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히브리 사고와 헬라 사고(48)
바벨탑 사건(창 11장)을 윤리적 관점에서 해석한다. 바벨탑은 인간 활동 결과 나타난 학문적, 경제적 또는 정치적 업적으로 비유된다. 설교의 결론은 성공할 때 교만하지 맙시다라는 윤리적 교훈으로 끝난다. 이런 설교가 강대상에 만연하다. 이런 상식적 설교는 다른 종교의 강론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 그럼 무엇이 문제인가?
역사적 사건을 비역사적 사건으로 보며 비유로 해석한다. 이것을 바로 영해(靈解: allegory)라 한다. 헬라 사고는 이런 식의 해석을 참으로 좋아한다. 헬라 철학은 창조 기사를 비롯한 구약의 기록을 싫어한다. 물질세계를 창조한 신은 저급하며 구약의 하나님은 사랑이 아닌 미움의 신으로 본다. 원역사(창1-11장)도 헬라 신화처럼 취급한다. 당연히 구약을 비유로 보려 한다. 그리고 바벨탑 사건의 주도자 니므롯은 카도릭 교회가 숭상하는 태양신과 깊이 관련된다. 이를 감추기 위해서도 이 사건을 비유로 보아야 한다.
성경적 설교는 무엇인가? 홍수에서 구원받은 노아의 후손이 세상에서 번성했다(창 10장). 그러나 홍수 후 100년 정도 지나자 니므롯 주도 아래 시날 평지에서 바벨탑을 쌓기 시작했다(창 11장). 그 목적은 무엇인가?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4절)
흩어짐을 피하고자 바벨탑을 쌓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라 사람의 이름을 내자고 바벨탑을 만들었다. 그러나 인류는 자신을 존재케 한 창조주만 섬겨야 한다. 또한 하나님은 창조 후 그리고 홍수 후 아담과 노아에게 이렇게 명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1:28, 9:1절) 바벨탑은 만물을 창조한 여호와 하나님과 홍수 심판에서 은혜로 구원한 구속주 하나님에 대한 반역 행위였다. 인본주의적 교만 뒤에 영적 타락이 숨어있다.
바벨탑 세우려면 중앙집권적 세력이 필요했다. 절대 권력자 니므롯은 함의 후손이었다. 자연스럽게 함 후손이 그 당시 지배 세력이었다. 이 일에 셈과 야벳 후손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류에 위치한 갈데아 우르의 출신인 사실이 이를 간접적으로 증명한다. 당시 셈 후손은 메소포타미아의 하류에 그러나 함 족속은 니므롯을 중심으로 중상류에 살았다(창 10:8-12절).
성경적 설교는 바벨탑 사건을 창조주와 구속주 하나님을 배반한 심각한 사건으로 본다. 그러나 상식적 설교는 그냥 윤리적 교훈을 얻는 것으로 만족한다. 전자는 신자의 믿음이 하나님의 말씀에 머물도록 돕는다면 후자는 사람의 지혜와 윤리 그리고 상식에 머물도록 한다(고전 2:1-5절).
윤리적 설교 또는 상식적 설교와 성경적 설교 사이 차이는 너무나 크다. 성경적 설교는 항상 구속사를 고려한다. 그러나 상식적 설교는 구속사를 철저히 무시한다. 이 때문에 기독교 설교는 다른 종교들의 강론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 기독교 신자들이 카도릭이나 불교로 쉽게 개종하는 이유이다. 설교에서 기독교의 배타성이 무시된 불행한 결과이다.
룻기를 또한 효도라는 윤리적 관점에서 많은 목회자들이 설교한다. 룻기는 매년 맞는 5월 가정의 달을 위한 귀중한 설교 자료가 된다. 이런 설교는 결국 모압 여인 룻의 효행 덕분에 예수님의 조상이 되는 은총을 입었다고 결론 내린다. 효도를 강조한다. 이런 유의 설교는 이신칭의가 아니라 이행득구를 결국 가르친다. 선행을 함으로 얼마든지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반성경적 설교이다. 한편 이신칭의를 열렬히 주장하면서도 다른 한편 이행득구를 설교한다. 이것은 신학적 모순이다. 이 모두 룻의 효도를 가능케 한 믿음을 보지 못한 결과이다.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룻1:16-17절)
무엇이 룻으로 하여금 이런 결단을 내리게 했는가? 자기 민족 모압의 신 몰록 또는 그모스가 아닌 이스라엘 민족의 신 여호와가 참 신임을 알고 믿게 되었다. 이민 가듯 혼인한 후 시집의 신앙생활을 그녀가 보았고 이때 성령이 깨닫도록 도왔다.
인간 스스로의 선행을 가르치는 것과 하나님이 선물로 준 믿음의 결과로 나온 선행 사이 차이는 하늘과 땅 사이만큼 너무나 크다. 후자의 믿음이 모압 여인 룻을 다윗의 조상과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도록 만들었다. 이행득구를 가르치는 류의 설교는 다른 종교의 강론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여호와를 믿는 믿음에 근거를 둔 선행은 이런 강론들과 완전히 구별된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아나니야와 삽비라의 불행한 죽음(행 5장)에 대해서도 윤리적 관점에서 설교한다. 아나니야는 히브리어 크헨(은혜, 자비)에서 나온 이름으로 '인자하신 여호와'라는 뜻이라면 삽비라는 '싸파이어'(보석의 한 종류)라는 의미이다. 이들은 이름값을 못하고 불행하게 죽었다. 성명 철학의 무용성을 성경이 주장하는 듯하다.
이런 유의 설교 문제는 무엇인가? 본문의 문맥을 전혀 살피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기록은 사복음서에 있다. 사도행전은 하늘에 오른 예수님이 성령을 통해 일하시는 것을 기록한다. 사도들과 신자들은 이를 믿고 헌신하며 자원하여 가진 것을 드렸다. 처음 아나니야와 삽비라는 믿음으로 약속을 했다. 그러나 나중 재물 욕심 때문에 헌물의 일부를 감추었다.
신자들은 믿음을 위해 재물을 드렸다. 그러나 이들은 구속 사역을 성취한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재물 중 재물을 택했다. 둘 사이 영적 중립은 불가능하다. 예수님 아니면 재물이다. 예수님을 택하면 영생이지만 재물을 택하면 영멸이다. 그들의 죽음은 믿음으로 서원한 바는 끝까지 믿음으로 이행하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믿음으로 끝까지 주께 충성하라고 가르친다. 이들의 죽음을 보고 초대교회는 엄청난 경각심으로 신앙 삶을 살았다(행 5:11절). 무엇이 본문의 제1차 가르침이며 주목적인지가 분명하다.
성경 기록 목적은 무엇인가? 상식적 설교를 하라고 아니면 성경적 설교를 하라고? 전자는 분명히 아니다. 성경 기록은 후자를 목표한다. 그러나 우린 성경적 설교보다 상식적 설교를 더 즐긴다. 성경적 설교보다 상식적 설교가 더 쉽게 마음에 다가온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인가? 성경 기록이 목적한 하나님의 경륜과 뜻을 전혀 배우지 못한다.
상식적 설교는 인간의 상식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설교이다. 성경 하나님의 가르침에 무관심하다. 이런 설교는 구원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 상식적 지식을 풍부하게 만들지 모르지만…… 성경적 설교가 하나님의 일을 전한다면 상식적 설교는 그냥 세상의 상식을 전한다.
이런 설교를 즐기다 보면 결국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며 부패한 인간의 일을 추구한다. 겉은 하나님의 말씀 같은데 실상은 인간의 사상, 철학, 지혜와 상식을 전할 뿐이다. 중세 유럽 교회가 이를 잘 증거하고 오늘날 한국의 대형 교회의 목회자의 행사도 이를 잘 증언한다.
성경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 일을 전한다. 물론 주체는 하나님이다. 그러나 상식은 그냥 사람들 사이 일이다. 전자를 하나님의 특별 은총으로 본다면 후자는 하나님의 일반 은총에 속한다. 세상 예화를 성경에 적용시키는 문제는 무엇인가? 사람 사이의 일을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일에 억지로 적용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은 그 의미와 뜻에서 서로 완전히 다르다. 서로 맞지 않는 것을 억지로 꿰맞추다 있다.
문제는 이런 상식적 설교가 교회 강대상에 만연하다. 십자가가 교회 지붕에 있지만 다른 종교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 하나님이 이를 좋아할 리 없다. 결과는 한국 사회의 혼란과 어둠이다. 한국 기독교가 예수님이 말한 대로 세상의 빛과 소금 역할을 못한다. 빛은 어둠을 쫓아낸다. 소금은 썩음을 방지시킴으로 음식 재료를 오래 보존시킨다. 교회는 자신이 속한 한국 사회에서 이런 빛과 소금 역할을 전혀 못한다. 이것은 성경적 설교는 극히 적고 상식적 설교가 만연한 불행한 결과이다. 성경적 설교만이 신자들이 빛과 소금이 되도록 돕는다.
상식적 설교를 피하려면 성경을 본문과 문맥을 함께 고려한 해석을 하려면 상당한 시간, 지력과 노력이 요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목회자는 주의 이름을 빙자하며 사역과 일에만 바쁘다. 텐트(또는 성전, 묵상과 기도)보다 켐프(일터, 목회)를 더 좋아한다. 자연스럽게 상식적 설교를 하게 된다. 중세 유럽 교회는 라틴어로 설교했다. 대중은 설교의 내용을 전혀 모른다. 시간이 지나며 신부들은 제멋대로 강론한다. 교회와 신자들이 모두 성경에 무지했다. 이것이 거의 일천년간 계속된 중세 암흑시대의 원인이다.
성도가 성경을 모른다면 목회자도 통제될 수 없다. 겸손한 목회자만이 진정 말씀의 통제 아래 있고 싶어 한다. 그는 성경을 열심히 그리고 잘 가르친다. 시대마다 다르게 기록된 하나님의 경륜과 의지와 뜻에 비추어 본문을 해석하려 한다. 이를 위해 문맥을 자세히 살핀다. 그러나 쉬운 상식적 접근 즉 철학적, 사상적, 시사적(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또는 영웅적 방식을 피한다. 성경을 지혜롭게 또는 감동적으로 설교하는 것이 무용하고 위험함을 그는 잘 안다.
신학원에서 주로 가르치는 조직신학은 성경 해석을 위한 기초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원어 공부나 성경 배경 역사도 마찬가지다. 본문의 역사적 문맥은 물론 문법적 구조를 자세히 살펴야 한다. 이 위에 성경을 관통하는 구속사적 경륜이 어떻게 역사와 문화를 통해 다르게 기록되는지에 대한 이해와 연구도 있어야 한다.
성경은 theme(주제)가 아니라 narrative(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내러티브 안에 여러 주제들이 역사적 상황에 의해 서로 유기적으로 얽히면서 일차적 가르침을 전한다. 일차적 가르침을 찾아낸 다음 신학적 주제들이 어떤 역사적 상황 아래 어떻게 서로 유기적(논리적)으로 얽히는지를 연구해야 한다. 이때 성경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가르침을 다양하게 설교를 할 수 있다.
문제는 신학원 졸업하기 전 기초적 신학 지식은 풍부한데 성경 본문 자체를 다루는 훈련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이다. 졸업하는 해 일 년 동안 이 훈련을 해야 한다. 그동안 배운 신학 지식을 종합적으로 묶어 성경 본문의 일차적 가르침을 찾아내야 한다. 이런 훈련이 부족하다면 상식적 설교를 하게 된다. 신학도 소용없다고 버린다. 쉬운 주제 설교나 제목 설교를 하게 된다. 이젠 신학적 기초학문에 만족하지 말고 성경 본문 자체를 다루는 연구와 해석에 몰두해야 한다.
[출처] 성경적 설교와 상식적 설교|작성자 오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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