그날 밤 시체를 둘러메고 성동대교를 건너며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장례를 마치고 교회로 돌아와 멍청하게 강대상 위를 올려보다가 말했다.
『주님, 너무 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을 암송하며 잠이 들었다. 그날이후 드러두워 3, 4일동안 고열에 시달리며 앓았다 창백해진 얼굴의 아내와 결핵에 걸린 아들, 주위에 널린 환자, 실업자, 술주정뱅이들, 철거반 온갖 악몽들이 떠올라 병중의 나를 괴롭혔다. 며칠이 지나 열이 내렸지만 집안에 먹을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이러다간 내가 먼저 죽을 것 같았다. 빈민촌을 떠나야겠다고 결심했다.
나를 모함하던 교인들
교회 간판을 내리고 짐을 싼뒤 용달차를 부르려고 밖에 나가보니 교회 앞마당 가득 아이들이 모여 놀다가 나를 보고 반색을 했다.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떠날 수 없다는 생각에 그냥 교회를 나와 마을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녔다. 그런데 한 집을 지나칠 때였다. 아이들이 많아 늘 시끌벅적하던 집인데 그날따라 방문앞에 아이들 신발만 흩어져 있고 조용했다.
이상해서 문을 열어보니 컴컴한 방에 다섯 아이가 나란히 누워있었다. 『너희들, 왜 낮에 누워있냐? 감기 걸렸냐?』하며 머리를 짚었더니 한 아이가 『배고파요』하며 앙-하고 울음을 떠뜨렸다. 나머지 네 아이도 따라 일어나 앉으며 울기 시작했다. 엄마 아빠가 장사 나갔다가 3일째 집에 들어오지 않아 내내 굶었다는 것이었다.
귓속에서 「윙」하는 소리가 나며 어지러웠다. 벽에 등을 기댔다. 조용히 아이의 눈을 보았다. 언뜻 아이의 얼굴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보였다. 예수님의 눈과 나의 눈이 잠시 마주쳤을 때 나는 깨달았다. 「나를 붙잡고 계시는구나」
가게에 가서 물국수 50원어치를 외상으로 가져다 아이들과 함께 끓여먹고 부모를 찾아나섰다. 나가는 길에 내 앞으로 온 발신인 불명의 등기우편을 하나 받았다. 1만원짜리 송금환이 들어있었다. 아이들의 부모는 노점상 단속에 걸려 경찰서에 잡혀있는 중이었다. 송금온 돈 중 5,000원을 내고 꺼내왔다. 청계천에 들어간 지 5개월 되었을 때의 이야기다.
그 즈음 나는 빈민선교의 방식을 완전히 바꿀 것을 결심했다. 5개월간 내가 한 일들이 주민들에게 오히려 안좋은 영향을 미쳤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어느날 보름 전 밀가루 한 포대를 가져다 드린 임씨댁 부인이 찾아왔다.
『전도사님, 죄송합니다. 떨어져서 다시 한 번만 은혜를 입었으면 해 찾아왔습니다』
무슨 말인지 몰라 『예? 뭣이 떨어졌다고요?』하고 물었더니 지난번 가져다 준 밀가루가 떨어졌다는 것이다.
나는 속으로 화가 치밀었다. 「이 사람들이 내가 약한 체력에 죽자사자 넝마를 주워 판 돈으로 도와준 것을 알기나 하는가」.
그러나 화낼 일이 아니었다. 내가 도와준 주민 모두 내게 굽실거리고 비굴한 표정을 지었다.밀가루 한 포대가 그 사람들을 그렇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날 이후 개개인을 도와주는 일은 삼갔다. 대신 주민의 조직된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유도해나갔다. 『뭉쳐야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그리고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자 주민회를 조직했다. 주민교육을 실시하고 신용조합도 만들었다. 전과자와 불량배들 110명을 모아 자활회를 조직했다. 넝마주이, 폐품 재생산, 식품가공 등의 사업으로 살길을 개척하려는 것이었다.
송정동 판자촌에 들어온 지 1년이 가까워가면서 나는 그간에 이룬 일들에 크게 만족하게 되었다. 활빈교회와 주민회가 양 날개가 되어 지역내의 선교활동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외형적인 발전에 가려 속안으로 곪아들고 있을 줄이야.
청년 제정구씨와의 만남
교인 수가 늘어나면서 1주일에 450원 정도였던 헌금이 점차 불어났다. 그래서 고물수집상을 하는 이씨에게 헌금 관리를 맡겼다. 그런데 3, 4개월 지나니 재정보고를 회피하는 것이었다. 알고보니 매주일 헌금이 들어오는 대로 다 쓰고 있었다. 그를 힐책했더니 대답이 걸작이었다. 『전도사도 예배당 돈 쓰는데 나는 쓰면 안되나요』
그 다음엔 교인 전체가 투표해 노가다판 십장 최씨를 헌금관리인으로 선출했다. 그런데 그 역시 돈을 쓰고 다닌다는 소문이 돌았다. 내가 장부를 보여달라고 했더니 예배시간에 『김진홍 전도사는 사기꾼입니다. 우리 빈민을 팔아 재물을 뒤로 빼돌리고 있습니다』라고 소리를 질렀다.
나쁜 일은 한꺼번에 오는건가. 이번에는 주민회의 생활안정부에서 재정사고가 터졌다. 사업시작을 위해 나는 누나에게 50만원을 빌렸었다. 3개월 후 꼭 돌려주기로 철석같이 약속했다. 그리고 사업계획서에 따라 각부에 돈을 분배했다. 그런데 20일이 지나 사업 진척 상황을 물었더니 하나같이 묵묵부답이었다. 모두들 급한 개인빚을 갚았거나 생활비로 써버렸던 것이다.
『이제와서 왈가왈부해야 무슨 이득이 있겠습니까. 누나에게 진 빚은 내가 맡기로 하고 주민들에게는 돈을 돌려준 것으로 발표하겠습니다. 아직 공동사업으로 일할 단계가 아닌가봅니다』
그렇게 마무리지었지만 나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며칠을 방에 들어앉아 생각했다. 뿌리에서부터 다시 씨름했다. 굶을 때 양식을 주니 비굴해진다. 자립하라고 돈 빌려다주니 도망가버린다. 조직을 만드니 그 조직은 타락한다. 장례식 치르느라 세월가고 환자 업고 병원 다니느라 기력을 소모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마태복음 4장4절을 읽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그 속에 해답이 있었다. 나는 빈곤문제를 떡으로만 생각하고 인간의 영혼을 살리는 말씀 선포는 등한시했던 것이다.
73년 들어서 활빈교회는 또한번 선교방향을 바꿔 집중전도운동을 시작했다. 「예수 믿고 천당갑시다」하는 식의 전도가 아니었다. 얻어진 열매는 스스로 놀랄 정도였다. 거기에다 귀한 일꾼도 얻게 됐다. 서울대 국문학과 학생이던 서종문군이 배달학당을 맡아주었고 서울대 정치학과 제정구군(현 국회의원)은 넝마주이를 하며 청년지도를맡아주었다.
그 시절 나를 지탱해주었던 힘이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아이의 눈에서 보았던 눈물이 아니었을까 하고 가끔 생각한다. 그때 나는 「저 아이의 눈물이 기쁨이 될 때까지 함께 살겠다」고 맹세했던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