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신학을 신론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통적인 신학자들이 단순한 논리적 순서로서의 가치를 뛰어넘는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다. 루이스 벌코프는 "교의학 혹은 조직신학에 관한 연구는 대개 신론으로부터 시작한다.(중략) 만약에 우리가 신학을[이] - 만유의 시작이며, 근거이며, 귀착점인 - 하나님에 관한 체계적인 지식이라는 전제를 계속 밀고 나간다면, 신론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충분한 이유가 있다.(중략) 19세기초에 이르기까지는 교의학 연구를 신론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거의 일반적인 관례였었다. 그러나 슐라이에르마허(Schleiermacher)의 영향으로 인하여 변화가 일어났는데, 그는 새로운 방법을 소개함으로써 신학의 학문적인 특성을 보장하려고 노력했다. 인간의 종교적 의식이 신학의 자료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을 대체해 버렸다. 하나님의 권위 있는 계시로서의 성경에 대한 신앙이 불신을 받게 되었으며, 인간 스스로의 감정적이거나 혹은 합리적인 이해에 근거한 인간의 통찰이 종교적인 사상의 표준이 되었다.(중략) 그는 신론을 연속적인 것이 아닌, 단편들 속에서만 다루었으며, 삼위일체에 관한 항목으로 교의학을 끝맺었다. 그의 출발점은 신학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인간학적이다"1)라고 말했는데, 그는 조직신학을 신론으로 시작하는 것이 곧 복음적인 신학을 고수하기 위한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여하튼 우리도 신론을 처음으로 놓고 조직신학에 대한 논의를 해 보려고 한다. 전통적으로 신론에서는 하나님의 존재와 인식(하나님이 계신가 아니 계신가, 그리고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나님의 속성(to be의 문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to do의 문제) 등을 다루어왔다. 대부분의 조직신학 책들이 다 이 순서를 따르고 있고, 논리적인 순서를 따져 보아도 이 순서가 합리적이다(합리적인 것이 바로 조직신학의 특성이지만).
1. 하나님의 존재와 인식
1) 하나님의 존재
신학에 있어서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말은 전제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면, 이미 그에게 있어서 신학은 설 곳이 없게 된다. 소위 "사신신학"(알티머)이 신학일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이를 지적하는 것이다. 그리고, "개혁파 신학은 하나님의 존재를 전적으로 합리적인 전제로 간주하지만, 합리적인 논증에 의하여 이러한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중략) 기독교인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진리를 신앙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 신앙은 맹목적인 신앙이 아니라 증거에 기초한 신앙이며, 그 증거는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인 성경 안에서 발견되며, 이차적으로는 자연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 속에서 발견된다."2) 결국 우리는 하나님께서 존재하신다는 사실에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이는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시와 증거에 근거하는 것이다.
2) 하나님에 대한 인식
이는 사실 서론에서 다룬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해서, 성경을 통해, 성령의 조명을 받아 하나님을 인식한다. 다른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방법은 없다는 것이 전통적인 입장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말할 때에 "선천적(본유적, 생득적) 지식"과 "후천적 지식"을 나누어 말하는 경우가 있다. 선천적 지식이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접촉하게 될 때에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지, 어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태어나면서부터 갖게 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것은 대부분 후천적인 지식에 근거한다. 후천적 지식은 일반, 특별 계시로부터 나온다. "그것은 정신 속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지식에 대한 의식적이며 끊임없는 추구의 결과로 생겨진다. 그것은 감각과 반성, 논구와 토의 등 지루한 과정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인간의지의 자발적인 탐구와 끊임없는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3)
2. 하나님의 속성
1)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속성을 다루기 전에 서론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다루곤 하는데,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자기계시이기 때문이다. 구약에서는 엘, 엘로힘, 엘리욘, 아도나이, 샤다이, 엘 샤다이, 야웨, 야웨 츠바오트, 신약에서는 데오스, 퀴리오스, 파테르(아버지) 등의 명칭이 제시되어 있다. 이들이 전부가 아니고, 신구약 성경에는 하나님을 지칭함에 있어서 비유적인 표현들도 많이 사용되고 있는데, 여하튼 이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속성을 알 수 있다고 한다.
2)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절대적 속성)
하나님의 속성을 논할 때에, 주로 비공유적 속성과 공유적 속성을 나누어 설명한다. 비공유적 속성이란, 하나님께만 있고 피조물, 특히 인간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속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이 분류가 유용하기는 하지만 완전하지는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완전하게 공유적이거나 완전하게 비공유적인 하나님의 속성이란 없기 때문이다."4) 여하튼 비공유적 속성에는 독립성(자존성), 불변성, 무한성(영원성-편재성), 통일성(단순성) 등이 제시되어 왔다(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는 웨인 그루뎀의 설명이 매우 유용하다).
독립성(Independence)는 자존성(aseity)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이나 피조물들을 필요로 하시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와 다른 피조물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고 기쁘시게 할 수 있다"5)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아주 특이하신 분으로서, 단순히 피조물을 필요로 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필요로 할 수도 없는 분이시다.(중략) 그럼에도 이 교리를 균형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나 다른 피조물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도 있고 그를 기쁘시게 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고, 하나님의 독립성이 우리를 무의미하게 만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6)
하나님의 불변성은 "하나님은 그의 존재, 완전성, 목적 그리고 약속에 있어서는 불변하나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행동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각 상황에 따라서 다르게 행동하신다"7)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마음을 바꾸신 것처럼 보이는 부분도 있다. 그루뎀은 "이 사례들은 어느 시기에 주어진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와 의도에 대한 진실한 표현으로 이해해야 함에는 틀림이 없다. 만일 상황이 바뀐다면, 당연히 하나님의 의도나 태도에도 변화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는 단지 하나님께서 각각의 상황에 대해 다르게 반응을 보이신다는 의미일 뿐이다"8)라고 주장한다. 그루뎀은 하나님의 불변성을 상당히 역동적인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는데, 그는 성경적 표현의 테두리를 넘지 않으려 하고 있다. 하나님의 불변성을 지나치게 확대하여 하나님은 감정을 가지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주장이 있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성경에 근거하여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구축하는 것이라기보다 하나님의 불변성에 대해서 철학적 논의를 전개한 것에 불과하다고 본다. "우리의 감정의 근원이시며 우리의 감정을 지으신 하나님은 감정을 소유하고 계시다."9) 이렇게 생각을 전개하다 보면, 하나님의 불변성에 대한 교리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이 변하신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면, 이 교리의 중요성이 좀 더 선명해질 것이다."10)
하나님의 무한성에는 영원성과 편재성이 있는데, 이를 따로 다루어 보자. 영원성이란 하나님께서 시간적으로 무한하시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그 존재에 있어 시작이나 끝, 혹은 순간의 연속이 없고 모든 시간을 똑같이 생생하게 보신다. 그럼에도 시간 안에서 사건과 행동을 관찰하신다."11) 하나님께서는 시간을 초월하신다. 하나님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것을 똑같이 생생하게 보시고 아신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께서 사건을 시간 안에서 보시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을 초월하고 계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시간 안에 들어오셔서 역사하신다.
편재성은 "하나님은 크기나 공간적인 차원을 갖지 아니하시며, 모든 공간에 자신의 전 존재로 현존하시며, 또한 각각의 상이한 장소에서 상이하게 행동하신다."12)고 정의된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우주 어디에나 계신다고 고백하는 부분이 많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곳에 계시지만, 그 각각의 장소에서 다르게 행동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주를 주관하시고 하나님께서 의도하신대로 운행하도록 하시기 위해 임재하시며,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며 또한 벌을 주시기 위해 임재하신다. 구약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위한 특별한 장소가 지정되지만, 새 언약 아래에서는 우리는 어디에서나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게 되었다. "요약하자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전체로 우주의 모든 부분에 임재해 계시지만, 그럼에도 각각 다른 장소에서 다르게 행하신다. 또한 성경이 하나님의 임재에 관해 말씀하실 때는 대체로 복을 주기 위해 임재하시는 것을 의미하며, 그래서 우리의 일상용어도 이와 같은 성경의 의미를 반영하고 있다."13)
하나님의 통일성은 "하나님은 여러 부분으로 나뉘어지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각각 다른 시간에 강조된 다른 하나님의 속성을 본다."14) 이를 하나님의 단순성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여러 속성들이 모여서 하나님의 성품을 이룬다고 생각해서는 안 됨을 알 수 있다. 또, 하나님의 속성은 하나님의 참 존재에 부가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완전히 통일되고 하나가 되신 분이다. "하나님의 각 속성은 단지 하나님의 전체적 성품의 일면을 묘사하고 있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중략) 더욱이 하나님의 통일성에 관한 교리는 하나님의 어느 한 속성을 다른 속성들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지 못하게 해준다."15)
3) 하나님의 공유적 속성
"하나님의 공유적 속성들은 인간의 속성들과 어떤 유사점을 띄고 있는 속성들이다. 그러나 인간 속에서 발견되는 것들은 하나님의 무한, 완전한 것에 비해, 다만 유한, 불완전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16) 여기에는 지식, 지혜, 선, 사랑(은총, 긍휼, 오래 참으심), 거룩, 의(義), 진실, 주권 등이 포함되어 왔다. 이 각각의 속성에 대해서도 많은 논의들이 있으나,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속성을 가지고 계시며, 그와 비슷한 속성들이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서, 그리고 일반은총(계시)의 범위에서 모든 인류에게 미치고 있음을 아는 것으로 멈춘다.
3. 삼위일체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속성(존재)의 문제와 연관되는 것이지만, 그 중요성 때문에 따로 다룰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그의 본질적 존재에 있어서는 한 분이시나, 이 한 분 안에는 성부, 성자, 성령이라 불리우는 삼위(3인격)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 삼위는, 여러 사람의 여러 인격들처럼, 전혀 분리된 세 인격이 아니다. 삼위는 오히려 신적 본질이 존재하는 세 형태인 것이다. 동시에 명심해야 할 것은 신적 존재에 있어서의 이들 자기 구별은, 그들이 서로 인격적 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그런 성질의 것이라는 점이다. 성부는 성자에게 말씀하실 수 있으시며, 또한 성령을 파송할 수 있으시다. 이 삼위가 그 본질적 존재에 있어서 하나라고 하는 여기에 삼위일체의 참된 신비가 있는 것이다."17)
이 삼위일체 교리는 성경 안에서 점진적으로 계시되어 온 것이다. "구약성경에 삼위일체에 관한 교리가 공공연히 증거된 적은 없지만, 하나님이 단순히 한 위(person)로 존재하신 것은 아님을 제시하거나 암시하는 구절들은 여럿 있다.(중략) 신약성경은 성자께서 이 땅의 역사에 들어오신 사건으로 시작한다. 따라서 이 사건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본질에 관한 것을 좀 더 분명하게 가르쳐 주는 계기가 될 것을 기대할 수 있고, 실제로 그러하다."18)
Grudem은 이 삼위일체에 대한 중요한 명제가 세 가지 제시하고 있다. "1. 하나님은 삼위이시다. 2. 각 인격체는 한 하나님이시다. 3.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19) 그리고 이 세 명제들 중에 하나라도 부인되어서는 안 된다고 언급한다. 그러나, 이 세 명제들은 서로 조화되어서 하나의 진리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교리를 설명하기 위해 자연이나 혹은 경험으로부터 유사한 것을 끌어내려고 했다. 이 유비들은 초보 단계에서는 도움이 되지만, 좀 더 주의 깊게 살펴보면 모두 결함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20) 삼위일체를 유비로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삼위일체의 진리는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설명하는 것이기에,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피조물에서 찾을 수 없다.
4. 하나님의 사역
신론의 마지막 부분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역을 하고 계신가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이다. Berkhof는 하나님의 사역의 첫 부분을 하나님의 작정으로 시작하는데, Grudem은 창조로 시작한다. 하나님의 작정으로 시작하는 것은 사실 성경의 순서라고 보기는 힘들다. 분명 성경은 창조로 시작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작정, 창조, 섭리로 대표되는 하나님의 사역 중에서 작정의 부분은 구원으로 넘기는 입장을 취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이는 Calvin의 입장이기도 하다.
1) 창조
하나님은 자유적인 행위로 우주를 창조하셨다. 이는 필연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는 자아충족자이시기 때문에 세계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우주창출은 하나님의 고유의 필연성에 의하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의 완전한 자발적 결단에 의한 것이었다. 이것은 일체의 범신론적 교리에 대항하여 강조되어야 한다.(중략) 하나님은, 창조사역을 통하여, 세계를 만드실 때 자기 존재와 구별되어 있는 분리된 존재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우주는 그 자체가 하나님이나 또는 하나님의 한 부분으로 생각될 수 없다. 동시에 하나님은 세계를 구성하시되, 세계가 항상 하나님께 의존하여, 매일같이 그의 권능에 의하여 유지되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결코 그의 전창조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속에 현재하고 계신다."21)
하나님은 태초에 말씀으로 온 만물을 창조하셨다. 이는 어떤 기존 재료를 사용하지 않으셨음을 의미하며, "태초" 이전에는 끊없는 영원이 있었을 뿐임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계를 창조하신 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함이었다. 인간은 하나님의 모든 창조로부터 혜택을 받지만, 창조의 궁극적인 목적이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창조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본래 피조물에게서 경배와 찬송으로 영광 받으려고 세계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다만 그의 영광의 나타나심을 위하여 창조하셨다는 것을 뜻한다."22)
2) 섭리
"섭리란,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을 보존하시며, 세계에서 생성하는 모든 일에 행동하시며, 그리고 만물을 그 정해진 목적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역"23)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는 보존, 협력, 통치가 포함되어 있다. 섭리를 다시 일반 섭리와 특별 섭리로 나누기도 하는데,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의 구분과 그 틀이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전통적인 입장에서 섭리를 다룰 때에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악의 문제와 이적의 문제다. 하나님이 통치하심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할 수 있느냐의 문제, 그리고 자연법칙에 의거하지 아니한 현상들이 기적이 있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를 상당히 중요하게 보는데, 이는 성경의 무오성 문제와 깊이 연관되기 때문이다. Grudem은 기도의 문제도 섭리에서 중요한 것으로 다루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당신의 계획에 의해 섭리해 가고 계신 것이라면, 우리의 기도는 그 가운데에서 어떠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것인가? 이런 문제는 역시 그리 쉽게 풀릴 문제처럼 보이지 않는다. 일단 우리는 악, 기적, 기도의 문제들이 모두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들 문제에 대한 언급은 개관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논의는 다음 기회로 미루려 한다.
지금까지 조직신학 신론을 개관하였다. 특히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에 대해서 조금 더 관심을 두고 있는데, 사실 각각의 모든 영역들이 여러 저작들을 통하여 첨예한 토론이 벌어질 수 있는 문제들이다. 우리는 여기서 신론을 알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신론에서 어떠한 문제들이 떠오르고 있는가를 개관하고, 우리의 기본적인 태도가 무엇이겠는가를 제시하는 선에서 마감하였으므로, 이후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탐구하는 모습이 있기를 바란다.
1) Louis Berkhof, Systematic Theology, 권수경, 이상원 역, 벌코프 조직신학(상),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2), pp. 205-206.
2) Ibid., p. 207.
3) Louis Berkhof, Manual of Christian Doctrine, 신복윤 역, 기독교 신학개론, (서울: 성광문화사, 1996), p. 61.
4) Wayne Grudem, Systematic Theology, 노진준 역, 조직신학(상), (서울: 도서출판 은성, 1997), p. 213.
5) Ibid., p. 219.
6) Ibid., p. 222.
7) Ibid., p. 223.
8) Ibid., p. 225-226.
9) Ibid., p. 227.
10) Ibid., p. 230.
11) Ibid., p. 232.
12) Ibid., p. 239.
13) Ibid., p. 245.
14) Ibid., p. 245.
15) Ibid., pp. 248-249
16) Louis Berkhof, 기독교 신학개론, p. 75.
17) Ibid., pp. 85-86.
18) Wayne Grudem., op.cit., pp. 327-331.
19) Ibid., p. 333.
20) Ibid., p. 344.
21) Louis Berkhof, 기독교 신학개론, p. 106.
22) Ibid., p. 108.
23) Ibid., p.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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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접하지 못한 사람에게도 미약하나마 절대자에 관한 관념은 있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까닭이다. 그러나 인간은 죄로 오염되었으므로, 특별 계시인 성경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정확히 알 수 없다.
1. 하나님을 아는 지식
인간은 유한하므로 무한하신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불가지론(不可知論)이 있다. 그러나 인간은 실제로 신 관념(神觀念)을 갖고 있으며, 성경은 모든 인간이 자연 만물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증거 한다(롬 1:19,20). 이처럼 인간은 정확하지는 않다고 할 지라도 하나님의 존재와 그 절대성을 알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이해는 불가하다고 보는 불가 이해성(Incomprehensidility)은 타당하나 불가지론(agnosticism)은 성립될 수 없다.
1) 선천적 지식 ― 인간은 선천적으로 마음속에 신 관념을 갖고 태어난다. 그러나 그 신 관념이란 지극히 미미(微微)하여, 출생후 하나님의 게시와 접함으로만 온전한 형태의 신 관념에 이르게 된다.
2) 후천적 지식 ― 인간의 지식이 후천적 노력의 결과 듯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에 대한 습득과 연구에 생겨난다. 즉, 선천적인 신 관념 곧 종교적 소질을 계발함으로써,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고유할 수 있다.
2.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증명
특별 계시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존재는 증명될 수 있다. 물론 하나님의 구체적 속성에 대해 증명할 수는 없지만 합리적 유신 논증을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는 보여 줄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변증(辨證)하고 전도하는데 큰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1) 존재론적 증명(Ontological Argument)
절대자에 대한 인간의 관념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시도이다. 즉 인간이 신에 대한 관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러한 신 관념을 갖게끔 하는 절대자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것이다(Ansem, Descartes, Clarke).
2) 우주론적 증명(Cosmological Argument)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고 하는 인과론적(因果論的) 접근 방법이다. 즉, 만물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들을 존재케 한 제일 원인(第一原因)이 반드시 있을 수밖에 없다는 논증이다(Locke, Leibnitz)
3) 목적론적 증명(Teleological Argument)
자연 만물이 질서를 유지하되 혼돈에 이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그 질서를 유지하는 어떠한 이성적 존재가 필연적으로 있다는 논증이다(Theophilus, Clement).
4) 도덕론적 증명(Moral Argument)
이 사회는 상선징악(賞善懲惡)을 권장하는 도덕적 판단이 있다. 또한 개인의 양심도 악을 미워하는 성향을 갖고 있다. 이와 같이 선을 지향하는 도덕적 성향은 곧 이 사회를 도덕적으로 인도하려는 도덕적 주관자의 존재를 증명한다는 것이다(Kant).
5) 종족론적 증명(Ethnological Argument)
비록 형태는 다르지만 지상의 모든 종족이 보편적인 신관념과 종교를 가졌다는 것은 절대자의 존재를 간접적으로 입증한다는 것이다.
6) 성경적 증명(Biblical Argument)
앞에서와 같은 합리적 유신 논증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유한한 인간의 증명시도로서 필연적으로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이론적인 유추에 의해 증명하지 않고 곧바로 하나님의 존재를 당연한 전재로 하고 있다(창 1:1). 따라서 믿는 자에게 있어서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완전한 증명이 된다.
3.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에 대한 지식
위에서 언급한 유신 논증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구체적 속성을 알 수 없지만 특별 계시의 기록인 성경을 통해서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구체적 속성도 알 수 있다.
1) 영성(靈性)
하나님은 육신이 없으신 영이시므로(요 4:24), 손으로 만져지거나 눈으로 관찰되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초월하실 뿐만 아니라 편재(偏在)하실 수도 있다(렘 23:23).
2) 완전성(完全性)
하나님은 여러 신 중의 하나가 아니고 유일하신 분이므로, 투쟁하거나 혹은 발전하실 필요가 없다. 또한 완전하시어 피조물과도 철저히 구별되신다(출 15:11;시 147:5).
3) 단순성(單純性)
하나님은 다른 요소들과 혼합되어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다. 오직 절대 완전하심으로 자존(自存)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도움도 필요치 않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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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섭리의 정의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만물을 그 작정의 목적에 합당하게 유지 보전시키실 필요가 있는데, 이의 전 과정이 바로 섭리(providence)이다.
2. 섭리의 대상
정신적·물리적 사건을 포함하여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 세계의 모든 일이 하나님 섭리의 대상이나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다.
1) 모든 우주(시 103:19 ; 단 5:35)
2) 물질적 세계(시 104:14 ; 마 5:45)
3) 동물계(시 104:21,28 ; 마 6:26 ; 10:29)
4) 국가적 사건(욥 12:23 ; 행 17:26)
5) 사람의 출생과 운명(삼상 16:1 ; 시 139:16 ; 사 45:5 ; 갈 1:15,16)
6) 인간의 성공과 실패(시 75:6,7 ; 눅 1:52)
7) 우발적인 듯한 사소한 사건(마 10:23)
8) 의인의 보호(시 2:8 ; 5:12 ; 롬 8:28)
9)악인의 적발과 형벌(시 7:12,13 ; 11:6)
10) 하나님 백성의 필요에 대한 공급(창 2:8,14 ; 신 8:3 ; 빌 4:19)
11) 기도의 응답(삼상 1:19 ; 사 20:5,6 ; 대하 33:13 ; 시 65:2 ; 마 7:7)
3. 섭리의 성질
1) 보편성(普遍性)
하나님의 섭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
2) 주밀성(周密性)
보편성이 섭리의 넓이를 말한다면, 이것은 섭리의 깊이와 관계 있다.
3) 주권성(主權性)
하나님의 섭리는 다른 그 어떠한 것의 간섭이나 영향을 받지 않는다.
4) 허용성(許容性)
모든 것이 섭리의 대상이지만 죄는 아니다. 하나님은 죄를 조성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하용 하 실뿐이다.
4. 섭리의 요소
섭리는 자연계 전반에 대한 하나님의 보편적 관할을 다루는 일반 섭리와 택한 성도의 구원과 관련된 특별 섭리로 나눌 수 있다. 또한 그 섭리의 시행 방법상 통상 섭리로 나누기도 한다. 이것은 섭리의 성격에 의한 구분 방법이고 이제 보다 중요한 섭리의 요소를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1) 보존(Preservation)
하나님은 만물 창조 후 자연 법칙을 세우셨지만, 여전히 변치 않으시고 만물을 유지하고 계심을 말한다. 그런데 만일 이러한 신적 활동이 없다고 한다면, 육체적 생명이나(시 66:8,9). 정신 생활의 유지(딤전 6:3)가 불가능하다. 인간의 극심한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속시키고 계시는 것은 노아의 언약에 따른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은혜 때문이다(창 8:21,22 ; 9:10,12,16 ; 벧전 3:20).
2) 협력(Concurrence)
보전이 피조물의 존재를 유지시키는 신적 사역이라고 한다면, 협력은 피조물의 활동 배후에서 이를 가능케 하는 신적 사역이다. 즉, 협력은 하나님의 절대적 의지와 능력이 자연 세력이나 인간 의지와 같은 종
속적 능력과 합력(合力)하여 일을 이루시는 신적 사역이다. 따라서 인간이나 자연의 모든 활동은, 제 2원인과 동시적으로 섭리하시는 제 1원인, 즉 하나님이 직접적인 신적 협력을 따라서만 가능하다(행 17:28).
3) 통치(Government)
우주의 통치자이신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존재 목적에 맞게 다스리시는 신적 활동이다. 그런데 이러한 통치는 외면적 세계(마 4:45 ; 행 14:17). 이성적이거나 비이성적 피조물(시 104:21 ; 잠 21:1), 큰 일과 작은 일(시 126:2,3 ; 마 10:29), 일반적 일과 특별한 일(시 127:2 ; 잠 16:33). 선행과 악행(행 14:16 ; 빌 2:15), 이스라엘과 열국(시 47:9 ; 사 33:22) 등의 모든 영역이 그 대상이다. 따라서 이러한 하나님의 통치는 인간으로서는 그 통치의 양식을 알 수 없고, 또한 그 누구도 이 역사를 막을 수 없다. 비록 하나님에 대한 대적이 있다고 할지라도 도리어 그것은 그분의 위대한 목적을 이루는 데 이용될 뿐이다.
5. 비상 섭리(非常 攝理)
이것은 자연법칙에 따라 역사 되어지는 통상 섭리(通常 攝理)와는 반대로 일반 법칙을 초월하는 임시적 역사로서, 제 2원인의 매개 없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능력에 따라 일어나는 이적을 말한다. 이러한 이적은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드러내시기 위한 특별한 수단이므로, 가시적(可視的)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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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작정과 예정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내향적 사역이다. 그러나 창조(creation)는 작정과 예정의 외향적 사역이다. 그런데 창조는 무에서 유를 산출하여 내는 일로서, 오직 하나님에게만 가능하다. 또한 이는 하나님의 피조물에 대한 역사에 있어서 시간적· 논리적으로 제일 먼저 행하여진 일이다.
1. 창조의 정의
무(無)에서 유(有)를 산출하여 내는 일, 불완전한 것을 완전하게 만드는 일을 가리킨다.
2. 창조의 주체
창조는 성부가 주관자가 되시며(고전 8:6), 성자(요 1:3 ; 골 1:15,16)와 성령(창 1:2 ; 욥 26:13)에 의한 삼위일체 공동 사역이다.
3. 창조의 시기
영원 전부터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은 시간의 창조와 더불어 그 시간의 태초에 창조 작업을 시작하여서 6일만에 마치셨다.
4. 창조의 방법
전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우주를 창조하셨고, 인간의 경우는 이미 창조되어 존재하는 흙을 재료로 삼아 창조하셨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합리적으로 증명할 수 없고, 다만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믿음으로써만 받아들여 질 수 있다(히 11:3).
5. 창조의 목적
인간의 행복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이다. 물론 부차적 목적으로는, 인간으로 하여금 피조 세계 속에서 행복을 맛보며, 하나님께 대하여 감사와 찬양을 이끄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6. 창조 교리에 대한 반론
하나님의 만물 창조는 인간의 경험적 지식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이므로 이를 부인하는 여러 사상들이 있다.
1) 유출론(流出論)
피조 세계는 하나님에게서 필연적으로 유출된 결과이며, 그래서 하나님과 피조 세계는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완전하신 하나님과 불완전한 피조 세계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점과, 이 주장대로 하면 피조 세계에서 야기된 죄악의 책임이 하나님에게로 귀착되기에 이른다는 점에서 전혀 옳지 못하다.
2) 이원론(二元論)
하나님이 완전하신 채로 영원하시듯이, 물질도 불완전한 채로 영원 전부터 존재하였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하나님을 성경에서 말하는 창조자가 아니라 다만 조성자(造成者)로 격하 시킨다는 점에서 오류이다.
3) 진화론(進化論)
영원 전부터 이미 존재한 미미한 기존 물질 혹은 창조에 의해 존재한 기존 물질이 오랜 세월 동안 자연적으로, 복잡하고 고등한 형태로 발전하였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어떠한 물질이 이미 존재하였다고 하는, 사실상 불가능한 가설에서 출발하며 자연 발생론을 전제한 맹목적 우연론이므로 과학적으로도 답을 얻을 수 없는 자체의 많은 모순을 지니고 있다.
7. 천사의 창조
하나님의 창조는 그 대상에 따라 영적 세계의 창조와 물질 세계의 창조로 구분된다. 인간의 구원을 위한 책인 성경에는 영적 세계의 신비에 대한 직접적 언급이 없다. 그러나 천사는 눈에 보이는 존재는 아니지만, 분명 존재하면서도 성도를 위한 하나님의 섭리적 역사를 돕는 기능을 담당한다.
1) 천사의 존재
성경은 전체 66권 중 34권에서 '천사'라는 단어
를 약 275회 사용함으로써 그것의 존재를 말하며, 특히 하나님이, 세상이 있기 전에(욥 38:6,7), 거룩하게(유 1:6) 창조하셨다고 증언한다. 게다가 그리스도도 천사의 존재를 확증하셨다(마 18:10 ; 26:53).
2) 천사의 속성
⑴ 영적 속성― 살과 뼈가 없으며(눅 24:39), 결혼하지 않으며(마 22:30), 제한된 공간에 많은 천사가 임재할 수 있고(눅 8:30), 죽지 않는다(눅 20:36)는 사실 등은 천사가 영적 존재임에 대한 분명한 증거이다.
⑵ 인격적 속성― 인간보다 더 뛰어난 지 정 의(知, 情, 意)가 있다(마 24:36 ; 눅 2:13 ; 벧전 1:12 ; 유 1:6). 따라서 천사는 하나님을 예배하며 인간과 교류할 수 있다(엡 3:14,15).
⑶ 도덕적 속성― 하나님과 성도를 위한 도덕적 임무를 수행한다.
⑷ 권능적 속성― 전능하신 하나님에게는 미치지 못하나 인간보다는 훨씬 큰 능력이 있다(골 1:16 ; 벧전 5:8).
3) 천사의 조직
천사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효과적으로 수행키 위해 지적 능력을 발휘하며 조직적으로 활동한다
⑴ 미가엘 ― '천사장'(유 1:9) 혹은 '군단'(단 10:13)으로 불리며, 악령과 싸움.
⑵ 가브리엘 ― 기쁜 소식을 전함(눅 1:19).
⑶ 그룹 ― 하나님의 거룩을 보존함(사 37:16).
⑷ 스랍 ― 예배 자를 도움(사 6:2,3,6).
⑸ 정사, 권세, 보좌, 주관자, 능력 ― 천사들에 대한 또 다른 다양한 이름들로서, 천사들의 권능과 계급의 차이를 보여줌.
4) 천사들의 사역
천사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을 하나(시 103:20) 구원의 성취를 위하여도 활동하는 바 그 대상에 따른 분류는 아래와 같다.
⑴ 그리스도에 대하여― 수태 고지(마 1:20,21). 탄생 사실 선포(눅 2:10-12). 예수의 생명 보호(마 2:13;26:53). 수종(마 4:11), 기도 보조(눅 22:43), 부활 사실 고지(마 28:6) 등이다.
⑵ 성도에 대하여― 어린이와 성도의 보호(시 34:7 ; 마 18:10)와 섬김(히 1:14). 육적 양식 공급(왕상 19:5-8), 활동 방향 지시(행 8:26), 격려(행 27:23,24). 위기에서의 구원(단 6:22), 계시전달(단 8:16-27), 기도 응답에의 관여(행 12:15), 의인의 영혼 보호(유 1:9) 등이다.
⑶ 불신자에 대하여― 심판 경고(계 14:6,7), 징벌, 집행(행 12:33), 심판 때의 가라지 제거(마 13:39) 등이다.
⑷ 민족에 대하여― 신적 섭리 대행(단10:21), 심판의 수종자(마13:41,42), 보호(단10:21) 등이다.
5) 천사의 타락
천사는 본래 선하게 창조되었으나(창 1:31), 일부가 교만하여 타락하므로 서 하나님을 섬기는 본래의 신분적 위치를 박탈당하고(벧후 2:4 ; 유 1:6) 마귀 혹은 악령이 되고 말았다.
⑴ 사단- 악한 천사의 우두머리로서 강력한 능력을 갖고 있다(마 25:41).
① 사단을 가리키는 용어들-마귀(마 13:39 ; 약 4:7), 공중권세 잡은 자(마 25:41 ; 계 12:87), 이 세상의 신(고후 11:15 ; 딤전 4:1), 이 세상 임금(요 12:31), 바알세블(마 10:25 ; 막 3:22), 벨리알(삼하 23:6), 약한 자(마 4:4 ; 살전 3:5), 미혹하는 자(계 20:10), 뱀(욥 26:13 ; 고후 11:3 ; 계 12:9), 계명성(사 14:12) 등이다.
② 사단의 속성-기본적으로는 이미 언급한 천사의 속성과 동일하나 타락으로 인하여 도덕적인 미덕은 모두 사라지고 하나님과 인간을 전대하게 되었다.
a. 영적 속성-천사였으므로 육체가 없다. 그러나 육체를 가지며 영혼을 가진 인간과 교류 할 수 있다(엡 6:11,12).
b. 지성적 속성-인간을 속이고 말씀을 왜곡시킬 수 있을 만큼의 지력이 있다(창 3:1-5 ; 고후 2:11 ; 11:3).
c. 의지적 속성-스스로 판단할 수 있으며 이를 행동으로 옮긴다(딤후 2:26).
d. 도덕적 속성-살인자(요 8:44), 거짓말쟁이(요 8:44), 참소자(계 12:10), 대적(벧전 5:8) 등의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비도덕적 특성을 지닌다.
e. 유한적 속성-탁월한 능력이 있으나 역시 피조물이므로 하나님의 지배를 받으며(욥 1:12), 그리스도에게 패배한다(마 12:29 ; 요일 3:8).
③ 사단의 타락
a. 사단의 죄-하나님처럼 높아지려는 교만 때문에(사 14:14 ; 겔 28:17 ; 딤전 3:6) 징벌을 받게 되었다(겔 28:17-19).
b. 사단에 대한 심판-영광스런 본래의 위치에서의 축출이었다(겔 28:16). 또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승리(요 19:30)로 말미암아 그것의 머리는 이미 상하였다(창 3:15 ; 요 12:31 ; 계 20:2), 물론
아직은 여전히 맹렬한 활동을 하지만 결국 재림 때 유황불에 던져지는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된다(계 20:10).
④ 사단의 활동
a. 하나님에 대하여-하나님을 모방하여(요일 3:1,2). 기적 등으로 사람을 혼란케 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예배케 한다(고전 10:20).
b. 그리스도에 대하여-그리스도와 원수가 되어 그 발꿈치를 상하게 한다(창 3:15). 이는 헤롯을 통한 유아 살해(마 2:16). 세 가지 시험(마 4:4-11), 선교 사역 방해(마 16:23 ; 요 8:4). 십자가 처형(요 13:27) 등으로 현실화되었다.
c. 성도에 대하여-성도가 하나님의 일(살전 2:18)을 하며 기도(단 10:12,13)하는 것을 방해하며, 거짓말(행 5:3)과 악행(고전 7:5) 등을 유도함으로써(창 3:1-5)올무에 빠지게 한다.
d. 말씀에 대하여-말씀을 문맥에서 이탈시켜(마 4:5,6) 잘못 해석케 하고(창 3:1-4), 마음에서 말씀을 빼앗으므로 써(마 13:19) 진리를 모르게 한다(고후 4:4). 또한 거짓 교리를 유지 시켜 혼란에 빠뜨린다(딤전 4:1-4).
e. 불신자에 대하여-사단은 불신자들을 지배하는 왕으로서(엡 2:2), 그들에게서 진리를 떠나게 하며(고후 4:4). 이미 받은 말씀을 빼앗으며(마 13:19), 미혹하여(계 13:14) 하나님을 거역하게 하고(계 2:13), 자신을 경배케 함으로써(살후 2:3,4)결국 영육의 멸망으로 인도한다(눅 9:42).
⑤ 사단에 대한 성도의 자세-성도는 하나님의 권능을 힘입기만 하면 능히 사단을 이길 수
있다. 우선 사단이 틈타지 못하도록(엡 4:27) 항상 경계하며(벧전 5:8),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엡 6:11-18), 말씀으로 무장하고(엡 6:17), 하나님께 순복하여 대적해야 한다(약 4:7).
⑵ 귀신-이교도들은, 죽은 악인들의 영혼을 귀신으로 본다. 하지만 이는 성경의 가르침과 전혀 다르다. 비록 성경이 귀신의 기원을 명백히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사단이 귀신의 왕으로 묘사 된다는 사실에서 볼 때, 귀신 역시 타락한 천사임이 분명하다(마12:24).
① 귀신을 가리키는 용어들-수염소(레 17:7), 악한 신(삿 9:23), 벌하는 사자(시 78:48), 더러운 귀신(마10:1), 마귀의 사자들(마 25:41), 더러운 영(계 18:2), 점하는 귀신(행 16:16), 거짓말 하는 영(왕상 22:21-23), 정사, 권세,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 하늘에 있는 악의 영(엡 6:12), 미혹케 하는 영(딤전 4:1), 범죄한 천사들(벧후 2:4) 등이다.
② 귀신의 속성-귀신도 사단처럼 타락한 천사이되, 사단의 지배를 받는다(마 12:24-30)는 점 만이 다르다. 따라서 그 속성도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a. 영적 속성-형체가 없는 영적 실체이다.
b. 지성적 속성-(마 8:29), 그리스도의 능력(막 1:24), 하나님의 구언 계획을 안다(약 2:19).
c. 도덕적 속성-악행 유발이 주된 사역이다.
d. 능력적 속성-수가 많고(막 5:8,9) 강하다(눅 8:29).
③ 귀신의 활동
a. 발병(發病)-육체적(욥 1:5-10), 정신적(눅 8:35) 질병을 일으킨다.
b. 도덕적 불결의 야기-더러운 언행심사의 원인이다(마 10:1 ; 막 1:23-27 ; 눅 4:33 ; 행 5:16 ; 계 16:13).
c. 거짓 교훈 유포-진리를 왜곡시키고 거기서 떠나게 한다(살후 2:11,12).
d. 영적 진보 방해-성도의 성화(聖化)를 방해한다(엡 6:10,11).
e. 사람과 동물에 대한 지배-육체뿐 아니라 정신을 지배하며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게 한다(마 4:24 ; 막 5:8-14 ; 눅 8:2).
f. 하나님의 계획-하나님은 귀신의 악행조차도 당신의 뜻을 이루는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하신다(삿 9:23 ; 산상 16:14).
④ 귀신과 종교현상-귀신은 기독교 이외의 다른 종교 속에서 기이한 영적 현상을 일으킨다.
a. 점복(占卜)-자신의 지혜를 받는 점쟁이(행 16:16)를 통하여 미래의 길흉을 말한다(삼상 28:10).
b 귀신 숭배-귀신 숭배를 조장하여 하나님과의 영적 교통을 막는다(신 32:17).
c. 강령(降靈), 접신술(接神術)-영매(靈媒)를 통하여, 산 자와 죽은 자의 교통이라는 사술(邪術)을 행한다(신 18:11 ; 삼상 28:3,7-9).
d. 귀신 들림-인간이나 동물의 내면에 들어가서, 특히 인간의 경우 그 정신을 완전 지배함으로써 미치게 하거나(막 5:5,15), 간질을 일으키며(막 9:18), 결국 죽음의 위험에 이르게 한다(막 9:22), 하지만 성령의 내주(內住)가 있는 참된 신자에게는 그가 성령을 거슬리지 않는 한 원칙적으로 이러한 현상을 일으킬 수 없다.
⑤ 귀신의 운명-귀신은 예수님과(막 1:34 ; 눅 4:20)과 사도들(마 12:1 ; 행 8:7)에 의하여 쫓겨 났듯이, 모든 성도들에 의해서도 쫓겨나게 된다(막 9:18,28,29 ; 16:17). 그리고 귀신은 현재도 주의 이름으로 쫓겨날 뿐만 아니라(막 9:28), 그 일부는 이미 심판의 때까지 무저갱에 갇혀 있고(눅 8:31 ; 벧후 2:4), 현재 활동하는 자유로운 귀신들도 결국 우두머리인 사단과 함께 영원한 유황불의 형벌에 떨어지게 된다(계 20:7-10).
8. 물질 세계의 창조
하나님은 물질 세계를 창조하셔서, 만물의 영장(靈長)인 인간의 지혜 아래 있게 하셨고, 또한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시는 계시의 수단으로 삼으셨다(롬 1:20).
1) 창조에 관한 성경 기록에 특성
성경은 오늘날 인간이 물질 세계에서 통용되는 진리에 접근할 수 있는 과학적 관점으로 기록되지 않았으며 인간을 중심으로,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기록되었다.
⑴ 구속사 중심의 기록-성경은 타락한 인간에 대한 구속을 위하여 기록되었다. 따라서 창조에 대한 짧은 언급(창 1,2장)에 이어 바로 인간의 타락(창 3:15이하)에 대하여 말한다.
⑵ 인간 중심의 기록-성경은 하나님의 청조가 자연이 아닌 인간을 위한 것임을 증거 한다. 지구는 인간의 거처일 뿐이므로 성경에서는 자연과학 대상으로의 지구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발견되지 않는다.
2) 창조의 연대
여기서는 성경의 언급과 과학적 연구의 결과인 지질학이 보여주는 장구(長久)한 연대를 조회하기 위한 인위적 노력들에는 어떠한 것이 있는 지를 열거한 뒤 성경적 견해를 살핀다.
⑴ 제목설(題目說)-창 1:1,2을 3절 이하에서 언급되는 내용의 서론으로 본다. 그러나 1,2절도 창조 제 1일에 있었던 창조 사건의 기록이지 서론적 언급은 아니다.
⑵ 중건선(重建說)-창 1:1을 일차적 창조로 보고, 창 1:2을 천사의 타락에 대한 심판의 결과로 본다. 창 1:3에서부터 현존하는 우주의 창조가 언급된다고 보는 셈이다. 그러나 이는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⑶ 장기설(長期說)-창 1:1부터 현재와 같은 우주의 창조로 보지만, 1장의 '날'(히, 욤)이 오늘날의 24시간과는 다른 장구한 세월로 생각한다.
⑷ 반일자설(半日字說)-육 일간의 창조 기간 중 태양이 창조된 제 3일을 기준으로 하여 전 삼 일의 하루는 장구한 세월로 보고, 후 삼 일의 하루는 오늘날의 하루로 보는 견해이다.
⑸ 일자설(日字說)-"날"을 문자 그대로의 하루, 즉 24시간으로 본다. 이 견해는 아담이 어른으로 창조된 것처럼 우주 또한 오늘날의 형태와 유사하게 창조되었다고 본다면 문제가 없다. 이는 안식일 규례를 언급하는 부분에서 창조 기간을 엿새로 말한다는 사실과도 분명히 조화 된다(출 20:9 ; 레 23:3 ; 신 5:13).
3) 창조의 순서
6일간 모든 우주와 인간이 창조되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전능성을 증명해 준다. 또한 그 창조의 순서가 지극히 합리적이라는 사실은 하나님의 지혜를 증거 한다. 한편 제7일의 안식은 6일간의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만족스러운 기쁨의 반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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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정이 우주 만물에 관한 하나님의 보편적 계획인 반면, 예정은 인간과 천사와 마귀 등 모든 이성적 피조물의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특별 계획이다. 그러나 예정 교리에서 그리스도는 삼위 하나님의 한 분으로서 예정의 주체이실 뿐 아니라 인간 몸을 입으시고 제2의 아담으로서 모든 인간의 대표가 되셨으므로 예정의 대상에도 포함되는 독특한 면모를 지니신다. 한편, 예정에는 영생을 얻는 선택과 영원한 멸망에 이르는 유기(버리심)란 두 가지 측면이 있다.
1. 선택
1) 선택의 종류
⑴ 선민으로서 이스라엘의 민족적 선택(신 4:37 ; 호 13:5).
⑵ 하나님에 대한 봉사자의 선택(신 18:5 ; 삼상 10:24 ; 시 78:70).
⑶ 구원받을 자에 대한 하나님 자녀로서의 선택(행 13:48 ; 롬 11:5) ― 이것이 예정 교리에서 주로 다뤄지는 분야이다.
2) 선택의 특성
⑴ 하나님 주권적 의지에 근거―인간의 의지나 선행을 전제로 하지 아니한다(롬 9:11;엡 1:9).
⑵ 불변적― 만일 선택되었다면, 그 어떠한 요인에 의해서도 방해받지 않고 반드시 구원에 이르게 된다(롬 8:29,30 ; 딤후 2:29).
⑶ 영원적― 예정은 역사 이전에 이루어져서 그 효과가 영원히 지속된다(롬 8:29,30).
⑷ 무조건적― 예정할 자의 상태를 예지(豫知)한 가음 거기에 맞춰 예정하는게 아니라 당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 하신다(행 13:48 ; 롬 9:11).
⑸ 불가학력적― 하나님에 의하면 선택된 자는 그 선택에 따른 자녀로서의 부르심을 절대 거절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는 자유의지를 무시하심이 아니다. 다만 인간의 심령에 감회를 주심으로써, 자연스럽게 부르심에 응답하도록 하신다(시 110:3 ; 빌 2:13).
2. 유기(遺棄)
구원받을 자로 선택되지 못함으로써 필연적으로 죄에 대한 형벌을 받도록 허용되는 것을 말한다(마 11:25,26 ; 롬 9:13,17,18,21,22 ; 벧후 2:9). 한편 선택이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를 둔 것임에 반해 유기는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에 근거한 것이란 차이점을 지닌다.
3. 예정의 순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견해가 있으나, 돌트 종교회에 의하여 채택된 사실에서 볼 수 있듯이 후자가 보다 타당한 것 같다.
1) 타락전 선택설
⑴ 구원하실 자와 유기하실 자의 예정
⑵ 구원하실 자와 유기 하실 자의 창조
⑶ 인간의 타락의 허용
⑷ 선택 자를 구원의 길로 인도
2) 타락후 선택설
⑴ 인간 창조의 작정
⑵ 타락 허용의 작정
⑶ 타락자 중 일부의 선택
⑷ 선택 자를 구원의 길로 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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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어떠한 성품을 가지셨는지를 아는 것은 신자들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은 계시, 특히 특별 계시로서의 성경을 통하여 알 수 있다.
1. 비공유적 속성(非共有的 屬性)
하나님에게서만 발견될 수 있는 독특한 성품으로서 일명 본체적(本體的) 속성이라 불리운다.
1) 자존성(독립성)
하나님은 당신 안에 스스로의 존재 근거를 갖고 계시므로, 무엇에 의존적인 피조물과는 달이 지적으로(롬 11:33:34), 의지적으로(단 4:35;롬 9:18), 능력적으로(시33:11;115:3) 자존하신다(요5:26).
2) 불변성
하나님 스스로와 그분께 속한 그 어느 것도 결코 변함이 없다(말 3:6). 즉, 사상의 측면(시 33:2), 활동적 측면에서 결코 변함이 없으시다(히 13:8).
3) 무한성
하나님은 완전하시므로 그 누구 혹은 무엇의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행 17:25). 따라서 그 어떤 제한이 없이 자유로우시다. 즉, 하나님은 본질적 무한성(시 145:3), 시간적 무한성9시 102:26), 공간적 무한성(렘 23:24)을 가지시므로 만물 속에 갇혀 있는 신을 가리키는 범신론(汎神論)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4) 유일성
하나님은 여러 신 중의 하나가 아니라 이 세상에 유일하신 절대자이시다(신 4:35). 따라서 만물이 그분으로부터 나오고 결국 그분에게 돌아가게 되어 있다(롬 11:36).
2. 공유적 속성(共有的 屬性)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에게서도 발견 될 수 있는 성품으로 보편적(普遍的) 속성이라 불리워 진다. 그러나 인간은 지극히 불완전 하나 하나님의 그것은 완전무결하다는 차이점이 있다.
1) 영적 속성
인간은 영혼과 육체의 합일체(合一體)이지만, 하나님은 순수한 영이시다(요 4:24). 그래서 하나님은 불가견적(不可見的)이다(딤전 6:15,16).
2) 지성적 속성
하나님은 자신에 대한 분명한 지식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외의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분명히 인식하고 계신다(요일 1:5).
⑴ 하나님의 지식 ― 하나님은 지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들 모두에 대하여, 즉 실제적인 것이나 추상적인 것,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것을 원형적(原型的), 직각적(直覺的), 독립적(獨立的), 총괄적(總括的), 불변적(不變的)으로 분명히 알고 계신다(잠 15:3; 히 4:13).
⑵ 하나님의 지혜 ―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당신의 지식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실수 있는 지적 능력도 갖고 계신다(시 19:1-7; 고전 2:7; 엡 3:10).
⑶ 하나님의 진실 ― 하나님은 그 존재 자체가 진실하시므로 (출 34:6), 인간에 대한 계시와 행위 또는 진실하시다(시 117:2; 신 7:9).
3) 도덕적 속성
불완전한 측면을 지니고 있는 이방신의 경우와는 달리 하나님은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한 만큼 하 등의 도덕적 결함이 없으시다.
⑴ 하나님의 거룩 ― 피조물과는 본질적으로 구별 될 수밖에 없음을 말하는 위엄적 거룩(출 3:5)과 죄와는 합치될 수 없으심을 말하는 윤리적 거룩이 있다(사 5:16;마 5:48).
⑵ 하나님의 의 ― 여기에는 우주 만물에 대한 통치 원리로서의 의(사 32:1) 및 정치적 의(신 7:9)와, 또한 하나님이 그 통치 원리를 구체적으로 적용하시어서 불순종한 자에게는 벌을 내리게 하는 동기로서의 분배적 의(롬 2:9)가 있다.
⑶ 하나님의 선 ― 선의 유일한 원천(막 10:18)으로서의 하나님은 그 뜻과 행위가 항상 선하시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선에는 일반 생물에게 베풀어지는 자선(시 145:9,15,16),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에게 베풀어지는 사랑(마 10:31;12:12), 죄인으로서의 인간에게 베풀어지는 값없는 은혜(롬 3:24;딛 3:11)가 있다. 또한 죄로 인하여 고통을 달하는 인간에게 베풀어지는 긍휼(삼하 24:14; 시 79:8; 애 3:22), 범죄를 일삼는 인간에게 베풀어지는 인내(출 34:6;롬 9:22) 등도 있다.
4) 주권적 속성
하나님은 우주의 조성 자이시므로, 당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 그 우주와 인간들을 다루실 수 있다. 여기에는 당신의 행위 방향을 결정짓는 주권적 의지(롬 9:15,16)와 실제로 그 의지를 행하게 하는 주권적 능력이 있다.
5) 유복적 속성(有福的) 속성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완전하시므로 모든 덕에 요소를 지니시며, 자신을 아시는 절대적 지식과 자신에 대한 절대적 사랑을 가지셨으므로, 스스로에 대하여 자충족적(自充足的) 기쁨이 있으시다(딤전 1:11;6:15).이러한 내면적 유복성이 외향적으로 나타날 때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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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당신 스스로가 부여하신 여러 이름들을 통하여 당신의 성품의 일면을 계시하신다.
1. 기본적인 구약의 이름
1) 엘, 엘로힘
'엘'은 '강한 자'란 뜻을 갖는 가장 단순한 이름으로서, 강하신 분으로서의 하나님을 나타낸다. 한편 '엘로힘'은 하나님에 대한 가장 보편적 이름이며, 이 이름 어미(語尾)의 복수형은 장엄 복수(莊嚴 複數)로서 그분이 이방신과는 비교될 수 없는 절대적 경외의 대상임을 강조한다.
2) 여호와
'스스로 있는 자'란 뜻으로서 오직 하나님에게만 사용되는 고유명사이다(출 3:14). 이 이름은 하나님의 자존성(自尊性)과 거룩성 및 영원 불변성을 강조한다. 특히 이 이름은 이스라엘 백성과의 언약의 주체로서의 하나님을 가리킬 때 조로 사용된다.
3) 아도나이
'주'(主)라는 뜻을 갖는 이 이름은 인간에게도 사용되지만, 하나님에게 사용될 때는 인간을 포함한 전(全)피조 세계에 대한 소유자 혹은 통치자를 가리킨다.
2. 복합적인 구약의 이름
1) 엘의 복합어
⑴ 엘 솨다이 ― 전능하신 하나님(창 17:1;28:3).
⑵ 엘 엘론 ―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창 14:19).
⑶ 엘 올람 ― 영원하신 하나님(사 40:28).
⑷ 엘 로이 ― 감찰하시는 하나님(창 16:13).
2) 여호와의 복합어
⑴ 여호와 이레 ― 여호와가 준비하심(창 22:14).
⑵ 여호와 닛시― 여호와는 나의 깃발(출 17:15).
⑶ 여호와 살롬 ― 여호와는 나의 평강(삿 6:24).
⑷ 여호와 라파 ― 여화와가 치료하심(출 15:26).
⑸ 여호와 삼마 ― 여호와가 거기 계심(겔 48:35).
⑹ 여호와 치드케누 ― 여호와는 우리의 의(렘 23:6).
⑺ 여호와 로이 ―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 23:1).
⑻ 여호와 체바오트 ― 만군의 여호와(삼상 1:3).
⑼ 여호와 마케 ― 멸망시키시는 여호와(겔 7:8).
⑽ 여호와 엘 게물로트 ― 여호와는 보복의 하나님이심(렘 51:56).
⑾ 여호와 메카디쉬켐 ― 너희를 거룩케 하시는 하나님(출 31:13).
3. 신약의 이름
1) 데오스
구약의 '엘'이나 '엘로힘'의 번역어이다. 그러나 '엘'이나 '엘로힘'은 민족적 종교 공동체로서의 이스라엘과 관계하여 주로 사용되었으나, 이것은 신자 개인과 관계하여 사용된다.
2) 퀴리오스
'주'를 의미하며 구약의 아도나이와 동일하다. 신약에서는 하나님에게보다도 그리스도에게 더 많이 사용된다.
3) 파테르
'아버지'란 의미가 있으며, 신자 개인에게 영적 혹은 육적 도움이 되시는 아버지로서 성부 하나님을 지칭한다(마 6:6;롬 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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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세 위격과 하나의 실체로 존재한다는 교리이다. 실지 성경에는 삼위일체라는 용어가 없고, 그 후 교회가 신학적으로 표현한 용어이다. 삼위일체론적 신의 개념은 성경적 구속사에 있어서 기초적이요, 지배적인 사상이 되어 있다.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의 영원한 신성의 존재 안에 세개의 영원하고 본질적인 구별인 성부.성자.성령이 있다는 주장이다. 서방 기독교 세계에서 고전적 신조는 "한 실체 안의 세 위격"(una substantia et tres personae)이며, 동방 기독교세계에서는 한 존재 안의 세 구분( S S )이다.
이 교리는 4세기까지 구체화되지 않았으나, 삼위일체적 언어는 신약성서와 초대교회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구체화는 여러 가지 이유로 재촉을 받았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두 가지는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의 관계에 대한 반영과 급진적인 견해들에 대항할 필요성이었다. 마르키온(100-160년경)은 창조주와 구속주는 하나가 아니고 둘이라고 주장했고,아리우스(250년경-336년경)는 로고스를 완전한 사람도 완전한 하나님도 아니라고 주장했다.
요한과 바울사상의 그리스도 선재와 희랍사상의 로고스 개념을 동일시하기 위해 기독교 신학은 필연적으로 하나의 특정한 방향으로,즉 로고스인 영원한 성자와 신적 기원인 성부의 관계를 정의하게 되었다. 이러한 필연적인 경향은 신중하지 않은 사상들이 신빙성없는 해결책을 추진할 때에 더욱 증가되었다. 군주신론자들이나 양식론자들은 모든 구분을 반대하는 하나님의 연합을 강조하며 하나님의 고난과 죽음을 주장했다.
종속론자들은 로고스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주장하여,실체적으로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육신하셨다는 신앙을 손상시켰다. 이러한 신학적 논쟁들은 정치적으로나 교회적으로 경쟁이 치열하여 너무나 복잡했다. 더구나 동방교회는 희랍어를 사용하고 서방교회는 라틴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희랍어로나 라틴어로 용어가 통일되지 않아서 더욱 혼란을 빚었다. 사람들은 처음에 그 의미에 동의해야 했고, 그 다음에는 그것을 동의할 수 없는 용어로 번역해야 했다. 아다나시우스(295년경-373년)가 지도하는 동방의 정통파의 목적은 하나님의 연합과 성부.성자.성령의 동등한 지위를 보존하는 것이었다. 몇년동안 이 파는 카파도키아파(Cappadocaians)가 화해하는 신조와 해석을 마련할때까지 이 까다로운 용어에 동의할 수 없었다. 이것은 "셋으로 구분되는 한 존재"였다. 이 신조는 서방교회의 신학자들에게 호감을 주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 이전의 테르툴리아누스(150년경-225년경)의 라틴어 시조인 한 본체 안의 세 위격과 같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 교리가 비밀처럼 보인다고 항상 주장되었지만 신학자들은 해명하려고 서두르지 않았다. 아우구스티누스(354-430년)의 저작이 이 문제에 관한 그 다음의 사상을 정립한 이래, 정통적인 견해는 하나의 신적 실재 안에 세 개의 중요한 구분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 구분을 위격이라고 부르며 영원히 공존하며 동등하다. 각 위격 안에서 신적 본질을 완전하며 분리할 수 없다. 비록 위격들이 서로 밀접하게 연합되어 있고 서로 침투할 수 있다 하더라도(참조, 상호충만), 각 위격은 다른 것과의 관계에서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성부는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자생(자생)했다고는 말할 수 있다. 성자는 영원전에 태어나서 친자관계(filiation)가 됐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으로 발생했다(참조. 필리오케).
때로는 어떤 특성이나 행위가 위격들 중 어느 것에 할당되는데(참조. 귀속), 이것은 전통적인 개념으로 각 위격은 모든 행위와 작용을 창조.구속.성화로 분담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떤 위대한 신학자도 하나님 안에 세 개의 독립적으로 의식하는 존재가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 것을 주의 할 필요가 있다. 그 반대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유명한 유비는 세으로 구분된 지력과 의지, 그리고 그것들을 구속하는 하나의 연합된 의식이었다.
삼위일체의 교리는 하나님의 내적 활동과 존재에 관한 특수한 이론이며 셋으로 구분된 하나님의 활동에 목적을 둔 교리가 아니기 때문에, 신앙과 불신앙의 당명한 문제에 대부분의 관심을 갖는 신학자들에게는 생각의 변두리로 쫓겨나는 경향이 있었다. 예를 들면 종교개혁자들은 이 교리를 의심하지 않고, 기독교인의 신앙고백의 삼위이체적 구조인 신자와 함께 그 영이 거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하신 창조자를 믿는 신앙을 우선적으로 강조했다. 그러나 자유주의 개신교가 이 교리를 가장 진보적으로 검토했는데, 직접적인 종교적 경험으로 제한할 필요가 있는 자명한 신학으로 취급했다. 심지어 신개혁주의 신학자들까지도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주장을 반대 했으나, 그들은 이 교리가 계시된 것이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만남"의 구조 위에서 반영되는 것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 교리를 하나님의 본질에 관한 진술로 간주하지 않았다.
에밀 브루너(1889-1966년)는 이것을 비호하는 교리라고 불렀다. 칼 바르트(1886-1968년)는 이 일반적인 경향에 대하여 주목할 만한 예외자였다. 그는 주장하기를, 이 교리는 확실히 계시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계심을 확실히 나타내셨으며 그것이 삼위일체적이라고 하였다. 이 교리는 기독교 교의학에서 중심적이며 독특한 교리라고 그는 결론을 내렸다. 바르트의 저작 때문에 이 교리에 대하여 새로운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사회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의 두 유비가 사용되었다. 자의 비평자들은 그것을 삼심론(tritheism)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후자의 비평자들은 그것이 세구분을 정당화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1. 삼위일체의 교리적 정의
삼위 일체란 인간의 합리적 사고로는 완전히 이해될 수 없는 신비이지만, 이 신비는 다음과 같이 정의될 수 있다.
1) 하나님의 본체(本體)는 단 하나로서 절대 나뉘어질 수 없다(신 4:25;슥14:9:고전 8:6;딤전 2:5).
2) 한 신적 실유(實有)에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세 개체적 실존(實存)이 있다.
3) 절대적 나뉘어질 수 없는 본체의 모든 속성이 삼위 안에 각각 완전하게 존재한다(요 10:30;14:11; 골 2:9).
4) 한 실적 실유(divine bing) 안에 존재하는 삼위는 그 실존(subsistence)에 있어서나 사역(事役)에 있어서 일정한 순서가 있다. 그런데 그 순서는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⑴ 존재론적 순서 ― 이것은 인출(引出, derivation)의 논리적 순서로서, 성자는 성부에게서 영원부터 발생(發生) 하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영원부터 발출(發出)하시되 성부는 다른 위에서 다른 위에서 인출되시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⑵ 경륜적 순서(經綸的順序) ― 외향적 사역(外向的事役)의 순서로서, 만물은 성부 '에게서' 나오고('of' or 'out of'), 성자로 '말미암고'('through' or 'by means of'), 성령 '안에'('in') 있다(요 1:3,14).
⑶ 사역의 순서 ― 이것은 인간의 구속에 관한 논리적 순서로서, 성부는 구속을 계획하시고(요 17:6), 성자는 죽으심으로 구속을 성취하시며(롬 5:8), 성령은 그 효과를 개인에게 적용하신다(고후 3:18)는 것이다.
2. 삼위일체의 성경적 증거
삼위일체 교리는 인간적 사색이 아니며 절대 오류가 없는 성경의 계시에 근거한다.
1) 구약의 증거
신약 성경에는 미치지 못하나 구약 성경에서도 희미하게 삼위일체를 계시한다.
⑴ '우리'라는 하나님 스스로의 표현(창 1:26;27;3:22;11:17;사 6:8).
⑵ '여호와'와 '주'에 대한 동시적 언급(시 110:1)
⑶ '여호와의 천사'와 '여호와'의 동일시 혹은 구분(창 16:7-13; 출 3:2-5).
⑷ 성자이신 '하나님의 지혜'(잠 3:19;8:1) 및 '말씀'(시 33:4,6:119:89)과 하나님의 동시적 언급.
⑸ 성령에 대한 인격적 묘사(창 6:3; 느 9:20; 시 51:11; 사 40:13).
2) 신약의 증거
신약에서는 또다른 하나님이신, 성육(成育)하신 그리스도에 대하여 주(主)로 언급하는 만큼 삼위일체에 관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신약에서도 삼위일체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
⑴ 하나님의 유일성에 대한 단일 표현과 더불어 삼위 각위에 대한 구별적 묘사(행 5:3,4; 롬 9:5; 고전 8:6).
⑵ 삼위 각위간의 인격적 유대 관계에 대한 묘사(요 3:35;15:10;16:14).
⑶ 특별히 강조되어야 할 사항에서의 삼위 이름의 언급(마 28:19; 고후 13:13).
3. 삼위의 개별적 연구
삼위(三位)로서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기는 힘들지만, 각위별로 개별적으로 연구하는 일은 어느 정도 용이하다. 그러나 그 삼위는 완전히 구분되는 존재가 아니다.
1) 성부(聖父)
⑴ 명칭 ― 그 분에 대한 주요한 이름인 '아버지' 는 만물의 창조자이시며(욥 1:6;2:1; 눅 3:38),
구약 선민(選民)을 보호하시며 (신 14:1;사 63:16), 신약 신자들의 구원자이심(요 1:12;롬 8:15)을 표현한다.
⑵ 사역 ― 성자를 발생하시며 성령을 발출하신 내향적 사역과 만물 창조와 구속을 계획하며 보전 심리하시는 외향적 사역이 있다.
2) 성자(聖子)
⑴ 명칭 ― 제 2위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중요한 명칭은 '아들'이다. 그는 성육신 이전부터 아들로 언급되며(요 1:14,18;갈 4:4), 성육신에서 아들 되심이 증명되었다(요 3:17). 또한 스스로 성부를 '아버지'로 부르심으로써 당신의 아들 됨을 확증하셨다(마 6:9; 요 20:17).
⑵ 사역 ― 만물은 근본 성부로 말미암지만, 성자는 그것의 실제적 창조와 보전을 담당하신다(요 1:3,10; 히 1:2,3). 한편 인간 구 속의 경우, 하나님은 계획하시나 그것의 성취는 성자로 말미암는다.
3) 성령(聖靈)
⑴ 명칭 ― '하나님의 영'(고전 2:11) 혹은 '그리스도의 영'(갈 4:6)이라는 명칭은, 성령이 성부와 성자의 외향적 사역을 담당하신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성령'의 '성'(聖)은 그분이 성부와 성자에 대하여 열등하지 않음을 증명한다.
⑵ 사역 ― 성령의 사역은 성자의 사역을
뒤따른다. 따라서 성령의 사역은 신적 경륜을 피조물에게 직접 전달하는 마지막 단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