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의 미학
일찍이 폴 틸리히는 그의 작은 책 신앙의 역동성 (Dynamics of Faith)속에서 개신교 설교의 문제를 초래하는 원인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첫째는 참다운 신앙이 일종의 종교적 교리나 신조를 받아들이는 지적인 수용행위로 변질되는 것이다. 설교가 기독교 정통 신앙 교리나 기독교 신학 내용을 변증하고 해설하는 교리 해설 또는 성경 구절에 대한 신학적 강의로 변질될 때 발생한다. 설교의 증언을 통한 말씀의 사건 은 종교적 교리나 신조를 지적으로 수락하는 인지적 행위 이상이어야 한다.
만약 말씀 증언 이 종교교리 강론 시간으로 변질되면, 설교자와 회중이 강론을 하는 자와 청중과의 관계로 전락하여 설교자가 말하는 종교적 명제를 합리적으로 이해하려는 지적 인식 작용이 예배의 중심을 이루게 된다. 인식작용은 인간의 의식의 차원에서 논리적 정합성을 따라서 주객구조의 인식론적 차원을 견지하면서 이뤄진다.
흔히 보수주의 교단에서 정통 교리 신조를 그 밑바닥에 깔고 행하는 교리적 설교가 초자연주의적 진리나 실재를 언급하지만, 그러한 말씀 증언은 초자연주의적 교리 내용을 합리주의적 신학의 틀로 설명하고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형태를 취한다. 예를 들면 삼위일체 교리의 신비, 하나님의 섭리와 선택, 부활 메시지의 논증, 십자가 사건의 속죄론, 예수 재림과 처녀 잉태설의 성경구절과 신학적 논증, 성경의 무오성 논증, 인간의 원죄성 논증 등등이 그 예들이다.
교회는 정통교리를 굳게 지키는 신자를 만들려는 교리학교로 전락한다.
참다운 신앙체험 사건 대신 위와 같이 주지주의적으로 왜곡된 설교가 횡횡하면, 설교는 신학강론, 성경 구절의 연쇄적 인용을 통하여 구원 진리를 논증하는 시간이 되고 회중은 신학적 교리나 신앙적 명제를 거듭 내면화시키는 학습 효과를 얻을 수 있으나, 말씀이 사건을 일으킨다. 는 영적 체험을 할 수 없다.
회중의 믿음의 상상력은 억압되고 삶의 신비한 경험의 개방성은 자물쇠가 잠겨 진다. 시적(詩的)인 영감은 메마르고 거룩의 영적 체험은 불가능하게 된다. 회중은 우리가 구원에 필요한 초자연적 구원 진리의 내용 곧 영지 (靈知)를 붙잡고 있다는 착각, 나는 확실한 구원의 조건인 신에 대한 지식, 구원 지식을 정확하게 소유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질는지 모르나 신앙인의 부드럽고 열린 마음은 사라진다.
거듭 거듭, 순간순간 임재 하는 하나님의 말씀과 영적 현존에 대면하여 겸손하고 빈 마음으로 말씀에 응답하려는 깨어 있는 신앙, 카이로스적 인식은 사라지고 구원에 자신만만한 종교인이 양상 된다. 거룩과 경건을 많이 말하지만 참된 거룩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감정과, 기쁨과 희열에 온몸이 떨리는 체험은 사라진다.
도리어 수은, 카드뮴 등 중금속에 오염된 신체처럼 하나님, 구원, 성령, 십자가, 은혜, 거룩 등 어마어마한 실재들에 심령이 중독되어 신앙인 이 아닌 종교인으로 전락하고 만다. 전문적 종교인이 되어 종교적 명제 진술과 종교적 예배의식에 능수능란하게 잘 적응한다.
수줍음, 서툴음, 더듬거림, 머뭇거림, 떨림, 낯섦 등의 감정은 사라지고, 구원받은 신앙인의 감동과 신명나는 신바람도 사라진다.
둘째는 권선징악의 도덕 강화, 윤리적 선행의 권면시간이 반복되면서 참다운 신앙이 일종의 도덕주의로 변질 왜곡되는 것이다.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선을 행해야 하고 바른 길을 실천해야 한다는 도덕감을 지닌 존재이다. 설교자의 말씀 선포가 흔히 신자공동체에서 윤리적 선행을 실천하도록 격려하고 권장하는 것은 전혀 잘못일 수 없다.
그런데 말씀은 말씀증언 이어야 하는 설교가 단순히 도덕적 차원에 머물고 인간에게 도덕 강론을 행하는 일에 그친다면 설교는 실종되고 말씀의 영성은 시들어 버린다.
설교가 말씀사건 을 일으키면서 인간의 도덕성의 그 뿌리를 뒤흔들고 인간의 선악판단이나, 권선장악의 합리주의를 넘어서서 역설의 차원을 현재화시키는 일에 실패할 때 말씀의 영성 은 사라진다. 인간은 도덕적으로 선행을 행하는 선한 사람이면서 자기 위선과 연약성에 휩싸인 죄인이라는 역설적 의식, 하나님은 불의를 용납하지 않으시고 악인을 심판하시는 공의로운 하나님이시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햇빛을 선인과 악인에게 골고루 내리신다는 역설, 인간은 보다 작은 악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한계 내 존재이지만 전쟁무기 생산, 군대제도 자체가 죄라는 철저한 의식 등은 도덕주의를 넘어선 은총의 빛에서만 이해되는 신앙의 현실 체험이다.
말씀 선포로서의 설교가 도덕주의적 권선징악의 윤리강론으로 변질될 때 오는 치명적 문제는, 윤리적 당위성을 실천할 수 있는 신명나는 신바람이 결여된 채 무거운 책임감, 죄책감 또는 정반대의 우월감 등으로 인간을 억누르고 비인간화시킨다는 사실이다. 복음이 복된 즐거운 소식이 아니라 대심문관의 엄중한 책임 추궁으로 다가올 때 설교의 영성은 인간의 윤리적 선행을 통하여 의로워지려는 은폐된 바리새주의로 전락하든지 무의식적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나 자기학대증에 의해 영혼은 시달린다.
말씀 선포로서의 설교가 인간의 도덕적 위선과 태만성을 예언자적 통찰력으로 질책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것은 옳다. 그런데 거기에서 멈춰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이기심을 진심으로 회개하고, 자기 스스로 은폐하고 있는 도덕적 위선과 자기변호의 심적 자기 방어 심을 무장 해제시키고, 복음의 진리 앞에 겸손히 순종하는 길은 도덕적 질책을 넘어서고, 윤리적 선행 실천의 책임성 추구를 넘어서는 말씀의 영성이 필요한 것이다.
삭개오를 변화시키고, 사울을 바울로 변화시킨 것은 율법이 아니고 복음의 은총의 힘, 도덕주의를 넘어선 영적 깊이의 충격이었다.
말씀의 영성이 동반하는 참된 신앙의 상태가 변질되는 셋째 위기는 신앙을 일종의 심리적 과잉흥분 상태와 혼동하는 심리적, 정서적 왜곡 현상이다. 신앙을 체험할 때 심리적, 정서적 요소가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는 점을 먼저 인지할 필요가 있다.
삶이란 추상적인 관념의 유희가 아니고 생생하고 진솔한 경험의 연속이다. 삶이란 체험의 연속이다. 체험 내용과 양이 인간의 질과 양을 결정한다.
신앙도 일종의 생명의 체험이다. 다만 그 체험이 궁극적 체험이요 전인적 체험이며 인간의 존재를 의미 있게 방향 전환시키는, 그래서 인간 존재를 근원적으로 새롭게 중생시키는 체험이라는 것이 일상적 체험들과 다르다. 인간의 심리적, 정서적 메커니즘이 종교 체험의 근원일 수는 없다.
그러나 인간의 종교 체험은 초월적 차원에서 오는 하나님의 영적 현존,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로 촉발되고 가능하지만 그 체험은 어쩔 수 없이 인간의 심리적, 정서적 메커니즘을 통과하면서 현실적으로 체험된다. 포이에르바하, 프로이드 등 종교 비판가들의 심리학적 종교기원설이 잘못된 것임에 틀림없지만, 그들은 종교비판 이론 중 부정할 수 없는 요인은 종교 체험이 심리적 메커니즘을 통과하거나 스크린에 반영되는 체험의 기원 자체가 인간의 인공적 심리 산물이라고 봤던 것이 잘못이었다.
참 신앙은 인간의 심리적, 정서적 차원을 높이 고양시키는 숭고성을 체험케 하면서 인간이 희열, 자유, 해방감, 진 선 미를 추구하려는 열망, 거룩한 실재와 접촉하고 그 신비로운 궁극자의 품안에서 절대 평화, 절대 평정, 지복의 감정을 느끼도록 한다. 그러므로 회중의 정서적 감동을 일으키지 못하는 무미건조한, 형식에 매인, 종교의식으로만 진행되는 예배는 실패인 것이며, 말씀선포가 참다운 정서적 감동을 주고, 회중의 심령을 그 깊은 차원에서 흔들어 새롭게 변화시키지 못하는 경우 그러한 신앙공동체는 침체되고 무력증에 시달리며 신바람이 결여된 종교단체가 되고 만다.
예배에는 진정한 의미의 정서적 감동과 심리적 흥분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현존 곧 하나님의 영적 임재인 성령을 인간이 심리적으로 조작하거나 강림을 강요할 수 없는데도 예배의식을 종교적 과잉 흥분상태로 몰아가면서 회중 공동체를 일종의 자기 최면, 집단 최면에 빠지도록 하는 데 있다.
인간은 홀로 있을 때에는 약하지만 집단적 관계 속에서 정서적 격정 분위기에 몰입하면 일상적으로 체험할 수 없는 흥분, 해방감, 일종의 몰입을 경험한다. 방언과 비슷한 사이비 방언, 환각, 환시도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그러한 비일상적 경험을 한다고 해도 존재가 새롭게 변화하지 않는다.
인간이 중생하여 새 사람으로 변하고,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던 삶의 태도가 봉사와 사랑과 공동체 전체를 위한 헌신적인 삶의 태도로 변화되지 않는다. 일시적인 흥분상태를 맛보게 되면 다시 그러한 심리상태를 지속하기 위한 심리적 자극과 정서적 무드를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진정한 말씀의 영성이 결여된 열광적 예배분위기가 여름철 쏟아 붓는 소낙비처럼 일과성 현상을 반복하면서도 교회가 속한 사회공동체에 아무런 창조적 변화의 영향을 주지 못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러한 과잉흥분상태에 쉽사리 빠져드는 열광주의적 종교집단에게서 아무런 감동이나 거룩한 경외감을 느끼지 못하고, 특수체질 을 지닌 이상경험 추구 자들이라는 낙인을 찍고 만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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