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스크랩] 히 브 리 서 연구

하나님아들 2015. 2. 1. 23:21

히 브 리 서 연구 

 

 

 

 

 


 

                            A. 서  론

 


 

1. 수신인

 

   편지의 서두에는 그 편지의 수신인들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에 관한 아무런 정보도 나타나 있지 않다. “히브리인들에게”라는 전통적인 칭호는 본래 편지의 일부가 아니라 주후 2세기 경에 첨가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어떤 이들은 이 편지가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이루어진 기독교인들에게 보내어진 것이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또 다른 이들은 이 편지가 정통 유대교로부터 갈라져 나온, 그러나 예수께서 메시야라는 것을 확신하지 못한 일단의 유대인들에게 보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이들은 이 편지가 불신앙으로 빠져들 위험이 있는 이방인들에게 보내진 것이라고 말한다.

 


 

   이 모든 주장들은 문제를 안고 있다. 가장 그럴 듯한 주장은 본서가 유대교로 되돌아갈 위험이 있는 유대인 기독교인들에게 보내졌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자는 신약의 계시가 구약의 계시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상당한 부분을 할애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6장과 20장은 기독교 신앙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며(히 6:6), 언약의 피를 모독하는 것이라는 일련의 경고들을 포함한다(10:29). 저자는 주님의 선하심을 한 번 맛보았던 사람들이 그들의 이전 신앙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막기 위하여 본서를 집필하였다(6:4-5).

 


 

   수신인들이 어느 곳에 살았느냐 하는 것은 불확실하다. 본서는 “이달리야로부터 온” 사람들이 전하는 문안을 포함하고 있는데(13:24), 이 사람들은 아마도 저자와 함께 있는 자들로 이탈리아에 있는 그들의 모 교회에 문안하고 있는 것 같다. 어떤 이들은 바울이 (롬 16:5,14-15)에 언급한 가정교회들 중의 한 교회가 수신인들의 일원이었음을 시사한다(이 편지는 제일 처음 로마의 저작자들 즉 로마의 클레멘트 및 헤르마스에 의하여 인용되었다).

 


 

   이 메시지는 저자와 그의 독자들 사이의 친숙한 관계를 반영한다. 그는 그들 가운데서 살았었고, 그들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집필 당시 그들과 함께 있지는 않지만 곧 그들에게 돌아갈 것을 희망하였다(13:19,23).            

 

      

 

2. 저자

 

   저자의 신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요한 1서를 예외로 한다면 히브리서는 저자의 이름이 언급되는 서두 인사를 생략하고 있는 신약의 유일한 편지이다. 215년경 아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바울이 본서를 유대인들을 위하여 히브리어로 쓰고, 누가가 그것을 헬라어로 번역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250년경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겐은 “하나님만이 히브리서를 누가 기록하였는지 확실히 아신다”는 유명한 말을 하였다. 터툴리아누스는 이 편지가 바나바의 저작이라고 말한다. 4세기 말 서방 교회는 이 편지를 바울이 쓴 것이며, 정경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바울의 저작을 부인하는 이유들도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최근에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이 편지의 저자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으며, 루터는 이 편지를 아볼로가 썼다고 하였다. 우리는 비록 누가 이 서신을 기록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성령께서 그를 인도해 주셨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3. 기록 목적

 

   히브리서는 유대교로 다시 돌아갈 위험이 있는 유대인 기독교인들에게 보내진 것이다(3;12, 13:9-14). 그들은 이전에 참 신앙과 신실한 사랑을 나타내 보였다(6:10). 그들은 박해에 직면하였을 때,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이웃들을 돕기로 하였다(10:32, 34). 하지만 비록 그들이 위기 가운데서 용기를 보여 주었지만, 죄와 투쟁하는 데는 점점 나약하게 되었다(12:4,12). 아마도 동료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죽음의 연약함에 대하여 비난을 퍼부었던 것 같다. 그들의 신앙은 정체에 빠지고 또한 그들은 공중 예배를 통하여 성장하게 되는 경험을 무시하였다(5:11-14, 10:25). 그들은 자신들의 이전 신앙과 제도들, 확고한 구심점(예루살렘 성전), 엄숙한 의식들, 그리고 로마법 아래 허용된 종교(religion licita)로서 유대교가 누렸던 안정에 매료되었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유혹에 대처하기 위해서 저자는 “권면의 말”을 한다(13:22). 그는 그들에게 흔들리지 말고 “믿는 도리의 소망을 굳게 잡을 것”을 촉구한다(10:23). 그는 그들에게 “자기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신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라”고 격려한다(12:2). 주님은 그들에게 능력을 덧 입혀 그들의 영적인 곤경과 낙심을 극복하게 하신다(12:3).       

 

        

 

4. 기록 시기

 

   편지의 저작 시기를 추정하기 위하여 사용될 수 있는 자료는 제한되어 있다. 로마의 클레멘트는 96년에 이 서신에 대하여 언급을 했는데, 이로 보아 이 편지는 96년 이전에 이미 존재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 디모데는 아직 생존해 있었으며(13:23), 수신인들은 주님의 사도들에 의해 얼마 전에 신앙을 갖게된 사람들이었다(2:3). 히브리서 기자는 많은 지면을 낡은 제사장 직과 희생 제사 제도는 더 위대하고 완전한 것으로 대치되어야 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할애하였다. 또한 히브리서가 예루살렘과 성전의 멸망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보아 이 서신은 성전이 멸망한 70년 직전에 쓰여졌다고 볼 수 있다.    

 


 

5. 주제

 

   히브리서의 중심 주제는 진정한 대제사장을 통한 참된 하나님 예배이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인해서 유대교의 희생 제사는 쓸모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대치되었다. 지상에 있던 예전의 성소는 하늘에 있는 완전한 성소의 그림자일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의 백성들이 하늘 성소의 아버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다. 새로운 언약 공동체의 성원들은 참된 성경적 전승의 상속자들이다(8:6-13). 비록 표면적으로는 히브리서는 신학적 저작이라는 인상을 주지만, 그것은 근본적으로 인간들의 영혼에 관심을 둔 목회 서신이다. 이 편지를 받는 사람이 누구이든 그들은 그들 지도자의 믿음을 본받으라고 강조하고 있다(13:7).   

 


 

6. 특징

 


 

7. 히브리서의 가치

 


 


 


 


 


 


 


 


 


 


 


 

                                 B. 내용 연구

 


 

   히브리서는 훌륭한 헬라어로 기록되었다. 본서는 구약으로부터 100개 이상의 인용문과 구약의 언급들을 사용하였다. 본서는 시 1, 8, 10편과 렘 31장을 광범위하게 사용한다. 11-13장은 주로 구약과 이스라엘 역사를 기초로 한다. 저자는 자신의 주장을 지지하기 위하여 헬라 역 구약 성경을 자주 활용한다. 본서는 설교 형식으로 되어있다. 교회의 말씀들이 그 다음 경고와 권면의 말씀들이 나온다. 히브리서의 기초적인 교리적 관심은 그리스도의 우월성이다. 정중한 서문에 이어(1:1-4:13), 사역(4:14-)의 우월성에 대하여 말한다. 편지의 세 번째 단원은 권면과 경고들(10:19-13:19) 및 추신(13:20-25)을 포함한다.

 


 


 

1. 선지자 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1:1-3)

 


 

 1) 구약 시대의 계시-선지자

 

   옛적에( '팔라이')는 '구약 시대'를 의미한다. 이것은 2절의 '이 모든 날 마지막에'와 대조를 이룬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들 안에서' 말씀하셨다. 이것은 그들이 단순히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인격을 통해서 성령께서 역사 하셨다는 것을 말한다(Morris).  이러한 선지자들은 구약시대 전체의 하나님의 사람들을 가리킨다(Morris, Hewitt). '여러 부분'('폴뤼메로스)은 '여러 시기', 또는 '여러 번'을, 그리고 '여러 모양'(폴뤼트로포스)은 '다양한 방법으로'라는 말이다. '조상들'은 구약 시대의 성도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2절의 '우리'와 대조를 이룬다.

 


 


 

2) 신약 시대의 계시-그리스도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문자적으로 '이 날들의 마지막에'를 의미한다. 이것은 앞 절에서 언급된 '옛적에'와 대조되는 것으로 메시야가 오심으로 시작된 새로운 시대, 곧 그리스도의 초림에서부터 재림 때를 말한다. 이것은 신약 성경의  다른 곳에서 '마지막 때' 혹은 '말세'로 표현되고 있다(행 2:17; 약 5:3; 벧전 1:20; 벧후 3:3; 요일 2:18; 유 1:18).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는 말은 1절의 '선지자들로 말씀하셨다'는 말과 대조를 이루고있다. 이것은 구약 시대에 선지자 안에서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신약 시대에는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하셨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엔 휘오'에는 '엔 토이스 프로페타이스'와는 달리 관사를 사용하지 않고 있어서, '아들'이 선지자들보다 탁월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Morris, Hewitt, Vincent).

 


 

   하나님께서는 구약 시대에 그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시대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신을 계시해 주셨다. 그러나 역사의 마지막 시기에는 창조주요, 만유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서 직접 자신을 계시해 주셨다.

 


 


 

3) 그리스도의 우월하심

 


 

  가. 그리스도의 상속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상속자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만드시고 운행하시는 모든 세계를 아들에게 전임(專任)하셨다.

 


 

  나. 창조주의 권위를 가지신 그리스도

 

   세상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다. 이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있어서 그리스도께서 중재자가 되셨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말씀'(로고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창조 사역을 이루셨다(요 1:1-3; 고전 8:6; 골 1:16).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만물의 존재의 근원이시다. 세계'('아이오나스')는 우주(universe)를 의미한다(Morris). 따라서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온 우주의 창조주이시며, 만물의 존재의 근원이 되심을 나타내고 있다.

 


 

  다.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다. '영광'('독세스')은 하나님의 임재(겔 1:28; 11:23), 또는 하나님의 속성 전체를 의미한다(마 16:27; 행 7:2,55; 롬 1:23; 3:23; 5:2; 딤전 1:11). 그리고 '광채'( '아파우가스마')는 (1) 빛의 근원으로부터 나오는 '빛'. 또는 (2) 외부에서 빛을 받아 '반사하는 빛'을 의미한다. 신약성경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빛' 자체로 묘사되기도 하며(요 1:4-9; 고후 4:6) 동시에 중보자로서 하나님의 빛을 반사하여 드러내는 분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속성과 영광을 볼 수 있다.

 


 

  라. 하나님의 인격의 형상이신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이시다. '본체'('휘포스타세오스')는 사물을 존재케 하는 실체를 말하는 것으로서 하나님 자신을 말한다. 그리고 '형상'(카라크테르')은 문자적으로 '표식'이나  '인장'(seal) 또는 '같은 모양의 복제(複製)'를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본질이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 있어서 그리스도를 볼 때 성부 하나님을 보는 것과 같음을 의미한다(요 14:8-10).

 


 

  마. 만물에 대한 통치권

 

   그리스도는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이끄신다. '만물'(,판타)은 모든 피조물을 말하며 이는 그리스도의 통치 영역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말한다(Morris). 한편 '붙드시며'('페론')라는 말은 '인도하다', '이끌어가다'라는 말로서 그리스도께서 어떤 목적을 향해 세상을 이끌어 가신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는 만물을 창조하신 자로서 자신의 능력 있는 말씀을 통해서 모든 피조물을 유지시키며 또한 이끌어 가신다(Morris, Bruce).

 


 

  바. 그리스도의 속죄권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성육신하시고 자신을 제물로 드려 단번에 인류의 죄를 깨끗게 하셨다(9:12,26,28; 10:12,18). 이러한 그리스도의 구속 행위는 불완전했던 옛 언약의 제사가 하지 못한 것을 온전하게 성취하신 것이었다(10:2,4,6,11).

 


 

  사. 그의 높아지심

 

   그리스도께서는 속죄의 일을 마치신 후에 높은 곳에 있는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다. 이 구절은 (시 110:1)을 그리스도께 적용시킨 것이다. '높은 곳'은 '하늘'을 의미하며(엡 4:10; 빌 2:9) '위엄'은  장엄함을 가리키는 것으로(8:1; 유 1:25),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은 하나님을 나타내는 표현이다(Morris).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시고 다른 어떤 것들과도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을 소유하셨다는 것을 말한다(Lane).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오르셔서 온 우주를 다스리고 계신다(Hewitt).

 


 

   아들은 아버지의 존재의 완전한 대리자이다. 그는 태초에 창조 사역에 참여하셨고, 그가 창조하신 것을 계속해서 유지하신다. 그는 하나님과 동등된 영광을 지니셨고 하나님을 우리들에게 계시하셨다. 그는 죄의 권능을 깨뜨리기 위해서 세상에 내려오셨다. 그리고 십자가로 그 일을 완수하시고 부활하신 후에 승천하여 아버지께 돌아가셨다. 그는 독특하시다. 어떤 사람, 어떤 피조물도 그의 위엄에 비교될 수 없다. 그 분은 지금 그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는 영광 중에 계신다.       

 

 

2. 천사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1:4-2:18)

 


 

 1) 천사보다 아름다운 이름(아들)을 기업으로 얻으심(4-5절, 시 2:7, 삼하 7:14)

 


 

   그리스도는 천사보다 우월하시다. '뛰어남'(크레이트톤)은 '보다 우월한', '보다 탁월하다'는 말이다. 저자가 그리스도와 천사를 비교하는 이유는 천사의 사역에 있다. '천사'는 옛 언약인 율법을 모세에게 중재한 자이다(2:2; 행 7:38-39,53; 갈 3:19). 그러나 천사가 모세에게 중재해 준 율법은 그리스도의 계시와 비교할 때 열등한 것이었다. 천사를 통해서 전해진 율법은 불완전해서 구속 사역을 온전히 해결할 수 없었으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몸으로 단번에 구속 사역을 성취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천사보다 우월하신 것은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받으셨기 때문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이란 그리스도의 '아들됨'을 말한다(5). 하나님께서는 천사에게 아들이라고 부르신 적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부르실 때에는 아들이라고 하셨다. 이 말은 (시 2:7)을 인용한 것으로 '아들'은 '솔로몬'을 가리킨다. 그러나 히브리서 저자는 이 '아들'이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또 (삼하 7:14)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되시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라고 하셨다. (삼하 7:14)은 다윗이 성전을 짓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 선지자 나단을 통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여기에 나타난 '아들'은 일차적으로 성전을 건축하게 될 '솔로몬'을 가리킨다. 그러나 히브리서 저자는 이것도 역시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구약 시대의 사람들은 이 본문을 근거로 하여 다윗의 후손 가운데 메시야가 출현하여 하나님 나라를 세우게 될 것을 믿어왔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런 메시야 사상을 통해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천사와는 비교될 수 없는 유일하면서도 우월한 관계하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2) 그리스도는 장자로서 천사들의 경배를 받으실 분이다(6절, 시 89:27)

 

   또한 하나님께서는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지어다“고 명령하셨다. '맏아들'('프로토콘')이란 말은 그리스도께서 만유의 후사로 임명되셨음을 나타내는 말이다(2절). 이 이름의 기원은 (시 89:27)이며, 이 이름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창조물이 창조되기 전에 계셨으며, 장자가 부모의 재산을 상속받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께서 만유의 상속자라는 것을 나타낸다(골 1:15,18).

 


 

   '다시'('팔린')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다시', 또는 '그 위에')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본문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 ‘팔린’을 ‘다시“로 해석하면 본문은 ”그리스도를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경배할지어다“ 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 때에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한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2) “팔린‘을 ”그 위에’로 해석하면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세상 위에서 주관하시는 때에....경배할지어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학자들은 이 두 가지 견해 중에서 두 번째의 것을 더 선호한다. 왜냐하면 문맥 상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셔서 온 세상을 주관하실 때에 천사들이 그에게 경배하라고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이렇게 천사들이 그리스도에게 종속되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천사를 포함한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통치자로서 하나님의 우편에 좌정하셨기 때문이다(3). 그래서 천사들은 그리스도께 경배해야만 한다.

 


 

3) 그리스도는 천사들을 만드시고 그들을 종으로 부리신다(7절, 시 104:4)

 

   또한 구약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신다”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은 (시 104:4)을 인용한 것으로서 맛소라 본문에서는 이 구절을 "바람을 그의 사자로, 불꽃을 그의 종으로  삼으셨다"고 번역하였다. 그러나 히브리서 저자는 70인 역을 인용하여 그리스도께서 “그의 천사들을 바람과 불꽃으로 삼는다”고 인용하였다. '삼으시느니라'('포이온')라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만들다'라는 의미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천사들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천사들의 서열과 임무를 부여하신다는 것을 말한다(Lane, Morris).

 


 

4)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서 다스리신다(8-9절, 시 45:6-7)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원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본문은 그리스도의 지위에 대한 진술로서 (시 45:6)을 인용한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라고 불리우고 있으며, 따라서 경배의 대상으로서 합당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Lane, Morris). 본문은 그리스도의 나라는 영원하고, 그 나라는 공의로운 나라라는 것은 선언하고 있다. 홀'('랍도스')은 '막대기' 또는 '지팡이'를 의미하며 이 말은 왕권을 의미한다. '보좌'와 '홀' 그리고 '나라'라는 말은 모두 다 “왕적 권위와 통치”를 상징한다(시 103:19; 애 5:19; 마 25:31; 계 4:2). 그리고 '공평'('유뒤테토스')이란 말은 '막대기의 곧음'을 나타내는 말로서 '의‘를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는 나라의 홀, 즉 막대기는 곧은 막대기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통치가 정의롭고 바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나라의 기초는 공의이다. “네가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였으니”-이 말은 (시 45:7)을 인용한 것이다. 이 말도 그리스도께서 공의로 자기 나라를 다스리실 것을 말해주고 있다(벧전 2:23; 계 19:11).

 


 

 5) 그리스도는 더 높게 기름부음을 받으셨다(9).

 

   “그러므로 하나님 곧 너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네게 부어”-'기름 부음'은 하나님께서 누군가에게 사명을 맡기실 때 행하는 의식이다.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역을 이루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영광과 존귀의 기름을 그리스도께 부으셨다. “네 동류들보다 승하게 하셨도다”-'동류들'('메토쿠스')은 '동참자' 혹은 '동료'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뜻을 전달한다는 점에서 천사는 아들과 같은 역할을 하였지만, 그리스도는 천사보다 뛰어난 이름을 가지셨다. 천사는 섬기는 직분을 지니나 아들은 통치하는 직분을 가지셨다(Lane).

 


 

6) 그리스도는 창조자시며, 변하지 않으시는 영존자 이시다(10-12절, 시 102:25-27)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이 말은 (시 102:25-27)의 인용이다. 이 말은 하나님께 대한 진술인 동시에 그리스도께 대한 언급이다. D 구절은 아들 되신 그리스도의 영원성과 만물에 대한 그의 주권을 나타낸다. 그리스도는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다(롬11:36).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이 구절은 천사들의 유한성을 말하고 있다. 모든 피조물은 멸망할 것이지만 그리스도는 영원하실 것이다.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의복처럼 갈아입을 것이요”. 히브리서 저자는 피조물의 멸망과 유한성을 의복에 비유하고 있다. 의복이 '낡아진다'는 것은 모든 피조물이 멸망할 것을 말하고, '갈아입는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피조물을 새롭게 변화시킬 것을 말한다. 모든 만물은  재림 때에 새롭게 변하게 될 것이다.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다함이'('에클레이프)란 말은 '끝나다' 혹은 '없어지다'라는 말('에클레이포')의 미래 능동태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심을 말해준다(13:8).

 


 

7) 그리스도는 더 높은 존귀의 자리를 차지하신다(13-14, 시 110:1)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느뇨”. 이 말은 (시 110:1)을 인용한 것이다. '내 우편에 앉았으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서 주신 왕권을 소유하셨다는 것을 말하여 그리스도의 주권과 통치를 나타낸다.  천사들은 하나님에게서 우편에 앉으라는 초대를 받은 적이 없으며 단지 하나님 앞에 서서(눅 1:19;계 8:2) 섬기는 직분을 감당할 뿐이다. 한편 '네 원수로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모든 원수들을 굴복시키실 때까지 왕노릇 하실 것임을 의미한다.

 


 

8) 천사의 위상과 직분-부리는 영-(14)

 

   “모든 천사들은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 '부리는'('레이투르기카')이란 말은 ‘섬기는’, '봉사하는'이란 의미로서 천사들의 임무가 종으로서 섬기는 일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인들을 '구원 얻을 후사'라고 묘사하고 있다. '구원 얻을 후사'는 만유의 후사이신 그리스도(2절)께서 이루신 대속 사역을 의지함으로 그와 함께 하늘나라를 기업으로 얻을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한다(롬 8:17;딛 3:7, Morris). 천사들은 이렇게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통해서 구원 얻은 성도들을 섬기는 영들이며, 따라서 그리스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9) 적용: 소중히 다루어야 할 복음(2;1-4)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갈까 염려하노라”-‘그러므로’라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천사보다 더욱 우월하시기 때문에'를 말하며, ‘들은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전해진 최종적인 계시인 '복음'을 말한다(Bruce, Lane, Morris). 그리고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라는 말은 '더욱 많이 주의하여 숙고하라'는 의미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천사보다 우월하시므로 천사를 중개로 해서 주신 율법보다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복음을 더욱 주의하고 열심히 상고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흘러 떠내려간다‘는 말은 '’흘러가다', 또는 '반지가 손가락에서 빠져나가다'는 의미이다. 이 말은 독자들이 복음에 대한 관심 부족과 부주의로 인해서 진리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라는 것을 말한다.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 보응을 받았거든”-모세는 시내(Sinai)산에서 천사들의 손을 통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율법을 받았다(갈 3:19). (신 33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일만 성도 가운데 오셨다”고 선포하였고, 70인역에서는 '천사들이 그 오른편에 함께 하였다'고 언급하고 있다(LXX 신 33:2;시 68:7). 랍비들은 천사들이 율법의 중개자 역할을 한다고 전한다(Lane, Bruce). '범죄 함과 순종치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거부하며, 하나님의 뜻을 의도적(意圖的)으로 거절하는 것을 의미한다(Lane). '공변된'은 ‘공의의 판단으로 이루어지는'이란 말이며, '보응'은 ’응당히 치러야 할 '보수'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공변된 보응‘이란 말은 율법을 범한 죄인들에게 공의대로 임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말한다(롬 2:2-12). 하나님께서 옛 언약 아래서 천사들을 통해 전해주신 율법을 어길 경우에는 이에 상응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큰 구원'이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된 구원을 말하며, '어찌 피하리요'라는 말은 '도무지 피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보다 열등한 천사를 통해 전해준 율법을 거역해도 공의의 심판을 받았다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 큰 구원을 거절할 때에는 얼마다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인가를 강조하는 말이다. 이 구원은 처음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선포되었으며, 그 후에 그 말씀을 들은 사도들을 포함한 모든 전도자들이 독자들에게 확증해 준 것이다.  '확증한 바니'라는 말은 법률 용어로서 '보증인을 세우다'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복음에 대한 확실성을 강조한 말이다. 그 뿐 아니라 복음 전파자들이 복음을 전파할 때에 하나님께서도 그들과 함께 그 복음의 확실함을 증거해 주셨다. 하나님께서 복음 전파자들의 복음을 확증시켜 주신 방법은 네 가지이다.

 


 

  가. “표적들”:표적’은  기적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 기적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 주었다. 결국 이 표적들은 복음의 진실됨을 증명하는 도구였다.

 

  나. “기사들”-“기사들”('테라신')은 가시적(可視的)으로 나타나는 경이로운 기적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초자연적 현상을 통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경이로움과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역사이다.

 

  다. “여러 가지 능력”-'능력'('뒤나메신')은 본래 자연적인 현상에서 나타나는 힘을 의미했지만 후에 표적과 기사를 내포하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힘(마8:13), 또는 하나님의 역사 하심 자체를 의미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초자연적인 이적 현상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계시하기도 하며 또한 계시하신 말씀을 확증하고 보증하시기도 한다(Lane, Hewitt).

 

 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이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성령'을 의미할 수도 있고(갈3:5), 또는 각 사람에게 성령께서 나눠주신 은사를 의미할 수도 있다(고전12:11). 그러나 하나님께서 복음을 확증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는 전체 문맥으로 볼 때 본 절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령께서 그리스도인에게 부어주시는 은사를 의미할 가능성이 높다.

 


 

10) 그리스도께서 천사보다 잠시 낮아지신(육신을 입고 죽으신) 이유(2:5-10)

 


 

  가. 그리스도의 비하와 승귀(5-8)

 

   “장차 오는 세상(그리스도께서 왕으로 등극하시고 온 우주를 구원하시는 새롭게 창조된 세상)에서 천사들은 세상을 다스릴 권한이 없다. 그러므로 세상은 천사들에게 복종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시 8편)을 인용하여 그리스도께서 잠시 찾아지신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이 시는 하나님께서 연약한 인간을 만물이 주관자로 세우시고 그를 사랑하시는 것을 찬양한 시이다.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인간을 도아 주시기 위해서 기억해 주시며('생각하시며': '밈네스케'), 기억해 주시고 찾아와 주신다('권고하신다': '에피스케프테'). (시 8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잠시 천사보다 못하게 하셨다“고 하였는데, 맛소라 사본은 ”천사“라는 단어를 엘로힘(하나님)이라고 기록했다. 이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하나님보다 잠시 못하게 하셨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70인역 성경을 인용하여 ”저를 잠깐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라고 기록하였다. 이 경우 사람이 천사보다 못하게 되었다는 말이 된다. 그것은 바로 육신을 가지고 있는 점에서 그렇다. 이 말은 그리스도께도 적용이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도 잠시 동안 육신을 입으셨으며, 죽음을 당하셨기 때문이다(빌 2:7).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들은 죽은 이후에 천사들보다 높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신분이 된다. 그러므로 (시 8편) 저자는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관을 씌우시며'('에스테파노사스‘)는 영광과 전귀로 옷을 입히셨다고 기록하였다. 이 말은 그리스도께도 적용이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잠시 죽음을 당하셨지만, 구원을 이루시고 부활하신 후에는 죄와 죽음을 이기신 승리자로서 왕위에 오르셨다. 그리고 영광과 존귀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권한을 소유하셨다. 그리하여 이제는 그리스도께 “복종치 않은 것이 하나도 없게 되었다. 아직 우리가 그리스도의 왕국이 완성되는 재림 때까지는 “만물이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복종한 것을 볼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우리들은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께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나. 낮아지신 이유(1)-하나님의 은혜의 섭리(대속자로서의 죽으심)(9)

 

   그리스도께서 천사들 보다 못하게 되신 것은 오직 잠깐 동안으로 이는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죽으심을 가리킨다. 히브리서 저자는 주님께서 잠깐 동안 천사보다 낮아지신 것, 즉 그의 성육신과 죽으심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대속적인 죽음을 당하셔야만 했던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섭리와 계획을 따른 것이었다. 

 


 

  다. 낮아지신 이유(2)-하나님의 본성에 부합하며 그 영광을 높이는 일이다(10)

 

  하나님께서는 '만물'의 존재의 근원‘이시며(만물이 인하고), '만물을 창조하신 분’(만물이 말미암은)이시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수많은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리스도(구원의 주)를 고난을 받게 하심으로 구원자로서의 완전한 자격을 갖게 하신 일은 그 분의 본성에 부합하는 일이다. 이러한 일은 하나님의 온전하신 사랑과 지혜를 드러내 준다.  

 


 

  라. 낮아지신 이유(3)-성도들을 형제라 부르시기 위해서-(11-13)

 


 

  * 거룩함에서 하나된 형제들(11(상))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대제사장으로서 자신의 피로 성도들을 거룩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을지라도 양자는 한 성령 안에서 모두 공통된 기원을 가지고 있다.

 


 

  * 가족 관계에서 하나된 형제들(11(하)-12(상))

 

   아들인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통해서 양자가 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뿌리를 둔 영적 가족 관계를 형성한다(Kogel, Sqicq, Michel). 예수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형제 관계를 이루며, 가족 중에서 맏아들이 되신다(1:6).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성도들을 형제라 부르는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시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을 형제라 부르기 위해서는 그들과 똑같이 육신을 입고 그들 대신 고난을 당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 일을 위해서 잠시 낮아지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일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용기를 주기에 충분하다(11:16).

 


 

 * 예배드리는 일에 하나된 형제들(12(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본절은 초대 교회가 메시야 시편으로 해석한 (시 22:22)의 인용이다(마 27:26; 막 15:34; 요 19:34).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후에 하나님의 이름과 섭리와 영광을  그의 영적인 형제들(사도들과 신자들)에게 선포하셨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을 “형제들”이라고 부르셨다(요 20:17). 본절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형제가 된다는 사실의 증거 본문이다. 또한 주님께서는 교회 가운데 계셔서 구원을 이루신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실 것이다. '교회'('에클레시아)'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을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인들과 더불어 하나님을 찬양하실 것이다.

 


 

  * 믿음에서 하나된 형제들(13)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그리스도께서는 구원을 이루신 후에 또 다시 “하나님을 의지하실 것이다”. 이 말은 (사 8:17)을 인용한 것으로 이사야가 하나님을 의지한 것을 말한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이 말이 그리스도께서 구원받은 형제들과 함께 마지막 구원이 완성될 때까지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이 말은 (사 8:18)을 인용한 것으로 이사야가 자기 자녀인 스알야숩과 마할살렐하스바스를 가리켜 한 말이다. 이 자녀들은 이사야 당시에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고 남아있던 자들을 상징하였다. 그러나 히브리서 저자는 이사야를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보고 그의 두 아들은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형제들의 모형으로 보았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믿고 구원받은 형제들을 자랑스러워하며, 그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것이다.

 


 

 마. 형제들과 같은 육신을 입으심(3)-마귀로부터 형제들을 해방시키기 위해서-(2:14-16)

 

   하나님의 자녀들이 육신을 입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도 같은 육신을 입으셨다. 그 이유는 바로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애기 위해서였다” 마귀가 사망을 다스리는 권세를 본래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 권세는 인류를 꼬여 인류로 하여금 하나님께 대해 반항하게 함으로써 얻게 된 것이었다(창 2:17; 3:19; 롬 5:12, Lane, Morris).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마귀의 권세를 무효화시키신 방법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즉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였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인간과 같이 반역(反逆)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인 마귀를 없애기 위해서였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형제들과 같이 육신을 입으신 것은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기 위한 것”이었다. 사람은 원래 죽지 않는 존재였으나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마귀를 말을 따르다가 하나님께로부터 사망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마귀는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자기의 노예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자기 피로 죄값을 지불하시고, 죽으셨다가 죽음을 이기시고 살아나심으로 이러한 사단의 모든 권세를 무너뜨렸다. 이러한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이제 사단의 권세와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유롭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같은 일을 하신 것은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은 천사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이 모든 일은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인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한 형제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천사들보다 더 우월한 위치에 서게 되는 것이다.

 


 

바. 시험을 당하는 면에서 같이 되심-시험받는 형제들을 도우심-(17-18)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일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다”(17(상))고 선언하고 있다. '마땅하다'('오페일렌)는 말은 '...할 의무가 있다' 혹은 '빚지다'라는 의미로서 책임을 강조하는 말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서 반드시 성육신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리스도께서는 구속 사업을 이루셔야 했기 때문에 그의 성육신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이러한 일들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구원의 일을 위해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기 위한 것이었다”(17(하)). 대제사장은 하나님과 언약 백성 사이의 중보적 역할을 수행하여 대속을 위한 제사 행위를 주관하며(민18:19;  렘33:20-26),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의 성결을 보존하는 일을 했다(출28:38; 민18:1). 한편 '자비하고 충성된'에서 '자비'가 먼저 나온 것은 강조의 의미로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역을 이루셨음을 나타내며 '충성'은 하나님께 대한 대제사장으로서의 신실하심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몸을 제물로 삼아 인류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일에 자비롭고 신실하신 대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셨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께서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시험받는 형제들을 능히 도울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18). 예수께서는 성육신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들이 당하는 모든 고통과 유혹을 맛보셨다(마 4:1-11; 눅 4:1-13), 그리고 그분의 시험과 고난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절정을 이루었다(4:15; 5:2,7-10).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모든 고난과 시험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고통받는 사람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그러므로 시험과 고난을 당하는 형제들은 언제든지 그리스도께 나아가 도움을 요청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아는 것은 세상에서 살아가면 시험과 고통을 받는 성도들에게 큰 위로와 힘을 준다. 

 


 


 


 


 


 


 


 


 


 


 


 

 3) 모세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3:1-19)

 


 

 가. 모세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1-6)

 


 

   가)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1).

 

  히브리서 기자는 독자들을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말은 그들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고, 예수님을 통해 거룩한 자들이 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또한 저자는 예수님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믿는 도리'(호몰로기아스')라는 말은 '신앙고백“이란 말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신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도', 즉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분”이시다. 모세는 비록 구약에서 '사도'로 불리지는 않았지만, 그는 분명히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사람이었다(출3:10).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세보다 우월하신 사도가 되신다. 또한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을 대제사장이라고 부르고 있다. 대제사장은 백성들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이다. 그는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 열납 받을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재물대신 자기 몸을 가지고 교회를 위해 피 흘려 단번에 속죄의 제사를 완성하셨다. 그리고 지금도 하늘 성소에 들어가셔서 교회를 위해 간구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러한 예수님을 “깊이 상고해야만 한다”. 우리의 신앙 고백이신 주님께서는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으신 분이시며, 자기 몸으로 단번에 속죄의 제사를 완성하신 대제사장이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우리의 신앙 고백의 주체이신 이러한 주님을 깊이 묵상할 때“에 하나님의 깊은 은혜를 체험할 수 있게 된다(1).  

 


 

  나) 충성된 종 모세와 충성된 아들 예수(2, 5)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충성한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도 자기를 세우신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셨다(2). 저자는 2절에서 하나님에 대한 예수의 충성과 모세의 충성을 비교하고 있다.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맡은 청지기로서 충성을 다했다(민 12:7).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모세와 같이 자신을 세워 주신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셨다. 이러한 충성스러움은 모세와 예수님께서 가지신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모세는 '사환'으로 충성했으나, 예수 그리스도는  ‘집 맡은 아들’로 하나님께 충성하셨다(5-6). '종'과 '아들'이라는 표현은 모세와 예수님의 영광이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를 설명해 준다. 모세는 집주인이 부리는 종이었지만, 예수께서는 그 집의 상속자가 되실 아들이셨다.

 


 

   다) 피조물 모세와 창조주 그리스도(3-5)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께서 모세보다 더 존귀한 것은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한 것과 같다”고 하였다(3). 모세는 탁월한 이스라엘의 지도자였지만 그는 그 집(하나님의 백성)의 한 부분(일원)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모세와 교회를 지으신 주인(창조주)이시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님의 영광이 모세와는 질적으로 다른 탁월한 것임을 알게 해준다.     

 


 

   라) 소망의 담대함과 확신을 끝까지 잡으라(6).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고 하였다(6). 이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에 대한 소망을 말한다(Lane, Morris).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소망에 대해 두 가지를 끝까지 견고하게 잡아야 한다. 첫째로 성도들은 소망의 담대함을 끝까지 굳세게 잡아야 한다. 담대함은 '신뢰'를 의미하며,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을 끝까지 견고하게 갖는 것을 말한다. 둘째로 성도들은 소망의 자랑을 끝까지 굳세게 잡아야 한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자랑스러워할 줄 알아야 한다. 참다운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약속 성취에 대한 소망에 대해 확신과 자부심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 소망을 주님의 재림 때까지 끝까지 굳세게 잡을 것이다.

 

나.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라(7-12)

 

   저자는 (시 95:7-11)을 인용할 때에 이것을 “성령께서 하신 말씀”이라고 하였다. 성도들은 성령의 음성을 들을 때에 겸손히 믿음으로 받아야 한다(7).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모세를 대적하고 그를 통해 주신 율법을 거역하였다. 이러한 반역은 하나님의 분노를 초래하였고 그 결과 그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나 신약의 성도들은 그들과 같이 복음을 들을 때에 마음을 강퍅하게 해서는 안된다(8). '강퍅케 하다'(스클레뤼네테')는 '말라서 굳은', '딱딱한'의 뜻을 갖는 '스클레로서'에서 파생한 동사이다. 이 '강퍅함'은 애굽 왕 바로가 하나님의 이적을 보면서도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대적했던 것처럼(출 9:35) 하나님의 역사 하심에 대해 거부하는 성향으로 굳어져 버리는 것을 말한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신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하나님을 시험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기사를 행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기사를 친히 목격하였다(9). 하나님께서는 믿지 않고 반역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노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하나님의 길을 알지 못했다”고 선언하셨다(10). 이스라엘 백성들은 항상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잘못된 길을 걷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잘못을 가르쳐주셨지만, 그들은 스스로 마음을 닫고 거부해 버렸다. 그러므로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하셨다(11). 불신앙 자에게 내려진 심판은 '안식'(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었다. 신약의 성도들은 이러한 전철을 밟아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독자들에게 ”삼가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다가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염려하라“고 권하고 있다. '믿는 형제들' 가운데 몇 명이 기독교를 버리고 유대교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그리스도를 거역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옛날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하나님이 보낸 모세를 거부하고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한 행위와 같다.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러한 일을 반복하지 않도록 주의하고 조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히브리서의 독자들은 “배교의 위험 속에서 살던 성도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서로  경건한 삶을 살도록 권면해야 한다”(13). 이러한 성도의 교제와 권면은 성도들이 죄의 유혹에 빠져 마음이 강퍅케 되지 않게 해 줄 것이다. 배교의 위험 속에 있는 당시의 성도들은 성도의 교제를 통해서 이러한 위험을 끝까지 이겨나가야만 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독자들에게 그들이 “시작할 때에 확실했던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라”고 격려하고 있다. 그러면 그들은 마침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될 것이다(14). '시작할 때'는 그리스도를 처음 믿을 때를 말하며, '확실한 것'은 처음 믿을 때 가졌던 도리에 '확신을 갖는 것'을 말한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기적을 보고 애굽에서 당당하게 나왔다. 그들은 처음에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모세가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 그러나 그들은 어려움에 부딪치게 되자, 그 사실을 잊어버렸다. 그리고 ”새로운 지도자를 뽑아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했다“(민14:3,4). 히브리서 기자는 독자들에게 ”이러한 조상들의 전철(前轍)을 밟지 말 것을 권면한다. 성도들은 그들이 처음 믿을 때에 가졌던 믿음에 확신을 가질 때에“ 여호수아와 갈렙이 가나안에 들어간 것과 같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나라를 상속할 자“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독자들은 성령의 음성을 들을 때에 이스라엘과 같이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아야 한다(15).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을 향하여 광야를 지나는 도중에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불평하여 하나님을 여러 번 진노케 하였다(16).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하다가 죽게 하셨다(17). 이스라엘 백성이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던 것은 그들의 불순종 때문이었다(18). 이것은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에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19). 성도들은 이와 같은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명심하고 가데스에서의 조상들처럼 배교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한다.

 

 4) 여호수아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4:1-16)

 


 

 가. 삼가 두려운 태도와 믿음으로 말씀을 받으라(1-2)

 

   히브리서 저자는 수신자인 유대 기독교인들에게 복음을 들을 때에 삼가 두려운 태도로 받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1). 이 약속은 말씀을 듣는 자들은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적용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에 들어갈 약속을 받았지만 믿음으로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약속된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다(2).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에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그 언약을 잘 지키면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복된 소식을 들었다(출 19:3-6; 23:20-33).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복음을 듣고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지금도 그때와 똑같이 유대인 기독교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모든 죄의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영생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이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들도 역시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그 약속에 참여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나. 창조와 안식(3-4)

 

   하나님의 안식은 이미 세상을 창조하실 때부터 있었다. 하나님은 제 칠 일에 그의 모든 하시던 일을 그치고 안식하셨다(창 2:1-3). 첫째로 하나님의 안식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행하신 일에 대하여 만족하셨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 만드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하고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일이 하나님의 마음에 드시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는 안식하시지 않고 그 일을 다시 완성하려고 하셨을 것이다. 둘째로 하나님의 안식은 피조물들도 따라야 할 본이 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것처럼, 6일 동안 자기 일을 힘써 하되, 제 7일에는 쉬라고 명하셨다. 이러한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들은 이미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한 사람들이다. 셋째로 하나님의 안식은 그리스도 안에서 미래에 성도들이 영원히 누릴 안식의 예표요 보증이었다(습 3;17)(3-4). 이미 믿는 기독교인들은 이미 하나님의 안식, 즉 하나님 나라의 축복에 참여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의 안식이 미래에 완성되기는 하지만, 그것은 믿음으로 현재에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다. 이스라엘과 안식(5-8)

 

   이 안식은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선포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씀을 믿고 순종하게 될 때에 안식에 들어갈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불순종하다가 이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시 95:11). 그러나 이 안식은 폐지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을 위해 남겨져 있었다. 그러므로 오랜 시간이 지난 후(사사시대와 사울 왕의 시대가 지난 후)에 다윗은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고 권하였다(시 95:7(하), 8(상)). 다윗은 안식의 때를 가리켜서 ‘오늘날’이라고 불렀다. 그가 이렇게 또 다른 안식의 때를 선포한 것은 하나님의 안식이 아직도 유효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안식의 약속은 과거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안식은 '하나님의 음성'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을 통해서 성취되는 종말론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안식에 참여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들은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했던 과오를 범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다. 남아 있는 안식(9-10)

 

   만일 여호수아에 의해 안식에 대한 약속이 성취되었다면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통해서(시 95편) 다시 안식에 대한 새로운 약속을 주시지 않으셨을 것이다(9). 그러나 여호수아 때에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누린 안식은 결코 완전한 안식이 아니었다. 그 곳에는 아직도 수많은 대적들이 남아 있었으며, 그 안식은 순종할 때에만 허락되는 조건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리고 불순종하다가 멸망하고 말았다. 이러한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서 누린 안식이 안식의 본체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온전한 안식을 예표한 것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여호수아'는 '예수'라는 헬라식 발음을 히브리식으로 발음한 것이다. 처음 '예수'인 여호수아는 백성들을 하나님의 완전한 안식으로 인도하지 못했다. 그러나 둘째 예수인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들을 완전한 안식으로 인도하셨다(Morris). 그러므로 성경은 여호수아 이후에도 아직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있다”(9)고 말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안식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될 완전한 영적인 안식과, 미래에 완성될 영원한 안식을 의미한다.

 


 

   이미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안식에 들어간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쉰다(10).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로 구속을 완성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안식에 들어가셨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을 안식일로 지킨다. 이것은 창조 때에 선포된 안식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렇게 누리게 된 안식의 시제성은 하나님 나라와 마찬가지로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안식'은 안식일의 주인 되신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이미' 이 땅에서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며, 이것은 주님의 재림 때에 완성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현재에 이미 안식을 누리고 있는 동시에, 미래에 완성될 영원한 안식을 바라보며 살고 있는 것이다.

 


 

   라.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11)

 

   신약의 성도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불 신앙으로 인해 이 안식을 잃지 않도록 주의하고, 서로 격려해야 한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약속을 소홀히 여겨서는 안되며,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한다(11). '힘쓴다‘('스푸다소멘')는 말은 '재촉하다', '열심히 노력하다'라는 의미로 의지를 나타낸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수 있도록 의지적인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약속을 믿음으로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안식은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전심을 다해서 이 약속을 붙들려고 해야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과 같이 순종치 않는 죄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안식을 얻지 못하게 하려는 대적들의 큰 방해가 있기 때문이다.   

 


 

 마. 말씀을 청종해야 하는 이유(12-13)

 

  *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말씀은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이다. 

 

  *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생명력과 역동성이 있다. 그 말씀은       생명력 있는 말씀이며, 하나님의 뜻을 실제로 수행한다. 

 

  * 말씀은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딘 칼이 아닌 예리한 칼      과 같아서 인간의 영혼을 다루는 데 가장 효과적으로 작용한다. 

 

  * 말씀은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 '혼과 영', '관절과 골수'는      인간의 육체와 영혼의 모든 것을 말하며, '찌른다’(디이이크누메노스')는 말은 '꿰뚫는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모든 내면까지 들어가서 그들의 죄악을 드러내고 회개하게      하고, 영적인 모든 질병들을 수술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 말씀은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한다”. '감찰한다'('크리티코스')는 말은 법정 용어로서 '      판단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마음과 생각까지도 판단하며, 그 행위의 깊숙한      동기까지도 판단하여 공의를 시행한다.

 

  * 그러므로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을 피조물이 하나도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역동성이 있으      며, 마음과 뜻을 감찰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 앞에서 피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        므로 모든 만물들은 그리스도 앞에서 마치 벌거벗은 사람과 같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러      므로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때에 두려움을 가지고 믿음으로 화합해야 한다.

 

  바. 우리에게 있는 큰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14-16)

 

   우리는 창조주 그리스도와 그 말씀 앞에 설 때에 실망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죄인 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누가 감히 말씀을 통해 자기의 모든 죄악상을 보고 나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할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실 대제사장이 계시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다고 외친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탁월성을 가리켜 주는 말이다.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들이나 멜기세덱은 대제사장이라고 불리웠지만, “큰 대제사장”이라고 불리운 적은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큰 대제사장”이 되시는 이유는 그가 인류의 모든 구속의 역사를 완성하셨기 때문이다. 사실상 구약의 모든 대제사장들은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모형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의 원형이신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위대하신 대제사장”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또한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을 “승천하신 자”라고 소개하였다. 이는 그리스도의 초월성을 나타내고 있다. 아론 계통의 제사장들은 이 땅의 성막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으나, 그리스도께서는 승천하셔서 하늘에 있는 성소에서 제사장의 사역을 감당하고 계신다. 또한 우리에게 있는 큰 대제사장은 “하나님 아들 예수”시이시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나타내는 말이다. 우리에게 있는 큰 대제사장은 자기 몸으로 인류의 대속 사역을 완성하시고 하늘 성소에서 인류를 위해 중보하시는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이러한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자기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초월성, 그리고 신성은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아야 할“ 근거가 된다.  '굳게 잡으라'('크라토멘')는 말은 '단단히 쥐다' 혹은 '들러붙다'의 말로 서 이 말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을 끝까지 지키라는 것을 권고한 말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 하지 않는 자가 아니다. 그리스도는 탁월하시고, 초월하여 계시며, 신성을 가지고 계시지만, 우리의 연약함을 모두 이해할 수 있는 분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의 유혹에 넘어질 수 있는 연약성과, 인간이 지닌 모든 한계성을 체휼하셨다. '체휼하다'('쉼파데사이')는 말은 우리의 연약함을 이해하시고 동정하실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저자는 '아니하는...아니요'라는 이중 부정을 사용하여 예수님 자신이 인간과 동일하게 연약함을 느끼신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께서 우리를 이해하시고 도우실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완전히 인간성에 참여하셨기 때문이다(2:17,18). 주님께서는 죄에서 떠나 계신 분이시지만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다. 이 말은 예수께서도 인간이 되셔서 인간들이 겪는 모든 어려움을 경험하셨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으로서 인간들을 돕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조건이었다. 왜냐하면 인간의 연약성을 이해해야만 인간을 위해서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와 같이 인간과 똑같은 시험을 받으셨으나 승리하셨기 때문에, 인간들이 당하는 모든 시험의 어려움을 알고 또 능히 도울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긍휼 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한다”(16). 그리스도인들은 연약하여 자기 행위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긍휼히 여김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긍휼 하심을 얻는 길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또한 연약한 그리스도인들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아야만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다. '때를 따라'라는 말은 '적절한 시기'를 의미한다. 불완전하여 수시로 죄의 유혹에 넘어지기 때문에 때를 따라 적절한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자비와 도움을 필요로 하는 때를 아시며, 자기에게 나아오는 자들을 위해 시기 적절한 도움을 베풀어주신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은혜를 받기 위해서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한다. '은혜의 보좌'는 하나님이 계시는 장소이며 성막 안에 있는 속죄소를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곳에서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에 이 곳은 ”시은소“(은혜를 베푸는 장소)라고 불리워졌다. 그러나 본절에서 저자가 말하는 '은혜의 보좌'는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를 가리킨다. 구약의 성도들은 성소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 때에는 대제사장만이 시은소에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신약의 성도들은 언제든지 때를 따라 도움을 얻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통해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을 얻게 되었다. 이것은 우리에게 위대한 대제사장이신 예수께서 계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연약한 인간성을 가진 우리가 이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며 살아갈 때에 우리에게 이러한 위대한 대제사장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큰 위로와 힘을 제공해 줄 것이다.

 

 


 

5) 아론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5:1-14)

 


 

  가. 아론의 반차를 좆은 대제사장의 성격(1-4)

 


 

   가) 대제사장의 본성: 사람(1)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선택된 자여야 한다. 천사들은 대제사장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천사들은 사람들의 인성과 연약함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 대제사장의 직무: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1)

 

   대제사장의 직무는 세상에 속한 일을 하지 않고 하나님께 속한 일을 하는 자이다. 그들은 백성들을 대신해서 거룩한 직무를 수행하는 자들이다.

 


 

  다) 대제사장의 의무: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림(1)

 

   대제사장은 백성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소제물)과 속죄제사를 드리는 일을 담당하였다.

 


 

  라) 대제사장의 구비 조건: 연약성(2-3).

 

   대제사장은 타인의 무지와 미혹을 용납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무식하다'('아그노우신')는 말은 '모르고 죄를 짓는다'는 의미이며,  '미혹'('플라노메노이스)은 '잘못 인도되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고의적으로 짓는 '짐짓 죄'(헤쿠시오스: 히 10;26)와 반대되는 것으로 모르고 짓는 우발적인 죄를 말한다(Robertson). 그리고 '용납 할 수 있다'('메트리오파데인')는 말은 다른 사람을 친절하고 사려 깊게 대하는 것을 의미한다(Yarnold, Lane). 대제사장은 무지나 실수로 죄를 범한 자들은 용납하였으나(9:7; 레 4:2,13,22,27; 5:2-4), 고의적으로 범죄한 자는 회중에서 제외시켰다(민 15:30,31). 대제사장이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 동정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무의식 속에서 범죄할 수 있는 '연약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그러므로 대제사장은 백성을 위해 속죄제를 드리는 것과 같이 자기를 위해서도 속죄 제사를 드려야만 했다(3). 구약 시대의 대제사장은 도덕적으로나 신체적으로 흠이 없어야 했다(출 28:1,2) 그러나 그는 여전히 죄지을 가능성이 있는 연약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율법은 대제사장이 죄를 지었을 경우를 대비해서 속죄할 수 있는 규정을 마련해 놓았다(레 4:3-12;9:7). 대제사장은 속죄일에 회중을 위해서 제사를 드리기 전에 먼저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위해서 속죄제사를 드렸다.

 


 

   마) 대제사장의 소명: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4)

 

   대제사장의 직분은 사람이 원한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 직분은 오직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만이 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의 초대 대제사장이었던 아론도 하나님에 의해서 제사장으로 임명되었으며 그 이후로 그 직분이  세습되었다(출 28:1; 민 3:10;18:1). 아론 집안 외의 사람이 제사장 직분을 감당하게 될 때라도 하나님께서는 직접 부르셨다. 대제사장은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서만 임명(任命)될 수 있었다.

 


 

  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의 성격(5-10)

 

 

   가) 소명: 하나님에 의해 대제사장으로 부름 받고 세우심을 받았다(5-6)

 

   이제 저자는 아론의 대제사장직과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을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이 되신 것은 아론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대제사징직은 아론의 대제사장직 보다 우월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대제사장이 되셨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증거하기 위해  (시 2:7)을 인용하여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라는 것을 설명한다. 하나님께서는 예수께서 요단 강에서 세례 받으시고 올라올 때와 변화산 상에서 그리스도께서 사랑하는 아들이심을 친히 음성으로 인정해 주셨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께서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보다 더 우월하신 대제사장이심을 논증하기 위해 (시 110:4)도 인용하고 있다. (시 110:4) 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영원한 제사장'으로 임명하는 장면이 나타난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좆는다”(카타 텐 탁신 멜키세덱')는 말은 멜기세덱 계열의 제사장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멜기세덱과 같은 형태의 제사장이라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멜기세덱에게는 후손이나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이다(Morris, Moffatt, Hewitt). 아론계통의 대제사장은 오로지 제사 직무를 감당하기 위해 기름부음을 받은 존재에 불과하지만, 그리스도는 멜기세덱과 같이 제사장인 동시에 왕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으셨다.

 


 

   나) 연약성을 가지심(7-)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시기 위해서 육체를 입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으로 오셔서 인간과 똑같은 시험을 당하셨다(2:14-18).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연약성을 지니셨으며 인간의 감정이나 어려움을 똑같이 느끼시는 대제사장이 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셨다. 본 구절에 대해서 혹자는 예수의 지상 생활 중 겟세마네에서 드린 고뇌에 찬 기도 장면에 대한 묘사일 것이라고 주장하나(눅 22:39-46, Bruce, Robertson, Hewitt) 이것은 예수님의 지상 사역 중 어느 특정한 순간에 적용시키기 보다는 그의 대제사장적인 사역 전체에 적용시키는 것이 타당하다(Lane, Maurer, Morris). '올리다‘('프로세넹카스')는 말은 희생 제물을 '바치다'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1절에서 언급된 대제사장의 제사와 평행을 이룬다. 대제사장이 속죄를 위하여 드리는 '제물'은 예수께서 하나님께 올린 '간구와 소원'을 의미한다(Rasco).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그 기도를 열납 하심을 받으셨다. '경외하심'('율라베이아스')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있다.  (1) 혹자는 '두려움'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기도했다는 의미로 해석한다(Morris). 예수는 죽음에 대해 인간으로서의 두려움을 느끼셨으나 이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계획에 순복하셨다. (2) 혹자는 '율라베이아스'가 '잘'에 해당하는 접두사'유'와 '붙들다'는 뜻의 헬라어 '람바노'의 합성어로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나타낸다고 한다(Robertson). 이 두 가지 견해는 둘 다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 들으심을 얻었다는 말은 (시 22:24)의 '부르짖을 때 들으셨도다'라는 말과 상응된다. 이것의 일례로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장면을 들 때의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막 14:36)라는 예수의 기도가 성취되지 않은 것으로 오해될 수 있으나 사실상 예수의 기도의 목적은 고난의 잔을 옮기는 데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있었으므로(막 14:32-36) 그의 기도는 받아들여진 것이었다. 하나님은 예수의 기도를 받아들이셨다(Boman, Rissi, Maurer). 이 사실을 저자가 본절에서 밝히는 이유는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의 제사가 항상 받아들여진 것이 아닌 반면에 예수의 기도는 항상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Lane).

 


 

  다) 고난을 통해 순종함을 배우심(8-9)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받으신 고난을 통해서 순종함을 배우셨다(8).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고난받아야 할 이유가 없으시다(Morris).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구원을 위해 고난을 받으셨다.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웠다'는 말('에마덴 아프 혼 에파덴')은 헬라문학에서 오랫동안 쓰어진 관용구로서, '배우다'의 헬라어 동사어근 '마드'와 '고난받다'의 동사어근 '파드'는 음성학적으로 서로 유사하기 때문에 수사학적인 효과를 위해 자주 함께 사용되었다(Lane). 이 말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인간들이 겪는 동일한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께 순종하셨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고난을 통한 주님의 순종은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은 실제적인 교훈을 준다. 첫째로 주님께서는 육신을 입으시고 순종하심을 통해 우리들이 그 발자취를 따라 오게 하시려고 본을 보여 주셨다. 둘째로 주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순종을 윈하시는 지를 가르쳐 주셨다. 주님께서는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하셨다. 셋째로 순종하는 사람이 어떠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지를 가르쳐 주셨다. 무릇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주님과 같이 핍박을 받게 될 것이다. 넷째로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뜻대로 당하는 고난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셨다. 다섯째로 주님께서도 고난을 받으심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고난에서 제외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셨다.   

 


 

   주님께서는 이와 같이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배우심으로 인해 사람들의 죄를 사할 수 있는  대제사장으로서 온전한 자격을 구비하게 되셨다(9). 만일 주님께서 고난 속에서 순종을 배우지 않으셨다면, 고난 당하는 인간들을 용납하지 못했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고난을 통한 순종을 통해서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을 주실 수 있는 합당한 분이 되셨다. 자기를 순종하는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고난 속에서 죽기까지 복종한 것을 본받아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성도들을 말한다. 주님의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 그리스도께서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구원은 시간의 차원을 뛰어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와 같이 인성을 체험하심으로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다(10). 그리스도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이라는 것은 멜기세덱의 후손으로 대제사장이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6절), 그리스도께서 율법 하에 있던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보다 탁월한 다른 은혜의 약속을 따라 대제사장이 되셨다는 것을 말한다.

 


 

  라) 멜기세덱의 반차를 좆은 대제사장(11-14)

 

   히브리서 저자는 멜기세덱에 관해서 할 말이 많지만, 독자들이 듣는 것이 둔하기 때문에 해석하기 어렵다고 말하고 있다(11). '둔하다'('노드로이')는 말은 '듣는 것에 무관심하거나', '이해력이 부족한 것'을 말한다. 수신자들은 예수를 믿은 지 이미 오래되었기 때문에 마땅히 남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었어야 한다(12).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말씀(복음)의 기초”에 대해서 남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말씀의 초보는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의 기초적인 진리를 말한다. 수신자들은 오래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기초적인 지식마저 결핍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먹을 수가 없었다. 헬라 윤리학에서는 아직 기초단계에 있는 자들을 '우유를 필요로 하는 어린아이'라고 비유했다. 그리고 성숙한 단계에 이른 사람들은 '단단한 음식을 즐기는 어른'에 비유하였다(고전 3:1-3, Williamson). 히브리서 저자는 이 말을 사용하여 수신자들이 오랜 신앙의 연륜에 걸 맞는 성장을 이루지 못한 사실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그들을 책망하며 권하고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젖을 먹는 자'에 대해서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13). 어린아이('네피오스‘)는 올바른 언어를 구사하거나 정상적인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옳은 것을 분별하는 윤리적인 능력이 없는 사람을 말한다. 또한 젖을 먹는 자들은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이다.  '의의 말씀'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첫째는 신자들의 올바른 삶으로서의 '의'를 의미하며 둘째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가 신자들의 '의'가 된다는 측면에서의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의미한다(Hughes). 젖을 먹는 자들은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영위해야 하는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한다.

 


 

   그러나 단단한 식물을 먹는 사람들은 영적인 지각을 사용함으로 선악을 분별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14). '단단한 식물'은 문맥상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에 대한 말씀으로(7:1-10:18) 초신자들과 같이 어린아이에 해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납득하기 어려운 진리를 가리킨다(Lane). 이러한 진리를 이해하는 자에 대해 저자는 두 가지로 묘사하고 있다. 장성한 자는 앞에서 언급된 '어린아이'에 비해(고전 3:1; 13:11) 상대적으로 온전한 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단단한 식물'을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 자를 말한다. 그들은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다. '지각'('아이스데테리아')은 도덕적인 분별력을 넘어 영적인 분별 기능을 의미한다(Michel, Morris).  '연단을 받는다'는 말('게귐나스메나')는 말은 '훈련하다(귐나조')는 말의 완료 수동 분사로서 끊임없이 훈련을 받는 상태를 나타낸다. 단단한 식물을 먹는 자는 훈련과 진리를 통해 성숙한 영적 분별력을 소유하게 되며 그 분별력을 통해서 선악을 분별하여 범죄치 않으며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된다.

 


 


 


 


 


 


 


 


 


 

 6) 갓난아이와 성숙한 사람(6:1-3)

 


 

   히브리서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의 시작에서 떠나서 출발해서 완전한 데(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충만한 복음의 세계)로 계속 나아갈 것'을 계속해서 권고하고 있다. 배가 항구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는 것 같이, 그리스도인들도 초보의 항구를 떠나서 더 깊은 곳으로 나아가야 한다. 수신자들은 기독교의 교리에 대해 다시 기초를 놓을 필요가 없다. (1-2절)에서는 '그리스도 도의 원리(초보)'에 대해서 6가지(3쌍)로 설명하고, 3절에는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성숙한 신앙인이 될 것을 권하고 있다.  

 


 


 

  가. 회개와 믿음-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1(하))

 

   '죽은 행실'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것으로서 이러한 행위는 그를 죽음으로 인도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회개하고 제물을 드려 이 죄악을 씻게 하셨다. 유대인들은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회개와 신앙은 유대교의 가장 기본적인 것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은 이제 이런 것을 떠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진정한 회개와 참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나. 세례와 안수(2(상))

 

   '세례들'은 유대교의 일반적인 정결 예식을 의미한다(레 11-15장, Bruce, Morris). 유대인들은 여러 가지 부정에서 정결케 하기 위해서 손과 발을 씻는 정결 예식을 행했다. ‘안수’는 구약시대부터 널리 시행되던 관습이었다(민 8:10; 신 34:9). 구약 시대의 제사장들은 제물을 잡기 전에 짐승에게 안수하여 백성들의 죄를 짐승에게 전가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것에서 출발해서 복음 안에 주어진 진정한 정결의 도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다.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2(하))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은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의 중대 관심사인 종말론적 교리이다(사 26:19; 단 7:9,10; 12:2; 눅 20:37,38; 행 23:8; 마카비2서 7장, Bruce). 이러한 교리는 인간이 불멸한 존재이며, 마지막 때에 하나님 앞에서 공의로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데로 다시 돌아가서는 안된다. 이제는 이에서 출발하여 복음 안에 잇는 충만한 종말론으로 나아가야 한다. 

 


 


 

  라. 성숙한 신자가 되라(3)

 

   신자들은 이러한 도의 초보를 떠나 계속해서 완전한 곳으로 전진해야 한다. '완전'('텔레이오테타')은 '성숙'을 의미하며, 완전한데로 나아가라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충만한 계시의 세계로 나아가라는 것을 의미한다.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이전의 유대교에서 다루던 데로 다시 돌아가거나 그것에 머무르지 말라고 복음 안에서 게시된 충만한 세계로 나아가라고 명령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문제에 대한 기초를 다시 닦을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충만한 곳으로 나아가면 된다. 그러나 히브리서 저자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3).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이란 말은 '참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의 복음 안으로 나아가는 일이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은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때에만 가능하다. 그리스도인들이 복음 안에서 더욱 더 성숙해지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다(1,7절, Lane).

 


 

7) 배도의 결과(6:4-6)

 

   저자는 (4-6절)에서 자신의 믿음을 성숙시키지 못하고 헛된 교훈에 미혹된 배도자(背道者)의 결말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4-5절은 개종자들의 첫 신앙 체험을 기술한 것으로 그 표현이 추상적이어서 구체적으로 해석하기에 다소 난점이 있다. '비췸을 얻고'(포티텐타스)라는 말은 복음의 진리를 믿고 받아들인 행위를 의미한다. 신약성경에서 복음이나 그리스도를 '세상의 빛'으로 묘사하고 있으며(요 1:9; 고후 4:4,6; 벧후 1:19), 복음을 믿는 자들도 '세상의  빛'(마 5:14; 요 8:12)이라고 불리고 있다. ‘하늘의 은사를 맛보았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귀한 선물을 체험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었다’는 말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을 체험한 것을 가리킨다(Lane, Bruce). '선한 말씀을 맛보았다'는 말은 하나님 말씀의 귀중한 가치를 깨달았다는 의미로 보이며, '내세의 능력'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장차 올 세계의 능력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현재에도 신앙의 공동체 안에서 실현되고 있다(Lane, Morris).  이와 같이 4-5절에 걸쳐 진술된 영적인 체험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누구든지 체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사(恩賜)이다.

 


 

   이러한 일에 참여한 후에 다시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다(6). '타락한 자들'('파라페손타스')이란 말은 '한쪽으로 떨어져 나가다'라는 의미로서 그리스도인이 되어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좋은 은사를 체험한 후에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간 자를 의미한다. '회개'는 회개하는 자가 자신의 삶 전체의 방향을 전환시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결코 반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은 후에 다시 배도 하는 것은 다시는 구원받을 길이 없다. 그러므로 고의적인 배도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자들이 다시 회개할 수 없는 이유를 말해주고 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이기 때문이다(6).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다'('아나스타우룬타스')는 말에서 '다시'('아나')로 번역된 말은 '위에'라고 번역해야 한다(Robertson). 그러므로 이 말은 배도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두 번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였다”고 해석하기보다는 배도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 위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이는 죄를 지은 것이다“라고 해석해야 한다. 이 말은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자들은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던 자들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8) 두 부류의 신앙 고백 자들(6:7-8)

 

   개역 성경에는 '가르'('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이 '가르'는 7-8절에 나오는 내용이 4-6절의 내용의 이유가 된다는 것을 말한다.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서 복을 받는다(7). '땅'은 그리스도인들을 비유한 것이며(마 13:18-23), '비'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감화 등을 비유한 것이다(사 44:3; 55:10). 밭을 가는 자가 열심을 다해 밭을 갈았을 때에, 밭이 그에 맞는 소출을 내면 밭을 가는 농부가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들이 배도하지 않고 성숙한 신앙으로 발전해 나아갈 때 은혜를 베푸시고 돌보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축복해 주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Hewitt, Morris, Lane).

 

   그러나 만일 밭이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결국에는 불에 태워지게 될 것이다(8). '가시와 엉겅퀴'는 (창 3:17,18)의 내용과 연관된다. 창세기에서 가시와 엉겅퀴는 인간의 불순종으로 인해 야기된 저주의 산물이었다. 본절에서 '가시와 엉겅퀴를 낸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고 오히려 신앙을 버리고 배도 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배도의 '마지막' 결과는 불사름, 즉 하나님의 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불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을 소멸하는 도구가 된다(10:27; 12:29).

 

 9)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들(6:9-11)

 

   히브리서 저자는 4-8절에서 배도 자들의 결국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하여 엄숙한 경고를 하였다. 그러나 수신자들은 그러한 배도 자들이 아니었다. 저자가 수신자들을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부른 것은 수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스런 자녀가 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한다”고 말하고 있다(9). '이보다 낫다'는 말은 수신자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말하며, '구원에 가깝다'는 말은 수신자들이 구원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수신자들은 배도 할 위험 앞에 놓여 있기는 했지만, 그들은 결코 배도 자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구원받은 것의 증거가 될 수 있는 선행의 열매가 있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수신자들의 행위와, 그들이 하나님을 위해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지금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하신다(10). 수신자들은 선행을 행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는 사랑으로 성도들을 계속적으로 섬겼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수신자들의 행위를 기억하신다. 저자는 하나님의 공의와 수신자들의 행위를 근거로 앞 절에 언급된 확신을 소유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수신자들의 선행이 그들의 구원과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Hewitt). 그들의 선행은 자신들의 믿음이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행위를 통해 고백되어지는 진실한 것임을 나타내준다.

 


 

   저자는 수신자 각 사람들이 모두 다 같이 부지런하여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11). '간절히 원한다'는 말은 저자의 간절한 염원을 나타낸다. 저자는 모든 수신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부지런하며, 믿음에서 난 선행으로 하나님과 성도들을 섬기기를 바라고 있다. '끝까지'('아크리 텔루스')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해 그들의 소망이 완전히 실현(實現)될 때까지를 말한다(9:28, Lane). 한편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다'는 말은 '온전한 소망을 지닌다'라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주님의 재림으로 완성되는 하나님 나라를 마음에 지니고 살아야 한다. 한편 10절에서는 사랑이 언급되고, 11절에서는 '소망'이 언급되고 있으며, 12절에서는 ‘믿음’이 언급되고 잇는데, 이것은 기독교인에게 항상 있어야 할 세 가지 요소이다(10:22-24; 롬 5:2-5; 고전 13:13; 갈 5:5,6; 골 1:4,5; 살전 1:3; 5:8; 벧전 1:21,22).

 


 


 

 10) 그리스도인의 견인(6:12-15)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말씀을 이해하고 영적으로 성숙하게 되는 일에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 할 것을 권하고 있다. 그들은 이렇게 할 때에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약속을 기업으로 받았던 신앙의 선조들을 본받는 사람이 될 수 있게 된다(12).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은 자들'은 아브라함과 같은 신앙의 선조들을 말한다(Bruce).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에 대해 오래 참고 인내함으로 마침내 약속된 기업을 받았다(Lane, Grasser). '기업으로 받는'이란 '확실히 소유하다'는 의미로, 예수님을 믿은 성도들이 믿음을 끝까지 인내로 지켜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생의 약속을 확실하게 소유하는 것을 말한다. 성도들은 믿음의 성조들과 같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믿고 인내함으로 기다려야 한다.

 

그리할 때에 마침내 그들과 함께 하나님의 약속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가 자기보다 더 큰이가 없기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맹세할 때에 자신을 가리켜 맹세하셨다(13, 창 22:16).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는 시간이 지나야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것을 이행하실 것을 맹세로 보증해 주셨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내가 반드시 너를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고 약속으며(14, 창 22:17.),  아브라함은 이것을 믿고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이삭을 제물로 드리려고 한 것은 어떠한 절망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러한 믿음은 약속을 기다리는 모든 성도들이 본받아야 할 본보기가 된다고 말한다(Lane). '약속을 받았다'는 말은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낳게된 것을 말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이 약속은 메시야를 통해서 성취될 것이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도 유대인들에게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 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 8:56)고 말씀하셨다.

 


 


 

 11) 영혼의 닻(6:16-20)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한다. 왜냐하면 맹세는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로 확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16). 맹세는 약속한 것에 대하여 내리는 최종작인 확증이다. 맹세는 약속한 것을 이행할 것을 하나님 앞에서 약속하는 엄숙한 행위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맹세를 통해 약속하신 것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않을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주시기 위해서였다(17). '맹세로 보증하셨다'는 말은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킬 것을 맹세하셨다는 말이다. 사실 하나님은 맹세가 필요 없으신 분이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굳이 맹세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겠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었다. 한편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은 아브라함을 포함한 믿음의 후손들, 즉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한다(Lane, Morris).

 


 

   본절은 '히나'('위하여')로 시작하는 목적절로 하나님께 맹세하신 목적을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하신 약속과 맹세에 대하여 거짓말하실 수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을 아는 것은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해 가는 우리에게 큰 안위가 된다(18). 그리스도의 재림의 소망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죄악을 피해가야 한다(Morris). '큰 안위'는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알 때에 오는 용기', 또는 '위로'를 가리킨다(Robertson).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 현재 구원을 누리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를 통해 그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과 이로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우리에게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과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다(19). '닻'의 비유는 흔들리지 않는 굳건함을 의미한다. 저자는 소망이 '영혼의 닻'과 같다는 말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바라는 구원의 성취가 확고한 것임을 말해준다. 이러한 소망을 가진 자들은 휘장 안으로 들어간다(19). '휘장'은 구약 시대의 성막 안에 있던 두 개의 방 즉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천을 가리킨다. 이 휘장 너머 안쪽에는 지성소가 있었다. 지성소는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 번 속죄 일에만 들어갈 수 있었다(레16:2).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이 되셔서 들어가심으로(20절) 휘장은 찢어졌고(마 27:51; 막 15:38)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모든 자들이 자유롭게 지성소 즉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이 지닌 소망은 닻과 같이 튼튼하고 안전하여 세상의 어떠한 시련이나 유혹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갈 수 있도록 한다(Morris).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선구자가 되어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우리를 위해 이 휘장으로 들어가셨다(20). '앞서 가셨다'는 말은 '선구자', 혹은 '선두주자'라는 의미를 지니며 동시에 누군가가 그 뒤를 따른다는 것을 말한다.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의 선구자(先驅者)로 멜기세덱과 같은 대제사장직을 수행하기 위해 먼저 휘장 안으로 들어가셨다(5:7-10). 예수께서는 자신의 대속적인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셨으며, 그 구속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하셨다(10:14,  Lane).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셨다는 일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되었다는 것을 말한다(Hewitt).

 

   

 


 


 


 

12) 멜기세덱(7:1-10)

 


 

  가. 그리스도의 예표로서의 멜기세덱(1-3)

 

   저자는 예수께서 멜기세덱과 같은 대제사장이 되신다는 것을 말한 후에 (창 14:17-20)을 인용하여 멜기세덱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 세 가지로 설명하였다(1). 멜기세덱은 1) 살렘(예루살렘)의 왕이었으며, 2)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고, 3) 아브라함을 축복한 자였다. 제정(祭政)이 분리되지 않았던 고대에는 왕이 제사장 직책을 수행하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은 '지존하신 하나님'이란 의미로서, 하나님의 탁월성을 의미한다(Lane, Hanlon, Philo).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였고,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을 제사장으로 인정하고 그에게 십일조를 드렸다(창 14:19,20).

 


 

   멜기세덱의 이름은 의의 왕이며, 살렘(평강)의 왕이었다(2). '멜기세덱'은 '나의 왕'을 의미하는 '말키'와 '의'(義)를 의미하는 '체데크'가 결합된 형태이며, 그 뜻은 '나의 왕은 의롭도다'라는 말이다. 이것은 예레미야가 미래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여호와 우리의 의'(렘 23:6)로 부른 것과 같다. '살렘'이라는 지명(地名)은 '평강'을 의미하는 '샬롬과 동일한 어근에서 비롯된 단어로 '평화'로 번역될 수 있다(Morris).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평강의 왕'(사 9:6)이라고 부른 것과 같다. 저자는 멜기세덱이라는 이름의 의미를 통하여 멜기세덱과 그리스도와의 관련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참된 평강을 주러 오셨으며(마  11:28), 공의를 세우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사 9:7; 11:1-5).

 


 

    멜기세덱은 아비나 어미, 또는 족보가 나타나지 않는다(3).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다'는 말은 사생아나 천한 신분의 사람이나, 성적(性的)인 것을 초월하여 태어난 신적인 사람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Morris). 이것은 성경에 멜기세덱의 부모나 족보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멜기세덱의 부모와 족보가 없다는 사실은 멜기세덱의 제사장직이 아론의 후손과 같이 혈통에 의해 승계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직접적인 부르심에 의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5:5, 6, Lane, Horton). 또한 멜기세덱은 태어난 날이나 죽은 날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하나님 아들과 같이 항상 제사장으로 있다(3). 저자는 멜기세덱의 탄생과 죽음에 관한 언급이 창세기에 기록되지 않은 사실에 착안하여 그의 제사장직이 영원한 것임을 강조하고, 이러한 사실은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임을 말해준다. '방불하다'는 말은 '유사하다'라는 말이며, 이는 멜기세덱과 하나님의 아들이 유사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께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영원한 제사장이라'고 하셨다(시 110:5).

 


 

  나. 멜기세덱과 레위 제사장(4-10)

 

   저자는 4-10절에서 멜기세덱이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을 논증하고 있다.

 

신앙의 조상 아브라함은 노략물 중에서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드렸다(4). 멜기세덱의 위대함은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바쳤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2절에서는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일체의 십분의 일'을 주었다고 기술되고 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전리품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다는 것을 말한다. 아브라함은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그의 후손인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대표하고 상징하는 사람이다. 이런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주었다는 사실은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이 멜기세덱에게 조상 아브라함을 통하여 십일조를 드렸음을 나타내며, 멜기세덱이 레위계통의 제사장들보다 위대하는 것을 말해준다(Cockerill).

 


 

   율법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레위인들에게 십일조를 바칠 것을 명하고 있으며(민 18:21, 24), 레위인들은 다시 그들의 십일조를 제사장들에게 주도록 의무화하고 있었다(민 18:26).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브라함의 직계 자손이었지만, 그들에게서 십일조를 취했다(5). 그러나 멜기세덱은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하였지만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서 십일조를 받았다(2절; 창 14:18-20). 그리고 ‘그 약속 얻은 자’인 아브라함을 위해서 축복하였다(6). 축복의 행위는 신분상(身分上)으로 높은 자가 낮은 자에게 할 수 있는 것이다(Morris).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리고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복을 빌어준 사실은 멜기세덱이 아브라함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말한다(7). '폐일언하고'라는 말은 저자가 자신이 말하고자하는 바의 확실성을 강조할 때 사용된 표현이며, '높은 자'라는 말은 '더 나은', '더욱 탁월한' 혹은 '더욱 위대한'이란 의미로 본서에서 자주 사용된다(19,22절; 8:6; 9;23; 11;40). 또한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서 십일조를 백성에게서 받았으나, 멜기세덱은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로서 십일조를 받았다(8). 여기서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는 저자가 3절에서 언급한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 표현이다. 성경은 멜기세덱의 죽음을 기록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저자는 이러한 멜기세덱과 죽을 수밖에 없는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을 비교하여 멜기세덱이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보다 우월한 존재임을 드러낸다.

 


 

   그뿐 아니라 십일조를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을 통해서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렸다(9).레위인들은 십일조를 받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그들도 멜기세덱 제사장에게는 아브라함을 통해 십일조를 드렸다. 왜냐하면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기 때문이다(10). 레위가 직접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다고 할 수는 없으나 레위를 대표하는 조상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바쳤으므로 그것은 곧 레위가 바친 것과 같다(Lane).  이와 같이 저자는 그리스도의 모형인 멜기세덱의 우월성을 강조하여 결국에는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보다 뛰어나신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을 시사하고 있다(Morris).

 


 


 

 13) 제사 직분의 변역(7:11-17)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11). 레위 제사장들의 제사 행위로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죄악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9:9;10:1). 그러므로 레위 계통의 제사장 직분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게 하는 데 실패하였다(Moffatt). 그래서 아론을 좇는 레위 계통의 제사장 대신에 멜기세덱을 좇는 별다른 제사장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레위 계통의 제사장직을 근거로 하여 율법을 받았다. 그러나 레위 계통의 제사장직이 불완전하여 백성을 온전케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제사장과 함께 율법도 바뀌어야 했다. 왜냐하면 제사 직분이 변하면 율법도 함께 변해야만 하기 때문이다(12). 율법은 레위 지파가 제사장직을 감당하도록 규정하고 있었으나 복음에 따른 새로운 제사장은 레위 지파가 아닌 다른 지파 곧 유다 지파에 속한 자가 제사장이 되었다(Morris). 그 동안 율법에서는 유다 지파가 왕족 지파였기 때문에 이 지파 사람 중에 어느 한 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 수 없었다(13).

 


 

   그러나 율법이 폐지되면서 제사직에도 변화가 왔다. 새로운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유다 지파였다(14). 그는 레위 지파가 아닌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제사장이 되셨다. 그리스도께서 레위 지파에 속하지 않고 유다 지파에 속한다는 것은 그의 대제사장직이 혈통에 의존하지 않고, 근본적으로 새로운 하나님의 질서(秩序)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사실은 멜기세덱과 같은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면 분명한 일이었다(15, 시 110:4). 그리스도께서는 육신에 따른 율법을 좇지 않고 영원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대제사장이 되셨다(16). 그리스도께서는 레위 계통의 합법적인 후손, 즉 혈통을 따라 제사장이 되지 않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었다가 부활하신 영원한 생명의 능력에 의해 대제사장이 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향해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고 선언하셨다(17, 시 110:4).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생명을 소유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14) 폐해진 율법(7:18-24)

 


 

  * 연약하기 때문에 폐혜진 율법(18-19)

 

   이전 계명인 율법은 연약하며 무익하기 때문에 폐해졌다(18). 율법이 '연약하다'('아스데네스')는 말은 사람들이 연약하여 율법을 지킬 수 없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무익하다'('아노펠레스')는 말은 율법이 사람의 양심(良心)을 온전히 깨끗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케 하지 못한다(19). '온전케 한다'는 말('에델레이오센')은 인간이 하나님과 더불어 온전한 관계를 갖는 것을 말한다(11절). 사람들은 제사장직이나 성결 의식과 같은 율법적인 제도에 의해서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가질 수 없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더 좋은 소망을 예비해 주셨으며, 이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게되었다(19).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더 좋은 소망' 즉 새 언약을 주셨으며, 따라서 우리는 이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다(Lane).

 


 

 * 맹세로 되지 않은 율법(20-22)

 

   예수께서 제사장이 된 것은 맹세 없이 갑자기 된 것이 아니었다(20).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엄숙하신 맹세로 말미암아 제사장이 되셨다(21, 시 110:4)). 그러나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은  율법에 근거하여 제사장직을 부여받았으며 이때에 하나님의 맹세는 없었다(21절). 하나님께서  맹세하셨다는 것을 결단코 변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 제사장직은 율법과는 달리  변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다(22). '보증'('엥귀오스')이란 말은 '보증인'이라는 의미로서, '중재자'( '메시테스')와는 달리(8:6; 9:15; 12:24) 보증인 자신의 인격과 생명을 담보로 하여 자기 말을 보증한다는 강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Michel). 그리스도는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하여 새 언약의 보증이 되셨다. 율법은 모세가 중재자가 되어 짐승들의 피를 가지고 맺어졌다. 그러므로 이 경우 모세가 율법의 보증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신다.

 


 

* 일시적이므로 폐혜진 레위 제사장직(23-24)

 

   새 언약의 제사장은 예수 한 분 뿐이지만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은 그 수효가 많았다(23).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아론부터 시작해서 A. D. 70년 예루살렘 멸망에 이르기까지 83명의 대제사장들이 취임했었다고 한다(Antiq. 20,227).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은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숫자가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영원히 살아 계시기 때문에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않는다(24).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은 죽음을 인하여 제사장직을 감당할 많은 사람들이 필요하였던 반면 예수께서는 영원히 살아 계신 분이시므로 뒤를 이을 다른 제사장이 필요하지 않다. 예수님의 제사장직은 “계승”되는 것이 아닌 영원하고 변함이 없는 직분이다. 그는 자기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오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영원한 중보자시요, 영원히 살아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보증인으로 계실 수 있기 때문이다(7:20-24).    

 


 


 

15) 완전한 대제사장 그리스도(7:25-8:5)

 


 

  가.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의 완전성(7:25-28)

 

   예수께서는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다(25). '온전하다'는 말은 '완전히', '절대적으로'라는 의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믿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든 자를 완전하게 구원하실 수 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항상 살아서 그들을 위해 간구 하시기 때문이다(25). 주님께서는 부활과 승천하신 후에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인간들을 위해 중재 사역을 하심으로 성도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신다.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다. 그리스도께서는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분이시다(26). 저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합당한 제사장이 되시는 이유에 대해서 다섯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거룩하신 분이시다. 우리의 중보자가 되실 분은 거룩하신 분이어야만 한다. 그리스도는 ‘악이 없으신 분’이시다. 악이 없다는 말('아카코스')은 '교활하지 않고', '순수하신' 분이라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더러움이 없으신 분’이시다. 더러움이 없다는 말('아마안토스')은 '더럽혀지지 않은', '순결한'이라는 뜻으로 제의적 순결성을 나타낸다(마카비 2서 15:34).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은 정결 예식을 통해서 자신을 깨끗이 해야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온전히 순결하셨기 때문에 이러한 정결 예식이 필요 없다. ‘죄인에게서 떠나 계신다’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도덕적으로 죄인들과 분리되어 있어 근본적으로 죄인인 사람들과는 다른 존재라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는 말은 하나님의 보좌 위에 앉으심 분으로서,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는 분이란 것을 말한다. 이 다섯 가지는 그리스도께서 새 언약의 대제사장으로 지녀야 할 성품과 지위를 나타낸다(Hauck). 이러한 특성을 가지신 그리스도는 우리들을 위해 합당하신 대제사장이시다.

 


 

   주님께서는 죄가 없는 분이시기 때문에 레위 계통의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해 제사 드리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해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같이 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몸으로 단 번에 속죄의 제사를 완성하셨다(27). 레위 계통의 대제사장들은 속죄일에 다른 사람들의 죄를 위해 속죄 제사를 드리기에 앞서 항상 자기 죄를 위한 속죄 제사를 드렸다(5:3; 레 4;3-12; 16:6-10). 왜냐하면 레위 계통의 대제사장도 역시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하나님께 용서를 받아야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죄가 없으신 분이시므로 자신의 죄를 위하여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었다(4:15). 그가 드린 단 한 번의 제사는 자신의 몸을 인류의 구속을 위해 드린 완전한 제사였다.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지만,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케 되신 아들을 제사장으로 세우셨다(28). 저자는 본장을 결론 지으면서 사람인 제사장과 온전하신 제사장이신 그리스도와 세 가지 차이점을 제시한다.

 


 

  (1) 율법과 하나님의 맹세.

 

   옛 언약에 속한 레위 제사장들은 '율법'에 근거하여 제사장직을 물려받았으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맹세를 따라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영원한 제사장으로 세움을 받으셨다.

 


 

  (2) 사람과 하나님의 아들.

 

   옛 언약의 제사장들은 유한한 생명을 소유한 사람을 제사장으로 내세웠으나 새 언약은 하나님의 아들로 영원히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제사장으로 세웠다.

 


 

  (3) 약점을 가진 자와 온전케 되신 자.

 

   옛 언약의 제사장은 불완전한 사람들이었으나, 새 언약은 온전하신 그리스도를 제사장으로 내세웠다.

 


 


 

 나. 이러한 완전한 대제사장이 우리를 위해 있다!(8:1-5)

 

   '중요한 것'은 '요점', '핵심'을 의미한다(Robertson). 저자가 앞으로 하려는 말의 요점은 바로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며, 그가 하늘의 위엄의 보좌에 앉아 계신다는 것이다(1). 성도들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하늘에 계신다는 것을 기억할 때에 크나 큰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하늘에 있는 성소와 장막에서 제사직을 수행하신다. 이 장막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푸신 장막이다(2, 롬 8:34). '부리는 자'('레이투르고스')란 말은 공식적인 일을 수행하는 자란 말로서 '사역자', 또는 '종'을 의미한다. 레위 제사장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지상의 장막에서 제사를 드렸으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있는 장막에서 제사직을 수행하신다(Hewitt). 대제사장은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는 일을 담당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도 드려야 할 제물이 필요했다.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제물은 바로 '흠 없는 자신의 몸'이었다(7:27; 9:14).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다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땅에는 율법을 좇아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기 때문이다(4). 예수께서는 지상의 어느 성소에서도 제사장직을 수행한 적이 없다. 왜냐하면 이 땅의 성소에는 모세의 율법을 따라 제사장 직무를 수행하는 아론 계통의 레위 제사장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승천하셨기 때문에 하늘 성소에서 대제사장이 되셨다. 

 


 

   땅에 있는 제사장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였다(5).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은 지상의 성소에서 그들의 직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그 성소는 하늘에 있는 참 성소의 모형에 불과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고 할 때에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고 명령하셨다(5, 출 25:40). 모세는 산에서 하늘에 있는 성소의 모습을 보았다. 지상에 있던 성소는 그 성소의 식양(式樣)대로 지어진 것이었다. 모세가 지은 성막과 그 안의 모든 기구들은 하늘의 성소와 예수 그리스도의 기능들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예수께서 자신의 몸을 속죄 제물로 바쳤을 때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것(마 27:51)은 더 이상 이 땅의 성소가 필요 없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예수께서 승천하심으로 지상의 성소는 하늘의 성소로, 인간의 제사장 사역은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으로 완전히 대체되었다.

 

   

 


 

16) 두 언약(8:6-13)

 

   주님께서는 구약의 대제사장보다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다(6). '아름답다('디아포로테라스')는 말은 '우월하다'는 말이다. 예수께서 얻으신 대제사장 직분은 레위 계통의 대제사장들의 직분보다 우월하다. 구약의 대제사장은 땅에서 짐승의 피로 제사를 드렸지만, 주님께서는 하늘의 성소에서 자신의 몸으로 영원한 제사를 완성하셨다. '얻으셨다'('테튀켄')는 말은 이미 그러한 직분을 얻으셨으며 현재에도 소유하고 계신다는 것을 말한다. 주님은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운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다”(6). 새 언약은 옛 약속보다 더 좋은 약속을 근거로 해서 세워졌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완전한 순종의 삶과 죽음을 통해서 (렘 31:31-34)에 예언된 새 언약의 시대를 여셨다(Lane). 새 언약은 모세의 중보를 통해 짐승의 피로 세워진 옛 언약과는 달리 주님을 통해 그리스도의 피를 가지고 세워진 언약이다. 만일 첫 번째 언약이 흠이 없었다면 둘째 언약을 요구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7). 새로운 언약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 것은 옛 언약이 불완전하였기 때문이다. 모세의 중재로 주어진 율법은 인간의 중심을 정결케 할 수 없었고(9:9,10), 인간이 지킬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중심을 정결케 하며 성령을 통해 율법을 준수할 수 있는 새 언약을 허락하셨다. 

 


 

   히브리서 저자는 (8-12절)에서 (렘 31:31-34)을 인용하여 새 언약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리라”(8). '날이 이른다'는 말은 미래에 도래할 메시야 시대를 말한다. 그리고 '.새 언약을 세운다'는 말은 1)  옛 언약 즉 모세의 율법을 폐하rpt다는 것을 말하며, 2) 새로운 언약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의해서 성취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새 언약의 상대자는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되어 있다(렘 31:31). 예레미야 당시는 이스라엘과 유다가 한 국가로 존속하지 못하고 두 왕국으로 나뉘어져 있었다(렘 1:2,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나타나는 것은 장래에 두 나라가 하나가 될 것이라는 것을 말한다. “이는 내가 저희 열조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저희와 세운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9).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손을 잡고 즉 부모가 어린 자녀를 안전한 장소로 인도하는 것과 같이(호 11:1-4, Morris)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다. 그리고 시내 산에서 첫 번째 언약을 맺었다. 그러나 이 언약은 이스라엘이 온전히 준수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율법과는 다른 새로운 언약을 주실 것을 예레미야를 통해 약속하셨던 것이다. “저희는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저희를 돌아보지 아니하였노라”(9). 이스라엘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준행 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한다. 그 결과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간에 맺어졌던 옛 언약의 효력은 상실되었으며,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지 못하고 진노의 심판을 선고받았다(렘  22:5).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였다'는 말('에멜레사')은 '무시하다' 혹은 '등을 돌리다'라는 의미로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리셨다는 것을 말한다.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10)”. 예레미야는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갈라져 있었던 이스라엘 왕국이 다시 하나가 될 때를 내다보며 예언하고 있다(Morris). 율법이 돌판에 기록된 외적인 법이었다면(출 32:15,16), 새 언약은 ‘생각과 마음에 기록될 내적인 것’이다. 여기서 '생각과 마음'이란 인간의 내적 본성을 말한다(Robertson, Westcott). 하나님의 법을 '생각에 두고 마음에 기록한다는 것'은 옛 언약이 할 수 없었던 전인격적인 변화를 수반한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언약을 자기 백성의 심비에 새겨서 하나님의 법과 명령에 순종하는 백성이 되게 하실 것이다.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니 아니할 것은 저희가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11).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과 모세를 통해 내리신 계시로 하나님을 알 수 있었다. 새로운 언약 안에 있는 믿음의 공동체는 모두 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Bruce). 왜냐하면 새 언약은 성령을 통해서 사람의 생각과 마음에 기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새 언약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안다고 한 것은 신자들 개개인이 모두 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12). 새 언약 안에는 하나님이 백성들의 죄를 용서한다는 약속이 들어있다(Morris). 옛 언약에 속해 있던 사람들은 자신이 범죄 할 때마다 제사장에게 가서 속죄 제사를 드려달라고 요청해야 했다. 그러나 새 언약의 백성들은 그럴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6절)께서 단번에 신자들의 모든 죄를 속해 버리는 제사를 드리셨기 때문이다(7:27;10:10). 따라서 하나님은 새 언약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신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은 더이상 구약 시대의 제사와 같은 일을 반복할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13). 저자는 이제 새 언약의 내용에서 관심을 돌려 이 언약이 '새로운“'(카이넨) 언약이라는 데에 초점을 맞춘다.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선포하셨다는 것은 모세를 통해 시내 산에서 주셨던 옛 언약 즉 율법의 효력을 폐기시키셨음을 암시한다. 옛 언약은 불완전하여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게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새 언약을 통해서 옛 언약을 폐기시키고(7:11,12) 불완전한 구약 시대의 율법을 온전한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으로 완전히 대체시키셨다.

 


 


 

 17) 모형적인 장막(성막)(9:1-5)

 

   첫 언약에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1) 섬기는 예법-이것은 제사(예배)에 관한 규례를 말한다. 첫 언약에는 백성들이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5대 제사의 규례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2) 세상에 속한 성소-첫 언약에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사람의 손으로 세운 성막이 예비되었다. 그러나 이 성소는 모형이며 실체가 아니었기 때문에 일시적이며 불완전하였다. 이 성막은 두 개의 방 즉 '성소'와 '지성소'로 구분되었다(2). 두 개의 방 중 안쪽 방을 '지성소'라고 불렀으며(3절), 바깥쪽 방을 '성소'라 라고 불렀다. 성소 안에는 등대와 떡상이 놓여 있었다. 등대는 성소의 남쪽에 있었으며 가운데에 중심 줄기를 기준으로 7개의 가지에 등잔과 22개의 꽃 모양의 받침대가 있었다(출 25:31-39; 27:20,21). 그리고 '상과 진설 병'은 성소의 북쪽에 있었으며 12개의 진설 병이 각각 6개씩 두 줄로 놓여 있었고 안식일마다 교환되었다(레 24:8). 이 떡은 무교 병이었다(Philo, Lane).

 


 

   '둘째 휘장'은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구분하는 휘장을 가리킨다(출 26:31-33; 36:35,36; 레 24:3). 둘째 휘장의 뒷편 즉 안쪽에 있는 방을 지성소라고 부른다. '지성소'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장소로 1년에 한번 대제사장만이 들어가 제사를 지냈다(7절).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구속 사역을 이루셨을 때 지성소로 들어가는 것을 가로막던 휘장이 찢어졌다(마 27:51). 이 사건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존전(尊前)에 어떤 제약도 받지 않고 나아갈 수 있게되엇다는 것을 의미한다. '향로'(4)는 본래 성소에 속한 기물로서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휘장 앞에 있었다(출 30:6;40:26). 그런데 본문에서는 지성소에 있는 기물로 나타나고 있다. 향로는 항상 지성소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지성소에 속한 기물(器物)로 볼 수 있다(Hewitt,Bruce, Morris). '언약궤'(4)는 아카시아 나무 즉 조각목으로 만든 상자로서 '증거궤'라고도 불렸다(출 25:22). 언약궤 안에는 세 가지가 들어 있다. 1)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는 하나님께서 광야생활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먹이셨던 양식임을 알리기 위한 증거였다(출 16:32-34). 2) 아론의 싹 난 지팡이는 아론이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 중에서 제사장 직분을 위해서 하나님의 선택함을 입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증거였다(민 17:1-11). 3) 언약의 비석들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받은 언약의 돌 판이며, 이 돌 판에는 십계명이 새겨져 있었다(출 25:16; 31:18; 신 9:9; 10:3,4). 저자는 70인역을 따라 언약궤 뚜껑'속죄소'라고 부르고 있다(출25:17, 21, Philo). 대제사장은 속죄일에 속죄제의 피를 속죄소에 뿌렸다(레  16:14,15). 속죄소인 언약궤의 뚜껑에는 한 쌍의 그룹(cherubim)이 있었다. 이 그룹은 언약궤의 뚜껑 위에서 날개를 펴고 서로 마주 대하는 모습으로서 하나님의 보좌를 수호하는 천사들이다(겔 10:1-8;계 4:6-8).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했다(삼상 4:4; 시 80:1;99:1). 저자는 그룹에 대해서 더 이상의 언급을 피한다. 그 이유는 저자가 본서를 통해서 주장하고자 하는 것이 옛 언약을 상징하는 성막에 대한 자세한 교훈이나 설명이 아니라, 옛 언약과의 비교를 통해서 새 언약의 우월성과 완전성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Hewitt).

 


 


 

18) 서로 다른 제사장들(9:6-10)

 

   제사장들은 첫 장막, 즉 성소에 들어가서 섬기는 예를 행하였다(6). 제사장들이 성소에서 섬기는 일은 세 가지였다. 1) 아침마다 금 향단에 분향하는 일(출 30:7-8), 2) 저녁마다 등대에 불을 밝히는 일(출 27:20,21), 3) 매 안식일마다 떡 상에 열 두개의 진설 병을 진설 하는 일(레 24:8, 9). 그러나 둘째 장막인 지성소에는 대제사장이 홀로 일년에 한 번씩만 들어갈 수 있었다(7, 레 16:11-16). 대제사장은 이 날 자신과 백성들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지성소에 들어갔다. '허물'('아그노에마톤')은 대제사장 자신과 백성들이 모르고 범한 죄로서 ‘무지’를 가리킨다(Morris, Hewitt). 저자는 본절에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매개체로서 '피'를 강조하고  있다. 이는 이후에 언급될 논쟁에서 그리스도의 피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Lane).

 


 

   성령께서는 첫 장막을 통해서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지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을 가르쳐주셨다(8). 옛 언약의 성막이 주는 의미는 새 언약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온전한 구속 사역을 이루시기 전까지는 제사를 통해서만 하나님께로 갈 수 잇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소에 들어가는 길'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Bruce, Morris). 이 장막은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역을 완성하시기 전까지의 상태를 비유한 것이었다. 이때에는 율법을 의지해서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들을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는 없었다(9). 구약 시대의 의식(儀式)인 '예물과 제사'는 외형적이어서 내면적이며 영적인 양심을 온전케 할 수 없었다. '온전케 하다'('텔레이오사이')는 몸뿐만 아니라 양심까지 죄의 오염으로부터 깨끗해지는 것을 말한다(Lane). 구약 시대의 의식은 일 년에 한번씩 행해지는 속죄 제사를 통해서(7,25절; 10:1-3) 영원한 정화를 할 수 없었으므로(Johnsson) 하나님과 섬기는 자 사이의 전인적 관계를 회복할 수 없었다. 이런 것들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었다(10). 장막에 관련된 규례들, 즉 '먹는 것'(레 11장)과 '마시는 것'(레 10:8,9; 11:33-38; 민 6:2,3), 그리고 '씻는 것'(출 30:20; 레 15:4-27; 17:15,16; 민 19:7-13)에 관한 규례들은 모두 육체와 관련된 외형적인 예법이다. '육체의 예법'은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것으로 새 언약으로 대체될 때까지만 그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언약이었다. 옛 언약의 제의들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양심이 깨끗해지고(11-14절) 하늘 성소에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는(10:19, 20) 새 언약이 성취될 때까지만 그 효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19) 영원한 구속(9:10-14)

 

   그러나(개역 성경에는 11절 앞에 '데'('그러나')가 생략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셔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에서 제사장직을 수행하셨다(11). '장래 좋은 일'은 옛 언약이 제공해주지 못했던 일, 즉 온전한 속죄와 하나님께로 자유롭게 나아가게 해주는 새 언약을 의미한다(Morris). 한편 '오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게노메스')는 부정 과거로서 새 언약의 좋은 일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말한다(Morris). 저자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통해서 새 언약의 구속 사역이 성취되었음을 언급하고 있다(24절; 10:20). 그리스도께서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다.(12). 염소는 백성의 죄를 위한 희생 제물이었으며, 송아지는 대제사장 자신과 가족을 위한 희생 제물이었으나 그 효력은 일시적이고 불완전한 것이었기에 매년 속죄일마다 희생 제사를 드려야만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새 언약의 대제사장으로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온전한 구속 사역을 성취하셨다

 

(Lane).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희생 제사는 영원하며 완전한 것이었다(Hewitt). '단번에'('에파  팍스')라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속죄 사역이 옛 언약의 구속 사역과는 달리 반복할 필요성이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Morris, Lane). 그리스도께서는 속죄 사역을 성취하시고 하늘 성소에 들어가셔서 성도들을 위해 대제사장직을 수행하고 계신다.

 


 

   구약 시대에는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였다(13). ‘염소와 황소의 피'는 일반 제사에 드려진 제물이었음은 물론 속죄일에 대제사장과 가족, 그리고 백성의 속죄를 위한 피였으며(12절), '암송아지의 재'는 정결케 하는 의식에 사용되었으며, '재'는 부정한 것을 깨끗게 하는 물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민 19:1-10). 이러한 희생 제물의 피와 재는 효과가 있는 것이나 단지 외형적이며 상징적으로 깨끗해지고 거룩해지는 것에 불과하였다(Morris, Lane). 구약 시대에 짐승을 가지고 이러한 일을 수행했다면,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는 당연히 양심으로 죽은 우리를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할 수 있다(14). 그리스도의 피는 옛 언약의 제사보다 질적으로 우월한 것으로 옛 언약의 제사가 성취할 수 없는 구속 사역을 성취하셨다.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는다‘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속죄 사역을 하실 때에  성령을 통해서 일을 수행하신다는 것을 말한다. '흠 없다'('아모몬')는 말은 결점이 하나도 없는 희생 제물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구속을 위해서 자발적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셨다. 만일 동물들의 피가 의식의 정결 성을 부여해 줄 수 있었다면(음식, 음료, 정결례 같은)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온존케 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20) 중보자(9:15)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구속을 이루시고 새 언약을 성취하셨다(렘 31:31-34).  그리스도는 새 언약의 중보자가 되신다.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들이 범한 죄를 속하시고,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받게 하기 위해서였다(15).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양심까지 깨끗하게 속죄시킴으로 성도들에게 하늘의 기업을 얻을 수 있게 하였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녀들에게 주어질 '기업'은 영원한 구원을 의미한다(1:14; 5:9, Lane).

 


 


 

 21) 새 언약(9:16-22)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며 살았을 때에는 효력이 없다(16). '유언'('디아데케')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1) 언약, 2) 유언. '디아데케'는 신약성경에서 보통 '언약'을 가리키나 본절에서는 '유언'을 의미한다. 유언은 언약과는 달리 반드시 죽음을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도 새 언약의 중보자가 되기 위해서 죽으셔야만 그 언약은 효력을 발생한다. 그러므로 첫 언약도 생명을 상징하는 피 없이 세워지지 않았다(18). 구약에서 언약의 비준(批准)은 희생 제물의 피로 보증되었으며(18; 출 24:3-8; 시 50:5; 렘 34:17-21), 새 언약의 비준은 그리스도의 피로 보증이 되었다. 이와 같이 옛 언약이든 새 언약이든 '디아데케'('유언')의 효력이 발생되기 위해서는 죽음이 필수적인 조건이었다(Morris).

 


 

   모세는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하였다. 그리고 그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렸다(19). 피 뿌림의 과정을 통해서 언약의 비준이 결정되었다. '물과 양털 그리고 우슬초'는 대개 시체를 만져서 부정해진 자나(민 19:1-22) 문둥병자(레 14:4-6, 49-51)를 정결케 하는데 사용되었다. 또한 구약성경에서 '책'에 뿌렸다는 사실은 나타나지 않지만, 이것은 사람의 손이 닿은 책이 부정할 수 있기 때문에 정결례(淨潔禮)를 행했던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Morris). 그리고 나서 모세는 백성들에게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고 선포하였다(20, 출 24:8). 또한 모세는 피를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다(21). 장막의 봉헌 후에 모세는 아론 집안의 제사장들을 피와 기름으로 거룩하게 하였으며(레 8:23,24,30) 또한 장막과 그에 필요한 모든 기구에 기름을 발라 거룩하게 하였다. 구약성경에는 장막과 모든 기구에 기름만 바른 것으로 나타나나 본절에서는 피를 뿌렸던 것처럼 장막과 기구에도 피를 뿌린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Bruce, Morris).

 


 

   이와 같이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된다. 그러므로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22). '거의'('스케돈')라는 말은 정결케 함에 있어서 피를 제외한 다른 예외적인 방법이 있음을 나타낸다. 그 예외의 방법은 네 가지이다. 1) 전쟁터에서 노략한 전리품은 '물'로 정결케 하였다(민 31:23). 2) 속죄제에서 비둘기조차도 드릴 수 없는 가난한 자는 곡물'을 제물로 드려 정결케 하였으며(레 5;11-13), 3) 때로는 '향'을 속죄제로 드리기도 하였다(민 16:46). 그러나 이러한 정결 방법은 예외에 불과하다. 4) 대부분의 경우 희생 제물이 피를 통해서 정결케 되었다. '피 흘림'('하이마텍퀴시아스')은 피를 통한 속죄를 의미한다. 사람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하여 타락하였고 그 결과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죽을 죄인이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생명이 있는 피 흘림이 필요하였다(레 17:11). 첫 언약에서는 희생 제물의 피를 통해서 죄 사함을 얻고 생명을 소유할 수 있었다. 피 흘림은 죄 사함을 얻기 위한 절대적인 조건이었다.

 


 


 

 22) 위대한 제사(9:23-28)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하늘에 있는 것들은 이것보다 더 좋은 제물로 정결케 해야한다(23). 구약에서 모세를 통해 허락하신 첫 언약과 장막을 통한 희생 제사는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이었다. 이러한 모형들을 정결케 하기 위해서는 짐승의 피 흘림이 필요했다. 그러나 '하늘에 있는 것들'은 '더 좋은 제물', 즉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영적이고 내적인 양심의 정결을 필요로 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셨으며, 이제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앞에 나타나셨다(24).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를 통해 들어가신 곳은 지상의 성소가 아니다. 그리스도는 지상 성소의 실체인 하늘이 성소에 들어가셨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우리들을 위해 중보하시기 위함이었다(Morris, Bruce).

 


 

   주님께서는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짐승의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던 것같이 자주 자신을 드리지 않으신다(25). 구약의 대제사장들은 일년에 한번씩 속죄일에 자신과 가족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희생 제물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셨다(레 16장). 이러한 속죄 행위는 매년 반복되었으며 이 속죄 행위를 위해 매년 다른 희생 제물의 피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구속 사역을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은 영원한 효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반복해서 드릴 필요가 없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여러 번 제물이 되셔야 했다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기 위해서 세상 끝에 세상에 오셨다(26). '단번에'는 앞서 언급한 '자주'와 대조되어 그리스도께서 역사의 절정에 나타나셔서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림으로 죄를 완전히 제거 하셨다는 것을 말한다(Bruce, Lane, Hewitt). 한편 '세상 끝'은 구속사역의 성취의 때인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상에서 구속 사역을 성취함으로 개인의 종말과 역사의 종말을 도래(到來)케 하셨다(Bruce, Morris).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며, 그 후에는 심판이 있을 것이다(27). 사람이 태어나서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이치이며 하나님의 섭리이다. 이 죽음은 불가항력적인 것이며 최종적인 것이다. 죽음 이후에 모든 사람들은 심판을 받게 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다. 그리고 그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실 것이다(28). 이 말은 (사 53:12)에 나타난 주의 종의 사역을 암시한다. 그리스도께서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죽으셨다.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죽음이 인생의 최종성을 의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 또한 최종적(最終的)인 것이다. 그가 자신을 '단번에' 드린 것은 모든 사람들의 죄를 온전히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속죄제를 드리기 위해 지성소에 들어갔을 때 백성들은 근심 가운데 대제사장이 직무를 마치고 지성소에서 나오기를 밖에서 기다린다. 대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왔을 때 백성들은 대제사장이 대신 드린 속죄제를 하나님께서 받으셨음을 확신하게 된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늘 성소에 들어가셔서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셨다가(24절) 자신을 기대하는 자를 위하여 두 번째  나타나시는 재림('파루시아')을 의미한다(Lane, Bruce). 옛 언약의 대제사장들이 속죄제의 제물을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간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는 초림과 십자가의 구속 사역을 통해 백성들의 죄를 완전히 제거하시고 하나님 존전에서 중보 사역을 행하셨다. 그리고 또한 구약의 대제사장들이 속죄제를 드리고 성소에서 나올 때 밖에서 기다리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속죄제를 받으셨음을 확신하고 기뻐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심으로 그리스도를 기대하며 기다리는 자들은 구원의 상속자로서(1:14;2;3, 10;5:9) 영원한 기업을  누리며  완전한  구원을  소유하게  된다(Hewitt, Lane, Bruce).

 


 


 

23) 그림자인 구약의 제사(10:1-4)

 

   “왜냐하면(개역 성경에는 1절에 '가르'(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해마다 늘 드리는 제사로는 그에게 나아오는 자들을 늘 온전케 할 수 없었다(1).. 히브리서 저자는 율법이 장차 올 새 언약의 그림자였고 참 형상이 아니었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다. '장차 오는 좋은 일'은 새 언약을 통해서 이루어질 새 시대의 축복을 가리킨다(Peterson). 옛 언약인 율법은 해마다 속죄일에 동물을 희생 제물로 드리는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였지만, 그것은 불완전한 것으로 죄를 제거하는 데에 아무런 효력이 없었다(Peterson). 만일 그 제사가 백성들을 완전하게 할 수 있었다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므로 드리는 제사를 중단하였을 것이다(2). '죄'('쉬네이데신 하마르티온')는 문자적으로 '양심의 죄'를 의미한다. 율법에 의해서 행해진 희생 제사는 양심의 죄를 정결케 할 수 없었다(9:9). '정결케 되다'(`케카다리스메누스')는 말은 '최종적인 정결을 성취할 수 없었다'는 말이다. 만약 율법이 완전하여서 온전히 정결케 할 수 있었다면 매년 속죄일에 희생 제사를 반복적으로 드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매년 속죄일에 희생 제사를 드렸다는 사실은 율법의 불 완전성과 한계성을 보여주고 있다.

 


 

   구약의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였다(3). 옛 언약의 제사는 해마다 다시 드려야 했기 때문에 그 때마다 죄를 기억나게 하였다. 그러나 새 언약은 다시는 단번에 모든 죄가 속해졌기 때문에 더 이상 죄를 기억하지 않게 해주었다(렘 31:34). 구약의 제사가 죄를 생각나게 한 것은 "황소와 염소의 죄가 능히 죄를 없이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4). `황소와 염소의 피'는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희생을 보여주는 상징에 불과했다.

 

 


 

 24) 하나님의 성육신(10:5-7)

 

   본문은 (시 40:6-8, 시 39:6-9, LXX)의 인용이다. 이 시편은 본래 다윗의 시였으나 저자는 본문을 기독론적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에게 적용시키고 있다. '세상에 임하실 때'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들어오실 때 즉 성육신 때를 가리킨다.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신다”(5). 저자는 본문에서 옛 언약을 나타내는 네 가지 종류의 제사(번제(`올라'), 속죄제('해타트')-속건제 포함-, '제사'(제바흐)-화목제-, '예물'(민하)은-곡물 제사 즉 소제)를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네 가지의 제사는 레위기에 묘사된 주요한 종류의 제사들을 모두 내포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제사를 기뻐하시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위해서 “한 몸을 예비하셨다(6). 하나님께서 에비하신 몸은 바로 그리스도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7). '두루마리 책'('케팔리디 비블리우')은 문자 적으로 두루마리의 봉을 가리키는 것으로 토라 즉 모세 오경을 포함한 모든 구약성경을 의미한다(Bruce, Hewitt, Morris). 저자는 그리스도께서 율법으로 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Lane, Kistemaker).

 


 


 

 25) 그리스도의 헌신(10:7-10)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제사를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하셨고, 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한 몸을 보내셨다고 말하셨다(7-8).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첫 것을 폐하신 이유는 둘째 것을 세우시기 위함이었다(9). 참된 언약 즉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에 자발적으로 순종하여 세우신 새 언약은 옛 언약인 첫 것의 폐지를 요구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우리가 거룩함을 얻게되었다(10).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룬 '방법'은 자신의 몸을 속죄의 재물로 단번에 드리는 것이었다. `드리다'(`프로스포라스')느 말은 70인역에서 희생 제사를 드릴 때 사용된 용어이다(시 39:7; 단 3:38). 저자는 '프로스포라스'를 사용하여 효력이 없는 동물 희생 제사와 온전하고 효력있는 희생 제사, 즉 그리스도의 몸을 드리는 인격적인 제사를 비교하고 있다(Taylor, Manson). 그리스도께서 몸을 드리신 것은 완전한 것으로 더 이상 반복될 필요가 없는 '단번에' 드린 제사이다. `단번에'('에파팍스')란 말은 구속 사역의 완전성을 말해주고 있다. '거룩함을 얻었다'는 말은 하나님께로 성별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26) 교회를 온전케 하심(10:11-14)

 

   구약의 제사장들은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렸다. 그러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였다(11). 아론 계통의 제사장들은 날마다 성소에 서서 자신의 직무를 행하였다. 지상의 제사장들이 '서서' 직무를 감당한다는 사실은 그 직무가 완성되지 않았으며 동물 희생  제사로는 죄가 온전히 제거되지 않아 양심을 온전히 깨끗게 할 수 없기 때문에 계속적으로 반복되었다는 것을 말한다(Bruce, Lane, Morris).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위해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12). '앉으셨다'는 말은 지상의 제사장들이 '서서' 직무를 수행하는 것과 대조되는 것으로(11),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옛 연약의 속죄 사역과는 달리 온전히 성취되어 반복할 필요가 없는 것임을 말해준다(Lane, Hewitt).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다. 한편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는 시편 110:1의 인용으로 등극(登極)하신 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의 모습을 나타낸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하나님의 백성인 그리스도인을 위하여 중보 사역을 행하신다(8:1-6).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신다”(13).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셔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원수들이 굴복할 때까지 기다리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원수가 멸망할 때까지 성도들을 위해 중보 사역을 행하실 것이다. 저자는 이런 진술을 통해서 이미 그리스도께서 원수들에 대해 승리하셨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다”(14). '한 제물로'는 속죄제물이신 그리스도의 몸을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제사를 통해서 거룩하게 된 그리스도인들을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다. 그 결과 그리스도인은 단지 외적인 면만이 깨끗게 된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양심까지 깨끗하여졌으며, 동시에 하나님 앞에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Bruce).

 


 


 

 27) 성화(10;15-18)

 

   히브리서 저자는 (렘 31:33-34)을 인용하여 새 언약에 대한 또 다른 성령의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그 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고 하셨다. 이것은 바로 새 언약을 말한다. 저자는 이 인용에서 새 언약에 대해 두 가지 약속을 언급하고 있다(16-17).

 


 

1) 하나님의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할 것임.

 

   이것은 새 언약 하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더 이상 외적인 율법에 의존할 필요가 없으며 율법을 이마나 팔에 기록할 필요가 없음을 말한다(출 13:16; 신 6:8).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결단과 의지를 나타내며 내적인 생활을 가리키는 '마음'과 '생각'에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였기 때문이다(Behm, Lane).

 


 

2)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옛  언약 하에 있던 희생제사는 '죄를 생각나게 하는  것'이어서 반복해서 제사를 드릴 수밖에 없었지만(3절), 새 언약 하에서 드린 그리스도의 희생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게 되는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그리스도인의 죄를 기억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희생이 더 이상 반복할 필요가 없는 영원한 제사임을 의미한다(Bruce, Lane).

 


 

   구약의 희생 제사들은 미래를 위한 영적인 유익을 가져오지 못하였다. 그 희생 제사들은 단순히 미래의 유익을 예시해 줄뿐이었다. 만일 그것들이 용서를 가져다주었다면 제사를 반복하여 드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이것들은 사람들의 죄에 대하여 계속적으로 일깨워 주는 역할을 할뿐이었다. 분명히 동물들의 피는 죄를 제거할 수 없다. 예수님은 옛 희생 제도의 불 충분성을 아셨기 때문에 자신을 제물로 드리셨다. 그는 한 번의 희생 제사를 드리셨고 이 희생 제사는 그를 영원히 아버지의 오른 편에 앉게 하였다. 이제 그는 자신의 사역의 궁극적 결과만을 기다리신다. 그는 다른 모든 희생 제물을 폐하는 새 언약을 가져 오셨다.      

 


 


 

28) 하나님께 나아감(10:19-23)

 

   히브리서 기자는 수신인들에게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고 말하고 있다(19). 지상의 성소에 속한 자들 중에서 오직 한사람, 즉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 번 속죄 일에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새 언약 하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담력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새 언약 하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담력을 소유하게 되는 것은 “예수의 피”를 힘입을 때에만 가능하다. 하나님께서 나아가는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다”(21).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희생시켜 이루신 구속 사역을 통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하신 길은 세 가지 특성을 지닌다(Lane).

 


 

1) 새로운 길이다.

 

   이 `새로운 길'은 두 가지 차원 즉 시간상으로 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길이 그리스도의 희생  결과로 그리스도인 공동체에게 현재 주어진 것임을 나타내며, 질적으로 옛 언약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 새 언약에서는 변할 수 없는 영원한 것임을 말한다.

 


 

 2) 산 길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길이 하나님 앞에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도록 하여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임을 말한다.

 


 

 3) 휘장 가운데 열어놓은 길

 

   또한 이 길은 '휘장' 가운데 열어놓은 길이다. '휘장'은 성소와 지성소를 분리하는 막이다. 이 막은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게 하는 장애물이 되었다. 그런데 이 휘장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실 때 찢어졌다(마 27:51; 막 15:38; 눅 23:45). 이 사건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 휘장은 그리스도의 육체를 상징한다. 왜냐하면 십자가상에서 그리스도의 몸이 찢겨졌을 때 휘장이 갈라졌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신다”. '큰 제사장'은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대제사장으로서(12-14절) '하나님의 집' 즉 하나님의 백성이 모인 공동체인 교회를 다스리시며 중재사역을 행하신다(Bruce, Michel, Hewitt).

 

“성도들은 마음에 피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제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22). '마음에 뿌림을 받았다'는 말은 구약 시대의 제사장들이 피를 뿌림으로 정결케 한 일을 생각나게 한다(출 29:21; 레 8:30). 구약 시대의 제사장들과 마찬가지로 새 언약에 참여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서 옛 언약 하에서 깨끗게 할 수 없었던 양심이 온전히 깨끗게 되어 하나님 앞에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맑은 물'은 정결 의식에 사용되는 물을 가리키지만(민 5:17; 겔 36:25), 본문에서는 이 말이 내적 정결을 통해서 깨끗게 된 양심에서 비롯된 하나님을 향한 고백을 나타낸다(Bruce). 따라서 '몸을 맑은 물로 씻었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 성취된 내적 정결을 나타내는 외적인 표징으로서의 '세례'를 의미한다(Windisch, Bruce, Morris, Spicq, Dahl).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서 내적인 정결을 경험하고 세례를 통해 깨끗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향해 고백을 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 저자는 본문에서 수신자들에게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것을 권면하면서 두 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1) 참마음.

 

   이것은 하나님께서 새 언약 하에서 자기 백성에게 '새 마음'을 창조하시겠다는 약속을 상기시킨다(렘 31:33). 이러한 약속은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에게 성취되었으며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의 더럽혀진 양심은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 정결케 되었다(18절; 9:13,14).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해진 양심 곧 진실한 마음으로 나아가야 한다(Bruce, Morris, Hewitt).

 


 

 2) 온전한 믿음.

 

   이것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의해서 창조된 것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성과 확실성을 가리킨다(Morris, Lane). 그리스도인들은 대제사장이시며 자신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도록 하신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고 신뢰해야만 한다.

 


 

   이러한 새 언약을 주신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신이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야 한다(22). ‘믿는 도리의 소망'은 '우리가 고백하는 소망'이라는 의미이다. 이 '소망'은 예수의 제사장적인 행위와 연관된 것으로 그 내용은 현재와 미래의 구원이다(Lane).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적 행위에 의해 약속하신 종말론적 구원을 온전히 성취하실 것을 의심치 말고 확신 가운데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소망 즉 종말론적 구원을 성취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굳게 잡을 수 있는 것은 그 약속을 하신 하나님께서 신실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29) 그리스도의 견인(10:23-24)

 

   그러므로 성도들은 “서로 돌아보아 격려해야 한다”(23). 성도들은 서로 돌아보면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해야 한다.

 

 

1) 사랑

 

   이것은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서 필요로 하는 것을 돌아보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사랑은 반드시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나타나야만 하는 행동 표현이다(Morris).

 


 

2) 선행

 

   이것은 돌보는 사랑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행위이다(6:10).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능동적인 지원과 관심은 당시 시련으로 인해 좌절하기 쉬운 공동체 삶 속에서 매우 긴급하고 중요한 것이었다(Bruce, Peterson).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격려와 돌봄은 공동체의 일원들로 하여금 용기를 잃지 않고 소망을 굳게 지켜 확신 가운데 거하게 하며 친교와 확신을 복 돋우는 자극제가 된다. 말세를 당한 성도들을 굳건히 세워 주는 한 가지 방법은 성도들 상호간의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교제이다.  

 

   

 


 

 30) 배도(10:25-27)

 

   그러므로 성도들은 “모이기를 폐하는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교제를 강화해야 한다”(25). 모임을 폐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모임의 협동적인 생활을 파기하게 되며, 상호 위로와 격려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기 때문에 저자는 모이기를 폐하지 않도록 수신자들에게 권면하고 있다. '그 날'은 주님의 재림을 의미한다. 저자는 그 날 곧 심판의 날이 다가오면 올수록 모이기를 폐하지 말고 더욱 열심을 내어 다가오는 고난과 박해 속에서 서로 격려와 위로를 통해 담대해지기를 권면하고 있다.

 


 

   히브리서 저자는 다시 한 번 배교 자에 대해 엄중한 경고를 한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26). '진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얻은 구원을 말하며, '짐짓 죄를 범한다'는 말은 고의적으로 계속해서 범죄함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하시는 계시와 그리스도를 통해 드려진 희생 제사의 효력을 거부하고 계속적으로 범죄 하는 자는 더 이상 속죄할 수 있는 제사가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자는 의도적이며 자발적으로 배교하였으며 유일한 구원의 방법인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들은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게 될 것이다”(27), 의도적으로 배교하고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자에게는 속죄할 수 있는 제사가 없고 오히려 심판만이 있을 뿐이다. '맹렬한 불'('퓌로스 젤로스')은 문자적으로 '불의 질투'를 의미하는 것으로 백성의 배교로 인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손상되어 생겨난 격정적인 질투를 의미한다(Montefiore). 이것은 사 26:11을 암시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대적자들을 멸망시킴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배교자들은 하나님의 대적자로서 그들에게는 오직  맹렬한 불의 심판만이 존재한다.

 


 


 

 31) 사도들의 운명(10:28-31)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아들을 통해 주신 약속을 배반한 자가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28). 저자는 본절에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과 모세의 율법을 비교하여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거부하는 것이 모세의 율법을 어기는 것보다 훨씬 더 엄한 심판을 자초하는 것임을 드러내고 있다. 본문은 신 17:2-7을 인용한 것이다. 신명기 본문은 우상 숭배를 한 자에 대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 숭배에 빠졌을 때 두 세 사람의 증인만 있으면 그들은 용서받지 못하고 죽임을 당했다. 그 형벌이 훨씬 더 엄한 것은 옛 언약보다 새 언약이 훨씬 탁월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새 언약을 성취시킨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거부하고 배교 하는 것은 옛 언약 하에서 우상 숭배하는 것보다 더 강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거부하는 배교 때문에 고소를 당하는 이유는 세 가지이다.

 


 

1) 하나님 아들을 모독함

 

   예수의 칭호로 사용된 '하나님 아들'은 그리스도인 공동체 내에서 이미 잘 알려진 공식적인 신앙고백이었다(4:14, lane). '하나님의 아들을 밟는다'는 말은 그리스도를 모독하는 행위를 말한다. 배교는 단순히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거부하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모욕하는 행위이다(Morris, Bruce).

 


 

2)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김

 

   '언약의 피'는 옛 언약을 세울 때 사용되었던 피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출 24:8) 새  언약을 세울 때 희생되었던  그리스도의 피 곧 십자가상의  죽음을 의미한다(9:20; 마 26:28; 막 14:24; 눅

 

22:10; 고전 11:25). 새 언약을 위해서 흘린 그리스도의 피는 옛 언약 하에서 제거할 수 없었던 양심의 더러움까지 정결케 하며 거룩하게 하는 매우 귀중한 것임에도 불구하고(10, 14절; 13:12) 배교자들은 그러한 그리스도의 피를 가볍게 여기고 사소한 것으로 이해하며 보통 사람의 죽음과 동일하게 여긴다(Morris,Lane). 배교자의 이러한 이해는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서 이루어지는 모든 축복과 은혜를 거부하는 것이다(Bruce).

 


 

3)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함

 

   성령께서 '은혜의 성령'으로 나타나는 곳은 신약성경에서 이곳뿐이다. `은혜의 성령'은 (슥  12:10)을 암시한다(Windisch, Michel). 만약 이것이 의도된 암시라면 구원을 가져다주는 은혜를 공동체에 부어주신 오순절의 성령을 의미한다(Michel). 하나님께서 회중에게 부어주신 성령은(2:4; 6:4)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종말론적 은혜를      나타내는 표시이다(Lane, Schweizer). 따라서 본절의 '은혜의 성령'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영' 혹은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는 영'을 가리킨다(Morris). 의도적으로 배교하는 것은 은혜를 가져다주는 성령을 거부하는 것으로 성령을 모욕하는 죄이며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이다(막 3:29, Bruce, Hewitt).

 


 

    본절은 신 32장에서 인용된 두 가지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저자는 인용문을 통해서 배교자에 대한 심판이 공동체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으며(Lane) 그 심판의 엄중함을 나타낸다(Hewitt, Bruce). 하나님께서는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하셨다(신 32:35). 이 말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출하시고 변호하심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당신을 잘 섬겼을 때 원수를 갚아주시고 구원을 이루시며 변호하시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직접 개입하셔서 공정한 의의 원리에 입각해서 심판하신다(Bruce, Morris). 이러한 하나님의 원리는 하나님 백성에게 뿐만 아니라 배교자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기 때문에 본문은 배교자에게 반드시 심판이 임할 것임을 시사한다(Lane).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이 말은 다윗 왕이 인구 조사를 한 후 심판을 받을 때 한 말이다(삼하 24:14; 대상 21:13). 다윗 왕은 사람의 손보다 하나님의 손에 빠지기를 원하였다. 죄를 범할 경우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배교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심판이 피할 수 없는 무서운 것이다(Lane, Morris). 그래서 저자는 `포베론'('무서울진저')을 27절의 '포베라'('무서운')와 연결시켜 배교자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의 엄함을 나타내고 있다.

 


 


 

 32) 환난의 길(10:32-34)

 

   그러나(개역 성경은 32절 앞에 '데'('그러나')가 생략되어 있다) 성도들은 “전날에 그들이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해야 한다”(32). 수신자들은 복음을 통해서 구원의 빛을 마음에 받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박해를 받았다. '싸움'은 본래 운동 경기를 가리키나 본절에서는 박해를 의미한다(Lane). 수신자들은 박해를 받았으나 그것에서 좌절하지 않고 잘 인내하였다. 히브리서 저자는 본절에서 수신자들이 과거에 겪었던 박해와 인내를 상기시킴으로 수신자들이 배교에 이르지 않고 하나님을 끝까지 바라보도록 권면하고 있다. 그들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고 그들의 산업을 빼앗겼다”. '비방'은 거짓으로 고소하여 비난하는 것을 나타내며 '환난'은 폭력을 동반한 박해를 의미한다(Lane). 또한 '구경거리'는 공적이고 공개적인 박해를 받는 것을 나타낸다. 수신자들은 과거에 주변 사람들에게 거짓으로 고소를 당하기도 하고 폭력을 당하기도 하며  공개적으로 조소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한편 '빼앗기는 것' 폭도들에게 강제로 재산을 빼앗기는 고난 당한 것을 말한다.

 


 

   또한 그들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며, 갇힌 자를 동정하였다”. 본문은 고난 당한 그리스도인들과 동참함을 기록하고 있다. 당시 재산이 하나도 없이 감옥에 갇힌 자는 밖에 있는 사람이 돌보지 않으면 굶어 죽기 쉬웠기 때문에 당연히 돌보아야 했다. 그러나 당시 그들을 돌보는 것은 감옥에 갇힌 자와 동일한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감옥에 갇힌 자를 돌보는 것은 상당한 위험을 동반하는 행위였다(Bruce).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감옥에 갇힌 자들을 돌봄으로 감옥에 갇힌 자들의 고난에 동참하였다. 비록 이런 행위가 당시에는 위험한 것이라 할지라도 장래에 하나님으로부터 칭찬 받을 만한 행위이다(마 25:36). 그들이 이렇게 “기쁘게 고난을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알기 때문이다”. 수신자들이 앞서  언급한 위험과 고난을 당하면서도 즐거워했던 것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큰상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기억했기 때문이다(눅 6:22,23, Bruce). 저자는 고난과 위험을  감수하며 인내한 그리스도인들이 받을 `산업'을 수신자들이 지상에서 고난 당하면서 상실했던 '산업'과 연결시켜 비교함으로 고난을 인내한 그리스도인들이 받을 산업이 훨씬 더 탁월함을 드러내고 있다(Lane).

 


 


 


 

 33)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말씀(10:35-39)

 

   그러므로 수신자들은 담대함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큰상을 얻기 때문이다. (35). '담대함'은 본서에서 두 가지 경우에 사용되었다. (1)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4:16;10:19). (2) 새 시대에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용기 있는 신앙을 나타낸다(3:6). 본절은 후자의 경우로 사용되었다. '담대함'은 그리스도인의 표식이며, 그리스도인들이 비방과 재난을 당하면서도 담대함을 잃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받을 상 때문이다(34절;11:26;눅 6:23). 하나님은 믿음 안에서 당신을 찾는 자에게 상주시는 분이시며(11:6) 그 상은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온전한 구원의 축복을 가리킨다(23, 25절;9:28, Lane). 수신자들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해서이다(36). `필요함'은 단순히 바라는 어떤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필요한, 없어서는 안될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담대함뿐만 아니라 인내도 그리스도인의 표식임을 시사한다(Lane).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서 고난과 위험에 직면한다 할지라도 잘 인내하면 하나님으로부터의 '약속'을 받게 된다. 그 '약속'은 새 언약 하에 있는 하나님 백성이 바라보아야 할 최종적인 목표로서 앞 절의 `큰상'과 동일하며 `영생'을 의미한다.

 


 

   왜냐하면(개역 성경에는 37절 앞에 있는 '가르'('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실 것이기 때문이다(37). 본문은 합 2:3, 4(LXX)의  인용이다. '오실 이'는 재림 때에 오실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지체하지 않으시고 속히 오실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고난과 위험 속에서도 인내해야만 한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고 선언하셨다. '나의 의인'은 '살리라'와 '물러가면'의 주어로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속히 오시리라는 사실을 믿고 직면한 고난과 박해에 대해 담대하게 맞서며 인내하면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삯과 약속을 허락하실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뒤로 물러나 인내하지 못하고 배교한다면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성도들은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들이다“(39). 

 


 


 


 


 


 


 


 


 


 


 


 


 


 


 

34) 믿음의 탁월성(11:1-3)

 


 

  가. 바라는 것을 이미 있는 것으로 간주하게 하는 믿음(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1(상))-여기에서 말하는 ‘믿음’은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참 믿음”을 말하며, ‘바라는 것들’은 미래에 완성될 약속들을 말한다. 하나님의 약속은 미래와 완성될 것이기 때문에 인내력 있는 믿음이 요구된다. 그리고 '실상‘('휘포스타시스')은 '...아래에 서다'(substance)는 뜻으로, 성경에서 '확증'(NIV)', ’기초‘, ’근거‘, 그리고 '실체로 존재하다'(Lane) 등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에 대하여 ’확신‘을 갖게 해준다(확증). 믿음을 가진 자는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하심을 신뢰하기 때문에 그 약속이 분명히 이루어질 것을 확신한다. 그리고 이러한 확신은 그 믿음의 ’기초‘와 ’근거‘가 되어서 그를 더욱 굳세게 만들어 주며,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때까지 그를 지탱해주고 든든히 서서 요동하지 않게 해준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아무리 긴 어둠의 터널 속을 지난다고 해도 끝까지 견디고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을 ’현재에 실체로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해준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이 아직 손에 잡히지는 않았지만, 그것의 실체를 현재에 소유한 것과 같이 생각하게 한다. 왜냐하면 믿는 자는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은 결코 어기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을 현재에 실체로 존재하는 것처럼 마음에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잠자는 자들 중에 다시 살리셔서 첫 열매로 세워주심으로 장래에 우리들이 다시 살게 될 것이라는 실체를 우리 마음에 가질 수 있게 해 주셨다.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1(하))-불신자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계시된, ‘눈에 보이지 않고 장래에 이루어질 일들’은 모호하고 허구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그러한 일들을 깨달을만한 기능이 전혀 없다. 왜냐하면 육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성령의 일이 미련하게 보이기 때문이다(고전 2:14). 그러나 믿음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는 그것을 본다. 왜냐하면 믿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입증할 수 있는 증거를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 ‘증거'('엘렝코스')란 말은 증거를 통해서 확신시킨다는 동사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이 말은 법률 용어로 사용되면  '객관적인 증거'를 제시하여 어떠한 사실을 확신하게 만들어 주는 것을 말한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세계와 미래에 성취될 약속들에 대한 증거를 제시해 준다. 믿음은 마치 망원경이나 현미경으로 사물을 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육안으로 보는 자는 먼 곳의 사물이나 미세한 물건을 볼 수 없지만, 망원경이나 현미경을 통해서 보는 자는 먼 곳의 장면이나 미세한 물체를 볼 수 있다. 육에 속한 사람은 과학적 증거만을 믿으려고 한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들에 대해서는 믿지 못한다. 그러나 믿음은 성령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그 분이 약속하신 모든 것들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증거를 제시해 준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진 자들은 성령 안에서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흔들리지 않는 분명한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2)-'선진들'은 구약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께 인정받은 모든 신앙인들을 말한다. 구약 시대의 신앙 위인들은 이러한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증거함을 받을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신앙의 조상 아브라함을 그의 믿음을 보고 그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사람인 아브라함을 친구처럼 대해 주셨다(대하 20:7). 또한 다윗도 그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증거를 받았다(삼상 13;14). 구약 시대나 신약 시대를 막론하고 항상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3)”-이 모든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고 하는 것은 믿음이 없이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창조 사건은 우리가 눈으로 확인 할 수 없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성경을 통해서 태초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하는 것을 믿을 수 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우주는 창조 이전에 존재했었던 어떤 물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으로부터 만들어 졌다. 그러나 창조에 대한 사실은 믿음으로 밖에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35) 아벨의 믿음(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다(4).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물은 열납(悅納)하셨으나 가인의 제물은 거절하셨다(창 4:3-50. 그러나 성경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70인 역에 따르면 가인의 제물이 거절당한 이유는 제사 절차상의 결함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가인은 제물을 드릴 때 제물을  나누는 법대로 나누어 놓지 않았으나, 아벨은 제사 법대로 바르게 제물을 잘라서 드렸다는 것이다(Aptowitzer, LXX 창 4:7). 또한 필로는 아벨의 제물은 생명체였던 반면에 가인의 것은 생명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요세푸스는 가인의 행동에 도덕적인 결함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히브리서 저자는 본문에서 그 이유는 믿음때문이었다고 밝혀주고 있다. 즉 아벨이 드린 제사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믿음을 가진 제사였으나, 가인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벧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은 것은 아벨의 믿음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드린 아벨의 제물을 열납하셨다(창 4:4).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그 의 제물을 열납 하심으로 그의 믿음을 증거해 주셨다. 가인은 아벨을 죽인 후에, 아벨은 죽어서도  믿음을 통해 후손들에게 교훈하고 있다(창 4:10). 창세기에서는 '핏소리'가 호소한다고 했으나, 헬라어 본문에는 '디헤스'('그것을 통하여')라고 번역되었다. 그것은 바로 '믿음', 또는 '제사'를 말할 수도 있다. 아벨의 제사와 그의 믿음은 언제까지나 살아있는 소리가 되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참다운 예배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가르쳐주고 있다.

 


 


 

 36) 에녹의 믿음(11:5-6)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그가 다시는 세상에 보이지 않았다(5, 창 5:21-14). 맛소라 본문에는(MT)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심'으로 되어있는 반면 70인역에는 '하나님께서 그를 옮기셨으니'로 되어 있다(창 5:24, Bruce, Morris, Lane). '옮기셨다'('메테데켄')는 말은 '변화하다'('메타티데미')는 말의 단순 과거 수동형으로 '바뀌다', '변화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고 몸이 변화되어 하늘로 올리워?다는 것을 의미한다. 히브리서 저자는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하늘로 옮기울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인이 바로 그의 '믿음'때문이었다고 선언하고 있다. 에녹의 믿음은 그가 옮기움을 받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이었으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었던 근본 요인이었다(Lane). 에녹은 하늘로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다(5, 창 5:22-24). 맛소라 본문(MT)은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나(창 5:22,24), 70인역에서는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다'로 번역하였다. 이것은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그가 가진 믿음 때문이었다.

 


 

   히브리서 저자는 성도들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말한다(6). 그러므로 성도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반드시 다음과 같은 두 가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 두가지를 가지고 있으면 누구든지 아벨과 에녹과 같이 하나님의 열납 하심을 받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이 두 가지가 없다면 그는 가인과 같이 하나님의 열납 하심을 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 

 


 

1)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에 대해서 믿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께 나아갈 자격이 없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증명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이것은 단지 우리들이 믿음으로 받아 들여야 하는 일이다. 

 


 

 2)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은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상을 주신다'('미스다포도테스')는 말은 '보상해 준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자기에게 나아오는 자들을 빈손으로 돌려보내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구약 성경은 젊은 사자는 굶주릴 수 있어도 하나님을 찾는 자들은 결코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은 반드시 하나님께 용납하심을 받게 될 것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것이다. 다윗은 우리가 잘 아는 (시 23:1)에서 하나님을 자기 목자로 삼은 자들은 모든 일에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하였다.   

 


 


 

 37) 노아의 믿음(11:6-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다(6, 창 8장). '경고하심'('크레마티스데이스')이란 말은 '신적인 의사 소통', 혹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응답'이나 '신탁'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8:5;12:25). 노아는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 홍수로 온 땅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계시를 받고 방주를 예비하였다. 이것은 노아가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계시를 액면 그대로 믿었다는 것을 말한다.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대k여 믿음으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1절). '경외함'('율라베데이스')이란 말은 문자적으로 '거룩한 두려움'을 의미하는 데, 이 말은 '존경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노아는 하나님을 신뢰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 질 것을 믿고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노아는 믿음을 통해서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될 수 있었다(7). 노아가 믿음으로 방주를 예비하였을 때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비웃었다. 그러나 노아의 믿음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옳은 것으로 확증되었다. 그리고 그를 조롱하던 사람들은  심판으로 인해 그들의 불신앙을 정죄 받게 되었다. 결국 방주를 지으며 의를 전하던 노아의 믿음은 그 말을 믿지 않던 당시 사람들의 불신앙을 정죄한 것이 되었다(Morris). 그리하여 노아는 이 세상을 살면서 '믿음을 좇아 산' 참 신앙인의 의로운 상속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노아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응답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에게 주신 의를 공유하고 상속하였다(Lane).

 


 


 

 38) 아브라함의 믿음과 삶(11:8-10)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다(8). ‘부르심을 받았을 때'('칼루메노스')는 '칼레오'의 현재 분사형으로 아브라함이 하나니의 부르심을 받은 즉시 순종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아브라함은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창 12:1)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즉시 길을 떠났지만, 그가 어디로 가야 할 지도 모른 채로 떠나게 되었다. 그는 나안 땅에 이르렀을 때도 그는 그곳이 하나님이 자신과 후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신 땅인지 모르고 있었으며(창 12:5, 6), 하나님께서 다시 가르쳐 주신 후에야 알게 되었다(창 12:7). 아브라함이 목적지도 알지 못한 채 그 땅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이방 땅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되,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다(9). 아브라함이 이방 땅에 사는 것처럼 우거했다는 것은 그가 남의 땅에서 나그네처럼 살았다는 것을 말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그 땅을 유업으로 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매장지 외에는 아무 땅도 차지하지 못했다(행 7:5). 그리고 그와 같은 약속을 받은 이삭과 야곱도 가나안 땅을 차지하지 못한 채로 그 땅에서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아야 했다. '장막에 거하였다'는 말은 집을 짓고 정착된 삶을 살지 못하고 천막을 치고 이동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애곱은 반드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것으로 믿고 있었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살았던 것은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기 때문이었다(10). '터가 있는 성'은 일시적인 '장막'과는 달리, 한 곳에 고정된 기초가 있는 영구한 집을 말한다. 이 성은 일차적으로 출애굽 후에 차지할 가나안 땅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장차 올 영원한 하늘 도성을 의미한다. '경영하다'('테크니테스')는 말은 '기술'을 뜻하는 '테크네'에서 파생된 단어로 '기술자', '설계자' 혹은 '건축가'를 의미한다. 그리고 '지으신다'('데미우르고스')는 말은 ‘많은 사람'('데미오스')과 '일'('에르곤')이란 말의 합성어로서 '많은 사람을 위해 일하는 자'를 의미한다. 이 두 가지 표현은 하나님께서 실제적으로 성도들을 위해서 성을 건축하실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아브라함이 발붙일 땅도 소유하지 못한 채 나그네처럼 가나안 땅에서 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 즉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손수 지으실  가나안과 그후에 완성될 영원한 하늘나라의 도성을 바라보았기 때문이었다.

 


 


 

 39) 사라의 믿음(11:11-12)

 

   믿음으로 사라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신실하신 분이란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11). 비록 사라가 잉태하게 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믿지 못하고 웃었다 할지라도(창 18:9.) 사라가 끝까지 의심하였다고는 볼 수 없다. 사라는 곧 아브라함의 믿음에 동의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사라가 아브라함과 한 마음으로 믿음에 동의하지 않았다면 둘 사이에 부부 관계가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며 이삭도 잉태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Morris). 두 사람은 늙어 아이를 생산할 능력이 전혀 없었으나, 약속하신 하나님의 미쁘심 곧 신실하심을 믿음으로 이삭을 출산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죽은 자와 같았던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게 되었다(12).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은 나이 많아 아이를 낳을 수 없었던 아브라함을 가리킨다. 나아가 많아 전혀 아기를 가질 수 없었던 아브라함을 통해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 같이 많은 후손이 생기게 된 것은 그가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롬 4:19).  

 


 


 

 40) 믿음의 견인(11:13-14)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지만,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였고, 또 땅에서는 자신이 외국인과 나그네라고 증거하였다(13). '이 사람들'이란 8-12절에 언급된 인물들 즉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곱을 가리킨다. 그들은 모두 가나안 땅과 그 후손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들을 말한다. 그들은 가나안을 소유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죽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를 실행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일생을 살았다. '보았다'는 말은 신체적인 눈으로 보았다는 것이 아니라, 약속을 믿는 믿음의 눈으로 약속이 성취될 것을 바라보았다는 것을 말한다. 이 약속의 성취는 일차적으로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이라고 할 수 있으나, 보다 근본적인 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성취된 구원을 가리킨다(Bruce). 아브라함은 그리스도의 때를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다가 보고 기뻐하였다(요 8:56). '외국인과 나그네'는 아브라함이 헷 족속에게 한 말 즉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한 자니'(창  23:4)와 야곱이

 

바로에게 한 말 즉, '내 나그네 길...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창 47:9)을 인용한 것이다. 저자는 본절에서 옛 신앙의 위인들의 그러한 고백을 통해 그들이 이 땅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적으로 나그네로 살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참된 소망을 하늘나라에 두고 살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들이 이와 같이 말한 것은 그들이 돌아갈 본향을 찾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14).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앞 절의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한 옛 조상 즉 아브라함이나 야곱과 같은 이들을 가리킨다. 이들이 자신들을 가리켜 나그네라고 한 것은 자신들이 살았던 이 땅이 본향(本鄕)이 아님을 분명히 한 것이다(Bruce). '본향'('파트리다')은 '선조의 땅', '고향'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들은 이 땅에서 나그네로 존재하였으며 그들의 목적지가 하늘나라였다는 것을 말한다.

 


 


 

41) 믿음의 상급(11:15-16)

 

   만일 그들이 이전에 살던 고향, 즉 하란 땅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면 그들은 언제든지 다시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15). 그러나 그들은 지상의 고향을 자신들의 본향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결혼시키려고 할 때 가나안 땅의 여인들 중에서 신부감을 택하지 말고 자신의 고향, 즉 메소포타미아로 가서 신부감을 구해오도록 그의 종에게 당부하면서 '삼가 내 아들을 그리고 데리고 돌아가지 말라'(창 24:6)고 부탁하였다. 야곱 역시 메소포타미아를 고향으로 생각하지 않고 가나안으로 다시 돌아왔다(창 30:25;31:3). 아브라함은 사라를  가나안 땅에 묻었으며, 자신 역시 그 곳에서 장사되었다(창 23:19;25:9-10). 이삭이나(창 35:27-29) 야곱도(창 49:29-33;50:13) 가나안에서 장사되었다. 그들이 이 땅에서 고향을 찾았다면 자신들이 태어난 지상의 고향으로 충분히 돌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Bruce). 그러나 그들의 본향은 하늘나라에 있었기 때문에 지상의 고향을 찾지 않고 믿음으로 하늘나라의 영원한 고향을 찾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은 더 나은 본향, 곧 하늘에 본향을 사모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해 주셨다(16). 그들이 찾았던 고향은 지상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좋은 곳, 즉 '하늘에 있는 고향'이었다. '사모한다'('오레곤타이')는 말은 '...을 향해 뻗치다', '열렬히 갈망하다'라는 의미로 그들이 간절히 하늘 나라를 갈망하였음을 의미한다. 한편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 하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을 가리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출 3:6, 15, 16)이라고 말한 사실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살았던 이스라엘의 족장들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으며, 오히려 그들을 위하여 하늘나라에 '한 성'을 준비해 놓으셨다. 이 '성'은 '장막'(9절)과는 대조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영원한 처소를 가리킨다.

 


 


 

42) 아브라함의 믿음(11:17-19)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다. 이삭은 약속을 받은 자였지만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독생자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다(17).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다(창 22:1-18). 이와 같은 하나님의 명령은 아브라함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으나 그는 순종하였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생자가 이삭을 바치라고 명하셨을 때 이는 그에게 이겨내기 어려운 혹독한 믿음의 시험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통해서 그에게 수많은 자손을 주시겠다고 이미 약속해 주셨기 때문이다. 부자간의 애정 문제를 제외하고라도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 사이에 커다른 모순이 생기게 됨에 따라 아브라함은 갈등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Morris). 그러나 이런 모순을 제거하는 일은 아브라함이 처리할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셔야 할 문제였다(Bruce). 그러기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고 이삭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미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고 약속하셨다(18).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라고 약속하셨으며(창 12:2), 이러한 아브라함의 민족은 오직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한다고 약속하셨다(창 21:12). 이삭을 통해 아브라함의 민족을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그 이삭을 바치라고 요구한 것은 하나님 자신의 약속에 위배되는 행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어떠한 방법을 통해서라도 반드시 그 약속하신 바를 이루신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아식이 죽은 후에 그를 다시 살려서라도 그 약속을 이루실 줄로 믿었다. 그러므로 사실상 이삭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과 같았다.(19). '생각한지라'('로기사메노스')는 말은 부정 과거로 단순한 견해가 아니라 단호한  내적인 확신이나 신념을 나타내는 말이다(Westcott, Lane).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 즉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것'이라는 그의 믿음은 아브라함 자신의 과거 경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아브라함은 죽은자와 다름없는 자신의 몸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명인 이삭을 낳을 수 있었다(11, 12절). 아브라함의 이러한 경험은 자신의 아들 이삭이 죽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살리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해 주었으며(Moxnes, Teodorico) 그 확신으로 인해 자신의 종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창 22:5). 만약 아브라함이 이삭이 다시 살 것을 믿지 못하였다면 이런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Bruce, Morris). '비유컨대'('엔 파라볼레')에서 '파라볼레'는 '유형', '상징', '예시'를 뜻한다.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이삭이 제물로 바쳐진 사실을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한 상징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에(Bruce) '엔 파라볼레'는 본절이 '예수의 부활에 대한 예시'임을 암시한다(Lane). 한편 아브라함이 정작 이삭을 죽이려고 칼을 쳐들었을 때(창  22:10), 그에게 있어서 이삭은 죽은 것과 다름이 없었다(Bruce). 그러나 그 후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는 음성을 들었을 때 그것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었다.

 


 


 

 43) 이삭의 믿음(11:20)

 

   믿음으로 이삭도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할 수 있었다(20). 아브라함

 

에게 약속하셨던 하나님은 이삭에게 그 약속을 다시 확인시켜 주셨다(창 26:2-5). 그리고 이삭은  장차 이루어질 이 약속을 그의 두 아들 야곱과 에서에게 다시 축복해 주었다(창 27:27-29, 39, 40). 이 때 합법적인 축복의 상속자는 맏형인 에서였으나 야곱이 속임수로 그 축복을 가로챘으며 에서는 그 나머지 축복을 받아야 했다(창 27:39, 40). 저자는 이러한 부당성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있다. 다만 그는 이삭이 미래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두 아들에게 축복하였다는 사실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삭의 이러한 행위는 믿음의 본질, 곧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1절)라는 것에 대한 실증적인 예(例)에 해당한다(Bruce). 한편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은 사실이 비합법적인 것이라고 단정할 수만은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실을 나중에 이삭이 알게 되었을 때 그 축복을 무효화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그가 정녕 복을 받을 것이니라"(창 27:33)고 야곱을 인정해 주었기 때문이다. hosi하면 이렇게 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창 25:23).

 


 


 

 44) 야곱의 믿음(11:21)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다(21). 야곱은 자신의 임종이 가까왔을 때 손자인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축복하였다(창 48:13-20). 이 때 요셉은 장자의 축복을 장자인 므낫세가 받기를 원했으나, 야곱은 팔을 어긋나게 하여 오른손으로 차자인 에브라임 머리에 얹고 왼손으로 장자인 므낫세의 머리에 얹어 축복하엿다(창 48:14,19,20). 이러한 사실은 야곱이 차자를 축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을 말한다. 야곱은 믿음의 눈으로 그들이 미래에 받을 축복을 미리 보고 그들에게 축복하였던 것이다.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다”는 말은 맛소라 본문(MT)에는 "침상 머리에서 경배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지팡이'와 '침상'이라는 두 가지로 번역이 되는 것은 여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모음을 붙이기에 따라 '맡테'(matteh, '지팡이')로 읽을 수도 있고 '밑타'(mittah, '침상')로 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70인 역을 따라서 이 단어를 “지팡이”로 해석하였다. 야곱이 그의 임종이 가까왔을 때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한 것은 지상에서 '외국인과 나그네'(9, 13절)같이 살았던 그의 삶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지팡이는 순례자의 상징적인 물건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Michel).

 


 


 

 45) 요셉의 믿음(11:22)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그때에 자기 해골을 가지고 나갈 것을 지시하였다(22, 창 50:24-25). 요셉은 그의 임종시에 장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탈출시켜 선조에게 약속한 가나안 땅에 이르게 하실 것을 예언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분명히 이루어 질 것을 믿는 요셉은 그 때가 되면 반드시 자기의 유골도 가지고 가도록 지시하였다(출 13:19; 수 24:32). 이러한 사실은 요셉이 얼마나 하나님께서 선조들을 통해서 해 주신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확실하게 믿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요셉은 비록 수 백년 후에 일어날 일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유언을 남길 수 있었다.

 


 


 

 46) 모세 부모들의 믿음(11: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는 그 아이가 아름다운 아이인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키웠으며 아이를 죽이라는 임금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았다(23). 애굽 왕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의 인구수가 급증함에 따라 위협을 느끼며 그들의 숫자를 줄이기 위해 사내아이가 출산되었을 때 그들을 전부 나일강에 던져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출 1:9-10, 15, 22). 그런 상황에서

 

모세가 출생하였다(출 2:1, 2). 저자는 70인역을 인용하여 본절에서 믿음으로 그 부모가 모세를 석달 동안 숨겼다고 서술하였다. 그러나 출 2:2에는 모세를 숨긴 일을 한 사람으로서 오직 어머니만 언급되었다. 이러한 차이는 별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아이를 숨기는 일이 남편과의 합의 없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Morris). 70인 역에서 부모가 모세를 석 달동안 숨긴 것은 '아름다운' 아이였기 때문이다. '아름답다'('아스테이온')는 말은 '도시'('아스튀')라는 말에서 파생된 형용사로서 '도시에 속한', '잘 양육된', 혹은 '우아한'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아마 부모는 아이의 이러한 아름다움을 보고 하나님이 그 아이를 통해 큰 일을 이루실 것을 예견했을 것이다(Morris).

 


 


 

 47) 모세의 믿음(11:24-28)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였다(24-25). 모세는 장성한 후에 자신이 히브리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나서 그는 애굽의 왕자가 되기보다 비천한 신분인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원했다. 모세는 자기 형제인 히브리 노예를 돕는다고 무력으로 애굽 사람을 죽였다. 이것은 모세가 자신을 히브리인으로 자처한 행위였으며, 바로의 공주의 아들 됨을 부인하는 행위였다.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온갖 부귀와 영화를 누릴 수 있는 기회를 가졌지만 믿음으로 그 모든 것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원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스라엘 백성'을 뜻하는 민족주의적 개념이 아니라 '영적인 하나님의 백성', 즉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의미하는 종교적 개념이 내포된 표현이며(Morris), '죄악의 낙'은 모세가 바로의 왕궁에서 도덕적으로 타락한 생활을 하였다는 의미가 아니라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닫고도 그대로 왕궁에 머물러 있었다면 그 자체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크나 큰 죄악이 되었을 것이라는 의미이다(Bruce). 한편 '더 좋아하였다'는 말은 '...보다 ...을 택하다'라는 의미로 모세가  바로의 왕자가 되기보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고난받는 편을 의지적으로 선택했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행동은 믿음이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다.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26). 저자는 본문에서 모세가 그리스도를 위해 능욕을 받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신약 시대뿐 아니라 구약 시대에도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하셨다. 바울은 출애굽 사건을 언급하면서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라고 하였다(고전 10:14). 모세가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것'(25절)은 결국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받는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그리고 ‘상'('미스다포도시안')이란 말은 '보상'을 의미한다. 모세가 그리스도를 위해 능욕을 기꺼이 받은 이유는 하나님께서 보상해주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그 보상은 바로의 궁전에 있는 보화보다 더 귀한 것으로서 하늘나라에서 받게 될 영원한 상이었다.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으로 인해 고난받는 수신자들에게 모세의 예를 들어서 하나님의 상을 바라보며 기꺼이 고난에 동참하도록 권면하고 있다.

 


 

   믿음으로 모세는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다(27). 모세는 애굽을 두 번 떠났다. 첫 번째는 자기 동족을 박해하는 애굽 사람을 살해한 일로 바로를 피해 미디안 땅으로 도피한 일이며(출 2:11-15), 두 번째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탈출시킬 때였다. 본절의 '애굽을 떠나'가 의미하는 것은 두 가지 경우 중 전자에 해당한다(Lane, Morris, Bruce). 왜냐하면 다음절에서 모세가 유월절을 정하여 피 뿌리는 의식을 하게 한 사건인 출애굽에 대해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절의 사건은 출애굽 전에 되어진 일로서 모세가 미디안 땅으로 도망한 일을 가리킨다. 본절의 해석의 문제점으로 모세가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모세가 미디안으로 도주할 때에는 두려워 하였다는 것이다(출 2:14, 15). 그러나 모세가 미디안으로 도주한 동기는 애굽인을 죽여서 생겨난 바로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다(출 2:14). 왜냐하면 출애굽기나 다른 성경에서 모세의 도망과 두려움을  연결시키지 않기 때문이다(Morris). 즉 모세가 비록 노예 폭동을 일으킬 수 있었을지라도, 그냥 도주한 것은 아직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때가 안 되었다는 인식과 믿음에  의한  것이었다(Bruce, Morris).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유대교나 초대 기독교에 있어서 하나님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롬 1:20; 골 1:15; 딤전 1:17, Lane). 필로(Philo)는 바로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으나 모세는 이와 대조적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눈으로 보는 것처럼 믿었다고 진술하고 있다(Life of Moses 1.88). 모세는 오랜 광야 생활 가운데서도 '보이지 아니하는 자'이신 하나님과 동행하면서(출 33:11; 민 12:7, 8)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믿음으로 기다렸다. 모세는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다. 이것은 장자를 멸하는 자가 이스라엘을  건드리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28). '정하였다'('페포이에켄')는 말은 '만들다'('포이에오')는 말의 완료형으로 유월절의 항구성을 의미한다(Robertson). 모세는 이 절기를 영원한 규례로 제정하였다(출 12:14). 모세가 이같이 정한 것은 유월절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출 12:12, 13)을 그대로 믿었기 때문이다. 애굽 전역에 장자의 죽음을 가져다 백성들로 하여금 문설주와 인방에 어린양의 피를 바르게 하였다. 그 이유는 죽음의 천사가 피를 바른 집은 넘어가리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믿음으로 수용하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 애굽인의 장자들은 죽임을 당하였으나 이스라엘의 장자들은 구원을 받을 수 있었으며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을 탈출할 수 있었다.

 


 


 

 48) 이스라엘의 믿음(11:29-30)

 

   믿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다(29). 모세의 인도로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 주변에 장막을 치게 되었다(출 13:17-14:4). 애굽의 군대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머물고 있던 곳까지 추격해 왔을 때(출 14:10-12) 그들은 모세의 명령에 순종하여 홍해 바다를 건넜다. 이러한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믿음을 함께 나누었음을 시사한다(Lane). 홍해를 믿음으로 무사히 건넌 이스라엘 백성과는 달리 불신앙과 하나님을 대적하고자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하다가 물 속에 침몰하여 전멸하였다(출 14:23-28).

 


 

   믿음으로 이스라엘은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다(30). 여리고 성은 40년 동안 광야 생활에 지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난공불락의 요새였다(수 2:1). 그러나 여호수아와 그를 따른 용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성 주위를 6일 동안은 하루에 한번씩 돌고 7일째 되는 날에는 일곱 번 돌고 큰 소리로 외칠 때 그 성이 무너져 내렸다(수 6:1-21). 이러한 사건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순종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Spicq). 저자는 본절에서 특별히 실제 믿음을 갖고 행동한 여호수아나, 그를 따른 군사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이는 저자가 불가능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고 그의 명령에 따라 행동으로 실천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Lane, Spicq).

 


 


 

 49) 라합의 믿음(11: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않고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31). 라합은 창녀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과 초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높이 존경받는 인물로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사라, 아비가일, 에스더와 더불어 구약성경의 대표적인 여인 중의 한사람으로 평가되었다. 신약성경에서도 라합의 믿음은 본절 이외에 (약 2:25)에서 찬양되고 있으며 예수님의 족보에도 등장한다. 이와 같이 그녀가 믿음의 인물로 추앙 받는 것은  이스라엘의 첩자를 숨겨준 자신의 행동이 동족에게 발견될 경우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됨을 알고서도 그러한 행동을 실행하여 결국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점령하는 데 중대한 공헌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는 목숨을 걸고 믿음을 실천한 행위였다(수 2:1-21, Morris). 한편 '순종치 아니한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토이스 아페이데사신'은 믿음으로 순종하여 행동으로 옮긴 라합과 대조를 이루는 여리고 백성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순종치 아니함으로 멸망당하였다.

 


 


 

 50) 사사들의 믿음(11:32)

 

   내가 무슨 말을 더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32). '내가 무슨 말을 더하리요'는 말은 수사적이며 문학적인 표현으로서 시간이나 지면 관계상 제한을 받게 될 때 흔히 사용되던 관용구이다(Lane, Robertson). 저자는 이와 같은 관용구를 사용하므로 믿음에 대한 예를 얼마든지 열거할 수 있으나 그 전체적인 이야기를 다 취급할 수 없음을 나타내면서 여섯  명의 믿음의 사람을 예로 제시한다.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이들 네 사람은 신약성경에서는 본절에서만 언급되었고(행 3:24;13:20) 다윗은 자주 언급되었다(마 1:1,6; 막 2:25; 행 1:16 등). 여기서 이들 여섯 사람의 이름은 연대순서대로 기록된 것이 아니다. 구약성경에는 바락(삿 4, 5장), 기드온(삿 6-8장), 입다(삿 11,  12장), 삼손(삿 13-16장), 사무엘(삼상 1-15장), 다윗(삼상 16-삼하 24장)의 순서로 기록되어 있다. 기드온은 이스라엘의 다섯 번째 사사로서 미디안의 군대를 무찌른  사람이었으며(삿 7장),바락은 네 번째 사사로 가나안 족속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한 인물이었다(삿 4장). 삼손은  무서운 힘의 소유자로서 그 힘을 사용하여 블레셋을 괴롭힌 사사였으며(삿 13-16장), 입다는 길르앗의 서자(庶子)로서 방랑생활을 하다가 암몬 족속의 위협을 받던 이스라엘의 부름을 받고 큰 전과를 거두었던 사사였다(삿 11-12장). 그리고 다윗은 선지자 사무엘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아 이스라엘의 두번째 왕이 된 인물로 훌륭한 믿음의 소유자였으며(삼상 16:1-13), 사무엘은 어머니 한나의 기도로 얻은 아들인데 일찍이 엘리 제사장에게 맡겨져 하나님의 율례를 배웠으며 성장 후 이스라엘의 사사요, 제사장적 기능을 담당하는 자로서 쉽게 믿음을 저버리는 이스라엘 백성을 늘 신앙으로 인도한 선지자였다(삼상 1-15장). 저자는 이들 여섯 명의 믿음의 인물들을 열거하고서 이들에 관한 일을 말하려면 자신에게 시간이 부족할 것이라고 한다.

 

 51) 믿음이 성취한 것들(11:33-34)

 

   저희는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고 약속을 받기도 하였다(33).  본문은 여호수아를 위시하여 32절에서 언급된 사사들과 다윗에 대한 설명으로 볼 수 있다(Bruce). 여호수아 시대부터 시작된 이스라엘 민족의 정복 사업은 사사 시대를 거쳐 다윗에 이르러서 최고의 절정에 달하여 그들이 차지한 영토는 이집트 국경에서부터 유브라데스강까지 확장되었다(왕상 4:20, 21). 특히 '이기기도 했다'는 말은 '정복하기도 했다‘는 말이다. 사가(史家) 요세푸스는 이 단어를 다윗이 팔레스틴 지역을 정복했음을 기록할 때 사용하여서(Antiq vii, 53) '나라들을 이기기도'가 다윗이 블레셋과 모압과 수리아 그리고 에돔을 정복했던 것을 가리킨다고 진술한

 

다. 한편 '의를 행하기도 하며'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소유한 사사들이나 열왕들의 의롭고 바른 통치를 가리킨다. 이것은 특히 사무엘이 완전한 의로움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며(삼상 12:3-5, 23) 다윗 또한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 '공과 의'로 모든 백성에게 행하였음을 가리킨다(삼하 8:15;대상 18:14). 이상 언급된 사사들이나 열왕들은 하나님을 섬기며 믿음을 가지고 살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시리라는 약속을 받았으며 그 약속의 성취를 경험하였다(Bruce).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34). 본문은 다니엘과 세 친구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다니엘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지키려다가 모함을 받아 사자 굴에 던져졌으나 신체적으로 아무런 해도 받지 않고 거기에서 나올 수 있었다(단 6:17-22). 다니엘 이외에 다윗도 양을 칠 때 사자를 물리친 일이 있었으며(삼상 17:34-37), 브나야도 사자를 죽였었다(대상 11:22). 다니엘과 함께 바벧론에 포로로 끌려온 세 명의 친구인 사드락, 메삭, 아벱느고는 느브갓네살 왕이 세운 금 신상 앞에 절하지 아니한 죄목으로 풀무불 속에 들어가게 되었으나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조금도 상하지 않고 그곳으로부터 나올 수 있었다(단 3:23-37). 그들이 맹렬히 타는 풀무불(단 3:19-23) 앞에서 왕의 명령을 거역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들의 굳건한 믿음을 시사한다(Bruce).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34). 칼날을 피한 자들로는 구약 시대의 몇몇 선지자들을 생각할 수 있다. '엘리야'는 이세벨로부터 도망하였으며(왕상 19:2), '엘리사'는 이세벨의 아들인 여호람에게서 구원받았고(왕하 6:31 ff.), '예레미야'는 여호야김을 피하여 숨었다(렘 36:19,26). 또한 '다윗'도 사울 왕의 칼날을 무사히 피하여 도망하였다(삼상 18:11). 저자는 이러한 예를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진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방패가 되심을 강조한다(시 18:2).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34).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된 실례는 구약성경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기드온은 므낫세 지파 중에서 제일 보잘것없는 가문 출신으로서(삿 6:31 ff.) 300명의 군사만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위엄을 이룩하였다. 뿐만 아니라 삼손(삿 16:28-31)이나 하스기야 왕(왕하 20장;사 38장)은 연약한 중에 있다가 하나님의 권능으로 다시 강하게 회복되었다. 에스더 역시 연약한 여자였으나 믿음으로 강하게 되어 자기 동족을 죽음으로부터 구할  수  있었다(Clement  1서 55:3).

 


 

   전쟁에서 용맹하게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34). 이는 여호수아나 사사들 그리고 다윗의 전쟁사 등을 가리킨 것이다. 이와 같이 믿음의 사람들은 이 세상의 어떠한 권세나 군대의 세력 혹은 모든 위험을 물리칠 수 있었으며 자신들이 바라던 바를 성취할 수 있었다.

 


 


 

 52) 믿음의 정점(11:35-38)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35). 이것은 구약성경의 사르밧 과부(왕상 17:17-24)와 수넴 여인(왕하 4:18-37)의 경우를 가리킨다. 전자는 엘리야가 그녀의 죽은 아들을 살려 주었다. 신약성경에서는 나인성 과부(눅  7:11-14), 나사로의 누이인 마르다와 마리아(요 11장), 도르가(행 9:36, 41)를 가리킨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믿음은 곧 생명이라고 할 수 있다(요 3:15,16,36; 5:24; 6:40,47).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35). 본절 상반절에서 여인들은 자신의 자녀나 관계된 자들을 부활로  되돌려 받았었다. 그 부활은 일시적인 것으로서 그들의 아들들은 다시 죽을 수밖에 없었다. ‘더 좋은 부활'은 일시적인 부활과는 대조를 이루는 표현으로 영원한 생명을 부여받게 되는 종말론적 부활을 가리킨다(Spicq). '악형을 받는다'('에튐파니스데산')는 말은 고문대나, 곤봉을 뜻하는 명사 '튐파논'에서 유래한 말로서 '죽도록 때리다', '고문하다'를 의미한다. 즉 이것은 고문대 위에 사람을 묶어놓고 때려서 죽이는 형벌을 말한다. 마카비서에는 어머니와 일곱 명의 아들이 여러 가지 고문을 당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들은 한결 같이 부활에 대한 희망으로 모든 고문과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였다(마카비 2서 7:9). 즉 이들은 이 세상에서 구차하게 생명을 연장하기보다는 새로운 삶과 부활이 있다는 믿음에 근거해서 하나님과 그의 의를 위해 자신들의 생명을 기꺼이 바칠 수 있었다.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다(36). 본절이 가리키는 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마카비 전쟁 당시 시리아의 침략군들이 신앙을 지키려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혹한 고문을 가한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마카비 2서 7:1, Morris). (2) 혹자는 예레미야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Bruce). 예레미야는 한때 바스훌에 의해 매를 맞고 착고에 채워지기도 하였으며(렘 20:2) 사람들로부터 치욕과 모욕거리가 되었으며(렘 29:7ff.),  구덩이 속의 진흙에 던져지기도 하였다(렘 38:6). 본절이 가리키는 것이 무엇이든간에 저자는 본문을 통해서 믿음의 사람들이 그 믿음으로 인해 수많은 핍박과 고난과 희롱을  당하였음을 강조하고 있다.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37). 돌로 치는 행위는 유대인들 사이에서 전통적으로 전해지던  처형법이었다. 전승에 따르면 애굽의 유대인들이 우상숭배를 그치지 않을 때 예레미야가 그에 대해 끊임없이 회개를 촉구하자 유대인들이 그를 돌로 쳤다고 한다(Tertullian, Scorpion, Antidote 8; Jerome, Against Jovinian 2.37). 또한 예수께서도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라고 탄식하셨다(마 23:37). 예수께서 탄식하신 내용은 여호와의 전뜰 안에서 돌에 맞아 죽은 예언자 스가랴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일 것이다(대하 24:21;눅 11:51). 또한 전승에 의하면 이사야는 톱으로 켜서 죽임을 당하였다. 다른 믿음의 사람들은 '칼날을 피하기도'하였지만(34절) 다른 이들은 믿음으로 인하여 칼에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다. 엘리야는 이세벨로부터 피할 수 있었으나 그 외의 다른 예언자들은 칼에 죽임을 당했다(왕상 19:10). 또한 여호야김이 집권할 당시 예언자 우리야가 칼에 죽임을 당했으며(렘 26:23), 신약 시대 사도 야고보도 칼로 죽임을 당하였다(행 12:2).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였다'는 것은 엘리야와 엘리사를 가리켜 한 말로 볼 수 있다(Lane).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of Rome)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전하며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한' 사람들을 본 받으라고 촉구하였다(Clement 1서 17:1). 클레멘트는 거기서 그들이 엘리야와 엘리사, 그리고 에스겔을 가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특별히 엘리야는 구약 시대 예언자들의 일반적인 복장이었던(슥 13:4) 털옷을 입고 다녔으며(왕하 1:8) 신약 시대의 세례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었다(막 1:6). 이러한 복장은 특수한 신분을 나타내는 것이라기보다는 예언자들의 검소한 생활을 반영하는 것이다. 한편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라는 말은 엘리야와 엘리사의 예언자의 삶을 요약하고 있는 말로 볼 수 있다(왕상  17:2-16;19:1-19;왕하  1:3-16;8:1,  2,  Lane). 또한 이것은 특별히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Antiochus IV Epiphanes)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점령하였을 때 경건한 유대인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도망하여 산이나 광야에서 짐승처럼 생활하였던 것을 상기시킨다(마카비 2서 5:27).

 


 

   히브리서 저자는 이런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치 못한다고 선언하며, 그들이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다고 말한다(38). 본문은 '세상이 그들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라는 의미이다(the world was not worthy of them, NIV).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핍박과 환난이 문제시 될 수 없었으며, 세상적인 부귀와 영화가 그들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 없었다. 그들에게는 오직 하나님만이 유일한 소망이었다. 박해가 있을 때 광야나 산 혹은 굴속으로 피신하는 일은 일반적인 현상이었다(왕상 18:4, 13;19:1-4, 9). 저자는 이러한 인용을 통해서 하나님을 의뢰하는 믿음이 있다고 하여 반드시 이 땅에서 안락함과 평안을 누리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그리스도인들의 보상은 세상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며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받게 된다(Bruce).

 


 


 

 53) 믿음의 권속(11:39-40)

 

   이 사람들은 모두 믿음으로 증거를 받았지만 약속을 받지는 못하였다(39). '이 사람들'은 본 장에서 언급된 모든 믿음의 사람들을 가리킨다(Michel, Moffatt). 이들은 모두 다 성경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의 믿음에 대하여 증거를 받은 자들이었다(2, 5절). 그러나 그들은 '약속'을 받지는 못하였다. 이 말은 33절의 '약속'을 받지도 못하였다. 이 말은 33절의 '약속을 받기도 하며'와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33절의 '약속들'은 하나님께서 개인에게 하신 특정한 약속들로서 그러한 약속들은 그들의 생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었다. 그러나 본절의 '그 약속'은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성취될 '영원한 기업의 약속'(9:15)으로서 영원한 하늘나라의 구현을 가리킨다. 저자가 본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 사람들은 다...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였다"는 것이다(13절,  Peterson). 구약 시대의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다 약속의 성취를 경험하지 못하였으나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 속에서 살았다. 이러한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이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교훈 하는 실제적인 본보기가 되었다(Lane).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40). 앞절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구약 시대의 믿음의 사람들이 약속을 받지 못한 것은 그들의 믿음에 결함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기 때문이었다. '더 좋은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온전케 되는 구원을 시사한다(Morris). 구약 시대의 믿음의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누릴 수 있는 구원의 온전함을 경험할수 없었으나 이제 그리스도의 구속하심으로 말미암아 구약 시대의 믿음의 사람들이나 현재의 그리스도인들은 다같이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분 앞에 자유로이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Bruce). 이것은 구약 시대의 믿음의 인물들의 구원이나 그리스도인들의 구원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달렸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54) 믿음이 요청하는 것들(12;1)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고 말한다(1). 증인'('마르튀론')은 일차적으로 '관람자'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본문이 결승점을 향하여 달려가는 운동 경기를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문의 '마르튀론'은 단순히 수동적인 관람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증인으로서 진리를 증거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자이다(Michel, Peterson). 즉 '마르튀론'은 앞장에서 언급된 신앙의 선배들을 가리키는 것으로(11장)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고난 속에서도 인내하며 충성을 다한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증인들 앞에서 모든 얽매이기 쉬운 것을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해야 한다(1). 신앙의 경주자는 두 가지를 벗어버려야 한다.

 

  1) 무거운 것('옹콘')-이것은 운동 선수가 운동을 하는 데 방해가 되는 체중을 나타내는 것으로 최선을 다하는데 장애물이 되는 것을 가리킨다(Morris, Bruce).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장애물은 부를 사랑하는 것, 세상적인 관심사나 자만에 빠져있는 것 혹은 세상에 애착하는 것 등을 의미할 수 있다(Spicq, Mora).

 


 

  2) 얽매어기 쉬운 죄-이것은 어떤 특정한 죄를 지칭하기보다는 '죄 자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여기서는 경주를 하는 과정에서 경험하게 되는 연약성을 가리킨다(Spicq, Mora).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경주를 하는 과정에서 불필요하며 장애물이 될만한 모든 것을 버려야만 하며, 동시에 인내로서 경주해야 한다. 저자는 인내하는 가운데 경주를 한 앞선 증인이 많음을 진술함으로 수신자들이 당하는 어려움이 자신만 홀로 당하는 것이 아님을 가르쳐 준다. 그리고 이미 앞선 허다한 증인들이 결승점에 도달한 것처럼 인내로 참고 결승점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55) 믿음의 대상(12;2)

 

   이를 위해서 수신자들은 믿음의 주요, 우리를 온존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아야 한다(2). '믿음의'는 '주'만을 수식하는 것이 아니라, '주'와 '온전케 하시는 이'를 모두 수식한다(Bruce, Lane). '믿음'은 11장에 나타난 허다한 증인들이 삶 속에서 지녔던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신뢰를 나타내며 예수의 지상생활에서도 그 예를 찾을 수가있다(Moffatt, Westcott, Bruce, Hughes). 저자는 본문에서 예수에 대해 두 가지 칭호를 사용하고 있다.

 


 

  1) 주(아르케곤)-이 말은 '시작하다', '지배하다'(아르코)는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능동태일 경우 '지배하다'라는 의미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나타내며 중간태일 경우 '시작하다'라는 의미를 취해 선구자 되심을 나타낸다. 두 가지 중 후자가 더 타당한 듯하다(Bruce, Lane, Morris). 그리스도께서는 수신자뿐 아니라 앞 절에서 언급된 앞선 '허다한 증인들'보다 더 앞서 믿음의 길을 걸어가셨다. 왜냐하면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셨으며 광야에서도 하나님의 백성들과 동행하셨기 때문이다(유1:5, Bruce).

 


 

  2) 온전케 하시는 이(텔레이오텐)-이 말은 완수하다('텔레이오오')는 말에서 유래한 단어로 '완성자' 혹은 '완전자'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지상 생활 가운데 그 믿음을 온전히 실행한 자임을 드러낸다(Moffatt,Westcott, Bruce). 저자는 '아르케곤'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믿음을 우선적으로 행한 분이시며, 동시에 믿음을 행함에 있어서 다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한 자임을 시사하며 '텔레이오텐'을 통해서 구원자로서의 그리스도께서 믿음을 완전히 성취하셨음을 드러내고 있다(Peterson, Westcott).

 


 

   그리스도께서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기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2). '위하여'('안티')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1) '대신에'. 이 경우에 본문은 그리스도는 성육신 하시기 이전에 누리셨던 하늘의 지위와 복을 버리시고 죄인들만이 당하는 형벌인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음을 시사한다. 2) '위하여'. 이 경우에 본문은 앞으로 다가올 즐거움 즉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릴 구원과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을 위해 당시 수치스러운 것으로 이해되었던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여 걸어가셨음을 시사한다. 문맥상 후자의 해석이 더 타당하다. 한편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는 즉위식을 나타내는 시 110:1의 인용이다(2:5-9; 8:1,2; 10:12,13).  '앉으셨느니라'의 헬라어 '케카디켄')은 완료 시상으로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심을 시사하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그 수치를 참으시고 이루신 승리가 영원하며 완전함을 나타낸다(Bruce).

 


 


 

 56) 끝까지 변치 말라는 하나님의 요청(12:3-4)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3). 저자는 본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을 제시함으로 고난 당하는 수신자 공동체를 위로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거역하고 대항하며 직접 십자가에 못박았던 대적자들에게 직접적으로 대응하시지 아니하시고 참으셨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인내는 고난을 당하고 있는 수신자 공동체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었다. 수신자들은 죄와 싸우고 있었지만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않았다(4). 저자는 이 비교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이 수신자들이 당하는 고난보다 훨씬 극심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인내하신 것 같이 수신자들도 그래야 함을 시사한다. '죄와 싸우되'는 수신자들의 공동체와 악의 세력과의 갈등을 나타내는 것으로 '죄'는  1절에서 언급한 '죄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3절의 '죄인들'과 같이 악의 무리를 가리킨다(Lane). 한편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는 수신자들이 죄에 대항하여 당한 고난이 순교에까지 이르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수신자들은 고난을 당할 때 자신들보다 더 심한 고난을 당한 허다한 증인들과 수치와 죽음에도 인내하신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결코 낙심해서는 안 되며 그들과 같이 인내하고 고난에 잘 대응해야 한다.

 


 


 

 57) 하나님의 징계(12:5-11)

 

   히브리서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아들들인 너희에게 말한 권면을 완전히 있었느냐?'고 묻고 있다(5). 이 물음을 통해서 저자는 수신자들이 훈련과 교육의 측면에서 부과된 고난의 바른 개념을 완전히 잊어버렸음을 확고하면서도 부드럽게 비난하고 있다. 다음에 언급되는 인용문을 통해서 저자는 수신자들이 인내해야만 했던 고난이 훈련의 성격을 띤 것임을 진술하고 있다.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6). 본문은 잠 3:11,12의 인용이다. 이는 하나님의 징계하시는 행위에 대한 의도를 나타내는 바, 하나님께서는 자신과 더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을 개인적으로 혹은 집단적으로 고난을 통해서 훈련시키심을 시사한다. '징계하심'('파이데이아스')은 꾸짖음, 교정, 징벌과 같은 수단을 통해서 교훈하시며 교육하시는 것을 의미한다(신 8:5). 하나님은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부모와 같이 자기 백성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고난을 통해서 자신의  뜻에 순종하도록 함으로 목표에 도달하도록 훈련시키신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징계와 책망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사이가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임을 나타내어 '아들됨'을 강조하는 것이며 동시에 자식에 대한 하나님의 책임과      사랑을 시사한다(Bruce, Hewitt, Morris). 한편 본문의 '내 아들들아'란 말은 잠언 전체에서 교사가 학생을 부를 때 사용된 표현이다(Lane, E.Ahlborn). 저자는 이러한 의미를 지닌 70인 역에 '무'를 삽입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새 언약을 이루신 그리스도의 중재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 됨을 강조하고 있다(Bertram, Bornkamm).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7). '너희가 참음은'('휘포메네테')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있다. 1) 직설법으로 이해하여 개역성경 본문처럼 해석한다(Hewitt). 2) 명령법으로 이해하여  '너희는 징계를 참으라'는 의미로 해석한다(Morris).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한 듯하다. 왜냐하면 문맥상 명령법으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7). 본문은 아버지로서 자녀를 징계하는 것이 보편적인 것임을 말하는 수사학적 표현이다. 아들이 아버지와 징계를 받는다는 사실은 아버지가 그 아들을 진정한 아들로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고난을 통해 징계를 하신다는 것은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아들로 인정하고 계심을 시사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당하는 고난을 슬퍼하거나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난이 하나님의 징계로 하나님의 아들 됨의 증거임을 깨닫고 기뻐해야 한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 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8). 저자는 본문에서 징계를 받지 않는 경우를 통해서 징계가 아들됨의 증거임을 반증한다. '사생자'('노도이')는 노예나 첩의 아들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단어로 모든 사생아를 의미한다. 또한 '참 아들이 아니라'ss 말은 서자(庶子)를 가리킨다. 만약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의 징계가 없다면 그는 서자이며 사생아이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할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도 될 수가 없다. 반대로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고난의 징계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사랑과 상속자로서의 특권적 위치를 소유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서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9). '영의 아버지'는 '육체의 아버지'와 대조되는 개념으로 하늘 세계가 복종하는 초월적인 분 즉 하나님을  가리킨다(Kuss,  Lane).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는 주로서 그리스도인들을 훈련시키고 헌신을 요구할 수 있는 최고의 권위를 소유하신 분이시다. 저자는 최고의 권위를 소유하신 영의 아버지와 육신의 아버지틀 대조함으로 자녀들이 육신의 아버지보다 더 위대한 영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징계하실 때 당연히 복종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살려하다'('제소멘')는 말은 생명으로의 초대를 의미하는 것으로(신 30:11-20) 종말론적 구원을 즐기는 것과 연결된다(10:38,39, Peterson).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징계를 받을지라도 좌절하여 배교하는 것이 아니라 인내하며 담대히 나아가 복종함으로 온전한 구원을 소유해야만 한다.

 


 

   육신의 아버지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지만,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신다(10). '자기의 뜻대로'는 육신의 아버지의 징계가 자녀에게 유익을 끼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징계의 불확실성을 시사한다. 또한 '징계하였다'는 말('에파이듀온')은 미완료 시상으로 육신의 아버지의 징계가 불완전하여 반복되었음을 시사한다. 이처럼 '저희' 곧 육신의 아버지가 행한 징계는 불완전할 뿐만 아니라 자녀에게 유익을 끼치는지 조차도 불확실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은 육신의 아버지를 공경한다(9절). 하나님의 징계는 육신의 아버지의 징계와는 전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완전하시기 때문이다(Bruce).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을 징계하시는 목적을 나타내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녀들을 영적인 성숙과 거룩함에 이르도록 하심을 시사한다. '거룩하심'('하기오테토스')은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공유하고 있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성품을 나타내는 것으로(Morris, Procksch)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완전하여진다(Bruce, Lane).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훈련의 성격을 띤 고난을 통해서 자신의 속성인 거룩함을 공유할 수 있도륵 하신다. 한편 그리스도인이 온전한 성화를 이루는 데는 인내를 통해서 믿음을 보존함으로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는 미래에 있다(Lane, Michel, Hughes, Peterson). 훈련의 성격을 띤 고난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실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며 종말론적 구원에 참여하는 것이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는다(11). 징계를 받을 때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인다. 그러나 이 징계를 통해 인격이 연단된 후에는 이로 인해 의롭고 화평한 열매를 맺게되는 것이다. .'의의 평강한 열매'는 평강과 의로 이루어진 열매를 의미한다(Lane). '평강과 의'는 종말론적 구원의 선물로서(Michel) 미래에 소유하게  될 하나님의 거룩함에 참여하는 흔적이다(Peterson).

 


 


 

 58) 견고해지라는 권면(12:12-13)

 

   그러므로 히브리서 저자는 수신인들에게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고 권면하고 있다(12-13). 저자는 본문에서 (사 35:3)을 인용하여 고난으로 인해 소진(消盡)된 상태에 있는 수신자들에게 강하고 담대해질 것을 권면하고 있다. '피곤한 손'은 '불구가 된 손'(JB)으로 무용하여  아무 것도 성취할 수 없는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본절의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은 철저하게 소진되고 좌절한 사람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그리고 '세운다'('아노르도사테')는 말은 '강하게 한다'라는 말로서, 고난으로 인해 좌절에 빠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어서 담대해질 것을 나타내는 권면이다. 13절은 (잠 4:26)을 인용한 것이다. '곧다'('오르다스')는 말은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 가운데 적절한 행동을 취하는 것으로 윤리적인 것을 의미하나, 13절에서는 믿음의 시련을 통해서 도달하는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를 의미한다(Lane). 그리스도인들은 시련에 의해서 좌우로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최종적인 목표를 향해 곧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어그러지다‘('에크트라페')는 말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곧은 길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을 의미하여 '배교'를 의미할 수도 있다(Hughes, Kasemann). 2) '탈구(脫臼)하다'라는 의미로 믿음이 흔들리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Morris, Bruce, Hewitt).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만약 전자의 경우처럼 배교를 의미한다면 '배교는 더 이상 속죄할 수 있는 제사가 없다'는 말(10:26)과 '고침을 받게 하라'는 명령과 부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Lane). 저자는 본절에서 시련과 위험 속에서 좌절하고 소진된 상태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여 신앙의 최종적인 목표인 종말론적 구원만을 향하여 매진할 수 있도록 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59) 신앙적인 권면(12:14)

 

   모든 사람으로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14). '좆으라'('디오케테')는 말은 긴박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여 추구하라는 것을 말한다(Morris, Lane, Michel). 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것에 대해서 두 가지로 진술한다.

 


 

1) 화평함-이것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ㄱ) 불신자들까지 포함하는 모든 사람들과의 평화를 의미한다(Morris). ㄴ) 십자가상에서 성취된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에 의해서 회복된 하나님과 인간과의 화평을 의미한다(Lane,  Foerster). 이 두 가지 견해는 둘 다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 이루어진 하나님과 인간과의 화평은 그리스도인들과 그리스도인들, 혹은 그리스도인들과 비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화평을 이룰 수 있는 근간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의 화평을 통해서 타인의 행복과 복지를 위한 책임을 갖게 된다.

 


 

2) 거룩함-거룩해져 가는 과정을 나타낸다. 그러나 인간의 노력에 강조점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서 성도들이 믿음으로 받아들이고자 할 때 주어지는 것이다(Michel, Morris, Bruce). 거룩함은 그리스도인이 소유해야 할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거룩해져야만  한다(레 11:45; 벧전 1:15,16). 이러한 화평과 거룩함이 없이는 절대로 하나님을 볼 수 없다. 왜냐하면 '화평과 거룩'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해 그리스도인에게 성취된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드러내야 할 하나님의 속성이기 때문이다(마 5:9).

 

 


 

 60) 점검하기 위해 돌아보라(12;15)

 

  히브리서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서로 돌아볼 것을 권면하고 있다. '돌아본다'('에피스코푼테스')는 말은 현재 능동태 분사로 '계속적으로 지켜보고 감독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공적인 목회 사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개개인이 서로를 돌보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3:12,13; 10:24,25). 저자는 그 과정에서 조심해야할 세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1)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라-'이르지 못한다'는 말('휘스테론 아포')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서 어떤 혜택으로 부터 제외되는 것을 말한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거절이나 불 신앙, 또는 가볍게 여기는 마음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제외되는 일이 없도록 두려워하고 서로 돌아보아야 한다.

 

 2) 쓴 뿌리가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라(신 29:12(LXX)) 저자는 신명기 본문에서 두 가지를 생략하고 있다. ㄱ) '에스틴 엔 휘민'('너희 중에 있다'). 왜냐하면 '에스틴...에노클레'('있다...괴롭게 하고')가 구문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Michel). (ㄴ)신명기 본문의 마지막에 있는 '피크리아'('쓴'). 이 말을 생략한 것은 중복을 피하기 위함이다(Lane). '쓴 뿌리'는 쓰고 독이 있는 열매를 내는 것으로 신명기에서는 우상 숭배와 연관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인용을 통해서 완고한 기질로 인해서 생겨나는 불신앙과 배교가 수신자들의 공동체에      팽배해지지 않도록 조심할 것을 경고한다.

 

 

 (3) 음행 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저자는 본문에서 창 25:29-34의 '에서'를 예로 들어 공동체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어려움에 대해 경고한다. 성적 부도덕을 행하는 '음행 하는 자'(포르노스)와 나란히 '에서'를 언급한 점에 대해 두 견해가 있다. 1) '음행하는 자와...망령된 자'( '포르노스에 베벨로스')에서 '에'('또는')가 '음행 하는 자'와 '망령된 자'를 분리시키는 것으로 수신자의 공동체내에 '음행 하는 자'와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라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고 주장한다(Bruce, Morris). 2) 혹자는 '포르노스'를 은유적으로 해석하여 하나님과의 계약을  파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 '망령된 자'와 동일한 의미로 보며 '음행 하는 자'와 '망령된 자' 둘 다가 에서의 경우에 해당되는 것으로 주장한다(Lane). 두 가지 견해 중 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포르노스'를 은유적으로만 해석해야 할 이유가 없으며 실제로 저자는 문자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13:4). 한편 '망령된'에 해당하는 헬라어 '베벨로스'는 '거룩하지 못한' 혹은 '세속적인'이란 의미로 영적인 면보다는 현세적인 것에 더 치중하는 것을 의미한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림으로 현세적인 것을 위해서 하늘의 참 복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고 내던져 버리는 자의 모델이 되었다(Thompson). 이러한 에서의 행위는 하나님께서 장자에게 주시고자  했던 축복에 대한 불신앙에서 비롯된 것으로 배교자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Hewitt, Morris).

 


 


 

 61) 배도에 대한 경고(12;16-17)

 

   에서는 야곱에게 축복을 빼앗긴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했다. 그러나 그는 버린 바가 되어 다시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16-17). 예수께서는 만유의 상속자로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1:2,4), 그리스도인들도 주님과 함께 아들의 지위를 얻은 자로서(2:10)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자들이다(6:12,17,18;9:15).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기업은 하나님의 선물로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할당하신 것이다. 에서의 눈물은 축복을 도로 찾기 위한 눈물이었지 장자 명분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를 가볍게 생각한 것에 대한 눈물이 아니었다(Lane) .그러기에 그가 눈물을 흘리며 간구 했던 축복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의 선물을 멸시하였기 때문이다(Westcott, Andriessen).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소홀히 여겨 세상만을 추구하다가 에서와 같이 축복을 빼앗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62) 열등한 유대교(12;18-21)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시내 산에서 만질 만한 불붙는 산과 흑운과 흑암과 폭풍과 나팔 소리와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히브리서 저자는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현현 하실 때 나타났던 징조를 여섯 가지 제시하고 있다(만질 만한 불붙는 산, 흑운, 흑암, 폭풍, 나팔 소리, 말하는 소리). 이것은 시내 산 사건이 외적으로 보이는 것과 귀에 들리는 현상을 통해서 계시가 전달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현현 때 동반되었던 외적이고 가시적이며 가칭적인 현상들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두려움을 품게 하였다(출 19:16-22; 신4:11,12; 5:22-27).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소리를 더 이상 듣지 않도록 해달라고 간구 하였다.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짐승이라도 산에 이르거든 돌로 침을 당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엄중한 명령을 견디기 어려웠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무시한 것에 대한 심판은 신속하고 가공할 만한 것이어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공포감을 느끼게 하였다. 이러한 일들은 모두 다 것은 옛 언약 하에서 인간 스스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히브리서 이러한 현상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만 두려워했던 것이 아니라, 옛 언약의 중재자인 모세도 두려워했다고 진술한다. 그러나  구약성경 어느 곳에서도 시내 산 사건 때 모세가 두려워했다고 진술된 곳은 없다. 저자가 어디에서 본문을 인용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가 말하는 강조 점은 백성들뿐만 아니라 옛 언약의 중재자인 모세조차도 하나님의 현현을 두려워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옛 언약 하에서는 예배 자와 하나님과는 분리되어 있었으며 감히 접근할 수 없었다는 것을 말한다.

 

 


 

 63) 기독교의 우월성(12:22-24)

 

   저자는 새 언약의 초월적인 축복에 대해서 일곱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구약의 성도들과 달리 신약의 성도들이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이다. 시내 산 사건이 물질적이고 외적이며 가시적이고 가칭 적인 반면에 본문의 시온 산 사건은 영적이며 비가시적인 것이다. 한편 '너희가 이른 곳'이란 말('프로셀렐뤼다테')은 완료 시상으로 이미 그리스도인들이 새 언약의 중재자인 예수를 통해서 축복에 참여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세 가지 호칭은 모두 다 하나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시온 산은 예루살렘에 있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이 거하는 집이라고도 불렸으며 이스라엘 지파들이 만나던 장소였고(Bruce, Morris) 영광스러운 하늘 도성의 기초로 불려지기도 하였다(LXX 사 28:16; 54:11-14). 이러한 시온 산이라 불린 '하나님의 도성'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은유로서(28절; 겔 48:35; 계 3:12) 새 언약 하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미래에 완전히 소유할 나라이며, 이미 소유하고 있는 영원한 나라이다(28).

 


 

   천만 천사...총회-개역성경 본문에는 '총회'(assenbly, NIV)가 '장자들의...교회'와 연결되어 있으나 헬라어 본문으로 볼 때 '천만 천사'와 연결되는 것이 훨씬 더 자연스럽다(NIV, Morris). '총회'의 헬라어 '파네귀레이'는 축제를 즐기기 위해 모이는 '즐거운 집회'를 가리키는 것으로(Spicq, Morris, Bruce) 앞서 언급된 옛 언약 하의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공포에 떠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천만천사와 연합하여 축복의 장소인 하늘의 예루살렘에서 하나님께 경배하며 그 앞에 나아가게 된다.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구속받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첫 열매이며 상속자로서 비록 지상에서 생활한다 할지라도 그들의 이름은 하늘에 기록되어 있다(사 4:3; 단 12:1; 눅 10:20; 롬 8:6,29;  빌 4:3;  약 1:18; 계 3:5; 13:8; 17:8; 20:12).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이것은 종말론적 측면을 강조한 표현으로 심판자이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모습을 시사한다(Lane). 또한 이는 그리스도의 피를 경히 여기고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는 배교자들이나 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피할 수 없는 가공할 만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으며(10:26-29)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통해 거룩해지고 깨끗하여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은혜와 교제로 함께 하심을 시사한다(Hewitt, Bruce).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온전케 된'에 해당하는 혤라어 '테텔레이오메논'은 완료시상으로 예수의 피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미 전혀 부족한 것이 없는 상태에 있음을 시사한다(10:14, Spicq, Lane). 옛 언약 하에서는 야심이 깨끗해질 수 없었지만, 새 언약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서 모든 믿는 자들은 온전케 한다(10:14; 11:40).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옛 언약의 중보 자인 모세(21절)와 새 언약의 중보 자이신 그리스도의 비교를 통해 그리스도와 새 언약의 우월성을 증거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대속을 위해 흘리신 피에 의해서 옛 언약이 할 수 없었던 양심의 정결함을 입게 되었고, 영원한 구원을 소유하게 되었으며 하늘 성소에 들어가  하나님 존전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9:11-14). 아벨과 동일하게 그리스도께서도 죄 없이 죽임을 당하였지만 그리스도의 피는 모든 이들에게 저주가 아니라 축복과 은혜를 가져다주었으며, 모든 이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영원한 구속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Bruce, Morris, Lane).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피는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한다.

 

   

 


 

 64) 삼가 들으라(12:25-26)

 

   너희는 삼가 말하신 자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자를 거역한 저희가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 좇아 경고하신 자를 배반하는 우리일까 보냐(25). '말하신 자'는 한 분이신 하나님을 나타낸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땅에서 경고하신 자'와 '하늘로 좇아 경고하신 자'로 나타나고 있다. 옛 언약 하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았고 순종하기를 거절하여 심판을 당하였다(3:16-19). 새 언약보다도 열등한 옛 언약을 거절한 것도 심판을 피할 수 없었건만 옛 언약보다 훨씬 월등한 새 언약의 메시지를(2:1-4) 고의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율법을 거부할 때보다 더 엄중한 심판을 면할 수 없는 행위이다(Morris, Hewitt). 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가라사대 내가 또 한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26). '그 때'는 과거의 시내 산 사건을 가리키는 것으로 18-21절의 내용을 시사한다. 시내 산에서 하나님이 현현 하실 때에 땅이 진동하였으며(출 19:18; 삿 5:4,5; 시 68:8; 77:18; 114:4,7) 그 위엄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개역 성경에는 이제는 이란 말 앞에 '데'('그러나')가 생략되어 있다. '데'는 시내 산 사건에서 나타난 땅의 진동보다 더 큰 진동이 있을 것임을 암시한다. 한편 '약속하였다'는 말('에펭겔타이')은 완료 시상으로 과거에 약속하셨으나 현재까지 그 약속이 지속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저자는 (학 2:6)를 인용하여 과거의 시내 산 사건은 땅만 진동하였으나 미래에는 하늘과 땅이 모두 진동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여기서 '땅'과 '하늘'은 시내 산에서의 계시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새 언약에 대한 상징이며(Thomas) '진동'은 미래에 벌어질 세상의 변형 또는 긍극적인 파멸을 가리키는 것으로 우주적 대변혁을 나타낸다(Lane). 새 언약의 계시를 거부한 자들은 최후의 파멸의 날에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산에서 주어진 계시를 무시한 자들과 마찬가지로 심판하실 것이다(Morris, Lane).

 


 


 

 65) 지나간 유대교와 기독교의 확립(12:27)

 

    하나님께서 또 한 번 하늘을 진동케 할 것이라고 하신 것은 진동치 않는 하늘 나라를 영존케 하기 위해서 진동할 것들 곧 피조물들을 변하게 하실 것임을 말한다(27). 하나님께서 시내 산의 현현을 통해 땅을 진동하시고 다시 미래에 하늘과 땅을 진동하시는 이유는 불변하는 하나님과 그 나라를 '영존케 하기 위한 것‘('메이네')이다. 새 언약에 신실한 자들은 미래에 영원히 진동하지 않을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게 되며 하나님의 불변성을 공유하게 될 것이다(23절).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영원한 나라를 세우시기 위해서 최후의 날에 변동될 것 즉 창조물을 제거하실 것이다. '진동할 것'과 '만든 것들'('페포이에메논')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만드신 만물들을 말한다.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모든 것들은 진동할 것이며 제거될 것이다. 그들은 새 언약의 축복을(22-24절) 빼앗길 뿐만 아니라 저주와 심판을 당하게 될 것이다(25절).

 


 


 

 66) 그리스도의 나라(12:28)

 

   저자는 성도들이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라고 권하고 있다(28). '진동치 못할 나라'의 기원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단 7:14,18(LXX)에서 기원한 것이다(Westcott, Michel). (2) 시 95:9-11(LXX)에서 기원한 것이다(Vanhoye, Lane).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저자는 본서에서 자주 시편을 인용하여 논증하고 있으며, 또한 앞서 학 2:6을 인용하여 진동의 문제를 해석하면서 단 7:14,18을 인용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진동치 못할 나라'라는 것은 최종적인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실체로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Morris). 한편 '은혜를 받자'는 말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 '감사하자'(NIV, Hewitt, Lane). 2) '은혜를 붙잡자'(JB, Morris, Montefiore). 두 가지 해석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카린'은 감사보다는 은혜를 의미하며, 또한 뒤에 언급되는 '이로 말미암아'(디 헤스)란 말이 이것을 지지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새 언약 하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진동치 아니할 하나님 나라를 선물로 받았기 때문에 심판을 자초하는 배교나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행위를 범하지 말고 오직 은혜를 굳게 붙들 것을 권면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겨야 한다(28). '경건함과 두려움'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자신의 비천함을 깨닫고 종말적인 하나님의 심판을 늘 인식하는 가운데(29절) 하나님을 섬기는 자세를 나타낸다(Morris, Lane).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굳게 붙잡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형성하고 그 관계 속에서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봉사하며 섬겨야 한다.

 


 


 

 67) 마지막 경고(12:29)

 

   개역 성경에는 29절 앞에 있는 '가르'('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가르'는 29절이 28절에서  언급한 것, 즉 그리스도인들이 두려움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이유라는 것을 말한다.

 

성도들이 하나님을 두려움과 경외함으로 섬겨야 하는 이유는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기 때문이다(29절, 신 4:24). 저자는 신명기 본문에서 본절을 인용하는 과정에서 '너의'(수)를 '우리'(헤몬)로 변경하였다. 이는 본문이 새 언약 하에 있는 수신자 공동체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라는 것을 말한다. 시내 산 현현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은 새 언약 하에서도 여전히 변하지 않는다(Riggenbach, Moffatt, Michel). 한편 '불'은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한다(6:8; 10:27). 본문은 하나님의 음성을 거부하고 새 언약의 효력을 고의적으로 부정하는 배교자들과 비그리스도인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이 엄격함과 완전함을 암시한다(Lane). 그러기에 새 언약 하에 있는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의 심판을 간과하지 말고 두려움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여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68) 성도들을 향한 몇 가지 권면(13;1-6)

 

   히브리서 기자는 마지막 경고 부분에서 나그네들과 죄수들에게 계속해서 형제애를 실행하고, 음란과 돈에 대한 탐욕을 버리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자족한 생활을 추구할 것을 그의 독자들에게 권면하고 있다(13:1-6)

 

 

 가. 형제 사랑(13:1-3)

 


 

  * 형제 사랑(1)

 

   '형제 사랑'은 믿음의 공동체 내에서 형제와 자매를 연결하여 연대감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22,23).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지속적으로 지녀야 할 사항이다(Lane). 저자는 당시의 수신자들 사이에 신앙이 약해진 자들을 결속시키고 그리스도 안에서 계속적으로 교제를 나눌 수 있도록 권면하고 있다.

 


 

  * 손님 대접(2)

 

   저자는 앞절에서 권면한 '형제 사랑'을 확대하여 '손님 대접'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손님 대접'에 관한 권면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가르침을 반영한 것이다(마 25:35).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핍박으로 인해서 복음 전도 여행과 그 여행을 위한 숙식을 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손님을 대접하는 것은 복음 전도 사역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었다(행 21:4,7,16,17). 그러기에 손님 대접에 대한 권면은 초기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메시지였으며 그들이 지켜야 할 의무였다(딤전 3:2; 딛 1:8; 벧전 4:8,9, Bruce,Lane). 아브라함은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세 사람의 손님을 영접하고 대접하였을 때 세 손님은 사라에게 이삭의 출생에 대해 예언하였다(창  18:1-21).  저자는 손님을 대접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므로 그리스도인이 행해야 하는 덕목이라는 것을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다.

 


 

  * 갇힌 자와 학대받는 자를 생각함(3)

 

   저자는 자기도 함께 갇힌 것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고 권면한다. 본문에서 저자는 '형제 사랑'에서(1절) '손님  대접'으로(2절), '손님 대접'에서 '갇힌 자와 학대받는 자에 대한 대접'으로 확대하고 있다. 당시 '갇힌 자들'은 심한 학대를  받아서 음식이나 의복에 대해 가족이나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만약 가족이나 친구들의 직접적인 도움이 없었다면 그들은 감옥에서 굶주려 죽어야만 했다. 당시에 그리스도인들이 갇힌 자들을 도와주면 그들 역시 갇힌 자와 동일한 대우를 받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자신이 갇힌 것처럼 생각하여 도와주라고 한다(고전 12:26, Morris, Bruce). 한편 '학대받는 자'는 신앙 때문에 악한 대우를 받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11:36,37, Lane).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신앙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소외된 자들과 연대감을 가지고 자신의 몸이 학대받는 것처럼 생각하여  그들과 교제를 나누어야한다(10:32-34; 11:36-38, Filson).

 


 


 

  나. 혼인(4)

 

   성도들은 모든 다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해야 한다. 결혼을 더럽히는 자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다(4).-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결혼을 귀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결혼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제도이며,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모두 다 결혼을 귀중히 여겨야 한다. '침소'('헤 코이테')는 성생활에 대한 완곡한 표현이다(Morris, Lane). 성적인 범죄를 통해 침소를 더럽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시고 거룩하게 하신 결혼을 욕되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행위에 대해 반드시 심판하신다(17절). 저자는 성적인 죄를 범하는 자에 대해 두 부류로 묘사한다.

 


 

1) 음행 하는 자들-이것은 결혼 외에 다른 방법으로 성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포함하여 모든 성적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을 가리킨다.

 


 

2) 간음하는 자들-이것은 결혼 시에 표현한 서원에 불충실하여 이를 어기며 성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을 가리킨다. 이러한 두 부류의 행위는 불법적인 성행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반드시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

 


 


 

 다. 탐심과 자족함(13:5-6)

 


 

 *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돈을 사랑치 말라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주 강조된 금지 명령이다. 돈에 대한 탐욕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마음에 두 주인을 섬기게 하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들며 범죄하게 만든다(마 6:24; 눅 16:13; 딤전 6:10). 그 결과 우상 숭배의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저자는 본절에서 현재 주어진 여건과 물질에 대해  만족할 것을 권면한다. 저자는 현재 주어진 것에 대해 만족해야 할 이유 두 가지를 제시한다.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그리스도인들이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현재 주어진 여건에 만족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지켜주시고 함께  하시리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창 28:15; 신 31:6; 수 1:5; 사 41:17). 모든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지켜주신다는 사실은 바울과 같이 현재에 주어진 환경에 자족하게 한다(빌 4:11-13).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시 118:6).-하나님께서 돕는 자로서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시편 기자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은 돈과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와 지며 담대해질 수 있다(2:14,15). 한편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는 부정을 유도하는 수사학적 질문으로 사람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를 대항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롬 8:31).

 

   

 


 

 69) 충성에 대한 여러 동기들(13:7-8)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7)-'인도하는 자'('톤 헤구메논')는 신앙을 지키다가 죽은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인도하는 자들'의 역할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들을 인도하는 역할을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공동체 내에 서나 선교 사역 때에 설교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구속사역에 관한 메시지를 전달해 주던 지도자들을 기억하고 더불어 그들의 신앙을 본받아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지도자들이 수많은 고난과 죽음의 위협 속에서 신앙을 지키다가 심지어 죽기까지 한 것을 기억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과거에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 말씀에 의지하며 신앙을 저버리지 않고 굳게 잡은 사실을 주의하여 살펴보고 따라가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8).-우리들이 말씀을 전하고 인도하던 이전의 신앙의 선조들을 생각해야 할 이유는 그리스도께서는 그 때나 지금이나 항상 동일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에게 신실하게 대해 주신 주님께서는 오늘 날의 성도들에게도 역시 신실하게 대해 주실 것이다. 또한 이 말에는 이 세상의 지도자들은 죽고 사라질지라도 그리스도께서는 변함없이 성도들을 인도하신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예수께서 성도들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5:7), 지금도 그리스도인들의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변호하시며, '영원토록'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간구하고 계신다. 또한 이 말은 과거의 지도자들이 그리스도를 믿음의 대상으로 삼고 그를 전파한 것 같이, 오늘의 수신자들도 배교의 위험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믿음을 지켜야 한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70) 마음을 굳게 하라(13:8-9)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9)-저자는 본문에서 수신자들에게 다른 교훈에 빠지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다. '식물'은 '음식'을 의미한다. 이상한 교훈을 전하는 자들은 음식을 통한 의식이나 규례에 의해서 온전하여지고 유익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거짓된 여러 가지 다른 교훈은 엣세네파(Essenes)나 그와 비슷한 종파와 연관된 혼합주의 적인 영지주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Bruce, Hughes). 그러나 '식물'은 육체에 제한된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온전한 것을 이루실 때까지 허락된 예법에 불과한 것이었다(9:10). 그러기에 식물과 의식을 통해서는 전혀 어떠한 유익도 가져다 줄 수 없으며, 온전히 깨끗게 할 수 없고, 단지 외적인 것만을 정결케 할뿐 양심을 정결케 할 수 없다(9:13,14).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유익과 풍성함은 식물과 그에 따른 의식을 지킴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의 효능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2:9)과 기도를 통해서(4:16) 그리스도인들에게 전달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은혜에 의해서만 온전하여질 수 있으며 거짓 가르침이 말하는 것처럼 식물이나 그 의식에 의해서 온전해질 수 없으니 그 식물과 그에 따른 규례는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도래할 때까지로 제한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71) 그리스도인의 제단(13:10)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그 위에 있는 제물은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이 이 제단에서 먹을 권이 없나니”(10)-혹자는 '제단'은 '희생 제사'를 의미하며, 이는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적 사역에 대해 언급할 때 사용되었다(8:1-5; 9:11-14,24-26; 10:11,12). 이것은 은유적으로 영문 밖에서 당하신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암시한다(12절; 12:2, Andriessen). 십자가상에서의 예수의 죽음은 구원의 근원일 뿐만 아니라 은혜를 유지하는 원천이 된다(Bruce). 그러기에 새 언약의 백성이 된  그리스도인들은 음식이나 그에 따른 급례에 의해서 거룩하여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의 희생  제사에 의해서 거룩해지며(12절; 9:14; 10:10,14), 그 제단은 레위기에 규정된 법을 따르는 제사장들이나 유대인들은 전혀 참여할 수 없으며 맛볼 수 없는 것이었다(6:5,  Kuss).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희생 제사는 구약에서 규정한 제사 규례나 정결 규례보다 훨씬 우월한 것이며 온전케 하는 것이다. 한편 혹자는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를 문자 적으로 신약 시대의 성만찬과 연결 지어 제단을 성만찬 식탁으로 해석한다(Schroger).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본절 내에 성만찬에 대한 어떠한 암시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볼 때 타당하지 않다.

 


 


 

 72) 우리의 속죄 제이신 그리스도(13:11-12)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11)”-속죄일이 되면 대제사장은 희생 제물의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갔으며(레 16:14,15) 희생 제물의 시체는 영문 밖에서 불살라  버렸다(레  16:27).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다”(12)-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 성문 밖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사실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Lane). 1) 그리스도는 자기 몸으로 죄인을 거룩케 하기 위해 속죄 제사를 드리셨다. 2) 그리스도는 죄인을 거룩케 하시기 위해서  거룩한 영역으로부터 배제 당하는 수치를 당하셨다. 주님은 인류의 대속을 위해 산헤드린에 의해 정죄 받고, 백성들에 의해 배척(排斥) 당하셨으며, 마침내 처형을 당하셨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율법이 할 수 없었던 것을 가능케 한 것으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새로운 방법이었다.

 


 


 

 73) 영문 밖으로(13:13-14)

 

   “그런즉 우리도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13).-유대인들은 '영문'을 거룩한 것으로, '영문 밖'을 더럽고 부정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 영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다는 사실은(12절) 거룩한 영역에서 제외되었으며 부정하고 부끄러운 것으로 이해되었다(레 13:46; 민5:2-4; 신 23:11; 눅 6:22). 그러나 전에 거룩하던 영문은 부정하여졌고, 전에 부정하던 영문 밖은 거룩하여졌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영문에서 쫓겨나 영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이다(Bruce). 따라서 저자는 아직도 옛 언약과 유대교의 범주인 영문 안에  머물러 있지 말고 이제 새 언약과 그리스도가 계신 영문 밖으로 나아갈 것을 권면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영문 밖의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는데 필요한 조건은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능욕을 지는 일', 즉 그리스도와 동일한 고난을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에게 나아가기 위해서 그의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14)-그리스도인들이 생활하는 이 세상이나 유대교 안에는 영구한 하늘의 도성은 없으며 단지 일시적인 도성만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장차 올 도성은 사라질 도성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경영하시는 터가 있는 도성(11:10,16) 곧 하늘의 도성이다. 그들은 하늘에 기록된 천국 시민이기 때문에 오직 하늘의 도성을 바라보고 이 세상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며 나그네와 같은 생활을 해야한다.

 


 


 

74) 그리스도인의 제사(13:15-16)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 하는 입술의 열매니라”(15)-그리스도인들이 드리는 찬미의 제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드려진다. 그리스도인들이 드리는 제사는 더 이상 옛 언약의 제사장들이 드렸던 동물 희생 제사가 아님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에 의해 온전한 희생 제사가 단번에 드려졌으므로 더 이상 속죄를 위한 동물 희생 제사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도리어 그리스도인들이 드려야 할 제사는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찬미하는 제사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오직 찬미의 제사를 드리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희생 제사가 하나님께 온전하게 열납 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항상'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드려지는 찬미의 제사가 지속적이어야 함을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끊이지 않고 하나님께 찬미의 제사를 드리는 일은 하나님의 은혜와 선하심을 계속적으로 경험할 때 가능하며 하나님의 약속의 불변성을 확신할 때 이루어진다(Lane). '입술의 열매'는 감사제와 감사 찬송시 에 대한 셈어적인 표현이다(잠 10:31; 12:14; 13:2; 18:20). 하나님께서 간절히 원하시는 제사는 하나님의 이름을 증거하고 드러내는 찬양으로서(LXX 시 49:23) 그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혜와 선함에 대한 응답이며 하나님과의 계약을 진실하게 이행할 수 있도록 하는 조건이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16).-저자는 그리스도인이 '찬미의 제사'뿐 아니라 사랑의 행위도 하나님께 드려야 함을 역설한다. '선을 행한다는 것은 타인에게 관심을 보이는 모든 친절한 행위를 가리키며, '서로 나누어주는 것‘은 타인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타인을 사랑하는 실제적인 행위가 없는 찬미의 제사는 불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사랑의 행위가 동반되어야 한다(Thuren). 친절과 관용 그리고 찬미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새 언약 하에 있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에게 요구하시는 예배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응답으로 '말'로는 물론 '행함'으로  제사를 드려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이러한 제사를 통해서 성취되며, 하나님은 이러한  제사를  기쁜 마음으로 열납 하신다(Lane).

 


 


 


 


 

 75) 기독교 인도자들(13: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17)-본절의 '인도하는 자'는 7절의 '죽은 지도자'와는 달리 현재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인도하는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저자가 반복적으로 지도자들에 대해 복종할 것을 강조하는 것은(7,24절) 당시 배교의 위험과 이해 관계에 직면하여 지도자들을 잘 따르지 아니하고 대적하는 경향이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영적 지도자들은 성도들을 위해 깨어 돌보며 지킨다. '경성한다'는 말('아그뤼프누신')은 양떼들을 돌보기 위해 밤을 지새우는 목자 상을  나타내는 말로, 신약성경에서 주로 종말론적인 '깨어 있음'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막 13:33; 눅 21:36; 엡 6:18). 영적 지도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영혼을 위해서(10:39), 날마다 깨어 돌보는 자들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존경과 순종을 받을 만한 권위가 있다. 한편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라는 말은 성도들의 일을 자기 일처럼 책임지고 사역한다는 것을 말한다.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17)-그리스도인들이 지도자에게 순종하는 것은 지도자들이 양떼들을 돌보기 위해서 경성(警醒)하는 것이 즐거움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의 불순종과 고집으로 인해서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책임을 이행하는 것이 부담스럽고 근심스러운 일이 된다면 그 지도자의 인도함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전혀 유익이 되지 못할 것이다.

 


 


 

 76) 선한 양심, 교역자들을 위한 기도(13:18-19)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를 위하여 너희 기도함을 더욱 원하노라”(18-19)-1인칭 복수인 '우리'는 서간체 복수로 저자 자신을 의미한다(Hewitt, Bruce). 왜냐하면 다음절에서 이 말이 다시 '내가'로 변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지도자로서 자신을 위하여 기도해 줄 것을 수신자들에게 부탁하고 있다. 개역 성경에는 18절에 '가르'('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더럽혀진 양심'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되므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서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해져야 한다(9:14). 저자가 본절에서 자신의 '선한 양심'에 대해 확신하는 것은 자신을 향한 타인의 비방에 대한 방어책으로 저자 자신이 지도자로서 선한 행동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의무를 잘 수행하였음을 말한다(Bruce). 저자는 수신자들이 속한 공동체에 다시 방문할 수 있도록 기도해 줄 것을 요청한다. 재 방문을 위한 기도 요청은 저자와 수신자들간에 개인적으로 상당한 친분 관계가 있었으며(Hewitt, Lane) 또한 저자가 수신자 공동체를 방문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방문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저자의 투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Hewitt, Morris, Bruce). 왜냐하면 23절에서 디모데가 감옥에서 나오면 함께  방문할 것이라고 함으로써 자신이 감옥에 투옥되지 않았음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저자가 수신자 공동체에 방문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확실히 있으나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77) 사도의 기도(13:20-21)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20) 본문은 송영이다. 그리스도께서 ‘양의 큰 목자라고 언급한 것은 (사 63:11)의 '백성과 양 무리의 목자를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란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저자는 이사야가 모세가 미디안의 목자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으로부터 이끌어 낸 것을 언급한 본문을 유형론적으로 해석하여  '양의 큰 목자'이신 예수께 적용하고 있다(Lane, Bruce). 저자는 예수께 '큰 목자'라는 칭호를 부여함으로 (사 63:11)에서 모세에게 칭한 '양 무리의 목자'와 대조를 이루게 하며 옛 언약의 중재자인 모세보다 새  언약의 중재자인 예수께서 더 위대하심을 강조하고 있다. '언약의 피'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언약의 희생 제사임을 시사하며(9:20; 출 24:8) '영원한'은 예수의 속죄 사역이 영원한 효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죽음으로부터 이끌어 내셨다. 예수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정하고 비준(批准)하신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을 통해서 이루어졌다(Michel, Cranfield, Thuren). 애굽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내신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로부터 일으키셨다. 하나님께서 주님을 다시 살리신 것은 죽음의 세력이 무너지고 의로운 자녀들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평강의 하나님‘이란 칭호는 하나님께서 평화의 근원이시며 수여 자이심을 의미한다. 또한 이 말은 수신자 공동체 가운데 배교의 위험과 지도자와의 불협화음이 있었음을 암시한다(Bruce, Morris, Hewitt). 그래서 저자는 송영에서 수신자 공동체에게 하나님께서 '평화의 하나님'이심을 상기시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서로간의 불화를 억제하고 지도자에게 순복하여 평안을 이룰 것을 강조한다(17절).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 무궁토록 있을 지어다. 아멘“(21)-하나님께서는 수신자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공급하셔서 모든 선한 일을 행하는 일에 온전케 해 주실 것을 기도한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안에서 선한 일에 온전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며(12:28),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리도록(15,16절) 부름을 받은 존재들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 안에 기쁘고 즐거운 일들을 이루신다. 저자는 하나님께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기를 기원한다.

 


 


 

 78) 신적인 권고들(13:22)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22) -'형제들아'와 '용납하라'는 말은 저자가 앞서 기술한 배교나 비 그리스도인에 대한 격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진술, 그리고 지도자와 수신자들 사이의 갈등에 대한 훈계와 비교되어 부드럽고 애정이 서려 있다. 본문에서 저자는 이제까지 진술한 내용을 '권면의 말'이라고 정의함으로 자신이 이제까지 진술한 것이 책망보다는 격려 차 위로에 기인한 것이었음을 밝히고 다시 한번 본서의 내용에 주목해 줄 것을 암시하고 있다. '권면의 말'은 '설교를' 의미한다. '간단히 썼다'는 것은 유대 문서나 초기 그리스도인 문서에서 공손함을 나타내는 문학적인 표현이다(Hewitt, Lane).

 


 


 

 79) 신령한 자유(13:23)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저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23)-저자가 바울의 동역 자였던 디모데를 '우리 형제'라고 부른 것은 디모데가 수신자들에게 매우 잘 알려져 서로 교제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한편 '놓였다'는 말은 감옥에서 풀려난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디모데가 언제 어디에 있는 감옥에 갇혔었는지는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디모데가 감옥에서 풀려난 사실을 먼저 알고 전하면서 디모데가 속히 올 경우  함께 방문할 것을 밝히고 있다.

 


 


 

 80) 결말(13:24-25)

 

   “너희를 인도하는 자와 및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24)-저자는 본문에서 앞서 언급한 것과 마찬가지로 '인도하는 자'와의 문안을 통해서 갈등 관계가 아니라, 선한 관계를 형성하여 그들에게 순복(順服)할 것을 암시한다(7,17). 한편 '모든 성도'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  본서의 수신자들이 속해 있는 도시 전체의 성도를 가리킨다(Lane). 2) 본서의 수신자들이 모이는 가정 교회의 성도들을 가리킨다(Bruce). 두 가지 해석은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모든 성도들에게 문안하여 화평의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화평을 이룸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을 암시적으로 권면하고 있다.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이달리야에서 온 자들'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 당시 이탈리아에 흩어져 사는 자들이 이탈리아 내에 있는 사람들에게 문안한 것을 가리킨다(Spicq). 2) 이탈리아 밖에 있는 사람이 이탈리아에 있는 사람들에게 문안하거나 이탈리아가 고향인 자들이 이탈리아에 있는 사람들에게 문안한 것을 가리킨다(Bruce). 이 두가지 해석이 모두 가능하기 때문에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가 어렵다(Morris, Bruce, Hewitt).

 


 

   “은혜가 너희 모든 사림에게 있을지어다”(25)-'은혜'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리스'는 비록 흔히 사용되던 인사법이라 할지라도 본서를 마감하는 종결 인사로서 매우 적절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저자가 본서에서 계속적으로 하나님께서 구속하시고 인도하시며 도와주시는 은혜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9절; 2:9; 4:16; 12:15). 저자는 마지막 인사로 수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상기시킴으로 배교(背敎)의 위험에 처해 있는 수신자들과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는 물론 지도자와 수신자들간의 갈등관계를 하나님의 은혜로 해결할 것을 암시하고 있다(Lane).

 

    

 


 

< 결론 및 요약 > 

 

   히브리서는 신앙에 있어서 점차로 태만해져 가고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유혹을 받고 있는 유대 기독인들을 위해 쓰여졌다.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에 활동한 사람들의 품격과 사역보다 예수님의 품격과 사역이 우월함을  입증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품격으로 볼 때에 천사들과 모세보다 우월하시며, 그의 사역도 역시 우월하시다. 신이시며 인간으로서의 새 언약의 대제사장으로서 그는 세상 죄를 위하여 단번에 모든 사람을 위한 희생 제물로써 자기 자신을 드리셨다. 그의 제사장 직은 멜기세덱 반열의 성취이다. 이 제사장 직은 하나님의 맹세의 말씀에 의하여 수립되었고, 죽음에 의하여 영향받지 아니하며, 죄에 의하여 훼손 받지 않는다.

 

 

   그는 그의 백성을 완전하게 이해하신다. 그 이유는 그가 그들의 인간 본성을 함께 소유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공로를 힘입어 그의 백성은 하나님의 면전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은 대제사장이신 주님께서 하늘 성소로부터 다시 이 땅에 임하시어 그들을 영접해 주시기까지, 그의 뜻을 열심히 행해야 한다.

 


 

   히브리서의 목적은 신앙을 굳건하게 하고 인내와 견고함을 격려하기 위한 것이다. 그 메시지는 세 가지 주요 특징들을 소유하고 있다.

 


 

 1) 그것은 구약을 기초로 하였다.

 

 2) 그리스도께서 전체 메시지를 지배하시고 좌우하신다.

 

 3)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이후의 날들은 “마지막 날들”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예수님과의 관계를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임마.누엘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