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돌봄과 치유로서의 목회에 관하여
여는 말
한국교회는 급성장기를 지나 이제는 정체기의 끝부분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필요한 것은 목회의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그래서 다양한 형태의 목회가 시도되고 있다. 그 중에 몇 가지 형태의 변화는 성공적인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면 셀 목회 같은 것이다. 또 다른 형태는 가정과 상담치유사역을 중심으로 목회하는 경우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들도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 역시 과거의 성장중심적인 목회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목회자는 항상 목회 현장에서 한 영혼에 대한 관심이냐 전체에 대한 관심이냐, 혹은 조직이냐 그 구성원 개개인에 대한 관심이냐의 갈림길에서 갈등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갈등은 한 교인이 지금 어떤 삶의 자리에 있는가를 바라볼 때에 사라질 수 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매우 빠른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사회의 변화는 곧 교회와 가정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현대사회는 한 마디로 말하면 소비가 극대화된 물량주의적 사회라 정의할 수 있다. 따라서 교인들은 물질적 화려함 뒤에 가려져 극심한 인간소외현상을 겪고 있다. 즉, 끝없는 불안과 염려, 자기상실, 고향상실, 소외감과 고독감, 무의미감 등을 경험하면서, 핵인간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에 따른 정신적 심리적 영적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이러한 현대사회의 변화와 개인의 문제는 가족구조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확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부부중심가족으로, 기능성 가족과 같은 다양한 가족형태로의 변화를 일으키고 있으며, 나아가 노인인구의 증가로 인해 가족구성원의 연령층도 변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영향은 가족 개념만이 아니라 결혼과 성(性)에 대한 개념도 변화시키고 있다.
현대사회는 가족역할에도 변화의 영향을 끼치고 있다. 곧 성역할에 대한 변화된 개념들이다. 이제는 고정되거나 전통적인 성역할을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이는 부부간에 혹은 사회 안에서 성역할에 대한 갈등의 요인이 되기도 한다.
가족기능 역시 이러한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과거의 가족기능은 다양했다. 그러나 현대사회의 가정은 소비기능과 애정기능만이 극대화되어 남고 다른 기능들은 약화되었다. 이것은 가족해체현상을 가속화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가족이 가족으로서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삶의 현장은 그대로 한 개인과 사회에 영향을 미친다. 이는 한 개인의 문제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사회 전체의 문제이고, 나아가 세대간의 문제, 부부간의 문제, 청소년 문제의 요인이 되기도 하며, 그러한 개인과 가정이 모인 교회의 문제가 된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질문을 하게 된다. 급격한 사회와 가정의 변화 속에서 목회의 본질은 무엇인가?
목회의 본질 - 양적 성장에서 돌봄으로
목회의 본질은 결론적으로 말하면 한 마디로 “영혼의 돌봄”이어야 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 목표 수행이다. 이 목표의 수행은 말씀을 통한 하나님과 인간과의 만남이라는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즉,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또한 말씀으로 인간에게 찾아오셨고, 지금도 말씀으로 만나고 계시며, 이 만남을 통해 영혼의 돌봄이라는 목회적 기능이 이루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트루나이젠(Thruneysen)은 “목회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와서 그 말씀이 교회에서 선포되기까지의 모든 대화 형태로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이렇게 목회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목회자가 성도들을 만나고, 말씀을 선포하고, 말씀으로 가르치고, 말씀을 가지고 돌보고, 말씀으로 치유하는 모든 역할과 기능을 포함한다.
클라인벨(H. Clinebell)도 목회의 통일된 목표를 제시한 바 있다. 그것은 영을 핵으로 한 인간의 전인건강을 증진시키는 일이라고 하였다. 여기에는 지역사회 봉사, 사회활동, 복음의 선포, 예배인도, 교육, 목회와 상담, 교회 지도력과 개발, 그리고 평신도 훈련이 속하는데, 이 모든 기능들은 성장과 치유의 도구가 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목회에 대한 설명은 구약성경으로부터 시작된 목회적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전통이란 바로 치유(healing), 지탱(sustaining), 인도(guidance), 화해(reconciling) 등이다. 여기에 양육(Nurturing)의 기능을 더 부가할 수 있다. 여기서 양육의 목표는 “하나님이 주신 가능성을 개발할 수 있도록 능력부여(empowering)를 하는 것”이 된다.
힐트너(Hiltner)에 의하면 "목회적 돌봄“(Pastral Care)의 기본적인 개념은 보살핌이다. 이것은 성경의 목자와 양의 비유에서 찾은 목회자의 자세이다. 목회는 궁극적으로 돌봄의 목회(caring ministry)여야 하며, 그것은 목회자가 돌보아야 할 양이라 할 수 있는 교인들의 영적, 정신적, 육체적 문제들을 살펴서 풍성한 삶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요10:10).
캐롤 와이즈(C. Wise)는 목회자는 “그의 인품 속에서와 사람들과의 생동하는 관계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속에서 폭넓게 발견되는 존재의 질 같은 것을 중재해 주는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 관계는 결국 영원하신 하나님의 본성과 관계가 있으며, 이 살아 있는 관계 속에서 화해, 용서, 치유가 있게 되고, 이것들은 인간 존재의 기반을 넘어서 인간 실존의 핵심에까지 도달하며, 이 관계로부터 매일 매일의 삶을 가능케 하는 힘과 통찰이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목회자의 돌봄에 관한 설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종합되어 드러난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실 때에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시고, 가르치시고, 병든 자들의 병을 고치셨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것을 다르게 설명한다면 인간을 돌보시고(caring), 치유하시고(healing), 가르치시는(preaching) 일을 하셨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캐롤 와이즈는 “목회적 돌봄”(Pastoral Care)이라는 말에서 “돌봄”(care)은 관심을 의미하고, ”목양“(pastoral)은 그 관심의 깊이와 방향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 관계의 핵심은 복음이라고 하였다.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이라는 좋은 소식”이다. 목회적 돌봄은 목회자가 자신의 행동을 통해서 바로 이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목회자와 성도간의 복음적 대화”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목회자와 교인간에 일체감과 참여적 공감이 일어난다.
그렇다면 목회자의 목회적 돌봄의 역할은 무엇을 목표로 하여야 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목회의 궁극적인 목표가 복음을 핵으로 한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의 관계를 통한 구원이라는 명제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구원은 회복과 치유를 포함한다
목회적 돌봄은 구약적 전통과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에 근거를 두고 있다. 초대교회 역시 는 이 전통을 따라 “영혼의 치유”(Cure of Souls)에 초점을 맞추었다. 여기서 "치유"는 라틴어의 'cura'에서 파생된 말인데, "치료한다"(to heal)이라는 뜻으로 쓰였지만, 대부분은 "보살핀다"(to care)는 의미로 쓰였다.
이러한 관련성은 이미 구원의 의미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성경 전체에 걸쳐서 구원을 뜻하는 헬라어 soteria는 동사 sozo에서 파생되었는데, 이 언어와 치유의 언어가 교차되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구원을 가리키는 헬라어 용어들이 151회 사용된 중에 16회는 질병 또는 귀신에게 사로잡힘으로부터의 해방을 가리키고, 40회 이상은 육체적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을 가리킨다. 즉, “구원하다, 건져내다”는 의미와 “치유하다”는 의미가 교차되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 이와 관련하여 생각할 수 있는 신약성경의 단어는 “therapeuo”이다. 이 단어는 “섬긴다”, 즉 service의 의미와 “돌본다, 치료한다, 치유한다, 회복한다”는 의미를 다 포함한다. 섬긴다는 의미의 영어 단어 service는 그리스어 therapeia에서 파생되었는데, therapeia와 therapeuo는 같은 단어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therapeia는 영어의 치유를 뜻하는 therapy를 파생시켰는데, 이것은 상담(counseling), 인도(guidance), 돌봄(care)의 의미를 담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목회라는 뜻을 담고 있는 영어 단어 ministry는 어원적으로 볼 때에 라틴어 minstrare에서 파생되었다. 이 단어는 영어로 service로 번역될 수 있다. 이러한 개념을 담고 있는 성경구절이 누가복음 22장 26절로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and the one who rules like the one who serves.)고 되어 있다. 즉 여기서 minister의 의미를 섬기는 자의 의미로 찾아낼 수 있으며, therapeia의 service(섬기다)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어원적으로 볼 때에 신약성경에서는 구원은 궁극적으로 치유를 포함하여 이해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으며, 구원과 상담과 치유는 서로 통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구원과 상담과 치유를 통합적으로 이해할 때에 그 목표는 에베소서 4장 13절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까지 이르는 “완전한 자”, 즉 성숙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골로새서 1장 28절에 자신과 동료들이 그렇게 수고하는 이유에 대해서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존재(고후5:17)가 됨으로 가능해 진다.
크랩(L. Crabb)은 기독교 상담의 목표에 대해서 그것은 “성숙”(Maturity = Spiritual and Psychological Maturity)임을 주장하면서 골 1:28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는데, 그 하나는 특수한 환경 속에서의 즉각적인 순종이고, 다른 하나는 장기적인 안목에 있어서의 인격의 성장이다. 이 둘을 통해 성숙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위와 같은 내용들을 통해서 구원과 치유와 상담에 대해서 그 어원적 의미와 목표의 관점에서 하나로 통합하여 이해할 수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은 바로 care-giver로서의 목회자와 성도의 관계라는 목회적 돌봄이라는 목회활동 안에서 통합되어 나타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목회적 기능의 핵심은 영혼의 돌봄이며, 그 목표는 구원이다. 이 목표는 목회적 돌봄을 통해 구체적으로 수행된다고 정리할 수 있다. 목회적 돌봄의 수단과 방법은 기독교 영성이라는 틀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상담과 치유를 통한 성숙을 향해 가는 것이다. 이 과정은 일시적이거나 단기적인 과정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일생동안 이어지는 지속과정이어야 한다. 그러기에 목회적 돌봄은 일시적이거나 이벤트성이 아니라 지속적인 것이어야 하며 본질이 되어야 한다.
목회적 돌봄의 장으로서의 가정과 교회
성경에는 가정이라는 말이 직접 나오지는 않고 있지만, 집이라는 말과 가족이라는 말은 많이 나타나고 있다. 더 자세히 살펴보면 구약에서는 꽤 많은 가족과 집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고 있는 반면에 신약에는 적게 나타나고 있다. 가훈표가 나타나고 있는 골로새서의 경우를 보아도 겨우 네 구절일 뿐이다. 가정생활에 대한 언급이 있는 에베소서도 155절 중 겨우 16절뿐이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7-11절에서는 가정을 예화로 들고 있을 뿐이다. 또 고린도전서에는 여러 유형의 결혼 문제를, 그리고 디모데전서에서는 과부들의 부양 문제를 다루고 있고, 디도서에서는 아내와 어머니들이 가정에서 지켜야 할 바람직한 행동을 가르쳐 주고 있다. 베드로전서에는 부부에 대한 권면이 약간 나타나고 있다.
그 외에 바울서신 중 로마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데살로니가후서 등에는 가정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이 하나도 없다. 히브리서에도 가정에 관한 언급이 하나도 없다. 물론 요한서신과 베드로후서와 계시록에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겉모습만 보고 신약성경이 교회는 강조하고 있고, 가정은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고 보아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신약시대에는 교회와 가정은 거의 동일한 기관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교회가 설립되기 이전에는 가정이 교회였다. 그리스도인들이 회당에서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되자 자연스럽게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으며, 신약에서의 ‘교회’의 의미는 ‘가정교회’를 의미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 하나를 잊지 말아야 하는데, 신약에서 교회에 대하여 하고 있는 말씀은 가정생활을 전제로 하고 한 말씀이라는 사실이다. 실제로 보면 성경은 교회를 가정에 비유하여 가르쳐 주고 있다. 이것은 이미 가정생활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드러내 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 수 있는가? 현대로 올수록 교회는 강조되고 가정은 약화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인류역사의 발전단계와 무관하지 않다. 구약성경이 암시해 주고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은 국가라는 거대 조직에 관심이 없으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점점 그러한 권력과 계급구조를 만들어냈다. 그것은 어떤 한 조직과 체계를 이루는 개체보다는 전체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하는 사조를 낳았다. 개개인보다는 전체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점점 개인은 전체를 위한 하나의 요소로 전락하고 말았다. 더 큰 체계와 조직이 우선되고, 발전과 양적 성장을 위해서는 개개인의 권익과 권리는 부차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이러한 변화는 교회에도 그대로 영향을 주었다. 특히 중세의 중앙집권적인 왕정과 교회가 결탁되면서 이러한 경향은 더욱 강화되었다. 근대와 현대에 이르러 민주사회로 발전되면서 개인의 권익과 권리가 중요하게 여겨지고 강화되긴 하였지만, 또다른 요인이 부작용으로 작용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맘몬니즘을 바탕으로 한 양적 성장제일주의, 성과와 공로주의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교회가 확장되어야 하고, 또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지상명령임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본질적으로 보이는 것에 있지 않다. 그런데도 이 땅의 교회는 성장논리에 갇혀서 본래적인 것을 비본래적인 것으로 만들고, 오히려 비본래적인 것을 본래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교회가 성장되어야 하긴 하지만, 가정을 파괴하면서까지 그렇게 강요할 수는 없다. 교회를 섬기고 봉사해야 할 의무가 있지만, 그것 때문에 가정을 버리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오히려 디도서는 잘못된 가르침이 가정을 파괴한다고 하면서 경계하였다. “--이러한 자들이 더러운 이를 취하려고 마땅치 아니한 것을 가르쳐 집들을 온통 엎드러치는도다.”(딛1:10)
나가는 말
목회자가 된 자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모두 말한다. 그렇지만 그 결과는 꼭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왜 그럴까?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즉 그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 왜 예수님의 비판을 받았을까? 그들은 사실 하나님께 대한 열정이 있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옳지 않았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오늘날 우리에게는 그러한 오류가 없는가? 있다면 왜 그러한 일이 일어나는가? 여기에는 우리의 영적인 문제뿐만이 아니라 심리/정서적인 면이 도사리고 있다. 이 심리/정서적인 면면의 뒤에는 내가 자란 가정환경의 영향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정의 변화와 치유가 함께 되지 않고서는 교회가 건강해질 수 없다.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첫 번째 명령은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라, 다스리라”(창1:27,28)는 것이었다. 이것은 문화적 사명이면서 동시에 세상과 사람을 돌보는 돌봄의 명령이기도 하다. 또한 인간이 타락하여 세상에 죄가 관영할 때에는 노아와 아브라함과 같은 한 가정을 구원하심으로 인류구원의 구원사를 시작하셨다.
그러기에 목회적 돌봄의 장은 교회와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가정이어야 한다. 여기에 가정사역과 상담 치유사역의 당위성이 있는 것이다.
이 돌봄의 명령의 수행은 일시적이거나 성과중심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혹은 어떤 목적을 이후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어서도 안된다. 너무 양적 성장에 초점을 두어 한 영혼에 대한 돌봄을 소홀히 해서도 안된다.
또 하나 우리가 올바른 목회자가 되기 위하여, 그리고 올바른 의미에서의 교회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가정에 대한 바른 이해와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동시에 그러한 것을 바탕으로 한 가정생활이 있어야 한다. 성경은 이렇게 가르쳐 주고 있다.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보리요.”(딥전3:5).
노용찬
서울신학대학교및동대학원(B.A. M.A.)
연세대학교연합신학대학원(Th.M., Th.D. cand.)
신촌교회협동목사겸 가정상담소담당목사,
서울신대강사,
연세상담실 전문상담사
참고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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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inebell, Howard, Basic Types of Pastoral Care and Counseling, 박근원 역, 「목회상담신론」, 서울:한국장로교출판사, 1996
Crabb, Lawrence J. Jr., Effective Biblical Counseling, 정정숙 역, 「성경적 상담학」, 서울 : 총신대학교 출판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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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uwen, Henri J. M., The Wounded Healer,「상처입은 치유자」, 윤종석 옮김, 서울:두란노서원, 1999
Thrunysen Eduard., Die Lehre von der Seelsorge, 박근원 역, 「목회학 원론」, 서울:성서교재간행사, 1987
Williams, Daniel D., The Minister and the Care of Souls, New York : Harper & Row, 1977
Wise, Carroll A., The Meaning of Pastoral Care, New York : Harper & Row Publishers, 1966
Wynn, John Charles, Family Therapy in Pastoral Ministry, San Francisco : Harper & Row, Publishers,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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