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서 파노라마
요나서의 이야기는 유년 주일학교 어린이들이라도 뚜르르 할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정작 요나서를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주제(主題),
즉 하나님의 의도(意圖)는 알고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요나서의 중심점은
“요나도, 니느웨도, 큰 물고기도, 박 넝쿨도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의 손에 들려있는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요나서의 주제(主題)가 무엇일까요?
선교(宣敎) 사명입니까?
요나의 불순종입니까?
이방인의 구원문제입니까?
물론 이러한 문제들을 요나서를 통해서 교훈 받을 수는 있다하여도,
요나서를 통해서 말씀하시려는 중심주제는 아닌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해석들이 요나서의 주제를 이방인의 구원문제로 보고 요나에게 선교사명이 주어진 양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표면만을 볼 뿐 이면(裏面)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며,
성경의 역사성과 통일성을 무시하고 요나서를 동떨어진 독립적인 책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에서 교훈만을 구하고
하나님께서 이루어 오신 구속사(救贖史)라는 맥락,
즉 역사성을 무시하기 때문에 범하게 되는 한계(限界)입니다.
요나서의 주제
요나가 선지자로 세움을 받은 시대가 언제입니까?
여로보암 2세가 북 이스라엘의 왕으로 있을 때(왕하 14:25)입니다.
당시는 정치적으로는 번영을 누리고 있었지만은 신앙적으로는 여로보암 1세가 세운 송아지우상을 섬기고 있던 암흑기였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을 회개케 하기 위해서 세움 받은 요나에게
아닌 밤중에 홍두깨 내미는 식으로 선교사명이 주어진다는 말입니까?
당시는 이스라엘을 가리켜,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암 3:2) 하신
특별한 사명,
즉 선민 이스라엘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보내시려는 준비를 하고(요 4:22) 계시던 시대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에
이방인에 대한 선교사명은 그리스도가 오셔서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둘로 하나를 만드신”(엡 2:14) 후에,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는
사명으로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이스라엘은 메시아가 오실 통로로 거룩하게 구별(區別)이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또한 요나 선지자가 보냄을 받은 곳이 어디입니까?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입니다.
앗수르는 불원간 북 왕국 이스라엘을 정복하고, 그 여세를 몰아 남 왕국 유다도 정복하려는 두려운 적국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침략자라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하는 메시아 왕국을 파괴하려는 대적자(對敵者)로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는 심판 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나서의 주제는 무엇인가?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최우선적으로 누가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것일까요?
요나서를 기록케 하신 목적은 무엇일까요?
기록 된 요나서의 1차 독자는 누구들이었다고 여겨지십니까?
이러한 질문들을 가능케 하면서
요나서의 내용과 기록한 목적은 반드시 일치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유념해야만 합니다.
요나서의 내용은 니느웨에 관한 것이지만,
요나서의 기록 목적은
그들에게 들려주기 위해서 기록케 하신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요나, 아모스, 호세아는 다 같이 여로보암 2세가 40년 동안 왕위에 있을 때에 세움 받은 선지자(왕하 14:25, 암 1:1, 호 1:1)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남방에 있는 드고아의 목자인 아모스를 부르셔서 이스라엘로 보내시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께서 너희를 <쳐서 이르시는> 말씀을 들으라”(암 1:1, 3;1) 하고 외치게 하셨고,
아밋대의 아들 요나를 부르셔서
니느웨로 보내시면서,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욘 1:1-2) 하고 명하신 셈입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염려컨대 저가 불같이 요셉의 집에 내리사 멸하시리니 벧엘에서 그 불들을 끌 자가 없을까 하노라”(암 5:6) 하고 외쳤습니다.
요나도,
“그 성에 들어가며 곧 하룻길을 행하며 외쳐 가로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고 외쳤습니다.
이를 듣고 이스라엘과 니느웨는 각각 어떻게 반응을 할 것인가?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욘 3:4-5)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에서는 더 큰 회개운동이 일어났어야 할 것이 아닌가? 아닙니다.
아모스 4장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회개케 하시기 위해서,
“양식이 떨어지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한재(旱災)로 회개를 촉구하셨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 풍재와 깜부기와 메뚜기 재앙으로 치셨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 염병으로 임하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 성읍 무너뜨리기를 소돔과 고모라 같이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십니다.
이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셈입니다.
멸망 받아 마땅한 이방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는 것을 보고도,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내가 이와 같이 네게 행하리라 내가 이것을 네게 행하리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암4:12),
즉 심판 받을 준비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입니까?
이는 바울이 말씀한 바와 같이,
니느웨가 구원 얻는 것을 보고 이스라엘로 “시기 나게”(롬 11:11) 하여
저들로 구원 얻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긍휼이요,
오래 참으심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나서의 일차 독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요,
이를 통해서 회개하기를 촉구하시는 것이 요나서를 기록케 하신 의도로 할 수가 있습니다.
요나의 표적과 그리스도의 표적
그렇다면 요나서가 신약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가?
이에 대해 주님께서는,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하고 요나가 삼일 삼야 물고기 뱃속에 있다가 살아 나온
이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사한지 사흘만에 부활하실 것에 대한
“표적”으로 해석해 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눅 11:29-30) 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되었다” 하고 말씀하시는데,
요나의 무엇이 저들에게 회개하지 않을 수 없도록 표적으로 작용을 했을까요?
요나가, “삼일 삼야를 물고기 배에 있다가,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명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 하니라”(욘 1:17, 2:10) 한 사건입니다.
니느웨에서 불가사의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대대적인 회개운동이 일어나게 된 동기가 “요나의 표적”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눅 11:30) 하신
주님께서 이 세대에 믿을만한 “표적”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
성경은 말씀합니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행 17:30-31) 하신 “죽으시고 다시 사신” 표적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흘 동안 무덤에 계시다가 다시 살아나신
부활 사건은 요나의 표적보다 더 큰 표적이었던 것입니다.
만일 이 표적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에게 더 보여줄 표적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 세움 받은 증거자들은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는데 초점을 맞추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리고 결론은
“회개하기만 하면 심판을 면하게 되고 구원을 얻게 된다”는 데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나서를 통해서
궁극적으로 이후 시대에 말씀하시려는 계시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요나보다 더 크고 믿을만한
“그리스도의 표적”을 보고도 믿지 않는다면,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悔改)하였음이어니와 요나 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마 12:41) 하시는 것입니다.
이로 보건대
요나서의 주제는 선교사명이 아니라, “회개”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는 제 주장이 아니라 요나서를 들어서 그렇게 증거해주고 계시는
주님의 해석인 것입니다.
선지서를 기록케 하신 하나님의 의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전후해서 문서 선지자들을 집중적으로 투입하셨습니다.
구두(口頭)로 전하게 하신 것만이 아니라,
특이한 것은 그들에게 후대에 전하여주기 위해서 메시지를 기록케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서 선지자”들이 16명이나 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메시지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 죄를 책망합니다.
㉡ 심판을 경고합니다.
㉢ 그리고 결론에 가서는 회복, 즉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구원하여주실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목적을 달성한 선지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즉 회개케 하여 심판을 면케 하지를 못했습니다.
이는 자력으로는, 즉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구원의 소망이 없음을 말씀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중에 한 건의 예외가 요나서입니다.
요나의 경고를 듣고 니느웨성은 회개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도 성공한 선지자는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니느웨의 회개를 들어서
이스라엘을 회개케 하시려는 원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표적”을 통해서 우리에게 소망을 말씀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선지서들을 기록케 하셔서
우리에게 전해주신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가?
결국 요나서의 주제도,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하신
“회개와, 복음”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나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요나서 2장은 회개하는 기도로 등장합니다.
그 기도는 이 사건을 단순한 육체적인 문제로만 보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물고기 뱃속에서 살려달라”고만 애원하고 있지 않습니다.
“물이 나를 둘렀으되 영혼까지 하였사오며”(2:5) 하고 영적인 문제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하는 요나의 기도는,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2:9) 하는 성경의 대주제로 마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나서의 주제는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구원초청이라고 말씀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회개하기를 기대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제일 먼저 요나 자신입니다.
요나서에서는
“선지자”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도망가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요나서에서는
풍랑도, 물고기도, 박 넝쿨도, 심지어 벌레도 순종하는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은 불순종하고 반대방향으로 도망을 쳤던 것입니다.
다음은 이스라엘입니다.
요나서는,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4:11) 하는 말씀으로 끝맺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니느웨를 아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니느웨 보다도 이스라엘을 더욱 아끼셨습니다.
그 아끼심의 정도가
,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암 3:2) 하신 말씀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요나서는 그들의 회개를 촉구하기 위해서 기록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니느웨, 즉 이방인들인 우리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기뻐하십니다.
요나도 회개했고,
니느웨도 회개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니느웨의 표적을 보고도 끝내 회개하지 않다가 멸망을 당했습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하나님
요나서에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으로 계시되어 있는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4:2)으로 계시되어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일찍이 모세에게,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출 34:6) 하고 계시하신 바입니다.
이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출애굽기에서 시작하여 민수기(14:18)와, 역대하(30:9)와, 느헤미야(9:17)와 시편(86:15, 103:8)을 거쳐 요엘 선지자도,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욜 2:13) 하고 이어져 내려옴으로 성경의 축(軸)을 이루고 있는 대단히 중요한 하나님의 자기계시입니다.
이러한 하나님께서
회개를 촉구하시는 궁극적인 목표는 당신입니다.
형제여,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회개하고 복음을 믿고 구원을 얻으시겠습니까?
아니면 돌이키지 않다가 멸망을 당하고야 말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요나서를 통해서
, 완악하고 패역한 이스라엘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셈입니다.
“저 이방인의 성 니느웨를 보라.
저 이방인들은 요나의 경고를 듣고 회개하여 그 성이 멸망당하지 않고 구원을 얻었다.
이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면 살수가 있다.
그러나 이것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보여줄 표적은 없다
이것이 최후 통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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