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사탄의 왕국
사탄은 이 세상의 어둠의 주권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권 하에 있다. 사탄의 왕국은 시기, 장소, 통치 대상의 세 가지 면에서 제한받고 있다. 따라서 그는 이 세상을 영원히 다스릴 수 없고, 그의 주권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곳은 천국이 아니라 바로 이 세상이며, 통치 대상도 결코 빛의 자녀는 될 수가 없다.
사탄이 이 세상의 임금 노릇을 할 수 있는 시간은 제한되어 있다.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고전15:25). 마지막 때에 관한 소식은 악인들에게는 장례식과도 같을 것이다. 반면에 성도들에게는 가장 기쁜 순간이 될테고 그때의 기쁨은 그 후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사탄의 왕국은 영역면에서도 한정되어 있다. 즉 사탄이 다스릴 수 있는 곳은 오직 ‘이 세상’ 뿐이다. 그가 자기의 부하들을 다 모아 총력을 기울인다고 하더라도 결코 천국을 침범할 수는 없다. 사탄이 아무리 별의별 수단을 다 쓰더라도 당신에게 주어질 영원한 기쁨에 동참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기뻐하라. 하늘의 기쁨보다 더 값진 것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사탄이 이 세상의 임금이라고해서 겁먹을 필요는 없다. 하나님께서 늘 당신을 굽어보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에 의해 빼앗긴 욥의 모든 것들을 더욱 풍성하게 채워주셨다. 당신이 성도라면 그에 해당하는 특권이 당신에게 약속되어 있다. 그것은 천국의 시민권과 영원한 기업의 상속권으로서 그 유효 기간은 이 세상에서만이 아니라 내세에까지 영원토록 지속된다. 사탄은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그 특권을 낚아 채려고 한다. 그러나 사탄이 아무리 기승을 부리더라도 일단 생명책에 기록된 당신의 이름을 지울 수는 없다. 또한 당신의 믿음을 없애고 하나님과 당신의 관계를 끊을 수도 없다. 물론 하나님으로부터 당신에게 공급되는 안위의 물줄기를 잠시 고갈시킬 수는 있어도 그 한가운데 댐을 만들어 영원토록 단절시킬 수는 없다.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벧전1:5).
사탄이 지배하는 대상, 즉 사탄의 백성은 제한되어 있다. 사탄의 휘하에 있는 무리들은 ‘이 세상의 흑암’으로 묘사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어둠에 속한 자들이다. 그렇다면 이 ‘흑암’이라는 말은 첫째 일반적으로 죄의 어둠을 뜻한다. 둘째, 무지함을 뜻하기도 한다.
①왜 죄는 어둠으로 일컬어지는가?
영적 어둠이 죄를 범하게 한다. 또한 죄는 영적으로 눈 멀게 한다. 우리의 영혼을 더욱 깊은 어둠으로 이끈다. 죄는 빛을 피한다. 어두움을 더 좋아한다.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3:19). 사탄은 사람들의 양심이 진리의 빛에 접하지 못하도록 안간힘을 쓴다. 설교에 집중할 수 없게 만든다. 졸도록 한다. 아니면 그나마 불붙으려고 하는 양심의 빛을 아예 꺼버림으로 냉랭한 설교를 듣도록 인도한다. 죄는 절대적인 어두움으로 인도한다. 이 세상이 끝난 뒤 그들에겐 오직 어두움만이 있게 된다. 쉴 줄 모르고 타오르는 진노의 불길 속에서 그들은 죄의 대가를 끊임없이 치러야만 한다.
②어두움에 속한 자들은 왜 사탄의 지배 하에 있는 것일까?
‘이 세상 어두움의 주관자’인 사탄은 어두움에 거하는 자 즉, 죄인 가운데 거한다. 마태복음 12장 44절을 기억하는가?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사탄은 성도들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노크를 해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인 그들은 아무도 사탄을 들여 보내지 않는다. 하나님의 자녀는 빛의 자녀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결코 사탄의 종노릇 할 수 없다.
③사탄의 속임수를 분별하라
하나님께로 향한 것을 안 바로 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부역을 강화시킴으로써 딴 생각을 할 틈을 허용하지 않았다. 사탄도 같은 책략을 전개한다. 즉 사람들이 천국과 지옥에 대해 생각해볼 틈이 없도록 바쁘게 만든다. 그리하여 은혜나 긍휼이나 회개에 대한 생각을 성령이 불어 넣으면 사탄은 그것들을 얼른 가로챈다.
이스라엘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냈을 때 사탄은, “바로도 현인들과 마술사들을 부르매...”(출7:11)처럼 얀네와 얌브레를 보내 방해한다. 불신자들의 친구나 친지 가운데 혹은 당신의 자녀들을 통해 장애 역할을 할 수 있다. 사탄은 사람들의 결단의 시기를 지연시킨다. ‘내일 해도 돼’라고 늘 속삭인다. 하나님께서는 ‘오늘이어야 한다’고 명하신다.
사탄은 타협할 것을 제안한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바로의 말처럼 말이다.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제사를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 가지는 말라...”(출8:28).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양다리 걸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든가 아니든가 둘 중에 하나를 분명히 택하라고 말씀하신다.
④무지의 힘
모든 죄 중에서도 무지는 우리로 하여금 사탄의 종이 되게 하는 데 있어서 큰 역할을 한다. 무지한 상태에서 범하는 죄는 다소 묵과될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하겠지만 결과적으로 사망의 길에 이르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다. 숱한 사람들이 무지로 인해 사망의 길로 빠지는 것이다. 무지란 그리스도를 향해서는 문을 닫아 놓고 사탄에게는 활짝 열어 젖힌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무지는 죄를 향해 열린 문이다.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딤후3:7). 무지는 사람 안에 죄를 가둬 둔다. 영적으로 무지한 사람은 결코 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또한 죄를 범하고도 그것이 죄인지 아닌지를 분별하지 못한다. 이러한 모습은 마치 어린아이가 바닷가에서 아장아장 걷다가 밀어 닥치는 파도를 향해 다가가는 것과 같다. 그 결과는 뻔하지 않은가. 그 아기는 결국 노도에 휩쓸려 바다에게 삼키워 버릴 것이다.
이제 당신에게 권하노니 당신이 영적 무지 상태에 있다면 즉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하나님께로 달려가라. 그리고 당신의 무지를 하나님의 지혜와 바꾸도록 하라.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라도록 하라. 사람의 양심은 죄인에게 울리는 하나님의 경종과도 같다. 그러나 우리가 진리에 대해 무지하다면 죄가 우리 안에 슬금슬금 기어 들어와 온몸을 불사를 때까지 무감각하게 있는다. 왜냐하면 양심이란 한번 둔해지면 죄에 대항해서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적절한 시기에 회개를 통해 죄의 불꽃을 소멸하지 않는다면 영원한 지옥의 불로 떨어지게 된다.
무지는 구원의 길을 봉쇄한다. 설득이나 협박을 한다고 해서 무지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스스로 불 속에서 나오게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무지한 사람에게는 어떤 방법도 전혀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위험’이라는 표지판을 크게 써서 보여 주더라도 쓸모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것은 마치 맹인이나 황소가 글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결책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성령의 은혜가 죄인에게 임하게 되면 그들의 무지한 눈이 밝아지며 비로소 구원받기를 열망하게 된다. 물론 그들의 영혼이 죄에 얽매어 있음도 깨닫게 된다. 그제서야 자유를 얻기 위한 탈출구를 찾게 된다. 그러나 사탄이 순순히 물러날 리가 없음을 알아야 한다. 사탄은 한 발 앞서 멋진 길을 제시함으로써 그것이 마치 구원의 길인 양 죄인을 유혹한다.
⑤무지에 대한 경고
자녀들의 영적 무지와 부모의 책임
부모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다. 부모들이 자식의 필요를 채워 주기 위해서는 어떠한 일도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것은 육적인 공급에만 국한되어 있을 때가 많다. 그러나 그들의 영적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기 바란다. 나침반이 없이 바다를항해한다는 말을 듣고 놀라지 않을 사람이 과연 있을까? 그러한 배는 쉽게 좌초되거나 가라앉을 것이다. 그런데도 자녀들의 영적 방향을 제시해 줄 하나님을 무시한 채 인생의 항해를 시작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위기를 느끼지 못하니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그리스도인 부모들의 믿음의 척도는 그들이 과연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도를 제대로 가르치느냐에 달려 있다고 본다. 만일 당신이 자녀의 영적 교육을 소홀히 했다면 나중에 주님 앞에 섰을 때 할 말이 없게 된다. 우리가 자녀들을 영적으로 훈련시키는 것을 소홀히 한다면 다음의 세 가지의 면에서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먼저, 당신이 당신의 자녀들을 영적 무지 상태에 방치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그것은 자녀들이 그리스도인이냐 아니냐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삶의 방식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믿음의 씨앗은 뿌려지지 않으면 결코 싹이 나오지 않는다. 당신이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여 방치해 두는 동안 끔찍한 일이 전개된다. 즉 당신의 자녀의 마음과 지식 속에 성경이 전혀 자리 잡지 않는다면 사탄은 그 새를 놓칠세라 다가와서 불신의 씨앗을 뿌려 놓는다. 이제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분명해졌으니 행동에 옮기는 것만이 남아 있다. 믿음의 씨앗을 당신의 자녀에게 뿌리는 것이다. 또한 믿음의 씨앗을 뿌리기에 가장 적합한 시기는 바로 어린 시절임을 기억하라.
둘째, 당신의 자녀로 하여금 영적 무지 상태에 머물게 할 경우, 그 죄의 결과는 당신 자녀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도 당신의 죄와 함께 가중치로 적용될 것이다. 자녀들이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은 일단은 그들의 죄라고 할 수 있겠지만 동시에 부모의 죄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법을 자녀에게 가르치지 않았다는 죄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녀들은 부모에게 무거운 십자가 역할을 한다.
당신의 자녀가 지옥을 향해 최고의 속력으로 달려가는 것을 바라보는 것보다 더 애간장이 타는 일이 있을까? 그 길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역할을 바로 부모가 해야 하지 않겠는가? 아무쪼록 자녀가 어릴 때, 하나님에 대해 가르치고 끊임없는 영적 관심을 기울이도록 하라.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원하시는 일이다.
셋째, 당신의 자녀들이 영적 무지에 거하도록 방치할 때 야기되는 또 하나의 심각한 상태는 자녀들이 불의한 자로 낙인찍히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자녀들로 하여금 구원의 지식을 알지 못하도록 가두어 놓는 행위와 같다. 비유컨대 자식이 살 집을 강탈하는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당신이 부모로서 영적 교육을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당신 자녀에게 주라고 맡긴 귀중한 보배를 당신 주머니 속에 감추어 둔 채 시치미를 뚝 떼는 것과 같다. 당신이 영적 유산을 자녀에게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면 복음의 진리라는 보배는 자녀들의 속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땅 속에서 썩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훈육하듯 당신도 당신 자녀를 훈육하기를 바라신다. 그래야만 사탄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자녀를 가르치라. 그저 설교조로 몇 마디 하는 데 그치지 말고, 당신이 받은 하나님의 훈계를 철저히 전수하도록 하라. 다윗을 보라. 아들을 영적으로 훈계하는 일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버지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대상28:9). 디모데를 어린 시절부터 영적으로 잘 훈육했던 그의 부모들은 어떠한가?
목회자들에게 고한다
당신의 교인들 가운데 영적 무지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도록 하라. 사망의 길을 걷고 있으면서도 전혀 자신의 위치를 알지 못하는 그들을 안타깝게 바라보라. 무지라는 질병은 불치의 암과도 같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 우리의 영혼을 갉아 먹는다. 따라서 한시라도 빨리 손을 쓰지 않는다면 생명을 건질 수가 없다.
죄인을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과정에서 갈등이 존재하는 것과 같이 영적 무지를 깨우치는데는 고통이 수반된다. 육신의 병을 고치는 것이 의사라면 목회자들은 영적 질병을 치유하는 사람이다. ‘영적 무지’라는 질병은 무감각하다는 면에서 육신의 문둥병과 증세가 비슷하다. 이러한 환자들을 치료해야 할 사람은 바로 목회자이다.
무지한 사람들이 목회자인 당신을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지 말라. 앞서 말했듯이 그들은 영적으로 맹인이나 다름없기에 스스로 당신에게 다가올 수는 없다. 혹시 그들이 자신의 상태가 심각하다고 느끼고 있더라도 그것만으로는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환자들이 자기가 병에 걸렸음을 알고도 치료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병을 고치겠다는 마음보다는 그 병을 숨기는데 정력을 소모한다. 영적으로 무지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당신이 맡고 있는 교회의 교인 수가 많을 경우, 일일이 개개인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최선을 다할 필요는 있다. 당신의 역할은 욥이 말한 바와 같다. “나는 맹인의 눈도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의 발도 되고”(욥29:15). 하나님께서 당신과 같은 목회자를 부르신 것은, “내가 또 내 마음에 합한 목자들을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양육하리라”(렘3:15)는 이유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목자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다면 당신의 존재는 영적 무지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 한낱 장신구만도 못하게 된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당신의 양들을 양육해야 할지 몇 가지 의견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먼저 당신의 영적 상태를 파악해야 한다. 당신 자신이 하나님에 대해 무지하다면 다음과 같은 말씀에 아무런 찔림이 없을 것이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4:6).
하나님의 율법에 무지한 목회자가 어떠한 징계를 받게 될 것인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당신이 겸손하고 인내심이 풍부하고 죄를 범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설파하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지 못한다면 목회자로서의 자격이 없다. 모든 물건은 제 나름대로의 용도가 있기 마련이고, 그에 따르는 능력도 소지해야 한다. 사역자에게도 나름대로의 역할이 주어졌는데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이다. 따라서 이러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역자는 본분을 잃게 된다. 만일 사역자들이 말씀 연구에 게으른 탓으로 교인들이 영적 조난을 당한다면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둘째, 사역자가 나태하게 되면 교인들의 무지는 깊어진다. 목회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지식을 성도들의 양육에 사용하지 않는다면 당신이 아무리 오랜 훈련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말짱 헛일이 되고 만다. 이렇듯 쓸모없는 목자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화 있을진저 양 떼를 버린 못된 목자여 칼이 그의 팔과 오른쪽 눈에 내리리니 그의 팔이 아주 마르고 그의 오른쪽 눈이 아주 멀어 버릴 것이라”(슥11:17). 영적 양식이 코앞에 주어졌는데도 먹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람들의 죄로 돌리겠으나 영적 양식을 공급해야 할 사람이 그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다면 누구의 잘못일까?
셋째, 횡설수설하는 설교는 교인들을 영적 무지에 빠지게 한다. 목회자가 두서 없는 설교를 하게 되면 교인들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고 결국은 영적으로 도태된다. 더구나 말씀이 잘못 전달될 때의 심각성이란 차라리 교인들이 무지 상태로 있는 것만 못하다. 다시 말해서 교인들을 무지 상태로 내버려 두는 것이 그들의 영적 눈을 거짓 말씀의 물감으로 더덕더덕 칠하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다. 교인들의 영적 허기를 알맹이 없이 말만 번드르한 설교로 채워주는 것은 탕자의 배를 채우던 쥐엄 열매만도 못하다.
또한 복잡하게 신학적 논리만 전개하는 설교는 평범한 교인들에겐 마치 외국어를 듣는 듯할 것이다. 이러한 실수는 공부를 많이 한 목회자일수록 잘 저지르게 된다. 물론 극소수의 사람들에겐 마음에 드는 설교가 되겠지만 당신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평범한 사람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교회 내의 다수가 영적 양식의 부족으로 굶주려 있는데 몇몇 사람만 풍족함을 누린다면 어떻게 될까? 어린아이에겐 고기 덩어리보다는 우유가 필요하다는 것을 기억하고 영적으로 어린 교인들에게 알맞은 설교를 하도록 하라.
엉터리 건축가는 기초 공사를 제대로 할 생각도 안하고 건물의 골격만 높게 세운다. 높은 건물을 지으려면 튼튼한 토대 위에 골격이 세워져야 한다. 교인들 중 영적으로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을 잘 양육하는 것이 바로 기초 공사를 잘 하는 것이다. 또한 영적으로 성숙한 몇몇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양육되는 과정을 참고 지켜보아줄 필요가 있다. 이런 성숙한 자들은 마치 건물의 골격과 같지만 본인들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기 위해서는 기초 공사가 다 될 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온전한 건물이 설 수 있는 지름길이다.
끝으로, 목회자들의 삶이 거룩하지 못하면 교인들은 영적 기갈을 면치 못하게 된다. 목회자들의 생활이 바로 서 있지 않은 것은 마치 요리사가 더러운 앞치마를 두른 채 음식을 내놓는 것과 같다. 그렇게 하면 식사를 하는 사람들은 행여 음식에 더러운 것이 들어있지나 않을까 해서 선뜻 먹기가 꺼려진다. 반면에 목회자가 너무 의로운 면만을 보이며 ‘자기 의’에 빠져 자신만만하게 교인들을 대한다면 교인들은 기가 질려 선뜻 자신의 문제점을 꺼내 놓고 의논을 하지 못한다. 즉 목회자의 생활이 불경건한 것도 탈이지만 너무 거룩하게 보이는 것도 평범한 교인에겐 거리감을 준다.
바람직한 목회자란 마치 능숙한 낚시꾼처럼 조심스레 물고기를 유혹한 뒤 결정적인 순간에 낚아채어서 바구니에 넣는 것과 같다. 이처럼 유능한 목회자는 교인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잘 파악하여 그들을 가깝게 다가오게 한 뒤 하나님의 은혜의 그물에 사로잡히게끔 한다.
무지는 사탄이 기뻐하는 노예이다. 어떻게 하면 이 무지의 수렁에서 헤어날까? 하나님께서는 몇 가지 간단한 지침을 마련하셨다.
-당신의 무지를 인정하라
어떤 사람들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교인들처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계3:17). 눈이 멀어 있다. 무지는 영적 백내장과도 같다. 그러나 그들의 자존심으로 인해 선뜻 의사를 찾지 않는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무엇을 배운다는 것은 생각조차 안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일일이 초청장을 보내셨다. 그 내용인즉 모두 와서 배우라는 것이다. 우선 낮아질 필요가 있다. 스승이신 그리스도가 겸손하시기 때문이다.
-신실하라
아마도 당신을 진리로 인도하는 빛은 아주 희미할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그 빛 가까이 따라가도록 하라. 그리고 그 빛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그 어떠한 행동을 하도록 촉구한다면 신실함과 열심으로 그에 따르도록 하라. 진리를 아는 지식이 건강하게 자라기 위해서는 규칙적인 훈련이 요구된다.
-보다 많은 지혜를 구하라
하나님이야말로 모든 지식과 지혜의 보고(寶庫)이다. 그러한 하나님의 지혜를 배우는 길은 먼저 기도하는 것이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하나님 앞에 당신의 무지를 드러내 놓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규칙적으로 공부하라
규칙적으로 진리의 말씀을 탐구할 수 있도록 일정한 시간을 할애하라. 이것은 마치 금을 캐기 위해 애쓰는 것과 같다. 말씀을 공부하기 위해 수고도 하지 않고서, 어느 날 갑자기 성령의 힘으로 당신의 무지가 사라진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 우리가 마땅히 노력해야 할 부분이 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요5:39). 이 ‘연구’라는 말은 나태한 가운데서 지니는 호기심이 아니라 열심히, 그리고 세심하게 성경을 공부한다는 뜻이다. 지식을 얻고자 하면 그것에 필요한 각자의 노력을 기꺼이 쏟아야 한다.
버나드(Bernard)는 하나님 말씀을 공부하는 것으로 친구를 사귀는 것에 비유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보다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를 바라는가? 그렇다면 보다 자주, 그리고 오랫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도록 하라. 영적인 배움에는 단계가 있다. 기초 교육이 잘 되어 있지 않으면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는 힘들다. 확신하건데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견고히 서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의 기초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성령의 도우심을 의뢰하라
당신이 정말 하나님의 진리를 알고자 한다면 말씀이 설파되는 곳에 모이기를 싫어하지 말라(히10:25). 그렇게 할 처지가 못된다면 집에서라도 성경을 읽으며 성령의 도우심을 의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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