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유다

[스크랩] 이스라엘의 실상

하나님아들 2014. 8. 21. 23:12

이스라엘의 실상

 

이스라엘 건국 60년..빛과 그림자

[연합뉴스] 2008년 05월 04일

수많은 절멸 위기 딛고 중동 최강국으로 발돋움

약자 팔레스타인 탄압 비난..아랍권과 평화공존 등 과제(예루살렘=연합뉴스) 박세진 특파원 = 이스라엘이 오는 8일 건국 60주년을 맞는다.

유엔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인 1947년 11월29일 총회에서 영국의 위임통치를 받고 있던 팔레스타인 땅의 약 56%를 유대인들의 국가에 주는 팔레스타인 분할을 결의했다.

일부 영역을 잃게 된 아랍권 이를 거부했지만 유대인들은 그로부터 5개월 보름만인 1948년 5월14일 전격적으로 이스라엘 건국을 선포했다.

이스라엘은 건국일을 유대력에 따라 기념하고 있는데 올해는 이 날이 서양력으로 5월8일이다.

서기 7세기 이래 아랍 무슬림들이 지배력을 행사해 온 중동의 한 복판에 전혀 이질적인 국가로 태동한 이스라엘은 당연히 역내 갈등을 일으키는 씨앗이 됐다.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로 구성된 아랍연합군은 이스라엘의 독립이 선포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이스라엘을 침공해 제1차 중동전쟁을 벌이는 것으로 끝이 보이지 않는 분쟁의 서막을 올렸다.

이후 이스라엘은 아랍권과 크고 작은 규모의 전쟁을 수없이 치렀지만 그때마다 더 강한 국가로 거듭났다.

특히 이스라엘은 1967년 선제공격으로 시작한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을 통해 팔레스타인 전역을 장악함으로써 성서를 통해 약속받았다고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영역이 명실상부한 국토가 됐다.

이스라엘의 건국은 근 2천 년에 걸친 디아스포라(이산)와 20세기의 홀로코스트(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를 겪으며 절멸의 위기로 내몰렸던 유대인들에게는 성공 신화의 출발점이었다.

이스라엘은 오늘날 정치, 경제적으로 세계 최강국의 반열에 올라 있다.

이스라엘이 유대인 로비단체들을 앞세워 국제 정치 무대를 주도하는 미국의 정책 형성 과정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의료, 제약, 전자 등 기술집약적인 산업 분야에서 선도국가로 자리매김한 이스라엘의 국민총생산(GNP) 규모는 연간 5천억 달러에 육박해 주변의 아랍 국가들이 넘볼 수 없는 지경이 됐다.

이스라엘은 군사적으로도 덩치가 큰 아랍 국가들과의 크고 작은 전쟁에서 불패의 역사를 써올 만큼 막강한 힘을 자랑한다.

이처럼 높아진 이스라엘의 국가적 위상은 이스라엘의 건국에 반발하며 여러 차례 전쟁을 불사했던 이집트와 요르단이 현실을 받아들여 이스라엘을 인정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집트와 요르단은 1979년과 1994년 각각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고 유대인 국가의 동반자가 됐다.

이스라엘이 건국 후 60년 간 정치, 경제, 외교적으로 눈부신 성과를 이뤘지만 평화와 안정을 구가하는 보통 국가가 되기 까지는 갈 길이 멀고 주변의 현실이 우울하고 답답한 게 사실이다.

가장 큰 문제는 이스라엘의 건국으로 삶의 터전을 빼앗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저항이다.

이스라엘이 지난 60년 간 팔레스타인 땅에서 국가의 틀을 확고히 다지는 동안 팔레스타인인들은 자신들만의 국가를 세우는 꿈이 점점 더 멀어지는 현실에 직면해야 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1967년의 제3차 중동전쟁으로 전 팔레스타인 영역이 이스라엘 점령 체제에 놓이자 독립을 향한 처절한 투쟁을 본격화했다.

이 투쟁은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서방의 시각에선 테러리즘으로 규정됐다.

1987년과 2000년 각각 시작된 팔레스타인인들의 제1, 2차 이스라엘 점령 반대 투쟁(인티파다)은 약 6천 명의 팔레스타인인과 1천 명 이상의 이스라엘인을 희생시켰다.

이스라엘은 저항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지난 93년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와 체결한 오슬로 평화협정을 통해 점령지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의 제한적 자치를 허용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지금까지 1967년 전쟁 이전의 경계에 맞춰 가자지구와 동예루살렘을 포함하는 요르단강 서안을 영토로 하는 독립국가를 세우고자 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의 꿈을 외면하고 있다.

동예루살렘과 요르단강 서안의 일부 땅을 영원히 차지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에 반발하는 하마스 등 팔레스타인 내의 강경 정파들은 저항공격으로 이스라엘을 압박하고, 이스라엘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큰 인명피해를 수반하는 무력에 주로 의지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또 하마스 등 강경 정파들을 약화시키기 위해 이들의 근거지인 가자지구를 봉쇄하는 정책을 펴면서 요르단강 서안 지역에서는 유대인 정착촌과 팔레스타인인 마을을 갈라놓는 약 700㎞에 이르는 보안장벽(분리장벽)을 세우고 있다.

이를 두고 이스라엘 비판론자들은 홀로코스트를 겪은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인들을 상대로 제2의 홀로코스트를 자행하고 있다거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분리 정책이었던 아파르트헤이트를 시행하며 땅을 절취하고 있다고 서슬이 퍼런 지적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 입장에선 아랍 국가들에 둘러싸인 작은 나라의 생존을 위한 것이며, 국가안보를 위해 불가피한 일이라며 그런 비난을 일축하고 있다.

물론 이스라엘 내에도 팔레스타인과의 평화협상 타결에 무게를 두고 아랍권과의 공존을 중요시하는 세력들이 존재한다. 팔레스타인에 대한 정책을 제외하면, 주변 아랍 국가들과는 달리 이스라엘의 경우 대내 정치에선 서구 여느 나라 못지 않게 민주주의 적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내부에서 확산하는 극우주의 성향은 공존을 통한 평화구현 가능성에 대한 기대를 낮추는 요인이다.

마탄 빌나이 이스라엘 국방부 부장관이 최근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더 엄청난 홀로코스트를 안겨줄 수 있다고 발언한 뒤 이와 비슷한 견해를 피력하는 유대교 지도자들이 잇따르고 있다.

유대교 율법학자(랍비)인 이스라엘 로센은 "팔레스타인인은 남자, 여자, 아이를 불문하고 모두 죽여야 한다. 그들의 가축도 예외가 돼선 안된다"는 취지의 극단적인 발언을 해 물의를 빚었다.

사무엘 엘리야후라는 이름의 랍비는 지난 3월 예루살렘에 소재한 유대인 종교학교에서 총기를 난사해 학생 8명을 숨지게 한 팔레스타인인의 자식들을 교수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스라엘은 지난 60년 간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해 중동 지역의 최강국으로 발돋움했고, 이에 대해 찬사를 받아야 한다는 점에는 아랍권에서 조차 이론을 찾기가 어렵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주변에 수많은 적을 둔 태생적 환경 탓에 팔레스타인 문제 등에 대처하면서 자국의 안보 이기주의에 너무 몰입해 보편적 정의를 등지는 길을 걸어왔다는 비판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이집트 신문인 알-아흐람 위클리는 "이스라엘은 60번째 생일을 맞았지만 60년 전 탄생 때처럼 여전히 피와 학살, 절취와 거짓의 기반 위에 세워진 국가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parksj@yna.co.kr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그 愛憎의 관계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은 가능한가?

1947년 유엔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경계에 대해 중요한 제안을 했다.
가자 지구와 요르단강 서안, 심지어 동예루살렘까지 팔레스타인에 넘겨주자는 것이다.
과연 60년이 지난 오늘도 유엔의 이러한 제안이 유효할 것인가?


장 크리스토프 빅토르 지음
김희균 옮김

<편집자 주> 이 글은 장 크리스토프 빅토르가 지은 <정치지리의 세계사―아틀라스 세계는 지금>이란 저서의 ‘팔레스타인의 영토’ 부분이다. 가자 지구와 요르단강 서안 문제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출판사 측의 허락을 얻어 이 부분을 소개한다.

 가자 지구는 별다른 광산자원이 없는 사각형의 땅으로, 사막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한 초지도 아니다. 현재는 130만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거주하고 있고, 여성 한 명당 7~8명의 아이를 낳을 만큼 세계적으로 출산율이 높은 곳이다.
 
  주산업은 농업이지만, 수입의 대부분을 이스라엘에 의존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인부들은 매일 이스라엘의 건설 현장과 서비스 산업에 투입되어 일을 하기 위해 이스라엘로 들어간다. 가자 지구에서 이스라엘로 통하는 길은 이스라엘 군인들의 통제하에 있고, 자주 폐쇄되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나갈 길도 없고, 일도 없고, 임금도 없는 것이 팔레스타인의 현실이다.
 
  원래 가자 지구에는 약 7000개의 이스라엘 정착촌이 있었고, 이스라엘군이 그곳 이스라엘 정착민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2004년 10월 샤론 정부는 가자 지구에서 철수할 것을 결의했고, 이스라엘 의회와 미국도 이에 동의했다. 2005년 8월 커다란 소요 없이 이스라엘 정착민들의 철수가 이루어진 것이다.
 
  반면에 요르단강 서안 문제는 조금 더 복잡하다. 면적이 5800㎢로 프랑스의 한 주와 맞먹고, 농업과 제조업, 서비스업이 발달해 있으며, 1967년 6일 전쟁(이스라엘과 아랍국 사이에 일어난 3차 중동전쟁-옮긴이)의 결과 이스라엘에 편입된 이후, 2001년 6월 현재 150개나 되는 이스라엘 정착촌이 있는 곳이 바로 요르단강 서안이다.
 
  250만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23만6000명의 이스라엘 정착민들이 살고 있는 요르단강 서안은 오슬로 평화협정(1993년 이스라엘의 라빈 총리와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아라파트 의장의 합의에 의해 이뤄진 것으로, 팔레스타인 자치에 대한 원칙적인 합의와 이스라엘의 존재 근거를 인정하여 공존의 가능성을 제시했다-옮긴이)에 따라 세 개의 지역으로 나누어 그중 일부 지역은 점진적으로 팔레스타인 정부에 귀속될 계획이었다. 하지만 협정에 따른 지역 분할은 실현되지 않았고, 그 대신 이스라엘과 요르단강 서안을 나누는 ‘녹색 선’을 따라 장벽이 세워지고 있다.
 
 
 
보안벽?
 
  과연 이스라엘이 세우고 있는 이 장벽의 정체는 무엇인가? 보안벽인가, 아니면 차별과 분리의 벽인가? 그도 아니면 국가 내에 있는 국경인가? 지도를 보면서 ‘녹색 선’을 따라가 보면, 장벽의 성격에 대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이 지금 가장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가자 지구가 자살폭탄 테러의 기지로 사용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군대 차할(Tsahal)이 가자 지구를 철통같이 에워싸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요르단강 서안에 세우는 장벽도 기본적으로 가자 지구에 있는 벽과 성격이 같다. 테러리스트가 이스라엘 본토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노동당 정부는 그를 위해서 장벽을 세우기로 했고, 2002년 7월 이스라엘 의회의 승인을 받았다.
 
  이스라엘 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자살 공격을 감행하기 위해 본토로 들어오는 자들을 막고, 국민을 보호하는 것은 당연한 국가의 임무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의 눈으로 보면, 이 장벽은 단순한 벽이 아니다. 보안벽이라는 구실로 땅에 금을 그어 장차 팔레스타인과의 국경으로 삼고, 요르단강 서안에 있는 이스라엘 정착촌들을 보호하기 위한 벽이다.
 
  장벽을 세우는 것은 ㎞당 100만 유로나 드는 대규모 공공사업으로 총비용이 10억 달러나 투입된다. 국경을 세우자는 것이 아닌 이상, 그렇게 많은 돈을 들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현재도 진행 중인 작업을 잠깐 들여다보자. 우선 팔레스타인 쪽으로 50m를 들어가서, 도랑을 파고 순찰로를 만든 다음에, 중앙에 열을 감지할 수 있는 철책을 쌓는다. 그리고 주위에 모래를 채워 드나드는 발자국이 보이게 한다. 뿐만 아니라 어떤 곳에는 8m 높이의 콘크리트 벽을 쌓아 저격수의 공격에 대비한다. 2005년 현재 전체 길이 200㎞ 가운데 8㎞에 이와 같은 콘크리트 벽이 세워진 상태다.
 
  장벽은 군데군데 팔레스타인 영토를 깊숙이 침범하면서 2만2000개의 정착촌을 이스라엘 영토로 만들어버린다. 요르단강 서안에 있는 정착촌의 15%를 이미 감싸 안은 것이다. 심지어 팔레스타인 영토 아주 깊숙한 곳에 있는 아리엘과 엠마뉴엘 정착촌 바로 뒤까지 이어지도록 되어 있었다. 다행히 미국의 반대로 이 계획은 보류되었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장벽이 계획대로 완성되면, 요르단강 서안의 11.6%가 이스라엘에 넘어가고, 정착촌의 80%가 그 벽 안에 갇히게 된다.
 
  예루살렘 근처에도 삼중 ‘보호벽’이 만들어졌다. 50㎞ 길이의 전기선과 철조망, 감시로를 갖춘 삼중 장벽이 북쪽으로 예루살렘과 라말라, 남쪽으로 예루살렘과 베들레헴, 동쪽으로 예루살렘과 아부 디스를 나누게 되는 것이다. 장벽이 완성되면 동예루살렘에 사는 20만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요르단강 서안으로 가는 길을 잃게 된다. 공식적인 이유는 테러를 막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동예루살렘을 요르단강 서안과 떼어내려는 술책이다. 그렇게 되면 동예루살렘을 새로운 국가 팔레스타인의 수도로 삼고자 하는 계획도 수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결국 테러가 장벽을 만들었고, 정치적으로 원만한 합의를 이루지 못한 정치가들의 무능력이 장벽을 높인 셈이다. 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우선 이스라엘 우파들은 왜 섣불리 벽을 만들어서 팔레스타인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땅까지 넘겨주느냐고 비판한다. 반면에 ‘눈앞의 평화’를 주창하는 평화주의자들은 벽을 세움으로 해서, 팔레스타인과 협상의 여지가 없어졌다고 비판한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는 명분은 확고하다. 테러리스트가 들어오지 못하게 장벽을 쌓아야만 하는 것이다. 평화주의자들이라고 해서 테러의 대상이 되지 말라는 보장이 없으니까 말이다.
 
 
 
분쟁의 중심에 있는 땅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보면, 가자 지구에 사는 7000명의 정착민을 철수시킨 것은 잘한 일이다. 비록 돈이 좀 들고, 여론의 반대도 없지 않았지만, 손익계산으로 보면 남는 장사였다. 사실 이집트와 가까운 곳에 있는 가자 지구는 전략적으로 큰 의미가 없는 반면에, 팔레스타인에 내미는 협상 카드로서는 괜찮았던 것이다. 하지만 요르단강 서안은 얘기가 다르다. 유대와 사마리아의 땅으로서 상징적인 가치가 높으며,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하다. 정착민의 숫자로 보나 규모로 보나 철수가 쉽지 않다. 이스라엘의 안보를 염려하는 사람들이라면, 설사 이 땅을 팔레스타인에 내주더라도 테러리스트의 군사기지가 들어서는 것만큼은 극구 반대했을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요르단강 서안에 팔레스타인 국가가 세워지는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하지만 새로운 팔레스타인 정부가 요르단강 서안의 모든 팔레스타인 주민을 품는 것은 불가능하다. 장벽이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 공동체의 주민을 장벽으로 가로막는 것은 오슬로 평화협정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지만,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다. 그냥 두면 늘어나는 팔레스타인 인구 속에 이스라엘 정착민들이 파묻히는 신세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 20세기 초의 팔레스타인
 


  1차 세계대전의 결과 오스만 제국이 무너지면서, 1922년 팔레스타인 지역은 영국의 수중에 떨어진다. 그러다가 1948년 이스라엘 정부가 탄생하면서 팔레스타인이라는 나라는 사라지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팔레스타인 문제’의 본질이다. 유대인들의 방랑이 끝나면서, 제 땅에서 쫓겨난 팔레스타인인의 방랑이 시작된 것이다.
 
 
▣ 가자 지구
 


  길이는 40㎞, 너비는 8㎞에서 12㎞, 총면적 360㎢인 가자 지구는 지중해를 바라보고 있는 농토로 130만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고 있다. 2005년 8월, 7000명의 이스라엘 정착민들은 가자 지구에서 철수했다. 가자 지구에 사는 대부분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1948년 이스라엘 정부 수립과 함께, 이스라엘 본토에서 쫓겨온 사람들이다. 인구의 반이 20세 이하이고, 국제연합 팔레스타인 난민구제 사업기관 덕에 학교에는 다니지만, 그만큼 실업률이 높다. 현재 가자 지구와 이스라엘 본토 사이에는 전기철책이 세워져 있고, 이스라엘 군이 보초를 서고 있다.
 
 
▣ 요르단강 서안
 


  오슬로 평화협정에 따르면, 요르단강 서안은 A, B, C 세 지구로 나뉜다. 각 지구의 성격에 따라 어떤 곳은 팔레스타인의 수중에 떨어지게 구획해 놓았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비정부기구 벳셀렘에 의하면, 오슬로 평화협정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이스라엘은 요르단강 서안에 7만8500명의 정착민을 수용할 수 있는 집 1만1200채를 지었다고 한다. 사실 요르단강 서안은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쓸모’가 많은 땅이다. 아랍계 인력을 공급 받을 수 있고, 새로 들어오는 유대인들에게 집을 마련해줄 수도 있는 것이다. 게다가 평균 너비가 약 40㎞나 되는 유대와 사마리아 지방은 이스라엘의 방어를 위해서 꼭 필요한 완충지 역할을 한다.
 
 
▣ 보호벽
 


  요르단강 서안의 북쪽 끝에서 장벽이 시작된다. 장벽은 동쪽으로는 요르단을 향해서 나아가고, 남쪽으로는 예루살렘을 지나갈 것이다. 하지만 움알팜이라는 도시를 지나자마자, 장벽은 ‘녹색 선’을 벗어난다. 서안 쪽 땅으로 들어가 세 개의 이스라엘 정착촌을 감싸 안기 위해서다. 그렇게 되면, 장벽 서쪽에 있는 열 개의 팔레스타인 마을에 사는 5200명은 완전히 갇힌 신세가 된다. 서쪽으로는 ‘녹색 선’이 앞을 가로막고, 동쪽으로는 장벽에 막히게 되는 것이다. 사정은 남쪽에서도 마찬가지다. 예루살렘 근처에 있는 알파메나슈와 주핀이라는 정착촌을 위해서, 칼킬리아에 사는 4만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북쪽과 서쪽, 남쪽에 올라선 콘크리트 장벽에 갇히는 신세가 되는 것이다.
 
 
▣ 예루살렘: 두 개의 수도
 
  예루살렘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라는 두 개의 나라가 만나는 지점이다.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1967년에 동예루살렘을 되찾음으로써 ‘영원히 나눌 수 없는’ 수도를 확보한 셈이고, 반면에 팔레스타인인들은 알코드라고 불리는 동예루살렘을 떼어내 미래의 수도로 삼기를 원한다.
 


  고도 예루살렘
 
  예루살렘에는 유일신을 믿는 세 개의 다른 민족이 함께 살고 있다. 그것이 예루살렘이 처한 현실이다. 전통적으로 예루살렘은 네 개의 지구로 나누어져 있다. 통곡의 벽 주위의 유대인 지구, 아르메니아인 지구,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이 있던 성묘교회를 포함한 기독교 지구, 바위의 돔과 알아크사 사원 등이 있는 아랍 지구 등이다.
 
 
▣ 갈등의 중심
 


  예루살렘의 중심으로 들어가 보면 오스만 시대의 성벽에 둘러싸인 구시가지가 보인다. 예루살렘은 구시가지가 속해 있는 동예루살렘과 서예루살렘으로 나누어진다. 서예루살렘은 1980년 이스라엘의 수도가 되었고, 주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동예루살렘에는 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산다. 이스라엘은 1967년 전쟁을 통해서 요르단강 서안과 동예루살렘을 빼앗았고, 동예루살렘을 서예루살렘에 행정적으로 편입시켜버렸다.
 
  이와 같은 조치는 유엔결의 242(1967년 3차 중동전쟁 후에 채택된 것으로 가자 지구, 요르단강 서안 골란고원, 시나이 반도 등 분쟁으로 점령한 영토에서 이스라엘 군이 철수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옮긴이)에 어긋나는 것이지만, 이스라엘 입장에서 보면 팔레스타인에 대항하는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하는 의미가 있다. 이스라엘 주민들을 팔레스타인의 영토 안에 들여보내, 이른바 ‘정착촌’을 만드는 작업이 1970년대부터 진행되고 있다.
 
  특히 1990년대에는 기존의 동예루살렘 옆에 하르호마 정착촌을 지었고, 요르단강 서안 깊숙이 들어가 말레아두민 정착촌을 짓기도 했다.
 
  이처럼 동예루살렘과 요르단강 서안에 지은 정착촌에는 러시아나 우크라이나에서 온 유대인들, 혹은 에티오피아 출신 유대교 전사들을 이주시켰으며, 보조금이 지급되었다. 보조금에 대한 이자는 아주 낮거나, 아예 무이자인 경우도 있어서, 새로운 정착민들의 구미에 맞았다. 심지어 1993년 오슬로 평화협정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정착촌 건설은 계속되었다. 집을 짓고 길을 새로 내면서, 요르단강 서안에 대한 영토확장 사업을 차곡차곡 진행한 것이다.

월간조선


 

“온가족 한방에서 어항물로 버텼다”

[한겨레 2006-09-08 22:24]


[한겨레] “이스라엘이 건국된 1948년 이후 최악의 상황이다. 가자는 감옥으로 변했다. 우린 여기 갇힌 채 빵과 밭에 남은 토마토, 오이만으로 견디려 애쓰고 있다.”

팔레스타인 가자시티의 시장이자 의사인 마게드 아부 라마단은 8일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에 경제봉쇄와 이스라엘의 폭격이라는 이중 굴레에 꽁꽁 묶인 가자지구 주민들의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이스라엘 석달째 공격·봉쇄로 전기·식수 마비
사람 집밖 출입금지…밭작물 버려진 채 썩어가

팔레스타인 독립국의 터전이던 가자가 죽어간다. 올해 초 이슬람주의 단체 하마스가 총선에서 승리해 정부를 구성하자, 미국·유럽은 이곳의 생명선인 경제원조를 모두 끊어버렸다. 팔레스타인 무장단체들이 이스라엘 병사 한 사람을 납치한 데 대한 보복으로 이스라엘은 6월28일부터 ‘여름비 작전’이란 이름으로 석 달째 가자 공격을 계속하고 있다. 363㎢의 좁은 땅에 130만명 인구가 북적대며 살아가는 가자는 외부세계의 무관심 속에서 지상최대의 감옥으로 변했다.

주요 수입원이던 카네이션과 딸기는 버려진 채 밭에서 썩어가고 있다. 이스라엘이 외부로 연결되는 통로를 모두 차단해 사람도 물건도 밖으로 나갈 수 없다. 이스라엘은 미사일 공격을 막을 안전지대를 만든다며 오렌지 농장의 70%를 파괴했다고 주민들은 말한다. 어부들이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나가는 것도 금지됐다. 공습으로 발전소가 파괴돼 전기공급도, 식수 공급도 거의 마비됐다.

주민의 3분의 2는 실업 상태이고, 나머지 3분의 1인 공무원들은 7개월째 월급을 받지 못했다. 이번주엔 급여를 못 받은 군인과 경찰, 보안요원들이 항의 시위에 나섰다.

하늘에선 공습이, 땅에서는 지상군 공격이 계속되고 있다. 6월말 이후 계속된 이스라엘군의 공격으로 어린이 64명 등 260명 이상이 숨졌고 1200여명이 다쳤다. 이스라엘 일간 <하레츠>는 최근 “이스라엘군은 가자 전역에서 미친 듯 날뛰고 있다. 다른 표현은 쓸 수 없다. 무차별적인 살인과 파괴, 폭격이 벌어지고 있다”고 썼다. 지난주 가자 북부 샤자예 마을에 진격한 이스라엘군은 닷새 동안 이곳을 점거하고 주민들이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으며, 22명을 살해했다고 <인디펜던트>는 전했다. 마을 주민 바헤르 알투바는 이 신문에 “군인들은 우리 가족들을 한 방에 몰아넣고 나오지 못하게 했다. 어항에 있는 물을 먹으며 버텼다. 이웃 한 사람은 물을 구하러 나가다가 총에 맞아 죽었다”고 말했다.

38년 동안 이스라엘의 점령 치하에 있다가 1년 전 이스라엘의 정착촌 철수로 잠시 희망을 품었던 주민들은 더욱 악화된 재점령 상태에 빠졌다. 유엔은 이스라엘이 이미 전력시설 파괴로 18억달러의 손실을 입혔고, 주민 100만명 이상이 마실물조차 부족한 상태에 빠지게 됐다고 이스라엘을 비난했다.

분노는 증오와 복수심으로 변해간다. 목과 다리, 가슴과 배를 다친 채 병원에 누워 있는 아라 헤자이리는 지난주 샤자예에서 이스라엘 탱크를 겨냥해 대전차 지뢰를 묻다가 폭격을 당했다. 그는 “몸이 나으면 다시 이스라엘 저항공격에 나설 것이다. 죽는다면 순교자로 천국에 갈 것이다”라고 말한다. 절망밖에 남은 게 없는 많은 팔레스타인 젊은이들은 보잘 것 없는 무기를 든 채 이스라엘에 맞서다 죽어간다. 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땅따먹기 놀이, 팔레스타인의 현실


삼엄한 검문 대신 넘을 수 없어 빙빙 돌아야 하는 벽이 넓고 높게 솟네

가자지구의 외로움이 깊다. 그나마 들고 나던 사람과 물건도 2주 전부터 꽁꽁 막혔다. 이스라엘 정부는 외신기자의 출입까지 차단한 상태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까지 직접 나서 “봉쇄를 풀고 인도지원 물품 반입을 허용하라”고 요청했지만, 11월21일 오후 현재 이스라엘 정부는 묵묵부답이다.

요르단강 서안지구은 고립감에 떨고 있다. ‘국제법 위반’이란 국제사회의 비난에도 ‘분리장벽’ 건설은 멈출 줄 모르고 있다. 장벽으로 둘러쳐진 팔레스타인 땅은 조각조각 ‘섬’이 돼가고 있다. 지난 10월 말 김동문 전문위원이 3년여 만에 다시 그 땅을 찾았다. 일주일 남짓 현지를 둘러본 김 위원은 “장벽이 가져온 변화는 고립의 고착화”라고 지적했다. 편집자

어린 시절 즐겨하던 ‘땅따먹기’ 놀이가 떠올랐다. 팔레스타인에선 놀이가 아니라 현실이다. 정확히 말해 힘이 센 쪽이 일방적으로 벌이는 ‘땅 빼앗기’다. 요르단강 서안지구 곳곳에 ‘유대인 정착촌’과 이스라엘 땅을 잇는 도로가 건설되고, 정착민 보호를 명분으로 성벽을 둘러친다. 팔레스타인 땅 서안지구는 조각으로 흩어진 채 섬처럼 고립되고 있다. 벌써 여러 해째다.

이스라엘군은 무력시위, 학생은 짱돌

‘분리장벽’. 2004년 7월 국제사법재판소(ICC)가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라는 권고의견을 냈다. 그럼에도, 공사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앞으로도, 더 많이 세워질 게다. 장벽이 없는 곳에는 어김없이 ‘휴전선’을 연상시키는 몇 겹의 철조망이 버티고 있다. 수용소의 망루처럼, 장벽 곳곳엔 이스라엘군의 감시탑이 드높이 솟아 있다. 계속되는 장벽 건설은 팔레스타인 땅에 지각변동을 불러와, 서안지구 곳곳에 흔적만 남은 이스라엘군 검문소가 즐비하다. 팔레스타인 땅과 이스라엘 땅을 들고 나는 무수한 이들을 통제하던 철조망과 바리케이드도 사라졌다. 삼엄한 검문을 하던 풍경도 쉽게 마주치기 어려워졌다. 분리장벽 안쪽, 팔레스타인 땅에선 최소한 그랬다. 그 안에선 ‘자유’를 느낄 수 있었다.

칼란디야 검문소, 팔레스타인의 ‘행정수도’ 라말라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한때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통제하던 이스라엘군의 움직임이 가장 두드러졌던 장소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분위기를 찾아볼 수 없다. 예고 없이 이스라엘군이 잠시 검문을 강화하기도 하지만, 예전의 그 ‘위용’은 찾아볼 길이 없다. 여전한 것이 있다면, 팔레스타인인들이 예루살렘과 라말라를 오가기 위해서는 8km 구간을 돌고 돌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우회하는 번거로움은 감수할 만하다. 아침저녁으로 라말라를 오가기 위해 검문소 앞에서 몇 시간씩 ‘벌’을 서야 했던 일은 이제 반복하지 않아도 된다.


지난 10월28일 빗줄기가 오락가락하는 라말라의 분위기는 차분했다. 3년여 만에 다시 찾은 도시는 이스라엘군 검문소가 있던 자리를 기억해내기 어려울 정도로 변해 있었다. 라말라 일대를 거대하게 둘러친 분리장벽과 이스라엘군의 감시탑만 아니라면, 든든한 성이 지키고 있는 ‘평범한’ 아랍 도시로 느낄 만했다. 라말라의 시내 중심가 ‘사자 광장’에서 만난 팔레스타인 경찰관 이야드는 “상황이 많이 좋아졌다”며 “적어도 라말라를 드나들기 위해 겪던 번거로움은 사라졌다”며 웃었다. 물론, 이스라엘군 순찰 차량이 시내 안으로 들어와 무력시위를 하는 풍경은 여전했다. 순찰차가 나타날 때면 ‘짱돌’을 던지기 위해 학교 담장 근처로 빼곡히 몰려드는 중·고등학생들의 기민한 움직임도 마찬가지였다.

여명 전 80여m를 늘어선 사람들

분리장벽 건설로 가장 큰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은 정작 따로 있었다. 예루살렘을 가장 빈번히 오가는 베들레헴 주민들이었다. 베들레헴에서 예루살렘까지는 걸어가도 2시간 남짓이면 족하다. 팔레스타인 땅인 동예루살렘에는 시외버스 정류장이 2곳이다. 하나는 예루살렘 북쪽 지역으로 연결해주는 나블루스 거리의 정류장이고, 다른 하나는 베들레헴과 동예루살렘을 연결해주는 정류장이다.

베들레헴으로 향하기 위해 정류장을 찾았다. 손님을 끌기 위한 ‘호객’이 한창이었다. 베들레헴까지의 요금은 4세겔, 우리 돈 1500원 정도다. 베들레헴행 버스를 탔지만, 손님들은 베들레헴에 가닿기 전에 차에서 내려야 했다. 베들레헴을 둘러싼 분리장벽 앞 검문소가 버스의 종착지였다. 장벽을 넘는 것은 국경을 넘는 것과 마찬가지다. 까다로운 검문·검색이 여전했다. 불과 10여m나 될까? 그 거리를 넘나들기 위해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출퇴근 시간마다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예루살렘∼베들레헴∼헤브론을 연결하던 도로도 막혀 있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조상’ 야곱의 두 번째 부인 라헬의 무덤이 있는 그 도로변에 일부 유대인들이 정착한 게다. 이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이스라엘 정부는 어김없이 분리장벽을 세웠고, 길은 막혀버렸다.

10월29일 새벽 제법 지붕을 때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빗방울이 뿌렸다. 그 와중에 사람들이 하나둘 베들레헴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막고 선 분리장벽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아예 새벽 2시께부터 자리를 잡고 앉아 새우잠을 청하는 이들도 있었다. 채 4시가 되기도 전에 몰려든 이들이 몇백 명이다. 여명이 시작되는 5시가 되자 분리장벽 주변으로 몰려든 사람들이 기다랗게 줄을 늘어선다. 80여m는 족히 돼 보였다. 늘어난 인파도 2천여 명을 헤아린다. 출입구가 개방되는 새벽 5시를 전후해 분리장벽 출입구에 몰려드는 이들은 평균 2500명 안팎이란다.

“아니, 또 무슨 일이야? 왜 아직도 통과시켜주지 않는 거지?” 평소 같으면 출입 심사가 한창일 텐데, 이날은 6시가 다 돼서도 검문소 빗장이 열리지 않았다. 빗발은 주춤해진 채다. 새벽 3시45분께부터 줄을 섰다는 일용노동자 이브라힘은 힘 빠진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여기 늘어선 사람들 대부분은 날품을 팔러 예루살렘으로 가는 거다. 최소한 아침 7~8시에는 검문소를 통과해 예루살렘에 도착해야 한다. 그래야 일거리를 얻을 수 있는데….”

6시15분께 장벽 사이에 나 있는 좁다란 철문이 한 명씩 사람들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20분 남짓 만에 1천명가량이 허겁지겁 장벽 안으로 비집고 들어섰다. 그건, 시작이었다. 장벽 사이에 있는 이스라엘군 출입 통제 사무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로 넘쳐났다. 이제부터 족히 2시간은 잡아야 장벽에서 벗어날 수 있다. 절차는 단순하다. 그러나 지칠 수밖에 없는 상황의 연속이다.

먼저 분리장벽 들머리에 있는 철제 회전문을 통과해야 한다. 이스라엘 병사에게서 간단한 신원 확인을 받은 뒤엔, 출입 사무실로 들어서게 된다. 줄을 따라 건물 안에 들어서면 다시금 한 사람씩 안내를 따라 철제 회전문과 보안 검색대를 통과해야 한다. 소지품을 모두 꺼내 보안 검색대에 올려놓는다. 가죽 허리띠는 물론 금속 성분이 들어간 건 뭐든 다 꺼내놓아야 한다. 그 다음, 최종 신원 확인 절차를 밟는다. 분리장벽을 통과해 ‘예루살렘 입성’ 절차를 밟는 데 2시간 가까이 걸리는 이유다. 3년여 전부터 이런 일이 일상이 됐단다.

500여 정착민, 2천여 이스라엘 병사


베들레헴 거주자 모두가 장벽을 넘나들 수 있는 건 아니다. 이스라엘군 당국이 출입 허가를 내준 팔레스타인 주민들과 이스라엘 국적을 가진 ‘아랍계 이스라엘인’에게만 허용되는 특혜다. 출입 허가를 받은 이들에게도 제한은 있다. 저녁 8시까지는 돌아와야 한다. 사실상 통금 조치다. 기독교도라고 자신을 밝힌 팔레스타인 주민 조세프는 “베들레헴 검문소는 사실상 국경”이라며 “이스라엘과 맞닿아 있는 곳은 어디나 베들레헴 검문소 같은 국경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검문소 곁 장벽에 이스라엘 관광부가 써놓은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예수 탄생의 도시, 베들레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발길을 헤브론으로 돌렸다. 3년 전만 해도 베들레헴에서 헤브론으로 가는 길엔 여러 차례 검문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이제 검문소는 흔적으로만 남아 있다. 요새 같던 이스라엘군의 원형 초소도 마찬가지다. 헤브론으로 향하는 길 양쪽으로 포도나무 과수원이 연이어 눈에 들어왔다. 전통적으로 헤브론은 포도 농사로 유명하다.

다시 찾은 헤브론에서도 변화가 느껴졌다. 도시 분위기가 말끔해졌다. 쾌적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 옛 시가지로 들어서자 비좁은 길은 차량과 사람들로 넘쳐났다. 헤브론의 명물은 단연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야곱 같은 이들의 무덤이 있는 이브라힘(아브라함) 사원이다. 성서의 아브라함은 곧 쿠란의 이브라힘이다. 이곳이 유대인과 무슬림 모두에게 최고의 성지로 꼽히는 이유다. 지금 사원의 절반은 유대인이, 나머지 절반은 무슬림이 차지하고 있다. 아브라함과 그의 첫 번째 부인 사라, 야곱과 그의 첫 번째 부인 레아의 무덤이 있는 동쪽은 유대인, 그 반대쪽은 무슬림의 영역이다. 아브라함(이브라힘)의 묏자리를 둘러싸고 후손이 쟁탈전을 벌이는 현장인 게다.

사원으로 가는 길은 좁고 기다란 시장 골목이다. 재래시장과 기념품 코너가 즐비하다. 그런데 대낮에도 문을 닫은 상점이 부지기수였다. 헤브론 출입을 번거롭게 하던 이스라엘군의 검문소도 사라졌는데 무슨 일일까? “당연히 장사가 안 되지. 요즘 분위기가 험악해서 이곳을 찾는 외국인도 거의 없고….” 좌판을 벌여놓은 팔레스타인 상인 아부 알리가 쓴 입맛을 다신다.

“이 땅은 1807년 헤브론의 유대인 공동체가 값을 치르고 사들인 곳이다. 그것을 1927년 아랍인들이 유대인 67명을 살해하고 강탈했다. 우리는 그저 빼앗겼던 땅을 되찾으려는 것뿐이다.” 6년 전 헤브론 인근 키르앗 아르바나, 키르앗 하아봇 같은 유대인 정착촌에 사는 일부 유대인들이 헤브론의 옛 시가지 일부를 점거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충돌이 벌어졌지만, 헤브론의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속수무책으로 밀려냈다.

이후 베이트 하닷사, 텔 루메이다, 베이트 로마노 등 헤브론 일대에 유대인 정착촌이 잇따라 들어섰다.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스라엘군은 전망 좋은 곳에 초소를 마련했다. 검문소와 군경비 초소, 막사가 하나둘 똬리를 틀었다. 새롭게 검문소 17곳, 출입 통제용 철문 7개가 설치됐고, 80여 곳이 철조망과 콘크리트 바리케이드 등으로 차단됐다. 500여 정착민을 보호하기 위해 2천여 이스라엘 병사가 정착촌 안팎에 주둔하고 있다.

사원 앞 확성기에서 흘러나오는 건 승전가?

팔레스타인 땅에서,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을 통제하던 검문소는 분명 사라지고 있다. 분리장벽이 점점 넓게, 더 높게 그 자리를 대체하고 있다. 유대인 정착촌은 팔레스타인 마을 깊숙한 곳까지 확장되고 있다. 그 정착촌을 위한 도로가 새로 닦이고,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군사시설이 들어선다. 그리고 장벽에 둘러싸인 팔레스타인 마을은 섬이 된다. 장벽이 가져온 변화는 고립의 고착화였던 게다. 스산한 거리를 지나 이브라힘 사원에 다다르니, 사원 앞 건물에 설치된 확성기에서 히브리어 노랫소리가 넘쳐난다. ‘승전가’인가?

라말라·헤브론·베들레헴(팔레스타인)=글·사진 김동문 전문위원
yahiya@hanmail.net

 


 

 ‘도전받는 시오니즘’ 결속 약화되나

시오니스트 정체성·이스라엘 돕기 지지율 약해져

군사강국·압제자 이미지 영향…‘구시대 신념’ 비판도

 “현지 동화과정과 비유대인과의 결혼 때문에 미국의 유대인 사회에는 미래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전세계 유대인들의 이스라엘로의 이주를 관장하는 이스라엘 유대인청의 제브 빌렌스키 청장은 지난해 11월 이렇게 말했다. ‘약속의 땅’ 이스라엘로의 유대인들의 ‘귀환’과 이스라엘을 중심에 두는 유대인 공동체를 꿈꾸는 시오니즘의 약화를 ‘개탄’한 것이다.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으로 열매를 맺은 뒤 유대인들의 응집과 대 아랍 투쟁의 핵심 이데올로기 역할을 해 온 시오니즘의 열기가 식어간다는 진단이 나오고 있다고 주간 <이코노미스트>가 14일 보도했다.

시오니즘의 균열은 이스라엘과 맞먹는 유대인 인구가 사는 미국에서부터 엿보인다. 케린 아비브와 데이비드 시니어는 최근 낸 <새로운 유대인>(원제: New Jews)이라는 책에서, 미국의 일부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을 정점에 놓고 국외 거주 유대인을 밑에 배치하는” ‘유대인의 추방’(디아스포라)이라는 전통적 개념을 거부한다고 밝혔다. 유대인은 이스라엘로 돌아오거나 언제든 돌아올 준비를 해야 한다는 종교적·민족적 신념은 잘못됐으며, 자신들은 망명자가 아니라는 입장이다.

2년 전 미국 헤브루연합대의 스티븐 코헨 교수의 조사에서는 미국 유대인의 17%만이 자신이 시오니스트라고 답했다. “유대인으로서 이스라엘을 돕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는 데 동의하는 이들의 비율은 1989년 73%에서 57%로 떨어졌다. 갈수록 많은 유대인 청년들이 유대교 예배당이나 시오니즘 단체에 오기보다는, 유대인공동체 밖에서 활동하거나 ‘일반적’ 의미의 사회참여 활동에 치중하고 있다.

유럽과 러시아에서도 유대인 청년들의 정체성 이완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100만명이 이스라엘로 건너갔던 옛 소련지역 유대인들 중 10만명이 러시아로 되돌아갔다. 빠르게 발전하는 러시아 경제가 일부 유대인 청년들한테 더 나은 미래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국의 랍비(유대교 사제) 로드니 마리너는 “중년층과 청년층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열정과 헌신성이 아주 낮다”며 우려감을 나타냈다.

시오니즘의 ‘시련’은 국제적인 반이스라엘 여론과도 관련이 있다. 지난해 여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은 많은 국외 유대인들에게 시오니즘에 대한 의문과 심적 갈등을 일으켰다. 대다수 유대인들은 아직 이스라엘을 지지하지만, 팔레스타인 땅 강점과 계속되는 전쟁으로 이스라엘의 이미지는 점차 군사강국 또는 압제자의 이미지로 와닿고 있다고 <이코노미스트>는 진단했다. 이스라엘군이 이집트·시리아·요르단의 3개국 군대를 6일만에 격파한 1968년의 3차중동전쟁은 유대인들한테 영웅적 사건으로 기억되지만, 젊은세대한테는 피부에 와닿지 않는다.

끝없는 분쟁 탓에 더 이상 이스라엘이 안전한 피난처가 아니라는 인식도 퍼지고 있다. 국외 유대인들의 이스라엘 ‘귀환’은 1990년대 초 옛 소련과 에티오피아로부터의 유입 물결 이후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일부 ‘급진적’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건국 동기가 인종차별적이고 낡은 개념에 바탕했다는 비판까지도 내놓는다. 영국 <비비시>(BBC)는 최근 이스라엘 정부가 최초로 아랍계를 과학기술장관에 임명하자, “시오니즘의 훼손”이라는 반발이 이스라엘 안에서 강하게 일고 있다고 전했다.

‘시오니즘의 위기’는 유대인공동체 지도층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특히 미국의 군사적·정치적 지원을 이끌어내며 이스라엘 우파 정치세력의 강력한 지지세력이 돼 온 미국 유대인사회의 열기 부족이 걱정거리다. 때문에 유대인 젊은이들에게 정체성을 찾아주자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1998년 출범한 “이스라엘의 권리”라는 프로그램은 10만명의 젊은이에게 10일간의 이스라엘 여행기회를 제공해 왔다.

코헨 교수는 장기적으로 신앙심 깊은 소수와 그로부터 멀어져가는 다수로 미국 유대인 사회가 양분될 것으로 전망했다고 <이코노미스트>는 전했다. 이본영 기자 ebon@hani.co.kr  

 


이스라엘의 첩보기관 MOSSAD


▶ Mossad의 모체.

이스라엘 정보조직의 기원은 영국이 팔레스티나를 위임 통치했던때 존재하였던 지하조직에서 찾을 수 있다.  시오니즘의 지하 레지스탕스 세력, 하가나(Haganah)는 샤이(SHAI)라고 알려진 첩보부대 세루투 예디오스(Sherut Yedioth)를 유지하였다.  샤이는 쥬리히에 있는 시오니스트 의회에 유태기구(Jewish Agency)를 창설하여 1929년부터 범 세계적인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1929年~1948年까지 샤이의 목표는 영국위임통치국에 침투하여 영국의 자세와 계획된 활동을 통보, 시온주의자의 주의,주장에 이용될 수 있는 정치정보 수집, 팔레스타인과 주변국의 反시온주의 단체에 침투, 팔레스타인과 외국의 자국민 공동체 중에 극우 및 극좌단체의 감시와 조정,나치독일에 대한 첩보를 수집하여 독립국가 이스라엘의 건국을 촉진하는 것이었다.

또 다른 비밀 공작기구로는 레크헤쉬(Rekhesh)가 있었다.  이 공작기구는 해외에서 무기를 획득하여 자국민 지하군사조직에 공급해주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레크헤쉬의 공작원들은 위장 사업체를 설립하고 신분을 가장하여 비밀정보요원으로서 공작에 필요한 경험을 쌓았다. 해상병과 팔리암(Palyam)에서는 그 요원들을 불법 이민선의 항해사로 배치하여 선장을 감시하게 하여 배신자가 발생하지 않토록 하였다.  그 결과로 팔리암은 이스라엘의 첫번째 해군 정보부대가 형성되는 모체가 되었다.



▶ 이스라엘 독립후 정보기관의 변화.

1.1948년 5월 14일 독립후 그해 6월 30일 SHAI 해체.

2.군사정보병과(이스라엘 국방부 일반 참모부의 작전병과 예하분과 소속) 창설과 정치국(외무부 소속으로 전세계를 대상으로 정보수집의 임무) 및 세루트 비타촌 클라리[약어:SHABAK](방첩 활동가 대전복업무로 국내보안 기능을 수행)등의 3개의 정보기관이 창설되었다.

3.1951년 정치국이 해체되고 연구국으로 대체.

4.1951. 9. 1 벤 구리안 수상의 지시로 중앙 연구소(Mossad Letafkidim Meouychadim)설립.

5.1953년 군사정보병과가 정보부(AMAN)로 격상되었다.

6.1960년대 과학 관계국(LEKEM)이 창설되어 과학과 군사기술에 관한 연구 수행 및 무기체계아 관련된 자료와 과학과 기술 발전에 관한 정보수집 임무를 수행하였다.

7.1980년대  LEKEM 해체되면서 이스라엘은 1980년대 말까지 모사드, 이스라엘 방위군 정보부,공군 정보부대, 해군정보부대, 공군 보안대로 구성되었다.

▶ Mossad의 임무.

세계에 퍼져있는 아랍국가와 기구, 아랍의 공식 대표단 및 그들의 시설에 대항하여 공작을 수행하며 아랍의 군사력 배치, 사리, 군비 및 리더쉽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다. 또 유엔과 동유럽 및 서유럽국가들도 공작의 대상이며 이스라엘에 지향된 정책결정과 자국민의 이민문제 처리 및 타국가의 관료직에 요원을 투입시키기도 한다.

또한 모사드는 이스라엘 방위군을 위한 무기거래 추진과 미국의 비밀정책 결정에 관한 정보와 과학 또는 기술정보 수집에 노력하며 아랍의 군사능력에 관한 첩보를 수집한다.

▶ Mossad 의 실적.

*비밀정보요원 Elicohen 에 의하여 시리아의 골란고원의 많은 군 방어시설 및 군 장비에 대한 정확한 정보 획득과 시리아 정부 정책을 사전 파악 및 1964. 3월 이스라엘의 관개시스템 파괴계획을 사전 밝혀내어 차단하는등 현격한 공적을 수행하였다.

*볼프강 롯즈는 시나이 반도와 네게브 국경지역에 배치되어 있는 이집트의 미사일 전자통제 시스템 설계인 "프로젝트 33"의 청사진을 빼내 1967년 이집트와의 전쟁시 승리를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973년 Yom Kipper War에서 이스라엘이 최초로 당하게 될 패배를 면하게 할 정보를 얻기도 하였다.

*1966. 8. 15 베일에 쌓인 舊 소련의 전투기인 MIG-21기를 이라크 파일럿을 이용하여 귀순시켜 MIG-21전투기를 손에 쥐게 되었다.

*1969. 12. 27 Mossad에 의하여 이스라엘 특공대들이 홍해의 라스 가레브에 있는 이집트 해군기지의 경계병들을 살해한후 이스라엘에 타격적인 7톤 무게의 레이다 시스템 P-12SPOON REST를 해체하여 헬기로 이스라엘로 공수하였다.

*1968년 이스라엘은 공작 Piumbat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독일로부터 200톤의 우라늄을 획득하였다.

*1981~1985 사이에 이스라엘은 비밀리에 이란에 상당량의 무기를 판매하는데 Mossad가 크게 기여하였다.

*1960년 아래기사와 같이 아르헨티나에서 나치 전범자 아돌프 아이히만을 유괴하는데 성공하여 재판에 회부하여 이듬해 교수형에 처하게 만들었다.


*1985년 이스라엘 Dimona 원자시설에서 해고된 핵 기술자 Mordechai Vanunu는 이스라엘의 비밀 핵시설 및 핵무기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폭로하여 1986.9. 30 오스트레일리아에 머물러 있는 그를 로마를 통하여 유괴, 반역죄 및 정보망 누설 혐의로 정식 기소시켰다.  유괴과정을 보면 여자공작원 "신디"로 하여금 바누누에게 접근하여 친구가 된후 신디는 섹스를 약속하면서 그를 설득하여 로마로 동행하였다. 로마에 도착한 신디가 그를 아파트로 데리고 왔을 때 2명의 사나이가 바누누를 덮쳐 억누르고 있는 동안 신디가 마취제를 놓아 쇠사슬로 결박하여 수송선에  싣고 로마를 몰래 빠져 나오는데 성공하였다.

▶현재 이스라엘은 주변 3면이 아랍국 16억 이슬람 인구 둘려쌓여 있어 항상 테러와 분쟁속에 국가의 존립자체의 위협을 받아가며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위협속에 "눈에는 눈"이라는 작전으로 공격을 당하면 그에 상응하는 이상의 보복을 가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기본 전략으로 세우고 국가를 유지해나가고 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과의 계속된 피의 보복전이 끊이지 않고 전개되고 있는 실정이다.   과거 이스라엘에 피해를 준 상대방의 주요인물을 암살한 사례들을 몇가지 알아보기로 하자.

▷피해 상황 : 1955년에 이집트의 Fedayeen 게릴라가 차량과 건물을 습격하고 이스라엘 라디오 송신소에 피해를 힙히면서 이스라엘 人 20여명이 사상을 당하였다.

▶이스라엘의 보복 : 피해를 당한 이스라엘은 모사드를 통하여 군인5명, 민간인 17명에 대한 암살보복을 감행하였는데 첫째 암살 대상자는 팔레스타인 지휘관이며 이집트 정보장교인 하페즈 대령으로 폭발물을 내장한 소포 우편물로 암살하였으며, 둘째 암살 대상자는 요르단에서 페다이언을 맡고 있는 요르단주재 이집트 무스타파 대령으로 폭발물이 내장된 소화물을 보내어 무스타파의 자동차를 폭파시켜 암살하였다.   그 다음 목표는 이집트로 하여금 이스라엘이 관할하고 있는 지역에 재래식 병기, 세균,방사선 및 핵탄두 공격을 가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고 이집트의 로켓 계획에 참여하고 있는 독일 과학자들도 암살되었다.

▷피해상황 : 1972, 5, 30 텔아비브 로드공항에서 팔레스타인 인민해방전선과 검은 구월단과의 합의 아래 일본 적군파 4명이 이스라엘인 27명이 학살된 피해가 있었다.

▶이스라엘의 보복 : 모사드는 팔레스타인 인민 해방전선 중앙본부의 요원으로 로드공항의 학살을 도왔던 팔레스타인 시인 소설 가 카나파니를 1972. 6. 1 폭파장치가 된 그의 자동차에서 폭발로 죽었다.  그 다음 목표는 1972. 7. 25 카나파니의 참모요원인 샤리프가 자기 집에서 폭발한 소포에 의해서 중상을 입히었다.

▷피해상황 : 1972, 8월 전세계인이 보는 가운데 검은구월단에 의하여 뮌헨 올림픽에서 10명의 이스라엘 선수 납치와 학살을 당하였다.

▶이스라엘의 보복 : 올림픽 경기장에서까지 엄청난 피해를 입은 이스라엘의 모사드는 검은 구월단 간부들과 뮌헨 올림픽 테러 작전 지도자인 살라메의 암살을 위하여 "신의 분노"라는 특수부대를 창설하고 암살반을 구성하여 1972, 10, 16 검은 구월단의 "즈 웨이터"를 야유회에 참가한후 귀가하여 집밖에 있는 그를 12발의 총격으로 암살하였으며, 1972, 12 월에는 프랑스 주재 검은 구월단의 제2인자인 함차리 박사를 전화기에 설치된 폭약이 폭발하면서 그의 아파트에서 폭사시켰다.

1973년 4월 검은 구월단에 신 무기를 구입하여 인도하는 병기창을 준비하는 일을 맡은 베이루트의 아메리칸 대학의 이라크 교수 "바실 알쿠베시" 박사를 파리에서 암살하였으며 1973, 4월 모사드는 "청춘의 원천"이라는 공작아래 검은 구월단의 우두머리중의 하나인 "낫사르"를 비롯하여 그의 보좌관을 차례로 살해하였고 그외에도 검은 구월단의 주요 인물들을 차례로 제거해 나갔다.

마지막으로 테러의 주범인 "살라메"를 7년간의 끈질긴 추적끝에 1979년 초 폭발물로 가득찬 폭스바겐 한 대를 "살라메"가 시보레 웨건을 타고 지나가는 길거리에 주차시켜 놓고, 시보레가 폭스바겐 옆을 지나갈 때 모사드 공작원이 폭스바겐을 폭파시켜서 "살라메"와 그와 함께 타고 있던 경호원 2명과 근처에 있던 4명을 살해하여 뮌헨 올림픽 피해의 보복을 마감 하였다.

상단자료 : 2004. 4. 19. 서울신문 기사

이외에도 최근 여러 가지 테러에 대한 암살 보복은 계속되어 왔는데 그에 대한 자료는 아래 기사를 참고하시기를 ........ !

이렇듯 이스라엘 정보조직의 보복은 철저하게 끝까지 추적하여 보복하는 모습을 보면 정보기관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다.

▶모사드의 최대장점 : 영국의 MI-6 정보기관으로 부터 많은 지원을 받으며 또한 이스라엘의 모사드는 다른 나라에 비하여 최대장점은 전세계적으로 모든나라에 대규모 자국민 공동체가 있어 해당지역에 자국민을 이용하여 정보원으로 삼을 수 있으며 세계를 이끌고 있는 나라 미국이나 영국 등의 정보조직과 연계하여 활동할 수 있어 전 세계의 정보를 훤히 꿰뚫고 볼 수 있는 특권을 누리며 활동하고 있다.

이러한 장점을 가진 이스라엘의 정보기관이 이제는 세계주요 정보기관과 언론사, 정치등을 움직이며 세계를 지배하는 기관으로 부각을 받고 있다.

상단의 자료 참고문헌 : 군사저녈 紙.

                       작은 조직 막강 정보력 ‘살아 있는 전설’
1200명 요원 지구촌 레이더 역할… 정보수집·분석·암살 등 조직마다 세계적 명성

"기만에 의하여 전쟁을 수행한다”(By way of deception, thou shalt do war). 손자병법을 연상케 하는 이 구절은 이스라엘의 전설적인 국가 정보기관 모사드의 모토다.

이스라엘의 정보공동체는 해외정보를 담당하는 모사드, 국내보안을 담당하는 신베트, 군사정보를 담당하는 아만, 외무부 산하의 정치기획·조사센터, 내무부 산하의 경찰 등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정보공동체를 조정하는 기관으로는 최고정보조정위원회(Va’adat Rashei Hasherutim)가 있다. 여기에는 각 정보기관의 책임자와 총리의 정보·군사·정치·대테러대책 고문이 참석한다. 의장은 모사드 부장이 맡고 있다.

모사드의 정식 명칭은 ‘ha Mossad le Modiin ule Tafkidim Meyuhadim’으로 정보 및 특수임무 연구소로 번역할 수 있다. 모사드는 이스라엘의 정보·보안체계에서 해외정보를 담당하며, 주로 인간정보(Humint)와 비밀공작(Covert Action), 대테러활동(Counterterro rism) 등의 임무를 수행한다. 본부는 텔아비브에 위치하고 있으며, 요원 수는 1980년대 후반의 평가에 의하면 1500∼2000명이었으나 최근의 자료는 1200명이라 평가하고 있다. 한편 전직 모사드 요원이었던 빅터 오스트로브스키는 전 세계적으로 모사드가 고용한 에이전트는 3만5000명이며 이 가운데 2만 명은 활동중이고 1만5000명은 활동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비밀스런 모사드의 조직과 관련된 자료는 크게 두 가지다. 우선 미국 CIA가 1977년에 작성한 이스라엘 정보기관에 대한 보고서다. 이 자료는 원래 극비자료였으나 79년 이란 회교혁명으로 테헤란 주재 미 대사관이 점거되었을 때 외부로 유출되어 알려졌다. 이 자료에 의하면 모사드는 작전기획조정국, 수집국, 정치활동연락국, 인력·재정·병참·보안국, 훈련국, 분석국, 기술공작국, 기술국의 8개국(局)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치활동연락국과 수집국은 공동으로 북·중·남미 등 8개의 지역과(課)를 운영했고, 이스라엘 대사관의 모사드 요원들은 첩보수집국과 정치활동연락국에서 파견나온 요원들로 구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정확한 조직규모 아직도 베일에 가려

다른 하나는 전직 모사드 요원이었던 오스트로브스키가 1990년에 밝힌 모사드 조직표이다. 이 조직표에 모사드는 작전을 담당하는 부서와 지원을 담당하는 부서로 나누어져 있다. 하지만 모두 몇 개의 국이 있는 지는 이 도표만 가지고는 확인하기 어렵다. 이를테면 미국과학자연합(FAS)은 모사드가 8개국으로 이뤄졌다고 하지만 이름은 5개만 밝혔을 뿐이다.

먼저 모사드의 작전부서에는 수집국과 정치활동연락국, 심리전국(LAP)국 등의 부서로 구성되어 있다. 수집국은 가장 규모가 큰 부서로 해외첩보수집을 담당한다. 수집국은 A·B·C의 3개실을 가지고 있으며, 각 실은 지역과와 해외지부를 관리한다. 정치활동연락국은 우호국의 정보기관과 정보교환업무를 담당하며, 외교관계가 없는 국가와의 접촉 및 연락업무를 수행한다. 심리전국은 모사드의 심리전, 선전, 기만작전을 담당하고 있다. 모사드의 작전부서 중 챠프리림(Tsafririm)은 전 세계에 있는 유대인과의 연락을 담당한다.

야할로민(Yahalomin)과는 특별통신부대로 이스라엘의 적대국에서 활동하는 첩자들과 통신을 담당하고 있다. 네비오트(Neviot)는 정해진 목표물에 대한 도청 등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부서다. 그리고 모사드 내부보안을 담당하는 부서로 APM이 있다.

지원부서 중 가장 중요한 곳은 분석국이다. 수집된 첩보를 정보화하는 역할을 담당하며 구체적으로 일일보고서, 주간동향보고서, 월간보고서 등을 제작한다. 연구국은 14개의 지역과와 핵담당과로 구성되어 있다. 기술국은 모사드의 작전을 지원하기 위한 최첨단의 기술과 장비를 개발하는 업무를 담당한다. 이밖에 모사드의 비밀공작을 담당하는 독립부서인 메차다(Metsada)는 암살, 사보타주, 준군사적 활동을 수행하는 핵심부서다. 특히 메차다 휘하에는 암살을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키돈(Kidon)과가 활동하고 있다.

히브리어로 위 혹은 정상을 의미하는 알(Al)은 미국 내에서 비밀리에 첩보활동을 벌이는 모사드의 특수부서다. 오스트로브스키에 따르면 모사드 내에서도 알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 만큼 조직 자체도 독립적이라고 한다. 3명의 카트사(Katsas:정보관)를 포함한 24∼27명의 현장요원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73년 10월 전쟁 예측 못해 ‘명성 흠집’

이스라엘의 가장 유명한 첩보원인 엘리 코헨(Elie Cohen)의 첩보활동은 전형적인 제3국 우회침투를 통한 첩보수집 사례를 보여준다. 이집트 태생의 유대인인 코헨은 1951년 비밀리에 이스라엘에서 정보원 및 사보타주 훈련을 받았다. 훈련을 마친 후 모사드 정식 요원이 된 코헨은 카밀 아민 타베스라는 레바논 이주 시리아인으로 위장해 먼저 아르헨티나의 시리아인 공동체에서 활동했다. 코헨은 그곳에서 나중에 시리아 대통령이 된 아르헨티나 주재 시리아 무관 아민 엘-하페즈 장군 등 저명 인사들과 접촉해 이들의 소개장을 갖고 62년 시리아로 잠입했다.

시리아에서 코헨은 고위층과의 교류를 통해 막대한 정보를 입수했다. 코헨이 획득한 정보에는 소련고문단이 작성한 이스라엘 공격계획, 소련이 시리아에 제공한 무기 사진, 골란고원의 시리아군 배치도 등이 포함되었는데 특히 골란고원 시리아군 배치도는 67년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군이 승리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러나 코헨은 그 전인 65년 시리아 방첩부대에 체포되어 다머스커스 순교자광장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밖에 이집트에 영국군 장교로 위장 잠입해 이집트 미사일 개발계획 및 배치도 등을 수집해 보고한 볼프강 로츠, 레바논 베이루트에 사는 7명의 자녀를 둔 유대인 주부로 암호명 ‘진주’라는 모사드 요원으로 활동한 ‘중동의 마타하리’ 슐라미트 키사크-코헨 등이 전설적인 모사드 첩보요원으로 손꼽힌다.

모사드 비밀공작의 대표적 사례는 아돌프 아이히만 납치공작이다. 아이히만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독일의 친위대 장교로 유대인 학살에 깊이 관여했지만 종전 후 신분을 감추고 잠적해 전범재판을 피한 인물. 모사드는 그가 아르헨티나에 산다는 첩보를 입수한 뒤 약 3년 간의 추적 끝에 60년 5월 마침내 그를 납치해 아르헨티나 독립 150주년 축하사절단이 타고 온 비행기로 이스라엘로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 아이히만은 이스라엘 법정에서 유죄평결을 받고 62년 5월 처형되었다. 이 공작은 당시 신생조직이던 모사드의 역량과 나치즘에 대한 이스라엘 정부의 단호한 의지를 전 세계에 과시한 것이었다. 이밖에 72년 뮌헨올림픽에서 ‘검은 9월단’이 이스라엘 육상선수들을 사살한 데 대한 보복암살은 모사드의 대표적인 암살공작으로 꼽힌다.

이스라엘 정보활동의 가장 큰 실패 사례는 73년 10월 전쟁을 예측하지 못한 것이다. 그로 인해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시리아에게서 전략적인 기습을 받아 패전 위기에 직면했다. 반격에 나선 이스라엘은 미국의 전폭적인 병참 및 정보지원 아래 최종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이때까지 무적의 이스라엘군과 세계 최고의 정보기관 모사드라는 이미지는 크게 훼손되었다. 이로 인해 전후에 위원회를 구성해 문제점을 규명했지만, 이는 첩보 부족 탓이 아니라 첩보 해석을 둘러싼 정보공동체 내의 갈등-대립 탓이 컸다. 즉 총리 직속기구인 모사드와 군정기구인 아만의 판단 및 의견 대립으로 정부가 아무런 대응조처를 취하지 못한 상태에서 전쟁을 맞이한 것이다.

이와 같은 총리와 정보공동체 사이의 상호불신과 갈등은 이스라엘 정보공동체 위기의 핵심 원인이다. 이런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이스라엘 정보기관들 또한 점차 베일을 벗고 양지로 나오고 있다. 공식적으로 모사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던 이스라엘 정부가 전례를 깨고 모사드 국장 임명 사실을 공개하고 지난해 7월 최초로 언론에 공채광고를 내고 신입요원 모집에 나선 것 등이 이를 반영한다. 또 이스라엘은 미군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기술정보(Techint) 수집능력을 강화하는 데 힘쓰고 있다. 작지만 세계에서 가장 민첩한 정보기관 모사드의 변신이 기대된다.
< 정리·김 당 기자 / 자료 제공·국가정보연구회 >
dangk@donga.com  주간동아 제298 호 기사.

이스라엘 정보기관의 ‘표적사냥’
국제법 논쟁 일으키는 중동사태의 새 불씨   김재명 분쟁지역전문기자 (kimsphoto@yahoo.com)

중동사태는 좀처럼 잠잠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요원들 가운데 ‘위험분자’를 점찍어 제거중이다. 내부협력자가 건네는 정보를 바탕으로 한 이스라엘의 표적사살에는 정보기관들이 개입돼 있다. 모사드와 신 베트다. 이들 기관 요원들은 협박, 회유, 마약, 섹스 등 온갖 수단으로 ‘내부협력자’를 만들어 이용한다. 표적사살을 둘러싼 국제법 논쟁도 뜨겁다. 협박과 배신, 증오와 복수가 얽힌 중동사태의 한 단면을 들여다본다.

이스라엘군의 팔레스타인 요원 표적사살 일지

▷2001년 2월19일 = 마모드 마다니(25), 하마스 간부, 발라타 난민수용소 안의 회교사원을 나서다 피살당함.
▷2001년 2월13일 = 마소우드 아야드, 야세르 아라파트 경호원, 가자에서 이스라엘 헬기 공격으로 사망. 이스라엘은 아야드가 헤즈볼라 요원이라고 주장했으나 팔레스타인측은 이를 부인
▷2000년 12월31일 = 타베트 타베트(49), 서안지구 툴카렘 지역 파타 사무총장, 치과의사, 출근길에 혼자 차를 몰고 가다 피살.
▷2000년 12월17일 = 사메 말라베(28), 파타 요원, 난민수용소에서 장치된 폭발물에 피살.
▷2000년 12월 중순 = 사이드 카루프, 이슬람 지하드 요원, 이스라엘 경찰이 사살.
▷2000년 12월14일 = 하니 아부 바크라(Hani Abu Bakra, 32) 하마스 요원, 미니버스 운전기사로 승객들을 태우고 가다 가자 이스라엘 검문소에서 피살.
▷2000년 12월13일 = 아바스 아와위(26), 하마스 단원, 헤브론 유대인 정착촌에서 날아온 저격수의 총탄에 피살. 1990년대 초 4년 동안 이스라엘 감옥에 있었다.
▷2000년 12월11일 = 요세프 아부 스와예, 파타 요원, 베들레헴 자택 부근에서 피살.
▷2000년 12월10일 = 안와르 알 하르만(28), 이슬람 지하드 요원, 2년 동안 팔레스타인 당국에 억류돼 있다 지난해 10월말 풀러났음. 나블러스에서 그가 경영하는 책가게 문을 닫은 뒤 택시를 타려고 서 있다 집중사격을 받고 피살. 이스라엘 당국은 그가 2건의 폭탄테러와 관련있다고 결론.
▷2000년 11월23일 = 이브라힘 바니 오데, 하마스 요원, 나블러스에서 자동차에 미리 장치된 폭탄이 터져 피살
▷2000년 11월22일 = 자말 아브드 알 라제크(33, 파타 간부) 외 3인, 가자 남부 유대인 정착촌 부근에서 이스라엘군 총격 받고 사망
▷2000년 11월9일 = 후세인 아바야트(37), 파타 간부, 베들레헴 외곽에서 이스라엘 헬기 공격으로 피살


지난해 9월말 이래 400명에 이르는 사망자를 낳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충돌은 좀처럼 가라앉을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팔레스타인 희생자 속에는 100명 가량의 소년들도 포함돼 있다. 지금까지의 충돌을 살펴보면 이스라엘이 지나치게 무기를 과잉 사용, 희생자를 양산했고, 이것이 사태를 더 악화시킨 한 요인으로 꼽힌다. 이스라엘이 국제적으로 비난받는 다른 하나의 사실은 팔레스타인 요원들에 대한 이른바 표적사살이다. 이들을 죽이기 위해 헬리콥터까지 동원한다. 마치 첩보영화처럼 자동차에 폭발물을 설치해 팔레스타인 요원을 죽이기도 한다. 이스라엘 첩보기관은 팔레스타인 협력자를 이용해 그들이 점찍은 대상에 대한 일거수 일투족을 살핀 다음 암살작전을 펴는 것으로 알려졌다.

기자가 지난 10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현지에서 접촉한 이스라엘군(IDF)·정부 관리들은 “우리는 지금 전쟁중”이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일반적인 국제법의 개념으로는 전쟁중인 국가는 비전투원(민간인)에 대한 공격은 못하게 돼 있다. 민간인을 향해 총을 쏴대는 것은 전쟁범죄에 준한다. 이스라엘 당국은 ‘테러리스트’를 포함한 팔레스타인 행동요원들을 사법처리하기보다 표적사살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듯하다. 이른바 ‘사법외적 처리’(extrajudicial execution)다. 지금까지 이스라엘군에 의한 표적사살은 이번 충돌 과정에서 줄여 잡아도 10여건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지금껏 30명이 넘는 활동가들이 이스라엘의 표적사살에 희생됐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팔레스타인 당국은 ‘이적행위자’를 색출해 총살형에 처하고 있다. 중동사태는 피가 피를 부르는 살벌한 충돌로 치닫는 중이다.

헬기 띄워 사살, 자동차에 폭탄 장치하기도

표적사살의 대상은 하나같이 이번 충돌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이스라엘에 맞서 싸워온 팔레스타인 행동대원들로, 자살폭탄테러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하마스(Hamas), 이슬람 지하드(Islamic Jihad)와 파타(Fatah) 요원들이 대부분이다. 파타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와 더불어 1996년 선거에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으로 뽑힌 야세르 아라파트가 이끄는 정치조직이다. 아라파트가 대이스라엘 무장투쟁 과정에 참여한 파타 요원들에게 어느 정도로 개입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마스나 이슬람 지하드 지도자들과 달리 아라파트는 무력충돌을 중지하자는 거듭된 호소를 한 바 있다.

파타의 베들레헴 지역 간부인 후세인 아바야트(37)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인티파다(intifada·봉기) 이후 이스라엘의 첫 표적암살 희생자로 꼽힌다. 지난해 11월 베들레헴 부근 집에서 차를 몰고 나온 직후 이스라엘 헬기로부터 미사일 공격을 받고 그 자리에서 죽었다. 당시 그 부근에서 차를 기다리던 팔레스타인의 50대 여인 2명이 애꿎게 함께 죽음을 당했다. 아바야트는 9월 말부터 시작된 인티파다에서 베들레헴 인근 지역의 무장충돌을 주도한 혐의를 받아왔다. 이 사건 직후 한 이스라엘 고위장교는 “이 사건은 이스라엘 국방부의 윗선에서 내린 결정에 따른 것이고, 정보에 따라 작전이 펼쳐졌다”고 밝혔다. 팔레스타인 내부협력자의 도움을 받아 작전이 가능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택시 운전기사이자 하마스 요원인 하니 아부 바크라는 지난해 12월 미니버스를 타고 가다 가자지구 검문소에서 5명의 이스라엘군으로부터 집중사격을 받고 숨졌다. 당시 버스 안에는 승객들이 여러명 있었는데, 불과 2m 떨어진 거리에서 이스라엘군들로부터 사격을 받아 바크라는 현장에서 즉사하고, 승객 두 사람이 중상을 입었다. 이 가운데 한 사람은 그후 병원에서 사망했다. 이스라엘 병사들이 바크라를 체포하려면 충분히 가능했는데도, 더구나 버스 속의 다른 승객들의 안전문제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집중사격을 가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오로지 그를 죽여야 한다는 상부의 지침을 받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여학생 1명이 낀 승객들의 증언으로는 5명의 이스라엘 병사가 바크라를 운전석에서 바깥으로 끌어내자마자 쏴 죽이고 차 안으로 마구 총을 쏴댔다. 이스라엘군의 발표는 그러나 ‘테러리스트들이 총격전을 벌여 응사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파타의 핵심간부인 자말 아브드 알 라제크(33)는 11월22일 가자지구에서 차를 몰고 가다 교차로에서 매복한 이스라엘군의 집중사격을 받고 숨졌다. 그의 차에 함께 탔던 아우니 이드하이르(38)와 앞서 가던 택시 승객 2명이 그때 함께 총격을 받고 피살됐다. 총에 맞아 죽은 척하고 있던 팔레스타인 택시기사(29)가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였다. 당시 이스라엘군 당국은 “파타-탄짐의 고위간부를 검문하려 했으나 그가 IDF의 저지선을 돌파하려 해 사살했고 다른 3명의 무장 괴한도 함께 죽었다”고 발표했으나 택시기사의 증언으로 미뤄 사실은 전혀 다른 듯하다. 알 라제크를 이스라엘군이 체포하려고 마음먹었다면 충분히 가능한 상황에서 매복하고 기다렸다 그를 집중사격했고, 덩달아 다른 희생자까지 내고는 ‘무장괴한과의 충돌’ 발표한 것이다. 표적사살의 한가지 특징은 이스라엘군이 그들을 체포하려면 충분히 가능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불과 2~3m의 가까운 거리에서 다짜고짜 총을 쏴댔다는 점이다.

야세르 아라파트의 팔레스타인 당국은 이스라엘 정보기관 협력자로 드러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이적행위자’로 낙인찍고 재판에 회부해 총살형에 처하고 있다. 이스라엘 정보기관의 끄나풀로 동족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팔레스타인 배신자들에 대한 분노는 깊다. 서안지구 북부도시인 나블러스에서도 지난 1월 알란 바니 오데(24)가 광장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총살됐다. 미장공인 알란은 모사드와 더불어 이스라엘 정보기관의 하나인 신 베트(Shin Bett)의 지령을 받고, 그의 사촌이자 하마스 요원으로 폭탄전문가인 이브라힘(35)을 죽게 한 혐의를 받았다. 처형되기에 앞서 알란은 가족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다음과 같이 고백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스라엘 공동체 마을 키부츠에 부는 변화의 바람

노석조 인턴기자 (고려대 언론학부 4학년) 2009.08.13

김두식(26,건국대4)씨는 작년 이스라엘 키부츠에서 자원 봉사 활동을 2개월 동안 했다. 히브리중동학을 전공한 그는 키부츠가 사회주의의 공동생산, 공동소유를 표방하며 1910년에 생긴 마을이라고 배웠다.

하지만 현지에 도착해 보니 실제 키부츠는 책 속의 키부츠와는 달랐다. 공동소유가 아닌 개인 재산 소유가 인정됐고, 공동 주택보다는 개인 주택을 구입해 사는 키부츠 주민들이 많았다. 공동체(community)라는 뜻의 키부츠가 새로운 모습을 변하고 있던 것이다.

“속옷까지 공동으로 사용하던 시절이 키부츠에 있었다고 들었는데, 이제는 공동식당에서조차 음식 마다 가격을 매겨요. 정량보다 많이 먹으면 돈을 추가로 내기도 하고, 끼니를 거르면 안먹은 만큼 돈을 받기도 해요. 개인의 사정과 기호를 반영하려는 것이겠죠.” 김두식씨는 “북적거리는 키부츠 관광객들을 보고 한번 더 놀랐다”고 했다.

◆실속 차리는 키부츠 마을

올해로 형성된 지 100년이 된 이스라엘 키부츠는 사회주의구조에서 사유화를 인정하고 효율성을 강조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습에 가까워 지고 있다. 수익창출구조도 농업에서 관광산업으로 돌아섰다. 돈이 되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건국대 히브리중동학과 최영철 교수는 “노동 의욕을 고취시키지 못하는 노동 구조와 경쟁력이 떨어지는 농업위주의 경제구조로 인해 수많은 키부츠 마을들이 파산 신청을 냈다”며 “경제난에 허덕이던 대부분의 키부츠가 사라졌다”고 했다. 전성기던 1970년 키부츠 마을은 260여개에 이르렀으나 현재는 30여개 밖에 남지 않았다.

뉴욕타임즈에 따르면 키부츠는 2007년을 기점으로 공동체에서 사유화를 인정하고 개인의 적성에 맞는 전문직을 인정하는 등 본격적인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키부츠 주민들을 특정한 일자리에서 영구적으로 근무하지 않고 농장, 공장, 양육원 등의 여러 근무직을 돌아가며 일해왔다. 공동체 생활이라는 기본적인 틀은 유지하면서 경제적 효율성을 올리는데 기존의 틀을 깨고 있는 것이다.

키부츠는 이스라엘 전역에 마을 형태로 분포돼 있다. 갈릴리 호수, 사막, 지중해 등 관광지로서의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관광업으로 많은 인기를 끌고 있다.

이스라엘 주요 일간지 하레츠에 따르면 키부츠 운영위원회에서는 다른 지역과 교류없이 외딴 섬과 같았던 키부츠를 많은 사람들이 찾고 싶어하는 지역으로 재탄생시키고자 외부적으로도 많은 시도를 하고 있다. 실제로도 이스라엘 주요 명절인 유월절 때에 키부츠 마을 호텔들은 일찌감치 예약 만료가 된다.

최교수는 “현재 30여개 키부츠 사이에서 부자 키부츠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부의 차이가 생기고 있는 것은 공동소유와 생산을 강조하던 키부츠가 얼마나 새로운 모습으로 변해가는 지를 보여준다”고 밝혔다.

◆한국 학생들에게 키부츠는 어학 연수 코스

“요즘은 많은 학생들이 경제적인 비용으로 해외 경험과 어학 공부 목적으로 키부츠 봉사 프로그램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키부츠 봉사 정원이 많이 줄었는데도, 지원수는 오히려 계속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키부츠 코리아 대표 김덕(45)이사는 “작년에 100여명이 봉사활동을 갔는데 대학 재학생이 60%였고 나머지 30%가 미취업자였는데 해외경험 및 어학연수가 주목적이었다”고 했다. 6~8시간정도 일을 하면 숙식이 제공되고 20여개국 사람들과 쉽게 어울릴 수 있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키부츠 봉사활동 전후로 영어권 국가에서 연수를 받는 패키지 상품이 덩달아 생겼다.

키부츠 자원 봉사 프로그램은 1998년 우리나라 외환위기가 발생했을 때 대학생, 미취업자들에게 경제적으로 부담없이 해외 생활을 할 수 있는 곳으로 알려져 인기를 끌었다.

키부츠에 2개월 봉사활동을 했던 김두식씨는 “키부츠에서 순수한 자원 봉사의 의미보다는 여러 나라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해외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고 말했다.

키부츠의 자원 봉사자들의 모습. /김두식씨 제공

사회주의적 공동사회를 고수하던 키부츠가 경제 이익 창출과 공동체 운영에 효율성을 꾀하며 변하듯 학생들도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바를 기대하며 키부츠 자원 봉사 프로그램에 지원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키부츠란?

키부츠는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이주하면서 1910년 이스라엘 갈리리 호수 남부 지역에 처음으로 세워진 공동체를 말한다. 시온주의와 사회주의가 결합되어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고 공동 생산, 공동 분배를 추구하는 이상적인 공동체를 지향했다. 이 후 계속된 증가로 1970년대에는 이스라엘 전역에 약 257개의 키부츠 마을이 형성 됐다.

키부츠 공동체 체험 및 자원 봉사 프로그램은 1960년대 중반 시작됐다.초반에는 이스라엘 공동체와 시온주의 등에 관심있는 유럽 젊은이들이 많이 찾았다. 이후 세계 각 지의 젊은이들이 다양한 목적으로 키부츠에 모여 들었다. 하지만 2000년 ‘인티파타’라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간의 무력 충동 사태이 발생하자 대부분의 봉사자들이 키부츠를 빠져 나갔다.

우리나라에서는 1998년 IMF외환위기가 떠졌을 때 대학생과 미취업자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다. 하루 6~8시간 일을 하면 숙식 및 생활 경비가 제공됐기 때문이다. 이 후 온라인 동호회나 유학 센터를 통해 봉사 활동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시오니즘의 태동과 중동 전쟁의 이면사

  오늘의 중동 문제를 이해하기 우해서는 석유와 더불어 미국의 또 다른 화두인 이스라엘의 중동 패권 정책의 진행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고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라도 시오니즘의 계기가 된 '드레퓌스 사건'을 다뤄야만 한다. 1894년 10월, 프랑스 참모본부에 근무하던 유대인 출신의 포병 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Dreyfus, Alfred: 1859-1935)가 독일 대사관에 군사 정보를 제공한 혐의로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비공개로 진행된 군법 회의에서 그는 별다른 물증이 제시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당시 민족주의가 발흥하면서 유럽 사회에 팽배해진 반유대주의라는 사회적 편견이 드레퓌스를 스파이 사건의 주범으로 몰아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프랑스 군 수뇌부는 그 후 사건의 진범이 드레퓌스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는 확증을 얻었음에도 진상을 밝히길 거부하고, 오히려 사건을 은폐시키려 했던 것이다. 그러자 드레퓌스의 결백을 믿고 재심을 요구하던 가족도 뒤늦게 사태를 파악하고 1897년 11월, 진범으로 알려진 헝가리 태생의 에스테라지 소령을 고발한다. 하지만 프랑스 군부는 형식적인 신문과 재판을 거쳐 그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석방함으로써, 이 사건의 진상은 영원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듯하였다(참고로 프랑스군은 사건이 발생한지 1백년만인 1995년 9월, 드레퓌스가 무죄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그런데 재판 결과가 공개된 직후인 1898년 1월 13일, 소설가 에밀 졸라가 드레퓌스에게 유죄 판결을 내린 프랑스 군부의 의혹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사설을 <오롤>지에 게재하면서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이 사건은 드레퓌스 한 개인의 석방 문제라는 차원을 넘어 정치적 쟁점으로 비화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 결과 프랑스는 정의, 진실, 인권 옹호를 주장하는 드레퓌스 재심파와 군의 명예와 국가 질서를 내세우는 반 드레퓌스 파로 분열되어 논쟁을 벌인 끝에 결국 재심파가 승리하면서, 이 사건은 프랑스 내 좌파 세력의 결속을 다지는 계기가 된다.

  중세 시대부터 반유대주의가 기승을 부릴 때마다 재산 몰수와 추방, 학살 등을 경험한 유대인들의 시각은 달랐다. 드레퓌스 사건을 계기로 그들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부당하게 겪어야만 하는 사회적 차별로부터 항구적으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국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절감한 것이다. 그 결과 1896년 오스트리아의 유대계 언론인인 데오도르 헤르츨(Theodor Herzl)은 <유태인 국가>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유대인들이 박해를 피하려면 독립 국가를 세우는 길 밖에 없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바야흐로 <성서>에서 예언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으로의 귀환이라는 시오니즘이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로 드레퓌스 사건 이후 유럽의 부유한 유대인들은 중동 지역의 기독교도들과 유대인들의 도움으로 팔레스타인의 땅을 매입해 수십 개의 정착촌을 건설했다. 그리고 마침내 에밀 졸라가 드레퓌스 사건에 대해 ‘나는 고발한다’는 제목으로 국가 권력을 비판하던 1898년, 정치적 시오니즘(Political Zionism)의 아버지로 불리던 헤르츨은 “앞으로 50년 후 이스라엘은 독립할 것이다” 라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그의 말이 실현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정확히 50년이 지난 1948년, 놀랍게도 헤르츨의 예언은 이스라엘 국가의 탄생이라는 현실로 나타나게 된다.

  이스라엘 독립 이면에 감춰진 영국과 로스차일드 밀약

  유대인이 정착촌을 건설하던 19세기 말까지만 하더라도 아랍 민족과 유대인이 평화롭게 공존하던 팔레스타인이 오늘날과 같은 세계의 화약고로 돌변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의 전비 처리 문제로 고민하던 영국 정부의 도박에서 비롯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5년 10월, 터키의 참전으로 곤경에 빠진 영국은 전세를 만회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집트 주재 외교관인 맥마흔을 통해 당시 아랍의 지도자인 후세인에게 게릴라 전문가인 로렌스를 도와 전쟁에 협력하면, 전후 아랍을 독립시켜주겠다고 약속한다. 이 때 유명해진 인물이 다름 아닌 아라비안 로렌스다.

  하지만 1차대전의 후유증으로 당시 영국 경제는 독일에 항복을 고려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미국의 참전을 유도해 전쟁을 빨리 끝내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워싱턴을 장악하고 있는 미국내 시오니스트들의 도움이 절실했다. 그런 까닭에 영국의 전시 내각은 1916년 10월, ‘세계시온주의자연맹’ 대표이자 유럽최대 금융재벌이던 바론 리오넬 로스차일드(Rothschild)와 비밀리에 회동해, 전후 팔레스타인을 유대인들에게 넘겨줄 것을 약속하는 런던 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이에 대해 로스차일드는 팔레스타인 유대인들에게 새로운 국가 건설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영국의 전시 내각에 필요한 재정 지원을 약속한다.

  당시 미국의 시오니스트들은 영국 정부의 런던 조약의 이행 여부에 회의적이었다. 1916년 12월4일, 다급해진 영국 정부가 전격적으로 시오니스트로 유명한 로이드 조지를 총리로 임명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총리로 취임한 로이드 조지는 바로 다음날, 영국에서 존경받는 조시아 웨지우드 의원을 미국에 파견한다. 12월 23일, 웨지우드가 미국에 도착하자 당시 윌슨 대통령의 고문인 에드워드 하우스 대령은 그를 뉴욕 54번가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에 머물도록 배려하면서, 유대계 지도자 51명을 사보이 호텔로 초청해 런던 조약에 대해 자세히 설명할 기회를 제공한다.(1912년 미국에서 출간되어 정치적으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행정관 필립 드루>(Philip Dru: administrator)의 실제 저자가 바로 윌슨 대통령의 고문인 하우스 대령이다.)

  그 때까지 친 독일 노선을 지향하던 미국의 시오니스트들이 친 영국 노선으로 입장을 정리한 것은 바로 이 무렵부터다(이것은 훗날 독일 나찌 정권의 유대인 학살의 동인으로 작용한다).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스라엘 국가를 설립하려는 유대 시오니스트들은 당시 영국 지배하에 있던 팔레스타인을 필요로 했고, 그런 까닭에 영국을 돕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 결과 1917년 4월 2일,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의회에서 “미국은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해야 한다”는 연설을 하기에 이르고, 그로부터 불과 4일 후 즉 1917년 4월 6일, 미국은 특별한 사유도 없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1917년 11월, 영국의 외무장관 밸푸어(Balfour)가 로스차일드에게 보낸 아래의 서한은 이같은 이면 합의의 빙산의 일각이었던 셈이다.

  “영국 정부는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을 위한 고국(National Home)을 건설하는 것에 호의를 보이며, 이 목적이 쉽게 달성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다만, 현재 팔레스타인에 거주하고 있는 비유대인 단체의 시민적.종교적 여러 권리를 손상시키지 않고, 또 다른 나라에서 유대인이 누리고 있는 여러 권리 및 정치적 지위를 손상시키지 않을 것을 전제로 한다.” 귀하께서 이 선언을 시온주의자 연맹에 통지해 주시면 저에게 큰 기쁨이 될 것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자 영국은 약속대로 유대인의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를 도왔다. 그 결과 1936년 팔레스타인 내 유대인 인구 비율은 전체의 28%를 차지하게 된다. 1880년대 팔레스타인의 총인구 50만명 가운데 유대인 비율이 겨우 5%인 2만5천명이었던 것과 비교해보면, 이 시기에 얼마나 많은 유대인들이 이주해왔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은 영국 정부의 비호 하에 로스차일드로부터 제공되는 우수한 기술과 자본을 바탕으로 정착촌을 건설하고 협동조합과 각종 산업 시설을 갖추어 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1948년 5월 14일, 영국군이 팔레스타인에서 철수하자, 시오니즘 운동의 지도자인 데이비드 벤-구리온은 텔아비브에서 이스라엘의 건국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바야흐로 꿈에 그리던 이스라엘의 독립이 달성된 것이다.

  중동 전쟁을 주도한 이집트와 수에즈 운하

  1차 대전이 종료되면서 오스만 투르크에서 해방된 중동 지역엔 아랍 국가들이 하나 둘, 독립하기 시작한다. 먼저 이집트가 독립(1922)에 이어 사우디 아라비아가 독립했고(1926), 이어서 이라크(1932)에 이어, 레바논(1943)과 시리아(1944)가 프랑스로부터 독립했다. 그리고 1946년엔 요르단이 독립하기에 이른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이스라엘의 탄생 과정을 지켜보며 영국과 미국을 배후에서 조정하는 유대 시오니스트들의 완력에 두려움을 느낀 이집트, 사우디, 이라크, 레바논, 시리아, 요르단 등 아랍국들은 1945년 3월, 아랍 연맹을 결성해 이스라엘에 대항하기로 합의한다.

  4차에 걸친 중동전쟁에서 아랍 세계를 리드한 것은 이집트였다(심지어 샤론 이스라엘 총리와 더불어 오늘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유혈 분쟁의 중심 인물인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수반도 전직 이집트 군인 출신이었다). 이집트가 팔레스타인 문제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은 수에즈 운하 때문이었다. 수에즈 운하를 독점해온 영국이 이스라엘을 통해 그 영향력을 계속 유지하려는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국의 외무장관 밸푸어는 친 영국 성향의 유대인들이 수에즈 운하를 지키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이것은 2차 중동전쟁을 통해 명백히 입증되었다.

  1차 중동전쟁이 끝난 1949년 이후 이집트는 이스라엘 선박과 이스라엘행 특정 물자를 운송하는 외국 선박의 운하 통과를 거부했다. 그 사이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요구하는 이집트인의 요구가 격렬해지면서 운하에서는 이집트인과 영국군의 충돌이 빈번해졌다. 그런 가운데 1952년 혁명에 성공한 나세르는 1954년 10월 영국과 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르고, 1956년 6월 영국군이 철수하자 7월 26일, 마침내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단행한다. 그러자 10월 31일, 영국의 사주를 받은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를 공격해 가자 지구와 아카바만에 접근할 수 있는 시나이반도 끝의 샴 엘 셰이크를 확보하기에 이른다. 2차 중동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두 차례에 걸친 중동전쟁에서 아랍연맹이 이스라엘에게 완패를 당하자, 정규전으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아랍 민족주의자들은 이스라엘에 대한 투쟁 방법으로 ‘테러’ 조직을 구상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나온 것이 다름 아닌 1964년 전직 이집트 군인 출신인 야세르 아라파트가 창설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PLO다. 오늘날과는 달리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PLO는 테러라는 폭력 수단을 동원해 이스라엘을 파괴시키겠다는 목표를 가진 테러 조직이었다.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이스라엘 선수 11명을 사살한 것은 그 대표적인 경우였다.(그런 의미에서 알-카에다의 탄생 과정은 PLO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 차이가 있다면 당시 PLO는 ‘특정 인물’에 대한 ‘테러’를 무기로 삼았지만, 알-카에다는 ‘불특정 다수’에 대한 ‘자살 테러’를 무기로 삼는다는 점이다.)

  ‘6일 전쟁’으로 불리는 3차 중동전쟁(1967) 역시, 수에즈 운하의 아카바만 봉쇄를 둘러싸고 발생한다. 시리아, 요르단과 군사동맹을 맺은 이집트는 소련의 지원하에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지만, 오히려 이스라엘로부터 선제 공격을 당해 골란고원과 예루살렘 구시가지, 가자지구, 시나이반도, 웨스트 뱅크를 빼앗긴다. 흔히 ‘욤키푸르’(속죄일) 전쟁으로 불리는 4차 중동전쟁은 1973년 10월, 속죄일 기간에 이스라엘을 공습한 것으로 이 전쟁에서도 이스라엘은 결국 이집트와 시리아의 공격을 물리치는데 성공한다. 이 전쟁에서 패배한 이집트는 1979년 3월, 시나이 반도를 돌려받는 대가로 이스라엘을 국가로서 인정하는 캠프 데이비드 협정에 서명함으로써 4차에 걸친 중동 전쟁을 종식시킨다.

  석유의 무기화를 구상한 카다피와 후세인

  이집트가 무대에서 사라지자 중동에서는 이스라엘을 상대할 또 다른 정치 지도자를 필요로 하게 된다. 이 때 혜성과 같이 등장한 인물이 다름 아닌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다. 이집트가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 문제로 팔레스타인 분쟁에 개입했다면, 후세인은 이라크 석유의 국유화 문제로 팔레스타인 분쟁에 개입한 경우였다. 후세인에게 석유 국유화 가능성을 깨우쳐 준 인물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생포 된지 불과 1주일만에 WMD(대량살상무기)의 완전 포기를 선언한 리비아의 카다피였다. 4차 중동 전쟁이 발발한 1973년에 발생한 1차 오일 쇼크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중동 민족주의의 상징인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 그러나 그는 최근 이라크전후 미국과의 공존을 택했다.

  1970년까지 원유는 배럴당 1달러대인 반면, 소비자들은 휘발유를 1리터당 1달러에 구입하고 있었다. 여기에 산유국의 정부 지분율은 메이저 석유회사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다. 이는 제 값을 받으려는 산유국의 시도가 미국과 유럽의 메이저 석유회사의 로비를 받은 강대국에 의해 번번이 무산되었기 때문이다. 이란의 팔레비 정권이 붕괴되고 호메이니가 등장하자 미국이 후세인을 지원한 것은 그 대표적인 경우였다. 당시 미국은 이란의 종교 혁명이 아랍권에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라고 해명했지만, 실상은 이란의 석유 국유화를 사전에 차단하려는 조치였다.

  전 세계 메이저 석유회사의 통제에서 벗어난 최초의 인물은 1969년 영국사관학교 유학생으로 영국에 와 있던 리비아의 젊은 장교 카다피였다(지난해 말 후세인이 생포 된지 불과 1주일만에 이루어진 카다피의 WMD의 포기 선언은 이런 측면에서 매우 의미심장 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리비아 왕이 비굴한 자세로 영국에 석유 이권을 바치는 것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은 카다피는 그 해 9월, 젊은 장교들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왕정을 붕괴시키고 정권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아랍 민족주의를 표방한 카다피는 메이저가 아닌 인디펜던스, 다시 말해 당시 리비아에서만 원유를 전량 매입하던 옥시덴탈사와의 협상에 성공, 정부 지분율을 대폭 끌어올리는 데 성공한다.

  카다피의 협상 방식은 이후 다른 중동 산유국의 협상 모델로 부각되어 1973년 여름, 원유는 배럴당 1달러 대에서 3달러로 상승한다. 이에 대해 메이저 석유회사들은 OPEC와의 협상입지 강화 차원에서 시추율을 올리려는 시도를 중단함으로써 석유 생산에 대한 통제에 나섰다. 하지만 1973년 10월에 터진 4차 중동전쟁의 여파로 11월엔 선진국 유가가 4배나 상승하는 석유 파동이 벌어진다. 게다가 생산량마저 감축되면서 당시 중동 원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우디 아라비아의 유가 고시 가격은 배럴당 11.69달러까지 수직 상승하게 된다. 마침내 제1차 오일 쇼크가 발생한 것이다.

  1차 걸프전의 계기가 된 후세인의 쿠웨이트 침공(1990.8)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당시 이라크의 주도로 이뤄진 OPEC의 쿼터(생산량 할당)를 쿠웨이트와 아랍에미리트가 무시하고 초과 생산을 시도한 것이다. 그 결과 배럴당 3달러 정도의 인상 요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유가는 하락했는데, 이는 메이저 석유회사의 로비를 받은 미국의 배후 조종으로 발생한 사건이었다. 아랍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후세인에게 있어, 특히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인해 국가 재정이 고갈된 상황에서 쿠웨이트의 이같은 행동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1차 걸프전 이후 사담 후세인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2000년 8월, 후세인은 이라크를 방문한 베네수엘라의 차베스에게 OPEC 석유 대금을 달러가 아닌 유로화로 사용할 것을 제안한 것이다. 후세인의 제안에 공감한 차베스는 이후 1개월 간 중동 지역을 순방하며 각 국지도자를 설득한 끝에 9월에 개최된 OPEC 회의에서 석유의 무기화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그러자 다음날 뉴욕 증시는 공황 상태에 빠지고, 2000년 대선을 준비하는 부시는 지지자들에게 “여러분 제가 후세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시죠?”라는 말로 후세인 축출 의지를 드러낸다. 2001년 4월 미국의 주도로 이루어진 베네수엘라 차베스 대통령에 대한 쿠데타와 2003년 3월에 발생한 부시 정권의 이라크 침공은 이같은 배경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스라엘 역사

팔레스타인 분쟁은 유태인들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성서의 2천 년 기록을 근거로 이 지역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면서 1948년 이스라엘 국가를 건립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에 대한 아랍국가들의 강경한 저항으로 4번의 주요 전쟁과 수 없는 충돌을 거치면서 중동의 화약고로 불렸다. 그러나, 미국의 적극적인 중재로 1990년 대 부터 평화 분위기가 조성되고는 있으나 분쟁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는 상태이다.

팔레스타인 분쟁은 외향적으로 볼 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과의 분쟁으로 보이나 중동지역 대부분의 국가가 직ㆍ간접적으로 연루되어 있고 이스라엘의 생존권을 보장하는 미국도 깊숙이 개입되어 있어서 그 어떠한 분쟁보다도 국제화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실례로 1973년 소위 '10월 전쟁'시 러시아의 개입 위협을 미국이 핵억지 전력을 가동시키면서까지 막은 바 있다. 또한, 1990년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면서 '이스라엘에 대항하여 팔레스타인의 권리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세우는 등 국제화 경향을 보였다. 따라서 팔레스타인 분쟁은 중동 전체의 안전과 평화, 나아가 세계 평화에 있어서 핵심적 관건이 되고 있다.

팔레스타인 지역은 서기 135년경 이 곳에 거주하고 있던 유태인들이 로마에 의해 추방된 후 아랍인들에 통치되어 왔다. 아랍인들은 사라센제국의 건설 이후 동로마제국을 멸망시키고, 팔레스타인 지역을 장악하였으며, 예루살렘을 성도로 삼아왔다. 그 후 이 지역은 십자군 원정이 있었을 때 기독교도들에 의해 일시적으로 점령당한 기간을 제외하고는 아랍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지배되어 왔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유럽에서 반유태인 운동이 전개되고 그에 대응하여 유태인들이 '조국의 건설'을 목표로 민족주의 운동을 확산시켜 나가면서부터 팔레스타인 지역의 수난이 시작되었다.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오스만제국의 약화와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팔레스타인 지역을 미끼로 아랍민족과 유태인들 모두에게 독립국가를 창설시켜준다는 이율배반적 약속을 하였다. 그러나, 영국은 전쟁 후 팔레스타인 지역을 자신의 위임통치 지역으로 편입하고 동 지역으로 이주해오는 유태인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취하였고 아랍인들은 이에 강력히 반발하면서 반유태인 운동을 확산시켰다.

2차 세계대전 후 영국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유엔에 이관하고 유엔은 팔레스타인 특별위원회(UN Special Committee on Palestine; UNSCOP)를 설치하여 팔레스타인 지역을 아랍인 구역과 유태인 구역으로 분할시키는 안을 채택하였다. 유태인들은 이를 기꺼이 수락한 반면 아랍 측은 거부하였고 그 결과 유태인들은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국가를 수립하였다.

이로써 아랍 측과 이스라엘 측의 지루한 전쟁이 잉태되었다. 이른바 '팔레스타인 전쟁'으로 불리는 제1차 전쟁은 이스라엘 건국 직후 이집트를 비롯한 7개 아랍국가들이 무력적 항쟁을 벌이면서 발생되었다.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80%를 차지하는 전과를 올렸고, 팔레스타인인 90만 명이 유랑민으로 전락하게 됨으로써 훗날 중동지역의 최대 골칫거리를 유산으로 남기게 되었다.

1956년 10월에는 이른바 '시나이 전쟁'으로 불리는 제2차 중동전쟁이 발생하였다. 동 전쟁은 이집트의 낫세르의 군비 증강에 위협을 느낀 이스라엘이 시나이 반도를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스라엘은 이 전쟁으로 가자지구를 점령하게 되었다.

1967년 6월 5일에는 시리아, 요르단, 이집트 연합세력과 이스라엘간에 이른바 '6일 전쟁'으로 불리는 제3차 중동전쟁이 발생하였다. 시리아와 이집트는 1966년 10월 군사동맹을 맺고 주변 아랍국가들과도 협력체제를 강화하면서 대이스라엘 군사공격을 준비하였으나 이스라엘이 선제공격을 가함으로써 전쟁이 발발하였다. 6일만에 종결된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시나이반도, 골란고원, 요르단강 서안 등 본토의 5배에 달하는 광대한 지역을 점령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 뒤 1973년 10월 6일 이집트와 시리아가 연합하여 이스라엘을 기습적으로 공격함으로서 이른바 '욤 키푸르(Yom Kippur) 전쟁'으로 불리는 제4차 중동전쟁이 발발하였다. 이스라엘은 전쟁 초기의 열세를 만회하고 골란고원에서 일방적으로 승리를 확보한 후 시나이반도의 이집트군을 집중 공격함으로써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1982년 5월에는 이스라엘이 레바논 지역을 공격함으로써 시리아와 소위 '2일 전쟁'을 벌였다. 동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85대 이상의 시리아 전투기를 격추한데 비해 이스라엘 측 전투기는 단 한 대만이 격추되는 전과를 올렸다.

팔레스타인 지역을 둘러싼 아랍 측과 이스라엘 측간의 분쟁은 네 차례의 전쟁을 치른 끝에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우선,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국제적 공인을 받게 되었다. 유엔은 총회 결의로서 팔레스타인들에 대하여 외부로부터 간섭받지 않는 자치권, 민족 독립과 주권을 가질 수 있는 권리, 중동 평화 달성을 위한 중요 당사자로서의 지위 등을 인정하였고, 팔레스타인해방기구에 대해 유엔 옵저버 자격까지 부여하였다. 또 하나의 중대한 변화는 1977년 11월 이집트와 이스라엘간의 평화협정(캠프 데이비드 협정) 체결이다.

미국의 주선으로 이집트는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이스라엘과 국교를 수립하고 평화적 관계를 정착시키는 한편 잃었던 시나이반도를 되찾게 되었다.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이와 같은 평화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양국간의 관계를 안정시킬 수 있었으나, 팔레스타인 분쟁의 근원적 문제들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남아 있었다. 이스라엘은 어렵게 조성된 중동지역의 평화 분위기를 외면하고 1967년과 1973년 전쟁에서 점령한 동예루살렘과 가자지구 및 골란고원을 1980∼1981년 기간동안 자신의 영토로 공식 합병시켰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분쟁은 1993년 미국의 중재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팔레스타인 자치 확대를 골자로 하는 '오슬로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이후 1994년 5월 '카이로 협정'을 체결하여 이스라엘 점령지 내 가자지구 및 예리코 지역에서 팔레스타인 자치권을 인정하였다. 이에 따라 1994년 7월 1일에는 아라파트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의장이 가자 자치지구에서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마침내 7월 5일 자치정부의 수립을 공식 선언하였다

이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1998년 10월 25일 '와이 협정'(Wye River Memorandum)을 체결함으로써 양측의 핵심문제에 접근하게 되었다. 동 협정에서 이스라엘은 1967년 점령한 요르단강 서안을 단계적으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 이양하고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에 대한 적대행위를 중단하기로 합의함으로써 '영토와 평화의 교환'이라는 성과를 이루어 내었다. 이에 따라 이스라엘은 1998년 12월 요르단강 서안지역에서 1단계 철수를 마쳤으나 1999년 초 요르단강 서안에서 폭력사태가 잇따르자 철군을 중단하였다.

1999년 5월 평화공존을 공약으로 내 건 바라크가 이스라엘 총리로 당선된 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정상회담이 재게되고 양측은 9월 와이협정의 후속조치로 이스라엘 점령지역의 일부 영토에 대한 추가 이양에 합의하였다. 2000년 3월에는 이스라엘 정부가 요르단강 서안의 땅 6.1%에서 철군하는 계획을 승인한 바 있다. 철군이 완전히 이루어질 경우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는 요르단 강 서안 40% 지역에 대한 부분 또는 완전 통제권을 확보하게 된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는 가장 큰 걸림돌인 동 예루살렘의 지위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다. 예루살렘은 유대인과 아랍인 모두의 성지로 1967년 제3차 중동전 때 이스라엘에 의해 합병되었으나 국제사회는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팔레스타인은 '아랍 동 예루살렘'을 원하고 있는 반면 이스라엘은 동 예루살렘에 이주한 유태인이 이미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음을 내세우고 있어서 협상에 난항을 겪고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내부 문제도 평화 정착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성서에 나오는 '유대와 사마리아' 지방인 요르단강 서안의 이양을 반대하는 이스라엘의 유대교 원리주의자와 이스라엘 정부에 퍼져 있는 강경주의자들의 반발이 문제가 되고 있다. 또한, 팔레스타인도 PLO안에 독립국가의 즉각적인 선포를 주장하는 강경세력과 이스라엘과의 대화 자체를 거부하는 하마스 등의 급진ㆍ테러 단체의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 외에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아랍국가간에는 상호 실체 인정과 공존을 사실상 원치 않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존재한다. 이는 2000년 가까이 지속된 양측의 뿌리 깊은 역사적 반목과 종교적 이유에 기인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의 진정국면은 양측간의 진정한 화해보다는 탈냉전 초강대국으로 등장한 미국의 적극적인 중재와 힘에 의해 이루어진 측면이 강하다.

그러므로 중동지역 세력균형의 변화에 따라 분쟁이 재연될 개연성이 충분히 있다. 반미를 표방하며 아랍권의 맹주를 자처하는 이란과 이라크, 권위주의 정권을 유지하고 있는 시리아 등이 중동 지역의 세력 균형을 재편하는 과정에서 연합할 경우, 이들 국가의 공통된 공격 대상인 이스라엘과의 분쟁이 재연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한 예로 1999년 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평화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이란은 팔레스타인 전 지역의 해방을 주장하면서 투쟁을 천명한 바 있다

출처 : 빛과 흑암의 역사 (성경연구,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
글쓴이 : 등대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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