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나라에 대한 글
헤르만 리델보스의 하나님나라 독후감(review)
하나님 나라 (The Kingdom of God) --------------------------------------------------------- 1. '나라'(Kingdom)의 두가지 표현 본문은 '나라이 임하옵시고'라고 말할 때 헬라어의 basilei,a를 쓰고 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성서를 볼 때 이 나라는 두가지로 표현되고 있다. 그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라는 표현이고 다른 하나는 하늘나라(Kingdom of heaven) 라는 표현이다. 그렇지만 복음서에서 병행되는 이 두가지 개념은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 마태는 하늘나라를 30번, 하나님 나라를 3번 쓰고 있다. 마가는 하나님의 나라를 16번, 누가는 32번 쓰고 있으나 하늘나라라는 말은 한 번도 쓰지 않고 있다. 우리가 마태 19:23, 마가 10:23과 누가 18:24을 비교해 보면 이 두 개의 말이 같이 쓰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왜 같은 의미의 말을 위에서와 같이 두 가지로 표현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지극히 거룩하기 때문에 경건한 유대인들은 그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았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다시말해 거룩한 이름에 대한 경외심이 '하늘나라'라는 표현을 초래 했다는 것이다. 마태가 그중 가장 유대적이었으므로 그는 '하나님 나라'라는 말 대신에 '하늘나라'라는 표현을 주로 사용한 것이다. 2. 하나님 나라의 의미 헬라어의 basilei,a는 왕권( 혹의 왕의 통치를 의미한다. 여기서 사용되는 '나라, 왕국'이라는 말은 일반적 의미로 말하는 '영토'의 의미는 아니다. 그것은 통치권이요 하나님의 지배와 통치를 말한다. 하나님 나라란 땅의 임금이 통치하는 것같이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영토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권이며 지배이며 최고의 통치를 하시는 상태요 상황을 말한다. 3.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전통적인 두가지 견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사상은 두가지 관점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 첫째는 현세가 모두 악한 세대이며 도움도 희망도 고침도 바라볼 수 없는 이른바 악의 세계에 넘어간 세대이지만 내세는 완전히 선한 시대이며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시대라는 것이다. 이와같은 사건은 하나님이 직접 시간과 이 세상에 개입하셔야만 가능하다. 혼돈과 고통과 진통 속에서 하나님이 최고의 주인이 되시는 새시대가 동터 온다는 것이다. 둘째는 하나님의 통치가 느린 과정으로 실현된다는 사상이다. 즉 사람들이 결국 하나님의 통치권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게 되는데 그 날까지는 사람들이 더욱 더 율법의 지배 아래 있게 된다는 것이다. 4. 하나님 나라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 '나라이 임하옵시고' 라는 주의 기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예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많은 언급을 함과 동시에 그것을 적극적으로 지시하고 있는데 그것을 몇 가지로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복음서에서는 종종 이 하나님 나라가 이미 온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 나라는 역사에서 나타난 것이 아니고 영원에서 시간 속으로 들어온 것이며,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며, 인간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며, 하나님이 활동하시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둘째, 이러한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들어오는 것은 전적으롤 새로운 상태이며 획기.적인 것이며 새로운 인간형의 출현에서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 나라이다. 셋째, 예수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이미 도래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나라는 아직도 오고 있으며 어떤 의미로는 미래적인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능력으로서 현재 그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의 생애 속에 온다는 것이 예수의 약속이었으며, 아버지의 나 라에서 새로운 것으로 마시겠다는 것이 예수의 희망이요 믿음이었고, 예수는 그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하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다. 5. 주기도문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우리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 나라가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동시에 존재한다는 역설을 가지고 있다. 그 나라는 예언자와 족장들이 들어가는 곳이며, 현재 사람들 속에 또는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것이며, 예수가 제자들 에게 그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우리는 그 나라가 주어진 나라요, 하나님 자신의 행동에서 나온 직접적인 결과요, 동시에 인간의 행위와 반응에 큰 관계를 가진다는 역설을 가지고 있다. 주기도문 가운데는 두가지 기원이 나란히 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 ( evlqe,tw h` basilei,a sougenhqh,tw to. qe,lhma, sou( `j evn ouvranw/| kai. evpi. gh/j ) 히브리 문체의 가장 일반적인 특색은 병행법이다. 서술을 병행형으로 반복하는 것은 유대의 시 문체의 특징이다. 두 번째 구절은 첫 번째 구절을 확대하고 설명한다.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으며, 메시야가 통치할 다윗 왕국을 대망하였다.특히 그들은 회당 예배가 끝날 때마다 고대 아람어 기도인 '콰디쉬'(QADDISH,성화를 뜻함, 여기에는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소망이 간절히 깃들어 있다)를 암송하기도 했다. 눅17:21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볼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하였는데 에수는 바로 그 나라가 임하기를 간구하라는 것이다. 이 누가복음의 말씀은 현세에서부터 천국이 벌써 영적으로 실현되고 있음을 중요시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이에서 더 나아가 예수는 주기도문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적 임재와 통치가 우리의 생활에 이르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한다. 예수님의 구속 사역은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님 나라 실현에 있는데. 이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 완전히 이루어진 상태를 말한다. 이 말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롬 12:2) 하늘에서 온전히 성취된 것같이 땅에서도 이뤄지게 해 달라는 기도이다. 여기서 뜻에 해당하는 원어 '델레마'(qe,lhma)는 하나님의 의로운 요구들(7:21 ; 12:50),과 구속사에서 어떤 사건을 전개시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18:14 ; 26:42)이 포함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나라가 우리에게 지시하는 것은 무엇인가? (1)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받아들이고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완전히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자기를 굴복시키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는것이다. (2) 그 나라에 대한 이 개념은 그 나라를 개인과 관련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각자가 하나님이 뜻을 인격적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3) 그 나라에 대한 이 개념은 어떻게 그 나라가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동시에 있을 수 있는가를 설명해 준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인 사람은 그 나라에 들어갔다. 그러므로 오늘도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인 사람은 누구나 그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죄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 나라에 들어갈 충분한 자격을 갖추지 못하게 하였다. 인간의 의지적인 노력이나 열심이 그것을 가능케하지도 못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의 통치를 인정하는 열려진 가능성 아래서 이 나라는 인간에게 미래적인 것이 되는 것이다. (3) 이 나라는 예수를 통하여 왔고 예수를 통하여 이해 가능한 나라이다. 이 나라는 예수에게서 구체화되었고, 예수의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복종이 그것을 가능케 하였으며 예수는 단순히 그의 인격 속에 하나님 나라를 나타내셨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놓으신 것이다. 1. 왕국과 선교 예수님과 세례요한의 설교의 주제는 "하나님나라"였다. 부활하신 후에도예수님의 메시지의 주제는 "하나님나라"였다(행1:3) 전도자 빌립도 "하나님 나라"(행8:12)를 설파하였다. 바울도 "하나님 나라"를 주제로 하여 선교하였다(행28:31) 이 하나님나라의 복음은 심령에 관한 복음이기 때문에 심령의 변화를 항상 전제하여 전파되었다. 심령변화의 복음 곧 회개의 복음이었다. 이 회개의 관문을 통과할 때만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축복을 누릴 수 있음이 천국복음의 진수이다. 신약의 천국개념은 동시에 역사의 종말개념과 함께 연결되어 선교적 사명과 함께 강조되었다. 주의 재림에서 완성되는 천국의 궁극적 실현은 회개로 시작되는 천국의 복음이 땅끝까지 증거되어야 하는 선행 조건이 따른다(마24:14). 유대인들이 실패한 가장 큰 원인은 이런 왕국의 영적의미를 깨닫지 못한데서 기인하였다. 제자들도 그들의 임무는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의 가시적 왕국을 회복하실 때까지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 뿐이라고 생각하였다(행1:6)제자들도 하나님나라의 실현을 이스라엘 중심적으로만 해석하고 왕국의 영적개념과 선교적 사명의 연관성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예수께서 이들의 이러한 확인을 시정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시기적 관심과 수동적인 왕국도래의 기대자세에서 벗어나 권능받아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어 선교할 것을 지적하셨다. 2. 예수님과 이방인 우리는 복음의 기록들 가운데 예수님께서 이방인 선교를 중요시하지 않는 듯한 인상이 풍기는 구절들을 대한다. 제자들에게 전도하려 보내시면서 "이방인의 길로 가지 말라"(마10:5)고 하신 말씀이다.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라"하셨고 가나안 여인에게 자신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에게만 보내심을 받았다(미15:24)고 하셨다. 이러한 말씀들은 얼핏 우리들을 당혹케 한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들은 Johannes H.Bavinck는 그 당시에는 아직 복음 전파가 전세계적 차원에 이르지 못했다는 뜻을 알리시는 것 뿐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방선교에 대하여 단순히 시기상조라고 해석하기 보다는 메시아 대망 사상으로 무장된 이스라엘에게 복음을 먼저 집중적으로 전한 후에 이방인 선교의 차례를 택하라는 선교전략적 차원의 표현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으로 보인다. 단순히 때가 이르지 못했다기 보다는 유대인 전도의 긴급성과 필요성을 강조한 것뿐이다. "구원은 유대인에게 속했다"(요4:22)고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말씀도 예수님이 유대지파를 통하여 오신 예언 성취의 메시아 임을 증거하신 것 뿐이요 사마리아인들에게 구원이 없다는 선교부정적 언급으로 볼 수 없다. 예수님께서 수가성 여인을 찾아가 전도하신 사실이 예수님의 본의를 행동으로 증명하여 주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가버나움의 백부장을 만났을 때 구약의 예언을 들어 이렇게 말씀하셨다.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리라"(마8:11). 베다니의 마리아의 신앙을 높이 평가하여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되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마26:13)고 칭찬하셨다.또 "이 천국 복음은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마24:14)라고 말씀하셨다. 3. 선교대령(마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이 선교대령은 신약 속에서 발견하는 가장 대표적인 선교의 명령이다. 이 명령은 네가지의 동사를 분사형으로 되어있는 보조동사이다. 가는 일(전도운동)과 세례주는 일(교회설립)과 가르치는 일(교회교육)을 거쳐 철저하게 제자를 삼아 그들로 다시 전도하는 일군으로 삼으라는 사실이다. 곧 제자화운동을 통한 선교 운동을 의미한다. 4. 사도행전과 선교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선교 기록이다. 사도행전의 교훈은 비록 사도들의 선교행전이긴 하지만 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 행전이기도 하다. 선교의 주역은 사도들이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시며 강조되어 있다. 비록 선교운동의 효시로 알려진 안디옥 교회 선교도 바나바와 바울이 주역이 아니요 성령이 그들을 따로 세워 파송한 사실을 누가는 밝히고 있다. 바울이 3차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 교회에 선교보고를 할 때에 "하나님이 자기의 봉사로 말미암아 이방가운데서 하신 일"(행21:19)곧 선교주역이 하나님이심을 강조하였다. 안디옥교회에서 제기한 문제로 예루살렘 총회가 회의를 할 때도 성령께서 총회를 주관하시고 결의케 하신 사실을 "성경과 우리는"(행15:28)이라는 표현으로 밝히고 있다. 곧 예루살렘 총회도 성령의 인도로 진행된 사실을 의미한다. 바울은 이방선교의 그릇으로 택하신(행9:15)사실이나 베드로를 고넬료의 집으로 보내어 복음을 전하게 하신 일도(행10) 성령의 독력적사건이시다. 하나님은 바울 선교의 코스도 결정하셨다(행6:6-7).유럽선교의 시작을 환상으로 지시하셨다(행16:9-10). 바울선교의 주도권은 바울자신보다 그를 도구로 쓰시는 성령이심을 사도행전은 거듭 강조한다(행18:9-10). 신국적 세계관으로서의 기독교 세계관(1) │ 45중생자의 세계관은 결국 신국적 세계관일 수밖에 없다. 중생한 자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따라서 중생자의 세계관은 반드시 하나님 나라적 세계관의 형태를 지니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장에서는 하나님 나라란 과연 무엇이며, 우리와 어떻게 관련되고, 우리의 세계관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는가를 생각해 보기로 한다. 1. 신국(神國)이란 용어와 그 의미 신국(神國), 즉 '하나님 나라'(???????? ??? ????)라는 용어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다스리심(rule or reign)을 뜻하는 용어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그의 주재권(主宰權)을 뜻하고, 부차적으로 그 다스리심을 받는 존재들과 그 다스리심이 미치는 범위와 영역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개념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고 나서도 이 말의 의미가 다 드러난 것은 아니다. 과연 이 '하나님의 다스리심'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온 세상을 하나님이 다스리시니, 온 세상이 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인가? 아니면 성경이 '하나님의 나라'라고 했을 때는 어떤 다른 것을 뜻하는가? 이는 아주 심각하고도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성경에서 그 의미를 배우기를 원한다. 그런데 중요한 성경의 많은 용어들이 그러하듯이, 이 '하나님의 나라'란 용어도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그 의미가 성경의 한두 곳에서 정의되어 있는 용어가 아니다. 구약에서는 정확히 이런 용어가 사용된 일이 없고, 신약에서 187회 정도 이 용어와 이를 달리 표현하는 '하늘 나라', 즉 '천국'(天國)이란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이 용어가 사용되었을 때 당대의 사람들은 이에 대해서 그 누구도 그 의미가 무엇인지 물어 본 일이 없다. 하나님 나라라는 이 용어는 그저 당시에 이 말을 듣는 모든 사람이 다 그 의미를 알고 있는 양 아주 자연스럽게 사용되고 있다. 예수님께서 주로 이 용어를 많이 사용하셨고,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바리새인들도 이 용어를 다 알고 있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이 '하나님 나라'라는 용어는 (1) 구약에서 이런 개념이 사용된 예를 살펴보고, (2) 이와 연관해서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이 용어를 사용한 의미를 검토하고, (3) 예수님과 사도들이 이 용어를 사용한 그 의미를 살펴봄으로써, 그 의미를 확정할 수 있을 것이다. 2.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다스리심'의 용례와 그 의미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구약에는 "하나님의 나라"(????? ????? 또는 ???? ?????)라는 말은 거의 없다. 한번 예외적으로 나타나는 경우를 들 수 있다면 그것은 다윗이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여호와의 나라 위에 앉혀"(???? ????? ?????? ????)라고 말할 때이다. (물론 우리말 시편에는 "주의 나라"라는 표현도 나온다[시 145:11, 12, 13]. 그러나 정확하게는 "당신님의 통치" 또는 "당신님의 다스리심(??????)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정확히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다스리심", "여호와의 나라" 등의 말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보스가 잘 말하고 있듯이 "비록 아직 명확한 명칭은 없었지만 그 사상은 구약에서도 나타난다." (1) 온 우주에 미치는 하나님의 다스리심 그런데 구약에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께서 영원부터, 또 창세로부터 온 세상의 왕으로서 온 세상을 다스리고 계심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시므로 온 세상이 다 그의 주관 하에 있다(시편 95:3-7 참조). 그러므로 그는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것이다. 보스는 이를 "창조에서 시작되었고, 전 우주에 미치는 섭리로 확대되는 하나님의 통치"라고 부르며, "이는 특별히 구속적인 (하나님) 나라의 사상이 아니다"고 말한다. 이런 온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말하고 있는 다음 같은 구약의 구절들을 살펴 보라: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능력을 입으시며 띠셨으므로 세계도 견고히 서서 요동치 아니하도다. 주의 보좌는 예로부터 견고히 섰으며 주는 영원부터 계셨나이다(시 93: 1-2).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유로 통치하시도다(시 103:19). 이 구절들은 하나님께서는 그 계신 곳, 하늘(heaven)로부터 온 세상을 다스리신다고 한다. 이를 하나님께서 "하늘에 그 보좌를 베푸셨다"고 하든지 하나님께서 보좌에 앉아 계시다고(겔 1:26-27), 그리고 "하늘의 만군이 그 좌우 편에 보시고 서 있다"(왕상 22:19, cf. 욥 1:6; 2:1)고 표현하는 것이다. 또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며 그 안목이 저희를 감찰하시도다"(시 11:4)고 말하기도 한다. 이 표현은 실제로 하늘에 보좌가 있고, 하나님께서 그 곳에 앉아 계신다는 말이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것을 표현하는 말로 보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그래서 이사야도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라고 말하며,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에는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고 말했던 것이다(사 6:1, 6). 이렇게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통치하셨다는 것으로부터 하나님은 여러 곳에서 왕으로 지칭되신다. 다음 같은 구절들을 보라: 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토록 왕이시니 열방이 주의 땅에서 멸망하였나이다(시 10:16). 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셨음이여, 여호와께서 영영토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시 29:10). 지존하신 여호와는 엄위하시고 온 땅에 큰 임군이 되심이로다.......우리 왕을 찬양하라. 하나님은 온 땅에 왕이심이라.......하나님이 열방을 치리하시며, 하나님이 그 거룩한 보좌에 낮으셨도다(시 47:2, 6-8). 대저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오, 모든 신 위에 크신 왕이시로다(시 95:3).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시편 145:1). 열왕의 왕이시여......오직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오...... 영원한 왕이시라(렘 10:7, 11). 만군의 여호와라 일컫는 왕이 가라사대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 그가 과연 산들 중의 다볼같이, 해변의 갈렐 같이 오리라(렘 46:18, cf. 렘 48:15; 51:57). (또한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라고 옮겨진 말 중 많은 것이 "여호와는 왕이시니"라고 옮겨질 수도 있는 표현(??? ????)임에 유의해야 한다[시편 93:1; 96:10; 97:1; 99:1]). 또 때로는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님이 왕이라고 말씀하기도 하신다: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열방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말1:14하). 이렇게 온 땅의 왕이신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통치자들을 세우시는 일에서(단 2:37; 4:17; 5:21 등)와 현세적 심판과 주재권의 발휘에서(렘 48:15; 51:57; 시 22:28) 나타난다. 그리고 이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는 영원하다. 이스라엘 백성도 그렇게 말하고, 심지어는 하나님의 권능을 목도한 이방의 왕도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여호와의 다스리심이 영원무궁하시도다(출 15:18).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시 45:6). [주의 성도가] '주의 나라'(??????)의 영광을 말하며 주의 능을 일러서 주의 능하신 일과 '주의 나라'(??????)의 위엄의 영광을 인생에게 알게 하리이다. '주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니, 주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이다(시 145:11-13).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내게 행하신 이적과 기사를 내가 알게 하기를 즐겨 하노라. 크도다 그 이적이요, 능하도다 그 기사요, 그 나라는 영원한 나라요, 그 권병(權柄)은 대대에 이르리로다(단 4:2-3). 시온아! 여호와 네 하나님은 영원히 대대에 통치하시리로다(시 146:10). (2) 이스라엘의 왕이신 하나님 그리고 위 인용문들 중의 마지막 구절이 시사하듯이 온 땅의 왕이신 하나님은 특별히 이스라엘의 왕이시다(신 33:5; 삼상 12:12; cf. 삿 8:23). 그리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나라이다(대상 17:14; 28:5; 대하 13:8. cf. 출 19:6). 그러므로 구약에서는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이 특별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여겨지는 것이다. 보스는 이를 "신정(theocracy)이라 불리는 특별한 구속적 나라"라고 부른다. 우리가 위에서 살펴 본 대로 온 세상이 다 하나님의 통치의 대상이나 그 온 땅의 거민이 다 타락하고 패역하여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기꺼이 받지 않게 되었다. 이 때에는 하나님의 권능의 통치는 온 땅에 미치나 그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즐겁게 받아들이지 않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마치 사단과 악한 영들도 하나님의 다스리심 안에 있으나 그들을 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런 것을 전통적으로 "권능의 왕국"(regnum potentiae)라고 불러 왔다. 이 권능의 왕국에는 사단과 악한 영들, 또 이 세상에 불순종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세상이 포함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왕이라고 할 때에는 이런 권능의 왕국의 왕이시라는 뜻이 다분하다.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복종하지 않자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아브람을 선택하시고 그와 그의 후손들과 언약을 맺으셔서 그들을 자신의 특별한 소유로 삼으셨다. 이렇게 특별히 세우신 이스라엘이 특별한 하나님의 나라인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구약적인 의미의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었다. 그들은 구약적인 "은혜의 왕국"(regnum gratiae)에 속한 백성들이다. 실질적으로 그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일 수 있는 것도 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구속 사역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도 하나님의 은혜 언약 아래에 있는 백성들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은혜의 왕국은 은헤 언약 하에 있는 백성들로 이루어진 것이다. 은혜 언약의 머리가 그리스도이시듯이 은혜의 왕국의 왕도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장차 오실 구속자 안에 예기적으로 있는 구약적인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었다. 그런데 보스는 "이 구속적 나라를 처음으로 명백히 언급한 것은 출애굽 때"에 나타나는 "제사장 나라"라는 표현이라고 한다(출 19:6).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법궤 위의 시은소에 새긴 그룹 위에 계신 분으로도 언급되신다(왕상 19:15; 사 6:1). 또 때로는 시온산이나 예루살렘으로부터 다스리신다고도 표현되는 것이다(시 44:22; 99:1-2; 렘 8:19). 따라서 이 제사장 나라인 이스라엘 가운데서 왕으로 세우심을 입은 자도 자신 이 진정한 왕이 아니고 하나님의 통치를 대리하며, 하나님께 속한 주권을 인정하여야 한다. 그 대표적인 왕 다윗은 이런 생각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었다: 우리 조상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송축을 받으시옵소서.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이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主宰)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대상 29:10-12). 그러나 이 이스라엘은 그들의 하나님 백성 됨에 충실하지 못했다. 그들도 그 나라 밖에 있는 사람들처럼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해 버렸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여러 모양과 여러 수단으로 현세적인 심판을 내리셨으나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잘 생각하지 않고 더 악한 데로 나아가 버렸다. 바빌론 포수의 상태는 이 땅에 있는 구약적 하나님 나라가 무너지고 상실된 상황임을 느끼도록 해주었다. 이 역사적 시기는, 보스가 표현한 바와 같이, "그 신성한 나라가 결코 모두 파기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 나라를 새롭게(de novo) 가져온다고 말하는 것이 적절할 정도로 사라져 간 때"였다. (3) 하나님의 미래 통치 이런 상황 가운데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런 일이 임했음을 선지자들을 통해서 선언해 주셨다. 그러나 심판이 하나님의 마지막 말은 아니었다. 이스라엘의 왕,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그 왕이 장차 온 세상을 공정히 심판하고 만민을 다스리시려고 임하실 것임도 선언하고 강조하는 것이다: 열방 중에서는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 세계가 굳게 서고 흔들리지 못할지라. 저가 만민을 공평히 판단하시리라 할지로다....... 저가 임하시되 땅을 판단하려 임하실 것임이라. 저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판단하시리로다(시 96:10, 13). 이 열왕의 때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하고 영원히 설 것이라(단 2:44).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하나이실 것이요, 그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며......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열국 중의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슥 14:9, 16). '라고 칭하며 그것을 기다린 듯하다. 이는 신약에 나타나는 당대 유대인들이 '하나님 나라'이러한 하나님의 통치의 실현, 또는 하나님 통치의 회복이 메시아 예언과 연관된다. 메시아는 이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위해 보내지는 하나님의 대리자이다. 그 메시아 예언에 속하는 시편 22편의 한 곳에서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 나라의 사상이 표현되어 있기도 하다: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열방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경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열방의 주재이심이로다...... 후손이 그를 봉사할 것이요 대대에 주를 전할 것이며 와서 그 공의를 장차 날 백성에게 전함이여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 할 것이로다(시 22:27, 28, 30, 31). 구약 선지서들에는 결국 이런 하나님의 나라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모든 나라가 다 하나님께 속할 것이라는 기대로 가득차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구원자들이 시온산에 올라 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리니,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오바댜 21)고 말하는 예언은 오바댜에만 한정된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즉 하나님의 통치가 임할 것을 예언하고, 그것을 기다렸던 것이다. 이사야도 이렇게 말한다: "그 때에 달이 무색하고 해가 부끄러워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시고 그 장로들 앞에서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니라"(사 14:23). 3.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용례 그러면 이제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이 '하나님 나라'란 용어에 대해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사용했는지를 생각해 보자.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온 세상을 하나님께서 통치하시고 다스리신다는 것을 구약에서 잘 배워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는 이런 온 세상에 대한 보편적인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리심을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지는 않은 듯하다. 오히려 우리가 지난 절의 마지막 부분에서 보았던 장차 임할 하나님의 통치와 심판을 '하나님 나라라는 말을 사용한 용례를 살펴보면 잘 나타난다. 예를 들어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후에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다라"고 한 공회원인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하였다(막 15:43, 44). 하나님 나라를 기다린다는 것은 그 나라, 그 통치가 아직은 현존하지 않는다는 것이요, 그 나라, 그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이루어지기를 바랐다는 것이다. 심지어 바리새인들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기다리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들도 한번은 예수님께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하고 물었던 것이다(눅 17:20). 물론 이는 요셉을 비롯한 당대의 유대인들이 온 세상에 미치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부인하였다는 말은 아니다. 그 권능의 왕국을 인정하되, 현재는 그런 것에 부합한 현실이 나타나 있지 않음을 보면서 그에 부합한 현실이 눈앞에 전개되기를 기대한 것이다. 구약에서 예언하신 대로 그 왕이 임하셔서 온 세상을 심판하시고, 온 세상을 그 의와 공평으로 다스려 주시기를 고대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 당시의 유대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로써 장차 임하게 되는 하나님의 통치를 지칭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그 나라가 이 땅에로 임하여 올 것이라고 믿었고, 그 통치가 이 땅에 가득하게 되어 이 온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에 방불하게 되는 날이 어서 속히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어디 다른 곳에 현존하고 있다가 그 나라가 이 땅에 임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직 하늘에서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통치가 현저하게 드러나서 온 땅에 가득하게 되기를 기다렸었고, 그것을 하나님의 통치요, 하나님의 나라라고 지칭했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이 하나님 나라의 임함이 과거 구약적 하나님 나라였던 "이스라엘을 회복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그에게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이니이까?"라고 묻기도 했던 것이다(행 1:6). 이는 그들이 기다려 오던 하나님 나라의 임함, 즉 이스라엘의 회복이 지금 이루어지느냐는 질문인 것이다. 여기서는 이스라엘의 회복이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되었다. 또 이와 비슷한 것은 "이스라엘의 위로"라는 말이나(눅 2: 25), "예루살렘의 구속됨"이란 말이다(눅 2:38).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시므온도 결국 하나님 나라의 임함을 기다린 것이고, 안나의 예수님에 대한 증언을 들은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들도 결국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던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유대인들이 "하나님 나라"와 동의어적인 말로 사용한 이런 말들을 볼 때에 그들은 "하나님 나라"라는 말을 이 땅에 임하게 되는 하나님의 통치를 이해했음이 분명해 진다. 그들이 기다린 메시아 왕국이 그런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거나, 그 실현의 전조로 이해된 것이다. 유대인들의 전통적 두 세대 개념도 유대인들의 이런 하나님 나라 개념을 잘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이 세대(this age) 또는 이 세상(this world)이 끝나면 '오는 세대'(즉, 來世, the age to come) 또는 '오는 세상'(the world to come)이 오리라고 믿었다. 그들이 바라던 하나님 나라의 임함은 바로 이 오는 세상이 임하는 것이었다. 이런 '오는 세대' 개념은 유대인들의 묵시 문학 가운데 자주 등장하는 용어였고, 이는 하나님 나라의 임함과 동일시 되었다. 물론 당대의 유대 사람들은 항상 구약에 근거한 바른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때로는 구약에 근거해서 바른 생각도 했지만, 그것에 대한 기대가 여러 가지 것과 혼합되어 나타났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의 하나님 나라 개념은 다윗 왕국의 회복에 대한 기대로부터 정치적이고 이 세상적인 메시아 왕국 개념으로 발전되기도 했다. 그것이 이 역사 가운데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으나, 그들은 대개 그것이 이루어지는 때가 세상 끝, 즉 종말이라고 이해했다. 거뜨리가 잘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유대인들에게는 "그 나라가 오는 세대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즉, 오는 세상에서라야 이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고 본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이 세상은 끝, 즉 종말에 이르고 하나님의 나라만이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4.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왕국 선포(1) 바로 이런 배경 가운데서 세례 요한의 "회개하라"는 선포가 나타났다. 당시의 유대인들의 다양한 집단들은 그들 나름의 다른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가 다 그들에게 임하여 오는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도 세례 요한이 선포한 말을 꼭 그대로 사용하셔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신다. 그런데 마태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그 "회개하라"는 말 다음에 나오는 말은 요한과 예수님 모두에게 있어서 "하늘 나라, 즉 천국(天國)이 가까웠다"는 말이었다. 예수님의 말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자. 마태 복음 4:17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이 때부터[요한이 잡힌 후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같은 것을 마가복음에서는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고 하고 있다. 정황이 모두 같고, 이것이 예수님의 첫 선포임을 생각하면, 이는 같은 것을 표현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가깝게 다가온 것'은 하나님 나라요, 천국이다. 그러므로 이 둘은 같은 실재에 대한 지칭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정확히 어떤 용어를 써서 표현하셨는지를 단언할 수는 없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고 하셨는지, 아니면 "천국이 가까웠다"고 하셨는지 말이다. 유대인들의 표현 습관을 생각하면 아마 천국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또 어떤 이들은 예수님께서 천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셨다면 왜 마태만 이 용어를 유지했겠는가라고 하면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라고 하셨을 텐데 마태가 천국이란 변형을 만들지 않았겠느냐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말씀을 직접 듣지 못했으므로 예수님께서 어떤 용어를 사용해서 표현하셨는지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 ??? ????)와 '하늘 나라, 즉 천국'(天國, ???????? ??? ???????)이란 용어의 정확한 관계를 정리해야 할 것이다. 위의 인용문에 비추어 보면 이 두 용어는 동의어로 사용된 것임이 분명하다. 후크마가 말하고 있듯이, "하늘 나라[天國]라는 표현과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이 공관복음서에서 서로 바꾸어 쓸 수 있는 것이므로, 그 둘 사이의 의미의 차이가 없다고 안전하게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마태복음에서는 하나님 나라를 하늘 나라, 즉 천국(天國)이라고 했을까? 게르할더스 보스는 마태복음이 유대인을 대상으로 하여 쓰여졌음을 생각하면서 슐러(Schurer) 등의 해석에 따라서 "하나님이란 이름을, 그것이 다양한 형태로 상당히 회피되던 것이므로 '하늘'로 바꾸어 사용하던 유대적 관습"과 관련해서 설명한다. 즉, 여기서 "하늘"이라고 표현된 말은 "하나님"의 이름을 회피하려고 다른 말로 돌려 쓴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보스는 이와 비슷한 용례로 탕자의 비유에서 탕자가 하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눅 15:18, 21)라는 말과, 예수께서 비판하던 자들에게 물으셨던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서냐?"(마 21:25)는 말을 들고 있다. 이에 해당하는 또 다른 예로 요한이 하는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요 3:27)는 말을 들 수 있다. 또한 다니엘서에 나타나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줄을 왕이 깨달은 후에야 왕의 나라가 견고하리이다"(단 4:26)는 말의 난하주에 나타난 원문을 직역한 "하늘이 다스리는 줄을"이라는 표현도 이에 대한 용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의 "하늘"(???????)은 "하나님"에 대한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이런 용례의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하나님 나라를 하늘 나라, 즉 천국(天國)이라고 부른 경우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는 신약 성경에서 천국이라는 말이 나올 때 우리는 기본적으로 이를 하나님 나라라는 말로 이해해야만 한다. 이 용어에 대해서 하늘 나라[天國]라는 말의 어원을 가지고서 생각하는 것은 성경의 용례에 맞지도 않고, 이 말이 사용된 의미에도 반하는 일임에 유의해야만 한다. 이 말의 "하늘의" 라는 말은 이 문단에서 우리가 살펴 본 바와 같이 "하나님의"라는 말을 대신하여 사용된 말이라는 것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하늘 나라[天國]라는 말로써 전달하시려는 바를 오해하고자 하는 것이 되겠기 때문이다. 이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는 신약 성경에서 '하늘'(heaven)이란 말이 여러 가지 용도를 가지고 나타나고 있음을 잘 주의해 살펴보아야만 한다. 신약 성경을 면밀하게 살펴 본 학자들은 그 용례를 다음과 같이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그 첫째는 '하늘'을 우주론적인 하늘로 지칭한 경우이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하늘, 해와 달과 별들이 있는 그 곳을 하늘이라고 하였다. 둘째는 위에서 우리가 살펴 본 바와 같이 하나님을 지칭하는 대신에 '하늘'이라고 돌려 표현한 경우이다. 그 셋째는 하나님이 계신 곳, 즉 하나님의 거주지를 지칭해 '하늘'이라고 한 예가 있다. 예를 들어서, 시편에서 "하늘"을 하나님의 "거하신 곳"의 병행법적 표현으로 쓰고 있는 시편 33:13-14를 보라: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감찰하사 모든 인생을 보심이여, 곧 그 거하신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을 하감하시도다." 또한 신약에 나타나고 있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란 표현이나(마 6:9),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는 표현(마 7;21; 10:32, 33; 12:50; 16:17; 18:10, 19), 또 "하늘에 게신 너희 아버지"라는 표현(마 5:16, 45; 6:1, 7;11; 18;14), 그리고 "천부"(heavenly Father)라는 표현(마 5; 48; 6:14, 26, 32; 15:13; 18:35)에 나오는 "하늘"은 모두가 하나님이 계시는 곳을 지칭하는 표현에 해당하는 것이다. 성자께서도 그 "하늘", 즉 하나님께서 계신 곳으로부터 이 세상에 오셔서 성육신하셨고, 구속 사역을 마치신 후에 다시 그 '하늘'에 오르신 것이다. 예수께서 친히 그렇게 말씀하신다: "하늘에서 내려 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 3:13).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렇게 묻기도 했던 것이다: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저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 왔다 하느냐?"(요 6:42) 이처럼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내려 오셨고, 하늘에서 오셨음을 분명히 하셨다. 또한 그의 사역을 마치신 후에는 그가 계시던 곳, 하늘로 오르셨다. 그가 다시 오시기까지 마땅히 "하늘"이 그를 받아 두는 것이다. 그는 지금도 "하늘"에 계시고, 그 "하늘"로부터 심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로 임하여 오실 것이다. 이 하늘을 바울은 유대인들의 개념을 따라서 "낙원"(paradise)라고 부르기도 했다(고후 12: 2, 4).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상에서 그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한편 강도에게 "네가 오늘날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다(눅 23:43). 이는 그 강도의 영혼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것이라는 말이 분명하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이 계신 곳, 즉 '하늘'에 계실 것이므로 '하늘'(heaven)을 '낙원'(paradise)과 동일시하신 것이다. 성경은 신자들이 죽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면전에 있을 것임을 분명히 한다. 예를 들어서, 바울은 자신이 죽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한다(빌 1:23). 이런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는 "개혁 교회들의 일반적 입장은 신자들의 영혼이 죽으면 곧바로 하늘 영광(the glories of heaven)에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성도들의 몸과 분리된 영혼도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계신 그 곳, '하늘' 즉 '낙원'에 있게 된다는 말이다. 그 곳에 있던 성도의 영혼은 부활 때에 몸과 다시 합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올 것이고, 그리하여 심판 이후에 "새하늘과 새땅"으로 불려지는 극치의 하나님 나라, 영광의 왕국(regnum gloriae)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벌코프는 "신자들의 최종 상태는 현 세상이 지나가고 새로운 창조가 나타난 후에야 있게 된다"고 말한다. 그 새로운 창조인 새하늘과 새땅이 성도들의 최종적 거주지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과 예수님께서 "천국이 가까웠다"고 표현한 것은 결국 유대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그 오는 세대의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다고 하는 말이다. 유대인들은 그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 즉 은혜의 왕국과 영광의 왕국 이외의 것을 가르쳐서 천국이라고 말하거나 생각해 본 일이 없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가, 즉 천국이 가까웠다"고 말씀하실 때도 다른 것에 대해서 말씀하셨을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과 신약의 하나님 나라 개념을 잘 요약하고 있는 다음 신학자들의 말을 잘 들어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왕의 신적인 행위를 생각해야만 한다...... 요한과 예수께서 선포하신 천국은 무엇보다도 역동적 성격의 과정이다...... 왜냐 하면 천국의 임함은 종말 역사의 위대한 드라마의 처음 단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왕이시며, 역사 가운데서 역사를 하나님께서 지향해 가시는 목표로 이끌어 가시기 위해서 행동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 역사 가운데서 역동적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통치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그 목표는 하나님의 백성을 죄와 마귀적 세력들로부터 구속하는 것이고, 종국적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수립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 위에서 진행되는 하나님의 통치 행위로 이는 결국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그 극치에 이른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과 예수님께서 그 나라가 "가까왔다"(???????)고 하신 말의 뜻은 무엇일까? 옛날에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그 하나님 나라가 이제 많이 가까웠다는 말인가, 아니면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인가? 그 정확한 의미는 예수님께서 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신 모든 점을 잘 고찰함으로 통해서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다음절에서 고찰해 보기로 하자. 가.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는 '하늘나라'(The Kingdom of Heaven) 또는 단순히 '나라', '왕국'(Kingdom, 마 6:10) 이라고도 불리며 '하나님의 왕적통치'(The Reign of God) 혹은 '하나님이 왕의 주권을 가지고 다스리시는 나라'를 의미한다(The Kingly rule). 주기도문에 나타난 대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나라',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나라'(마 6:9, 눅 11:2)를 의미한다. 또는 '하나님과 함께 종말적인 잔치상에 참여하는 축복'(막 8:11, 눅 7:28, 눅 22:30)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 생각할 것이 있다. 과연 영역(Sphere)과 통치(Reign)를 엄격히 구별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는 곳이라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이스라엘이 곧 하나님의 나라였을 것이다. 그 나라는 사랑, 공의, 평화가 넘치는 메시아의 곧 하나님의 나라였을 것이다(사 42:1, 51:4, 렘 31:31, 겔 34:22-24, 비교. 막 11:10, 15:43, 행 1:6). 예수 당시 하나님의 나라는 적어도 로마제국의 지배에서 온전히 회복된 독립된 이스라엘을 의미했을 것이다. 그러나 공관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적인 색채를 띤 개념인지 아니면 초민족적이고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의미의 나라라는 개념인지는 분명치 않다. 공관복음에는 그 두가지의 요소가 다 나타나기 때문이다. 예수가 이스라엘 12지파를 상징하는 12제자를 택해서(막 3:13-19, 마 10:1-4, 눅 6:12-19)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게 한 것은(마 10:7, 눅 9:1-2, 막 6:12) 확실히 하나님의 나라가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그러나 마가복음 8:11, 누가복음 13:28-29 같은 구절은 민족을 초월한 보편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키고 있다. 따라서 양면성이 다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문제는 예수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이해했느냐 하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막 1:15, 마 4:17) 또는 "하나님의 나라는 ...와 같다."라는 말로 표현했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다."와 같이 분명한 정의를 내리지는 않았다. 그것이 상징이든 아니면 현상이든 하나님의 나라를 잘 알고 있는 것으로 가정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을 하면 듣는 사람들이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금방 알아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방민족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압제에서 벗어나 평화, 사랑, 공의를 누리는 샬롬의 나라로 여기고 속히 임하기를 간절히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성격을 가진 하나님의 나라는 스스로 온다. 환경의 변화나 사람들의 노력으로 오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는 오직 그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하라고 하셨다(막 6:10, 눅 11:2).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돌연히 임하지만 인간 편에서 적절한 결단을 내릴 것을 요구한다. 주께서 추수 노력이 필요하듯이(마 9:37-38) 능동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갈 준비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 운동'이란 용어는 합당치 않은 용어이고 구태여 쓰려고 한다면 '세례자 요한, 예수, 제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다는(마 3:2, 4:17, 막 1:15, 눅 4:17, 눅 10:9) 사실'을 의미할 뿐이다. 예수 시대의 사람들이 늘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 시기에 관심이 많았지만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 자신이 선택하신 시기와 방식으로 완성하신다. 다른 말로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묵시적 성격(Apocalyptic Nature)을 가지고 있다. 즉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는 대변동을 의미하며 파국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역사와 인간의 경험에 대한 하나님의 결정적이고 종말론적인 개입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묵시적'이란 의미가 무엇인가를 놓고 의견이 분분한 바, 시간과 역사공간을 초월한 실존적인 결단을 강조하는 불트만의 견해와 선(線)적인 시간개념과 역사개념 안에서 예수 당시의 하나님의 나라의 의미를 강조하는 견해가 있다. 하나님의 나라의 묵시적 도래는 세상에서의 급격한 변혁을 가져오는데(마 11:12, 눅 10:18, 마 12:28=눅 11:20, 막 3:27) 사람들을 속박하고 고통을 주고 있는 사탄과의 종말적인 전쟁을 의미한다. 여기서 예수가 병자들을 고치고, 가난하고 잃어버린 양과 같이 버려진 사람들의 회복과 인간을 노예로 삼고 있는 세력인 사탄을 쳐부수는 것은 질병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세력의 패배를 의미하며 최종승리를 의미한다. 그에 따라 구원과 사랑, 정의, 용서, 회개, 평화와 희락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된다. 특별히 관심있게 볼 것은 많은 경우에 있어서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 선포는 사람들의 삶에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밝힌 것이다(마 10:7, 눅 10:9, 마 9:35-38). 이 하나님의 나라를 오늘의 시각에서 보면 하나님의 영에 이끌리어 사는 사람들(기독교인)의 출현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적어도 1세기 이스라엘 사람들은 좀 더 가시적인 면에서 보았을 것이고 이스라엘의 독립 같은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행 1:6, 눅 17:20). 예수는 정치적이거나 민족적인 의미로만 하나님의 나라로 해석하는 것을 거부했다(눅 17:20).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를 순전히 영적이거나 초월적인 것으로만 해석하는 것도 옳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에는 묵시적인 성격과 더불어 사회적인 차원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들이 살아나며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마 11:5-6). 특히 가난한 자에게 기쁜소식이 전파된다는 말은 신체적인 문제와 더불어 사회적인 문제와 관계있음을 말한다. 나. 하나님의 나라는 언제오나 ? 「하나님의 나라 연구」에서 이 문제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이것은 예수의 사역과 가르침에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도래해 있는가 아니면 미래에 도래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크게 세 가지 견해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첫째로 도드(C.H. Dodd)가 주장한 현재적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의 사역에 이미(already) 와서 현존하고 있다는 것이다(마 12:28=눅 11:20, 막 1:15, 눅 17:20). 그러나 이 주장에 대한 반론도 있다. 마가복음 1:15는 시제로서는 현재완료지만 아주 임박한 상태를 나타낼 뿐이라는 주장도 있고, 더욱이 "미래의 하나님의 선취적 현재" 즉 너무나 임박해서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선취적 미래(Proleptic Presence)로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이에 반하여 Weiss, Schweitzer, Bultmann 등의 학자들은 예수는 임박한 미래적인 하나님의 나라만을 가르쳤다고 주장한다(마 9:1, 6:10, 눅 11:2, 마 8:11=눅 13:28-29, 마 11:11=눅 17:28, 막 14:25, 눅 22:16=마 26:29). 불트만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마치 기차가 기차역에 지금 막 들어오고 있어서 모습을 일부 볼 수 있으나 아직 완전히 역안으로 들어오지 않은 상태와 같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마 8:11=눅 13:28-29, 마 11:11=눅 17:28, 막 14:25, 눅 22:16=마 26:29 같은 구절을 중심으로 여러 다른 구절에 근거하고 있다. 현재적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는 구절보다 미래적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는 구절이 상대적으로 많은 것이 사실이다. 셋째로 위의 두 주장은 나름대로 타당성은 있으나 한 쪽만 주장하기에는 치우친 감이 있다고 보고, 예수의 사역과 말씀에서 종말론적인 구원이 성취되기 시작하므로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적인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나 완성되지는 않았고, 그때를 향해 나아가는데 임박한 미래적인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이 있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현재적 하나님의 나라와 미래적 하나님의 나라 사이의 긴장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하는 요점이라고 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다. 예수가 이미 자신의 사역에 현존한 현재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절반 진행되었고 곧 닥칠 하나님의 나라가 절반 진행될 것으로 설명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확실히 강조점은 미래적 하나님의 나라에 있다. 그러나 예수의 사역에서 나타난 도래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징표도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원형(Prototype)일 수가 있고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에 대해 예수도 대답치 않았다. 그는 마가복음 13:31에서 그 날과 그 시는 자신도 모르고 아버지만이 아신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 시기와 관련하여 중요한 질문이 있다. 즉 오늘에 사는 기독교인으로서 예수가 가르친 그 나라가 이미 왔는가? 아니면 아직도 오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위에서 설명한대로 몇 가지 대답이 가능하다. 예수의 사역에 하나님의 나라의 한 원형으로 이미 온 그 나라는 아직도 완성으로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신앙의 실존적 결단(Existential Decision)으로서 모든 시대에 신앙의 결단을 하는 사람들에게 이루어진다 등의 대답이다. 그러나 이런 대답들은 예수가 그 나라가 곧 들이닥칠 것처럼 가르친 긴박성을 무시한 대답이다. 그러면 예수의 말씀은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오히려 예수의 예언은 이루어졌고 예수 부활후 세워진 교회와 오늘에 사는 기독교인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이 점에 착안하여 예수의 십자가 지심과 부활사건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고 설명할 수 있다. 부활 이후 성립된 성령강림에 의해 성립된 교회는 곧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의 실체며 하나님과 신자들 간에 새로운 인격적 관계가 형성되어 하나님을 모시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영적인 나라로 설명이 가능해진다(고전 4:20, 6:9, 15:14, 롬 14:17). 그러나 이 주장은 심각한 도전을 받게된다. 왜냐하면 부활 사건 이후 여러 사도들 특히 바울은 아직도 하나님의 나라를 대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와 바울이 기대한 재림과 종말이 별개의 것이라면 예수가 예언한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은 종말에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가장 합리적인 견해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견해에도 반론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 선포는 거의 모두 단회적인 내림을 말하지 부분적인 내림을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언제? 어디서? 어떻게?라고 묻는 질문, 즉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의 때에 대한 정확한 본질은 예수의 가르침에 나타나 있지 않기에 불합리한 질문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이중적인 의미 그러나 엄밀히 말해 "하나님의 나라"는 이중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현재 이 땅에서 성령 안에 거하는 영적인 면과, 또한 미래에 완성되어 우리 앞에 펼쳐질 예언적인 면이다. 분명히 거듭나서 들어가는 이 나라는, 예수님께서도 친히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오는 것이 아니니라."(눅 17:20)고 말씀하신 것처럼 현재 우리 가운데 이루어져 있는 나라이다.(눅 17:21). 그러나 이 나라는 또한 누가복음 9:27에서 말한 것과 같이 "볼 수" 있다. 누가복음 21:31에서는, 무화관 나무가 싹을 내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을 알라는 예언적인 말씀을 하시면서 "너희도 그와 같이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줄 알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셨다. 학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이러한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이라는 용어로 설명하려 한다. 현재적인 하나님의 나라와 미래적인 하나님의 나라, 어찌 보면 이 말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매우 올바른 정의인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구분하는 대부분의 학자들은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를 구분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천국도 하나님의 나라의 범주 안에 집어 넣어 동일한 나라로 만들어 버리는 오류를 범한다. 그렇게 되면 유대인에게 약속된 천국에 대한 모든 예언들이 선지자들이 말한 본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무너져 버리게 된다. 성경은 많은 부분에서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를 분명하게 구분한다. 이것은 천국(오직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용어이다.)에 관한 모든 설명들이 문자적이고 정치적인, 재림하시는 그리스도의 왕국에 한정되는 점들로 확인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알 것은 이 두 왕국이 별개의 왕국이라는 것이다. 다만 하나님의 나라라고 묘사된 왕국이 영적인 나라를 말함과 동시에 천국의 의미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뿐이다. 이것은 마태복음을 제외한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나라"라고 묘사된 구절 중 어떤 구절들은 실제로 천국을 말한다는 것으로 확인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 가운데 있는 이 두 의미를 구분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먼저 마태복음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나라는 모두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이다. 마태복음에서는 대부분이 "천국", 또는 "왕국"이라고 묘사되는 가운데(복음서에서 이 둘은 정확히 같은 표현이다.), 오직 다섯 구절만이 "하나님의 나라"라고 묘사하고 있다(마 6:33; 12:28; 19:24; 21:31,43). "천국"이라는 말은 오직 마태복음에만 등장하는 바, 천국의 개념을 분명히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있는데, 굳이 그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하나님의 나라라는 다른 용어를 사용할 필요가 전혀 없다. 따라서 마태복음에서 등장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천국과는 전혀 개념이 섞이지 않은 분명한 하나님의 나라다. 예를 들어 6:33에서는 백성들이 천국을 바라기에 앞서 "도덕적이고 영적으로 온전한 상태의 의"의 내적인 왕국을 먼저 구해야 함을 말씀하고 있고, 21:31은 자기 의를 내세우지 않은 죄인들이 하나님의 나라로 밀려 들어가는 모습을 너무도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어느 구절을 보아도 명료하다. 다른 복음서나 서신서들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가끔 천국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이 또한 문맥적인 이해력만 있으면 전혀 구분하기 어렵지 않다. 그 구절이 미래에 세워질 실제적인 왕국을 말하면 거기서 "하나님의 나라"는 "천국"을 말하고 있는 것이고, 그 구절이 영적인 상태를 말하고 있다면 그 "하나님의 나라"는 말 그대로 "하나님의 나라"이다. 문제는 왜 마태복음을 제외한 다른 책들에서는 단어를 통한 분명한 구분을 하지 않고, 한 용어에 대한 두 가지 의미로 설명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천국적 의미 먼저, 그것은 마태복음이 유대인을 위해 기록된 복음서인 반면, 다른 복음서들은 이방인들을 위해 기록된 복음서이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마태복음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기록한 책이고, 마가복음은 종으로 오신 예수님, 누가복음은 인자,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을 기록한 책이다. 마태복음의 족보자 지극히 유대적이라는 것과 다른 복음서들보다 구약 인용이 많다는 것 등은 이 책이 유대인을 염두에 두고, 그들에게 예언된 왕을 제시하는, "유대인을 위한 복음"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따라서 거기에 등장하는 왕국 또한 유대인에게 예언되어 있는 메시야의 왕국으로 일관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나라는 천국을 설명하는 관계에서 관련된 설명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러나 다른 복음서들은 그렇지 않다. 종으로 오신 예수님이나 인자로 오신 예수님,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에 관한 기록들은 전혀 유대인에게 한정시킬 필요가 없다. 그러한 그리스도의 모습은 교회가 믿고, 받아들이고, 본으로 따라야 할 그분의 모습이셨다. 특별히 요한복음은 어느 복음서보다도 신약 교리를 충실하게 전해 주고 있고, 누가복음은 그 수신자 자체가 데오빌로(눅 1:3), 즉 한 로마인이었다. 누가는 한 로마인에게 유대인의 우월성과 유대인이 받은 언약, 메시야의 왕국에서 높아지는 유대인 등에 대해서 설명하려고 이 책을 기록한 것이 아니다. 그는 이 책에서 한 이방인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 그분이 어떻게 일하시고 가르치셨으며, 그분이 어떻게 죽으셨고 또 부활하셨는가를 알려 줌으로써 궁극적으로는 그에게 복음의 진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거기에는 유대인의 왕국에 대한 강조가 필요 없었다. 이방인들이 믿고 들어올 때,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오는 것이지 천국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다윗의 왕국인 "천국"이 약속되었지만, 이방인들은 그 약속을 받지 못했다. 단지 이방인들이 믿으면 그리스도의 몸, 즉 교회가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받게 된다. 이 나라는 거듭남을 통해 들어가는 영적인 나라다. 물론 다른 복음서들을 통해서도 대환란과 재림에 관한 모습을 볼 수 있다(눅 17,21장 등). 그리고 재림하시면서 이루어지는 왕국은 "천국"이다. 하지만 거기서도 "유대인을 위한 왕국"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현재에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있지만,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 미래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나라에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마태복음을 제외한 복음서에는 천국이 강조되지도 않을 뿐더러, 그 용어조차도 등장하지 않는 것이다. 함께 나타나는 두 왕국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또 하나의 사실은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 시대에만 한정되는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요한복음 3장에서 거듭나면 들어간다는 사실은 분명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받을 복을 말하는 것이지만, 이 복은 이 시대에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적인 하나님의 광범위한 영적 통치요,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성품이 충만하게 드러나는 나라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으로, 또 도덕적으로 "온전한 의"의 상태를 요구하게 된다. 이러한 의가 죄인의 육신으로는 도저히 드러날 수 없기에 거듭남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입음으로 가능하게 되는 것뿐이다. 사실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는 분리되어서는 안 되었다. 이 두 왕국은 처음부터 함께 있었다. 하나님의 물리적인 통치가 있다면,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속성에 따라 영적으로 의로운 통치와 함께해야만 한다. 적어도 태초에는 그랬었다. 하지만 루시퍼가 타락하고, 이어서 아담이 타락한 후에 이 두 나라는 불가불 분리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아담이 범죄함으로 그 형상을 잃어버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담의 영은 그 날로 죽었기에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에 동참할 수 없었다. 이때부터 하나님의 나라는 그 영이 살아나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될 때까지 사라지게 되었다. 물론 이 형상의 회복은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셔야만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래서 그리스도 이전에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없고, 대신 이스라엘을 통한 하나님의 신정 통치 형태의 천국만이 존재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가 함께 통치되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최초의 계획대로, 초림 때에 이 두 왕국을 동시에 가져오셨던 것이다(마 4:17, 막 1:15). 마침 이스라엘의 신정 통치인 "천국"도 바빌론 포로 이후에는 사실상 사라졌기에(렘 22:3), 이 왕께서는 두 왕국을 가져오시기에 아주 적절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먼저 유대인들에게 전파되었고, 그들에게 천국, 즉 메시야 왕국의 통치를 받기에 합당하도록 먼저 온전한 영적인 상태의 왕국인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고 요구하셨다(마 6:33).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그 "의"가 통치 기틀로서 자리잡지 못한다면, 아무리 완벽한 환경이 설정된다 하더라도 그 천국은 실패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유대인들은 그 왕과 왕국을 거부했고, 천국은 왕의 재림 때까지 연기되었으며,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를 통해 확장되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거듭남의 문이 열려진 이상 하나님의 나라는 연기되거나 취소될 수 없다. 그래서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나라는 없고 천국만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신약 시대에는 천국은 없고 하나님의 나라만 있게 되는 것이다. 두 왕국 안에서 한꺼번에 통치하기 원하셨던 하나님의 최초의 계획은 구약과 신약 아래서 이처럼 불완전하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두 왕국은 이제 재림 때에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최초의 계획은 사탄의 방해로 지난 6,000년 동안 실패한 것처럼 보였으나, 유대인을 통해 천국이 준비되었고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준비된 이 시점에서, 이제 이 두 왕국이 만나는 세 번째 시점(첫 번째는 창조 때, 두 번째는 초림 때)인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 두 왕국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며 펼쳐질 것이다. 누가복음 등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온다"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러한 모습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성경은 말하기를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에 있다고 한다.(고전4:20) 이 말이 무슨 뜻일까 말에 있지 않고 능력(뒤나미스)에 있다니?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지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그것을 경험하고 소유할 때 아는 것이며 이렇게 소유할 수 있도록 실재하는 힘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뒤나미스)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막9:1)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 이 장소 사람에게 생명의 힘이 임하는 것과 하나님의 영원과 거룩함이 임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 하나님의 거룩함이 임해야 어두움이 들어 날것이다. 사람 속의 어두움, 환경 속의 어두움, 국가 속의 어두움, 그곳에는 사랑과 평화와 위로와 돌봄 따뜻함이 가득차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쫒아내는 것이면 하나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눅11:20)라고 하셨다. 거룩한 힘에 의해 우리 마음을 잡고 있는 악한 힘들이 떠나는것 이것은 실재하는 사건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성을 차지하고 먹고, 마시고, 폭력을 일삼고,약탈, 방화, 강간을 일삼는 무리를 빛의 군사들이 쳐들어와 이들을 몰아내고 성의 평화를 찾아 주는 것, 이것이 하나님 나라를 말하는 것이다. 마음은 성이며 이미 어둠의 군사들에게 점령 당한 상태이다. 우리는 선하고 싶어도, 바르게 살고 싶어도, 평화를 말하고, 진리를 따라가고 싶어도, 우리 속의 악한 힘이 죽음과, 죄악과, 고통과, 공포,분노, 어두움으로 나를 사로잡고 있는 한 인간들의 외침은 공허할 뿐이다. 평화와 진실을 사랑한다는 말은 허구요, 공허한 메아리다. 이세상은 그런 허구 속에 여전히 고통, 기아, 전쟁, 욕심만 잉태하고 있을 뿐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길이시다 우리를 구원하시며 하나님 나라를 우리에게 주신다. 그분을 믿고 그분이 주시는 성령님을 받을 때 우리 속이 하나님 나라로 변해 가는 것이다. 기다리라. 아버지의 약속을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리라.(행1:4-5) 이는 실존하는 사건을 가르킨다. 성령은 권능으로 내게 임하며 나를 하나님의 나라로 바꾸신다. 예수님은 살아 계셔 성령님을 통해 우리 속에 거하신다.(고후1:22) 성령님은 오셔서 나를 집으로 삼으시고 나를 지어가신다.(벧전2:5) 거기에 하나님 나라를 사모함과 순종함만 있다면 주님이 나를 다시 빚으시며 영원한 나라로 나를 이끌 것이다.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약속을 사모하자! 이는 생명과 거룩함과 기쁨이 가득찬 길이다. "내게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성령이시여 권능으로 오소서! 나의 마음의 어두움을 몰아내시고 나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확산되게 하소서! 이 땅에 주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은 마태복음에 4회(12:28; 19:24; 21:31; 21:43), 마가복음에 14회, 누가복음에 32회, 요한복음에 2회(3:3, 5), 사도행전에 6회, 바울서신에 8회, 요한계시록에 1회(12:10) 나온다. '하늘나라'란 표현은 마태복음에 33회, 요한복음 3:5의 이문(異文 : 다른 사본의 표현)에 1회, 히브리인의 복음이라는 위경 11장에 1회 나온다. '나라'라는 표현은 9회(예, 마 25:34; 눅 12:32; 22:29; 고전 15:24; 계 1:9) 나오고, '당신의 나라'라는 표현(마 6:10; 눅 11:2에 대한 표준역 난외 주 참조)과, '그의 나라'(마 6:33; 눅 12:31; 살전 2:12). '그들의(나의) 아버지의 나라'(마 13:43; 26:29), '그 나라의 복음'(마 4:23; 9:35; 24:14), '그 나라의 아들들'(마8:12; 13:38), '그 나라의 말씀'(마 13:19),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막 11:10)라는 표현들도 나온다. '나라'라는 말이 구속 받은 자들에 대해서 두 번 사용되었다. (계1:6; 5:9) '하나님의 나라'와 '하늘나라'는 동일한 개념을 용어상 달리 표현하는 것뿐이다. 유대인의 관용어에서는 신적인 것이 다른 적당한 용어로 대치해서 표현되곤 하였다<눅15:21; 마 21:25; 막 14:61; 마카베오 1서 3:50; 피르케 아보트(조상들의 금언 - '지혜'에 관한 유대인의 경구집 = 역자 주) 1:3>. 마태복음에는 셈어적인 이 관용어가 그대로 표현되지만, 다른 복음서들에는 이것이 헬라어적인 관용어로써 표현되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또한 그리스도의 나라이다. 예수님께서는 인자의 나라(마 13:41; 16:28)와 내 나라(눅 22:30; 요 18:36)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그의 나라(눅 1:33; 딤후 4:1), 당신의 나라(마 20:31; 눅 23:42; 히 1:8), 그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골 1:13), 그의 하늘나라(딤후 4:18), 우리 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벧후 1:11)를 보라. 하나님께서는 그 나라를 그리스도께 주셨는데(눅 22:29), 하나님의 아들은 그의 통치를 완성하실 때 그 나라를 하나님 아버지께 다시 돌려드릴 것이다(고전 15:24). 따라서 그 나라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엡 5:5)이다. 이 세상 나라는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계 11:15)가 될 것이다. '우리 하나님의 능력과 나라, 그리고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계 12:10) 사이에는 아무런 충돌이 없다. '하나님의 나라'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통치'즉 하나님께서 왕으로 다스리시는 그의 통치권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러한 추상적 의미(통치권)는 복음서들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누가복음 1:33에서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는 그의 통치권과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에수님께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요 18:36)라고 하신 말씀은 그의 '통치 영역'을 가리키는 말씀이 아니다. 그가 하신 말씀의 뜻은 그의 '통치권'이 세상 통치자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며, 그의 왕직은 세상 나라와 같이 실현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도를 따라 실현되는 것이라는 뜻이다. 사람들이 어린 아이들처럼 단순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이 나라(막 10:15; 마 19:14; 눅 18:17), 또한 사람들이 일차적으로 추구해야 할 이 나라(마 6:33; 눅 12:31), 그리스도께서 그의 모든 제자들에게 주시리라는 이 나라(눅 22:29)는 모두 하나님의 통치권을 가리킨다. '천국' '하나님의 나라' '하늘나라'는 어떻게 다른가 --------------------------------------------------------------------------------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세 가지 종류의 왕국(나라)이 등장한다. 그것은 천국(kingdom of heaven)과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와 하늘나라(heavenly kingdom)이다. 이 세 왕국은 서로 비슷해 보이고, 또 사람들에 따라서 같은 나라라고 인식되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공통점이 없다. 1. 천국(The Kingdom of Heaven)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천국"은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용어이다. "너희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태복음 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태복음 4:17). 이 천국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죽어서 가는, 주님이 계신 낙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단지 관념적으로 "천국"을 피상적인 나라로 생각하지만, 마태복음에서 제시하고 있는 천국은 구약전체를 통하여 예언된, 왕이 직접 다스리는 실제적인 지상의 왕국이다. 천국이 실제적인 지상의 왕국이라는 것은 성경에서 "천국"이라고 제시된 나라가 의미하는 바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예들들어 마태복음 5장에서 묘사되는 천국과, 10장에서 언급되는 천국복음의 묘사 등을 살펴보면, 도저히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난 이방인들이 죽은 다음에 가는 나라로 생각되기가 힘들다. 특히 사복음서나 산상설교 등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내용들과 시대 상황, 그리고 유대인들이 기대하고 있던 메사야 왕국의 생각 등을 살펴보면, 이곳이 땅에 속한 왕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왕국으 성경 전체의 주제가 되는 나라이다. 일반적으로 많은 신학자들은 성경 전체의 주제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라고 생각하지만, 성경 전체의 흐름은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그분의 통치에 더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구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다루는 부분은 주로 "예표"로서 등장하지만, 그분의 통치와 왕국을 다루는 부분은 직접적인 서술로 분명히 드러나 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통해 어떻게 이 땅을 다스리기 원하셨는지, 노아를 통해 어떻게 다스리기 원하셨는지, 아브라함을 통해서, 모세를 통해서, 다윗을 통해서 어떻게 이스라엘을 "신정국가로 삼아" 통치하기 원하셨는지, 그리고 메시야를 통해 어떻게 이 지구를 다스리기 원하시는지가 신구약 전체를 통해서 분명히 드러나 있다. 그래서 성경 전체의 주제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신정통치의 "왕국"이다.. 이것이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묘사하고 있는 마태복음에서 "천국"이라는 특별한 용어로 나타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나라는 영적인 나라가 아니라 실제적인 나라이며, 눈에 볼 수 있게 이 땅에 세워질 정치적인 나라이다. 이 왕국은 먼저 유대인에게 주어졌는데, 그것은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통하여 신정통치의 왕국을 계획하셨기 때문이다. 이 왕국(천국)을 완성하시는 분은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래서 그들이 이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은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왕"으로 맞아들이는 것이다. 2.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 천국이 눈에 보이며, 정치적이고, 물질적인 이 땅에 속한 왕국으로, 실제적인 왕이 다스리는 나라라면, "하나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지 않고, 이 땅에 속하지 않은 왕국으로, 하나님께서 왕이 되어 다스리나 실제적인 몸을 입고 다스리시지는 않는다. 이 나라에 대한 정의는 로마서 14:17에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다만 성령 안에서 의와 화평과 희락이라."고 명시되어 있는 것처럼 영적인 나라다. 그런데 이 영적인 왕국은 유대인에게만 주어진 나라가 아니라,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나라이다. 그리고 이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은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3:3,5에서 말씀하신대로 거듭나는(born again)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 세상에 살고 있으나 이 세상 나라에 속하지 않고 또 하나의 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에 속할 수 있다. 거듭나기만 하면 된다. 이 나라는 영적 왕국이고, 영이신 하나님께서(요 4:24) 이 왕국의 왕이시다. 그러므로 사람은 영으로 다시 태어나야만 이 나라에 속할 수 있다. 하지만 "천국"은 영적으로 들어가는 나라가 아니라 몸을 입고 실제적으로 들어가는 왕국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거듭나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라고 말씀하셨지 "거듭나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라고는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는 다르다. 이 두 왕국에 대한 설명은 서로 같은 부분도 있지만 이 나라 자체는 서로 다르다. 두 왕국의 묘사가 비슷하다고 해서, 또 같은 상황 속에서 언급되는 곳이 있다고 해서 이 둘이 서로 같은 것은 아니다. 천국(the kingdom of heaven)과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가 같지 않은 것은 하늘(heaven)과 하나님(God)이 같지 않은 것과 같다. 하늘은 우리의 육안으로 볼 수 있지만 하나님은 볼 수 없다. 하늘에는 새들이 날아다니고 구름이 있으며 해와 달과 별들이 있지만, 하나님께는 그런 것이 없다. 하늘은 하나님의 피조물이지만 하나님은 하늘의 피조물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에서는 "천국"을, 다른 복음서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을지라도 이 둘은 서로 다른 것이다. 오히려 이 두 왕국의 전파가 서로 다르게 기술되어 있는 것을 보고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두 개의 왕국, 즉 실제적인 왕국과 영적인 왕국을 함께 전하셨다는 점이다. 3. 하늘 나라(Heavenly Kingdom) 이 나라도 하나님의 나라와 마찬가지로 거듭나야 들어갈 수 있는 나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와 다른 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 영적으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가는 나라이지만, 하늘 나라는 성도가 죽어서 가는, 셋째 하늘에 있는 나라이다. 이 나라에서 하나님께서는 천상의 보좌에 앉아 계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 오른 편에 앉아 계신다. 이 나라는 바울 사도에 의해 "낙원"이라고 불리며(고후 12;4)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 믿고 천국 가십시오"라고 말하는 그 나라이다. 그러나 이 나라는 결코 "천국"이 아니다. 이 나라가 천국과 비슷한 점은 둘 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것 외에는 없다. 이 나라는 셋째 하늘에 있는 나라이고, 천국은 이 땅에 세워질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에는 이 나라를 디모데후서 4:18에서 분명히 "하늘나라"(heavenly kingdom)라고 못박고 있다. 우리에게 너무나 "천국"이라는 용어가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하늘나라에 대하여 말할 때에도 천국이라고 말하며, 심지어 구령할 때에도 "예수 믿고 천국가십시오"라고 말하기는 하지만, 신학적으로 이 말은 틀린 말이다. 우리는 "예수 믿고 하늘나라 가십시오"라고 말해야 한다. [오히려 "천당 간다"라고 말하는 것은 맞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4:2에서 우리를 위해 처소(저택들)를 마련하러 가신다고 했기 때문이다. "천당"(天堂)이라는 말은 성경 용어는 아니지만 "하늘에 있는 집"을 말하므로 요한복음 14장에 따라서 옳은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예수 믿으면 거듭나서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게 됩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옳으나 "예수 믿는 사람은 죽어서 하나님의 나라에 갑니다."라고 말하면 틀리다. 물론 하나님의 나라를 포괄적으로 말해서 그렇게 이야기할지라도, 우리는 신학적으로 정확한 표현을 써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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