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창세기 주석과 카피토의 하나님의 6일 사역에 나타난 하나님의 창조
황대우 고신대학교
논평 원종천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이 논문은 2010년 8월 남아공 블룸폰테인(Bloemfontein)에서 개최된 세계칼빈학회에서
발표된 글입니다. (발표: 황대우)
서론
최근 창조에 관한 칼빈의 견해를 상세하게 연구하고 분석한 책이 출판된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1) 그 책의 저자가 칼빈의 창조론에 접근한 방법은 과학적 관점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창세기 1장의 피조 세계에 대한 칼빈의 생각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해석학적접근 방법이 필수적이다.
창세기 1장의 창조기사에 대한 해석은 매우 다양하다. 해석학적 원리들 역시 서로 광범위한차이를 보인다. 창세기의 창조기사가 역사적인지 상징적인지에 대한 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고 모든 성경 해석자에게 열려 있다. 대부분의 고대 신학자들은 그것을 ‘문자적으로’(ad litteram) 받아들여 역사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칼빈과 카피토는 문법적이고 문자적인 주석가에 속한다. 하지만 두 종교개혁가가 수용한 해석학적 원리들과 방법들이 항상 동일한 것은 아니며 때때로 상당한 차이가 나기도 한다.
1550년 칼빈은 창세기를 강의하기 시작했는데 1554년에 이것은 <창세기주석>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반면에 스트라스부르 종교개혁가들 가운데 한 사람인 카피토는 1539년에 이미 <하나님의 6일 사역>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판했는데,2)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6일 동안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창조 사역을 설명하는 것이다.3)
카피토 책의 표지에 쓰인 ‘헥사메론’(Hexameron)이란 단어가 창세기의 첫 6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주 창조를 완성하신 6일을 의미한다는 것을 바르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 단어가 학계에서 오해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오해를 보편화시킨 사람은 카피토의 전문연구가 키텔슨(Kittelson)이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카피토의 1539년 저술을 “창세기의 첫 6장”에 대한 해설서로 잘못 소개했던 것이다.4) 하지만 실상은 카피토는 자신의 책에서 창세기 1-6장까지를 해설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6일 동안의 창조사역을 상세하게 설명하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그가 그 책에서 제시해 놓은 창세기 본문은 단지 1장뿐이다.
이 소논문의 목적은 칼빈과 카피토의 창조론을 창세기 1장에 대한 그들의 해석을 근거로 비교하여 두 종교개혁가 사이의 신학적인 공통점과 차이점을 제시하는 것이다.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 사상에 나타난 삼위일체(Trinitas)
칼빈과 카피토는 둘 다 창조를 만물을 무로부터 창조하신 삼위 하나님의 사역으로 보았다. ‘무로부터의 창조’ 교리는 칼빈5)과 카피토6) 두 개혁가 모두 주장한 것이다. ‘무로부터의 창조’교리에 대한 칼빈 견해의 기초는 창세기 1장 1절에 나타나는 히브리어 동사 ‘바라’( בָּרָ֣א . 라틴어로는 creare 혹은 condere)7) 인 반면에 카피토 견해의 기원은 히브리어 명사 ‘브레이쉬트’( רֵאשִׁ֖ית 라틴어는 principium)이다.
카피토는 자신의 책에서 ‘브레이쉬트’ 즉 ‘태초’(principium)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주 길게 설명하고 있다.8) 카피토는 ‘태초에’(inprincipio)라는 것을 ‘태초를 통해’(per principium)라는 말로 이해했다.
그는 만물이 ‘태초’(principium)를 통해 ‘창조된 것’(condita esse omnia)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주장하기를 “창조하는 방법 혹은 수단은 세상에서 찬양받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이다.”(mediumcreandi rationemve esse verbum patris, Deum benedictum in saecula)9) 스트라스부르 종교개혁가는 ‘태초’를 하나님의 제2위이신 말씀과 결부시켰는데, 이것은 아리우스가 그리스도를 ‘최고의 피조물’(optima creatura)로 정의하는 것을 반대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다.10)
카피토와는 달리 칼빈은 “태초라는 용어를 그리스도와 연관시켜”(nomen principii de Christo) 설명하는 것은 너무나도 천박하다고 지적했다.11)
비록 칼빈이 신성의 세 위격이 엘로힘(Elohim)이라는 복수명사에 의해 표현된다는 점을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다음과 같이 주의를 환기시킨다.
하지만 그와 같은 주장[=복수명사 엘로힘이 삼위 하나님을 나타낸다는 것]에 대한 어떤 확고한 증거가 내게는 없기 때문에 나는 그런 식으로 주장하고 싶지 않습니다. 오히려 독자들이 되새겨야 하는 것은 스스로 극단적인 주석 방법을 피하는 것입니다. 저들은 자신들이 [엘로힘이라는 단어로부터] 아리우스주의자들에 대항하는 증거를 가지게 되어서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는 사이에 그들은 스스로 사벨리우스의 오류에 포위가 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뒤에서 모세는 엘로힘이 말씀하셨다는 것과 성령 엘로힘이 수면에 운행하셨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세 위격이 [엘로힘이라는 단어로] 표현되는 것이 좋다면 결코 그 위격들 사이의 어떤 구분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아들도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셨고 성령도 아버지께 속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속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내게 만족스러운 것은 복수[명사]가 [사용된 것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나타내는 하나님의 능력들을 말한다는 [해석]이다.12)
칼빈의 이해에 따르면 창세기 1장에서 엘로힘이라는 복수명사가 사용된 것은 삼위 하나님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들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이런 칼빈과 는 달리 카피토는 어떤 망설임도 없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일체성을, 엘로힘이라는 단어에서는 삼위성을 찾으려고 노력했다.13)
비록 칼빈이 복수의 하나님에 대해 성경을 해석할 때 “복수의 위격이 신성 속에 있다.”(plures subesse in Deo personas)는 점을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카피토가 말하는 식의 이러한 삼위일체주의가 칼빈의 신학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것 같다.14)
카피토와 칼빈 둘 다 하나님의 두 번째 위격인 “말씀을 통해 만물이 창조되었다”(omnia facta sunt per verbum)는 것을 믿는다. 요한복음 1장 3절을 기초로 칼빈은 세상이 말씀의 동일한 효력으로 시작되었고 완성되었음을 확신한다.15) 그는 강조하기를 ‘그리스도의 신성’(divinitas Christi)은 “그분이 하나님의 말씀이시기 때문에 만물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다”(quod quum sit Dei sermo, per eum creata sunt omnia.)는 사실로부터 증명된다는 것이다.16)
카피토 역시 하나님께서 만물은 오직 ‘말씀을 통하여’(per Verbum) 창조하셨는데, 그 말씀 없이는 아무것도 창조된 것이 없었다고 말했다.17) 천지는 ‘태초 안에서’(in principio) 즉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in filio Dei) 창조되었는데, 그 이유는 “동일한 말씀이 창조자이시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우리의 회복자요 구원자이시기”(idem uerbum creator est filius Dei Iesus Christus reparator atque redemptor noster.) 때문이다.18)
스트라스부르의 개혁가는 그리스도를 ‘창조주’(creator)라고 부른다. 칼빈도 하나님의 아들을‘어머니 창조주’(creatrix)라고 말한다. “세계는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이신 그분[=하나님의 아들]에 의해 창조되었습니다. 그분은 태초부터 하나님의 모든 사역의 어머니 통수권자이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이 그분[=아들]을 통해 창조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마치 그분 자신이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가] 아닌 것처럼, 그분의 능력이 축소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창조주라고 불리는 것이 일반적인 말하기 방식이다. 하지만 어떤 곳에서 ‘지혜를 통하여, 혹은 말씀을 통하여, 혹은 아들을 통하여’라고 첨가되어 있는 것은 마치 지혜 자체가 어머니 창조주라고 명명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 확실하다.”19)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카피노가 하나님의 아들을 ‘말씀’(verbum)과 ‘모사’(consilium)로 서술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에 칼빈은 제2위 하나님을 말하기 위해 종종 ‘말씀’(verbum)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카피토가 사용한 용어들 보다는 오히려 ‘말씀’(sermo)과 ‘지혜’(sapientia)라는 단어들을 선호하는 편이라는 것이다.
칼빈은 말하기를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리라”(sine ipso factum est nihil quod factum est)는 문장이 “지어진 것은 그분 안에서 생명이었다, 즉 살아 있었다거나 생명으로 유지되었다”(quod factum est, in ipse erat vita, hoc est, vivebat aut in vita sustinebatur)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20)
“창조된 것들의 보전”(eorum quae creata fuerant, conservationem), 즉 “그분의 능력의 말씀 혹은 의지로 만물을 유지하는 것”(sustinere omnia verbo aut nutu potentiae suae)을 의미한다.21) “
왜냐하면 그것은 [다음과 같이] 단순한 의미이기 때문인데, 즉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피조물을 위한 생명의 원천이셨으므로 존재하지 않았던 그것들이 존재하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분의 살리시는 능력은 그것들로 하여금 그것들 자신의 상태로 남아 있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지속적인 영감이 세상에 에너지를 불어넣지 않는다면 능동적으로 일하는 만물이 즉시 소멸하거나 무로 되는 것은 불가피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영원한 말씀을 통해서 그렇게 하신다.”22) 칼빈과는 달리 카피토는 다음과 같이 주장함으로써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침에 동조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불변하시기 때문에 그분[=말씀]은 태초 전, [즉] 한 분이시요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스스로 홀로 계셨던 그 때의 자신과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혹은 태어나고 죽는 것들의 영속이 끝나게 될 바로 그 순간의 자신과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그분[=말씀]은 가장 진실하신 분이실 뿐만 아니라 가장 잘 알려지신 분이요 가장 분명한 분으로 보이는 이유는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시편 44편을 따라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사역은 말씀 그 자체 속에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자한 것은 무엇이든지 이미 말씀 속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만일 그것이 말씀 속에 없었던 것이라면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실로 ‘창조된 것은 그분 안에서 생명이었다’라는 복음서의 말씀처럼 모사[=계획] 속에 없었다면 형성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조된 것은 존재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말씀 속에 존재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사역은 바로 그곳에 존재했고 사역들은 아직 없었지만 말씀은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그 말씀 속에 그리고 즉시 [그것들을] 자신에게 종속시키십니다. 또한 자신의 아버지와 더불어 그 영원한 말씀은 변화된 그것들, 즉 이미 그 말씀 속에 있었고 곧 존재하게 될 것들을 아실 수도 있고 보실 수도 있습니다.”23) 카피토의 신념은 만물이 말씀 속에 존재한다는 것이며 “과거와 미래의 모든 존재 역시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다”(praeterita & futura in uerbo Dei praesentia esse)는 것인데, 이유는 이럴 때만이 “왜, 그리고 어떻게 새로운 것들이 발생하고 발생할 것들이 다시 고대와 시간 속으로 사라지는지”(quamobrem, quomodo res nouae oboriantur, & obortae uetustate & tempore iterum occidant)가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24
스트라스부르 종교개혁가는 만물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말씀 속에 선재 한다는 선재교리를 확고하게 유지하는 것으로 보인다.25) 하나님의 창조와 관련하여 카피토는 “그리고 하나님께서 빛을 보셨다”(Et uidit Deus lucem)는 성경 말씀에서 ‘성령의 특성들과 사역들’(proprietas et officia spiritus sancti)을 발견했다.
그는 삼위 하나님의 사역을 세 개의 라틴어 동사로 구분했는데, 즉 아버지 창조주는 ‘말씀하시고’(dicere) 아들이신 말씀은 ‘말씀되시고’(dici) 성령은 ‘보신다’(videre)는 것이다. “‘빛이 있으라’라고 말하는 것은 아버지 창조주이십니다. 그리고 말씀되시는 것은 아들 혹은 말씀이신데, 이분에 의해 빛이 있고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것이 선하다라고 보는 것, 즉 우주의 사용과 장식을 위해 만물이 자기 분량에 따라 적응하도록 그들에게 능력과 효력을 제공하는 것은 장식하시는 분이요 배열하시는 분이신 성령이십니다.”26)
더욱이 카피토는 “물들이 성령이다”(aquae sunt spiritus sanctus)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제네바 개혁가는 창조 시 성령의 사역을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는 문장과 연결시키지, “보시기에”라는 동사와 연결시키지 않았다. 칼빈은 어디에서도 물들을 성령과 동일시하지 않았다.
‘무로부터’(ex nihilo)의 창조와 관련하여 두 종교개혁가의 해석학적 차이는 다섯 째 날 물들로부터 물고기들과 새들을 창조하는 사건에 대한 그들의 해석에서도 나타난다. 칼빈은 ‘창조하다’(creare)라는 동사가 ‘다른 물질로부터의 사물 창조’(creatio rerum ex alia materia)에 사용될 수 있는지의 문제에 답하려고 노력했다.
왜냐하면 앞에서 우리는 세상이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것이 무로부터 지어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모세는 다른 물질로부터 형성된 것들을 창조되었다라고 말합니다. 물이 물고기들을 존재하도록 하는데 결코 충분하지도 적합하지도 않기 때문에 물고기들은 창조되었다고 바르고 정확하게 말하는 자들은 도피 외에 바라는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러는 사이에도 물질이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저 [엄연한 사실]이 남아 있어서 단어의 적합성이 그것[=창조했다는 말]을 수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창조를 다섯 째 날의 역사에 제한하지 않고 오히려 [그 창조가] 마치 온 세상의 샘과 같았던 저 무형적 혼합 덩어리와 연관된 것이라고 나는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고래들과 나머지 물고기를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은 창조의 시작이 형태를 수용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계산되어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이 무로부터 지어진 우주적인 몸체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種)에 관해서는 단지 형태가 첨가되었을 뿐이다.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조라는 말은 전체와 부분 모두에 바르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27)
카피토는 그 문제에 대해 다른 해결책을 제시한다. “만일 파충류와 조류, 어류가 죽은 물들로부터 지어졌다면, 물론 실제로 그랬기 때문에, 그것들 모두가 주의 말씀으로 창조되었을뿐만 아니라 또한 무로부터 만들어졌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유는 이것들의 무는 물들에 속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명령하시는 창조주의 유일한 말씀 때문에 물들로부터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섯 째 날 사역의 주요 사건입니다.”28)
이점에서 칼빈은, 비록 카피토가 하늘과 바다에 있는 동물들의 창조와 관련하여 삼위 가운데 제2위이신 말씀의 강력한 역할을 매우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그 문제에 신학적 답변을 제공해야 할 책임을 회피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간주했을 수도 있다.
빛과 어둠
카피토는 창조된 빛과 창조되지 않은 빛을 구분했는데, 창조되지 않은 빛은 요한복음 1장1-5절에 나오는 ‘말씀’(verbum)이라는 빛을 의미한다.29) 그에게 있어서 첫째 날 창조된 ‘빛’(lux)은 “지금의 해와 달보다 작은 것”(minor quam nunc in sole & luna)으로, 넷째 날의‘빛’(luminaria)에 의해 완벽하게 완성되고 대체된 것이다. 카피토에 따르면, ‘원인’(causa) 역할을 한 첫째 날의 빛은 최종적으로 넷째 날에 창조된 해와 달과 별들이 되었는데, 이것들이 바로 그 원인의 ‘목적’(clausula)이었다.30)
반면에 칼빈은 해와 달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릴 경우어떤 빛도 남아 있을 가능성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을 반대했다. 왜냐하면 빛을 제공하는 능력은 해와 달에 포함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제네바 종교개혁가에 따르면 첫째 날 창조된 빛은 직접적으로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기원된 것이다. 해와 달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비추기 위해 사용하시는 ‘기관들’(organa), 즉 수단으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창조의 참된 순서에 따라 친히 빛을 자신의 손에 쥐고 계신다고 증거하시는데, 그분은 그것[=빛]을 우리에게 해와 달 없이도 분배하실 수 있습니다.”31)
창조된 빛과 창조되지 않은 빛 사이의 구분은 칼빈의 창조론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첫째 날의 빛이 넷째 날의 해와 달로 축소되거나 대체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모세는 이전에 창조되었던 빛을 상호 교대로 지구에 두루 발산하도록 확실한 기관들을 정하셨다는 것과 다른 무엇을 언급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유일한 차이는 그 빛이 이전에는 흩어지지 않았으나 이제는 발광체들로부터 지속적으로 쏟아져 나온다는 것인데, 그것들[=발광체들]은 이러한 활용을 위해 하나님께 복종합니다.”32)
카피토는 어둠이 이미 깊음 위에 있었기 때문에 이 어둠은 빛보다 더 일찍 창조되었다고 주장했다.33) 또한 주장하기를 만일 이 어둠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이라면 그것 역시 선한것인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모든 사역이 선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34) 그리고 카피토는 그 어둠을 밤과 동일시했다.35) 그러므로 빛 이전에 존재한 밤은 결코 낮의 일부일 수 없
으며 오히려 그 반대가 참이라고 그는 주장했다.36)
하지만 하나님께서 어둠을 밤이라 부르신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어둠과 밤을 동일시하는 것에 대해 칼빈은 인정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언급하기를 깊음 위의 어둠이란 뒤섞인 공허의 일부였다는 것이다.37) 달리 말하면 ‘무형의 혼돈’(informe chaos)라는 것이다. 혼돈과 공허의 상태는 칼빈이 보기에는 결코 선하지 않았다. 그는 저 ‘혼합 덩어리’(indigesta congeries)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능력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38) “그러므로 그는[=모세는] 주장하기를 이 덩어리가 비록 혼합적일지는 모르지만 한동안 성령의 신비한 효력에 의해 안정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39)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던 것은 빛이지 어둠이 아니었다고 칼빈은 생각했다.
“탁월함에 있어서 빛은 세상을 장식해야 했던 장식 가운데 첫 번째이어야 했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구분의 시작이었다.”40) 어둠이 시간 전에 존재했음을 인정하면서도 칼빈은 지적하기를 “이것이 날을 마감하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빛을 철수하실 때입니다.”41)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밤이 다른 한 날을 향해 출발할 수 있도록 빛을 시야로부터 제거하시기 때문입니다.”42)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칼빈은 시간의 시작을 첫째 날 창조된 빛과 연
결시키는 것으로 보인다.43) 하지만 분명한 것은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principium)과 연결시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카피토의 확신에 따르면 태초부터 시간이 있었고 그래서 비록 날이 빛의 창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시간은 밤이 있기 전에 존재했다.44)
히브리어 ‘라키아’( רָ קִ֖יעַ )의 의미
칼빈은 이 ‘ רָ קִ֖יעַ ’를 라틴어 ‘extensio’(펼침, 확장)와 ‘expansio’(펼침, 확장)로 번역하면서 말하기를, “둘째 날의 사역은 하늘이 땅과 뒤섞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 땅의 경계를 통해 이러한 빈 공간을 [만드는 것]입니다. …
나아가 ‘라키아’라는 말은 공중의 모든 영역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우리 위에 열려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라틴 사람들는 종종 하늘을 바로 그러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하늘과 공중의 정리정돈을 구분하지 않고 일반적으로 ‘라키아’라 부릅니다. 하지만 그 단어가 때로는 둘을 다같이 의미하기도 하고, 때로는 하나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45) 또한 칼빈은 여기서 그 히브리어 단어를 왜 헬라인들이 궁창을 의미하는 ‘스테레오마’(stere,wma)로 다르게 이해하고 싶어했는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이 헬라어를 모방하여 라틴인들 역시 궁창을 의미하는 ‘피르마멘툼’(firmamentum)이라는 단어를 차용했음을 지적했다.46)
칼빈처럼 카피토도 역시 히브리어 단어 ‘라키아’가 히브리인들에게는 확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칼빈과는 달리 카피토는 그 히브리어 단어를 헬라인들과 라틴인들이 각각 ‘스테레오마’와 ‘피르마멘툼’으로 이해한 점을 수용했다.47) 카피토는 설명하기를 ‘피르마멘툼’은 히브리인들에게 ‘세 가지 의미’(sententiae tres)가 있다는 것이다.
첫째로는 태초에 창조된 ‘하늘들의 하늘들과는 다른 것’(aliud esse à coelis coelorum), 즉 “가시적이고 우리 눈앞에 펼쳐진 여러 공간들 속에 나누어져 있는 것이다.”(visibile, & in spheras uarias distributumoculis)48) 오늘날 그것은 우주 공간이다. 두 번째 의미는 “비구름이 나타날 때 우리가 볼 수있는, 적어도 윗 물들이 존재하는 대기권”(aerio firmamento, in quo nubibus pluuiis apparentibus, aquae nobis conspicuae supernae quidem sunt)과 연관된 것이다.49)
이러한 대기권(aeriumfirmamentum)을 아마도 공중 하늘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 의미는 “태초에 만들어진 하늘로써 한 때는 유동적이고 가변적이었는데, 바로 그러한 것이 함께 연결되고 두 번째 날에 저절로 저 끊임 없고 정복할 수 없는 견고성에로 결집되었다.”(olim coelum in principio conditum fluxum & inconstans fuerit, quod idem sit hoc die secundo coagmentatum, condensatumque in illud suum perpetuum atque inuictum robur)50 이 궁창은 ‘하늘’(coelum)을 의미하며 태초에 창조된 것으로 두 번째 날에 완전히 다른 성질로 변화되었다.51)
천상의 물과 지상의 물
칼빈과는 달리 카피토는 태초의 하늘이 ‘세 개의 이름’(tres nomina)으로 불렸는데, 즉 ‘하늘과 땅’(coelum & terra), ‘심연’(abyssus), ‘물들’(aquae)이 그것이다.52 둘째 날 심연은 ‘천상적인 물들’(coelestes aquae)과 ‘지상적인 물들’(terrestres)53 물들이 되었는데, 그것은 공간이 삽입되었기 때문이었다.54)
천상의 물들은 어둠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으로써 삼중적이다.55 “참으로 천상의 물들이 처음에는 성령과 마음의 축복으로 변합니다. 그 다음에는 마음을 재정화하는 복음의 직분들로 [변합니다]. 마지막으로는 말씀과 성령을 통해 씻어진 사람으로 [변합니다].”56)
카피토는 물들을 ‘성령의 은사들’(dona spiritus sancti)과 동일시하는데, 이 은사들을 ‘영적인 물들’(aquae spirituals)이라고 정의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영적인 물들을 제공하신다.57
“물들은 교리들이며 규칙적으로 선포되는 복음의 말씀인데, 이 [말씀] 속에 성령께서 계십니다. 참으로 복음은 모든 신자들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인간의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58)
‘기독교인들’(hominessChristiani)로서 경건한 자들은 ‘샘이요 천상의 물’(fons & coelestis aqua)이다.59) “그러므로 천상의 물들은 적그리스도가 일정 기간 방해하는 그리스도의 교회들입니다. 적그리스도는 많은 물들 위에 앉아 있는 큰 음녀입니다.”(계 17[:15])60)
여기서 분명한 것은 카피토가 ‘물’이라는 단어를 문자적으로 해석한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해석했다는 사실이다. 이유는 그가 물을 은유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천상의 물에 대한 칼빈의 생각은 카피토의 그것과 다르다. 칼빈은 ‘천상의 물’(aquae supercoelestes)을 ‘구름들’(nubes)과 ‘비’(pluviae)로 간주했다.61)
카피토는 창세기 1장 10절에 나타나는 “모인 물”을 바다들로 설명하는데 이것 역시 칼빈의설명과 다르다. 카피토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물들의 모임은 대양의 바다, 즉 바닷물들을 담고 있는 해변들 사이의 가장 거대한 저 곳입니다.”62) 그러나 ‘바다’는 ‘바닷물이 아닌데, 이유는 [그것이] 물들의 모임이기 때문”이다.63) 물들의 모임으로서의 바다는 “십자가의 짠 눈물을 흘리신 그리스도의 교회인데, 이 교회를 통해 선택된 자들은 훈련되는 것입니다.”64) 바다에 대한 카피토의 이러한 석의는 칼빈의 저술 가운데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칼빈에게 있어서 바다는 일반적인 의미의 바다이다. 카피토는 물들의 모임을 ‘물들의 분’(aquarum segregation)로 묘사하는데, 이 분리는 ‘물들의 철수요 혼합된 진흙탕으로부터 물들의 재정화’(secessio aquarum, & ab admixto coeno earum repurgatio)를 의미한다.65) 제네바 개혁가에 따르면,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물들의 떠남과 모임은 인간에게 거처, 즉 마른 땅을 마련하기 위한 초자연적인 과정이다. 칼빈의 해석에서는 ‘혼합된 진흙탕으로부터 물들의 재정화’와 같은 카피토의 개념이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인 인간
칼빈과 카피토 둘 다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faciamus hominem)라는 말씀에서 의논하시는 삼위 하나님의 공역을 보았다. 그들에게 이러한 의논은 인간 창조가 하나님의 명령으로만 창조된 다른 피조물들에 비해 절대적으로 탁월하고 독립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삼위 하나님의 의논과 관련하여 하나님께는 어떤 외부적인 의논 상대도 불필요하며 그분 자신 속에 계신 성자와 성령, 즉 영원한 지혜이신 성자와 영원한 능력이신 성령과 더불어 의논하셨다고 제네바 개혁가는 말했다.66) 인간을 어떻게 창조하실지 성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원한 지혜이신 성자와만 의논하셨을 뿐만 자신의 영원한 능력이신 성령과도 의논하셨다는 것이다.
카피도 역시 이와 매우 유사하게 해석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형상으로, 즉 좀더 완전하게 추구되어야 하는 그리스도에 따라, 그리고 진실로 모방되어야 하는 그의 능력으로, 나 아버지는 나의 이들을 통해 성령 안에서 인간을 지으리라.”67)
칼빈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과 ‘모양’(similitudo)이 서로 다른 것이라는 생각을 부정했다.68) 또한 형상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단어 ‘첼렘’을 영혼의 본질에 적용하고 모양을 의미하는 ‘데무트’를 영혼의 특성들에 적용하는 사람들의 생각도 거부했다.69 반면에 카피토는 두 단어를 구분했다. 즉 형상은 본질에 대한 내적이고 온전한 표현이라고 생각했고 모양은 하나님의 속성들과 유사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형상은 본질의 내적이고 완전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들에서 예수 그리스도이신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과 다른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까? 참으로 그분에 관해 기록되기를 그분은 하나님의 불가시적인 형상이요, 영광의 광채요, 하나님의 본질의 형상이요, 그분 자신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운행하시는 유일한 분이십니다.”70)
“하지만 모양은 본질에 대한 표현이 아니라 유사성과 같이 하나님의 속성들에 대한 [표현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지혜와 진리와 선하심이 결코 하나님 속에 있는 하나님의 실재와 다른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엄밀하게 그것들을 그분의 특성과 일치하는 하나님의 속성들로 간주합니다. 그리고 마치 비본질적인 것들과 일치하는 [속성들]과 같습니다.71)
“형상은 영혼의 본질을 완성하는 형식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마치 판단력과 감성이 참된 믿음으로부터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으로부터 피어날 때 영혼의 부착물들이 다시 태어나는 것과 같습니다.72)
카피토의 생각에 따르면 하나님의 형상을 재창조하는 것은 ‘믿음의 빛’(lumen fidei)이요, ‘하나님의 모양을 따라, 즉 그리스도의 능력과 부합되게’(secundum similitudinem dei, id est, iuxta Christi uirtutes) 우리를 재창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 성령 안에 있는 평화와 기쁨’(iustitiae dei, pax & gaudium in spiritu sancto)이다.73 여기서 카피토는 하나님의 모양을 그리스도의 능력보다 더 나은 것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담 속에 있는 하나님의 모양은 “원시 거룩함과 의로움 속에, 다시 말하면 조명된 영혼의 부착물 속에 있었는데, 이것들로 인해 아담은 하나님의 입양된 아들들을 향한 저 말씀에 따라 하나님을 닮고 있었습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음 받은 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선하심을 실제로 철저하게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일반적인 성질의 속성이 아니라, 새로운 피조물의 능력과 효력입니다. 왜냐하면 아담에게 있는 하나님의 모양은 의,즉 몸과 영혼의 힘의 가장 큰 순종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복종시키는 의지와는 다른 것이었습니다.”74)
“그러므로 첫 사람의 삶은,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에 따른 저 사람의 정체는 그를 향한 하나님의 선의를 아는 지식과 의지와, 그리고 하나님의 빛에 의해 선물로 주어진 이성에 복종하는 감정들의 감성과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75)
창세기 1장의 인간 창조와 관련하여 제네바 개혁가는 카피토가 즐겨 사용한 ‘in maginem’이라는 용어보다는 ‘in magine’라는 용어 사용을 선호했다. 비록 칼빈이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유일한 형상’(unica patris imago)이심을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in magine’를 ‘in Christo’로 이해하는 사람들의 생각에 대해서는 반대했다.76)
26절을 해설하면서 칼빈은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 속에 있던 하나님의 형상이 ‘제거되었’(deleta)으나 복음으로 말미암아 다시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형된다’(transfigurari)고 주장했다. 그리고 바울의 가르침을 따라 ‘영적 중생’(regeneration spiritualis)을 ‘형상의 회복’(imaginis instrauratio)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그 형상이 ‘의와 거룩함’(iustitia et sanctitas)에 있다는 바울 서신의 표현을 문자적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제유법(synecdoche)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칼빈은 그것이 특별하긴 하지만 결코 전부가 아니라고 말했다. 칼빈은 주장하기를 “신의 형상의 주된 좌소는 정신과 마음 속이었는데, 그 [형상은] 그곳에서 탁월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종의 불꽃들이 튀지 않은 부분은 하나도 없었습니다.”77)
카피토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in imaginem dei)라는 개념은 확실히 ‘그리스도를 따라’(in Christum)와 같은 의미였고 ‘하나님의 모양대로’(secundum similitudinem dei)라는 개념은 ‘그리스도를 뒤따라’(secundum Christum)와 같은 의미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형성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형상을 따라 자신의 모양대로 우리를 태어나게 하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78)
카피토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사탄의 형상과 모양’(imago Satanae et illius similitude)과 대조시켰는데, 아담의 후손인 우리 모두는 이 사탄의 형상과 모양에 따라 타락하게 되었고 태어나게 되었다는 것이다.79)
이러한 생각은 칼빈의 저술에서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카피토와 칼빈 모두 아담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되었다는 견해를 지지하지 않았으며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 둘 다를 그분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고 주장했다.80)
두 종교개혁가 모두 하나님의 형상은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인간이 만물의 목적이라는데 동의했다.81) 칼빈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개념을 영혼의 불멸성을 증명하는데 사용했다.82)
카피토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하는 곳에서 불멸성을 논했다.83) 그러나 카피토가 그런 개념으로 영적 불멸성을 증명하려고 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결론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에 관한 칼빈가 카피토의 해석은 확실히 다양한 본문비평 방법들을 사용하는 오늘날 성경 주석가들 보다는 훨씬 문자적이다. 창세기 1장의 창조에 관한 한카피토는 칼빈보다는 본문을 좀더 문자적으로 주석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문자주의는 본문을 영적으로 해석하는 원인과 기초가 되기도 했는데, 그것은 그가 성경의 각 구절과 단어마다 영적 의미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카피토의 방법은 중세의 석의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특히 교회를 위한 영적 해석(anagogical interpretation)과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는 달리 칼빈은 문자주의적 해석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가 추구한 것은 문자주의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종종 성경 본문을 상징적으로 주석했기 때문이다.84) 자신의 성경 해석학을 위해 칼빈은 당대의 천문학자들이 내놓은 결과물들을 어느 정도 긍정적으로 고려했던 반면에 카피토는 그것을 부정적으로 여겼다.
두 종교개혁가 모두 창조를 삼위 하나님의 동역으로 이해했다. 칼빈에게 있어서 창조는 창조의 첫 원인인 하나님의 기적적인 능력에 절대적으로 의존는데, 왜냐하면, 예컨대, 땅과 물
과 불과 공기 등과 같은 두 번째 원인들은 첫 번째 원인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그
는 생각했기 때문이다.85) 특히 칼빈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창조주이신 성부와 매우 밀접하게 연관시켰다. 이와 같이 그에게 있어서 창조는 성부중심적(Patro-centric)이다. 반면에 스트라스부르크 개혁가는 창조의 모든 것을 말씀이신 성자께 돌렸다. 이런 점에서 창조에 대한 카피토의 관점은 성부중심적이기 보다는 오히려 그리스도중심적(Christo-centric), 즉 성자중심적(Filio-centric)이다.
뿐만 아니라 카피토의 창조론은 극단적으로 교회론적인데, 그것은 그가 창조와 관한 모든 성경 구절과 단어들을 교회와 연결시켰기 때문이다.
창세기 1장에 대한 카피토의 주석은 교리들에 대한 장황하고 반복적인 설명으로 인해 길고복잡하다. 반면에 칼빈의 주석은 훨씬 간단하고 단순하다. 이러한 방법은 그가 자신의 첫 번째 로마서 주석(1540) 서문에서 언급한 그 자신의 성경 원리, 즉 ‘가장 건강한 성경 해설 방법’(optimum enarrandae Scripturae genus)으로 제시한 ‘명료한 간결성’(perspicua brevitas)을86) 유지하려고 노력한 이유이며 결과이기도 하다.
제네바 종교개혁가는 성경주석과 기독교 교리를 어느 정도 분리하기를 원했다. 그러므로 칼빈은 자신의 주석에서 교리들을 상세하게 기술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창세기 1장의 모든 구절과 단어를 교리들, 특히 교회론과 연결시키려고 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창세기 1장의 주석에서 교회론적인 해석들을 반복적으로 만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칼빈의 창조론에서 분명한 것은 그가 창조를 결코 하나님의 교회 사역을 위한 전 단계나 준비로 간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반면에 카피토는 창조를 교회와 너무 밀접하게 연관시킴으로써 마치 그가 의도적으로 창조를 교회를 위한 준비단계로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각 주
1) David A. Young, John Calvin and The Natural World (Lanham: University Press of America, 2007).
2) Wolfgang Capito, HEXAMERON DEI OPVS explicatum à Vuolphgango Fa. Capitone Theologe, Argentorati. Vuendelinum Rihelium, 1539).
3) Hexameron, praefatio a4 recto: “Ego ut in hanc rem aliquid adferrem, incepi à Genesi principium facere, & magnum dei sex dierum opus meis commentariis explicare,…”
4) James M. Kittelson, Wolfgang Capito from Humanist to Reformer (Leiden: E.J. Brill, 1975), 226: “…, but in his three commentaries, on Habakkuk (1526), on Hosea (1528), and on the first six chapters of Genesis (1539), …”. 참고. W. de Greef, ‘De ware uitleg.’ Hervormers en hun verklaring van de Bijbel (Leiden. J. J. Groen en Zoon, 1995), 141: “In 1539 publiceerde Capito zijn commentaar op de eerste zes hoofdstukken van Genesis.”
5) CO 23, 15: “Quare sensus est, mundum ex nihilo conditum esse.”
6) Hexameron, 40 verso -41recto: “Item coelum et terra, hoc est, res omnes quae existunt, ex eo quod simplicite r nihil erat, & quod omnino non erat, facta sunt. Nam in principio creauit deus coelum & terram, hoc est, In principio [41recto]omnia facta sunt, Non igitur erant ante principium.”
7) 칼빈은 ‘창조하다’를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 ‘ ברא ’ (바라)와 ‘형성하다’를 의미하는 단어 ‘ יצר ’ (야차르)를 구분한다.
8) Hexameron, 24recto-71verso.
9) Hexameron, 25recto-verso.
10) Hexameron, 26recto-verso.
11) CO 23, 14.
12) CO 23, 15: “…: sed quia parum solida mihi videtur tantae rei probatio, ego in voce non insistam. Quin potius monendi sunt lectores ut sibi a violentis eiusmodi glossis caveant. Putant illi se testimonium habere a dversus Arrianos ad probandam Filii et Spiritus divinitatem, interea se involvunt in errorem Sabellii: quia po stea subiicit Moses Elohim loquutum esse, et spiritum Elohim incubuisse aquis. Si tres personas notari place t, nulla erit earum distionctio. Sequetur enim et Filium a se ipso genitum, et Spiritum esse non Patris, sed sui ipsius. Mihi satis est, quod pluralis numerus Dei virtutes sonet quas in creando mundo exseruit.”
13) Hexameron, 65recto maginalia: “Vocabolum Elohim trinitatem insinuat, unitatem verbum creauit.”
14) CO 23, 25.
15) CO 23, 16: “Atqui Iohannes (Ioan 1, 3) testatur nihil absque ipso factum esse eorum quae facta sunt. Et certum est eadem verbi efficacia inchoatum fuisse mundum qua perfectus est:…”
16) CO 23, 16.
17) Hexameron, 44verso: “Alterum quod omnia per ipsum facta sint, & sine ipso factum est nihil, cum coeli a c terrae appellatione ueniant omnia, quae iam liquet facta esse per Verbum.” 18) Hexameron, 130recto.
19) CO 55, 10-11: “Per ipsum[=filium Dei] enim creatus est mundus, quatenus aeterna est Dei sapientia: qua e omnium eius operum ab initio directrix fuit. […] Neque hoc eius derogat potestati, quod per ipsum dicitur creatus mundus: quasi non ipse creaverit. Haec usitata est loquendi ratio, patrem vocari creatorem: quod autem quibusdam locis additur, per sapientiam, vel sermonem, vel filium, perinde valet ac si ipsa sapientia creatrix nominaretur.” 이런 설명을 근거로, 피터 와이어트(Peter Wyatt)는 지적하기를 칼빈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께서는 수단적 창조주이시라고 말한다. 참고. 그의 책, Jesus Christ and Creation: In The Theology of Jo hn Calvin (Pennsylvania: Pickwick Publications, 1996), 56sqq.
20) CO 47, 4. 칼빈에 따르면 이러한 생각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교리를 근거로 삼는다. 칼빈은 그를 ‘지나치게 플라톤적인 사람’으로 간주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만드시기 전에 전체 구조의 형식을 마음에 품고 계셨고, 그래서 존재하지 않은 것들의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 있었는데, 그것은 세상의 창조가 그분 안에서 정해진 것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참고. CO 47, 4: “Augustinus more suo nimium platonicus ad ideas rapitur: quod Deus antequam mundum conderet, formam totius opificii in mente sua conceptam habuerit: atque ita vita eorum quae nondum exstabant, in Christo fuerit, quia in eo ordinata erat mundi creatio. Sed quam istud sit a mente evangelistae longe remotum, mox videbitur.”
21) CO 47, 5.
22) CO 47, 5: “…: simplex enim sensus est, sermonem Dei non modo fontem vitae fuisse creaturis omnibus, ut esse inciperent quae nondum erant: sed vivifica eius virtute fieri ut in statu suo maneant. Nisi enim con tinua eius inspiratio mundum vegetet, necesse erit quaecunque vigent, protinus decidere, aut in nihilum redigi… Deus ergo est qui nos vivificat: sed per aeternum sermonem.”
23) Hexameron, 131verso -132recto.
24) Hexameron, 132verso.
25) 참고. Hexameron, 133recto: “Quod factum est in ipso uita erat. Si id quod iam factum est, iam olim in u erbo uita erat, nam hoc ualet oratio Eualgelistae, sequitur in uerbo id uitam esse, quod in se esse nondum coeperit. Nam res nunc existens antequam fieret, in uerbo uita erat. Sic habes, quod omnipotens Dei uerbu m eodem ambitu & praeterita & futura omnia cum praesentibus complectatur.” 26) Hexameron, 138verso: “Patris creatoris est dicere, Fiat lux: Filii uel uerbi, quo fiat & condatur ea, dici: Spiritus autem sancti ornatoris & ordinatoris eiusdem, est uidere quod sit bonum, hoc est, uim atque efficaciam dare rebus, ut ad usum et ornatum uniuersi, pro suo quaeque modulo sit accomodata.”
27) CO 23, 23-24: “Prius enim ex nihilo factum esse mundum contendimus, quia creatus esset: nunc autem quae ex alia materia formantur, Moses dicit creari. Qui dicunt vere et proprie creatos esse pisces, quia aquae nullo modo ad procreandos ipsos idoneae aptaeque fuerint, nihil quam effugium captant: nam interea staret illud, materiam priorem fuisse, quod verbi proprietas non admittit. Ego vero ad opus diei quinti non restrin go creationem: sed potius ex illa informi et confusa massa pendere dico, quae[24] fuit veluti scaturigo totius mundi. Creavit ergo Deus balaenas et reliquos pisces: non quod initium creationis numerandum sit ab eo momento quo formam accipiunt: sed quia in universo corpore quod ex nihilo factum est continentur. Ita quo ad species, forma tantum accessit: sed creatio nihilo minus vere dicitur totius et partium.”
28) Hexameron, 260recto-verso: “Si reptilia & aues & pisces ex mortuis aquis facta sunt ut reuera sunt procliue est intelligere, quod ea omnia per uerbum Domini & creata, & ex nihilo facta sint, quia nihil harum rerum aquis per se inesse poterat.[verso] Sed ex aquis ea propter solum creatoris iubentis uerbum extitere. Atque haec est summa operis quintae diei.”
29) Hexameron, 126recto: “Proinde lux duplex est, altera creata, ut, Et dixit deus, Fiat lux, & facta est lux: alt erna increata, ut, Et uita erat lux hominum, & lux in tenebris lucet.”
30) Hexameron, 247recto: “…, quod lux quae primo die inchoata sit quarto demum creatis luminaribus & stelli s super terram illuminaribus ad summum deducta. Quod forte in causa est, cur lucis conditioni clausula. Et fuit sic, non sit primo die adiuncta. Nondum enim tum lux sic erat, ut nunc est, donec in hunc modum atq ue in hoc fastigium quarto die attolleretur.”
31) CO 23, 17: “Ergo Dominus ipso creationis ordine, lucem se in inanu habere testatur: quam nobis largiri possit absque sole et luna.”
32) CO 23, 20: “Nihil enim aliud refert Moses quam Deum certa organa destinasse quae lucem iam prius cr eatam, mutuis vicibus per mundum diffunderent. Hoc tantum est discrimen, quod prius erat lux sparsa, nunc a corpribus lucidis procedit, quae in hunc usum obsequuntur Deo.”
33) Hexameron, 144recto: “Nam diem nox in natura praecedit, quod in scriptura perpetuo obseruatum est. Nos dicimus primam noctem initium coepisse ab eo, que in principio Deus crearit tenebras, quae erant super faci em abyssi, …”
34) Hexameron, 145recto: “Tenebrae igitur, quoniam Deus eas fecit, res bonae sunt. Nam omnia Dei opera sunt bona, …”
35) Hexameron, 144verso: “…, quoniam scriptura lucem diem, et tenebras noctem nominat, …”
36) Hexameron, 146recto: “Nam & si nox diei pars non est, sed potius oppositum eius,… tamen ex hoc loco sit indubitatum, superiorem noctem ad sequentem diem esse referendam, ita ut quisque dies suam noctem habeat, atque ea est quae praecessit, non quae hunc diem sequitur.”
37) CO 23, 15: “…, tenebras fuisse super faciem abyssi, in parte illius confusae inanitatis pono:…”
38) CO 23, 16.
39) CO 23, 16: “Ideo dicit, massam illam quamvis indisposita foret, arcana spiritus efficacia stabilem ad tem pus fuisse.”
40) CO 23, 16: “Lucem tanta decoris praestantia, qua ornandus erat mundus, priorem esse oportuit: et hoc quoque erat distinctionis exordium.”
41) CO 23, 17: “Scimus tenebras fuisse tempore superiores: quum lucem Deus subduxit, hoc erat diem claudere.”
42) CO 23, 17: “Lucis enim conspectum abstulit Deus, ut nox diem alterum inchoaret.”
43) 참고. Inst. I.14.1. (=OS III, 152): “Illic primo notatam est tempus, ut continua annorum serie fideles adprimam humani generis et rerum omnium originem pervenirent;…”
44) Hexameron, 144recto-verso: “A principio tempus fuit, neque ante creatam lucem dies erat, pro nocte igitur illud habebatur, [verso] nisi dicere uolueris temporarias res, ut erant coelum & terra, in principio fuisse, sine tempore, quod hactenus nemo dixit.”
45) CO 23, 18: “Opus secundi diei est, inane hoc spatium per terrae circumferentiam, ne coelum terrae misceatur. …Porro vox רקיע non modo totam aeris regionem comprehendit, sed quidquid supra nos patet: qualiter coelum Latinis interdum capitur. Ita dispositio coeli et aeris promiscue vocatur רקיע : sed aliquando utrumque simul, aliquando alteram partem significat:…”
46) CO 23, 18.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라틴어 ‘피르마멘툼’이 어떻게 정의되고 이해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다음의 신학사전 참고. J. Altenstaig & J. Tytz, Lexicon Theologicum (Colonia: Peter Henningius, 1619. =Darmstadt: Georg Olms, 19742), 341: “FIRMAMENTVM est coelum stellatum & suprema spherarum, secundum Arist[otelem]… Firmamentum est coelum, in quo sunt stellae fixae, quod in primaria rerum conditione positum est in medio aquarum.”
47) Hexameron, 152recto: “Hebraeis רקיע dicitur mutato nomine, ab extendendo. Semper enim latius patet, quam sensus hominum capiunt. Graeci autem et latini à constantia & perpetuitate στερέωμα & firmamentum, & si Rab ille uetus Rakia pro firmo & robusto exponit.”
48) Hexameron, 147verso.
49) Hexameron, 150recto.
50) Hexameron, 151recto.
51) Hexameron, 151verso: “…, in principio idem coelum esse creatum, quod secundo die in 52 Hexameron, 154recto.
53 Hexameron, 160verso.
54 Hexameron, 161verso-162recto: “Quamobrem quaniam duplices aquae iam[162recto] sunt, propter interpositum firmamentum, supernae & infernae, quarum utrisque sua peculiaris natura est, metaphorarum quae ab aquis ducuntur, duplex erit ratio.
55 Hexameron, 160verso-161recto.
56 Hexameron, 162recto: “Coelestes enim aquae primum transferuntur ad spiritum sanctum & mentium benedict ionem. Deinde ad euangelii ministerium, quo mentes repurgantur. Postremo ad hominem lotum per uerbum & spiritum.”
57 Hexameron, 162verso-163recto.
58 Hexameron, 164verso: “Aquae sunt doctrinae & uerbum Euangelii praedicatum ordinatim in quo est spiritus sanctus. Euangelium enim uirtus dei est ad salutem omni credenti. Nam uerbum dei est, non uerbum hominis.”
59 Hexameron, 194verso-195recto.
60 Hexameron, 196recto: “Ecclesiae igitur Christi sunt coelestes aquae, quas turbat interim Antichristus, meretri x illa magna. Apoc. 17. Quae sedet super aquas multas.”
61 CO 23, 18-19.
62 Hexameron, 219recto: “…congregatio aquarum est mare Oceani, id est, locus inter littora ille uastissimus, aquas marinas continens.”
63 Hexameron, 225recto: “…non aqua marina,[…] nam aquarum congregatio.”
aliam prorsus naturam conuersum, eoque ceu de nouo creatum sit.”
64) Hexameron, 225verso: “…est Ecclesia Christi, cui inest salsugo crucis, qua electi exercentur.”
65) Hexameron, 212recto.
66) 참고. CO 23, 25: “Neminem extraneum advocat Deus: hinc colligimus, intus eum aliquid distinctum invenire: ut certe aeterna eius sapientia et virtus in ipso resident.”
67) Hexameron, 281verso: “In imaginem, id est, ad Christum plenius consequendum, & uirtutes eius vere exprimendas, ego pater per filium in spiritu sancto hominem faciam.”
68) CO 23, 26.
69) Inst. I.15.3. (=OS III, 178): “Unde ridiculos esse apparet qui subtilius philosophantur in nominibus illis, sive Zelem, hoc est imaginem, statuant in substantia animae, et Demuth, hoc est similitudinem, in qualitatibus,
70) Hexameron, 276verso -277recto: “…imaginem & interiorem, & integram substantiae expressionem esse. Quam vero aliam talem inuenias in literis diuinis, nisi uerbum patris aeternum, qui est Iesus Christus, Nam de eoscribitur, quod sit imago Dei inuisibilis, splendorque gloriae & imago substantiae eius, portans om[277recto]ni
a uerbo uirtutis suae.”
71) Hexameron, 277recto: “Similitudo autem est, non substantiae expressio, sed quasi assimulatio, qualitatum in Deo. Nam etsi sapienta & ueritas & bonitas Dei, […,] nihil aliud in Deo sunt, quam essentia Dei, tameneas proprietates Dei ad modum qualitatum, quasique accidentium rerum consydramus,…”
72) Hexameron, 279recto: “…, imago est forma quae substantiam animae perficit. deinde tanquam inhaerentia animae renatae sunt iudicium & affectus ex uera fide, ueraque dei cognitione profluentes. In quibus est sita similitudinis ratio.”
73) Hexameron, 279recto.
74 Hexameron, 282recto- verso: “…similitudo Dei, quae erat sita in originali sanctitate atque iustitia, tanquam in illuminatae mentis inhaerentibus, quibus Deo assimilabatur, iuxta illud oraculum ad filios Dei adoptatos. Esto te sancti, quia & ego sanctus sum. Quare secundum similitudinem dei factum esse, est sapientiam & boni tatem Dei uel remote referre, quae non est uulgatae hominum naturae proprietas, sed uirtus & efficacia nouae creaturae. Nam in Adamo quid erat aliud similitudo Dei, quam iustitia, hoc est, obsequendi Deo uoluntas, [verso] cum summa uirium corporis atque animae obedientia.” 칼빈 역시 인간의 상태가 아담의 인격 안에서 완전하지 않았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수용했다. 참고. CO 23, 36.
75 Hexameron, 281recto-verso: “Vita igitur primi hominis, et illius, in imaginem & secun[verso]dum similitudinem Dei constitutio nihil aliud fuerit, quam diuinae beneuolentiae erga se cognitio & uoluntas, affectusque sensu um rationi luce dei praeditae parentes:…”
76 CO 23, 27.
77 CO 23, 26: “Ita primaria sedes divinae imaginis in mente et corde fuit, ubi emineret: nulla tamen fuit pars in qua non emicarent aliquae scintillae.”
78 Hexameron, 285recto: “Genuisset enim nos in imaginem & secundum similitudinem suam, qui erat in imaginem & secundum similitudinem Dei fabricatus.”
79) 참고. Hexameron, 279 verso-281recto.
80) 참고. CO 23, 27; Hexameron, 287 verso-288recto.
81) 참고. CO 23, 27: “Atque hinc colligimus quorsum creata sint omnia: ne quid scilicet desit hominibus adomnia vitae commoda et usus.”; Hexameron, 297verso: “…, hominem ess finem rerum, …” 하나님의 섭리에 있어서 두 번째 원인에 대해서는 다음 참고. Herman J. Serderhuis, God in het midden. Calvijns theologie van de Psalmen (Kampen: Uitgeverij Kok, 2000), 105sqq.
82) CO 23, 36: “…, quod huic animae Deus imaginem suam insculpsit, cui annexa est immortalitas.” 참고. Inst. I.15.2. (=OS III, 174-176).
83) 참고. Hexameron, 285recto: “Hoc foelici cursu in horto Eden, sine molestia & sine metu mortis, ad immortalitatem soli Deo congruentem eluctati fuissemus, …”
84) 창세기 1-3장에 대한 칼빈의 상징적 해석에 대해서는 다음 참고. K. E. Greene-McCreight. Ad Litteram: How Augustine, Calvin, and Barth Read the “Plain Sense” of Genesis 1-3 (New York: Peter Lang, 199
9), 148-149.
85) 참고. CO 23, 20: “Fatemur quidem verbo per se satis valere primam causam, medias vero et iferiores habere quantum ab ipsa mutuantur: sed re ipsa fingimus Deum inopem vel mutilum, nisi ab his adiuvetur.”
86) T. H. L. Parker, ed., Iohannis Calvini Commentarius In Epistolam Pauli Ad Romanos (Leiden: E. J. Brill,1981), 1. (=CO 10b, 402sq.)
칼빈의 창세기 주석과 카피토의 하나님의 6일 사역에 나타난 하나님의 창조
논평 원종천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이 논문은 칼빈(1509-1564)과 카피토(Wolfgang Capito, 1478-1541)의 창조에 대한 성경해석을 비교했다. 저자는 두 인물의 창조 관련 주석의 비교 검토를 통해 성경해석 방법과 주석내용의 차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본 논문은 원자료를 중심으로한 연구를 통하여 학적 수준을 갖추고 있다. 아울러 종교개혁 대표 주자이며 당대 성경해석의 표본인 칼빈과 아울러 희소성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카피토의 연구를 통하여 16세기 성경해석의 현 주소를 잘 보여준다. 칼빈이라는 당대 최고의 성경주석가와 그 보다는 좀 덜 알려져 있으나 당시 종교개혁에 중요한 역할을 한 카피토라는 인물을 비교하여, 한편으로는 당시 성경해석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또 한편으로는 칼빈 해석의 우수성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판단된다.
논문은 서론에서 칼빈과 카피토의 창조에 관한 성경 주석을 비교하겠다고 명확하게 밝힌다. 그러나 필자에게는 이 두 사람의 창조에 대한 성경해석의 비교를 왜 하는지 그 근본적인 의의를 서론에서 언급해 주었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있다. 이 비교가 어떤 역사적 또는 신학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저자는 이 논문의 가치를 어디에 두고 있는지?
이것이 종교개혁 시대에 창조 해석의 표본을 이루는 것인지? 당시 이 두 해석 사이에 논란이 있었는지? 무슨 의미로 이 두 사람을 택했는지 밝혀주면 도움이 될 것이다.
칼빈은 잘 알려져 있기에 소개가 필요 없겠으나 카피토는 소개가 필요하다. 카피토는 당대 지성인으로 의학과 법학을 공부했고 신학으로 박사학위를 가진 인물로 1세 종교개혁 대표자들인 루터나 츠빙글리와 동시대 사람이며 칼빈과는 시대적으로 좀 차이가 있었던 인물이다. 그가 죽을 때 칼빈은 제네바에서의 짧은 1차 사역 후 제 2차 사역을 막 시작할무렵이었다.
카피토는 주종교개혁자 츠빙글리, 루터, 부처 등과 친분이 있고 부처와 함께 1530년 Confessio Tetrapolitana를 작성하며 교회 연합을 위해 노력한 중요한 종교개혁 인물로 “종교개혁의 날개”(주 종교개혁자는 아니지만 주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종교개혁자들)라고 일컬어 질 수 있겠다.
칼빈과 카피토는 신학적으로 유사한 개신교 입장이었음에도, 본 논문은 성경 해석에 있어서 제네바와 스트라스부르그 사이에 상당한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실례를 통해 보여준다. 사실 카피토에 대한 연구는 그리 흔하지 않다. 본 논문은 카피토의 성경 해석을 드러내어 주변 종교개혁 인물의 성경해석의 실체를 보여주고 그것을 칼빈과 비교하여 개신교지도자들 사이에 성경해석에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었는지를 흥미롭게 보여준다.
필자는 본 논문을 읽으며 좀 더 설명을 해주었으면 하는 부분들이 있어 아쉬운 마음을 가진다. 카피토가 ‘태초에’(in principio)를 ‘태초를 통해’(per principum)이라는 말로 이해하여 만물이 태초를 통해 창조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참 이상해 보이며 칼빈이 이것을 천박하다고 지적한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이다.
칼빈과 카피토의 창세기 1장 해석의 수준 차이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또한 카피토는 창세기 1장의 엘로힘이란 복수명사에서 삼위 하나님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칼빈은 엘로힘 복수명사 사용이 삼위 하나님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는 부분은 특이하다. 왜 복수형이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것인지 칼빈 설명의 소개가 아쉽다.
현대 복음주의 주석에서는 오히려 카피토의 입장이 보편적인 것으로 아는데, 칼빈의 이러한 입장은 어떻게 평가를 해야하는지 궁금하다.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라는 부분의 해석에서, “창조된 것들의 보전” 또는 “그분의 능력의 말씀 혹은 의지로 만물을 유지하는 것”이라는 칼빈의 해석은 창조 내용을 섭리로 돌리는 것처럼 보인다. 창조에서 성자의 역할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칼빈은 어떻게 이 부분을 섭리 차원으로 이해했는지 궁금하다.
카피토가 말하는 창조에서 말씀의 역할은 어거스틴을 따르는 것으로, 창조 전 말씀안에 이미 만물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선재교리를 말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이 내용은 말씀이 창조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또 하나의 새로운 시각을 선보인다.
시편 44편의 “하나님의 모든 사역 그 자체는 말씀 속에 있다”는 부분에 대한 어거스틴의 해석을 근거로 창조 전 말씀 안에 만물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해석은 논리적 비약이 심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해석방법에 있어서 역사 문법적 해석을 추구하는 종교개혁의 해석방법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어떻게 이런 해석이 카피토에게 가능했는지 궁금하다.
성령의 역할을 ‘보신다’는 것으로 해석하고, 그 의미를 만물에게 능력과 효력을 제공하시고 배열하신다는 것으로 보는 것도 특이하고 이해가 잘 안된다. 칼빈이 이것에 동의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며 옳게 보인다. 카피토에게는 무리한 해석이 많이 보인다. 칼빈은 창조에서 성령의 역할을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는 것과 연결시켰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인지 좀 더 설명이 필요해 보인다. 칼빈의 해석은 카피토와 같은 무리하고 특이해 보이는 해석보다는 자연스럽고 평범한 이해가 돗보인다.
칼빈은 무에서 유가 아니라 다른 물질로부터 형성된 것도 창조로 보았다. 제 5일에 물이 생물을 번성케하는 것과 하늘의 궁창의 새와 바다 짐승과 물의 생물 그리고 날개 있는 새를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말한다. 그런데 카피토는 이 생물들의 창조가 무에서 만들어 진 것으로 보았다. 물들에 무가 속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씀으로 물들로부터 일어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부자연스러워 보이고 잘 납득이 되지 않는다.
첫째날의 빛과 넷째 날의 해와 달의 빛에 대해 키피토는 양쪽이 연결되었다고 이해했고, 칼빈은 양쪽을 별개로 생각했다. 둘째날 물 가운데 궁창이 있게 하시고 물과 물로 나뉘게 한 부분에서, 카피토는 물을 영적으로 해석하여 교리, 복음, 그리스도의 교회 등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칼빈은 이 물들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천상의 물’을 구름과 비로 이해했다. 물들이 모여 바다가 된 것도 카피토는 십자가의 짠 눈물을 흘리신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해석했다. 종교개혁 지도자 중 한 사람인 카피토에게서 이런 영적 해석이 있었다는 것은 칼빈 해석의 우수성을 보여줄 뿐 아니라, 당시 아직도 중세의 영적 성경해석법이 종교개혁자들에게 활용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이것은 칼빈의 해석을 더욱 돗보이게 한다.
칼빈은 이런 류의 해석을 전혀 하지 않았다. 칼빈에게 물들의 떠남과 모임은 인간의 거처를 마련하시기 위하여 땅을 만드시기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이해했다.
칼빈은 형상과 모양을 동일한 의미로 해석했고 카피토는 두 단어의 의미를 구별했다. 중요한 부분인데, 왜 칼빈이 그렇게 이해했는지를 보여주었으면 좋았겠다. 카피토는 형상과 모양을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진 것으로 해석했다. 형상은 본질의 내적 표현, 모양은 하나님의 속성과 유사한 것으로 이해했다. 이 부분도 칼빈은 개신교적인 현대적 해석을 하고 있고, 카피토는 중세 유형의 해석을 했다.
해석의 내용은 당시 로마 가톨릭 것과 다르지만, 형상과 모양을 서로 다른 의미로 보는 것만은 그것과 같았다. 반면에 형상을 바울이 말하는 ‘의와 거룩함’에 있다는 말을 제유법(synecdoche)으로 해석하여 그것이 특별하기는 하지만 전부는 아니라는 칼빈의 해석은 매우 현대적이고 탁월해 보인다.
본 논문은 창조 부분의 해석에 대해 칼빈과 카피토의 본문 해석과 주석의 내용을 원자료를 가지고 소개하며 충실하게 비교했다. 카피토와의 비교를 통해 칼빈의 해석이 얼마나 탁월한지를 보여준다.
중세의 잘못된 해석법인 영해를 배제하고 문자적이면서도 상징적인 해석을 적절하게 사용하며 당시 천문학자들이 내놓은 자연과학의 내용을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본문의 의미에 충실하며 칼빈 특유의 명료하고 간결한 문체 등이 카피토와 대조된다는 저자의 결론적 주장은 설득력이 충분하다.
저자는 지극히 객관적인 서술로 두 사람의 창조 해석 방법과 주석 내용을 소개하는 것으로 끝을 낸다. 저자는 이 논문에서 두 사람의 창조 관련 성경해석 내용을 소개하며 결국 칼빈의 우월성을 보여주는 것을 주된 취지로 가진 것으로 보인다. 카피토는 상대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다.
카피토는 어떤 배경과 어떤 이유로 이런 영적 해석과 지나치게 교회론적인 창조해석을 하게 되었는지가 궁금해진다. 그도 종교개혁의 일원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혹 이런 해석을 하고 있는 그의 배경을 좀 더 이해한다면 칼빈과의 대조에서도 또 다른 평가가 나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히 연구되지 않는 카피토라는 인물을 통해 종교개혁 주변 인물의 성격해석을 원문을 통해 보여주며, 상대적으로 칼빈의 성경해석의 탁월성을 다시 한번 엿보게 해준 본 논문의 공헌을 높게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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