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선교사! 목회자란!

[스크랩] 목사와 장로의 자격(딤전 3:1-7)

하나님아들 2018. 2. 26. 11:40

목사와 장로의 자격

 

 

본문: 딤전 3:1-7

요절: 2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아내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오늘 본문은 목사는 어떤 자격을 갖추어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그런데 자격 기준이 상당히 높아서 목사들에게 크게 부담이 되어 설교하기를 꺼리는 본문입니다. 잘못하면 자기를 도마에 올려놓는 설교가 되기 쉽습니다. 우리는 본문 순서대로 설교하므로, 본문을 지나칠 없습니다.

 

본문이 가르치는 바는 간단하지만, 우리가 이해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우선, 당시 상황을 이해해야 하고, 본문을 다각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본문 해설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사도 바울이 말하는 감독 당시에 무슨 직책인지 알아보겠습니다. 그래야 본문을 이해할 있고, 또한 감독을 오늘날의 목사, 장로와 유사점을 찾아서 우리가 실제적인 것을 배울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설교는 본문해석보다는 주로 배경 설명이 되겠습니다.

 

가지 양해를 구할 것은, 설교에 상당한 분노가 섞여 있다는 것입니다. 관운장의 청령도를 높이 세우고 설교하는 느낌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저보다 훨씬 분노하실 것입니다. 저는 양의 가죽을 늑대들에게 속아서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고생했습니다. 그러므로 UBF(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 같은 악질적인 이단 단체와 이단적 교회를 비판하는 것을 저의 임무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며 사역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양떼를 이들로부터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표현이 거칠 지라도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더욱 분노하실 것입니다.

먼저 감독이라는 말의 의미와 배경부터 살피겠습니다.

 

1. 감독은 장로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감독(비숍) 그리스적 표현이고, 장로는 히브리적 표현이라고 간단히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는 감독은 없고 대신 장로가 있었다는 것을 보아서도 있습니다. 바울은 같은 곳에서 감독과 장로라는 말을 번갈아가면서 사용했습니다( 20:17 28; 1:5 7; 딤전 3:1 5:17). , 말머리에는 장로라고 했다가 나중에는 감독이라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초기에는 감독과 장로는 같은 말이었습니다.

 

2. 일반적으로 교회에 명의 감독들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밀레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불러서 작별 인사를 했을 때에 장로들이 왔다고 것을 보아, 에베소 교회에 3-4명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을 있습니다. 19장에 묘사된 대로, 에베소에서 교회가 형성되었으므로, 성도 수가 몇백 명은 됐을 같습니다. 그러므로 지도자 수가 많은 것은 이해가 됩니다. 빌립보 교회에도 명의 비숍이 있었습니다( 1:1). 그런데 지도자 그룹에는 감독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안디옥 교회에는 선지자와 교사인 바나바, 시므온, 루기오, 마나헨, 바울 5명의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다른 교회에는 목자, 혹은 다른 직책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시대 후인 2세기 초부터는 속사도 시대라고 하는데, 이때에는 벌써 독재 비숍 있었습니다. 독재 비숍이란 비숍이 독재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혼자서 최고의 권력을 가지고 다스린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한국교회의 모습입니다. 겉으로 보면, 당시에 영지주의가 교회에 침투하자 이것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학자이면서도 다스릴 역량이 있는 사람이 독재 감독이 같습니다. 여러 교회가 서로 연관을 가지게 되자, 교회들을 총괄하여 다스리는 대감독도 생겨났습니다. 이렇게 해서 점차로 성경의 원리를 벗어나게 되어 교황까지 탄생하게 것입니다. 이러한 제도의 깊은 배경에는 영적 지도자가 구원을 전달하는 사제(무당)이라는 이교적 사상이 있습니다. 이것이 시리아 지방에서 출발하여 몇백 년을 거쳐서 서서히 교회를 잠식했습니다.

한국에는 이것보다 발전해서 이름만 목사이고 실제로는 무당이 상당히 많습니다. 이곳은 교회가 아니라 귀신의 집입니다. 목사는 구원을 전달하는 무당(/하나님의 ) 아니라, 성경을 조리 있고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교사이며, 성도들에게 예수님을 따르는 모범을 보여주는 같은 형제입니다.

 

목사나 장로, 혹은 세력자가 왕인 교회는 분명히 문제가 있습니다. 교회 지도자는 항상 복수여야 정상이라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지도자 사이에는 상하가 없이 서로 동역해야 합니다. 속사도 시대에 감독과 대감독 제도가 생겼을 , 이들은 원칙적으로 primus inter pares(동등한 사람 중에서 대표자) 견지했습니다. 이것 자체는 성경적입니다. 교회에는 대표자가 있어야 하고, 대표자도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면 이것이 문제가 없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도 베드로, 그리고 이어서 야고보 장로가 primus inter pares였습니다. 이들이 권력을 행했다든지, 무슨 특별 대우를 받았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이들은 겸손하게 형제들을 섬기는, 섬기기 위한 사도였습니다.

 

교회에 계층이 없어야 하는 진정한 이유는, 예수님만이 유일한 목자시고 그분만 우리를 지배하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섬긴다는 명목으로 지배하는 자가 있어야 곳은 결코 교회가 아닙니다. 그런 사람이 있는 곳은 교회가 아니라, 이미 지도자의 모습으로 사탄이 다스리는 입니다. 그런 곳은 빨리 탈출해야 합니다. 집안 대대로, 혹은 일생 교회를 섬겼으며, 교회 건물을 짓기 위해 자기 재산을 바쳤다고 할지라도, 한푼에도 미련을 갖지 말고 즉시 떠나야 합니다. 영생만큼 중요한 것은 있을 없습니다.

 

3. 사도 교회는 평신도의 모임이 아니라, 분명히 지도자 그룹이 있었다는 입니다. 지도자 없는 교회는 없습니다. 물론 임시 교회는 있을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 교회에는 반드시 영적 지도자가 있어야 합니다. 본문이 분명히 이것을 가르치므로, 직분자가 없는 교회는 비성경적입니다. 다른 서신에서는 바울은 직분자 명단까지 들고 있으며, 직분자를 세우라고 명합니다. 지도자는 직분자 중에서도 가장 중요합니다.

 

4. 2절부터 7절까지 감독의 자격이 나오는데, 놀랍게도 가르쳐야 한다 조건이 제일 앞에 있지 않고 중간쯤에 나옵니다. 이것은 당시의 감독이 오늘날의 목사처럼 가르치는 직분이 아님을 간접적으로 말해줍니다. 아마도 감독 중에서도 주로 가르침을 담당하는 사람 있었고, 다스리는 일을 주로 하는 감독 있었을 것입니다. , 전자는 목사이고, 후자는 오늘날의 장로입니다. 그럼에도 장로는 어느 정도는 가르쳐야 합니다. 가르치지 못하는 장로라는 말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르치지 못하는 사람을 장로로 안수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일입니다. 가르치지 못하는 사람은 다스릴 수도 없습니다.

 

5. 교회에 여러 명의 지도자가 있는데, 지도자들이 모두 가르쳐야 한다면, 오늘날 목사가 독재 감독처럼 다스리는 교회에서는 목사가 얼마나 가르쳐야 하겠습니까? 그뿐 아니라 독재 목사는 앞으로 나올 감독의 자격보다 높은 잣대를 통과해야 합니다. 이것이 한국교회에서 가능하겠습니까? 이런 자격을 갖춘 목사가 과연 명이나 되겠습니까? 우리는 딜레마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1 미쁘다 말이여,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

2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아내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미쁘다 말이여”(피스토스 로고스; 말은 신뢰할만 하다!):

말씀은 우리가 1:15에서 말로서, 사도는 그곳에서도 똑같은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죄인을 구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설명하면서, 자주 이러한 형태의 짧은, 혹은 찬양송(doxology) 노래합니다. 바울 서신에서 이러한 형태의 찬양송을 자주 있습니다. 이번에는 바로 구절인 2:15에서 자매가 절제있게,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하면서 감탄하는 말로써 형제와 자매에 대한 가르침을 끝맺었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의 속죄사역의 복음(1:15) 정말로 믿을만하고, 우리가 구원받는 것이 어떤 위대한 일을 함으로써가 아니라, 형제는 기도하고, 자매는 형제와 교회의 머리가 되지 말고, 일상 삶에서 모든 일을 절제 있게,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으로 함으로써 구원받는다는 가르침이 하나님으로부터 ,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진리임을 확인하고 감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직장에서 일하고, 혹은 집에서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 자녀를 양육하고 이웃을 돕는 일을 하되,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처럼 하면, 이것이 거룩함에 머무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만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전체 삶이 거룩함의 표현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해서 구원을 얻습니다. 이것은 정말로 신뢰할만한 위대한 진리입니다.

 

사도는 말로써 감독에 대한 말을 잇습니다. 감독은 무엇하는 사람입니까? 그의 사명은 근본적으로 성도들이 절제 있게,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거하도록, 그렇게 사고하고 살도록 도와주는 사람입니다. 앞으로 나올 그의 자격 조건도 여기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합니다. 자기도 매사에 절제 있게, 믿음과 사랑으로, 그리고 거룩하게 사는 것도 어려운데, 교회의 모든 성도가 그렇게 살도록 도와준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그럼에도 일을 하겠다는 사람이 나선다면, 믿음으로 사는 , 자기 삶을 온전히 그리스도의 대속죽음의 은혜에 기초해서 사는 삶을 모범으로 보이면서 성도를 섬기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것은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데에서 모범이 되며, 거룩한 행실에서 모범이 되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정말로 아름답고 선하고 귀한 일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귀한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은 자기를 그리스도께 온전히 드려서 번제처럼 태우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 희생의 길을 그대로 감으로써, 그분의 양들에게 길을 따르도록 격려하는 사람입니다.

 

목사의 길은 이렇게 어려운 길입니다. 그런데 그뿐 아니라 벌써 박해가 징조가 보였습니다. 박해 시에는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제일 먼저 지도자에게 칼을 들이대고 개종을 요구합니다. 그러므로 지도자가 때에는 순교를 각오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도자에게는 어려운 과제가 하나 있습니다. 이것은 거짓 교리입니다. 이미 당시 에베소 교회에도 거짓 교리가 들어왔으므로, 그는 먼저 교리를 비판해야 하고, 교인을 이것으로부터 보호해야 하고, 거짓 교사를 꾸짖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은 불쾌하고 부담이 되는 입니다. 그러므로 생명력 있는 믿음으로 주님만 사랑하고 그분을 위해 자기를 헌신하고, 순교를 각오하고, 주님의 양들을 돌보고자 모든 것을 버릴 있으며, 게다가 가르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참으로 아름다운 것을 소망하는 사람입니다.

 

1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미쁘다 말이여,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 말로써 바울은 지금 사람들에게 목사가 되도록 독려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말로 선하고 아름다운 일이니, 부디 목사가 되어라!” 하는 같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명망욕을 부추기는 것이 결코 아니라, 지도자가 된다는 것이 너무나 부담되어 망설이는 사람에게 하는 격려의 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훌륭한 믿음과 숭고한 마음과 사랑과 헌신된 마음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영적 지도자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목사와 장로의 자격 조건이 나옵니다. 많은 조건 중에서 우리는 먼저 가지만 보려고 합니다.

 

첫째, 목사나 장로는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한다

 

말은 흠잡고 책잡을 만한 것이 없다 의미입니다. 영적 지도자는 어느 정도는 완벽해야 합니다. 중대한 , 간음이나 횡령, 거짓말 등이 드러나면 크게 징계를 받아야 하고, 이것이 계속된다면 교회에서 쫓아내어 이방인() 같이 여겨야 합니다. 교회에서 이것을 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주님을 떠난, 사탄이 지배하는 사탄의 회가 됩니다. 여러분, 혹시 이런 곳에 들어있다는 당장에 나오시기 바랍니다. 그곳에 있다면 반드시 지옥에 갑니다!

 

1) 중대한 죄를 짓고도 설교를 한다면, 그는 거짓 설교를 수밖에 없습니다. 양심에 이미 화인을 맞았으므로, , 사탄이 자기 소유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마음에 불도장을 찍었으므로, 그는 결코 거룩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할 없습니다. 그가 말한 것은 겉으로는 그럴듯하게 들릴지라도 전부 거짓입니다. 당신이 죽어있으므로, 그의 거짓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2) 또한 영적 지도자에게 흠잡을 만한 일이 있다면, 영향력이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이런 죄를 지었으면, 나는 성도이므로 정도 죄까지는 지어도 되겠다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죄라도 미워하십니다.

 

징역 2 6개월에 집행유예 4대형 교회 지도자로서 책임을 망각하고 교인들이 형성한 재산을 교회 사업과 무관한 주식거래에 사용하는 죄질이 무겁다!” 이것은 조용기에 대한 대법원 판결 내용의 일부입니다. 조용기는 이제 자기 아들과 함께 감옥에 들어가야 합니다. 교회 131 원을 사기로 아들에게 거저 것과 같습니다.

 

문제는 조용기가 아니라, 그를 징계하지 않는 교회입니다. 형제가 이것보다 훨씬 가벼운 죄를 범할지라도, 권면하고 경고해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 형제가 끝까지 권면을 듣지 않으면, 교회에서 그를 쫓아내고 이방인으로 여기라고 명하십니다( 18:15 이하). 이것은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이것을 지키면 교회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는 전에도 수없이 이와 비슷한 죄를 지었고, 파리의 나비부인과 간음했다는 책자까지 나왔습니다. 조용기 때문에 수많은 안티들이 나와 교회를 헐뜯고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집단에서는 그를 쫓아내지 않고 개와 같은 이방인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교인은 모두 그와 같은 이방인이 되는 입니다. 사회적으로도 물의를 일으키는 거짓 목사를 그대로 두는 곳은 결코 교회가 아닙니다. 이것과 교류하는 집단도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들 집단과 완전히 끊어버리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조용기보다 훨씬 악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UBF(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 University Bible Fellowship) 창시자 이창우, 일명 사무엘(Samuel Lee)입니다. 조용기는 아무리 영향력을 가졌어도 단지 무당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창우는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한 적그리스도입니다. 그의 죄가 오랫동안 지도자 선에서 모두 감추어져 있다가 그에게 오랬동안 짓밟혀오던 목자들이 반발하여 그의 만행을 모두 공개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습니다. 저도 그때 모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모든 회원에게 절대 순종을 요구했습니다. 자기에게 불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이라고 위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이런 명예를 가지실 있습니다. 회원은 정말로 그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상숭배이며 1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는 정말로 악하고 탐욕적이고 잔인한 사람입니다. 그는 훈련의 명목으로 펜치로 눈하나 깜짝 않고, 살아있는 사람의 엄지발톱을 사람입니다. 그것을 당한 사람이 너무 감사해서 울었다고 합니다. 그는 당시에 이것을 자기를 사랑한다는 표시로 보았다고 했습니다. 세뇌가 이렇게 무섭습니다. 이것은 당한 사람이 직접 저에게 이야기해주었습니다.

 

그가 늙어서도 오랫동안 자매 선교사와 간음상태에 있었던 것이 그의 아내가 호소해서 알려졌으며, 그의 아들은 선교사를 강간했으며, 남편인 한국 선교사 사이에서 명의 자식을 가진 그의 딸은, 오랫동안 아느 미국 목자와 간음한 사실이 목자 아내에게 들통 나서 사실이 공개되었는데, 결국은 아내는 거짓말쟁이로 몰렸습니다. 그곳에는 진실과 진리는 찾아볼 없습니다.

 

이창우는 수양회를 다니면서 수양회 걷은 헌금을 모두 가져갔습니다. 그리고 헌금에 대한 아무 보고도 없었으므로 모두 개인 수중에 들어간 것입니다. 한번은 설교자가 설교할 때에 단상 뒤에 앉아서 돈을 세고 있는 것을, 앞에 앉았던 사람이 보고 폭로해서 그의 돈에 대한 집착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한번은 헌금을 걷어서 가져가다가 미국 세관에서 외화밀수로 적발되어 구치소에서 하루를 보낸 적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양을 위해 자신의 피를 흘리셨는데, 이창우는 불쌍한 유학생들이 청소해서 벌어 헌금한 돈을 착복했습니다.

 

한국 유비에프 소속 의대 학생이 미국 여행을 마친 귀국길에, 이창우가 있는 시카고 센타를 들렸다가 그에게 붙들렸습니다. 그는 여권과 비행기표를 뺏은 후에 강제로 훈련을 시키다가, 절망한 학생이 높은 건물에서 뛰어내려 자살했습니다. 그러자 마자 그는 사람을 학생 방으로 보내 모든 증거를 인멸해서 형사 고소는 면했지만, 소문이 나게 되어 자기가 공격을 받자, 아버지에게 강제로 공개편지를 쓰게 했습니다. 내용은, 자기 아들은 정신병 증세가 있었으므로 그가 자살한 것은 다른 사람의 책임이 아니라는 성명서를 내었습니다. 아버지는 얼마나 비열한 사람입니까?

 

모든 사건이 인터넷에서 공개되었음에도, 본인은 사실을 부인하고 고소한 사람은 전부 거짓말장이요 사탄의 앞잡이로 매도되었습니다: “개들이 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마라!” 이것이 그들의 대답이었습니다. 이런 일을 일일이 보도한다면 몇백 장을 써야 합니다. 모든 것은 목자에게 절대 순종하라는 가르침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목사에게는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조용기나 사무엘은 보통 단체에도 보기 어려운 악한이요 범법자입니다. 그럼에도 이들을 추앙받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단체는 사단의 조종을 받는 단체입니다. 정상적인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런 곳에 머물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이들이 이미 세뇌를 당했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이 귀에 들리지 않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와 같이 정결한 사람들이 모이는 입니다. 이렇게 더러운 사람들이 거룩한 강단에 선다는 자체가 하나님을 모욕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조용기나 사무엘은 더러워도 너무나 더럽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거룩한 피를 더럽힙니다. 이들은 거룩한 교회를 창녀의 집으로 만드는 인간들입니다. 이들이 만든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 창녀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교회는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어린 양의 신부”( 19:7)입니다.

이들이 바로 성경 전역에서 가르치는 미혹하는 ”, “귀신의 가르침을 가르치는 ”, “자기 양심에 화인을 받은 ”, “거짓말하는 ” “위선자”(모두 딤전 4:1-2 있음) 찢는 늑대입니다.

 

이러한 단체에 있는 사람은 당장에 나오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향하여 관운장보다 무서운 칼을 들고 계십니다! 머물러 있으면 당신은 반드시 베임을 당해 지옥에서 영원을 보내야 합니다.

 

 

둘째, 목사나 장로는 가르쳐야 한다.

 

아마도 이것이 우리에게 가장 도전이 아닐까 합니다. 성경 해석은 우리 한국 사람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과제입니다. 루터가 발견한 위대한 진리인 성경의 명료성”(claritas scripturae) 한국인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성경은 대부분 한국인에게 닫혀있는 같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이단이 가장 많은 나라가 한국이며, 열심이 가장 많음에도 문제가 가장 많은 곳이 한국교회인 같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원칙에 맞게 정확하고 자세하게 해설한 설교는 매우 드뭅니다.

 

이유는 한국인에게는 본문 해석에 대한 개념이 올바로 형성되지도 않았고, 교육과정에 해석학적 분야가 없고, 학교에서나 사회적으로 담론화되지 않았고, 객관적, 과학적이고 올바른 해석 보다는 음모론이나 감정적 주관적 해석에 관심을 갖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복음, 성경의 메시지가 한국인의 세계관과 성격과 문화를 이기지 못하고, 한국인이 자기의 관점에서 복음을 재해석하여 채색하게 됩니다.

 

성경해석학은 유대교에서부터 시작하여 기독교 2000년간 꾸준히 발전했지만, 여기에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는 사람도 많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목소리 크고 잘나가는 목사 말이 진리가 되어 교회는 심히 더러워져 있습니다. 되면 진리이고 되면 비진리가 되었습니다. 이미 한국인의 의식 속에는 매우 강하게 메타언어(상부언어) 형성되어 성경을 해석할 때에 이것을 해석학적인 틀과 안경, 혹은 프리즘으로 삼기 때문에 복음의 진리는 배척당합니다. 한국인의 메타언어는 다음과 같습니다: 성장, 열심, 헌신, 선교, 축복, 행복, 건강하게 먹고 살자, 영성, 자유, 해방, 예정론, 자유의지 등과 같이 수도 없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이 그들에게 해석학의 가장 중요한 열쇠로 작용합니다. 이것이 고착되면 세뇌가 되는데, 이미 이단에 물든 사람은 이러한 해석 방법으로 모든 성경을 풀기 때문에 아무리 올바른 것을 가르쳐줄지라도 듣지 않고, 자신들만이 성경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유비에프와 같은 단체에서 선교나 제자양성, 절대순종이라는 말로 성경을 풀면 성경 전체가 말로 풀리고 눈이 열립니다. 그래서 이들은 모두 자신이 거듭났다고 착각합니다. 이들은 세뇌와 거듭남을 혼동한 것입니다. 이것은 통일교, 여호와증인, 공산당, 나찌의 거듭남과 똑같습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사랑, 축복, 성령님, 부활의 그리스도라는 해석학적 안경으로 보면 성경 전체가 그러한 의미로 보이고 자신이 성경의 달인이 같은 느낌을 가집니다. 이들은 나름대로 완벽한 체제 안에 갇혀 있으므로 우물안의 개구리가 되어 다른 교회를 부족한 교회, 심지어 이단이라고 생각하고, 상당한 자부심이 있으므로 문제가 생기지 않는 , 절대 집단을 떠나지 않습니다. 이들에게는 성경 계시가 완전히 막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UBF창시자 사무엘이 아무리 범죄를 저질러도 여기에는 눈을 감습니다. 이들은 항상 말씀을 가지고 말하지만, 이들은 말씀에 강제를 가하기 때문(억지 해석) 하나님이 대단히 분노하십니다. 이들에게 구원이 있을 없습니다.

 

성경은 가지 열쇠로써 있는 책이 아니며, 쉽게 체계를 세워서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성경 66권은 수많은 모순처럼 보이는 이야기와 기사들이 변증법적 긴장을 이루고 있으며, 관점(perspectives) 따라 다차원적으로 이해될 있는 것도 많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우리를 죽입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죽여야 하고, 또한 그리스도의 사함과 부활 설교를 통해 우리를 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가르치신 것과 같이 우리는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면 구원이 없다는 것도 가르쳐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는다는 것과 사함의 은혜도 가르쳐서, 항상 은혜 가운데서 살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구원은 계시인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이해하고, 이것을 그대로 실천할 오는 입니다. 절대 다른 구원의 길은 없습니다. 자기가 만든 믿음이나 열심으로 구원받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믿음이 있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실천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말씀과 계명을 올바로 이해하고자 해석하고 실천하는 일에 가장 많은 시간을 쏟아야 합니다. 그러나 저는 한국교회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풀어주는 설교는 별로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들을 귀가 있는 사람도 별로 없고, 또한 계명 설교는 듣는 이에게 부담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들을 비로소 하나님이 누구신지, 자기가 누구인지, 예수님의 대속 죽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자기가 거듭나야 하는지를 깨닫고, 새로운 삶의 방향을 찾아 나가며 거룩한 삶을 살아나갑니다. 인간은 말씀으로 새롭게 피조되어야 뿐만 아니라, 자신을 계속해서 새로운 인간으로 빗어 나가야 합니다. 전체가 그리스도의 사함의 은혜의 표현이어야 하며, 끊임없는 감사와 거룩함과 헌신으로 은혜에 답변해야 합니다.

 

그러나 제가 아무리 조용기와 이창우와 같은 개들을 비판해도 대부분 사람이 크게 충격을 받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들도 그만큼 썩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문둥병자가 되어 거의 감각이 없습니다. 양심이 죽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분노를 배워야 합니다. 악에는, 특히 목사 칭호를 사람이 그렇게 악을 행할 때에는 분노해야 합니다.

 

이제 한국교회 문제에 대한 대안을 이야기해야 하는데, 시간이 너무 갔으므로, 다음 주로 미루고 읽어야 주석책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8 중순에 나올 게르하르트 마이어 교수의 마태복음 주석입니다. 책은 20세기에 나온 가장 뛰어난 신학 서적 중의 하나임을 단언합니다.

 

오늘 설교를 간단히 요약하면, 목사는 세상 사람들에게도 평판이 좋아야 하며, 모함이 들어올 때에는 반드시 밝혀야 하며, 잘못이 밝혀졌을 때에는 반드시 사과해야 하며, 잘못이 너무 때에는 징계를 받아야 하며, 이러한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에는 목사를 축출해야 합니다. 이런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교회는, 주님의 계명을 어길 뿐만 아니라 이미 병이 들어 있다는 증거이므로 속히 떠나야 합니다. 또한, 목사는 가르치기 위해서 각고의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거짓 증거자가 되어 하나님의 엄한 심판을 받습니다. 그는 교인도 죽이고 자기도 죽습니다!

 

 

 

 

 

http://cafe.daum.net/reformedvillage/MvxA/81

출처 : 영적 분별력
글쓴이 : 진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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