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애가 파노라마
주제 : 우리의 날을 새롭게 하사 회복하여 주소서
애가서는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당한 후에
예레미야 선지자가 폐허가 된 예루살렘과 백성들의 참담한 현실을 바라보면서 지은 다섯 편의 슬픈 노래입니다.
다니엘이 바벨론에 있었다면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에 있었습니다.
“슬프다 이 성이여
본래는 거민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히 앉았는고
본래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고
본래는 열방 중에 공주 되었던 자가 이제는 조공 드리는 자가 되었도다
밤새도록 애곡하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사랑하던 자 중에 위로하는 자가 없고 친구도 다 배반하여 원수가 되었도다”(1:1-2) 하고 시작이 됩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 애가를 통해서 말씀하려는 바(신학적 가치)가 무엇이며,
우리와는 무슨 상관(적용)이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전 2:16) 한, “주의 마음”을 아는 일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의문(儀文)만을 보게 되고 신령한 뜻을 깨닫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애가서에 나타난 주의 마음
그러므로 애가서를 대할 때에 예레미야의 눈물만을 볼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 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눅 13:34),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19-41-44) 한
, 주님의 눈물을 보며 마음을 품고 대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성전이 불에 타게 된 원인이
예레미야 애가 당시나 주님 당시나 동일한 것이며, 이는 구속사의 동일선상에서 동일한 원인에 의하여 일어난 동일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당시도
예루살렘을 암탉이 새끼를 품음과 같이 품으려 하셨고,
멸망당하는 예루살렘을 보시며,
“나의 심령이 너희 교만을 인하여 은근히 곡할 것이며 여호와의 양 무리가 사로잡힘을 인하여 눈물을 흘려 통곡하리라”(렘 13:17) 하고,
그 때도 눈물을 흘리셨기 때문입니다.
구속사의 동일 선상에서 일어난 두 번의 심판
그렇다면 예루살렘이 심판 받게 된 원인이 무엇인가?
“저의 죄가 많음으로(1:5),
예루살렘이 크게 범죄하므로(1:8),
나의 패역이 심히 큼이니이다”(1:20)
한 패역에 대한 징벌을 받아서입니다. 그런데 이점에서 분별력을 가져야할 점은 저들의 죄가 윤리적인 죄 때문만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예레미야서에서 보는 바대로 심판 당하게 된 치명적인 죄는 우상숭배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받으리니”(창 22:18) 하고 세워주신 메시아언약을 배신했음을 의미합니다.
이점에 확고하지 못하기 때문에 본문에서 교훈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우상을 숭배했는가?
예레미야 44:15-19절에 그 이유를 자신들의 입으로 분명히 말하고 있는데,
그리스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우상을 통해서 복 받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기복신앙에 깊이 빠져있는 현대교회의 병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유대인과 예루살렘 거민 중에 반역(反逆)이 있도다”(렘 11:9),
“내가 그물을 그 위에 베풀며 내 올무에 걸리게 하여 끌고 바벨론으로 가서 나를 반역한 그 반역을 거기서 국문할지며”(겔 17:20) 하십니다
. 예루살렘이 로마에 의하여 멸망당한 원인도
동일하게 메시아를 배척한 반역죄(反逆罪) 때문임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최후심판 날에도
복음을 믿지 아니한 자들과
끝까지 지키지 못하고 변절한 자들 위에 진노는 임하게 될 것입니다.
반역죄에 대한 진노
이점이 본문에 분명히 드러납니다.
“성막을 헐어버리시며,
절기와 안식일을 잊어버리게 하시며(2:6),
여호와께서 또 자기 제단을 버리시며 자기 성소를 미워하시며”(2:7) 합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들입니다
.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기 제단을 버리시고 자기 성소를 미워하시다니,
그리하여 불태워버리시다니, 어찌하여 이렇게 하셨단 말인가?
메시아언약을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성막과, 제물과, 절기와, 안식일”이 무엇에 대한 상징인가를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메시아언약을 상실한 성전, 제물, 절기는 아무 의미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점을 성전을 건축할 당시 솔로몬에게 경고한 바입니다.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숭배하면
내가 이스라엘을 나의 준 땅에서 끊어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전(殿)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버리리니”(왕상 9:6-7) 하셨습니다.
이점을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아언약을 망각한 체 드려지는 제사란 우상숭배나 다를 바가 없다(사 66:3)고 통렬하게 책망합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성전 문 앞에 서서 예배하러 들어가는 자들을 향해서,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렘 7:4) 하고 외치라 명하셨습니다.
교회의 표지(標識)가 무엇인가?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는 여부에 달린 것입니다.
복음을 상실한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 멸망당하게 된 치명적인 죄가 “우상숭배”요,
우상을 숭배한다는 것은 다름 아닌 메시아언약에 대한 배신임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의 설교에 틀린 점이 하나도 없다해서 옳은 것은 아닙니다.
먼저, 그리고 더 많이 강조하고, 증거 해야할, 사활이 걸려있는 복음을, 조금밖에 전하지 않거나, 말하지 않고 “복 받으라”는 말만 한다면 그것은 명백한 잘못인 것입니다.
“축복, 축복”하는데 이는
“복음”이 놓여있어야 할 자리를 “탐심”이 차지하고 있는 것이며,
복음을 옆으로 밀어놓고 “금송아지”를 섬기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하고 선언합니다.
탐심(축복)은 우상숭배니라
그러면 메시아언약을 상실하게 된 책임이 누구에게 있단 말인가?
“네 선지자들이
네게 대하여 헛되고 어리석은 묵시를 보았으므로
네 죄악을 드러내어서 네 사로잡힌 것을 돌이키지 못하였도다
저희가 거짓 경고와 미혹케 할 것만 보았도다”(2:14) 하고,
말씀을 맡은 선지자에게 있다고 분명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네 죄악을 드러내지 못하고, 미혹케 할 것만 보았다”는 말씀은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는데도,
“그들이 내 딸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 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렘 8:11) 하고 백성들에게 영합하는 설교만 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4:13절에서도 멸망당하게 된 책임이,
“그 선지자들의 죄와 제사장들의 죄악을 인함이니” 합니다.
그리하여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성소에서 죽임을 당하도록(2:20) 버려 두신 것입니다.
이점을 심각하게 받아야함은
고대하던 그리스도가 오셨는데도 배척하였다가 또다시 예루살렘이 심판을 당하게 된 책임도 동일하게 설교자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눅 11:52) 하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재림의 날에도
이런 악순환이 반복이 될 것이고, 그런 징후는 이미 농후한 것입니다.
선지자와 제사장의 죄악을 인함이라
애가서의 중심 장은 3장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장들이 22절로 되어 있는데,
3장은 66절로 되어 있습니다.
3장은, “여호와의 노하신 매로 인하여 고난 당한 자는 내로라”(3:1) 하고 시작이 됩니다. 그러면 여호와의 매로 인하여 고난 당한 “나”는 누군가?
1차 적으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구약교회입니다
. 파괴당한 성(城)과 성전(聖殿)을 가리킵니다.
선지자는 이 모든 것을 한 몸의 지체처럼 “하나”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구속사의 관점으로 보면
몸 된 구약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 됩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첫 언약(구약시대)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셨다”(히 9:15)고 말씀하고 있으며,
신구약을 막론하고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서만이 가능하여 지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렘 31:31) 하신
“새 언약”을 예언한 선지자입니다.
주님은 잡히시던 날 밤, 다시 말하면 헐리게 될 전날 밤에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 22:20)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의 노하신 매로 인하여 성전이 파괴당한 예표를 통해서,
“성막, 성전”으로 임마누엘 하셔서 고난을 당하실 실체(實體)를 본다는 것은 결코 비약이 아닙니다.
솔로몬의 성전이 헐리게 된 것은 자신들의 죄로 인한 것이었으나,
성전 된 그리스도의 몸이 “헐리게”(요 2:19) 된 것은 우리들의 죄를 대신하여 당하신 고난이라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이 성전을 헐라
① 이를 음미해 보면,
“처녀 시온의 장막에 노를 불처럼 쏟으셨도다”(2:4) 합니다.
“진노”는 애가서의 핵심 단어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구약시대 내내 “길이 참으시던”(롬 3:25) 진노를
자기 아들 위에 쏟으신 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② “내가 부르짖어 도움을 구하나 내 기도를 물리치시며”(3:8) 하고,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려 오고,
③ “이스라엘의 아름다운 것을 하늘에서 땅에 던지셨음이여
진노하신 날에 그 발등상(성전)을 기억지 아니하셨도다”(2:1) 하고
버림당하시는 모습이 그려져 있고,
④ “내 몸을 찢으시며, 활을 당기고 나로 과녁을 삼으심이여
전통의 살로 내 허리를 맞추셨도다”(3:11-13) 하고,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시는 모습과,
⑤ “나는 내 모든 백성에게 조롱거리 곧 종일토록 그들의 노랫거리가 되었도다(3:14),
무릇 지나가는 자는 다 너를 향하여 박장하며 처녀 예루살렘을 향하여 비소하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기를 온전한 영광이라 천하의 희락이라 일컫던 성이 이성이냐”(2:15) 하며,
비웃는 어리석은 군중들의 모습도 보입니다.
⑥ “나를 쓴 것으로 배불리시고 쑥으로 취케 하셨으며”(3:15) 하고
쓸개 탄 포도주를 받으시는 광경과,
⑦ “전에는 존귀한 자의 몸이, 이제는 그 얼굴이 숯보다 검고 그 가죽이 뼈에 붙어 막대기 같이 말랐으니”(4:7-8) 하고
운명하신 주님의 모습도 보이고,
⑧ “저희가 내 생명을 끊으려고 나를 구덩이에 넣고 그 위에 돌을 던짐이여 물이 내 머리에 넘치니 내가 스스로 이르기를 이제는 멸절되었도다 하도다”(3:53-54) 하고
장사되고, 만사가 끝장이 난 것으로 여기는 절망도 봅니다.
⑨ “우리의 콧김 곧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가 저희 함정에 빠졌음이여”(4:20) 하고,
잠시나마 사망이 승리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으나,
⑩ 그러나, “내가 주께 아뢴 날에 주께서 가까이 하여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하셨나이다”(3:57) 하고
부활하신 기쁜 소식을 듣게 됩니다.
사흘만에 다시 세우리라
그러므로 “죄, 진노, 애통”으로 가득 찬 애가(哀歌) 속에서,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3:32) 하는
“자비, 긍휼”을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3:33) 합니다.
그리하여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3:21) 하고,
“소망”을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렘 29:11) 하십니다.
이 “평안, 소망”이
짐승이 죽임을 당하는 첫 언약의 의식으로 가능하여지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노하신 매로 인하여 고난 당한 자는 내로라” 하는,
대속으로만이 가능하여 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3:26) 합니다.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다”(3:21)고 진술하고 있는데
무엇을 회상했을 것인가?
아브라함에게 세워주신 언약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유월절 양의 피로 구원하여주신 출애굽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언약하신 바를 묵묵히 이루어 나오신 하나님의 행사를 회상했을 것입니다.
사람이 한 일을 생각하면 절망뿐입니다.
형제여, 우리도 회상하기를 게을리 하지 맙시다
우리의 현실이 아무리 낙망스럽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크신
“자비와 긍휼”을 묵상하노라면,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3:23) 하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그러므로 애가서의 기록목적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죄가 얼마나 비참한 결과를 가져오는가 하는 죄의 사악성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이 멸망당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셔야만 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를 배척한다면 영원한 멸망이라는 사실입니다.
둘째는,
자력구원의 불가능성입니다.
구약의 역사가 예루살렘이 멸망당하는 것으로 끝나고 있음이 이를 단적으로 증언합니다. 그러므로 애가를 다룰 때에,
“저들은 범죄하여 멸망했으나 우리는 죄를 범하지 말자”는 식으로 교훈만을 말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렇게 한다면 행위구원론이 되어, 복음은 필요 없는 것이 되고 주님은 헛되이 죽으신 것이 되고 맙니다.
애가서도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입니다
. 그러므로 애가를 통해서도 그리스도를 만나야 하고 복음이 증거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애가는 마지막에 이르러,
“우리의 날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5:21) 하고 간구합니다.
하나님은 대답하십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사 43:18-19).
애가서는,
“주께서 우리를 아주 버리셨사오며 우리에게 진노하심이 특심하시니이다”(5:22) 하는
탄원으로 마치고 있는데,
하나님은 대답하십니다
.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4-15). 아멘.
'구속사 !!! 구원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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