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의 작은 이야기!!

[스크랩] 윌리엄 거널, "그리스도인의 전신 갑주", Ⅳ. 전신 갑주를 입는 것에 대한 두 번째 훈계

하나님아들 2017. 9. 20. 16:54

. 전신 갑주를 입는 것에 대한 두 번째 훈계

 

1. 권고와 그 의미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6:13).

이 구절에서 전신 갑주를 취하라는 말씀은 11절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는 말씀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마치, “전원 무장! 무장!”이라고 명령하는, 전쟁을 앞둔 군대와도 같다.

 

첫 번째 고찰: 거듭 권고한 이유는?

 

비유컨대 당신의 자녀가 혼자서도 길을 잘 건널 수 있는 나이로 자랐다면 굳이 조심해서 길을 건너라는 말을 반복하며 신신당부하지는 않을 것이다. 바울은 영적으로 어린 그리스도인들을 매우 염려했다. 그들이 직면한 위험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적 무장에 대해 거듭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바울의 태도는 마치 못을 하나 박는 데에도 꼼꼼하게 여러 번의 망치질을 하는 성실한 목수와도 같다. 대충 박고 다른 일로 넘어가는 일이 결코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너무도 많은 설교가들이 서둘러대는 목수와 같을 때가 있다. 서두르는 목수는 의자를 만들 때 연결 나사를 잘 조여야 하는데도 그것이 귀찮아 압정으로 대충 박아 놓는다. 과연 그렇게 해 놓은 일의 결과는 어떠할까?

 

성급하기만 한 설교가들은 진리의 못을 확실하게 박아 놓지도 않은 상태에서 다른 일에 손을 대곤 한다. 이러한 목회자들이 교인을 보다 면밀히 관찰했더라면 그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그들의 머리에, 가슴에 진리의 못을 확실히 박는 것임을 깨달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각이 완고하고 강퍅하여 웬만한 힘으로 두들겨서는 복음이라는 못이 잘 들어가질 않는다. 따라서 여러 번의 반복되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뿐 아니라 가능한한 간단하고 쓸데없이 난잡하지 않은 참 진리를 드러내야 한다. 너무 많은 것을 내놓으면 더 애를 먹게 된다.

 

설교자는 매 번 동일한 진리를 설파하는 것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3:1). 목회자들이여, 당신의 교인들은 당신의 반복되는 설교에 대해, 특히 그 내용이 거의 동일한 것에 대해 불만을 토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신에겐 아무런 잘못이 없다. 잘못이 있다면 그들에게 있는 것이다.

 

당신이 목회자로서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닮기 원한다면 주일마다 재미있는 화제로 교인들에게 즐거움을 주고자 하는 일은 버려라. 그대신 교인들이 모두 죄를 회개하고 악한 길에서 돌아설 때까지 죄에 대한 것과 복음에 대한 것을 끊임없이 외치도록 하라. 당신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의 진리 또한 사랑하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아이는 당연히 그의 진리를 들음으로 성숙하는 것이다. 그리고 진정 겸손하고 영적 식욕이 왕성하다면 하나님의 진리를 거듭 듣더라도 늘 새로울 것이다.

 

다시 한 번 다짐해 두고 싶은 것은 각자의 지닌 바 은사나 재능을 그냥 썩히지 말고 복음의 확장을 위해 사용하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일들을 감당할 수 있도록 만반의 태세를 갖추어라. 목회자가 자신의 지식이나 지혜를 갈고 닦아 그 영향력을 기르지 않는다면 흉악한 강도와 다를 바 없다. 이러한 목회자는 교인들의 영적 식탁 위에 오래되어 말라 비틀어진 빵만 놓는 셈이다.

 

두 번째 고찰: 당신의 은혜를 잘 간수하고 돌봐야 할 이유

 

바울이 반복을 한 이유는 사람들이 중요한 사실을 쉽게 망각하고 처음엔 잘 행하다가도 곧 중단해 버리기 때문이다. 또한 전신 갑주를 입긴 입었어도 헐거워져 있거나 손상된 부분을 조이고 수리하기를 바랐기 때문일 것이다.

 

갑옷을 입고 있는 것만으로도 적을 물리칠 수 있다는 생각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전신 갑주를 입기는커녕 그냥 등에만 걸머지고 있다면 그것은 사단에게 항복의 깃발을 흔들어대는 것과 똑같다. 따라서 갑옷을 대충 걸치기만 해서는 안 되고 조일 부분은 확실히 조여서 몸에 단단히 부착시킬 필요가 있다. 당신은 늘 사단의 감시를 받고 있음을 기억하라. 당신이 영적으로 잠시라도 나태해져 있을 때 사단의 공격은 즉시 감행될 것이다. 전신 갑주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생겼다면 즉시 수리하도록 하라. 그러나 그 수리자는 당신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임을 기억하라.

 

(1) 당신의 영적 무장이 형편없음으로 인해 해를 당하는 것은 누구인가?

하나님께 손해가 된다

하나님의 영예는 그를 믿는 성도들의 영적 상태에 달려 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죄악이 아무리 많다고 한들 그것이 하나님의 영예에 어떤 손상을 주는 것은 아니다.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를 끼친다

당신의 영적 무장 상태에 뭔가 문제가 생기게 되면 그것은 곧 다른 그리스도인에게 해를 끼치게 된다. 그것은 마치 우리의 신체의 어떤 부위가 병들면 다른 부위도 고통을 받게 되는 것과 같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고전12:26).

 

당신 자신에게 해가 된다

당신의 영적 상태가 점점 악화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때, 그것을 회복시키기 위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게 되면 당신은 그러한 나태함으로 인해 고통받게 될 것이다. 영적 은혜가 쇠퇴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회의가 몰려오게 되어 있다. 구원을 받았는지 안받았는지에 대한 회의가 생기게 된다. 또한 영혼이 병이 들면 삶에 있어서의 즐거움도 함께 사라지게 된다. 현재의 기쁨뿐만 아니라 미래의 기쁨까지 잃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영적인 힘도 상실하게 되어 무슨 일에도 자신을 잃게 된다.

 

(1) 당신의 영혼이 시들어 가고 있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착각을 불러 일으킬 그릇된 진단

어느 날 문득 자기 자신 속에 있는 자만심과 위선과 또는 다른 죄악을 적나라하게 자각할 때가 있다. 그리고는 그것으로 인해 두려움에 빠질 때가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을 좌절감에 빠지도록 사탄이 필요 이상의 죄책감을 불어 넣는 때이다. 이러한 상태에 빠졌더라도 결코 사탄에게 득이 가는 행동은 하지 말기 바란다. 하나님께 나아가 당신의 상태를 솔직히 아뢰도록 하라.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날로 커가는 사람은 사소한 죄에 대한 죄책감에만 주저앉아 있지는 않는다. 지나친 자책감에서 자유로워질 때 우리의 영혼 또한 자유롭게 될 것이다.

 

또한 당신은 주의 일을 하고나서도 평온함이나 안위함을 얻지 못하는 경험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느낌이 들었다고 해서 당신이 한 행동이 잘못됐다고 할 수는 없다. 우리의 느낌으로 우리의 영적 상태를 측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행한 일에 항상 위안이 따르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실 수도 있고 안 주실 수도 있는 것이다.

 

당신 또한 유혹의 짐에 눌려 헉헉거릴 때가 있다. 유혹의 짐이 늘 동일한 무게로 당신의 양심을 짓누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유혹의 짐이 점점 늘어나기 전, 사소한 것을 하나하나 해결하면 그렇게 힘겨워 하면서 고생할 필요는 없다. 당신이 영적으로 침체되는 때는 대부분 당신의 영적 생활이 나태해지거나 불성실해질 때이다. 각종 유혹과 시험에 강경하게 맞설 때 영혼은 더욱더 강해지게 된다.

 

영적 침체기의 확실한 징후

유혹에 대해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양심이 둔감해지면, 사탄의 유혹의 덫에 걸려들 찰나에도 별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다윗이 밧세바를 보고 정욕에 눈이 멀었던 순간을 보라. 이처럼 영적 경계가 나태해지면 사탄의 유혹에 빠지게 되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일에 관심이 없어질 때

하나님을 대하는 것이 두려운 사람은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을까 궁리하는 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얼굴을 찾을까 고대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을 앙모하는 열정이 강하다는 것은 우리 안에 영적 양식을 구하는 소리가 강하다는 것을 뜻한다. 반면에,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 영적 양식을 구하는 소리가 시원치 않으면 그것은 영적으로 날로 쇠약해지는 것을 뜻한다.

 

당신의 영적 상태는 어떠한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통해 충분한 양의 영적 양식을 공급받고 있는가? 이러한 공급이 없이는 당신의 믿음과 순종이 온전할 수가 없다. 기도와 말씀 듣는 것 등을 통해 유혹에 대항할 힘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을 간직하고 있는가? 하나님과의 교제가 없이는 당신의 믿음과 영적 능력을 새롭게 할 수 없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없다는 것은 우리의 영적 침체의 한 현상이다.

 

(3) 침체되는 영적 상태를 어떻게 회복시킬 것인가?

죄로 인한 손상을 회복시키는 법

당신의 회개를 새롭게 하라

이에 대한 좋은 말씀이 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2:5). 당신에게 숨겨진 죄가 있다면 그것들을 잘 살펴 하나님께 나아가 고백하도록 하라.

 

당신의 믿음을 점검하고 공고히 하라

일단 하나님께 자복한 죄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것이 분명하니 이젠 당신의 믿음을 새롭게 해야 한다. 믿음은 일종의 강장제이다. 기진맥진한 영혼이 믿음으로 다시 힘을 얻는 것이다.

 

당신의 세상 욕심을 버려라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용서를 얻었으면 이젠 죄에 뿌리 내렸던 당신의 행동을 찬찬히 돌이켜 보고 그것들을 근절시키도록 하라. 잡초가 너무 무성하면 화초는 죽기 마련이다. 하나님의 은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영혼이 은혜 가운데에서 잘 자라다가도 세상의 욕심이 너무 드세면 우리의 영혼은 결국 질식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매일매일 성령의 도움을 받아 잡초와 같은 죄를 제거하지 않으면 그 잡초는 하룻밤만 지나도 무성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도끼로 뿌리를 패어내듯 죄의 뿌리를 완전히 제거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당신 안에서 무럭무럭 자랄 것이다.

 

나태함이 영적 침체의 원인이 될 때의 해결책

잘 타오르던 장작불이 점점 꺼져갈 때 나무를 더 집어 넣으면 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을 읽어라

말씀이야말로 당신의 완전한 영적 회복책을 제시할 수 있다. 즉 그리스도의 완전한 사랑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성경 말씀이라는 말이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죗값을 치루기 위해 목숨을 버리셨다는 내용이 담긴 성경을 대할 때 거룩해지지 않을 수 없고, 죄를 미워하지 않을 수도 없게 된다.

묵상하라

묵상은 마치 꺼져가는 불에 기름을 들어 붓는 것과도 같아서 하나님을 향한 당신의 영혼의 불을 다시 활활 타오르게 하는 역할을 한다. 말씀을 묵상하는 동안 당신의 마음은 점점 뜨거워지고 성령의 불이 다시 활활 타게 된다. 매일매일 묵상을 통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이르시는 음성을 듣도록 하라.

 

기도하라

말씀에 대한 묵상은 곧 기도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묵상과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묵상이란 불을 지피기 전에 나무를 차곡차곡 쌓는 것과 같고 기도는 그 나무에 불을 당기는 것과 같다. 당신이 하나님과의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지 않고서 무슨 재주로 천국의 불을 지필 수 있겠는가? 이러한 영혼의 불을 지피기 위해서는 당신의 신앙과 기쁨과 인내가 병행되어야 한다.

 

다른 그리스도인과 교제하라

당신이 다른 그리스도인과의 관계가 너무 소홀해져 있다면 사탄이 당신을 유혹하기가 쉬워진다. 그러나 당신이 다른 그리스도인과 친밀한 교제를 유지하고 있다면 사탄을 향한 방어벽이 두터워지게 마련이다.

 

2. 훈계의 필요성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전신 갑주를 입어야 되는 이유를 두 가지 측면에서 거듭 강조하고 있다. 하나는 악한 날에 능히 대적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다.

 

첫째 이유: 싸움의 때

 

바울이 말한 악한 날이란 무엇인가? 어떤 사람들은 이 세상의 모든 순간을 일컫는다고 본다. 또 다른 해석가들은 우리의 삶은 악한 날, 즉 어둠의 날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매일매일의 삶 속에는 악한 날이 포함되어 있다고 본다. 그런데 바울의 악한 날이란 죽음을 배제하고는 이해될 수 없다. 죽음은 악의 본질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면 바울의 말을 이해하기 전에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은 재앙(고통)은 악을 내재한 것이 있고, 또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도 재앙을 계획하신다(2:3, 3:6). 재앙과 악이 항상 동일시 되지는 않는다. 고난은 박해의 양상으로 나타날 때가 있는데, 이 경우 마땅히 감수해야 한다. 고난이 싫다고 죄를 선택함으로써 일순간의 안락을 누려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우리가 악한 날의 도래를 막는다는 것은 마치 태양이 저물어 가고 있는 시간을 저지하는 것과 같다. 우리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사망의 씨를 잉태한 셈이다. 임산부가 산고의 날을 피할 수 없듯이 인간 또한 사망의 날의 도래를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필연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날을 대비하며 우리의 할 바를 행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 전투 방어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

 

이제 당신 스스로에게 진지하고 엄숙하게 물어보라. ‘당신은 죽음의 날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는가? 죽음이 닥쳐오면 애지중지하던 이 세상의 모든 것들과 미련없이 헤어질 수 있는가?’ 사망의 날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의 즐거움과 과감히 결별하도록 한다. 평안함과 믿음 가운데서 그것들을 떠날 수 있는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과연 어떤 대답을 할 것인지 생각해 보라. 아무쪼록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한 순간도 의심하지 말기 바란다. 그리고 다가올 그 날을 예비하라.

 

두 번째 이유: 영적 전투에서 승리를 얻기 위해 필요한 것

 

믿는 사람들은 이미 승리가 확정된 상태에서 전투에 임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승리의 면류관이 보장된 싸움이라는 말이다. ‘모든 싸움을 마친 후 선다는 말이 그런 큰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천국은 선한 말이나 신앙고백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을 행한 후에 얻어지는 것이다. 사탄과 싸울 때에도 기도만으로는 부족하다. 적극적으로 대항해야만 한다.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만을 사랑한다는 증거를 보여 주어야 한다.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게 함이라는 말은 짧지만 이 말 속에는 인내의 필요성과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해야 할 이유, 그리고 영적 무장이 되었을 때의 승리에 대한 약속이 담겨 있다.

 

(1) 인내의 필요성

인내는 그리스도의 참 군사로서 꼭 필요한 것이다. ‘모든 일을 행한 후에라는 말 속에는 죽음과의 영적 투쟁도 포함된다. 즉 죽기 전에는 전쟁이 끝날 수가 없다. ‘할 일은 모두 한 후에 새로운 요구사항을 제시하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전력을 다해 싸움에 임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겐 후퇴가 있을 수 없다. 오직 전진이 있을 뿐이다. 죽음이 임할 때까지 영적 전투는 끝이 없는데, 여기에 인내가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의 영원한 기업은 인내에서 비롯된다.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이는 인내하기 힘들다. 또한 하나님의 전신 갑주가 없이는 인내할 수 없다. 거룩한 하나님이 이 전신 갑주와 함께 하기 때문이다.

 

(2) 영적 무장이 되어 있으면 인내하는 것도 문제없다

우리의 마음에 진정한 믿음이 없을 때 인내란 불가능하다. 이 점이 전신 갑주를 취해야 할 중대한 이유이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5:4).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5:13)라는 말씀의 시제는 항상 현재임을 기억하라.

 

혹시 그리스도인이었다가 구원의 약속을 잃게 되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본인에게 문제가 있다. 구체적으로 말해 자기가 먼저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이지 하나님이 먼저 그를 버린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직접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13:5).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11:29).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절대로 의심하지 말라. 그분은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래도 의심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맹세하신 말씀을 보라고 권하고 싶다(54:8-10).

 

천국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은 길고 힘들어 약한 우리의 믿음으로는 그곳에 당도하기도 전에 포기하고 하나님을 저버리게 되지 않나 걱정할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은 우리의 약함으로 인한 의심의 구름을 말끔히 거둬들이며, 성령께서는 우리가 천국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신다.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36:27).

 

(3) 인내에 대한 보상

모든 일을 행한 후 선다는 표현은 성도에 대한 상급이 담겨 있다. 죄와 사탄과의 격렬한 싸움을 마치고 섰을 때의 보상이 어떻겠는가? 그리스도의 군사는 영광스런 상을 받게 된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3:21).

 

그렇다면 선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슨 뜻을 지녔는가?

-그것은 정복자를 의미한다. 군대에서 패배자는 엎드리게 마련이고 승리자는 그 앞에 선다. 우리의 영적 전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패배자인 사탄 앞에 승리자로 우뚝 서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여, 사탄과의 치열한 전투가 힘겨울 때마다 영원한 안식을 기대하자. 그 때가 되면 당신의 적 사탄은 완전히 격파되고, 사탄은 당신을 공격하기 위한 그 어떠한 무기도 손에 들지 못하게 된다. 그 영광의 날 사탄은 당신의 발 밑에 엎드려 벌벌 떨 것이다.

 

-마지막 심판에 무죄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을 의미한다. 마지막 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판결문을 낭독하실 것이다. 그리스도에 의해 무죄가 선포될 때의 기쁨을 생각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얼마나 복받은 영혼인지 아는가? 그 기쁨을 확인하기 위해 굳이 하늘에 갈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다. 이곳에서도 충분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늘에서의 성도들의 지위를 뜻한다. 왕에게 특별히 충성한 신하에게는 아주 가까이에서 왕을 모실 수 있는 지위가 수여된다. 이 땅에서의 수고한 대가로 성도에게 주어지는 보상은 그 어느 것으로도 견줄 수 없다. 오직 천국에 대한 소망만 간직하도록 하라.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8:18).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유정식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