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강해] 엡 1:20 - 22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 설교 : 전준식 목사
서양의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알려 주는 이야기 중에 새끼 독수리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미 독수리가 새끼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생겨서 어미 독수리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어느 농부가 이 새끼 독수리를 발견하고는 자신의 농장으로 데려가 닭장에서 병아리 들과 함께 키웠습니다. 그 새끼 독수리는 병아리 들과 같이 자라게 된 것입니다. 새끼 독수리가 주변을 둘러 보니 다 병아리들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새끼독수리는 자기도 병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단지 자기는 다른 병아리와 조금 다를 뿐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병아리의 행동을 보방했습니다. 병아리처럼 걷고, 병아리처럼 놀고, 병아리처럼 먹고 병아리처럼 노래했습니다. 그러면서 자라갔습니다. 이 새끼 독수리는 계속 자신이 병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바람이 몹시 불던 날, 닭장 밖으로 아주 멋지게 생긴 새 한 마리가 창공을 차고 날아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 새끼 독수리가 옆에 있는 병아리에게 물었습니다. 저게 무슨 새지? 그러자 병아리들이 대답했습니다. 너는 저 새도 모르냐? 우리 새들 가운데 왕자인 독수리야. 독수리만이 저렇게 날 수 있어. 그러나 우리는 닭새끼야. 우리는 병아리야 우리는 날 수 없어. 이 말을 들은 새끼 독수리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맞아. 나는 닭 새끼야 나는 병아리야 나는 날 수 없어 이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살다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에 하나님의 능력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바울의 기도를 묵상했습니다. 우리가 다시 한번 기억해야 할 것은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들 가운데 능력으로 역사 하시는 것을 알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서 내리신 능력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믿으십니까? 아직도 우리는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이 아직도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면 그 능력이란 무엇입니까? 돈의 능력입니까? 건강의 능력입니까? 세상의 힘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한가지 능력을 위하여 기도한다면 그것은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능력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을 말씀하셨습니다.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의 공통점과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공통점은 집을 짓는 다는 사실입니다. 같은 재료를 가지고 집을 짓습니다. 같은 기술과 같은 정성으로 집을 짓습니다. 그러나 다른 점은 기초다 다르다는 점입니다. 한 사람은 반석이요 한 사람은 모래입니다. 똑 같은 집을 짓고 있는데 그 기초가 서로 다른 것입니다. 똑 같은 정성과 재료와 시간을 들여서 지은 집이 하나는 견고하고 하나는 비가 오고 창수가 나면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너진 집을 지은 사람은 다시 그 집을 지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반석 위에 집을 세운 사람은 그런 수고를 다시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무너진 사람은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 할 것입니다. 하나님 다시 한번 집을 지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돈을 허락해 주십시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처럼 늘 반복합니다. 능력을 주십시오. 능력을 부어 주십시오. 그러나 반석 위에 집을 세운 사람은 어떻습니까? 이미 주신 능력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반석이라고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 반석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반석 위에 집을 세운 사람은 능력이 있습니다. 능력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모래 위에 우리 인생의 기초를 세우면 우리는 늘 반복되는 인생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을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우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반복하며 기도하지 않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반석 그 자체가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 능력이 우리 인생을 지키고 보호하십니다. 그 반석의 능력이 우리를 무너지게 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반석 위에서 말씀을 들어야 하고 반석 위에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반석이 아닌 모래 위에서 예배를 드리거나 말씀을 들으면 우리는 영원한 능력을 맛보지 못합니다. 이에 대해서 좀더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하여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국제적으로 설교를 하고 다니는 아주 유명한 설교자였습니다. 시카코에 있는 큰 교회의 목사였습니다. 삼십년 동안이나 설교를 해 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뇌졸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완전히 전신 마비가 되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 분의 인생에 큰 폭풍이 몰아 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목사님은 우울증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이 분의 마음은 점점 완악해져 갔습니다. 이 사람은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위해서 삼십년 동안이나 봉사해왔습니다. 저는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해 왔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증거했는데 이것이 나에게 보상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까? 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저주 했습니다. 이분의 인생은 이제 완전히 지쳐버렸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필리핀에서 사역했던 존이란 선교사입니다. 이 선교사는 미국에서 성경학교를 졸업하고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신체가 마비되는 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이제 사역의 열매를 맺으려고 하는 때에 몸에 마비가 온 것입니다. 목 아래로는 움직일 수가 없게 되어 누워 있는 상태로 들것에 들려 다녀야만 했습니다. 그런데도 이 선교사님은 하나님 앞에 감사했습니다. 후에 이 분은 기독교 서점을 경영하게 되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 분에게 와서 자신들의 문제를 상담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선교사님은 능력을 달라고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이 선교사님 안에는 이미 능력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여러분 가운데 이미 능력이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또 다른 능력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안에 능력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가장 큰 능력은 무엇입니까?-- 20절 이 세상에 사는 사람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죽음입니다. 아무리 힘센 장수라고 하더라도 사망을 이긴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리 살려고 몸부림쳐도 우리는 죽는 것입니다. 사망의 쏘는 힘이 얼마나 강한지 한번 목표를 항하여 쏘면 여지없이 죽음의 자리에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었지만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여러분! 창세기 1장을 보시면 이 부활을 말씀하시고 계심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하루 하루 창조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녁이 되니 아침이 되니라. 저녁이 되니 아침이 되니라.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죽음의 시간 다음에 반드시 아침 소망이 온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아침에서 어두움으로 끝난 분이 아니라 어두움에서 아침으로 나아가게 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에게로 가면 부활하는 것입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시는 능력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의 능력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능력입니다. 그 부활을 내가 받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도 나는 다시 사는 능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내가 아무리 지쳐있고 소망이 없어 죽은 것처럼 보여도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은 우리를 다시 살려내십니다. 기독교는 사상체계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능력입니다. 힘입니다. 환희입니다. 어떤 죄인도 살려 낼 수 있습니다. 어떤 타락한 자도 다시 회복시킬 수 있습니다. 아무리 소망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복음은 부활의 능력은 소망을 줄 수 있습니다. 앞으로 에베소 교회는 예수님 때문에 손해도 보고 매도 맞게 될 것입니다. 억울함도 당할 것입니다. 이런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반드시 회복이 있다. 현재 고난은 장차 다가올 영광과 족히 비교 할 수 없는 부활이 있다 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능력 때문에 이 땅에서 손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매도 맞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인생이 죽음입니까? 어두움입니까? 쓴 맛입니까? 이런 분들에게 부활의 능력이 있기를 선포합니다. 이제 억울해 하지 마십시오. 절망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부활의 능력으로 즐거워하십시오. 감사하십시오. 누리십시오. 우리 가운데 부활의 능력이 이 모든 것을 회복시키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어디에 자리하십니까?--20절 승천하셔서 하늘에 오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우편에 앉게 하셨습니다. 오른 편에 앉아 있다는 것은 권위를 나타냅니다. 오른편에 앉아 있다는 것은 대신 그 권위를 행사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끝난 인생인 그리스도를 부활하게 하시고 그토록 높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가장 많은 것을 버렸으며 가장 위대한 사랑을 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런 사람을 가장 존귀하게 높이십니다. 예수님은 가장 큰 것을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모든 영광을 다 버리셨습니다. 그의 능력과 존귀와 아름다움을 다 버리셨습니다. 그것도 그냥 버리신 것이 아니고 십자가 위에서 비참하게 죽는 자리까지 가셨습니다. 죽기까지 낮아지셨습니다. 그리고 도저히 사랑할 이유가 없는 우리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어주는 사람을 높이 들어 올리십니다.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에게 자기 돈이나 시간을 써가면서 이렇게 수고를 아끼지 않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높이십니다. 한번은 예수님의 제자 중 세배대의 두 아들이 어머니를 앞 세워 예수님께 인사 청탁을 했습니다. 영광의 자리에 앉을 때 주님의 보좌의 우편과 좌편에 아들 하나씩을 앉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나의 받을 잔을 받으며 나의 받을 세례를 받을 수 있겠느냐고 물어보셨습니다. 나처럼 남을 섬길 수 있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사람들을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자기 모든 것을 다 버릴 수 있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식사자리에 초대를 받아 가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문화 가운데 종이 손님들에게 물을 떠다 발을 씻겨 주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밥 먹을 시간이 되어도 물 떠다 주는 사람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다 잘난 사람들만 모여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일어날 기미가 보이질 않는 거예요. 베드로가 수석인데 베드로 체면에 어떻게 일어납니까? 가롯 유다가 적어도 공부를 많이 한 지식인인데 어떻게 일어납니까? 이때 예수님이 일어나신 것입니다. 그래 내가 하지. 하시면서 허리에 수건을 동이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대로 내 위치와 가진 것을 버린 사람이 더 존귀한 자리에 앉게 될 것입니다. 지난 주에 wec 이사회를 저희 교회에서 했습니다. 한 20명 남짓 오실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46명이나 오셨습니다. 거기에는 목사님도 계시고 장로님도 계시고 권사님들도 계십니다. 우리 장로님들께서 오셔서 도와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장로님들이 그 분들에게 아주 아름다운 섬김을 보여 주신 것이 있습니다. 너무나 사람들이 많이 와서 미쳐 국을 끓여서 대접에 담아야 하는데 그럴 시간이 없자 우리 최 장로님께서 국그릇을 들고 다니시면서 국자로 퍼주셨습니다. 나 장로님께서는 밥을 날라다 주셨습니다. 거기에 모여있던 다른 교회 장로님들 목사님들이 처음에 집사인가보다 라고 생각했다가 장로님이라고 소개하자 충격을 받은 얼굴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에 우리 신림교회 영성이 있습니다. 교회의 권위는 낮아짐으로 발을 씻겨 주는 곳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서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오직 순수한 마음으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결코 그냥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반드시 높이 십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예수님처럼 자꾸 남을 대접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자꾸 남에게 주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시간을 드리십시오. 교회에 좀 일찍 나오셔서 의자를 나르는 섬김을 하십시오. 마당에 자동차 주차를 도와 드리십시오. 그리고 예배를 드리면 우리는 가장 완벽한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반드시 기억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의 우편에 앉게 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부활의 능력과 함께 예수님에게 다음과 같은 권위를 주셨습니다.-- 21절 원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하나님의 법 안에서 이루어지는 질서의 세계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이 질서가 무너졌습니다. 이제 인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말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죽음이 명령하는 대로 인간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하게 하셔서 죽음의 말을 듣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인간이 죄를 지은 이래로 늘 이 세상을 독점하고 있었던 악한 영들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악한 영의 세계에 구조조정이 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 믿는 자들로 하여금 죄가 무엇인지 밝히고 드러내게 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는 곳마다 죄를 폭로하고 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묶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신의 잃어버렸던 가치를 되찾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단이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제부터 사단은 우리에게 명령 할 수 없는 패배한 존재입니다. 오직 예수님 만이 하나님의 오른편에 있는 분이요 오직 예수님 만이 이 세계를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이제 악한 영들에게 끌려 다니지 마시고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삼아 여러분의 영적 세계에 영적인 구조 조정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설교 : 전준식 목사
서양의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알려 주는 이야기 중에 새끼 독수리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미 독수리가 새끼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생겨서 어미 독수리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어느 농부가 이 새끼 독수리를 발견하고는 자신의 농장으로 데려가 닭장에서 병아리 들과 함께 키웠습니다. 그 새끼 독수리는 병아리 들과 같이 자라게 된 것입니다. 새끼 독수리가 주변을 둘러 보니 다 병아리들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새끼독수리는 자기도 병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단지 자기는 다른 병아리와 조금 다를 뿐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병아리의 행동을 보방했습니다. 병아리처럼 걷고, 병아리처럼 놀고, 병아리처럼 먹고 병아리처럼 노래했습니다. 그러면서 자라갔습니다. 이 새끼 독수리는 계속 자신이 병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바람이 몹시 불던 날, 닭장 밖으로 아주 멋지게 생긴 새 한 마리가 창공을 차고 날아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 새끼 독수리가 옆에 있는 병아리에게 물었습니다. 저게 무슨 새지? 그러자 병아리들이 대답했습니다. 너는 저 새도 모르냐? 우리 새들 가운데 왕자인 독수리야. 독수리만이 저렇게 날 수 있어. 그러나 우리는 닭새끼야. 우리는 병아리야 우리는 날 수 없어. 이 말을 들은 새끼 독수리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맞아. 나는 닭 새끼야 나는 병아리야 나는 날 수 없어 이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살다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에 하나님의 능력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바울의 기도를 묵상했습니다. 우리가 다시 한번 기억해야 할 것은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들 가운데 능력으로 역사 하시는 것을 알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서 내리신 능력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믿으십니까? 아직도 우리는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이 아직도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면 그 능력이란 무엇입니까? 돈의 능력입니까? 건강의 능력입니까? 세상의 힘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한가지 능력을 위하여 기도한다면 그것은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능력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을 말씀하셨습니다.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의 공통점과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공통점은 집을 짓는 다는 사실입니다. 같은 재료를 가지고 집을 짓습니다. 같은 기술과 같은 정성으로 집을 짓습니다. 그러나 다른 점은 기초다 다르다는 점입니다. 한 사람은 반석이요 한 사람은 모래입니다. 똑 같은 집을 짓고 있는데 그 기초가 서로 다른 것입니다. 똑 같은 정성과 재료와 시간을 들여서 지은 집이 하나는 견고하고 하나는 비가 오고 창수가 나면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너진 집을 지은 사람은 다시 그 집을 지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반석 위에 집을 세운 사람은 그런 수고를 다시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무너진 사람은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 할 것입니다. 하나님 다시 한번 집을 지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돈을 허락해 주십시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처럼 늘 반복합니다. 능력을 주십시오. 능력을 부어 주십시오. 그러나 반석 위에 집을 세운 사람은 어떻습니까? 이미 주신 능력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반석이라고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 반석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반석 위에 집을 세운 사람은 능력이 있습니다. 능력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모래 위에 우리 인생의 기초를 세우면 우리는 늘 반복되는 인생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을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우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반복하며 기도하지 않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반석 그 자체가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 능력이 우리 인생을 지키고 보호하십니다. 그 반석의 능력이 우리를 무너지게 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반석 위에서 말씀을 들어야 하고 반석 위에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반석이 아닌 모래 위에서 예배를 드리거나 말씀을 들으면 우리는 영원한 능력을 맛보지 못합니다. 이에 대해서 좀더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하여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국제적으로 설교를 하고 다니는 아주 유명한 설교자였습니다. 시카코에 있는 큰 교회의 목사였습니다. 삼십년 동안이나 설교를 해 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뇌졸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완전히 전신 마비가 되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 분의 인생에 큰 폭풍이 몰아 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목사님은 우울증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이 분의 마음은 점점 완악해져 갔습니다. 이 사람은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위해서 삼십년 동안이나 봉사해왔습니다. 저는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해 왔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증거했는데 이것이 나에게 보상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까? 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저주 했습니다. 이분의 인생은 이제 완전히 지쳐버렸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필리핀에서 사역했던 존이란 선교사입니다. 이 선교사는 미국에서 성경학교를 졸업하고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신체가 마비되는 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이제 사역의 열매를 맺으려고 하는 때에 몸에 마비가 온 것입니다. 목 아래로는 움직일 수가 없게 되어 누워 있는 상태로 들것에 들려 다녀야만 했습니다. 그런데도 이 선교사님은 하나님 앞에 감사했습니다. 후에 이 분은 기독교 서점을 경영하게 되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 분에게 와서 자신들의 문제를 상담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선교사님은 능력을 달라고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이 선교사님 안에는 이미 능력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여러분 가운데 이미 능력이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또 다른 능력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안에 능력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가장 큰 능력은 무엇입니까?-- 20절 이 세상에 사는 사람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죽음입니다. 아무리 힘센 장수라고 하더라도 사망을 이긴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리 살려고 몸부림쳐도 우리는 죽는 것입니다. 사망의 쏘는 힘이 얼마나 강한지 한번 목표를 항하여 쏘면 여지없이 죽음의 자리에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었지만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여러분! 창세기 1장을 보시면 이 부활을 말씀하시고 계심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하루 하루 창조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녁이 되니 아침이 되니라. 저녁이 되니 아침이 되니라.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죽음의 시간 다음에 반드시 아침 소망이 온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아침에서 어두움으로 끝난 분이 아니라 어두움에서 아침으로 나아가게 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에게로 가면 부활하는 것입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시는 능력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의 능력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능력입니다. 그 부활을 내가 받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도 나는 다시 사는 능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내가 아무리 지쳐있고 소망이 없어 죽은 것처럼 보여도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은 우리를 다시 살려내십니다. 기독교는 사상체계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능력입니다. 힘입니다. 환희입니다. 어떤 죄인도 살려 낼 수 있습니다. 어떤 타락한 자도 다시 회복시킬 수 있습니다. 아무리 소망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복음은 부활의 능력은 소망을 줄 수 있습니다. 앞으로 에베소 교회는 예수님 때문에 손해도 보고 매도 맞게 될 것입니다. 억울함도 당할 것입니다. 이런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반드시 회복이 있다. 현재 고난은 장차 다가올 영광과 족히 비교 할 수 없는 부활이 있다 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능력 때문에 이 땅에서 손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매도 맞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인생이 죽음입니까? 어두움입니까? 쓴 맛입니까? 이런 분들에게 부활의 능력이 있기를 선포합니다. 이제 억울해 하지 마십시오. 절망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부활의 능력으로 즐거워하십시오. 감사하십시오. 누리십시오. 우리 가운데 부활의 능력이 이 모든 것을 회복시키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어디에 자리하십니까?--20절 승천하셔서 하늘에 오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우편에 앉게 하셨습니다. 오른 편에 앉아 있다는 것은 권위를 나타냅니다. 오른편에 앉아 있다는 것은 대신 그 권위를 행사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끝난 인생인 그리스도를 부활하게 하시고 그토록 높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가장 많은 것을 버렸으며 가장 위대한 사랑을 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런 사람을 가장 존귀하게 높이십니다. 예수님은 가장 큰 것을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모든 영광을 다 버리셨습니다. 그의 능력과 존귀와 아름다움을 다 버리셨습니다. 그것도 그냥 버리신 것이 아니고 십자가 위에서 비참하게 죽는 자리까지 가셨습니다. 죽기까지 낮아지셨습니다. 그리고 도저히 사랑할 이유가 없는 우리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어주는 사람을 높이 들어 올리십니다.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에게 자기 돈이나 시간을 써가면서 이렇게 수고를 아끼지 않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높이십니다. 한번은 예수님의 제자 중 세배대의 두 아들이 어머니를 앞 세워 예수님께 인사 청탁을 했습니다. 영광의 자리에 앉을 때 주님의 보좌의 우편과 좌편에 아들 하나씩을 앉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나의 받을 잔을 받으며 나의 받을 세례를 받을 수 있겠느냐고 물어보셨습니다. 나처럼 남을 섬길 수 있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사람들을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자기 모든 것을 다 버릴 수 있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식사자리에 초대를 받아 가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문화 가운데 종이 손님들에게 물을 떠다 발을 씻겨 주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밥 먹을 시간이 되어도 물 떠다 주는 사람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다 잘난 사람들만 모여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일어날 기미가 보이질 않는 거예요. 베드로가 수석인데 베드로 체면에 어떻게 일어납니까? 가롯 유다가 적어도 공부를 많이 한 지식인인데 어떻게 일어납니까? 이때 예수님이 일어나신 것입니다. 그래 내가 하지. 하시면서 허리에 수건을 동이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대로 내 위치와 가진 것을 버린 사람이 더 존귀한 자리에 앉게 될 것입니다. 지난 주에 wec 이사회를 저희 교회에서 했습니다. 한 20명 남짓 오실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46명이나 오셨습니다. 거기에는 목사님도 계시고 장로님도 계시고 권사님들도 계십니다. 우리 장로님들께서 오셔서 도와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장로님들이 그 분들에게 아주 아름다운 섬김을 보여 주신 것이 있습니다. 너무나 사람들이 많이 와서 미쳐 국을 끓여서 대접에 담아야 하는데 그럴 시간이 없자 우리 최 장로님께서 국그릇을 들고 다니시면서 국자로 퍼주셨습니다. 나 장로님께서는 밥을 날라다 주셨습니다. 거기에 모여있던 다른 교회 장로님들 목사님들이 처음에 집사인가보다 라고 생각했다가 장로님이라고 소개하자 충격을 받은 얼굴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에 우리 신림교회 영성이 있습니다. 교회의 권위는 낮아짐으로 발을 씻겨 주는 곳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서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오직 순수한 마음으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결코 그냥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반드시 높이 십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예수님처럼 자꾸 남을 대접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자꾸 남에게 주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시간을 드리십시오. 교회에 좀 일찍 나오셔서 의자를 나르는 섬김을 하십시오. 마당에 자동차 주차를 도와 드리십시오. 그리고 예배를 드리면 우리는 가장 완벽한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반드시 기억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의 우편에 앉게 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부활의 능력과 함께 예수님에게 다음과 같은 권위를 주셨습니다.-- 21절 원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하나님의 법 안에서 이루어지는 질서의 세계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이 질서가 무너졌습니다. 이제 인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말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죽음이 명령하는 대로 인간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하게 하셔서 죽음의 말을 듣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인간이 죄를 지은 이래로 늘 이 세상을 독점하고 있었던 악한 영들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악한 영의 세계에 구조조정이 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 믿는 자들로 하여금 죄가 무엇인지 밝히고 드러내게 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는 곳마다 죄를 폭로하고 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묶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신의 잃어버렸던 가치를 되찾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단이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제부터 사단은 우리에게 명령 할 수 없는 패배한 존재입니다. 오직 예수님 만이 하나님의 오른편에 있는 분이요 오직 예수님 만이 이 세계를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이제 악한 영들에게 끌려 다니지 마시고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삼아 여러분의 영적 세계에 영적인 구조 조정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출처 :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 agaser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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