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나라
G.E.Ladd
현대의 학자들은 거의 만장일치로 하나님 나라가 예수의 중심적인 메시지였다는 의견에 동의합니다. 공관복음서는 각각 다음과 같이 하나님 나라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마가복음의 경우 예수의 사역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로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마가복음 1:14~15)
마태복음은 예수의 사역을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마태복음 4:23)
누가복음은 처음에 예수를 소개하는 장면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대신에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고, 그 예언에 대한 예수의 단호한 선언을 제시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누가복음 4:21)
하나님 나라에 대한 해석들
하나님 나라에 대한 해석은 세부적인 내용까지 따지면 무한할 정도로 다양합니다. 어거스틴에서 종교개혁자들에 이르기까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장 우세한 견해는 그 나라가 어떤 경우에든 교회와 일치된다는 것입니다.(교회가 하나님 나라라는 의견) 그러나 이런 견해는 이제 카톨릭 학자들조차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지, 하나님 나라 그 자체가 될 수는 없습니다.
자유주의의 대표적인 해석은 하르낙의 ‘What is Christianity’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를 예수가 가르친 순수하게 예언적인 종교로 이해했습니다. 이 종교는 하나님의 아버지되심, 인류의 형제됨, 개인 영혼의 무한한 가치, 사랑의 윤리로 이루어집니다. 예수의 가르침에 분명하게 들어가 있는 묵시적인 요소에 대해서는 이러한 가르침을 담는 그릇 역할을 위해서 당시의 상황에 맞추어 선택된 껍데기 불과한 것으로 치부했습니다. 이렇게 묵시적이 요소를 배제하고 하나님 나라에 대해 비종말론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대세가 되었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일차적으로 개인의 종교적인 경험으로 이해하려 했습니다. 그들의 의견에 따르면 하나님 나라는 개인의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지배입니다.
1892년, Johannes Weiss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설교”라는 책을 출판했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관점에 대해서, ‘미래’와 ‘종말’에 대한 면을 가지기 때문에, 유대 묵시론의 하나님 나라 관점과 같다고 주장했습니다. 예수는 사탄에 대한 하나님 나라의 승리는 이미 하늘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지상에 하나님 나라가 온다고 선포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행위가 될 것이며, 하나님 나라가 올 때, 예수는 천상의 인자가 될 것입니다.
Albert Schweitzer는 이런 생각을 수용해서, 예수의 생애 전체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종말론적 이해의 관점에서 해석하였습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운 미래에 올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이러한 해석을 Consistent Eschatology라고 불렀습니다.) 예수의 윤리적 가르침도, 계속 진행될 역사 속에서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을 위한 것이 아니라, 종말이 오기 전의 짧은 기간만을 위해 고안된 것일 뿐입니다.(중간기 윤리) 그러나 이런 기대에 어긋나게도 하나님 나라는 오지 않았고, 예수는 절망과 망상 속에 죽었습니다. Schweitzer와 같은 사람은 예수를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로써 볼 때, 1세기의 미혹된 묵시론자로 보았습니다.
Weiss와 Schweizer 이후 대부분의 학자들이 묵시적인 요소가 예수의 가르침에서 껍데기가 아닌 핵심이라는 것을 인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오직 묵시적인 것으로만 보는 사람도 거의 없습니다. Rudolf Bultmann 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임박한 도래를 예수의 메시지에 대한 올바른 역사적 해석이라고 받아들였지만, 그 진정한 의미는 실존적인 관점(하나님의 근접성과 요구)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영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해석은 C.H.Dodd의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입니다. Dodd는 종말론적 언어를 껍데기라고 여기지 않고, 인간의 마음이 바로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실재를 나타내는 일련의 상징으로 이해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묵시적인 언어로 묘사되는데, 실제로는 시공간을 초월한 차원이며, 예수의 사역 속에서 역사 안으로 침투해 들어왔습니다. 예수 안에서 전적인 타자(wholly other)가 역사로 들어온 것입니다. 이 Dodd의 사고에서 초월적인 “전적 타자”는 성경적이기보다는 플라톤적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선지자들이 소망했던 모든 것이 역사 속에 실현되었습니다. Dodd가 “실현된” 종말론이라고 불렀던 이유가 이것입니다. Dodd는 하나님 나라의 미래적인 면(미래에 완성될 것이라는)을 최소화시켰다고 비판을 받아왔습니다. 그의 최근의 저서에서 그는 하나님 나라가 아직 역사를 넘어서 완성을 기다리고 있다고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이 예수의 가르침에서 가장 특징적인 요소가 ‘하나님 나라의 현존’이라는 그의 관점을 따르고 있습니다.
학자들이 하나의 일치된 견해에 접근했다면, 그것은 하나님 나라가 실재적인 의미에서 현재이기도 하고 미래이기도 하다는 점입니다. W.G.Kummel 은 하나님 나라의 일차적인 의미가 ‘종말’이라고 이해했습니다. ‘종말’은 유대의 묵시문학에서 ‘새로운 시대’와 동의어였습니다. 예수는 새로운 시대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렇지만 Kummel은 그 나라가 오직 예수의 인격 안에(제자들 안에서는 아니고) 현존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미래에 나타날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가 이미 예수의 사역의 활동 속에서 시작되었습니다. Kummel 의 관점에서 어떻게 미래의 종말과 예수의 현재 활동이 공존 할 수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른 학자들은 이 문제를 하나님 나라가 미래이면서도 그 힘을 이미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왔다는 의미로 설명하려 합니다. 마치 해가 돋기 전에 새벽이 오듯이 말입니다. 또는 하나님 나라의 표지가 현재에 있기는 하지만 그 자체는 아니라는 식으로 설명하려고도 합니다.
이런 논의에서 Jeremias의 위치는 독특합니다. 그는 Dodd가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인 침입을 강조하여 신약 해석의 역사에 전환점을 열었다고 칭찬하면서도, 종말론적 면을 퇴색시켰다고 비판했습니다. Dodd의 ‘실현된 종말론’을 대신하여, Jeremias는 '실현되어 가는 종말론'을 제안했습니다. 그는 예수의 모든 사역을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어가는 사건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는 세례 요한에 대해 성령이 그에게 임했고, 그로부터 구원의 시간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세례 요한도 성취의 시대 속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메시지와 귀신 축출의 기적과 함께 하나님 나라는 역사 속으로 침입해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 자신의 부활과 재림을 아우르는 하나님 나라의 즉각적인 완성을 기대했습니다. Jeremias는 예수의 부활과 재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하나님의 승리가 실현되는 단일한 사건으로 보았다는 Dodd의 생각을 따랐습니다. 예수의 부활 현현에서 제자들은 예수의 재림을 경험했습니다. 그들은 초대 교회가 재림과 부활을 분리한 것은 부활절이 지나고 나서였다고 봅니다. 이런 점에서 Jeremias의 관점과 그가 비판하는 Dodd의 관점에서 실재적인 차이는 없습니다.
미국과 영국의 복음주의 진영에서는 보다 새로운 관점이 나타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섭리주의자(Dispensationalist)들은 모든 구약의 예언이 문자적으로 성취되어야 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하여, 하나님 나라와 천국을 구별했습니다. 천국은 지상에 대한 하늘(하나님)의 지배인데, 일차적으로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지상의 신정 국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만이 우리에게 이 나라에 대한 유대적 관점을 보여줍니다. 예수가 천국이 가까왔다고 선포할 때, 천국은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지상의 신정 국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나라를 거절했고, 예수는 이스라엘을 위한 나라를 세우는 대신, 새로운 메시지를 전했고, 그를 믿는 보는 사람에게 안식과 섬김을 베풀고, 모든 인종을 아우르는 새로운 믿음의 가족을 만들었습니다. 마태복음 13장의 천국의 비밀은 크리스챤 신앙고백자들의 영역입니다. 이것은 예수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지상에 대한 하나님의 지배가 가지는 형태를 설명합니다. 누룩은 언제나 악을 나타냅니다. 천국(고백 교회) 안에 진실한 교리는 잘못된 교리에 의해 더럽혀질 것입니다. 그리고, 산상 설교는 천국의 법입니다. 구약의 신정 국가가 가졌던 법이 모세 율법이라면, 산상설교는 그리스도가 지상 왕국을 지배하는 규범이 되도록 해석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거절한 천국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실현될 것인데, 그 때 이스라엘 나라는 회개하게 되고, 구약의 다윗 왕국이 회복되리라는 약속이 문자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신학의 기본적인 교의는 두 그룹의 하나님의 백성(이스라엘과 교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둘은 두 신적 프로그램 아래에서 두 가지 운명을 가집니다.
1963~64년에 하나님 나라를 구속 역사의 전개라는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공통점을 가진 세 가지 책들이 출판되었습니다. 이들의 관점은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의 왕적인 통치라는 것입니다. 이 통치는 두 가지 중요한 순간을 포함합니다. 하나는 역사적인 예수의 사역 속에서 구약의 약속들이 성취되는 순간으로 올 시대의 시작을 알립니다. 또 하나는 그 시대의 마지막에 있을 완성의 시점입니다.
유대교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의미
“하나님 나라”라는 단어가 구약에 나타나지는 않지만, 그에 대한 개념은 예언서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구약에는 ‘하나님의 왕되심’에 대해서 이중적인 강조가 있습니다. 그는 종종 ‘이스라엘의 왕’으로도, ‘모든 세상의 왕’으로도 이야기됩니다. 하나님은 ‘지금’ 왕이시지만, ‘미래에’ 그가 왕이 되어 그의 백성들을 지배하는 날에 대해서도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왕이시지만 또한 왕이 되셔야 한다는 결론을 이끌어냅니다. 그는 그의 왕되심을 인류와 나라들 가운데 나타내셔야 합니다.
미래의 하나님 나라의 형성에 대해서는 예언자들마다 다르게 표현합니다. 구약과 유대교 안에서 두 종류의 두드러진 소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진정 히브리적인 예언의 소망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역사 속에 출현하여 지상에서 다윗의 후손이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후 이런 소망이 사라지면서, 유대인들은 역사 속에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잃어버렸습니다. 이를 대신해서 그들은 역사를 넘어서 완전히 초월적인 나라를 가지고 오는, 천상적인 인자의 인격 속에 있는 하나님의 묵시적인 침입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다니엘 7장)
학자들은 구약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묘사를 보면 상당한 다양성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도 하나님 나라는 언제나 하나님의 구원 목적이 완전히 실현될 때에 역사 속에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고 합니다. 땅이 악의 저주로부터 구속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나라는 언제나 지상의 소망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소망은 언제나 윤리적인 면을 가집니다. 그것은 단순한 사색의 산물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지금 여기에서 역사 안에서 직면했을지도 모르는 일들이, 미래의 빛을 현재에 비추게 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가까운 미래와 먼 미래의 융합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곧(가까운 미래에) 이스라엘을 구원하거나 심판하시기 위해 일을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종말론적 소망을 성취하시기 위해 정해지지 않은 미래에도 또한 행동하실 것입니다. 예언자들은 이 까가운 미래와 먼 미래를 날카롭게 구분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 모두 그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묵시론적 유대교는 다양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나라의 지상적이고 역사적인 측면을 강조했습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좀더 초월적인 측면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종말론적인 성격을 언제나 동일하게 강조됩니다. 그런데 유대의 묵시문학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행동하신다는 믿음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묵시주의는 비관적이 되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그의 나라를 세우시는 하나님의 마지막 결정적 행동에 관련해서가 아니라, 지금 현재의 역사 속에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행위와 관련해서입니다. 현재 역사에 대해서, 역사가 악한 권세에 넘겨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유대의 문시론자들은 역사에 대해 절망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앞으로 올 시대에 그의 나라를 세우려고 행동하시기 전까지는, 이 세대에서 고통과 핍박 만을 견딜 수밖에 없습니다.
쿰란 공동체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묵시론자들과 비슷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종말론적 완성의 날에, 그들은 천사가 내려와 빛의 아들인 자신들과 어둠의 아들인 그들의 적과의 싸움에 함께 할 것이며, 쿰란 공동체에게 다른 모든 사람들(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에 대한 승리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랍비 문학도 유사한 종말론을 발전시켰는데, 그들은 ‘천상의 나라’라는 용어를 좀 더 사용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그의 지배가 행해지는 것)를 말합니다. 인류 역사의 과정에서 하나님은 그의 율법을 통해 그의 주권을 시행하셨습니다. 따라서 율법에 순종하는 이들은 자신을 하나님의 지배에 내어 놓은 것입니다. 유대교로 개종하여 율법을 받아들인 이방인들도 그들을 하나님의 지배에 맡긴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에 대한 순종은 하나님 나라 혹은 하나님의 지배를 경험하는 것과 동등한 의미였습니다. 그래서 지구 상에 하나님 나라는 이스라엘에게 국한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그 나라는 사람에게 다가오는 어떤 것이 아니라, 율법 속에 구체화되었으며 그것에 복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의 마지막에 하나님은 모든 세계에 대한 그의 지배권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고대의 기도문에는 이런 소망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생애 동안에, 당신의 날들에, 모든 이스라엘 집의 생애에, 그의 지배를 세우시기를, 속히, 가까이 왔을 때에” 라고 표현됩니다. 모세의 격언에는 “그리고 그의 나라가 모든 그의 피조물에게 나타나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의 지배는 율법에 복종하는 이들에게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이 시대의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의지에 저항하는 모든 것들을 굴복시킬 것입니다. 현재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하는 것은 사람들의 자유로운 결정(율법에 순종/불복종)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의 마지막에는 악한 사람을 심판하고 의로운 이스라엘만을 모아 구속된 축복의 질서로 인도하기 위해 ‘천상의 한 사람이 그의 왕적인 보좌로부터 일어날 것이다.’
유대교 안의 또 다른 움직임은 하나님 나라를 설립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열심당이 그들입니다. 1세기 초기에 열심당에 의해 촉발된 로마에 대한 폭동이 계속해서 일어났습니다. 신약에도 유다와 데오두스 아래에서의 폭동에 대해(사도행전 5:36,37), 이름모를 이집트인 아래에서의 또 다른 봉기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행전 21:38) 요세푸스는 신약에 언급되지 않은 다른 폭동들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혁명들에 이름을 붙이지는 않았는데, 132년 Bar Kokhba에 의한 마지막 폭동에 대한 기록을 보면, 그가 Akiba라는 사람에 의해 메시아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열심당은 유대의 급진주의자들로 하나님께서 그의 나라를 가져오기를 조용히 기다리기 보다는, 무력을 사용해 그 나라의 도래를 앞당기려 했습니다. 전체적으로 로마에 대한 반란이 정치적이나 민족주의적인 목표로 시작되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앞당기기 위해 종교적으로 일어났다는 점에서 로마에 대한 반란들이 메시야적이라 말할 수도 있습니다.
앞에서 논의한 모든 유대주의의 관점에서,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하나님께서 가져오시는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아마도 인간을 통해서 이루실) 그것은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만의 지배를 받는, 이스라엘의 악한 대적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불러 모으는 대적에 대한 승리를 가리켰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의미
학자들은 basileia의 기본적인 의미에 대해 일치를 보이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basileia가 "eschaton" (마지막 종말론적인 질서)이라는 관점을 지지합니다. 만약 esachaton에 대해 basileia의 관점에서 이해하려 하면, 어떻게 eschaton 이 현재이면서 미래가 될 수 있는지 설명하기가 어려워집니다. basileia는 배타적으로 미래일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히브리 단어는 추상적이고 역동적인, 지배 혹은 다스림 등의 개념을 가집니다.
저희가 주의 나라의 영광을 말하며 주의 능을 일러서 (시편 145:11) 주는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니 주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이다. (시편 145:13)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부터 만유를 통치하시도다 (시편 104:19)
유대교에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지배, 군림을 말합니다. 이 역시 복음을 이해하기 위한 최선의 출발점이 됩니다. RSV는 몇 번에 걸쳐 basileia에 영어 단어인 “kingship", "kingly power"라는 뜻을 부여했습니다. ”reign", "rule" 이라는 의미는 다른 본문들에서 명백히 나옵니다. 주기도문에서 우리가 기도하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즉 그의 지배가 완벽하게 실현된다는 뜻입니다.(마태 6:10) 예수가 그의 제자들에게 규정한 “kingdom”은 왕적인 지배입니다.
'어떻게 하나님 나라가 미래이면서 현재일 수 있는지'라는 주요한 문제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예수의 메시지를 해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약 왕국이 일차적으로 eschaton(구원의 종말론적인 시기)이라면, 미래의 영역이 현재도 된다는 것을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구약에서, 그리고 랍비 유대교에서, 하나님 나라(그의 지배)가 하나의 의미 만을 가진 게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하나님은 지금도 왕이시지만, 왕이 되셔야만 합니다. 이것이 복음서의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입니다.
천국 the Kingdom of Heaven(s)
‘천국’이라는 용어는 마태복음에서만 나타나며, 32번 사용되었습니다. 마태복음의 나머지에서, 그리고 신약의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 나라’라는 용어가 사용됩니다. 천국은 셈 언어에서 숙어입니다. 여기에서 하늘은 신적인 이름을 대신해 부르는 말입니다.(누가 15:18) 복음서 전승을 보면,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다고는 하지 않습니다. ‘천국’이란 단어는 유대-기독교 환경에서 고유한 의미를 가진 단어였을 것입니다. 이 단어는 예수가 실제로 사용했다기 보다는, 마태 공동체에 전해내려온 복음 전승을 가직하고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는 두 가지 숙어(천국, 하나님 나라)를 모두 사용했을 것입니다. 이방인 청중들을 위해 쓰여진 복음서에서는 이방인이 알아들을 수 없기에 셈어 숙어(천국과 같은)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천국’이란 말은 예수의 생애 이전에는 유대 문학에서 좀처럼 쓰이지 않았습니다. Jeremias 는 이 사실을 강조하기를, 예수의 가르침에서 basileia(왕국)에 대한 많은 새로운 구절들이 나타났는데, 이들은 예수 당시의 세상의 문학에서는 병행구를 찾기 힘들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 충분한 관심이 기울여지지 못했습니다.
종말론적인 왕국
우리는 앞 장에서 예수님이 가진 사고의 기본적인 구조가 두 시대에 관한 종말론적 이원론이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종말론적 이원론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오는 것'(마태 6:10) 혹은 '그 나라가 나타나는 것'(누가 19:11)으로 이 세대에 끝을 가져오고 올 시대가 시작됩니다. basileia는 하나님의 왕적인 통치가 실현되는 것이기도 하고, basileia의 도래와 함께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종말론적’ 왕국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영생을 얻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올 시대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일례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영생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다니엘 12:2에 나와 있는 종말론적 생명을 염두에 두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힘들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의 제자들이 집과 가족을 떠나 예수님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내세’의 ‘영생’을 받았다고 확실히 말씀하셨습니다.(마가 10:17~31)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와 올 시대, 영생은 서로 연관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귀신과 그의 천사들의 마지막, 완전한 파괴’(마태 25:41), ‘악과 혼합되지 않은 구속된 사회의 형성’(마태 13:36~43), ‘메시야 축제에서 하나님과의 완전해진 교제’(누가 13:28~39)를 의미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는 내세와 동의어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중 유대교의 가르침과 가장 차이있는 점은 하나님 나라 개념을 보편화시켰다는 것입니다. 구약과 유대교에서는 그 나라는 언제나 이스라엘을 위한 것입니다. 구약에서 이방인들은 주로 이스라엘의 의해 정복되어야 대상으로 생각되었습니다.(아모스 9:12, 이사야 45:14~16, 60:12,13). 종종 이방인의 변화된 모습을 묘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나라는 언제나 이스라엘의 것입니다. 후기 유대교는 더욱 특수화되어서, 하나님 나라가 세워진다는 의미는 이스라엘이 정치적, 국가적인 대적들을 지배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너희 이스라엘이여, 기뻐하라, 독수리의 목과 날개에 오르라 높은 곳에서 살피며 겐나의 적들을 보라, 그들을 보고 기뻐하라 (Ass. Mos. 10:8~10)
세례 요한은 유대교의 특수주의를 거부하였고, 유대인 신자들도 회개하여 오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야 한다고 선포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인격과 메시지를 받아들어야만 종말론적 왕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아가 예수님은 이스라엘(자연적으로는 그 나라의 자손들)이 그 나라로부터 거절되어, 그들의 자리가 다른 사람들로 채워질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마태 8:12) 진정한 ‘그 나라의 자손’은 예수님께 응답하고 그의 말을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마태 13:38) 사람은 종말론적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부모에게 완전히 의존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태도를 가지고 지금 선포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마태 10:15)
현재 세워진 왕국(왕국의 현재성)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기대는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새롭게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그전부터 존재해왔습니다. 이 기대는 선지자들에게도 나타나는데, 유대교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발전되었습니다. C.H.Dodd는 복음의 특징적이고 두드러진 면들이 하나님 나라가 ‘지금’ 왔다는 것을 말하는데 있다고 했는데, 그것은 옳은 지적입니다. 복음에 대한 현재적인 언급은 유대교의 가르침이나 그 시대의 기도문 중에서는 유사한 것들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독특한 요소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사역에 대해 구약의 약속이 역사 속에 성취되는 것으로 보았지만, 마지막으로서의 종말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구약의 약속의 성취라는 측면은 다음 두 개의 성경 본문에서 명백하게 나타납니다.
나사렛 회당에서 예수님은 이사야 61:1~2의 메시야적 예언을 읽었습니다. 이 예언은 기름부음받은 자가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엄숙하게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누가 4:21)고 말씀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에게 그가 진정 오실 자(the Coming one)인지 물었을 때, 예수님은 이사야 35:5~6에 있는 메시야 예언을 인용하여 대답하면서, 세례 요한에게 그 예언이 실제로 성취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11:2~6) 이렇게 공관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의 사역은 계속해서 구약의 약속의 성취로 이해되었습니다.
‘현재의 실재’로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하는 것은 이런 배경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하는데, 하나님 나라가 현재 함께 한다는 가장 강력한 진술은 마태복음 12:28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 중 가장 특징적인 것이 귀신 축출입니다. 예수님이 몇 마디 명령으로 귀신들린 사람들을 그 즉시 사탄의 구속에서 구원하셨을 때, 사람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마가 1:21~28) 예수님이 사탄의 힘을 힘입었다고 고소당했을 때, 그는 하나님의 권세로 귀신을 쫓아낸다고 대답했는데, 이것은 하나님 나라가 그들 위에 임했다는 증거였습니다.
마태복음 12:28의 그리스어 단어인 ephthasen, "has come"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 수많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 단어를 ‘실제적인 현재’가 아니라 ‘지시된 근접한 미래’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용법들은 그 동사가 단지 근접한 미래가 아니라 실제적인 현재를 의미한다는 것을 명백하게 밝혀줍니다.
현재의 것은 종말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가 현재 임했다는 것은 종말의 의미를 가질 수 없을까요? 하지만, 하나님의 왕적 권세는 사탄의 지배를 공격해 사람들을 악의 권세에서 해방시켰습니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마태복음 12:29)
이 말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사탄의 왕국을 침입했고, 그 강한 자를 결박했다고 선언했습니다.
이 두 구절에서 하나님 나라의 본질적 신학이 구체화되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왕적 권세를 드러내고 사탄의 악을 파괴할 이 시대의 마지막(미래의 종말)을 기다리는 대신,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그의 왕적인 권세를 가지고 사탄의 권세에 재갈을 물리기 위해 이미 행동하셨다고 선언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하나님 나라는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1) 사탄을 무너뜨리는 이 세대의 마지막에 2) 사탄을 결박하는 예수님의 사역 안에
사탄의 마지막 파멸 이전에 사람들은 그의 힘으로부터 구원받을 지도 모릅니다. “결박”(binding)은 은유적인 표현이지만, 실제적인 의미에서 사탄에 대한 승리를 가리키며, 그렇기 때문에 그의 권세는 억제된 것입니다. 때때로 그 말의 은유적인 성격이 무시되곤 하는데, 그 말은 분명 사탄이 완전히 힘을 잃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사탄은 계속해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사탄은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아 갑니다.(마태 13:19) 사탄은 베드로를 통해 말할 수 있었고,(마가 8:33) 가룟 유다에게 들어갔으며(누가 22:3) 베드로를 소유하려고 했습니다.(누가 22:31)
Cullman은 사탄의 결박에 대해서, 사탄이 결박당하기 했지만 긴 밧줄로 결박되어다는 흥미로운 표현으로 설명했습니다. 사탄은 힘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그의 권세가 깨어진 것입니다. Cullman은 또 군사적인 용어로 이것을 설명하려 했습니다. 마지막 승리를 얻기 전에, 전체 전쟁에서 볼 때 가장 결정적인 전쟁을 이미 이겼고, 전투의 흐름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사탄과의 가장 결정적인 싸움에서 승리했고, 이제 남은 잔당들을 소탕하는 일만 남았다는 의미입니다.) 가르침, 행위, 죽음, 부활에 걸친 예수님의 전체적인 사역은 사탄의 권세에 대한 최초의 승리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승리와 마지막 결과를 확실하게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악한 영을 몰아내는 모든 사건들은 사탄이 눈에 보이는 형태로 그의 힘을 빼앗기는 시대에 대한 기대를 보여준다. 그의 부하들에 대한 승리는 종말의 승리를 미리 맛보는 것이다.”
학자들은 언제 사탄의 결박이 일어났는지 논쟁해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이긴 특정한 사건을 언급합니다. 하지만 가장 간단한 설명은 귀신축출 그 자체가 귀신과 그의 나라 사이의 전투에서의 승리로 간주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서 귀신이 쫓겨날 때마다 그것은 사탄이 패배하고 그의 소유를 빼앗기는 것을 가리킵니다. 각 귀신축출 사건에서 예수님은 사탄의 패배를 보았습니다.
사탄에 대한 동일한 승리가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도록 갈릴리 지역으로 제자들을 보낼 때 그들에게 준 권세 안에서도 나타납니다.(누가 10:9) 그 전파자들이 돌아왔을 때, 그들은 기뻐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항복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말했습니다. “사단이 하늘에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누가 10:18) 예수님이 사탄이 하늘에서 버려지는 환상을 보았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문맥에서 예수님은 70인의 성공적인 전도 속에서 사탄의 패배의 증거를 본 것입니다. 여기에서 또 다시 우리는 은유적인 언어 사용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은유는 또 다른 말들을 사용하여 예수님의 사역에서 사탄에 대한 결적정인 승리를 얻었음을 확실히 보여줍니다. 사탄은 결박되었고, 그는 그의 권세의 자리에서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파멸은 이 세대의 마지막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여기에 신약 신학의 설명할 수 없는 신비가 있습니다. 이것은 공관복음 뿐 아니라 신약의 다른 곳에서도 발견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대적은 구약에서처럼 적대적인 이방 국가가 아니라, 영적인 악의 권세로 생각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승리는 영적인 세계에서의 승리로, 사탄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입니다. 바울은 이 같은 사실을 고린도전서 15:25에서 확실하게 말합니다.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노릇 하시리니
흥미로운 문제가 있습니다. 왜 신약은 이 승리를 완전히 영적인 세계에서의 전투로 묘사하지는 않을까요? 왜 악에 대한 승리는 역사의 장에서만 얻어질까요? 어떤 설명도 없지만, 대답은 인류의 운명이 이 투쟁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 안에 있습니다.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 어떤 방법으로, 예수님은 악의 힘과 싸우셨고, 그것을 이기셨고, 이 시대의 마지막에 이 권세들은 마지막으로 영원히 파괴될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교와는 다른 기독교 복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시대의 묵시론은 이 세대를 악의 권세 아래 있으며,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 뒤로 퇴장하셨다고 생각했습니다. Dream Visions of Enoch 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포로로 끌려간 후 그의 이스라엘에 대한 지배를 거둬들이셨다고 묘사합니다. 그는 자기 백성이 야생 짐승에게 찢기고 삼켜지도록 내어줬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으신다. 그는 그들이 먹히고 삼켜지고 강탈당하는 것을 보면서도 즐거워하셨고, 모든 짐승의 손에 그들이 삼켜지도록 내버려 두셨다.”(En 89:58) 심판의 날에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고 이스라엘을 괴롭힌 자들은 벌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고통에서 멀리 떨어져 계신채 움직이지 않으십니다.
반대로, 예수님의 메시지는 그 자신의 인격과 사역 속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 속으로 침입해 들어오셨고, 악에 대해 승리하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아직 마지막 구원은 이 시대의 마지막에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현존은 누가복음 17:20에서 주장됩니다. 바리새인들이 종말의 하나님 나라가 언제 임하는지 물었고, 예수님은 다소 수수께끼처럼 들리도록, 하나님 나라가 이미 그들 중에 왔지만, 그들이 기대하지 못한 방식으로 왔다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바리새인들이 기대하던 표적과 외적인 표지를 동반하지 않았고, 그들은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entos hymon’ 은 ‘너희 안에’ 혹은 ‘너희 가운데’라는 의미입니다. 마가 10:15은 하나님 나라가 사람의 마음에 받아들여진다고 하지만,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너희 안에 있다’고 말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의 인격 안에서 ‘너희 가운데’ 있다고 보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의 전체적인 문맥을 볼 때 가장 적절합니다.
새로운 종말론적 구조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구원 역사의 시간 선(time line)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습니다.
구약과 유대교는 미래의 단 하루(하나님께서 지상에 그의 통치권을 수립할 주의 날)를 기다렸습니다. 그것은 직선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Cullmann 은 그리스도가 시간선에 새로운 중심을 가져왔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시간선은 유대교와 같은 기본적인 구조를 유지합니다. 하지만 중심이 이동됩니다. Cullmann은 종말을 희생하여 역사의 중심점을 너무 강조했다는 비판을 받아왔는데, 이것은 정당한 비판입니다.
오래 전에 Geerhardus Vos 는 비슷하지만 더 나은 시간선을 제시했습니다. 올 시대를 이 시대보다 더 높은 차원으로 움직여가는 것으로 설명하고, 부활과 재림 사이의 시간이 두 시대의 중첩 기간이라고 묘사하는 장점이 있습니다. 교회는 ‘시대의 사이’를 살아갑니다. 옛 시대는 계속되지만 새 시대의 권세가 옛 시대 안으로 침입해 들어옵니다.
신약에는 이중의 이중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늘에서 이루어집니다. 그의 나라는 지상에 나타납니다.(하늘과 땅의 이중성) 올 시대에 하늘은 땅으로 내려오고, 역사적인 존재를 구속된 생명의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 올립니다.(계시록 21:2~3) 이것은 상세히 설명되지 않았지만 공관복음에 나타나 있습니다.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잡가는 일이 없으며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라 (누가복음 20:35~36)
여기에는 진정 상상할 수 없는 존재의 차원이 있습니다. 이처럼 성과 가족에 대한 물리적, 사회적인 관계없이 실존을 묘사하는 다른 예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악을 정복하고 그의 백성에게 올 시대의 영생의 축복받은 불멸성으로 이끄는 것 말입니다.
이 도표는 하나님 나라가 구약에서도 활동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출애굽, 바벨론 유수와 같은 사건 속에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구원하고 심판하는 그의 왕적 권세로 활동하셨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에서 역사 속으로 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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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의 필요성 세상 그리고 인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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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Ladd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기 시작합니다. 마가는 이에 대하여 이렇게 묘사합니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마가복음 1:14~15)
마태는 다음과 같이 예수님의 초기 사역을 요약합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마태복음 4:23)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나사렛에서 있었던 한 사건으로 공생애를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나사렛에서 성경의 한 예언을 찾아 읽으셨는데, 그 예언은 주의 성령이 임한 한 사람이 와서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할 것이라는 이사야의 예언이었습니다. 그 예언을 읽은 후에 예수님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누가복음 4:18~21)
이렇게 예수님의 사역은 하나님 나라, 구약의 예언의 완성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고려하지 않고는 예수님의 메시지와 기적들에 대해 이해할 수 없습니다.
[ 세상과 인류에 대한 예수님의 관점,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요구 ]
종말론적 이원론 Eschatological Dualism
구약의 선지자들은 주의 날(the Day of the Lord)을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주의 날에 하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죄와 악이 지배하는 세상을 깨끗케하시고, 지상에 완전한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시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구약에서 ‘현재의 질서’와 ‘(미래의) 하나님 나라에서의 구속된 질서’ 사이의 대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옛 질서와 새 질서 사이의 차이에 대해서 묘사하는 방식을 보면, 그 질서 사이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정도에 따라 다른 용어들로 묘사합니다. 예를 들어 아모스 9:13~15에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 무너진 성을 건축하고 땅을 경작하는 모습과 같은 구약적인 가치들로 소개합니다(연속성). 그러나 이사야 65:17에서 이사야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묘사되는 새로운 질서를 목격합니다(불연속성).
새로운 구속된 질서 : 이 개념은 후기 유대교 문헌에서 다른 용어들로 나타납니다. 때때로 하나님 나라는 아주 세속적인 용어들로 묘사되는데, 이럴 때에는 새로운 질서가 단순히 옛 질서가 완전해지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초월적인 언어로도 묘사되는데, 이를 위해서는 옛 질서의 근본적인 변혁이 와야합니다. 후기 묵시문학에서는 처음에는 일시적인 지상 왕국이었다가, 새롭게 변혁된 영원한 질서가 뒤따른다고 그리기도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역사적 발전 과정 가운데에서 새로운 용어가 등장합니다. 그것은 바로 ‘이 시대 this age’와 ‘올 시대 the Age to come'입니다. 이 말의 발전 과정을 정확하게 추적할 수는 없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최초의 증거는 에녹 1서 71:15에 있는데, 올 세상(world to come)이라고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히브리어 olam habba (coming age)를 표현한 같습니다. 이 용어가 유대 문헌에 충분히 나타난 것은 주후 1세기 경 에스라 4서와 바룩의 묵시록에 와서입니다.
‘두 시대’라는 숙어는 랍비 문학에서는 흔하게 사용되었습니다. 그 시작은 Pirke Aboth 로 주전 3세기 경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어디에서부터 사용되기 시작됐는지와 관계없이, 이 말이 표현하고 있는 의미는 구약에 있는 현 세계와 미래의 구속된 질서와의 대조에 닿아 있습니다. 그리고 이 용어는 예수님의 전체적인 메시지와 사역에 대한 틀을 제공합니다. 이에 대한 완전한 표현은 마태복음 12:32에 나옵니다.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며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이 곳에서는 마태의 용어(이 세상, 오는 세상)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의 영생의 길에 대해서 물어보는 청년에 대한 일화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의 상황인 ‘금세 this time'와 ’영생‘을 비교하시는데, ’영생‘은 ’내세 the age to come'에서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금세(this time)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the age to come)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마가복음 10:30)
금세(this time)는 이 세대(this age)와 동의어입니다.
쿨만(O. Cullman)은 종말론적 이원론(eschatological dualism)이 구속사(redemptive history)의 하부구조라는 관점을 정확하게 설명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영원“을 의미하는 단어는 신약에 없습니다. 우리는 영원에 대해서 그리스인들처럼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리스인들은 영원에 대해 시간을 넘어선 초월적인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의미에서 영원은 끊나지 않는 긴 시간일 뿐입니다. 헬레니즘 문화권에서 사람들에게 구원이란 이 세상의 시간의 순환으로부터 벗어나서 시간이 없는 저 너머의 세계로 올려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시간은 지금뿐 아니라 미래에도 인간 실존의 배경으로 남아 있습니다.
AV역에서 요한계시록 10:6은 "there should be time no longer"으로 번역되어 잘못된 인상을 줍니다. 하지만 RSV은 ”there should be no more delay"라고 바르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신약은 전체적으로 영원이라는 관념을 몇 가지 방식으로 표현합니다. ‘εις τον αιονα' 는 ’영원히‘라는 의미이며(마가복음 3:29), ‘εις τους αιονας', ‘εις τους αιονας τον αιονον' 은 세세토록, 세세에 무궁토록으로 번역되었습니다.(갈라디아서 1:5, 베드로전서 4:!1, 요한계시록 1:18)
올 세대(the Age to Come)와 하나님 나라(the Kingdom of God)는 때때로 서로 바꾸어 쓸 수도 있습니다. 마가복음 10:30에서 예수님은 부자 청년에 대해 이야기할 때, 영생이 올 세대의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올 세대는 언제나 불의와 관련되기보다는,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목적과 관련하여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그 세대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남겨진 축복입니다. 그것은 죽은 자의 부활로 시작될 것이며, 더 이상 죽음이 없는 세대입니다. 그 세대에 이른 사람은 죽지 않는다는 점에서 천사와 같습니다. 그리고 그 때에야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의 의미를 알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다. (누가복음 20:34~36)
그렇기 때문에 부활의 생명이 바로 영생 - 올 세대의 생명 - 이며, 하나님 나라의 생명입니다.
부활은 이 세대가 올 세대로 옮겨간다는 표지이며, 그리스도의 재림은 이 세대가 끝마쳤다는 표지입니다. (마태복음 24:3) 그 때 인자는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려서 그의 천사들을 보내 이 땅 사방에서 택하신 자들을 불러모으실 것입니다.(마태복음 24:30~31)
마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에서 이 시대의 마지막에 대해 세 번 언급합니다.(13:39,40,49) 가라지 비유에서는 이 세대의 상황을 하나님 나라가 함께 할 세대의 상황과 대조합니다. 이 세대에는 밀과 잡초(하나님 나라의 아들과 악한 자의 아들)가 함께 살면서 혼합된 사회를 이룹니다. 하지만 추수(심판) 때에는 의로운 사람으로부터 악인들이 분리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죄와 악한 일을 하는 자들의 원인이 하나님 나라로부터 제거되어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에 비해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입니다.(마태복음 12:42~43)
이 세대의 특징은 올 세대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항하여 서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드러납니다. 씨 뿌리는 자가 씨를 뿌리는데 이 씨는 ‘천국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많은 생명체에 뿌리를 내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세대의 걱정과 염려가 말씀을 막아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이 세대가 그 자체로 악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 세대의 세상의 염려와 걱정이 가장 중요한 관심의 초점이 되어버려,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메시지를 무시하게 되면 그들은 악하게 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님의 말씀보다 한 발 더 나아가 이 세대 자체를 악하다고 규정합니다. 그는 갈라디아서 1:4에서 ‘이 악한 세대’라고 말합니다. 이 세대의 지혜는 하나님에 이를 수 없습니다. 바울은 로마교인들에게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권고합니다. 바울의 이러한 관점은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두 세대 개념과 일치합니다.
이러한 종말론적 이원론은 유대교 안에 널리 알려졌던 것과 같은 세계관으로 예수님과 바울도 역시 공히 가지고 있던 관점입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역사에 대한 묵시론적 관점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묵시사상에 대해서 히브리인들의 예언적인 소망이 자연스럽게 발전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히브리인들은 역사 안에 나타날 지상의 왕국을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에서 하나님 나라가 올 것을 기다리는 예언적 소망에서도 역시 하나님께서 세상에 격변을 가져오도록 개입하시며, 옛 질서와 연속성을 가질 뿐 아니라 불연속성도 가지게 될 것을 예견했습니다. 게할더스 보스(G. Vos)는 유대교 안에서 발전된 종말론적 이원론이 하나님의 계시로 신약 시대의 저자들에게 통합되었다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종말론적 이원론은 구약의 예언적 소망이 자연스럽게 발전한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이 세대는 창조로부터 주의 날까지를 말하며, 주의 날은 복음서에서 그리스도의 재림과 부활, 심판으로 구체화되어 실현되었습니다. 이 세대는 인간이 연약함과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 속에 살아가는 시대이며, 악이 지배하는 시대입니다. 그에 비해 올 세대는 하나님의 통치의 모든 것이 실현되는 때이며,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삶으로 들어갈 부활의 세대입니다. 복음서의 모든 것이 올 세대의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은 지상에서의 삶이라는 생각을 드러냅니다. 물론 여전히 지상의 삶이지만, 하나님의 왕적인 통치에 의해 완전히 변화된 삶입니다. 그의 백성은 하나님의 완전한 축복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언했을 때, 그는 히브리·유대적인 사고를 배경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유대적 사고는 인간의 삶이 죄, 악, 죽음에 지배되며, 그로부터 구원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는 구약의 예언서에서 말하는 소망을 포함합니다. 그 소망이란 모든 이 세대의 악이 하나님의 개입으로 인간과 지상의 존재들로부터 씻겨 없어질 것이라는 기대였습니다.
영 - 세상
1. 사탄
세례를 받은 후, 예수는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가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습니다. 두번째 시험에서 사탄은 예수를 아주 높은 산으로 데려가 세상의 모든 나라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예수에게 말합니다.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누가복음 4:6)
공관복음서 전체에서 사탄은 귀신이라고 불리는 하급의 악한 영들의 우두머리로써 초자연적인 악한 영으로 묘사됩니다.
이런 관념은 구약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구약은 하나님에 대해 그를 섬기로 그의 명령을 수행하는 천상적인 영적인 군대에 둘러싸여 있다고 묘사합니다. 많은 학자들은 신명기 32:8에서 하나님께서 국가들의 경계를 영적인 존재들을 따라 정하셨다는 사고가 숨어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자가 열국의 기업을 주실 때 인종을 분정하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민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 → RSV에서 'sons of God'로 번역함
욥기 1~2장에서 사탄은 하나님 앞에서 욥을 고소하고, 욥을 시험할 허가를 얻어내는 “하나님의 아들” 중의 하나입니다. 역대상 21:1에서 사탄은 다윗이 죄를 짓게 합니다.
중간기 유대교에서 악한 영이라는 개념이 유행했습니다. 그런 영의 우두머리가 사탄이라고 불리는 일은 좀처럼 없었고, 대신 Mastema, Azazel, Semjaza, Beliar, Asmodaeus 와 같은 이름이 나타납니다. Belial은 쿰란 문서에서 가장 흔히 사용되었던 이름입니다. “귀신”이라는 말도 좀처롬 보기 어려운데, 악한 영의 우두머리에 복종하는 악한 영의 군대는 등장합니다. 에녹 서에는 이 악한 영들이 거인들의 영이라고 합니다. 이 거인들은 “watchers"라고 불리는 타락한 천사들이 여자들과 관계를 맺어 나온 자손들입니다. 이 악한 영들은 지상의 모든 악의 근원입니다. 이러한 천사들의 타락은 에녹 1서 6장에 묘사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18 지도자의 이름이 나오는데, 그들은 모두 Semiazaz의 지배 아래에 있습니다. 그들은 여자와 관계를 맺은 후에 타락했기 때문에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왔습니다. 이 천사들이 사람들에게 모든 행위를 가르쳤고, 전 지상은 이 타락한 천사들의 작업으로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Azazel에서 모든 죄가 돌려집니다. 때때로 에녹 서에서 이 악한 영은 사탄이라고 불리는데, 그는 구약에서처럼 사람들을 고소하고, 사람들을 죄로 유혹하는 존재입니다. 에녹 서에서 사탄은 단일한 우두머리로 두 번 언급됩니다.
복음서에서 사탄이 하는 주요한 일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반대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시험한 이야기에서 그는 세상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하는데, 예수는 그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습니다. 시험의 목적은 예수를 하나님이 부여한 신적인 임무(고난받는 종)로부터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며, 자신에게 굴복하게 하여 자신이 권력을 쟁취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와 똑같은 생각을 더욱더 생생하게 표현하였습니다. 그는 사탄은 “이 세대의 신”이라고 불렀습니다. 악의 왕국에 대한 신학은 유대교에서도 발견됩니다. 단의 유언서는 현재를 “적들의 왕국”이라고 묘사합니다. 훈육서는 이 세대를 Belial이 지배하는 시간이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12:29에도 그와 같은 사고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는 “강한 자의 집”(이 세대)를 습격해 그를 무너뜨리기 위해 칩입해 들어갑니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마태복음 12:29)
그렇다고 이 악한 왕국과 하나님의 나라가 동등하다는 식의 절대적 이원론은 유대교에도 신약에도 없습니다. 타락한 천사들은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의 힘 앞에서는 무기력할 뿐입니다. 신약에서는 모든 영적인 권세들도 하나님의 피조물일 뿐이며, 하나님께 복종해야 합니다. 묵시 문학에서는 이 악한 영들은 심판의 날에 마지막 운명을 맞이하게 됩니다.
사탄과 귀신들의 원칙들을 보면 몇 가지 두드러진 신학적인 함축점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악은 하나님께서 직접 사람들에게 주입하는 것도, 우연히 휩싸이는 것도, 얄궂은 운명도 아닙니다. 악은 개인에 그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악은 인간보다 더 큽니다. 하지만 인간이 악에게 굴복할 수 있더라도, 인간의 의지로 악에 대항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악은 애니미즘에서처럼 조직화되지 않은 혼란스러운 힘들의 충돌이 아닙니다. 악은 단일한 의지의 지도 아래에 있으며, 그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좌절시키는 것입니다. 게다가 하나님에게 적대적이 될 수 있는 영적인 존재가 창조된 이유를 찾을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
“묵시적인 계획에 대한 환상적인, 혹은 신화적인 치장들이 제거되었을 때에도 악의 문제에 대한 충분한 대답을 찾기 위한 모든 시도의 기초인 중심 전제는 제거되지 않았습니다. 악은 자유를 위해 지불되어야 할 대가라는 것입니다.“
공관 복음서에서 사탄의 활동을 여러 가지 면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3:16에서, 18년 동안 절름발이였던 여자에 대해 사탄에 매인 되었다고 합니다. 즉 육체적인 면으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사탄의 활동은 일차적으로 윤리적인 면으로 나타납니다. 가라지 비유는 이 세상의 혼합된 성격를 표현하고 있는데,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이지만,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입니다. 여기에서 사회는 두 개의 대립적인 부류로 나뉘어집니다. 천국 복음을 듣고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그것을 알지도 못하고 거절하는 사람들. 그런데 여기에서 사람들의 마음이 천국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 사탄의 목표입니다. 사탄은 예수를 유혹하여 그의 구속사역에서 벗어나게하려 하였고, 베드로를 통해 고난을 당하여 죽는 것은 메시야의 역할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게 하였습니다. 사탄은 가룟 유다에게 들어가 예수를 배반하여 제사장들에게 팔게 했습니다. 또한 베드로가 믿음에 대해 회의하도록 시험하여, 그가 가라지에 불과하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였습니다.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하지만 예수님의 기도로 이러한 사탄의 의도는 좌절되었습니다.
이런 점들이 사탄의 악에 대한 예수의 사역과 하나님 나라의 선포에 대한 우주적인 배경이 됩니다. 그런 악한 영적 실체가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는 과학이나 철학이 대답해 줄 수 없습니다. 선한 영(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면 인간 역사의 배후에 악한 영이 존재함을 믿는 것도 어려울 것은 없습니다. 중요한 점은 먼저 하나님 나라의 신학이 본질적으로 사탄의 왕국과의 갈등과 정복에 관한 신학이라는 것입니다.
먼저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공관복음도 신약의 다른 책들도 사탄이나 귀신에 대해서 사색적인 관심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부 유대교의 묵시론에서 이런 사탄에 대한 사색이 나타나는데, 사탄에 대한 이름이 여러 가지였다는 것만 보아도, 그 사색적인 면을 알아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관심은 실제적이며 구속적인 것입니다. 신약은 악의 초자연적 권세를 인식하고 있는데, 신약의 관심은 이러 악한 힘들로부터 사람들을 구원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구원 사역’입니다.
2. 귀신들
공관복음에서 사탄의 힘에 대한 가장 두드러진 증거는 귀신들이 사람들의 인격의 중심을 지배하는 능력에 있습니다. 명백하게 귀신들은 악한 초자연적인 영들로 표현됩니다. 가버나움 전도 사역에서 예수는 귀신의 힘들과 맞서게 되었는데, 귀신들은 본능적으로 즉시 예수를 알아보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마가복음 1:24)
유대교에서 사탄의 힘이 파괴되는 것은 그 시대의 끝에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그 때가 바로 하나님 나라가 오는 때입니다. 귀신들은 예수 안에서 사탄의 힘을 지금, 그 곳에서 무너뜨릴 수 있는 초월적인 힘을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귀신들림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나타납니다. 때때로 그것은 육체적인 기능이 손상되는 것(벙어리, 소경, 중풍)으로 나타납니다. 정신적인 문제와 관련된 예는 한 곳(거라사 광인)뿐입니다. 무덤 속에 살았던 거라사 광인은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마가복음은 그가 고침을 받은 후에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해졌다고 기록합니다.(마가복음 5:15)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던 게 확실한데, 이것을 단순하게 미쳤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가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은 외적인 힘(귀신의 힘)에 영향에, 그의 인격의 중심이 지배당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귀신들림에 대해서 현대의 정신의학은 고대인들이 정신질환을 고대의 세계관으로 잘못 해석한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현대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일 뿐입니다. 때때로 공관복음은 귀신들림을 다른 질환들과 구별합니다. 예수님이 고친 사람들은 “병자”와 “귀신들린 자”로 분류됩니다. 귀신들림은 간질이나 중풍, 연약함, 나병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귀신 축출은 예수님의 권세를 나타내는 사역 중에 가장 특징적인 것입니다. 물론 귀신을 내쫓는다고 주장하며 마술을 부리고 주문을 외우는 다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대 세계에서 귀신에 대한 믿음과 귀신축출은 대체로 조잡한 차원의 마술 수준이었습니다. 그에 비해서 예수님의 사역이 가진 놀라운 요소는 단순한 말의 권세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는 어찜이뇨 권세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마가복음 1:27)
예수님의 사역에서 귀신 축출이 가지는 역할은 현대의 성경해석가들에게 거침돌이 되어왔습니다. 성경 신학은 일차적으로 서술할 뿐이라는 원칙을 세운 이후로, 성경신학자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역사적인 환경 아래에서 설명하려고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다음과 같은 결론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예수님의 메시지는 영적인 악의 왕국에 대한 근본적인 투쟁과 정복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시대의 성경신학자들의 주장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예수님이 사탄과 귀신을 믿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당시의 세계관에 자연스럽게 적응한 것일 뿐이며, 사탄과 귀신에 대한 믿음이 예수님의 가르침의 내용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귀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예수님의 가르침에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목적은 윤리적인데, 그 시대의 개념들(사탄과 귀신과 같은)을 윤리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사용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목적은 초자연적인 존재의 실재나 행동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두 번째 해석도 이와 비슷합니다. 예수님이 어릴 때 귀신에 대한 잘못된 믿음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고대 사람들이 귀신들림이라고 불렸던 것은 단순한 정신적인 문제일 뿐이며, 현대인에게는 정신 질환으로 여겨질 뿐입니다. McCasland는 그런 견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합니다. 예수님은 성령에 사로잡힌 위대한 권위를 지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령에 사로잡힌 예수님이 귀신에 대해 잘못된 믿음을 가졌다고 추측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귀신 축출은 예수님의 사역 중에서 사소한 요소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가 이 악한 세대 안으로 침입하고 있다는 예수님의 본질적인 사역의 목적을 나타내는 표적입니다. 우리는 귀신 축출에서 예수님이 영적인 세계에서 일어나는 실제적인 갈등에 관여하고 있음을 알게됩니다. 이 갈등은 그의 메시야적 임무에서도 중심적인 요소입니다. “귀신과 천사에 대한 이야기는 예수님의 복음에서 전체적으로는 명확한 역할이 없는 불합리한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복음서의 사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것입니다. 귀신은 죄와 하나님 나라의 필요성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을 이해하는데 절대적으로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사람들은 그들보다 강한 개인적 힘(영적인 힘)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사람들을 이러한 사탄의 왕국의 속박에서 구원하여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가는 것이 예수님의 사역의 핵심입니다.
세 번째 해석은 앞의 두 가지보다 더 나아갑니다. 이 설명은 귀신에 대한 성경의 개념 속에서 본질적인 진리를 찾아내려고 했습니다. 인간의 경험 속에 귀신적 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역사를 바라볼 때, 역사는 종종 개인을 초월하며, 무의미할 뿐 아니라 불합리하고 미친 것 같기도 하다. 우리를 바라보는 얼굴은 미친 것 같다. 확실히 예수님이 사람들을 바라볼 때, 그는 사람들을 항상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개체나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는 영혼이라고 보지는 않았다. 그는 그들의 영혼이 전쟁터이며 하나님의 성령과 사탄의 우주적인 힘들 사이에 일어나는 비극적 갈등의 무대로 보았다.”
확실히 귀신과 마법사에 대한 교회의 믿음의 역사는 피상적인 사람들로 하여금 많은 악과 고통(중세의 마녀사냥과 같은)을 일으키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개념이 남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과학이나 철학은 인간을 초월하는 영이나 존재가 존재하는지에 대해 이성적으로 확증할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선험적인 이성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악한 영적 권세가 존재한다는 예수의 믿음을 거절해버린다면, 우리는 개인적인 하나님에 대한 예수의 믿음이 왜 계속 지속되었는지 설명할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악한 영적 존재에 대한 생각은 여전히 현대의 문학에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입니까? 적응 이론, 정신 질환 이론, 영향력 있는 개인의 영향 등 많은 설명이 시도되었지만, “우리에게는 여전히 일종의 신비와 많은 대답되지 않은 질문들이 남겨져 있습니다.”
3. 세상
예수는 이 세대에 대한 신약의 일반적인 태도와 같이 이 세대를 사탄의 영역이라고 보았지만, 그가 창조된 세계를 악하다고 본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의 이원론은 개인의 영혼이 속한 실체 세계(noumenal world)와 인간의 육체를 포함하는 현상 세계(phenomenal world)를 대조합니다. 현자는 마음을 잘 훈련시키고 육체적인 욕구를 잘 조절하여 영혼이 물질세계의 방해 공작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한 사람입니다. 후기의 영지주의 사고에서 물질세계는 그 자체로 악의 영역입니다. 반대로 히브리적 사고에서는 세계를 하나님의 창조로 보며, 그것이 악에 감염되어 있어도, 그 자체로는 선합니다.
예수는 세계에 대한 히브리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분명하게 하나님을 창조주를 간주하였고, 인간과 세계를 그의 창조물로 여겼습니다. (마가 13:19. 마태 19:4) 예수는 계속해서 그의 가르침을 성명하기 위해 자연으로부터 예를 끌어들였는데, 자연의 질서와 규칙성을 하나님께서 그의 창조물을 신실하고 변함없이 돌보신다는 증거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계속해서 지탱하고 계십니다. 그는 들의 백합화를 입히시며 까마귀를 먹이십니다. 그는 가장 하찮은 새인 참새 한 마리에게도 관심을 기울입니다. 하나님은 악한 자와 선한 자 모두에게 동일하게 햇빛을 비추시며 의로운자와 불의한 자 모두에게 비를 내리십니다. 그는 하늘과 땅의 주이십니다. 예수의 가르침과 행동에는 세상을 부정하거나 금욕주의에 대한 것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는 오히려 종교적이지 못하다고 생각됐던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했기 때문에, 종교적 순수주의자들의 진노를 사야만 했습니다. 그는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즐거움을 묘사하기 위해 연회와 축제의 은유를 자주 사용했습니다. 그는 심지어 술고래와 대식가라고 조롱받기도 했습니다. 명백하게 사탄은 이 세대의 지배자이지만, 세상은 여전히 하나님의 것입니다. 창조안에서 어떤 것도 도덕적으로 나쁘지는 않으며, 인간의 죄됨이 사람들이 육체적 욕구를 가진 피조물이라는 사실에 내재되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그들의 육체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하나님을 믿으라고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가장 선한 것은 창조된 세상 수준에서 발견될 수 없다는 점도 강조되어야 합니다. 세상을 얻어도 생명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세상’은 물리적인 세계나 사람이 사는 세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지상의 삶의 총체를 말합니다. 인간이 인간의 수준에서 추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얻어내는 것이 악은 아니지만, 그것이 인간의 진정한 삶이 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그런 수준에서 모든 것을 이룰 수는 있지만, 그것은 동시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진정한 생명을 잃는 것을 뜻합니다. 세상의 부가 관심의 초점이 되어 하나님의 것들을 몰아내버릴 수 있는데, 그러면 그는 죄와 죽음의 도구가 되어 버립니다. 자신의 소유에 정신이 팔린 사람들은 특히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최우선 순위로 놓도록하는 하나님의 사역만이 세상에 대한 인간의 자연적인 사랑을 극복하게 할 수 있습니다.
4. 사람 Humanity
인간론에 대해 신학과 목회 양 방면에 폭넓은 영향을 끼친 견해는 구자유주의의 해석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되심’, ‘신성’, ‘하나님의 자녀로써 인간의 위치’, ‘인간 영혼의 무한한 가치’와 같은 개념들 속에 복음 전체가 표현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가족과 관계된 개념들(아버지됨, 아들됨, 형제)이 인류에 대한 통일된 관점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개념들을 기준으로 다른 모든 문제를 평가하려고 했는데,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개념도 그런 기준으로 이해하였습니다.
로빈슨(Robinson)은 예수님의 가르침 안에서 ‘일시적이고 외부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분리하려 했습니다. 그는 종말론은 일시적인 요소로 분류했고, 영원한 요소는 ‘인류와 하나님 사이의 자녀로써의 관계’라고 했습니다. 그는 그런 관점에서 네 가지 기본적인 가르침을 도출했는데, 이것이 이 영원한 핵심의 주요한 윤곽을 구성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인간의 더없는 가치’입니다. 하나님의 눈에 인간의 생명은 독특하고 엄청난 가치를 가진다는 말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람들의 의무입니다. 인간은 자녀로써 믿음과 복종의 관계를 하나님에게 빚지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인류의 형제됨이라는 결론입니다. 하나님의 아버지됨이 보편적이기 때문에, 인류의 형제됨도 보편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넷째는 죄가 아들됨의 관계를 파괴해왔지만, 절대로 하나님의 아버지됨은 손상시키지는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역은 이상적으로 인류에게 마땅히 있어야 했던 것들(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을 회복시키려는 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인간에 대한 예수님의 관점을 잘못 해석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이 하나님에 대한 예수님의 관점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이기는 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을 모든 사람의 아버지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아버지라고 국한시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은 보편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선물로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사람에 대해 동물보다 더 가치있다고 보았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이지만, 그들은 공중의 새나 들의 백합보다는 더 가치있는 존재입니다.(마태 6:26~30, 10:31) 하나님은 사람들을 돌보시는데, 그들의 머리카락의 숫자를 셀 수 있을 정도입니다.(마태 10:30)
하나님의 피조물로써 인간은 마땅히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신적인 지배자(하나님)에게 어떤 주장도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냈을 때에도, 그들은 그들의 의무를 수행해야 하는 종들에게 기대되는 역할을 해낸 것일 뿐입니다.(누가 17:7~10)
하나님의 피조물로써 사람들은 완전히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검거나 희게 만들 수도, 그들의 키를 늘릴 수도, 그들의 수명을 마음대로 정할 수도 없습니다.(마태 5:36, 6:27) 사람들은 재산에서 안전을 찾으려 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한 부자가 자신의 재산을 즐기기도 전에 그의 재산을 앗아가 버리셨습니다.(누가 12:16~21)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지옥의 형벌을 내리실 수 있으며,(마태 10:28) 그들에게 맡겨진 일들에 대해 그들의 행동에 맞추어 심판하실 수 있습니다.(마태 25:41)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보았습니다. 이것은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말했다는 사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비극은 그들의 죄가 얼마나 크고 작은지에 놓여있는 게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회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멸망하게 됩니다.(누가 13:1~5)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 조차도 길을 잃어서, 예수님은 그들을 찾아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마태 10:6, 15:24, 누가 19:10)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셨고(마가 2:17), 또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누가 15:7) 그런데 여기에서 ‘의인’은 실제로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도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의롭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부름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종교적인 유대인들의 관점을 ‘의인’이란 말로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죄인이라기보다는 의롭다고 생각하는 그의 대적자들에게, 예수님은 구원으로의 부름이 스스로가 죄인임을 깨닫기 때문에 그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에게만 향해있다는 것을 알리려고 하셨다. 그의 대적자들의 실수는 그들이 자신을 죄인으로부터 배제시켰다는 데 있다. 반면에 예수님은 이 의로운 사람들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이 죄에 빠져있다고 전제했다.”
사람들은 그들의 궁극적인 가치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 선생에 대한 비유는 사람이 곡식 창고나 육체적인 편안함으로 그의 삶을 만족시킬 수 없으며, 하나님을 향해서 부를 가져야한다고 가르칩니다.(누가 12:15~21) 모든 세상을 얻고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깨달을 수 있는 진정한 생명을 잃는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마태 16:26) 인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지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사람이라는 그 사실 자체에서가 아니라, 그들이 잃어버린 죄인이기 때문에 기쁨을 맛보십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하늘에 기쁨이 있는 경우는 오직 죄인이 회개할 때 뿐입니다.(누가 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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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나라의 하나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역동적인 이해들은 처음에는 그 뜻에 대한 언어학적, 주석학적 연구와 그 용어 자체의 쓰임으로부터 도출되었습니다. 이 역동적인 해석은 복음의 신학에 의해, 좀더 엄격하게 말하면 복음서의 하나님에 대한 교설에 의해 좀더 설명되었습니다.
그 나라는 인류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basilieia tou 'theou'. 강조점은 첫 번째가 아닌 세 번째 단어에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나 고려해야 할 사실은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서 그의 하나님에 대한 관념이 모든 것을 결정짓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와 메시아 개념도 마찬가지다”
만약 그 나라가 하나님의 통치라면, 그 나라의 모든 측면은 하나님의 특징과 행동으로부터 도출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현존 역시 하나님의 현재의 활동의 특성으로부터 이해되어야 하고, 그 나라의 미래는 그 시대의 마지막에 그의 왕적인 통치가 구속적으로 표현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유대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전체적으로 군주적인 통치를 하는 것입니다. 그는 그의 왕적 지배권이 궁극적으로 모든 존재를 넘어서는 하나님이 아니신 적이 없으신 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는 언제나 어디에서나 율법을 통해 알려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시대의 마지막에 그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해 행동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의 현존에 대한 선포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위해 역사 속에 구속적으로 활동하시기 시작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인 측면을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 속에서 역사 안에서 행하고 계신 하나님은 또한 그의 영광과 구원하는 능력을 나타내시기 위해 이 시대의 마지막에 다시 행동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현재와 미래 모두 다 하나님의 구원의 행동의 마당이기 때문에, 현재와 미래 모두가 하나님 나라를 나타냅니다.
찾으시는 하나님 seeking God
‘찾으시는 하나님’이란 명제는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에 대한 특별한 개념에 대한 연구를 통해 나온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상적인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선포 안에 있는 새로운 요소로써 하나님에 대한 그의 가르침과도 병행되는 것인데, 하나님이 ‘찾으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목적은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진리를 가르치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경험되어야 할 분이지, 전해져야 할 가르침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역 속에 반영되어 있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을 품을 수는 있습니다. 어떤 측면에서 유대교의 하나님은 구약의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예언자들의 하나님은 일관되게 역사 속에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고 또한 구원하시기 위해 활동하였습니다. 그런데 유대교의 하나님은 악한 세상으로부터 떠나버리셨고 더 이상 역사 속에서 구원을 위해 활동하시 않으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의 마지막 구속적 행위가 그 시대의 마지막에 일어나리라고 기대되었지만, 그 중간에는 하나님은 역사와 동떨어져 있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마침내 행동을 개시하셨을 뿐 아니라, 그 하나님이 지금 다시 역사 속에서 구속적으로 활동하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구약의 예언자들이 알리지 않았던 방식과 정도로 역사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구약의 약속의 성취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메시야적 구원이 임했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은 죄인들을 찾으시고, 잃어버린 자들을 그의 통치로 불러들이는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간단히 말해 그는 찾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학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관점에 대해 율법의 역할이 예수님의 종교적 경험으로 대치되었다는 것을 제외하면, 랍비적 사고의 흐름을 따랐다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핵심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내적으로 경험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의 사역은 그의 내적 경험을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예수님의 경험으로 들어올 때, 하나님 나라가, 그의 통치가 그들에게 ‘옵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경험으로 들어오게 되면 하나님 나라가 발전하고 온 세계로 확장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에도 간직해야 할 중요한 요소들이 있지만, 하나님 나라의 역동적인 측면을 간과한다는 점에서 부적절합니다. 우리 주님의 메시지와 사역의 핵심에는 찾으시는 사랑으로써 하나님의 실재가 구체화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잃어버린 자들이 그들의 죄를 회개하기를 기다리지만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직접 찾아 나섰습니다.
그 사실은 예수님 자신의 사역에 구체화되었습니다. 그가 바리새인들로부터 의에 대한 규칙을 어기고 죄인들과 어울렸다고 비난을 받았을 때, 그는 죄인들을 찾으시는 것이 그의 사역이라고 답하셨습니다.(마가 2:15~17) 의사가 필요한 사람은 자신이 아프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예수님은 그러한 죄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복음을 가져오셔야 했습니다. 그는 그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으셨고, 그들의 죄책감을 들추어내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보다 그들의 필요를 지적했고, 그것을 위해 봉사하셨습니다.
죄인을 찾아오신다는 하나님에 대한 위대한 진리는 누가복음 15장에 길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거기에는 세 개의 우화가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친근한 식탁 교제를 나누는 것에 대한 비난을 잠재우기 위해 나와 있습니다. 그는 길 잃은 양을 찾는 것이, 잃어버린 동전을 찾는 것이, 용서를 받을 만하지 않더라도 탕자를 가족으로 불러들이는 것이 신적인 목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각각의 우화에서 하나님께서 먼저 찾는 일을 주도하십니다. 목자가 양을 찾으며, 여자가 동전을 찾으려고 청소를 하며, 아버지는 탕자가 돌아올 것을 기다립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중심적인 특징은 돌아오는 아들이 아니라 기다리는 아버지에게 있습니다. 그 우화는 일차적으로 인류이 방탕함보다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묘사합니다.
유대 학자들은 죄인에 대한 이러한 관심이 새로운 것이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바리새주의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첫 걸음을 먼저 내미신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 주도권이 보통 죄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회개)에 있다고 말합니다. 즉, 죄인이 회개해야 하나님이 만나주십니다. Montefiore 는 그와 비교되는 예수님의 “위대함과 독창성”이 “죄와 죄인들을 향한 인간의 태도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인정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죄인을 피하기 보다는 찾으셨기 때문입니다. 죄인에 대한 이러한 관심은 유대교에서는 완전히 들을 수 없었던 것이며, 에스라4서에서 표현되는 것들과 비교하면 완전히 배치됩니다. 에스라4서에서 저자는 의로운 사람이 적음을 한탄하며 말합니다.
“정말 나는 죄인을 변화시키는 일이나, 그들의 죽음이나, 그들의 심판이나 멸망에 대해 관심이 없다. 오히려 나는 의의 창조에, 그들의 순례에, 그들의 구원에 기뻐할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자들을 찾으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일을 시작하셨다는 것입니다.
찾아오시는 하나님 inviting God
‘찾으시는 하나님’은 또한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은 종말론적 구원을 많은 손님들이 초대된 연회나 축제로 묘사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우리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 사이에 자주 있었던 식탁 교제를 이해할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축복들을 제공하고 미리 보여주는 살아 있는 비유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식탁교제는 가장 친근한 관계이며, 예수님의 사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죄인들과 먹는다는 사실에 분개했습니다. 예수님은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불렸습니다. ’call'은 'invite'의 의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연회로 죄인들을 초청하는 것이 정확히 예수님의 사역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쳤지만, 그러한 호출은 또한 초대이기도 합니다. 사실상 예수님의 회개로의 호출이 초대라는 특징은 그의 요구가 유대교의 가르침과 다음을 보여줍니다. 유대교에서 회개의 교리는 가장 중요한 자리에 있는데, 그것은 구원이 얻어지는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크게는 율법의 용어로 이해되었습니다. 부정적으로는 율법에 대항하는 악한 일과 위반을 없애는 것이었고, 긍정적으로는 신적인 뜻의 표현인 율법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멍에”는 “회개의 멍에”라고도 불릴 수 있었습니다. 일의 차례는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십니다. 인간의 행동이 신적인 행동에 선행해야 합니다. “유대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죄의 용서는 죄인에게 달려 있다. 거기에는 중개자에 대한 질문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회개에 대한 요구는 사람들이 그들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라는 호출 뿐만 아니라, 신적인 초대에 응답하라는 요구입니다. 이 신적인 초대가 전제되어 있는데, 그 자체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선물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회개 요구를 세례 요한의 요구와 구별시킵니다. 요한은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심판의 날에 비추어 그들의 죄를 회개하라고 했지만, 예수님은 초대를 받아들이라고 요구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메시지는 하나님이 행동하고 있으며, 역동적으로 역사 속에 그의 구속적인 뜻을 드러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말과 행동으로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찾으십니다. 그는 그들을 메시야적 축복으로 들어오도록 초대하십니다. 그는 그의 은혜로운 제안에 사람들이 호의적으로 응답하기를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다시 한 번 말씀하셨습니다. 새로운 선지자가 등장했는데, 실상 그는 선지장 이상이며, 사람들에게 그가 약속한 축복 그것을 가져오셨습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
하나님은 죄인을 찾으시며, 그들을 그의 통치에 복종하도록 초대하셔서, 그가 그들의 아버지가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와 그의 아버지 되심 사이에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습니다. 이 두 요소 사이의 밀접한 관계가 특별히 종말론적인 상황 속에 가장 자주 등장한다는 것은 특별히 주목할 만합니다. 종말론적 구원에서 의인은 그들의 아버지의 나라로 들어갈 것입니다.(마태 13:43) 축복받은 자들을 위해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인 상속을 준비하신 분은 바로 아버지이십니다.(마태 25:34)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선물을 부여하는 분도 아버지이십니다.(누가 12:32)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이라는 가장 고귀한 선물은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는 것인데, 이 통치는 모든 세계에 미치는 것입니다. 그 날에 예수님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그의 제자들과 새로운 교제를 즐기게 될 것입니다.(마태 26:29) 하나님의 아들들의 가장 큰 기쁨은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나누는 것이기에,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그의 나라가 임하옵시며”(마태 6:9,10)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왕되심과 아버지되심은 밀접하게 연관된 개념입니다.
이러한 종말론적인 언어들은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에 대한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묘사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이 모든 사람이 아닌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들만 즐길 수 있는 축복이며 관계라는 것입니다. 아버지되심의 관계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옴으로 자격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로 들어오게 하시는 것은 아버지로써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은 그들의 아버지로써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릴 수 없습니다.
아버지되심이라는 선물은 종말론적인 완성, 미래에만 속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현재의 선물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하나님 나라의 미래의 선물은 현재의 관계에 달려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그렇게 간주하라고 가르친 사실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현재의 관계 속에서조차, 아버지되심은 하나님 나라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그들의 아버지로 아는 사람은 삶에서 가장 고귀한 선물이 하나님 나라이며, 하나님의 의가 되는 사람들입니다.(마태 6:32, 33, 누가 12:30)
여기에서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의 기원과 성격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생깁니다. 아버지되심이란 개념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 관계를 묘사하는 방법으로 나타나는 구약에 그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언약 때문에 하나님의 장자입니다.(출애굽기 4:22) 하나님은 따라서 종종 그 나라의 아버지로 생각되었습니다.(신명기 32:6, 이사야 64:8, 말라기 2:10) 이것은 자연적으로 생긴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도에 의해 만들어진 관계입니다. 하나님이 전체적으로 그 나라의 아버지이시지만, 이스라엘이 배교하면,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은 이스라엘 안의 의로운 신앙적 남은 자들에게만 국한됩니다.(시편 103:13, 말라기 3:17) 정경 이후의 문서에서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은 특별히 각 개인들과 관련하여 강조됩니다. 아버지되심의 완전한 의미는 종말론적이며, 하나님 나라에서 경험될 것입니다. 랍비 문학에서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윤리적인 관계로 설명됩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고전적인 자유주의적 견해가 바로 예수님의 가르침 속의 아버지되심이라는 이 개념을 결정적인 주제로 만들었고, 보편적인 용어로 해석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이라는 유대교의 가르침을 도입해서, 그것을 심화시키고 풍부하게 했으며, 모든 사람들에게까지 확대시켰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완전하시기 때문에, 그리고 사랑은 그의 모든 도덕적인 완벽함의 합계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가 되어야할 그 분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보편적인 아버지라고 합니다.
최근의 비평가들은 “흔히 알고 있는 바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버지되심과 인간의 형제됨’이라는 교리를 가르쳤다고 주장하는 데에는 어떤 근거도 없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용어에 대한 연구로부터 두 가지 사실이 도출되었습니다. 1) 예수님은 자신을 그의 제자들과 함께 하나님의 자녀로 그룹화시키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20:17에서의 용법은 복음서의 것보다 더 명확합니다.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예수님은 메시야적 아들이지만, 그의 제자들이 그와 같은 식으로 하나님의 자녀인 것은 아닙니다. 2) 예수님은 단지 그의 제자들만을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메시야적인 아들됨을 인식하고서야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의 보편적인 아버지되심은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 속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마태복음 5:44~45)
이 말은 하나님이 보편적인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원수까지 사랑해야 하며, 하나님이 그의 자녀로써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도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되었습니다. 이 해석은 전이해를 가지고 이 본문을 읽은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단지 예수님의 제자들의 아버지로만 보여집니다. 선인과 악인 모든 사람에게 비를 내리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신적인 아버지되심과 혼동되어선 안됩니다. 똑같은 본문을 주석해서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의 아버지라는 결론으로 이끌 수도 있습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마태 6:26)
하지만 하나님께서 새들을 돌보는 것은 아버지로서가 아니며,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가 아닌 자들에게 그의 창조의 축복을 부여하는 것도 아버지로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은 하나님의 찾으시는 사랑에 반응하여 하나님 나라에 그들을 복종시키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찾으시는데, 그가 그들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아버지가 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보편적인 아버지되심은 탕자의 비유에서도 발견됩니다.(누가 15:11~24) 탕자는 모든 사람이 자연적으로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가 속한 곳으로 돌이키기만 하면 된다고 해석됩니다. 이런 해석은 그 비유가 일상의 삶에서 나온 이야기로써 그 목적이 기본적인 진리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지, 자세한 부분까지는 강조하지 않는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사람들이 자연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주장하는 것은 거기 나오는 돼지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는 것처럼 부적절한 주해입니다. 이 부분의 세 가지 비유의 중심적인 진리는 간절히 그리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이며, 잃어버린 동전을 찾는 여자이며, 탕자가 돌아올 것을 기다리는 아버지와 같습니다. 이것은 아버지에 대한 비유이지 아들에 관한 비유가 아닙니다. 세 비유 모두 잃어버린 것에 대해 말하고 있는 한 가지 요소는 그것이 소유물이란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은 양떼에 속했으며, 동전은 여인의 소유이며, 아들은 그의 아버지의 집에 속해 있습니다. 인류가 있어야 할 적절한 장소는 아버지의 집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이 잠재적으로는 보편적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다. 아들이 낯선 땅에 있을 동안에는 그의 아들됨은 공허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가 자신으로 돌아오게 되면, 즉 그가 속한 곳으로 돌아오면 아버지의 집에 속하게 됩니다. 하나님도 역시 그 자신에게로 되돌아와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모든 사람을 받아들이셔서 그들이 아버지의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되기를 원하고 갈망하십니다.
아버지로서 하나님의 의미는 Jeremias가 연구해 왔습니다. 예수님이 아람어인 ‘abba’를 하나님을 지칭하는데 사용하였고, 그의 제자들에게 ‘abba'라고 부르라고 가르쳤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이러한 아람어 형태는 서신서들 속에서 그리스어의 옷을 입고 나타납니다.(로마서 8:15, 갈라디아서 4:6) 'abba'라는 단어는 아이들의 말에서 따온 것인데, 지금의 ‘아빠’라는 말과 비슷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일상적으로 이 단어를 하나님을 말하는데 사용하지 않았는데, 그 단어가 너무 친근해서 실례가 될 것 같아서입니다. 예수님은 아이처럼 하나님께 말했고, 그의 제자들에게 그렇게 말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예의 차원에서 일상적으로 쓰이는 의미에서 ‘아버지’를 사용하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마태 23:9)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 그 말을 아껴두어야 합니다. 'abba’는 예수님에 의해 사람들에게 주어진 확실함과 친밀함이라는 새로운 관계를 표현합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죄인을 찾으시고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선물을 제공하지만, 그는 여전히 은혜의 선물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보복하시는 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잃어버린 자에 대한 그의 관심은 그의 신적인 거룩함을 그저그런 친절함으로 바꾸어버리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찾으시는 사랑이시지만, 그는 또한 거룩한 사랑이십니다. 그는 하늘의 아버지이십니다. 그의 이름은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합니다. 따라서 그의 왕국을 거절하는 사람은 그의 심판 아래 있게 됩니다.
실제로,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랑이라는 사실은 인류를 곤경으로 몰아넣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사랑의 제안에 반응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더 큰 유죄판결이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Bultmann은 하나님을 ‘요구자’로써 사람들에게 더 가까이 왔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과 직면했을 때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며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결과는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거나 심판 둘 중의 하나입니다.
이러한 보복하는 의로움에 대한 강조는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서도 반복됩니다. 세례 요한의 가르침에서 종말론적 왕국의 도래는 의인을 위한 구원과 불의한 자에 대한 격렬한 심판을 뜻합니다.(마태 3:12) 예수님도 똑같이 가르쳤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는 것의 이면에는 영원한 불의 형벌을 겪는 것이 있습니다.(마태 25:34,41)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거부하고, 다른 사람이 들어가는 것을 막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하나님 나라의 능력은 예수님 안에서 현존하며 역사하여 사람들을 악의 속박으로부터 구원합니다. 하나님은 참회하는 자에게는 아낌없는 죄사함을 주시며, 죄인들을 직접 찾아서 자신에게 돌아오게 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눈이 멀어 하나님 나라의 능력과 악의 활동을 구분할 수 없어서 하나님 나라를 귀신의 것이라고 생각하다면, 그 사람은 절대 용서받을 수 없고 영원한 죄의 책임을 져야 합니다. 신자들을 하나님 나라로부터 멀어지게 하려는 사람들에게 두려운 운명이 기다릴 것입니다.(마태 18:6) 찾으시는 사랑으로써 하나님의 위대한 진리는 하나님의 의로움과 정의를 손상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의미는 구원이면서 동시에 심판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심판은 원칙적으로 인류 가운데서 예수님의 사역 속에서 결정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과 그의 선포를 거절할 때, 그들의 종말론적인 운명이 결정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다양한 도시를 방문하여 천국을 선포했지만 거절되었을 때, 제자들은 그들의 발의 먼지를 떨어버려 심판을 표현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알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왔다”는 선언은 약속 대신에 심판이 되었습니다. 두려운 심판이 그런 도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설교했고 하나님 나라의 일들을 행한 도시에 심판을 선언했습니다.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 가버나움에 선언된 심판의 성격은 명백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처럼 누가복음은 심판이 고라신과 벳새다에 떨어질 것이라고 종말론적 어조로 말합니다. 그런데 누가와 마태 모두에서 가버나움에 대해서는 덜 종말론적 용어로 말하는데,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의 중심부였고 왕국의 메시지를 계속해서 들었던 이 자랑스런 도시가 하데스로 떨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마태가 종말론적 어조를 붙이기는 했지만, 그는 이 말을 역사 속에서의 심판을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했다는 것이 확실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가버나움에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했더라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가버나움에 대한 이 심판에서 예수님은 그것을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사야 14:13~15에서 바벨론에 대해 행해졌던 모욕의 노래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마태와 누가 모두가 기록한 중요한 요점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거부한 것에 대한 심판은 종말의 날 뿐만 아니라 역사 속에서도 일어날 것입니다. 세속적인 교만으로 높아졌던 가버나움은 수치스러운 가장 낮은 곳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가버나움은 소돔과 같은 운명 - 멸망을 겪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14 장을 인용한 것은 적절합니다. 바벨론처럼 가버나움은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예언자들처럼 예수님은 종말론적인 시각에서뿐만 아니라 역사 속에서도 심판을 위한 신적인 임재를 볼 수 있었습니다. 가버나움의 파괴는 하나님 나라의 심판일 것입니다.
역사적인 용어로 심판에 대해 예수님께서 말하는 부분은 다른 데도 있습니다. 많은 말들이 예루살렘과 예루살렘의 거민들에 대해 그들의 영적인 무지와 제공된 메시야적 구원을 인식하지 못한 것 때문에 심판받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하나님 나라의 제안을 거절했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새끼를 날개 아래 모으는 암탉의 은유는 구약으로부터 온 것입니다.(신명기 32:11, 시편 17:8, 36:7) 그리고 이방인을 개종시킨 유대인은 Shekianh(하나님의 임재)의 날개 아래로 그를 데려온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의미는 어떤 사람을 하나님 나라로 들어오게 했다는 아주 단순한 것입니다. 이 초청을 거절하는 것은 “너의 집이 버림받았고 황폐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너의 집”이 성전을 의미하는지 유대 민족을 의미하는지는 모릅니다. 그렇지만 의미는 같습니다. 성전이나 유대 민족이나 흥망을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제안이 거부되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구속된 세계의 수도가 될 것이라 기대했던 예루살렘과, 인류의 유일한 성소인 성전은 하나님께 버림받았고 황폐케 되었습니다.
이런 생각은 누가복음 19:41~44에서도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방문의 때”를 몰랐기 때문에 우셨습니다. 이 단어(episkope)에는 그의 백성을 방문하러 오시는 하나님에 대한 예언적인 사고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이 말에서 하나님은 은혜롭게도 평화를 주시려고 예수님의 사역 속에서 예루살렘을 방문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은혜와 자비 가운데 이스라엘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비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들을 멸망으로 이끌 길을 택했습니다. 그 재앙은 그 도시에 죽음과 파괴를 가져올 역사적인 방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예루살렘과 성전에 닥쳐오게 될 역사적 심판에 대한 다른 본문들을 살펴볼 필요는 없습니다. Wilder는 예수님이 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 미래를 볼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임박한 역사적인 재앙으로 장차 올 일을 묘사할 수도 있었고, 묵시적이고 초월적인 사건으로써 다가올 일을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거부한 이스라엘을 심판하기 위해 장차 올 신적인 방문은 역사적이면서도 종말론적입니다. 하나님은 다시 한 번 역사 속에서 활동하십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역 속에서 그의 나라의 축복을 주기 위해 자기 백성을 방문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제안이 경멸받았을 때, 심판의 방문이 뒤따릅니다. 역사 속의 심판과 마지막 때의 종말론적 심판이 모두 뒤따릅니다. 두 가지 모두 하나님의 왕적 통치의 심판입니다.
구원의 새 시대
우리는 앞 장에서 basileia(왕국)의 의미가 단일 개념으로 축소할 수 없는 다양한 요소를 지닌 복잡한 개념이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왕국의 기본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통치 혹은 지배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종말론적 행위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때에 그의 적을 물리치고 그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그의 왕적인 권세를 가지고 행동하실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백성이 그의 통치라는 축복을 누리기 위해 모여들 미래의 구원의 왕국을 가리킵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 나라는 올 시대와 바꾸어 쓸 수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선포 중 가장 두드러진 사실은 그 나라가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역사 속에 지금 침입해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baileia tou theou(하나님 나라)라는 말이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임으로 들어가게 되는 구원의 축복이 있는 새로운 왕국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는 사실에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현재의 축복의 왕국으로써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현재의 실재라고 말해주는 본문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에게 저주를 선언하셨는데, 그 이유는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기”(마태복음 23:13) 때문이었습니다. 누가복음의 병행 구절을 보면 그 이유는 더 명백해집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누가복음 11:52) 또 다른 곳에서 예수님은 “세리나 창기들이 너희(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마태복음 21:31)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본문들에 대한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은 다음과 같이 당시에 실제 일어난 상황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 사회에서 버림받은 집단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외적으로 존경받는 지도자가 응답할 것이라는 증거는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버림받은 사람들을 보았음에도 그들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11:11~13은 가장 흥미로우면서도 가장 어려운 말입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게 제자들을 보내, 그가 메시야인지 아닌지 물었을 때 예수님은 이사야 35:5~6절에 있는 메시야 예언을 인용하며 그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대답했습니다. “이 예언이 지금 성취되고 있다. 메시야 구원의 시대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나서 헤롯의 감옥에 있는 세례 요한에 대해 말하면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선언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1:11~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이 구절은 세 가지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1) ‘biazetai’의 의미 2) ‘침노하는 자’의 의미 3) ‘하나님 나라에서 극히 작은 자’의 의미
동사 'biazo'는 ‘힘이나 무력을 사용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는 수동태로 쓰이면 ‘강제적으로 취급되다’, 중간태로 쓰이면 ‘힘을 발휘하다’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에 대해 6가지 다른 해석들이 존재하는데, 여기에서는 결론만 제시하겠습니다. 이 동사를 중간태로 해석하는 것(힘을 발휘하다)이 예수님의 사역 안에 활동하고 있는 하나님의 왕적 통치로써 하나님 나라의 역동적인 측면을 가장 잘 묘사해줍니다. “The kingdom of heaven has been coming violently.”(RSV) RSV의 해석에는 언어학적인 문제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지배는 엄청난 힘으로 나아가고, 열렬한 사람들은 그것을 부여잡고 그것에 참여하고 싶어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강력한 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힘은 인류 가운데 힘차게 일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동시에 강력한 반응을 요구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가르침이 랍비의 가르침과 다른 점입니다. 랍비들은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짐을 져야하고 하나님의 뜻에 대한 규례로 율법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으로는 부족하다고 가르쳤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은 예수님의 사역 속에서 힘있게 역사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역동적인 권세가 세상에 침입해 왔고 사람들은 근복적인 반응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때때로 이 반응을 격렬한 표현으로 묘사했습니다.
마가복음 9:43, 47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만일 네 눈이 범죄케 하거든 빼어버리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격렬한 행동입니다. 다른 곳에서 예수님은 그를 위해서는 가족까지 미워해야 한다는 격렬한 언어를 사용했습니다.(누가복음 14:26) 그는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고 했습니다.(마태 10:34) 하나님 나라의 현존은 근본적인 반응을 요구합니다.
누가도 역시 이 구절을 이런 방식으로 이해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enters violently)”(누가16:16)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에서 ‘bizetai’는 중간태로 쓰였습니다.
이 말들에서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 안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역동적인 통치입니다. 그것은 또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현재적인 축복의 왕국입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이 요한의 때까지입니다. 그는 마지막 예언자입니다. 요한의 날들 이후로 새로운 어떤 일이 일어났는데, 그 일로 인해 새로운 상황이 발생했고, 다음과 같은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동터오는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도 요한보다 위대합니다. 개인적인 성취나 가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 때문에 그는 세례 요한과는 다르게 하나님 나라에 속해 있습니다.”
여기에서 대조되는 것은 요한과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예언자의 옛 시대'와 '하나님 나라의 새 시대'입니다. 이 새 시대는 예수님의 사역과 함께 시작된 것입니다.
현재의 선물로써 하나님 나라
이 새로운 축복의 왕국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이 나라(basileia)가 하나님의 역동적인 통치와 구원의 왕국일 뿐만 아니라, “생명과 구원의 선물”을 가리킨다는 것도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가르침에 있는 또다른 독창적인 요소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메시야적 구원이 포함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종합적인 용어로 쓰입니다. Dalman 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그 왕국이 “사람들이 투쟁해 왔고, 주어지고, 소유되며, 받아들여지는 것을 가능케 하는 좋은 것”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종말론적 완성에서 그 나라는 의로운 사람들에게 자유롭게 상속되는 어떤 것입니다.(마태 25:34)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나 올 시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는 시대에 하나님의 통치의 선물인 생명의 축복입니다.(마태 24:46) 영생을 얻는 것에 대한 젊은이의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영생을 얻는 것에 대해 이 둘이 동일한 개념인 것처럼 이야기합니다.(마가 10) 그 나라는 하나님께서 기쁨으로 작은 예수님의 제자들 무리에게 부여한 선물입니다.(누가 12:32)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께서 종말론적 영광으로 그의 지배를 나타내실 때, 그의 백성에게 부여되는 생명의 선물이라면,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종말론적 완성이 오기 전에 역사 속으로 침입해 들어온 하나님의 통치라면, 우리는 현세 속의 하나님의 통치가 그의 백성에게 “예비적인 축복”을 가져온다고 기대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상 우리에게 찾아온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올 시대에 속한 종말론적인 선물일 뿐만 아니라, 옛 시대에서 받아야 했던 선물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여러 가지 말들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다른 모든 것보다 중요한 보물이나 값비싼 진주와도 같습니다.(마태 13:44~46) 하나님 나라는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무엇이며(마태 6:33) 아이가 선물을 받을 때처럼 받아야 합니다.(마가 10:15, 누가 18:16~17) 이 말에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이지만, 그의 통치의 선물도 포함합니다. 신적인 지배는 사람들이 그 앞에서 어쩔 수 없이 경배해야 하는 두려운 권세가 아니라, 선물입니다. 아이들은 하나님 나라의 아들들에게 요구되는 신뢰성과 수용성을 나타냅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들이 그 나라에 합당할 만한 겸손함을 갖추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응답했기 때문에 그들의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것을 선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속한 것입니다. 그것은 신적 통치의 선물입니다. 마태 19:14은 하나님 나라가 어린이와 같은 사람의 현재의 소유물이라는 동일한 생각을 보여줍니다. 구하는 자가 받을 것이라는 약속과, 찾는 자가 찾을 것이라는 말도 이런 문맥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누가 12:31) 두드려야 할 문은 하나님 나라의 입구를 제공하는 그 문입니다.
팔복 역시 하나님 나라를 선물의 관점에서 봅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사람은 선물을 받을 것입니다.(마태 5:3,10) 이 말에서 하나님 나라가 미래인지 현재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팔복은 분명히 종말론적인 색조를 가집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고, 긍휼히 여김을 받고(심판의 날에), 하나님을 본다는 것에 대한 말은 일차적으로 종말론적입니다. 그러나 팔복의 주요한 목적은 미래에 주어질 축복을 약속하기보다는 현재의 축복에 대해 가르치는 것입니다. 슬퍼하는 자는 그들의 영적 가난함 때문에 위로를 받는데, 그것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배부르는 것과 같이 현재적이면서 미래적입니다.(마태 5:4,6) 하나님 나라가 두 번 언급되었듯이 현재와 미래를 모두 포함합니다. 팔복은 종말론적 구원과 현재의 축복을 모두 설명합니다.
구원의 선물
하나님의 선물로서 하나님 나라는 “구원”이라는 단어로 좀더 설명될 수 있습니다. 복음에서 “구원하다”와 “구원”이라는 단어는 동시에 종말론적이고 현재적인 축복을 언급한다.
구원은 일차적으로 종말론적인 선물입니다. 영생에 대한 젊은 부자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에서 구원은 영생과 올 시대에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것과 동의어입니다.(마가 10:17~30) 이러한 종말론적인 구원은 다른 곳에서 한 사람의 육체적 생명을 버리는 것과 비교하여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마가 8:35, 마태 10:39, 누가 17:33) 이러한 종말론적 구원은 단순하게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으로(마가 9:43, 마태 25:46) 혹은 주의 기쁨으로 들어가는 것으로(마태 25:21,23) 설명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미래의 구원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 죽어야 할 운명으로부터의 구원, 하나님과의 완전해진 교제.
육체적인 구원(부활) : 복음은 부활에 대해서는 많이 언급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누가복음 20:34~36을 보면 종말론적 구원이 전인(全人)을 포함한다는 것을 명백히 알 수 있습니다. 부활의 생명은 천사와 공통점, 말하자면 불멸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 불멸의 부활의 생명은 올 시대의 생명입니다.(누가 20:35) 육체적 약함, 병, 죽음이라는 악은 하나님 나라의 생명에 의해 삼켜질 것입니다.(마태 25:34,36)
하나님과의 완전해진 교제 : 종말론적 구원은 육체의 구원뿐 아니라 하나님과 인류 사이의 교제가 회복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죄에 의해 깨어졌었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며(마태 5:8), 주님과의 기쁨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마태 25:21,23) 이러한 종말론적 완성은 보통 일상적인 삶으로부터 온 그림으로 묘사됩니다. ‘추수’가 일어날 것이며 곡식은 수확되어 창고에 모여집니다.(마태 13:30, 39, 마가 4:29) 양들이 염소부터 분리되고, 우리 속으로 안전하게 모일 것입니다.(마태 25:43) 가장 흔한 그림은 축제와 탁상 교제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서 그의 제자들과 포도주를 계속해서 마실 것입니다.(마가 14:24)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예수님은 탁자에서 먹고 마실 것입니다.(누가 22:30) 사람들이 이 땅의 모든 곳에서 모여서 구약의 성인들과 함께 탁자에 앉을 것입니다.(마태 8:11~12, 누가 13:29) 완성은 결혼 축제(마태 22:1~14, 25:1~12)와 연회(누가 14:16~24)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은유는 모두 죄로 인해 끊어졌던 하나님과 인류 사이의 교제가 회복되는 것을 그립니다.
종말론적 구원의 종교적인 측면은 잃어버렸던 것들과의 날카로운 대조로 설명됩니다. 헬라어 단어인 ‘apollymi’는 두가지 뜻을 가집니다. 파괴한다 혹은 죽인다. 두 가지 모두 (파괴된다, 멸망된다) 종말론적 파괴를 위해 쓰입니다.(apleia, 마태 7:13)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은 목숨을 잃는다는 말이며(마가 8:35), 목숨을 잃는 것은 자기를 잃은 것이기 때문에(누가 9:25), 모든 것을 잃는 것입니다.(마태 8:36) 따라서 목숨을 잃는 것은 파괴당하는 것입니다. 육체 뿐 아니라 영혼을 파괴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리고 이 파괴는 지옥의 불(마태 10:28, 마가 9:42~48), 영원한 불(마태 18:8), 어둠(마태 8:12)으로 표현됩니다. 불과 어둠은 동질한 개념은 아니기 때문에, 중심적인 사실은 이러한 궁극적인 파괴의 형태보다는 그 종교적 중요성(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습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말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태 7:23, 누가 13:27)에 나타납니다. 여기에 파괴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이 계심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으로부터 배제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을 찾는 사역은 이러한 종말론적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들의 ‘잃어버림’은 현재이면서 동시에 미래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 있으며 그들의 생명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지금 길을 잃었기 때문에, 영원한 파괴의 위협 아래 있습니다. 잃어버린 아들은 죽은 것으로 간주됩니다. 그의 아버지의 집에로의 ‘구원’은 생명의 회복을 뜻합니다.(누가 15:24)
예수님의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는 사역은 미래의 차원뿐 아니라 현재의 차원도 지닙니다. 그는 죄인을 미래의 운명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일 뿐만 아니라 현재의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해 죄인을 찾으셨습니다. 회개한 삭개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누가 19:9~10) “잃어버린” 의 뜻의 배경에서, “멸망하다, 죽다”라는 의미의 예로 19:10의 ”잃어버린“을 들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자는 길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구출되지 않으면 멸망될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통해 약속하셨습니다. ”그 잃어버린 자를 내가 찾으며 .. 내가 내 양떼를 구원하여“(에스겔 34:16,22) 예수님께서 이루셨다고 주장하는 것이 바로 이 사역입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에게 가져다준 구원은 그 축복이 미래에 있을지라도 현재의 예수님의 방문입니다.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동전,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는 종말론적일뿐 아니라 현재의 구원을 묘사합니다.(누가 15장) 잃어버린 아들이 그의 아버지의 집의 기쁨으로 회복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과의 교제를 환영하는 삭개오와 세리와 죄인들에게 가져다주신 현재의 구원의 축복을 묘사합니다. 큰 형은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나타냅니다. 그들이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는 진정한 이스라엘이라고 주장했듯이 큰 형은 그의 아버지의 지붕 아래 거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의 아버지와의 진정한 교제나 그의 아버지의 집에서의 기쁨을 몰랐기 때문에, 역시 잃어버린 아들입니다.
종말론적 완성을 기대하는 가운데 현재의 교제라는 이 선물이 바로 탁상 교제의 비유로 묘사되는 모티프입니다.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것을 보고 공격했습니다. 이것은 일상적인 식사가 아니라 축제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일상 식사에서 눕는 이방인의 습관을 따르지 않고 탁자에 앉아서 식사했습니다. 그런데 딱 한 특별한 경우 - 파티, 결혼 축제, 왕의 연회 - 에서는 유대인들도 누워서 식사했습니다. 축제 비유는 종말론적 구원에 대한 흔한 유대적인 그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제자들, 그를 따르는 자들과의 교제는 종말론적 왕국의 기쁨과 교제에 대한 기대로 이해됩니다. 이 식사의 종교적인 중요성은 예수님의 다음 말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가 2:17) 예수님은 자신과의 교제로 죄인을 부를 때 그의 메시야적 임무를 성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기에만 국한되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두 가지 예가 더 있습니다. 누가는 15:1~2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비난의 주요한 근거 중의 하나가 예수님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뒤에 나오는 세 개의 비유는 모두 잃어버린 죄인들이 회복될 때의 기쁨을 강조합니다. 중심적인 사실은 회개한 한 죄인에 대한 하늘에서의 기쁨입니다.(누가 15:7) 그러나 예수님과 회개한 죄인들과의 식탁 교제에서 기대되는 것은 이 땅 위에서의 기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역의 전형은 이러한 기쁨의 교제였는데, 그의 비판자는 그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긴다고 했습니다.(마태 11:18) 메시야적 기쁨에 대한 동일한 강조가 예수님과 제자들이 금식에 대한 바리새인의 예를 따르지 않는다는 비난에도 나타납니다. 신랑이 있을 때에는 기뻐해야 하기 때문에 금식할 필요가 없습니다.(마가 2:18~19) 우리는 신랑 비유가 유대교 안에서 메시야에 적용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결혼 축제는 하나님 나라의 상징이었습니다. 결혼 축제의 일곱 째 날에 신랑의 친구와 손님들은 많은 심각한 종교적인 의무를 준수하는 것으로부터 해방되어 축제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 가운데 자신이 있다는 것은 이러한 결혼에 관한 메시야적 상징으로 묘사했습니다. 구원의 날이 왔고, 결혼 축가가 울려 퍼집니다. 더 이상 애곡할 곳은 없고 기쁨을 위한 곳일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할 수 없습니다.
메시야적 구원의 현존은 예수님의 치유 기적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치유’에 그리스어로 ‘구원하다’라는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현존은 유출병, 소경, 귀신 들림, 심지어 죽음으로부터 구원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구원이 메시야적 구원의 현존의 증거라고 주장했습니다.(마태 11:4~5) 그것들은 육체의 불멸성을 의미하는 종말론적 왕국의 생명에 대한 보증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의 영혼 뿐만 아니라 전인(全人)의 구원에 관련됩니다.
그런데 육체적 구원의 한계는 그 미래적인 현현에 대하여 현재의 왕국의 성격을 묘사합니다. 종말론적 왕국에서는 “저 세상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는 모두 불멸의 부활 생명 안에서 약함과 죽음을부터 구원받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의 일 속에서는 이 구원의 능력은 조금 밖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모든 병자와 절름발이가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모든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도 아닙니다. 복음서에는 죽었다가 생명이 다시 돌아오는 단지 세 번의 예가 있을 뿐입니다. 사람들은 고침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님 혹은 제자들과 직접적인 접촉이 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치유하는 힘은 아직은 우주적으로 작용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예수님과 그가 임무를 맡긴 사람들 안에만 있었습니다.(마태 10:8, 누가 10:9)
그리고 예수님과 접촉한 사람이 누구나 다 하나님 나라의 치유의 생명을 경험한 것은 아닙니다. 이런 육체적인 구원은 믿음의 반응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것은 무조건 작동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너희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육체적인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영적인 반응이 필요합니다. 치유의 기적이 그들에게는 중요하지만, 그것이 그 자체로 끝은 아닙니다. 치유가 메시야적 구원의 가장 높은 축복을 구성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사실은 마태 11:4~5의 문장 배열에서 나타납니다. 소경이 보며, 앉은 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입니다. 이 ‘복음’이 바로 예수님 자신의 현존이며, 그가 가난한 자들에게 가져온 기쁨과 교제입니다.
육체적 질환에서 구원받는 것이 영적인 구원의 외부적인 면이라는 사실은 귀신축출과 관련된 말에서 나타납니다. 이 기적은 하나님 나라의 현존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히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빈 집을 늑탈하기 위한 일차적인 작업일 뿐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된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그 삶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귀신은 일곱 다른 귀신을 데리고 들어올 수 있으며, 그 사람은 전보다 더 악화될 것입니다. 치유과 귀신축출은 구원에 대한 부정적인 설명입니다. 긍정적인 면은 하나님의 힘과 생명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구원과 영적인 면 사이의 연계는 열명의 문둥병자를 고친 사건에 나타납니다. 열 명 모두가 깨끗해졌고 치유되었습니다. 예수님께 사례하기 위해 돌아온 그 중의 한 사람인 사마리아 인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이것은 다른 치유 기적에서도 쓰인 같은 말들입니다. 우리는 나머지 아홉 명이 진정 치유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많은 주석가들은 그 본문에서 혼란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말들이 확실히 “영적”인 구원에 사용되었다는 사실에 비추어볼 때(누가 7:50) 우리는 나머지 아홉 명보다 그 한 사마리아 인에게 더 많은 축복이 부여되었다는 것에 동의할 것입니다. 그의 ‘구원’ 혹은 온전함은 육체적인 치유 이상이었습니다. 그것은 온전한 영적 상태를 함축합니다.
이 현재의 ‘구원’이 육체적일뿐 아니라 영적이라는 사실은 시몬의 집의 죄인인 한 여자의 예에서 증명됩니다. 그녀의 눈물과 애정의 표시가 그녀의 회개를 증명했습니다. 그녀에게 예수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치유의 기적도 없었습니다. 그녀의 질병은 도덕적이며 영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녀의 ‘구원’의 의미는 이 말에서 표현됩니다. “네 죄사함을 얻었느니라.”
죄사함의 선물
죄사함은 메시아적 구원의 더 깊은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님과 서기관 사이의 분쟁은 예수님께서 죄 사함을 선언했을 때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만이 죄를 사할 권세가 있기 때문에, 그런 예수님의 주장은 신성모독에 다름 아니었습니다.(마가 2:7) 서기관들의 전제에 비추어본다면 그들은 올바른 판단을 내린 것입니다.(시편 103:3, 이사야 43:25) 예언서에서 죄사함은 메시아 시대의 축복 중의 하나였습니다. 심판자이며, 통치자이며, 왕이신 주님이 그의 백성을 구원하여 더 이상 어떤 병도 없을 것인데, 주님께서 모든 죄악을 사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이사야 33:24) 구원받은 남은 자들은 그들의 죄가 바다의 깊은 곳으로 던져지기 때문에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Mic 7:18~20) 하나님은 새로운 언약을 만드시고, 그의 법을 마음에 새기셔서, 자신과의 완전한 교제와 죄사함을 선물하실 것입니다.(예레미야 31:31~34, 에스겔 18:31, 36:22~28) 모든 죄로부터 하나님의 백성을 깨끗케 할 샘물이 다윗의 집을 위해 열릴 것입니다.(Zech 13:1)
한 가지 경우를 제외하고, 이러한 일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이사야 53장은 사람들의 죄를 담당하고 그 자신을 죄를 위한 제물로 드리는 주의 종에 대해 이야기합니다.(이사야 53:11~12) 그러나 유대교는 3세기에 이르기까지 이 예언은 메시아에게 적용하지 않았습니다. 메시야가 그 자신의 권위로 죄사함을 약속한다고 말하는 문헌을 아직 우리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죄를 사하시지만, 유대교는 하나님의 정의와 그의 은총 사이의 긴장에 의해 형성된 문제에 대해 해답을 내린 적이 없습니다. 의로운 사람은 하나님께 자유롭게 죄사함을 받은 자가 아니라, 그의 공적이 그의 부채보다 큰 사람을 말합니다. 의로움은 심판 때의 신적인 면제이지만, 이 종말론적 면제는 공적 이론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서느냐는 문제는 그의 선행와 죄악 사이의 균형으로 결정됩니다. 선행이 죄보다 많으면 그는 면제됩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보아야, 예수님께서 자신의 권위로 자유로운 죄사함을 선포하셨을 때, 서기관들 사이에 야기되었던 놀라움과 경악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죄사함을 약속했고(마가 1:4), 예수님은 이 약속을 성취하셨습니다. 중풍병자를 치유한 것은 “인자가 땅에서 죄사함의 권세가 있다”(마가 2:10)는 것을 보여주는 외적 증거입니다. 인자는 다니엘 7:13에 나오는 지극히 높은 분을 나타내는 천상의 형상입니다. 그는 하늘 구름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를 가지고 오시고 인류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 말 속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이 천상의 심판자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이 천상의 심판자가 이 땅 위에 사람들 사이에 나타났으며 죄를 사하는 신적 특권을 수행합니다. 이것은 메시야적 구원이 현존한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 나라 개념에서 죄 사함이 핵심적이라는 것은 죄사함의 비유에 나타납니다.(마태 18:23~25) 그 비유는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의 죄사함과 인류 사이의 죄사함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죄사함은 인간 사이의 죄사함보다 먼저 일어나며, 인간의 죄사함의 조건이 됩니다. Jeremias 는 심판의 종말론적 요소를 강조하면서, 이 비유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가르친다고 했습니다. 종말론적 심판은 하나님의 죄사함이라는 선물을 먼저 경험한 것에 기초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죄사함이라는 이 자유로운 선물은 사람들에게 죄사함의 영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은 죄사함의 새로운 교리를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자들에게 죄사함의 새로운 경험을 가져오신 것입니다. 그는 시몬의 집에서 여자에게 하나님께서 그녀를 용서하신다는 교리나, 그녀에게 그녀가 구원을 찾는 길을 설명하신 게 아닙니다. 그는 그녀의 죄가 용서되었다고 선언하셨습니다.(누가 7:48) 이것이 그녀의 ‘구원’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선언하신 그것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현존은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인격 안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새로운 활동입니다. 이 활동을 통해 사람들에게 현재적인 경험을 통해 예언자들이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 안에서 약속했던 것들을 가져다 줍니다.
의로움의 선물
죄사함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 ‘의로움’입니다. 의로움은 일차적으로 윤리적인 의미가 아니라, 올바른 관계이며, 죄책으로부터의 신적인 면제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찾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찾는 것이며(마태 6:33), 하나님 나라를 받는 것은 그와 동반된 의로움을 받는 것을 뜻합니다.
유대교에서 의로움은 인간의 활동이었습니다. 랍비들은 의가 율법에 대한 복종과 자비의 실천으로 구성된 인간의 행위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의로움이 하나님의 요구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를 넘어서는 의가 요구됩니다.(마태 5:20) 이 의로움은 화, 욕정, 보복으로부터의 자유를 포함합니다.(마태 5:21~48) 그런 완전한 의로움을 달성하는 것이 인간의 노력에 맡겨진다면, 어느 누구도 그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분명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윤리적 가르침의 핵심이 있습니다. 자기 의를 폐기하고 아무 것도 가지지 않고 모든 것을 받아야만 하는 아이처럼 되어야 합니다. 서기관들은 자신을 낮추어서 하나님의 의의 선물을 받아야하지만, 그들의 의에 대한 자부심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기는 한, 그들은 하나님의 선물에 대한 필요성을 느낄 수 없습니다. 자기 의를 가진 바리새인에 대조되어 세리가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하나님의 자비에 완전히 맡겼습니다. 그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의로운 행동도, 자선의 행동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열려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누가 18:14)는 말은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명백하게 그의 의는 그 스스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우화의 가르침은 십자가에 대한 언급이 있다는 것만 빼고는 자유로운 칭의에 대한 바울의 교설과 같습니다.
산상 설교에서 말하는 의도 역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의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을 만족시킬 것에 대한 약속은 스스로 자신의 불의함을 인식하지만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올바름에 굶주리고 목말라있는 사람들에 대한 약속입니다. 공적에 대한 유대인의 사고에 반대하여, ‘dikaiosyne’(의)는 명백하게 하나님께서 그것을 찾는 사람에게 주시는 선물로 간주됩니다.
따라서 종말론적인 구원에 대해 예견하지 않았던 모습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의 많은 면에서 나타나며, 하나님 나라에 대한 당시의 용어들을 뛰어넘어 표현됩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새로운 가르침이 아니라 새로운 사건을 가져왔습니다. 사람들에게 종말론적 구원을 실제로 미리 맛볼 수 있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죄의 용서를 약속하기보다는 그것을 부여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미래의 그 나라에서 누릴 교제를 단순히 확인해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담지자인 자신과 함께 하는 교제로 사람들을 초청했습니다. 그는 단순히 심판의 날에 그들을 변호한다고 약속한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현재의 의로운 지위를 부여했습니다. 그는 육체적인 악으로부터의 종말론적 구속을 가르쳤을뿐만 아니라, 약함과 죽음으로부터 사람들을 구원하여 하나님 나라의 구원하는 능력을 직접 나타내셨습니다.
이것은 구원의 새로운 시대로써 하나님 나라가 현존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받는다는 것, 자신을 하나님의 통치에 맡긴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선물로 받는 것이며,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즐기는 것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성취의 시대는 현재이지만, 완성의 시간은 여전히 올 시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