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 에베소서

[스크랩] [에베소서강해] 엡 1:18-19

하나님아들 2014. 1. 2. 10:25
[에베소서강해] 엡 1:18-19


- 설교 : 전준식 목사

요즈음은 기업체에서 일군을 채용할 때 곧 바로 채용하지 않고 어느 정도 수습기간을 거친 후에 채용하는 분위기로 가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본질은 사람을 더 잘 알고 나서 채용하고 싶은 마음일 것입니다. 아무래도 이력서 상으로만 사람을 뽑게 되면 잘 못 판단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력서는 자기에 대해서 설명하지만 자기가 어떤 품성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인격을 소유하고 있는지 잘 판단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습 기간을 거치게 되면 상급자는 그 사람에 대해서 아는 것만이 아니라 그 사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알기 위해서는 서로 자주 만나고 밥도 같이 먹고 같이 이야기를 해 봐야 그 사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하나님을 더 잘 알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알기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알기 원한다면 신학 책을 읽으면 될 것입니다. 경건 서적을 읽으면 될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논문을 읽으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우리가 좋은 책을 읽는 하더라도 그 책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설명을 할 뿐 하나님의 인격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책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셔야만 알 수 있습니다. 지혜와 계시의 정신은 곧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께서 알려 주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아바 아버지 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바를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성도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빠는 어린 자녀와 같이 사는 분입니다. 자녀 또한 아빠와 같이 살아야 합니다. 아빠라 하더라도 자녀와 같이 살지 않으면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이 많이 일어 날것입니다. 아빠와 자녀는 같이 살아야 아버지가 이해되고 자녀가 이해되는 것입니다. 같이 살아야 어떻게 도울 것인가? 알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 모두가 성령을 받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와 친해지는 사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함께 하는 사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더 깊이 알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 18절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나를 부르셨는지 알게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비젼을 주셨는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부르셨습니까? 마귀를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우리를 하나님의 품으로 구원하시려고 부르신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신음하는 우리를 영생하는 세계로 부르신 것입니다. 이것이 부르심입니다. 이 부르심에 우리가 응답한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부르심의 소망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버려진 영혼들을 지금도 부르고 계십니다. 버려진 영혼들에게 소망을 주시고 싶어하십니다. 이 소망을 가지고 선교지에 나가신 선교사님들이 계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을 사람들에게 배달하러 가신 것입니다. 또 하나 부르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받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비젼을 주신 것입니다. 거룩한 사역을 주신 것입니다. 구원받을 수 없는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다는 소망과 함께 하나님처럼 거룩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우리를 부르시고 소망을 주신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믿음의 선배들은 모두 이 부르심이 분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오늘 본문 말씀을 기록한 바울도 이 부르심이 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죽이러 다멕섹으로 향하던 길에서 주님은 바울을 불렀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이 두 번의 부르심은 곧 구원의 부르심과 사역의 부르심을 말합니다. 살인죄를 짓고 광야에서 눌려 사는 모세를 주님은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를 애굽에 들어가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키는 사역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예수님을 핍박하며 사는 바울의 죄를 용서하시고 이방인의 선교사로 불러 주셨습니다. 이 부르심은 어느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다만 이 두 가지 부르심이 바울과 모세처럼 동시에 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따로 따로 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은 반드시 거룩한 사역으로 부르심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렇게 부르십니다. 먼저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우리를 구원으로 부르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만들어진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을 만드실 때 심심해서 장난하시다가 만드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처럼 우리는 고귀한 존재요 가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처럼 살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행복할 자격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처럼 기뻐할 수 있는 권리와 거룩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죄로 말미암아 이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우리는 행복을 빼앗겼습니다. 기쁨을 잃엇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우리를 찾아오셔서 이 기쁨을 회복시켜주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되찾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받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구원자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여러분의 삶을 팔자소관으로 돌리지 마십시오. 운명에 맡기지 마십시오.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서 책임지십니다. 우리가 상처받는 삶을 살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 때 우리의 토기장이신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 빚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다시 창조하십니다. 태어난 때를 비관하지 마십시오. 말띠로 태어났다 고 자기 스스로 자기를 무너뜨리지 마십시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부르심의 소망을 기대하십시오. 나는 행복할 권리가 있다고 선포하십시오. 저는 우리 교회에 왜 젊은이들을 보내주셨을까? 생각 해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 있음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저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이 가운데 한 사람도 덧없이 와서 앉아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시대에 이 나라와 열방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있으시기에 젊은이들을 보내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믿습니까? 믿어야 합니다. 두 번째 부르심은 비젼으로의 부르심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왜 구원시켜 주셨나? 나를 어떻게 사용하실 것인가? 아는 것이 곧 부르심의 소망입니다. 내가 어느 곳에 있든지 부르심의 소망이 있을 때 우리는 좌절하지 않고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요셉은 바로 이 부르심의 소망이 분명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감옥에서도 소망을 가지고 살 수 있었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을 섬기는 비젼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사자굴속에서도 살아 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내가 어디에 있느냐가 아니라 나에게 비젼이 없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비젼이 없으면 우리는 현실 탓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비젼이 있는 사람은 현실을 비관하지 않습니다. 비젼이 있는 사람은 기대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으로 부르셨고 또 앞으로 나를 부르실 거야 하는 기대를 합니다. 지난 주 심방을 마치고 권사님과 집사님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는 가운데 한 집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신이 지금 밤마다 김밥 집에 가서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집사님께서 김밥 집에서 일하시는 일을 하나님이 주신 부르심으로 고백하고 사역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소명이라고 해서 김밥 집에서 일하는 모습이 더 아름답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앞치마 두르고 일하는 것 뿐입니다. 그러나 현실을 비관하면서 꿈이 없이 김밥을 마는 사람과 부르심으로 김밥을 마는 사람은 전혀 다릅니다. 찬양이 나옵니다. 기쁨이 넘칩니다. 옆 사람에게 그 기쁨이 넘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모두 이런 부르심의 소망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있는 그 곳이 주님이 부르심 소망의 자리임을 선포하십시오. 이 소망은 어떻게 생깁니까?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이 소망이 분명해 지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하면 할수록 이 소망이 더 구체적이 되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사자굴 속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았던 것은 다니엘의 경건 생활이었습니다. 요셉에 고난 가운데에서도 꿈을 잃지 않았던 것은 하나님께서 언제나 요셉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바울이 기도하는 기도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 18절 바울은 영적 기업의 풍성함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을 때에 우리는 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쓰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기 몸을 학대해서 오직 동물처럼 살아갑니다. 물질의 풍성함으로 사는 것이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물질이 많은 것은 좋은 것입니다. 물질이 많으면 하나님을 위하여 할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시는 풍성함은 영혼에 대한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자신이 이 영광스러움을 경험합니다. 초라한 나를 부르셔서 나의 옷을 벗기시고 풍성한 옷으로 갈아 입히십니다. 그리고 풍성한 영광의 자리까지 우리를 초대하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갈렙을 보십시오. 갈렙은 가나안 정복의 일등 공신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의 리더쉽을 여호수아에게 넘겨주고 오랜 동안 빛을 보지 못한 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45년만에! 갈렙의 나이 85세가 되던 해! 하나님은 갈렙에게 이스라엘의 리더쉽을 주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85세가 된 갈렙이 강건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강건하다는 말은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영적인 강건입니다. 영적인 풍성함입니다. 만일 45년을 기다리면서 영적인 강건함이 갈렙에게 없었다면 갈렙은 무너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여호수아를 뒤에서 욕했을 것입니다. 이제 그만 내려오고 내가 해야 할 것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갈렙이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강건함 때문이었습니다. 영적인 풍성함 때문이었습니다. 부르심의 소망을 놓지 않고 있었을 때 그에게는 풍성함의 선물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회적인 위치가 나를 풍성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나를 높여 주어야 내가 열정을 갖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풍성할 수 있는 것은 곧 내 영혼의 상태에 달려 있습니다. 영적인 풍성함이란 꺼질 줄 모르는 것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 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불꽃과 세상의 불꽃이 있습니다. 세상의 불꽃은 열정이 식으면 사라지는 불입니다. 나이가 들면 사라집니다. 상황이 바뀌면 사라집니다. 인정하는 사람이 바뀌면 사라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불꽃은 꺼지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이 불이 우리 안에서 타고 있습니다. 나를 인정해주는 사람이 사라져도 우리는 풍성함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모세는 인생 80에 이 불을 보았습니다. 꺼지지 않는 가시나무 떨기를 보았습니다. 인생 80에 양치는 목자의 삶을 청산하고 신음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구하는 풍성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물질의 풍성함으로 살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나 이것 보다 더 우리가 사모해야 할 것은 영적인 풍성함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처럼 롯 앞에서 기름진 소돔 땅을 바라보며 선택권을 롯에게 줄 수 있는 영적인 풍성함이 있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로 바울이 기도하는 기도 내용이 무엇입니까? --19절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을 알기 원하는 기도를 지금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무엇인지 알기를 원한다고 기도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능력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창조의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능력의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이 우주의 소유자 이신 주인이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때문에 우리는 무엇을 얼만큼 가지고 있는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능력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께서 나를 붙들고 계신다는 것을 아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절대가 아니라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구원의 능력이십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구원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마른 뼈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하나님은 마른 뼈인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우리를 변화 시키셨습니다.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내 남편이 변하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능력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능력은 날마다 새롭게 하는 성령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고갈되지 않습니다. 한번 쓰고 나면 없어지는 능력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날마다 새롭고 영원한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사모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임하십니다. 장소에 구애받지도 않습니다. 감옥에서도 하나님의 능력은 임하십니다. 병원에서도 임하십니다. 죽음 앞에서도 이 능력은 나타납니다. 때문에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면 어떻게 됩니까? 능력의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사용하십니다. 나의 보잘 것 없는 것도 능력의 하나님께 드리면 그 능력이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제자들은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덩이를 예수님께 맡겼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습니다. 그리고 5천명을 먹이셨습니다.



출처 :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 agaser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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