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신학으로 새로 본
요한복음
김동수 교수(평택대)
2006
차 례
제 1장 요한복음 개론
제 2장 프롤로그: 로고스 찬양서시(1:1-18)
제 3장 예수 현현(1:19-2:22)
제 4장 예수와 사람들과의 호의적 만남(2:23-4:54)
제 5장 유대인들과 대충돌하는 예수 1(5-6장)
제 6장 유대인들과 대충돌하는 예수 2(7-8장)
제 7장 유대인들과 대충돌하는 예수 3(9-10장)
제 8장 영광(죽음)의 시간을 향하여 전진하는 예수(11-12장)
제 9장 예수의 최후 만찬과 고별 설교(13-16장)
제 10장 예수의 고별 기도(17장)
제 11장 예수의 수난(18-19장)
제 12장 예수의 부활(20장)
제 13장 에필로그(21장)
제 14장 요한복음 참고 문헌
제 1장 요한복음 개론
1. 요한복음의 신학적 위치
요한복음과 요한 일, 이, 삼서의 문체적, 신학적 특징의 유사성으로 인해 이 모든 문서를 합쳐 흔히 요한 문헌(Johannine corpus)이라고 부른다. 전통적으로는 요한계시록을 세베데의 아들 사도 요한의 저작이라고 생각하여 계시록도 요한 문헌의 하나로 간주되었었지만 현재는 계시록과 여타 요한 문헌 사이의 문학적 장르와 신학상의 차이로 인해 계시록은 요한 문헌과 구별하여 취급하는 것이 상례이다.
요한 문헌은 신약에서 몇 가지 면에서 독특하다. 첫째, 신약성서 중에서 요한 문헌만이 복음서와 서신으로 구성되어있다.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의 관계는 바울의 친서와 제2 바울서신의 관계에 비교될 수 있다. 둘째, 요한복음은 신약성서 중 가장 이해하기 쉬운 복음서이면서 동시에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복음서이기도 하다. 동일한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하고 단순한 셈어적 헬라어 구문을 사용한다는 측면에서 요한복음은 복음서 중에서 가장 이해하기 쉬운 ‘어린이 복음서’라 할 수 있다. 한편 요한이 사용하는 쉬운 단어와 구문들은 요한만의 독특한 표현과 색깔을 띠는 경우가 많고 그 전승의 정확한 출처를 밝혀내기 어렵기 때문에 요한복음은 ‘수수께끼 복음서’로도 불리어 왔다. 요한서신은 이러한 요한복음의 언어와 신학적 특징을 그대로 갖고 있다. 복음서와 서신은 요한만의 독특한 색깔을 내는 단어들을 공유할 뿐만 아니라 그 단순한 단어들을 반복해서 사용한다는 것에서도 일치한다.
요한복음은 기독교 역사상 신자들에게 가장 영향력 있는 복음서였다. 요한복음은 초대 기독교의 기독론과 삼위일체론의 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했고 기독교에 입문하는 자들에게 최우선적으로 읽어야 할 필독의 복음서였으며 심오하고 신비한 기독교의 영적 지혜를 얻으려는 신자들에게 요한복음은 ‘경전안의 경전’이었다. 그런데 복음서의 왕으로 군림하던 요한복음은 18세기 이후 역사비평적 성서연구 방법이 도입된 이후 역사적 예수를 찾는 자료로서의 가치를 상실하여 공관복음의 뒷전에 밀려난 형국에 처하기도 했다. 그 자료와 종교사적 배경과 특히 저자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인해 요한복음은 ‘제사복음서’(the Fourth Gospel)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요한 문헌에 근거한 요한신학은 공관복음의 신학과 바울신학과 함께 여전히 신약신학의 주요한 축의 하나로 자리 메김을 하고 있다.
2. 요한학파
2.1. 요한학파의 존재
요한 문헌은 언어와 문체와 신학에 있어서 서로 상당한 정도로 유사하다. 이러한 유사성이 어떻게 생겨났을까? 전통적으로는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의 저자를 세베대의 아들 요한으로 보고 이러한 유사성이 이 저자의 개인적 특성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최근 요한연구에서는 이 문제를 요한 학파와 연관지어 해결한다. 요한계 문헌의 생성 배후에는 이 문헌을 기록, 편집, 보존하고 사용했던 일정한 신자 그룹이 역사상 존재했었다는 것이다. 이 그룹은 학자들에 따라 ‘동아리’(O. Cullmann), ‘학파’(R. Alan Culpepper), ‘공동체’(R. E. Brown 등) 등으로 불리운다.
요한 학파의 존재에 대해서는 요한본문 내증과 정황적인 증거가 충분하다. 첫째, 요한복음 21:24에 본문의 저자와 구별되는 ‘우리’라는 일단의 무리가 나오는데 이들은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고 말함으로써 저자의 증언을 인증하는 역할을 한다. 여기서 ‘우리’는 편집적 ‘우리’가 아니라 일인칭 복수 ‘우리’로써 요한 학파의 구성원들을 가리킨다. 둘째, 요한서신은 요한복음과 문학적, 신학적, 언어적 특징들을 공유하고 있는데 이는 이 문서들 배후에는 특정한 신학을 가진 공동체가 존재했었음을 암시한다. 셋째,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에 동일한 윤리적 교훈(cf. 요 13:34-35; 요일 2:7-11)과 동일한 교회론적 표상(cf. 요 15:13-15; 요삼 15) 등이 나타나는데 이는 이 문헌이 최소한 같은 공동체 안에서 태동되었음을 보여준다. 넷째, 고대 학파처럼 요한 공동체는 설립자(‘애제자’)가 있었다.
2.2. 요한 학파의 기원과 요한 문헌
1970년대 말부터 현재까지 요한 공동체의 기원과 역사에 관한 수많은 전문 연구 서적과 논문들이 출판되었다. 그런데 이에 관한 대부분의 서적들은 마틴(J. Louis Martyn)의 제안에 기본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마틴에 의하면 요한복음은 예수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요한 공동체의 생생한 삶의 이야기로도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마틴은 이것을 ‘두 차원 드라마’(two-level drama)라고 부른다. 그는 요한복음이 기독론적 고백에 있어서 요한 공동체와 유대교 회당 간의 심각한 갈등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중요하게 취급한다. 그는 이러한 갈등의 배경을 역사적으로 추적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요한복음 9:22, 12:42, 16:2에 있는 ‘아포수나고고스’(avposuna,gwgoj)라는 단어는 일세기 말 얌니아에서 결정한 이방인에 대한 저주[혹은 축복] 선언(Birkath ha-Minim)을 통해서 유대인 회당으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은 축출한 사건을 지칭하는 전문 용어라는 것이다.
위와 같은 가정 하에서 마틴은 요한 공동체의 역사를 재건하는데, 요한 공동체의 역사는 세 시대로 나누어진다. 초기에는 유대인 회당과 사회적 신학적 입장에서 어울리는데 어려움이 없던 그리스도인 유대인 그룹이 존재했었다(요 1:35-49). 중간기에는 요한 공동체가 회당에서 축출되거나 순교를 당함으로써 요한 공동체와 회당 유대인 사이에 큰 상처가 발생한다. 이것은 요한 공동체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자신의 백성으로부터 거부당한 자요(요 1:12) 하늘로부터 온 이방인이라는 칭호로 부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때 요한 공동체는 스스로를 ‘그리스도인 유대인’ 대신에 ‘유대인 그리스도인’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말기에 요한 공동체는 유대인 회당보다는 다른 그리스도인 공동체와 연관하여 스스로의 정체성을 갖게 된다. 이 때 숨어있는 그리스도인 유대인들이 생겨나고(요 8:31f.) 분열된 요한 공동체의 일치를 호소하게 된다(요 10:16).
마틴의 주장은 요한문헌 연구에 하나의 ‘패러다임 쉬푸트’(paradigm shift)를 제공했고 그의 논지는 요한문헌 연구에 있어서 현재까지도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비록 마틴식의 접근이 요한복음을 창(window)으로 사용해서 요한 공동체의 역사를 재건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방법은 복음서의 예수 이야기를 모두 공동체의 이야기로 알레고리화 한다는 지적도 있고, 마틴 자신이 재건한 공동체의 역사가 브라운 등에 의해서 수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요한 문헌을 요한 공동체의 정황 하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그의 제안은 유용하다. 한마디로 말해, 요한 문헌에는 요한 공동체의 관심사와 사랑과 미움의 역사가 반영되어 있다.
3. 저자와 저작 연대
3.1. 저자
요한복음은 세베데의 아들 사도 요한이 연로하였을 때 에베소에서 쓴 책이라는 오래된 교회 전승은 이 세기말 리용의 감독이었던 이레니우스에게서 가장 확실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그 후에 주의 제자 요한은 주님의 품에 기대었던 자로서, 아시아의 에베소에 머무는 동안 자신이 복음서를 출판했다.”(Irenaeus, Haer. 3.1.1); “그리고 주님의 제자인 요한 주위에 모였던 모든 장로들은 요한이 이것을 우리에게 주었다고 증언한다. 왜냐하면 그는 트라얀 시대까지 그들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Irenaus, Haer. 2.22.5). 이레니우스는 자기에게 이러한 전승을 전달해 준 자들로써 특히 폴리캅과 파피아스를 언급한다. 파피아스는 사도 요한과 장로 요한을 언급 하지만 그들이 요한복음의 저자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이레니우스는 자신이 소년기에 순교자 폴리캅에게서 들은 것을 증언한다:
폴리캅은 사도들에 의해 가르침을 받고 주님을 본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했을 뿐만 아니라 사도들에 의해 아시아에 있는 스미르나의 주교로서 임명되기 까지 했다. 그가 오래 살았기 때문에 내가 어릴 때 내 자신이 그를 보았고 그가 영광스럽고 가장 아름다운 순교로서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때 그는 실로 연로했었다... 그리고 주님의 제자 요한이 에베소에서 목욕하러 간 것을 그가 어떻게 묘사하는지를 들은 사람들이 있다(Irenaus, Haer. 3.3.4).
한마디로, 이레니우스는 폴리캅을 통하여 자신과 사도 요한과 연결되어 있음을 말하며 요한복음이 사도 요한에 의해서 쓰여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요한복음이 사도 요한에 의해 저술되었다는 이레네우스의 주장은 곧바로 널리 인정되었고 교회의 전승이 되었다. 2 세기에 영지주의 집단이었던 알로고이(Alogoi) 등이 신학적인 이유로 요한복음이 사도 요한에 의해서 저술되었다는 것을 반대한 경우도 있었으나 이레니우스 이후 요한복음이 사도 요한에 의해서 기록되었다는 견해는 19세기에 이르기까지 크게 도전받지 않았다. 그런데 역사비평학적 성서해석의 등장이후 이레니우스가 제시한 사도 요한 저작설은 몇 가지 면에서 그 확실성을 의심받아 왔다. 첫째, 요한복음의 사도 저작설은 이 문서가 교회 내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는 대 대한 하나의 조치로서 내려진 것이라는 것이다. 즉 이레니우스는 당시 널리 사용되고 있던 요한복음에 정당성을 확보해주기 위해 사도 저작설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둘째, 폴리캅 자신의 글에서는 요한복음이 사도 요한에 의해서 저술되었다는 주장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과 110년경 이레니우스가 에베소 교회에 쓴 편지에 사도요한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은 이레니우스의 주장의 확실성을 의심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 대부분의 요한복음 연구자들은 요한복음이 사도 요한에 의해서 쓰여진 것이라는 전통적인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요한복음 본문 자체는 이 책의 저자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는가? 요한복음은 저자를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는다. 대신에 요한복음의 내용을 증언하고 기록한 한 제자를 언급한다(21:24). 이 인물은 복음서 중 요한복음에만 유일하게 등장하며 익명으로 ‘예수가 사랑한 제자’(이후 애제자)라고 불리운다. 최후의 만찬장에서 애제자는 예수의 품에 의지해 있는 예수와 친밀한 관계를 향유하는 자로 소개된다(13:13-26). 그는 제사장과 잘 아는 사이로 예수가 심문을 받는 장소까지 따라가고(18:15), 예수의 십자가 밑에까지 예수를 따른다(19:25-27). 또한, 그는 예수의 빈 무덤에 먼저 다다르기 위해 베드로와 경주를 벌이고(20:2-10), 부활의 예수를 알아보며(12:7) 베드로가 순교하는 것과는 달리 장수한다(21:20-23).
요한복음에서 이처럼 구원사적으로 중요한 예수의 생애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어떤 학자들은 애제자가 다른 복음서에 나오지 않고 항상 익명으로 나오기 때문에 이 제자는 실제 인물이기 보다는 가상의, 이상적인, 상징적인 인물이라고 본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 마리아는 “예수의 어머니”라는 익명으로 등장하지만(2:1-11; 19:25-27) 이상적인 제자이면서 동시에 실제 인물인 것을 볼 때 애제자가 익명으로 등장한다는 이유만으로 애제자를 가상의 인물로 볼 수는 없다. 애제자가 실존 인물이었다면 누구를 가리킬까? 전통적으로는 세베데의 아들 요한, 즉 예수의 제자 사도 요한을 애제자로 보았다. 그러나 만약 이 주장이 옳다면 팔레스틴의 어부 출신이 대제사장과 친분이 있었다는 난점과 사도 요한이 애제자였다면 왜 자신의 이름을 굳이 밝히지 않았는가 하는 난점이 있다. 그래서 여러 학자들에 의해 나사로, 마가요한, 도마 등 여러 인물들이 애제자로 제시되었지만 어느 하나 확증하기는 어렵다. 결국 요한복음이 익명으로 남겨놓은 애제자가 누구인가는 미해결 과제로 남아있다.
하지만 그 애제자가 사도 요한일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1) 왜냐하면 요한복음에 저자가 자신의 이름대신 애칭을 사용한 것은 저자가 그 애칭으로도 널리 알려진 유명했던 사람임을 반증하며, 초대 교회의 여러 전승으로 볼 때 그 애칭을 사용할 사람으로는 사도 요한이 가장 유력하기 때문이다. 외경 복음서는 사실 저저미상이지만 각 책에 유명한 사도의 이름을 붙였고, 역으로 신약의 모든 정경 복음서는 그 책에 저자의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즉 정경 복음서들이 익명으로 쓰였다는 것은 역으로 이것들이 사도 혹은 그에 준하는 유명한 사람들에 의해서 쓰여졌다는 것을 어느 정도 반증하는 것이다. 바울도 자신의 사도성에 도전을 받았기 때문에 이 사안을 매 편지에 민감하게 기록하고 있는 반면(cf. 롬 1:1; 고전 1:1), 여타 사도들은 그렇지 않았다. 이런 측면에서 요한복음 저자도 자신이 사도 혹은 그에 준하는 유명 인사였기 때문에 자신의 이름을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 외에 애제자를 사도 요한으로 볼 수 없는 위에서 제시된 내적인 증거도 그렇게 결정적이지는 않다. 요한이 부유한 어부였다면 어물 거래 등으로 대제사장과 얼마든지 친분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요한복음 저자가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이유는 복음서는 본래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을 기록하는 것이기에 예수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다른 복음서 저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이름을 익명으로 처리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증거로도 내적인 증거에 의해서는 요한복음이 사도 요한에 의해서 기록되었다는 것을 백 퍼센트 확증해 주지는 못한다. 다만 그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으며 애제자가 사도 요한일 개연성도 충분히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요한복음 자체는 복음서의 저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다만 요한복음은 그 저자가 애제자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요한복음의 저자를 단순히 애제라고만은 할 수 없다. 요한복음에서 저자에 대해서 가장 명확하게 언급한 것은 21:24이다: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여기서 “그 제자”는 애제자를 말한다. 그런데 이곳에 애제자 외에 “우리”라고 말하는 일군의 또 다른 저자가 등장한다. 애제자와 “우리”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어떤 관계였을까? 앞의 공동체의 상황에서 이해하면 이들은 요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요한복음의 편집에 관여한 일단의 무리라고 할 수 있다. 요한복음이 본래 20:31에서 끝나도록 쓰여진 것이기 때문에 최소한 21장은 이들에 의해서 쓰여졌다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현재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들이 요한복음의 주요 내용의 편집과 수정에 까지 관여했던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의 저자는 한 사람이 아니라 애제자를 비롯하여 요한 공동체 내에 있는 문서의 편집에 관련된 일을 했던 구성원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2)
요한복음의 저술 장소에 대한 문제는 요한복음의 신학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요한복음을 영지주의의 한 지류 문서로 이해하게 되면 요한복음이 이러한 이단적 사상이 만연해 있던 시리아에서 쓰여졌다고 가정하게 된다. 반면 요한 공동체가 유대인이 압도적으로 많은 환경에 처해있어 아직 회당과의 완전한 분리를 이루지 못한 유대인 신자들의 집단으로 이해하면 요한복음이 저술된 가장 가능성 있는 장소로서 팔레스틴을 떠올리게 된다. 또한 요한복음 사본 중 가장 오래된 파피루스(P52)가 발견된 지역을 중요한 요소로 취급하면 알렉산드리아가 가장 가능성 있는 장소가 된다. 마지막으로, 요한복음이 에베소에서 쓰여졌다는 교회 전승과 요한신학과 바울신학의 접촉점 등을 중요하게 생각하면 에베소가 요한복음의 집필 장소로서 가장 가능성 있는 곳이 된다. 여러 가지 증거들을 고려해 볼 때 에베소가 요한복음의 집필과 가장 관련이 깊은 곳 같다. 하지만 요한복음의 신학이 형성된 장소는 하나 이상의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쉬나켄부르크(R. Schnackenburg)는 이러한 입장을 다음과 같이 적절히 표현하고 있다: “요한 전승은 그 뿌리가 팔레스틴에 있으며, 중간단계로 시리아의 영향을 통과하며, 마지막으로 소아시아(에베소)에 확고한 토대를 마련하는데 여기서 요한 전승은 확고하게 확립된 전승이 되었고 최종적으로 편집되었다.”(The Gospel of John I, 152).
요한복음이 저작된 시기는 일세기 마지막 십년 어간으로 보는 것이 학자들의 대체적인 의견이다. 19세기말과 20세기 초반에는 요한복음의 저작연대를 이세기 중후반까지로 잡는 경향성이 있었으나 이 세기 초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요한복음의 일부(18:31-33, 37-38)를 포함하는 파피루스(P52)가 이집트에서 발견됨으로써 요한복음이 이집트에까지 전해진 기간 등을 감안하면 요한복음의 저작 연대를 일세기 내로 잡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또한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말씀과 신학이 공관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말씀과 신학에 비해 전반적으로 더 깊이 숙고한 형태인 것을 감안하면 요한복음의 저작연대를 90년대로 보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4. 요한복음의 기원
4.1. 공관복음과의 관계
요한복음은 예수의 공생애와 가르침으로 시작하여 그의 수난과 부활로 끝나며 이러한 이야기들이 잘 정돈되어 있다는 면에서 외경 복음서들보다는 공관복음에 더 가깝다. 하지만 요한복음은 그 스타일과 내용에서 공관복음과는 구별된다. 양자의 주요한 내용상의 차이점을 요약하여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의 공생에는 3년 여간(cf. 2:13; 6:4; 11:55) 주로 예루살렘을 무대로 해서 이루어지는데 반해, 공관복음이 그리는 예수의 공생애는 1년 이내이고 그것도 주로 갈릴리를 무대로 해서 이루어진다. 공관복음에서 예수가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은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였다. 둘째, 요한복음의 주제는 영생인데 반해, 공관복음에서 예수의 가르침의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또한 예수의 가르침의 방법도 공관복음에서는 주로 비유의 형태라면 요한복음에서는 한 사람과의 긴 대화 혹은 강화의 형태로 되어있다. 셋째, 요한복음의 예수상은 각 공관복음서가 그리는 예수상과 상당한 정도로 차이가 있다. 공관복음은 역사적 예수를 요한복음은 신앙의 그리스도만을 강조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하여 이해하는 것이나 요한복음의 예수상은 공관복음서에 비해 그 신성과 영광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요한복음의 “표적”은 예수의 신성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또한 요한복음의 예수는 “나는...이다”(evgw, eivmi)라는 신현현 문구를 통해 예수의 신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면 이러한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의 차이점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이 세기에 벌써 이러한 문제를 인식한 클레멘트는 공관복음서는 예수의 말씀의 역사적 기록에 충실한 육적인 복음서였다면 요한복음은 그 의미에 집중한 ‘영적인 복음서’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에 의하면 공관복음을 알고 있던 요한복음 저자는 그 내용을 반복하지 않고 예수 말씀의 의미를 중심으로 한 복음서를 썼다는 것이다. 클레멘트 이후로 학자들은 요한복음 저자가 공관복음을 알고 있었다고 믿어왔다. 그런데 20세기에 들어와 이러한 전제가 가드너-스미스(Percival Gardner-Smith)의 John and the Synoptic Gospels(1938)라는 연구서에 의해 무너졌다. 그는 위의 책에서 요한복음 전승이 공관복음 전승과는 독립된 것이라는 것을 설득력 있게 논증했다. 다드(C. H. Dodd)와 불트만(R. Bultmann)과 브라운(R. E. Brown) 등 저명한 요한신학 전문가들이 가드너-스미스의 제안을 따라갔고 아직까지도 대다수의 학자들이 이를 받아들이고 있다. 다만 최근 10여년 사이 요한복음이 공관복음-최소한 마가복음 혹은 누가복음-을 알았을 것이라는 주장이 다시 대두되기 시작했다. 요한복음의 구조가 마가복음의 기본구조를 따르고 있다는 것과 수난 사화에서의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의 일치점을 볼 때 요한복음 저자는 최소한 공관복음을 문서로는 몰랐을 지라도 공관복음에 대한 구전 전승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4.2. 자료들
요한복음 저자가 공관복음을 자료로 사용하지 않았다면 그는 어떤 자료를 사용하였을까? 이 점에 관해서는 불트만의 이론을 중심으로 여러 논의가 이루어져왔다. 불트만은 요한복음이 ‘표적 자료’와 ‘계시자료’와 수난 기사를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표적 자료는 예수의 기적자료집에서 취한 것으로 신적인 기적을 행하는 자를 믿었던 세계에서 예수를 이러한 타입의 인물로 소개하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자료라 한다. 포트나(R. T. Fortna)는 한 걸을 더 나아가 표적 자료가 한 묶음으로 된 독립된 복음서(‘표적 복음서’)로 존재했었다고 까지 주장한다. 계시 자료는 본래 아람어 시로 된 자료로서 계시자가 하늘에서 내려온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것을 헬라어로 번역하여 저자가 예수의 설교에 맞게 수정한 것이라 한다. 예수의 수난과 부활 기사는 공관복음 전승에서 취한 것이라 한다. 현재 요한복음의 자료로서 요한 공동체가 자체의 수난사화 자료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널리 인정된다. 하지만 요한복음의 특성대로 요한복음 저자는 이 자료를 자신의 신학에 부합하도록 철저하게 자신의 언어적 표현으로 바꾸었기 때문에 현재의 완성된 본문에서 자료를 정확히 분류해 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불트만의 ‘표적 자료’와 ‘계시자료’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많은 논란이 있었고 대체로 불트만의 이론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특히 쉬바이처(E. Schweizer)와 룩슈툴(E. Ruckstuhl)은 불트만이 제시한 세 자료를 연구한 결과 이 세 자료의 문체는 기본적으로 일치를 이루고 있으며, 따라서 복음서 저자 자신이 이 세 부분을 다 쓴 것이라고 주장한다.
4.3. 문학적 일치
요한복음은 문학적 일치를 이루고 있는가? 불트만은 현재의 본문대로의 요한복음은 순서가 잘못된 것이라 하여 순서를 재구성한 상태의 요한복음 주석을 내놓았다. 그는 요한복음 5장과 6장을 비롯한 여러 부분의 환치를 주장함과 아울러 현재의 본문은 원래의 복음서에 교권적 편집자가 요한복음의 신학이 다른 기독교 분파와 어울릴 수 있도록 편집한 것이라 한다. 먼저, 요한복음의 5장과 6장을 환치시키면 예수 사역의 장소가 자연스러워지는 문제는 해결할 수 있지만(4장: 갈릴리; 6장: 갈릴리: 5장: 예루살렘) 5장과 7장의 내용의 연결이 매끄럽지 않게 되는 또 하나의 난점을 낳는다. 그리고 그 어떤 사본에도 이러게 환치된 형태가 없다는 것은 환치론이 현대인의 마인드에서 나온 순전히 상상의 산물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다음으로, 요한복음 20:30-31에서 복음서는 결론에 이르렀기 때문에 21장은 요한복음이 20장까지 완성된 후에 첨가된 것이 확실해 보인다. 다만 누가 이것을 첨가했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복음서 저자가 했을 수도 있고 제 3의 편집자가 했을 수도 있다. 21장이 그 이전의 본문에 비해 보다 목회적, 교회론적 상황이 설정된 것으로 보아 21장은 복음서 저자가 아닌 요한 학파의 일원에 의해서 쓰여졌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불트만의 주장대로 21장 저자가 복음서의 논지를 해치는데 까지 가위질을 했다는 것은 지나치게 현대적인 발상이다. 고대의 어떤 학파의 일원은 어떤 글에서 그 설립자의 의도를 대폭 수정하기 보다는 그 의도를 살리는 작업을 하는데 더 익숙했기 때문이다. 또 요한복음이 프롤로그로 시작하고 있기 때문에(1:1-18) 21장을 에필로그로 보면 에필로그는 본래 저자에 의해서 계획되었던 것이 된다. 이 경우에 에필로그 저자를 본문 저자와 동일 인물로 보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여기서 해결해야 할 또 한 가지 중요한 문제는 요한복음 고별설교의 층에 관한 것이다. 요한복음 14:31에서 예수의 고별설교가 끝나고 18:1에 연결되는 것이 자연스럽고 요한복음 15-16장에서 보혜사 본문을 비롯한 여러 내용들이 14장의 내용의 반복이기 때문에 15-17장은 후대의 첨가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요한 연구가들은 15-17장 부분이 본래의 고별 설교에 첨가된 부분이라고 본다. 문제는 이것이 후대의 첨가라면 예수의 고별설교는 여러 개(farewell discourses)가 되는데 이것이 두개(13-14장; 15-16장)냐 혹은 세 개(13:31-14:31; 15:1-16:4a; 16:4b-33)냐 하는 것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후에 첨가된 것이 본래의 고별설교와 맥을 같이 하고 있는지 아니면 다른 신학적 견지 혹은 공동체의 다른 정황을 반영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4.4. 종교사적 배경
요한복음은 신약의 다른 부분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언어와 개념들을 사용한다. 빛과 어두움의 이원론, 인격화된 말씀, 올라감과 내려옴의 기독론, 독특한 영생의 개념 등은 요한만의 언어 혹은 개념이다. 이러한 용례는 당연히 그 언어와 개념들의 종교사적 기원 혹은 배경을 찾는 물음을 낳았다. 그동안 요한복음의 종교사적 배경에 대한 주요 논의 중 하나로서 요한복음 서문의 ‘로고스’ 개념에 대한 토론을 보면 흥미롭다. 첫째, 요한복음 서문에 인격적 개념으로 사용된 ‘로고스’는 필로가 스토아 철학과 플라톤적 개념을 결합시켜 이해한 신적 중재자 ‘로고스’ 개념과 유사하다는 제안이 있었다. 둘째, 인격화된 개념과 창조의 관여자라는 면에서 요한복음 서문의 ‘로고스’는 지혜문학에 나타난 ‘소피아’의 기능과 역할과 매우 비슷하다(cf. 잠 8:22-31). 셋째, 요한복음 서문의 “태초에 말씀(로고스)이 계시니라”는 구절은 창세기 1장 l절의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한 구절을 연상케 한다. 여기서 요한복음 서문의 ‘로고스’ 개념의 기원으로 위의 배경 중 하나만을 고집하는 것은 적절치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저자가 살았던 시대에는 헬라사상과 유대사상이 상호 영향을 주고받았던 시기로 양자를 완벽하게 구별해 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오히려 요한복음의 사상적 배경은 다양했던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요한복음 저자는 아마도 폭넓은 독자층을 염두에 두고 헬라적인 배경의 독자들과 유대적인 독자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로고스’라는 개념을 도입했을 것이다.
요한복음의 종교사적 배경에 관해서 가장 많은 논란이 되었던 영역은 쿰란 문서와 영지주의에 대한 것이었다. 20세기 초반에는 요한복음의 종교사적 배경으로 가장 많은 논의가 이루어진 것은 요한복음과 영지주의의 관계이다. 불트만은 영지주의의 일파인 만다교의 구속자 신화를 요한복음의 종교사적 배경으로 설정했다. 그런데 문제점은 여기서 제시된 만다교 문서는 분명히 요한복음이 기록된 이후에 생겨난 것이라는 점이다. 문서 이전 단계의 구전 단계에서의 만다교의 존재와 이것의 요한복음에 대한 사상적 영향을 고려할 수 있지만 개연성 이상은 주장하기 힘들다. 그리고 불트만이 주장하는 만다교 구속자 신화로 요한복음을 읽는 것도 정당화되기 어렵다. 불트만은 요 10:1-18과 15:1-17을 영지주의적 배경에서 읽지만 위의 본문은 후대의 작품인 만다교 문서에서 보다는 요한복음 사상의 기본적 배경인 구약에서 그 아이디어를 빌려왔다고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쿰란 문서가 발견된 이후 쿰란 문서와 요한복음사이의 사상적, 언어적 유사성에 대한 연구가 많이 이루어져 왔다. 이원론 사상, 세상에 대한 저항 사상, 형재애 개념의 유사성에서부터 ‘일치’로서의 공동체의 자의식, 성령 개념 등에 이르기까지 많은 유사점들이 발견되었다. 최근에 찰스월스(J. Charlesworth)는 요한 공동체가 역사적으로 쿰란 공동체에서 유래했다고 까지 주장하기까지 이른다. 그러나 쿰란문서와 요한문서 사이의 사상적, 언어적 유사성은 전자의 후자에 대한 ‘영향’(influence)이라는 말보다는 상호 동시대의 유대교적 종교적 ‘배경’(milieu)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보는 것이 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다만 쿰란 문서가 발견됨으로써 그동안 요한복음의 이원론이 영지주의적 이원론 등과 유사한 것으로 설명되던 것이 이제는 유대교적 배경에 있는 쿰란 문서와의 유사성으로 설명된다는데 있다. 결국, 그 언어적, 사상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메시야를 미래에 대망했던 유대교의 섹트 그룹이었던 쿰란 공동체의 사상과 예수를 현세에 임한 메시야로 믿었던 요한 공동체 사이에는 그 근본적 사상에 있어서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요한복음의 가장 중요한 배경은 구약성서이다. 요한복음은 마태복음과는 달리 구약을 직접 인용하는 경우는 비교적 적지만(1:23, 51; 2:17; 6:31; 10:34; 12:13, 15, 27, 38, 40; 12:40; 13:18; 15:25; 19:24, 36, 37) 구약의 개념과 매우 친숙했으며 이것을 자기의 언어로 적절히 풀어내고 있다. 요한복음은 구약의 ‘인자’, 모세의 역할의 완성,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로서의 목자와 양, 포도나무와 가지 등의 개념을 직접 인용보다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요한복음의 구약 인용의 또 다른 특이점은 구약 인용이 주로 기독론에 초점이 맞추어져있고 그것도 수난사화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직접 인용이든 간접적인 개념이 인용이든, 요한복음은 구약의 사상과 개념에 매우 친숙하다.
5. 구조와 내용
요한복음의 구조는 비교적 명확하다. 표적의 책(1:19-12:50)과 영광의 책(13-20장)을 본론으로 하고 프롤로그(1:1-18)와 에필로그(21장)가 그것을 감싸고 있는 구조이다. 학자들 사이에 가장 널리 인정되는 요한복음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I. 프롤로그(1:1-18)
1. 세상의 창조자이신 로고스(1-8절) 2. 로고스에 대한 반응과 결과(9-13절) 3. 교회를 위한 로고스(14-18절)
II. 표적의 책(1:19-12:50)
1. 예수 소개하기(1:19-51) 1) 세례 요한의 증언 1: “나는 메시아가 아니다”(19-28절) 2) 세례 요한의 증언 2: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다”(29-34절) 3) 첫 제자들의 고백: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35-42절) 4) 예수의 자기 계시: “나는 인자다”(43-51절)
2. 예수의 표적과 계시(2:1-22) 1) 새 포도주 예수(1-11절) 2) 새 성전 예수(12-22절)
3. 예수와 사람들과의 호의적 만남(2:23-4:54) 1) 예수와 니고데모(2:23-3:21) 2) 예수와 세례 요한(3:22-36) 3)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4:1-41) 4) 예수와 왕의 신하(4:43-54)
4. 유대인들과 대충돌하는 예수(5:1-11:47) 1) 안식일의 주인 예수(5:1-47) 2) 생명의 떡 예수(6:1-71) 3) 영생수의 근원 예수(7:1-52) 4) 음행 중에 현장에서 잡힌 여인과 예수(7:53-8:11) 5) 세상의 빛 예수(8:12-59) 6) 시각 장애인 치유자 예수(9:1-41) 7) 선한 목자 예수(10:1-42)
5. 영광의 시간을 향하여 전진하는 예수(11:1-12:50) 1)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11:1-44) 2) 예수의 죽음 예시(11:45-57) 3) 향유를 붓는 마리아(12:1-8) 4) 나사로를 죽일 모의(12:9-11) 5)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12:12-19) 6) 헬라인들이 예수께 옴(12:20-36a) 7) 사람들의 불신(12:36a-43) 8) 예수 메시지 요약(12:44-50)
III. 영광의 책(13:1-20:31)
1. 최후의 만찬장의 예수(13:1-30)
2. 예수의 고별 설교(13:31-16:33) 1) 고별 설교 1(13:31-14:31) 2) 고별 설교 2(15:1-16:4a) 3) 고별 설교 3(16:4b-33)
3. 예수의 고별 기도(17:1-26) 1) 예수와 하나님(1-5절) 2) 예수와 제자들(6-19절) 3) 예수와 미래의 제자 공동체(20-23절) 4) 교회의 미래와 완성(24-26절)
4. 예수의 수난(18:1-19:42) 1) 예수의 체포(18:1-11) 2) 예수의 심문 받음(18:12-27) 3) 예수의 왕국(18:28-19:16) 4) 예수의 대관식(19:17-37) 5) 예수의 장례(19:38-42)
5. 예수의 부활(20:1-31) 1) 빈 무덤 발견기사(1-18절) a. 애제자와 베드로(1-10절) b. 막달라 마리아(11-18절) 2) 예수의 부활 후 현현(19-29절) a. 요한에 따른 성령 강림(19-23절) b. 의심 많은 도마?(24-29절)
6. 복음서의 목적(20:30-31)
IV. 에필로그 (21:1-25)
1. 부활 후 디베랴 바닷가에 나타난 예수(1-14절)
2. 부활한 예수를 목도한 자의 사명(15-24절) 1) 목양의 사명(15-19절) 2) 베드로와 애제자 각각의 사명(20-24절)
3. 결말 (25절) |
6. 기록 목적
요한복음 저자가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 혹은 동인은 무엇이었을까? 어떤 학자는 요한복음에 세례 요한을 독립적으로 중요성이 있는 인물이 아니라 단순히 예수에 대해서 증언하는 자로 묘사한 것으로 보아(cf. 1:8-9; 1:20, 30; 3:28, 30; 10:41) 요한복음은 세례 요한 추종 파들을 억압하기 위해서 기록되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요한복음에서 세례 요한을 예수에 대한 증거자로 제한하는 것은 세례 요한 파에 대한 억압에서라기보다는 요한복음 저자의 기독론적 경향성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요한복음 저자는 세례 요한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지 않다. 세례요한은 요한복음에서 애제자를 제외하고 예수 부활 이전에 예수의 정체를 알고 있던 유일한 사람이다. 또 요한복음 전체를 이 모티브로 해석하기에는 그에 관한 본문의 증거가 충분치 못하다.
또 하나의 중요한 주장은 요한복음이 유대인들(혹은 바리새인들)에 대한 혐오감을 바탕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이다(cf. 5:46-47; 7:19, 24; 8:15, 24, 34, 41, 44, 47, 55). 특히 최근에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유대인들에 대한 반감은 예수 시대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요한 공동체가 유대교 회당으로부터 축출되면서, 이에서 나온 쓰디쓴 경험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주장되었다. 하지만 이 주장에도 약점이 있다. 요한복음에 “유대인들”이라는 단어가 나쁜 뜻으로 쓰이는 경우도 있지만 긍정적으로 쓰이는 경우도 많다(cf. 4:22; 11:19, 31, 33, 36, 45; 12:9, 11). 오히려 요한복음에 부정적으로 언급된 “유대인들”은 주로 유대인 당국자들로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기독론적 교리를 반대하는 불신앙의 집단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들은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는 “세상”을 대표한다.
마지막으로, 요한복음은 기독교 내부 집단과의 경쟁 관계에서 타 집단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쓰여졌다는 주장이 있다. 요한복음 본문 안에 베드로와 애제자가 각각 상징적인 제자로 등장하여 경쟁하고 협조하는 모습을 통해 이 상황을 유추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요한 서신에는 이러한 기독교 내부 여러 파 간의 문제가 발생한 예를 볼 수 있기 때문에(요삼 9-10) 이러한 추측은 상당히 개연성이 있는 것으로 보여 진다. 또 요한복음 일부 구절은 이러한 관점으로 읽을 때 그 의미가 더 분명해진다(cf. 20:1-10). 하지만 요한복음 전체를 이 목적으로 썼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마도 요한복음 기록 당시 저자의 생각 속에는 이러한 의식이 어느 정도 있었을 것이고 이러한 의식이 특정 본문에 어느 정도 반영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21장 30-31절에서 그 어느 복음서보다도 자신의 책의 기록 목적을 분명히 밝힌 요한의 진술이 정확하고 진실하다고 본다. 요한은 독자들로 하여금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신앙을 갖게 하고, 또 그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하여금 더 풍성한 신앙에 이르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 복음서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제시된 것들은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이라기보다는 기록할 당시의 내외적 정황(context)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세례 요한파가 아직도 남아있어 그가 메시아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상황에서, 또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을 거부하는 유대인의 회당과 아직도 대결하는 상황에서, 또 다른 예수 추종자들과 누가 과연 제자도를 가장 장 실천하고 있는가 하고 경쟁하는 상황에서, 요한은 제자들의 신앙을 함양하고 나아가 그들의 신앙을 통해 선교를 이루기 위해 이 복음서를 기록한 것이다.
7. 주요 신학적 주제
7.1. 기독론
복음서가 예수의 삶과 교훈에 관한 내용을 기록한 것이라면 당연히 복음서의 중심 관심사는 기독론이다. 복음서 중에서도 특히 요한복음은 기독론적 집중이 강하다. 요한에게 있어 종말론, 성령론, 구원론 등이 모두 기독론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또한 요한 기독론은 예수의 신성에 그 초점이 맞추어졌다는 면에서 공관복음의 기독론과 비교된다. 요한 기독론의 독특한 것 중의 하나는 예수가 “나는...이다”라는 신현현 문구를 통해 자신의 본질을 설명하는 단어들을 도입한 것이다. 예수는 생명의 떡, 선한목자, 부활, 길, 진리, 생명 참 포도나무이다. 그 외 요한복음에는 여러 기독론적 모티브가 등장한다. 육화된 말씀, 인자, 하나님의 아들, 인격화된 지혜, 모세와 같은 선지자, 제자들의 보혜사 등이 대표적인 것들이다.
여러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요한 기독론의 중심은 무엇보다도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계시된 아들로서의 예수의 위치에 있다. 요한복음에서 아버지라는 단어는 138회 나오는데 아버지(6:42), 조상(4:12, 29; 6:31, 49, 58; 7:22) 혹은 자신의 영적 출처(8:38f.)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거의 대부분은 예수의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에 대해서 쓰였다. 특히 요한복음은 하나님을 “하나님”이라는 명칭보다도 “아버지”라는 명칭으로 더 많이 사용한다. 요한복음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다(10:30; 17:20-23). 이것의 의미는 (i) 아들의 기능과 아버지의 기능은 하나(5:17-18, 43; 14:9-10), (ii) 아들을 섬기는 것과 아버지를 섬기는 것은 하나(5:23; 8:19; 14:7, 21), (iii) 아버지의 영광이 아들에게 나타남(1:14; 2:11, 18; 4:48, 53; 5:36; 6:32, 43; 8:21; 21:19), 아들과 아버지의 친밀성(1:14; 10:15, 38; 17:20-23)이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은 자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대리자, 대표자로서, 아버지께 순종(4:34; 5:30; 14:31)과 공경(8:49)과 영화롭게 함(17:1)을 하고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한다(3:35; 17:5). 요한복음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는 유일하고 독특한 관계이다. 요한복음에서 “아들”, “독생자” 등의 단어는 예수에게만 사용되고 신자의 하나님의 아들됨은 “자녀”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7.2. 종말론
공관복음서의 주제가 하나님의 나라라면 요한복음의 주제는 영생이다.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하나님의 나라는 주로 종말론적 축복(마 7:14; 막 9:43, 45; 눅 10:25)인데 반해 요한복음도 미래적 종말론을 기록하고 있으나(3:36; 12:25) 그 강조점은 신자가 영생을 이 땅에서 맛볼 수 있다는데 있다(6:33; 10:10; 17:3). 또한 영생을 경험한 신자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며(1:12; cf. 요일 3:1, 2, 10; 5:2) 그 특권을 현세에서 누릴 수 있게 된다.
위와 같은 영생 개념은 요한복음의 독특한 종말론을 이끌어낸다. 요한복음에는 미래적 종말론의 요소(5:28-29; 6:39-40, 44, 54; 12:48; 14:3; 21:21-23)와 현재적(혹은 실현된) 종말론의 요소(1:12; 3:18-19; 5:24; 11:25; 12:31)가 공존한다. 하지만 그 무게 중심은 미래적인 것보다 현재적인 것에 쏠려있다. 바울에게 있어서도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은 현재에 주어지는 것이지만(롬 8:14; 갈 4:6-7) 그것이 미래에 완성될 것이라는 것에 그 강조점이 있다(롬 8:18f.). 그러나 요한복음에는 신약의 어느 부분에서 보다도 구원의 현재성에 그 초점을 두고 있다. 요한에게 있어서 종말은 현재에 경험되는 그 무엇이다.
7.3. 성령론
요한의 현재적 종말론에 대한 집중은 요한 공동체의 성령 체험과 연관되어 있다. 요한 공동체에게 있어서 성령은 실제로 신자가 체험하는 영이고(7:37-39) 교회의 예배 가운에 현존하며(4:24), 무엇보다도 신자가 될 때부터 신자의 삶에 관여하는 영이다(3:5). 더 나아가, 성령은 기름부음을 통해 신자의 인도자의 역할로서 계속 수행함을 통해 공동체에 현존하는 영이다(요일 2:27). 요한 공동체가 성령 체험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공동체라고 하는 것은 사복음서중 요한복음만이 ‘성령강림 사건’을 기록했다는 데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예수는 부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 선교의 사명을 부여하면서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해 “성령을 받으라”고 한다(20:19-23). 이것은 요한복음에 일관되게 예언되었던 것으로(7:37-39), 고별설교에서 좀 더 구체화되었고, 결국 예수 부활 후 “성령을 받으라”는 명령으로 성취된 것이다. 비록 사도행전에 기록된 성령강림사건(2:1f.)이 역사적 사실에는 더 가까울지 모르나 요한신학에 의하면 성령의 강림은 이미 예수의 부활로 인해 시작된 것이다. 이것은 요한 공동체의 실제적, 현재적 성령체험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7.4. 교회론
요한복음의 교회론은 20세기 후반 요한신학 연구에 있어서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킨 주제였다. 먼저, 요한복음에 교회론이 존재하는가? 요한복음에는 교회(evkklhsi,a)라는 단어가 한번도 나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혹은 새 이스라엘 같은 초대교회에서 일반적으로 쓰던 교회론적 용어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한은 자기 나름대로의 독특한 용어와 사상으로 그의 교회론을 전개한다고 할 수 있다. 요한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는 ‘목자와 양’(10:1-8), ‘포도나무와 가지’(15:1-7) 등의 이미지를 이용하여 새 하나님의 백성을 그리고 있으며, 제자들의 공동체(8:31; 13:35; 14:12; 15:5; 20:19-23), 하나님의 자녀(1:12; 11:52), 성령 공동체의 모임(14:6-7, 25-26; 15:26; 16:7-11, 12-15) 등으로 기독교 공동체를 표현하고 있다.
요한복음에 교회론이 존재한다면 그 특징은 무엇인가? 요한 교회론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교회론이 철저하게 그리스도 중심적이라는데 있다. 요한복음에 사용된 모든 교회론적 이미지는 그 핵심이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목자와 양’과 ‘포도나무와 가지’의 이미지를 예로 들면, 이 두 이미지는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상징하던 것이었는데 요한복음에서는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으로 쓰인다. 공관복음에도 이러한 이미지가 나오지만(마 18:12-14; 눅 15:3-7; 막 12:1-11 병행구절) 요한복음에서처럼 이 구절들이 예수에게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않다. 구약과 공관복음에서 포도원이 이스라엘을 상징한다면,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가 참 이스라엘이다. 다시 말해 교회를 형성하는 구성요소로서 예수 자신이 필요충분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예수가 곧 교회인 것이다. 신자는 목자의 양과 포도나무 가지로서 교회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 중심적 교회상은 바울의 몸 교회론(고전 12:12-27)에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바울은 그리스도 중심성에 있어서 요한만큼 철저하지 않다. 요한의 이미지에서는 예수 자신이 곧 교회인데 반해, 바울은 그리스도가 머리로서 몸의 지체와 함께 교회를 형성한다.
요한 교회론의 두 번째 특징은 그리스도와 신자와의 개인적인 관계를 중요시 한다는데 있다. 목자와 양은 ‘알다’(ginw,skw)라는 동사로 상호간의 친밀한 관계를 나타낸다. 목자와 양의 관계는 하나님이 아들 예수를 알고 예수가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근원할 정도로 친밀하다. 그런데 이러한 관계는 목자와 하나의 양과 개인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그리스도와 신자 개인 간의 친밀한 관계를 중요시하는 요한의 교회론적 이미지는 그리스도와 신자간의 수직적 관계를 중요하게 취급하는 것이다. 이것 또한 바울의 몸 교회상과 비교하면 그 특징이 분명해진다. 바울의 몸 이미지의 관심은 몸의 지체 간의 관계, 즉 수평적 관계이다(고전 12:12-27). 이에 반해 요한의 포도나무와 가지 이미지는 ‘서로 사랑’의 문맥 속에 위치하여 신도 상호간의 수평적 관계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예수와 신자 간의 상호내재에 주 관심을 둠으로써 수직적 관계에 그 초점이 있다.
요한 교회론의 세 번째 두드러진 특징은 요한의 민주적 교회 직제에 대한 이해에 나타난다. 요한복음에는 후대에 첨가된 21장을 제외하고는 어떤 교직에 대한 언급도 없다. 누가에 있어서 새 이스라엘 백성을 형성하는 축으로서의 사도라는 용어도 요한복음에는 사용되지 않는다. “십이”[제자]라는 단어는 언급되어 있지만(6:67, 70, 71; 20:24) 이들은 사도도 아니고 특권 계층도 아니며 제자로 선호되어 호칭된다. 여자가 명시적으로 제자라고 언급된 적은 없지만 사마리아 여인(4:7-42), 막달라 마리아(19:25; 20:1-2, 11-18), 마르다(11:1-44), 베다니의 마리아(12:1-8), 예수의 어머니(2:1-11; 19:25-27) 등의 여인들은 신앙고백과 선교 등 남자 제자들의 역할을 한다. 한마디로 말해 요한복음이 이해하는 직제는 근본적으로 기독교 공동체 안에는 어떤 지배 그룹이나 특권층이 없다. 이러한 교직에 대한 이해는 요한복음과 동시대에 쓰인 문서들에 나타난 교직에 대한 이해와 배치되는 것이다. 목회서신에 나타난 교직은 감독, 장로, 집사 등이 어는 정도 기구적인 모습을 띤다. 특히 이세기 초반 문서인 이그나시우스의 편지에는 이러한 것들이 극단화되어 나타나는데, 요한복음에서 교회가 그리스도와 동일시된다면, 이그나시우스 편지에서는 교회가 감독과 동일시된다.
제 2장 프롤로그: 로고스 찬양 서시(1:1-18)
1. 내용 구성
요한복음은 한 편의 아름다운 그리스도 찬양시인 프롤로그(서시)로 시작 한다(1:1-18; cf. 빌 2:6-11; 골 1:15-20; 딤전 3:16). 요한복음 프롤로그는 신약성서의 주요 구절 중에서도 아마도 가장 많이 연구되어 온 부분일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발표되는 신약 관계 논문을 요약하여 소개하는 New Testament Abstracts라는 저널을 보면 지금도 요한복음 프롤로그에 대한 논문과 전문서적이 끊임없이 산출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국내 학자들에 의해서도 요한복음 본문 중에서 가장 많이 연구된 곳도 바로 프롤로그이다. 이렇게 요한복음 프롤로그가 계속해서 국내외의 여러 학자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이 본문이 “성서에서 가장 심오한 구절 중하나”이기 때문일 것이다(R. Alan Culpepper, The Gospel and the Letters of John, 110).
요한복음 서시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번째 부분(1-8절)을 ‘세상을 향한 로고스’라고 한다면 마지막 부분(14-18절)은 ‘교회를 향한 로고스’라고 할 수 있다. 중간부분은 교회론적 혹은 구원론적 측면을 담고 있다(9-13절). 전통적으로는 로고스의 성육신과 성육신에 대한 신자의 체험을 말한 14절을 포함한 마지막 부분에 요한복음 프롤로그 핵심 사상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것은 역사비평을 통해서 재구성한 원시(原詩, Vorlage)가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현재의 본문에서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을 말하는 12-13절을 포함하는 중간 부분에 그 핵심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앞부분은 창조주로서의 로고스의 사역이 펼쳐지고 뒤 부분에서는 로고스의 사역이 그를 믿는 교회 공동체를 위한 것으로 구체적으로 표현되는데 중간 부분은 그 피봇 역할을 하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자는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요한복음의 핵심 메시지인 것이다(요 1:12; 3:16; 20:30).
여기서 한 가지 논의해 볼 수 있는 것은 요한복음 프롤로그와 본문과의 관계이다. 먼저, 대부분의 학자들은 프롤로그가 복음서의 서론(introduction)이 된다는데 동의한다. 그러나 어떠한 의미에서 프롤로그가 본문을 인도하는 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양하다. 프롤로그가 복음서의 요약인가(summary)? 아니면 이것이 복음서 이해의 열쇠인가(key)? 아니면 헬라 독자들은 위한 해설인가(note)? 아니면 복음서가 서문의 핵심 주제에 대한 주해인가(commentary)? 혹은 서문이 예수 이해를 위한 렌즈인가(lens)? 요한복음 프롤로그가 복음서의 정확한 요약도 아니며 단지 헬라 독자들을 위한 해설도 아니다. 그러나 프롤로그의 논지는 복음서의 핵심 논지와 상응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바레트의 말을 빌리면 요한복음 프롤로그는 “복음서의 주 논지에 대한 철학적 원리(rationale)이다.”(C. K. Barrett, The Prologue of St John's Gospel, 6). 요한복음 본문은 프롤로그의 핵심 내용을 이야기 형식으로 전개한 것이다. 그래서 프롤로그의 핵심 내용(1:12-13)은 요한복음의 기록된 목적(20:30-31)과 상응한다.
2. 세상의 창조자이신 로고스(1-8절)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이 책 제목으로 시작하고(마 1:1; 막 1:1) 누가복음이 책 서문으로 시작한다면(눅 1:1-4), 요한복음은 서시로 시작한다(요 1:1-18). 요한복음 서시는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그 말씀이 바로 하나님이었다”(1절) 라는 말로 시작한다. 그 다음 두 절은 이 구절에 대한 요약 내지는 주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이 인격체가 처음부터 하나님과 함께 있던 분이라는 것이 다시 한번 강조되고(2절), 이 분이 바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라고 설명한다(3절). 만물이 이 분을 통해서 창조되었고, 창조된 것 중에 그 어떤 것도 이 분을 통하지 않고는 존재하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결국 여기서 요한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동참한 신성을 가진 분으로, 하나님과는 구분되지만 동질적 신성을 가진 한 인격체를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신약 성서에서 예수를 로고스로 소개한 경우가 이 곳이 유일하기 때문에 그 동안 요한이 어떻게 기독론적 명칭으로 로고스를 사용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그 종교사적 배경을 캐는 작업이 방대하게 이루어져 왔다. 우선 로고스에 대해서 연구해보면 다음과 같은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요한복음 서시에 인격적 개념으로 사용된 로고스는 필로가 스토아 철학과 플라톤적 개념을 결합시켜 이해한 신적 중재자 로고스 개념과 유사하다. 둘째, 인격화된 개념과 창조의 관여자라는 면에서 요한복음 서시의 로고스는 구약성서의 지혜문학에 나타난 인격으로서의 지혜의 기능과 역할과 매우 비슷하다(cf. 잠 8:22-31). 셋째, 그 내용과 동일한 단어의 쓰임새를 볼 때 이것은 창세기 1장 l절과 깊게 관련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구약의 고대 아람어 역본인 탈굼 성서에서는 하나님의 인격을 하나님의 말씀(멤므라)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그 동안 학자들은 위의 배경 중에서 어느 하나가 요한복음이 사용한 로고스와 가장 근접한가를 논의해왔다. 하지만 여기서 요한복음 서시의 로고스 개념의 기원으로 위의 배경 중 어느 하나만을 고집하는 것은 적절치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저자가 살았던 시대에는 헬라사상과 유대사상이 상호 긴밀하게 영향을 주고받았던 시기로 양자를 완벽하게 구별해 내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로고스에 대한 종교사적 배경은 어느 것이 주 배경이든지 간에 복합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요한은 아마도 헬라적인 배경의 독자들과 유대적 배경의 독자 모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로고스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보다 폭넓은 독자층을 아우를 수 있는 개념을 기독론적 명칭으로 사용했을 것이다.
창조자이시고, 신성을 가진 말씀이라는 인격체를 소개한 후 요한은 그 인격체의 본질과 성격을 생명과 빛이라는 메타포를 통해 구체화 시킨다. “그분 속에 생명이 있었고, 그 생명은 인류에게는 빛이었다. 그 빛은 어둠 속을 비추었지만 어둠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4-5절). 생명(혹은 영생)은 요한복음의 주제로서 서시 이후의 본문에서 예수의 가르침 속에 자주 나타나는 용어이다. 이후의 본문에서 생명이 주로 예수를 믿고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는 그 무엇이라면 여기에서의 생명은 먼저 예수 안에 거하는 그 무엇이다. 이 생명은 예수가 소유한 것으로, 이것이야말로 인류의 소망이요 빛이다. 그런데 이 생명이 빛으로서 어둠 속을 비추었지만 어둠은 그것을 깨닫지(혹은 이기지) 못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역에 대한 결과를 말한 것이다. 여기서 카텔라벤(kate,laben)이라는 동사는 두 가지 의미를 다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깨달았다”라는 말로 취하면 어둠에 거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보내신 자로서의 그리스도의 본질을 깨닫지 못했다는 말이 되고, 이것을 “이겼다”라는 의미로 취하면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어둠의 세력인 사탄이 그리스도를 이기지 못했다는 것이 된다. 요한이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은 주 의미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두 가지 의미를 다 포괄하는 것을 의도한 결과였을 것이다.
세상을 위한 창조자이신 말씀에 대해서 소개 하면서 요한은 세례 요한에 관한 내용을 끌어 들인다(6-8절). 그 내용은 요한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지만 그리스도와는 달리 이 사람은 “빛”이 아니고 빛에 대해서 증거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 구절이 없으면 5절에서 9절이 더 매끄럽게 연결되기 때문에 많은 학자들은 15절과 함께 이 부분을 후대에 삽입한 것으로 본다. 그럴 개연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의 내용 자체가 원문이라는 견해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우선, 어떤 글이든 자연스럽다는 것이 원문임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6-8절은 현대 논문에서는 각주로 처리할 수 있는 것이지만 당시에 그러한 글쓰기 방식이 없던 시절에 이 부분은 각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또 최근의 문학비평적 연구들에 따르면 현재의 서시는 교차대구적으로 아름다운 하나의 문학적 일치를 이룬다고 하기 때문에 세례 요한에 대한 것을 굳이 원래의 시에 추가한 것이라고 볼 필요는 없다. 더구나 세례요한이 그리스도인가 하고 생각하던 사람이 많은 상황에서(cf. 요 1:19-28) 예수를 소개하면서 예수와 세례 요한의 관계에 대한 내용은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다.
3. 로고스에 대한 반응과 결과(9-13절)
요한복음 서시의 처음 부분(1-8절)과 마지막 부분(14-18절)이 주로 기독론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부분이라면 중간부분(9-13절)은 기독론적 내용과 함께 교회론적 혹은 구원론적 측면을 담고 있다. 이 부분은 사실 요한복음 전체 내용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다. 유대인과 세상이 예수를 거절한 것(9-11절)과 하나님의 자녀가 예수를 영접한 것(12-13절)은 각각 복음서의 처음 부분(1-12장)과 두 번째 부분(13-21장)에 대한 요약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요한은 앞에서 소개된 세례 요한과 대비되어(6-8절) 예수를 참 빛으로 소개한다. 그는 참 빛으로서 성육신해서 온 세상을 비춘다(9절). 그는 세상에 왔고 세상은 그를 통해서 창조되었지만 세상은 그를 알지 못했다(10절). 10절에서 강조점은 마지막 부분에 있다 (10c절). 즉 “빛이 세상에 왔고, 세상이 그로부터 창조되었고, 세상은 마땅히 그를 인식하고 그를 영접해야만 했다. 그러나(kai.) 세상은 그를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알다(e;gnw)라는 동사는 요한 문헌에서 어떤 사물에 대한 단순한 지적인 인지를 의미하기 보다는 관계적 혹은 경험적인 인식을 말할 때 주로 쓰인다(요 14:7; 17:25 참조). 그래서 요한적인 용법에서는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과 동의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거부의 모티브가 다음 절에도 계속해서 흐르고 있다. “자기 땅에(ta. i;dia) 오매 자기 백성(oi` i;dioi)이 영접치 아니했다.”(11절) 그래서 11절은 10절을 단순히 다른 말로 옮겨 적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즉 “그가 자기의 소유지(세상)에 왔으나 세상은 그를 영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요한복음 4:44에서 이디아(ivdi,a|)라는 단어가 예수와 이스라엘과의 특별한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선택되었던 것처럼, 11절의 이디오스(i;dioς)라는 어근의 단어들도 이와 비슷한 뉘앙스를 띠고 있다. 양 구절 모두에 거부의 모티브가 지배하고 있으며 11절에서 이 단어는 예수의 집(땅)과 그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11절은 단순히 10절의 반복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스라엘에 대한 구속 사역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는 자기 소유의 땅에 도래했지만 자기 백성이 그를 영접하지 않은 것이다.
10-11절은 세상과 이스라엘이 로고스를 거부했다는 모티브가 지배하고 있다면, 12절에서 주 모티브가 급격히 전환되고 있다. 여기에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과 그 결과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다. 세상과 유대인의 불신앙과 예수를 영접한 신자들의 신앙이 분명하게 대조되어 나타난다. 한글 개역 성경에 번역되지 않은 불변화사 “데”(de.)가 12절에서 강력하게 ‘그러나’의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과 11절과 12절에서 불신앙과 신앙을 나타내는 동사로 같은 어원의 동사를 사용한 것(pare,labon; e;labon)은 이러한 대조를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다.
이러한 문맥에서 하나님의 자녀(te,kna qeou/)라는 문구가 등장한다. 그의 백성(oi` i;dioi)이 예수를 거절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일 군의 사람들(o[soi)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데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이다(13절). 자기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을 의미한다면 이와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는 ‘새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하게 된다. 여기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부여하신 특권으로 묘사되어있다. 여기서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에 대해서 구약, 고대 유대교와 바울과는 다르게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의 자녀 됨은 구약이나 고대 유대교에서처럼 선택된 소수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도 아니요, 바울서신에서처럼 하나님의 양자로서의 법률적 용어도 아니다(롬 8:16f. 참조).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가 어떠한 인간적이거나 육체적인 기원을 갖고 있다는 사상에 대해서 세 가지 부정 문구를 통해서 분명하게 밝힌다: “피들의 결합에 의한 것도, 육체의 정욕에 의한 것도 아니며 남편의 의지에 의한 것도 아니다.” 이러한 부정 문구는 그 다음에 나오는 하나님의 자녀의 신적인 기원을 말하는 것을 강화시키기 위해 사용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다.”
4. 교회를 위한 로고스(14-18절)
창조자로서의 로고스와 그의 구속 사역과 그에 대한 두 가지 반응과 결과를 소개한 후 요한은 이제 마지막으로 로고스를 영접한 신앙 공동체에서의 로고스의 역할에 대해서 소개한다. 먼저, 요한은 창조주 로고스가 육체(sa.rx)가 되었다고 선언한다(14a절). 앞에서 로고스는 태초부터 존재하시는 신성을 가지신 분이며 동시에 그 자신이 하나님이시고 이 세계를 창조한 분이라고 소개된 것을 감안하면 이 말씀이 육체가 되었다는 선언한 것은 상당히 충격적인 것이다. 물론 여기서 로고스가 육체가 되었다는 것은 단순히 몸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몸이나 영혼 혹은 사람이라는 단어를 쓸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요한이 굳이 육체라는 단어를 사용한 이유는 예수가 보통 사람과 같은 몸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이 구절 속에는 요한복음이 기록될 당시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하급의 육체로 이 땅에 오실 수 없고, 따라서 이 땅에 육체로 나타난 예수님은 실체가 아니라는 가현설적 이단의 주장을 반박하려는 의도도 담겨져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요한은 성육하신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한다고 기록한다(14b절). 여기서 “거했다”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 “에스케노센”(evskh,nwsen)은 본래 그 원형이 “텐트를 치다”라는 말로서 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성막에 거하는 것을 연상하게 하는 것이다(출 25:8; 29:46). 즉 이 구절은 신성을 가지신 예수께서 사람 가운데 텐트를 치시고 거하셨다는 말이다. 이 구절은 예수의 사랑과 겸비를 보여준다.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신성을 가지신 예수께서 스스로의 결단과 사랑으로 인간 세계 안에 거처를 정하셨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말씀은 빌립보서 2:6-8에 바울이 그린 성육하신 그리스도상과 일치한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 논란이 되는 것은 예수님이 거처를 정하신 “우리”가 누구를 가리키는 가에 있다. 그 동안 이것은 ‘우리 인간들’ 혹은 ‘우리 사도들’을 가리킨다고 흔히 주장되어 왔다. 하지만 본분에서 “우리”라는 단어가 바로 앞 구절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자녀”(12절)를 가리킨다고 볼 때 여기서 “우리”는 ‘우리 신자들’을 말하는 것이다. 특히 뒤이어 14c절에 나오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사람들임을 볼 때, 요한복음에서 불신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신자들’을 가리키는 것은 분명하다. 성육신 하신 예수는 그를 믿는 신자 공동체 안에 거하는 것이다.
또 요한은 신자가 공동체 안에 거하시는 예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14c절). 구약 전통에서 영광은 하나님께 대하여 사용한 말임을 감안할 때(출 33:22; 신 5:22) 이 단어가 예수께 사용되었다는 것은 바로 예수께 이러한 신성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영광은 그의 표적을 통해서(2:11; 11:4, 40), 그리고 그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7:39; 12:16, 23; 13:31-32) 나타난다. 이러한 영광은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로서 받는 것이다(14d절). 또 구약과 다른 것은 이제 그 하나님의 영광을 신자 공동체 안에서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저 멀리만 계시는 하나님이거나 모세 같은 위대한 지도자와만 대화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모든 사람들이 만날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이다. 이제 신자들은 생명의 말씀을 멀리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듣고 보고 주목하고 손으로 만질 수 있다(요일 1:1-2). 그래서 이 예수를 체험한 공동체는 이분이 바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분 (14e절)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로고스의 성육신을 선포한 후 요한은 앞부분에서 했던 것처럼 세례 요한의 역할에 대한 기사를 그 내용상 괄호의 형태로 포함시킨다(15절). 여기서도 세례 요한의 역할은 성육하신 로고스를 증거하는 것이다. 앞 구절에 비해 이것이 특이한 점은 예수에 대해서 증거하는 세례 요한의 직접화법의 말을 포함시킨 것이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누가복음 1-2장의 기록에 따르면 분명히 세례 요한은 예수보다 앞서 태어난 사람이다. 하지만 세례 요한은 인간적인 탄생의 시점이 아니라 본래의 존재의 시점에서 본 것이다. 로고스는 창조 이전부터 존재했던 분임을 볼 때 로고스가 자기보다 시간적으로 앞선 존재이기 때문에 자기보다 뛰어나다고 증언하는 것이다.
로고스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분이라는 구절(14e절)과 연관되어 이제 신자는 그의 충만함으로부터 은혜와 진리를 받아서 “은혜 위에(avnti.) 은혜”가 넘치게 된다(16절). 여기서 ‘안티’(avnti.)라는 전치사가 “대신에”라는 뜻도 있고 뒤 구절도 율법과 은혜를 대조시키는 것을 볼 때 이 단어가 이런 뜻으로 사용되지 않았을 까 하는 추측을 하게 한다. 하지만 뒤 구절에 서로 다른 은혜가 대조된 것이 아니라 은혜와 율법이 대조되어 있고, 로고스의 충만함으로부터 은혜를 받아 누리는 신자는 더욱 더 충만한 은혜가 넘친다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을 볼 때 여기서 ‘안티’는 한글 개역성서의 번역대로 “위에”라는 뜻으로 해석되는 것이 적절하다. 그 다음 구절에서 요한은 은혜라는 단어를 설명하면서 율법과 은혜를 대조시킨다. 이 구절은 복음과 율법을 대조시키는 바울의 편지글들의 용어와 신학을 내포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요한복음 자체에서도 그리스도의 신성을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들의 태도를 율법으로 본다면 이 구절은 요한신학으로도 충분히 이해되는 구절이다. 또 비록 예견된 일이긴 하지만 여기서 비로소 로고스가 예수 그리스도로 확인된다.
요한복음 서시는 수미쌍관법(inclusio)으로 끝난다. 서시 첫 구절이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서 말하는 구절이라면, 마지막 절도 예수가 “독생하신 하나님”이라고 선언한다(18절).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선언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사람들은 이것을 “독생하신 아들”로 고치기도 했다. 첫 절에 비해서 마지막 절에 달라진 점은 첫 절은 선재하신 신성을 가지신 로고스를 말했다면 마지막 구절은 이제 자신을 스스로 계시하시는 아버지 품속에 있는 성자 하나님을 보여준다. 아무도 하나님을 스스로 알 수 없지만 성육하신 로고스인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계시해 주셨다는 것이다.
5. 해석과 적용
5.1. 요한복음 서시는 기독교 교리의 보고이다. 특히 서시에는 예수를 신적 인격인 로고스로 표현할 구절(1-3절; 14절), 예수의 성육신에 대해서 천명한 구절(9-11절; 14절), 예수를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도리를 말하고 있는 구절(12-13절), 삼위일체 교리를 말하고 있는 구절(1, 18절) 등 기독교의 핵심 교리적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서시에 나오는 주요 주제와 개념들은 이하 본문에서 다루어질 것에 대한 길라잡이의 역할을 한다. 요한복음 서시는 이하의 복음서 본문이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철학적 원리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5.2. 요한복음 전체가 그렇기도 하지만 특히 프롤로그의 핵심 주제는 기독론, 즉 예수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예수를 소개하는데 있어 요한은 프롤로그에서 자신이 만들어 낸 용어인 독자(개역: 獨生子), 로고스를 사용하고 있으며 그 후에는 하나님의 어린양, 메시아, 인자 등과 같은 구약적 전통이 있는 용어와 빛, 생명 등과 같은 일반적인 메타포를 사용한다. 이 모든 것을 통해 요한이 말하려고 했던 것은 이것이다. 예수는 단순히 훌륭한 인간 사역자가 아니라 창조주로서 하나님과 동일 본질을 가지고 있는 신성을 가진 존재이며,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성육신하셨으며, 사람들과 하나님과의 유일무이한 중재자다.
5.3. 예수가 누구인가 하는 것 다음으로 프롤로그 중요하게 다루어진 주제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 예수와 올바른 관계를 가질 것인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사람들의 태도는 두 가지다. 하나는 창조주, 메시아로서의 예수를 거부하는 것이고(10-11절), 다른 하나는 그를 영접하고 믿는 것이다(12절). 이러한 주제는 요한복음에서 주요 모티브로 계속된다. 전반부(1-12장)가 거부의 모티브가 주로 작동했다면 후반부(13-20장)에서는 영접의 모티브가 주 모티브이다. 예수를 믿고 영접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이 주어진다(13절). 요한복음에서는 특히 그 특권을 현재에 영생을 소유함으로써 이 땅에서도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신약 성서의 그 어떤 문서에서 보다 강조되어 있다(cf. 요 10:10; 17:3).
5.4. 여기서 다루어진 또 한 가지 중요한 문제는 기독교 공동체에 관한 것이다. 프롤로그의 중심부분(9-13절)은 교회론적 측면을 담고 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하나의 무리를 이룬다는 것이다. 프롤로그 다음에 이어지는 요한보음 1장 마지막 부분도 제자 무리 형성에 대해서 다룬다(35-51절). 이러한 제자들은 무리를 이루어 후에 신앙 공동체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래서 예수는 인자로서 자기 계시를 할 때 나다나엘과 말하면서 그 배후에 있는 신자 공동체를 염두에 두고 “너희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51절). 요한복음 1장에서 이러한 신자 공동체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수는 성육신하여 신자 공동체에 거하며, 오직 이 공동체만이 예수의 영광을 보며,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함으로부터 공급을 받아 충만한 은혜를 더 풍성하게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교회는 다름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자들 곧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의 모임이며(13절),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의 모임이 된다. 교회는 예수를 찾아가 그와 삶을 공유하며 그에게 배우는 공동체인 것이다(39절). 요한복음에서 신자 공동체 내에서 신자 상호 간의 사랑 등 신자들 간의 관계가 전혀 무시된 것은 아니지만 그 지향성은 예수와 신자 각자의 관계에 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오늘의 교회가 물론 신자들 상호 간의 사랑이 없는 것도 문제지만, 신자 공동체의 근원적인 관계인 그리스도와 개별 신자의 관계를 뒤돌아 볼 수 있다.
제 3장 예수 현현(1:19-2:22)
1. 내용 구성
요한복음 서시(1:1-18) 후에 예수에 대한 소개(1:19-51)와 예수의 자기 계시(2:1-22) 부분이 이어진다. 예수는 세례 요한의 증언(1:19-34)과 예수 자신의 첫 제자를 부르는 사역을 통해서 소개된다(1:35-51). 세례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님을 선포하고(1:19-28절), 예수를 어린양이라고 소개함으로써 예수에 대한 증인의 사명을 다한다(1:29-34). 예수는 제자들에게서 메시아로 인식, 고백되고(1:35-42) 스스로를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인자라고 소개한다(1:43-51). 요한복음 2장은 1장에 소개된 예수가 실제로 자신의 본질을 본격적으로 들어내면서 사역을 시작하는 부분이다. 2장에서 예수는 새 이스라엘로서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상징하던 것을 대체하는 인물로 스스로를 계시한다. 이스라엘이 포도원이요 성전이라면 예수는 새 포도주(2:1-12)요, 새 성전(2:13-22)인 것이다.
2. 예수 소개하기(1:19-51)
요한복음 서시 이후의 나머지 1장 부분은 2장에서부터 시작되는 표적을 통한 예수의 자기 계시에 앞서 세례 요한과 예수 자신에 의해서 예수가 소개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2.1. 세례 요한의 증언 1: “나는 메시아가 아니다.”(19-28절)
요한복음에서 서시 이후의 첫 기사는 세례 요한에 대한 것이다. 요한복음 저자는 세례 요한에 대한 내용이 저자가 임의로 판단한 내용이 아니라 첫 문장을 “그리고 이것이 요한의 증언이다”라는 말로 시작함으로써 앞으로 전개될 내용이 세례 요한 자신의 증언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19a절). 세례 요한의 증언이 강조되어 있는 것은 이 문맥의 끝에서도 이 내용이 다시 한번 나오는 것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34절).
세례 요한의 증언은 이런 것이었다.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그들의 대표자들인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보내서 세례 요한의 정체에 대해서 그에게 직접 질문을 한다. “네가 누구냐?”(19절) 이에 대해서 세례 요한은 주저하거나 애매모호하게 말하지 않고, 곧바로 명확하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힌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21절) 예루살렘 대표자들이 불명확하게 질문한 것을 요한이 이렇게 구체적으로 대답한 것은 당시에 요한을 그리스도로 생각했던 사람들이 많은 상황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질문이 무엇인지를 요한은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요한의 답변 이후에 이들은 보다 구체적으로 요한의 정체에 대해서 질문하고 요한은 대답한다(21절).
제사장 등: 그렇다면 무엇이냐? 네가 엘리아냐?
세례 요한: 아니다.
제사장 등: 네가 바로 그 선지자냐?
세례 요한: 아니다.
구약 성서에서 엘리아와 “그 선지자”는 모두 종말론적 인물을 가리킨다. 말라기 4:5에서 엘리아는 메시아가 도래하기 전 그의 도래를 준비할 사자를 말한다(cf. 3:12). 여기서 “그 선지자”는 신명기 18:15-22에 나오는 하나님께서 종말에 일으키기로 약속하신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가리키는 것 같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메시아 일뿐만 아니라 그 선지자이기도 하기 때문에(6:14, 7:40) 세례 요한이 자신이 “그 선지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그런데 공관복음에서는 세례 요한이 엘리아로서의 역할이 있다는 것이 인정되는데 반해(막 1:2l; 마 17:11-13) 요한복음에서 이것이 부정된다. 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구약의 종말론적 예언이 모두 예수의 인격과 사역 속에서 완성된다는 것을 감안하면 요한 신학에서 이러한 내용이 그리 이상한 것은 아니다. 공관복음에서도 세례 요한이 예수께 복종하는 인물이라는 내용이 나오지만(마 3:11; 막 1:7-8; 눅 3:16) 요한복음에서는 그것이 더 강조되어 있다. 요한복음 서시에서 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모든 세례 요한 기사에서 요한은 예수와 독립적으로 어떤 종말론적 사역을 하는 인물이 아니라 예수에 대해서 증언하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요한복음에서 세례 요한의 사역은 예수에 대해서 증언하는 것으로 국한된다.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인 대표자들이 자기들이 가지고 온 모든 질문 사항들을 소진하자 이제 요한에게 스스로 어떤 인물이라고 생각하는지를 묻게 된다. 자기들을 파송한 사람들에게 가지고 갈 말이 있어야 했던 것이다(22절). 이에 대해 세례 요한은 이사야 40:3을 인용하면서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23절)고 대답한다. 본래 이 구절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해서 천사가 할 역할에 대해서 묘사한 것이다. 세례 요한은 바로 이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의 할 일은 그리스도가 와서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이 이것을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마음 밭을 갈아 놓는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가 말씀이라면 자신은 그것을 전달하는 소리인 것이다.
여기에서 갑자기 요한복음 저자는 대표자들을 보낸 사람들이 바리새인이라는 것을 확인 한다(24절). 여기서 저자가 이 내용을 왜 포함시켰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아마도 이것은 이후에 전개되는 예수와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을 예고하는 것일 것이다. 대표자들은 이제 세례 요한의 본질에 관한 질문에서 그의 사역에 관한 질문으로 넘어간다.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찐대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25절) 물론 이 세 인물 중 어느 누구에게도 세례 사역이 있다는 것이 기대되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이 세례를 주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질문자들은 그것에 관한 대답을 요구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 세례 요한은 이 질문 자체에 대해서 대답하기 보다는 자신의 세례 사역을 예수와의 연관성 속에서 설명함으로써 자신의 위치에 대한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26-27절) 요한은 노예에게 부여된 역할을 자신의 역할로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은 예수의 사역을 준비시켜주는 것뿐이지 독립적인 어떤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이러한 모든 일이 구체적으로 일어난 곳이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된 일”(28절)이라고 말함으로써 증언의 확실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2.2. 세례 요한의 증언 2: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다.”(29-34절)
이제 예수의 본질에 대한 세례 요한의 직접 증언이 이어진다(34절). 예수가 자기에게 나오는 것을 보고 요한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외친다(29절). 유대인들에게 양은 가장 중요한 재산이기도 했지만 종교적 희생 제사에 쓰이는 제물이기도 했다. 특히 유월절 어린양은 그 자체가 희생 제물로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양을 희생시킨 피를 집 문 설주에 발라 장자의 죽음을 면하는데 사용되었다. 바울 서신과 공관복음서 공히 예수가 바로 이 유월절 어린양으로서 십자가를 진 것이라는 내용을 기록한다(고전 5:7; 롬 3:25; 막 14:22-25; 막 22:24-23; 26:26-30). 요한도 여기에서 예수를 유월절 희생양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cf. 요 19:14; 19:29).
이어서 세례 요한은 서시에서 이미 말한 것을 반복적으로 말하면서(15절) 예수를 자기보다 앞서 존재한 분으로 자기보다 뛰어난 분이라고 소개한다(30절). 예수가 세례 요한보다 뛰어난 이유는 기본적으로 예수의 선재에 있다는 것이다. 예수가 세례 요한보다 늦게 출생했지만 그의 선재를 인정하는 것은 결국 창조의 동참자로서의 신성을 가진 예수를 인정한 것이 된다. 세례 요한은 본래부터 자기도 예수를 안 것은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세례를 통해 예수를 유대인들에게 소개하는 것이라는 것이 자신의 사명임은 분명하다고 한다(31절). 이어서 세례 요한은 자기가 어떻게 예수를 알게 되었는지를 소개한다. 성령이 하늘에서 비둘기처럼 내려와 예수 위에 머물러 있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그가 바로 성령으로 세례 주는 분임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32-33절). 세례 요한이 물로 세례를 준다면 예수가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분이라는 내용은 사복음서에 모두 나오는 것이다. 요한복음 기사에서 성령으로 세례 준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요한의 물세례는 본질이기 보다는 예표라고 할 수 있고, 예수의 성령 세례에 대한 안내의 성격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오직 예수만이 본질이고 예수만이 이 세례를 줄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례 요한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힘주어 증언한다(34절). 하나님의 아들은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에 대한 대표적인 칭호로서 이곳에 처음 나오는데 여기서는 1:18에 나오는 하나님의 독자를 다른 표현으로 표현한 것일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특별한 아들인 것이다.
2.3. 첫 제자들의 고백: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35-42절)
세례 요한은 이제 자기 제자들에게 예수를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다시 한번 소개하고 이것을 듣고 있던 세례 요한의 두 제자들이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해 예수를 따라 나선다(35-37절). 이것을 보고 예수는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을 향해 제자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무엇을 구하느냐?”(38절) 즉 무엇을 얻으려고, 무슨 목적으로 자기의 제자가 되려하는가 하고 물은 것이다. 이에 대해 두 제자는 “랍비여, 어디에 머물고 계십니까?”(38절)하고 되묻는다. 이 질문 속에는 이미 예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들어있는 것 같다. 이들이 예수의 제자가 되려고 하는 것은 예수의 삶을 배우려 하는 것이다. 이에 예수는 “와 보라”는 말로 이들을 초대하고 이들은 예수가 머물고 있는 곳을 방문하여 그곳에 유하여 결국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39절).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세례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의 제자가 되었던 사람 중 하나인 안드레는 이것을 자신의 형제인 베드로에게 알린다.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40-41절) 여기서 일인칭 단수 동사를 쓰지 않고 복수 동사를 쓴 것은 아마도 익명의 다른 한 제자를 이 말 속에 포함시킨 것일 것이다. 그리고 안드레가 베드로에게 아무 설명도 없이 메시아를 만났다고 말한 것은 당시에 메시아를 고대하던 이스라엘 민족의 상황을 반영함과 아울러 이 두 사람도 평소에 메시아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많은 대화를 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기 때문에 안드레는 이 한 마디로 베드로를 곧 예수께 데려올 수 있었던 것일 것이다. 베드로가 자기의 제자가 되기 위해 나오는 모습을 보고 예수는 곧바로 그에게 “시몬”이라는 이름에서 “게바”(헬,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개명을 해준다. 개명을 하면서 공관복음에서처럼 어떤 특별한 사명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베드로가 예수의 수제자라는 것을 알고 있던 당시의 독자들은 이 부분을 읽고 요한복음에서도 베드로가 어떤 특별한 역할을 할 것을 기대했을 것이다.
2.4. 예수의 자기 계시: “나는 인자(人子)다.”(43-51절)
이전에는 세례 요한의 소개와 제자들의 고백으로 예수가 소개되었다면 이제 절정에 이르러 예수는 스스로를 소개한다(51절). 처음 두 제자와 베드로가 예수를 찾아왔다면, 빌립의 경우에는 예수가 그를 제자로 부른다. 아무 설명도 없이 예수는 위엄 있게 “나를 따르라”고 하고 빌립은 예수의 제자가 된다(43절). 저자는 빌립이 벳세다 사람으로서 안드레와 베드로와 같은 도시 출신이라고 한다(44절). 그런데 안드레가 예수의 제자가 된 뒤 곧바로 그의 형제 베드로를 찾아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했듯이, 빌립도 자신의 친구인 나다나엘을 찾아가 구약 성경에 기록된 그이, 메시아를 만났다고 한다. 그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로서 나사렛 출신이라는 말도 덧붙인다(45절). 안드레를 곧바로 따라 나섰던 베드로와는 다르게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나사렛은 구약 성서에 나오는 신학적인 중요성이 있는 지명도 아니고, 시골 외딴 마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를 만났던 빌립은 예수가 처음 두 제자들에게 한 것처럼 “와 보라”는 말로 그를 초청한다(46절).
빌립의 말을 듣고 예수께 나아오는 나다나엘을 보고 예수는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말한다(47절).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된 야곱이 간사한 인물이었던 것에 착안하여(창 27:35), 나다나엘은 참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간사한 것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자신을 칭찬하는 말을 들은 나다나엘이지만 이러한 자신에 대한 칭찬이 어디에서 기원했는가를 그는 알고 싶어 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이에 예수는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고 대답하여 자신이 나다나엘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48절). 요한복음의 예수는 사람을 만나기 전 먼저 그 속마음을 알고 있는 것이다(2:24-25). 빌립과 나다나엘 모두 메시아를 고대하던 사람이었던 것을 보면 나다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메시아의 도래를 고대하면서 기도했을 지도 모른다. 이에 대해서 예수는 모든 것을 다 파악하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 이 한 마디에 나다나엘은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49절) 라고 말함으로써 예수가 자신들이 고대하던 메시아임을 고백한다.
이렇게 자신을 메시아로 고백한 나다나엘에게 예수는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는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50절)라고 말한다. 여기서 더 큰 일이란 예수가 앞으로 행할 표적을 말할 수 도 있고 예수의 신적 본질에 대한 것일 수 도 있다. 이것이 후자를 말한다면 다음 절에 있는 예수의 자기 계시가 더 큰 일이 될 것이다. 이제 예수가 단순히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는 인물이라는 것을 넘어 제자들은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51절)는 것이다. 먼저, 여기서 예수는 나다나엘과 말하고 있지만 “보리라”는 동사는 이인칭 복수를 써 “너희가 보리라”고 한다. 이것은 이 말씀이 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이인칭 복수로 대별되는 신앙 공동체에 해당된다는 것을 말한다. 또 예수는 여기서 자신을 인자(人子)라고 소개하는데 문자적인 뜻은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이지만 구약성서의 전통과 요한복음의 용례로 볼 때 여기에서는 오히려 하나님의 보내신 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이다(cf. 단 7:1-14; 시 8:5; 요 9:35).
그런데 천사가 인자인 예수를 기점으로 하늘과 땅을 오르락내리락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창세기에 보면 야곱이 베델에서 꿈을 꾸는데 하나님의 천사가 사다리를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꿈을 꾼 다음 야곱은 그 계시의 장소를 하나님의 집이요 하늘의 문이라고 했다(창 28:17). 이제 야곱의 사다리는 예수로 대체된 것이다. 예수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유일한 사다리요 중보자인 것이다. 오직 그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cf. 요 14:6). 요한복음에서 예수가 새 포도주요, 새 성전이요, 새 이스라엘로 나타나듯이 그는 새 야곱의 사닥다리인 것이다.
3. 새 이스라엘 예수(2:1-22)
요한복음 2장은 가나의 표적(2:1-11)과 연결 구절(2:12)과 성전 정화(2:13-22)와 연결구절(2:23-25)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여기에서 두 주요 기사는 예수가 가나에서 행한 표적 사건과 예수의 예루살렘 성전 정화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두 사건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어떤 학자는 이것을 정결이라는 관점으로 연결시킨다. 전자에서 예수는 정결례 항아리의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고, 후자에서 예수는 성전을 청결케 한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2장을 이러한 설정으로 보는 것도 의미 있는 것이지만 여기에서 더 중요한 모티브는 예수 이전의 중요한 예식(정결례)이나 예식 장소(성전)를 예수로 대체한다는 것이다. 결혼식에서 중요한 것이 포도주라면 예수는 이제 새 포도주이고, 성전에서 예배가 중요하다면 이제 예수는 새 성전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가 구약의 주요 개념을 대체하는 것은 요한복음의 주요 신학적 모티브이다.
3.1. 새 포도주 예수(1-11절)
예수께서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셔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혼인 잔치를 빛나게 한다(1-11절). 여기에서 저자는 먼저 예수가 행한 기적 사건을 기록한 다음(1-10절) 그 사건의 의미를 해석한다(11절). 요한의 해석에 의하면 이 사건은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예수의 여러 “표적” 중 하나이다. 공관복음에서 예수는 하나님 나라 도래의 표식으로서 혹은 단순히 병자를 불쌍히 여기심으로 기적을 행하는 경우가 많다(마 14:14; 20:34). 하지만 요한복음에서 기적을 표적이라고 표현한 것은 예수가 행한 기적 자체에 어떤 의미가 있기 보다는 기적이 지칭하는 바에 참 의미가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표적은 예수가 신성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임을 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표적은 예수가 하나님과 같은 영광 받을 존재라는 것을 계시해준다(1:14; 12:41). 이러한 예수의 계시는 표적을 보는 이들에게 결단을 요구한다. 즉 표적을 목도한 이들은 각자가 예수에 대한 신앙 혹은 불신앙으로 자신의 입장을 결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나에서 예수가 행한 표적에 대해서는 제자들이 신앙으로 응답했다(11절).
요한은 이 사건을 기록함에 있어 예수의 앞의 사역과 연결하여 “셋째 날”에 라는 시간 설정과 갈릴리 가나라는 지역을 언급함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셋째”라는 숫자를 예수 부활에 대한 암시(cf. 고전 15:4)로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본문에 대한 지나친 알레고리적 해석이다. 이 숫자는 바로 앞 구절에서 예수께서 나다나엘에게 자신과 관계된 큰 사건이 발생할 것(1:50-51)에 대해서 말했는데, 이것이 오랜 시간이 아니라 곧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면 된다. 또 요한복음에서 1:19부터 사건을 연결할 때 시간을 언급하는 것으로 시작하는데(1:29, 35, 43) 이 구절에서 시간을 언급한 것도 이러한 방식의 연속이다.
가나에서 있은 결혼 축제에서 행한 예수의 첫 번째 표적에 등장하는 인물로서 결혼식 초청자가 아니라 예수의 어머니가-그것도 가장 먼저- 소개된 것은 의외이다. 이것은 예수의 어머니가 이 결혼식 초청자와 어떤 친척 관계가 있다는 것을 나타낼 수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 사건에서 예수의 어머니가 담당할 역할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또 다른 복음서를 통해서 마리아로 알려진 이 인물이 이름으로 소개되지 않고 예수의 어머니로 언급되는 것은 요한이 이 인물에 대한 경외심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대 사회에서 어떤 사람의 어머니라고 불리 우는 것은 성공한 자녀를 둔 사람에게 부여되는 것으로서 영광스런 호칭이었다.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은 요한복음에서 예수를 제외하고 가장 중요한 인물이며 모델 제자인 “예수의 사랑 받는 제자”도 익명으로 나온다는 것과, 예수의 어머니와 이 제자가 예수의 십자가 밑에 같이 서 있는 장면이 나오는 것을 볼 때(19:25-27), 예수의 어머니는 예수의 사랑 받는 제자와 같이 어떤 모델 제자 혹은 상징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는 이 혼인 잔치에 그의 제자들과 함께 초청받는다. 공관복음서를 통해서 볼 때 예수가 혼인 잔치에 초청받고 참석하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었다(cf. 마 5:6; 8:11-12; 막 2:19; 눅 22:15-18, 29-30a). 거기서 예수는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마 11:19; cf. 눅 7:34)으로 언급된다. 어쨌든 예수는 영적 가족이라고 할 수 있는 제자들과 함께 혼인 잔치에 초대 받는다. 그런데 갑자기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내용이 나온다.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께 “그들에게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말을 한다(1-2절). 이러한 말은 앞 구절들을 읽은 사람이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내용이다. 설혹 예수의 어머니가 결혼 잔치 집과 어떤 친척 관계라 해도 예수의 어머니가 이 말을 주인 혹은 그 집 집사가 아닌 예수께 말한 것은 전혀 예기치 못할 일이다.
이러한 어머니의 말에 대해서 예수는 또 상당히 의외의 말을 한다. “여인(부인)이여(gu,nai), 이 일이 나와 당신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4a절). 예수의 이 말은 백번 옳다. 포도주가 떨어진 것과 예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예수가 어머니를 “어머니”가 아니라 “여인”으로 호칭한 것은 마리아에 대한 존칭의 언어이긴 하지만 당시의 유대 문헌 혹은 헬라 문헌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것으로서 모자간의 호칭 언어로 적절하지 않은 것이다.3) 또 포도주가 떨어진 일이 자신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말도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표현하는 셈어적 표현으로(삿 11:12; 삼하 16:10; 19:23; 왕상 17:18) 예수는 이 표현을 귀신과 자신이 상관없다고 할 때도 사용했다(cf. 막 1:24; 마 8:29; 눅 4:34; 8:28). 그렇다면 예수의 이런 표현은 과연 적절한 것인가? 만약 예수가 자신의 어머니를 혈통에 의한 어머니로 대했다면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인(gu,nai)이라는 말을 예수가 그의 여성 제자들에게 사용한 것(요 4:21; 20:13, 15)을 통해서 볼 때, 여기서 예수는 그의 어머니를 예수를 따르는 하나의 제자로서 대하고 있다고 추론해 볼 수 있다. 나아가 예수는 지금은 자신의 때가 아니라고 말한다(4b절). 요한복음에서 “때”는 주로 예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다 포함하는 영광의 때를 말한다(7:30; 8:20; 12:23, 27; 13:1). 하지만 여기서의 때는 그 때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표적을 통해 예수의 영광이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때를 가리킨다. 이것은 예수의 형제들이 예수께 자신을 나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라고 했을 때 예수가 동생들에게 한 말과 같은 것이다(요 7:3-6). 즉 이 말 속에는 예수의 어머니는 예수의 사역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암시가 들어있다.
자신의 말에 대해 거절을 표시한 예수의 말씀이 있은 후 예수의 어머니는 잔치 집에서 시중드는 사람들에게 “그가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5절)고 말한다. 본 기사에서 이 말이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말이다. 이 말을 할 때 예수의 어머니는 예수가 자신의 부탁을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가 큰 기적을 행할 걸로 믿은 것인가? 아니면 마리아는 단지 예수가 기적 행할 것을 예견했지만, 그 기적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적(11절)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인가? 아니면 예수의 어머니는 앞에서 말한 예수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엉뚱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마리아론적 해석을 하는 이들은 여기서 마리아는 잔치 집 사람들을 대신해서 예수께 무엇을 요청했는데, 이것은 마리아가 예수께 무엇을 요청할 수 있는 특별한 권리가 있음을 말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 구절을 통해 “마리아를 통해서 예수에게로”(per Mariam ad Jesum)라는 교리를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곳에서 예수의 어머니는 예수가 흔히 자신의 여 제자를 부를 때 쓰는 호칭인 “여인”으로 불리는 것과, 요한복음에서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을 오해하는 것은 매우 일상적인 것임을 볼 때 이 구절에서 마리아는 전형적인 제자로서 예수의 말씀을 오해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마리아는 후에 예수의 십자가까지 따라간 여 제자로서 이제 예수의 말씀을 이해한 사람으로 변했다고 할 수 있다(요 19:25-27).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진 것과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방금 말한 예수가 유대인의 정결예식에 쓸 물 항아리가 놓여있는 것을 보고 시중드는 사람에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말하고 그들이 이를 “아구까지 채웠다”는 것은 또한 상당히 의외다. 또 예수는 그것을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까지 한다. 그리고 결국 연회장은 물로 만든 포도주를 맛본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곧 예수가 처음에는 어머니의 말을 거절했지만 결국에는 그녀의 말을 들은 것이라 하여 이것을 통해서 예수는 참 효자였다고까지 주장한다. 하지만 그것은 본문에서 저자의 의도를 캐낸 것이라기보다는 해석자의 관점을 본문 내에 끌어들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요한복음 전체에서 볼 때도 예수와 어머니는 모자의 관계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아들과 그 제자라는 관점에서 기록되어 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문제는 예수가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켰는데 물과 포도주라는 단어는 각각 무엇을 상징하는가 하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물은 자주 등장하는 단어로서 상징적 의미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물이 말씀(혹은 율법)이고 포도주가 성령이라고 하는 종류의 상징적 해석은 요한복음 전체에서 매우 낯선 것이다. 여기서 물은 유대인의 정결 예식에 쓰였던 것이기 때문에 아마도 옛 질서에 속하는 어떤 물질로 보이고, 포도주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포도주를 옛 포도주와 새 포도주로 구별하며 후에 주어진 것이 더 좋은 포도주라고 말한 것을 볼 때(10절), 새 포도주는 예수가 전하는 복음이 가져올 것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요한복음의 표현대로 말하면 아마도 예수가 새 포도주일 것이다. 그 다음에 나오는 기사에서 예수가 옛 성전을 대체하는 (새) 성전이라는 모티브가 작동하는 것을 볼 때 여기에서도 예수는 새 포도주라고 할 수 있다. 예수는 구약의 정결 예식이나 이전의 어떤 예식에서 맛볼 수 없는 것을 제공해 주는 분이며, 나아가 이것을 변화시켜 그 자신이 대체하는 분인 것이다. 예수의 말에 의해 물로 만든 포도주를 맛보고 연회장은 “사람이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낸다”(10절)는 말을 하는데 이러한 관습은 당시의 문헌에서는 확인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이것은 보편적으로 어떤 문화에서건 약삭빠른 인간의 본성과는 잘 부합되는 말이다.
요한은 가나에서 일어난 사건의 전모를 기록한 후 이것에 대한 해석으로 끝맺는데, 이렇게 어떤 사건에 대해서 기독론적으로 해석하고 그 기사를 끝맺는 것은 전형적인 요한문헌의 문학적 특징이다(cf. 2:21-22). 요한복의 해석을 따르면, 이 사건의 의미는 혼인 잔치 자체나, 마리아론이나, 마리아와 예수의 관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예수가 어떤 분인가 하는 것이다. 예수는 물로 포도주를 만든 기적을 통해서 자신의 신적인 본질(영광)을 드러낸 것이다. 여기서 요한이 쓰는 용어인 ‘표적’은 구약성서에서 친숙한 언어와 개념으로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옳다는 것을 증명할 때 흔히 사용하는 것이다(출 16:7; 민 14:22). 요한은 본 기사를 통해서 프롤로그(1:1-18)와 예수에 대한 소개(1:19-51)에 나와 있는 예수상이 옳다는 것을 예수가 표적을 행해서 이를 증명한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표적을 통해서 표적을 본 모든 사람이 그 내용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예수의 어머니와 그의 형제들(12절) 혹은 결혼 축하연에 참석했던 어떤 사람들도 예수의 표적에 대해서 믿음으로 응답했다는 말은 없다. 요한은 그의 제자들이 예수를 믿었다는 것만을 기록하고 있다(11절).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가 물을 포도주로 만든 기사는 설교자들의 영감의 원천으로써 오랫동안 자리매김 해왔다. 하지만 이 기사는 이른바 영해라는 알레고리적 해석에 의해 곡해되어 온 경우가 많았다. 이런 경우에 있어 본 기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숫자(삼일, 돌 항아리 여섯 통)혹은 상징 언어(물과 포도주)이다. 성서에서 3 이라는 숫자가 예수 부활의 숫자이고, 6 이라는 숫자가 불완전을 상징하는 것이긴 하지만 이 본문에서 저자가 그것을 의도 혹은 암시 했는가는 별도의 답변을 요한다. 필자는 저자가 본문에서 그러한 의도 혹은 암시를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본문은 기독론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예수가 옛 질서의 변화자라는 것이 주안점이기 때문에 숫자나 상징이 어떤 구체적인 의미를 표시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예수가 새 질서의 창시자라는 면에서 예수는 새 포도주라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 본문에 대한 마리아론적 해석도 전형적인 본문에 대한 의미투여이다. 본문에서 마리아는 전형적인 예수의 여성 제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예수와 사람을 중재하는 이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3.2. 새 성전 예수(12-22절)
요한은 예수가 가나에서 행한 첫 번째 표적과 이어서 일어난 성전 정화 기사를 예수와 제자들과 그 가족이 가나를 떠나 가버나움으로 가서 잠시 머무르는 것으로 연결시킨다(2:12). 예수는 그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유월절을 맞아 유대인의 관습대로 예루살렘에 올라가는데(13절) 거기서 예수는 성전 정화사건을 일으킨다. 예수가 성전을 정화한 사건(2:13-22)은 크게 두 부분으로 대별해 볼 수 있다. 첫 부분(13-17절)은 배경 설정(13절)과 예수의 성전 정화(14-16절)와 그것에 대한 해석(17절)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부분은 공관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성전 정화 기사(막 11:15-17; 마 21:12-13; 눅 19:45-46)와 병행을 이룬다. 물론 여기에는 많은 차이점이 있다. 첫째, 공관복음 성전 청결 기사는 예수 사역의 마지막 부분에 위치한데 반해 요한복음에서 이 사건은 예수 초기 사역에 위치한다. 둘째, 요한복음에는 황소와 양과 회초리 등 공관복음에 없는 내용을 싣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 사건에 대한 해석을 하기 위해 공관복음에서는 이사야 56:7과 예레미아 7:11을 인용하고 있는데 반해 요한복음 기사는 스가랴 14:21과 시편 69:10을 인용하고 있다. 두 번째 부분(18-22절)은 예수와 유대인들 사이의 성전에 대한 대화(18-20절)와 그 대화에 대한 설명과 해석(21-22절)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부분은 공관복음 병행 기사에는 없고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내용이다.
우선, 공관복음 성전 정화 기사의 병행 기사인 첫 번째 부분(13-17절)의 내용을 보면, 예수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cf. 6:4; 11:55). 여기서 유월절이 “유대인의 유월절”이라고 표현된 것에는 이것을 기록할 당시에 이 명절은 교회가 더 이상 지키지 않는다는 암시가 내포되어 있다. 어쨌든 예수는 유대인 남성으로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당시의 풍습대로 예루살렘에 간다. 예루살렘에 올라가 예수는 성전에서 사람들이 돈을 바꾸고 양과 소와 비둘기를 파는 것을 보고 분노가 일어난다. 유월절에는 유대뿐만 아니라 다른 지방에 사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까지 성전에 와서 제물과 성전 세를 드렸기 때문에 제물을 사고파는 것과 환전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다만 이것이 성전 안(여기서는 이방인의 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문제였다. 예수는 스가랴 14:21과 연관하여 성전(예수의 입으로는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한다. 이러한 예수의 행동에 대해서 요한은 예수의 행동이 성전을 사모하는 열심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4) 요한은 이것을 예수의 말로 설명하지 않고 제자들이 예수의 행동을 보고 이 말씀이 생각났다는 것으로 표현한다. 이러한 생각이 예수의 행동 당시인지 부활 후인지는 본문에서 명확하지 않지만 그 이후에 나오는 예수의 행동에 대한 제자들의 기억과 연관시켜 볼 때 이러한 기억은 부활 후 신앙에 의한 판단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사건에 대한 해석 다음에 요한복음에는 공관복음서에 없는 부분이 나오는데(18-22절) 이것은 그 내용과 신학에 있어서 전형적으로 요한적인 것이다. 예수의 성전 정화 행동에 대해 유대인들은 예수의 행동이 정당한 것을 어떤 표적을 통해서 보여줄 것인가를 묻는다(18절). 이 말에 대해 예수는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이것을 일으킬 것이다(evgerw/).”(19절)라고 말한다. 여기서 “이 성전”을 건물로 이해한 유대인들은 “이 성전이 46년 동안 지어지고 있는데 네가 사흘 만에 그것을 일으키겠다고(oivkodomh,qh)?”(20절)라고 말한다. 이 말에 대해서 요한복음 저자의 설명이 뒤따르는데 여기서 성전은 건물이 아니라 예수의 몸인 성전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한다. 이 때는 유대인들도 제자들도 그 말씀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는데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난(hvge,rqh) 후에야 비로소 제자들이 예수가 말씀하신 것의 의미를 깨달았다고 한다(22절). 여기에는 “건축하다”라는 동사를 사용하여 언어유희가 있다. 성전 건물을 건설하는 것을 공관복음에서는 실제건축을 나타내는 용어닌 “오이코도메오”(oivkodome,w)라는 동사를 사용한 반면, 요한복음에서는 “에게이로”(evgei,rw)라는 동사를 사용하여 이 단어가 건물 건축과 아울러 예수의 부활에 대해서 언급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어쨌든 성전파멸에 대한 말씀을 자신의 죽음과 연결시켜 자신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한다는 것으로 말한 예수의 말씀을 유대인들은 깨닫지 못했다. 예수의 행동과 말씀에 대해서 피상적 이해를 하여 예수의 말씀을 올바로 깨닫지 못하는 것이라는 것은 전형적으로 요한적인 것이다. 요한은 이러한 오해에 대해 무엇이 바른 이해인지를 덧붙인다. 그것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것으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성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져올 것이다. 이전에는 건물로서의 성전이 예배를 위해서 중요했다면 예수의 죽음과 부활 후에는 예수가 새 성전이기 때문에, 이제는 그를 통해서 예배하게 된다(요 4:20-24; 14:6). 그런데 요한복음에 의하면 이것을 깨닫는 것은 자연인으로 갖고 있는 인간의 이성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부활 한 후, 보혜사가 와서 제자들에게 이것을 깨닫게 해 줄 때 가능한 것이다(cf. 요 14:16-17; 25-26; 15:26-27; 16:7-15).
예수가 구약 시대에 하나님을 섬기는 장소로서의 성전을 대체하다는 의미에서 요한은 성전을 “그의 몸”이라고 말한다(21절). 여기서 “그의 몸”이라는 어구는 바울 서신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몸”(고전 12장)과 같이 교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주장이 있어왔다. 예수가 자신의 몸을 성전이라고 했을 때 이것은 마가복음 14:58에 나오는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의미하며 그것은 예수 부활 후에 곧 건설된 것인데, 결국 이것은 영적인 의미에서의 신자들의 집(벧전 2:5)이요 그것은 곧 그리스도의 몸(고전 12:27; 엡 1:23)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단순히 그의 몸이라는 같은 단어에서 착안하여 그 의미를 지나치게 확대 해석한 것으로 요한의 의도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것이다. 만약 요한복음 본문에서 성전이 교회라면, 그것은 교회가 되기 위해 먼저 파괴되는 과정을 거쳐 부활해야 하는데, 이러한 내용을 교회에 그대로 적용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사실상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회론적 어구는 바울적 어구이지(롬 12:5; 고전 12:27; 골 1:18) 요한적 어구는 아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성전 정화기사는 기독론에 주 의미가 있다. 요한은 본 기사에서 첫 부분 끝과 두 번째 부분 끝에 기독론적 의미를 지닌 코멘트를 포함한다(17절; 21-22절). 각 각의 코멘트는 각 부분이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지 지침을 주고 있는 것인데, 각 지침이 모두 기독론적 의미에 관한 것이다. 먼저, 17절은 예수의 성전 정화 행동이 단순히 사람들의 잘못된 행동을 교정하고자 하는 것 이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요한은 예수의 성전 청결 행위를 시편 69:9과 연관시켜 해석하는데 부정과거형 단어를 미래형으로 고쳐(katafa,getai) 이 구절이 예수의 죽음과 연관되도록 한다. 예수의 성전 청결 행위는 단순한 의분에 의한 것만이 아니라 구원사적 의미가 있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결국 예수의 이러한 행동은 그의 죽음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것이 이 구절에 예견되어 있다.
다음으로, 21-22절은 성전에 대한 기독론적 해석이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말하는 성전을 건물로 해석하여 예수의 말씀을 오해했다. 여기서 성전을 재건하는 것을 ‘오이코도메오’(oivkodome,w)라는 동사를 사용하지 않고 ‘에게이로’(evgei,rw)라는 예수 부활과 성전 건설을 동시에 나타낼 수 있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요한은 이것을 예수 부활과 연관시킨다. 한마디로 말해, 성전 정화 사건을 통해서 요한은 이 사건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예시하는 것이며, 결국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성전은 예수로 대체된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4. 해석과 적용
4.1. 프롤로그를 포함하여 요한복음 1장의 중요한 모티브 중의 하나는 증인으로서의 세례 요한에 대한 것이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는 것이 1장 후반부이다(19-51절). 세례 요한은 자신의 사역의 최 정점에 있을 때 자기가 메시아 혹은 종말론적 중요성이 있는 인물이 아니라 예수 사역의 증인이라고 선언한다. 대중들의 인기가 있었고 예루살렘 당국자들로부터도 중요한 인물로 인식되었지만, 사람들의 자신에 대한 호불호(好不好)에 매이지 않고 자신의 본질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끝까지 알고 지킨 사람이다. 인간적으로 볼 때 사역의 최고점에 서서 이제 사역을 시작하는 예수께 대하여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29)고 선언한 것이다. 이러한 세례 요한에 대한 묘사는 물론 요한의 인물 설정에 대한 시각과 무관하지 않다. 세례 요한을 포함하여 예수 이외의 어떤 인물도 독립적으로 신학적 중요성이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 요한의 시각이다. 어떤 인간도 예수와의 관계 밖에서는 자신의 본질을 깨달을 수 없으며, 그를 통해서만 삶이 의미가 있게 된다는 것이다.
4.2. 1장 첫 부분인 프롤로그(1-18절)에서는 요한복음 전체의 기록 목적과 부합되는 정신을 말한다. 그 다음으로 여러 가지 기독론적 용어로 예수를 소개하는 부분이 이어진다(19-51절). 여기서 예수는 하나님의 어린 양(1:29), 성령으로 세례 주은 이(1:33), 랍비(1:38), 메시아(1:41), 하나님의 아들(1:49), 이스라엘의 왕(1:49), 인자(1:51)로 소개된다. 특히 마지막에 소개된 인자는 이전에 언급된 모든 기독론적 호칭의 정점을 이루는 것인데, 하늘과 땅을 연결시켜 주는 분으로써 성육하신 예수를 가리킨다. 마지막 부분의 인자로서 소개된 예수는 요한복음 2장에서 하늘로부터 와서 이 땅을 새롭게 하는 예수의 사역을 준비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4.3.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는 이전에 유대교에서 중요하게 생각되던 중요한 정결례와 성전을 대체하는 분으로 소개된다. 예수는 새 포도주이며, 또한 새 성전이다. 이러한 기독론적 천명은 앞으로 예수와 유대인들과의 격렬한 기독론적 논쟁을 예고한다. 예수는 자신을 단순히 이스라엘 종교를 갱신시키려고 온 선지자가 아니라 하나님과 아들의 관계를 가진 하나님으로써 이 세상에 왔으며 이것을 받아들이는 자는 영생을 얻고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쟁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예수는 이들을 향해 마귀의 자식이라고까지 한다(요 8:38). 요한복음은 영생과 심판을 예수의 입을 통해 단순한 메시지로 선포하고 결단을 요구한다. 이 복음서를 읽는 자들에게도 같은 결단이 요구된다. 요한복음 2장은 바로 그러한 결단을 촉구하기 위한 워밍업에 해당되는 부분으로써 큰 의미가 있다.
제 4장 예수와 사람들과의 호의적 만남(2:23-4:54)
1. 내용 구성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가르침은 피와 살이 있는 사람들과의 직접적인 만남에서 이루어진다. 여기서 예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고 대화하면서 중생의 진리와 영생의 진리를 설파한다. 하지만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가르침과 함께 예수 자신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신적 메시아임을 스스로 계시하는 것이다. 3-4장에 나오는 기사에서 예수는 니고데모, 사마리아 여인, 왕의 신하 등을 만나서 이들에게 자신을 계시하고 이들 각자에게 직간접적으로 신앙에로의 결단을 촉구한다. 이 부분에서 나오는 세례 요한은 예수가 직접 만나지는 않지만 요한복음에 예외적으로 예수가 아닌 자신 스스로가 자기의 본질을 깨닫고 예수의 본질에 대해서 증언한다. 예수와 사람들과의 조우를 기록한 요한복음 2:23-4:54은 다음과 같은 구조로 되어 있다: 예수와 니고데모(2:23-3:21), 예수와 세례 요한(3:22-36),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4:1-42), 예수와 왕의 신하(4:43-54).
2. 예수와 니고데모(2:23-3:21)
요한복음의 문학적 특징 중의 하나인 예수와 사람과의 긴 대화는 예수와 니고데모와의 만남에서 시작된다. 이러한 만남의 사건을 기록하기 위해 요한은 앞 장과 연결 구절을 사용한다(2:23-25절). 곧 이어 예수와 니고데모와의 대화가 이루어지고(3:1-12), 자연스럽게 복음의 핵심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이 뒤 따른다(3:13-21).
2.1. 연결 구절(2:23-25)
예수는 유월절 명절에 표적을 행함으로 자신의 신성을 드러내고 이것을 보고 사람들이 그를 추종하게 된다(23절). 하지만 사람들의 이러한 단순한 믿음에 흥분하지 않는데 그것은 예수는 사람들의 마음속을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24-25절). 이렇게 자신을 만나기도 전에 사람의 마음을 다 알고 있는 요한복음의 예수 상은 이미 나다나엘과의 만남에서도 전제되어 있는 것이고(1:43-51) 이어지는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는 확고히 자리 잡고 있는 개념이다. 요한이 이러한 예수를 이 부분에서 소개한 것은 결코 우연히 아니다. 이러한 개념이 전제 될 때에 비로소 니고데모와의 대화와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에서 사람의 마음과 과거의 행적을 알고 있는 예수를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된다.
2.2. 중생에 관한 대화(3:1-12)
바리새인이며 산헤드린 공회원이었던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예수를 “랍비”라고 존칭하고, 예수의 표적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평가 하면서 예수께 접근하는 것으로 대화는 시작된다. 이렇게 자신에게 호의적으로 접근한 사람에게 예수는 전혀 의외의 말을 한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가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절) 그러나 이러한 예수의 태도는 바로 앞 구절을 통해 이미 예견된 것이다. 예수는 사람의 마음을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사람의 아첨의 말에 현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쨌든 여기서 한글 개역 성경에 “거듭”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부사 ‘아노덴’(a;nwqen)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는 더 폭넓은 함의를 갖고 있는 단어이다. 본래 이 단어는 “거듭”이라는 뜻과 “위로부터”라는 두 가지 뜻을 가진 단어이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이것을 “거듭”이라는 뜻으로만 알아들어 이 말을 통해서 예수가 전달하고자 하는 말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습니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습니까.”(4절) 이러한 질문에 대해 예수는 자신이 말한 것을 설명한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가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 하니라.”(5-8절)
예수는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니고데모에게 “거듭난다”는 말을 “물과 성령으로 난다”는 말로 풀이해서 설명한다. 그런데 이 표현이 큰 문제가 된다. 예수가 위로부터 난다는 말을 단순하게 성령으로 난다고 했다면 이해하는데 큰 문제가 없다. 그런데 갑자기 성령이라는 단어 앞에 물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그렇다면 이 물은 무엇인가? 그동안 이것에 대해서는 천상의 물, 세례시의 물, 아이를 태어나게 하는 물(양수, 혹은 정자), 말씀, 성령을 나타내는 이사일의(二辭一意) 등 다양한 제안이 있어왔다. 우선 천상의 물이라는 제안은 그 증거가 희박해 보인다. 다음으로 이것이 세례를 상징하는 물이라는 주장은 많은 학자들의 호응을 얻는 것이다. 초기 교회 시대에 물은 세례를 상징하는 경우가 많았던 점을 감안하면 이 제안은 충분히 고려할 만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세례를 상징하는 물로 해석하면 문맥에도 잘 어울리지 않을 뿐 아니라 요한신학에도 잘 부합되지 않는다. 요한복음에서 크리스천의 세례가 명시적으로 언급된 적이 전혀 없는 것이 갑자기 문맥에 어울리지 않게 나타날 가능성은 별로 없다. 물을 세례로 보는 견해가 더욱 더 어려운 것은 요한복음 자체는 세례와 성만찬 등을 반대하지는 않을지라도 이것이 직접적으로 은혜의 방편이 된다는 신학은 없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출생에 반대된 하나님으로부터의 출생을 이야기하면서 요한이 세례를 언급한다는 것은 문맥과 요한신학 전체에서 잘 어울리지 않는다.
다음으로 고려할 수 있는 것은 여기서 물이 성령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물과 성령이 같이 나타나 성령을 상징하는 것은 구약의 전통일 뿐만 아니라(겔 36:25-26; 사 44:3) 요한복음 자체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7:37-39). 그러므로 물과 성령이 분리된 개념이 아니라 하나의 개념으로서 성령을 상징한다는 것은 상당히 가능성 있는 견해이다.
다음으로 그 뒤 문맥과 연관하여 보면 여기서 물은 자연적 출생 시의 물을 상징할 수도 있다. 니고데모가 자연적 출생만 알고 있기 때문에, 예수는 자연적 출생과 아울러 영적 출생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견해대로 해석하면, 예수는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을 설명할 때 자연적 출생과 영적 출생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이어서 자연적 출생은 육적 출생이요 영적 출생은 성령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뒤에 다시 한번 설명하는 것이 된다.
본인은 위의 견해 중 마지막 두 가지가 본문의 의도에 가장 부합한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물은 자연적인 물일수도 있고 성령을 상징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떻게 해석하든 예수 말씀의 본래의 뜻은 변하지 않는다.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자연적 출생 이외의 또 다른 출생, 즉 위로부터의 출생, 성령으로부터의 출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서 요한복음의 구원론에서 중요한 것은 크리스천 공동체에 참여하기 위한 어떤 예식보다도 내적인 변화, 거듭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요한복음이 그리스도의 대속적 능력을 과소평가하지 않으면서도 그 효력을 발휘하기 위한 것으로 성례전 같은 것을 들지 않고 거듭남을 말했다는 것은 요한복음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이다.
이와 같은 예수의 가르침에 대해서 전통적인 유대적 선민사상을 가지고 있던 유대인인 니고데모는 이것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하고 반문 한다(9절). 이에 대해 예수는 오히려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써 어떻게 이러한 진리를 알지 못하는가 하고 재 반문 한다(10절). 이어서 예수는 일인칭 복수로 자신의 중생에 대한 진리가 허공에 뜬 진리가 아님을 설파한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는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11절) 여기서 예수가 니고데모에게 말하면서 자신을 “우리”라고 하여 일인칭 복수로 말하고 니고데모에게 “너희”라고 하여 이인칭 복수로 말한 것은 이 대화가 예수와 니고데모의 대화를 넘어 “우리”로 대표되는 요한 공동체와 “너희”로 대표되는 불신앙 유대인들과의 논쟁임을 알 수 있다. 유대인들이 받아들이지 않는 중생의 진리에 대해서 요한은 이것이 자신의 공동체에서 경험된 진리임을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이어서 예수는 이러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들을 향해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12절)는 언뜻 이해하기 힘든 말을 한다. 여기서 땅의 일은 거듭남의 진리에 대한 것으로서 거듭남 자체가 땅의 일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이 땅에서 이루어진다는 의미에서 이 땅의 일이다. 그렇다면 하늘 일은 그 다음 구절에 나오는 “하늘에서 내려온 자” 같은 하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사실에 대한 것이다.
2.3. 복음의 핵심(13-21절)
중생에 관한 니고데모와 예수의 대화는 이제 하늘의 원리에 대한 예수의 선포로 이어진다. 예수는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자로 소개하는데 이것은 은연중에 이스라엘 조상 중에서 모세를 비롯하여 하늘에 올라간 자와 대비시켜 자신을 계시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하늘에 올라간 자도 소수인데(모세, 에녹, 엘리아) 하늘에서 내려온 자로는 예수가 유일하다는 것이다(13절). 이어서 예수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 형상을 만들어 들어올리고 이것을 믿는 사람은 살아난 것 같이(민 21:8-9) 자신도 대속적 죽음으로 십자가에 달려야 할 것과 그것을 믿는 사람은 영생을 얻을 것을 말한다(14-15절). 이 영생이란 주제와 관계하여 예수는 성경 전체에서 복음의 핵심이 되는 내용을 설파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16절)
다음으로 예수는 구원과 심판이라는 주제로 예수의 사역과 신자의 운명을 설명한다. 먼저, 하나님이 예수를 이 땅에 보낸 것은 세상을 심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이 그를 통해 구원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17절). 하나님의 뜻은 이와 같지만 각 사람의 이 계시에 대한 입장에 따라 운명이 달라진다. 그 태도는 다름 아닌 믿음이다. 그리고 믿지 않은 사람은 그 심판을 이 땅에서 벌써 받은 것이다(18절). 여기에는 종말의 심판이나 축복이 이 땅에 벌써 이루어졌다는 소위 요한신학의 실현된 종말론 사상이 나타나 있다(cf. 5:24; 11:25-26; 12:31). 마지막으로 심판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예수는 빛과 어두움이라는 메타포를 사용한다(19-21절). 사람들은 성육하신 빛인 예수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다. 그 이유는 악을 행하는 사람은 자연히 빛보다 악을 더 사랑하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로 선을 행하는 사람은 자연히 악보다 선을 더 사랑하여 선을 따라오기 마련인 것이다.
본 단락은 이후에 소개되는 예수와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이루어지는 전형적인 문학적 패턴을 보여준다. 예수는 사람을 만나서 어떤 대화 혹은 사건이 일어나고, 이 대화에 이어지는 예수의 가르침이 있고, 그 가르침 속에는 자신의 본질에 대한 기독론적 천명이 있다. 여기서 예수 가르침의 핵심은 바로 자기 계시에 있다. 물론 이 자기 계시에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가가 중요하다. 본 단락에서 예수는 자기 계시에 대해서 믿음으로 반응하느냐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서 벌써 이 땅에서 구원과 심판이 이루어진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렇게 예수가 하나님의 보내신 자요, 그것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고 거부하는 자는 심판을 받는다는 예수의 가르침은 성경 전체의 메시지를 요약한 복음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3. 예수와 세례요한(3:22-36)
3.1. 세례요한의 증언(22-30절)
니고데모와의 만남과 대화 이후에 예수와 제자들은 유대 지역으로 가서 거기에 머무르면서 세례를 준다(22절). 이 구절은 신약성서를 통틀어 예수가 어떤 특정인에게 직접 세례를 주었다고 언급한 유일한 구절이다. 그런데 다음 장에서는 예수 자신이 세례를 준 것이 아니라 그의 제자들이 준 것이라고 한다(4:1-2). 어쨌든 이 구절은 그 다음 구절에서 나오는 세례 요한의 세례 주는 사역과 비교하기 위해 언급된 것 같다. 요한은 여기서 예수와 세례 요한은 각각 세례를 주는 사역을 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았다(23절)는 것을 말하려 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않았다”(24절)는 말이 나온다. 이것은 요한복음이 기록될 당시에도 요한이 투옥되어 처형되었다는 것이 널리 알려진 사실로서 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그가 아직 옥에 갇히지 않았을 때라는 것을 독자들에게 알려주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요한의 제자들과 한 유대인 간에 유대인의 정결 예법에 대해서 논쟁이 발생한다(25절). 그러면서 유대인들은 요한에게 와서 뜬금없이 스스로 메시아라고 증거한 예수에 대해서 묻는다. 그리고 그가 세례를 주는데 사람들이 “모두 다” 그에게로 몰려가고 있다고(e;rcontai; 26절) 하여 요한의 감정을 자극하는 말을 한다. 특히 여기서 “다”라는 말을 사용한 것과 “몰려간다”는 동사를 현재형으로 사용한 것은 이들이 예수를 과대 칭찬하여 요한에게 경쟁심을 불러일으키려는 시도로 보인다.
하지만 세례 요한이 감정적으로 격해져 예수를 비난하는 말을 할 것을 기대했던 유대인들에게 세례 요한은 오히려 예수 사역의 정당성을 옹호하고 자신을 낮추는 말을 한다. 먼저, 세례 요한은 “사람이 하늘에서 주지 않으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고 하는데”(27절) 이 말만 보면 이것이 자신의 사역을 옹호하는 것인지 아니면 예수 사역의 정당성을 옹호라는 것인지 알기 어렵다. 하지만 이어지는 구절의 내용으로 볼 때 여기서 요한은 후자를 말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요한은 자신이 메시아가 아니고 그의 사역을 준비하는 사람이라고는 이미 말했고(20절) 바로 지금 이 말을 듣고 있는 “당신들 자신이 증인이다”라고 한다(28절). 즉 이 두 절을 통해 요한은 예수 사역은 정당하며 자신은 메시아가 아니라고 재천명한다.
그 다음에 그는 자신의 사역과 예수의 사역을 비교하여 설명한다. 먼저, 예수는 신랑이고 자신은 신랑의 들러리로서 신랑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같이 기뻐하는 자다(29절). 예수를 신랑으로 교회를 신부로 묘사하는 것은 초기 교회에서 익숙한 메타포로서(마 25:1-10; 엡 5:22-33; 계 21:2) 요한은 이 메타포를 통해 예수의 역할과 자신의 역할을 비교하여 설명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예수와 자신의 사역에 대한 가장 결정적인 선언을 한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30절) 여기서 “데이”(dei/)라는 동사는 신적인 당위를 나타내는 것으로 자신의 필생의 사명인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사역이 이제 마쳐야 할 시간이 되었고, 그리스도 자신이 자신을 계시할 때가 바로 지금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것이다. 세례 요한이 옥에 갇히기 직전, 즉 그가 사람들로부터 최고의 인기를 얻고 있던 그의 사역의 최 정점에서 이러한 언명이 나왔다는 것을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다. 세례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사랑받는 제자와 함께 유일하게 예수 부활이전에 예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했던 사람이었다. 예수가 나다나엘에게 했던 표현을 빌리면 세례 요한이야말로 “참 이스라엘 사람”(요 1:47)인 것이다.
3.2. 하늘에서 오신이 이, 예수(31-36절)
세례 요한의 선언이후 이제 하늘에서 내려온 분으로서의 예수에 대한 소개와 설명이 이어진다. 그런데 이것이 그 내용상 하늘에서 내려온 이를 말하는 구절인 21절에서 이어지면 자연스럽기 때문에 화자가 여기서부터는 예수라고 할 수도 있고, 세례 요한이 자신과 예수의 관계를 언급하다가 계속해서 예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예수를 삼인칭으로 언급하는 것과 여기서 사용된 내용이 요한일서 저자가 사용한 내용과 일치하는 것을 볼 때(요일 5:12) 이 부분은 요한복음 저자가 말하는 부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미 앞의 13절에서 사용한 기독론적 타이틀인 “하늘에서 내려온 자”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저자는 예수를 “위로부터 오시는 이”(31절), “하나님의 보내신 이”(34절)로 소개한다. 물론 위로부터 오신 이는 땅에서 난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인격이며 그분만이 만물위에 계시고 하늘에서 보고 들은 것을 이 땅에 증거하는 분이다(31-34절). 또 16절에 있는 “아들”이라는 타이틀을 이곳에서도 계속 사용하여 저자는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은 그에게 만물을 통치할 권한을 주셨고, 사람들은 그를 믿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서 각각 영생과 진노가 주어지게 된다(35-36절)는 것을 말한다. 이상을 통해서 볼 때 이 구절은 앞의 13-21절에 있는 기독론적 가르침의 연장이요, 반복이라고도 할 수 있다.
4.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4:1-42)
4.1. 만남과 대화(1-30절)
유대 지역에서 사역하던 예수는 바리새인들의 반대에 부딪히면서 충돌을 피하기 위해 갈릴리로 떠난다. 바리새인들은 예수와 세례 요한을 경쟁상대로 몰아 갈등을 조장하려 한다. 이들은 예수의 제자 삼는 사역과 세례 주는 사역-요한복음 저자는 이것이 예수의 사역이 아니라 그의 제자들이 한 것이라고 함-이 세례 요한의 그것보다 많다는 소문에 주목한다(1-3절). 이제 예수는 이들과 충돌을 피하려고 갈릴리로 떠나는데 그 중간 지역에 사마리아가 있었고 그곳을 통과해야만 했다(4절). 당시의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과의 반목으로 유대 지역에서 갈릴리로 갈 때 사마리아를 통과하지 않고 멀리 돌아갔는데 반해 예수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사마리아로 들어간 것이다. 이제 예수는 수가라고 불리는 사마리아의 한 도시에 들어섰는데 거기에는 야곱이 그의 아들 에서에게 준 우물이 있었고 예수는 그 우물곁에 앉게 되었고 그 때가 정오 쯤 되었다(5-6절).
그 때 어떤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가로 물을 길으러 오게 되고 여기서 그녀는 예수와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사실 이러한 만남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여러 가지 장벽이 있었다. 우선, 이 여인과 예수는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이라는 민족의 벽이 있었다. 당시에 양 민족은 서로 상종을 하지 않을 정도로 반목이 심했는데 여기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이 아시리아의 포로에서 귀환해서 사마리아에 정착해서 이방인들과 결혼해서 생긴 족속이 사마리아인들이었다. 남 유다 사람들은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해 순수한 혈통을 지켰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던 차에 남 유다가 귀환 후 성전을 건축할 때 사마리아인들이 돕겠다고 했으나 유대 사람들은 이것을 이를 단호히 거절했고, 이에서 관계가 악화되어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 산이라는 곳에 따로 성전을 세우고 예배를 드렸다. 또 한 가지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의 만남이 이루어지기 어려웠던 것은 당시 내외를 하는 남녀라는 문화적인 벽이다. 그래서 이 여인은 예수가 물 좀 달라고 하자 유대인 남자인 당신이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가 여인에게 먼저 “물을 달라”고 하는 말을 함으로써 양자의 대화가 이루어진다.
예수: 나에게 마실 물 좀 주시오(7절).
여인: 아니 당신이 유대인 남자인데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합니까?(9절)
예수: 당신이 “하나님의 선물”이 어떤 것이고, 지금 당신에게 “물을 좀 주시오”하고 말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당신이 나에게 청한다면, 나는 생명수를 당신에게 주었을 것이오(10절).
여인: 아니 선생님, 선생님은 물 긷는 바가지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떻게 생명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선생님이 이 이물을 우리에게 준 우리 조상 야곱보다 더 위대한 분이란 말은 아니시겠지요?(11-12절)
예수: 이 우물의 물을 길어 마시는 모든 사람은 다시 목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히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오. 내가 주는 물은 그것을 마시는 사람 자신 속에 영원히 솟아나는 샘물이 될 것이오(13-14절).
여인: 선생님, 내가 다시는 목마르지 않아 여기에 다시는 물 길러 오지 않도록 이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15절).
여기서 예수와 여인의 대화 주제는 물이다. 그런데 두 사람 대화의 톱니바퀴의 아귀가 서로 맞아 돌아가지 않는다. 예수와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도 니고데모는 예수의 말을 물리적으로, 문자적으로 그대로 이해해서 그 심연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것과 같이, 여기에 나오는 여인도 예수가 말하는 물의 의미를 정확히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여인은 마실 물을, 예수는 생명수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대화가 예수가 여인에게 물을 청한 것으로 시작되었으나(7절) 결국에는 여인이 예수에게 물을 청한 것으로 끝난다는 것이다(15절). 즉 요한은 이 기사를 통해 육체적으로 목마른 분은 예수였지만, 내면 세계의 문제에 있어 진정으로 생명수가 필요한 사람은 이 여인이라는 것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이 여인은 예수와 대화를 하는 가운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영적으로 목마른 사람인 것을 인정한 것이다.
이후의 대화의 주제는 급변한다. 예수는 문맥에서 전혀 예상되지 않았던 말을 함으로 다른 차원에서 이 여인과의 대화를 이어나간다. 하지만 예수는 사람의 마음을 아는 분으로 이미 소개되었고(2:23-25), 나다나엘과 니고데모의 속마음을 다 알고 있었다는 기사가 이미 있었기 때문에(1:48; 3:3) 예수가 여인의 개인적인 문제를 터치하면서 새로운 주제로 대화가 옮겨가는 것은 전혀 부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예수: 가서 당신의 남편을 데리고 이리로 오시오(16절).
여인: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17a절).
예수: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라고 말한 것은 옳게 말한 것이오. 남편이 다섯 있었지만 지금 있는 그 분도 당신의 남편이 아니지 않소. 그래서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라고 말한 것은 잘 말한 것이라고 한 것이오(17a-18절).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이 여인이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라고 말한 것을 정말로 올바로 대답한 것인지, 아니면 이 여인이 자신의 치부를 감추려고 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예수도 여인의 대답을 옳은 말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전자가 맞는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은 여인이 자신의 치부를 감추려고 일종의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를 발동한 것이고, 예수도 이 여인의 말을 형식적으로는 인정하지만 그 여인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써 오히려 여인에게 자신의 말이 자신을 감추기 위한 임기응변식 대답이라는 것을 보여 준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처지를 다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수의 말씀에 여인은 그를 선지자라고 인정하게 된다. “선생님, 당신이 선지자라는 것을 내가 알았습니다.”(19절) 하지만 이 순간까지도 이 여인은 예수의 정체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를 선지자로 인정하면서도 예배할 장소에 대한 논쟁적인 주제를 꺼냄으로써 유대인인 예수를 못 믿겠다는 투의 말을 던진다. 사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 예배의 장소에 대한 문제는 당시의 ‘뜨거운 감자’로서 서로 건드리면 안 되는 문제였다.
여인: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했는데, 당신들은 마땅히 예배할 장소가 예루살렘에 있는 그곳 만이라고 말합니다. [당신은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20절)
예수: 여인이여, 내 말을 신뢰하고 들어보시오. 때가 오면 이 산에서도 아니고 예루살렘에서도 아니라 아버지께 예배하게 될 것이오.-당신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들은 아는 것을 예배하지요. 왜냐하면 구원은 유대인들에게서 나기 때문입니다.-이제 그 때가 오고 있고 지금이 바로 그 때입니다. 즉 진실로 예배하는 자들이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때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신을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며, 그를 예배하는 이들은 마땅히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만 합니다(21-24절).
예배의 장소 문제를 건드리면 결국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대화는 단절될 수밖에 없는데 예수가 예배의 문제는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영과 진리의 문제라는 것을 말함으로써 대화의 소통이 계속될 수 있었다. 예수께서 “당신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들은 아는 것을 예배하지요. 왜냐하면 구원은 유대인들에게서 나기 때문입니다.”(22절) 라는 말을 할 때는 양자의 대화가 단절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예수는 곧바로 예배의 중요성은 성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이라는 것을 재천명함으로 여인에게 이 문제에 대해서 논박할 수 없게 만든다.
하지만 여인은 여기에도 굴복하지 않고 이제는 예배의 장소가 아니라 참 예배가 이루어질 시간에 대해서 말한다.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메시아가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주신다는 것을 나는 압니다.”(25절) 하지만 이러한 말에 대해 예수는 “네가 말하고 있는 자가 바로 그 분이다.”(26절) 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을 이 여인에게 계시한다. 결국 이 여인은 나중에 자신의 동네에 들어가서 “와서 이 사람을 보시오. 이분은 내가 과거에 행한 모든 것을 나에게 말한 분이오. 이분이 그리스도가 아니겠습니까?”(30절)라고 하여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인정하게 된다.
여기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은 요한복음에서 모델 제자의 하나로 자리매김 한다. 처음에는 예수의 말씀을 오해했지만 결국 예수의 집요한 선교 전략에 자신의 마음을 열게 되고 예수를 유대인 남자, 선지자로 인식하던 것에서 그리스도로까지 고백하게 되는 것으로 발전한다. 앞 장에 나오는 니고데모는 예수의 말씀에 대한 오해로 시작해서 그 오해가 오해로 끝났는데 반해, 사마리아인이 그것도 여성이 예수의 말씀을 올바로 깨닫게 되는 상황에 이른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4.2. 여인의 증언(31-42절)
사마리아 여인이 동네에 들어가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증언하고 돌아오는 사이에 예수와 제자들의 대화가 있었고 예수의 가르침이 이어진다.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이 물에 관한 대화를 하는 동안 먹을 것을 구하러 동네에 들어갔던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 가지고 돌아 와서 예수께 먹기를 청하자 예수는 음식을 먹는 대신 먹을 빵을 매개로 해서 자신의 사역을 설명하는 말을 한다.
예수: 나는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먹을 빵을 가지고 있다(32절).
제자들: 누가 선생님께 빵을 갖다 드렸습니까?(33절)
예수: 내 빵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완성하는 일이다(34절).
이 대화에서도 빵이 주제인데 예수와 제자들 각각이 생각하는 빵의 의미가 달랐다. 제자들은 사람의 입으로 먹는 빵을, 예수는 하나님의 사역을 위한 에너지원을 의미했다. 이러한 의미에 대한 오해는 요한복음에서 예수와 어떤 사람과 대화할 때 전형적으로 발생하는 것으로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도 물에 관해서 있었던 일이다. 이러한 오해가 발생하면 곧이어 이에 대한 예수의 설명이 뒤따른다. 여기에서는 사마리아 선교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일이고 지금 바로 여기가 바로 그 선교의 현장이라는 것을 예수는 추수의 비유를 통해 설명 한다(35-38절).
이러한 대화 중에 사마리아 여인의 증언을 듣고 예수를 믿은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이 사는 곳에 머무르기를 청하고 예수는 거기서 이틀을 묵으면서 이들에게 직접 말씀을 한다(39-42절). 이제 사마리아인들 중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는데 그것은 사마리아 여인의 증언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제는 예수께서 직접 가르치는 말씀을 통해서 그들이 예수를 믿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향해 미래 교회에서 이들의 말을 통해서 선교를 하도록 기도하는데 이러한 기도가 이미 사마리아 여인의 증언을 통해서 예수 부활 이전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를 “세상의 구주”(cf. 요일 4:14; 빌 3:20)로 고백한다.
5. 예수와 왕의 신하(4:43-54)
5.1 갈릴리로 돌아온 예수(43-45절)
사마리아에서 이틀을 유한 예수는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돌아온다(43절). 그런데 예수가 갈릴리로 돌아온 이유를 요한은 자신의 고국(patri,di)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한다는 예수 자신의 말씀에서 찾는다(44절; cf. 마 13:57; 막 6:4; 눅 4:24). 그렇다면 여기서 예수의 고국은 어디를 가리키는가? 예수가 유대에서 갈릴리로 간 것에 따르면 분명 여기서 그의 고국은 유대를 가리킨다. 그런데 공관복음서에 따르면 그가 자란 곳은 갈릴리이다(막 6:1-6a; 눅 4:16). 요한복음 4:44에서 고국이란 그가 자란 곳이라기보다는 그가 하나님의 사역을 한 주 무대, 즉 신학적 의미의 고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예수는 갈릴리로 돌아와서 갈릴리인들의 환영을 받는다. 그 이유를 요한은 예수께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행한 것들을 이들이 목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45절).
5.2. 왕의 신하의 아들의 치유(46-54절)
결국 예수는 다시 갈릴리 가나에 돌아온다. 가나는 예수가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 첫 번째 표적을 행한 곳이기도 하기 때문에 예수가 가나로 돌아온다는 말 속에 예수가 또 하나의 표적을 행할 것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 암시되어 있다. 곧이어 요한은 두 번째 표적을 맛볼 사람을 소개한다. 그는 가버나움에 사는 왕의 신하로서 그 아들이 병들어 있던 사람이다. 이 사람은 예수가 유대를 떠나 갈릴리에 왔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를 찾아와서 자기 아들이 병들어 죽어가고 있으므로 아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그를 치유해 달라고 요청한다. 이에 대해 예수는 그렇게 호의적인 것 같지 않은 응답을 한다. “표적과 기사를 보지 않으면 너희들은 결코 믿지 않는다.”(48절) 여기서 사용된 동사의 인칭이 이인칭 복수로 되어있기 때문에 예수가 이 말을 할 때 왕의 신하만이 아니라 듣는 모든 사람에게 한 것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이 말은 표적을 요청하는 것에 대해서 그리 긍정적이지 않은 언명이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왕의 신하는 예수께서 표적을 행할 수 있는 분임을 확실히 믿고 그에게 자기 아들을 고쳐달라고 요청한다. “선생님,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와 주십시오.”(49절) 이에 대해 예수는 마치 수로보니게 여인(혹은 가나안 여인; 막 7:24-30; 마 15:21-28)에게 결국 그 청을 들어주듯이 “가시오, 당신의 아이가 살았소.” 라는 말로 치유의 기적을 베푼다.
왕의 신하는 예수가 그에게 하신 말씀을 믿고 돌아간다. 그런데 그가 집으로 돌아가는 중간에 자신의 종을 만나서 자기 아들이 살았다는 말을 듣게 된다. 그리고 그가 병에서 회복된 시간을 물어보니 제 7시, 즉 오후 2시경 열이 떠나갔다고 한다. 이 사람은 예수가 자신에게 “당신의 아이가 살았소”라는 소리를 들은 그 시각이라는 것을 알고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온 가족”이 예수를 믿게 된다. 예수에 대한 증거를 듣고 “온 가족”이 믿었다는 표현은 누가와 바울이 사용하는 언어와 놀랍게도 일치 한다(cf. 행 16:33-34; 고전 1:16). 이 사건을 요한은 예수가 유대에서 갈릴리로 돌아와 행한 것으로서 두 번째 표적이라고 명명한다. 그가 예루살렘에서 행한 여러 표적은 수로 계산하지 않고 이 표적에 왜 “두 번째”라는 서수를 붙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아마도 예수가 행한 첫 번째 표적이 갈릴리 가나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독자들이 알고 있는 상황에서 여기에서 또 다시 한 표적이 일어났다는 것을 말하려고 했던 것 같다.
예수가 치유 기적을 베푸는 것은 복음서에서는 일상적인 것이다. 이 기적 사화에서 특이한 점은 이 기적을 환자에게 안수를 한다든지, 환자를 대면한 상태에서 한 것이 아니라 단지 환자에 대한 말만 듣고 행한 것이라는 데 있다. 하지만 이러한 기적이 요한복음의 예수 상에 의하면 그리 이상하지 않은 것은 그는 사람의 속마음과 사정을 다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2:24-25). 이미 예수는 나다나엘, 니고데모,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을 통해서 이러한 능력을 사용하셨다. 이 사람들과는 대면해서 이들의 마음을 읽었다는 것이 다를 뿐, 사람의 마음에 관한 한 전지한 예수는 이 능력을 통해서 사람의 마음을 찌르기도 하고, 병자를 치유하기도 한 것이다.
6. 해석과 적용
요한복음 3-4장은 예수가 사람들을 만나서 대화하면서 자신의 본질에 대해서 계시하는 것이 그 핵심 내용이다. 예외적으로 세례 요한 기사에서만 예수의 자기 계시가 아니라 요한의 증언에 의해서 예수가 소개된다. 예수와의 만남을 통해서 각 사람은 때로 오해하기도 하고, 자신의 치부를 감추기도 하고, 가족의 병을 치유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한다. 하지만 핵심 내용은 예수의 신적 메시아로서의 자기 계시이다. 예수의 자기 계시는 듣는 이로 하여금 신앙에로의 결단에 초청하는 것이 동반되고 이것에 어떻게 응답하는 가가 그 사람의 운명을 영생 혹은 심판으로 귀결시킨다.
예수의 만남과 교훈을 통한 자기 계시는 요한복음 5장 이후에도 계속되지만 그곳에서는 예수와 사람들과의 만남이 주로 적의적인 만남이라면 3-4장에서는 호의적인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의 호의를 받아 사마리아 사람으로서, 그것도 여성으로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데 까지 이른다. 이방인일 것으로 추정되는 왕의 신하도 결국 아들이 예수의 말씀으로 치유되어, 예수와의 만남이 곧 가족 전체의 회심으로 이어진다. 니고데모와의 만남은 앞의 두 만남에 비해 호의적이지 않은 것으로 묘사 되었지만 이후에 나오는 후속 구절에서의 니고데모의 예수에 대한 행태로 보아(7:50-52; 19:39) 이 만남도 결국은 호의적인 것으로 끝을 맺은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각 사람과 예수의 만남이 어떤 경우에 호의적이고 어떤 경우에 적의적이 되는가? 그것을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예수에 대해서 호의적인 언사로 접근한 니고데모에게는 그의 호의적 언사에 대해 예수는 일언반구의 대꾸도 없이 중생의 도리를 설파하여 그로 하여금 위로부터 태어나야 함을 가르친 반면, 예수가 호의적인 말로 접근한 사마리아 여인의 첫 반응은 그리 긍정적이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그녀에게 호의를 가지고 대화하기 때문이다. 3-4장 이후에 나오는 예수의 말을 통해서 보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하는 사람(7:17), 자신이 다 안다고 주장하지 않는 사람(9:35-41)이 예수의 본질을 깨닫기 쉽고 그 역은 어렵게 된다. 하지만 그 이전 부분에서 그 대답은 예수가 사람의 마음을 정확히 알고 있다(2:24-25)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로서 예수는 어떤 사람을 만나기 전에 이미 그 사람의 마음을 다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제 5장 유대인들과 대충돌하는 예수 1(5-6장)
1. 내용 구성
요한복음의 전반부(1-12장)는 예수와 유대인들 간의 충돌을 밑그림으로 사건이 전개된다. 성전 청결과 관련된 말씀에 유대인들은 예수의 권위에 도전하고(2:18), 유대인 니고데모는 예수의 중생에 대한 말씀을 깨닫지 못 한다(3:1-10). 하지만 여기까지는 충돌의 서곡에 불과하다. 예수와 유대인들 간의 충돌이 본격화된 것은 5장에 이르러서이다. 특히 5-10장에서는 예수와 유대인 간의 충돌이 극에 달한다. 예수와 유대인들이 충돌하게 된 배경으로는 안식일 준수에 관한 논쟁 등이 있었지만 근본적인 갈등은 기독론적 문제였다. 즉 예수는 자신이 인간적인 메시아를 넘어,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이라고 주장하고, 유대인들이 이것에 반발하여 대 충돌이 일어나는 것이다.
5-6장의 내용을 보면, 예수가 어떤 사건을 일으키고, 유대인들이 이것에 반발하고,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는 기독론적인 자신의 본질에 대한 가르침을 설파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첫 번째 충돌은 예수가 베다니에서 38년 된 병자를 치유한 사건에서 촉발된다. 예수는 환자를 치유하고(5:1-9a), 이 사건이 안식일에 행한 것이 정당한지에 관해서 논쟁이 일어나고(5:9b-18), 예수의 기독론적 자기 천명과 기타 교훈이 이어 진다(5:19-47). 두 번째 충돌은 급식이적과 물위를 걷는 이적을 예수가 행한 것(6:1-24)에서 일어난다. 이어서 표적에 대한 예수의 설명이 따르고 이에 대한 논쟁이 일어나고(6:25-59), 예수의 말씀에 대한 대중과 제자들의 반응이 나타난다(6:60-71).
2. 예수의 치유와 논쟁
2.1. 38년 된 환자의 치유(1-9a절)
예수의 치유 사건은 예수가 유대인의 명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을 배경으로 일어난다(1절). 예루살렘에 있는 베데스다 연못에는 전설에 의하면 천사가 그 연못의 물을 움직이게 할 때 누구든지 먼저 이곳에 들어가면 무슨 병이든지 나을 수 있다고 해서, 많은 환자들이 모여들었다(3b-4절). 그런데 이곳을 지나던 예수는 38년 된 병자를 주목하고 그 사람의 병이 벌써 오래 된 것을 그의 신적 본성으로 인식하게 된다(6a절; cf. 2:24-25; 1:48; 4:17-18, 29). 예수는 환자에게 접근하여 이렇게 말한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6b절) 그 환자는 전설을 믿고 있던 사람으로서, 천사가 와서 물을 움직이게 할 때 도와 줄 사람이 없다는 말로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함과 아울러 낫고자 하는 의지를 보인다. 이에 예수는 “일어나(e;geire)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외친다. 여기서 쓰인 “일어나다”라는 단어는 사람이 죽음에서 부활하는 것에도 쓰이는 것이기 때문에 이 말로써 예수는 이 사람의 육체적 질병 치료와 아울러 부활에 대한 암시를 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예수의 말씀에 따라 이 환자는 치유를 받는다(8-9a절).
예수가 환자의 낫고자 하는 의사를 확인하고 선언의 말씀으로 치유하는 것은 공관복음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치유 장면이다(cf. 막 1:40-42; 5:25-34). 하지만 이 치유 기사는 공관복음의 치유 이적과는 몇 가지 다른 점이 있다. 먼저, 예루살렘에서 치유 사역이 이루어진 것은 공관복음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다음으로, 치유가 이루어진 것이 예수가 신적 본성으로 환자를 인식하는 것에서 발원된 것(6절)은 전형적으로 요한적인 것이다. 요한복음의 예수는 어떤 사람을 만나서 대화하기 전에 이미 그 사람의 마음과 상태를 다 알고 있는 것이다(cf. 2:24-25). 하지만 이 기사에서 가장 요한적인 것은 치유 사건이 그 자체로서 목적이 있기 보다는 그 이후에 나오는 기독론적 논쟁의 지렛대 역할을 한다는 데 있다. 어떤 기적 사건에서 발원하여 이것이 기독론적 논쟁으로 이어지는 것은 전형적으로 요한적인 것이다.
2.2. 안식일에 행한 치유 사역에서 촉발된 논쟁(9b-18절)
예수의 치유 사역이 끝난 후에 저자는 이것이 안식일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기록한다(9b절). 저자가 이 내용을 치유 사역 끝에 기록함으로써 본문에서 예수의 치유 사건이 또 다른 사건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예수가 안식일에 행한 사역을 통해 유대인들과 논쟁이 발생하는 것은 공관복음과 요한복음 모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cf. 막 3:1-6; 요 9:14). 예수가 안식일에 행한 치유 사역은 결국 예수와 유대인들 간의 충돌로 이어진다.
유대인들의 공격은 예수에게 곧바로 향하지 않고 예수가 치유한 환자에게 향한다. 유대인들은 환자에게 치유를 받고 누워있던 침상을 들고 걸어간 것은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율법을 어긴 것이기 때문에 옳지 않은 일이라고 선언한다(10절). 이러한 선언에 대해서 이 사람은 유대인들이 말하는 율법에 호소하기 보다는 자신은 자신을 치료한 사람의 말을 따랐을 뿐이라고 대답한다(11절). 율법의 가르침이 아니라 어떤 사람의 말을 따라 이러한 행동을 했다는 이 사람의 말에 화가 난 유대인들은 그가 누구인지 묻지만 이 사람은 자신을 치유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12-13절). 이러한 상황에서 이 사람은 예수를 성전에서 만나게 된다. 이 때 예수는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14절)는 말을 하게 되고 이 사람은 바로 예수가 자신을 치유한 사람임을 알고는 유대인들에게 이를 고한다(15절).5)
그 환자를 안식일에 치유한 인물이 예수라는 것을 안 유대인들은 예수를 핍박한다(16절). 여기서 예수가 안식일에 행한 치유 사역이 정당함을 안식일에 관한 율법적 논쟁으로 풀었다면 이 사건은 안식일 논쟁으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요한복음에 전형적으로 나타나듯이 예수는 이 문제가 하나님과 자신의 특수한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예수는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17절)고 천명한 것이다. 이 말로써 예수는 앞으로의 논쟁이 예수의 신적 본성에 대한 논쟁이 될 것임을 선언한 것이다. 이 말 속에서 유대인들은 예수가 하나님을 “친 아버지”라고 부름으로써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기는 것이라는 것을 찾아낸다(18절). 흥미로운 것은 다음에 이어지는 예수의 선언은 이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에게 신적 본질이 있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10장 30절에서도 예수는 자신에게 도전하는 유대인들에게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선언함으로써 자신의 신적 본성을 천명한다.
2.3. 예수의 기독론적 자기 천명과 교훈(19-47절)
유대인들은 예수가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거부감을 느낀다. 또 하나님과 예수는 특별한 부자(父子) 관계에 있다는 예수의 말에 대해 유대인들은 이것이 신성모독에 해당된다고 고소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는 이들의 고소에 대해서 변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들의 고소 내용이 옳다고 선언한다.
2.3.1.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19-30절)
예수가 안식일에 환자를 치료한 것인 정당한 것인가? 예수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런데 예수는 그것이 율법의 어떤 조항에 근거한다고 논증하지 않는다. 그가 안식일에 환자를 고치는 것이 정당한 것은 그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고, 자신은 그것에 따라서 그 일을 한 것이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들인 예수는 스스로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관계 속에서 아버지의 행하는 것을 따라 행한다는 것이다(19절). 이어 예수는 하나님은 예수와 특별한 관계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예수께 자신이 하시는 모든 일을 보여주고 또 미래에는 더 큰 일을 보여주어 사람들을 놀라게 할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더 큰 일이란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것을 포함하여 인간이 할 수 없는 여러 가지 기적적인 일을 가리키는 것일 것이다.
이어지는 예수의 말은 이제 안식일 논쟁을 넘어서 예수의 신적 본성에 대한 것이다. 예수는 자신의 본질에 대해서 이렇게 천명한다. 먼저, 하나님이 죽은 자를 살리는 것처럼 신적 본성을 가지고 있는 예수도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을 할 수 있는 분이다(21절). 심판자이신 하나님은 모든 심판을 아들에게 맡겼기 때문에 아들인 예수는 심판자이다(22절). 또 하나님처럼 예수도 공경 받을 존재이다(23절). 나아가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과 예수를 공경하는 것은 분리된 것이 아니다(23절).
자신의 신적 본성에 대해서 선포한 예수는 이제 요한복음의 케리그마라 할 수 있는 영생의 복음을 전한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24절) 여기에는 잘 알져진 요한의 ‘실현된 종말론’ 사상이 배어있다. 예수를 믿은 사람은 이 땅에서 이미 영생을 소유하여 종말이 이미 이 땅에서 실현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요한복음에 실현된 종말론이 있다고 해서 미래적 종말론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바로 뒤 구절은 종말이 또한 미래에 속한 것임을 말하고 있다. 종말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들은 살아날 것이라는 것이다 (25절). 결국 모든 사람은 종말에 심판대 앞에 설 것인데 어떤 사람은 생명의 부활을, 어떤 이들은 심판의 부활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29절).
2.3.2. 예수 사역의 증인(31-47절)
예수는 자신이 정당함을 유대인의 증언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자신의 사역은 자신 스스로가 아니라 타인에 의해서 증언되는 것이라는 것이다(31-32절). 구약과 미쉬나에는 어떤 사안을 판단할 때 한 사람의 증언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두 사람 이상의 증언을 취하게 되어있다(cf. 민 35:30; 신 17:6). 이러한 문화 속에서 예수는 증언이라는 개념으로 자신의 사역이 정당함을 입증한다. 먼저, 예수는 자신의 사역은 세례 요한에 의해서 증언되는 것이라고 한다(33절). 요한복음 서문과 이후에 나오는 본문을 통하여 세례 요한의 사명은 예수에 대해서 증언하는 것이었다. 세례 요한이 자신의 증인이라고 하면서도 예수 자신은 그것에 근거해서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34절). 자신에 대한 증인은 하나님이 하라고 한 그 역사 자체와 하나님 자신이라고 말한다(36-37절). 이 말 속에는 이 말을 듣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각자가 하나님의 증언을 듣고 있는가를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증언을 듣고자 하는 자는 예수의 주장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예수는 구약 성서가 바로 자신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는 문서라고 말한다(39절). 예수가 주장하는 것이 기괴한 것이 아니라 바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소중하게 생각하는 구약 성서가 증언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모세가 기록한 율법이 곧 예수에 대해서 증언하는 것인데 유대인들은 그것을 믿지 않기 때문에 예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45-47절). 이들은 자신의 영광에 관심이 있는 나머지 자신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모세의 율법을 잘못 해석하여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다. 즉 이들이 부당한 것은 성서가 증언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이미 메시아라고 천명되었다. 그런데 구약성서를 비롯한 유대 문헌에서 메시아가 신성이 있는 인물이라는 것은 나오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한 신성을 가진 인물임을 천명하고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구약 성서를 잘못 해석한 것이라고 한다. 구약 성서의 문자에만 익숙한 사람은 위 예수의 메시지를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구약 성서 전통에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이고, 여기서 예수는 이런 전통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며,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로서 예수는 하나님 말씀의 완전한 계시자로 위와 같은 말씀을 선포한다고 할 때 예수의 신적 메시아로서의 자기 천명은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3. 생명의 떡 예수(6:1-71)
3.1. 두 가지 표적(1-24절)
요한복음 6장의 두 가지 기적 이야기(1-24절)를 읽으면 독자는 공관복음을 읽는 것과 같은 착각을 일으킬 수도 있을 것이다. 이곳이 바로 요한복음과 공관복음 사이에 흔치 않은 공통된 내용을 다루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급식이적은 사복음서에 모두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요 6:1-13; 마 14:13-21; 막 6:32-44; 눅 9:10b-17) 요한복음의 자료와 요한복음과 각 공관복음서의 문학적 관계 등에 관해서 학자들이 많은 관심을 기울여 연구해왔다. 그 자료와 문학적 관계가 어떠하던지 간에 요한복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급식이적의 마지막 부분에 나타나 있다(14-15절).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요한은 이 기적을 표적이라고 하고, 그것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표적을 보고 예수를 모세와 같은 “그 선지자”로 여기게 된다(cf. 신 18:15; 요 1:21). 하지만 예수는 사람들의 이러한 인식을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즉 예수의 표적에 의해 사람들이 예수를 인식하게 되지만 부적절한 인식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급식이적을 표적이라고 명명하고 그것에 대해서 어떠한 반응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전형적인 요한적인 터치가 배어 있는 것이다.
이어지는 예수가 물위를 걸어가는 기적(16-24절) 또한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것인데(마 14:22-33; 막 6:45-52) 이 기적 사화는 공관복음 병행사화와 매우 유사하다. 여기에는 요한복음적인 특징은 많이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예수가 물위를 걸어오면서 제자들에게 나타나 “내니”(evgw, eivmi)라고 한 말은 공관복음에도 같은 표현으로 나타나기는 하지만 이곳에서는 다른 요한복음 본문에서처럼 “나는 나다”라는 신적 자기 계시를 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cf. 출 3:14; 사 41:4).
3.2. 표적에 대한 해석을 둘러싼 충돌(25-59절)
급식 이적과 물위를 걷는 이적 자체보다도 이 이적에 이어지는 예수와 유대인들 간의 대화와 충돌을 기록한 부분에 요한신학의 독특성이 나타나있다(25-59절). 요한복음 5장에서도 예수가 병자를 고친 이적이 안식일 논쟁으로, 안식일 논쟁은 다시 기독론 논쟁으로 이어지듯이, 6장에서도 예수의 이적은 하나님의 일과 표적에 대한 논쟁으로(25-31절), 이 논쟁은 결국 예수의 본질에 대한 논쟁으로 귀결된다(32-59절). 출애굽 시 광야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었던 떡과 만나가 하나님의 역사의 표적이었던 것처럼, 예수가 자신의 가르침을 증명할 표적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예수는 자신이 바로 “생명(영생)의 떡”이라고 천명한다(35, 48, 51절). 이 말을 하면서 예수는 “나는 ...이다”(evgw, eivmi)라는 문구를 사용함으로써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신적 본질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
이 떡은 세상에 생명(영생)을 주는 떡이다. 곧 이 떡을 먹는 사람은 영생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서 죽었듯이 이 떡을 먹지 않는 자는 영생을 얻지 못하고 죽게 될 것이다. 나아가, 이스라엘 사람 중에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결국 죽었지만 생명의 떡인 예수를 먹는 자는 영생을 얻게 될 것이다. 예수는 생명의 떡과 관계된 자신의 본질을 말할 때 구약과의 연결점을 말하면서도, 동시에 불연속성이 있음을 암시하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이 새로운 계시임을 천명한 것이다. 또 예수는 자신이 생명의 떡으로서 세상 사람들이 생명을 얻기 위한 “살과 피”라고 소개한다. 이 부분은 성만찬 제정 본문이 없는 요한복음에서 성만찬을 간접적으로 언급한 본문으로 널리 인식되어 왔다(51-59절). 이 본문이 성만찬에 대한 암시이든지 그렇지 않든 간에 중요한 것은 이 말씀을 통해서 이제 새 시대에 있어서는 예수와의 관계에 의하지 않고는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신과 사람들의 생명적 관계를 떡이라는 메타포에서 출발하여 이제 예수는 이것을 “살과 피”라는 또 다른 메타포로 연결하는데, 요점은 떡이든 “살과 피”든, 각각은 영생(생명)을 얻는데 필수불가결한 요소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예수와 생명적 연합이 없이는 영생은 없는 것이다.
3.3. 사람들의 반응(60-71절)
위와 같은 예수의 가르침에 대해 표적을 보고 예수를 따랐던 여러 제자들은 이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 말씀은 기존에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신관과 세계관을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그랬던 것처럼 수군거리는 자들이 되었다(61절). 결국 예수의 계시는 이 사람들에게 예수를 더 이상 따를 수 없는 걸림돌이 되고 이들은 예수의 제자가 되기를 그만둔다(66절).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는 열 두 제자 그룹에게 “너희도 떠나갈 생각이냐?”고 묻게 되고 이 때 베드로는 공관복음서에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베드로가 한 고백(마 16:16)과 비견되는 요한복음 판 신앙고백을 한다.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신 줄 알았삽나이다.”(68-69절)
4. 해석과 적용
4.1. 5장
요한복음 5장은 38년 된 환자의 치유와 이어진 안식일 논쟁과 이에서 촉발된 예수의 기독론적 천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치유와 안식일 논쟁은 배경으로 자리 잡고 예수의 기독론적 천명이 그 주제로 자리매김 되어 있다. 요체는 예수가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 속에 있는 아들이고 그 아들은 하나님과 동등한 신적 존재라는 것이다. 바울 서신에서도 예수가 높이 고양되어 있지만 요한복음에서와 같이 예수가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이고(10:30), 나아가 하나님이라는 언명(1:1, 18)에 까지 이르지는 않는다. 바로 이 점이 요한복음의 특색이며, 우리가 믿고 있는 완전한 신으로서 성자요,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위격인 예수를 믿는 토대가 된 것이다.
요한복음 5장은 요한복음의 기독론적 특색으로서 아들 기독론이 펼쳐져 있다. 하나님과 예수는 부자(父子)로서 독특하고 유일한 관계이다. ‘아들,’ ‘독생자’ 등의 단어는 예수에게만 사용된다. 신자는 하나님의 ‘자녀’로 표현된다. 요한 기독론의 특징은 예수가 하나님의 특별한 아들이라는데 있다. 요한복음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먼저, 아들은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 아들은 아버지보다 크지 못하다 (14:28). 아들은 아버지의 대리자요 대표자로서 아버지께 순종하고(4:34; 5:30; 14:31), 아버지를 공경하고(8:49), 아버지를 영화롭게 한다(17:1).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한다(3:35; 17:5).
또 요한복음에서 아들은 아버지의 보내신 자일뿐 아니라 아들과 아버지는 하나이다(10:30; 17:20-23). 이 점이 요한복음 아들 기독론의 독특한 점이다. 요한복음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라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표함하고 있다. 첫째, 아들의 기능은 아버지의 기능과 하나다(5:17-18, 43; 14:9-10). 둘째, 아들을 섬기는 것과 아버지를 섬기는 것은 하나다(5:23; 8:19; 14:7, 21). 셋째, 아버지의 영광은 아들에게 나타난다(1:14; 2:11, 18; 4:48, 53; 5:36; 6:32, 43; 8:21; 21:19). 넷째, 아버지와 아들은 친밀하다(1:14; 10:15, 38; 17:20-23).
위와 같은 요한복음의 아들 기독론은 삼위일체 교리의 기초가 된다. 결국 예수의 반대자들인 유대인들은 삼위일체 교리를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예수에 의해서 계시되고 선포된 것이다. 이러한 계시가 신약성서 도처에 나타나 있지만(마 28:19; 고전 12:4-6; 고후 13:13 참조) 이것이 가장 명확한 것이 요한복음이고 예수의 직접적인 자기 계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유대인들과 충돌을 일으키는 것이 요한복음 5장이다. 이러한 계시가 있을 때 충돌이 일어나는 것은 이천년 전 유대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예수를 하나님 아버지의 관계 속에서 독특하고 유일한 신적 존재인 아들로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충돌일 것이다.
4.2. 6장
6장의 내용은 요한복음 이전 장들에서 전형적으로 보이는 것처럼, 예수가 표적을 행하(1-24절), 이것은 신적 본질에 대한 예수의 자기 계시에 관한 강화 및 대화로 이어지(25-59절), 이에 대한 두 가지 서로 다른 반응-신앙과 불신앙-을 기록한 것(60-71절)이다. 결국 독자에게 신앙의 반응을 보일 것을 가르치는 것을 암시적으로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제 6장 유대인들과 대충돌하는 예수 2(7-8장)
1. 내용 구성
2004년 연말에 남아시아에서 대륙 지각 판들이 대 충돌한 후 엄청난 지진과 해일이 일어난 사건을 통해, 우리는 지구 지각 판 대 충돌의 위력이 얼마나 큰가를 똑똑히 목도할 수 있었다. 요한복음 5-10장은 예수의 신적 본질에 대한 문제로 예수와 유대인들 간에 대 충돌이 일어난 것을 기록한 것이다. 지각 판들이 충돌하면 한 번의 큰 충돌 후 여진이 일어나듯이 예수와 유대인 당국자들은 첫 번째 충돌 후 여러 번에 걸쳐 재 충돌한다. 지각 판의 충돌은 대 충돌 후 여진이 이어진다면, 예수와 유대인 당국자들의 충돌은 갈수록 그 충돌이 커진다. 이러한 충돌이 최고조에 이른 것이 요한복음 7-8장이고 그 중에서도 8장이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이러한 충돌은 후에 유대인 당국자들이 예수를 고소하여 빌라도로 하여금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하게 하는 사건으로 결말지어진다. 이러한 대 충돌에 대한 부분은 요한복음 전반부의 중심부분으로써 예수는 유대인들과의 충돌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와 관계된 자신의 신적 본질을 계시하고 천명한다.
2. 영생수의 근원 예수(7:1-52)
2.1. 예수 형제들의 불신(1-9절)
요한복음 7장은 예수가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유대인들과 충돌한 사건을 배경으로 한 내용이다(1-2절). 유대인들의 박해를 피해 갈릴리에 머물러 있던 예수에게 그의 동생들은 큰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유대로 가야 되지 않겠느냐고 말한다(3-4절). 이렇게 예수를 정치적으로 성공할 인물로 잘못 이해하고 있던 동생들에게 예수는 자신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하면서 그의 동생들의 종용을 받아들이지 않는다(6-9절). 여기서 요한복음 저자는 이렇게 예수를 오해한 예수의 형제들의 행동을 불신앙으로 규정한다(5절). 예수의 형제들조차도 부활 이전에는 그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거기에 예수는 세상이 자신의 형제들을 미워하지 못하되 자신은 미워한다고 하여(7절) 그의 형제들이 세상에 속한 자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어떤 혈통이나 인간적 방법과는 상관없다는 요한복음 프롤로그에 있는 선언과 상응하는 것이다(1:13). 여기에는 복음서가 기록될 당시 예수의 친 형제들의 위신을 깍아 내리려는 어떤 정치적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사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의 어머니를 포함하여(cf. 2:1-11) 예수 부활 이전에는 애제자와 세례 요한을 제외하고는 예수의 본질을 정확히 깨달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 요한복음 저자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예수와의 어떤 인간적 관계에 의해서도 그의 제자가 될 수 없고 오직 각자의 신앙에 의해서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이전의 천명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2.2. 예수와 유대인들 간의 첫 번째 충돌(10-24절)
자신의 형제들의 그릇된 종용을 받아들이지 않던 예수는 그의 동생들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후 혼자 조용히 그 뒤를 따라간다(10절). 그곳에는 벌써 예수에 대한 소문이 퍼져 있었고 예수의 인물됨에 대해서 사람들이 수군거리고 있었다(11-13절). 이 모든 것을 갈파하고 있는 예수는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루살렘에 올라가 가르침을 베풀며, 자신에 대한 여러 가지 평가에 대해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결단]하면 [자신이 말하는]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지어서] 말함인지 알리라”고 선언한다(17절). 즉 진정한 판단은 이전의 지식과 그 지식의 출처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하는 순수한 의도에 달렸다는 것이다. 이 말을 함으로써 예수는 사람들이 자신을 핍박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이해부족에서라기 보다는 더 근원적으로는 유대인들이 섬기는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않고 있는 문제라는 것이다. 예수는 스스로 율법을 소중하게 여긴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오히려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19절)고 선언한다.
이에 대해 유대인들은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20절)라고 말하면서 예수의 말에 반박한다. 이에 대해 예수는 자신이 38년 된 병자를 안식일에 치유한 것에 대해서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예수를 반대하는 것을 알고 이들의 논리의 허점을 파헤친다. 즉 유대인들은 생후 8일 되는 날 할례를 행했는데(cf. 창 17:12; 레 12:3) 이날이 안식일이어도 할례를 행하는 것을 볼 때 안식일 준수 명령이 절대적인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예수는 안식일을 무시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이 행하는 표적이 안식일 준수보다 더 상위의 원리이고, 그렇게 환자의 치유를 행하는 것이야말로 안식일 본래의 취지인 사람의 안식에 부합하다는 것이다(21-23절). 결론적으로 예수는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고 다시 한번 판단에 있어서의 순수한 의도를 강조한다(24절).
2.3. 예수와 유대인들 간의 두 번째 충돌(25-36절)
위와 같은 예수의 말씀에 대해서 예루살렘 사람들은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 그가 공개적으로 말하는 내용 중에 이상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단지 예수의 인간적인 출신 배경이 갈릴리로 널리 알려진 것을 통해서 볼 때 이 사람은 메시아는 아니라는 것이다. 메시아가 오면 그 출생 배경을 알 수 없는데 자신들이 아는 예수는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예수의 메시아 성에 대해서 의심한다(25-27절). 이에 대해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났고 그의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본질을 드러낸다(28-29절). 이 말을 하자 “그들”이라고 표현된 일단의 사람들-아마도 그 이후에 나오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그들의 하속(32, 45절)-이 예수를 체포하려 하지만 아직 예수가 잡힐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예수를 해치지 못한다. 예수는 힘이 없어 체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들”과는 다르게 무리 중 많은 사람들은 예수가 행한 표적을 통해 그를 믿는다(31-32절).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것에 자극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보낸 병졸들이 예수를 체포하려 하지만 예수는 이들에게 자신의 죽음을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하고(34절; cf. 13:33) 사람들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들은 예수가 헬라인들에게 가서 헬라인들을 가르친다는 말인가 하고 서로 반문하고 있는 것이다(35절). 무슨 말인지 모르고 한 이들의 말은 흥미롭게도 사실이다. 예수의 말씀은 헬라인들에게 전달될 것이고, 유월절에 헬라인들이 예수를 찾으러 오자(12:20-21) 예수는 자신이 영광 받을 때인 것을 인식한다(12:23).
2.4. 예수와 유대인들 간의 세 번째 충돌(37-52절)
초막절에 일어난 예수와 유대인들 사이의 또 한번의 충돌은 초막절에 관계해서 자신의 본질에 대해서 천명한 그 말에서 발단하여 일어난다. 예수는 말세에 부어질 성령 체험과 관계해서 자신의 본질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37-38절).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이 구절의 해석을 두고 학자들 사이에 많은 논란이 일고 있다.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그[의] 배”가 신자의 배인가 아니면 예수 자신의 배인가 하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신자의 성령 경험이 강조되고(교회론적 해석) 후자의 경우에는 성령 부여의 원천으로서 예수가 부각된다(기독론적 해석). 문법적으로는 두 가지 해석이 모두 다 가능하나 “그의”가 예수의 입에서 말해진 것으로서 제 삼자, 즉 신자를 말한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하지만 성령을 보내는 분이 예수라는 요한신학으로 볼 때(15:26) 기독론적 해석을 취하는 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어쨌든 요한복음 저자는 여기서 생수의 강을 신자들이 예수 부활 후에 경험할 성령 체험을 가리킨다고 말한다(39-40절).
위의 말은 요컨대 예수에게서만 참 생명이 나오고 그를 믿음을 통해서만 약속된 성령의 체험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예수의 선언에 대해서도 찬반의 반응이 계속된다. 그 동안 논란이 있었던 대로 어떤 이들은 예수를 “그 선지자”(cf. 신 18:15)로 혹은 그리스도로 주장하며 다른 이들은 그의 출신 배경이 갈릴리임을 들어 그가 메시아임을 부정한다(40-43절). 물론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를 체포하려고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예수의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은 예수의 몸에 손도 대지 못한다(44절).
군중들의 의견이 나뉘어 논쟁하는 것을 지켜보았을 뿐 예수를 체포하여 오라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명령(32절)을 실행하지 못하고 그들의 군사들이 돌아온다. 물론 대제사장들의 무리는 그 하속들에게 왜 그를 체포해오지 않았느냐고 다그친다(45절). 그 하속들은 예수의 말에 자신들이 압도되었음을 고백한다(46절). 이에 격분한 바리새인들 무리는 “너희도 미혹되었느냐?”고 꾸짖으면서 당국자들, 바리새인들, 율법을 아는 자들은 아무도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며 오직 율법을 모르는 저주받은 무리만 예수를 따르는 것이라고 한다(47-49절). 이러한 상황에서 밤에 예수께 찾아왔던 니고데모가 나타나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고 하면서(cf. 신 1:16) 예수를 옹호하는 발언을 한다(50-51절). 하지만 바리새인 무리는 니고데모의 출신이 혹시 갈릴리가 아닌가 의심하면서 선지자가 갈릴리에서 날 수 없다는 주장으로 니고데모의 말을 반박한다(52절).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 하는 이슈와 만난다. 7장 이전과 이후의 기사에서 예수는 자신의 신적 본질을 천명하고 이에 대해서 유대인 당국자들이 반발하여 충돌하는 장면을 계속해서 만나게 된다. 7장에서도 이러한 충돌이 계속된다. 하지만 7장에서는 예수의 자신에 대한 계시보다도 그러한 계시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더 핵심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 이유를 자신들이 예수가 출생 배경을 알기 때문에(27절), 또한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41-42; 52절). 하지만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긍정하는 사람들은 예수가 행한 표적을 볼 때(31절), 혹은 그의 말의 결말을 기다려 보기 전에는 판단을 유보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49절). 예수는 이 모든 것에 대해 사람이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할 마음이 없기 때문에(17절), 그리고 공의로 판단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24절). 예수는 자신의 계시가 이전 계시와는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이전 계시에도 충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 것이다. 결국, 이 기사를 통해 요한복음 저자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거부한 것은 결국 하나님에 대한 불충에서 기원한 것이라고 힘주어서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3. 세상의 빛 예수(8:12-59)
8장 이전에는 주로 예수의 자기 계시에 따라 유대인들의 불 신앙적 반응으로 예수와 유대인들의 충돌이 이루어졌다면, 8장에서는 예수가 유대인들과 논쟁과 대화를 통해 충돌을 일으킨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예수의 목소리뿐만 아니라 반대자들의 목소리도 보다 많이 듣게 된다. 논쟁은 예수의 기독론적 자기 선언과 유대인들이 예수의 말꼬리를 잡는 형태로 이루어져 결국 가장 쓰디쓴 충돌로 이어진다.
예수와 유대인들 간에 오간 논쟁적 대화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3.1. 첫 번째 대화(12-20절)
예수: 나는 세상의 빛이다.
바리새인들: 네가 너 스스로를 위해서 증거하니 네 증거가 참되지 않다.
예수: 나는 스스로의 본질을 알기 때문에 스스로 증거 해도 참되다. 또 나와 나를 보내신 아버지-즉 하나님-가 같이 증거 하니 유대인의 율법에 따라 두 사람의 증거임으로 참되다.
바리새인들: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 너희는 나와 내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7장과 연관되어 초막절에 예루살렘에서 예수는 계속해서 자신의 본질을 천명한다. 예수는 “나는...이다”라는 신적 자기 계시 문구를 사용해서 자신이 세상의 빛이라고 선언하고(12절) 유대인들은 어떤 증거가 참이려면 두 사람의 증거가 있어야 하는 율법의 원칙(cf. 민 35:30; 신 17:6; 19:15)을 들어 예수의 말을 반박한다. 하지만 예수는 자신과 하나님 아버지가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증거가 참된 것이라고 한다. 물론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아버지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결국 예수를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인데 이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3.2. 두 번째 대화(21-29절)
예수: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유대인들: 저가 자살하려는가?
예수: 너희와 나는 본질적으로 다른데 너희는 “내가 그”(evgw, eivmi)인 줄 믿지 아니하면 죄 가운데 죽으리라.
유대인들: 네가 누구냐?
예수: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온 자니라. 내가 부활한 후 너희는 “내가 그”인 줄 알게 되리라.
이 대화에서도 요한복음에서 예수와 대화 상대자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유대인들은 예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예수는 자신의 고난/부활/승천을 통해서 영광 받는 것을 떠난다는 말로 표현하지만 이들은 이것을 예수가 단순히 자살하려는 것으로 이해한다. 결국 예수는 이들에게 심판의 메시지를 전한다. 예수가 “내가 그”라는 문구를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보내신 자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면 결국 이들은 심판을 받고 죽게 된다는 것이다.
3.3. 세 번째 대화(30-47절)
예수: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유대인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녀로서 남의 종이 된 일이 없다.
예수: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다.
유대인들: 우리 조상은 아브라함이다.
예수: 참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진리를 말하는 사람을 죽이려 하지 않는다. 너희는 너희 아버지의 행사를 한다.
유대인들: 우리 아버지는 하나님이다.
예수: 너희 아버지는 마귀다.
이 대화의 주제는 사람의 주권과 관계된 것이다. 예수는 어떤 사람이 죄를 범하면 죄의 노예가 되는 것이고, 그 사람은 결국 마귀의 자식이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들이기 때문에 참 하나님의 자녀라고 한다. 하지만 예수는 하나님의 자녀이면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의 말을 들을 텐데 그렇지 않기 때문에, 이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고 마귀의 자식이라고 한 것이다. 예수가 직접 유대인들에게 “마귀의 자식”이라고 한 것은 그 이전과 이후에 행해진 어떤 말보다도 유대인들에 대한 쓰디쓴 심판의 메시지이다. 여기서 유대인들은 민족으로서의 유대인을 가리키는 것이라기보다는 예수의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 당국자들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3.4. 네 번째 대화(48-59절)
유대인들: 너는 사마리아 사람이고 귀신들렸다.
예수: 나는 귀신 들린 것이 아니다. 사람이 내 말을 들으면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유대인들: 우리 조상 아브라함도 죽었는데 네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위대하냐?
예수: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노라.
유대인들: 네가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예수: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예수의 쓰디쓴 심판의 메시지에 유대인들도 반발하여 예수를 사마리아 사람이요, 귀신들린 사람이라고 공격한다. 여기서 예수가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공격한 것이 어떤 연유에서에서 그렇게 된 것인지는 명확치 않지만 유대인들에게 있어 사마리아인은 비 정통이요, 이단자들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그 의미는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는 이들의 말에 반박하며 영생의 메시지를 전한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입장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인 예수가 오히려 아브라함보다 위대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엉뚱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수는 아브라함은 인간적 출생에 의해 존재한 사람이었고, 자신은 신적 존재라는 것을 천명한다. 이것에 대해 유대인들은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하여 예수를 돌로 치려 한 것이다.
4. 해석과 적용
요한복음 7-8장에 나와 있는 예수와 유대인들의 충돌의 내용은 간단한 것이다. 예수는 자기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신적 존재라고 주장하고, 유대인들은 이것을 신성모독이라고 반박하면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이 충돌은 양 편에서 서로 양보나 타협을 통하여 ‘제3의 길’을 갈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가 자신이 신적 존재라고 천명하는 것을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이것을 거부하든지 둘 중의 하나밖에 없는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이 충돌이 양자에게 조금도 타협점이 없는 심각한 수준이기 때문에 그것을 누그러뜨리는 의미에서 이 충돌은 역사적 예수와 유대인들의 갈등을 반영하기보다 역사상 일세기 말 그리스도인과 유대인들 간의 쓰디쓴 충돌을 반영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구체적으로는 90년대에 얌니아(혹은 야브네) 에서 유대인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이단에 대한 저주 선언문’에 의해 기독교인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회당에서 축출한 사건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유대인들이 기독교인들을 이단으로 저주하여 회당에서 축출당한 경험으로 인해 기독교인들도 유대인들에게 요한복음 본문에 반영되어 있는 것과 같은 쓰디쓴 갈등과 저주를 표출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럴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예수의 기독론적 자기 계시는 실재했던 것이며, 그것의 충격은 아무리 크다 해도 그것을 억지로 누그러뜨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역사상 유대인들이 경험했던 이 충돌은 그 이후에 오는 모든 사람이 실존적으로 경험하는 것이며, 거기에 예수를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든지, 이것을 거부하든지 둘 중의 하나 결단을 해야 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저자는 바로 이러한 충돌에 대한 묘사를 계속해서 다룸으로써 그 충돌은 실재하고, 의미 있는 것이며, 독자로 하여금 믿음으로의 결단을 촉구하기 위해 이 부분을 쓰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존재하기 전에 예수가 존재했다는 언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것에는 그것이 거짓말이요, 사기라는 해석 아니면 그것은 사실이며, 따라서 예수를 신적 존재라는 결론 중 두 가지 중 하나 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언명 앞에서 신앙 혹은 불신앙 중 결단해야 하는 것이다.
제 7장 유대인들과 대충돌하는 예수 3(9-10장)
1. 내용 구성
일견하면 요한복음 9-10장은 특히 바로 앞에 나오는 7-8장과 내용상 직접적인 연관점을 찾기 어렵다. 하지만 예수와 유대인 당국자들 간의 기독론과 연관된 대 충돌이라는 점에서 9-10장은 앞 장과 주제 상으로 깊이 연관되어 있다. 9장은 예수가 태생 소경을 고친 표적을 행한 것에서 촉발된 유대인들의 예수에 대한 반발과 이에 대한 예수의 심판의 메시지가 그 내용이다. 여기에서 예수의 심판의 메시지(39-41절)가 바로 앞 장에서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8:44)라고 하는 것보다는 약하지만 여전히 이곳에서도 예수와 유대인들과의 대 충돌은 계속되고 있다. 10장에서도 예수는 목자 강화(1-18절)를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는데 이에서 끝나지 않고 이에 관해서 예수와 유대인 당국자들 간의 신랄한 논쟁이 이어진다(22-39절).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주장하고 유대인들은 이에 반박하면 예수는 또 이들을 말을 재반박한다. 예수와 유대인들의 충돌의 절정에 이르렀던 8장에 비하면 약간 수그러든 듯하기도 하지만 여기에서도 예수의 본질에 관한 문제로 예수와 유대인들은 극단적인 대립을 한다. 예수는 이 대립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그 대립 각을 곧추세우며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2. 예수와 한 시각 장애인(9:1-41)
예수가 무명의 태생 시각 장애인을 치유한 본 장의 기사는 전형적으로 요한적인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본 기사도 공관복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시각 장애인 치유(cf. 막 8:22-26; 10:46-52)로 시작하지만(1-7절)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결국 이것이 예수가 누구인가 하는 요한복음의 본질적 질문으로 귀결되고(8-34절) 그것을 통해 그 기사의 목적이 예수의 메시아적 본성을 드러내는 것에 있다는 면에서(35-41절) 이 기사는 전형적으로 요한적이다.
2.1. 예수의 태생 시각 장애인 치유(1-7절)
본 기사는 예수의 제자들이 길을 지나가다 마주친 태생 시각 장애인에 대해서 그가 이렇게 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인지에 대해서 예수께 질문하는 것으로 시작된다(1-2절). 이렇게 병이나 불행이 어떤 사람의 죄 때문인가 하는 것은 유대교내에서도 오래된 논쟁 이슈였다(cf. 출 20:5; 눅 13:1-5). 이에 대해 예수는 의외의 대답을 한다. 이 사람이 날 때부터 시각 장애인이 된 것은 이 사람의 죄에서도 부모의 죄에서도 기원한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는 것이다(3절; cf. 5:15). 이 말과 더불어 예수는 바로 지금 이 시간이 예수가 세상의 빛으로서 치유를 행할 ‘낮’이고, 예수가 세상을 떠나는 ‘밤’에는 그러한 사역을 할 수 없는 시간이라고 천명한다(4-5절). 이어서 예수는 침으로 진이긴 진흙을 그 사람의 눈에 바르고(cf. 막 8:23), 예수의 명령에 따라 그 사람은 실로암 연 못 물로 씻어 결국 치유를 받게 된다(6-7절). 이러한 방법으로 소경을 치유하는 것은 공관복음에도 나타나지만(cf. 막 8:23), 그것이 치유 자체로 끝나지 않고 치유를 행한 예수의 본질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지는 것은 전형적으로 요한적인 특징이다.
2.2. 치유 사건에 대한 논쟁(8-34절)
요한복음에서 예수가 표적을 행하면 그것에 관해서 흔히 논쟁이 일어난다. 이 기사에서도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사건에 대해서 먼저, 그것이 사실인가 하는 논쟁이 일어난다(8-12절). 이 사람과 면식이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도 바로 이 사람이 전에 걸인이었던 그 사람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논쟁이 일어난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상황에서 이 사람은 “바로 내가 그 사람이오!”(9절)라고 말한다. 본인의 말로 자신이 눈이 뜬 것을 확인해 주면 논쟁이 끝날 것이라는 일반적인 기대와는 달리 반대파들은 계속해서 이 사람을 몰아 부친다(10-12절).
이웃사람 등: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시각 장애인: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시키는 대로 했더니 보게 되었습니다.
이웃사람 등: 그가 어디 있느냐?
시각 장애인: 나는 모릅니다.
자신을 윽박지르고 몰아붙이는 사람들의 질문에 조금도 굴하지 않고 그 시각 장애인은 자신이 알고 경험한 바를 있는 그대로 말한다. 이러한 이 사람의 대답은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유대인 당국자들이 두려워 그 사실을 그대로 말하지 않은 그의 부모의 말과 대조된다(18-23절).
자신이 예수에 의해서 기적적으로 개안(開眼)이 되었다는 이 사람의 말에서 더 이상 꼬투리를 잡을 수 없었던 이웃들은 그를 바리새인들에게 넘긴다. 바리새인들은 이 사람이 시각 장애인에서 예수의 치유 기적을 통해서 다시 보게 되었다는 것은 더 이상 문제 삼지 않는다. 다만 이것이 안식일에 행해졌다는 것을 알고, 예수가 안식일에 진흙으로 무엇을 만들어 아무 일도 하지 않아야 된다는 규정을 범했다는 것을 문제 삼는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완전한 의견의 일치를 이룬 것은 아니었다. 바리새인 중에는 시각 장애인이 눈을 뜨는 기적은 죄인으로서 할 수 없는 것으로 하나님의 역사라고 보아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논쟁 중에 이들은 시각 장애인이었던 사람에게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다. 이 사람은 담대하게 “그는 선지자다”라고 대답한다(17절; 38절에는 결국 “인자”로 고백). 이 사람의 예수에 대한 이러한 언명은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를 유대인 남자(요 4:9)에서 선지자(19절)로 그리고 결국에는 그리스도(29절)로 고백한 것과 일치하는 것이다. 여기서 선지자라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명을 받고 이 땅에 온 사람을 가리키고 요한복음에서 예수가 바로 그런 사명자이다.
이 사람이 소경이었다가 예수의 사역으로 다시 보게 되었다는 걸 믿지 않던 유대인 당국자들(바리새인들)은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이 사람에 대한 취조를 일시 중지하고 그의 부모를 소환하여 사실 확인을 한다(18-23절). 여기서 부모를 소환한 사람들은 유대인 당국자들이고 그 부모는 소경으로 태어난 아들을 둔 유대인 소시민이다. 당국자들은 이 부모에게는 위협적 존재였다. 사실상 유대인 당국자들은 이들을 무서워했던 것이다(22절). 그래서 부모는 이들에게 거짓 증언은 하지 않지만 교묘하게 이 위기를 벗어나려 하는 진술을 한다. 즉 자신들에게 시각 장애인으로 태어난 아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고 그 사람이 기적적으로 눈을 뜨게 된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한 기적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누가 그 기적을 일으켰는지에 대해서는 자신들은 모른다는 것이다. 자신의 아들이 이미 성인이 되었기 때문에 그에게 물어보면 될 것이라는 것이다(20-21절).
부모의 이러한 진실을 회피하는 대답에 바리새인들은 결국 그 사람을 다시 소환하여 심문한다. 이번에는 아예 심문이라기보다는 협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어떤 것을 취조하기 보다는 위협을 가하면서 자신들이 원하는 답을 주고 그것에 동의하라는 형태다. 하지만 이 사람은 이러한 위협에 조금도 굴하지 않고 자신이 알고, 경험한 사실을 그대로 담대하게 말할 뿐이다(24-25절).
유대인들: 우리는 저 사람[예수]이 죄인인줄 아노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시각 장애인: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입니다.
이러한 담대한 대답에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그에게 그를 치유한 예수에 대해서 부정적인 평가를 해줄 것을 기대하면서 계속해서 그에게 묻는다(26-27절).
유대인들: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시각 장애인: 내가 이미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계속해서 묻는 것은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는 것입니까?
묻지도 않은 것에 대해서 엉뚱한 대답을 한 것에 유대인들은 격분한다. 이 사람에게 욕을 하며 “너는 그의 제자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고 한다(28절). 그리고 모세는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라는 것을 알지만 예수에 대해서는 그것을 알 수 없다고 한다(29절). 이 때 그 사람은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논리를 공격한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한 것은 창세 이래 없는 기적으로서 이러한 기적을 행한 분은 분명히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일 것이라는 것이다(30-33절). 자신들의 주장의 논리적 약점을 이 사람이 파헤치자 유대인들은 이 사람의 논리에 반박하지도 못하고 권위로서 이 사람의 주장을 물리치려 한다. 이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을 죄라고 규정하고 이 사람을 내친 것이다(34절).
2.3. 영적 정상인과 영적 소경(35-41절)
소경으로 태어났다가 치유 받은 사람을 바리새인들은 죄인으로 태어난 것으로 규정하고 그를 내치지만 바로 그 때 예수는 그를 찾아온다. 그리고 그에게 자신의 본질을 계시하는 대화를 한다(35-38절).
예수: 네가 인자를 믿느냐?
시각 장애인: 선생님, 그가 누구십니까? 내가 믿고자 합니다.
예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시각 장애인: 주여, 내가 믿나이다.
결국 이 사람은 예수를 인자(여기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인자)로 믿어 신앙고백을 하고 예수를 하나님으로 섬기게 된다(38절). 이것은 앞에 나오는 유대인들과 태도와도 극명하게 대조될 뿐만 아니라 진리를 회피하는 그의 부모의 태도와도 대조된다. 이 사람은 소경으로 태어났지만 진리 앞에 담대히 대면하여 결국 진리를 알게 된 것이다.
이 때 예수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심판의 메시지를 발한다. 자신이 온 것은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39절)고 한 것이다. 이것이 자신들에게 향한 말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바리새인들은 “우리도 소경인가?
”(40절)라고 반응한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죄 가운데서 태어난 소경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때 예수는 이들에게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주장]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41절)는 심판의 메시지를 던진다. 즉 차라리 소경으로 태어났다가 다시 보게 된 청년처럼 진리 앞에서 솔직하고 담대했다면 죄가 없겠지만, 오히려 영적으로 소경이면서 자신들은 모든 것을 다 아는 “보는자”라고 주장하니 이들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 기사를 통해서 우리는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계시와 계시의 인식에 대한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본문의 메타포를 따르면 하나님의 계시는 빛이신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정상적으로 인식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은 계시에 관한한 소경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소경인 것을 모르고 본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자신의 죄인된 모습을 모르는 것으로써 그 어떤 죄보다도 큰 죄가 된다. 반면 예수가 표적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할 때 자신이 죄인임을 인식하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영적인 소경이었지만 결국 영적으로 개안한 사람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를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유대인 당국자 바리새인들은 진리를 안식일 문제와 연관시키거나 혹은 진리 자체를 직시하기를 거부하여 예수를 그리스도로 알지 못했다. 반면 소경이었다가 고침을 받은 사람은 오히려 진리를 직시하고 대면하여 자신의 마음의 문을 엶으로써 진리를 인식하게 된 것이다.
3. 선한 목자 예수(10:1-42)
요한복음 10장은 강도에 대한 말로 갑자기 시작하기 때문에 9장과의 연관성이 문제된 때가 많았다. 하지만 10장 21절 등의 내용으로 보아 10장에서 예수는 9장에 나오는 유대인들과 계속해서 논쟁을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9장이 사람이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다루었다면 10장은 그 진리가 자기 계시를 하고, 이것에 대한 유대인 당국자들의 반응(22-39절)과 일반 대중의 반응(41-42절)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3.1. 목자 강화(10:1-18)
목자 강화는 비유 자체(1-6절)와 그에 대한 해설(7-18절)로 구성되어 있다. 비유(1-6절)의 내용은 다음 질문에 대한 해설로 요약될 수 있다. 누가 참 목자이고 참 목자의 특징은 무엇인가? 참 목자는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는 자며, 그는 양과 상호 간에 음성을 인식하는 자다. 역으로 말하면, 거짓 목자인 도둑 강도는 양의 우리의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며, 양과 음성으로 서로 대화할 수 없는 자다. 그래서 양은 목자를 따라가지만 강도에 대해서는 피해서 도망간다.
위 예수의 비유가 무슨 뜻인가? 예수의 청자는 물론 현대 독자들로 이 내용 자체로는 그 뜻이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 요한복음 저자는 이 예수의 말씀의 장르를 비유(‘파로이미아’)로 소개하면서 당시의 청자들이 그 뜻을 깨닫지 못했다고 한다(6절). 아마도 그것은 이곳에서 사용된 비유가 공관복음서의 하나님 나라의 비유(‘파라볼레’)와는 달리 어느 정도 풍유적 성격을 띠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예수는 이 비유를 통하여 예수가 누구인지를 말함과 동시에 “도둑과 강도”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정확히 없다 할지라도 본문 내외에서 얼마든지 추측이 가능하고 예수는 그것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예수의 비유에 대한 청중의 몰이해는 예수의 설명을 필요로 한다. 요한은 중요한 설명을 하기 위해서 청중의 몰이해라는 문학적 장치를 흔히 사용한다(2:19-21; 3:3-5). 여기서 기대된 대로 예수가 누구이고 도둑과 절도는 누구인가 하는 것에 대한 설명이 뒤따른다. 먼저 강도에 대한 설명을 보자. 여기서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도둑]요 강도”(8절)라는 예수의 설명은 또 다른 해석을 필요로 한다. 이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아브라함, 야곱, 모세, 다윗 등 예수보다 먼저 이 세상에 온 자는 모두 다 도둑이요 강도가 된다. 하지만 요한복음 전체적으로 볼 때 예수가 이들을 강도라고 했을 리는 만무하다. 이들은 아마도 예수 이전 시대과 동시에 나타났던 거짓 메시아를 가리키는 것일 것이다. 혹은 이들은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대적자들(바리새인들, 유대인 당국자들)을 가리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들은 예수의 양이 아니므로 예수를 따르지 않으며(10:26) 예수의 양들에게 강도짓을 하는 자들이다(cf. 9:28).
그런데 여기서 더 중요한 설명은 누가 강도요 도둑인가 하는 것이 아니고, 이들과 대비된 예수에 대한 설명이다. 여기서 예수는 먼저, 양의 문으로 소개된다(7절). 본 비유에서 예수는 목자임이 분명한데 갑자기 예수가 양의 문으로 등장한다. 어떤 주석가는 중동 지방의 양 우리에서 목자가 문에 대자로 누워 양 무리를 보호하는 관습이 있었는데 여기서 예수는 이러한 풍습에 따라 자신을 양 무리를 보호하는 양의 문이라고 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예수가 목자임과 동시에 양의 문이라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어쨌든 이것은 양의 문을 드나들면서 꼴을 얻는데 있어서 예수가 유일무이한 문이 된다는 것으로 예수를 통한 구원의 유일성과 배타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를 통하지 않고는 양이 꼴을 얻을 수 없고 곧 구원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9절; cf. 14:6).
예수가 양의 우리의 문이라는 설명에서 이제 예수는 자신이 선한 목자라는 설명으로 넘어가는데 이것이 곧 본 강화에서 예수에 대한 중심적 설명이다. 요한복음에서 ‘나는 ...이다’라는 신적 자기 계시 문구를 사용하여 예수는 자신이 삯군과는 다른 선한 목자라고 소개한다(11-15절). 여기에 소개된 선한 목자 예수는 에스겔서 34장에 나오는 악하고 이기적인 목자들과 대비된다. 이들은 양을 돌보지 않고 이들이 야생동물들의 먹이가 되도록 그냥 놓아두는 이스라엘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이들과는 다르게 예수는 선한 목자로서 양들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버린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 양과 목자의 관계로서 특이하게 제시된 것은 양과 목자를 서로 “앎”의 관계로 묘사한 것이다(14절). 더군다나 이 “앎”이라는 것은 예수와 하나님의 관계를 묘사하는 것에 사용된 것으로서(15절) 이것이 예수와 신자를 가리키는 데도 사용된다. 이 앎의 관계라는 것은 단순히 알고 지낸다는 것이 아니라 인격체 상호 간의 깊은 신뢰와 사랑의 관계를 지칭한다. 예수는 자신과 신자의 관계를 삼위 일체 인격체 내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사랑과 존중의 관계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과 제자들의 관계를 구약에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을 가리키는 목자와 양의 관계로 묘사하면서 예수는 갑자기 “이 우리에 들지 않는 다른 양”(16절)을 언급한다. 나아가 이들도 예수의 음성을 듣고 한 무리를 이루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들은 누구인가? 전통적으로, 이 무리는 유대인 양 무리가 아닌 다른 양 무리, 즉 이방인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되어져 왔다. 최근에 요한복음을 요한 공동체 내의 문제로 읽는 학자들은 이 무리를 요한 공동체 내의 상이한 그룹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우선, 후자는 본문을 ‘거울’로 읽는 것이 아니라 ‘창’으로 읽으려는 시도로 그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지만 본문을 모두 알레고리로 이해하는 위험성이 있다. 둘째, 전통적인 해석이 보다 가능성 있는 해석으로 보인다. 본문의 배경이 되는 메시아적 목자 본문에는 이미 흩어진 양들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는데(겔 34:12-16, 23) 이들이 종말에 하나가 될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겔 37:15ff.; 미 2:12; 사 56:6-8). 하지만, 요한이 여기에서 “이 우리에 속하지 않은 양들”을 이방인으로 한정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연관본문인 11장 52절과 17장 20-23절을 볼 때 이 우리에 들지 않은 양들을 예수의 제자들에 의해서 앞으로 전도될 제 2세대 예수의 제자들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유대인/이방인을 구별하여(cf. 고전 12:13; 갈 3:28) 이들에 대한 관계를 주제로 선교와 구원의 문제를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은 요한이 아니라 바울이다.
예수는 선한 목자로서 자신이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 것임을 재차 강조해서 말하고 또 그렇게 목숨을 버리는 것은 목숨을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선한 목자로서 자신의 자발적인 행동임을 천명한다. 자신은 신적인 속성을 가진 인물로서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고 얻을 권세도 있다는 것이다(17-18절). 이것은 요한복음에서 계속해서 나타나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예시이다. 또 그 죽음이 죽임이 아니라 스스로에 의해서 선택한 것임이 계속해서 강조되고 있다. 요한복음에서 수난은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의 길을 자발적으로 선택하여 걸어가는 것이다.
3.2. 목자 강화로 촉발된 유대인들의 분쟁(19-21절)
예수가 표적을 행한 것에 대해 또는 그의 가르침에 대해 어떤 반응이 즉각적으로 나오는 것은 요한적인 것이다. 특히 예수의 말씀에 대한 해석으로 유대인 그룹 내에서 분쟁이 일어나는 모습도 자주 보인다(cf. 7:40-42). 본 구절은 예수의 목자 강화에 대한 반응으로 유대인들이 두 패로 갈린 내용이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예수가 귀신 들려 미친 짓이라고 하고 일군의 사람들은 귀신들린 사람이 어떻게 시각 장애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는가 하고 반문한다. 이 구절을 통해서 목자 강화가 9장의 시각 장애인 치유 사건과 연관된 것임을 알 수 있다.
3.3. 예수와 유대인들의 기독론 논쟁(22-39절)
바로 앞 장면에서 예수의 본질에 대해서 결론을 내리지 못한 유대인들은 수전절(修殿節: 유다 마카비우스가 성전을 재 헌당한 것을 기념하는 신구약 중간기에 생긴 유대인의 절기)이 이르자 성전에 있는 예수를 발견하고 그에게 다시 논쟁을 건다.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미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24절). 이에 대해 예수는 자신이 이것에 대해 이미 대답을 했는데도 이들이 믿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또 자신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표적을 행하고 말씀을 선포함으로써 스스로를 증거 하는데도 믿지 않는다고 한다. 이렇게 이들이 믿지 않는 것은 이들이 예수의 양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한다(25-26절).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고 예수는 말한다(27절). 예수는 자신과 제자들의 관계를 목자와 양으로 그리는 목자 강화에 사용했던 메타포를 여기서도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다. 또 예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28-29절)고 하여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제자들을 보호하고 견인한다는 것을 말한다.
위 모든 대답은 예수의 본질에 대해서 스스로 밝히라고 한 유대인들의 질문에 대한 간접적인 답변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직접적인 답변은 마지막 말에 나온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30절) 이러한 예수의 언명은 요한복음 내에서는 이미 기대되었던 것이다(cf. 1:1, 18; 5:18). 하지만 이 선언은 유대인들에게 그 어느 말보다도 충격적인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과 동등함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유대인들이 그토록 알고 싶었던 예수의 본질에 대해서 예수가 직접적으로 말한 것이다. 이것에 대한 유대인들의 즉각적인 신체적 반응은 돌을 들어 치려 한 것이다(31절). 예수가 이들이 돌로 치려하는 것을 반발하자(32절) 유대인들은 이러한 예수의 언명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돌로 치는 것은 정당하다고 주장한다(cf. 레 24:10-16). 즉 예수는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주장한 것이다(33절).
자칭 하나님이라고 예수를 고소한 것에 대해서 당시 정통 유대인이라면 오히려 그것이 아니라고 반박했을 텐데 예수는 오히려 이들의 고소 내용을 반박하지 않고 그 고소 내용을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들의 논리를 반박한다. “너희 율법에 기록한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34-36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모든 사람이 신이므로 내가 신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예수의 언명은 지금까지의 요한복음 내의 원리로 볼 때도 기대되었던 대답이 아니다. 이것은 아마도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으로의 논증일 것이다. 즉 이 말은 “만약 사람들을 신들이라고 하는 것이 허용될 수 있다면-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도구로 사용되는 한에서- 하나님의 말씀 자체이신 분에게 신이란 호칭을 사용하는 것은 더욱 허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예수는 자신을 믿지 않은 유대인들에게 자신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 있어 판단 근거로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 지를 살펴보라고 한다. 만약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으면 자신을 믿지 말 것이요, 하나님의 일을 한다면 자신은 믿지 못할지라도 그 말은 믿으라고 한다(37-38절). 이 말 속에는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해서 공의롭게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 마음이 없다는 것이 내포되어 있다(cf. 7:17). 이러한 예수의 공격적인 말이 있었고 이들이 예수를 잡으려 했지만 아직 예수가 잡힐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는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셨다(39절). 여기에도 자신의 길을 꿋꿋이 가는 왕적 메시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3.4. 요단강 저편 사람들의 믿음(40-42절)
예수는 자신을 잡으려는 유대인들을 피하여 요단강 저편으로 가 머물렀는데 거기는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를 주던 곳이었다. 이곳에서 요한으로부터 예수에 대해서 증언을 들었던 사람들은 예수를 보고 세례 요한의 말이 다 참인 것을 알고 많은 사람이 그곳에서 예수를 믿었다(40-42절). 이렇게 일반 대중 가운데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 많이 있었지만 유대인 당국자들은 예수를 대적하고 믿지 않았다는 것을 저자는 은연중에 대조시키려 했을 것이다.
목자 강화와 이어진 예수와 유대인 당국자들 간의 대화를 통해서 예수와 유대인들 간의 논쟁은 계속된다. 인간적으로 보면 어느 한 쪽이 양보하면 쉽게 끝날 것 같은 싸움인데, 예수는 자신의 본질에 대한 유대인들의 공격에 대해서 조금도 그 주장을 움츠리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예수가 신적 인물이요 나아가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것이다. 만약 예수가 이것을 양보했다면 예수는 한 유대인으로 살다가 유대인 정치범으로 처형된 인물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자신의 신적 본질에 대해서 계시하고,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 심판의 메시지를 발한다. 목자 강화에서 절도와 강도와 삯군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본문에 밝혀져 있지 않지만 10장이 9장과 연속된 이야기라고 한다면 이들을 바로 소경을 눈뜨게 한 표적을 믿지 않는 자들이요 결국 “예수와 하나님은 하나”(10:30)라는 예수의 자기 계시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이다.
4. 해석과 적용
기독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 배타성이 강하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근본주의적인 기독교인들의 편협한 사고에서 기원했을 수 있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겸허히 수용하고 교정해 나가면 될 것이다. 그런데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의 신성과 구원에 있어서의 배타성은 절대로 타협해서는 안 되는 진리이다. 예수는 특히 요한복음 5장 이후부터 유대인들과 이 문제에 대해서 끊임없이 논쟁하는데 한 번도 이 문제를 어정쩡하게 넘어간 일이 없다. 예수는 자신에게 신성이 있고 자신이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반박하는 것에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표적과 말씀으로 자신을 계시하면서 이것을 보고 듣는 이들로 하여금 예수는 그들의 마음 속에서 ‘위기’가 일게 하였다. 즉 이것에 대해 어떤 반응이 요청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유대인 당국자들은 불신으로 반응했던 반면 소수였지만 소경으로 태어났다가 기적적으로 치유를 받은 사람과 세례 요한에게서 예수를 소개받았던 사람들은 믿음으로 반응했다. 요한복음 저자는 이러한 기사를 쓰면서 독자들의 마음속에도 ‘위기’가 일어나 믿음으로 반응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20:30-31).
제 8장 영광(죽음)의 시간을 향하여 전진하는 예수(11-12장)
1. 내용 구성
요한복음 5-10장은 예수와 유대인들과의 대 충돌을 기록한 것이다. 그 충돌의 배경에는 예수가 자신이 하나님의 보내신 자이며 신적 존재라는 기독론적 자기 천명이 있다. 이러한 충돌은 11장에서도 계속되지만 여기에서는 이 충돌이 구체적인 하나의 목적을 가진 사건으로 연결된다. 그것은 바로 예수의 죽음이다. 요한복음의 예수는 이 죽음을 슬픔으로보다는 영광으로 본다(18-19장 참조). 왜냐하면 이 죽음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온 인류를 구할 대속적 죽음이기 때문이다.
2.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11:1-44)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표적 가운데 최후(最後)의 표적이면서 또한 최고(最高)의 표적은 병으로 죽은 나사로를 살린 것이다. 이러한 표적은 자연 법칙상 일어날 수 없는 것이고 어떤 인간도 흉내 낼 수 없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곧 이 표적은 그의 신적 본성을 잘 드러내는 것이다.
2.1. 나사로의 죽음(1-16절)
예수의 표적은 나사로의 죽음에 대한 기사로 시작한다. 병자 나사로는 초기 교회에서 그 전승이 널리 알려진 마리아와 마르다의 남자 형제로 소개된다(1절). 특히 그의 누이 마리아는 예수의 몸에 향유를 부은 자로서 그 전승이 사복음서에 다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이였다(2절). 그런데 나사로와 마리아와 마르다가 한 가족으로서 예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자였다는 것은 요한복음에만 기록된 것이다(3, 5절). 공관복음에는 예수의 제자들 중 내부 핵심 인물로서 베드로와 안드레와 요한이 언급되어 있기는 하지만(막 9:3 참조), 요한복음에 예수의 십이 제자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로서 예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한 가족을 언급되어 있는 것은 퍽 흥미로운 일이다. 나사로의 누이들이 나사로가 병이 든 것을 예수께 알릴 때에도 그 이름을 언급하기보다 “선생님[예수]께서 사랑하는 자”(3절)로 말한 것으로 보아도 예수와 이 가족이 얼마나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는 단순히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마 14:14; 20:34) 혹은 하나님 나라 도래의 증거로서(마 4:23; 9:35; 21:14) 병자를 고친다면, 본 사건에서 예수는 비록 나사로를 불쌍히 여기지만 그 병을 곧바로 치료하지 않는다. 요한복음의 예수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다 알고 있고(2:24-25 참조) 하나님의 뜻 가운데 움직이기 때문에(6:38-39 참조) 여기에서도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게 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4절). 그래서 예수는 자신이 특별히 사랑하는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그를 치료하기 위한 즉각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나사로가 사망한지 이틀-이것은 그가 사망했다는 것을 증명할 충분한 시간인 것 같다-이 지나서야 예수는 나사로를 만나기 위해 유대로 가기로 결심한다(7절).
유대에서 이미 바리새인들로부터 신성모독 행위라는 죄목으로 돌로 맞을 뻔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10:31), 제자들은 유대로 가자는 예수를 만류한다(8절). 하지만 예수는 낮과 밤을 선과 악에 대한 메타포로 사용하여 말하면서 자신의 행동이 낮에 속한, 즉 정당한 것이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라고 한다(9-10절). 예수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 나사로를 살릴 중요한 임무가 있는 것이다. 예수는 나사로를 살리는 것을 잠에서 깨운다고 말하여 일종의 비유를 사용하는데(cf. 고전 15:6; 살전 4:14) 늘 그렇듯이 제자들은 예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마도 제자들은 예수를 죽은 자를 살리는 분으로 믿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이 사건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죽은 자도 살리는 표적을 행하는 자임을 이들에게 계시하여 결국 믿게 하려한다(15절). 물론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16절)고 말한 도마처럼 제자들은 이 때도 계속 예수의 말과 행동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은 보혜사가 와서 제자들에게 예수의 정당성을 깨닫게 해주기 이전의 제자들에게 전형적인 것이다(cf. 2:17, 22; 12:16).
2.2. 부활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17-37절)
예수는 베다니에 가서 죽은 나사로의 누이들인 마르다와 마리아를 각각 만난다. 물론 이 둘이 함께 예수를 맞으러 나올 수 없는 것은 한 사람은 집에서 문상객들을 맞이해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예수가 각각과 개별적으로 만나 대화하는 기록을 이러한 물리적인 상황으로만 해석해서는 안 된다. 요한복음의 예수는 주로 개인 하나 하나와 상대해서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요한복음에서 믿음은 기본적으로 개별적인 것이다. 예수를 만난 마리아와 마르다는 각각 예수가 늦게 도착한 것을 몹시 아쉬워한다. 그의 병 고치는 능력을 알고 있던 이들은 나사로가 죽기 전에 예수가 도착했다면 분명 그가 치료받았을 것을 확신했던 것이다(21, 32절).
예수를 먼저 맞이한 이는 마르다이다. 마르다는 예수가 자신의 집에 늦게 도착한 것을 아쉬워하면서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22절)고 말한다. 이 말만 보면 마르다는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믿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 뒤에 나오는 대화로 보아 그렇지 않다는 것이 분명하다. “네 오라비가 살리라”(23절)는 예수의 말을 나사로가 바로 살아날 것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마르다는 이것을 종말론적으로 내세에서 부활할 것으로만 이해했던 것이다(24절). 이러한 신앙은 당시의 유대교 일부와 초기 교회 신앙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종말론적 믿음이다(cf. 단 12:2; 막 12:18-27; 살전 4:13-18).
물론 예수가 마르다에게 요구한 믿음은 종말론적 부활에 대한 믿음 그 이상이다. 예수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25절). 예수는 자신의 본질을 ‘나는...이다’라는 신적 자기 본질을 나타내는 문구를 통해서 천명한다. 자신이 바로 부활과 영생의 주체라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이 세상에서 살고 죽는 것이 큰일이지만 예수께는 이 땅에서 어떤 사람의 육체적 생명이 살아 있느냐 그렇지 않으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부활과 영생의 주(主)인 예수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다. 예수와 관계를 맺지 않은 사람은 몸은 살았지만 실상은 죽은 것이며, 육체가 죽었을지라도 예수를 믿은 사람의 영혼은 영원히 살아 있는 것이다. 부활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믿느냐는 예수의 도전에 마르다는 분명히 그렇다고 대답하면서 베드로가 고백한 것과 같은 표준적인 신앙고백을 한다(27절). 마르다는 예수를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에 이렇게 사도적 신앙고백을 여성이 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마르다에 이어 예수는 마리아를 불러 그녀를 만난다. 이 만남에서는 예수와 마르다의 만남에서처럼 부활에 대해서 신학적인 중요한 가르침도 없고, 마르다의 고백과 같은 사도적 신앙고백도 없다. 하지만 요한복음에서 이 만남은 예수가 나사로를 살리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자리매김한다. 나사로를 살리기 전에 예수는 마리아의 슬퍼하는 모습과 곡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파하고 눈물을 흘리기까지 한 것이다. 예수는 사랑하는 나사로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이것이 곧 나사로를 살리는 사건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가 이렇게 “통분히 여긴” 것이 나사로의 죽음에 대한 애도와 슬픔에서가 아니라 불신앙의 유대인 집단들에게 대한 분노라는 해석이 있다. 물론 여기서 사용된 ‘엠브리마오마이’(evmbrima,omai)라는 동사가 분노를 나타내는 데 사용될 수 있다(cf. 마 9:30; 막 1:43). 하지만 요한복음 본문 문맥에서 예수는 유대인들을 비롯한 어느 누구에게도 분노를 발하지 않는다. 그 다음에 나오는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36절)는 문구로 보아도 이 동사는 유대인의 불신앙에 대한 것보다도 인간 예수가 자신이 특별히 사랑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느끼는 감정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이러한 예수의 슬픔은 나사로를 살리는 것으로 자연적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예수의 슬퍼하는 모습을 본 유대인들은 예수가 나사로를 얼마나 사랑했는지에 감동한다(36절). 예수의 사랑의 행동에 대해서는 감동했지만 어떤 유대인들은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예수가 나사로를 살릴 수 없었는가 하고 중얼거린다(37절). 이들에게는 예수가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다는 믿음은 없었던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들의 믿지 않으면서도 내 뱉은 말대로 예수는 곧 이어서 나사로를 살려낸다.
2.3.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38-44절)
나사로의 죽음에 대해서 슬퍼하면서 예수는 나사로의 무덤에 다다른다. 무덤은 돌로 막혀져 있었고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의 시체에서는 이미 썩은 냄새가 나고 있었다. 이것은 나사로가 죽었다는 것을 확실히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무덤에 같이 따라온 마르다에게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40절)고 한다. 이것은 나사로의 죽음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며(4절), 예수에 대한 신앙을 가질 때 내세에서 뿐만 아니라 현세에서도 부활할 소망이 있다는 것(25-26절)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이어서 예수는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하고, 이 표적이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 하기 위한 것임을 기도 가운데 말한다(42절). 그리고 나서 예수는 나사로를 부르고 이어 죽었던 나사로는 시체를 감쌌던 천을 그대로 하고 무덤에서 나온다.
2.4. 예수의 표적에 대한 반응(45-52절)
요한복음에서 늘 그렇듯이 예수가 행한 표적에 대한 반응은 상반되게 나타난다(cf. 7:40-44).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의 표적을 통해 예수를 믿었으나, 또 다른 무리의 유대인들은 이 사건을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고자질하게 바빴다(46절).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개최하여 이 문제를 논의한 결과 만약 예수가 이대로 계속해서 표적을 행하게 허용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를 믿게 될 것이요, 그렇게 되면 로마인들이 와서 자기들의 거룩한 장소-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땅”으로 번역됨-인 성전(cf. 요 4:20; cf. 행 6:14; 21:28)과 민족을 파멸시킬 것을 염려하게 된다(48절). 이 때 당시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일어나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는 요지의 말을 한다(50절). 즉 대제사장을 비롯한 공회는 일의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는 예수의 표적에 관한 일을 무고한 한 사람을 희생시켜 해결하려 한 것이다.
위와 같은 결정에 대해서 요한복음 저자는 이것을 이렇게 평가한다.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여(u`pe.r tou/ e;qnouj) 죽으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u`pe.r tou/ e;qnouj)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u`pe.r tou/ e;qnouj)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51-52절) 여기서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이방인만인가? 아니면 신자 모두를 가리키는가?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라는 문구는 본래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밖에 살면서 메시아 시대에 모여들 백성들을 말한다(cf. 사 11:12; 43:5, 6; 미 2:12; 렘 23:3; 겔 34:16; 37:21). 그런데 요한복음 저자는 이것을 신자를 가리키는데 사용한다. 여기서 "흩어진 하나님의 백성"이란 말은 이방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52절은 예수께서 유대 나라와 이방인들을 위해서 죽는다고 말하지 않고 예수의 죽음은 흩어진 하나님의 백성이 모여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본문에서 말하는 것은 이방인 신자가 본래의 유대인 하나님의 백성에 첨가된다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주장된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 없이 신자들은 예수의 죽음의 사역을 통해 모이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6) 한 마디로 말해, 여기서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는 미래에 교회에 모이게 될 신자들을 가리킨다.
2.5.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준비(53-57절)
유대인들의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자 이제 예수는 광야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으로 피신한다(53-54절). 이 때가 유월절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예수에 대해서 여러 말이 오갔는데 그 이유는 이미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체포하기 위해 그를 보면 곧 신고하라고 명령해 놓았기 때문이다(55-57절).
3. 예수 수난과 죽음의 준비(12:1-36)
3.1. 마리아의 기름부음(1-8절)
한 여인이 예수의 몸에 향유를 붓는 사건은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에 모두 등장한다(막 14:3-9; 마 26:6-13; 눅 7:36-50; 요 12:1-8). 이 사화들은 그 내용에 있어서 차이점도 있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그 내용뿐만 아니라 용어까지도 상당히 많은 부분이 일치한다. 모든 사화에서 이 사건이 일어난 도시를 베다니라고 하는데, 그 구체적인 장소로 마가와 마태는 나병환자 시몬의 집으로, 누가는 바리새인 시몬의 집으로, 요한은 나사로가 초청된 집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사건이 일어난 때를 마가와 마태는 유월절 이틀 전으로 설정하는 반면 요한은 유월절 엿새 전이라고 한다. 또 마가와 마태에는 이 여인의 이름이 무명으로 남아있고, 누가는 창녀로 그리고 있는 반면, 요한은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라고 하여 이 여인의 이름과 가족상황을 구체적으로 명시한다. 또 공관복음에서는 예수에게 기름을 붓기 위해서 옥합을 깨드리는 장면이 있다면 요한복음에는 이 부분이 없다. 하지만 이 사건을 묘사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차이는 마가와 마태의 기사에서 향유가 예수의 머리에 부어지는데 반해 누가와 요한에게 있어서 향유가 예수의 발에 부어진다는 것이다.
한 여인이 예수의 머리(혹은 다리)에 향유를 붓고 난 후 이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사복음서 기사 모두에 나타나 있다. 마가복음에는 이들이 “어떤 사람들”이라고 하여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 확인할 수 없는 반면, 마태는 이 사람들을 “제자들”로 누가는 “바리새인”으로, 요한은 예수를 판 “가룟 유다”라고 말하고 있다. 모든 사화에서 이 사람(들)은 이 여인이 한 일을 부정적으로 본다. 그 비싼 향유를 예수의 몸에 붓는 대신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더 올바른 행동이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향유 부은 여인의 행동에 대한 이 사람(들)의 부정적인 평가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하며 이 여인의 행위가 의미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공관복음 모두는 이 사건을 이 여인이 예수께 선행을 행한 것으로 평가한다. 특히 누가복음에서는 더욱 더 그렇다. 그런데 이 요한에게 있어(마가와 마태도 마찬가지로)서 이 사건은 단순한 선행사건 이상이다. 이 여인이 예수의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은 예수의 대속적 죽음을 예시한다는 면에서 더 의미 있고 중요하다.
요한복음에 있어서 마리아가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붓는 사건은 예수가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왕으로서 등극하는 것을 예비하는 사건이다. 예수가 고난/죽음/부활을 통해서 영광 받으심은 요한복음 전체에 흐르는 주요 주제이다. 요한은 이것을 예수의 성전청결 사건에서 말하기 시작하여(2:22), 목숨을 버리는 목자의 특징으로 예시하고(10: 11, 17-18), 나사로의 부활로 자신과 신자의 부활을 예고한다(11:25-27). 그런데 예수의 죽음 예고에 있어서 마리아가 향유를 붓는 사건은 예수의 죽음에 대한 가장 결정적인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이 사건은 예수가 예루살렘에 왕으로서 입성하기 직전에 일어난 것으로 예수의 수난 이전과 이후를 연결하여 죽음을 통한 예수의 왕으로서의 등극식을 예시해준다. 이 사건이 있은 후에도 요한은 계속해서 예수의 죽음을 예고한다(12:33; 18:32). 요한이 이 사건이 일어난 시간을 유월절과 연관하여(유월절 엿새 전) 기술하고, 이 사건을 기준으로 다음의 날짜를 계산한 것(12:12)은 우연이 아니다. 요한복음에 있어서 마리아의 향유 부음 사건은 그 이전까지의 예수의 구속 사역에 대한 요약이고, 구속사역을 완성할 예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시작으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가 마리아에게 기름부음을 받는 기사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처음 부분(1-2절)은 이 사건에 대한 배경 설정에 대한 것이다. 사건의 시간과 장소(1절)에 대한 설정과 사건의 경위에 대한 설명(2절)이 그것이다. 두 번째 부분(3-8절)은 이 사건 자체와 사건 자체에 대한 신학적 해석이다. 먼저 본문의 도유사건 자체에 대한 묘사는 의외로 간단하다(3절). 그런데 이 사건에 대한 유다의 반응(4-6절)과 이에 대한 예수의 말씀(7-8절)이 더 자세히 다루어져 있다.
3.1.1. 배경(1-2절)
마태와 마가가 도유 사화를 예수살렘 입성한 후의 사건으로 구성하는 것과는 달리 요한은 이 사화를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전에 일어난 마지막 사건으로 설정한다. 또 마가와 마태는 이 사건이 일어난 시간을 이 사건과 직접 연결시키지 않고 있는 반면 요한은 “유월절 엿새 전”이라고 하여 이 사건과 시간을 분명히 언급하는데 이것은 요한이 이 사건을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적 죽음과 연관시키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요한은 예수의 도유 사건을 예수의 왕적 죽음을 예시하는 사건으로 설정한 것이다. 더구나 이 사건이 일어난 장소가 베다니인데 그곳이 예수가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린 장소라는 설명을 덧붙임으로서 요한은 이 사건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과 연관된 사건임을 말하고 있다.
공관복음서의 사화와는 달리 요한은 도유 사건이 일어난 구체적인 장소를 언급하지 않고 대신에 예수의 다리에 향유를 부은 마리아의 가족들이 그 사건의 장소에 있었음을 말한다(2절). 예수는 식사 자리에 초대되고 마리아는 식사 시중을 들고, 그의 오라비 나사로는 예수와 자리를 함께하여 식사를 하고 있다. 아마도 이 자리는 예수가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린 것에 대한 그 동네 사람들이 베푼 향연이었을 것이고 그래서 나사로와 관계된 그의 누이들이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일 것이다.
3.1.2. 유다의 반응(3-6절)
예수가 식사를 하는 가운데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순수한 나드로 만들어진 비싼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붓고 그녀의 머리카락으로 예수의 발에 있는 향유를 씻어내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리고 요한은 마리아의 행위로 인해 그 집에 향유의 향기가 가득했다고 묘사한다. 먼저, 향유를 다른 사람의 다리에 붓는다는 것은 당시의 풍습에서 볼 때 예외적인 것이다. 통상 손님에게는 스스로 발을 씻도록 물이 제공되었고(창 18:4 참조) 특별한 경우에 향유가 제공되었지만 손님 스스로가 발을 씻게 되어 있었다. 다만 노예가 이런 행동을 대신해 줄 수 있었다(삼상 25:41 참조). 삼백 일의 노동자 임금이나 되는 값비싼 향유를 노예가 주인을 섬기는 행위로서 한 마리아의 행동은 예수가 나사로를 살려주신데 대한 충심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의 표시였다. 그 다음 장에서(13:1-20) 예수가 이러한 행동을 제자들에게 보이고 다른 사람의 발을 씻는 일을 하도록 격려했는데 이러한 행동을 마리아가 이미 보여준 것이다.
다음으로, 마리아의 행동으로 인해 그 향기가 온 집안에 가득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부분은 공관복음 병행 기사에는 없고 요한복음에만 있는 것으로, 이 사건의 의미는 단순한 물리적 현상 이상의 것이라는 것이 암시되어 있다. 즉 이 사건은 단순히 마리아가 예수에게 대한 보은과 사랑으로 말미암은 선한 행동을 넘어서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그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이 사건은 모든 사람들에게 미치는 아름다운 향기가 될 것과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후의 구절을 통해서 볼 때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의 대속적 죽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에게 미치는 좋은 소식이다.
그런데 위와 같은 마리아의 선행 사건에 대해서 가룟 유다는 공리주의적 평가를 한다. 삼백 일, 즉 일년 치의 노동자 임금 가치가 있는 향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위해 쓰지 않고 이 여인은 향유를 헛되이 낭비했다는 것이다(5절). 요한은 여기에서 일단 유다의 공리주의적 접근 방법 자체를-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평가하지 않는다. 다만 유다의 인격의 순수성을 의심함으로써 이 말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 아니라 재물에 대한 탐심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한다(6절).
3.1.3. 예수의 말씀(7-8절)
마리아가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붓는 행위와 이에 대한 유다의 반응에 대한 평가는 예수의 말씀에 의해 이루어진다.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해 그녀가 이것을 간직하도록 그녀를 그냥 놓아 두어라(7절).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들’은 항상 너희 옆에 있지만, ‘나’는 항상 너희 옆에 있지 않다(8절).” 7절은 내용적 분석이 필요한 부분이다. 이 구절의 의미는 이 여인이 예수의 미래의 죽음의 날을 위해 향유를 남겨두었다가 그 때 쓰라는 것인가? 앞뒤 문맥에서 볼 때 그러한 해석은 본문에 부합되지 않는다. 먼저, 유다가 분개한 것은 일 년 치 노동자의 임금 가치가 있는 향유가 모두 다 허비되었다는 것인데, 여기서 이것이 차후에 사용되기 위해 남겨진 것이 있다면 이러한 해석은 상황에 부합되지 않는다. 이것의 의미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마리아의 행위는 선한 것이다. 그녀의 행동을 가로막지 말라. 그녀는 나의 발에 향유를 붓는 행동을 통해 (자기도 모르게) 나의 죽음을 예비하는 행동을 하기위해 이것을 지금까지 간직해 온 것이다.”
마리아의 행위가 단순한 보은의 행위 이상의 의미, 즉 예수의 죽음을 예비하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정당한 것이라고 말하고 이어서 예수는 그 시점에서 가난한 자를 돕는 것과 자신의 죽음을 예비하는 것과의 중요성을 대비시킨다. 요한은 특히 ‘가난한 자’와 ‘나를’ 문장의 앞에 위치시키고 ‘항상’이라는 단어를 양 문장에 다 포함시킴으로서 이러한 대비를 의도한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를 섬기는 것이 가난한 자를 돕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다만 예수가 대속적 죽음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이것을 준비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우선된다는 것이다.
3.2.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9-19절)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은 유대인 군중들이 예수가 있는 곳으로 찾아오는 것으로 시작된다(9절). 이것은 유월절 명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먼저 도착해 있던 군중들이 예수를 찾는 이전 상황과 잘 맞아 떨어진다(11:56-57절). 사실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은 사복음서에 다 나온다(cf. 마 21:1-9; 막 11:1-10; 눅 19:28-38). 공관복음에서는 예수가 제자들에게 자신이 타고 입성할 나귀를 데려오라고 명령하는 장면이 있는데 요한복음에는 이 장면이 빠져있다. 또 공관복음에서는 군중과 예수가 함께 예루살렘으로 입성한다면, 요한복음에서는 두 군중이 있는데 하나는 예수를 찾아가고, 또 다른 군중은 예루살렘에서 예수를 맞이한다.
요한은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을 마리아가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붓는 장면과 연결시킨다. 그 사건이 일어난 곳은 마리아 가족이 사는 베다니로서 나사로도 그곳에 있었다. 군중들은 예수만 보러 온 것이 아니라 죽었다 살아난 나사로도 보기 위해 이곳에 몰려온 것이다(19-20절). 이러한 상황, 즉 사람들이 유대교 회당을 떠나 예수를 믿는 상황에서 대제사장들은 이제 예수뿐만 아니라 나사로도 죽이려고 모의하게 된다(11절). 여기에서 초점은 예수의 죽음이기 때문에 그 이후에 나사로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다른 복음서에서처럼 요한복음에서도 군중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나가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를 외친다(13절). 그리고 요한은 마태복음에서처럼 이것이 스가랴 9장 9절의 성취로 본다. 즉 예수가 예루살렘에 왕으로 입성하지만 겸손하게 나귀를 타고 온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의 독특성은 이것을 제자들이 깨달은 시점이 예수가 영광 받은 후, 즉 성령이 오신 이후 시점으로 보는 것이다(16절). 성전에 관련된 예수의 언명에 대해서도 요한은 같은 기록을 한다(요 2:17, 22).
예루살렘에 있는 무리가 예수를 영접한 것을 요한은 예수가 나사로를 살린 표적을 목도한 무리의 증언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18-19절). 즉 요한에 의하면 예수를 좇는 군중에는 두 무리가 있는데 하나는 예수의 표적을 증언하는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그 증언을 듣고 예수를 영접한 사람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제사장이 예수를 체포하려고 하는 의도를 이미 알고 있던 바리새인들은 무리들이 예수를 환호하고 영접하는 것이 의미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온 세상이 저[예수]를 좇는도다”(19절)고 예수를 따르는 무리를 비웃는다. 아니러니컬하게도 이들이 비웃은 그것은 비웃음거리가 아니라 바로 예수가 구원의 왕으로 등극하는 사건이었다. 이 때 예루살렘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랐던 것이다.
3.3. 헬라인들의 영접(20-36절)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한 후에 헬라인들이 예수를 만나고자 청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헬라인들”({Ellhne,j)이라는 단어가 단순히 헬라인들이 아니라 헬라어를 쓰는 유대인들이 아닌가 하는 주장이 있어왔다. 왜냐하면 이방인인 이들이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에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이곳에 왔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헬라인들”이라는 단어는 요한복음 7:35에 쓰인 것처럼 단순히 헬라인들을 의미하지 헬라어를 말하는 유대인들을 가리키지 않는다. 아마도 이들은 이방인들로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cf. 행 10:2)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예수를 만나기 위해 헬라식 이름을 가진 빌립에게 청을 넣은 것은 자연스럽다. 이어서 빌립은 자신의 단짝인 안드레에게 이것을 말하고 이 둘은 이 소식을 예수께 전한다(20-21절).
헬라인들이 자신을 만나고자 한다는 말을 전해들은 예수는 그들을 만나서 무슨 말을 하기 보다는 이것이 바로 자신이 죽어 하나님께 영광 돌릴 시간이 도래했다는 표시라고 생각한다. 즉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까지도 예수를 따라와 모든 사람(32절)이 구원받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시간이 된 것이다. 이 때 예수는 자신의 죽음의 의미와 제자도의 의미를 몇 가지 언명을 통해서 가르치는데 이러한 가르침은 바울이나 공관복음에서도 그 전승을 추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첫째, 썩어지는 밀알의 비유는 바울이 예수의 부활에 대해서 사용했다(24절; 고전 15:36). 둘째, 자기 생명에 대한 미움과 사랑에 대한 비유는 공관복음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다(25절; 막 8:35; 마 10:39; 눅 17:33). 셋째, 제자도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26절)은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라는 말과 상응하는 것이다(마 16:24; 막 8:34; 눅 9:23).
헬라인들의 면담 요청으로 자신의 죽음의 때를 감지한 예수는 이어서 고민하게 되는데(27절) 이 장면은 공관복음의 겟세마네장면에서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고민하는 상황을 연상케 한다(마 26:36-46; 막 14:34-42; 눅 22:39-46). 하지만 요한복음의 예수는 심각한 고민에 빠지지 않고 자신이 이 땅에 온 목적이 바로 죽기 위해서이며 자신이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임을 곧바로 고백한다(27-28절). 이러한 기도에 대해서 요한복음에서는 예외적으로 하늘에서 예수의 기도에 응답하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다(28절). 이 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우왕좌왕하자 예수는 이것이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하기 위한 것임을 가르친다(30절). 결국 예수의 죽음을 통해서 이 세상에 심판이 가해지고 이 세상 임금, 즉 사탄이 쫓겨 나가게 되는 것이다. 예수는 이 모든 것이 자신의 들림-중의적 용법으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 승천을 다 포함함-을 통해서 이루어 질 것을 말한다. 그 때 예수는 자신의 대속 사역을 통해 “모든 사람”을 자신에게로 이끌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예수의 말을 하게 된 계기가 헬라인들이 예수께 온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모든 사람은 이방인들을 포함한 모든 인류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예수가 메시아로서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진리를 설파하는 것에 대해서 무리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메시아 관과 예수의 가르침이 충돌함을 발견한다. 이들은 그리스도가 영원히 산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이들의 이러한 믿음이 외경 등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구약 성경이나 당시에 일반적으로 믿던 메시아 관과는 다른 것이다. 이러한 무리의 도전에 대해서 예수는 즉답을 피하고 대신 다시 한번 빛과 어두움을 메타포로 해서 어떻게 올바른 행동을 해야 할 것에 대해서 가르친다(35-36절). 예수는 자신을 빛으로 비유하며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고 한다. 그러면 "빛의 아들"이 될 것이라고 한다. 이 말을 마지막으로 예수는 사람들에게 떠나가서 숨는다(36절).
4. ‘표적의 책’의 결론(12:37-50)
4.1. 사람들의 불신(37-43절)
이 부분은 12장의 결론부분이라기 보다는 소위 1장에서 12장까지의 ‘표적의 책’의 결론 부분이다. 예수는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것을 시작으로 죽은 나사로를 살린 표적에 이르기까지 여러 표적을 행했지만 유대인 당국자들은 물론이고 일반 유대인들까지 예수를 믿지 않았다(37절). 이러한 사람들의 불신을 요한복음 저자는 이사야서에서 두 구절을 인용하면서 이것을 이사야 예언의 성취로 해석한다(38-40절). 또 저자는 이사야가 이러한 언급을 한 것은 이사야가 예수의 영광을 보고 그를 언급한 것이라 한다(41절). 여기서 이사야가 어떻게 예수의 영광을 보았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요한복음에서 아브라함도 미래의 예수에 대한 일을 보고 즐거워했다고 언급한 것을 볼 때(8:16) 여기서도 이사야가 미래의 예수에 대해서 언급한 것으로 저자는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예수의 표적을 보고도 믿지 않았지만 모두가 다 예수를 불신한 것은 아니다(42절). 유대인들 당국자들 중에서도 예수를 믿는 자가 많이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거기에서는 그가 예수를 믿었는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예수를 변호하고, 또 예수의 장례를 위해서 거금을 낸 것으로 보다 요한복음에서 그가 신앙을 가진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7:50-51; 19:39). 하지만 이 들 중에서 많은 사람이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 놓고 고백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를 요한복음 저자는 이들이 유대인 회당에서 출회를 당할 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마음을 요한복음 저자는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한 것이라고 평가 한다(43절).
4.2. 예수의 요약적 메시지(44-50절)
예수는 지금까지 말한 것을 요약해서 선포한다. 먼저, 예수는 요한복음의 기본 전제요 핵심 기독론인 아버지와 아들의 일치를 말한다(44-45절; cf. 5:19, 30; 10:30; 14:8-11; 17:4, 7-8). 예수를 믿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요, 결국 하나님을 믿는 것은 예수를 믿는 것을 통해 증명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예수는 빛의 메타포로 자신을 계시한다(46절). 이러한 가르침은 지금까지 계속되어 온 것이다(cf. 1:5; 3:19-21; 8:12; (;5; 11:9-10). 그 다음으로, 예수는 심판의 주제에 대해서 말한다(47-48절). 자신이 온 목적은 사람들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는 것이지만 믿지 않는 자는 예수의 말, 즉 하나님 말씀의 원리에 의해 종말에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예수는 자신의 가르침이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모두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한 것이라고 한다(49-50절). 요한복음에는 예수가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라는 사상과 예수가 하나님께 절대적 순종하는 존재라는 주제가 공존한다. 여기에는 약간의 긴장이 있다. 예수의 신성을 강조하기 위해 예수의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요소를 희생시킨다거나, 역으로 예수의 순종적 존재를 강조하기 위해 예수의 신성을 무시하는 것도 요한복음 저자가 제시하는 기독론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5. 해석과 적용
5.1 나사로 부활 사건의 교훈
나사로의 부활 사건은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내포한다. 첫째, 예수는 죽은 사람을 살리는 존재다. 예수가 죽은 나사로를 살린 사건은 요한복음 ‘표적의 책’에 나오는 최후의 표적이면서 동시에 최고의 표적이다.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표적이나, 환자를 기적적으로 치료하는 표적보다도 죽은 자를 살리는 표적은 표적 중의 표적이다. 이것을 통해 요한복음 저자는 예수가 단순한 이적 행사자가 아니라 죽은 사람도 살리는 특별한 존재임을 계시하려고 한 것이다. 부활절 이전의 제자들은 모든 것을 단순한 물리적 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죽은 자를 살리는 예수의 사역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11-16절). 마르다는 종말론적인 부활은 알고 믿었지만 산자의 부활을 믿는데 까지는 이르지 못했다(21-27절). 반면 유대인 지도자들은 불신앙의 대표자들로서 예수가 행한 표적에 대해서 시시비비를 명확히 가리려 하지 않고 오히려 이것이 자신들에게 유 불리한가를 가려 정치적으로 타결하려 했다(47-53절). 여기서 예수만이 모든 일을 하나님의 영광의 관점으로 보았다(4절).
둘째, 부활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부활을 예수 중심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당시의 사람들은 부활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론이 있었지만 예수는 자신이 부활이며 생명이라고 하여 부활을 예수 중심적으로 이해해야 함을 천명한다. 이 땅에서 육체가 살고 죽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디에 있든지 예수를 믿고 영생을 누리는가가 문제라는 것이다. 예수를 믿은 사람은 미래의 영생의 능력이 현재에 미쳐 현재로부터 영생을 소유하고 누리는 것이며, 죽어서도 이것은 계속되는 것이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죽어서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도 목숨은 살았지만 죽은 것과 마찬가지의 삶인 것이다.
셋째, 예수의 사랑은 보편적이면서도 개별적이다. 이 기사에서 나사로와 그 누이들은 예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인물들로 묘사되고 있다. 예수가 나사로의 죽음을 애도하여 눈물을 흘리기까지 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모든 인류를 보편적으로 사랑하는 예수의 사랑이 이렇게 어떤 특정 인물을 특별히 사랑하는 것과 내적으로 배치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하지만 본 기사에 나오는 나사로는 처음에 “예수의 사랑을 받은 자”로 묘사되고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모든 사람이 개별적으로 예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존재라는 것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요한복음 ‘영광의 책’에서 나오는 애제자도 그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요한복음 저자는 모든 제자가 예수의 사랑받은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 것 같다. 사실 특별하고 구체적인 사랑이 없는 보편적 사랑은 허구이며, 편애적인 사랑은 보편적 사랑을 결여한 것이다. 예수의 사랑은 보편성과 특수성을 다 갖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특별한 관계 속에서의 사랑인 ‘필리아’(친구로서의 사랑)와 보편적 사랑인 ‘아가페’가 동사로 쓰일 때 이것이 여기에서는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된다는 것은 우연히 아닐 것이다. 보편적인 사랑은 구체적인 특수한 사랑이 되고, 예수의 특별한 사랑은 인류애적인 보편적 사랑에 기반을 둔 것이다.
5.2. 도유 사건의 의미
요한복음에서 마리아가 예수의 다리에 향유를 붓고 머리로 이를 씻어낸 사건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먼저, 이러한 마리아의 행동은 예수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보은의 표시였다. 본문에서 특히 마리아의 선행과 예수를 판 가룟 유다의 이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대비되어 있는 것을 볼 때 이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단순히 마리아의 선행을 칭찬하기 위해 이 본문이 기록된 것은 아니다. 요한에게 있어 이 사건은 예수의 대속적 죽음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구약에서 왕의 등극식에서 도유하는 전통이 있지만 다리가 아니라 머리에 하는 것이기 때문에(삼상 10:1) 이 사건 자체가 왕으로서의 등극식은 아니었지만, 요한은 고난과 죽음을 통한 예수의 왕의 등극식(18-19장)에 앞서 이를 배치함으로써 이 사건을 등극식을 예비하는 사건으로 구성한다. 이러한 예수의 왕의 등극식을 예비하는 사건이 제사장에 의해서가 아니라 여자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것과 또한 머리가 아니라 다리에 향유가 부어진 것은 일종의 아이러니다.
제 9장 예수의 최후 만찬과 고별 설교(13-16장)
1. 내용 구성
1.1. 문학적 구조
요한복음에서 예수가 제자들과 고별하는 장면은 13장에서 17장까지이다. 이것은 최후의 만찬 장면(13:1-30)과 고별 설교(13:31-16:33)로 대별된다. 그런데 14장 마지막 절에서 “일어나자 여기를 떠나자”라고 말하고 18:1에서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편으로 나가시니”라고 되어 있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을 볼 때 15-17장은 초고가 완성된 후에 첨가 혹은 다른 사람에 의해서 추후에 보충된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래서 흔히 고별 설교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13:31-14:31; 15:1-16:4a; 16:4b-33) 세 층의 고별 설교가 있다고 생각한다. 각각에서 보혜사 본문 등 반복되는 것이 많음을 볼 때 각각은 예수의 고별 설교에 대한 여러 층이 합쳐진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여러 층으로 구성된 것이라 해도 최종 형태의 본문을 편집자가 그대로 남겨 놓은 것은 편집자는 최종 형태의 본문이 문학적으로 통일성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고별 설교는 여러 층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현재의 본문 자체가 저자의 본래 의도였다고 주장하는 것이 보다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
사실 요한복음 저자는 같은 내용을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반복이 생소한 것이 아니라 고별 설교에서는 요한복음의 다른 어떤 곳에서보다 반복이 더 많이 일어나고 있을 뿐이다. 또 보혜사에 대한 본문에서도 내용상 반복적인 것이 있지만 각각이 개별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설혹 고별 설교가 처음에 14장까지 완성되어 나중에 다른 것이 추가되었다 하더라도 현재 형태의 본문도 얼마든지 그 안에서 통일성 있는 문학으로 볼 수 있다.
1.2. 문학적 장르
예수의 고별 설교(13:31-16:33)는 문학적 장르로 볼 때 유대교 문헌과 그레꼬-로마 문헌 모두에서 죽어가는 영웅의 이별 장면을 기록한 유언 문학에 속한다. 다만 이것이 그레꼬-로마 문헌에 나오는 유언문학에 더 가까운지, 아니면 구약-유대교 문헌에 나오는 유언 문학에 가까운지가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있어왔다. 그레꼬-로마 문헌 중에는 죽어가는 영웅적 인물로서 제자들에게 유언을 남기는 것이 여러 문헌에서 발견된다. 가장 잘 알려진 것으로는 소크라테스가 죽기 직전 제자들과의 대화한 것에 대한 것이다. 구약 성서의 예로는 죽음을 앞둔 야곱이 제자들에게 유언을 한 것(창 49장), 모세가 백성들에게 행한 유언으로서의 연설(신명기) 등이 대표적인 것이다. 신약 동시대의 유대교 문헌에는 이러한 유언 장르의 문헌이 많이 있다. 특히 이 중에서도 열 두 족장 각자가 후손들에게 유언을 하는 형식의 ‘열두 족장의 예언’은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신약 성서 자체에도 이런 문학 장르의 글로는 누가복음에 기록된 예수의 고별 가르침(22:14-38)과 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에게 행한 연설(행 20:17-38)을 들 수 있다.
요한복음 저자가 위의 내용 중 어떤 것을 얼마나 알고 있었고 그것을 자신의 문학에 얼마나 활용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대체적으로 학자들은 요한복음 저자는 이 부분에 있어 유대 문헌에 더 익숙해 있었고 최소한 구약적 배경에는 친숙해 있었다고 생각해왔다. 최근에는 여기에 제자들을 위로하는 내용이 많이 나오는 것을 볼 때 이것이 구약-유대교 전통보다는 그레꼬-로마 전통의 유언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는 주장도 힘을 얻고 있다.7) 어쨌든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고별 설교는 기본적으로 구약-유대교의 유언 문학에 속하면서도 축복보다는 위로에 큰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고별 설교에 반복적으로 나오는 보혜사를 보내 줄 것에 대한 약속은 예수가 떠나간다는 것에 대해서 근심하는 제자들을 위로하는 것에 그 초점이 있다. 하지만 요한복음의 고별 설교가 위의 문학 장르와 유사하면서도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여기서 예수는 자신의 죽음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을 이야기 한다는 것이다.
2. 최후의 만찬(13:1-30)
2.1 세족식과 그 의미(1-20절)
2.1.1 세족식(1-11절)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은 공히 예수의 최후의 만찬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지만(마 26:17-29; 막 14:19-25; 눅 22:7-38; 요 13:1-30) 요한복음은 예수의 성만찬 제정 본문을 포함하고 있지 않고 대신 세족식을 기록하고 있다는 면에서 특이하다. 세족식에 앞서 요한복음의 예수는 자신의 사역에 있어서 결정적인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인식한다. 요한복음 저자는 이것을 예수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1절)로 표현한다(cf. 3절). 즉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죽음은 죽임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것이며(19:30)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예수는 자신의 본질과 사명에 대해서 한 번도 혼동하거나 잊어버린 적이 없으며 자신이 어떤 존재이고 무슨 일을 해야 하는 존재인가를 언제나 인식하고 있다(1, 3절).
예수는 자신의 본질과 사명을 인식하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의식을 행한다(4-5절). 그런데 예수가 자신의 죽음의 시간을 인식하고 있는 것과 세족식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가 언뜻 명확하지 않다. 이것은 당시의 제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예수가 베드로의 발을 씻기기 위해서 그에게 다가가자 베드로는 “주여, 당신께서 나의 발을 씻긴단 말입니까?”(6절)라고 의아해 한다. 이러한 베드로의 반응은 당시의 문화로 볼 때 당연한 것이었다. 고대 유대나 그레꼬-로마 사회에서 공히 다른 사람의 발을 씻기는 것은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에 대해서 행하는 섬김의 예식이었던 것이다. 사실 유대 사회에서는 노예조차도 주인의 발을 씻기는 것이 일상적인 의무 사항은 아니었다. 그런데 예수는 선생으로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려 했고, 이것에 대해서 저항하는 베드로의 반응은 문화적으로 정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예수의 세족 행위는 신학적인 의미가 있었다. 그래서 위와 같이 반응하는 베드로에게 예수는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후에는 알리라.”(7절)고 말한다. 요한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의 행위와 말씀에 대해서 예수 부활 이전에는 잘 깨닫지 못한다(cf. 2:17, 22; 7:39; 12:16). 이 장면에서도 예수 부활 이전의 베드로는 예수의 행위에 대해서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계속해서 말한다.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8a절). 이것은 요한복음에 나오는 제자들의 전형적인 오해의 말과 행동의 일종이다. 세족식이 신학적 의미가 있는 것을 알고 있는 예수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8b절)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세족식이 구원의 방편이 되는 성례전적 예식이란 말인가? 아니면 이것이 예수의 구원 사역에 대한 상징적 행위라는 말인가? 아마도 여기서 예수가 말한 뜻은 후자일 것이다. 세족식이 성례전으로 사용되었다는 증거는 신약 성서 안에는 없고 후대의 증거도 빈약하다. 그러므로 예수가 세족식을 행한 것은 그의 죽음에 앞서 자신의 갈 길을 제자들에게 보여준 것으로서 이것은 예수의 죽음을 제자들에게 예시하는 것이고 제자들로서는 그것을 받아들여야만 믿음이 성립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베드로는 예수의 말을 오해하여 발뿐만 아니라 손과 머리 등 전신을 씻겨달라고 한다(9절). 세족 자체가 죄를 씻는 행위가 아니라 예수의 죽음을 예시하는 상징적 행동이었기 때문에 예수는 온 몸을 씻을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이 때 예수가 한 말, 즉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10절)가 문제가 된다. 문제는 여기서 목욕한 자는 세족을 한 것을 의미하는 가하는 것과 “발 밖에”라는 말이 원문에 포함되어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먼저, 예수는 세족식을 통해서 씻는 메타포를 사용하는데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다. 즉 죽음을 앞둔 예수의 행위를 이미 받아들인 사람은 그것을 재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세족식을 성례전적 예식으로 사용하고 있던 일부 사람들이 자신들의 예식을 정당화하고 이 본문을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해석하도록 하기 위해 “발 밖에”라는 문구를 집어넣은 것으로 보인다.
2.1.2 세족식 의미 해석(12-20절)
제자들의 발을 씻기면서 베드로와의 대화를 통해서 예수는 이미 세족의 신학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세족식을 마치면서 예수는 자신의 행동의 신학적 의미를 넘어 윤리적 중요성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가르친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이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13-15절) 종이 주인보다 높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사람이 보낸 사람보다 크지 못한 것이 분명한데 이렇게 예수처럼 선생이 제자가 되고 주인이 종이 되어 상대방을 섬기는 것은 훌륭한 일이고 그렇게 행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것이다(16-17절).
그렇다면 여기서 예수는 이 세족식을 성만찬처럼 하나의 성례전으로 행하라는 것인가? 아마도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요한복음 저자가 공관복음(막 14:22-25; 마 26:26-29; 눅 22:15-20)과 바울서신에(고전 11:23-26) 나오는 예수의 성만찬 제정 사건을 모르지 않았다고 볼 때, 그가 이것을 여기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은 아마도 실제로 제자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보다도 그 예식 자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우려했던 것 같다. 요한복음 저자가 이러한 예식을 의도적으로 반대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가 이러한 성례전적 예식을 명시적으로 기록하지 않고 상징화해서 기록한 것은 예식 자체보다도 실제 형제간의 사랑을 중요시 여겼던 저자의 생각이 반영되어 있을 것이다.
세족식과 그것에 대한 해설을 마친 다음 예수는 요한복음의 핵심 주제로 돌아가 이 모든 자신의 행위와 말씀이 결국 제자들로 하여금 자신이 하나님께로 온 자임을 믿게 하려는데 있다고 한다. 요한복음의 예수가 이미 반복해서 말한 대로 예수를 영접하는 것과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은 하나인 것이다(19-20절). 예수는 바로 죽음을 통해서 자신의 사역을 완성하는 시점에서 다시 한번 자신의 사명을 선포하고 이에 대한 제자들의 신앙의 반응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2.2. 가룟 유다의 배반(21-30절)
요한복음 저자는 최후의 만찬 장면에 세족식과 가룟 유다의 배반 장면을 포함시키면서 양자를 긴밀하게 연결한다. 세족식에서 저자는 가룟 유다가 예수를 배반할 것임을 계속해서 언급하거나 아니면 복선으로 깐다. 예수가 세족식을 하는 장면에 앞서 저자는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라는 언급을 하고 있으며(2절), 모든 제자들은 깨끗하지만 그렇지 않은 제자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고(10b-11절), 시편 구절 인용을 통하여 자신을 배반할 자가 있을 것임을 예시한다(18절).
이제 이러한 예시와 복선을 넘어 배반자가 누구인가를 보여줄 시간이 왔다. 예수는 자신을 배반할 사람이 자신의 제자라는 것에 마음이 몹시 괴로워한다(21절). 여기서 “괴로워하다”라는 동사는 예수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사용했던 단어인데(12:27) 자신의 제자 중 배반자가 있다는 사실에 직면한 예수의 심정을 묘사하는데도 사용되었다. 예수는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한다. 이에 제자들은 그가 누가일까를 궁굼해하면서 어쩔 줄 몰라한다(22절). 여기까지의 장면은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동일사건 장면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배반자가 누구인가 제자들이 서로 확인하는 장면에서 공관복음서에는 나오지 않는 애제자가 등장하고, 그가 예수와 베드로의 중재자로서 등장하는 것은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내용이다(23-26절). 베드로와 애제자의 우정과 경쟁 모티브는 이후의 내러티브에서도 계속된다(18:15-16; 20:1-10; 21:1-7, 20-23).
어쨌든 애제자가 베드로의 부탁을 받고 배반자가 누구인가를 묻고 예수는 한 조각의 빵을
자기가 주는 사람이라고 대답한다. 이어 예수는 가룟 유다에게 빵 한 조각을 줌으로써 누가
배반자인지를 애제자에게 확인시켜준다. 이 때 사단이 가룟 유다의 마음에 들어가고 예수는
그에게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한다(27절). 그런데 요한복음에서 늘 그렇듯이 예수 부활
이전의 제자들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한다. 그러는 사이 유다는 예수가 건네 준 빵
한 조각을 받고 배반의 행위를 하기 위해 즉시 밖으로 나간다. 여기서 유다의 배반의 동인의
무엇이었는가가 본문 해석자들의 영원한 관심사였다. 공관복음에서는 유다가 돈 때문에 예
수를 배반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반면(마 26:15; 막 14:11; 눅 22:5; cf. 행 1:18; 마 27 :3-10)
요한복음에서는 그 배반의 원인자가 사탄이라고 말한다(2, 27절). 즉 요한복음은 예수가 유
다의 사소한 물욕 때문에 십자가에 내몰렸다기보다는 더 근원적인 원인자인 사탄에 궤계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은 유다가 최후의 만찬석을 떠난 시각이 “밤”이었다고 기록한다. 물론 시간적으로 이
것이 밤이었겠지만 여기에는 상징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것은 유다의 행동이 정당하
지 못했고 악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cf. 3:2; 9:7). 하지만 요한은 그 상
징적인 의미에 대해서 자세하게 묘사하지는 않는다. 조그만 상징으로 이미 독자들에게 전달
하고자 하는 바를 충분히 말했기 때문일 것이다.
3. 예수의 고별설교(13:31-16:33)
3.1. 고별설교 1(13:31-14:31)
3.1.2. 문제와 정황
고별설교는 예수가 제자들을 떠난다고 한 것에 대해서 제자들이 불안해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에 대한 위로로 주어진 것이다. 이것이 처음에는 베드로에 대한 위로로 시작해서(13:31-38), 제자들 일반에게 주어진 위로(14:1-14), 보혜사를 보내 줄 것을 약속한 것에 대한 위로(14:15-26), 평안의 약속을 통한 위로(14:27-31)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한 주제를 심도 있게 다루고 다음 주제로 넘어가는 바울서신의 논리 전개 방법과는 달리 요한 서신은 문단이 사상 단위 별로 명확히 끊어지지 않는데, 요한복음 14장도 요한서신과 비슷한 내용과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여러 주제가 반복되면서도 모두가 다 예수의 떠나감으로 생긴 문제를 위로로서 푼다는 주제로 묶여 있다.
가룟 유다가 예수를 배반하기 위해 최후의 만찬장을 떠난 때에 예수는 자신이 떠나갈 때가 되었다는 것을 영광이라는 말로 풀어 제자들에게 설명한다(13:31-33절). 물론 베드로, 도마, 빌립을 비롯한 모든 제자들은 그 뜻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이에 대해 엉뚱한 질문과 반응을 한다(13:36-37; 14:5, 8). 이 질문들의 잘못된 점들을 교정하면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떠나감에 즈음하여 몇 가지 명령과 대책을 제시한다. 먼저, 예수는 반복적으로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할 것을 주문하고 자신을 사랑하면 자신의 계명을 지킬 것을 요청한다(13:34-35; 14:16, 21). 둘째, 예수는 자신과 하나님이 하나된 것을 믿으라고 한다(14:1, 9-11). 예수는 자신만이 하나님께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천명한다(14:6). 셋째, 예수는 자신이 갔다가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14:18-20)과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주겠다는 것을 약속한다(14:27).
위 대책 중에서 예수가 떠나는 것에 대한 제자들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치는 예수가 이들에게 부활 후 다시 나타날 것을 약속한 것이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14:18) 예수는 자기가 죽으면 부활해서 다시 나타날 것인데 세상은 부활한 예수를 볼 수 없지만 제자 무리는 보게 될 것이라고 한다(19a절). 그 이유에 대해서 말하는 14장 19절의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evgw. zw/ kai. u`mei/j zh,sete)가 문제된다. 우선, 이것이 예수가 부활할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내가 살았고”라는 현재형 보다 “내가 살겠고”라는 미래형이 더 어울려 보인다. 그렇다면 저자는 왜 미래형 대신 현재형으로 이것을 표현한 것인가? 둘째, 만약 예수의 말로 “내가 살았고”라고 표현한 것이 정당하다면, 그 뒤의 제자들에 대한 것도 “너희가 살았고”라고 표현해도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에서 지금까지 강조되어 온 것은 생명이 현재에도 벌써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자는 왜 이렇게 현재형(zw/)과 미래형(zh,sete)을 병렬시켰을까? 우선, 이렇게 현재형과 미래형이 병렬되어 나타나는 것은 바로 앞 구절에서도 나타난 것으로서 요한 문헌에서 전혀 생소한 것은 아니다(me,nei와 e;stai). 요한복음 저자에게 있어 영생은 현재적 측면과 미래적 측면이 있기 때문에 이것이 때로 한 문장에서 같이 표현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가 생명을 얻는 것은 현재적으로 표현하고 제자들이 생명을 얻는 것을 미래형으로 표현한 것은 저자의 의도가 있는 것 같다. 여기서 예수는 생명의 원천이기 때문에 현재로부터 시작하여 미래에까지 생명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제자들은 생명의 원천인 예수에게 생명을 부여받아 영생을 소유하게 되기 때문에 성령의 오심을 통해 그것을 완전히 부여하는 사건인 예수의 성령 수여 사건(20:22)이 미래이기 때문에 제자들이 살아날 것(영생을 얻을 것)을 미래로 표현한 것이다. 특히 본 절의 문맥이 보혜사 성령의 오심을 약속한 것임을 통해서 이러한 것을 더 명확히 확인 할 수 있다.
3.1.2. 해결책
자신이 제자들을 떠난다는 것에 근심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는 위에서 제시한 여러 가지 위로와 해결책을 주었지만 이들의 근심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제시된 것은 바로 보혜사를 보내 주겠다는 예수의 약속이다(14:16-17). 이 구절은 예수가 떠난다고 말함으로써 일어난 불안에 대한 하나의 해결책으로 주어진 것이다(13:33). 우선 예수는 제자들 간에 서로 사랑해야 함을 강조한다(13:34-35). 그들이 더 이상 예수를 따를 수 없다고 한 예수의 말씀에 제자들은 당황한다. 베드로조차도 그를 따를 수 없다고 예언하자 그들의 불안은 증가한다. 예수와 제자들이 영원히 거할 장소가 있다는 것을 약속한 것도 그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닌 것이다(14:1-3). 제자들과 부활 후의 요한 공동체에게 급박하게 요구된 것은 죽은 후 하늘의 어떤 장소를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부재로 인해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주는 것이다. 예수는 자기와 같은 한 인격체인 보혜사를 제자들에게 보내달라고 하나님께 요청하겠다는 약속을 함으로써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여기서 예수가 보내줄 것을 약속한 것은 “제 2의 보혜사”(a;llon para,klhton)이다. 그렇다면 본래의 보혜사는 누구란 말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본문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여기서 본래의 보혜사는 예수를 지칭하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요한복음에서 이 시점까지 예수가 제자들의 보혜사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또 요한일서 2:1에서 예수를 보혜사로 호칭한 것도(한글 개역은 “대언자”로 번역) 이곳에서 예수가 본래의 보혜사였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지지해 주는 것이다. 나아가 요한복음에 나와 있는 보혜사의 기능들-제자들과 함께함, 가르침, 증거 등-이 주로 예수의 제자들에 대한 기능이었음을 볼 때 여기서 본래의 보혜사는 예수라는 것이 명확해 진다.
본래 보혜사인 예수의 역할이 제자들과 함께 걸어 다니는 것(6:66), 즉 제자들과 삶을 같이하면서 제자들을 인도하는 것이었듯이 이제 새로운 보혜사의 역할도 예수가 떠나간 상황에서 제자들과 “영원히 함께 있는”(meqV u`mw/n eivj to.n aivw/na h=|)것이다(16절). 보혜사가 제자들과 함께함은 다음 구절에 보다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parV u`mi/n me,nei kai. evn u`mi/n e;stai). 고별 강화에 나오는 여러 가지 보혜사의 기능은 이러한 제자들과 함께함이라는 기본적인 기능에서 근원한 것이다. 함께함에 의해 보혜사는 제자들과 인격적 관계를 맺고(14:17), 예수의 본질을 계시하고, 제자들에게 예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고(14:25-26), 예수를 증거하고(15:26), 세상을 책망하고(16:8-11) 이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것이다(16:13).
그런데 여기서 예수는 제자들과 “잠시 동안”(13:13) 머무르는 반면, 보혜사는 이들과 “영원히” 머무를 것이라는 문구가 나온다. 여기서 “영원히”라는 표현은 문자적으로 “영원히”라기보다는(cf. 4:38; 8:35; 12:34; 13:8) 보혜사가 제자들과 머무르는 시간이 예수의 지상 사역의 기간보다 더 오래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이 시간은 다름 아닌 교회 시대인 것이다. 예수는 자신이 떠날 것을 예고하면서 불안해하는 제자들에게 보혜사는 제자들을 떠나지 않고 계속적으로 이들과 함께 있을 것을 강조하여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가 제자들에게 보내 주기로 약속한 보혜사란 구체적으로 누구이며 어떤 역할을 하는 존재인가? 우선, 신약성서에서 헬라어 ‘파라클레토스(para,klhtoj)라는 단어는 요한문헌에서만 사용된 것이기 때문에 그 어원적, 종교사적으로 그 정확한 뜻을 고찰해야 할 것이다. 우리말로 “보혜사”로 번역된 이 단어는 신약 성서이외의 문헌에서는 주로 법정에서 피고를 도와주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런데 16:7-11에서는 이것이 법정에서의 역할과 연관되어 쓰인 것이 분명하지만-비록 피고를 도와주는 사람이 아니라 피고를 고소하는 역할이기는 하지만-다른 구절에서는 이것이 분명치 않다. 어형론으로 볼 때 이 단어가 수동형 분사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어떤 일을 돕기 위해 옆에 불리워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이 단어의 뜻이 수동적인 역할만을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이 단어는 옆에서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역할로서 조언자, 위로자, 중보자, 대변자의 뜻으로도 쓰인다. 그런데 요한복음에 쓰인 보혜사는 위의 어느 뜻 하나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이것은 세상을 고소하는 검사의 역할로 쓰였지만(16:7-11) 제자들의 변호사라는 의미로는 쓰이지 않았다. 그래서 보혜사가 누구이고 어떤 역할을 하는 인격체인가 하는 것은 그 어원이나 명확하지 않은 종교사적 기원에서보다는 요한 문헌에 나타나는 각 구절에서 그 쓰임새를 통해서 밝혀내야 할 것이다.
요한복음 보혜사 본문에서 보혜사는 “진리의 영”(14:17; 15:26; 16:13)이며 “성령”(14:26)으로 소개된다. 보혜사가 “진리의 영”으로 소개된 것은 예수가 진리(14:6)라는 요한복음 예수의 자기 천명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이것은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것의 다른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명칭을 기독론적으로만 해석할 필요는 없다. 14:17에서 보혜사가 처음으로 “진리의 영”으로 소개된 것은 세상은 근본적으로 거짓이기 때문에 진리의 영인 보혜사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상황에서 말해진 것이다. 이 언어는 거짓의 영의 지배를 받는 세상과 대조하기 위해서 쓰인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어쨌든 세상은 보혜사를 영접할 수 없다. 여기서 쓰인 “영접하다”(labei/n)라는 단어는 요한복음에서 “믿다”(pisteu,w)와 상응하는 용어이다(cf. 1:12). 세상은 보혜사를 받아들이지도 어떤 인격적 관계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유가 여기에서는 세상이 보혜사를 볼 수도, 알 수도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세상이 보혜사를 볼 수 없는 것은 보혜사가 영이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라기보다는 세상은 보혜사를 볼 수 있는 영적인 시각이 없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cf. 9: 39-41; 12:45). 왜냐하면 여기에서 쓰인 “본다”(qewrei/)가 “안다”(ginw,skei)라는 말과 교환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것임을 볼 때, 세상과는 달리 제자 무리는 보혜사를 알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17절).
흥미로운 것은 여기서 제자들이 세상과는 달리 보혜사를 알고 있는 것은 보혜사가 제자들 가운데 머무르고 함께 있다는데 있다고 한 것이다. 즉 제자들은 제자 무리 속에 거하는 보혜사를 체험함을 통해서 보혜사를 알게 된 반면, 세상은 보혜사를 체험할 수 없기 때문에 보혜사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고린도후서에서 바울도 신자들에게 구원의 확신에 대해서 말하면서 이들이 공통적으로 체험한 성령이 바로 구원의 보증이 된다는 것을 말한다(1:22; 5:5). 이것을 통해서 볼 때 이 구절은 요한복음을 현재 읽고 있는 요한 공동체가 현재 체험하고 있는 성령 체험을 반영하고 있는 것임을 볼 수 있다. 보혜사가 제자 무리 속에 현존하겠다는 약속에 해당하는 동사인 ‘메노’(me,nw)와 ‘에이미’(e;imi)가 사본에 따라 현재형과 미래형이 각각 다 나타나는 것도 이것이 요한 공동체의 현재적 성령체험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라는 하나의 증거가 될 것이다.
3.2. 고별설교 2(15:1-16:4a)
예수는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14:31)라는 말을 한 이후에 새로운 주제로 설교를 시작한다(15:1). 물론, 서로 사랑이라는 주제라든가 예수와 신자 간의 상호 내주 등의 공통된 주제로 앞뒤가 연결되어 있기는 하지만 여기서 예수는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서 새롭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3.2.1. 참 포도나무 예수(15:1-17)
요한복음에서 특징적으로 사용되는 “나는...이다”(6:35, 51; 8:12; 10:7-14; 11:25; 14:6)라는 신적 자기 계시 문구를 통해 이제 예수는 자신을 “참 포도나무”로 소개한다. 타락한 포도나무와 대조적으로(cf. 렘 2:21) 예수는 참 포도나무인 것이다. 유대교에서 포도원은 흔히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상징했는데(cf. 호 10:1; 사 5:1-2; 막 12:1-11), 여기에서는 예수 자신이 포도나무라고 하여 예수가 이스라엘을 대치하게 된다. 이렇게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던 것을 예수로 대치시키는 것은 전형적으로 요한적인 것이다(cf. 요 2:13-22; 10:1-18).
예수는 포도나무 메타포를 계속 발전시켜 자신의 본질과 자신과 제자들의 관계를 설명한다. 자신은 포도나무이고 제자들은 가지라는 것이다. 먼저, 가지가 생존을 유지하는 방법은 포도나무에 거해야 하는 것처럼, 제자들은 예수 안에 계속 거해야 한다. 제자들은 사실상 예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된다(5절). 만약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말라 죽는 것처럼, 제자들도 예수 안에 거하지 않으면 그렇게 된다(6절). 또 한 가지 여기서 사용한 주요 메타포는 가지치기이다. 포도나무에 열매를 더 풍성히 열게 하기 위해서는 가지치기가 필수적이듯이, 제자들도 과실을 맺지 않으면 가지치기가 된다는 것이다(2절). 여기서 요체는 열매 맺기이다. 이 열매 맺기는 흔히 전도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지곤 하는데, 문맥에서 이것은 제자들 간에 서로 사랑하는 것으로 설명된다(8-9절).
포도나무 비유의 전반부(1-8절)가 비유 자체라면, 후반부(9-17절)는 그에 대한 윤리적 적용이라고 할 수 있다. 전반부와 후반부가 “거하라”는 동사로 깊이 연관되어 있지만 후반부에서는 제자들 간의 “서로 사랑하라”는 내용이 더 부각된다. 이 부분은 사랑에 대한 명령으로 시작하여(9절) 서로 사랑에 대한 명령으로 끝난다(17절). 그러므로 포도나무 비유의 적용부분을 통해 볼 때 포도나무 비유가 그리스도 중심적이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수평적 관계를 무시한 것은 분명히 아니다.
그런데 제자들 상호 간에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한 후(9-12절) 예수는 다시 한번 자신과 제자들의 관계를 새로운 개념으로 묘사한다. 그것은 곧 예수와 제자들의 관계가 친구관계라는 것이다(13-15절). 예수는 이제 제자들을 종이라 여기지 않고 친구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예수는 제자들을 친구로서 인정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다 전달해준다고 한다(15절). 또한 예수는 제자들을 친구로서 사랑하는 증거로서 자신이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릴 것을 예시한다(13절). 예수와 제자들의 관계는 포도나무와 가지에서처럼 절대적이고 종속적인 관계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친구관계로서 상호적인 관계이기도 하다는 것을 예수는 천명한다.
마지막으로, 예수는 자신과 제자들의 관계를 친구 관계로 묘사하다가 다시 포도나무 메타포로 돌아가 결국 제자들이 그리스도와 올바른 관계 속에서 풍성한 열매 맺기를 요청한다. 그렇게 될 때 제자들은 기도 응답의 특권을 갖게 된다는 것도 언급한다(16절; cf. 7절). 여기서도 예수는 결국 열매 맺는 것은 제자 들 간에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결론 맺는다(17절).
3.2.2. 세상과 교회의 대립(15:18-16:4a)
제자들 간에 서로 사랑할 것을 계속해서 권고하던 예수는 이제 미움에 대해서 말한다. 물론 그것은 제자들 상호 간의 미움이 아니라 세상의 제자들에 대한 미움이다. 세상은 제자들을 미워하게 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제자들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15:19). 요한복음의 이원론적 사고에 따르면 사람은 예수에 속하거나 아니면 세상에 속하거나 둘 중에 하나밖에 될 수 없는데 제자들은 예수께 속한 것이다. 본래 세상은 예수를 미워하는데 결국 이것이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의 대한 미움으로 연결된 것이다(15:18).
그렇다면 여기서 명시적으로 지칭되지 않은 세상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세상이 믿는 것과 그 행동으로 볼 때 여기서 세상은 다름 아닌 믿지 않는 유대인 무리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예수를 거부하여 하나님과 예수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15:21; 16:3). 이들이 어떻게 예수를 거부한 것에 대해서는 요한복음 내러티브에, 특히 5-12장에 잘 묘사되어 있다. 이들은 예수와 하나님을 미워한 자들로 자신들의 죄를 피할 수 없는 자들이다(15:22, 24). 이렇게 이들이 죄인이라는 것은 성령과 제자들이 동시에 증거하는 것이다(15:26-27).
그런데 제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을 것에 대해서 예수가 이렇게 미리 언급하는 것은 예수가 떠나간 상황에서 제자들이 회당에서 축출당하는 것을 포함하여(16:2)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할 텐데 그 때 제자들이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올바로 대처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16:4). 결국 이러한 모든 행동 배후에는 세상이 하나님과 예수를 모른다는 한 가지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다.
이 부분은 세상과 교회의 대립을 묘사한 것으로 이것은 예수 시대에 그것을 대표하는 불신앙의 유대인 무리와 제자들 간의 대립이고, 이어지는 교회 시대에 있어서는 세상과 교회의 대립이다. 이것은 초기 교회 시대의 박해 현장에서 계속 이어지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신앙과 불신앙은 결코 화해할 수 없는 것이고, 여기에는 반드시 대립이 생긴다. 요한복음의 예수는 우리에게 이러한 대립을 이상하게 여길 필요가 없고,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이해하고 그것에 대처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결국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모르는 세상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교회를 핍박하게 되어있는 것이다.
3.3. 고별설교 3(16:4b-33)
3.3.1. 보혜사 성령(4b-12절)
자신이 떠나가는 것에 대해서 근심하지 않게 하기 위해 예수는 제자들을 위로하는 말을 하지만 여전히 제자들을 근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넘어 근심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6절). 이에 예수는 첫 번째 고별설교에서처럼 보혜사를 소개함으로써 그 해결책을 제시한다. 여기서 제자들의 근심이 반복되어 나타나고, 예수의 해결책이 보혜사에 대한 약속으로 앞의 내용과 같기 때문에 흔히들 이 부분을 제 3판 고별설교로 불러왔다. 하지만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은 동일한 내용을 계속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어느 정도는 전형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제 3판의 고별설교로 반드시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여기서 보혜사에 대한 예수의 약속은 하나는 세상에 관계된 것이고(7-11절), 다른 하나는 신자 공동체에 대한 것이다(12-15절).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되는 것은 세상에 대한 보혜사의 기능이다. 앞서 예수는 분명히 세상과 보혜사는 상극으로서 세상을 보혜사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14:17). 그렇다면 세상에 대한 보혜사의 기능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보혜사의 역할이 직접 세상에게 향해 있다기보다는 다름 아닌 신자 공동체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보혜사는 신자들의 마음속에서 세상이 갖고 있는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한 관념이 틀렸다는 것을 증거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가 보혜사의 세상에 대한 기능을 말하면서 갑자기 제자들, 즉 신자 공동체에게로 그 인칭을 바꾸어 말하는 것을 통해 증명된다(16:10). 즉 예수는 신자들의 마음 속에 있는 세상에 대해서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예수는 신자 공동체에서 역사하는 보혜사의 역할을 보다 상세히 소개한다(12-15절). 이 부분은 요한복음에 나오는 다섯 묶음의 보혜사 본문 가운데 최종적인 것이고 보혜사 본문 중 클라이맥스를 이루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는 보혜사를 “진리의 영”으로 소개하고 있다(13절). 예수가 진리(14:6)이기 때문에 여기서 진리는 기독론적으로 사용되어 이것은 “예수의 영”을 의미할 수도 있다. 하지만 특별히 여기서 보혜사를 “진리의 영”으로 소개한 것은 보혜사의 역할로서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본문 비평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진리”라는 단어 앞에 있는 전치사가 ‘엔’(evn[in])이냐 혹은 ‘에이스’(eivj[into])냐 하는 것이다. 사실 외증으로 볼 때 어느 것으로 결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 증거의 무게가 비슷하다. 하지만 어느 것으로 결정하든지 간에 그 의미에는 큰 차이가 없다. 혹자는 이것을 ‘에이스’로 결정하면 본문의 의미가 계시되지 않은 앞으로 계시될 진리를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나 이것은 본문을 지나치게 현미경적으로 보아 의미를 확대해석한 것이다. 어떤 것을 취하든지 간에 이것은 성령이 신자들을 예수가 계시한 진리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는 왜 “모든 진리 가운데로”라는 표현을 썼을까? 아마도 이것은 이전의 보혜사 본문에서 예수가 계속해서 강조해온 대로 예수 시대보다 보혜사의 시대가 제자들이 예수가 설파한 진리를 깨닫는데 있어서 더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일 것이다. 예수 시대에는 예수의 가르침을 올바로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만 보혜사 시대에는 제자들 각자가 보혜사의 도움으로 예수 가르침의 뜻을 깨달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cf. 2:22; 7:39).
예수는 보혜사의 역할로서 신자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것을 소개하면서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를 설명한다. 먼저, 보혜사는 자신의 독립된 권위로 어떤 진리를 설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로부터 듣는 것을 말한다는 것이다(13b절). 이것은 요한복음의 두 번째 보혜사 본문이 말하는 보혜사의 역할에 대한 내용과 상응하는 것이다(14:26). 즉 보혜사의 역할은 신자들을 가르치는 것인데 그 내용은 다름 아닌 예수가 제자들에게 말했던 내용이며, 보혜사가 하는 역할은 예수의 말씀이 어떤 뜻인지를 제자들에게 깨닫게 하는 것이다(2:22 참조).
다음으로, 여기서 소개된 중요한 보혜사의 역할은 “장래 일”을 제자들에게 알려주는 것이다(13c절). 다른 역할과는 달리 이것에 대해서 많은 주석가들이 당혹해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보혜사의 역할은 철저히 예수가 제자들에게 이미 말한 것을 생각나게 하고 그것을 올바로 깨닫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것은 보혜사의 역할로서 생소한 것이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이 역할을 예수의 관점에서 보면 자신의 고난과 부활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여기서 보혜사의 역할은 예수가 떠난 뒤 교회 시대의 역할이기 때문에 여기서 “장래 일”은 예수의 부활 이후에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예수가 말한 것 이외의 새로운 계시를 의미하는 것인가? 아니면 바울이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언급한 예언 사역을 말하는 것인가? 그런데 이와 같은 질문의 전제는 보혜사의 역할이 단순히 예수의 말씀에 대한 재생이라고 보는데서 출발한 것이다. 이전 보혜사 본문들에게 보혜사의 역할은 예수의 말씀을 제자들에게 올바로 이해시키는 것이었다. 다만 여기서 보혜사의 역할은 그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장래 일”을 알려주는 보혜사의 역할은 보혜사는 새로운 상황 속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 예수의 말씀을 새롭게 해석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이 이것은 예수의 가르침과 근본적으로 부합되는 것이지 배치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소개된 보혜사의 또 하나의 역할은 예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14절).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영광은 그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포함하는 일련의 구속사적 사건을 포괄하는 말이다(12:23, 27-28; 13:31-32; 17:1, 5).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예수의 영광을 드러내는 보혜사의 역할은 예수가 이루어 놓은 구원의 과업을 사람들 속에서 실제화시키는 것이다. 또 예수의 역할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었다면 보혜사의 역할은 예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예수와 성령은 상호 구별되면서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예수는 아버지의 것을 갖고 있고, 보혜사는 이것을 제자들에게 알린다. 결국 보혜사의 역할은 아버지의 것을 알리는 것이 된다(14-15절).
3.3.2. 예수의 고난과 귀환 예고(16-33절)
자신이 떠난다는 사실에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는 이제 마지막으로 자신의 귀환을 언급함으로 제자들을 위로한다. 물론 제자들은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16절)는 예수의 말의 뜻을 알지 못했다(17-18절). 여기서 예수는 자신의 죽음과 그 이후에 오는 부활을 각각 언급한 것이다. 예수의 죽음 앞에 제자들이 곡하고 애통하겠지만 그 후에 오는 예수의 부활에 그 고통이 오히려 기쁨이 되리라는 것이다. 예수는 여인의 산고를 예로 들면서 제자들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맞이하게 될 것을 설명한다(20-22절).
예수는 이제 예수의 부활에 때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그 때에는 제자들이 예수의 뜻을 깨달아 더 이상 예수의 말을 오해는 질문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23a절). 또 그 때에는 제자들이 하나님께 대한 기도의 특권을 갖게 될 것이고, 제자들의 간구에 하나님이 응답하실 것이다(23b-24절). 그리고 그 때에는 예수가 현재 알아듣기 어려운 말로 한 것을 알아듣는 말로 하게 될 것이다(25절). 이러한 말을 한 후 흥미롭게도 제자들은 부활 이전인데도 불구하고 예수의 말씀을 알아듣는다(29-30절). 어쨌든 예수는 이러한 제자들의 믿음의 응답에도 불구하고 곧 제자들이 자신을 버려두고 도망갈 것을 예고한다(32절). 하지만 예수는 제자들을 경고하게 위해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이들이 후에 이것을 깨닫고, 세상의 시험을 이기어 예수 안에서 새롭게 평안을 누리게 하기 위한 것이다(33절).
4. 해석과 적용
4.1. 요한복음 최후 만찬 장면(세족)의 교훈
요한복음의 최후의 만찬 장면에는 공관복음의 성만찬 예식 장면 대신 세족식 장면이 나온다. 세족식은 예수의 죽음에 앞서 제자들의 죄를 씻는 상징적 의미가 있는 동시에 사랑의 본을 보이는 의미가 있다. 바울서신에서와 마찬가지로 요한복음에서도 신자들의 윤리는 신학적, 혹은 기독론적 토대위에 서 있다. 즉 예수의 본을 따라서 신자는 서로 사랑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만찬이 성례전으로서 예수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이라면, 세족식은 그 성례전적 의미뿐만 아니라 윤리적 의미까지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 저자가 성만찬 예식에 대한 전승을 알고 있었다고 볼 때 그가 이것을 성만찬 장면에 포함시키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신학적 의미가 실천적 윤리로 화하지 않는 것을 경계한 것 같다. 예수의 대속적 죽음은 제자들의 “서로 사랑”이라는 윤리로 육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4.2. 예수 고별설교의 교훈
요한복음의 고별 설교 장면을 보면 예수가 제자들에게 자신이 그들을 떠나야 하겠다는 말을 했을 때 제자들은 그의 부재로 인한 상황에 대해서 심한 두려움에 싸이게 된다. 이 때 예수가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준 핵심 사항은 그가 제자들과 계속 함께 하겠다는 것이다. 그 약속은 두 가지로 주어진다. 하나는 그가 부활하여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날 것이라는 약속이다. 다른 하나는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어 그가 자신이 제자들에게 했던 것처럼 제자 공동체에 현존하여 그들을 지도하게 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약속은 예수 부활 이후에 신자가 된 우리 모두에게도 그대로 유효하다.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의 약속을 기다렸다면 우리는 그의 재림의 약속을 기다리는 것이며, 제자들이 예수의 약속을 따라 보혜사를 경험했듯이(20:19-23) 우리도 여전히 보혜사를 경험해야 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고별설교를 통해서 볼 때 바른 교회의 표지는 바로 예수의 재림에 대한 약속과 보혜사에 대한 약속을 얼마나 고대하고 실제로 체험하고 있는가 이다. 요한복음 고별설교에 이러한 약속이 기록된 것을 보면 요한 공동체는 복음서를 기록할 당시 이 예수의 약속을 실제로 깊이 체험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해 준다.
제 10장 예수의 고별 기도(17장)
1. 내용 구성
요한복음 17장은 종교 개혁 이후로 예수의 “대제사장적 기도”(D. Chrytraeus의 말)로 불리어져 왔다. 여기서 예수가 하나님과 그의 제자들의 매개자 등장한다는 면에서 이 명칭을 쓰는 것은 정당하다. 게다가 17절과 19절에서 예수 자신이 스스로를 성결케 하고 제자들을 성결케 해달라는 기도를 하는 내용은 여기에서 예수께 대제사장적 역할이 부여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해 준다.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고별 기도는 예수의 고별 설교의 대미를 장식하는 것으로 위치되어 있다. 예수의 고별 기도라는 형식으로 되어있는 요한복음 17장은 단순한 염원을 담은 기도라기보다는 기도라는 형식을 통하여 예수 자신이 자신의 사역을 요약 설명하고, 제자들의 현재 위치를 가르쳐주며, 앞으로 제자 공동체가 어떠한 미래를 맞게 될 것인지를 제시한 것이다. 요한복음 17장은 예수의 고별강화의 마지막에 해당되는 부분으로 예수는 기도로서 고별강화를 마친다. 이것은 구약에서 족장들이 유언을 할 때 자녀들을 축복함으로써 생을 마치는 것과 비견될 수 있다(cf. 창 49:1-27; 신 31:30-32:47).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고별 강화의 주요 주제 중의 하나는 보혜사에 의해 시작될 미래의 제자 공동체인데, 예수의 기도에서도 이러한 제자 공동체의 일치에 대한 것이 주요 주제이다.
요한복음 17장의 구조에 대해서 어떤 학자들은 내용을 중심으로 구조를 분석하고, 다른 학자들은 문단의 시작을 나타내는 형식에 근거하여 분석하고, 또 다른 일군의 학자들은 양자를 적절히 조화하여 분석하기도 한다. 전통적이고 가장 널리 인정되는 17장의 구조는 그 주제를 중심으로 분석한 것으로 다음과 같다: 예수의 자신을 위한 기도(1-5절); 예수의 제자들을 위한 기도(6-19절); 예수의 미래 교회를 위한 기도(20-26절). 마지막 부분은 전체 기도의 결론 부분인 24절(혹은 25절)을 중심으로 나누어 질 수 있다.
요한복음 17장의 구조를 분석하는데 있어서 어려운 점 중의 하나는 본문 자체의 구조가 비교적 느슨하게 엮여져 있다는데 있다. 요한복음의 특징대로 17장은 구조적인 형식에 의한 것보다는 신학적인 관심에 의한 유동적 문체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요한복음 17장을 교회론적 관점을 포함하여 여러 다른 관점에서 분석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의 고별 강화의 주요 주제 중의 하나인 교회론의 관점에서 17장의 구조를 이해하는 것도 유용하다. 교회론적으로 이해하면 미래 교회의 설립에 관한 내용이 있는 20-23절이 17장의 예수의 기도에서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기도의 도입부(1-5절)는 교회의 존재 목적을 보여주는 것인데,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기 위한 것이다(2-3절). 기도의 본론부(6-19절)에서는 교회론적인 개념들이 점진적으로 발전된다: a) 미래의 신자 공동체의 씨로서의 제자들의 선택(6-8절); b) 제자들의 보호와 보전(9-16절); c) 제자들의 성화와 세상으로 파송(17-19절). 제자들이 세상에서 선교적인 사역의 결과로(18절) 교회는 신자들의 일치로서 설립된다(20-23절). 마지막 부분은 교회의 종말론적 미래(24절)와 완성을 말하고 있다(24-26절).
2. 예수와 하나님(1-5절)
다른 복음서에서도 흔히 발견되는 대로 예수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막 14:36; 눅 11:2) 기도를 시작한다(1절; cf. 11:41; 17:5, 11, 21, 24, 25). 예수는 이 기도를 통하여 자신과 하나님이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임을 상기시키고 아들의 사역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제 마지막으로 자신이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시간이 되었는데 그것은 또한 하나님이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예수는 하나님께 자신이 이 과업을 잘 수행 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을 자신을 영화롭게 해달라는 말로 표현한다(1, 5절). 그런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들에게 영생을 주는 일이다(2절). 3절에는 영생이 직접적으로 정의되어 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한복음의 중심 주제인 영생은 이곳에서 명확하게 그것도 요한복음이 선호하는 안다는 동사를 통해서 정의되어 있다. 요한복음에서 안다라는 동사는 인격체 상호 간에 깊은 교제의 관계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이 단어로 표시하면 인간 편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신뢰를 의미라고 하나님 편에서는 인간에 대한 사랑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예수는 기도의 서두에 자신의 지상 사역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고 그 구체적인 결과가 하나님이 허락한 모든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는 것이라고 하여 다음 부분에서 이 영생을 소유한 사람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룰 것에 대한 암시를 한다.
3. 예수와 제자들(6-19절)
예수 고별 기도의 중심 부분에서 예수는 자신의 사역을 제자들을 위한 기도라는 형식으로 요약한다(6-19절). 예수의 사역은 하나님이 선택한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여 그들이 믿게 하는 것이다(6-8절). 예수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 제자 무리들을 보호하고 보존해 달라고 기도한다(9-16절). 또 이들이 거룩한 무리를 이루어서 예수의 사역을 계속할 수 있게 되도록 기도한다(17-19절).
예수가 제자들에게 한 가장 기본적인 사역은 그들로 하여금 예수 자신의 본질을 인식시키는 데 있었다. 그것은 예수 자신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에 대한 믿음이란 다름 아닌 예수의 출처와 본질을 아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이며 제자들은 결국 이것을 알고 믿는다(6-8절). 그런데 이 제자들은 하나님이 세상에서 선택하여 예수께 보내준 자들이다. 예수는 이들에게 하나님을 소개하고 그의 말씀을 지키도록 훈련하는 일을 한다.
제자들에 대한 예수의 첫 번째 기도는 하나님이 선택한 이 제자들을 세상과 악한자로부터 보호해 달라는 것이다(11, 15절). 예수는 지상 사역 기간 동안 이들을 보호하고 지키는 역할을 했지만 이제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되었기 때문에 이들의 보호를 하나님께 위탁한다. 그들이 보호받아야 될 것은 이들은 예수와 마찬가지로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세상과 불화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는 이들이 예수와 하나님이 삼위일체의 관계 속에 하나가 된 것처럼 제자들이 서로 하나가 되기를 기도한다(11절).
제자들에 대한 예수의 두 번째 기도는 이들이 세상에서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이들의 성별을 위한 것이다(17절). 예수가 성별되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제자들에 대한 사명을 다했듯이 제자들도 예수의 보내심을 받아 세상에서 사명을 다하도록 예수는 기도한다( 17-19절). 제자들에게 선교의 사명을 준 것은 뒤이어 나오는 구절에서 제 이 세대 신자들을 위한 기도를 준비시키는 역할을 한다.
4. 예수와 미래의 제자 공동체(20-23절)
제자들의 선교의 결과로 제 이 세대 신자들이 생기게 되는데 예수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한다(20-23절). 이 부분은 제자 무리가 미래에 교회 공동체를 이룰 것에 대한 기도로서 예수의 고별 기도의 정점을 이루는 부분이다. 20-23절은 작은 독립된 문단을 형성한다. 20절에 있는 ‘페리’(peri.)와 ‘데’(de.)를 포함하는 구문은 새로운 문단의 시작을 표시한다(cf. 9절). 24-26절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을지라도 뒤 구절이 전체 기도의 결론이 된다는 면에서 두 구절들은 서로 나뉘어 진다. 요한복음 17:20-23은 두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문장( 20-21절)과 두 번째 문장(22-23절)은 각 각 ‘카도스’(kaqw.j)(1번)와 ‘히나’(i[na)(3번)절을 포함하는데 양자는 문학적 평행을 이룬다. 이 양 문장 사이에는 놀랄만한 문학적 평행이 있다. 첫째, 양 문장을 어떤 진술로 시작한다(20절; 22a절). 둘째, 양 문장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는 신자의 일치이다(21ab절; 22b, 23a절). 셋째, 양 문장에서 일치의 궁극적 목적 즉 세상이 믿게 되는 것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것은 신자의 일치를 통해서 성취될 것이다(21c절; 23b절).
예수는 “이 사람들”(peri. tou,twn)을 위해서 기도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말을 통해서(dia. tou/ lo,gou auvtw/n) 믿게 될8)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한다. 여기서 “이 사람들”이라는 문구는 9절로 거슬러 올라가서 발견할 수 있는데 거기에서 예수는 그의 제자들을 위해서(peri. auvtw/n) 기도한다. 그러므로 “이 사람들”은 예수의 제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세상에서 선택되어(6절),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졌으며(9절),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다(18절). 예수의 첫 번째 기도는 그들에게 향해진다. 그러나 이 기도는 곧 미래의 신자들에게까지 확대된다.
예수의 제자들과 미래의 신자들 공히 “말씀”(cf. 8절; 20절)을 통해서 신자가 된다는 데는 구별이 없다는 것은 주의해서 볼 사항이다. 전자는 예수의 말(ta. r`h,mata)을 통해서 제자가 된다면 후자는 전자의 말을 통해(dia. tou/ lo,gou auvtw/n) 신자가 된다. 여기서 미래의 신자는 그 메시지를 받아들임을 통해 예수께로 올 미래의 모든 신자를 다 포함하는 것이다.
예수의 기도의 목적은 세 개의 ‘히나’(i[na절)(21절)로 표현되어 있다. 예수는 (i) 모든 사람들이-예수의 제자들과 미래의 모든 신자들-이 하나가 되고(e]n), (ii) 그들이 아버지와 아들 안에 거하고, (iii) 세상이 예수가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을 믿도록 기도한다. 여기서 (i), (ii), (iii)이 모두 ‘히나’(i[na)절로 구성되어 있는데 (i)과 (ii)는 일치와 내재의 주제와 연관되어 있고 (iii)은 세상에 대한 선교와 연관되어있다. 여기서 (iii)이 주 문장의 동사에 바로 연결되어 있는 것인지 아니면 (ii), (iii)의 내용에 연결되어 있는 것인지 학자들의 의견이 갈린다. 예를 들어 어웨이커(J. C. Earwaker)는 (i), (ii), (iiii) 모두가 주 문장의 직접 목적절로 사용된 것이기 때문에 그 결과 예수의 기도는 신자의 일치, 신자의 하나님 안에 거함, 세상을 향한 선교에 대한 것이 된다고 주장한다.9) 그런데 이러한 견해는 문제가 많다. 왜냐하면 세상을 예수의 기도 목록에 넣는 것은 11절과 20절의 세상이 예수의 기도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내용과 상호 모순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iii)은 앞의 (i) (ii)에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 불트만의 주장이 옳다. 따라서 그의 주장에 의하면 신자의 일치는 세상으로 하여금 예수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사신이라는 것을 믿게 인도한다. 예수의 기도는 신자의 일치와 신자의 내재가 세상을 도전해서 예수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자 라는 것을 믿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주요 주제는 신자들의 일치이다. 11b절에처럼 하나님의 일치는 신자의 일치의 모델로서의 역할을 하며, 신자의 일치는 여기서 요한의 상호 내재 형식문인 “아버지가 내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cf. 10:38; 14:10, 20; 17:23) 구절을 통해 보다 자세하게 표현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일치의 모델은 아버지와 아들의 상호 내재이다. (ii)는 신자의 하나님 안의 내재를10) 포함하는데 그것은 일치의 수직적 차원이다.
앞에서 보여준 대로 20-21절과 22-23절 사이에는 현저한 평행이 있다. 양자에서 ‘히나’(i[na) 문장이 똑 같이 세 번씩 나오는데 이것은 셈족어적 평행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21-23절에는 약간의 변화와 첨가된 것이 있다. 첫째, 여기에서는 신자의 일치는 예수가 제자들에게 준 영광으로부터 온다. 둘째, 23절에 있는 “내가 그들 안에 너희가 내 안에”라는 상호 내재 문구는 신자들과 삼위일체 하나님 간의 상호 내재의 측면을 보여준다. 21절에는 신자가 하나님 안에, 23절에는 하나님이 신자 안에 거한다고 표현되어 있는데 하나님과 예수의 관계를 표현하는 똑 같은 내재 문구(21절)가 제자들과 하나님의 관계를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다. 셋째, 23절에는 완료형 분사 ‘테텔레이오메노이’(teteleiwme,noi)가 첨가되었다. 요한복음에 있어 ‘텔레이오’(teleio,w)동사는 하나님으로 주어진 예수의 독특한 사명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4:34; 5:36; 17:4; 19:28). 이 동사는 “하나님 혹은 예수의 능력의 사역을 표현하는 전문 용어이다.”11) 이러한 용법을 23절에 적용하기 어려운 점은 이것이 여기에서는 제자들과 관계되어 쓰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수동태로 표현되어 있다는 것은 이 단어가 예수의 특별한 사명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해준다.12) 제자들이 일치를 이루는 것은 하나님이 부여한 예수의 특별한 사명 중 하나이다. 넷째, 세 번째 ‘히나’(i[na)구절에서 사용된 동사는 ‘기노스코’(ginw,skw)이다(cf. 21절에는 pisteu,w이다). 요한복음에서 이 동사들은 비슷한 의미로 쓰이며 여기서는 상호 교환적으로 쓰일 수 있는 말이다. 예수는 신자들의 일치를 통하여 세상이 도전을 받아 예수가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것을 깨닫기(ginw,skw)를 기도한다. 다섯째, 20-21절에는 없는 사랑이라는 주제가 여기에 도입되었다. 세상은 하나님이 예수를 사랑하듯이 하나님이 신자들을 사랑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5. 교회의 종말론적인 미래와 완성(24-26절)
예수는 마지막으로 제자들의 무리가 미래에 어떻게 될 것을 알리는 기도를 한다. 예수는 자신이 영광을 받은 후 있게 될 곳에 제자들도 함께 있기를 기도한다. 그 결과 제자들이 예수의 영광을 보고 그가 창조 시부터 하나님과 함께 있었던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를 위해서 기도한다. 결국 교회의 미래는 예수의 제자들이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것이 된다. 예수는 계속해서 세상과는 다르게 자신이 하나님과 독특한 교제를 나누고 있다는 것을 말하면서 이것이 곧 제자들로 하여금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을 특별한 존재임을 알게 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예수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냈고 미래에도 계속 나타낼 것인데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고 예수도 이들 안에 있게 된다. 즉 예수는 제자들과 상호 내주의 기쁨을 누리게 된다. 이것이 교회의 영광스러운 미래이다.
6. 해석과 적용
6.1. ‘일치’의 특징
이미 고찰한 대로 예수의 고별 기도의 주요 주제는 제자들의 하나됨이며 그 중심에는 ‘일치’(e]n)라는 용어가 있다. 요한복음 17장에 나타난 일치의 개념은 그 일치가 하나님과 예수 사이의 일치의 개념을 모델로 하고 또 그것에 근원하고 있다는 면에서 “독특한 종류의 일치”13)이다. 이 일치에 대해서 수많은 종류의 해석이 있어왔다. 어떤 학자들에게 있어서 이 일치는 신비적이고 비가시적인 것이다.14) 다른 학자들에게는 이 일치는 성만찬적 일치이다.15) 또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교회일치적(ecumenical) 일치이다.16) 그러나 여기에서 보여 지는 일치는 이그나시우스적 개념의 기구적인(institutional) 일치도 아니고(cf. Ign. Eph. 5:1) 이 일치의 모델이 어떤 지상의 모델과는 상관이 없는 모델의 일치라는 점에서 교회일치적인 일치도 아니다. 나아가 이 일치는 순수한 영적인 일치도 아니며 순전히 신비한 일치도 아닌 것은 이 일치가 세상이 예수를 믿도록 도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일치는 신자 공동체에서 실현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가시적인 것이 된다(23절).
요한복음 17:20-23의 일치의 개념은 기본적으로 관계적인 것이다.17) 이 일치는 아버지(하나님)와 아들(예수)의 관계(21b, 22b, 23a절)와 예수와 신자들의 관계(23a절), 제자들과 하나님의 관계(21c절)와 마지막으로 제자들 간의 관계(21a, 22b, 23b절)를 표현한 것이다. 일치의 근원적인 모델은 아버지와 아들의 완전하게 조화된 관계이다(21절). 아버지와 아들은 상호 내재를 통하여(21절) 하나가 된다(22절). 이 일치는 “아버지와 나[예수]는 하나이니라”(요 10:30)라는 기독론적 일치를 전제로 한다. 이 문제를 세심히 연구한 아폴드(Mark L. Appold)에 의하면 이 기독론적 일치의 모티브는 신약에서 요한복음에만 있는 독특한 것이다: “신약의 그 어떤 다른 부분에서도 일치의 용어가 예수의 아버지와의 관계를 명시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곳은 없다.”18)
요한복음 17:20-23의 일치의 모티브는 기독론적이며 동시에 교회론적이다. 여기서 일치는 신자들의 일치와 예수와 신자들이 일치가 다루어져 있다. 요한복음에 있는 일치를 나타내는 명시적 구절 중 거의 대부분이 교회론적 모티브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해 볼 사항이다(cf. 10:16; 11:52; 17:11, 21-23).19) 모든 구절에서 일치는 미래를 향하고 있다. 일치는 종말론적 사건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에서 ‘헨’(e])이라는 말은 종말론적 신자 공동체를 기술하는 말이다.20)
요한복음의 일치와 비슷한 개념이 요한 문헌의 다른 부분에 나타난다(요일 1:1-10). ‘코이노니아’(koinwni,a)라는 단어는 신자의 일치를 표현하는 말이다. 요한복음 17:20-23의 ‘헨’ (e]n)과 요한일서 1:1-10의 ‘코이노니아’ 개념에는 현저한 일치점이 있다. 첫째, 양 구절 모두 두 세대의 신자를 언급하는데 후자에서는 “우리”와 “너희”로 표현된다. 둘째, ‘헨’과 ‘코이노이나’의 목적이 증거 혹은 선교사역(요일 1:3)으로 비슷하다. 셋째, 양자 모두 수직적 차원과 수평적 차원이 있다(요일 3, 4, 6, 7). 넷째, 신자의 일치의 결과 중 하나가 기쁨이 충만한 것이라면(요 17:13), 사귐의 가시적 결과도 또한 기쁨의 충만이다(요일 1:4).
그러면 요한복음 17:20-23의 일치 개념에 반영되어 있는 요한 교회론의 특징은 무엇일까? 그 특징은 일치의 특징에서 발견된다. 근본적으로 이 일치는 관계적인 것이고 가장 근원적이고, 모델이 되는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일치이며, 그것을 모델과 원천으로 해서 신자의 일치가 이루어진다. 이러한 일치의 개념은 요한복음의 중요한 교회론적 구절인 10:1-18과 15:1-8의 내용과 상응한다. 거기에서 신자와 하나님(혹은 예수)의 상호 내재가 교회를 구성하는 가장 근원적인 요소 중 하나이다. 비교를 나타내는 ‘카도스’(kaqw.j)라는 접속사가 10:1-18과 17:20-23에서 똑 같이 공동체의 예수와의 관계를 정의하는데 아주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10:15; 17:21, 22). 두 본문 모두에서 신자의 일치는 하나님과 예수의 일치에 근거를 두고 있다.21)
6.2. 예수 고별 기도의 기능과 효과
예수의 고별 기도는 요한복음 전체 내용, 특히 고별강화의 내용을 상기시켜준다. 고별기도에서 예수는 자신의 사명과 하나님과의 관계와 제자들의 과거, 현재, 미래를 말한다. 이것은 마치 현대 교회 예배 시간에 설교자가 설교를 한 후 설교를 요약하는 기도를 통하여 청중들이 얻는 효과와 비슷하다. 이 기도를 통하여 제자들은 자신들의 현재, 과거, 미래가 예수의 기도 안에,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된다. 예수가 하나님께로 간 뒤 홀로 남게 될 제자들이 자신들의 미래를 걱정하게 되는 상황에서 전개된 고별강화는 제자들이 하나님의 선택과 보호아래 있고 이들은 예수에게서 사명을 받아 전도를 하고 결국은 하나의 신자 공동체를 이룰 것이라는 예언적 기도로 끝난다. 또한 이 기도가 승천한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기록되었다는 것은 현재 제자들이 예수가 승천하신 뒤에도 그리스도의 기도 가운데 남아 있다는 확신도 갖게 한다. 예수가 떠난 후 지상에서는 보혜사이신 성령의 도움을 받지만 또한 예수는 하늘에서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예수의 고별 기도의 중요한 기능은 제자들로 하여금 사랑 안에서의 일치가 지상에 있는 제자들의 사명이라는 것이다. 제자들은 사랑 속에서의 일치를 통해서 예수가 하나님을 제자들에게 알게 했듯이 세상으로 하여금 예수를 알게 하는 사명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일치와 사랑은 그 어떤 인간적인 최고선도 아니고 하나님과 예수 사이의 관계 속에서 그 모델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일치에 이르도록 명령을 받음으로써 제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가져야 하고, 이를 바탕으로 어떻게 상호 간에 일치를 이룰 수 있을지를 깨닫게 된다.
제 11장 예수의 수난(18-19장)
1. 내용 구조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은 각각 예수가 말하는 스타일과 내용을 상당히 서로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양자는 수난사화에 있어 그 내용과 순서가 상당한 정도로 일치한다. 그렇다고 해서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의 수난사화에서 그 신학적 주 모티브가 같은 것은 아니다. 한마디로 말해, 요한복음 수난사화에 등장하는 예수는 불쌍하고 가련하게 고난당하는 자로서 그려지기 보다는 오히려 왕으로서 모든 상황을 스스로 통제하는 위엄 있는 신적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유대인들과 로마 병정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그들이 예수의 목숨을 좌지우지 한 것이 아니라 예수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신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왕으로 묘사되는데(1:49; 12:12-16) 이것이 수난사화에서는 주 신학적 모티브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2. 요한복음 수난 사화: 왕으로서의 예수
2.1. 예수의 체포(18:1-11)
요한복음 수난사화에는 다가오는 고통과 죽음에 대해서 예수가 고뇌하는 장면, 이른바 겟세마네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cf. 막 14:32-42; 마 26:36-46; 눅 22:39-46). 예수는 현재와 미래에 일어날 모든 일을 다 아시고(4절)22) 모든 일을 왕으로서 의연하게 대처하며 하나님이 정해 놓은 길을 갈 뿐이다. 요한복음 수난사화는 예수가 왕이라는 것이 그의 행동과 말을 통해서 드러난다. 예수가 체포되기에 앞서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로 건너가는 것도, 다윗 왕이 압살롬의 반역으로 기드론 시내로 물러가는 장면을 연상하게 하는 것이다(1-3절; 삼하 15:23).
대제사장의 무리가 예수를 체포할 때 예수는 왕으로서의 위엄을 갖고 있음을 볼 수 있다(3-11절). 먼저, 유다가 대제사장들의 군대를 이끌고 무기를 가지고 예수를 체포하러 왔을 때 그는 겁내지 않고 “자기 앞에 전개될 일을 다 아시고”(4절; cf. 13:1) 이 사건에 의연하게 대처한다. 다시 말해 예수가 체포당할 때에 외적으로 보면 유다나 제사장들이 이 사건을 주도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본질적인 상황은 예수가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예수를 체포하러 왔지만 이들에게 먼저 주도권을 가지고 말을 건 것은 예수다.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이 말에 그들이 “나사렛 예수를 찾습니다.”라고 하자 예수는 “내가 바로 그다”(evgw, eivmi) 라고 말한다. 여기서 “내가 바로 그다(혹은 나는 ...이다)” 라는 문구는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신적 본질을 나타낼 때 흔히 쓰이는 것이다(4:26; 8:28; 13:19; 15:5). 이러한 신적 왕으로서의 위엄 있는 태도에 예수를 체포하러 왔던 군사들이 오히려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진다. 이 장면은 하나님의 현현 앞에서 혹은 예수의 이름 앞에서 모든 사람은 엎드리어 왕 하나님께 존경을 표해야 한다는 구약에서부터 내려오는 성서 구절들을 생각나게 한다(시 56:9; 단 10:9; 빌 2:8-11; 계 1:17). 구약에서 이 문구가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를 계시할 때 쓴 표현임을(LXX 출 3:14; 사 45:5-7; 48:12) 볼 때 여기서 이들이 예수의 이 말씀에 왜 엎드러지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한마디로 말해, 여기서 모든 상황을 장악하고 있는 이는 군사들이나 유다가 아니라 예수다. 군사들은 예수의 통제를 당하는 주변인물에 불과하고 유다도 그냥 옆에 서 있을 뿐(18:5) 공관복음에 나와 있는 것처럼 예수의 발에 입맞춤을 하지도 않는다(막 14:44-45).
이러한 상황에서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자르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때에도 예수는 자신의 길을 가야 한다면서 오히려 베드로를 꾸짖는다. “칼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18:11) 이 말은 예수의 고난은 스스로 주권적으로 선택한 것이지 수동적으로 힘이 없어 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가 체포된 것조차도 그가 허용하지 않았다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수의 태도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요한복음 내에서 이제까지 예수가 준수해온 입장과 일치하는 것이다. 예수는 스스로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어 주는 것이며, 다른 어떤 사람도 그것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10:18).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유다가 예수께 입맞춤을 하자마자 예수가 체포되지만 요한복음의 본 장면에서는 예수가 체포되었다는 보도가 없다. 이 모든 사건이 종결된 후에야 예수가 체포된 것으로 기록한다(18:12). 이것 또한 예수가 힘없이 체포당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체포당하여 자신의 길을 간 것으로 묘사하는 요한의 수난신학과 무관하지 않다.
2.2. 예수의 심문(18:12-27)
예수가 대제사장에게 끌려가 심문을 받는 장면에서도 예수의 왕으로서의 위엄을 찾아 볼 수 있다. 예수를 심문하는 대제사장은 예수의 교훈에 대하여 질문할 뿐 예수의 죄목을 대지도 못한다. 대제사장의 질문에 대해 예수는 직접적으로 대답하지도 않는다. 대신 대제사장이 자신의 교훈에 대해서 묻는 것 자체를 예수는 못 마땅해 한다. 예수는 자신이 회당을 비롯한 공개적인 장소에서 가르쳤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반복할 필요가 없으며 필요하면 이 말을 들은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될 것이라고 한다. 이 장면에서 예수는 심문 받는 자가 아니라 심문하는 자처럼 행동한다. 예수의 이러한 답변 태도가 심문을 당하는 자라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이 상황을 다 장악하고 있는 심판관의 태도였기 때문에 이러한 대답을 듣고 있던 대제사장의 하속(下屬)이 예수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겨 예수께 폭력을 가한다(22절). 이에 대해 예수는 본질을 호도하지 말고 자신이 무엇을 잘못하였는지를 대라고 한다. 대제사장은 이러한 예수의 위엄 있는 행동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흥미롭게도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동일한 사건의 장면에서는 사람들이 예수에 대한 거짓 증언을 하고 대제사장은 심판관으로서 예수께 변명할 기회를 주지만 예수는 잠잠히 아무 대꾸도 하지 않는다. 또 예수 자신이 메시아임을 드러내자 대제사장이 흥분하여 예수를 사형에 해당하는 죄로 정죄한다(막 14:53-65와 병행구절 참조). 한마디로 말해 공관복음의 예수 심문 장면에서와는 달리 요한복음에서의 예수 심문 장면에서는 대제사장이나 그의 하속이 아닌 예수가 모든 상황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겉으로는 심문 받는 자였지만 실제는 심판관이었다.
이러한 예수의 심문 장면에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하는 장면이 삽입되어 있다(18:15-18, 25-27). 베드로는 예수의 수난의 길에 동반자가 되지 못한 것이다. 결국 예수는 왕으로서 자신이 가장 사랑한 제자들의 지지도 받지 못하고 홀로 왕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 수난 사화에서는 왕으로서의 예수가 부각되고 있고 다른 인물들은 조연으로서 자리매김 한다.
2.3. 그리스도의 왕국(18:28-19:16a)
이어서 예수는 당시 로마 총독 빌라도 앞에서 자신이 왕임을 선포한다(18:28-38a). 빌라도의 예수 심문 장문을 기록한 이 부분이 요한복음 수난사화의 중심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23)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죄인이라고 데려온 예수를 심문하면서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이 질문에 대해 예수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빌라도에게 되묻는다.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 예수의 본질에 대한 관심보다도 예수가 정치적인 반역자인가 아닌가에 관심이 있었던 빌라도도 예수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또 엉뚱한 질문을 한다.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예수 또한 이 말에 직접적으로 답변하지 않고 그리스도 왕국에 대한 말로 대답을 대신한다. “내 나라”(basilei,a h` evmh.)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다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이 말을 통해 예수는 우회적으로 자신이 왕임을 선포하고 있다. 여기서 내 나라라는 말은 “내 왕국”(my Kingdom)이란 뜻이기 때문에 이 문구에는 자신이 바로 왕이라는 암시가 들어있는 것이다. 이에 빌라도는 말한다. 그렇다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한다.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예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의 왕이라고 스스로 선포한다.
공관복음의 이 장면에서 빌라도는 예수께 그가 유대인의 왕인지 아닌지를 심문하고(막 15:2-5; 마 27:11-14; 눅 23:2-5) 예수는 단순히 “네가 그렇게 말했다”고 대답하는 것으로 끝난다. 공관복음서에서 이 장면이 짧게 취급되었다면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자신의 왕권에 대해 보다 자세하게, 적극적으로 말한다. 공관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산헤드린 앞에서 예수에 대한 여러 고소하는 장면이 요한복음에는 빠져있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요한복음이 이 장면을 알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예수의 왕권이라는 주제에 집중하기 위해서 부차적이라고 생각된 이 주제를 포함시키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와 빌라도의 대화에서 예수는 자신이 진리에 대해서 증거 하러 왔다고 말하고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는 것으로 대화가 끝난다(38a절). 빌라도가 얼마나 진지하게 이 말을 했고 빌라도가 진리에 대해서 진정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왕(예수)과 대화를 나눈 후 빌라도는-아마도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 왕의 종처럼 행동한 것이다.
예수와 왕권에 대해서 대화를 하고 난 후 빌라도는 이상하게도 계속해서 예수를 왕이라고 부른다(18:38b-19:16a). 빌라도는 유월절에 죄인을 방면하는 전례에 따라 예수를 놓아주려고 사람들에게 물을 때 예수를 죄인이라고 하지 않고 “유대인의 왕”이라고 호칭 한다(18:40). 또 빌라도의 군사들도 비록 자신들은 장난기로 한 행동이었지만 예수께 왕의 옷(자색: 왕이 입는 옷 색깔)과 왕의 관(가시로 만든 왕관)을 씌우고 결국 예수를 왕으로 호칭한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찌어다.”(19:3). 또 하나 빌라도는 정오에 재판석에 앉아서 유대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보라 너희 왕이로다.”(19:14). 마지막으로, 유대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자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고 반문 한다(19:15).
요한복음의 수난사화가 예수를 왕으로서 묘사하고 있지만 예수가 왕이라는 것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곳이 바로 이 장면이다. 그래서 헹엘(M. Hengel)은 이 구절을 “요한복음 수난사화의 핵”이라고 말한다.24) 피츠너(Victor C. Pfizner)의 분석에 의하면 요한복음 수난사화는 예수가 1) 세상 죄를 위해서 희생하는 어린양, 2) 자신의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 3) 아버지의 뜻을 완성하는 아들, 4) 세상과 어둠의 권세에 대한 심판자, 5) 영광 가운데 등극하는 메시아적 왕으로 그려지고 있다.25) 이러한 모티브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것이 예수를 메시아적 왕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 수난사화에서 예수는 복음서 중에서 가장 명확하게 자신이 왕임을 선포하고 있고 빌라도는 이것을 인정하고 있다. 요한복음 저자는 예수를 단순히 고난을 당하는 이로 묘사하기 보다는 고난 자체도 선택하고 스스로 자신의 길을 가는 영광의 왕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2.4. 왕의 등극식(19:16b-37)
빌라도는 계속해서 자신도 정확히 그 의미를 모르는 말과 행동을 하여 예수가 왕임을 온 세상에 선포한다. 빌라도는 예수의 십자가 위에 있는 패에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라고 썼다(19절). 그것도 아람어, 라틴어, 헬라어, 삼개 국제 언어로 기록하여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유대인들과 대 제사장들이 이 죄 패의 내용에 이의를 제기하여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라고 하였지만 빌라도는 의외의 말을 한다. “내가 쓸 것을 썼다.”(22절) 이 말은 빌라도가 로마의 유대지역 총독으로서가 아니라 마치 예수의 신하로서의 행동처럼 보인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빌라도는 이 세상의 왕으로서 예수를 심문했지만 예수가 왕인 나라의 종으로서 예수를 왕으로 인정한 것이다. 그는 결국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가 왕으로 등극하는 것을 돕게 된다.
예수의 십자가 달리는 장면은 십자가에 써 있는 죄패의 내용(요 19:19; 막 15:26)과 예수가 남긴 옷에 대한 군사들이 나누는 것(요 19:23-24; 막 15:24)과 여인들이 십자가까지 따라간 것(요 19:25; 막 15:36) 등에서 공관복음과 여러 가지 내용을 공유한다. 하지만 요한복음에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에서 당한 조롱도 나와 있지 않고 예루살렘의 여자들에 대한 예수의 염려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요한복음에는 모든 초점이 예수의 왕됨에 맞추어져 있다. 예수의 죄패에 빌라도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씀으로써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예수가 공식적으로 왕으로 등극하는 장면이 된다.
나아가 예수는 그리스도 왕국의 왕으로서 죽음까지도 자신이 주장한다(19:25-30). 요한복음에 묘사된 예수의 죽음은 흔히 생각하듯이 비참한, 슬픈 최후가 아니었다. 예수는 자기에게 닥칠 일을 다 알고 있는 상태에서(28절), 이스라엘 사람들이 노년에 자연사 할 때 자녀들에게 유언을 하듯이(예를 들어 야곱이 아들들에게 유언을 하듯이) 어머니와 그 사랑하는 제자에게 유언을 한 다음 자신의 죽음이 유대인들과 로마 병정들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가운데 된 것임을 아시고 “다 이루었다”(tete,lestai)라고 말한 후 영혼을 하나님께 맡겼다(pare,dwken to. pneu/ma; 30절). 여기서 예수는 자신의 사역과 수난을 수동적으로 당한 것으로 묘사하지 않고 자신이 이룬 것으로 말하고 있으며, 자신의 죽음도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드린 것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는 죽은 것이 아니라 죽음의 주관자로서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하나님께 맡긴 것이다.26) 이것은 목자 강화에서 예수가 이미 천명한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대속적 행위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을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요 10:17-18)
2.5. 왕의 장례(19:38-42)
예수의 장례도 일반인의 장례가 아닌 왕의 장례로 묘사되고 있다(38-42절). 예수의 장례를 위해 니고데모가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 쯤(약 34 킬로그람) 가져왔는데 그 양이 보통 사람의 장례에는 쓰는 양을 넘어선, 엄청나게 많은 것이었다. 이것은 곧 예수의 장례가 왕의 장례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아사 왕이 죽었을 때도 “다윗 성에 자기를 위하여 파 두었던 묘실에 무리를 장사하되 그 시체를 법대로 만든 각양 향 재료를 가득히 채운 상에 두고 또 위하여 많이 분향하였다”고 했다(대하 16:14). 요셉푸스에 의하면 헤롯 대왕이 죽었을 때도 500명의 노예가 향을 들고 군대를 따라 왕의 장례식에 참여했다고 한다(유대고대사 17. 199).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장례는 이러한 왕의 장례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요한복음 수난사화에 그려진 예수는 죄인으로서가 아니라 왕으로서 고난과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우리는 예수의 고난을 생각할 때 예수를 불쌍하게 생각하고 슬퍼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요한복음에 제시된 예수는 고난과 죽음까지도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자신이 다 주장하고 계시는 분이다. 그는 그리스도 왕국의 왕이다. 제사장들의 무리와 빌라도가 정치적인 담합을 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이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를 그리스도 왕국의 왕으로 등극시키는데 일조를 하게 되었다. 예수는 바로 그리스도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요한복음 18:37에 “네가 왕이 아니냐?”는 빌라도의 질문에 예수를 단도직입적으로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고 말한다.
3. 해석과 적용
지금까지 고찰한 대로 요한복음 수난사화에서 그리스도의 왕 모티브는 “수난사화 전체의 하나로 엮는 실”과 같은 것이다.27) 그렇다면 이러한 특징적인 수난사화 모티브는 어디에서 발원한 것인가? 이러한 모티브를 외부의 자료에서 빌려 왔다기보다는 요한신학 자체의 근원적 특징과 연관이 있는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요한복음에 묘사하는 예수는 신약의 어느 문서가 그리는 예수 상보다도 더 고(高) 기독론적이다. 바울도 그리스도의 선재를 말하기는 하지만(엡 1:3) 요한같이 예수를 직접적으로 하나님으로 칭하거나(요 1:1, 18) 예수와 하나님을 동등선상에 놓치는 않는다(요 10:30). 하지만 요한복음이 그리는 예수는 근본적으로 신성을 가진 메시아다. 요한복음 5-12장을 보면 예수와 유대인의 갈등이 극대화 되어 있는데 그것은 대부분 예수의 신성에 대한 논쟁에서 발원한 것이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신성은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예수의 독특한 아들 됨과 관계있다(cf. 1:18; 3:16).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스도이며, 이스라엘의 왕이고, 세상의 구주이기도 하다. 요한복음 수난사화에서 예수를 왕으로 그리고 있는 것은 이러한 요한복음의 기독론과 무관하지 않다.
3.1. 왕적 메시아(신적 메시아)
수난사화 이외에 요한복음에서 예수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직접 묘사하는 구절은 1장 49절과 12장 13절이다. 먼저, 예수가 이스라엘 왕으로 묘사된 것은 나다나엘의 고백에 의해서이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1:49) 그런데 이러한 고백 이전에 나다나엘을 예수께 소개한 빌립의 예수에 대한 이해가 있었다. 예수는 “메시아”이고(1:41),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지가 기록한 그이”(1:45)이다. 곧 나다나엘의 입으로 말한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말은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과 관계가 있다.
하지만 요한복음에서 “이스라엘의 임금”이라는 타이틀은 예수가 단순히 구약 전통의 메시아라는 것에서 머물지 않는다. 예수를 “이스라엘 임금”이라고 고백한 나다나엘에게 예수는 이제 사람들이 더 큰 일들을 보게 될 것이고 그것은 야곱의 사다리가 천상과 지상을 연결하듯이 인자이신 그리스도가 아들로서 아버지와의 친밀한 교제를 통해서 사람과 하나님을 연결하는 유일한 매개자가 된다고 말한다(1:51). 실제로 이후에 나오는 예수는 하늘에서 내려온 자로서 아버지와 교제하면서 하늘 일을 이 땅에 전해주는 메시아로 소개된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타이틀 앞에 “하나님이 아들”이 나오는 것은 요한복음에서 메시아는 하나님과의 독특한 관계에서 누리는 예수의 아들됨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요한복음에는 예수에 대한 타이틀이 두 개가 연이어 나오면서 양자가 상호를 설명하는 형태가 되는 경우가 많은데(11:27; 20:30, 31) 여기에서도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과 맞물려 있다.
요한복음에서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기독론적 타이틀이 또 한번 사용된 것은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하면서 사람들이 외친 말 속에서 찾을 수 있다(12:14). 여기서 요한은 스가랴 9장 9절을 자기 나름대로 인용하여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를 해석하고 있다. “시온 딸아 두려워 말라. 보라 너희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12:15) 시온 딸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고 나귀를 타고 오는 왕은 메시아를 의미한다. 즉 요한은 이것을 예수가 왕적 메시아라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제자들이 예수가 영광을 받으신 후 즉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이후에 깨닫게 된다(12:16). 여기서도 왕적 메시아는 단순히 정치적 메시아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행함으로 영광을 얻는 아들로서의 신성을 가지고 있는 메시아를 말하고 있다.
요한복음 수난사화에서 예수는 자신의 왕국이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왕국이라고 말한다(18:36). 그러면 예수는 구체적으로 어떤 종류의 왕국을 소유하고 있으며 어떤 의미에서 그는 왕인가? 유세비우스는 도미니시우스 황제가 예수의 형제 야고보의 손자들을 예수의 왕권에 관하여 심문하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갈릴리로부터 로마로 송환되어 황제의 심문을 받는다. 황제는 이들에게 이들의 할아버지인 예수 왕국의 성격에 대해서 묻는다. 이들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이것은 세상이나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것이며 천사들에 속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세상 끝 날에 이루어질 것인데 그 때 바로 그가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을 심판하기 위해서 영광 중에 오실 것입니다....”(Eusebius HE 3. 20. 2f.). 도미니시우스는 이들이 로마를 전복시킬 사상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 이들을 방면한다. 즉 요한복음 수난사화와 유세비우스 기록 모두에서 예수의 왕국은 비정치적임을 표방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헹엘은 “요한복음은 모든 종류의 정치 신학의 종말을 의미한다”고 말한다.28) 요한복음 수난사화에서 예수가 왕이라는 것은 앞의 구절에서 묘사된 것처럼(1:49; 12:13) 예수가 하나님과 독특한 관계를 누리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적 메시아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3.2. 수난은 영광
위와 같이 요한복음에서 왕과 메시아는 신성을 가진 아들이라는 개념 위에 서 있다. 아들은 아버지와 독특한 관계를 통해서 아들로서의 독특한 위치에 있다. 아들은 사람들을 만나기 전 사람의 마음을 다 알고 있고(2:24-25), 자신 앞에 어떤 일이 닥칠 것을 알고 있으며(13:1; 17:1; 18:4),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그의 과업이다(4:34; 19:30). 또한 그는 왕으로서 위엄을 가지고 자신의 과업을 완성한다. 그의 사역은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것이고, 그는 그 길을 걸어가고 아무도 그 길을 막지 못한다. 예수의 수난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대속적 죽음으로 정해 놓은 길이지 예수가 누구에게 당한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수난과 죽음은 역설적이게도 영광이라는 개념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7:39; 12:16, 23). 예수의 죽음까지도 “위로 들어 올려지는 것”(12:32; cf. 18:32)으로 승천과 아울러 예수가 영광 받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의 십자가와 죽음이 수치보다는 영광이라는 모티브와 연관되어 있고 예수가 왕적 메시아로서 수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애매한 고난을 일방적으로 당한다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수난은 없다고 할 수 있다.29)
위에서 요한복음 수난사회를 읽으면서 우리는 요한복음 수난사화는 예수의 수난을 그리스도 왕국에서 예수가 왕으로 등극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예수의 수난을 예수가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난당하는 것에 초점을 맞춤으로서 예수를 믿고 신자가 되어 고난당하는 자들에게 예수의 길을 걸어간다는 위안이 되는 신학이 필요할 때가 있다(히 2:10-18; 4:14-16 참조). 하지만 예수의 십자가가 수치와 실패로 여겨지는 상황에서는 예수의 수난이 고통 그 이상으로 해석될 필요가 있다. 요한복음 수난사화는 바로 이러한 설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의 수난은 결국 예수가 영광 받은 자, 승리자, 왕으로 등극하는 장면이 된다.
3.3. 주제에 대한 성찰
유명한 영화감독 멜 깁슨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The Passion of the Christ"가 이것이 제작된 미국에서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대중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기독교 계통의 매체에서는 이 영화에 대한 찬사와 아울러 이에 관한 여러 책들을 영화 상영과 동시에 출판했다. 이 영화를 계기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의미와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이 영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실제를 그 이전의 어떤 영화보다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일반 대중과 대중 매체에서 간과하고 있는 중요한 한 가지는, 이 영화가 예수 고난의 장면을 아무리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도 예수의 수난에 대한 하나의 해석이라는 것이다. 멜 깁슨은 자기 나름대로의 철학으로 예수의 수난을 해석해서 이것을 영화라는 장르로 표현한 것이다.
예수의 수난이라는 말을 할 때 교회 생활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아마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셨을 때 얼마나 아프셨을까?” “예수께서 그 아픔과 수모를 참느라 얼마나 힘드셨을까?” 이러한 신도들의 생각에 보조를 맞추어 목회자들은 고난주간에 주로 예수의 육체적 고난과 정신적 고통을 주제로 설교하게 된다. 이 때 부르는 찬송가 가사에도 이런 내용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고난 주간에 가장 애송되는 찬송가 135장도 슬픈 곡조에다 예수의 육체적 고난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1절: 갈보리산 위에 십자가 섰으니 주가 고난을 당한 표라. 험한 십자가를 내가 사랑함은 주가 보혈을 흘림이라. 2절: 멸시함을 받은 주의 십자가에 나의 마음이 끌리도다. 귀한 어린 양이 영광 다 버리고 험한 십자가 지셨도다. (후렴)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주의 십자가 붙들겠네.”
예수의 고난을 생각할 때 이렇게 예수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어야 할까? 만약에 그렇다면 예수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과 대한 독립의 영웅인 우리의 영원한 ‘누나 유관순’의 고난과 죽음을 슬퍼하고 애도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복음서는 예수의 수난을 고난과 슬픔과 고뇌로만 그리고 있는가? 우리는 고난이라는 코드만을 가지고 예수의 수난을 해석하는 것이 아닌가? 복음서 저자들은 각각 예수의 수난을 어떤 주제와 연관지어 그리고 있는가?
위와 같은 질문을 가지고 요한복음의 수난사화를 읽어보면 요한복음 수난사화의 주 모티브 중 하나는 예수가 메시아적 왕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것은 예수를 왕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 요한복음 수난사화의 주 모티브 중 하나임을 보여주고, 이러한 예수의 왕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밝혀내 본 것이다. 이러한 과업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단순히 그리스도가 유대인들과 로마 당국자들에게 억울하게 고난을 당한 것이고 제자도는 이런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라는 이해에만 머물러 있는 사람들에게 수난사화에 대한 보다 넓은 이해를 제공해 준다.
멜 깁슨의 “The Passion of the Christ"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수난사화 내용을 포함하고 있기는 하지만 요한복음의 관점에 의한 예수의 수난을 그리고 있지는 않다. 아마도 그가 그리고 있는 것은 공관복음의 수난 신학을 섞어서 예수의 육체적 수난의 실제를 강조한 것 같다. 복음서에서 예수 사역의 의미의 핵심을 형성하는 예수의 수난보다도 다른 것에 초점을 맞추어 예수의 복음을 이해하려는 사람들에게 멜 깁슨의 영화는 복음서에서 예수 수난의 위치를 정위치 시키도록 사람들에게 수난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했다는데 크게 공헌했다. 하지만 이것이 각 복음서가 예수 수난에 대해서 묘사하는 전부라고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요한복음에 의한 수난사화는 멜 깁슨의 영화가 바라보지 못한, 다른 관점에서 수난을 해석하고 있고 그것은 또한 수난의 의미를 더 넓게 이해하도록 우리를 인도해 준다.
제 12장 예수의 부활(20장)
1. 내용 구성
요한복음은 다른 어떤 복음서보다도 예수의 부활 기사를 길게 취급하고 있다. 요한복음은 부활 기사(20:1-29) 후에 곧이어 복음서 전체의 결론(20:30-31)을 짧게 언급함으로 끝난다. 21장에도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에게 나타난 이야기가 있지만 21장은 복음서가 완성된 후에 저자 자신 혹은 공동체 내의 다른 사람에 의해 기록된 부록 혹은 에필로그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은 별도의 취급을 요한다. 본 장에서는 20장에 나와 있는 부활 기사만 취급하여 요한복음에 나타난 부활 기사를 다룰 것이다.
요한복음 부활기사는 크게 빈 무덤 발견 기사(1-18절)와 예수가 제자들에게 부활의 몸을 보여준 기사(19-29절)로 대별된다. 또 전자는 베드로와 애제자(예수의 그 사랑 받는 제자. 이하 애제자)의 빈 무덤 발견 기사(1-10절)와 부활의 첫 증인인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를 만나는 기사(11-18절)로 구분된다. 후자는 제자들에게 나타난 예수(19-23절)와 도마에게 나타난 예수(24-29절)로 나누어 볼 수 있다.
2. 부활기사(1-29절)
2.1 애제자와 베드로(1-10절)
요한복음의 부활기사는 막달라 마리아가 빈 무덤을 발견한 사건으로 시작된다. 마리아는 예수의 무덤에 있던 돌이 치워져 있는 것을 보고 이 사실을 곧바로 베드로와 애제자에게 통보한다. 이 말을 듣고 베드로와 애제자는 무덤으로 달려가는데 애제자가 베드로에 앞서 빈 무덤에 먼저 도착한다. 하지만 애제자는 빈 무덤에 먼저 들어가지 않고 베드로가 도착할 때 까지 기다려 첫 번째 목격자로서의 지위를 베드로에게 양보한다. 그래서 두 제자는 빈 무덤을 확인한다. 빈 무덤을 발견하고 확인한 것은 예수 부활의 증인으로서의 역할이기 때문에 누가 먼저 이것을 확인 했는지, 또 이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매우 중요한 사안이다. 여기에서 애제자는 믿음을 보였다고 기록되었고 베드로의 반응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8절). 하지만 두 제자는 모두 빈 무덤이 부활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갔다(9-10절).
여자(들)에 의해서 빈 무덤이 먼저 발견되고 이것이 사도들에게 통보되었다는 내용은 사복음서에서 모두 발견된다(막 16:1-8; 마 28:1-10; 눅 24:1-11). 각 복음서 마다 빈 무덤을 발견한 여인의 이름이 다르게 열거되지만 모든 복음서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막달라 마리아가 초기 교회 전승에서 빈 무덤의 제일 중요한 목격자로서 모두에게 인식되고 있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요한복음은 다른 여인들에 대한 언급은 없고 막달라 마리아만을 빈 무덤의 증인으로 기록하고 있다.
요한복음 기사에서 독특한 모티브 중 하나는 애제자와 베드로의 경쟁 모티브이다. 요한복음에서 베드로와 애제자는 같이 등장하여 서로 협조하기도 하고 경쟁하기도 한다(13:23-26; 18:15-16; 21:7, 20-23). 이 본문에서도 한편으로는 베드로와 애제자는 예수 부활의 공동 증인으로서 서로 협조자로 등장한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이들은 무덤에 먼저 도달하기 위해서 경쟁을 하고 또 빈 무덤을 목격한 것에 대한 반응도 서로 대조되게 묘사된다. 여기서 애제자가 빈 무덤에 먼저 도착한 것이 애제자가 베드로보다 연소하기 때문에 물리적인 체력이 더 앞선 것일 뿐, 여기에 신학적인 의미를 너무 많이 부과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하지만 이 사건 이후 애제자를 소개하면서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8절)로 표현한 것으로 보아 애제자가 베드로보다 무덤에 먼저 도착한 것에는 애제자의 젊음을 의미하기 보다는 보다 깊은 신학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공관복음, 특히 누가복음에 나타나 있는 예수의 빈 무덤 기사를 요한복음 기사와 비교해 보면 요한복음 기사가 베드로와 애제자의 경쟁에 그 초점이 맞추어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여인들이 첫 빈 무덤의 목격자이고 이 보도를 들은 사람들은 사도들이었는데 반해 요한복음에 의하면 여인 중 마리아가 첫 빈 무덤의 발견자이고 그 보도에 따라 빈 무덤에 대해 통보받은 것은 베드로와 애제자뿐이었다. 또 누가복음에서 빈 무덤을 확인한 것은 베드로인데 반해 요한복음에서는 베드로와 애제자이다.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푸려 들여다보니 세마포만 있는지라. 그 된 일을 기이히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는 누가복음 24:12의 내용과 요한복음 기사가 베드로와 애제자가 같이 등장하여 경쟁하는 내용을 제외한다면 단어와 내용까지 유사하다는 것은 요한복음의 기사의 모티브가 어디에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경쟁 모티브를 통해서 저자는 무엇을 말하려고 했던 것일까? 그 대답은 두 제자의 경쟁이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에 달려있다. 만약 이것이 서로에게 위해를 가하는 경쟁이었는지 아니면 우정에 근거한 순수한 경쟁이었는지에 따라서 그 대답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경쟁의 종류는 8절에 애제자가 “보고 믿었다”고 한 구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달려있다. 만약 애제자의 믿음이 예수 부활에 대한 믿음이었다면 애제자의 믿음은 베드로의 침묵과 극명하게 대조된다. 하지만 애제자의 믿음이 단순히 빈 무덤에 대한 것이었다면 베드로도 빈 무덤에 대한 목격자이기 때문에 빈 무덤을 목격한 후의 양자의 반응은 큰 차이가 없게 된다. 요한복음에서 믿다 라는 동사가 단순한 사실을 믿는다는 것보다는 주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과 연관되어 주로 쓰였기 때문에 여기서 애제자의 믿음은 예수 부활에 대한 믿음이라고 단언하기 쉽다. 하지만 이렇게 해석하면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이에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9-10절)는 구절에 있는 내용과 상충되게 된다. 이 구절에 보면 베드로뿐만 아니라 애제자도-아직 보혜사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부활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래서 8절에 기록된 애제자의 믿음은 마리아의 빈 무덤 보도가 사실이라는 것에 대한 믿음으로 보아야 한다.
이렇게 보면 베드로와 애제자의 경쟁은 승자를 가려 한 사람은 죽어야 하는 종류의 경쟁이 아니다. 이 경쟁은 우정에 바탕을 둔 경쟁이다. 요한복음 부활 기사에서 베드로와 애제자가 빈 무덤에 대한 동일 목격자로 나오는 것은 두 사람 사이에 우정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아무 경쟁 없는 우정은 아니다. 마리아가 빈 무덤을 보고난 후 이 사실을 고지하는 내용에서 애제자 보다도 베드로가 먼저 언급된 것과 빈 무덤의 최초 목격자를 베드로로 설정하는 것으로 보아 요한복음 저자는 분명히 베드로에게 수 제자로서의 위치를 부여한 것 같다. 하지만 빈 무덤에 먼저 도달한 사람은 애제자라는 것을 굳이 밝힌 것과 애제자가 빈 무덤 보도를 확인했다는 것을 “보고 믿었다”라는 문구를 사용한 것을 볼 때 저자는 애제자가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깨달음에서는 베드로보다도 한 걸음 앞서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이 기사를 통해서 저자는 마리아와 제자들이 빈 무덤을 목격했지만 아무도 이것을 통해 예수 부활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공관복음서 기사들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한복음 저자는 여기에 베드로와 애제자의 경쟁 모티브를 도입한다. 요한복음 전체에서 이들이 같이 등장하는 기사를 분석해 보면 베드로와 애제자는 단순한 개인을 넘어 각각 사도적 공동체와 요한 공동체를 대표 내지는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요한복음이 기록될 당시 요한 공동체는 한편으로는 정통 기독교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해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독특성을 보여주어야 했다. 요한복음 저자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인물인 애제자가 사도적 기독교를 대표하는 베드로를 나란히 등장시켜 이 두 제자가 서로 예수의 중요한 구원사적 사역의 현장에 같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한편으로는 자신의 정체성을 사도적 기독교와 나란히 하려고 했다. 다른 한편으로 저자는 요한 공동체는 사도적 공동체와 어깨를 나란히 하지만 예수의 말씀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한 걸음 앞서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우리는 이 기사를 통해서 요한 공동체가 자신의 정체감에 대한 위기를 어떻게 슬기롭게 극복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보통 ‘섹트적인'(sectarian) 단체는 기존 단체나 권위에 도전할 뿐만 아니라 이들을 모두 부정하는 것으로 흐르기 쉽다. 하지만 요한 공동체는 예수와의 친밀한 교제가 신앙의 요목 중 무엇보다도 우선된다는 자신들의 주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기존의 기독교 공동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기존의 단체에 대해서 예수의 원래 말씀으로 돌아가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예수의 말씀을 보혜사를 통해서 올바로 깨달아야 할 것을 촉구한다. 이런 면에서 요한복음의 빈 무덤 기사를 통해서 우리는 올바른 교회 개혁의 모델을 본다. 사이비적인 단체가 기존의 모든 단체와 교리를 부정하는 것으로 출발한다면 요한 공동체는 한편으로는 기존의 단체를 인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개혁을 외치고 있는 것이다.
2.2 막달라 마리아, 예수 부활의 첫 증인(11-18절)
베드로와 애제자가 집으로 돌아간 것과는 대조적으로 마리아는 예수의 무덤을 지키고 서 있었다. 마리아가 예수가 부활했다는 사실을 믿어서 그랬다기보다는 그녀는 예수의 시체가 없어졌다는 것에 대한 슬픔에서 무덤 곁에 서서 슬피 울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덤 속을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무덤 속에 아무도 없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예수의 시체가 있던 곳에 두 천사가 있었다. 이 상황에서 공관복음서에는 젊은이(막 16:5) 혹은 천사(마 28:2-6) 혹은 빛나는 옷을 입은 두 사람(눅 24:4)이 빈 무덤의 의미에 대해서 마리아에게 설명해 준다. 대신에 요한복음에는 마리아가 예수를 직접 대면하는 장면이 곧 이어진다. 마리아는 부활한 예수를 만나지만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이 상황에서 목자와 양의 비유에서 목자가 양의 이름을 부르고 양은 목자를 알아보는 장면이 이곳에서 그대로 벌어진다(요 10:1-18). 예수가 “마리아야”하고 그녀를 부르자 그녀는 그 음성을 듣고 곧바로 그가 예수인 것을 알아보고 “선생님”이라고 예수를 부른 것이다. 이제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를 목격한 최초의 사람이 된 것이다.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를 보고 너무도 기쁜 나머지 그에게 가까이 가려하자 예수는 자기가 사람들에게 자신의 부활한 모습을 보여주고 교제하기에 앞서 하나님 앞에 먼저 가야함을 말한다. 그리고 예수는 마리아에게 하나님이 이제는 자신의 아버지 일뿐만 아니라 제자들의 아버지가 됨을 선언한다. 그리고 제자들을 형제들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제자들이 하나님의 자녀(요 1:12; 11:52)라는 개념을 전제한 것이다. 이 말을 듣고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라는 예수 부활에 대한 표준적인 고백을 한다.
여기서 예수 부활의 첫 증인으로 나오는 막달라 마리아는 모범적인 제자로서 묘사된다. 마리아는 빈 무덤의 첫 발견자로서 베드로와 애제자에게 이 사실을 통보하는 역할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집으로 돌아가 빈 무덤 밖에 홀로 남아 있는 상태에서 부활한 예수를 처음으로 목격하면서 예수 부활의 첫 증인이 된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십자가를 따라간 네 여인 중 하나였으며(19:25), 빈 무덤을 처음으로 본 사람이고(20:1-2), 부활한 예수를 처음으로 대면했으며(20:16), 예수 부활을 처음으로 증거했다(20;18). 요한복음에서 남자 제자 가운데는 애제자가 예수의 십자가와 빈 무덤과 부활의 유일한 증인으로서 나온다면 막달라 마리아는 이 모든 사건을 목격한 유일한 여 제자였다.30)
더 나아가 요한복음에서 마리아는 사도적인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사도의 요건은 부활하신 예수를 목도하고 부활의 증인으로서의 소명을 받는 것이다(고전 9:1-2; 15:8-11; 갈 1:11-16). 마리아는 이 요건에 꼭 들어맞는 인물이었다. 다른 전승에서 베드로에게 부여된 부활의 첫 증인으로서의 영광이(고전 15:5; 눅 24:34), 요한복음에서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있는 것으로 증거된다. 뿐만 아니라 “내가 주를 보았다”는 사도적인 부활에 대한 증거가 요한복음에서는 마리아의 입으로 말해진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2.3. 요한복음의 성령 강림 사건(19-23절)
막달라 마리아에게 처음으로 부활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예수는 이제 제자들에게 부활한 자신의 모습을 나타낸다. “평안이 있으라”(출 4:18; 삿 6:23; 19:20; 삼상 25:6)는 히브리 식의 상대방의 평안을 비는 인사를 한 후 예수는 자신이 십자가에 달렸던 바로 그 예수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못 자국난 손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제자들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는 말과 함께 제자들에게 사명을 준다. 곧 이어서 예수는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한 후 죄 사함의 권세를 제자들에게 부여한다.
여기에는 예수가 부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 선교의 사명을 주고 난 후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la,bete pneu/ma a[gion)고 말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22절). 이것이 요한복음의 성령 강림 사건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오순절 사건에 대한 단순한 상징적 행동인지에 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있어왔다. 먼저, 요한복음 20:22이 오순절 강림에 대한 상징적 약속이라는 주장은 ‘데오도’(Theodore of Mopsuestia; c. 350-428)가 주창한 것으로 최근에는 카슨(D. A. Carson)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주장의 요체는 예수가 말한 ‘엠퓨사오’(evmfusa,w)라는 동사가 구약으로부터 내려온 전승인 새 창조로서의 “숨을 내쉰다”는 뜻이 아니라 단순히 “숨을 쉰다”는 뜻으로 쓰인 것으로 성령이 예수를 통해 나온다는 것을 의미하며 “성령을 받으라”는 것은 요한복음에 나타난 다른 많은 명령과 마찬가지로 미래에 대한 언급이라는 것이다.31) 먼저 이 주장의 난점은 카슨의 주장과는 달리 ‘엠퓨사오’(evmfusa,w)라는 단어는 단순히 숨을 내쉰다는 뜻으로 쓰일 수 없다는데 있다. 그 접두어 ‘엔’(evn)이 예시하는 대로 이것은 숨을 내쉬는 것이다(blow in). 또한 이 동사는 구약에 잘 쓰이지 않은 단어로 중요한 두 번의 쓰임새 모두(창 2:7; 겔 37:9-10) 성령과 연관된 새 창조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요한복음 20:22을 오순절 성령 강림에 대한 상징적 행동이라는 해석하는 것은 위와 같은 난점으로 인해 대부분의 학자들에 의해 거부당해 왔다. 그런데 일군의 학자들은 요한복음 20:22에 기록된 성령 수여의 사건을 완전한 성령의 강림 사건이 아니라 오순절에 완전히 주어질 성령이 부활절에 부분적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해석한다. 칼빈(J. Calvin)은 오순절에 주어진 것이 완전히 물에 적시는 것(saturated)이라면 요한복음 20:22에 기록된 것은 물이 흩뿌려진 것(sprinkled)이라고 한다.32) 벵엘(A. Bengel)은 요한복음에 주어진 성령은 오순절에 주어질 것이 “담보”(earnest)로서 주어진 것이라고 한다.33) 요한의 성령 수여의 사건을 웨스트코트(B. F. Westcott)는 봉사의 능력을 기대하는 새 생활의 능력으로서 주어진 것으로,34) 브루스(F. F. Bruce)는 이와는 반대로 부활의 성령 주심은 봉사의 능력으로 오순절의 성령 주심은 새 생활의 선물이라고 주장한다.35) 최근에 터너(M. B. Turner)는 요한복음 20:22은 요 17:17-19의 보충과 성취로 사도행전 2장은 보혜사에 대한 약속의 성취로 해석한다.36)
위와 같은 주장의 방법론적 난점은 누가의 오순절 사건 기록을 기초적 사실로 받아들이고 여기에 요한복음 20:22을 끼워 맞추려는 것이다. 즉 요한복음 20:22을 요한의 사상 안에서 이해하려 하지 않고 사도행전 사건과 조화시키려는 것이다. 던(James D. G. Dunn)이 말한 “요한을 요한되게 하라”(Let John be John)는 진술은 요 20:22을 해석하는 데도 유효하다.37) 위의 주장대로 하면 성령 강림 사건이 두 번이 되는데 그것은 요한과 누가 사상 모두에게 있어서 생소한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신약 성서에서 성령 강림 사건을 해석하는 두 가지 신학적 견해가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적할 것이다. 요한에게 있어서는 예수의 죽음, 부활, 승천이 신학적으로 하나의 사건이며 성령의 오심은 부활절에 일어났지만 죽음과 승천과도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누가에게 있어 예수 승천은 부활 후 40일 후에 일어난 사건이고 성령강림은 오순절에 일어난 것이다.
필자는 요한복음 20:22의 성령 부여의 사건을 브라운(Raymond E. Brown)과 또 여러 학자들과 함께 “요한의 성령강림 사건”으로 해석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요한의 성령 부어주심 사건은 요한의 사상과 신학 안에서 우선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안에서 성령이 제자들에게 오는 사건은 주도면밀하게 시간적으로 예언되었고 요한복음 20:22이 그 성취를 보여준 것이다. 첫째, 요한복음에서 성령이 제자들에게 주어지는 때는 예수가 영광을 받고 난 이후이다(요 7:39). 고별 설교에서는 보혜사란 이름으로 성령의 오심이 반복적으로 예언되었다(14:16-17, 25-26; 15:26-27; 16:7-15). 그런데 요한에게 있어서 예수의 영광은 십자가, 부활, 승천을 포함하는 것이다. 둘째, 요한복음에 의하면 20:19의 시점에 이르러 예수의 영광이 성취되었다. 부활을 처음으로 자신을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내면서 예수는 자신의 몸을 만지지 말라고 한다. 그 이유는 예수가 아직 아버지께 승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20:17). 그런데 그 이후의 사건, 즉 도마의 사건에서는 제자들이 예수의 몸을 만지는 것이 허용되는데(20:27) 이는 예수의 승천이 완료되었음을 시사해준다. 예수의 성령 부여 사건은 이 두 사이에 일어난 사건으로 이 때 예수의 “성령을 받으라“고 명령을 한 것은 예수가 이때에 이르러 이미 예수가 영광 받았음을 말해준다. 셋째, 예수가 영광 받은 후 보혜사가 제자들에게 수여될 수 있는 모든 준비가 완료된 상태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현재적으로 명령한다. 이 말은 요한복음 7:37-39의 성취이다.
요한복음 20:22이 “요한의 성령강림 사건”이라는 주장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볼 때 더욱 더 확고해진다. 첫째, 여기서 요한복음 20:22을 요한의 오순절로 해석하는 것은 요한에게 예수의 부활-승천과 성령 강림 사이의 거리를 없애버린 것인데, 이것은 예수가 제자들을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고 보혜사를 보내주겠다는 약속(14:16-18)과 잘 들어맞는다. 둘째, 요한의 성령강림 사건은 예수의 제자들에게 선교의 명령을 하는 문맥에서 주어졌는데(20:21), 이것은 제자들을 통해 보혜사의 증거하는 사역과 일치하는 것이다(16:8-10). 셋째, 요한복음이 본래 20:31에서 끝나도록 기록된 것이라면, 성령의 부어주심과 도마의 신앙 고백 부분이 요한복음 이야기의 클라이맥스가 되는데 이는 예수의 영광 받음 이후에 성령이 주어지도록 계속적으로 예언된 이 앞의 본문의 내용과 부합하는 것이다.
2.4 의심 많은 도마?(24-29절)
요한복음 부활기사의 마지막은 도마가 부활한 예수를 만난 사건이 장식한다. 도마는 십이 제자 중의 하나였는데 예수가 제자들에게 나타났을 때 그 현장에 없었다. 그의 동료 제자들이 “우리가 예수를 보았다”고 증언했지만 도마는 자기가 십자가에 달린 그 예수를 자신의 두 눈으로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고 한다. 일주일이 지난 후 예수는 도마가 있는 상태에서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난다. 그리고 도마에게 십자가에 달렸던 자신의 육체를 보여주며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한다. 이러한 예수의 말씀에 도마는 예수께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는 위대한 신앙 고백을 한다. 이것은 요한복음 전체에서 신앙고백의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이어 예수의 부드러운 권면이 뒤따른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도마하면 우리는 우선적으로 “의심 많은 도마”라는 어구를 떠올린다. 기독교 역사상 많은 사람들에 의해 도마는 예수의 부활을 의심하는 대표자로서 부정적인 인물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이 기사에서 도마가 부정적으로만 묘사된 것은 아니다. 도마가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한 것은 그가 특별히 의심이 많아서 라기 보다는 예수가 제자들에게 나타났을 때 그 현장에 없었기 때문이었다(24절). 사실 요한복음 부활 기사에 의하면 제자 중에 아무도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는 이들에게 십자가에 얻은 상흔을 보여줌으로 자신이 부활한 예수임을 증거한다. 그러므로 도마가 부활을 믿지 않은 것은 특별히 의심이 많아서가 아니다. 예수는 다른 제자들에게 한 것과 똑같이 도마에게 평안의 인사를 하면서 십자가 상에서 얻은 자신의 상처를 보여준다. 도마는 결국 예수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데 이것은 예수의 제자로서 최고의 신앙 고백이다.
다만 도마 기사가 요한복음 부활 기사의 마지막으로 기록된 것은 예수를 보지 못하고 믿는 제 이 세대 그리스도인들을 염두 해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반드시 예수의 부활을 목격하고 믿는 것만 복된 것이 아니라 예수 부활을 목격하지 않고도 믿는 사람이 더 복이 있다는 것은 다분히 제 이 세대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메시지처럼 들린다. 도마는 이러한 이 세대 그리스도인을 예표 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 부활 이후에는 제자들이 보혜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부활한 예수의 모습을 직접 보지 않아도 얼마든지 예수를 주와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3.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30-31절)
예수의 부활 현현 기사 뒤에 복음서 전체의 결론이 뒤따른다. 개별 기사를 기록을 끝내고 저자는 그 기록 목적을 명시한 것이다(30-31절). 먼저, 저자는 자신의 기록을 “책”(cf. 21:25)이라고 표현한다(30절). 마가는 이것을 복음이라고 했는데 반해(막 1:1) 요한은 이것을 책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쓴 책 내용이 예수가 행한 표적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 예수가 직접 표적을 행한 것은 복음서 전반부에 나와 있기 때문에 여기서 갑자기 저자가 표적을 이야기 하는 것은 문맥에서 약간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기까지 복음서 전체를 쭉 읽어온 사람이라면 요한복음의 주요 기사인 표적에 관해서 여기서 결론적으로 저자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본 책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표적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어떤 목적을 가지고 선별적으로 표적을 포함시켰다고 말하고 있다.
그 목적은 바로 예수를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계속]믿게 하려는 것이라고 한다(31절). 그런데 여기서 그 동안 학계에서 크게 논란이 되어 온 것이 바로 그 목적이 선교적인 것이냐 아니면 목회적인 것이냐 하는 것이다. 여기서 선교적이라 함은 본래 믿지 않던 사람을 처음으로 믿게 하는 것이요, 목회적이라 함은 믿는 사람을 계속 잘 믿게 하는 것과 관련된 것임을 말한다. 즉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이 비 기독교인에게 선교하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을 함양하기 위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먼저, “믿다”라는 동사의 시제 해석에 관계된 것이다. 이 동사는 여기서 가정법으로 쓰였는데 최고(最古)의 사본들(P66, B)은 현재형이고 다른 대부분의 사본들은 부정 과거형이다. 헬라어에서 현재형은 진행형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여기서 현재형은 선교적 의미로 쓰인 것이라는 것이다. 반면 부정 과거형에는 그런 의미가 없기 때문에 이것은 목회적 의미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그런데 외적인 사본적 증거만으로는 현재형이 우세하기는 하지만 어떤 것이 옳은지 명확히 결론내리기 어렵다. 그래서 다음으로 요한복음의 내용을 통해 이것을 결정하는 것이다. 예수의 고별 설교는 예수를 믿은 제자들에게 주어진 것으로 이것을 통해서 보면 요한복음은 목회적이고, 다른 부분에서는 신앙/불신앙 중 결단을 강조하기 때문에 선교적이라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는 “믿다”의 목적절에 관한 논란이 있다. 그리스도가 예수라는 것을 믿는 것인가? 아니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 것인가? 여기서 예수에는 관사가 없고 그리스도에는 있기 때문에(헬라어에서는 더 한정적인 것이 주어가 됨) 결국 그리스도가 주어이고 예수가 보어가 되어, 그 목적이 그리스도가 바로 예수라는 것을 믿는 것, 즉 선교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헬라어에서 이것이 그렇게 명확하게 적용되는 지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결국, 저자가 어떤 목적으로 이것을 기록한 것인지 명확하게 결론내리기는 쉽지 않다. 사본적 증거와 복음서의 내용 등으로 볼 대 목회적 목적으로 이것이 기록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그것은 주 목적과 부 목적에 관한 것이지 한 가지 목적만 있다고 보는 것은 올바른 판단이 아니다. 어떤 것이 주 목적이었든지 간에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에는 선교적 목적과 목회적 목적이 다 포함되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예수를 통해서 생명(영생)을 얻는 것이 그 최종 목적임은 불변이다. 요한은 어떤 경우에든 예수를 통하지 않고는 누구든지 참 살이를 할 수 없다고 본다. 저자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결국 불신자는 신앙을 통해, 신자는 그와의 계속적인 교제를 통해 영생을 [계속]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4. 해석과 적용
요한복음 부활 기사를 통해 요한복음 저자가 말하려고 한 것은 무엇인가? 아마도 그것은 부활기사 마지막 절에 있는 예수의 언명 속에 있는 것일 것이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20:29) 요한복음이 일 세대 그리스도인들이 사라지고 이후 세대 그리스도인들이 주축을 이룬 사람들을 위해 쓰여진 것이라면 저자의 의도는 더욱 더 명확해진다. 여기에서 저자의 논리는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첫째, 애제자와 베드로를 포함하여 예수의 모든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했다(1-18절). 이들이 부활을 믿지 못한 것은 이들이 예수가 약속한 성령강림 이전 시대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제자들은 성령의 도움을 받기 전에는 예수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 성령 강림 이전의 제자들은 예수의 말씀을 흔히 오해한다. 성령을 받고 난 후에야 비로서 제자들은 그 의미를 깨닫게 된다(요 2:22; 7:39; 14:25-26; 16:12-15). 둘째, 예수가 제자들에게 나타나 부활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성령을 부여함으로 이제 제자들은 예수 부활의 증인이 됨과 동시에 성령을 통해 그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19-23절).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의 부활과 승천 사이에는 사도행전에 나타난 것처럼 상당한 기간의 단절이 없다.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부활과 승천은 연속적으로 일어나고 따라서 성령도 오순절이 아니라 예수의 부활 후 예수에 의해서 직접 부여된다. 요한복음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을 모두 예수의 영광 받으심이라는 범주로서 크게 하나의 사건으로 취급한다. 셋째, 예수의 부활과 성령 부여 사건 이후에 사는 사람들은 이제 부활한 예수를 직접 보고 믿는 것이 아니다(24-29절). 이 시대 사람들의 예수 부활에 대한 믿음은 부활을 확실히 목도한 증인(들)의 증언과 이것을 이해하고 믿을 수 있게 도와주는 성령의 역사로 인해 가능해 진다. 증인(들)은 “내[우리]가 주를 보았다”(요 20:18, 25)라고 증언하고 성령은 그 증언이 옳다는 것을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증언하는 것이다(요 15:26-27). 성령 강림 이후의 사람들에게는 직접 눈으로 보지 않고도 보혜사의 도움으로 예수의 부활을 믿을 수 있고 그렇게 하라는 것이 촉구된다. 또 그것은 오히려 보고 믿는 것보다도 더 복된 것이다.
제 13장 에필로그(21장)
1. 내용 구성
보수와 진보, 서구와 동양, 남녀를 막론하여 신약성서학을 하는 학자들이 공통으로 인정하는 이론은 어떤 것이 있을까? 모든 학자들이 네슬-알란트 27판을 사용하여 학문을 함에도 불구하고-물론 본문비평에 의해서 그 정확한 본문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신약 성서학자들이 공통으로 동의하는 이론적 토대는 갈수록 희박해져 간다. 역사비평적 주석 방법과 (신)문학비평적 주석방법 같은 주석 방법론적 상이함에서부터 여성신학적 읽기과 민중신학적 읽기과 같은 이데올로기적 성서해석에 이르기까지 학자들의 성서 연구 방법론의 차이는 서로가 무슨 말을 하는지를 이해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수년 전 헹엘(M. Hengel)이 신약학회(SNTS) 회장 취임 연설에서 우리의 공통된 토대는 마가 우선설(Markan Priority) 밖에 없다는 말로 발제를 시작하려 하자 뒷좌석에 앉아있던 어떤 학자가 손들 들어 “나는 아니다”라고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러한 학문적인 방법론이나 입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요한복음 21장의 성격에 대해서는 학자들이 대체적으로 일치된 견해를 갖고 있다. 요한복음 21장은 20장으로 이미 완성된 복음서의 부록 혹은 저자가 아닌 후대 편집자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21장이 20장으로 완성된 복음서의 부록인 증거로서는 20:28의 도마의 고백은 인간으로서 예수께 할 수 있는 최고의 고백이며 이어지는 축복선언은 복음서의 종결을 예고하고 있고, 이어서 30-31절에 분명한 종결이 있다는 것이다. 21장이 복음서 저자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쓰여진 후대의 편집이라는 주장은 21장에 이르러 이전과는 다르게 베드로와 애제자의 관계가 갈등의 관계에서 어느 정도 동반자의 관계로 변화되었고, 21장은 복음서 저자인 애제자의 사후에 공동체에 일어난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는 요한복음 21장의 성격은 부록이나 후대의 편집이라는 단어 보다는 에필로그라는 단어가 더 적절하다. 앞의 견해대로라면 21장은 요한복음 저자의 본래 저술의도와 구성과는 별도로 쓰여진 부분이 되는데 그러면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오히려 여러 가지 난점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우선, 21장은 부록이나 후대의 편집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인정하듯이 현존하는 사본 중에서 21장이 빠진 사본이 없는데, 이 사실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면 안 된다. 물론, 이들은 21장의 편집이 20장이 완성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 주장 하지만, 이것은 지나치게 편의적인 발상이다. 둘째, 21장에 나오는 단어나 문법을 분석해보면 이것이 그 이전 본문에 나오는 단어나 문체나 문법과 다르지 않다. 소위 바울의 친서와 제 2 바울서신에 있는 문체의 차이와 비교해 보면 이러한 일치는 결코 우연이라고 할 수 없다.
더 중요한 것은 요한복음이 21장이 없이 끝나면 요한복음 안에 있는 몇 가지 문제가 모순 혹은 미해결 과제로 남는다. 먼저, 요한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제자는 베드로와 애제자, 그 중에서도 애제자인데 20장에서 복음서가 끝나게 되면 요한복음의 최고의 신앙 고백자는 애제자가 아닌 도마가 된다. 또한 13장부터 시작된 요한복음의 주요 모티브 중의 하나는 베드로와 애제자의 협동 혹은 갈등의 관계인데 이것이 21장 없이 끝나면 이들이 마지막 등장한 장면(20:1-10)에서 그 관계에 대한 결말이 나지 않을 뿐 아니라 이들이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는 장면으로 끝나 이들이 마치 배교자로 묘사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이것은 이 시점까지 요한복음이 묘사하는 이 두 제자상과 배치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두 제자의 관계에 대한 결말이 나는 것이 예상되어 있고 이것은 21장의 핵심 모티브 중의 하나다. 나아가, 애제자가 누구인가는 21장에서 끝까지 익명으로 남아있지만 그가 저자라는 것이 명시되는데 이것이 없이는 애제자의 본질에 대해서 알기 어렵다. 예수에 관한 중요한 사건에 증인인 애제자가 요한복음 저술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에 대해서 정보를 제공해 주는 것이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는 기대되어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21장이 부록이라는 견해는 20:30-31이 복음서 전체의 명확한 결론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하는데 마이니어(Paul S. Minear)에 의하면 이것은 얼마든지 20장 자체의 결론으로 볼 수 있고 복음서 자체에 대한 결론은 21장 마지막 절에 있다고 할 수 있다.38) 특히 요한복음이 시적 문구인 프롤로그(1:1-18)로 시작되고 거기에 “우리”라는 신앙 공동체 일원이 등장하는데 21장을 에필로그로 인정하면 에필로그의 마지막 부분(21:24)에 “우리”가 재등장하여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가 잘 어울리게 된다.
요한복음 21장의 구성은 비교적 명확하다. 21장은 복음서 전체의 결론에 해당하는 마지막 절(25절)을 제외하고는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연결 되어있다. 하지만 내용 구성상 21장은 부활 후 디베랴 바닷가에 나타나신 예수에 대한 부분(1-14절)과 베드로와 애제자의 사명에 대한 부분(15-23절)과 복음서 전체의 결론(25절)으로 대별해 볼 수 있다. 중간부분은 다시 베드로에게 준 목양의 사명(15-17절)과 베드로의 순교에 대한 예언(18-19절)과 베드로와 애제자의 서로 다른 사명(20-23절)에 대한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예수의 디베랴 바닷가의 부활 현현 기사를 보면 이때 예수가 제자들을 부활 후 처음 보는 것 같은 인상을 받기는 하지만 저자는 이것이 세 번째 부활 현현 기사라고 하여 20장의 제자들-저자에 의하면 막달라 마리아는 제자로 분류되지 않음-에게 나타난 예수의 부활 현현 기사와 이것을 연결시킨다. 요한복음의 내용이 반드시 시간의 순서대로 기록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 부활현현 기사가 다른 기사보다 시간적으로 앞선 것으로 보아도 문제가 없다. 즉 베드로와 애제자에 대한 사명으로 연결시키는 긴 기사를 별도로 취급하기 위해 21장에 이 마지막 부활현현 기사를 위치시켜 놓았을 수도 있다.
2. 부활 후 디베랴 바닷가에 나타난 예수(1-14절)
요한복음 21장 1-14절은 예수께서 부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난 사건에 대한 기사이다. 이 기사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났다”는 말로 시작해서(1절에 2번) 같은 단어를 재차 사용하면서 끝맺는다(14절). 저자는 “그 후에”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이 기사를 바로 앞 장에 나와 있는 예수의 부활 현현 기사와 연결시키려 한다. 즉 예수께서 제자들의 무리에게 이미 두 번 나타났던 것처럼 다시 한번 디베랴 바닷가(갈릴리 바닷가; cf. 6:1)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기사를 통해서 저자는 독자들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한 것인가? 앞 장에서 언급되었던 두 번에 걸친 예수 부활 현현 사건으로는 부활에 대한 증거가 부족했기 때문에 또 하나의 증거가 필요해서 이 기사를 포함시킨 것인가? 아니면 예수께서 제자들과 물고기와 빵으로 식사를 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예수가 몸으로 부활했다는 것을 더 확실히 보여주는 것이 필요했던 것인가? 아니면 빈 무덤 사건(20:1-10)에서 끝나지 않은 베드로와 애제자의 경쟁 모티브를 되살려 저자가 이에 대해서 어떤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쉽지 않다. 아마도 두 번째와 세 번째 답이 복합된 것이 저자가 의도했던 점일 것이다.
요한복음 내용 전체에서 예수 부활 전후를 막론하고 제자들의 리더였던 베드로는 이 기사에서도 제자들의 리더로서 자리매김한다. 그는 디베랴 바닷가에 있던 제자들의 명단에서 제일 앞에 나올 뿐만 아니라 이들을 이끌고 고기를 잡으러 가자고 권하고 다른 제자들은 베드로의 인도를 따른다. 여기에 나타나 있는 도마와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익명의 두 제자들이 어떤 성격의 사람들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나다나엘은 공관복음서 기록에 따르면 십이 제자의 일원이 아니었으며 여기에 모인 제자들이 총 7명이기 때문에 이들을 십이 제자의 무리로 보기는 어렵다. 어쨌든 7명의 제자들이 있었지만 여기서 부각되는 인물은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받는 제자(애제자) 뿐이다. 요한복음의 다른 구절에서처럼 여기서 베드로는 제자들의 대표요 리더이며 성격이 급한 사람이요(7절), 애제자는 예수와 친밀한 교제를 나누며 예수를 알아보는 사람으로 나온다(7절).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문제는 물고기를 잡으러 간 제자들의 행동이 비 신앙적, 나아가서는 배교적 행동인가 하는 것이다. 20장의 기록을 보면 예수께서 부활 후 이미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셨기 때문에(20:19-23) 선교의 현장으로 가지 않고 갈릴리 바닷가에 물고기 잡으러 간 것은 부활 신앙을 저버린 행동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들이 그곳에 가서 “이 밤에” 아무 것도 낚지 못했다는 것은 이러한 주장이 옳다는 것을 뒷받침 해주는 것 같다. 특히 “밤”이라는 단어가 요한복음에서 상징하는 바를 생각하면(cf. 3:2; 13:30) 이들이 물고기 잡으러 간 행동은 배교의 행동으로까지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본문 자체에는 이들의 행동이 잘못된 것이라고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는다. 이 기사에서 제자들이 물고기 잡으러 간 일을 배교와 연결시키는 것은 본문이 의도하고 있는 바를 벗어난 해석이다. 이들이 물고기 잡으러 간 것은 인간으로서의 생업의 일환이었을 것이고 예수는 그 생업의 현장에 부활하신 몸으로 나타난 것이다.
물고기를 잡기 위해 애쓰고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는 새벽녘에 해변에 나타나지만 제자들은 아무도 그가 예수인줄 알아보지 못한다. 물론 새벽녘의 바닷가는 안개도 있을 수 있고,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어슴푸레하기 때문에 사람을 정확히 식별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는 여기서 그러한 물리적인 조건 때문에 제자들이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을 말하려 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본문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부활한 예수의 얼굴을 보았지만 알아보지 못했던 마리아와 같이(요 20:15) 제자들도 마음이 어두워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일 것이다. 마리아에게 예수께서 그 이름을 부르심으로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셨듯이 고기잡이에 성공하지 못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 쪽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6절)고 말하심으로써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신다.
다른 장면에서와 마찬가지로(cf. 20:1-10) 이 때에도 역시 예수를 제일 먼저 알아본 것은 애제자였다. 요한복음 전체를 통해서 애제자는 예수와 친밀한 교제를 나누며 예수의 뜻을 잘 알아차리는 인물로 나온다(13:23; 19:35). 그리고 이러한 그의 통찰은 수제자인 베드로에게 즉시 보고 된다. 벌거벗고 고기잡이를 하던 베드로는 예수께서 나타났다는 애제자에 말에 옷을 걸치고 성급히 물에 뛰어든다. 베드로와는 달리 다른 제자들은 배를 끌고 해변에 다다른다.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베드로만이 그물을 끌어올려 큰 물고기를 153마리나 건저내고 예수께서 제자들과 물고기로 조반을 드시고 이 때 제자들은 모두 부활한 예수를 알아본다.
이 기사에서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사람들의 흥미를 가장 많이 자아냈던 것은 물고기 숫자에 대한 것일 것이다. 왜 153 마리인가? 단순히 많은 물고기라고만 하면 될 것을, 아니면 대략 백여 마리나 된다고 해도 될 것을 왜 구체적으로 153 마리라고 했을까? 어거스틴을 비롯해서 수 많은 신학자들이 상상력을 동원해서 이 난제를 풀어보려고 시도 했다. 하지만 모든 제안들이 그야말로 제안일 뿐 그 어느 것도 확정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아마도 이렇게 숫자를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은 예수가 바닷가에 나타난 사건이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사건이며 이것에 대한 증언이 확실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이 기사에서는 베드로와 애제자가 주요 인물로 나타나지만 이들에게 어떤 특수한 임무는 부여되지 않는다. 그것은 이어지는 기사에서 나올 것이고, 이 부분에서는 예수께서 베드로와 애제자의 사명을 언급하기에 앞서 제자들에게 부활 후 나타나셨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3. 부활한 예수를 목도한 자의 사명(15-24절)
3.1. 목양의 사명(15-19절)
부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 자신의 부활한 몸을 보여주고 그들과 아침 식사를 한 후 예수는 이제 이들 중 베드로와만 상대하여 의미심장한 대화를 한다. 그 대화는 다름 아닌 목양의 사명에 관한 것이다(21:15-19). 첫 번째 대화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이루어진다.
예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예수와 베드로는 첫 번째 대화 후에 비슷한 요지의 대화를 두 번 더 계속한다. 세 번의 대화는 정확하게 언어적으로 일치하지는 않지만 그 내용의 요지는 동일한 것이다. 약간의 다른 점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들 수 있다. 첫째, 예수의 질문 가운데 두 번째와 세 번째 대화에서는 “이 사람들보다”라는 말이 빠진다. 둘째, 예수가 베드로에게 목양의 사명을 주는 문장 혹은 단어가 각각 “내 양을 치라”와 “내 양을 먹이라”로 바뀐다. 셋째, 세 번째 대화에서 질문을 받은 베드로가 “근심했다”(혹은 “마음이 아파”)는 내용이 첨가된다. 먼저, “이 사람들보다”라는 구절은 한 번 사용하고 난 다음에는 굳이 반복해서 포함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다음으로, “양”/“어린양”과 “먹이라”/“치라”라는 단어는 저자가 동어반복을 피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다. 셋째, 베드로가 “마음이 아파”한 것은 자신이 예수를 세 번이니 부인했는데 예수가 세 번째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묻자 이것이 생각나 마음이 아파한 것 같다. 그러므로 이것은 대화의 진전에 따른 자연스런 결과다. 이상을 통해서 세 번의 대화는 그 요지가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사랑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동사의 사용에 관한 것이다. 예수는 첫 번째와 두 번째 질문에서 예수는 ‘아가파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베드로는 ‘필레오’라는 동사를 사용한다. 마지막 질문에서 예수는 ‘필레오’ 동사를 사용하고 베드로는 ‘필레오’ 동사로 대답한다. 그 동안 학자들은 여기에서 사용된 사랑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두 동사가 각각 동의어로 쓰인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의미로 쓰인 것인지에 대해서 논란을 벌여왔다. 만약 ‘아가파오’가 신적인 사랑을 의미하고, ‘필레오’가 친구로서의 사랑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예수와 베드로의 대화 가운데 이것이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다면 이 대화는 이런 것이 된다. 처음 두 번의 대화에서 예수는 베드로에게 전적인 헌신을 의미하는 신적인 사랑으로 자신을 사랑 하느냐고 묻고 베드로는 그렇지 못하고 단순히 친구로서 사랑한다고-예수의 말을 부정하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예수를 부정한 자로서 겸손한 태도로- 대답하는 것이 된다. 마지막 대화에서 예수는 베드로의 입장을 이해하여 자신을 신적인 사랑이 아닌 친구로서의 사랑을 하느냐고 묻게 되고 베드로는 그렇다고 대답한 것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요한복음 전체와 본문에서의 위 두 동사의 쓰임새와 문맥에서 볼 때 적절한 해석이 아니다. 우선, 요한복음에서 “사랑하다”라는 동사는 주로 ‘아가파오’ 동사가 쓰였는데 이것은 ‘필레오’ 동사와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되었다(cf. 20:2; 21:7). 둘째, 본문 자체에서 예수는 베드로에게 목양의 사명을 주기 위해 이 질문을 함으로써 베드로의 위상을 높여 주려는 의도에서 “사랑하다”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지 사랑의 종류를 물어보려고 베드로에게 질문한 것은 아니다. 만약 베드로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희생적인 사랑(‘아가파오’)이 아니라 친구로서의 사랑(‘필레오’)이 본문에서 의도된 것이라면 세 번째 대화에서 예수가 자신을 친구로서의 사랑을 하느냐고 질문을 했을 때 근심하거나 마음이 아파하기보다는 예수가 자신을 이해해 준 것에 기뻐했어야 했을 것이다. 이 장면의 핵심은 예수가 자신을 부인한 베드로의 위상을 높여주고 그에게 목양의 사명을 준 것에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베드로는 어떤 자격으로 이 사명을 받은 것인가? 여기서 베드로는 최초의 교황이며 이 목양의 사명은 교황에게 승계되는 것인가? 아니면 이 목양의 사명은 사도로서의 베드로의 사명을 이어받은 안수 받은 목사에게만 주어진 것인가? 여기서 베드로가 받은 사명은 요한복음 전체에서 늘 그랬듯이 제자들의 대표로서 받은 것이라면, 이 목양의 사명은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의 제자들 모두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성직자와 평신도를 본질상 구분하는 것은 신약성서 자체에서는 낯선 개념이다. 독점적 성직자인 “감독” 혹은 “장로”의 직분이 현재의 성직자와 평신도 개념으로 발달한 것은 이단의 득세에 따라 이것을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 강력한 지도자 개념을 도입한 이 세기 이후에 생겨난 것이다. 신약성서 자체의 입장에서 보면 목사와 평신도는 본질이 아니라 그 기능에 의해서만 구분될 뿐이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나와 있는 대부분의 예수 부활 혹은 승천 기사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선교명령을 하는 것으로 끝맺는데(마 28:16-20; 막 16:15-18; 요 20:19-23; 행 1:8) 이 명령이 어떤 특정인이나 특정 그룹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제자들에게 주어졌듯이 베드로에게 주어진 목양의 사명 또한 모든 제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이어서 예수는 베드로가 목양의 사명을 감당하게 될 때의 태도와 그가 이 사명을 감당하게 될 때에 어떤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인가를 예언의 형태도 알려준다. 목양의 사명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며 예수를 따르는 것이라고 예수는 말한다(19절). 또한 목양의 사명을 감당하기 전에는 자신의 길을 갔지만 그 이후에는 여러 가지 핍박을 받아 자신이 원하지 않는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18절). 예수는 실제로 베드로가 이러한 사명을 감당하다가 순교할 것에 대해서 여기서 말하고 있다. 여기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라는 구문을 사용하여 예언을 한 것을 보면 예수가 베드로에게 목양의 사명을 준 것이 얼마나 중차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베드로를 대표로 해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목양을 사명을 주었다면 예수를 따르는 후대의 모든 제자들에게도 이 사명은 그대로 주어진 것이다.
3.2. 베드로와 애제자 각각의 사명(20-24절)
목양의 사명을 받고 예수를 따르라는 명령을 받은 베드로는 애제자가 그들을 따라오는 것을 목도한다. 요한복음 내내 선의의 경쟁 관계로 묘사된 이 두 인물은 이곳에 마지막으로 다시 등장한다. 베드로는 자신이 순교할 사명이 있음을 예수께로부터 들은 후 애제자는 어떻게 되겠는지를 예수께 묻는다. 예수는 애제자의 사명과 운명에 대해서는 베드로가 상관할 바가 아니며 베드로는 예수를 따르기만 하면 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 말을 하는 가운데 예수의 말 중 “자신이 재림할 때까지 애제자를 이 땅에 머물게 할지라도”라는 내용의 말이 공동체 안에서 오해되어 그가 죽지 않는다는 소문이 생기게 된다.
이 구절에서 베드로와 애제자가 죽음의 종류에 관해서 비교되어 나타나며 이것은 어떤 죽음이 더 고귀한 것인가에 대해서 요한 공동체 내에서 논쟁이 이러났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베드로의 순교적 죽음과 애제자의 장수 중 어떤 것이 더 우월한 죽음인가? 초기 교회에서는 일반적으로 순교를 영광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자연사보다 순교가 더 고귀한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cf. 계 20:4). 하지만 요한 공동체 내에서는 공동체에서 존경받는 애제자가 장수(長壽)한 것이 예수의 재림과 연관하여 이에 못지않은 것으로 여겨졌다(22절). 그래서 공동체 안에서 애제자의 운명에 대한 오해가 생겼고 23절은 그것을 교정하는 내용이다. 두 제자의 죽음의 종류에 대한 논쟁은 아마도 애제자 사후에 발생했을 것이다(23-24절). 여기서 애제자의 증언을 기록한 사람들은(24절) 애제자가 장수한 것이 베드로의 순교보다 못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려고 한 것 같다. 이것을 통해 13장부터 이 본문까지 계속된 베드로와 애제자의 경쟁 모티브가 대단원을 맞게 된다. 이들은 대립 관계가 아니라 서로 다르지만 각각 예수를 따르는 제자도의 길을 올바로 가고 있는 것이다.
24절에 보면 이 애제자가 바로 요한복음 내용에 있는 예수 행적과 말씀에 대한 증인이며 동시에 저자라고 한다. 여기서 “그의 증거가 참이라”는 것이 강조된다. 그래서 애제자는 증인으로서의 특별한 위치를 향유한다. 그래서 이 구절 기저에는 애제자의 증인으로서의 역할은 베드로의 목회자로서의 역할과 동등 혹은 우월하다는 암시가 깔려있다. 그래서 요한복음 앞 부분에서처럼 여기서 애제자는 부활한 예수를 처음으로 알아본 사람이며 동시에 예수와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있는 사람으로 소개된다. 결국 요한복음에서 이상적인 제자로 설정된 애제자에 대한 언급으로 요한복음 본문이 끝나게 되는데 이것은 도마의 신앙고백과 그것에 대한 찬사로 마치는 것보다 더 자연스러운 것이다.
4. 결말(25절)
마지막으로 저자는 요한복음이 어떻게 저술되었는지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첫째, 이 책은 예수의 행적에 관한 것이다. 둘째, 저자가 알고 있는 예수의 행적은 여기에 기록된 것 이외에도 많아서 만약 그것을 다 기록한다면 이 세상도 그 책을 수용하기에 부족할 정도다. 이러한 표현은 문학적 과장법으로서 저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예수에 대한 전승이 얼마나 많은가 하는가를 잘 표현하고 있다. 또한 저자는 이 말을 통해서 자신이 자료를 선택적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이미 저자가 20:30에서 예수가 행한 표적에 관해서 말했던 것이다. 거기에서는 자료를 선택한 기준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계속] 믿게 하는데 있다고 한다(20:31). 21:25에서는 저자의 자료 선택 기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이미 앞에서 말한 기준에 의한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이렇게 복음서 저술이 어떻게 구전 혹은 문서 자료를 사용하고 자신이 이것을 어떻게 기술했는지를 기록하는 것은 요한복음만의 특징은 아니다. 요한복음이 이것을 복음서 말미에 기록하였다면 누가복음은 복음서 서문으로서 보다 명확하게 이것을 표현하고 있다. 누가는 자신의 복음서 기록이 역사상 이루어진 예수 사건에 대한 것이며, 그 사건에 대해서 목격자들이 구전한대로 기록한 여러 저술들을 참고하여, 자신의 입장에서 논리정연하게, 이미 예수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 예수 사건에 관한 것을 보다 명확하게 가르치기 위해, 즉 목회적 목적으로 이 책을 저술하고 있다고 말한다(눅 1:1-4). 요한복음은 목회적 혹은 선교적 목적으로-20:31의 본문의 선택 혹은 이것의 해석에 따라- 비슷한 과정을 거쳐 기록된 것이다.39) 다만, 누가는 자신이 구전과 문서 전승을 사용한다는 것을 명확하게 말했지만, 요한은 문서 전승을 사용하고 있다고는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요한복음의 내용을 분석해 보면, 비록 구전 혹은 문서 전승을 사용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요한은 자신의 언어로 이것을 철저하게 신학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자료를 말할 때 공관복음의 그것에 비해 어려운 부분이다.
5. 해석과 적용
요한복음 저자는 마지막 장을 에필로그의 성격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에필로그를 통해서 저자는 크게 다음과 같은 점을 말하려고 한 것 같다. 첫째, 예수의 육체적 부활은 확실히 일어난 것으로서 예수가 디베랴 바닷가에 부활 현현 시 제자들과 함께 조반으로 물고기를 먹었는데 거기에 있던 제자들은 그 물고기의 정확한 숫자(153 마리)까지 기억하고 있는 정도다. 둘째, 예수의 부활현현은 제자들에게 교회 시대에 사명을 주는 것으로 연결된다. 이 사명을 한마디로 말하면 목양의 사명이다. 셋째, 목양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예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수를 따르는 것이다. 하지만 목양의 사명을 감당하는데 있어서 모든 사람이 똑 같은 길을 가는 것은 아니다. 순교자의 길도 있고, 장수하면서 증인의 사명을 다 하는 것도 있다. 저자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 안에 이 사명의 종류에 대한 논란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논란을 종식시키려 한다. 두 가지 서로 다른 사명이 각각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복음서 전체의 결론으로서 자신이 어떻게 복음서를 기록했는지를 언급한다. 복음서를 기록한 것은 단순히 예수 어록의 수집물이나 흥미로운 사건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복음서 저자가 생각하기에 독자를 가장 효과적으로 전도 혹은 목회적 권면을 하기위해 선택적으로 자신의 신학에 입각해서 기록한 것이다. 이 에필로그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 사역의 결말인 부활과 그 의미와 부활을 믿는 자의 사명을 다시금 되새겨 볼 수 있다.
제14장 요한복음 참고 문헌
1. 최신 연구 동향
모든 성서 연구자는 허공에서 연구를 시작하지 않는다. 어떤 연구자든 이전 연구자의 어깨 위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연구자가 이전 연구자의 성과나 입장과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이전 연구자와의 성실한 상호교류(interaction) 없이는 학문이 성립되지 않는다. 어떤 학자든 새로운 주장을 하기 위해서는 이전 연구자들이 행한 연구를 성실하게 검토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다음은 이런 연구 성과들을 개괄적으로, 역사적으로, 주제적으로 정리해 놓은 논문과 책들이다. 이것은 요한복음을 처음으로 연구하는 자들에게 좋은 안내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1.1. 참고문헌
김동수, [신약성서개론: 한국인을 위한 최신 연구](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2) 제 19장; John Ashton(ed.), The Interpretation of John(Edinburgh: T & T Clark, 1997); R. Kysar, The Fourth Evangelist and His Gospel: An Examination of Contemporary Scholarship(Minneapolis: Augsburg, 1975); idem, "The Fourth Gospel: A Report on Recent Research," ANRW II 25(1985) 2389-2480; Klaus Scholtissek, "Johannine Studies: A Survey of Recent Research with Special Reference to German Contributions," Currents in Research 6(1998) 227-259; idem, "Johannine Studies: A Survey of Recent Research with Special Reference to German Contributions II," Currents in Research 9(2001) 277-305.
1.2. 평가
Ashton이 편집한 책은 20세기 요한복음에 관한 주요 논문 모음집이다. Kysar의 논문과 연구서는 1980년대까지의 요한신학계의 흐름을 잘 정리하고 있다. 김동수는 한국 요한신학의 연구사를 조망하고 있다. Sholtissek의 논문들은 최근의 특히 독일에서 전개되는 요한신학계의 흐름을 잘 분석하고 있다. 요한복음을 주제별 혹은 구절별로 연구하기 위해서는 이에 관한 참고 문헌을 잘 정리해 놓은 다음의 책들을 보라. G. van Belle, Johannine Bibliography 1966-1985: A Cumulative Bibliography on the Fourth Gospel(Louvain, 1988); E. Malatesta, St. John's Gospel 1920-1965: A Cumulative and Classified Bibliography of Books and Periodical Literature on the Fourth Gospel(Rome, 1967). 최신의 참고문헌은 매년 3차례 발행되는 New Testament Abstracts를 참조하라.
2. 연구 문헌 소개
요한복음을 연구하기 위해서 필요한 문헌들을 소개한다. 먼저, 성경 강해에 있어서는 참고 문헌을 많이 읽는 것보다 성서 본문 자체를 꼼꼼히, 묵상하면서 읽고 분석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본문 읽기와 분석이 충분하게 되었을 때 요한복음에 대한 개론서, 주석서, 강해서, 기타 참고 도서를 읽는 것은 강해 설교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표는 중요한 책을 의미. **는 매우 중요함을 의미).
2.1. 개론서
2.1.1. 참고 문헌
**D. Moody Smith, [요한복음의 신학](서울: 한들, 1999); *Robert Kysar, [요한복음서연구](서울: 성지출판사, 1996); *김득중, [요한의 신학](서울: 컨콜디아사, 1994); Stephen S. Smalley, [요한신학](서울: 도서출판 풍만, 1987); Barnabas Lindars, [요한복음](서울: 도서출판 이레, 2002); 김춘기, [요한복음연구](서울: 한들, 1998); **R. E. Brown, Introduction to the Gospel of John(Garden City, N.Y.: Doubleday, 2003); *R. Kysar, The Fourth Evangelist and His Gospel: An Examination of Contemporary Scholarship(Minneapolis: Augsburg Publishing House, 1975); D. Moody Smith, John(Philadelphia: Fortress, 1986); R. Alan Culpepper, The Gospel and Letters of John(Nashville: Abingdon, 1998); David J. Hawkin, The Johannine World(NY: SUNY, 1996).
2.1.2. 평가
한글로 된 저서 중에는 D. Moody Smith의 책이 요한복음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지식을 제공한다. 김득중의 저서는 20세기 후반 요한신학의 흐름을 요약적으로 잘 설명해주고 있고, 복음주의적인 입장의 저서로는 Smalley와 Lindars의 책을 추천한다. 요한복음 연구의 대가의 글로서 사후에 나온, 가장 최근의 요한복음 개론서는 Brown의 책을 들 수 있다.
2.2. 연구서
2.2.1. 참고 문헌
김동수, [요한복음의 교회론](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5); **R. E. Brown, [요한공동체의 역사와 신학](서울: 성광문화사, 1994); *E. Kaesemann, [예수의 증언](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2); *R. Bultmann, [신약성서신학](서울: 성광문화사, 1976); M. Hengel, [요한문서탐구](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8); *R. Alan Culpepper, [요한복음해부](서울: 요단, 2000); **J. L. Martyn, History and Theology in the Fourth Gospel(3rd ed.;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2003); John Ashton, The Interpretation of John(London: Fortress, 1986); C. H. Dodd, The Interpretation of the Fourth Gospel(Cambridge: CUP, 1953); idem, Historical Tradition in the Fourth Gospel(Cambridge: CUP, 1963); W. A. Meeks, The Prophet-King: Moses Traditions and Johannine Theology(Leiden: Brill, 1967); D. Rensberger, Johannine Faith and Liberating Community(Philadelphia, 1988); Paul N. Anderson, The Christology of the Fourth Gospel(Valley Forge, PN: TPI, 1996); Craig R. Koester, Symbolism in the Fourth Gospel(Minneapolis: Fortress, 1995).
2.2.2. 평가
위 참고 문헌은 요한문헌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기 위해 필요한 서적들이다. 운동선수가 자기 종목의 기술을 익히는데 필요한 것이 주석서와 강해서라면, 전문 연구 서적을 읽으면서 요한 문헌에 대한 지식을 넓히는 것은 기초체력을 연마하는 것과 같다. 기초체력 연마와 기술은 익히는 것이 운동선수에게 꼭 필요한 것같이, 요한복음에 나오는 구체적인 구절에 대한 주석과 아울러 요한 신학과 그 방법론에 대한 지식도 요한복음을 보다 깊게 이해하기 위해 필요하다.
2.3. 주석서
2.3.1. 참고문헌
**C. K. Barrett, [요한복음] 2 vols.(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4, 1985);**John Beasley-Murray, [요한복음](서울: 솔로몬, 2001); *R. Bultmann, [요한복음서연구](서울: 성광문화사, 1979); 이영헌, [요한복음서](왜관: 분도출판사, 1996); A. Schlatter, [요한복음강해](서울: 종로서적, 1994); F. F. Bruce, [요한복음](서울: 로고스, 1996); Gerald, S. Sloyan, [요한복음](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00); Leon Morris, [요한복음](서울: 생명의 말씀사, 1979); 이상훈, [요한복음](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3); 박수암, [요한복음](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2); **R. E. Brown, The Gospel of John, 2 vols.(AB 29 and 29A; Garden City, NY, 1966, 1970); **R. Schnackenburg, The Gospel According to St. John, 3 vols.(NY: Burns and Oats, 1968-1982); *E. Haenchen, John 2 vols.(Philadelphia: Fortress, 1984); *D. A.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Grand Rapids, MI: Eerdmands, 1991); *D. Moody Smith, John(Nashville: Abingdon, 1999); B. Lindars, The Gospel of John(New Century Bible: London: Oliphants, 1972); F. J. Molony, The Gospel according to John(Sacra Pagina; Collegeville, MN: Liturgical Press, 1988); Colin G. Kruse,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An Introduction and Commentary(Grand Rapids, MI: Eerdmans, 2003).
2.3.2. 평가와 설명
수많은 주석서 중에서 몇 개를 선택해야 할 때는 먼저 **와 *가 붙은 표준주석서를 택해야 한다. 표준 주석서가 아닌 것은 그것의 아류인 것이 많기 때문이다. 표준 주석서 중에서도 Brown과 Schnackenburg의 주석서는 그 방대함, 정확성, 참신성 등에서 타 주석서의 주종을 불허한다. 이 두 주석서가 출판된 지 30년이 넘었지만 이것을 능가하는 주석서는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학문성에 있어서 뒤떨어지지 않으면서도 복음주의적 관점으로 기술된 수작으로는 Beasley-Murray와 Carson과 Morris의 주석서를 들 수 있다. D. Moody Smith의 주석은 다른 표준 주석서와 같이 독특하고 새로운 관점은 많이 제공해 주고 있지는 않지만, 균형 잡힌 견해와 설득력 있는 문체로 되어 있어 본문에 대한 이해에 큰 도움이 되어 주석서라는 이름에 걸 맞는 책이다. 국내 요한 문헌 전문 연구 학자의 수가 비교적 적어, 국내 학자들에 의해서 쓰여진 요한복음 주석 중에서는 아직 표준 주석으로 분류할 만한 저술이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2.4. 강해 (설교)집
2.4.1. 참고문헌
Bruce Milne, [요한복음 강해] (서울: IVP, 1995); W. Hershel Ford, [요한복음 연속 예화 강해] 2 vols.(서울: 시온성, 2003); A. Köstenberger, [요한복음총론](서울: 크리스챤출판사, 2005); 레슬레 뉴비긴, [레슬레 뉴비긴의 요한복음 강해](서울: IVP, 2001); 유상섭, [설교를 돕는 분석요한복음](서울: 규장, 1999); *이종윤, [요한복음 강해] 4 vols. (서울: 필그림출판사, 1977); 이현주, 요한복음 묵상](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8); 전병욱, [153] 2 vols. (서울: 규장, 2000); 한규삼, [요한복음 다시보기](서울: 아가페출판사, 2002); *김서택, 요한복음 강해 6 vols.[서울: 성서유니온선교회, 1999); 곽선희, [은혜와 진리의 대화: 요한복음 강해] 2 vols.(서울: 엠마오, 1986); 조용기, [요한복음 강해] 2 vols.(서울: 서울말씀사, 1997); *이재철. [요한과 더불어] 10 vols. (서울: 홍성사, 1997-2004); *옥한흠, [요한이 전한 복음] 3 vols.(서울: 국제제자훈련원, 2002); *김광수, [요한복음 다시읽기(상)(하)](유성: 침신대출판부, 2002, 2004); **Leon Morris, Reflections on the Gospel of John (Peabody, MA: Hendrickson, 2000); Robert Kysar, Preaching John(Minneapolis: Fortress, 2002; **William Barclay, John 2 vols.(rev. ed.; Philadelphia: Westminster, 1975).
2.4.2. 평가와 선택
요한복음을 강해하기 위해서 책을 읽는 논리적인 순서를 들자면, 성서본문-개론서-연구서-주석서-강해서가 될 것이다. 물론 실제로 그 순서가 반드시 이렇게 되어야 만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강해서보다는 주석서를 먼저, 많이 읽는 것이 강해설교를 위한 기초체력을 더 탄탄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목회자들이 설교를 할 때 복잡한 연구서나 주석서보다는 강해서로 손이 쉽게 가는 것이 사실일 것이다. 물론 강해(설교)집은 위 모든 과정을 거친 최종 형태이기 때문에 그것은 곧바로 설교에 이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강해 설교집에는 저자의 경험과 특색과 예화가 많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그대로 이용해서는 오히려 설교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강해 설교집은 같은 본문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설교했는가를 이해하고 자신의 설교에 필요한 한두 가지 아이디어를 얻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위의 강해집에서 국내외 학자들의 저술들 (예, Morris, Kysar, Milne, 이종윤, 유상섭, 한규삼, 김광수)은 본문 자체에 대한 분석과 이해에 그 주안점을 두고 있다면, 목회자들의 강해집은 대체로 적용과 예화에 더 중점을 두었다. 요한복음 강해집의 고전은 Barclay를 들 수 있고, 최근의 저술 중에서는 Morris와 Kysar의 저술이 돋보인다. 본문이해에 바탕을 둔 강해집으로는 김서택, 옥한흠의 저술이 수작이고, 이야기를 통해서 본문의 이해를 이끌어 내는 강해집으로는 이재철의 저술이 돋보이고, 적용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는 전병욱의 저술을 들 수 있으며, 조용기의 주석은 목회자로서 예외적으로 성서 본문에 대한 해설에 주안점을 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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