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유다

[스크랩] 이스라엘 역사 정리

하나님아들 2014. 4. 7. 20:05

 

 

 

이스라엘 역사 정리

 

 

 

이스라엘 (BC2000-BC444)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사이는 멀지 않아서 서로 왕래가 많았다.

이 사이에 초승달 모양의 비옥한 땅이 있다.

이 땅의 끝부분이 지금의 팔레스틴(불레셋 )지역이다.

이를 가나안 땅이라고 부르고 이스라엘 민족이 거주한 땅이다.

이 지역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중 세력이 강한 쪽에서 지배하였다.

양쪽 문명이 들어오게 되어 일찍 문명이 싹트게 되었다. 


가. 족장시대(BC 2000- BC 1670 경)

연대는 할레이 저서의 최신 성서 핸드북을 참고로 하였고 추정 연대는 학자마다 다르다.

[우리 나라는 BC 2333년에 단군이 평양성(왕검성)을 서울로 삼고 고조선(단군 왕검)을 세웠다.]


BC 2000 경에 메소포타미아의 우르 지방에 아브라함이 살고 있었다. [4대문명지도]

하나님이 그를 불러내어 3가지 약속을 하였다. [우르위치지도(오스만투르크)]

1) 가나안 땅에서 살게 하겠다.

2) 위대한 민족이 되게 하겠다.

3) 모든 민족의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

이 약속은 이삭에게 또 야곱에게 반복되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과 함께 우르지방을 떠나 하란을 지나 가나안 땅 세겜으로 그 다음은 벧엘에서

그 다음은 헤브론에서 거주했다.


1 대 아브라함(BC 2000- BC 1825 경)

아버지 데라의 나이 130세에 출생하였으며, 75세에 가나안에 갔다.

80세에 롯을 구하고 멜기세덱을 만났다.

86세에 이스마엘을 낳았고, 99세에 소돔이 멸망하였으며, 100세에 이삭을 낳았다.

137세에 사라가 죽었으며, 160세에 손자 야곱과 에서가 태어 났다.

175세에 죽어 막벨라 동굴에 장사된지 115년 후에 야곱이 애굽으로 이주한다.

애급의 여종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은 아라비아민족의 조상이 되어 지금까지 대립의 원인이 된다.

사라가 죽은 후 아브라함은 그두라와 38년 살면서 6명의 자녀 중에 미디안은 미디안족의 조상이 되었으며,

미디안족과 모세는 인연이 깊다.

아브라함이 죽고 500년 후에 모세는 미디안족 이드로의 딸 십보라와 결혼하였고,

미디안족과 40년을 살면서 미디안광야에서 하나님의 섭리로 훈련을 하게된다.

모세는 출애굽 후에 유대인을 이끌고 다시 미디안 광야로 40년을 살게되어 약 80 년을 미디안 족과 같이

살게된다.

아브라함은 유대인, 회교도, 기독인이 가장 존경한다.

위대한 믿음의 조상이 되었으며, 관대하고 고귀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소돔과 고모라

죄악의 대명사인 두 도시는 멜기세덱이 사는 예루살렘과 아브라함이 살던 헤브론과 몇 km되지 않는

지금의 사해라고 하는 곳이 소돔과 고모라 땅이라고 전한다.

사해의 서남쪽 끝에 '우스돔(소돔)'산이 있다.

지금도 사해 한쪽에 유황 냄새가 나며, '롯의 처'라는 이름의 소금기둥이 여러 개 있다.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은 음탕, 잔인, 추악, 범죄 등의 악취가 하늘에 닿았다.

영어로는 소도미(sodomy)는 남색(男色)으로 표현하는데 소돔성에서 유래하였다.

하나님의 진노는 두 성읍에 '불과 유황을 내리셨다.' 이것은 예수님 재림시 모형이다.

지금도 그때와 같으니 세계적으로 회개의 운동이 일어나지 않으면 운명의 날도 멀지 않을 것이다.

두 족속

롯은 처가 죽고 후손이 없자 두 딸의 계략으로 큰딸에게서 모압을 낳아 모압족의 조상이 되었고,

작은 딸에게서 암몬을 낳아 암몬족의 조상이 되었으며, 암몬은 벤암미라고도 한다.


사해 [사해지도(이스라엘)]

주위는 소금 때문에 눈이 온 것처럼 하얗다.

사해는 이름처럼 생명체가 살지 못하는 이유는 물이 흘러들어만 오고 흘러나가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받기만하고 베풀 줄 모르면 세상은 사해처럼 될 것이라는 교훈을 주고 있다.

지금은 사해가 엄청난 보고라고 한다.

만약 세계 최후의 전쟁이라는 '아마겟돈' 전쟁이 일어난다면 사해의 보물 때문일 것이라고 한다.

지금도 이곳의 화장품은 세계적이며, 많은 사람들이 건강 때문에 사해를 찾아오고 있다.

사해는 해면보다 395(참고서 따라 392-399)m 낮아, 지구상에서는 가장 낮은 곳으로 버스를 타고

바다 밑을 가는 것과 같다.

철새들이 공기 저항을 적게 받기 때문에 이곳을 지나간다고 한다.


2대 이삭(BC 1900- BC 1720 경)

2대 이삭은 아버지가 물려준 재산과 터전 위에 기록할만한 사건이 없는 유복한 삶을 살았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100 세, 사라가 90 세에 탄생하여 37 세에 어머니 사라가 돌아가시고,

40세에 하란에 살고 있는 6촌 되는 미인 '리브가'와 결혼하였다.

60세에 야곱과 에서를 낳고, 75세에 아브라함이 죽었다.

137세에 야곱이 하란의 외삼촌 집으로 도망간 것 같고, 158세 때에 돌아온 것 같다.

167세에 손자 요셉이 애굽에 팔렸다.

180세에 죽어 막벨라 동굴에 장사되었고, 그 해에 요셉은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다.


3대 야곱 (BC 1840- BC 1693 경)

1) 형 '에서'에게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의 상속권을 샀다.

2) 하나님과 겨루어 이겨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으며, 이것이 나라의 이름이 되었다.

3) 결혼을 두 번하였고, 첩을 두 명 두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아들은 선택하여 분리했으나 야곱의 아들들은 모두 선택되었다.

4) 야곱은 애굽 땅에서 죽었고, 약430 년 후에 모세에 의하여 자손이 가나안 땅을 향해 가게 된다.

   15세에 아브라함이 죽었다. 77세에 하란으로 도망가다가,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얻었다. 84세에 언니 레아하고 결혼하였고 뒤이어 7일 후에 라헬과도 결혼하였다.

90세에 요셉을 낳았고, 98세에 가나안 땅 *헤브론으로 돌아왔다. 그해에 요셉이 애급으로 팔렸다.

120세에 이삭이 죽었며, 130세에 애굽으로 갔다.

147세에 애굽에서 죽었고, 장사는 헤브론의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굴에 하였다.

형님 '에서'는 에돔족의 조상이 되었고,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는 첩 '딤나'에서 아말렉을 낳아

아말렉의 조상이 되었다.


헤브론(Hebron) [이스라엘 고대 지도]

이 지방은 네게브 사막이 있어 메마르고 짐승을 기르는 유목을 주로 하였으며, 신앙을 잘 지켰다.

이곳에 아브라함이 헷 족속 에브론에게 밭과 함께 사서 소유 매장지를 삼은 마므레 앞 막벨라

동굴(洞窟)이 있었고, 여기에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부인들이 매장되었다.

예루살렘 남쪽 30Km 지점이며, 다윗이 이곳에 7년 동안 수도로 정하였다.

이 땅에 사는 사람을 '유대 땅 사람' 또는 '헤브라(히브리)인'이 이라고 하였고,

이 사람들이 쓰는 언어를 헤브라이(히브리)어라고 하였다.

구약성서가 이 언어로 쓰여졌으며, 이 문자는 페니키아(베니게)문자와 같고, 현재 이스라엘 공용어이다.

기독교가 헤브라인 사상을 승계 한 것을 헤브라이즘이라 한다.

후에 헤브라이즘과 헬라이즘이 합하여 유럽문명의 사상이 된다.


12 아들과 12지파


12 아들

1. 레아 -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스불론

2. 라헬 - 요셉, 베냐민

3. 실바(레아의 하녀) - 갓, 아셀

4. 빌하(라헬의 하녀) - 단, 납달리


12 지파

1)르우벤 2)시므온 3)유다 4)잇사갈, 5)스불론 6) 베냐민 7)갓 8)아셀 9) 단 10)납달리 11)므낫세

12)에브라임

레위는 제사장계보라 들어가지 않았고, 요셉대신 아들 둘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들어간다.

예수님의 계보는 유다(유대)이다.


 4 대 요셉 (BC 1780 - BC 1670 경)

1. 야곱의 나이 90세에 12아들 중 11번째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의 편애를 받았다.

2. 편애와 꿈의 사건으로 인하여 형의 미움을 받아 17세에 애굽에 팔려가 13년 동안 보디발과 감옥에

있으면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지켰다.

3. 바로왕의 꿈을 해몽하여 30세에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고, 기근이 들어 찾아온 형님들을 만나게

되는데 이 장면은 모든 문학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의 하나라고 한다.

4. 70세에 야곱의 집사람 70명이 애굽으로 이주하여 당시로는 가장 앞선 문명국이며,

기름진 고센 땅에서 큰 민족을 이루게 된다.

5. 110세에 사망하였고, 유언에 따라 400년 후에 출애굽 할 때에 요셉의 유해를 가지고 갔다.(출 13:19)

요셉은 진실, 순종, 인내, 사랑 등 이상적 덕목을 갖춘 명재상으로서, 이국에서 이름을 날렸으며,

이스라엘 역사에서도 각광받는 인물이다.

 

<12지파의 흉패를 가슴에 달고 있는 대제사장>

 


나. 출애굽과 광야 생활 (BC 1275 - BC 1235 경) [출 애굽지도]

야곱의 식구 70명은 약 BC 1710년에 애굽으로 이주하여 살다가 약 BC 1275년에 출애굽까지

약 435년 애굽 땅에 거주하면서 여자와 아이를 제외하고 약60만 명의 큰 민족을 이룬다.

여자와 아이까지 포함하면 약 300만 명의 민족으로 추정된다.

이 숫자는 25년을 1 세대로 하여 430년이면 가능 하다고 한다.

출애굽 때의 애굽의 왕은 아멘호텝(쿠푸)2세(BC1450- 1420)를 주장하는 학자와

메르넵타(BC1235-1220)를 주장하는 학자가 있다. 두 가지다 근거가 있으나 메르넵타가 더 가깝다.

아멘호텝(쿠푸)2세는 비돔의 요새를 건설할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을 노예로 삼았다.

출애굽 한 후 한 달이 지나자 식량은 떨어지고, 광야생활의 어려움이 닥쳐왔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을 것으로 주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의 옷과 신발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4가지 죄를 범하였다.

1)하나님 원망죄 2) 우상숭배죄 3) 간음죄 4) 하나님을 시험한 죄이다


 





모세(BC 1355-1235 경) [출 애굽 지도]

모세의 이름은 물에서 '태어났다'라는 뜻으로 요셉이 죽고 약 315년 후에 태어났다.

요셉이 죽은 후 오랜 세월이 지나 요셉을 모르는 왕들이 유대인을 노예와 함께 성(비돔, 람세스)을

쌓고 운하를 파고 신전 짓는 일에 동원해 유대인은 강제노역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들의 고통을 들으시고 하나님은 40년을 궁중에서 자랐으며, 교육도 받았는 모세를 택하였다.

모세는 싸우는 동족에 끼어들게 되어 한명을 살해하고 미디안으로 도망가 40년을 보냈으며,

장인 '이드로'로부터 부인 십보라를 얻었다.

미디안 시내산의 불타는 떨기나무(산 딸기) 속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유대인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라는 명령을 받게 된다.

모세는 유대인의 해방을 허락 얻기 위하여 바로왕에게 10가지 재앙을 가하였다.

1.피 재앙 2.개구리 재앙 3.이의 재앙 4.파리의 재앙 5.역병(가축전염병)의 재앙 6.피부병 재앙(종기)

7.우박 재앙 8. 메뚜기 재앙 9. 어둠의 재앙 10.장자의 죽음(유월절의 기원이 됨)이다.

이 모든 재앙이 이스라엘 사람은 피해가 없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바로의 허락을 받아 유대민족을 이끌고 역사적인 출애굽을 하게 되었다.

이것을 Exodus(엑스더스='탈출 이집트')라 하며, 한자로 출애굽(出埃及)이라 한다.

지금도 시나이 반도'카드린' 수도원 자리의 산을 아랍인들이 '제벨 무사(Jabal Musa)'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모세의 산'이라는 뜻이다.

애굽은 축복의 근원인 유대인이 살고 있을 때에는 부유하였으나 떠난 뒤에는 쇠약해졌다.

가나안땅과 이집트의 거리는 약 640Km으로 자동차로 8시간 도보로는 보름길(15-20일)이라고 한다.

그들이 이 보름길을 약 40년만에 가나안땅에 들어간 이유는 하나님을 불신하였기 때문이다.

가나안을 정복할 수 있는지를 알기 위하여 정탐꾼을 한지파마다 한사람씩 뽑아 12명을 보냈다.

이중에 유다지파 갈렙과 에브라임지파 여호수아만 긍정적으로 보았고 나머지는 부정적으로 보았다.

부정적으로 본 10명에 4년을 곱하여 40년간 광야에서 재훈련에 들어갔다. 


<모세가 홍해를 가르고 무사히 유대인을 건너게 했다.>


유대인들은 40년(BC 1275 - BC 1235 경)간 사막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만 먹고 유랑하면서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으로 성장하게 된 뒤에 가나안에 들어 갈 수 있었다.

광야 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땅으로 유대민족을 인도한 사람은 여호수아이다.

모세는 가나안땅을 바라보고 느보산에서 죽었고, 애굽을 떠난 사람 중에 갈렙과 여호수아만 들어갔다.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율법으로는 천국에 갈 수 없다는 징표라고 한다.

이 과정은 성경 출애굽기, 신명기, 민수기, 여호수아에 기록되어 있다.

모세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의 저자라고 한다.

이 5 권의 성경을 특별히 율법서(토라)라고 하고 매년 절기 때 낭독하였다.

구약성서에서 가장 중요한 성경은 레위기라고 하며, 내용은 레위기지파가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리는

방법과 율법의 조직을 기록하고 있다.

율법으로는 하나님에게 대한 것과 생활에 대한 율법이 있다.

안식일, 안식년, 희년의 제정과 신명기 28장에 다시 기록된 하나님께 복종함과 불복종에 대한 경고가

귀중한 자료이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40일간 금식 기도후에 '십계명(20장)'을 받는다.

출애굽기의 중요한 내용은 출애굽의 사건과 시내산에서 40일간 금식 기도후에 '십계명(20장)'을

받은 일과 *성막(35-40장)을 만든 일이다.

 







마늘이야기 

전설에 모세는 이집트에서 최초로 사과(라암세스에서 경작)와 마늘을 심었다고 전한다.

피라미드 벽면에 마늘 그림이 나온다. 축조하는 인부들에게 힘을 내게 하고자 마늘을 먹였다고 한다.

원산지는 남 시베리아로 중앙아시아→ 지중해→ 이스라엘→ 이집트로 전하고 옛날부터 양념으로 쓰였다.

유대인은 광야 생활 때에 애굽의 풍성한 마늘을 그리며 애굽으로 돌아갈 것을 갈망했다고 한다.

마늘은 스태미너 음식이기 때문에 성직자는 금하였는데 인도 성직자도 마찬가지였으나,

일반 대중은 애용하였다. 동남아의 불교국가들에서 마늘은 금단의 식품이다.

로마는 힘과 용기를 준다고 믿어 군대에서 마늘을 많이 먹었다.

그러나 냄새 때문에 마늘을 먹고는 원로원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또 남을 불편하게 하는 인격 장애증세를 '마늘 애호가(Love of garlic)'라고 한다.

이유는 마늘을 먹은 사람은 자기 입에서 나는 냄새를 느끼지 못하지만 주변 사람은 악취로 고통 받기

때문이다.

또 방균 효과도 있어 이탈리아는 어릴 때는 목에 걸고 다녀 감기나 병을 막는 방편으로 사용하였다.

유럽에서는 마귀가 가장 싫어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마귀를 대적할 때 마늘을 사용하였는데,

'드라큘라' 영화에 이 장면이 나온다.

시베리아에서 첫날밤 문전에 마늘을 걸어두는 풍습이 있는데 호사를 시샘하는 악귀가 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항암 식품으로 각광을 받고, 특히 한국인은 서민들의 스태미너 식품으로 즐겨먹는데,

냄새 때문에 외국인에게 경계의 식품이다.

외국 식당(특히 이스라엘)에서는 호텔 지배인은 김치를 먹는지 감시하는 곳이 있다.

우리도 이제는 당당하게 먹어야 한다.

열등의식과 언어불편 때문에 기죽어 감추었지만, 이제는 자랑해야 할 우리의 음식문화이며,

김치는 사스에 걸리지 않는 식품이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새로이 각광 받는 식품이 되었다.

 


 *성막(聖幕:Tabernacle) 출애굽기 25-31장, 35-40장

성막은 하나님이 직접 주신 것으로 인간이 그리스도의 신앙을 위하여 많은 교훈을 예시(豫示)하신 것으로

매우 중요하다.

또 솔로몬 성전은 성막을 2배의 크기로 만들었으며, 솔로몬 성전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간단하게 다루어 보려고 한다.

성막의 길이는 13.5m이며, 폭은 4.5m으로 서쪽 4.5m은 지성소, 동쪽 9m은 성소로 지성소와 성소는

휘장을 처서 구분하여 놓았다.

 

1. 지성소(The Most Holy Place)

'하늘의 그림자'(히 9: 24)로 성막 서쪽에 있으며, 길이4.5m, 폭4.5m이다.

곳에는 법궤만 있으며,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 번 들어갔다.


(1) 법궤(Ark)

길이112cm, 폭67cm, 높이 67cm인 궤이며, 싯딤 나무의 조각목으로 만들었다.

그 안에는 십계명 석판 2장, 만나 항아리, 아론의 지팡이가 들어 있다.

계시록 11:19절에 요한이 법궤을 본 것은 환상으로 하늘에는 성전이 없기 때문이다.

법궤는 바벨론 포로시절에 잃어버린 것으로 추정한다.


(2) 속죄소

율법과 자비의 장소로 '그리스도의 그림자'로 법궤 위에 있으며, 순금으로 만들었다.


(3) 아기천사

법궤 양쪽 끝에는 아기천사가 날개를 펴고 마주 대하고 있다.

하나님이 인간의 속죄에 관심을 나타낸 것으로 벧전 1: 12절의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이라고 말했을 때에 베드로는 이 아기천사를 생각하였을 것이다.


2. 성소(Holy Place)

성막 동쪽에 있으며 길이는 9m, 폭은 4.5m이다.

곳에는 북쪽에는 떡상, 남쪽에는 촛대, 서쪽 휘장 앞에는 제단이 있다.


(1) 휘장(Veil)

하나님이 계시는 방과 인간이 대기하는 방으로 구분해 놓았다.

마 27: 51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라고 기록되었다.

이는 하나님의 문이 인간에게 열린 것을 의미한다.

 

(2) 촛대(Candlestick)

'하나님 말씀의 그림자'로 또는 '교회의 그림자'(계1: 12, 20)를 나타냈다.

순금으로 만들었으며, 가운데 기둥이 있고, 양옆에는 3개의 가지가 있다.

기름은 감람유(올리브)를 사용하고 매일 닦아내고 불을 부쳤다.

솔로몬 성전의 촛대는 이것을 모방했으며,

바벨론에서 가지고 있었던 보물을 포로귀환 때에 가지고 왔다. (스 1: 7)

이 촛대는 AD70년 로마황제 티투스(디도)에 의해 로마로 운반되는 모습이 티투스 개선문에 조각되어 있다.

AD553년에 예루살렘 교회에 안치되었다는 기록을 끝으로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3) 떡상(Table of Shewbread)

길이 90cm, 폭은 45cm, 높이 67cm이며, 조각목으로 만들었고 순금으로 입혔다.

12개의 떡을 매 안식일마다 바꾸었다.

이것은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상징이다.(눅11: 3)


(4) 제단 또는 향단(altar of Incense)

길이와 폭은 45cm의 정사각형으로 높이 90cm이며, 조각목으로 만들었고, 순금을 입혔으며,

제사장이 아침, 저녁으로 그 위에 분향하였다.

이것은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을 의미했다.


3. 안뜰(Court)

성막 주위의 뜰로 길이 45m, 폭 22,5m 이며 남쪽을 향하여 있으며, 2.2m 간격에 2.2m 높이의 구리기둥을

세우고 가늘게 짠 아마를 구리고리에 은 걸쇠로 연결하여 둘러쳤다.

정문은 동쪽 끝에 있으며, 폭은 9m이며, 안뜰에는 물 두멍과 번제단이 있다.

안뜰에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외에는 절대로 출입하지 못하였다.


(1)물 두멍(Laver)

죄에서 정결하여 지는 것을 의미하며, '세례의 그림자'이다.

출 38: 8 '그가 놋으로 물 두멍을 만들고 그 받침도 놋으로 하였으니 곧 회막 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의

거울로 만들었더라'라고 기록되어 거울도 사용하였다.

제사장들이 성막에 들어가기 전에 손과 발을 씻기 위한 곳으로 물을 담긴 큰 구리 대야가 있다.


(2) 번제단( Altar of Burnt Offering)

'그리스도의 죽음의 그림자'로 동쪽 정문 가까이 있었다.

동물의 제물을 드리는 큰 제단으로 2.3m의 정 4각형으로 높이는 1.3m이며,

조각목으로 만들어 구리를 입혔다.

가운데는 파고 흙으로 채웠으며, 단 주위에는 제사장이 올라설 수 있는 받침대가 있었다.

이 단의 불은 기적적으로 붙여져 꺼지지 않았다.(레9: 24, 6: 9)

이곳에서 드리는 제물의 종류와 드리는 방법은 레위기 1장-7장에 기록되었다.


[제물의 종류와 드리는 방법을 간략하게 소개한다.]

1. 번제(Burnt-Offerings)

황소, 수양, 염소, 비둘기를 완전히 태웠으며, 이는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함을 의미했다.

2. 소제(Meal-Offerings)

곡물의 가루, 누룩이 없는 빵을 한 줌만 태우고, 나머지는 제사장에게 드렸다.


3. 화목제(Peace-Offerings)

소, 수양, 염소의 기름만 태우고, 나머지는 제사장에게 드리는 사람이 나누어 먹었다.


4. 속죄제(Sin-Offerings)

죄에 따라 제물이 다르며, 기름만 태우고, 나머지는 제사장이 먹었다. 어떤 때는 밖에서 태웠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쳤을 때는 1/5을 보태어 배상한 후에 제물을 드렸다.

이 밖에도 관제(Drink-Offerings), 요제(Wave-Offerings), 거제(Heave-Offerings) 등이 있다.

 

<'티투스의 개선문'에 조각 된 촛대 > 


 다. 가나안 침입과 사사시대 (BC 1235 - BC 1050 경)


이 시대의 사건들은 구약성경 여호수아, 사사기에 기록되었다.

BC1235-1200 경에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을 정복하여 12지파에게

나누어주었다. 가나안 정복할 때에 중요한 사건은 *여리고성의 함락과 그리고 아이성의 패전이다.

패전은 아간의 죄로 인한 것이라고는 하나 이 정복 전쟁의 의미는 하나님이 하시는 성전(聖戰)이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기브온성의 전쟁으로 하나님은 태양을 하루종일 머물게 하여 초자연적인 이적을 행하여 전쟁에

승리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정복 전쟁 때에 무자비한 살육을 하였다.

하나님이 그토록 잔인할 수 있을까? 이것을 이해하려면 아래의 바알신에서 설명하기로 한다.

BC1200-1050 경에 사사는 선지자와 왕의 역할을 하며, 군사적 영웅을 말한다.

옷니엘, 드보라, 기드온, 입다, 에훗, 삼손 등 12명 정도이며 마지막 사사는 사무엘이다.

사사시대 이후는 하나님 중심의 신권 정치가 인권 정치로 넘어 가게된다.

사사시대는 궁전도 세금도 없었으며, 이 시대에 철기가 들어왔다.


[사사시대의 압박자와 활동한 사사와 기간을 중요한 것만 간추려 보았다.]


      압 박 자

   압박기간

  활동한 사사(지파)

  평화기간

   메소포타미아

     8년

    옷니엘 (유다)

    40년

   모압, 암몬, 아말렉

    18년

    에훗 (베냐민)

    80년

  블레셋, 가나안

    20년

    드보라 (에브라임)

    40년

  미디안, 아말렉

     7년

    기드온 (므낫세)

    40년

  암 몬

    18년

    입다 (므낫세)

    31년

  블 레 셋

    40년

    삼손 (단)

    20년





(여리고성의 성경역사)

여리고 성은 성경에 많이 언급되고 있는데 간단히 열거하면

민 13장에 모세가 정탐으로 12명을 보냄. 수2:1에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2명의 정탐으로 보냄.

수 6:15-17절에 '제 칠일 새벽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서 여전한 방식으로 성을 일곱 번 도니 ...

일곱 번째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외치라...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소리를 듣는 동시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수 6:12-25에 여호수아의 나팔로 성이 무너졌으며, 기생 라합 만이 구조되었다.

수 6:26에 여호수아의 저주로 사람이 살지 않았고 개축하는 자도 저주를 받으리라는 예언함

왕상 16: 34에 이 예언은 5백년 후(BC 9세기)에 히엘이 개축하였다가 저주받았다.

왕하 25: 5-6에 이 성에 선지학교가 있어 엘리야와 엘리사가 방문하였고,

갈대아(바벨론)군대가 시드기야 왕을 잡아 바벨론으로 데려갔다.

느 3:2에 스룹바벨과 느헤미아가 데려온 유대인이 이곳에서 성을 쌓았다.

마20:29에 예수님이 두 소경의 고치셨다. 눅19:1-10에 삭개오가 뽕나무 위에서 예수님의 방문을 받았다.

눅20:25-37에 예수님이 예화로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를 만난 '선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를 하셨다.

이상이 성경에 나타난 여리고 성에 대한 내용이다.


(여리고성의 역사)

여리고(제리코-예리코)의 현재의 지명은 예리코이며 아랍인들은 '아리하'라고 한다.

예루살렘 북동쪽 36km, 요르단강과 사해가 합류하는 북서쪽 15km 지점에 있으며,

지중해 해면보다 250m 낮으며 사해는 해저 392m이다.

각종 과실수가 많은데 그중 종려나무가 많아 종려나무성이라 불렀다.

옛 여리고는 20세기초에 발굴되어 BC 5000년경의 집터의 유적을 볼 수 있다.

고대의 여리고 도시는 BC 9000년경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가운데

하나이다. BC 4000년대 팔레스타인의 다른 지역과 같이 여리고도 도시문화가 나타나 성곽도시가

되었으며, 성벽은 여러 차례 개축되었다.

BC 1900년경에 거주한 집단은 가나안족으로 지중해 연안에서 발견되는 문화를 지니고 있었고,

집과 가구는 유적 발굴작업을 통해 드러났다.

BC 13세기경 무너진 여리고성은 신약시대에는 구약시대보다 남쪽 6km쯤에 있는 아브엘 알라이크라고

부르는 폐허이다.

이 곳은 헤로데스왕의 겨울궁전이 있던 곳이며 현재의 여리고는 비잔틴 시대의 터 위에 재건되었다.

현재의 여리고는 웨스트 뱅크에 속한 도시로 1949년 요르단이 점령하여 지금의 도시로 만들었으며,

관개 수로를 통하여 비옥한 저지대로 만들었어 열대과일이 많이 생산된다.

영국고고학연구소 소장 케니온이 발굴한 옛 여리고 성에서 섬기던 제단을 발굴하였다.

이 지역은 주위 보다 21m 정도 높고, 그 아래에 엘리사 우물이 있는데 이것을 '탈앗술탄(수량이 풍부한

앗술탄 샘)'의 수원이 있어 어느 곳에서도 보기 드문 맑은 물이 수로를 통하여 흐르고 있다.

요르단 영토로 있다가 1967년 6일 전쟁 때 이스라엘군이 점령한 후 줄곧 이스라엘이 관장하였다.

현재는 PLO의 자치지구로 되어있다.


(여리고성이 무너진 역사적 사실)

19세기부터 여리고성의 고고학적 발견을 시도하였고, 고고학자 가스텡과 여러 학자들은 여리고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방법으로 정복되었다는 증거들을 찾아냈다.

고대의 전쟁은 오랫동안 성을 에워싸고 전쟁을 하기 때문에 식량이 바닥나게 되면 그때 항복을 하고

전쟁이 끝나게 된다.

그런데 발굴된 여리고성 내에는 많은 식량들이 남아있었다는 것은 단기간에 전쟁이 끝났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대영박물관의 탐사팀에 의해 여리고성은 여호수아시대에 강도 6.0의 강력한 지진이 발생하여

파괴되었음을 보여주는 지질구조가 발굴되었다.

이런 여러 가지 정황을 볼 때 여리고 성의 성경적 함락이 매우 신빙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지리학자는 탄소동위원소법에 의하여 추정 연대 BC 14세기에 침식 작용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이것은 여호수아가 가나안 침입이 BC(14-13)세기로 추정됨으로 비슷한 시기가 되는데 여리고 성 침입 할

때에 갑자기 침식작용이 잃어나 성이 파괴된 것으로 생각하면 성경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룻기는 다윗의 계보를 알리기 위한 것으로 이것은 예수의 계보를 알리는 일이기도 하다.

여리고 성을 함락할 때에 두 정탐꾼을 도왔던 라합은 갈렙의 아들 살몬과 결혼하여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자기 밭에서 만난 룻과 결혼하여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위대한 다윗(다비드=David)을 낳으니 룻은 다윗의 증조모이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베들레헴이 생각되어 지는데, 이유는 이곳에서 아기 예수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160Km나 떨어진 나사렛에서 살고 있던 요셉이 이곳까지 온 연유는 로마황제 아구스도(옥타바누스)가

호적을 하라는 명령 때문이다.

명령에 의하여 예수의 아버지 요셉은 1100년 전에 조상 보아스와 룻이 살았던 다윗이 고향 베들레헴으로

임신한 마리아를 데리고 갔기 때문이다. 목자 뜰은 1.1Km 떨어진 곳에 있다. 


 라. 통일 왕국시대 (BC 1050 - BC 922 경)

(우리나라는 BC 11세기 때 중국 주나라 호왕이 '기자'라는 사람을 보내어 단군을 몰아내고

'기자조선'을 세우고 단군은 황해도 산속에 숨어 1908세에 산신이 되었다는 설화 역사이다.

설화 이야기로는 단군이 솔로몬보다 오래 살았다. 헬라는 신화와 호머의 역사시대이다.)

신정정치가 무너지기 때문에 하나님은 왕의 제도를 반대하였다.


1대 사울 (BC 1050 - BC 1002 경)

이스라엘 초대 왕으로 4가지 잘못을 하였다.

1) 교만으로 제사장만이 드릴 수 있는 제사를 지냈고,

2) 군대식량을 삭감하였으며,

3) 장군 요나단 사형하였고,

4) 고의로 하나님께 불복종하였다.

사울은 하나님에게 버림받아 말년은 불행하였다.


2대 다윗(BC 1002 - BC 962 경)

우리에게 너무 잘 알려진 왕으로 아브라함의 14대손이다.

골리앗과 싸워 이겼으며, 골리앗은 거인이라 큰 것은 이 이름이 사용되며, 예로 '골리앗 크레인'이 있다.

그는 당대에 가장 강력한 왕이며, 신권정치와 인권정치를 도입했다.

지금도 유대인은 '메시아'하면 이 왕을 생각하며, 메시아가 다윗 왕국을 재건하여 줄 것을 갈망하고 있다.

다윗은 하나님 마음에 드는 자였고, 성가대를 창설하였으며, 법궤를 운반했다.

예루살렘을 정복하였고, 예루살렘을 새 종교중심지로 만들었다.(삼하 5:7)

성전 지을 준비를 하였으며, 전쟁에 처음 말을 사용하였다.

그도 단점은 있어 우리아 아내를 취하기 위하여 우리아를 전방에 보내어 죽게 하였고,

그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었다.

그의 죄로 딸이 죽었으며,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다윗은 도망 다니며, 망신을 당하였다.

다윗은 압살롬의 죽음으로 그 죄값을 치렀다.

밧세바에게서 아들을 얻으니 그가 솔로몬이다.

다윗의 아내이며, 사울 왕의 딸인 미갈이라는 여인이 있는데,

남편의 나체를 흉보다 불임의 저주를 받았다.

그는 정당하게 살아있는 두 남편을 섬긴 성경에 유일한 사람이다.

두 번째 남편 밭디엘은 미갈을 다윗이 데려 갈 때 울며 따라 갔다고 한다.

다윗은 왕이 될 때에 불레셋의 도움을 받았다.

불레셋은 사사시대부터 지금까지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대결의 상태로 있다.

불레셋(팔레스타인)은 지금도 뉴스에 자주 등장하니 조금 다루어 본다.

 


팔레스타인(philistine-그리스어로 '팔라이스티나') [고대 중동지도]

불레셋의 히브리어 '플레셰'어원인'필리스티아'는 이집트 북동쪽 작은 연안지역을 가리킨다.

팔레스타인은 '펠리시테인의 땅의 뜻'은 동일어로 민족과 지역(땅)의 개념으로 같이 쓰인다.

이 지역을 유대인들은 '에레츠 이스라엘(이스라엘의 땅)'이라고 부른다.

불레셋은 함의 자손이나 어디서 왔는지 잘 알 수 없지만 이집트를 공격하다 패하여온

이방인으로, 페니키아(베니게)같이 바다를 무대로 삼아 활동하든 민족으로 생각한다.

AD135년 하드리안 황제는 반란을 진압하고 다시는 반란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유대지역의 이름을

'팔레스타인'으로 바꾸어 오늘날까지 사용하게 되었다.

'팔레스타인 사람'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의 자치지구에 사는 사람과 이 지역 사는 난민을 지칭하며,

이스라엘의 지배하는 지역에 사는 사람은 이스라엘 아랍인이라 따로 구별하여 부른다.

넓게는 현재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이 사는 전지역을 팔레스타인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팔레스틴 사람만 사는 지역을 말하기도 하는데, 현재의 지역을 나누기는 무척 복잡한다.

건물을 나누거나, 도시를 나누기도 하고, 지역을 나누기도 한다.


이스라엘이란 바다 안에 팔레스타인란 섬나라가 있다고 생각하면 쉽다.

가나안 정복시 철기를 가지고 있어 여호수아가 점령하지 못한 곳이며,

가나안 정복 때 위험을 느끼고 유대인을 공격한 민족이다.

불레셋이 유대인의 법궤을 빼앗아 7개월 동안 가지고 있을 때 큰 재앙이 내려 재빨리 돌려주었다.

삼손이 불레셋 사람 들릴라에 속아 두 눈이 빠진 후에 하나님께 간구하여 이스라엘을 구하였다.

다윗이 싸워 이긴 골리앗도 불레셋 사람이다.

불레셋이 철기를 먼저 다루었고, 이스라엘에 전하여 준 것 같다. [팔레스타인 참조]


이 지역에 살던 가나안 7족

1) 가나안(시돈) 2) 아모리 3) 브리스 4) 여브스 5) 히윗 6)헷(힛타이트) 7) 기르가스(길갈)이다.

이들은 정복되었거나 동화되어 유대인과 한민족으로 운명을 같이 하였으나

불레셋 만은 따로남아 지금까지 대립하고 있다.


3대 솔로몬(BC 962 - BC922 경)

우리는 그를 지혜의 왕으로 잘 알고 있다.

아기의 어머니가 둘이어서 아기를 둘로 나누어 주라고 하자 아기의 죽음을 원하지 않는 친어머니가

포기함으로 누가 친어머니인가를 알아 낸 것과 생화와 조화를 가려내는 방법으로 나비가 찾아오는

원리로 알아낸 것 등이다.

지혜를 배우기 위하여 멀리 에티오피아 여왕 시바(스바)가 찾아 왔다.[메넬리크 2세참조] [아라비아참조]

솔로몬은 여왕과 내기를 하였는데 솔로몬의 허락 없이는 어느 것도 취하면 게임에 지는 것이었다.

그녀에게 짠 음식을 대접하였고, 그녀는 허락 없이 물을 먹었다가 게임에 지고 말았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그의 지혜를 담은 책이 잠언서이다.


다윗(군인)과 솔로몬(건설자)시대는 이스라엘은 세계최강국이었으며, 그때 애굽, 앗수르, 바벨론은 약했다.

그는 성전과 궁전을 건축하였고, 무역(각 나라와 페니키아=베니게 등), 금속, 건축에 뛰어난 왕이다.

예루살렘은 가장 화려한 성읍이며, 성전은 가장 장엄한 건물이었다.

그러나 그도 잘못이 많았는데 늙어 첩들이 가지고 온 신들의 신당을 건축하였고,

정치에 잡신을 도입한 것은 성서의 슬픈 장면이다.

강제노동과 중과세는 북부 반란의 원인이 되어 죽은 후 나라가 분열하게된다.

그는 성경 잠언, 전도서, 아가를 썼다.

 




마. 북 왕국 이스라엘과 남 왕국 유대(BC 922 - BC 586 경)


1. 2왕국으로 분열된 원인 [고대 이스라엘 지도]

BC922년 솔로몬이 죽은 후 르호보암이 왕위를 이어 받았다.

이스라엘과 여로보암이 선왕보다 노역을 가볍게 하여달라고 청원하였다.

왕에게 늙은 관원들은 허락하라고 청원하고, 젊은 관원들은 더 가혹하게 할 것을 청원하였는데

왕은 젊은 관원의 말대로 하였고, 10지파는 다윗의 자손을 거부하고 여로보암을 왕으로 삼았다.

왕상11:30-31에 선지자 아히야는 그가 입은 새 옷을 찢어 12조각으로 만들어 10조각은 여로보암에게

주었는데 아히야의 예언대로 2왕조가 이루어졌다.

이로써 120년(사울40+다윗40+솔로몬40) 존속된 통일 왕국은 분열되었으며,

남은 2개 지파인 유다와 베냐민은 남 왕조 유대(유다)왕국이 되었다.

북쪽왕국은 1대 여로보암부터 19대 호세아 까지 이며,

남쪽왕국은 4대 르흐보암부터 23대 시드기야까지이다.


2. 북쪽 이스라엘왕국의 간략사

북쪽은 온난하고 수량이 풍부하여 곡식, 포도, 올리브 등이 풍부하였다.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는 망할 때까지 섬기여 하나님 보시기에 북쪽 모든 왕들은 모두 악하였는데

가장 악독한 왕은 아합이고, 아주 나쁜 왕은 오므리이다.

많은 왕이 쿠테타에 의하여 왕위를 쟁탈했으며, 후회한 왕은 있어도 회개한 왕은 없었다.

수도는 처음에는 디르사에 있었으나 오므리가 사마리아로 옮긴 후 망할 때까지 수도였다.

BC734년 18대 베가 왕 때 앗수르왕 디글랄벨레셀(다른 이름은 '불')이 북이스라엘과 시리아를

정복한 후 모든 주민을 포로로 데려갔으며, 이를 제1 갈리리 포로라고 한다.

사마리아 땅과 이스라엘 왕국만 남았다.

제2 갈리리 포로는 19대 마지막 왕 호세아 BC722년 사마리아는 완전 함락되었고,

왕과 주민은 앗수르로 끌려가 고산 강가에 있는 할라와 하볼과 메대 사람의 여러 고을에 두었다.

이것을 '잃어버린 10부족'이라고 부른다.[앗수르 참조]

남은 자는 이방인들과 결혼하여 혼혈아들이 사마리아 조상이 되어 유대민족 으로부터 배척받고

사람대접을 받지 못한 이유이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 대화에서 알 수 있다.(요4:7-29)

선지자는 아히야, 엘리야, 엘리사, 이사야, 아모스, 호세아, 미가 등이다.


3. 남쪽 유대왕국의 간략사

남쪽은 땅이 건조하여 메마르며, 주된 농업은 목축이었다.

2왕국으로 나누어 질 때에 남은 2개 지파 가운데 유다가 대표적이 되여 이 나라의 이름이

유다(유대) 왕국이라 하게 되었으며, 수도는 예루살렘이다.

나쁜 왕은 르흐보암, 아비얌, 여호람, 아하시야, 여호야긴, 시드기야이며,

가장 나쁜 왕은 아달랴(악마적), 아하스(악함), 므낫세, 아몬, 여호야김(악함)

가장 좋은 왕은 히스기야, 요시아이고 나머지 왕들은 대부분 좋았다.

이때부터 이스라엘 민족을 '유대인'이라는 부르는 대명사가 되게 되었다.

유다인(Judah)의 이름에 '쥬다(Judas)'가 많은 것도 '유다'에서 왔다.

남왕은 선한 왕이 많았고, 반란도 적었다.

왕위는 계승에 의하여 거의 이루어지고, 종교 개혁하여 우상도 파괴하였다.

선지자는 이사야, 하박국, 예레미아, 스바냐, 에스겔 등이 활약하였다.  





 


4. 2왕조 역사의 기록이 있는 성경

2왕조 역사의 기록이 있는 성경은 열왕기상, 하는 남, 북 왕조를 다 기록하였으나

북 왕조 기록은 이곳에 있으며, 역대기하는 유대 왕조의 기록이다.

열왕기 상

1-2장, 다윗의 노년과 솔로몬이 왕이 되는 과정을 기록

3-11장, 성전건축과 솔로몬 왕국과 부인에 대한기록

12-22장, 북 왕국은 여로보암-아합까지이고, 남 왕국은 르흐보암-여호사밧 까지이다.

열왕기 하

1-17장: 북 왕국은 (아하시야-마지막왕 호세아까지이고, 남 왕국은 여호사밧-아하스까지이다.

18-25장: 남 왕국은 히스기야-마지막 왕 시드기야까지이다.

역대기 하

1-9장: 솔로몬의 성전건축과 지혜에 대한기록

10장-36장: 남(유대)왕국 기록은 르흐보암-시드기야까지이다.


참고로 사무엘 상하는 사울과 다윗에 대한 것을 기록하였으며, 역대기 상은 다윗에 대하여 기록하였다.

그리고 왕의 재위기간 때문에 고민을 많이 하였다.

1. 모든 연대는 할레이 저서 '성서 핸드북'을 인용하였다.

2. 재위기간의 연대가 자료마다 다르다.(약 2.500년 전의 역사를 생각하면 이것도 대단한 것이다.)

3. 재위연대가 겹치는 경우는 섭정기간과 성경에 기록된 통치기간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4. 재위연대가 없는 연도는 자세한 것은 모르나 재위가 늦어졌거나 왕이 없었을 경우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대략 그 시기라고 생각하면 된다.


[1] 북 이스라엘(BC 922 - BC 722 경) [고대 중동지도]


1. 여로보암(BC933-BC911) [고대 이스라엘 지도]

느밧의 아들로 밀로를 건축할 때에 감독이었다.

솔로몬의 가혹한 정치 때문에 선지자 아히야는 장차 이스라엘 10지파의 왕이 된다는 예언을 들었다.

솔로몬이 이 사실을 알고 죽이려하여 애굽으로 도망가 바로 시삭에게 있다가 솔로몬이 죽은 후에 돌아왔다.

르호보암의 어리석은 정치를 기회로 삼아 북방의 10지파의 지지를 받아 왕이 되어 22년간 재위하였다.

(왕상 12 :1-20) (대하 10:1-19)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는 것은 장래에 자기를 배반할 것을 염려하여 선지자 아히야의 반대를

물리치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는 북방의 단에 또 하나는 남방 벧엘에 두어 정치와 더불어 종교도

분립하게 하였다.(왕상 12:25-33)

이것은 자기와 백성을 하나님에게 배반하는 죄를 범하게 한 것으로 벌을 받아 아들 아비야가 죽었고,

아히야의 예언대로 그의 혈통은 아들 대에서 망하였다.(왕상11-15장)

북 왕국의 왕들 모두가 여로보암이 만든 금송아지 우상을 섬기는 악을 행하여 왕상14:15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쳐서 강(유프라테스) 너머로 흩으시리니'라고 예언한 것이 BC722경에 이루어졌다.


2. 나답(BC911-BC910)

여로보암의 아들로 2년간 통치 중에 아버지와 같은 죄를 짓다가 불레셋에게 점령된 깁브돈 성에서 부하

바아사에게 암살되었고 식구모두도 죽임을 당하였다.(왕상15: 25-27)


3. 바아사(BC910-BC887)

천한 신분인 그는 폭력으로 왕이 되어 24년 통치하였으며, 디르사를 수도로 정하였다.

악을 행하여 여로보암과 같이 파멸될 것이 예언되었다.

앗수루와 동맹하여 유대를 공격하여 라마성을 건축하려고 하였으나 남 왕 아사는 아람 왕과 벤하닷과

동맹하여 이스라엘 4개의 성을 점령하여 바아사는 라마성 건축을 포기하고 돌아갔다.

라마성의 건축 재료를 가져다가 게바와 미스바 2성을 건축하였다.

(왕상15:33-34, 16: 1-4, 렘41: 9) (대하16: 1-6)

4. 엘라(BC887-BC886)

바아사의 아들로 2년 통치하였으며, 향락을 즐기다가 취중 신하 시므리에게 암살 당하였고,

식구모두도 죽임을 당하였다.(왕상16: 8-9)


5. 시므리(BC886)

병거 대장인 그는 엘라를 살해하고 디르사에서 자칭 왕이라고 하였으나 다른 편이 즉시 오므리를 왕으로

삼아 디르사를 점령하였다.

시므리는 왕궁에 불을 지르고 그 속에서 죽은 것은 왕이라고 자칭한지 겨우 7일째였다.

그는 베냐민 지파로 사울의 왕위를 회복하려고 하였다.(왕상16: 8-20)(대상8:36)


6. 오므리(BC886-BC875)

엘라의 군대장관으로 시므리를 죽였으나, 또 다른 편이 디브니를 왕으로 삼으려고 하여 디브니를 죽였다.

왕이 된 후 4년간은 내란에 시달렸고, 6년 되던 해에 사마리아 성을 건축하여 수도로 삼았다.

유대를 정벌하기 위하여 모압과 화친하고 베니게와 동맹을 맺는 동시에 아들 아합을 두로 왕녀 이세벨과

혼인시켰다.

이세벨이 가지고 온 바알 신을 백성이 섬기기 시작하여 오므리의 왕조가 붕괴되는 원이 되었다.

그는 12년간 재위 중에 6년은 디르사에서 나어진 6년은 사마리아에서 통치하였으며,

이후의 왕들은 사마리아에서 통치하게 되었다.(왕상16: 9-35)


고고학적 자료

오므리의 강대함은 아다드니라리 비문에 이름이 나온다.

살만에셀(샬마네세르-샤르마네세르) 3세의 검은 오벨리스크 비문에 '오무리의 아들(후계자),

예후의 조공인 금, 은, 금주전자, 금잔, 주석, 왕홀(王笏), 창을 나는 받았다'를 기록했다.

BC850년의 모암비석에 '나 모압왕 메사는..., 이스라엘 왕 오므리는 여러 날 동안 모압을 억압했고 ...'라고

기로하였으며, 그가 죽은 후에도 이스라엘을 오므리의 땅으로 알려졌다.

그는 사마리아를 최초로 건설한 건설자이기도 하다.


7. 아합(BC875-BC854)

오므리의 아들로 22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아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신전 안에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또 아세라 상을 만들어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다.(왕상16: 29-33)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사려고 하였으나 나봇이 거절하여 그를 죽이고 빼앗은 고로

엘리야가 그 집이 멸망할 것을 예언하였다.(왕상21: 1-29)

정욕에 빠진 여인의 대명사인 그녀는 바알을 숭배하여 850명의 남창을 아스도렛에 두어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게 하였으며, 하나님의 선지자를 죽인 가장 악독한 왕후이다.

바알의 선지자 450명 그리고 아세라의 선지자 400명과 갈멜 산에서 엘리야와 대결에 승리하였고,

그들 모두를 기손 시냇가에서 죽였다.(왕상18장)

아람왕 벤하닷과 3번 싸웠다. (벤하닷은 폭풍의 신 '하닷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첫 번째는 승리하였다.(왕상 20: 1-21)

두 번째는 벤하닷을 사로잡고 전에 잃었던 성읍을 되찾았으며, 다메섹에 아합의 거리(상가)를 수축할

것을 약속 받았고, 벤하닷을 돌려보냈다.(왕상 20: 22-34)

세 번째는 남 왕 여호사밧과 함께 싸웠다.

전쟁에 나가기 전 2왕은 예언자들에게 예언을 받았는데 거짓 선지자 시드기야는 전쟁에서 승리를

예언하였고, 하나님의 선지자 미가야는 나아가지 말 것을 예언하였으나,

거짓 선지자의 말을 따르다가 전쟁에 대패하여 아합은 활에 맞아 죽었고, 여호사밧은 본국으로 돌아갔다.

엘리야의 예언대(왕상 21:19)로 나봇의 피를 핥은 개가 그의 피도 핥았다.(왕상 22: 1-40장)

 

<살만에셀 3세의 검은 오벨리스크> 


★ 고고학적 자료

아합은 살만에셀 3세(BC860-825)의 비문에 '나는 이스라엘 아합 왕의 전차 2.000대와 군인 10.000명을

무찔렸다'라고 기록하였으며, '오무리의 아들(후계자), 예후의 조공인 금, 은, 금주전자, 금잔, 주석,

왕홀(王笏), 창을 나는 받았다'를 기록했다.

아합의 '상아궁'을 1908, 1931년에 발굴하였는데, 그 벽의 표면은 상아로 되어 있으며, 정밀하게 조각된

수천개의 화관, 액자, 옷장, 의자의 조각도 있었으며,

특이한 것은 이세벨의 눈 화장 도구(왕하9: 30)로 화장품을 섞는 접시와 작은 돌합을 발견하였는데

돌합에는 검은색, 초록색, 빨강색 등을 담을 수 있는 여러 개의 작은 구멍이 있고 그 가운데 패인 곳은

이것을 섞는 자리라고 한다.


*바알(Baal)과 그의 아내 아스도렛(다른 이름 아세라)[고대중동지도]

고대 시리아 셈족 고유의 남신 '주(主)'신으로 '소유자'라는 뜻이다.

페니키아 신화에 각 도시의 수호신으로, 불레셋, 가나안, 네게브, 지방에서 섬기였으며,

태양의 신 '*엘' 다음 가는 신이다.

곡식, 과일 가축 등의 결실과 성장을 주관 하는 신으로 숭배한다 .

신전은 전지역에 있었고, 아세라 여신은 자연의 생식력을 의인화한 것으로 제사방식은

치스러운 술잔치에 여사제는 신전의 창녀이었고, 소돔의 남자 사제는 신전의 남창이었다.

여사제를 성경에 기생이라고 하였는데, 그 중에 라합이 있다.

행위는 창녀 같았으나 오늘날처럼 부끄러운 직업이 아니고 존경받는 자리였다.

생식력을 위한 신전은 음란과 악의 중심지이었고, 성욕을 증대하기 위해 과장된 성기를 붙었다.

가나안 땅 전체가 소돔과 고모라 임으로, 유대인은 유혹의 대상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것들과 단절시키기 위해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잔인한 방법으로

여호수아에게 정복하는 주민을 모두 죽이라고 한 것은 이 길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기초희생'이라는 명분으로 집을 지을 때 자기 아이를 죽여 집에 바르고,

제사에 제물로 장자를 죽이는 제사장들은 공식적인 살인자였다.

여호수아와 엘리야(왕상18:40) 그리고 예후(왕상:9-10)가 바알을 근절시키기 위하여 왜 그렇게

무자비했는지 이해 할 수 있다.


★ 고고학적 자료

므깃도를 발굴하다가 아합왕 시대 층의 아스도렛 신전 부근에서 바알 숭배으로 희생된 아이의 유해가

담긴 항아리가 발견되었다.


 *엘(EL)

고대 시리아 셈족이 섬기는 엘과는 성격이 다른 신으로 유대인의 하나님인 엘(EL)에 대한 이야기

하기로 한다. 여호와, 야훼, 엘로힘, 엘로이, 로드, 갓, 데오스 등은 하나님의 이름들이다.

엘(EL): 힘을 나타낼 때의 이름, 이 문자가 들어가면 하나님과 연관된다.

벧엘- 하나님의 집, 브니엘- 하나님의 얼굴, 이스라엘- 하나님과 겨루어 이김 등이다.

-.여호와(Jehpvah): 함부로 부르면 불경죄가 된다. 일년에 한번만 제사장이 제사 때 부름.

-.야훼(Yahweh): '스스로 있는 자'의 뜻, 구약에 6700번 사용,

-.엘로힘(Elohim): 아주 분명하게 유일신을 뜻함. 위엄과 천사의 뜻도 포함

-.엘로이(Elroi): 감찰하시는 분, 급할 때 부름, 창21:16,17

-.로드(Lord): 주님, 종이 주인을 부를 때, 영문 성경은 전부 이렇게 번역되었다.

-.갓(God): '엘'을 이렇게 번역하였다.

-.데오스(Θeos): 복수(複數)(3위 일체)의 뜻, 하나님의 약자 Θ의 표기는 여기서 왔다.

 



 

엘란트라 이야기

이스라엘에 가면 엘란트라를 자주 볼 수 있어는데, 전부 'EL' 글자는 없었다.

이유는 '엘(EL)' 자는 함부로 쓸 수 없다는 이스라엘 정부의 요청에 '엘' 자를 빼고 수출한데서 기인한다.

또 우리를 보면 아이들이 '가야'라고 합창하여 소리쳤다.

그 연유를 몰랐는데 '기아 자동차'에서 선전 할 때 '기아'는 설사의 뜻이 있어 '가야'로 바꾸어 선전

하였고, 선전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있어 모르는 아이가 없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한국인만 보면 반갑다는 인사로 '가야'라고 합창을 하는 것이었다.

 

*엘리야 

그는 갈멜산에서 바알 신과 대결하여 승리하여 기손강에서 바알선지자를 죽였으나,

이세벨의 회심에는 실패하여 호렙산에 도망가 40일 금식기도중에 '하나님의

뜻이 초자연의 표적에 있지 않고, 조용히 예언자(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뜻을 실현시킨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왕상19장)

이 대목에서 옛날 같이 바다가 갈라지고 만나가 지금에는 없는지 우리의 궁금증을 덜게 된다.

그리고 이 후로는 선지자 활동시대를 열게 된다.

과부의 아들 살리고, 불과 물을 하늘에서 내리게 하였고, 요단강물도 갈랐다.

모세처럼 죽으려고 느보산에 갔다가 불수레를 타고 승천하였다.


8. 아하시야(BC855-BC854)

아합의 아들로 모압 정벌을 나가다가 왕궁서 낙상하여 병들었으며,

병이 낫을 수 있는지를 바알세불의 점장이에게 물었다.

엘리야는 하나님을 의뢰치 않음을 책망하며 죽을 것을 예언하여 재위 2년째 되는 해에 죽었다.

아하시야는 부하 50명과 그들 부장를 엘리야에게 보내었으나 하나님의 불에 내려와서 부장과

그 오십 인을 불살랐으며, 또 보냈으나 그들도 불살랐다.(왕상22: 49-53, 왕하1장)


9. 여호람(일명 요람, BC854-BC843)

아하시야는 아들이 없어 아합의 아들 요람이 왕위에 올라 12년간을 통치하였다.

아합 왕에게 조공을 바치던 모압 왕이 배반하여 에돔과 함께 진군할 때에 물이 없어 고생하다가 선지자

*엘리사에게 구하여 많은 물을 얻어 모압을 정벌하였다.

그가 타락하는 것을 엘리사가 책망하자 도리어 죽이려고 하였다.(왕하6: 30-33)

하나님께서 저를 아람(수라아) 군대에서 구원하셨다.(왕하7장) 그러나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아람왕 하사엘과 싸우다가 부상당하여 이스르엘에 머물다가 예후의 손에 죽임을 당하여

그의 시체는 나봇 밭에 던져졌다.(왕하 9: 14-26)

왕후 이세벨도 예후의 명령을 받은 내시가 궁에서 내던져 죽었으며,

시체는 개들이 대부분 먹었다.(왕하 9장)

[남 왕 아하시아 참조]


★ 고고학적 자료

모압의 배반은 모압 비석에 기록되었는데 '나 모압왕 메사는 이스라엘에 해방된 것을 기념하여

이 기념비를 그모스(모압 신)에게 바친다.

이스라엘 왕 오므리는 여러 날 동안 모압을 억압했고, 그의 아들(아합)이 뒤를 이었으나 나는 그를

축출하고 여러 성읍을 빼앗으며, 전리품은 그모스에게 여자는 아스달 신에게 바쳤고,

이스라엘 포로로 고르하를 건축했다'라고 기록하였다


 *엘리사

선지자 엘리사는 여호람에서 요아사까지 활동하였으며, 그는 엘리야의 겉옷을 입은 제자이다.

그의 기적은 왕하 4-7장에 기록되었는데 요단강을 갈랐고, 과부의 기름이 증가하였고,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렸고, 독이든 음식을 제거하였으며, 빵이 증가하였고, 나아만의 문둥병을 고쳤고,

전차로 사마리아를 구출하였고, 시리아 군대를 물리 쳤고, 도끼자루를 물위로 떠오르게 하였으며,

보리떡 20개로 100명이 먹고 남는 등의 기적을 많이 행하였다.

아람의 왕 하사엘과 예후에게 기름 부어 왕이 되게 하였으며, 곡물가격이 하락할 것 등의 예언도 하였다.

그는 벧엘, 여리고, 길갈 등에 선지자 학교를 세운 것 같으며, 제자로 요나와 아모스를 가르친 것 같다.

같은 시대의 남 왕국 선지자는 요엘인 것 같다.


[선지자 학교]

사무엘은 제사장과 왕의 도덕적 타락을 억제하기 위하여 선지자학교 시작한 것 같으며,

사무엘상 19: 20절에 의하면 라마에서 시작한 것 같다.


★ 고고학적 자료

왕하 8:13절 하사엘에 관한 사건은 살만에셀 3세(BC860-825)의 비문에 기록되었는데 '나는 벤하닷과

싸워 그를 패배시켰다. 누구의 아들인지 모르는 하사엘이 그의 왕위를 계승했다'라고 기록하였다.


10. 예후(BC843-BC816) [고대 이스라엘 지도]

그는 아합의 경호원이며, 요람의 군대장관이었고, 엘리사는 제자를 보내 북 왕국의 왕으로 기름부고

아합에게 속한 모든 남자는 다 전멸하라고 하였다. (왕하 9: 1-13)

예후는 반란을 일으켜 북 왕 요람과 남 왕 아하시야도 죽이고, 아합의 부인 이세벨도 사살하였으며

(왕하 9: 14-37), 아합의 아들 70명과 바알을 섬기는 선지자를 하나도 빠짐 없이 죽었다.(왕하 10: 1-28)

다윗의 자손인 여호람의 아들이며, 남 왕 아하시야의 형제42명도 죽었다.(왕하 10: 12-14)

그러나 그도 율법을 준행하지 않았고, 벧엘과 단의 금송아지 섬기는 일을 금하지 않았다.(왕하 10: 29-31)

그는 28년간을 통치하였다.

★ 고고학적 자료 아합을 참조할 것


11. 여호아하스(BC820-BC804)

예후의 아들로 17년간 재위 중에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하나님은 아람 왕 하사엘과 그의 아들

벤하닷을 보내어 백성들이 많은 고통을 당할 때에 그가 하나님께 간구하여 벗어났다.

우상(금송아지)을 섬기며, 사마리아에 아세라 목상을 두었다가 하나님의 진노로 백성이 멸절하여

타작 마당의 티끌 같이 되게 하였으며,

군대도 전멸하고 마병 오십 명과 병거 10대와 보병 만 명만 남았으며, 17년간 통치하였다.(왕하 13: 1-9)


12. 요아스(여호아스, BC806-BC790)

여호아하스의 아들 요아스가 왕이 되어 16년간 다스리며 우상(금송아지)을 섬겼다.(왕하 13: 10-13)

그는 엘리사가 임종시 방문하여 아람에게 3번이길 것을 예언 받아 예언대로 3번 승리하여 아버지가

잃었던 성읍을 되찾았다.(왕하 13: 14-21)

에돔의 세일 자손의 신들에게 분향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된 남 왕국 아마샤가 에돔에 승리한 것에

용기를 얻어 요아스를 침공하였다가 도리어 벧세메스 전쟁에서 사로잡히게 되었다.

요아스는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성전에서 모든 금은과 그릇과 왕궁의 재물을 빼앗고 또 사람들을 볼모로

잡아 사마리아로 돌아왔다.(왕하14: 1-16)(대하 25:17-25) [남 왕 아마샤 참조]

 

13. 여로보암2세(BC790-BC749)

요아스의 아들로 사마리아에서 왕이 되어 41년간 다스렸으며, 우상숭배는 계속되었다.

(왕하 14: 23-29)

그의 치세 때 이스라엘은 가장 융성하여 영토를 회복하기를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다.

※ 이 시대에 선지자 호세아는 하나님의 긍휼로 다시 구원하신다고 예언하였다.(호 1: 1, 7, 3장)

선지자 아모스는 우상숭배, 사치, 방탕, 도덕적 부패로 멸망을 예언하였다.(암 2: 6, 5: 27, 6: 14)


14. 스가랴(BC748)

여로보암 2세의 아들로 6달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며,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살룸이 그를

반역하여 백성 앞에서 쳐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왕하 15: 8-12)


15. 살룸(BC748)

무정부 상태로 있을 때에 스가랴를 죽이고 왕이 되어 1달 동안 다스리다가 므나헴에게 살해되었다.

(왕하 15: 13-16)


16. 므나헴(BC748-BC738)

냉정하고 잔인한 그는 살룸을 살해하고 왕이 되어 10년간 다스리며,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앗수르 왕 불이 치려 왔으나 므나헴이 은 천 달란트를 불에게 주어 되돌아갔다. (왕하 15: 17-22)

※ 이 시대에 활동한 선지자는 호세아로 그의 악정을 기록하였다.

★ 고고학적 자료

디글랏 빌레셀의 비문에 '사마리아의 므나헴으로부터 나는 조공을 받았다'라고 기록하였다.


17. 브가히야(BC738-BC736)

므나헴의 아들로 왕이 되어 2년간 다스리며, 그는 앗수르에게 조공을 바치었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장관 베가가 반역하여 사마리아 왕궁 호위소에서 왕을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왕하 15: 23-26)


18. 베가(BC748-BC730)

그는 세력 있는 군인으로 이스라엘 왕이 되어 20년간 다스리며,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이 와서 갈릴리와 납달리 온 땅 9지방을 점령하고 그 백성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옮겨갔다.

이것을 제1 갈릴리 포로라 한다.

세아가 반역하여 베가를 쳐서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왕하 15: 27-31)

유대왕 요담 때에 아람의 왕 르신과 동맹하여 예루살렘을 점령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왕하 16: 5)

★ 고고학적 자료

디글랏 빌레셀 3세(BC 746-727) 비문에 '오므리 땅(이스라엘) 사람들을 재산과 함께 앗수르에 끌고

왔다. 그들의 왕 베가는 그들이 전복시켰다. 나는 호세아를 세워주었다.

그는 나에게 금 10달란트와 은 1.000달란트를 바쳤다'라고 기록하였다.


19. 호세아(BC730-BC721)

엘라의 아들 호세아가 왕이 되어 9년간 다스리며, 여호와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다.

그가 애굽의 왕 소에게 사자들을 보내고 해마다 하던 대로 앗수르 왕에게 조공을 드리지 아니고

배반하였다.

앗수르 왕 살만에셀 5세가 올라와 그를 옥에 감금하여 두고 사마리아를 3년간 포위하였고,

사르곤이 점령한 후 이스라엘 사람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끌어다가 고산 강가에 있는 할라와 하볼과

메대 사람의 여러 고을에 두었는데 이것을 제2 갈리리 포로라고 한다. (왕하 17: 1-6, 18: 9-12)

이 때에 사마리아 여인들은 앗수르 군인들 또는 이방인들과 결혼하여 혼혈 아이들이 사마리아인의

조상이 되었다.

★ 고고학적 자료

사르곤 2세의 비문에 '앗수르왕...사마리아에 가서 3년을 에워쌌더니...드디어 사마리아를 취하고 사람을

잡아 앗수르에 이르러...바벨론으로부터 사람을 보내어 사마리아의 모든 성읍에 두니라'라고 기록했으며,

또 다른 기록에는 '나는 첫 해에 사마리아를 정복하고, 포로 27.290명을 잡아왔다.

조공을 바치지 않는 다른 나라 사람을 사마리아에 살게 하였다'라고 하였다.(왕하 17:24)

 







[2] 남(유대)왕국(BC933-BC586) [고대 이스라엘 지도]


4. 르흐보암(BC933-BC916)

사울, 다윗, 솔로몬 계보를 이어 받았음으로 통합 4대가 된다.

솔로몬의 왕비 나아마(모압 여인)의 소생으로 세겜에서 왕위에 올라 17년간을 통치하였다.

그는 어리석어 젊은 관원들의 말을 듣다가 유다와 베냐민 2지파 만을 통치하게 되었으며,

이것이 남 왕국 유대왕국이다.(대하 10장)

군사를 일으켜 여로보암을 치려고 하였으나 하나님이 형제와 싸우기를 원치 않아 무산되었으나,

침입을 방비 성읍은 많이 건축하였다. (대하 11: 1-12)

여로보암이 우상을 세우고 레위 제사장을 해임하여 직분을 행하지 못하게 하여 그들은 유대로 돌아왔다.

3년 동안은 하나님을 잘 섬기어 강성했으나, 그가 여호와의 버린 죄로 애굽왕 시삭이 올라와서 예루살렘을치고

여호와의 전(殿)보물과 왕궁의 보물을 모두 빼앗고 솔로몬이 만든 금 방패도 빼앗아 갔다.

(대하 12: 1-12)(왕상 14: 25-28)그가 여호와의 율법을 버린 죄로 애굽 왕 시삭이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치고 여호와의 전 보물과 왕궁의 보물

17년 재위기간 르호보암과 여로보암 사이에 항상 전쟁이 있었다.(왕상 14: 29)

★ 고고학적 자료

시삭의 유대침입의 기록은 카르낙에 있는 아몬 대신전 남쪽 벽에 있는데 '팔레스틴 성읍 156개를

아몬 신에게 바쳤다'고 기록하였다. 므깃도에서 시삭이 세웠던 기념비 조각이 발견되었다.

다니스에서 발견된 시삭의 미이라는 순금을 입힌 은으로 만든 관속에 있었는데 이 금이 예루살렘에서

약탈해온 솔로몬의 금으로 추정된다.


5. 아비얌(야)(BC915-BC913)

아버지처럼 모든 죄를 행하여 하나님 앞에 온전하지 못하였지만 다윗이 하나님 일을 정직하게 행한

덕분에 예루살렘을 견고하게 하셨다.(왕상 15: 1-8)

북 왕과 전쟁 때에 아비얌의 군사는 40만이고, 여로보암 군사는 80만이었으나, 하나님의 율법을 잘

이행하였고, 또 하나님을 의지한 아비얌 군대가 대승하여 적군 50만 명을 죽였다.(대하 13:1-20)

그의 통치기간은 3년이다.


6. 아사(BC912-BC872)

아비얌의 아들 아사가 왕이 되어 41년 동안 재위 중에 다윗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며,

어머니 마아가가 아세라 상을 만들었을 때에 태후의 위를 폐하기까지 하면서 모든 우상을 없앴다.

그는 북 왕 바아사 사이에 일생 동안 전쟁이 있었는데 바아사가 유대를 치러 올라와서 라마를 건축하였다.

아사는 은, 금 모두를 벤하닷에게 보내어 동맹을 맺어 북 왕국 성읍들을 치게 하였다.

바아사가 이 소식을 듣고 라마를 건축하는 일을 중단하고 디르사로 돌아갔으며, 라마를 건축하던 돌과

재목으로 게바와 미스바를 건축하였다. (왕상 15: 9-24) (대하16: 6) [북 왕 바아사 참조]

<카르낙에 아몬 대신전 남쪽 벽에는 시삭의 부조가 있음>


7. 여호사밧(BC874-BC850)

아사의 아들 여호사밧이 유대의 왕이 되어 재위 25년 동안 아버지처럼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나 북쪽과 평화를 유지하려고 북 왕 아합과 사돈을 맺은 것은 불행이었다.

(대하 20:31-34)

그는 군중 교육제도를 만들어 제사장과 레위에 정기적으로 순회교육을 하였고,

전국에 재판소를 만들었으며, 많은 군대를 양성하여 더욱 강대하였다.

그는 아합과 동맹하여 길르앗 라못을 치다가 실패하였으며, 아합은 이 전쟁에서 죽었다.

(왕상 22: 29-38) [북 왕 아합 참조]

여호사밧은 모압 자손과 암몬 자손이 몇 마온(세일 산) 사람과 함께 와서 치고자 할 때에 왕은 여호와께

간구 하였드니, 자기들끼리 살육하여 자멸하였다.(대하20: 1-30)

여호사밧이 다시스의 선박을 제조하고 오빌로 금을 구하러 보내려 하였더니 그 배가 에시온 게벨에서

파선하였으므로 가지 못하게 되었다.(왕상 22: 48)(대하 20: 35-37)

8. 여호람(요람, BC850-BC843)

여호사밧의 장자를 악독녀 이세벨의 딸 아달랴와 결혼시켜 그녀가 섬기던 바알이 유대왕국에도 들어오게

되었다. 그는 여러 산에 산당을 세워 우상을 섬기고, 예루살렘 주민으로 음행 하게 하며,

그 동생들을 죽인 죄로 하나님은 창자가 빠져 나오는 병에 걸려 죽게 하였다.

백성이 그를 열왕의 묘에 들어가지도 못하였으며, 분향도 하지 않았다.(대하 21: 1-20)

그의 통치기간은 8년이다.


9. 아하시야(일명 여호아하스, BC843)

여호람의 아들이며, 모친은 이세벨의 딸인 아달랴이다.

이로써 다윗의 계보에 오역이 접목되었으며, 그를 여호아하스라고도 하는데 모친을 본받아 악을

행하였다.(왕하 8: 24-29, 대하 21: 17)

외숙인 북 왕 요람과 함께 아람(수리아)왕 하사엘과 싸우다가 패하여 이스르엘에 북 왕 요람이 치료하려

왔다가 반란을 일으킨 예후를 나봇의 토지에서 만나 요람은 예후의 화살에 죽었으며,

아하시야는 므깃도까지 도망가서 죽었다.

아합의 왕후 이세벨은 눈을 그리고 머리를 꾸미고 창에서 바라보다가 예후의 명령을 받은 내시가 궁에서

내던져 죽었으며, 시체는 개들이 대부분 먹었다.(왕하 9: 30-37)


10. 아달랴(BC843-BC837)

여호람의 왕비이며, 아하시야의 어머니가 되는 사람이다.

그는 어머니 피를 받아 잔인하였는데 예후에게 아하시야가 죽자 그의 형제를 모두 죽이고 왕위에 올라

6년을 다스린 유일한 여왕이다.(대하 22:10, 23: 12-15) (왕하 11: 1-16)


11. 요아스(BC843-BC803)

아달랴가 왕의 형제를 죽일 때에 아하시야의 누이이며,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내인 여호사브앗이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를 빼내어 6년 동안 성전에 숨어살게 하였다.(대하 22: 10-12)

여호야다가 반란을 일으켜 아달랴를 죽이고 6살의 요아스를 왕으로 삼았고, 바알 선지자들을 죽었으며,

성전에서 모세의 율법대로 행하였다.(대하 23장)

고모부인 여호야다가 살아 있는 동안은 성전을 보수하며, 정직하게 살았으나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는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겼다.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가 경고를 하였으나, 여호야다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그를 죽인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아람의 적은 군대로 큰 군대를 가진 요아스를 징벌하였으며, 그는 큰 부상을 입었다.

스가랴의 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이 정복되어 모든 방백은 다 죽고 노략한 물건이 다메섹 왕에게 보내어진

것에 대한 분노로 백성은 요아스를 침상에서 죽이고 그를 왕들의 묘실에는 장사하지 아니하였다.

그의 통치기간은 40년이다


12. 아마샤(BC803-BC775)

아마샤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15세이며, 29년 동안 다스렸으며, 아버지를 죽인 자들을 처형할 때에

율법(신 24:16)에 따라 아들은 처형하지 않았다.(왕하 14:1-17)

에돔하고 전쟁할 때에 백 달란트로 이스라엘 나라에서 큰 용사 십만 명을 고용하였다.

선지자가 그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다고 돌려보낼 것을 권하여 돌려보냈으나 그들이 분노하여

유대 성읍을 약탈하고 사람 삼천 명을 죽이고 물건을 많이 노략하였다.(대하 25: 5-16)

그는 에돔 사람들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세일 자손의 신들을 가져와서 자기의 신으로 세우고 그것들 앞에

경배하며 분향한 것에 하나님은 진노하여 북 왕 요아스와 벧세메스 전쟁에서 그를 사로잡게 하였다.

요아스는 아마샤를 예속으로 삼았으며, 예루살렘을 파괴하여 성전의 모든 금은 그릇과 왕궁의 재물을

빼앗고, 사람들을 볼모로 잡아 사마리아로 돌아왔다.(왕하14: 1-16) (대하 25: 17-24) [북 왕 요아스 참조]

아마샤가 여호와를 버리자 예루살렘에서 무리가 반역하였으므로

그가 라기스로 도망갔으나 거기서 죽임을 당하였고,

그의 시체를 말에 실어다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유다 성읍에 장사하였다.

(왕하 14: 17-22) (대하 25: 25-28)


13. 웃시야(BC787-BC735)

그는 일명 아사랴라고도 하며, 16세에 왕이 되어 52년간을 다스리는 동안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오직 산당은 제거하지 아니하였다. (왕하 15: 1-7)

그가 여호와를 찾을 동안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기 때문에 암몬 사람들에게 조공을 받았다.

그 이름이 매우 강성하여 애굽 변방까지 퍼지자 마음이 교만하여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다가 나병이 걸려 죽는 날까지 나병환자가 되어 별궁에 거하고 왕자 요담이 왕궁과 백성을

치리 하였다.(대하 26장)

※ 이 시대에 활동한 선지자 미가는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을 예언하였다.

★ 고고학적 자료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의 비문에 4번이나 '유대인 아사랴(웃시야)'라고 기록되었다.


14. 요담(BC749-BC743)

25세에 와이 되어 16년간 다스리는 동안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여호와의 성전에는

들어가지 아니하였고 백성은 여전히 부패하였다.

여호와께서 아람 왕 르신과 북쪽의 베가 왕을 보내어 유다를 치게 하였다. (왕하 15: 32-38)

요담이 여호와의 성전의 윗문을 건축하며, 정직히 행하여 암몬과 싸워 이겨 조공을 받았으며,

여호와 앞에서 바른 길을 걸어 강하여졌다.(대하 27: 1-9)

※ 이 시대에 활동한 선지자는 이사야

★ 고고학적 자료

에시온게벨에서 '요담의 소유'라고 적힌 조각 물(인장)이 발견되었는데 각문을 청동 틀에 끼워 만들었다.


15. 아하스(BC741-BC726)

요담의 아들로 20세에 왕이 되어 16년간을 다스리며, 모든 이방 신들을 섬긴 죄로 아람 왕르신과

북 왕 베가의 침략을 받았다.(대하 28:1-27)

그는 예물로 금, 은을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에게 보내어 원군을 요청하였다.

앗수르 왕은 다메섹으로 진군하여 르신을 죽이기는 하였으나 오히려 유대를 돕지 아니하고 공격하여

앗수르의 속국이 되었으며, 아하스는 유익이 없었다.(왕하 16: 1-9)(대하 28:16-21)

아하스는 회개치 아니하고 성전의 기물을 훼파하고 성전 문을 닫았으며, 다메섹 신들에게 제사하고 다른 신에게 분향하였다가 죽은 후에 왕의 묘실에 장사되지 못하였다.(왕하 16: 10-20)


★ 고고학적 자료

디글랏 빌레셀 비문에 '유대 왕 아하스의 조공으로 금, 은, 연, 주석, 직물을 받았다.

다메섹을 멸망시키고 그 관원을 산 채로 막대기에 꿰었고, 과일 나무를 모조리 베었다'라고 기록되었는데

이것은 왕하 16장과 이사야 7장의 기사와 완전히 일치한다.


16. 히스기야(BC726-BC697) [고대 중동지도]

내환과 외환으로 매우 어려운 시기에 25세로 왕이 되었으나 29년 재위 중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며 성전을 보수하였으며, 더러운 것을 없애고 성결하게 하였다.(대하 29:1)

그는 성전에서 많은 제물로 번제, 속죄제를 드리었으며, 유월절을 지키었고, 또 종교개혁까지 하여

진심으로 여호와를 의지하여 유대 왕 중에 이와 같은 자가 없었다고 하였다.

(왕하18: 1-12) (대하 29, 30, 31장)

산헤립이 40개의 유대 성을 점령하고 20만 명을 포로로 잡고 막대한 배상을 요구하여 성전과 왕궁의

장식품까지 벗겨내어 은 삼백 달란트와 금 삼십 달란트를 주었다.(왕하 18: 13-17)

산헤립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예루살렘을 위협하였으나, 히스기야는 여호와께 간절히 기도하여

이사야로부터 응답을 받았다.

여호와는 사자를 밤에 보내어 18만 5천 군사를 전멸시켜 산헤립은 예루살렘을 떠나 니느웨으로

돌아갔으며, 앗수르 속국에서 벗어났다.(왕하 19장)

또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낯을 벽으로 향하고 전심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여 3일만에 성전에 올라갈

것과 덤으로 15년을 더 살 것을 이사야가 예언하였다.

왕은 예언의 징표를 요구하였고, 이사야는 여호와께 간구하여 아하스의 해시계 그림자를 십도 뒤로

물러가게 하였다.(왕하 20: 1-11)

히스기야가 병든 것을 문안하려고 온 바벨론의 왕 사자들에게 보물창고에 잇는 것을 모두 보여

주었다가 이사야에게 책망과 함께 이 보물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바벨론으로 옮겨지리라는 예언을

듣게 되었다. 히스기야는 기혼의 윗 샘물을 막아 그 아래로부터 다윗 성 서쪽으로 터널을 뚫어 물을

끌어들였다.(대하 32: 30)

터널은 양쪽에서 뚫어 들어가 만났다고 하는데 당시의 기술로는 대단한 공사라고 한다.

이사야서 66장은 성경의 66권과 대조를 보이는데

39장까지는 구약을 40-66장까지는 신약으로 보인다. 특히 53장은 고난받는 예수님을 잘 예언하였다.

이사야는 유대나 이스라엘은 망하여도 '남은 자(회개한 자를 의미)'는 살 것을 믿었다.


★ 고고학적 자료

히스기야 수로에 대한 비문은 1860년에 발견되었으나 지금은 잘라져 이스탄불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비문에는 양쪽에서 곡괭이 질을 하는 동안 3큐빗이나 떨어져 있는데 상대방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곡괭이가 마주치자 물이 기온에서 실로암까지 흘렀다. 길이는 1200큐빗, 높이는 100큐빗이었다.

또 산헤립의 진흙으로 만든 6각 프리즘에는 '나는 굴복하지 않는 히스기야의 46개 성을 수 없이 부수고

200명, 150명 남녀노소와 말, 노새, 나귀, 소, 양 등을 수 없이 전리품으로 가져왔다.

히스기야를 새장의 새처럼 예루살렘에 가두고 성읍을 나오는 사람들을 격퇴시켰다'라고 기록했다.

산헤립이 패배는 기록하지 않았지만 예루살렘을 정복하지 못한 것은 확실하다.

또 히스기야가 보낸 조공으로 금 30달란트, 은 800달란트, 보석, 상아, 궁녀 등의 성물을 받은 것과

산헤립의 궁전 벽 비문에는 그의 부상당한 기록이 있다. 


17. 므낫세(BC697-BC642)

12세에 왕위에 오르고 55년 동안 다스리며,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그의 아버지 히스기야가 헐어

버린 산당을 다시 세우며 바알들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아세라 목상을 만들어 하늘의 모든 일월성신을

경배하여 섬겼다.(대하 33:1-9)

하나님은 앗수르(아슈르바니팔 왕)를 보내어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가게 하였다.

그는 바벨론에서 하나님께 겸손하게 기도하여 다시 돌아오게 되었으며,

그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다.

그는 22년 동안 하나님을 배반하였나 그후 23년 동안에는 모든 이방 신을 제거하며,

성전을 증수하고 하나님께만 제사를 하였다.(왕하 21: 1-28)(대하 33:10-20)

※ 이 시대에 활동한 선지자는 이사야, 하박국, 예레미야, 스바냐로

   전설에 의하면 이사야 선지자를 톱으로 켜 죽였다고 한다.

★ 고고학적 자료

앗수르 왕 에살핫돈(BC 680-BC 669) 비문에 '나는 서쪽 나라 왕 22명에게 궁전에 사용할 건축자재를

바치게 했다'라고 기록하였으며, '유대 왕 므낫세'의 이름이 있다.


18. 아몬(BC641-BC640)

22세에 왕이 되어 2년 동안 다스리며, 그의 아버지 므낫세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고,

모든 우상에게 제사하였다. 아몬이 그의 아버지 므낫세가 스스로 겸손함 같이 여호와 앞에서 스스로

겸손하지 아니하고 더욱 범죄 하여 그의 신하가 반역하여 왕을 궁중에서 죽였고,

백성들은 아몬 왕을 반역한 사람들을 다 죽이고 그의 아들 요시야를 대신하여 왕으로 삼았다.

(대하 33: 21-25)


19. 요시야(BC639-BC608)

아몬의 아들로 8세에 즉위하여 31년간을 다스렸다. 그는 성전을 수리하다가 힐기야가 발견한 율법 책을

서기관 사반에게 낭독하게 하였다.

은 율법대로 행하지 않아 하나님의 진노가 크다는 것을 깨닫고 그는 옷을 찢었다. 모든 백성을 모으고

율법왕 책을 낭독하여 듣게 하였고, 백성에게 율법을 준행하게 하였다.

사장이 분향하던 산당을 게바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헐어 버리고 우상을 섬기지 못하게 하며,

철저히 개혁하였다.

북 이스라엘에게 범죄 하게 한 여로보암이 벧엘에 세운 제단과 산당을 왕이 헐고 또 그 산당을 불사르고

빻아서 가루를 만들며 또 아세라 목상을 불살랐다.

마음과 성품을 다하여 율법을 준행한 자가 전무후무하였더라고 기록되었다.(왕하 22, 23장)(대하 34, 35장) 선지자 훌다가 왕의 시대에는 재앙이 내리지 않는다는 예언이 있었지만 왕의 운명은 빨리 찾아 왔다.

BC 609년 애굽왕 느고가 앗수르를 치려고 므깃도에 온 것을 막다가 전사하였으며,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이 슬퍼하였고, 예레미야는 그를 위하여 애가를 지었다. (대하 35: 20-27)

이시기부터 바벨론이 강대국으로 등장한다.[므깃도 참조]

※ 이 시대에 활동한 선지자는 예레미야


20. 여호아하스(BC608)

또는 살룸이일명 아하시야라고도 하며, 요시야의 아들로 3개월간 재위하였고, 애굽 왕 느고에게 잡혀가

그곳에서 죽었다.(왕하23: 30-34) (대하 22: 1-4) 


21. 여호야김(BC608-BC597)

사악하고 고집이 센 그는 여호아하스의 아우로 애굽왕 느고가 왕위에 앉혔으며,

본명은 엘리야 김이었으나 느고가 이름을 고쳐주었다.(왕하 23: 34) (대하 36: 5-8)

그는 3년간은 느고를 섬겼으나, 갈그미스전투에서 느부갓네살이 애굽을 무찌르고 점령하였으며,

유대는 바밸론의 속국이 되었다.(왕하 24: 1-4)

그의 11년 재위 기간에 사회 전체가 죄악에 빠졌으며, 그는 악한 무리의 손에 참혹히 죽었다.(렘22: 13-19)

※ 선지자 예레미야를 여러 번 죽이려고 하였다.


22. 여호야긴(BC597)

18세에 왕위에 올라 3달 10일 동안 다스리다가 느부갓네살 왕이 또 예루살렘의 모든 백성과 모든 지도자와

모든 용사를 바벨론으로 잡아갈 때에 여호와의 전의 귀한 그릇들도 함께 가져갔다.(대하 36: 9-10)

이 때가 제 1회 '바벨론 유수'이다. 에윌므로닥이 즉위한 원년에 그를 석방하여 자유를 주었으며,

바벨론 왕과 함께 식사를 하게 하였고, 37년 동안 속국이 된 다른 왕보다 우대하였다.(왕하 25: 27-30)

※ 선지자 에스겔이 함께 잡혀갔다.


★ 고고학적 자료

바벨론 공중 정원의 폐허에서 기름과 곡식을 정기적으로 분배받은 이름이 나열된 토판을 발견하였는데

그 중에 여호와긴과 5왕자에게 지급된 배급양의 표가 있었다.

배급양의 표에는 '유대의 왕, 여호야긴을 위해 기름 10실라(1.8리터), 왕자는 2.5실라'라고 쓰여있다.


23. 시드기야(BC597-BC586)

느부갓네살이 여호야긴을 잡아갈 때에 22세인 그를 왕으로 세웠고,

11년의 재위기간에 악을 행하였다.(대하 36: 11-21)

시드기야는 립나에 있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로 끌려가 그의 아들들은 죽임을 당하였고,

그는 두 눈을 빼서 바벨론으로 끌고 갔다.(왕하 25: 1-7)

루살렘의 성벽은 무너지고, 성전과 궁전은 불탔고, 성전의 보물과 왕과 방백들의 보물을 다 바벨론으로

가져가고 나머지는 파괴되었으며, 백성은 죽임을 당하였다.(왕하 25: 8-17)

살아 남은 자는 노예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갔는데 이것을 제 2회 '바벨론 유수'이라고 하며,

이들이 그곳에 있는 동안을 '바벨론 유수기'라고 한다. 유대 지도자로 그달리야를 세웠으나,

그를 죽이고 유대백성들은 예레미야와 함께 애굽으로 도망갔다. (왕하 25: 22-26)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참조]

※ 선지자 예레미야는 옛 계약 대신 새 계약을 주신다고 예언하였고,

에스겔은 '하나님의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고 고국으로 돌아가게 한다고 예언하였다.


★ 고고학적 자료

왕하 25: 4절 시드기야가 '밤중에 두 성벽 사이 왕의 동산 곁문 길로 도망하여'라는 기록이 있다.

이 '두 성벽 사이의 길'이 예루살렘 동남쪽에 지금도 50m남아있다.

라기스, 벧엘, 벳세메스 등지의 불탄 재의 두꺼운 층 아래에서 BC600경의 신전보물, 제단, 향로, 그릇,

제물의 뼈, 식료품(콩, 건포도, 올리브) 등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너무 갑자기 불이 탄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느부갓네살이 지른 불이라고 한다.

 



바. 바벨론 포로시대와 귀환( BC586-BC444 경) [고대 중동지도]

바벨론(바빌론)포로시대를 다른 표현으로 '바벨론 유수기(幽囚期: 가두는 기간)'라고도 한다.

BC 606(또는 BC 597)-BC 581년 사이에 이스라엘 남 유대(유다)왕국의 상류계급의 사람들과 주민이

신(新)바빌로니아의 바벨론(바빌론)으로 포로가 되어간 사건을 '바벨론 유수'라고 말하며,

BC538년 귀환까지의 약 반세기 기간을 '바벨론 유수기'라고 한다.

넓게는 바벨론 지방을 성경에서는 갈대아(칼데아)라고 부르기 때문에 BC734년의 북 이스라엘의

제1갈리리 포로와 BC722년의 제2갈리리 포로도 '바벨론 유수'라고 볼 수 있다.

당시 유대의 총인구는 25만 정도로 추정되며, 포로 수는 '예레미아(야)서' 52장 30절에 의하면 포로의

수는 전후 3회에 걸쳐 4,600명이라고 기록되었으나 이것은 남자만의 수일 것이며,

부녀자를 포함하면 4만 5,000명 이상으로 추정한다.

귀환할 때에 많은 유대인들이 돌아오지 않고 터키나 동유럽으로 흩어져 살았다.

바울 사도가 전도할 때에 복음을 받아드리거나 전도를 방해한 사람들 일부는 그 후손들이다.

[법궤에 대한 이야기가 이때부터 없다. 아마 포로 시절 때 잃어버린 같다.]


 1. 바벨론 포로는 느브갓네살에 의해 4차례가 있었다. [바벨론 참조]

1) BC 606 다니엘과 친구와 왕족을 포로로 데려갔다. 현재 이란에 다니엘 유적지로 탑이 남아 있다.

2) BC 597 보물과 여호야긴 왕과 10,000명의 관리와 왕자를 포로로 데려갔다.

3) BC 586 예루살렘 성벽을 헐고, 불지르고 832명 포로와 여리고에서 붙잡은 시드기야(시드키아-제데키아)

   왕은 눈을 빼서 함께 데려갔다.

4) BC 581 포로745명을 데려갔다. 예레미야와 많은 유대인은 그전에 애굽으로 도망갔다.

   활동한 선지자는 예레미아, 에스겔, 다니엘이다.

예레미아 '옛 계약 대신에 새 계약을 주신다.'고 예언 하였다.

에스겔 '하나님의 백성은 버리지 않고 고국으로 돌아간다'라고 바벨론에서 예언하였으며,

애굽은 아주 미약한 나라가 될 것과 (겔29장) 자국인은 왕이 되지 못할 것을 예언(겔 30:13)하였다.

이 예언대로 알렉산더에 정복당한 후, 톨레마이 왕조의 마지막 왕 크레오파트라를 로마가 정복하였고,

그 후로 터키가 지배하였고, 영국에서 독립 후 대통령제가 되어, 예언은 약 2400년 동안 지켜지고 있다.

이 역사적 증거로 성경의 위대함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의 섭리가 얼마나 정확한지 알 수 있다.


[바벨론에서 달라진 사상과 예배방식]

(사상)

1)하나님은 성전 안에만 계시지 않고 어디든 계신다.(포로시대는 성전에 갈 수가 없었다.)

2)고난은 조상의 죄가 아니고, 내 죄 때문이다.(포로생활이 조상의 잘못임으로 회개하지 않았다. 겔18:2)

(예배방식)

포로 때의 바빌론에서 종교적 자유는 허용되었으나, 예루살렘 신전에서와 같은 제의(祭儀)는 할 수 없었다.

대신 안식일 예배가 중심이 되어 회당(會堂)에서의 율법낭독과 기도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예배의식이

비롯된 것이 오늘날 교회예배의 모태가 되었다.

그리고 귀환한 느헤미아, 에스라 등에 의하여 새로운 법전(法典)이 나오고 민족이 재건되어 유대교가

성립되었다.

 


2. 바벨론 귀환 및 예루살렘 성전, 성벽건축 (BC536-BC444)


페르시아(바사)의 칼로레스(Cyrus-키로(루)스 2 세-성경 고레스)의 명령으로 시작되어 3차례가 있다.

1) BC 536 스룹바벨과 유대인 42,360명, 말 730마리, 나귀 205마리, 낙타 435마리 등 가지고 돌아왔다.

  스룹바벨이 총독으로 제사장 여호수아가 성전을 재건하고 학개, 스가랴가 도왔다.

2) BC 457 에스라와 남자 1,354명 금 100달란트와 은 750달란트 등 가지고 돌와 왔다.

3) BC 444 총독 느헤미아는 군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재건된 예루살렘으로 왔다. [바사 참조]

   에스라: 종교개혁으로 새로워지고, 이방인과 결혼금지, 이미 결혼한 사람은 이혼 요구하였다.

    첫 '대회당(大會堂)' 회장이며, 회당 예배 창시자이다. [대 회당 참조]

   느헤미아: 아닥사스라1세(술 관원) 왕의 권위로 성벽재건, 십일조, 안식일, 잡혼시정을 하였다.

   12년 동안 유다 총독이었다.

  에스더: BC478년 구셀구세스(아하수에르)와 결혼하였고, 에스라, 느헤미아를 도왔다. 

 BC473년 4촌 모르드개의 도움으로 하만의 음모에서 유대인을 구출, *부림절의 기원이 되었다. 

  요엘: BC400년 제사장, 모든 사람 올바른 생활을 권유했다.

 말라기: 에스라의 지나치게 엄함을 보고, 에스라의 이혼요구를 반대하였으며,

 '온 세계인이 주를 섬긴다'라고 믿었다.


*부림절

어원은 부림(purim)인데 'purim'은 'pur(주사위의 일종)'에서 왔는데 이유는 하만이

유대인을 죽이기 위하여 날을 잡을 때 주사위를 던진 것에서 유래하는데,

그 날이 자기가 죽는 날이었다. 부림절은 유대력12월(아달월) 14,15일 2일간 지킨다.


부림절 의식은 축일 전날은 '타아니트 에스델(에스델의 금식)'이라고 하며, 금식으로 시작한다.

부림절 회당 예배에서 가장 독특한 점은 '에스델(에스더)'서를 낭독하는 것이다.

에스더의 이름은 바벨론의 달의 여신'이슈타르'에서 왔다.

이 날은 선물을 교환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며 즐긴다.

세월이 흐르면서 종교와 상관없는 관습들이 그 축일에 덧붙게 되었는데,

그 중에는 '하만타셴'(하만의 귀들)이라고 하는 세모꼴 과자를 굽는 관습이 있다.

지금도 이란의 하마단에 가면 유대인을 구한 베냐민 족속의 에스더와 모르드개(모르데카인)의

무덤의 유적지가 있는 유대인 회당이 있다고 한다. [부림절 참조] [이란에 있는 성경의 유적지 참조]



사. 침묵시대(BC 444-AD 0)


말라기는 구약성서의 마지막 성서이며,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약 400년 동안 신구약 중간에는

하나님이 아무 말씀이 없어 이 시대를 침묵시대라고 한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70인 번역 성경에는 아무기록이 없으나,

천주교인이 사용하는 성경에는 마카비 1,2권이 들어가 있다.

알렉산더 시대를 지나, 셀레우코스왕조(BC358-BC163) 시대 말기

BC 167-BC 63까지 약100년 간 마카비(하스몬) 왕국이 있었다.[하스몬 왕조참조 ]

BC 63년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BC 106-48)가 유대를 침공하여 하스몬 왕조를 멸망시키고,

그를 지원한 안티파테르(안티파텔)과 로마와 관계가 시작되었다.


로마는 안티파테르이 BC 47년 유대 총독으로 임명하였고,

그의 아들 헤롯 1세가 유다를 다스리고 있을 때에 예수그리스도가 탄생하시고 예수님 시대가 열린다.

 



 아. 이스라엘 고대에서 현재까지 역사와 성경역사


 이스라엘(예루살렘) 역사 [이스라엘 여행기]

예루살렘에는 10만 년전 사람이 거주하였으며, BC30 세기말경 여부스(에부스)족의 가나안인이 도시를

만든 것이 유래이다.

도시의 이름은 처음에 평화 도시의 뜻으로 '우루살림' 또는 신성한 도시의 뜻인 '쿠드스'라고 불렀다.

BC 20-10 세기경까지는 이집트의 바로(파라오)의 지배아래 있었다.

BC 10 세기경 여부스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거할 때에 다윗이 빼앗아 다윗 성이라 하였고,

이 때부터 예루살렘은 유대인이 주인이 되어 수도로 삼고 새 종교중심지로 만들었다.

BC 580경에 예레미야가 유대인을 데리고 알렉산드리아로 피난 갔다.

    이들이 알렉산드리아에서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할 때 72명이였다.

BC 536,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도시를 재건축하였다.

BC 332, 팔레스틴을 점령한 알렉산더는 유대인을 특별히 고려하여 예루살렘에 남겨두었고,

   알렉산드리아에 거주하도록 특전을 베풀었다.

BC 305, 알렉산더의 부하 프톨레마이오스가 이집트에서 왕조를 열고 BC 181년까지 유대를 지배하였다.

BC 198, 셀레우코스왕조의 지배에 들어갔다.

BC 166, 마카비가 셀레우코스왕조의 안티오코스4세를 몰아내고 이스라엘의 마지막인 하스몬왕조를 열었다.

BC 63, 로마의 폼페이우스가 하스몬 왕조를 점령하여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을 파괴하였다.

BC 37, 헤롯(헤로데스)왕이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성전을 재건하였고, 번영을 되찾았으나,

 문명은 헬라로 변했다.

AD 30, 4월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에 10년간 골고다 언덕까지 성벽을 쌓았다.

AD 70-71 티투스(티토)가 도시를 점령하여 모든 것을 파괴하였고, 내가 이런 성을 파괴했다는 증거로

서쪽 축벽만 남겨놓았다. 헤롯의 번영은 사라졌으며, 이 때부터 '평화의 땅'이 '통곡의 벽'이 되었다.

이제 '평화의 땅'이 제 이름을 빨리 찾기를 바란다.

AD 73, 로마의 정복이 눈앞에 다가오자 항복보다는 죽음을 택하였다.

그들은 난공불락이라는 '마사다' 요새에서 960명 중에 어른 2명과 어린이 5명을 제하고 모두 자살하였다.

지금도 이스라엘 군인들은 이곳에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자는 맹세를 한다고 한다.


AD 132년 전설적 인물 시므온 바르코시바는 민24:17절에 이스라엘을 구원할 '별'이라 예언에 따라

'바르 코크바(별의 아들)'로 개명하였으며, 반란을 일으켜 예루살렘을 점령하였다.

AD 135년 명장 율리우스 세베루스가 예루살렘을 탈환하여 반란을 진압하였다.

하드리안 황제는 다시는 반란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이스라엘에 대하여 몇 가지를 단행하였다.

1. 예루살렘을 로마식 도시로 재건하여 로마 직속지로 다스리며 유대인 출입을 금하였다.

2. 예루살렘의 이름을 '아이리아 카피톨라나'로 개명하였다.

3. 유대지역의 이름을 '팔레스타인'으로 바꾸었는데, 이 지명은 오늘날까지 사용하게 되었다.

AD 135년 마지막 반란 이후 팔레스타인의 유대 민족은 극소수 집단으로 위축되어 이스라엘은 더이상

하나의 국가로 존재하지 않게 되었으며, 이 후로는 1800년 동안 독립하려는 시도는 일어나지 않았다.

AD313, 콘스탄티누스1세(재위 AD306-337)의 모친 헬레나 황후의 간청으로 예루살렘에 그리스도의

성묘교회가 최초로 건립되었다.

 

AD 313년 로마는 그리스도교가 국교로 되었으며, 예루살렘은 순례자로 붐비었다.

AD 638, 예루살렘은 회교의 함락되었으며, 예루살렘은 마호메트가 천사 가브리엘의 인도로 알라신에게

가기 위해 승천한 곳이라고 하여 메카, 메디나와 함께 3대 성지가 되었다.

AD 691년 예루살렘의 바위(파괴된 솔로몬 궁전 위)에 회교의 돔사원을 건립하였으며,

돔사원 안에는 마호메트가 승천할 때 바위도 따라 올라가자 천사가 눌러서 못 올라갔다고 하며,

그때의 천사의 손자국이 바위에 나 있다.

그때 마호메트의 머리카락도 빠졌는데 그것을 모아둔 상자가 있다.

이 후부터 유대인의 저항이 계속 되었고, 유대인을 이 땅에서 살 수 없게 하는 정책으로 유대인이 돈에

대한 집착을 이용하여 나무마다 세금을 매겼다고 한다.

세금을 내기 싫어 모든 나무를 베어 버려 땅은 황폐하여 졌고, 유대인들은 스스로 떠나게 되었다.

그래서 젖과 꿀이 흐르던 곳이 황폐의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AD 1096-1270년까지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하여 전쟁을 하였다.

그러나 잠시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셀죽투르크의 다메섹(다마스쿠스) 총독의 관할지였다.

성벽 대부분은 오스만 투르크의 슐레이만 대제(재위 AD1529-1566)의 시대에 축조 된 것이다.

1798-99년 일시적으로 나폴레옹의 침략을 받았다.


AD 1916 년 제1차 세계대전에 독일 편에 참가한 투르크군이 패하였고, 영국의 앨런비 장군의 점령으로

AD 1920부터 영국이 위임 통치하였다.

AD 1917년 군비가 부족한 영국은 유대인의 돈을 얻으려고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약속의

'밸푸어(외무부장관)선언'이 발표되었다.

밸푸어의 선언이 이루어 질 것을 믿고 유대인의 이민이 증가하였다.

이 시대의 배경으로 만든 영화가 '엑스더스(Exodus)'이다.

AD 1930-40년대초 아돌프 히틀러의 박해로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가 늘어나면서 유대인과 아랍인의

관계는 점차 악화되었다.

AD 1948년 5월 14일 2차 국제연합 총회는 팔레스타인을 아랍과 유대의 쌍방에 분할하는 결의하였다.

영국군의 철수와 동시에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AD 1948년 5월 16일 1차 중동전쟁에서 이집트에게 승리하였다. [나세르 참조]

AD 1956년10월 29일 수에즈운하 국유화로 2차로 이스라엘군이 시나이 반도를 침입하였다가 철수하였다.

AD 1967년 나세르의 아카바 만을 봉쇄로 *3차 중동전쟁이 일어나 승리하였다.

AD 1973년 전쟁에서 승리하였으나 점령지는 계속 불안정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AD 1979년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평화조약을 체결하였으나 팔레스타인과 점령지인 유대인 정착촌 문제로

여러 아랍 국가들과의 관계가 어려워졌다.

AD 1982년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에 속한 게릴라군을 몰아내기 위해 레바논을 침공하였다.

AD 1987년 웨스트뱅크와 가자지구에 거주하는 아랍인들이 '인티파다(intifadeh-반란의 뜻)'를 일으키기

시작하여 이스라엘 당국은 1992년 이후 아랍의 여러 국가와 팔레스타인 대표들과 직접 평화 교섭에

나서 PLO는 5년 동안 웨스트뱅크와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인의 자치를 점차 확대한다는데 동의하였다.

AD 1994년 이스라엘은 요르단과 평화협상을 맺었다.

 



*3차 중동전쟁(1967년 6월5-10일)

3차은 '6일 전쟁'이라고도 하는데 이 전쟁은 세계전쟁사에 길이 남을 승리이며,

우리도 본받을 점이 많아 조금 자세히 기록하려고 한다.

원인은 나세르가 2차 전쟁에서 패한 후 사회복지에 써야할 재정을 군사대국 정책에 사용한

부작용으로 이집트의 경제 사정은 형편없는 지경의 위기에 처하였다.

이렇게 국민들의 불만이 쌓여갈 때 이를 무마시키기 위하여 소련의 전폭적인 협조아래 이집트군의

재무장을 서둘었고 국민들에게 유태인에 대한 적개심을 부추겼다.

이에 이스라엘은 건국 20년이 지나 초창기와 같은 단결된 감투정신이 점차 쇠퇴하였고,

절박함을 깨닫지 못하는 젊은이들과 이민, 실업, 계층갈등 등의 사회문제를 해결하여 국민을

단결시키는 데는 전쟁의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이에 소련의 위협을 느낀 미국은 이스라엘을 돕기로 결정하여 소련과 미국 사이에 대리전쟁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개전당시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전력 비교는 전차 2.6:1 병력 1.8:1 전투기 1.5:1로 이스라엘은

이것만으로도 명백한 열세에 또 당장 싸워야 할 요르단과 시리아의 전력은 포함하지도 않았다.

그들을 도울 이라크와 회교국의 군대 또한 빠졌다.

만일 전쟁이 일어난다면 나세르의 말대로 '이스라엘을 간단히 홍해로 쳐 넣을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6월 5일 새벽 이스라엘 공군기들은 거미줄 같은 레이더망을 피하여 수십 개로 분산된 비행장을 완벽한

기습으로 이집트의 공군은 지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시리아와 요르단의 공군도 같은 운명을 만났다. 60:1이라는 우위의 아랍연방군 공군의 위협은 이것으로 사라졌다.

여기에는 모사드가 수집한 조종사들의 가족사항에서 레이더 요원들의 근무 습관까지 포함하였다.

또 이스라엘은 비행장과 사관학교 등에 '니플러스'라는 나무를 제공하고 나무의 관리비용까지

대 주었는데 이것은 이날을 대비하여 준비한 것으로 조종사들이 나무를 표적으로 삼아 정확한 포격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한 것이다.

그들의 준비는 이렇게 철저하였으니 승리는 우연이 아니다.

1995년 카이로 갔을 때에 4차 전쟁에 파괴된 것을 복구하지 못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를 점령하였고, 이집트의 전차를 900대 정도 파괴하였고,

상처하나 없는 900대 정도는 훗날 이스라엘이 T54/55전차를 개조하여 Ti 67이라고 개명하였다.

이스라엘은 Ti 67 전차로 독립전차여단을 만들었다.

그래도 남는 것은 다른 나라로 수출까지 하여 실속을 챙겼으며,

이 때에 노획한 무기가 25억 달러 상당에 해당한다. 이집트는 80%의 전력을 상실하였다.

요르단으로부터는 요르단강 서안의 웨스트 뱅크를 점령한 후 수도 암만 40km까지 진격하였다.

가장 큰 수확과 감격은 2000년 만에 처음으로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한 것이다.

그리고 시리아로부터는 수시로 이스라엘에 대포를 퍼붓어 위협을 가하는 전략의 요충지인 골란고원을

장악하여 그들의 생명수인 갈리리의 물 걱정까지 해결하였다.

다마스코스가 보이는 곳까지 점령하였으나 현재는 유엔군이 주둔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본토보다 7배나 되는 땅을 정복하였다.

이 같은 행동은 아랍의 형제들에게 동정을 바라고 발표한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예루살렘의 성경의 역사

예루살렘은 해발790m 분수령에 있으며, 지중해로는 45km이고, 사해로부터는 25km에 있다.

유대파와 베냐민파의 두 경계사이에 있다.

기후는 지중해 기후와 사막기후의 영향을 받아 겨울에는 춥고, 봄가을에는 더위를 겪는다.

성경에 불러진 이름 또는 예루살렘의 별명을 알아보면

'오홀리바'(겔23:4-17)라고 하였는데, 이 여인은 벽의 얼굴 그림만 보고도 음욕을 품은 여인이라고 한다.

곁에 있는 시온산의 이름에서 '시온 성'(삼하5:7), 다윗이 성을 쌓고 33년 간 도성이라고

'다윗 성'(삼하5:9, 눅2:11), '하나님의 성'(시8:2), '하나님의 성전'(느11:1, 마4:5),

'자유성'(갈4:26)라고 불렀다.

스가랴 8:22-23 예루살렘을 강대한 나라가 찾을 것이며, 여호와의 은혜를 구하리라고 예언하였다.

계시록 3:12 예루살렘은 새 이름으로 기록된다고 하였고,

계시록 21:2 ',신랑 신부를 위하여 단장 한 것 같다'라고 하였다.

예루살렘은 멜기세덱이 창건하였는지, 이전에 있었는 지, 그 후에도 얼마 동안 있었는지는 알 수는 없다.

세기기 창22:2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 온 모리아 산이 이곳이라고 한다.

성경에 처음 기록된 것은 여호수아 10:1-10로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이 여호수아를 침공하였다가

여호와께서 우박으로 크게 격파시켰다.

다윗이 시온 산성을 빼앗았으니 이는 다윗 성이더라.(삼하 5:7)

다윗이 7년 간 헤브론에서 왕으로 있다가 이곳서 33년 간 있었다.

오벳에돔의 집에서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찾아왔다.(삼하5:9-11)

성전 건축을 위해 여부스인의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을 사서 제단을 쌓았다고 하였다.(삼하24:24-25)

이곳에 솔로몬은 7년 간 성전건축을 하였고, 13년 동안 궁전 건축을 하였다.(왕상5:13-7:1)

두 왕국 분열 후에 390년 간 남 유다의 수도로 있었다.


자주 외부의 침략을 받다가 바벨론에 망하였고, 페르시아 시대에 재건되었다.

BC 167, 수리아왕 안디오커스가 성전을 더럽혔다.

BC 164, 12월25일 마카비는 안디오커스의 군대를 극적으로 몰아내고,

성전을 깨끗이 청소한 이날을 하눗가의 축제라하며, 마카비는 하스몬 왕조를 열었다.

BC 63, 로마의 속국이 되었고, 헤롯이 유다의 왕으로 왔다.

헤롯이 민심을 얻고자 성전을 46년 간 건축하였으며, 이 성전이 헤롯성전이고, 예수님 당시의 성전이다.

헤롯은 건축의 왕이라고 할 만큼 많은 건축을 남겼다.


AD70, 예수님의 예언대로, 티토가 점령하여 성전은 철저히 파괴하였다.

이 때 서쪽 축벽이 남아 통곡의 벽이 되었다.

제물을 약탈하였고, 10만의 유대인을 끌고가 로마 건축의 도구로 사용하였으며,

더러는 경기장에서 맹수와 싸우다죽었다.

건설이 끝난 후에는 살은 남은 사람은 땅속에 생매장하였으며, 무덤 위에 교회가 세워졌다.

AD313, 콘스탄티누스의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의 자유가 선언 되었고,

그의 모친 왕후 헬레나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성묘교회가 헌당(獻堂) 되었다.


유대인은 파괴된 옛 성전 터에 올라가지 않는다.

혹시나 모르고 성소를 밟는 불경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그런다고 한다.

성전에 대한 그들의 경외함을 엿볼 수 있다.

현재 예루살렘 도시 형태는 신도시는 이스라엘이 지배하고, 점령지인 예루살렘의 성전은 아랍인이

여전히 지배하고 있다.

동 예루살렘은 유대교, 기독교, 회교의 성지라 매우 복잡하다.

사는 곳도 구분 되여 있고, 무덤교회는 한 건물에도 정문은 회교가 내부는 시리아정교회, 동방정교회,

러시아정교회, 캬톨릭, 아르메니아정교회가 나누어 관리한다.

어디가 어느 소속인지, 순례자는 잘 알 수가 없다

통곡의 벽은 유대인, 오마르 사원은 회교가, 성묘교회는 캬톨릭교회가 관리한다.

 

 

 

 

 

 

*이스라엘 역사는 우리 성도들이 성경 특히 구약성경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시중에 이스라엘 역사를 소개하는 여러 책들이 있지만  그중에 마틴 노트와 존 브라이트의

저서를 권하고 싶다. 특히 존 브라이트의 "이스라엘 역사"는 뛰어난 역작이라 할 수 있다.

 

 

 

 

 

 

출처 : 한국교회개혁포럼
글쓴이 : Ezra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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