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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하나님의 계시 2

하나님아들 2012. 7. 25. 15:05

하나님의 계시


 

  역사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계시하시기 위해서 주도권을 행사하셨던 2가지 통로
가 있는데, 그 통로에는 각각 '일반계시(general revelation)'와 '특별계시(special revelation)'라는 명칭이 붙여졌습니다.
  일반계시는 사람을 포함하여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모든 것을 말하며, 특별계시는 하나님께서 성경에 기록한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사용했던 여러 가지 수단'을 말합니다. 그렇지만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는 모두 (1) 하나님으로부터 온 계시이고, (2) 하나님에 관한 계시입니다.

 

  I. 일반계시의 특징(CHARACTERISTICS OF GENERAL REVELATION)

 

  일반계시는 말 그대로 '일반적인 것(general)'이다. 일반계시는 그 영역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주어집니다(마 5:45; 행 14:17). 일반계시는 단순히 모든 사람에게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그들이 어느 때에 살고 있는지에 상관없이 영향을 미치는 계시이기 때문에, 명백하고 뚜렷한 진리는 아니지만 모든 일반 사람에게 빛과 진리의 모습을 전해줄 수 있고, 만약 사람들이 그 일반계시를 거부하면 그들에게는 정죄가 임하게 될 것이다.

 

  II. 일반계시의 통로(AVENUES OF GENERAL REVELATION)

 

  일반계시는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인류에게 주어집니다.

 

  A. 창조를 통해서(Through Creation)
  지금 우주(the cosmos)가 존재하게 된다면, 그것은 '무(nothing)'로부터 온 것이든지 아니면 '영원성을 가지고 있는 어떤 것'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두 번째 경우에 있어서 '영원한 어떤 것'은 '영원성을 가지고 있는 우주 자체(the cosmos itself which would have to be eternal)'일 수도 있고, '영원한 원리로서의 우연(chance as an eternal principle)'일 수도 있고, '영원한 존재자 하나님(God the eternal Being)'일 수도 있습니다.
  우주가 '무'로부터 왔다는 것은 우주가 스스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인데, 왜냐하면 어떤 것이 스스로 창조되기 위해서, 그것은 존재하되 같은 방식으로 같은 시간에 존재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자기창조(self-creation)'는 이제까지 과학적으로 증명된 적도 결코 없었고 관찰된 적도 결코 없었습니다.
  만약 우주가 스스로 생성되지 않았다면, 그 우주를 존재하게 한 '영원한 어떤 것(something eternal)'이 있어야 합니다. 한가지 '선택가설(option)'은 '우주의 진보과정 자체(the cosmic process itself)'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영원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인데, 그러한 가설을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대신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얼마나 오래 전에 그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우주는 '어떤 시작시점(a beginning)'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또 하나의 선택가설은 영원한 원리로서의 '우연(chance)' 혹은 '맹목적 지성(blind intelligence)'에 의해 우주가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엄청난 믿음을 필요로 합니다. '무작위적 우연(random chance)'이 오늘날 우리가 눈으로 보는 그와 같은 엄청난 우주를 만들어낼 수 없다는 것은 수학적으로 증명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백 번 양보하여 그 '무작위적 우연'이 우주의 재료라고 할 수 있는 분자와 원자는 만들어낼 수 있다고 할지라도, 그와 같은 무생물적인 재료가 생명의 혼적 요소와 영적 요소를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겠습니까?
  세 번째 선택가설은 유신론적 가설입니다. 즉 우주를 창조한 영원한 존재자는 하나님이라
는 것입니다. 이 가설은 우주가 영원한 존재자의 모든 성격을 상세하게 계시하고 있다는 말
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우주를 만들어낸 살아있는(living), 능력있는(powerful), 지성적인 (intelligent) 존재는 분명히 있다고 주장합니다. '살아있는(living)'이라고 말하는 것은 생명이 없는 존재가 생명을 만들어낼 수 없기 때문이고, '능력있는(powerful)'이라고 말하는 것은 창조의 위대성 때문이고, '지성적인(intelligent)'이라고 말하는 것은 우연의 산물이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우주의 질서와 조화 때문입니다.

 

  B. 조직을 통해서(Through Organization)
  세상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목적(purpose), 질서(order), 그리고 설계(design)는 설계자 (designer)가 있음을 말해줍니다. 이와 같은 '목적론적 논증(teleological argument)'에서 가장 널리 인용되고 있는 설명은 윌리암 펠리(William Paley)의 '자연신학(Natural Theology)'이라는 저서에 있는데, 그 저서에서 그는 '시계의 조직체계(the organization of a watch)'는 '시계를 만든 사람(a watchmaker)'의 존재를 암시한다는 예를 들고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세상의 조직체계(the organization of the world)'는 그 세상을 계획하고 만든 어떤 분의 존재를 암시합니다.
  목적론적 논증을 보다 효과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자연의 설계에 대해서 세밀한 측면보
다는 전체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버쉘(Buswell)의 예화 중에서 하나를 인용한다면(A Systematic Theology of the Christian Religion, [Grand Rapids: Zondervan, 1962], p. 87), 눈송이가 어느 것 하나라도 같은 모양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과 설계를 희미하게나마 증거하는 것이지만, 그 사실보다 눈이 일정한 계절의 주기를 따라 생성되고 땅의 습기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과 설계를 훨씬 뚜렷하게 증거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자연계에서 벌어지는 어떤 특이한 사실, 특히 바람직한지 못한 모습들이 종종 자연계에서 작용하고 있는 사실들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그러한 것들도 질서 있게 설계 된 것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무작위적 행동(random action)'은 세상에서 우리가 관찰하는 그런 '고도로 체계화된 조직(the highly integrated organization)'을 결코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C. 인간을 통해서(Through Man)
  '도덕적이고 지성적이고 살아있는 존재인 인간'이 어떻게 '도덕적이고 지성적이고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설명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여러 가지 요소들 각각이나 아니면 그 모든 요소들을 통합적으로 보면, 그러한 인간을 만들 수 있었던 '어떤 도덕적이고 지성적이고 살아있는 존재(a being who is moral and intelligent and living)'의 존재하심(existence)에 대한 설명을 요구받게 됩니다. '물질적이고 생명이 없고 혹은 의식이 없는 힘(material, inanimate, or unconscious forces)'은 결코 인간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진화는 영혼, 양심, 그리고 종교적 본능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생명이 없는 우상은 살아있는 사람을 생성시키지 못합니다.

 

  D. 존재를 통해서(Through Being)
  존재론적 논증(the ontological argument)은 안셀름(Anselm), 데카르트(Descartes), 그리고
그외 여러 사람들에 의해서 주장되었고, 헤겔(Hegel)과 같은 몇몇 사람들에 의해서 그 논증
이 받아들여졌으며, 칸트(Kant)와 같은 몇몇 사람들에 의해서는 그 논증이 거부되었습니다.
  이 논증의 개략은 다음과 같습니다. (a) 우리들은 '가장 완벽한 어떤 존재(a Most Perfect
Being)'에 관한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b) '가장 완벽한 어떤 존재'에 관한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그 완벽한 존재의 '존재하심(existence)'을 암시합니다. 완벽하지 않다면 존재하지 않았던 '어떤 존재(a Being)'가 존재했던 '어떤 존재'처럼 그렇게 완벽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c) 그러므로 '존재하심(existence)'에 대한 사상이 '가장 완벽한 존재(the Most Perfect Being)'에 대한 사상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그 가장 완벽한 존재(that Most Perfect Being)'는 존재해야 합니다.
  이 논증이 연역적인(deductive) 논증이지만, 한편으로는 귀납적인(inductive)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상은 어디로부터 올까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사상이 '존재론적 실재성(an ontological reality)'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상들(ideas)'은 '원인들(causes)'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신뢰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요정에 관한 사상이 존재하지만 '요정의 존재함'이 '요정의 실재성'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정에 대한 그 사상'에 대해서 신뢰를 가질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관한 사상'이 존재합니다. 그 사상이 어떻게 증명될 수 있겠습니까? 이 점이 바로 존재론적 논증의 귀납적인 측면입니다. 그리고 요점은 '무신론적 자료들(nontheistic data)'만 가지고는 이 존재론적 논증을 설명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IV. 일반계시의 가치(THE VALUE OF GENERAL REVELATION)

 

  일반계시의 가치를 결정짓는 데 있어서 사람들은 그 일반계시의 가치를 너무 높이 평가하거나 너무 낮게 평가할 위험성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일반계시를 통해서 나타난 것이
성경에 나오는 참된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증명하는 데에 부족함이 없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반계시의 가치를 너무 높이 평가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다른 어떤 사람들은 일반계시에 전혀 가치를 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
하면 성경에서도 일반계시에 의한 논증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일반계시의 적절한 가치는 무엇일까요?

 

  A.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것(To Display God's Grace)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리고 그 이후의 계속적인 인간의 반역 후에도 그분의 은혜를
거두어가지 않는 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외면하고 멀리 달아난 후에도 하나님이 인류와의 의사소통을 멈추지 않고 있는 것은 참으로 경이로운 일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참된 하나님에 관한 어떤 사실들을 알 수 있도록 일반계시라는 수단을 지속적으로 제공하신다는 점은 하나님의 지속적인 은혜를 잘 드러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일반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도덕적인 삶과 진리를 더욱 추구하는 삶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B. 유신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To Give Weight to the Case for Theism)
  하나님의 존재하심에 대한 일반계시적인 논증이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증
명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것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수많은 진리들이 일반계시를
통해서 계시된다고 할지라도, 또 다른 많은 중요한 내용들은 일반계시를 통해서 계시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계시가 불러일으키는 의문과 그에 대한 대답을 통해서, 일반계시는 무신론(atheism), 불가지론(agnosticism), 진화론(evolutionism) 등을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며 유신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합니다.

 

  C.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정죄를 정당화시키는 것(To Justly Condemn Rejecters)
  일반계시의 증거는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가지도록 만듭니다. "기계적이고, 무신론적이고, 비합리적인 설명을 가지고서는 오묘하게 짜여진 세상과 인간의 신비한 구성요소를 적절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깨닫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도한 바입니다. 인류는 어떤 사실 뒤에 살아있고, 능력있고, 지성적이고, 초인간적인 어떤 존재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깨달음에 상응한 반응을 해야 합니다.
  만약 사람들이 그와 같은 '최소한의, 그러나 핵심적인 인식(minimal but crucial acknowledge)'을 수용하지 않고 오히려 잘못된 길로 들어서 다른 헛된 설명을 추구한다면, 그때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을 거절하여 더 이상 그들에게 진리를 보여주지 않을지라도 그들은 하나님을 비난할 수 없습니다. 일반계시에서 드러난 것을 거부하는 것만으로도 그러한 사람들은 정죄를 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일반계시를 받아들이는 것 만으로 영원한 구원을 받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반계시를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는 영원한 구원을 받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일반계시에는 '하나님의 아들의 대속적인 죽음(the atoning death of God's Son)'에 대한 계시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주장이 이중적인 표준을 사용하는 것처럼 보여도 어쩔 수 없습니다. 두 개의 표준이
모두 정당하다면 두 개의 표준을 가지는 것이 본질적으로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앞서
말한 문제에 있어서는 두 개의 주장이 다 정당한 주장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죄를 대속할 '어린 양(a Lamb)'을 예비해 두셨다면, 일반계시로 인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주장은 정당한 주장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어린 양(the Lamb)'과 상관없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정당한 섭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일반계시에 나타난 진리들을 거절한 상태에서 그 거절한 사람을 정죄하는 않는다면, 그것도 또한 정당한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일반계시에 나타난 진리들을 거절하는 것은 언제나 정죄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랑이 넘치는 어떤 학생이 등록금으로 1,000불이 필요한 그의 동료 학생에게 가서 진실한 사랑과 함께 10불(그가 가지고 있는 전부)을 제공하는데, 만약 그의 10불짜리 지폐가 "그 적은 돈이 나에게 무슨 유익이 되겠어?"라는 비웃음과 함께 마루바닥에 경멸스럽게 내던져진다면, 그 학생이 동료 학생에게 추가적인 도움을 제공할 어떤 책임이 더 있겠습니까? 그런데 만약 그가 갑자기 돈이 생겨 1,000불을 다 줄 수 있게 되에서, 그 돈을 또 다른 필요한 학생에게 준다면 어떤 사람이 그를 불공정하다고 비판할 수 있겠습니까? '10불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이 1,000불이 필요한 그 학생을 '구원하지는(곤경에서 건져내다, save)'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10불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정죄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살았던 많은 사람들이 자연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를 경멸감을 가지고 거절하고 그들 자신이 꾸며내어 만든 신을 하나님 대신 숭배해 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을 정죄에 빠뜨린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을 거절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절대로 부당한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출처 : 주사랑
글쓴이 : 항공모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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