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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설교와 상식적 설교

하나님아들 2018. 2. 13. 23:00

성경적 설교와 상식적 설교(3)/히브리 사고와 헬라 사고(50)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2:4, 1:17, 3:11, 10:38)
 
성경에서 4회 인용된다. 각 성구의 역사적 문맥을 고려한다면 더 풍성한 해석이 가능하다여기선 문장 자체가 갖는 문법과 논리(論理)에 따라 해석한다.

이 성구가 이신칭의(以信稱義: Justification by faith)를 지지해주는 증거로 인용되는 듯하다.  이것은 어이없을 정도로 단순한 주장이다본문에서 의인은 누구인가? 믿음으로 이미 의롭다 함을 받은 신자이다. 의인이 의롭게 되기 위해 다시 믿어야 한다는 주장은 비논리적이다. 다른 칭의를 얻기 위해 또 다시 계속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가? 성경의 저자인 하나님이 과연 이를 또 요구할까? 성장할 줄 모르는 아이로 계속 남길 하나님이 원할까?
   
본문의 문법은 자신의 논리를 잘 설명한다. 문장의 주어는 이미 의인인 신자이다. 그러나 그는 계속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야 한다. 여기 믿음은 이신칭의의 믿음과는 완전히 다르다. 결국 이신칭의 후 다른 종류의 믿음이 계속 필요하다. 이 믿음은 무엇인가? 답을 얻기 위해 이신칭의를 가져오는 믿음에 대해 알아야 한다.
 
이신칭의를 얻게 하는 믿음은 일생에 단 한번 일어난다복음을 듣고 처음으로 예수님을 구세주와 주로 영접하겠다는 결심을 내리게 하는 믿음이다. 이 믿음은 단회적이며 의지적 결단이다. 이 믿음은 먼저 마음에서 일어나고 다음 입술로 고백함으로 표현된다(10:9-10). 이렇게 죄인은 의인이 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이런 급격한 신분의 변화는 영적 즉 무의식적 세계에서 일어난다.

다른 한편 이 신앙 고백은 이미 의인된 신자가 앞으로 예수님을 구속주와 만유의 주로 계속 모시고 살겠다는 의지의 또 다른 표현이다. 그의 고백은 삶에서 주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도록 돕는다. 여기 순종과 신뢰는 바로 칭의를 불러온 믿음의 외적 증거이다. 이 믿음은 반복적이다

반복적 성격의 믿음은 이신칭의를 가져오는 믿음과 대조된다. 단회적 믿음은 마음의 영역에서 일어나지만 반복적 믿음은 삶의 영역에서 계속적으로 일어난다. 이 결과 그의 삶에 윤리적 변화도 뒤따른다. 그의 윤리는 세상 사람의 윤리와 완전히 다르다. 서서히 삶도 바뀐다. 그가 주로 믿고 신뢰하는 예수님은 세상 기준과 다른 윤리적 삶을 요구한다.

단회적 믿음은 신분의 변화를 그러나 반복적 믿음은 삶과 인격의 변화를 각각 동반한다. 이를 칭의와 다른 성화(聖化: sanctification by obedience)라고 부른다. 본문은 이런 변화 즉 성화를 가능케 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이 계속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로써 의인은 결국 승리할 것이다. 종국적 승리는 조직신학에서 설명하는 영화를 뜻한다. 

이런 믿음은 성도 개인만 유익하게 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를 인류 사회에 세우도록 돕는다. 이신칭의 후에도 계소 반복적 믿음으로 사는 성도의 수가 증가한다면 하나님의 통치가 인류 사회에 실현된다. 비록 보이지 않지만 그곳에 하나님 나라가 세워진다. 결국 이 성구는 성도 개인의 신앙 삶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 건설을 목표하며 반복적 믿음으 계속 구사하라고 가르친다. 

하나님 나라의 건설과 확장을 목적하며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했다. 그리고 죄인을 구속하여 아들의 형상을 되찾도록 도와준다. 하나님 나라는 창조와 구속의 목적이다. 믿음의 영역은 개인 성도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도 긴밀히 연결된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여기 믿음은 반복적이다. 이 믿음만이 칭의의 최종 목적지인 영화는 물론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 목적을 달성케 한다. 성도의 성화 삶은 그의 주관적 신앙 삶은 물론 하나님 나라라는 객관적 실체인 공동체의 건설을 가능케 한다. 성도는 이를 위해 구속의 은총으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다

의인이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 나라의 의를 구해야 하는 이유이다. 그가 진정한 그리스도의 거룩한 제자이다. 결국 이 성구는 칭의 이후 성화를 가르친다칭의 후 성화라는 보다 더 발전된 교리를 가르친다신자는 성화에 힘써야 한다고 경고한다.

교회와 신학이 이신칭의를 얻게 하는 단회적 믿음만을 계속 가르치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성경적 가르침이 아니다. 이것은 낮은 신학적 지식과 단순한 논리력이 낳은 불행한 결과이다. 신학도 정확한 논리를 겸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 논리는 신학의 옷을 입어야 한다. 이로써 설교자는 성경 저자의 논리를 제대로 추적한 후 설교할 수 있다.

[출처] 본문의 논리(1)|작성자 오뚝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