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신학의 특징과 그 의미
요한복음과 요한 일, 이 삼서의 문체적, 신학적 특징의 유사성으로 인해 이 모든 문서를 합쳐 요한 문헌이라 부른다. 요한신학을 살펴보기위해 요한문서 전체를 살펴보아야 하나 본 논문의 연구범위는 요한복음으로 제한한다. 요한신학의 특징과 그 의미를살펴보기 위해 먼저 요한복음의 개관 및 저작 목적과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의 차이 중심으로 요한복음의 특징을 살펴보고, 그 다음에 이를 배경으로 요한복음에 나타난 요한 신학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I. 요한신학의 특징
1. 요한복음 개요
요한복음은 기독교 역사상 신자들에게 가장 영향력 있는 복음서였다. 요한복음은 초대 기독교의 기독론과 삼위일체론의 형성에지대한 공헌을 한 복음서였다.
1) 저자
요한복음은 세베데의 아들 요한이 연로하였을 때 에베소에서 쓴 책이라는게가장 유력한 설이다. 요한복음21장 24절에는 요한복음의 내용을 증언하고 기록한 한 제자를 언급하고 있다.이 제자는 익명으로 « 예수의 사랑한 제자 »(요 13 :22)로 나와 있는데 바로 사도요한이다. 이 제자는 최후의 만찬장에서 예수님의 품에 의지해 있는 것으로 나와 있고 (요13 :13-26), 제사장과 잘 아는 사이로 예수님이 심문을 받는 장소까지 따라갔고 (18 :15),예수님의 십자가 밑에까지 따랐다. 또한 그는 예수님의 부활을 확인하기 위해 베드로와함께 예수님의 무덤까지 달려갔고 (20 :2-10), 베드로가 순교하는 것과는 달리 장수하는 것이예고되었다.(21 :20-23)
2) 저작연대
요한복음이 저작된 시기는 90년 경으로 보는 것이 학자들의 대체적인 견해이다.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의 현격한 차이점 때문에 요한복음의 저작연대를 2세기 후반으로잡는 경향도 있으나 신성종박사는 다음과 같이 반박하고 있다. « 요한복음에 나타난 신학이 Hermetica (영지주의에 관한 2,3세기, 이집트에서 출판된 책들)와 비슷한 것은 틀림없으나헬메티가의 가장 중요한 용어인 gnosis(knowledge), mysterion(mystery), nous(reason)와 같은 단어가 요한복음에는 없다. 더구나 영지주의는 2-3세기에 나타난 것이란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1] 또한 요한복음의 일부를 포함하는 파피루스가 이집트에서발견되었는데 이 파피루스는 2세기 초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며, 요한복음이이집트에까지 전해진 기간 등을 감안하면 요한복음의 저작 연대를 1세기 말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2]
3) 요한복음의목적
신성종 박사는 요한복음의 기록목적에 대해 « 요한복음은 당시 영지주의적 경향을비판하기 위한 목적으로 1세기 말에 기록된 것 »[3]이라고 밝힌다.
요한복음의 저술목적에 대해서 저자 요한이 스스로 밝히는 말씀이있다. «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20 :30-31)이 말씀에 의하면 요한복음의 기록목적은 독자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생을 얻게 하는데 있다.앞으로 살펴볼 요한신학은 이러한 요한복음의 저술 목적과 일치하는 것이다.
4) 요한복음과공관복음의 차이
요한복음의 신학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으로 생각되던 출발점은공관복음과의 비교연구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요한복음이 공관복음과 차이점은 무엇인지,왜 그런 독특성이 나오게 되었는지 살펴 보도록하자.
첫째, 장소의 차이. 공관복음은 마지막 주간을 제외하고는 주로 갈릴리중심으로 기록되었으나, 요한복음은 주로 예루살렘을무대로 기록되었다.
둘째, 시간의 차이. 공관복음은 단 한번의 유월절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나 요한복음에는 적어도 세 번(요2 :13 ; 6 :4 ;13:1) 기록되었고, 요한복음 5장1절의 명절이 유월절이라면 네번이다.
셋째, 주제의 차이. 요한복음의 주제는 영생인데 반해, 공관복음에서 예수의 가르침의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이다.또한 예수의 가르침의 방법도 공관복음에서는 주로 비유의 형태라면 요한복음에서는 한사람과의 긴 대화 혹은 강화의 형태로되어있다.
넷째,자료의 차이. 공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출생, 세례, 변화사건, 귀신축출, 겟세마네의 고뇌, 최후의 만찬, 감람산 강화 등의 자료들은요한복음에는 나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하나님의 아들에게는 출생이나 세례, 변화사건 등 이런 사건들이 별로 중요하기 않기때문일 것이다.
다섯째, 죄의 개념차이. 공관복음에는 하말티아란 말이 죄의 행동, 곧 나타나는 죄에 대해서 사용된 반면 요한복음에서는죄의 원리를 더 강조한다. 요한복음에서 죄란 어두움이다. 죄악된 세상의특징이 어두움이기 때문이다. 또한 요한복음에서는 죄를 불신으로, 예수님께대한 미움으로 언급하고 있다.(3 :19-21) 신성종박사는 불신에 대한 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있다. « 요한복음에는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pisteuno eis)이 강조되고 있다. 공관복음에는 이 구절이 단 한번 나온다(마 18 :6). 그러나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13번, 요한의 해석에서 21번이나 나온다.불신은 죄의 본질에 해당한다(16 :9). 따라서 믿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고(3 :16),하나님의 진노가 그들 위에 머물러 있게 된다(3 :26). »[4]
여섯째, 구조의 차이. 신성종박사에 따르면 공관복음의 이원론은 주로 수평적이여서 현 세대와 미래 세대간의 대조이지만, 요한복음의 이원론은 주로 수직적이라고 한다. 즉 공관복음에서는 종말론적으로 역사가 종결되고,다가오는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한다는 이중성이 내포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이런 이중성은 두 세계의 시간의 이중성으로서 현재와 미래를 끝없이 대조를 이룬다고 한다. 그러나 요한복음에는현재와 미래사이의 긴장관계 대신에 위와 아래, 하늘과 땅, 하나님의영역과 세상 사이의 긴장관계가 있다고 주장한다.[5]
5) 요한복음의이원론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요한의 이원론은 수직적이다. 즉 아래 세상은 어두움, 사탄의 세력, 죄, 죽음의 영역이고, 위의 세상은 성령, 빛, 생명 등의 세상이라는 것이다.요한복음에 나타난 이원론을 크게 세가지로 나누어 살펴보자.
첫째, 어둠과 빛 (1 :5 ;8 :12). 요한복음에 가장 많이 나오는 이중성은 빛과 어두움의 대조이다. 아래의 세상은 어둠의 영역이고. 위의 세상은 빛의 영역이다. 그리스도께서 빛을 가져오기 위해 어둠의 영역안으로 오신 것이다.(요 1 :4)그러나 세상이 빛을 깨닫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1 :5) 그들의 행위가악함으로 고의적으로 빛을 거부했다. (3 :19) «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빛과 어두움의 전쟁이 시작되었으나 빛을 거부하는 행위는 곧 심판임으로 빛이 반드시 승리하는 것이다.
둘째, 육체와 성령. 요한복음 3장 6절은 다음과 같이 육과 영을 비교하고 있다. «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 6장 63절에도 «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라고 함으로 육과 영을 대조하고 있다. 이 말씀들에 의하면 육은 아래 영역에 속하는 연약함과무능력을 상징한다. 특히 영이신 하나님과 교제하기에 전적으로 무능력한 것이다. 요한복음 4장 2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신령과 진정으로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하심으로 육으로 드리는 예배의 무가치함을 강조하고 계신다.
셋째, 세상과 제자. 신성종박사는 요한복음에서는 세상(cosmos)이란 단어가 때때로 공관복음과 같이 ‘사람들이 거주하는 장소’(11:9; 16:21; 21:25) 를 의미하기도 하지만,요한복음에서는 comos가 공관복음에는 없는 ‘하나님과 반목하는 인류’라는(7 :7) 의미로도사용되고 있다는 것이 주목할 사실이라고 강조한다.[6]요한복음에는 우주론적 이원론의 요소나 세상을 부인하는 요소는 없지만 세상이 악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17:25 ;1:10)왜냐하면 이 세상 임금이 이 세상을 노예로 삼고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12 :31 ;14 :30 ;16 :11)이 세상은 예수님의 제자들과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으나 제자들의 복음 전파를 통해서 세상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될것이다.(17:21 ;20:39)
2. 요한신학의 특징
앞에서 공관복음은 수평적 종말론적 이원론이 강조되어 있고, 요한복음은 수직적 이원론이 강조되어 있음을 언급했다.그러나 이렇게 강조점이 다르다고 해도 결국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의 근본 신학은 같다. 왜냐하면 요한의 이원론은 수직적 종말론과 수평적 종말론 사이에 긴장관계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이 마태복음이나 다른 공관복음처럼 많은 구약인용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요한복음에도 구약의 예언이 예수님을 통해 성취되고 있음을언급하고 있다. 요한복음은 구약의 ‘인자’, 모세의 역할의 완성,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로서의 목자와 양, 포도나무와 가지 등의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신성종박사는 요한복음의 특징은 예수님의 사역을 구속사적줄기에서 보고 있다는데 있다고 한다. 그는 특히 예수님의 첫번째 기적인 가나 혼인잔치는 메시아 날의 상징(사 54 :4 -8 ;62 :4-5)이라고 보고 있다. 포도주는 메시야 축제의 기쁨을,정결예식에 사용된 항아리 6은 이제 끝나고 있는 구약시대를 상징하며,«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는 마리아의 말은 유대인의 정결예식이쓸모가 없다는 것을 반영해주는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그는 R. E. Brown를 인용하여 요한의 구원론은 수직적이자, 수평적이라고 강조한다.[7]즉 공관복음이 예수님의 위격과 사명을 통해 역사 속으로 침투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 안에서의 구원을 선포하고 있고,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위격과 사명 안에서 현재적 구원(종말론적 완성으로 맞이할)을 선포하고 있다.[8]따라서 영생이란 단어의 의미도 공관복음에서는 미래의 종말론적 축복으로 사용되고 있는 반면 요한복음에서는 현재 실현된 축복으로서의영생을 말한다.(요 3 :36)
II. 요한신학의 의미
이장에서는 요한신학이 의미하는 바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요한신학을기독론, 구원론,종말론,성령론, 교회론 순으로 살펴보자.
1. 기독론
요한복음의 중심 주제는 기독론이다. 요한에게 있어서 구원론, 성령론, 종말론 등이 모두 기독론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또한 요한 기독론은 예수의 신성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1) 나는…이다(I AM)
요한 기독론의 독특한 것 중의 하나는 예수님이 « 나는 …이다 (I AM)»라는 문구를 통해서 자신의 신적 본질을 설명하는 단어들을 도입한것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23번 « I AM »(ego eimi)란 표현을 사용했는데 그 중에7번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 « 나는 생명의 떡이요 »(6:35,41,48,51), (2) « 나는 세상의 빛이니 »(8:12), (3) « 나는 양의 문이라 »(10:7,9), (4) « 나는 선한 목자라 »(10:11,14),(5) «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11:25),(6) «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14:6),(7) « 내가 참 포도나무요 »(15:1).[9]이 일곱가지 의미에 대해서는 아래 6장에서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 나는 …이다»는 말씀은 «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있느니라 »(요 8 :58)는 절대적인 신의식을 반영하는것으로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고 있다. 즉 이 표현은 출애굽기 3장14절에 여호와께서 자신을 모세에게 나타내실 때 사용하신 표현과 동일한 표현으로 예수님이 영원 전부터 스스로 존재하신 분이란 것을 나타낸다.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2) 메시야
히브리어의 메시야란 말은 헬라어의 그리스도란 말과 동의어이다. 뜻은 ‘기름부음을받은자’란 것이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이 임명한 직분을 맡은 사람들,즉 제사장이나(레4 :3 ; 6 :22,),왕(삼상 16 :13) 또는 선지자에게(왕상 19 :16) 기름을 부었다. 그것은 그들이가진 직분이 하나님이 주신 거룩하고 인간이 침범할 수 없는 직책임을 표현한 것이다.[10] 그러므로 예수님이 그리스도란 의미는 예수님이 하나님께서우리의 구원을 위해 보내신 우리의 왕이요, 제사장이요 선지자이라는 뜻이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 ‘메시야’란 말은하나님에게서 기름부음받은 다윗의 자손으로서 이방의 멍에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켜주고 지상의 왕국을 성취해줄 정치적 메시야를 의미했다.그러나 신약성경의 메시야의 개념은 순전히 구원론적 의미를 가진, 유대인들과는 전혀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공관복음서에서는 그리스도라는 말은 몇 개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고유명사가아닌 하나의 칭호로 사용되고 있고, 요한복음에도 두 곳(1 :17 ; 17 :3)을 제외하고는 그리스도는고유명사가 아니라 호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는 요한복음의 저작 목적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기위함 임으로 요한은 예수님이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그리스도란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은 메시야로서의 예수님의 다양한 명칭들을 사용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1:34, 49)이나 ‘이스라엘의 임금’(1 :49), 그리고‘인자’(1 :51)가 그 대표적이다. 복음서가 진행됨에 따라 요한이 기록하는 메시야는 ‘말씀’(1 :1),‘하나님’(1 :1), ‘사람의 빛’(1 ;9),‘참 빛’(1 :9), ‘아버지의 독생자’(1 :14),‘세례 요한보다 더 큰자’(1 :15), ‘독생하신 하나님’(1 :18),‘주’(1 :23), ‘하나님의 어린양’(1 :29)으로 불린다. 요한은 이 많은 명칭들로 예수님을 표현하지만 그는 예수님의 유일성에 집중하고있다. 즉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메시야의 칭호 중에 ‘하나님의 아들’과 ‘인자’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좀 더 살펴 보기로 하자.
3) 하나님의아들
무엇보다 요한 기독론의 중심은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계시된아들로서의 예수님의 위치에 있다. 요한복음에서 아버지라는 단어가 자주 사용되었는데 거의 대부분은 예수님의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에 대해서 쓰였다. 특히 요한복음은 하나님을 하나님이라는 명칭보다도 « 아버지 »라는 명칭으로 더 많이 사용한다. 요한복음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될수 있다.
첫째,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다. (10 :30 ;17 :20-23) 이것의 의미는 (1) 아들의 기능과 아버지의 기능은하나(5 :17-18, 43 ; 14 :9-10), (2) 아들을 섬기는 것과아버지를 섬기는 것은 하나(5 :23 ; 8 :19 ; 14 :7, 21), (3) 아버지의 영광이 아들에게 나타남 (1 :14 ; 2 :11 , 18 ;4 :48, 53 ; 5 :36 ; 6 :32 , 43 ; 8 :21 ;21 :19), (4) 아들과 아버지의 친밀성(1 :14 ; 10 :15,38 ; 17 :20-23)이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은 자이다.아들은 아버지의 대리자, 대표자로서 아버지께 순종(4 :34 ;5 :30 ; 14 :31)하고 공경(8 :49)하며, 아버지를 영화롭게(17 :1)하고,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신다.(3 :35 ; 17 :5) 요한복음에서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은 유일하고 독특한 관계이다. 요한복음에서 « 아들 », « 독생자 » 등의단어는 예수님에게만 사용되고 신자의 하나님의 아들됨은 « 자녀 »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독생자이시라는 것은 그가 독특한 방식으로 하나님의아들이 된다는 뜻이다. 즉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그가 하나님의사랑의 대상이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그의 존재가 아버지로부터 나왔다는 것으로서의 의미이다.[11]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는데, 요한에게 있어서는 아들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았다는개념이 아주 중요하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보냄받았다는 개념은 매우 자주 나타나며, « 나를 보내신 아버지 » 라는 표현은 반복된다(5 :37 ;6 :44 ; 8 :16등). 특히 다음 구절은 하나님께서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3 :17)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목적은 세상을 심판하심이 아니라, 사람들을 구원하시려는것이였음을 강조하고 있다. 요한복음의 저작 목적이 독자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는것이라면,이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독생자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4) 인자
복음서에 있는 예수님의 칭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자라는말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메시야라부르지 않고 인자란 칭호를 사용한 것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님이 당시 유대인들의 메시야 개념과는 전혀 다른 사명을 가지셨기 때문이다.즉 예수님은 메시야의 역할을 고난의 종의 개념과 융합시켜 사용할 수 있는 용어로 ‘인자’가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하셨다고 신성종박사는 강조한다.[12]요한복음에서도 공관복음과 마찬가지로 인자라는 말은 오직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사용하신 표현이다. 그러나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이 인자란 용어를 사용하는데 서로 차이가 있다. 신성종박사에 의하면공관복음에서 사용한 인자라는 말은 첫째, 지상에서 사역하는 인자, 둘째, 굴욕과죽음을 당하는 인자, 셋째,하나님 나라를 열기위해 종말론적 영광중에 오시는 인자로 사용된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이런 구분은 맞지 않는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들려야 할 것을 언급하면서도 그 안에서 예수님의 영광을본다. 요한복음 3장 14절에서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처럼 인자도 들려야 하지만 이것은 저를 믿는자 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이 들림은 또한 그에게 영광이었다.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12 :23) «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13 :31)
예수님은 또 6장 27절에서인자는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주신다고 하시며 인자는 하나님의 인치신 자로 표현했다. 그리고 예수님은3장 13절에서 «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하심으로 1장 51절 «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는 말씀을 해석하는 단서를 주셨다.즉 인자는 하늘과 땅 사이를 연결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실현된종말론의 일부인데, 인자는 현재적으로 하늘의 출입문이요 하나님의 은혜가 이 땅에 임하는 장소요 하나님께서인간들 가운데 거하시는 장막이시다는 것이다. 영지주의적 가현설을 반박하기 위해 요한은 종말론적 말씀들을 많이생략하고 예수님의 삶의 실체를 강조했다(6 :51)[13]
5) 로고스
요한복음은 로고스(logos) 곧 말씀에서 시작한다. 로고스란 말씀, 이성, 질서란 뜻이다. 신약성서에서 예수를 로고스로 소개한 경우가 요한복음이 유일하다.
스토아철학에서는 로고스를 신의 내재의 원리로 본다. 로고스는 스토아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그들은 이성적 도덕 생활의 토대를 위해 로고스라는 개념을 사용하였다. 이 로고스는만물에 퍼짐으로써 우주에 이성과 질서를 제공한다고 한다.[14]플라톤주의에서는 로고스를 초월의 신과 피조 세계의 중재자로 보았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의유대인 철학자 필로는 교회에서의 로고스를 구약의 말씀(dabar)이라고 한다.[15]
요한이 사용한 로고스개념이 스토아철학이나 헬레니즘 사상에서 주장하는로고스와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당시 헬라사람들이 예수님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로고스란 단어를 사용한 것으로 추정할수 있다. 특히 그가 강조하고자했던 것은 로고스는 영원하다는 점이다. 신성종박사에 따르면 요한이 사용한 로고스의 개념은 아래와 같다.첫째, 예수님의 선재성을 언급하기 위해, 둘째, 예수님의 신성을 역설하기 위해, 섯째, 창조의대행자임을 주장하기 위해, 넷째,영지주의의 이원론(물질은 악하다는 사상)을반박하기 위해 요한복음 1장 14절을 기록한 것이다. 다섯째, 계시자로서 육체로 오셨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이다.[16]
이제 이 로고스가 의미하는 말씀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보자. 요한이 예수님을 로고스 즉 말씀이라고 한 것은 첫째,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지식이 된다는 뜻이다. 둘째,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말씀 그 자체라는 뜻이다. 셋째,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한 것은 예수님이 바로 우주의 근본이시요,창조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당시 헬라 사람들이 사용하는 로고스를 사용한 것이다.[17]
2. 구원론
요한복음의 저작 목적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독자들이 예수를믿어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한마디로 요한복음은 인간의 구원의 방법을 제시해주고 있는 것이다.여기서는 요한복음에 나타난 구원론을 죄, 심판, 구원의 순서로 살펴보자. 1) 죄와심판.
요한복음에서 강조하고 있는 죄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불신이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죄인 것이다. 불신은 죄의 본질에 속한다고 요한복음 16장9절은 말하고 있다. «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 이러한 죄의 결과는 심판인데,요한복음에서는 미래의 종말론적 심판이 아니라 현재적 심판을 강조하고 있다. «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요 3 :18) 구원받지 못한 자의 삶, 그자체가 심판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 »(요 3 :6)고 말씀하심으로 심판아래 있는 육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2) 구원.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전 인류는 하나님과의 관계가단절되었고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리고 사망과 심판을 받아야 할 존재가 되었다.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심으로 구원의 길을 예비하셨다.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요 3장 16절) 사망과 심판의 고통에서 구원받은 유일한 길은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 영접하는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 :11) 이처럼 구원이란 하나님께서 사랑과 은혜로 예비해놓으신 예수님을 영접한것이다. 김상복박사는 구원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 구원은 현재와 미래와 영원한 멸망에서 건져내어 영원한 새로운 생명을 주는 것을 말한다.영생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하나님이 세상과 화목을 이루셨기 때문에 인류에게 주어진 것이다.»[18]구원이란 죄로 인해 스스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죄인들을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받아주시는 일방적인 은혜와 사랑의 행위를의미한다.
3) 중생및 영생.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은 중생을 거듭남으로 표현하시면서 물과 성령으로 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수 있다고 하셨다. 이처럼 요한은 중생이 현재적인 것 처럼 하나님나라도 현재적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으로표현했다. 요한복음에서의 구원은 현재적인 것으로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고 예수님과하나님과의 생명의 관계성 속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는 삶인 것이다. 따라서 요한복음 15장 포도나무 비유에서 예수님은 «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고 하신 것이다. 이러한 열매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이 참으로 구원받은 자의 삶임을강조함으로 현재적인 구원을 강조하고 있다. 곧 구원받은 자가 누리는 영생은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원한삶 뿐만 아니라, 현재적으로 하나님과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축복도 포함된 다는 것이다. 영생에 대한 것은 아래 종말론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3. 종말론
공관복음서의 주제가 하나님의 나라라면 요한복음의 주제는 영생이다. 공관복음 역시 영생에 대해서 말한다.그러나 그 영생의 의미는 다가오는 세상의 생명이다. 즉 미래에 있을 종말론적 축복이다.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영생이 종말론적 영생으로도 사용되기도 하지만(5 :39 ; 12 :25),신자가 이 땅에서 맛볼 수 있는 것으로서의 영생을 강조한다.(6 :33 ; 10 :10 ;17 :3) 요한복음 17장 3절에서요한은 « 영생은 곧 유일하신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라고 정의함으로 영생은 하나님과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이고, 현재적인 관계로 부터 오는 생명이라고 했다. 또한 요한은 영생을 경험한 신자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며 (1 :12) 그 특권을 현세에서 누릴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러한 요한복음에서의 영생의 개념은 하나님의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잘 나타내주는데, 요한은 미래적 종말론과 현재적 종말론을 동시에 강조하고 있지만[19],그 무게 중심은 미래적인 것보다 현재적인 것에 쏠려있다. 요한에게 있어서 종말은현재에 경험되는 그 무엇이다.
4. 성령론
요한복음에는 성령님의 역할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성령님과 관련된 말씀을 중심으로살펴보고자 한다.
1) 성령님의호칭
첫째, 보혜사.(14 :16 ;14 :26 ; 15 :26 ; 16 :7) «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라. »(요 14 :16)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또 다른 보혜사를 아버지께 구하여 보내시겠다고하셨다. 이는 예수님 자신이 보혜사이심을 암시한다. 그리고 여기서 사용된‘또 다른’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알로스’로, ‘똑같은 것 가운데 하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따라서 성령님은 예수님과 똑같으면서도 또 다른 개체적 인격을 가지신분임을 나타내고 있다.[20] 보혜사란 표현은 공관복음에는 없는 표현으로 원어로는파라클레토스라 하며 돕는자, 변호하시는 분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이미보혜사로 제자들과 함께 지내셨듯이 성령께서 오셔서 예수님을 대신하고 제자들과 함께 사역을 계속하실 것을 약속하신 것이다.[21]
둘째, 진리의 영(14 :17 ;15 :26 ;16 :13). « 진리의 성령이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6 :13)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시다. 진리의 영이란 성령님께서 진리의 근원이 되시며,세상에 진리를 선포하신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으로 진리 되신 예수님을 증거하시고사람들을 그에게로 인도하신다.
셋째, 물(4 :15), 생수(7 :38). «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4 :14)예수님은 성령님을 물로 호칭하셨다. 이것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야곱의 우물물과 대조하여사용하신 상징어이다. 이와 유사하게 예수님은 성령님을 생수라고도 말씀하셨다. 이는 초막절을 맞아 아래와 같이 말씀하셨다. «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7 :38-39)예수님은 물, 생수를 사용하심으로 성령님이 우리 영혼의 갈증을 만족시켜 주시는 분으로묘사하고 있다.
2) 성령님의사역
첫째, 거듭나게 하신다.(3 :5-6)성령님의 도움 없이는 중생은 있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오직성령으로 난 것이 영이기 때문이다.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둘째, 교회 예배를 예배되게 하신다.(4 :23-24)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진정한 예배는 장소에 관계없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라고하셨다.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의 받으시는 예배가 되기 위해 성령님이 주관하시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셋째, 예수님을 증거하신다.(15 :26)성령님은 예수님의 사역과 영광을 증거하신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은 제자들에게 모든것을 가르치시고 예수님이 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신다.
넷째, 진리로 인도하신다.(16 :13)진리의 성령님은 제자들을 진리로 인도하신다. 성령님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것을 말한다고 함으로 성령님은 바로 예수님을 대신하여 진리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다섯째, 죄, 의,심판에 대해 세상을 책망하신다.(16 :8-11) 죄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신다는뜻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임을 세상에 알리신다는 뜻이다. 의에 대해서 책망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의이신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성령님은 또한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는데 이는 세상 임금이 이미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세상의 빛 되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아니함으로 벌써 세상은 심판을 받은 것이다.(요 3 :18)
여섯째, 영원히 함께 하신다(14 :16) «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라. » 보혜사이신 성령님은 제자들을 고아와같이 버려두지 않으시고 영원토록 함께 계신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성령님께서 오셨고,한번 오신 성령님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는 것이다. 이처럼 성령님은 신자가 중생할때 부터 신자의 모든 삶의 영역에 관여하며 영원토록 지키시고 인도하시는 영이시다.
5. 교회론
요한복음에는 교회라는 단어가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요한은 그의 독특한 용어와 사상을 가지고그의 교회론을 전개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요한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는 ‘목자와 양’(10 :1-8), ‘포도나무와 가지’(15 :1-7)등의 이미지를 이용하여 새 하나님의 백성을 그리고 있다.
이러한 개념에서 도출한 요한의 교회론의 첫번째 특징은 철저하게 그리스도 중심적이라는데 있다. 요한복음에 사용된 모든 교회론적 이미지는 그 핵심이그리스도 중심적이다. ‘목자와 양’과 ‘포도나무와 가지’의 이미지를 예로 들면, 이 두 이미지는구약에서 이스라엘을 상징하던 것이었는데 요한복음에서는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으로 쓰인다. 구약과 공관복음에서포도원이 이스라엘을 상징한다면,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참 이스라엘이다. 다시 말해 교회를 형성하는 구성요소로서 예수 자신이 필요충분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예수가 곧교회인 것이다. 신자는 양과 포도나무 가지로서 교회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 중심적 교회상은 바울의 몸 교회론(고전 12 :12-27)에서도 볼 수 있다.
요한교회론의 두 번째 특징은 그리스도와신자와의 개인적인 관계를 중요시 한다는데 있다. 목자와 양은 ‘알다’라는 동사로 상호간의 친밀한 관계를나타낸다. 목자와 양의 관계는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관계로 이루어진다.
요한교회론의 세 번째 두드러진 특징은범우주적 교회상에서 나타난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은 기도하실 때 제자들이 하나가 되게 해주시도록 기도하신다.(17 :11)그리고 예수님은 이어서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여 예수님을 믿게 되는 모든 성도들이 예수님과 하나님안에서 하나가 되도록 기도하고계신다. 이를 볼때 요한복음에 나타난 교회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공간과 시간을 초월한 범우주적 교회인것이다. 이것은 칼빈이 기독교강요 4권 1장 3절에서 언급한 « 무형교회 »의 의미로 현재 지상에 살고 있는 택함 받은 성도들과 세상이 시작된 이래 택함 받은 자들 모두를 지칭하는 것이다.[22] 이상의 요한의 교회론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신자들의 교회 내에서의연합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연합에서 나온 개념이다.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그리스도의 몸으로 살아있는 유기체인 것이다. 그리고 요한복음 속의 교회의 사명은 아들과 성령과 제자들을 파송하는 것이며, 제자들은 예수님의본을 따라 세상으로 파송되어 교회를 확장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6. 요한복음에 나오는 비유(표적) 예수님께서말씀하신 « 나는 …이다 » 즉 « I AM »(ego eimi)라는 표현중 중요한 7가지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비유라기 보다는 표적 (sign)으로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한데, 이 표적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해준다. 1) 생명의떡
오병이어의 이적 후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 나는 생명의 떡이라 » (6 :35)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은 사람들이 «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무엇이니이까 ? »라고 물으며 « 기록된 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6 :30-31)라는 말에 대한 답으로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로 부터 떡을 준 자는 모세가 아니라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데, 이 생명의 떡이 바로 자신이심을 선포하셨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6 :51).«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6 :48).
사람들은 심한 영적 굶주림에 빠져 죽어가고 있다. 예수님께서 « 나는 생명의 떡이라 »말씀하신 것은 자신이 이 영적 굶주림을 충족시키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생명의 떡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즉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라는 것은 그가 영적으로 죽은 자들에게 생명을 전달해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비유로 설명한 것이다.
2) 세상의빛
빛은 요한복음의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요한은 그 용어 phos(포스)를 23회 사용하여, 신약성경의 어떤 책에서 나타난 것보다 두배 이상 많이 사용하기 때문이다. 레온 모리스는 빛에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 빛은 선하고 바른 것을 말하는 자연적인 방식이며, 자주 자연스럽게 악을 말하는 방식인 어둠과대조되어 발견된다. »[23]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8장 12절에서 «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고 하셨다. 이 말씀에서 주님께서는 세상은 어둠이며, 참 빛은 주님 자신이며 그 빛은 세상을 비추는 영원한빛임을 강조하셨다. 이는 예수님 자신 만이 이 세상의 죄와 사망의 어두움을 물리치시는 영원한 생명의 빛이심을의미하는 것으로 사람들은 그를 믿고 영접함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빛을 깨닫지못했을 뿐만 아니라(1 :5) 그들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함으로 고의적으로 빛을 거부했다.따라서 유일한 참 빛이신 예수님을 거절한 그 자체는 이미 정죄되고 심판 받은 것이다. «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 (3 :19) 예수님은 이 세상의 빛이시다. 그러므로 어두움가운데 살고 있는 사람들의 영원한 운명은 예수님에대한 그들의 반응에 달려있다는 것을 요한은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영원한 어두움에 거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예수님의 초청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12 :36)
3) 양의문
양과 목자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두 번씩이나 자신을 « 문 »으로 비유하셨는데(10 :7, 9), 첫번째는 « 양의 문 »으로, 두 번째는 단순히 « 문 »으로 언급하셨다. «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 :9)양은 문을 통해서 출입하며, 우리 안에서 안전을 누린다. 신성종박사는 주님이 자신을 문이라고 언급한 것은 세가지 의미가 있다고 설명한다. 첫째, 구원(9절상), 둘째는 안전(9절하), 셋째는 만족을 의미한다.[24]즉 예수님이 양의 문이되신다는 의미는 예수님을 통해서 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고, 그를 통해서 안전과 필요한 꼴을 얻게 된다는 의미이다. 양의 우리에 문이 하나 밖에 없는 것을고려할 때, 예수님께서 나는 문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자신이 양들이생명으로 들어가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 되심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레온 모리스는 배타적인 구원의개념을 설명한다. « 배타적이라는 것은 오직 한 문,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이다. 모든 인류를 위한 오직 한 문만이 있다면 예수에대한 매우 중요한 어떤 것을 다시 한번 기억할 수 있다. »[25]
4) 선한목자
문에 대한 비유에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 나는 선한 목자라 »고 말씀하신다. « 나는 선한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목숨을 버리거니와 »(10 :11) 우리는 여기서 선한 목자 예수님의 역할에 대해서알수 있다.
첫째, 선한 목자 예수님은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삯군은 이리가 오면, 양들을 버리고 도망한다. 그러나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위험을 무릎쓰고 양들을 보호한다. 그러나 어떤 목자라도 양들을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목자는 드물다. « 선한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 »는 이 말은 예수님께서 그의 죽음을통해 양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진리를 말하고 있다. 양은 무력한 존재이다. 이처럼 죄인들도 그들의 구원을 가져오기에 무력한 존재들이다. 그러나 선한 목자가 그의 생명을버리므로 양들은 구원을 받는 것이다.
둘째, 선한목자는 양들을 잘 알고 그들을 생명의 문으로 인도한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0 :14-15)양은 무지하고 무능하다. 즉 별다른 방어수단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양은 잠이 많고, 눈이 어두워서 멀리 보지 못한다. 따라서 양은 목자 없이는 생존을 유지하기 어려운 동물이다. 그러나 이러한 단점은 오히려 목자의절대 의존성을 갖게하는 장점이 되기도 한다. 목자의 음성을 잘 듣고 따라 갈때 생명의 꼴을 얻을 수 있기때문이다. 10장 3-5에 보면 목자의 음성을 아는 양들은 목자를 따르지만타인의 목소리는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를 따르지 않을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을 위한 양들의삶의 양식은 예수님에 대한 절대 순종임을 알 수 있다. 즉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사랑과 순종의 관계인것 처럼 예수님과 양의 관계도 바로 사랑과 순종의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아시는것 처럼 예수님은 양들을 다 아신다. 그들의 필요와 안전 및 구원의 길을 다 아신다. 따라서 예수님의 사랑을 영접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우리가 생명의 꼴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5) 부활이요,생명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앞에서 슬피 울고있는 마르다에게 자신은 부활이요생명이심을 선포하셨다. «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내가 믿느냐. »(11 :25-26)마르다는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예수님께서 단지 부활과 생명의 주시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가부활이시며 생명이시라고 선포하신다. 즉 예수님은 자신을 부활과 생명과 동일시 하고 계신것이다.예수께서 생명과 부활 그 자체이심으로 죽음이 그에게는 아무런 장애물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잠으로 표현하신 것이다. (11 :11) 잠은 깨는것을 전제로 하는 것 처럼 부활이요, 생명되신 예수님에게 있어 죽음은 부활을 전제로 한 것이다.
6) 길,진리, 생명
예수님께서는 요 14장 6절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자가 없느니라 »고 하셨다. 이 말씀을 하신 배경은 다음과 같다. 예수님께서 십자자에 못박히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임박한작별을 하시며 «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일리라 »고 하시자, 도마는 «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라고 하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
첫째, 예수님께서는 « 나는 길이다 »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 여러 길들 중의 하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그가 바로 그 길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그가 아버지께로 가는 유일한 길로써 그로 말미암지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는 뜻이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그가문’이라는 주장처럼, 여기에도 배타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즉 예수님께서아버지께 이르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이에 대해 히브리서 10장 19-20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 예수님께서는 그의 죽으심을 통하여 죄인들을 하나님께로인도하시는 유일한 새롭고, 산 길이 되신 것이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 나는 진리이다 »고 선포하신다. 예수님 자신이 진리 그 자체이시라는 뜻이다. RudolfBultmann에 따르면 « 진리는 예수에 의해서 전달된 하나님에 대한가르침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발생하여- 그 자체를 계시하시는 하나님의바로 그 실체 »라고 하고 Kummel은 « 예수님이 진리이시라는 것은 그가 하나님께 속한다 »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했다. [26]
셋째, 예수님은 « 나는 생명이다 »고 하셨다. 이 말씀은 «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라는 말씀과동일한 의미이다. 예수님의 생명이 하나님의 생명처럼 자존함으로 예수님은 생명 그 자체이신 것이다.요한복음 5장 26절에 이를 설명하고 있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 예수님은 생명 그 자체로서 다른 사람들의생명의 원천이 되시는 것이다. 신성종박사는 요한이 예수님을 생명이라고 한 것은 크게 세 가지의 뜻이 있다고했다. 1) 예수님이 모든 존재의 근원이란 뜻이다. 만물이 주님에 의해서창조되었고, 주님을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뜻이다. 2) 예수님이 존재의의미요, 목적이란 뜻이다. 3) 예수님은 ‘완성’이시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생명의 시작이요 완성이시다.이 말씀은 우리가 완전하게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생명의 근원이요, 생명으로 나가는 길이요, 생명의 진리이시다.[27]
7) 참포도나무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5장 1절에서 «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하셨고 5절에서 «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라고하셨다. 첫번째 말씀에서는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를, 두번째 말씀에서는자신과 신자들과의 관계를 말씀하셨다. 포도나무를 기르는 이유는 포도를 생산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포도는 그 가지에서 열매를 맺는 것인데 이것은 신자가 열매를 맺기 위해 예수님과의 살아있는 연결, 즉 교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예수님은 15 :5절에서 이 예수님과의 일체성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할 수 없음이라. » 우리 신자의 삶은 예수님과의 연합을 통한 열매 맺는 삶이되어야 한다.구체적으로 어떤 열매를 맺어야 하는지 언급하지 않았지만 포도나무가 예수님이라면 우리는 예수님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이다.즉 우리의 삶을 통해 예수님의 인격과 영성에 맞는 열매들을 맺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가 우리 삶을 통해 전달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할 중요한 사실은 우리 스스로는 아무런열매도 맺지 못하기 때문에 참포도나무되신 예수님과의 생명력있는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론
요한은 우리에게 요한복음이 «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고 »(20 :31)기록되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가 요한신학의 특징과 그 의의를 연구하면서 이미살펴본 것처럼 요한복음이 예수님에게 집중하고 있는 이유이다. 요한은 예수님이 확실히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아들이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노력한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의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믿고, 생명을 얻어야 한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자는 구원에이를 것이고 거절하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다. 여기서 믿음의 중요성이 강조되는데 믿음은 꼭 잡는 것이고,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다 내어맡기는 것이고, 순종하는 것이다. 이믿음에는 인격적인 대상이 있는데 바로 요한복음에서 제시하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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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수, "요한신학으로 새로 본 요한복음", 논문, 평택대.
김현일. "요한복음신학의 중심으로서의 요한복음 6장 연구". 신학학석사학위논문, 장로회신학대학교, 2004.
<!== Not Allowed Tag Filtered --><font face="Times New Roman" size="3"></font> [1]신성종, 요한복음 강해와 설교(서울 : 국제사이버신학대학원, 2010), 11. [2]김동수, 요한신학으로 새로 본 요한복음, 논문, 평택대, 5. [3]신성종,Ibid., 12. [4]신성종, Ibid., 15. [5]신성종, Ibid., 10-11. [6]신성종, Ibid., 14. [7]수직적이라 함은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독특한 개입을말하고, 수평적이라함은 예수님의개입과 구원역사 사이에 관계가 형성된 것을 의미한다. [8] 신성종, Ibid., 16. [9] 신성종, Ibid., 156. [10] 신성종, 신약신학(서울 : 기독교문서선교회, 1995),97. [11] 레온 모리스, 요한신학, 홍찬혁역(서울 : 기독교문서선교회,2009), 128. [12] 신성종, 신약신학(서울 : 기독교문서선교회, 1995),105. [13] 신성종, 요한복음 강해와 설교(서울 : 국제사이버신학대학원), 18-19. [14] 신성종, Ibid., 17. [15] 김영재, 기독교교회사(수원 : 합동신학대학원출판부, 2005), 104-105. [16] 신성종, Ibid., 17. [17] 신성종, Ibid., 26-27. [18] 김상복, 예수의 신학I(서울 : 국제사이버신학대학원,2010), 360-361. [19] 즉 하나님 나라는 already(벌써)왔지만 그러나 그 완성은 not yet(아직 이루어지지않았다)는 것이다. [20] 김상복, Ibid., 205. [21] 신성종, Ibid., 22 [22]Jean Calvin, Institution de la relisgion chrétienne(Aix-enProvence : KERYGMA ; Charols : EXCELSIS, 2009), 949. [23] 레온 모리스, Ibid., 153. [24] 신성종, Ibid., 239. [25] 레온 모리스, Ibid., 156. [26] Rudolf Bultmann, Theology of the NewTestament II(Londonm 1955), 19. (레온 모리스, Ibid., 162.에서 재인용.) [27] 신성종, Ibid., 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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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개혁하는 교회
글쓴이 : 청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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