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하나님의 본질 (The Nature of God)
1. 성서적 견해
하나님은 누구이시며 또 어떤 분이신가? 지금까지의 하나님에 대한 최선의 정의를 웨스터민스터 교리 문답 속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영원 무궁토록 불변하는 무한한 영이요 그의 존재 속에 지혜와 능력과 성격과 의와 선과 진리가 거한다." 하나님의 명칭에 관하여 연구하여 보면 성서적 정의를 명확히 계통을 세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 속에 있는 하나님의 명칭은 다만 문자의 결합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된 인격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이름을 선포하여 나타냄으로써 자신을 계시하신다(출6:3,33:19,34:5,6).
하나님을 예배함은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요 (창12:8) 그의 이름을 경외하는 것이요(신28:58).
그의 이름을 찬양하는 것이요(삼하22:50). 그의 이름에 영화를 돌리는 것이다(시68:9).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나 (출20:7) 욕되게 하는 것은(레18:21, 24:16) 악한 것이다. 하나님을 존경하는 것은 곧 그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마6:9). 하나님의 이름은 그의 백성을 높이 드시며(시20:1) 그의 이름을 인하여 그는 그의 백성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삼상12:22).
다음은 가장 평범한 하나님에 대한 성서상의 명칭들이다.
(a) 엘로힘 (Elohim)
이 명칭은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과 전능 성이 기술되거나 암시되어질 곳에 사용되었다. 엘로힘은 창조의 신 (the Creator-God)이다 복수형은 능력의 충만과 삼위 일체성을 암시해 주고 있다.
(b) 여호와 (Jehovah)
창조의 신이신 엘로힘은 그의 피조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피조물의 필요를 아시고 내려오셔서 그들을 도와주시고 구원해 주신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그는 그 자신을 언약의 신 (the Covenant God) 이신 여호와로 계시하신다.
여호와라는 명칭은 존재 (To be) 를 나타내는 동사에서 온 것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세 가지 시제(the three tenese)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명칭은 존재하였던 분, 존재하고 계신 분, 존재할 분 곧 다시 말하면 영원하신 분을 의미한다. 여호와는 자기 자신을 인간에게 계시하시는 신이므로 그 명칭은 다음과 같은 뜻이다. 나는 나 자신을 나타내었고 또 나타내고 있으며 나타낼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위하여 행하시는 바 그 일은 그의 명칭에 의하여 나타난다. 그리고 그의 백성들이 그의 은혜를 체험할 때에 "그의 이름을 알게 될 것이다." 여호와와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는 여호와의 언약의 명칭들 속에 요약 되여 있다. 병들어 누워 있는 자들에게는 "병을 치료해주시는 신" 이신 여호와 _ 라파 (Jehovah-rapha) 로 알려져 있다.(출 15:26). 원수들에게 압제를 당하였을 때에 그의 백성들은, 우리들의 깃발이신" 여호와 -닛시 (Jehovah-nissi)라고 그를 불렀다.(출17:8-15). 근심에 싸여있을 때에 그들은 그가 "우리들의 평화"
이신 여호와 살롬(Jehovah-shalom)임을 깨달았다. (삿6:24). 이 세상에서 나그네 되었을 때에 그들은 "목자"이신 여호와-라하 (Jehovah-ra'ah)의 필요성을 느꼈다.(시23:1).
정죄를 지각하고 의의 필요성을 의식하였을 때에 그들은 "우리들의 의의신 여호와 -지드 (Jehovah-Tsidkenu)에 게 소망을 걸고 부르짖었다.(렘23:6). 궁핍할 때에 그들은 그가 "궁핍을 채워 주시는 신"이신 여호와-이레(Jehovah-Jireh) 인줄을 깨달았다 (창22:14).하나님의 나라가 세상에 임할 때에 그는 여호와 - 샤마(Jehovah-Shammah)로서 알려질 것이다(겔44:35).
(c) 엘 (EL)(하나님) 은 복합어로서 사용되어 진다. 엘엘이 하나님은 신들이라고 불리워지는 다른 존재들보다는 훨씬 우월한 분이시다. 엘샤-다이(EL- Shaddai)는 "그의 백성의 궁핍을 채워주는 신"이다(출6:3),엘-올암(EL-Olam)은 "영생하시는 하나님"이다(창21:33).
(d) 아도나이 (Adonai)는 글자 그대로 "주" (Locd)또는 "선생" (Master)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명칭은 통치권과 주권의 개념을 갖고 있다. (출 23:17,사10:16,13). 그는 그의 인격과 행위 때문에 그의 백성의 봉사와 충성을 요구한다. 신약에서 이 명칭은 영화럽게 된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었다.
(e) 아버지(Father) 라는 명칭은 구약과 신약에 모두 사용되었다. 광범위한 의미에서 아버지라는 명칭은 만믈의 생산자와 인간의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창조적 의미에 있어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자손이라고 불리워질 수 있다.(행17:28). 그러나 이와 같은 관계가 인간의 구원을 보증해 주지는 않는다. 다만 성령으로 새롭게 거듭난 사람만이 하나님의 자녀들이다(요1: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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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잘못된 신관(神觀)
성경을 도외시한 그릇된 다른 신관들이 있다. 이 신관들 중에 어떤 것은 진리를 너무 지나치게 강조한다. 어떤 신관은 부적당하고 또 다른 신관들은 악용되어졌거나 타락된 것이다. 이러한 그릇된 신관을 살펴 볼 까닭이 어디에 있는가? 그 이유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완전히 설명하는 일은 매우 힘들기 때문에 그릇된 신관을 살펴봄으로써 올바른 신관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
(a) 불가지론 (Agnosticism)
불가지론 (헬라어로 "알지 못한다"를 의미한다.) 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부인한다. 불가지론 자들은 "유한한 인간 정신을 무한을 이해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불가지론 자들은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인식하는 것과 하나님에 관하여 약간의 것을 인식하는 것과는 구별하지 못한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 곧 다시 말하면 그를 완전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를 이해 할 수 있다. 즉 그에 관해서 알 수 있다.
" 우리들은 하나님에 관하여 온갖 것을 알지는 못해도 그가 계시다는 것을 알 수는 있다. 비록 우리들이 우리들의 팔로 온 지구 덩어리를 얼싸안을 수는 없을지라도 지구를 만져 볼 수는 있다. 철학자가 전능 자를 완전히 찾아낼 수는 없을지라도 어린아이도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클라크(D.S.Clarke)씨는 말하였다.
성경은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한편 성경은 우리들에게 "부분적으로 그를 알 수 있다"는 점을 경고해 주고 있다.(출33:20,욥11:7,롬11:33,34,고전13:9-12).
(b) 다신론 (Polytheism)
다신론은 (많은 신들을 섬기는 것) 고대 종교의 특징으로서 오늘날도 아직 이교도의 나라 안에는 존속하고 있다. 이 다신론은 우주가 단 하나의 세력에 의하여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세력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다는 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수신과 화신과 산신과 전쟁의 신 등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다신론은 이교 신앙의 자연스러운 결과로서 유한한 대상물을 신들로 만들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게 되는 것이다"(롬1:25).
아브라함은 이교 신앙을 떠나 참다운 유일신의 증거자가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아브라함의 소명은 이스라엘 선교의 시작으로 주위에 있는 여러 나라들의 다신론을 반박하여 유일신교를 전하는 것이 되었다.
(c) 범신론 (Pantheism)
범신론 ("모든 것이 신이다"라는 뜻을 나타내 주는 헬라어에서 왔다.) 은 하나님과 우주를 동일시하는 사상 체계이다. 나무와 돌과 새와 동물과 땅과 물, 파충류와 인간, 이 모든 것은 신의 일부분이며 마치 영혼이 육체를 통하여 표현되듯 이 신은 이 모든 물질과 힘을 통하여 살고 있으며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 이와 같은 사상 체계는 어떻게 되었을까? 롬1:20-23 은 여기에 대하여 사색의 실마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 아득히 먼 과거에 이방인 철학자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마음들 속으로부터 하나님을 추방해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을 대신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만큼 큰 것이 아니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내버려 두고 멀리 떠났기 때문에 이 세상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그들은 이와 같이 논리적으로 추리하여 산과 나무와 사람들과 짐승과 그밖에 모든 자연의 힘을 숭배하기 시작하였다.
맨 처음 볼 대 자연 숭배는 매우 아름다운 듯이 보이나 불합리한 결론을 내포하고 있다. 만일 나무와 꽃과 별들이 하나님이 될 수 있다면 버러지와 세균과 범과 비열한 죄인들도 하나님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니 불합리하다.
범신론은 하나님과 자연을 혼동하고 잇다. 그러나 시가 시인이 아닌 것처럼 예술이 예술가가 아닌 것처럼 음악이 음악가가 아닌 것처럼 피조물은 결코 하나님이 될 수 없다. 유대 민족의 아름다운 전설은 아브라함이 어떻게 피조물과 하나님을 구별하게 되었는가에 대하여 전해 주고 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본질에 관하여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에 그는 아름다운 광채 때문에 별들을 하나님을 잘못 보았었다.
그러나 별들의 빛 보다 달빛이 더 뛰어나게 밝은 것을 보고 달을 하나님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태양 빛에 비할 때 달빛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그는 태양을 신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태양도 밤에는 사라지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 모든 성좌들보다 훨씬 위대한 무엇이 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라고 아브라함은 생각했다. 이렇게 하여 틀림없을 것이다"라고 아브라함은 생각했다. 이렇게 하여 그는 자연숭배로부터 자연의 하나님을 예배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성경은 범신론의 잘못된 견해를 바로 잡아주고 있다. 성경은 자연을 통하여 하나님이 계시되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면서 하나님과 자연을 구별하고 있다. 범신론자들은 하나님이 곧 우주라고 말하고 있는데 반하여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범신론은 오늘날 어디에서 신앙되고 있는가? 첫째로 자연을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는 시인들 사이에 신앙되고 있다. 둘째로 범신론은 대부분의 인도의 종교 속에 침투하여 우상 숭배를 정당화시키고 있다. 셋째로 크리스챤 사이언스 (Christian - Science)는 범신론의 한 형태이다. 왜 그러냐 하면 그들의 근본 교리 가운데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요. 모든 것은 하나님이다" (God is all and all is God). 크리스챤 사이언스는 관념론적 범신론이다. 왜 그러냐 하면 이 교파는 모든 것은 마음 또는 "아이디어"(idea)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물질은 비 실재적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d) 물질주의 (Materialism)
물질주의는 물질과 정신의 구별을 부인하고 생명과 정신과 그리고 모든 힘의 현상은 다만 물질의 특성이라고 단언한다. " 간장이 담즙은 분비하듯이 두뇌는 생각을 산출한다." "인간은 기계이다." 물질주의자들은 이렇게 말하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인간의 고상한 생각과 신성을 말살해 버리기 위하여 "인간은 단순히 동물에 불과하다."고 선언한다.
이 물질주의는 너무도 조잡하고 불합리하기 때문에 논박할 가치도 거의 없다. 그러나 수많은 대학 안에서 또 수많은 소설 안에서와 기타 여러모로 물질주의가 논의되어지고 있으며 또 신봉되고 있다. 즉 사람이한 짐승이 아니면 기계이다. 또 사람이란 자기에 행동에 대하여 책임을 질 수 없으면 선도 악도 없다고 믿고 있다. 물질주의의 오류를 논박함으로서 다음과 같이 관찰해 보라.
(1) 우리들의 의식은 물결 이상이며 또 돌과 나무와는 다르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말해주고 있다. 적은 상식이 많은 철학보다 더 가치가 있다. 아일랜드의 웅변가 다니엘 오코넬 (Daniel O' Connel)이 어떤 날 아일랜드의 어떤 부인의 날카로운 혀와 신랄한 말씨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부인을 만나 다음과 같은 말을 퍼부어 이 부인을 압도시켰다.
" 이 비참하고 뻔뻔스러운 사람 같으니!" 부인이 당황해질 때까지 그는 이런 지독한 욕을 계속해서 퍼부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대 철학자들도 으리으리한 말들로 우리들을 무섭게 만들고자 한다. 그러나 장황하게 늘어놓는다고 오류가 진리로 될 수는 도저히 없다.
(2) 경험과 관찰에 의할 것 같으면 생명이란 오직 존재하고 있는 생명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생명은 살아 있는 원인을 갖고 있는 것이다. 생명이 없는 물질로부터 생명이 나올 수 있다는 증거를 찾아 볼 수 없다. 수년 전에 어떤 과학자는 생명이 없는 물질에서 생명이 생겨 나오는 것을 발견하였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공중에 미생물이 있다는 것이 발견되자 학설은 수포로 돌아갔다.
(3) 우주 속에 있는 섭리와 계획과 지성의 증거는 맹목적 물질주의를 부인한다.
(4) 가령 인간이 기계라고 가정해도 기계 자체는 기계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기계는 그 발명가를 산출해 내지 못한다. 그러나 발명가는 기계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물질주의의 악은 그것이 도덕의 기초를 파괴해 버린다는 사실 속에 있다. 만일 사람이 다만 기계에 불과하다면 그는 그의 행동에 대해서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 따라서 우리들은 영웅을 고상하다고 부를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악한을 악하다고 부를 필요도 없다. 왜 그러냐 하면 그들은 다만 그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정죄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정죄할 수 없다. 왜 그러냐 하면 마치 둥근 톱이 단두대를 보고 "너는 왜 그다지도 잔인하냐?" 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면 물질주의에 대한 해독제는 무엇인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성령이 나타나며 그 표적이 따른다.
(e) 자연신교 (Deism)
자연신교는 이 세상을 창조한 인격적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으나 창조 후에 그는 이 세상을 자연 법칙의 지배 아래 두고 이 세상으로부터 떠나버리고 말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마치 시계의 태엽을 감아 놓았듯이 이 세상이란 시계의 태엽을 감아놓고 다 풀릴 때까지 아무 간섭도 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두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시 하든가 혹은 기적 같은 것은 도저히 불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사상 체계를 종종 이성주의라고 부르는데 그 까닭은 이성을 종교에 있어서 최고의 길잡이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계시 종교의 반대로서 자연 종교라고도 한다.
이 사상 체계는 성경의 영감의 증거와 역사 중의 하나님의 역사의 증거와 모순된다. 자연 신교를 믿는 사람들의 신관은 편역 된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과 세계와의 관계에 관하여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다. 첫째 사실은 그의 초월성이다. 곧 세계와 인간을 초월하여 따로 떨어져 있음을 의미한다.(사6:1).
둘째 사실은 그의 내재성이다. 곧 세계와 인간 속에 존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행17:28,엡4:6) 자연 신교가 첫째 사실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는데 반하여 범신론은 둘째 사실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는데 반하여 범신론은 둘째 사실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다. 성경이야말로 균형이 잡힌 참다운 신관을 보여주고 있다. 곧 자세히 말하면 하나님은 이 세계를 초월하여 계시면서 또 다른 한 편에서 그는 이 세계 속에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과 같이 계시기 위하여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 그리고 아들은 또한 우리들 속에 성령을 보내 주셨다. 그러므로 삼위 일체의 교리는 이 두 가지 극단을 피하게 만든다. 하나님께서 이 세계 밖에 계신가 또는 세계 안에 계신가는 질문에 대하여 성경은 두 가지가 다 옳다는 긍정적 답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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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하나님의 속성 (The Attributes of God)
하나님은 무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알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그는 인자하게도 자기 자신을 우리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계시하셨다. 그리고 성경 속에 내포되어 있다. 가령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가르켜 "나는 거룩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거룩함이야말로 하나님의 속성이다. 왜 그러냐 하면 거룩이야말로 하나님께 적용할 수 있는 특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나타낸 계시의 도움을 받아 하나님에 관한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의 명칭과 그의 속성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명칭은 그의 존재를 나타내고 있는데 반하여 그의 속성은 그의 인격의 여러 가지 면을 나타내 주고 있다.
하나님 같이 위대한 존재에 대하여 기술할 바가 있다면 대단히 많은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속성을 분류해보고 나면 하나님에 관한 설명도 훨씬 용이해 질 것이다.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일을 마치 컵으로 태평양의 물 전체를 담아보려는 것과 같은 노릇이다. 그러나 그는 우리들이 그를 알 수 있는데 족할 만치 자기 자신을 계시하셨다. 다음과 같은 분류를 살펴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1. 절대적 속성.
피조물을 더나 하나님 차체로서 절대적인 것. 이와 같은 절대적 속성은 모든 만물이 존재하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 가라는 질문에 해답을 주고 있다.
2. 활동적 속성. 하나님과 우주와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
3. 도덕적 속성. 하나님과 그의 도덕적 존재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것.
1. 하나님의 내적 성격 (절대적 속성)
(a) 하나님은 영이시다(요4:24).
하나님은 인격을 갖고 계신 영이시다. 그는 생각하며 느끼며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피조물과 직접적인 교제를 가질 수 있다. 하나님은 육체의 지체와 감정과 물질적 요소로 구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는 자연적 존재의 조건들에 굴복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육안과 육체적 감각에 의하여 그를 인식할 수는 도저히 없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공허하고 비현실적 존재로서 살아 계시다는 말은 아니다. 왜 그러냐 하면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모습"에 관하여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요5:37,빌2:6 참조) 하나님의 참다운 인격적 존재이시다. 그러나 본질상 무한하기 때문에 인간의 이성으로써 그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언어로서 그를 적절히 설명할 도리가 없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다" 고 요한은 선언하였다. (요1:18,출33:20).
그러나 출24:9-10 속에는 모세와 장로들이 하나님을 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등의 모순된 점을 찾아 볼 수 없다. 요한은 아무도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보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성경이 볼 수 있는 형체로 나타날 수 있다는 점도 이해할 수 있다.(마3:16)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계시하실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그의 무한한 인격을 유한한 인간 이성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통하여 기술하신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께서 손과 발과 눈과 귀를 갖고 계신 존재로서 볼 수 있고 감촉 할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후회할 수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찾아 낼 수 없고 알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권능자를 어찌 능히 온전히 알겠느냐?"(욥11:7)
라는 질문에 대하여 우리들은 다음과 같이 대답할 도리 밖에 없다.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요4:11).
(b) 하나님은 무한하시다.
곧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연과 인간의 제한에 구애받지 않는다. 하나님의 무한성을 다음과 같이 두 가지 면에서 고찰해 볼 수 있다.
(1) 공간과 관련하여 하나님은 광대 무변 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왕상8:27)
곧 하나님의 본질은 어디에나 안 계신 곳이 없는 무소 부재의 원리 속에 있다. 그의 임재와 능력과 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은 한 곳도 없다. "그의 중심은 어디에나 있으나 그의 주변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우리들은 어느 특정된 곳 곧 하늘에 영광스러운 모양으로 그가 존재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2) 시간과 관련하여 하나님은 영원하시다(출15:18,신33:27,느9:5,시90:2,렘10:10, 계4:8-10). 그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존재할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그에게 있어서는 현재이다. 영원하시기 때문에 그는 불변이시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시다. 이 진리가 신자들에게는 하나의 위안이 된다.
신자들은 "영원하신 하나님이 너의 처소가 되시니 그 영원하신 팔에 네 아래 있도다."라는 말씀을 믿을 수 있을 것이다(신33:27).
(c) 하나님은 하나이시다 (출20:3,신4:35,39,6:4,삼상2:2,삼하7:22,왕상8:60,왕하19:15,느9:6,사44:6-8,딤전 1:17)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라는 말씀은 구약 시대의 종교의 근본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많은 거짓 신들을 섬기는 이방인의 세계를 향한 이스라엘의 독특한 메시지가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단일성에 대한 이와 같은 가르침은 삼위 일체의 교리를 가르치는 신약과 모순되는가? 우리들은 두 가지 단일성 즉 절대적 단일성과 복합적 단일성을 구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 사람"이라는 표현은 한 인격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절대적 단일성의 사상을 전달해 주고 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 찌로다"(창2:24). 라는 성경 구절을 읽을 때 이는 복합적 단일성을 의미한다. 왜 그러냐 하면 두 사람이 한 몸으로 결합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스3:1과 겔37:17도 참조하라. 이 성경 구절들 속에도 "하나"를 뜻하는 동일한 말(에카드)이 사용 되었다.(창22:2,12,암8:10,렘6:26,슥12:10,잠4:3,삿11:34).
신 6:4에는 어떤 종류의 단일성이 언급되어 있는가? "우리 하나님"이라는 말이 복수형(엘로힘)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미루어 보아 복합적 단일성을 가르키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삼위 일체의 교리는 영원하고 본질적인 단일체 속에 결합되어 있는 성삼위를 포함한 복합적 단일성으로서의 하나님의 단일성을 가르쳐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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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우주와 관련을 맺고 계신 하나님 (능동적 속성들)
(a)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창1:1,17:1,18:14,출15:7,신3:24,32:39,대상16:25,욥40:2,사40:12-15,렘32:17,겔10:5,단3:17,4:35,암4:13,5:8,슥12:1,마19:26,계 15:3,19:6). 하나님의 전능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1) 하나님의 본성과 모순되지 않는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는 그의 능력과 자유 "하나님은 능치 못할 것이 없느니라." 물론 이 말은 그의 본성에 위배되는 일도 하실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가령 예를 들면 거짓말을 한다든가 물건을 훔치는 일을 하실 수 없는 것이다. 곧 자가 당착의 모순 가령 삼각형의 원이라든가 마른 물을 만들어 낼 수는 도저히 없다.
(2) 모든 것이 가능하도록 지배하시는 그의 주권과 지배력.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왜 이 세상에 악이 행하여지고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는데 하나님도 인간의 자유 의지를 침범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는 악이 작용하도록 허용하고 있다. 하나님만이 전능하시기 때문에 사탄도 하나님의 허락을 받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욥1장과 2장을 참조하라)하나님에 의하여 모든 생명을 유지되고 있다. (히1:3,행17:25,28,단5:23).
인간의 존재는 마치 올간의 소리와 같이 하나님의 손가락이 건반 위에 머물러 있는 한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이다.
(3) 모든 것이 가능하도록 지배하시는 그의 주권과 지배력.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왜 이 세상에 악이 행하여지고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는데 하나님도 인간의 자유 의지를 침범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는 악이 작용하도록 허용하고 있다. 하나님만이 전능하시기 때문에 사탄도 하나님의 허락을 받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욥1장과 2장을 참조하라). 하나님에 의하여 모든 생명은 유지되고 있다(히1:3,행17:25,28,단5:23).
인간의 존재는 마치 올간의 소리와 같이 하나님의 손가락이 건반 위에 머물러 있는 한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이다.
(b) 하나님은 무소 부재이시다. 즉 다시 말하면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신다(창28:15,16,신4:39,수2:11,시139:7-10,잠15:3,11,사66:1,렘23:23,24,암9:2-4, 6, 행7:48,49,엡1:23). 광대 무변과 무소 부재와의 차이는 무엇인가? 광대 무변 은 공간과의 관련해서 하나님의 실재인데 반하여 무소 부재는 피조물과의 관련하에서 본 하나님의 실재를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피조물에게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나타나신다.
(1) 영광 가운데서 만군의 여호와가 나타나심(사6:1-3).
(2) 효과적으로 자연의 질서 가운데 나타나셨다. (나1:3).
(3) 섭리에 의하여 인간의 여러 가지일 가운데 나타나셨다.(시68:7-8).
(4) 주위 깊게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나타나심.(마18:19,20,행17:27).
(5) 심판하시려고 악한 사람들의 양심에 나타나심 (창3:8 시68:1,2). 인간은 우주의 어느 구석에서나 그의 창조주의 법을 피할 도리가 없다. 어느 한 중국인은 중국인 신자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만일 하나님께서 어느 곳에서나 계시다면 그는 지옥에도 틀림없이 계실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중국인 신자는 재빨리 "그의 노여움은 지옥에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어느 무신론자가 "하나님은 아무 곳에도 계시지 않는다."(God is no where)고 기록하여 놓았더니 그의 어린 딸은 "하나님은 지금 여기 계시다."God is now here)라고 읽은 일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이 말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받았다.
(6) 육체로 그의 아들 속에 거하신다 (골2;9)."하나님께서 우리들과 함께 거하신다.."
(7) 신비하게도 교회 속에 거하신다(엡 2:12-22).
(8) 공식으로 그의 일꾼들과 함께 계신다 (마28:19,20).
하나님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계신 한 편 어디에나 거주하시지는 않는다. 다만 하나님께서 어떤 개인이나 단체와 인격적 관계를 맺을 때에 그들과 더불어 함께 거하신다고 일컬어진다.
(c) 하나님은 전지하시다. 곧 모든 것을 다 아시고 계시다.(창18:18,19,왕하8:10,13,대상28:9,시94:9,139:1-16,147:4,5,잠15:3,사29:15,16,40:28,렘1:4,5,겔11:5,단2:22,28,암4:13,눅16:15,행15:8,19,롬8:27,9,고전3:20,딤후2:19,히4:13,벧전1:2,요1서3:20).
하나님의 지식은 완전하다. 그는 추리하거나 점차적으로 학습할 필요가 없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한 그의 지식은 동시적인 것이다. 이 속성을 생각해 볼 때에 우리들은 크게 위안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인생의 온갖 시련 가운데에서도 신자들은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6:8)는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어려운 점이 대두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어느 누군가 타락할 것도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사람이 어떻게 타락함으로부터 면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하나님의 지식은 인간이 자기의 자유 의지를 상용하는 것을 강제하지는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예지 하시나 미리 고정시키지 않는다.
(d) 하나님의 현명하시다(시104:24,잠3:19,렘10:12,단2:20,21,롬11:33,고전1:24,25,30,2:6,7,엡3:10,골2:2,3,). 하나님의 지혜는 그의 전지와 전능의 결합에서 온 것이다. 그는 그의 지식을 최선의 수단에 의하여 실현될 수 있는 최선의 목적에 적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계시다.
하나님은 항상 올바른 일을 적당한 때에 올바른 방법으로 행하신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또 모든 사건의 과정을 자기 자신의 선한 목적을 위하여 지배하실 때에 이 행위를 섭리하고 부른다. 하나님의 일반적의 특수한 섭리는 인간 생활의 사소한 일들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e) 하나님은 주권자이시다. 곧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그가 원하는 대로 그의 피조물을 다스리고 처리할 절대적 권리를 갖고 계시다.(단4:35,마20:15,롬9:21).
그는 그의 무한한 우월성과 모든 것에 대한 그의 절대적 소유권과 모든 만물이 지속하기 위하여 그에게 의존하는 절대적 의존성에 의하여 이와 같은 권리를 갖고 계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길을 비판하는 것을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악한 것이다. 클라크씨 (D.S.Clarke)의 다음과 같은 글을 살펴보자.
"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교리는 가장 유용하고 격려의 힘이 되는 교리이다. 만일 우리들이 다음과 같은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즉 좀더 자세히 말하면 맹목적인 운명이나 변덕스러운 유언이나 변경할 수 없는 자연 법칙이나 근시안적이고 왜곡된 자아나 무한히 현명하시고 거룩하시고 사랑하시며 능력이 있는 하나님 중에 어느 하나에 의하여 지배되기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면 우리들은 어느 것에 의하여 지배되기를 선택해야만 될 것인가? 하나님의 주권을 거부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주권 이외에 다른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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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도덕적 피조물과 관련을 맺고 있는 하나님 (도덕적 속성)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 대한 하나님의 기록을 검토해 보면 다음과 같은 것을 알게 된다.
(a)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출15:11,레11:44,45,20:26,수24:19,삼상2:2,시5:4,111:9,145:17,사6:3,43:14,15,렘23:9,눅1:49,약1:13,벧전1:15,16,계4:8,15:3,4). 하나님의 성결은 그의 절대적 도덕상의 순결을 의미한다. 그는 죄를 범치 않으실 뿐만 아니라 죄를 허용치도 않으신다. "거룩"의 근본적 의미는 "격리"이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은 격리되어 있는가? 공간적으로 그는 인간으로부터 격리되어 있다. 즉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인간들은 지상에 있다. 본질과 인격에 있어서 그는 인간으로부터 격리되어 있다. 하나님은 완전하시다. 그러나 인간은 불완전하다. 하나님은 신성을 지니고 계시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성을 갖고 있다. 그는 도덕적으로 완전하시다. 그러나 인간은 죄악되다. 그러면 우리들은 성결이야 말로 하나님과 인간을 구별짓는 속성임을 깨닫게 되었다. 성결은 단순히 하나님의 속성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의 신성으로 인간을 감동시킬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계시하실 때에 그는 자기 자신을 거룩하게 한다고 말씀하셨다(겔36:22,38:23).
곧 그는 자기 자신을 거룩한 자로 계시하신다. 스랍들이 보좌에 앉아 계신 여호와로 부터 광채가 흘러나오는 것을 보고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라고 부르짖었다.(사6:3)
인간들이 여호와를 하나님으로서 경외할 때에 그들은 하나님을 거룩케 하는 것이다 (민20:12,레10:3,사8:13). 그러나 인간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범함으로써 그를 모욕할 때에 그들은 그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에 반대는 그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마6:9). 하나님만이 홀로 거룩하시다. 거룩한 백성이라든가 거룩한 건물이라든가 거룩한 목적이라고 할 때에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은 거룩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거룩"이라는 말을 사람이나 물건에 적용하였을 때 이는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다. 곧 여호와를 섬기기 위하여 따로 구별해 놓은 것을 말한다. 이렇게 따로 구별된 물건들은 깨끗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렇게 구별된 사람들은 거룩한 법을 쫓아 살려고 헌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사실들 로써 성결의 교리에 기초를 이루고 있다.
(b)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의와 거룩의 차이는 무엇인가? "의는 행위로 나타난 거룩이라"고 대답할 수도 있으리라. 의는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과의 관계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거룩함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창18:25). 의는 옳은 표준과 일치하는 것이다. 곧 의는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 옳은 행위를 말한다. 언제 하나님께서는 이 속성을 나타내시는가?
(1) 하나님께서 무죄한 자의 결백함을 증명하고 악한 자를 벌하실 때에 정의가 실행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재판관들이 다른 사람들이 그들 앞에 제시한 증거에 의거하여 재판하듯이 판단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증거를 발견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이 충만한 메시야는 "그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고"정으로써 판단하신다.(사11:3)
(2)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자는 용서할 때 그의 정의가 나타난다 (시51:14,요1서1:9,히6:10).
(3)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징계하고 심판하실 때에 그의 정의가 나타난다(사8:17,암3:2).
(4)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실 때에 그의 정의는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위하여 간섭하시는 것을 그의 의하고 칭한다(사46:12,45:24,25). 구원이 소극적인 면이라고 하면 의는 적극적인 면이다. 그는 그의 백성을 그들의 죄와 원수들로부터 구원하신다. 그리고 그 결과가 마음의 의가 되는 것이다(사60:21,54:13,61:10,51:6).
(5) 하나님께서 그의 진실한 종들에게 승리를 주었을 때에 그의 정의는 나타난다.(사50:4-9).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고 악한 자들을 심판하신 후에 우리들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의를 쫓아 살게 될 것이다. (벧후3:13).
하나님께서는 올바르게 처리하실 뿐만 아니라 의를 요구하신다. 그러나 만일 인간이 범죄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러면 그는 회개하는 자를 은혜 스럽게도 의로 여겨주신다. (롬4:5). 이것이 칭의의 교리의 근본이 된다.
하나님 본질은 인간과 그의 관계의 기본이다. 하나님은 하나님답게 행동하신다. 거룩하신 분은 신성하게 하며 의로우신 분은 의롭게 하신다.
(c) 하나님은 성실하다.
그는 절대적으로 믿을 만하며 그의 말씀은 틀림 없다. 그러므로 그의 백성들은 그의 약속을 굳건히 믿을 수 있다(출34:6,민23:19,신4:31,수21:43,-45, 23:14,삼상15:29,렘4:28,사25:1,겔12:25,단9:4,미7:20,눅18:7,롬3:4,15:8,고전1:9,10:13,고후1:20,살전5:24,살후3:3,딤후2:13,히6:18,10:23,벧전4:19,계15:3).
(d) 하나님은 자비스럽다.
"하나님은 자비심은 그의 피조물의 비참에 대하여 표명된 하나님의 선과 그들에 대한 동정심으로 만일 그들이 개과 천선의 가망이 있는 죄인들이라면 그들을 구제하려고 오래 참으신다. (Hodges)(딛3:5,애3:22,단9:9,렘3:12,시32:5,사49:13,54:7). 하나님의 자비심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표현 중에 하나를 시 103:8-18에서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자비심에 대한 지식이 소망의 근거와(시130:7)신뢰의 근거 (시52:8)가 된다. 하나님의 자비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일 가운데 현저하게 나타났다. (눅1:78).
(e).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이다. 그렇게 때문에 그는 그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과 인격적 관계를 맺고자 하신다. 특별히 인격적으로 하나님과 같이 거룩하게 창조된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자 하신다.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기술되어 있는 것을 살펴보라(신7:8,엡2:4,습3:17,사49:15,16,롬8:39,호11:4,렘31:3).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는가 살펴 보라 (요3:16,요1서4:9,10,롬9:11-13,요1서 3:1,사43:3,4, 사63:9,딛3:4-7,사38:17,엡2:4,5,호11:4,신7:13,롬5:5).
(f) 하나님은 선이시다.
하나님은 선이시다. 그렇게 때문에 그는 그의 피조물들에게 생명과 그밖에 다른 축복들을 주신다. (시25:8,나1:7,시145:9,롬2:4,마5:45,시31:19,행14:17,시68:10,85:5). 죤슨 박사 (Dr,Howard Abnew Johnson)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수년전에 나는 어느 가정의 저녁 식사에 초대받은 적이 있다. 그 집 주인은 나에게 식기도를 드려달라고 요구하였다. 이 요청에 있은 다음에 나는 우리들 앞에 놓여 있는 하나님의 선물들에 대하여 감사의 기도를 드렸더니 그는 다소 무뚝뚝하게 이렇게 말하였다.
'참으로 나는 기도의 진의를 알 수 없는데요. 왜 그러냐 하면 이 식사는 내가 친해 마련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다음과 같이 물었다.' 만일 파종이나 추수가 실패되어 온 지구에 흉년이 들어 인구의 반이 다음 추수기를 넘기지 못하고 굶어 죽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만일 이와 같은 흉년이 이년 동안 계속된다면 전 지구 위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이 죽고 말게 되리라는 것도 생각해 보신 적이 계십니까?
곧 그는 정색을 하면서 이와 같은 흉년이 들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하여 생각해보지 못한 점을 시인하였다. 그래서 나는 우리 앞에 차려놓은 음식을 그가 장만하였다고 말하는 그의 태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암시해 주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생명과 또한 능력을 주어 이와 같은 음식을 장만케 하여 주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이 음식물로 사용하는 곡식과 동물 속에 생명을 넣어 주셨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와 같은 일을 할 수는 없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하나님의 율법에 들어감으로써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을 장만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그에게 암시하여 주었다. 그리고 나서 나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만일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어떤 것을 선물로 줄 것 같으면 당신은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만일 하루에도 이와 같은 선물을 두세 번 받게 되면 받을 적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그는 곧 나의 말이 옳다고 동의하였다. '이제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는 이유를 알게 됐을 겁니다.'라고 내가 말하자 그는 흥분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아 이제야 감사하다고 말하는 것이 고상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악과 고통이 존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을 믿을 수 없다고 한다. "왜 사랑의 하나님이 고통으로 가득찬 세계를 창조하셨는가"라고 그들은 의문을 제기한다. 다음과 같은 이유를 제시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 이 될 것이다.
(1) 하나님은 악에 대하여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 만일 조심성 없는 직공이 부주의하여 아주 섬세한 기계 속에 모래를 집어넣었다면 그 기계를 제작한 사람이 책임을 짊어져야 하겠는가? 하나님은 모든 것을 선하게 창조하셨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물들을 망쳐놓았다. 이 세계 가운데서 인간들이 고의로 범한 죄악에 기인된 모든 고통을 제거해 버리고 나면 별로 남는 고통이 많지 않을 것이다.
(2) 하나님은 전능자이시기 때문에 악은 그의 허락을 받아 존재하다. 왜 하나님께서 악이 세상에 존재하도록 허락하시는지 그 이유를 우리들은 이해할 수 없다. 왜 그러냐 하면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지나치게 사색적인 사람에게는 "네 사색이 너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느냐?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의 길의 일부분을 이해할 수 있다. 곧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과오를 범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유명한 작가인 스트븐슨씨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비록 내가 한 눈을 감고 다른 한눈으로 들여다보는 적은 구멍으로 우주의 적은 단편을 살펴보아도 나는 나의 자신의 운명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과 신호의 단편적 증거를 찾아 볼 수 있다. 그런데 모든 것을 알아 볼 수 없다고 미칠 듯이 불평할 수 있을까?
차라리 이와 같은 광대한 계획 가운데서 믿음을 격려해 줄 수 있는 적은 것이나마 알 수 있게 된 것을 무한한 경의 가운데서 감사함이 마땅치 않을까?"
(3) 하나님은 대단히 위대하시기 때문에 선을 위하여 악을 억압하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요셉의 형제들과 바로와 헤롯과 그리스도를 못박은 사람들의 죄악을 어떻게 억압 하셨는가를 기억하라. 어떤 고대 학자는 다음과 같은 매우 지당한 말을 하였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업에 악이 조금이라도 개입하도록 허락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악도 선으로 만들 수 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고통과 시련의 불길 가운데서 인격을 정화시켰으며 믿음을 공고히 하였다. 고통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더욱 더 하나님의 품속 깊이 안길 수 있게 되었다. 고통이란 불로 연단 된 인격을 사는데 필요한 대가이다.
(4) 하나님은 이 우주를 자연 법칙에 의하여 조정하셨다.
그런데 이 자연 법칙 속에는 우발적 사고의 가능성이 개재되어 있다. 가령 예를들면 만일 어떤 사람이 부주의로 인해서 또는 고의로 낭떨러지에서 떨어지게 되면 그는 중력의 법칙을 범한 결과로 해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와 같은 법칙이 있음을 대단히 고맙게 생각한다. 왜 그러냐하면 만일 이와 같은 법칙이 없다면 이 세상은 온통 혼란한 상태에 빠지고 말기 때문이다.
(5) 우리들은 항상 이 세상이 완전한 질서의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하나님께서는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의 모든 것도 주관하신다. 하나님께는 "하늘 나라의 표준시 (Heavenly Standard Time)에 의하여 일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들은 그가 지체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속히 풀어주실 것이다(눅18:7,8).
이 세대라는 극의 마지막 장면이 끝나고 막이 나릴 때까지는 결코 하나님을 비판해서는 안 된다. 이때에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아름답게 이루어주실 것을 "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