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서신

[스크랩] 요한서문에 나타난 로고스 연구

하나님아들 2014. 6. 27. 15:58

 

 

 

서울신학대학교신학대학원

1  9  9  2    학  년  도

석  사  학  위    논  문


    요한서문에 나타난 로고스 연구


(요 1:1 ~ 18을 중심으로)


 성서신학전공   진 대 석  1 9 9 2 년



                          목   차


Ⅰ. 서  론 ........................................................ 1


  A. 문제의 제기 및 연구목적  ..................................... 1


  B. 연구방법 및 범위 ............................................. 3


Ⅱ. 로고스 개념들의 영향 .......................................... 5


  A.헬라 세계의 로고스 개념과 영향 ................................ 5

     1.헤라크리투스(Heraclitus:535-475 B.C.)  ..................... 5

     2.플라톤 ..................................................... 6

     3.스토아 학파 ................................................ 7

     4.필로(Philo,B.C.20-A.D.54) .................................. 8


  B.유대적 로고스 개념과 영향 .................................... 11

     1.요한의 로고스와 구약성서 .................................. 11

     2.랍비적 유대교(Rabbinic Judaism) ........................... 15

     3. 쿰란 문서(Qumran Texts) .................................. 16

  C.요한의 로고스와의 관계 ....................................... 21

Ⅲ. 서언의 구조 .................................................. 23


  A. 키아즘 이전의 구조 분석 ..................................... 23

     1.로고스 찬양시 ............................................. 23

     2. 두 개의 찬양시 ........................................... 26


  B.키아즘 구조 .................................................. 27

     1.키아즘의 중심축(pivot) .................................... 27

     2.서언의 기능   ............................................. 30


Ⅳ. 로고스 신학 .................................................. 32


  A. 서언과 요한복음과의 관계 .................................... 32

     1. 로고스와 다른 표현들  .................................... 32

     2. 로고스 기독론에 대한 세례 요한의증거 ..................... 35


  B.  로고스 기독론 .............................................. 39

     1.선재하신 로고스 ........................................... 39

     2. 로고스의 인격(The person of The Logos) ................... 43

     3. 창조자로서의 로고스 ...................................... 46


  C.성육 로고스 기독론 ........................................... 48

     1. 성육한 로고스와 임마누엘 ................................. 49

     2. 은혜와 진리의 소유자로서 성육하신 로고스 ................. 50

     3.아버지의 계시자로서 성육하신 로고스 ....................... 52


  D.로고스 와 구원과의 관계 ...................................... 55

     1. 빛과 구원 ................................................ 55

     2. 지식과 구원  ............................................. 56

     3. 영접과 구원 .............................................. 58

     4. 그의 이름을 믿는 자와 구원 ............................... 60


ⅴ. 결  론 ....................................................... 63


  A.요 약  ....................................................... 63


  B.평가 및 제언 ................................................. 67


 참고문헌 ........................................................ 68



Ⅰ. 서  론


A. 문제의 제기 및 연구목적


저자 요한은 나사렛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을 Logos로 지칭하면서, 이 서문을 자기 복음서 첫 머리에 놓았다. 저자는 이것 때문에 한 사색적, 철학적 오역(misinterpretation)과 같은 것은 두려워할 필요조차 없을 만큼, 전혀 새로운 무엇을 자신이 선포 중이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는 자신있게, 그의 당시 이전에 또는 그의 당시에, 비기독교인 저술가들이 Logos에 관해 가르쳤던 모든 종류의 관념들을 활용할 수가 있었다.1) 그런이유는 저자가 전달하려는 내용2)은 분명하게 그의 눈으로 보았고 경험했기 때문이었다.3) SUrjit Singh4)는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의 경험과 성령의 임재가 있은 후에, 예수에 대하여 “인자”(son of man), “하나님의 아들”(son of God), “말씀”(The Logos) 또는 “주님”(The Lord)이라는 용어로 표현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아직 예수의 부활과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했던 베드로는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5) “그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 할 수 있었다.

우리는 요한의 서언의 Logos를 어떻게 이해하며, 즉 그 내용이 무엇이며 또한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하는 문제에 부딪힌다. 우리가 Logos의 이해를 문제시 할때, 요한복음의 종교적 사상적 배경을 주시해야 한다. 이런 경우 두개의 극단적인 견해가 있어 왔다. 즉 어떤 학자들은 요한복음이 오로지 팔레스틴적이라고 하는 반면 다른 학자들은 헬라적 종교철학의 예로써 보려고 한다. 불트만(R. Bultmann)6)은 요한복음이 영지주의의 구속자 신화(Gnostic Redeemer-myth)에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다드(C.H. Dodd)는7) 요한복음을 필로(Philo)가 대표하는 헬레니즘의 이원론에 비추어 설명한다.브라운(R.E Brown)은 “ 신약성서 시대에 이미 헬라적 요소가 있었다”고 주장한다.8) 그러나 성서와 유대의 사상적 근원을 더욱 강조한다.9)그러므서 예수가 지금까지 왔던 모든 사람을 능가 하는것 같이 ,요한의 사상도 모든 것을 능가 한다고 주장한다.10) 테 (Merrill C. Tenney)도11) 요 이 예수의 부활을 근거로 하여 이교도의 개념을 넘어서 새로운 철학을 시작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요한의 로고스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문제는 쉽지가 않다. 클라크(Gordon H. Clark)는12) 요한의 서언의 로고스(요 1:1, 14)는 태초에 말씀, 도리, 가르침, 마음, 하나님의 지혜(The wisdom of God)였다고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혜는 하나님이다. 말씀이 육체가 되셨고 우리가 그의 은혜와 진리의 영광을 본다 라고 설명한다. 또한 하나님의 지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깨우치게 하는 역활을 수행한다.13) 쿨만(Oscar Cullmann)은14) 요한의 서문에서 예수님 자신을 로고스와 동일화 했을 때, 그 ‘말씀’역시 생각치 않았다고는 거의 여길 수 없을 만큼 요한복음 전반에서 매우 중요한 역활을 한다. 그가 그렇게 했다는  추정은 예수께서 계시를 가져오실 뿐아니라 그의 품격안에 계시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빛을 가져 오시고, 동시에 그가 곧 빛이시다. 그는 생명을 베푸시고 그가 곧 생명이다. 그는 진리를 선포하고 그가 곧 진리이다. 그것은 로고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가 말씀을 가져오시는 것은 곧 그가 말씀이시기 때문이다라고 요한의 로고스의 역활을 설명한다.

요한의 로고스의 내용은 로고스가 태초에 계셨으며, 인간들을 깨우치게 하기 위하여 육신이 되어서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다. 그가 세상에 오실 때 빛과 진리와 계시로서 왔다는 것이다. 이제 요한에게 있어서 진리 자체인 예수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를 요구하고 있다. 요한은 세례 요한의 입15)을 통하여 예수를 믿게 하려함이라고 선언한다. 요한은 서언에서 빛을 영접하는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리가 주어진다고 선포한다.16) 그리고 요한은 세례 요한의 증거(고백)와 자신의 기록목적이 “그리스도를 믿게 하려함이며, 믿어 생명을 얻게 하려함”이라고 한다.17)

예수가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했던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주어지고 있다. 예수를 누구로 여기느냐? 그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우리들의대답은 기독교에 있어서 언제나 가장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고, 또한 그럴 것이다. 요한에게 있어서 위의 질문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는 예수의 부활을 경험했고 예수를 보았고 진리와 계시자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는 로고스란 단어를 사용하여 그가 경험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의 서언과 함께 그의 나머지 복음에 나타난 독특한 로고스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하여 연구의 수고를 감행해야 할 것이다.




B. 연구방법 및 범위


서언의 로고스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저자가 활동했던 환경과 저자가 영향을 받았던 배경을 신중하게 파악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저자가 사용한 로고스의 의미를 아는 것은 또한 저자의 의도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될 것이다.

본 연구는 저자가 활동했던 환경과 영향 그리고 저자의 신학적 배경을 살피기 위하여 문헌 연구에 의한 이론적 접근 방법을 시도 할 것이다.

제Ⅱ장에서 헬라세계와 유대적 로고스 개념들의 발전과 영향들을 살핀다. 그리고 이것이 요한의 로고스에 어떤 영향이 있는 지를 살핌으로 요한의 로고스의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한다.

제Ⅲ장에서는 요한복음 서언의 문학적 구조를 연구한다. 연구의 방법은 키아즘 이전의 구조와 키아즘 구조의 분석 비교와 키아즘의 기능을 살핌으로 각각의 특징에서 강조하는 주제를 찾는다. 찾아진 주제를 서언에 나타난 로고스와 연결하여 요한의 로고스 신학의 특징을 찾을 수 있는 준비를 한다.

제 Ⅳ장에서는 Ⅲ장에서 찾아진 주제들의 의미를 명확하게 함으로 저자의 의도를 이해한다. 저자의 의도를 상세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서언과 요한복음과의 관계성 속에서 연구를 할 것이며, 찾아진 주제의 이해를 위하여 주석적인 방법을 사용할 것이다.

제 Ⅴ장에서는 결론으로서 지금까지의 연구된 모든 내용을 요약하고 평가 할 것이다.  


Ⅱ. 로고스 개념들의 영향


A.헬라 세계의 로고스 개념과 영향


철학적 용어인 로고스는 세계 정신이나 우주의 혼과 같이 이해하였다.로고스는 모든 것과 관계 있는 원리, 즉 우주의 합리적 원리이다. 창조적 에너지이며 생각에 따라서는 모든 존재가 로고스에서 왔다고 해석이 된다.18) 

 1.헤라크리투스(Heraclitus:535-475 B.C.)

헤라크리투스에게서 로고스 개념을 처음으로 볼 수 있다. 그는 만물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만물유전설(Eternal Fluxion)을 주창하였다.19) 즉 모든 사물은 어떤 순간에도 영구적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흐른다 라고 표현하고 있다.20) 이는로고스는 사람과 세계의 존재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과 세계, 사람과 사람, 사람과 하나님, 이 세계와 천상 세계의 가교(bridge)와 이해의 가능성을 형성하는 연결원리(Connecting principle)이며, 체와 우주와의 통일성의 우주적 법칙(Cosmic Law)이며, 이 로고스가 사람들 안에서 신율(Oracular word)로서 존재하여 서로를 결속시켜 사회를 유지하게 하는 항구적 질서(order)이다. 그러므로 인간과 세계의 탐구는 그들안에 내재해 있는 로고스를 이해함으로 가능해진다.21)

종교적 입장에서 볼 때 헤라크리투스의 로고스는 만물에 침투되어 있음으로 범신론적이며, 불과 신을 동일하게 보는 특징이 있다.22)

2. 플라톤

 플라톤은 직접적으로 로고스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그러나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은 후기 철학적인 로고스 이론에 영향을 끼쳤다.23) 그는 이데아의 세계는 선이고 물질은 악하다는 이원론을 발전시켰다.

표1)희랍적 이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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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ꠐ  월등한 마음 

ꠐ 이데아의 세계 ꠐ 비가시적 실재 ꠐ   위의 세계   ꠐ<             

                                             ꠐ  영원한 실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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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ꠐ  영원한 육체 

ꠐ   현상 세계   ꠐ 가시적 실재   ꠐ  아래의 세계  ꠐ<             

                                             ꠐ  영원한 실재 

                                             ꠐ  의 복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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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이원론적인 구조에 의하면 인간의 열등한 육체안에 갇혀 있는 마음이 신과 합일하려면 사고, 명상 그리고 금욕을 통하여 이데아 세계의 최상층에 있는 최고의 선(The Highest Good), 목적(The End), 최고의 이데아(The supreme Idea)를 찾음으로 구원을 얻게 된다고 한다. 무지는 죄악이며 구원은 지식을 통해서 얻는다는 이 철학은 후에 필로에게 영향을 주어 선의 하나님과 열등의 물질 창조사이에 로고스라는 중보자를 도입케하여 그의 로고스론을 발전시켰으며 영지주의에 영향을 끼쳐 지식에 의한 구원과 왜곡된 기독론을 발생시켰을 것이다.24)


3.스토아 학파

스토아 학파의 아나라고라스(Anaragoras) 시대로부터 희랍 철학의 특성이었던 이원론에 대한  반론으로 발전되어졌다. 스토아 학파는 마음과 물질을 구분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은 둘다 같은 본질과 기원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은 똑같은 것을 그저 다른 것으로 본 것일 뿐이라고 보았다. 비록 그들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약간의 생각을 빌려 왔다 할지라도 그들은 헤라클레토스의 가르침을 형이상학의 기초로 삼았다. 로고스라는 이 단어는 그 시대의 문학으로 다시 돌아왔다. 로고스는 스토아 학파의 하나님이며 물질적인 세계의 사람의 영혼에 거주하는 것으로 표현되었다.25)

이 로고스는 내적 합리적 자질을 의미하는 내재적 이성과 내적 이성과 사상을 표현하는 언어(speech, word)인 이중성(duality)을 뜻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로고스는 세계혼인 신(God)이면서 세계 정신의 표현인 우주이다. 그들의 신관은 범신론(Pantheism)이며 로고스에 다른 신은 없는 것이다.26) 스토아 학파의 로고스는 우주안에 있는 모든 합리성의 원리이며, 물질속에 스며들어 작용함으로서 세계를 만들어내는 창조적 역활도 한다. 따라서 이 로고스 개념은 초월성과 내재성의 통합을 이루고 있다.27) 이러한 스토아 학파의 로고스 개념은 그 이전의 경우보다 요한 복음서안의 로고스 개념과 더 밀접해 보인다 할지라도 그 중심 배경으로 삼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서안의 로고스는 진정 “자기 땅에”왔다. 그리고 이것은 복음서 전체를 꿰 뚫고 있는 일관된 주제이다.28)


4.필로(Philo,B.C.20-A.D.54)

요한복음서의 저자와 거의 동시대 헬라주의적 유대주의 종교 철학자 필로는 그의 저서에서 로고스를 1,300회 이상 사용하고 있다.29) 그는 유대교와 헬라철학을 연결시키려고 시도 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로고스 배경에는 유대교적  맥락과 헬라주의적인 배경을 공유하고 있다.30) 그는 전 생애를 알렉산드리아에서 지냈다는 사실은 그의 저작에서 발견하는 일종의 종교적 고찰이 동시대의 특징적인 모습이었다는 것을 거의 확실히 한다. “그의 전승자들의 저작이 마지막 부분까지 사라졌다 할지라도, 사람들은 성서 속에서 희랍의 전체적인 철학적 교훈, 물리학, 심리학, 윤리학을 찾고자 한 이러한 전승자들이 얼마나 많았는가를 알기 위해서 또한 그의 작품을 철저히 검토해야 한다.31)

필로의 로고스 개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 특징들이 있다.32)

첫째 로고스의 인격이 모호하다. 그의 창조적 로고스는 창조자가 사용한 창조적 능력으로서의 도구이다. 비록 그가 로고스에게 하나님의 형상, 중보자, 대제사장, 하나님의 장자, 천사장, 두번째 하나님, 왕 등의 인격적 명칭을 부여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다분히 구약의 인물들과 알레고리적  동일시에 불과한 것이다.33)

둘째 로고스의 선재가 모호하다는 것이다. 비록 πρεσβυτατοs(가장 오래된 최연장자의)라는 형용사를 그것에게 붙인다 해도 창조 되었기 때문에 영원한 선재는 아니다.

셋째 요한복음의 서언은 로고스에서 생명과 빛 사이에 연결의 교리가 있다. 그러나 필로에게서는 구원론이 없기 때문에 그 관계가 나타나지 않는다.

네째 필로에게는 성육신의 교리가 없다. 그것에 관한 그의 사고가 희랍적인 이원론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무한하고 불변하는 하나님과 물질적인 세계와의 연결을 로고스로 보았다. 이것은 요한의 첫 문제에 대한 필로의 답이었다. 그러나 요한의 해답이 훨씬 더 충분하고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필로는 그 자신의 원리에 의해서 그 문제의 그리스도인적인 해답에 도달할 수 없었다.

그는 말하기를 “세 종류의 삶이 있는데, 첫째는 προs Θεον이고 둘째는 προσ Γεγεοιν(탄생:birth)이며, 세째는 첫째와 둘째의 혼합이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ζωη προs Θεον은 우리에게 전승되지도 않았고, 멀리서부터 오지도 않았다. 요한의 이성은 필로의 로고스개념이 성취할 수 없었던 것을 성취했다. 즉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였다”라는 요한의 진술은 필로가 사색을 통해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한 간격을 성육신을 통하여 해결할 수 있었다.34)

이상에서 헬라세계의 로고스 개념과 영향을 살펴보았다. 불트만35)은  지주의의 구속자 신화(Gnostic Redeemer Myth)가 요한복음의 서언에 영향을 주었다고 했다. 다드(C.H. Dodd)에게 있어서 요한복음은 필로가 대표하는 헬레니즘의 이원론에 비추어 설명된다고 했다.36) “신약성서 시대에 이미 강력한 헬라적 요소가 존재 했었다고 전제하면서도, 헬라의 철학 보다는 이미 팔레스틴에 편만해 있는 생각과 언어에 더 큰 영향을 받았다”37)는 브라운(R.E. Brown)의 표현은 주목할 만하다. 그것은 요한의 로고스 개념에 지배적인 헬라적 영향을 조심스럽게 반대하는 것이다.

클라인에흐트(H. Kleinecht)38)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요한의 로고스 개념에 헬라적 영향을 반대한다.

첫째 헬라 로고스는 사물 자체의 내적 법칙을 감지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계시이며 언제나 사물 자체를 지향하나 요한의 로고스는 하나님으로 부터 사람에게로 지향하고, 말씀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고 거하게 되었다(요1:14 “And The word became flesh and dwelt among us").

둘째 헬라 로고스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중보자가 아니다.

셋째 이 로고스의 사역이 역사적으로나 시기적으로 정해져 있지 않고 끊임없이 활동하고 창조하는, 인격적인 하나님의 결정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영원한 과정이다.

네째 스토아주의와 신플라톤주의에서 이 로고스는 세계가 되었고 세계이다 라고 설명한다.

한편 필로와 비교 할 때, 요한의 로고스는 천사장이 아니라 하나님(요1:1) 곧 구약에서 말하는 야웨 하나님(요12:41-42)이며, 추상적 원리가 아니라 인격자(요1:1,2;17:5)이고, 피조된 창조자가 아니라 자존자로서 창조자(요1:1-3;8:58)이다.

우리는 불트만이 주장하는 영지주의와 자이짼스타인에 의한 포이만드레스문서(Poimandres)의 영향도 살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상의 헬라적 사상(철학, 이교도)이 성서의 종교에 침투하여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것 보다 성서의 종교가 헬라적 이교에 더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또한 주목해야 할 것이다.39)


B.유대적 로고스 개념과 영향


요한의 중요한 사상적 배경이 예수시대의 팔레스틴 유대(Palesti- nian Judaism)라는 견해에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40) 또한 사해사본(Dead Sea Scrolls)의 발견 이래로 이 견해는 더욱 확고 해졌다.  유대교는 단일 체제와 거리가 있고 오히려 그것의 다양함은 요한 사상의 다른 측면을 이해 하는데 도움을 준다. 우리는 요한복음서의 서언에 나타난 로고스의 유대적 배경을 살피기 위해서 구약의 로고스, 랍비문학의 멤라(Memra),유대의 지혜문학, 쿰란 종파(Qumran Sectarian)들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


1.요한의 로고스와 구약성서

요한복음서에는 다른 복음서들이 지닌 것 보다는 많지 않지만 나름대로의 많은 문제들을 제기한다.41) 요한이 구약성서를 인용할 경우 직접 인용하는 경우가 거의 없고 증거본문(prooftexts)으로 구약을 사용하는 경우도 비교적 드물다. 요한은 구약성서를 인용할 경우 일정하게 칠십인역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42)

구약의 로고스 배경으로서 하나님의 말씀(           )을 들 수 있다. 히브리 언어에 있어서 말은 일, 사건, 행동을 의미한다. 즉 말과 행동이 결코 따로 분리 되지 않는다.43) 이러한 특징은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그의 말씀으로 창조했다는 데서 잘 나타난다(창1:3,6,9;시33:6-9;136:5:사42:5:45:18).

요한은 서문에서 창세기1장의 분위기에서 기록을 하고 있지만 구약의 말씀(하나님의 발언)에 큰 영향을 받은 것 같지 않다.44)

우리는 창조사건의 기록들에서 다음과 같은 표45)를 들 수 있다.

 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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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ꠐ 창 세 기   ꠐ히 브 리 서   ꠐ골 로 새 서    ꠐ요 한 복 음ꠐ

       ꠐ 1:1-3(시33 ꠐ1:2,10-12;11:6ꠐ 1:55ff        ꠐ  1:1-3    

       ꠐ :69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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ꠐ 시기  ꠐ  태초에(1: ꠐ 태초에(1:10) ꠐ 모든 창조물 보ꠐ  태초(1:1)ꠐ

       ꠐ   1)                     ꠐ다 선재함(1:15)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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ꠐ 창조자ꠐ 하나님이   ꠐ하나님(1:2)이 ꠐ 창조자는 아들 ꠐ 말씀=하나 

       ꠐ  (1:1)     ꠐ아들(1:10-12) ꠐ 임(1:16,능동태ꠐ 님과 함께 

                   ꠐ이            ꠐ 로 바꾸면)    ꠐ 계신 하나 

                                                ꠐ 님(1:1)   

ꠉꠏꠏꠏꠏꠏꠏꠏꠊ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ꠊ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ꠊ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ꠊ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ꠐ

ꠐ 창조  ꠐ 천지들(1:  ꠐ모든세계(1:2) ꠐ  모든 창조물( ꠐ  만물=그가ꠐ

ꠐ 범위  ꠐ 1)         ꠐ를,땅의 기초  ꠐ  1:15)=하늘과 ꠐ  없이된 것ꠐ

                   ꠐ와 하늘을(1:  ꠐ  땅에 보이는  ꠐ  이 하나도ꠐ

                   ꠐ10)           ꠐ  것들과 보이  ꠐ  없음(1:3)ꠐ

                                 ꠐ  지 않는 것들            

                                 ꠐ  (1:16)                  

ꠉꠏꠏꠏꠏꠏꠏꠏꠊ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ꠊ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ꠊ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ꠊ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ꠐ

ꠐ 창조의ꠐ가라사대(   ꠐ 그들로 말미암ꠐ  그로(아들) 말ꠐ  그로 말  

ꠐ 대행자ꠐ 하나님의   ꠐ아(1:2) 하나님ꠐ  미암아 (1:16)ꠐ   미암아(1ꠐ

       ꠐ 발언 1:3;  ꠐ의 말씀으로(                 ꠐ   :3인격  

       ꠐ 시33:6,9)  ꠐ발언,11:6)                   ꠐ   자이신  

                                                ꠐ   말씀)   

ꠉꠏꠏꠏꠏꠏꠏꠏꠊ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ꠊ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ꠊ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ꠊ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

ꠐ 창조  ꠐ 창조하니라 ꠐ 지 으 심     ꠐ   창조되었고(1ꠐ  지은바 되ꠐ

ꠐ 행위  ꠐ  (1:1)                   ꠐ    :16)       ꠐ   (1:13)  

ꠌꠏꠏꠏꠏꠏꠏꠏꠍ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ꠍ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ꠍ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ꠍ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ꠎ

앞의 비교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추리를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요한의 로고스는 인격자이므로 창세기 1장 및 구약의 하나님의 발언(fiat)과 동일시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요한이 로고스는 영원한 인격자이지 우주의 원리나 하나님의 발언이 인격화(personalization)된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요한은 당시의 선임자들의 영향을 받았을 뿐 아니라 성령의 가르침을 받았을 것이다(요15:26;16:13-15).

셋째 성령의 가르침과 예수 자신의 증언46) 에 의해 그가 구약의 야웨 하나님의 타자인 것을 깨닫고(요12:41-42;8:58) 이사야의 모든 예언이 이사야서 6장1절 이하의 여호와의 영향력 아래 있음을 근거하여 순환논법에 의해서 창조자(사41:4;43:10,13;46:4;48:12)47), 고난의 종이며 메시야로서의 구원자(사50장;52:12-13), 메시야이신 야웨로서의 심판주(사63:1ff;슥12장-14장)그리고 계시자48)이심을 충분히 이해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네째 구약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나 지혜가 야웨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대행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사실 인격자와 인격자의 이성이나 사상(로고스:λογοs)과 그 사상의 표현인 언어(로고스:   λογοs)는 불가분리의 본질적 관계가 있음으로 이 표현은 인격자의 행위와 인격의 연장이란 의미에서 정당할 수 있을 것이다. 계시는 계시자를, 진리는 진리 자체를 생명은 생명의 원천을, 심판은 심판자를, 구원은 구원자를, 표현된 말씀은 말하는 자를 나타내고 그 인격에서 이루어진 사건이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 그 인격자에게 진리, 빛, 생명, 계시, 말씀이란 칭호를 붙일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49)

요한복음 서언의 로고스 찬양시의 형태는 지혜문학에서 발견되는 지혜찬양시와 유사하다.50) 또한 그 내용에 있어서도 서로 병행된다. 슈나켄부르그(R. Schnackenburg)는 요한복음 서언의 로고스 찬양시의 주요 내용을 선재, 성육 그리고 거부로 보며, 이것은 지혜문학의 지혜개념과 병행됨을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요한복음 로고스 개념의 진정한 배경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51)  그릴 마이어(A. Grillmeier)는 구약성서의 지혜와 요한복음서의 로고스가 많은 특징을 공유한다52)고 하고 이 둘의 관련성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즉 양자는 태초부터 존재하며(잠언8:22;집회서24;요1:1), 하나님과 함께 있을 뿐만 아니라(잠언8:23-25; 집회서24:4 LXX,요1:1) 사람에게로 와서(잠8:31;집회서247:7-12 LXX,요1:14) 그들 중에 거한다는 것이다(집회서24:8 LXX, 요1:14). 그러나 이러한 문학적 의존성에도 불구하고 요한복음서가 “지혜”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로고스”를 선택한 것은 헬라어와 히브리어(σοφια-           )들이 여성형이고 그것은 영지주의에 적합하기 때문이라고53) 설명한다. 아직 우리는 지혜문학의 지혜와 요한복음서의 로고스와는 엄격한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지혜문학의 지혜는 요한의 로고스와는 달리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도 분명하지 않다. 또한 지혜서의 지혜는 요한복음서 처럼 하나님으로 불려지지도 않는다.54) 여기에 요한의 독특성이 나타나고 있다.


2.랍비적 유대교(Rabbinic Judaism)

유대교는 구약성서의 토대를 둔 것이지만 이것은 1세기 동안에 여러 모양으로 발전하여, 한편으로는 묵시문학으로 또 다른 한편으로는 랍비적인 사상으로 발전하였다.55) 아직도 묵시문학은 구약성서 중에서 예언자적인 것을 계승했고, 랍비적 사상은 법적인 것을 계승했다고 말할 수 있다. 율법과 예언서들을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듯이 묵시문학과 랍비문학도 분류시킬 수 없을 것이다.

신약성서의 묵시문학은 대개가 미래에 관심을 갖는다. 그것은 예컨대 요한 계시록이 천상의 예배를 생생하게 그대로 묘사하고 있을지라도 여전히 미래적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서는 현실의 베일을 벗겨준다는 점56)과 예수를 하늘에서 내려온 인자57)로 표현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요한이 유대교 묵시문학적58) 영 권으로부터 벗어나 있지는 않았음을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그가 묵시문학적 종말론을 철저하게 수정하면서 받아들였다59)는 바렛트의 주장도 타당한 것이다.

요한복음이 기록될 당시 랍비들의 사상은 이미 구전의 상태로 존재했 었다.60) 이것은 사회적 규범과 윤리로서, 혹은 종교 의식과 구약 성서의 주석으로 대중들속에 널리 퍼져 있었던 사상이다. 이러한 사상이 요한복음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율법에도 기록되었으니”(요8:17), “율법을 알지 못하는 무리”(요7:49)라는 표현은  그 당시 랍비들이 흔히 사용하던 표현이었다. 그리고 피고인이 재판장 앞에 설 때 발언할 권리가 있다는 것61)과 죄의 성립을 반드시 두 사람이상의 증인이 있어야 한다는 형사법(요8:17)에 관한 사실은 그 당시 유행했던 랍비적 해석 방법이다. 또한 안식일 준수와 할례를 중시하는 규례(요7:22)와 안식일날 자리를 들고 가면 죄가 된다는 사실(요5:10)에 대한 저자의 랍비적 율법 해석 방법이었다.62) 위의 사실로 볼때 묵시문학과 랍비 유대교는 요한복음 서언의 배경으로서 중요한 요서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이것들을 간과할 경우 중요한 것을 그르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유대교의 전부인 것은 아니다63)라는 사실을 우리는 더욱 주목해야 한다.


3. 쿰란 문서(Qumran Texts)

사해 두루마리(Dead Sea Scrolls)들이 발견되기 전까지 팔레스틴에서의 유대교 종파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었다.64) 쿤(K. G. Kuhn)은 “이러한 새로운 본문들 속에서, 우리들은 요한복음의 원래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그 원래의 상황은 ..... 영지주의적 구조를 가진 팔레스틴의 유대교의 종파적 경건성이다.”65) 라고 주장한다. 브라운은 이 관계가 보다 자세하게 규명될 수 있다고 생각 하였다.66)

요한복음서와 쿰란 문서는 다같이 이원론의 배경이 있다.67) 여기서 “이원론이라는 말은 수정된 이원론(modified dualism)이다. 즉 우주는 두개의 상반된 요소에게 지배를 당하고 있는데 그들은 모두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지배아래 있는 것이다.”68)

우리는 브라운의 이원론에 대한 비교69)를 통하여 요한의 서언과 쿰란문서의 차이를 볼 수 있다.

첫째 쿰란 문서는 창조에 관하여 성서적인 교리를 가지고 있다. 훈련교본(The Manual of Disciple;IQS)3:15 “지금 있는 것이나 장차 있을 모든 것이 지혜의 하나님으로 부터 생겨 났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의 뜻에 의하여 정하여진 것이며, 그가 없이는 아무것도 되어지는 것이 없다.” 이것은 요한복음 서언에 있는 말과 아주 흡사하다. 그리고 쿰란 문서는 선한 세력을 지배하는 영과 악한 세력을 지배하는 영이 다같이 창조 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 요한복음 서언은 침묵을 지킨다.

둘째 쿰란 문서는 요한복음 서언과 같이 빛과 어두움, 진리와 패역의 대립이 있고 각각 인격을 가진 영도자가 있어 그 양세력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는 빛의 세력의 영도자가 그리스도 곧 창조된 일이 없는“말씀” 자체이시다. 쿰란 문서에 있는 빛의 영도자는 창조된 “빛의 천사”로 나타난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어두움에 대하여 자주 말하며 마귀 혹은 사탄이란 말을 사용하는데, 쿰란 문서는 어두움의 세력의 영도자, 어두움의 세력의 땅, 또는 어두움의 세력의 천사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세째 그 두세력의 투쟁에 관해서도 양자가 거의 같은 사상을 가지며 결국은 빛이 승리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그리스도가 빛의 세력의 영도자로서 이미 어두움을 이기시고, 참 빛을 버리고 있다. 쿰란 문서에 의하면 승리는 아직 미래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70)

네째 쿰란문서에 의하면 이 두세력의 사람들은 각각 어느편에 속하여 빛의 아들이든지, 그렇지 않으면 어두움의 아들 노릇을 한다. 이것은 운명이어서 사람들이 제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 같이 말하고 있으나, 어떤 곳에서는 사람이 마음대로 한편을 택할 수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요한복음에서도 역사의 사람들이 빛과 어두움 중의 어느 한편을 자유로 택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71)

다섯째 쿰란문서와 요한복음은 거의 같은 모양으로 선한 사람의 특성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어떻게 사람을 빛의 세력에 들게하느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그들의 견해가 매우 다르다. 즉 쿰란 사회에 있어서는 그 사회가 가르치는 교훈을 받아들이고 복종하는데 있다면, 요한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데 있다고 가르친다.72)

킴멜(W.G. Kummel)은 요한복음과 쿰란문서의 유사성들이 존재하는 것과, 요한복음의 곳곳에서 보이는 표현들이 다른 곳보다  오직 쿰란에서만 발견 된다고 하는 것(μαρτυρειν τη αληΘεια 요5:33, “진리에 대한 증거” IQS 8:6)73)을 지적 하며, 분명히 해야 할 사실은 쿰란 문서들과 요한 복음 사이의 행들은 대부분의 경우에, 다른 초기 유대교 문헌에서도 발견되며, 특히 묵시 문학에서 발견되었고, 또한 개념적으로 복잡한 이원론은 두 문서들에 있어서 전혀 다르다고 한다.74)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요한복음의 신비주의적인 기독론과, 그것과 관련된 영지주의화한 이야기들, 즉 “위로부터의 오심”과, “위로부터 탄생하심”에 대한 이야기나, ελω  ειμι진술들은 쿰란과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요한복음과 쿰란 공동체가 공통된 배경을 갖고 있지만 쿰란의 사상 세계가 요한의 사상 형태의 원래적인 배경일 수는 없다는 정도로 조정이 되어야 한다75)고 주장한다.

이상에서 우리는 쿰란문서가 유대교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았다. 반면에 요한복음은 유대적 입장을 수용하나 그 맥락을 뛰어넘은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이제 우리는 로고스 개념들의 영향을 정리하면서 헬라세계의 로고스 개념과 유대적 로고스 개념의 차이를 구별 해야 할 것이다.사상과 언어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에 있다. 히브리어      와 헬라어의 λογοs의 의미를 집중적이고 분산적인 것으로 분석한 보만(Bowman)의 비교76)는 매우 인상적이다. 그는 동방이 그 기원인 말씀의 개념이 구약과 유대교에 기인한다고 해서 헬라 세계의 중요성을 경시해서는 안된다고 한다.

표3)

           dabar                       logos

           drive forward            gather,order


               speak         speak,reckon,think


                      Word


              reason          deed


보만은 구약의 말씀은 행동에 강조를 두고 있고 헬라의 말씀은 존재(being)에 강조점을 두는 차이가 있다고 분석한다. 그는 이것을 소리에 비유하여 그 소리를 함께 들으면서 그 특징을 비교해야 한다고 제안한다.77)

라이트 푸트(R.E. Lightfoot)도      와λογοs를 비교하면서 현저한 차이점을 지적한다.       가 생명의 표현을 하는데 있어서 의지와 행동을 강조한다면, λογοs는 지성과 사고에 강조점을 둔다.

표4)          

꠆ꠏꠏꠏꠏꠏꠏꠏꠇꠏꠏꠏꠏꠏꠏꠏꠏꠇ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ꠇ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ꠇ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ꠈ

       ꠐ 활동적 ꠐ 이상향을 ꠐ 미래의 희망  ꠐ 세상을 변화 시킨ꠐ

               ꠐ 향한                   ꠐ 다              

ꠉꠏꠏꠏꠏꠏꠏꠏꠊꠏꠏꠏꠏꠏꠏꠏꠏꠊ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ꠊ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ꠊ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

ꠐ λογοs ꠐ 정적   ꠐ 의지를   ꠐ 현재적인 통  ꠐ 세상을 이해하다 

               ꠐ 실행     ꠐ 찰                             

ꠌꠏꠏꠏꠏꠏꠏꠏꠍꠏꠏꠏꠏꠏꠏꠏꠏꠍ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ꠍ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ꠍ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ꠎ


우리는 두 사람의 분석을 통하여 헬라 세계의 로고스 개념과 유대적 로고스 개념에 엄격한 차이점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요한복음 서언의 로고스는 유대적 로고스 개념과 헬라 세계의 로고스 개념이 함께78) 있으며, 요한만의 독특한 특징79)이 있음을 볼 수 있다.




C. 요한의 로고스와의 관계


우리는 요한이 사용한 로고스의 이해를 위하여 헬라 세계와 유대적 로고스 개념의 영향을 살펴 보았다.

로고스의 출처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다양하다. 스콧트는 필로의 영향에 불트만은 영지주의의 구속자 신화에, 구스리는 유대 사상에 요한의 로고스의 출처를 돌린다. 다드는 로고스의 출처를 구약성서의 고유한 유대적 요소를 지적하면서 그 배경을 헬라적 유대교라고 주장하다. 브라운은 서언의 로고스 개념이 어떠한 희랍 사상에서 연유했다고 보기 보다는 성서와 유대의 사상적 근원에서 연유했다고 주장한다. 로고스 개념의 기원과 내용에 유사성이 있으나 오히려 성서와 유대적 로고스의 특징이 강함을 볼 수 있다.

요한 당시 로고스란 말은 유대 사회나 희랍 사회에서 서로 유사점과 상이점을 가지고 그들의 철학내지 종교적 진리를 표현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의 진리를 증거하는 하나의 토양으로서 요한이 사용하였다고 보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런 사상적 영향을 받아 복음화 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받아들이는 것은 곤란한 것 같다.80) 그것은 요한이 자신의 자료활용과 문학적 기법을 통하여 요한만의 독특한 특징81)으로  자신의 의도인 예수 그리스도를 로고스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은 헬라 세계와 유대적 배경에서 감히 생각할 수 없었다. 로고스의 선재와 성육을 선포하여 자신의 의도를 표현했다.

요한은 헬라인에게나 유대인에게나 한가지로 예수는 아버지의 최종적인 통역자라고 주장한다. 요한의 마음에는 예수가 하나님의 최종적이고 완전한 계시였다. 우리는 요한이 로고스라고 표현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의 진정한 주석을 발견할 수 있다. 위의 설명은 요한이 선택한 로고스의 의미가 다음을 설명하는데 매우 적절함을 보여준다.82)

첫째, 하나님과 자연의 하나됨

둘째, 천지 창조에 로고스의 참여

셋째, 계시의 중생자이신 로고스로서의 예수, 하나님과 함께 태초에 있었던 말씀

그리고 히브리인에게는 창조와 예언자의 사역으로 하나님의 행위를 표현하였고, 헬라인에게는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중재를 제공해 주는 말씀은, 하나님 자신과 하나인 것을 보여 주었고, ο λογοs σαρζ εγεγετο를 긍정하는 역사적 예수와 관련을 맺는다(요 1:14).

계시자로 온 예수는 세상의 어두움을 물리치는 생명의 빛으로 왔다(요 1:4-5). 그리고 그 빛은 세상에서 계속적으로 비췸으로(요 1:9), 언제나 진리를 알 수 있는 기회를 사람들에게 제공한다. 유대 민족은 구약성서 예언자들을 통한 특별한 계시로 “자기의 백성”이라고 불리운다. 그러나 그가 친히 가져온 계시를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요 1:12). “이들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다(요 1:13).”

그래서 요한은 자연, 역사, 양심에 뿌려진 흩어지고 파괴된 어렴풋한 것들이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의 영광 곧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으로 집중되어 촛점이 맞은 것처럼 뚜렸해졌음을83) 서언과 나머지 복음서에서 계속 증언하고 있다.

  우리는 요한의 신학의 특징인 로고스를 본 논문의 3장과 4장에서 더욱 깊이 있게 다룰 것이다.



Ⅲ. 서언의 구조


예수의 사역에 깊이 관여한 요한은 사건의 현장을 생생하게 묘사한다84). 요한복음의 목적을 명백하게 하기위해 원초적인 대상자를 알아야하는 것 처럼 요한의 신학을 바르게 알기 위해서 요한이 기록한 사건의 장소, 시간, 인물을 중심으로 하는 구조를 알아야 한다.

전통적인 방법에 따른 요한복음의 내용 분해는 21개장(Twenty-one chapters)으로 구분한다. 그러나 키아즘의 구성으로 분해하면 21개의 연속(Twenty-one sequences)으로 더욱 치밀한 짜임새의 구조를 발견한다. 이와 같이 21개의 연속으로 분해하고 보면 장소, 시간, 주제, 상황이 더욱 맥락과 일치하여 모순이 없다.85)

게르하르트의 주장에 의하면, 현재의 요한복음은 절대로 저자가 한 사람이라는 것과 전혀 내용의 이탈이 없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교차대구의 구성으로 증명된다. 그리하여, 신약안에 자리를 정한 요한복음에서 간음녀의 용서와 중요하지 않은 몇 군대의 단서를 제외하면 전부가 원 저자의 글일 뿐만 아니라 마치 절단 할 수 없어 통으로 하나를 제비뽑아야 했던 신비한 속옷(요19:23-24:유일하게 요한복음에만 나옴)과 같다고 오래 전에 결론을 내린 스트라우스(Strauss)의 말 그대로라는 것이다.86)

게르하르트는 요한복음을 단일 저작에 의한 것으로 파악하여 상세하게 교차 대칭적으로 분석한다. 그는 서언이 자체 본문의 중심 주제를 가지며, 그 주제가 본문 안에서 발전되어 진다고 간주하여 서언을 독립시킨다.87)

우리는 요한복음 서언의 로고스를 연구하기 위하여 교차대구 병행구조와 키아즘구조(chiasm sturcture)이전의 것을 함께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각각의 구조가 각각의 특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들의 구조속에서 요한복음서의  로고스를 더욱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 있다.


A. 키아즘 이전의 구조 분석


1.로고스 찬양시

요한 서언은 요한복음 전체의 주제장으로 요한복음 뒤에 소상하게 개진할 내용을 장엄한 시적 표현으로 요약하고 있다.88) 사실 시의 행처럼 재조정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버나드(Bernard)는 헬라어 운문에서 그것을 시도하였고 리(Rieu)는 영문번역에서 그렇게 하였다. 또한 시의 속성이 이 본문에서 발견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89) 브라운은 그의 책 “The Gospel According to John"에서 학자들의 서언 구분을 소개하며 자신의구조도 다루고 있다.90)

1.Bernard        accepts  1-5, 10-11, 14,      18.

2.Bultmann       accepts  1-5, 9-12b, 14, 16,

3.De Ausejo      accepts  1-5, 9-11,  14, 16,  18.

4.Kesemann       accepts  1, 3-5, 10-12,

5.Schnackenburg  accepts  1, 3-4, 9-11, 14abe, 16,

7.Brown          accepts  1-2, 3-5, 10-12b, 14, 16,


바렛트는 학자들의 여러 견해에 대하여 “시적 표현으로서의 서언을 나누고 구조를 만드는 학자들의 산문과 운문을 구별하는 능력이 의심스럽다”고 한다. 91) 그의 지적은 이색적인 지적이라 생각한다.

위의 언급한 학자들을 모두 언급할 수 없기에 대표적으로 불트만과 브라운의 특징을 살펴 보려고 한다.

불트만은 서막의 로고스 찬양시의 기원을 기독교 이전의 세례자 요한에게 그 기원을 둔 영지주의 세례자 종파의 찬양시(Gnostic-baptismal sect Hymn)라고 주장했다.92) 그러나 불트만이 주장한 이런 기원 가설은 대부분의 학자들에게서 거부되고 있다. 세례자 종파의 존재 유추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자신들의 세례를 수행하면서 요한과 더불어 종파를 이루었다는 명백한 증거가 없다.93) 더구나 세례요한이 신적 존재로 예배되고 찬양시의 대상이 되었다는 증거는 더욱이 없는 것이다.94)

브라운은 불트만의 찬양시의 세례자 종파 기원 가설을 부정하면서, 서막의 찬양시의 지지 기반을 솔로몬의 송가(odes of Solomon)로 알려진 기독교 반-영지주의 찬양시(christian semi-Gnostic hymn)에서 발견했다. 95) 이또한 그의 생각은 요한 공동체가 헬레니스틱 공동체(Hellenistic Community)라는 기본 가정에 근거하고 있다.96) 그러나 여기에 대한 반대 증거가 많이 제기되고 있다.97) 많은 학자들이 상세한 분석과 검토를 통하여 서막의 로고스 찬양시가 유대이즘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98), 또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1차적 독자는 유대교적 기독교인이라 한다.99) 결국 브라운이 주장하는 것 처럼 서막의 찬양시가 요한복음서 기자의 손에 의하여 쓰여진 것이아닌 원래 작성되어 있던 찬양시를 요한복음서의 서언으로 채택한 것이라고 할 때, 이러한 채택을 시도한 최종 편집자의 의도를 알 수 없으며, 그가 이 찬양시를 왜 요한복음의 서언에 위치시켰는가 하는 질문에 대답해야 될 것이다. 그러나 브라운은 이 문제에 관해서 상세하게 다루지 못하고 있다.

서언을 찬송시로 보는 학자들과 브라운의 견해에 의하면 서언을 나누고 구조를 만드는 학자들의 산문과 운문을 구별하는 능력이 의심스러울 뿐 아니라, 서언에 나타난 요한의 증거(요한1:8-8, 145)들이 서언에서 완전히 제외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세례자 요한의 입을 통하여 예수를 증거하려고 했던 저자의 의도를 보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 학자들의 상세한 분석과 견해들 속에서 다양하며 상이한 견해들을 보여주지만, 이들의 공헌 또한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들의 연구의 공헌은 로고스 찬양시의 중심이 기독론(The word become flesh dy 1:14)을 제시해 주었다100) 는  것이다. 본 논문의 Ⅳ장에서 “성육신”을 서언의 로고스 신학의 중요한 핵심으로 다룰 것이다.


2. 두 개의 찬양시

두개의 찬양시를 주장하는 학자로 페인트(John Painter)가 있다. 그는 로고스 찬양시는 요한복음서 기자가 사용하기 전에,  먼저 종파적 유대교인들에 의해 만들어져 이것이 바울 계열의 헬라적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만들어져 이것이 바울 계열의 헬라적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율법과 은혜를 대조시킨 부분이 서언에 편집되어 들어 갔고, 그 후에 복음서 기자에 의해 재 편집되어 요한복음서의 서언으로 쓰이게 되었다고 한다.101) 페인트는 서언의 기원이 다른 두개의 시, 즉 유대교의 지혜 찬양시(Judaism wisdom hymn:1-14c)와 바울 계열의 헬라 기독교 공동체 찬양시(Pauline Hellenistic Christian Community:14d-18)가 편집되어 함께 들어 갔다고 한다.102) 그러나 모세의 율법과 성육신한 로고스를 은혜와 대조하는 것은 바울 계열의 헬라 기독교로 부터의 영향이라기 보다는 요한공동체와 유대교 회당의 대립103)으로  설명될 수 있다.

위의 주장은 서언 안에서 구분되는 두 부분이 있다는 시각을 열어주었다는 점에서 그 나름대로 공헌을 인정할 수 있다. 그리고 페인트도 요한복음 서언의 중심을 1:14절에서 선재 로고스와 성육신한 로고스를 말하고 있다.


B.키아즘 구조


1.키아즘의 중심축(pivot)

이 방법은 서언에서 사용된 자료분석 보다는 서언의 현재 형태 구조에 1차적으로 관심을 둔다.104) 이러한 연구 방법을 주장하는 학자들로는 룬드(N.W. Lund)105) 보이스마드(M.E. Boismard)106) 쿨퍼(R.A. Culpper)와 이상훈 교수 같은 학자들이 있다. 본 논문에서는 위의 학자들을 중심으로 키아즘의중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

현대 키아즘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룬드는 서언의 구조 를 다음과 같이 구성하였다.



A.(vv. 1-2)

  (영원한 말씀과 하나님)

 B.(vv. 3-5, 9-10b)

   (말씀의 세상과 구약 사람들과의 관계)

  C.(vv. 10c-12a)

    (역사적 말씀의 영접과 거부)

   D.(v.13)

     (참과 거짓의 자녀들)

  C'.(v.14)

    (역사적 말씀이 세상에 거하시고 사람들에게 보여짐)

 B'.(vv.16-17a)

   (말씀의 세상과 신약사람들과의 관계)

A'.(vv.17b-18)

  (아버지의 품에 있는 영원한 말씀)

룬드는 13절을 키아즘의 중심축(pivot)에 둔다.107)

보이스마드는 서언의구조를 다음과 같이 구성했다.

A.(vv.1-2)                          A'.(v.18)

 (하나님과 함께 있는 말씀)            (아버지 품속에 있는 아들)

B.(v.3)                             B'.(v.17)

 (창조 사역에서의 그의 역활)          (재창조 사역에서의 역활)

C.(v.4-5)                           C'.(v.16)

 (인간을 향한 선물)                   (인간을 향한 선물)

D.(vv.6-8)                          D'.(v.15)

 (세례 요한의 증거)                   (세례 요한의 증거)

E.(vv.9-11)                         E'.(v.14)

 (말씀이 세상으로 오심)               (성육신)

                      F.(vv.12-13)

                       (성육신한 말씀에 의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됨)

보이스마드는 12-13절을 그의 키아즘 구조의 중심축에 둔다.108)

쿨페퍼는 서언의 구조를 다음과 같이 구성했다.

A.(vv.1-2)                          A'.(v.18)

 (하나님과 함께있는 말씀)             (하나님과 함께있는 말씀)

B.(v.3)                             B'.(v.17)

 (창조 사역)                          (은혜와 진리)

C.(vv.4-5)                          C'.(v.16)

 (생명)                               (은혜)

D.(vv.6-8)                          D'.(v.15)

 (세례 요한의 증거)                   (세례 요한의 증거)

E.(vv.9-10)                         E'.(v.14)

 (성육신)                             (성육신)

F.(v.11)                            F'.(v.13)

 (말씀과 자기 백성)                   (말씀과 자기 백성)

G.(v.12a)                           G'.(v.12c)

 (말씀의 영접)                        (말씀의 영접)

                     H.(v.12b)

                      (하나님의 자녀가 되다.)

쿨페퍼는 12b를 그의 키아즘 구조의 중심축으로 본다.109)

그리고 서언의 해석을 a b c b'a'의 구성으로 해낸 게하르트의 공헌을 인정하는 이상훈 교수는 서언의 구조를 다음과 같이 구성한다.

(a) vv.1-8                          (a') vv. 15-18

v.1 태초에                          v.15 나보다 앞서

v.1 말씀이 계시니라                 v.18 나타내셨다.

v.1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v.18 아버지 품속에

v.1 말씀이 하나님                   v.18 독생하신 하나님

v.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v.17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

v.4 생명과 빛                            스도로 말미암아

v.6-8 요한이 증거하러 오다.         v.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

(b) vv.9-11                         (b') v.14

v.10그가 세상에 계셨다.             v.14a 말씀이 육신이 되어

v.11 자기백성이 영접치 아           v.14bc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니하였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c)vv. 12-13

                            v.12 하나님의자녀가 될 권세

이상훈 교수는 12-13절을 그의 키아즘 구조의 중심축으로 본다.110)

키아즘의 구조를 통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얻을 수 있다. 학자 마다 다소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키아즘 구조는 중심을 12절과 13절에 둔다는 사실이다.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키아즘 이전의 구조에서 “말씀의 선재”와 “말씀의 성육”과 키아즘 구조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중심인 것을 알 수 있다. 본 논문은 Ⅳ장에서 이것들을 중심으로 논할 것이다.


2.서언의 기능

요1:1-18의 기원과 원래적 형태에 대한 최근의 포괄적인 논의는 음절에 맞추어 구성된 로고스 송가가 복음서 기자에 의해 확대되어 복음서의 서문으로서 개작 되었다는 견해와 서문이 하나의 단일체이며 복음서 기자가 작성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견해가 있다.111)  저자의 주장을 대표하는 사람은 스미드(D.M. Smith)의 훌륭한 해설과 논의를 참고로하는 불트만이다. 그의 이론은 주석학적, 신학적 고찰들에 의해 좌우된다.112)  바레트는 “저자의 의도”를 강조하는 린다스(Lindars)와 ‘이음새 없는 옷’의 상징으로서 요한복음을 주장하는 스트라우스의 입장을 받아들인다.113)  선제상의 확고한 통일성에대한 인상이 본문 배열이 잘못되었다는 이론들이나 편집 이론들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그 이유는 요한복음의 키아즘이 이 문제를 해결하고 있기 때문이다.

객관적인 사실보다는 영원한 진리에 관심을 두며, 역사보다는 신학에관심을 가진 요한복음의 서언은 보편적으로 알려진 범주를 암시하고, 보편적인 흥미를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요한의 서언은 누가가 어떻게 누가복음을 쓰게 되었다고 설명하는 머리말(Preface) 이상의 기능인 요한복음 전체를 어떻게 읽고 어떻게 이해 할 것인가 하는 방향을 제시 한다.114)  이상훈 교수는 요한의 서언이 “예수의 신성과 선재와 창조행위와 그리고 예수가 구속사역의 주역임을 그리고 특히 예수의 인격을 ‘말씀’으로 천명한 이 주제들은 당시 요한 공동체의 신앙이었음을 증거하여 준다”115) 고 말한다. 요한의 서언은 마치 잘 훈련된 오케스트라를 힘차게 그리고 세밀하게 인도하는 지휘자와 같은 기능을 보여준다.여기에는 한 치의 오차도 없으며,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다만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로고스의 의미 즉 요한의 로고스 신학을 어떻게 이해하며, 저자의 의도를 어떻게 읽을 것이가 하는 것이다.


Ⅳ. 로고스 신학


A. 서언과 요한복음과의 관계 


1. 로고스와 다른 표현들

우리는 서언의 구조 분석을 통하여, 서언의 주제가 로고스 기독론(로고스의 선재, 로고스의 성육)과 로고스를 믿는자임을 살펴 보았다.116) 그리고 서언의 기능에서 요한복음의 서언이 주제장으로서 요한복음 전체를 어떻게 읽고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방향117)을 제시하고 있음을 살펴 보았다.

서언과 요한복음과의 관계는 독립적인 것이 아닌 삼각형의 세각처럼 필수적인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서언이 요한복음의 기독론과 관계가 있다는 것은 여러가지로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테니(Tenney)가 서언을 크게 두가지로 작게는 일곱가지로 나누는 것118)처럼  서언과 요한복음과의 관계를 역활 중심으로 살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로고스 기독론과 같은 개념으로 간주되는 ‘인자’(The Son of man)119)  ‘그리스도’(Christ)120), 둘째 ‘하나님의 어린양’(The Lamb of God dy1:29, 36), 네째 ‘하나님의 아들’(The Son of God)121), 다섯째 ‘이스라엘의 임금’(The King of Israel)122)으로  나타난 다른 표현들을 통하여 서언과 요한복음과의 관계를 볼 수 있다.

한편 스몰리(S.S.Smalley)는 요한복음의 첫장은 전체적으로 요한복음서 전장의 축소판인 것 같이, 그 복음서와의 관련된 전체 구원 역사의 흐름을 요약한것 같이 보인다123)고 한다. 이같은 인상은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인명, 빛, 지명들의 보편성에 주의를 집중시킬 때 더욱 강해진다. 예를 들어, (유대교 역사 및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한결같이 중요한) 모세, 엘리야, 세례자 요한등과 같은 대표적 인물들이 등장한다. 뿐만아니라 요셉, 안드레와 베드로, 빌립, 그리고 참 이스라엘 사람 나다니엘 등도 나온다. 보다 추론적인 입장을 취할 경우, 요한복음 서언은(그 복음서 자체와 마찬가지로) 선재적이고  역사적인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현존(presence)에 지배되고 있다.124)

마찬가지로 요한복음 1장의 지명들도 더 넓은 배경, 아니 실지로 무한한 배경을 시사해 준다. 우리는 여기서 북부(갈릴리, 벳새다, 나사렛 등) 및 남부(예루살렘과 요단 건너편 베다니)를 망라하는 팔레스틴의 지명들을발견 할 수 있다. 또 한편으로는 하늘과 땅이 한 가지로 서언과 그 이후에서의 요한 서술의 배경을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125)고 주장한다.

  요한의 서언과 나머지 요한복음의 관계에서 더욱 선명한 사실은 예수의 신성을 말해주는 일곱가지 기적126)과 예수의 일곱가지 담화127), 그리고 예수의 자기천명(εγω ειμι)128)를 의해서 서언의 구체적인 표현을 발견할 수 있다. 이상의 사실들을 종합 해보면 다음과 같은 분명한 사실이 확인 된다.

표5)

a. 서언의 로고스                          a'. 다음장의 로고스

꠆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ꠈ

ꠐ1.선재(태초에)        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   1’선재 하나님과 함께) 

ꠐ (1:1-5)                                 (1:30;5:18;8:56:10:30;ꠐ

ꠐ                                          17:5)                 

ꠐ2.성육(육신이 되어)   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   2’성육(곤하여)        

ꠐ (1:14)                                  (4:7)                  

ꠐ3.영접(하나님의 자녀) 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   3’믿는자(생명)        

ꠐ (1:12-13)                               (3:16;8:29;20:27-30)  

ꠌ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ꠎ


우리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a)서언의 로고스                        a')다음자들의 로고스


             1.선재                            1.선재


           λογοs                              λογοs


2.영접               3.성육          2.성육            3.믿는자


요한은 자신이 보고, 느끼고, 경험한 예수를 서언에서 간결하고 정확하게 소개하며, 서언의 다음장에서도 서언의 내용을 완벽하게 설명하고 있다.

카힐(P.J. Cahill)이 “서언의 로고스가 요한복음의 중심(Center)이며, 여기로부터 복음서의 모든 의미와 내용이 흘러 나온다”고 본 것은 지나친 것이 아니다.129) 그러므로 서언과 요한복음 나머지 부분에서 기독론적 칭호의 변화가 있다 할지라도 기독론적 구조와 기독론적 역활은 일관되게 나타나며 서언에 이미 그 기본 구조가 잘 나타나 있음을 볼 수 있다.


2. 로고스 기독론에 대한 세례 요한의증거

서언의 로고스 이해에서 배제 할 수 없는 사실 중 하나가 요한복음의 저자가 왜 세례요한의 존재를 등장시켰으며, 셰례 요한을 통하여 저자의 의도를 전달하려 했던 저자의 의도와 세례 요한의 증거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해야 할 것이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세례 요한을 빛에 대한 증거자와 빛에 대한 고백자로 등장시킨다.130) 저자는 6-8절에서 세례 요한은 빛에 대한 증거자로, 사실에 대한 전달자로 등장 시킨다.131)

모리스는 요한복음에는 예수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는 이가 일곱이 있다고 주장 한다. 그 증거와 내용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132)

첫째 하나님 아버지(성부) 자신의 증거 (5:31,34,37;8:28)

둘째 그리스도 자신의 증거 (3:11,32;8:14,18,37)

셋째 성령의 증거 (15:26-27,16:14)

네째 구약성서의 증거 (5:39,40,46)

다섯째 예수의 사역과 무리들 (5:17,35;10:25;14:11,15:24;12:17)

여섯째 세례 요한의 증거 (1:7-8,15,32,34;3:26;5:33)

일곱째 제자들의 증거 (15:27;19:35;21:24)

모리스는 이들의 간증(증거)에는 진리의 실증이 요구된다고 본다.133) 그래서 우리가 북음서를 읽는 중 결코 기피할 수 없는 의식은 저자가 신뢰하고 있는 사실을 집필 했다는 진지한 사실이다. 자기가 집필하고 있는 내용은 전부 충분하고도 우수한 증거가 있임을  줄기차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세례 요한의 위치는 예수의 위치와 비교되면서 등장 된다. 세례 요한이 보냄을 받은 사람( εγενετο ανθρωποs)으로 6절에서 나타난다. εγενετο는 부정과거형으로 보냄을 받았다는 의미다. 함께 3절에서는 지음을 받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세례 요한이 지음을 받아 보냄을 받았다는 것은 1절의로고스의 <ην-being>과 대조되어 그리스도의 영원적 존재에 비해 그의 피조적 존재를 말한다.134) 그러나 그의 존재적 위치는 하나님께로 부터 보내심을 받은 신적인 근거가135) 있다.

저자 요한의 깊은 사려는 세례 요한이 예수께만 해당되는 위치와 동등히 서 있을 수는 없으나, 그러나  요한의 진정한 위대성이 밝히 드러나야 한다고 하는데 있었다. 결국 그의 사명은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신적인 근원의 것이라는 것이다.136)

세례 요한의 역활은 자신을 부정하면서 예수를 높이는 역활을 한다.137) 이것을 다드는 공관복음과 비교하여 요한의 특징으로 지적한다.138)


표6)

  a)공관 복음                         b)요한복음

꠆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ꠈ                  ꠆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ꠈ

ꠐ Jesus is not                      ꠐ John is not        

ꠐ John redivivus                    ꠐ Messiah            

ꠐ Elijah                            ꠐ Elijah             

ꠐ a prophet                         ꠐ The Prophet        

ꠐ Jesus is                          ꠐ John is The voice  

ꠐ Messiah                           ꠐ of one crying      

ꠌ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ꠎ                  ꠌ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ꠎ

공관복음이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증명하여 강조하고 있다면, 저자 요한은 세례 요한이 자신의 입을 통하여 자신이 메시야가 아니라고 고백하며 예수가 메시야요 그리스도임을 고백하는 역활을 했다.139) 그것은 당시 세례 요한이 중요한 위치에 있었고 종교적으로 중요한 역활과 영향력을 행사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140) 세례 요한은 충분히 메시야로 또는 예언자로 간주될 정도로 예수와 비교가 되는 중요한 역활을 했었다. 그래서 모리스는 세례 요한이 사람들의 이목을 예수에게로 인도하는 훌륭한 역활을 하였다고 주장한다.141)

세례 요한의 증거 내용은 이미 그의 역활에서 본 것처럼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가 ‘빛’이라는 사실142)을 증거하였다. 그 ‘빛’은 선재하신 말씀이며 친히 세상에 오신 성육의 말씀이었다.143) 그 빛이 세상의 죄를 속하실 구세주144)이심을 고백 하였다.

세례 요한의 증거의 목적은 저자가 요한복음의 집필 목적이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함 ....”(요20:31)이라고 고백한 것과 일치한다.저자 요한은 세례 요한의 증거의 목적이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요1:7)이라고 단언 한다.

세례 요한이 예수 보다 먼저 난 자이나 나중된 자로서 사람들의 이목을 예수에게로 이끌기 위하여 자신은 메시야가 아니고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고백을 하였다. 또한 그는 예수가 생명의 빛이라는 내용을 증거하여 사람들로 예수를 믿게 하려는 목적을 훌륭하게 수행한 것과 함께 예수의 선구자(as the precursor of Jesus)로서 예수가 세례 요한을 만남으로서 그의 공생애 사역을 시작 할 수 있었던 사실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145)


B. 로고스 기독론


1.선재하신 로고스

요1:1a, 3   εν αρχη ηνο λογοs ....... παντα δι αυτου εγενετο και

            χωριs αυτου εγενετο ουδεξν. 

우리는 본문의 표현에서 로고스의 성격과 활동을 볼수 있다. 그러나 먼저 해결해야 될 문제는 로고스의 선재(pre-existence)임을 기억해야 된다.

주석가들은 요한복음 서언 1절에 기록된 ‘εν αρχη’와 창세기 1장 1절 ’εν αρχη‘(70인역에서)와 연결하여 동일하게 생각했다. 사실 문자적으로는 동일한 관용구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문맥에서 표현하고 있는 의미는 다르다.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는 천지를 창조한 창조의 시작을 의미하는 시간이지만 요한복음의  ‘태초’는 시간의 시작이 아닌 영원성을 의미한다.146)

요한복음 1:1의 ‘태초에’(εν αρχη)는 동절의 주동사(finite verb)인  ην(있었다)와 1:3의 εγενετο(되어졌다, 만들어졌다)란 동사와 서로 비교 유추해볼 때 εν αρχη ην (그는 태초에 계셨다)는 창1:1 εν αρχη εποιησεν  (ποιεω) (그는 태초에...을 만들었다)가 함축하고 표현하는 시간을 내포함과 동시에그 이전의 영원 무궁한 무시간적 시간을 표시한다.

그 이유로는 첫째 요1:1의 ην은 무시간적(timeless), 계속적(continous)미완료 과거시제147)이기  때문이다. 바레트는  ην이 지속을 나타내는  이 시제는 3절(창조)와 6절(세례 요한의등장) 그리고 14절(성육)의 어색한 εγενετο (생겨났다, 있었다)와 대조 된다. 또한 이것은 ‘태초’(αρχη )라는 말이 시간적인 연속선에서 최초의 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시간의 피안을 의미 한다고 한다.148) 이상근 박사는 ην을 존재 (εστιν)의 미완료 과거형으로 명명하고 “그는 태초에 벌써 계셨고 계속적으로 계셨다..... 아리우스(Arius)의 주장처럼 성자가 존재하지 아니한 때는 없었다. 그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 이시다.”149) 라고 주석한다. 테니도 요1:1의 말씀을 로고스의 영원성, 로고스의 인격성, 로고스의 신성으로 나누어 설명 하면서, 로고스는 시간의개념으로 시작점이 끊을 수 없으며 시간을 능가하는 무한계성의 영원성을 주장 한다.150)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εν αρχη ην ο λογοs)의 ην(was)은 첫째의의미로 계속적인 존재로서의 항상 존재 하는 것을 의미 한다. 둘째는 ην과 3절 εγενετο와의 대조이다. 로고스의 “존재의 지속과 한정 없는 존재 상태는 ην이 암시하고 3절, 특별히 14절에 대조된다”고 한다.151) 저자 요한은 로고스의 선재를 표현하기 위해 서언과 그의 복음 전체에서 존재동사(εστιν, ην)는 로고스인 그리스도에게 적용시키고 준 존재동사(γινομαι, εγενετο)는 그와 대비되는 존재에게 적용 시키고 있다.152) 저자 요한은 1장6절 “εγενετο ανθρωποs απεσταλμενοs παρα θεου ονομα αυτω Ιωαννηs” (There was a man sent from God whose name was John)이다.  저자 요한은 기동적 동사인  ‘εγενετο’(나타났다)를 사용함으로 세례 요한이 자존자나 선재자가 아님을 분명히 밝힌다. 또한 세례 요한이 직무상 예수보다 선구자이지만 존재(being)에 있어서는 예수가 자기보다 앞섬(εμπροσθεν μου γεγονεν)을 주장한다.153) 로고스의 선재는 본질적으로 요한보다 앞섬으로 그의 본질(nature)에 어울리는 본질적 우월성(essential priority)를 갖는 것은 당연하다.

셋째로 서언에서 로고스를 설명하는 또 하나는 3절의 두 εγενετο이다. 창1:1의 “εν αρχη επποιησεν”(그는 태초에 ....을 만들었다)의 시간은 요1:1  “εν αρχη ην”(그는 태초에 있었다)과 시간과 동일시 되는 시간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창1:1은 3절의 “παντα δι αυτου εγεντο”(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만들어졌다)와 동일시 되어야 한다.154) ην은 εγενετο(창조의 싯점을 나타내는)와 비교해 보면 “태초”(αρχη)라는 말에 의해 ην은 시간적인 연속선에서 최초의 시작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하여 있는 것을 나타낸다.155) 그러면 요한의 로고스는 선재하신 로고스이다. 천지가 창조 되기전 만물이 만들어지기 전에 로고스는 존재 했었다. εγενετο는 발단적, 시발적 단순과거(The ingressive aorist)로서 만물(παντα)이 창조되는 시간의 시작점을 강조하며 영원한 시간을 가르키지 않는다. 창조자인 로고스156)가 전시간적 영원한 시대에 항존했으며 창세기 1장 1절이 태초라고 하는 어느 싯점에 천지를 만든 것이라고 단순과거에 의하여 알 수 있다.

구약적 영향을 반대하고 영지주의의 구속자 신화의 영향을 주장한 불트만은 구약의       (λογοs)는 첫째 자연과 역사를 향해 명령하는 지배력이며 둘째 인간(사제와 예언자)을 통하여 인간이 무엇을 해야하는가를 인간에게 말하는 신의 절대적 명령이다. 그러므로 요1:1의 로고스는 구약성서에 의해 이해 될 수 없다고 하면서 이 로고스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그때 그때의 사건이 아니라 태초부터 신과 함께 있는 영원한 존재다 라고 주석하였다.157) 슈 켄부르그는 로고스의 선재와 영원성을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가 여기서 창세전까지 소급되며 신적 영원성(divine eternity)까지 소급된다..... 그 로고스는 창조되지 않았으며 그는 단지 ‘있었다’(was) 즉 그는 이미 존재했었다는데 절대적으로(absolutely) 무시간적(timeless), 영원적(eternal)으로 존재 했다”158)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예수가 모든 것 보다 선재 했다는 사실, 예수가 어떤 것 보다 우월하며, 하나님을 나타낼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 그리고 예수가 신적인 계시의 근원으로, 하나님과 동일시 하고 있다. 우리는 저자가 예수의 선재적 우월성과 대조 될 수 있는 대상을 선정하고 있음을 요한복음 전체에서 볼 수 있다.

그 내용을 간단하게 살펴 보면, 첫째 모세에 대하여 예수의 선재와 우월성이다. 모세의 율법은 예수가 가져온 은혜와 진리에 대조 된다(1:17). 모세가 광야에서 준 만나는 하늘로부터 온 참된 떡과 비교 된다(6:32,49). 모세는 고발자(5:45)와 기록자(5:46)에 불과함을 말하고 있다. 저자 요한은 모세에 대하여 예수의 선재와 우월성을 선명하게 할때, 모세와 예수, 율법과 은혜을 대립시키고 있다. 요한에게 있어서 예수는 확실히 새로운 모세가아니고159) 선지자임을 말한다.

둘째는 야곱에 대한 예수의 선재와 우월성이다. 여인의 질문은 “μη συ μειζων ει του πατροσ ημων  Ιακωβ” (Are you greater than our father Jacob?)“당신이 우리들의 아버지 야곱보다 크니이까?” 야곱이 더욱 위대하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으며, 영생한다”160)라고 한다. 즉 야곱이 주는 물은 시간적 이지만, 예수가 주는 물은 영원 하다는 것이다.

셋째는 아브라함에 대한 예수의 선재와 우월성이다.161) 이것은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 비해 휠씬 종교적 의미가 약화되어 있으나, 아브라함의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됨이 더 강조되어 있다. 여기서 유대인의 질문은 “Are you greater than our father Abraham, who died?"(당신은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이었다. 그들의 질문 속에서 예수보다는 아브라함이 우월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이미 죽었고 선지자들도 죽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저자의 의도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조상들이 영원하지 않고 한계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의 대답 속에서 여전히 영원성에 대한 대답 “I say to you, before Abraham was, I am”(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 부터 내가 있었느니라:πριν ΑΒρααμ γεγεσθαι εγω ειμι)162) 은 영원전 부터의 예수의 존재를 말한다.

네째는 이미 앞에서 살펴본 것 처럼 세례 요한에 대한 예수의 우월성이다.163)

다섯째는 모든 것에 대한 예수의 우월성이다.164) “그로부터 인자는 만물 위에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만물을 다 그 손안에 가지고 있다.”(34-35)만물을 소유한 자에 반응(obey)하는 자는, 영생을 가진자(위로부터 난자)의 영생을 소유하게 된다.

위에서 본 바와같이 요한의 서언에서 그리고 그의 복음서에서 ‘먼저 계신자’(1:15), ‘위로부터 온 자’(3:31), ‘위로부터 보냄 받은 자’(1:18)등 다양하게 표현된 예수의 선재와 우월성이 “요한 공동체를 둘러싼 예수의 권위에 대립되는 모든 것들을 상대화 시킨다.”165)는  (N.A. Dahl)의 주장이 타당성이 있을 수 있다. 그 이유는 저자 요한이 긴문장의 논쟁을 구성하는 정당한 근거166)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격하게 저자의 선명한 의도요20:30-31)에 비추어 볼때 사람들로 예수를 믿게 하기 위하여 예수의 선재와 우월성을 강조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2. 로고스의 인격(The person of The Logos)

1:1  και ο λογοs ην προs τον θεον :and The word was with God

고대 희랍철학과 종교에서의 로고스는 분명한 인격적 존재로 나타나지 않는다. 쿨만(O.Cullmann)은 고대 희랍철학의 로고스의 비존재성, 비인격성에 대하여 “로고스는 고대 희랍 철학자인 헤라클리투스와 스토아 학파에서 나타난다.  여기서는 우주를 다스리고 동시에 인간 지성안에 현재하는 우주적 법칙이다. 그러므로 그 로고스는 추상(abstraction)이지 인격적 실체(υποστατs :actual being)는 아니다. 그러므로 스토아 학파가 로고스에 관해 태초에 있었다고 말하지만 그들은 요한의 로고스와 전혀 다른 비인격적, 범신론적(pantheistic) 세계정신을 의미했다”167)라고 주장한다. 플라톤주의에서도 로고스 개념을 사용하되 이상주의적 의미(idealistic sense)로 사용하므로 요한의 로고스에 가까우나 여전히 인격적 실체는 아니다.168) 다드에 따르면 필로의 로고스는 결코 인격자가 아니다.169) 그래서 필로의 로고스는 사랑과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래드(G.E. Ladd)역시 필로의 로고스는 종종 실체화되고(hypostatized) 의인화 되지만 결코 인격화되지 않는다.170)

그러나 요한의 서언에서는 로고스의 인격을 볼 수 있다. 로버트슨은  προs의 의미를 하나님과 얼굴을 맞대고171)로 제의한다. 더 나아가서 그는 “대격을 가진 προs는 다른 사람과 서로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동동함과 친밀함을 표현한다”고 해석한다. 이것은 “로고스가 하나님과 함께 영존하실 뿐 아니라 하나님과 영원한 사귐을 갖고 있었다”172)는 것을 의미한다.

테니는 진일보하여 이 귀절의 ‘함께’란 전치사는 연합은 물론이고 동등됨과 인격의 구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173) 불트만도 요1:1의 로고스는 처음 부터 하나님과 함께 존재한 영원한 존재임을 주장한다.174)

요한이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라고 선언한 것은 그의 로고스가 성육 이전에 우주의 원리나 하나님의 사상으로서 무인격이었다가 성육 이후에 인격을 취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계심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175) 보여준다.

그러면 로고스의 인격의 영향은 어디서 왔는가 하는 질문을 밝혀야 할것이다. 스콧트(E.F. Scott)는 “요한은 희랍철학과 유대사상의 조정 철학자인 필로에 의하여 기독교 메세지를 해석하고 있다.”176)라고  주장했다. 버나드는 에베소의 지성인들 가운데서 필로의 로고스 교리와 그의 히브리어 성경 해석법에 영향 받은 사람들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하며 요한을 이 부류에 포함 시켰다.177) 그러나 이상근 박사는 요한의 로고스와 필로의 로고스를 10가지로 비교한 후 후자의 영향을 부인한다.178)

우리는 오히려 요한이 구약성경의 영향을 받았음을 부정하는 불트만179)과 불트만의 반대 견해를 180) 함께 볼수 있다. 그러나 요한이  직접, 간접으로 구약을 124번181) 인용하거나 암시한것은 구악성경과의 영향을 고려하게 한다. 요한은 구약성경의 창조와 계시및 구원에 관여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져오는 인격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구약성경에서 발견했을 것이다.182) 이사야가 성전에서 본 스랍들에 의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라고 찬양을 받던 “만군의 왕이신 여호와”를(사6:1ff)  저자 요한은 성육신 이전의 로고스인 예수로 이해한다(요1:18;17:5).183) 요한의  로고스의 영원한 인격은 이사야 6장을 비롯하여 구약성경 전반에 나타나 있는 여호와의 타자아에 근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184)

요한의 로고스의 인격에 대한 또 하나의 영향은 그의 주 예수의 자기 진술에 근거했을 것이다(요17:5-14). 그리고 예수의 신인식(요5:18, 24)에서 요한은 충분이 로고스의 인격을 도입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요한이 성령의 계시에 의존했음을 185) 고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위의 내용을 통하여 저자 요한이 구약성경에 편만히 산재해 있는 삼위 일체(창1:26)를 암시하거나 여호와의 타자아를 계시하는 성귀들과 예수 자신의 증언들과 성령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요한이 로고스의 절대적으로 영원한 신적 인격 사상을 천명한 것은 그 자신의 사상이며, 또 기독교의사상적 체계를 따르고 있으면서도186) 그런개념은 독자적이고 새로운 것187)이라고 할 수 있다.


3. 창조자로서의 로고스

요 1:3 παντα δι αυτου  εγενετο και χωριs αυτου  εγεντο υδε εν ο

       γεγονεν.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 된 것이 없느니라.


필로와 영지주의의 로고스 창조는 헬라주의의 이원론(dualism)에 근거한다. 절대선의 하나님께서 절대 열등물질을 창조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헬라주의는 하나님과 물질 세계의 중보적 창조자로서 로고스를 내세운다. 필로의 로고스는 세계를 창조 하였지만 사실상 그 로고스 역시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그의 로고스는 계시와 창조의 중보자, 제2의 하나님(second god), 재판장, 피조된 자로서 모든 만물의 창조자, 천사들 중에 장자권을 가진 천사장, 왕, 선생, 그리고 하나님의 작품들 중에서 첫째이며 가장 위대하고 가장 완전한 것으로서 세계이다.188) 이런 의미에서 필로의 요한의 로고스와 큰 차이가 있다. 필로의  로고스는 인격자가 아니고 의인화된 하나님의 원리나 영향력에 불과하다.

그러나 요한의 로고스는 참 하나님이며 선재하시고, 독생하신 하나님( 요1:18)인 동시에 여호와 하나님으로서(요12:41-42), 창조자이시다(요1:3). 요한의 로고스는 아버지 하나님과 한 실체를 공유하나 인격적으로 구별되는 하나님 자신이다. 그러므로 그의 창조는 하나님의 창조이며 그 반대로 하나님의 창조는 요한의 로고스의 창조인 것이다.189) 요한의 분명한 의도는 말씀이 창조자(행위자)로서 모든 존재의 존재 의미를 부여 하는 것이며, 모든 것의 존재가 가능하기 위하여 말씀에 힘입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190)


C.성육 로고스 기독론

요 1:14  και λογοs σαρξ εγενετο και εσκηνσεν εν ημιν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헬라 사상의 이원론의 영향을 받은 필로와 영지주의의 로고스는 성육이 불가능하다.  슈낙켄부르그는 예수안에서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이 단적으로드러났다는 것을 서언에서의 로고스 성육 사건 이라고 기술하고 있다.191) 불트만도 로고스의 성육(1:14)이 요한복음서의 전체주제라고 하였다.192) 그리고 불트만은 요한복음 기자가 동방 영지주의 구원신화의 영향을 받아 자기의 로고스에 적용하였다고 주장했다.193) 불트만이 말하는 영지주의의 성육은 진정한 의미에서 성육이 아니고 위장(disguise)이다. 이 위장은 로고스가 구세주로서 스스로 인간의 모습을 지니고 낮은 세계로 내려올 때 암흑의 악마적 세력을 속이고 구원해야 할 인간들을 놀라게 하지 않기 위해 인간의 몸으로 위장해서 지상에 내려오는 변장인 것이다.194) 그러나 요한의 수육은 위장이 아닌 참된 성육(εν σαρκω διs)이다. 요한은 로고스의 수육에 가장 적합한 εγενετο란 단순과거 동사를 사용한다.  이 단순과거 동사는 기동적(ingressive or inceptive)단순 과거로서195) 선재하신 로고스(ην ο λογοs)가 하나님과 함께 신적 본질을 공위하면서 인간이 되심(Flesh or man, not a man)을 의미한다.196)

그 이유는 저자가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기 위하여197) 하나님께서 육신을 지니고 오셨다는데 대한 고백을 그리스도교 고유의 것을 구별해주는 결정적인 기준(standard)으로 제시한다.198) 예수는 자신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고 했다면 요한은 예수의 성육을 고백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교와 비그리스도교 뿐아니라 그리스도와 반그리스도를 가늠하는 경계선이었다.199)

이제 우리는 성육신의 의미를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


1. 성육한 로고스와 임마누엘

요 1:14  και εσκηνωσεν ε ημιν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이 귀절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이스라엘의 성막을 연상케 한다(출 40:34-38;민 9:15-23). 이것은 후에 솔로몬의 성전을 포함하여 구약적 임마누엘이었다. 그러나 모세의 장막은 참 장막의 모형과 그림자이므로 진정한 의미의 임마누엘이 되지 못하였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자신이 친히 오셔서 자기 백성 가운데 거처를 삼겠다고 하셨다.200) “말씀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장막을 쳤다)”는 말은 하나님이 바로 자기의 거처를 우리 가운데 두셨다는 진정한 의미의 임마누엘을 의미한다.201) 예수는 자신의 몸이 구약의 성막을 대체한 것이라고202) 말씀하신다. 그의 성육은 로고스가 한 사람안에 임재 하거나 한 삶을 충만케 하는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출생(1:14;19:26;갈4:4)하여 신성의 모든 충만함이 예수 안에 육체로 거하심이다(골2:9).203) 그러므로 로고스는 참 신(real God)이며 참 인간(real man)으로서 나사렛 예수라는 사람으로204) 우리에게 임마누엘 하셨다.

모리스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에서 두가지 요점이 특별히 강조되고 있다고 하다.205)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로 참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셨다고 하는 경이의 사실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육신을 입으실 때에 인간이 그것에 아무런 참여도 할 몫이 없다고 하는 더욱 경이로운 사실이다. 카알 헨리(Carl F. H. Henry)도 “요한의 증언에서 신약의 여러 로고스들 보다 우월한 근거로 보는 까닭은 예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동일하게 보는 것 이상으로 예수님이 선재하신 그리스도이며 영원한 로고스의 수육화라고 하였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한다.206)

εσκηνω σεν은 제1단순과거, 능동태, 직설법으로 히브리어    (shakan)을 상기 시킨다. 이 동사는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거하는 것에 대하여 사용되었다.207) 그리고 파생된 명사인       (shekinah)는 하나님 자신의 이름에 대한 완곡법적인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나아가서 환한 구름이 초막위에 머물렀고(     출24:16), 이 구름은 하나님의 현존하심에 대한 눈에 보이는 현시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속적인 현존은 그의 영광을 보여준다.208) 그러나 바렛트는 다음과 같은 두가지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고 한다.209) 첫째는      ( shekinah)는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그의 현존을 의미한다. 둘째는    는 일반적으로 ‘거하다’로 번역되지 않는다. 아마도 요한은 말씀이 사람들 가운데서 일시적인 거처를 정했다는 것 이상을 의미하지 않았을 것이다 라고 그는 주장한다. 헨드릭슨(Handricson)도 말씀이 잠시 사람들 사이에 그의장막을 치고 그들 사이에 거하였다210)라고 주석했다.


2. 은혜와 진리의 소유자로서 성육하신 로고스

요 1:14  και εθεα σαμεθα την δοξαν αυτου δοξαν ωσ μοροογενουs

         παρα πατροs

유대 민족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성육신의 영광을 보았다.211) 성육한 로고스의 영광은 창세전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나누었던 것이다(요 8:54;17:5,24). 그의 영광을 통하여 그가 아버지의 독생자(μονμγενηs)임을 지각 하는 것이다. 이상근 박사는 그리스도의 중보적 양면성을 주장한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과 동질이시며 동시에 대인 관계에서는 많은 하나님과의 자녀 중 특수한 아들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212) 모리스는213) 요한이 문자 그대로의 나사렛 예수의 살아계신 인격에 함께한 영광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주석한다. 다시 말하여 그 영광이란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아버지가 보내신 독생자인 예수의 신성이다.

이 독생자이신 로고스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분이다.214) 예수는 그 자신이 진리(요 14:6)며, 세상에 비치는 참 빛(1:9;8:12)으로서 그의 성육을 통하여 은혜와 진리를 인간에게 전달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준다(요1:12). 그러므로 요한은 17절에서 그의 이름을 로고스에서 자연스럽게 예수 그리스도로 변경하고 은혜와 진리는 후자를 통해서 왔다고 말한다.215)

‘은혜’(χαριτοs)는 위대한 기독교 언어중 하나이다. 그리고 보면 요한이 이 언어를 서언에서 3회나 사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시는 복음서에서 사용하지 않았음은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216) 이런낱말은 원칙적으로 “기쁨의 원인이 되는것”이라는 뜻이며 따라서 “지극히 호감스러운것”의 의미이다. 이 뜻이 발전하여 이유없이 무조건 베풀어 주는 호의를 뜻하는 개념이 되었다. 이 개념을 기독교적 이해로 정리해 보면, 은혜란 특별히 인간의 영적 필요로써 구주이며 그의 아들을 보내주신 하나님의 일방적 행위에서 발견되는 것이다.217)

골든 클라크(Gordon H. Clark)는 요한복음에 나타난 진리(αληθεια)에 대하여 상세하게 연구한 후에 요1:14 ‘진리’를 ‘예수가 정직하다’로 설명했다. 예수가 신실 하다는 것은 그가 말하는 것이 사실로서 믿을 수 있는것을 말한다고 설명한다.218)

바렛트는219) 요한복음서의 αληθεια는 구약의      (amat)의미 이상을 지니고 있으며, 때때로 일반적인 그리스어 용법에서 처럼 αληθεια는 사실에 일치하는 것, 거짓이 아닌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요 5:33;8:40). 그러나 보다 특징적으로 그것은 예수 안에서 주어지고 드러난 그리스도교적 계시를 의미한다(요1:17;8:32;16:13;17:17,19).  이 계시는 하나님이 그 자신의 품성에신실하다는 사실로부터  그리고 하나님이 그의 언약에 충실 하다는 사실로부터 생겨나며, 계시는 그 언약의 성취이다. 그것은 진리를 쌓는 것이다(요8 :32). 그것은 성령의 활동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220)


3.아버지의 계시자로서 성육하신 로고스

요 1:18  θεον ουδειs εωρακεν πωτοτε μονογενηs θεοs ο ων ειs τον

         κολπον του πατροs εκεινοs εξηγησατο

         본래 하나님을 본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

         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모리스는221) 이런문절이 그리스도와 아버지와 지극히 친밀함을 강조함으로써, 실상 전 서언의 절정을 형성하고 있다고 주석한다. 요한의 로고스는 아버지 품속에 독생하신 하나님이시다.222)  독생하신 하나님은 아버지의 계시와 관련을 갖고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는 계시자로 묘사한다(고후 4:4,6). 히브리서 저자는 아들을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와 그 본체의 형상으로서 아버지의 계시자로 이해한다(히1:3).223) 요한은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의 광채와는 다른 표현인 독생하신 하나님이란 명칭으로 하나님의 계시자로 설명한다. 하나님 아버지와 독특한 관계를 가지고 계시는 독생자만이 아버지의 계시자가 될 수 있다.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자가 없다(마 11:27). 아버지에 관한 완전한 지식은 그의 독특한 관계의 아들에 의해서만 전달된다(요 17:6,8). 아들은 아버지의 형상과 영광의 광채요 독생하신 하나님 이시므로 그 아들을 본자는 아버지를 본자이다(요 14:7,9).

이런 의미에서 구약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았으나224) 하나님(본체)을 본자가 없으며225)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이며 영광의 광채며 독생하신 하나님을 보았던 것이다.226)  또 때마다 하나님을 본 자들은 그들의 본 하나님을 통해 하나님의 본체의 계시를 받았다.227) 독생하신 하나님의 아버지를 나타낼때 그분은 아버지의 보냄을 받아 이 세상에 친히228) 오셔서 그로 나타내셨다. 구약에서는 여호와의 사자나 하나님의 사자로 파송을 받았으며 요한의 서언에서는 독생하신 하나님(요 1:18)과 아들로 파송을 받았다.229)

성육한 로고스는 독생하신 하나님으로서 존재적으로는, 자기를 보는 자들에게 하나님을 계시(요14:9)했으며, 자기를 아는 자들에게 그 앎이 곧 하나님을 아는 것(요14:7;8:19)으로 했으며, 사역적으로는 아버지께로 부터 듣고 본것을 말하고(요18:38), 그와 같이 행하며(요5:19),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말씀들은 제자들에게 줌으로(요17:8,14)서 아버지를 계시 하였다.

모리스는230) ε ηγησατο ‘나타내셨느니라’는 동사가 요한복음 여기 한 곳에만 나오며 그 의미는 전모를 밝힌다는 의미라고 한다. 따라서 예수께서 비로소 아버지에 관하여 사실 전모를 밝히셨다는 뜻이라고 주석 했다. 사실 예수의 모든 언행과 십자가의 구속사건 뿐아니라 그의 인격으로 계시하는 것은 독생하신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자신있게 분명히 할 수 있는 바는 그리스도가 나타내 주신대로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231)


D.로고스 와 구원과의 관계

νισ οδοι δε ελαβον αυτον εδωκεν αυτοιs εξουσιαν τεκνα θεου γεγεσ-     θαι τοιs πιστευουσιν ειs το ονομα αυτου

영접하는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를 주셨나니(요1:4, 7, 9, 16-17 참고)

로고스의 선재 및 성육신의 소재가 표현하려는 내용은 이렇다. 즉 예수의 인격과 십자가 죽음은 세계 내적 역사의 연관에 그 기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 내적으로는 도저히 연역할 수 없는 방식으로 하나님은 몸소(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하여) 세상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세계 내적으로는 연역할 수 없는 이 자유는 마침내 숙명적 관계를 깨뜨리고 우리를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한다. 하나님의 아들의 선재에 관한 언명의 의도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지위’와 우리의 ‘구원’에 그 궁극적 근거를 제공하려는데 있다.232) 요한의 구원(영생) 사상은 헬라 철학과 히브리사상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빛(요1:4;8:12;9:15), 진리(요1:14,17;14:6), 지식(요1:10;17:3)과의 관계233)(거절(요1:11)와 영접(요1:12))속에서 표현되는 특징이 있다.


1. 빛과 구원

요 1:4  και η ζωη ην το  φωs των ανθρωπων

        이 생명은 사람들의빛이라.

테니는234) 빛은 사람들의 영적인 각성을 의미 한다고 한다. 모리스235)는 빛과 생명의 원천으로 보는 하나님을 말하고 있는 구약의 말씀을 상고하는 것이 보다 적격이라고 한다. 그리고 서언은 복음서의 나머지 부분이 주장하고 있는 것 이상을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뒤에서는 구원론적인 측면에서 시작될 것이 서언에서는 우주론적인 차원에서 시작되며, 서언에서 요한의 사상적 배경은 더 넓은 폭을 보여 준다고 한다.

구약의 창조기사에서 생명과 빛은 필수요소들이다. 태초에 하나님의 말씀의 최초의 운동은 빛의 창조(창1:3)였으며, 이것은 우주에서 생명의 첫 탄생이었다. 하나님은 생명을 주시며 빛과 지혜의 근원이다(시119:30). 그러므로 시36:9의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다.”에서 앞뒤가 꼭맞는 귀절을 본다. 요한이 앞서 예수와 생명을 연결해 놓은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는 빛과 연결시키고 있다.236)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이시다(요8:12;9:5). 그분은 “세상에 빛으로 오신 분”(요12:46)이었다. 진실로 예수를 따라가는 사람은 “어둠속에서 걸어가지 않을 것이며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8:12) 사람들이 그를 믿도록 초대 받은 것과 같이 빛을 믿으라고 권면 받고 있다(요12:36).237)

예수는 빛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계시의 근원이다. 모든 사람을 위한 생명이다.238) 생명은 말씀의 본질적인 힘이다. 말씀은 하나님의 지식이 전달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생명은 사람들의 빛 이었으며, 그들에게 참된 지식을 제공해 주었고, 그들 가운데 비침으로서 그들을 심판받게 하였다.239)


2. 지식과 구원

요 1:10 και ο κοσμοs αυτον ουκ εγνω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요한이 믿음의 동의어로서 사용한 언어중에 지식과 관계된 단어는 γι- νωσκω(요 1:10,48; 2:24, 25 등등), ακουω(요 1:37, 40; 3:8, 29, 32 등등), θεωρεω(요2:23; 4:19 등등)등을 사용한다. 이들 모두가 믿음을 의미하는 단어로 쓰여진 것은 아니지만, 부분적으로 표면적인 믿음이나 신뢰성을 의미하는 경우도 있다.240)

우리는 지식에 대한 동의어와 함께 사상적 배경을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 다드는241) 지식에 대한 히브리적 이해와 헬라적인 이해의 차이를 설명하였다. 구약의 지식(     :yada)은 교훈으로 알아가는 과정(레5:1)이며, 관찰(사13:21), 친밀한 사람을 알아보는 것(창29:5), 본능적 지식의 특징(욥 28:7), 그리고 사별과 같은 특별한 경우를 경험하는 것(사47:8)으로 설명된다. 신약에는 γινωσκω의 동의어로서 οιδα가 있다. γινωσκω는 배운다는 의미가 강하다. 그리고 οιδα는 계시나 교훈으로 부터 얻어진 지식을 말한다.242)

그런의미에서 모리스가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는 “그를 알기에 이르지 못하였고”나 “그를 인정하려고 노력하지 아니 하였고”라고 주석한것은 타당한 것이다. 바렛트는243) “세상이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를 세상이 그를 알지도 못했고, 그에게 응답하지도 않았다고 주석한다. 테니도244) 세상이 하나님을 알지못한것은 그를 인식한지 못한 것이며, 공관복음의 많은 사람이 그를 피상적 이해(superficial comprehension)로 그리며, 심지어는 그의 제자들도 예수의 말씀들과 그의 인격 또는 그의 사명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무지는 빛을 갈망하지 안고 빛을 거절한 것의 갈등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한다.

요한은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 17:3)이라고 한다. 곧 “아는 것”과 “영생”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아는 것”이란 개인적 체험과 친밀한 교제의 관계를 포함한다.245) 즉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안다는 말은 지적 인식 뿐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안에 들어가고 하나님이 우리안에 들어 오시는 그런 연합과 교제 관계를 의미한다.246)

요한이 믿음과 인식 또는 지식을 매우 밀접하게 연결된 것으로 보고 있다고 주장하는 킴멜은247) “지식은 믿음의 결과이고, 믿음은 아는 것의 결과라”고 하다. 그는 지식과 믿음의 병행구절(요 11:42과 요 17:3, 요 8:24과 요8:28, 요 14:10과 요 14:20)을 설명하면서 요한의 복음은 단순히 지식에만 그치지 않고 인내하는 믿음, 그리스도안에 거하는 지식이 있어야 된다고 한다(요 15:5-7;15:16-17;요일 2:6).

요한이 말하는 지식은 일시적인 조사, 명상을 통하여 얻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역사적 활동들 속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된 경험의 지속적인 관계 속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지성적인 면에서 시인하는 것 이상의 인정(acknowledge)을 의도하고 있다. 또한 친밀한 관계를 뜻하며 정당한 관계에 들어가기 위하여 벗으로 사랑한다는 뜻이 있다.248) 불트만은249)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그를 사랑하는 행동이며, 그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인식이다”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빛 과 진리로서 생명의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를 아는 것은 구원의 중요한 요소이다.


3. 영접과 구원

요 1:12  οσοι δε εγαβον αυτον εδωκεν αυτοιs εξουσιαν τεκνα θεου

         γεγεσθαι

         그를 영접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를 주셨다.

슈낙켄버그는 신약성서의 다른 원시 찬양시들과 비교할 때, 서막 로고스 찬양시의 독특성을 바로 성육한 로고스에 대한 세상의 거부자라고 지적한바 있다.250) 그리고 이 거부 주제가 주로 유대인과 관련하여 요한 복음서에 일관되게 나타난 것을 볼 때에 중요한 주제임을 금방 알 수 있다고 한다.251) 그러나 우리는 거부만 보아서는 충분치 못하며, 거부와 영접을 함께 보아야 한다. 오히려 요한의 역설적인 표현과 요한의 의도(요 20:31)에 의하여 영접에 강조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모리스는252) 12절 주석에서 중요한 낱말 셋을 지적한다. 여기서 모리스는 εδωκεν “주셨다”는 이야기의 결말은 거부의 비극이 아니라 영접의 은혜라고 주석한다. “영접” 곧 예수를 믿는 행위가 저자 요한에게는 영생의 열쇠이다(요3:3-29). “영접”이라는 열쇠는 모든 인류에게 적용된다. 이러한 보편성 때문에 예수의 사역은 보편세계의 것이며, 땅 끝까지의 무한대의 범위로 지평이 열리게 한다.253) 또한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것은 그를 아버지의 사절로 순종과 신앙안에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254) 그러나 브라운은255) 로고스의 거부(요 1:9-11)와 로고스의 영접(요 1:12-13)의 대립의 강도는 단순히 로고스를 거부한 불신앙인과 로고스를 영접한 신앙인의 대조라기 보다는 예수를 거부한 유대교와 예수를 영접한 요한 공동체의 대립으로 볼 때 더욱 잘 설명되어진다 라고 설명한다.

또한 이러한 증거로 브라운도 10-12절이 예수의 지상 사역을 언급하고 있으며, 11절의 ‘자기 땅’, ‘자기 백성’은 각각 ‘유대 땅’과 ‘유대 백성’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영접하지 않고 예수를 거역하였다(요5:18;7:1,19,25;8:37,40,59;10:31,39).

εξουσια(권세, 특권)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권위’ 또는 ‘권리’를 의미한다(요1:12;5:27;17:2;19:10-11).256) 모리스는257) 요한의 εξουσθα를 ‘신분’으로 설명한다. 저들은 지극히 높은 신분과 상응하는 명분 곧 온전한 권세를 받은 것이다. 요한은 ‘자녀가 되어라’고 말하지 않는다. 신분258)의 자격을 말함과 동시에 신분의 변화를 말한다.

τεκνα(자녀)에 대해서 모리스는259) 요한이 ‘후손’(sons)이라고 하지 않고 ‘자녀라고 한 것은 요한의 언어 사용 성격상 공동체를 연상시킨다고 한다(벧후 1:4). 다시 말하여 ‘아들의권리’나 특전의 강조보다는 공동 사회를 뜻하였다. 이상훈 교수도260) 구약성서에서 자주 이스라엘을 가리켜 하나님의 자녀라고 언급한다(출 4:22;신14:1;호11:1;렘3:19). 신약의 맥락에서는, 누가 참 하나님의 자녀인가하는 논쟁이 자주 일어난다(마3:9;11:9;21:28;갈3:25;4:6-7;롬8:14-17,21,29;엡5:1,8;요일3:1-2,10;5:20).

신약성서는 하나님을 모든 사람의 아버지로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모든 사람이 아버지의 자녀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지으시고 그들을 위해 공급하는 점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엄격히 말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바에 대하여 응답할 때만 참다운 의미에서 하나님의 자녀이다. 그러므로 ‘자녀’란 믿는 자이다.261)


4. 그의 이름을 믿는 자와 구원

요 1:12  τοιs πιστευουσιν ειs το ονομα αυτου

         그의 이름을 믿는자들에게

요한은 ‘믿는다’는 말을 사용할 때 98회 모두 동사로만 표현하는데 그 표현이 매우 다양하고 그 의미 또한 다양하다.262)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것과 같이 그의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의 모든 계시와 인격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요 17:11)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이름과 자신의 이름을 공유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모리스는 263) 믿음이 길이라는 것을 중요시하며, 독자들이 그점을 놓치지 않기를 저자가 원했다고 한다. 또한 그들이 ‘그이름’을 믿는 자들임을 주목하여야 한다고 한다. ‘그이름’은 현대인 보다는 고대인들에게 더욱 중요한 뜻을 갖는다. 그들에게 이름은 전 인격을 표시한다.264) 그렇다면 ‘그의 이름을 믿는 것’은 말씀의 진정한 인격을 신뢰함을 뜻한다. 그 분을 그 분 그대로 믿는 것이다. 하나님을 말씀에 나타내신대로 믿는 행위이다. 그러한 하나님께 우리의 신뢰를 쏱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인지가 아니라, 그 분을 완전한 인격자로 신뢰하는 것이다.265) 우리가 그 분을 인격자로 신뢰 할 수 있을때 우리는 그 분의 소유가 되도록 자신을 내어 바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 요한의 집필동기(요 20:31)에서 그리고 요한의 많은 내용266)을 말하여 요한의 서언과 나머지 복음에서 믿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발견 할 수 있다. 다드는267)  예수 안에서 아버지를 보는 것과 그의 영광과 진리를  보는 것이 믿음의 한 부분이 아니고 믿음의 그 부분이라고 한다. 클라크는268) 로고스 교리(logos-doctrine)와 구원의 믿음 교리(doctrine of saving faith)와의 연결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예수가 로고스이고 그는 진리269)로 가득 채워져 있고, 진리는 예수를 통해서 이세상에 왔기 때문이며,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길이고 생명되신 진리270)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예배 할때, 신령과 진리271)로 예배해야 한다.


ⅴ. 결  론


A.요 약

우리는 요한이 사용한 로고스의 개념과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 로고스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 할 것인지를 위하여,


Ⅱ장에서 로고스의 출처를 살펴 보았다. 로고스의 출처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다양 하였다. 스콧트는 필로의 영향에 불트만은 영지주의의 구속자 신화에, 구스리는 유대 사상에 요한의 로고스의 출처를 돌린다. 다드는 로고스의 출처를 구약성서의 고유한 유대적 요소를 지적하면서 그 배경을 헬라적 유대교라고 주장한다. 브라운은 서언의 로고스 개념이 어떠한 희랍 사상에서 연유한다고 보기 보다는 성서와 유대의 사상적 근원에서 연유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유대주의와 헬라주의의 영향이 있었음을 배제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요한이 구약성경과 주님의 증거 초대교회의 사도들의 영향 아래 성령의 도우심을 받았다는 사실과 요한이 직접 직시한 계시(요 1:14, 요일 1:1-2)와 부활의 경험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를 로고스라고 표현했던 것이다. 요한은 다른 것들로 가득 채워진 로고스의 방을 깨끗이 치워 버리고 자신이 직접 보고 경험한 예수를 로고스의 방에 가득채워 사람들에게 소개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헬라적인 이교가 성서적 종교를 침투하여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기 보다는 성서적 종교가 헬라적 사상과 종교에 더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이제 그 로고스의 방의 주인은 헬라적 사상이 아닌 요한 자신의 사상인 것이다. 우리는 로고스의 개념을 위하여 요한의 방에 도착하였다.


Ⅲ장에서 로고스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밝혀내기 위하여 서언의 구조를 분석하였다. 서언의 구조는 카즘이전의 구조와 키아즘 구조를 중심으로 하였다. 키아즘 이전의 구조에서는 로고스의 찬양시와 두개의 찬양시에서 로고스의 선재와 성육의 주제를 발견하였다. 그리고 키아즘의 구조에서는 로고스의 선재와 성육에 대한 반응인 로고스의 영접 주제를 보았다.


우리는 요한의 로고스의 방이 로고스의 선재, 성육 그리고, 영접으로 구분되어서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이것은 삼각형의 조건으로  세각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로고스를 세각의 뿔로하여 선재, 성육, 영접이 각각의 위치를 정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각각의 위치들은 객관적인 사실보다는 영원한 진리에 관심을 두며, 역사보다는 신학에 관심을 둔다. 그리고 요한의 서언은 누가가 어떻게 누가복음을 쓰게 되었다고 설명하는 머릿말(preface)이상의 기능인 요한복음 전체를 어떻게 읽고 어떻게 이해 해야 하는가 하는 방향을 제시한다. 요한의 서언은 마치 잘 훈련된 오케스트라를 힘차게 그리고 세밀하게 인도하는 지휘자와 같은 기능을 보여 준다. 우리가 요한의 서언의구조와 기능을 살필 것은 우리가 요한의 로고스의 방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다.


Ⅳ장에서 우리는 서언의 로고스의 내용과 역활을 효과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서언과 나머지 복음과의 관계, 로고스에 대한 세례 요한의 증거를 살펴 보았다. 그리고 각각의 주제(선재, 성육, 영접(구원))들을 살펴 보았다. 서언과 나머지 복음과의 관계는 서언의 로고스인 ‘선재’(태초에, 요 1:1-2), ‘성육’(육신이 되어, 요1:14), 그리고 ‘영접’(하나님의 자녀, 요 1:12-13)이 나머지 복음의 로고스에서도 ‘선재’(하나님과 함께, 요 1:30; 5: 18; 10:30; 17:5), 성육(곤하여, 요 4:7), 믿는자(생명 요 3:16; 6:29; 20:31)로 나타난다.272) 카힐은 서언의 로고스가 요한복음의 중심이며, 여기로 부터 복음서의 모든 의미와 내용이 흘러 나온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서언과 요한복음 나머지 부분에서 기독론의 칭호의 변화가 있다 할지라도, 기독론적 구조와 내용, 역활은 일관되어 나타난다.

로고스 기독론에 대한 세례 요한의 증거는 예수의 위치와 세례 요한의 위치가 비교되면서 등장한다. 세례 요한은 보냄을 받은 사람으로 자신을 부정273)하고  예수를 높이는 증거자(witness)로서 공관복음과 대조되는 특징을 나타낸다.274) 또한 셰례 요한의 증거의 목적275)과 저자 요한의 집필 목적276)이 있음을 볼 수 있었다. 모리스의 주장처럼 세례 요한은 저자의 목적에 따라 사람들의 이목을 예수에게로 인도하는 훌륭한 역활을 하였다.

선재하신 로고스(The Pre-existent Logos)는 영원성, 인격, 창조와 신성으로 설명될 수 있다. 창세기의 태초의 시간을 내포함과 동시에 그 이전에 영원히 무궁한 무시간적 시간을 표시한다. ‘태초’(αρχη)라는 말에 의해 ην은 시간적인 연속선에서 무시간적(timeless), 계속적(continuous) 미완료과거 시제이다. 로고스는 시간의 개념으로 시작점이 있을 수 없으며  시간을 능가하는 무한계성의 영원성을 나타낸다.

로고스가 선재했다는 것은 로고스의 인격성을 의미한다. 로버트슨은  προs의 의미를 하나님과 얼굴을 맞대고 있는 것으로 정의한다. 더 나아가서 그는 대격을 가진 προs는 다른 사람과 서로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친밀함과동등함을 표현한다고 해석했다. 로고스가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계심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뿐 아니라 하나님과 영원한 사귐을 갖고 있다. 테니는 ‘함께’란 전치사는 연합은 물론 동등함과 인격의 구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았다. 요한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요 1:1)라고 선언한 것은 그의 로고스가 성육이전의 우주의 원리나 하나님의 사상으로서 무인격이었다가 성육 이후의 인격을 취하셨다는 의미가 아니고 성육 이전에 이미 인격자로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계셨다는 것이다. 요한이 로고스를 인격체로 표현하는 것은 구약을 직접 간접으로 124번 인용하거나 암시함으로 구약성경과의 영향을 보여 준다. 요한은 구약성경의 창조와 계시 및 구원의 관여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져오는 인격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구약성경에서 발견했다.

로고스의 신성은 요한이 로고스를 Θειοs로 표현하지 않고 θεοs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바렛트는 요한이 복음서 전체를 로고스의 신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일곱가지 기적, 예수를 사6:1-10에 현현하신 구약의 여호와와 하나님과 동일시함 εγω ειμι(I am)의 절대형, 예수님 자신이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사용되는 칭호들을 자기에게 돌림,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과 하나라고 선언함, 도마의 고백을 대비시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며 선언함(요 20:28), 예수 자신이 신앙을 요구하시며(요 9:35-38) 하나님과 동등한 신성을 주장한다.

헬라 사상의 이원론의 영향을 받은 필로와 영지주의의 로고스는 성육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가 사람(ανθλοφοs)이 아닌 육체(σαρχs)가 되어서 자신의 땅에 왔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불트만도 로고스의 성육(요 1:14)이 요한복음서의 전체주제라고 하였다. “말씀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는 말은 바로 하나님께서 자기의 거처를 우리 가운데 두셨다는 진정한 의미의 임마누엘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로고스의 성육에 의하여 하나님의 거처가 인간 가운데 영원히 거하게 되었고 그는 임마누엘이 되신다.  독생하신 로고스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 예수는 그 자신이 진리(요14:6)며, 세상에 비치는 참 빛(요1:9; 8:12)으로서 그의 성육신을 통하여 은혜와 진리를 인간에게 전달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준다. 요한은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의 광채와는 다른 표현인 독생하신 하나님이란 명칭으로 로고스를 하나님의 계시자로 설명한다. 하나님 아버지와 독특한 관계를 가진 독생자만이 아버지의 계시자가 될 수 있다.

로고스와 구원과의 관계는 깨닫게 하는 빛과 지식과 그 이름과 믿음이 함께 관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이시다. 진실로 예수를 따라가는 자는 ‘어둠속에서 걸어가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 8:12). 사람들이 그를 믿도록 초대 받은 것 같이 빛을 믿으라고 권면받고 있다(요 12:36). 요한이 말하는 지식은 일시적인  조사, 명상을 통하여 얻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역사적 활동들 속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된 경험의 관계속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지성적인 면에서 시인하는 것 이상의 인정(acknowledge)을 의도하고 있다. 예수를 안다는 것은 예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녀’란 믿는 자이다. ‘그의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말씀의 진정한 인격을 신뢰함을 뜻한다. ‘그 이름’은 고대인들에게 중요한 뜻을 나타내었으며 그 사람의 전인격을 표시한다. 우리가 예수를 인격자로 신뢰할 때 우리는 그 분의 이름을 믿는 것이다.  우리는 요한의 로고스의방을 세밀하게 살펴 보았다.

 

B.평가 및 제언

저자 요한은 눈으로 보았고 경험한 역사적 인물인 나사렛 예수를 로고스로 표현할 때 예수의 증언, 사도들의 전승, 초대 기독교 문화, 성령의 도움277) 세례 요한의 역활을 힘입었다. 로고스의 내용은 선재하신 창조자, 성육하신 계시자(빛, 진리, 은혜)로 이해278) 할 것을 요구한다. 그 이름을 믿는자 그리스도의 인격을 영접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 권고한다. 이제 우리는 요한의 로고스의 방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예수가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했던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주어지고 있다. 예수를 누구로 여기느냐? 그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우리들의 대답은 기독교에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고, 또한 그럴 것이다. 저자 요한은 이 질문에 대하여 명쾌한 대답을 제시한다. 요한의 대답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자279)는 요한의 로고스의 그 방의 주인의 자리에 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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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개혁하는 교회
글쓴이 : 청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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