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강해] 엡 1:15 - 19
: 전준식 목사
에베소서 1장 15절 - 19절
우리는 지난 시간까지 바울이 설명한 신령한 복에 대해서 나누었습니다. 이 복이 얼마나 아름다운 복인지 바울은 흥분한 채로 에베소 교인에게 설명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숨도 쉬지 않고 신령한 복을 말했던 것입니다. 그 복은 크게 3가지였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령한 복이었는데 그것은 태초 전부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택하셨다는 복입니다. 그리고 성자 예수님께서 십자기의 피로 우리를 구속해 주시는 구원의 복이었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주시는 인치심의 복이었습니다. 이런 신령한 축복으로 인하여 우리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인생이 보장 된 것입니다. 이 복이 얼마나 위대한지 바울은 이복을 찬송하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런 복을 분명히 받은 사람이라면 바울 처럼 우리도 찬양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을 것입니다. 나의 과거의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우리는 찬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현재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찬양하는 것입니다. 나의 미래를 성령께서 인 치시고 보장하셨으니 걱정 근심이 사라지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벌게 해 주신 복으로도 주님을 찬양 할 수 있습니다. 내 아들 시험에 합격하게 해주신 축복 때문에 주님을 찬양 할 수 있습니다. 내 건강을 회복해 주신 은혜로 주님을 찬양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찬양하고 있는 찬양은 이 세상의 것들이 채워진 것 때문에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먼저 아시고 구원시키시고 앞으로 성령이 함께 하시는 것으로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이런 신령한 축복 때문에 찬양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바울은 찬양을 마치고 우리를 또 다른 세계로 안내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1장을 정리 해 보면 인사와 찬양과 기도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찬양하는 사람은 기도도 하는 사람입니다. 찬양 만하고 기도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도 만하고 찬양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찬양하는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이요 기도하는 사람은 찬양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기도 하는 사람은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만이 아니라 남을 위하여 중보기도 하는 사람입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바울이 기도하는 기도 내용을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먼저 바울의 기도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바울의 귀에 에베소 교회에 대한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그 소문이 무엇입니까? --15절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과 성도들을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믿음과 사랑이 이 교회에 있다는 것을 듣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무엇 하는 곳입니까? 교회는 믿음과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믿음은 없고 사랑이 넘치는 곳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곳을 성도들이 모인 교회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또한 믿음만 있고 사랑이 없는 곳도 성경적인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믿음이 있고 동시에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믿음이 있으면 예수님의 사랑이 생긴다 는 것입니다. 믿음 없이는 예수님의 사랑이 생기지 않습니다. 믿음이 없이 행하는 사랑은 휴머니즘입니다. 자기 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종종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어떠냐? 믿음이 있으면서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것보다 믿음 없이 가난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아닙니다.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것도 틀린 것이지만 믿음이 없이 사랑 할 수 있다는 것도 틀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 없이 하는 사랑의 행위는 자기 의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자기 의를 드러내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남을 사랑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믿음이 생기자 사랑하는 일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사도행전에 보면 에베소 도시는 점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점치면서 밥을 벌어먹고 사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복음이 들어갔습니다. 이 사람들이 복음이 주시는 믿음이 생기자 지금까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점치는 책들을 다 내어놓고 불살랐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에서 오는 사랑입니다. 왜 이것이 사랑입니까? 그렇습니다. 성경적인 사랑은 한 영혼에 대한 긍휼함에서부터 출발합니다.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엣 출발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의 자리를 버리고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에게 빵을 주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죄악 가운데 신음하는 영혼의 긍휼함 때문이었습니다.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바로 이 긍휼함이 그들 가운데 있었습니다. 점치면서 살다가 영원히 죽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죽는 길을 없애려고 하는 많은 점치는 책들을 다 불살라 버린 사랑이 있었습니다. 과거의 어두운 삶을 청산하고 믿음을 가진 성도들을 교회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바울은 말합니다. 에베소 교회 교인들이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것이 아닙니다. 에베소 교회 모든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고 있다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교회 안에서 유력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회에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나처럼 대학교육을 받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같은 고향 사람이라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로이든 존스 목사님은 에베소서를 강해하면서 자신이 이런 고백을 하였습니다. 나는 이 나라에서 그리스도인이 아닌 가장 위대한 사람과 함께 하는 것 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게 살지만 그가 성도라면 나는 그 사람과 친구가 되고 싶다. 저는 우리 신림 교회 성도님들이 이런 사랑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한 영혼에 대한 긍휼함이 있는 성도의 사랑! 이 사랑이 있기를 우리 교회 가운데 있기를 축복합니다. 내 영혼을 좀먹고 파괴시키는 것들을 예수님이 주신 믿음으로 다 불태우는 사랑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 가정에 올해 사주팔자는 어떨까 궁금해서 사 가지고 온 더러운 책을 불살라 버리는 사랑이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집 어딘가 깊숙이 숨겨 논 포르노 필름을 불태우는 사랑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신림 교회가 믿음 안에서 거듭난 모든 성도들을 사랑하는 교회라고 입 소문이 퍼지기를 바랍니다. 저는 지난 주일 새 가족으로 등록하신 분과 교회 식당에서 같이 식사를 하였습니다. 저는 그 분께 여쭈어 보았습니다. 어떻게 우리 교회를 오시게 되었습니까? 이 분이 하시는 말씀이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자신이 교회를 찾고 있는데 자기 집 주변에 사시는 다른 교회에 권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저 아래 신림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를 가면 손해보지 않을 것이라고 그래서 다른 교회 권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면 분명히 살아 있는 교회임에 틀림이 없다고 판단되어서 우리 교회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에베소 교회가 착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에 소문이 퍼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식인들이 많이 모였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프로그램이 많은 교회도 아니었습니다. 에베소 교회가 아름다운 교회로 소문난 이유는 믿음과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에베소 교회처럼 소문나기를 바랍니다. 착한 사람이 모여 있는 교회가 아니라 믿음이 주시는 사랑이 있는 교회! 지식인들이 모여 있는 교회가 아니라 믿음으로 인하여 생기는 사랑이 있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바울은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 16절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질문을 해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 3-14절까지 말씀했습니다. 그것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축복으로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현실적으로 보니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믿음이 분명하고 사랑하는 일에도 자기 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사랑하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상식으로 에베소 교회는 성숙한 교회니까 사회 사업을 한다든지 의료사업을 해야 한다고 권면 할 것 같은데 17절 이하에 보면 그런 기도가 없다는 것입니다. -- 17절. 왜 그렇습니까? 그렇습니다. 믿음을 가졌다고 하는 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가졌다고 하는 것은 곧 영적인 세계에 첫발을 들여놓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제 믿음을 가진 우리는 더 성숙한 세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여기에는 아픔이 있습니다. 고통이 있습니다. 실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그는 갈대아 우르 땅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믿고 갈대아 우르 땅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완성된 신앙인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 땅을 나와서도 많은 실수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실수 많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좀더 잘 알 수 있도록 다양한 경험을 하게 하셨습니다. 하늘에 별들을 보여 주시면서 하나님의 신령한 약속을 다시 확인시켜주셨습니다. 또 한가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기도 하기 전에 바울이 가진 마음은 감사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의 순서는 찬양이고 감사고 그리고 기도 인 것입니다. 찬양이 없으면 감사가 생기지 않습니다. 찬양과 감사가 없으면 기도가 나오질 않습니다. 온전한 기도는 주님을 찬양하면 감사 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기도 할때 먼저 찬양과 감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찬양과 감사가 바로 기도 줄을 붙잡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하는 기도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17절 첫 번째 기도 제목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계시의 정신으로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바울은 소크라테스처럼 우리가 누구인지 알게 해 달라 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체험케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우리는 기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 바울 처럼 기도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우리 자신의 문제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남을 위해서 중보 기도할 때에도 그 사람이 지금 처한 어려움을 가지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 자녀들의 대학입시 합격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 교회 성도들 사업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더욱 더 잘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더 풍성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냥 지나친 사람을 보고 아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냥 얼굴만 아는 사람을 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영어로 프랜드는 그냥 아는 사람을 말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정말 친하고 그 사람 속을 다 알고 있는 친구는 프랜드라고 하지 않고 베스트 프랜드 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그냥 아는 사이가 아니라 베스트 프랜드가 되는데 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가 가야 할 삶의 목표입니다. 이것만큼 더 큰 기도는 없습니다. 여러분!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 모른 채 살아 보십시오. 얼마나 불쌍한 사람입니까? 이런 아내는 남편을 위하여 밥을 해주는 것에 대해서 아무 의미도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저 밥 해주는 기계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남편이 누구인지 알게 되면 우리가 새벽에 일어나 아침을 준비하는 것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사역임을 알게 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모른 채 교회에 나오면 얼마나 불쌍한 사람이겠습니까? 아무 의미도 발견하지 못한 채 예배를 드린다면 얼마나 시간 낭비하는 것이겠습니까? 저는 여러분들 가운데 하나님을 알고 싶은 마음을 하나님께서 주시기를 사모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기쁨이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에 기쁨이 있기를 바랍니다. 왜 내가 교회에 나와 사역을 하는지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모른 채 하는 사역, 하나님을 모른 채 하는 열심히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풍성하는데 까지 이르도록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17절을 다시 보면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셔야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지혜의 성령과 계시의 성령이 우리에게 임해야 풍성하신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지식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만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해 주시고 풍성하게 해 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본질상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잘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 마음을 가지고 성경을 보십시오. 지난해에 성경을 읽을 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아 그냥 지나친 성경말씀이었는데 올해에는 그 말씀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새롭게 이해되고 새롭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삶이 더욱 풍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나갔다는 증거입니다.
: 전준식 목사
에베소서 1장 15절 - 19절
우리는 지난 시간까지 바울이 설명한 신령한 복에 대해서 나누었습니다. 이 복이 얼마나 아름다운 복인지 바울은 흥분한 채로 에베소 교인에게 설명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숨도 쉬지 않고 신령한 복을 말했던 것입니다. 그 복은 크게 3가지였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령한 복이었는데 그것은 태초 전부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택하셨다는 복입니다. 그리고 성자 예수님께서 십자기의 피로 우리를 구속해 주시는 구원의 복이었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주시는 인치심의 복이었습니다. 이런 신령한 축복으로 인하여 우리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인생이 보장 된 것입니다. 이 복이 얼마나 위대한지 바울은 이복을 찬송하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런 복을 분명히 받은 사람이라면 바울 처럼 우리도 찬양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을 것입니다. 나의 과거의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우리는 찬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현재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찬양하는 것입니다. 나의 미래를 성령께서 인 치시고 보장하셨으니 걱정 근심이 사라지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벌게 해 주신 복으로도 주님을 찬양 할 수 있습니다. 내 아들 시험에 합격하게 해주신 축복 때문에 주님을 찬양 할 수 있습니다. 내 건강을 회복해 주신 은혜로 주님을 찬양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찬양하고 있는 찬양은 이 세상의 것들이 채워진 것 때문에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먼저 아시고 구원시키시고 앞으로 성령이 함께 하시는 것으로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이런 신령한 축복 때문에 찬양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바울은 찬양을 마치고 우리를 또 다른 세계로 안내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1장을 정리 해 보면 인사와 찬양과 기도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찬양하는 사람은 기도도 하는 사람입니다. 찬양 만하고 기도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도 만하고 찬양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찬양하는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이요 기도하는 사람은 찬양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기도 하는 사람은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만이 아니라 남을 위하여 중보기도 하는 사람입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바울이 기도하는 기도 내용을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먼저 바울의 기도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바울의 귀에 에베소 교회에 대한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그 소문이 무엇입니까? --15절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과 성도들을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믿음과 사랑이 이 교회에 있다는 것을 듣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무엇 하는 곳입니까? 교회는 믿음과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믿음은 없고 사랑이 넘치는 곳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곳을 성도들이 모인 교회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또한 믿음만 있고 사랑이 없는 곳도 성경적인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믿음이 있고 동시에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믿음이 있으면 예수님의 사랑이 생긴다 는 것입니다. 믿음 없이는 예수님의 사랑이 생기지 않습니다. 믿음이 없이 행하는 사랑은 휴머니즘입니다. 자기 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종종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어떠냐? 믿음이 있으면서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것보다 믿음 없이 가난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아닙니다.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것도 틀린 것이지만 믿음이 없이 사랑 할 수 있다는 것도 틀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 없이 하는 사랑의 행위는 자기 의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자기 의를 드러내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남을 사랑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믿음이 생기자 사랑하는 일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사도행전에 보면 에베소 도시는 점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점치면서 밥을 벌어먹고 사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복음이 들어갔습니다. 이 사람들이 복음이 주시는 믿음이 생기자 지금까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점치는 책들을 다 내어놓고 불살랐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에서 오는 사랑입니다. 왜 이것이 사랑입니까? 그렇습니다. 성경적인 사랑은 한 영혼에 대한 긍휼함에서부터 출발합니다.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엣 출발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의 자리를 버리고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에게 빵을 주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죄악 가운데 신음하는 영혼의 긍휼함 때문이었습니다.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바로 이 긍휼함이 그들 가운데 있었습니다. 점치면서 살다가 영원히 죽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죽는 길을 없애려고 하는 많은 점치는 책들을 다 불살라 버린 사랑이 있었습니다. 과거의 어두운 삶을 청산하고 믿음을 가진 성도들을 교회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바울은 말합니다. 에베소 교회 교인들이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것이 아닙니다. 에베소 교회 모든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고 있다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교회 안에서 유력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회에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나처럼 대학교육을 받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같은 고향 사람이라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로이든 존스 목사님은 에베소서를 강해하면서 자신이 이런 고백을 하였습니다. 나는 이 나라에서 그리스도인이 아닌 가장 위대한 사람과 함께 하는 것 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게 살지만 그가 성도라면 나는 그 사람과 친구가 되고 싶다. 저는 우리 신림 교회 성도님들이 이런 사랑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한 영혼에 대한 긍휼함이 있는 성도의 사랑! 이 사랑이 있기를 우리 교회 가운데 있기를 축복합니다. 내 영혼을 좀먹고 파괴시키는 것들을 예수님이 주신 믿음으로 다 불태우는 사랑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 가정에 올해 사주팔자는 어떨까 궁금해서 사 가지고 온 더러운 책을 불살라 버리는 사랑이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집 어딘가 깊숙이 숨겨 논 포르노 필름을 불태우는 사랑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신림 교회가 믿음 안에서 거듭난 모든 성도들을 사랑하는 교회라고 입 소문이 퍼지기를 바랍니다. 저는 지난 주일 새 가족으로 등록하신 분과 교회 식당에서 같이 식사를 하였습니다. 저는 그 분께 여쭈어 보았습니다. 어떻게 우리 교회를 오시게 되었습니까? 이 분이 하시는 말씀이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자신이 교회를 찾고 있는데 자기 집 주변에 사시는 다른 교회에 권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저 아래 신림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를 가면 손해보지 않을 것이라고 그래서 다른 교회 권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면 분명히 살아 있는 교회임에 틀림이 없다고 판단되어서 우리 교회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에베소 교회가 착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에 소문이 퍼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식인들이 많이 모였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프로그램이 많은 교회도 아니었습니다. 에베소 교회가 아름다운 교회로 소문난 이유는 믿음과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에베소 교회처럼 소문나기를 바랍니다. 착한 사람이 모여 있는 교회가 아니라 믿음이 주시는 사랑이 있는 교회! 지식인들이 모여 있는 교회가 아니라 믿음으로 인하여 생기는 사랑이 있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바울은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 16절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질문을 해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 3-14절까지 말씀했습니다. 그것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축복으로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현실적으로 보니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믿음이 분명하고 사랑하는 일에도 자기 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사랑하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상식으로 에베소 교회는 성숙한 교회니까 사회 사업을 한다든지 의료사업을 해야 한다고 권면 할 것 같은데 17절 이하에 보면 그런 기도가 없다는 것입니다. -- 17절. 왜 그렇습니까? 그렇습니다. 믿음을 가졌다고 하는 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가졌다고 하는 것은 곧 영적인 세계에 첫발을 들여놓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제 믿음을 가진 우리는 더 성숙한 세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여기에는 아픔이 있습니다. 고통이 있습니다. 실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그는 갈대아 우르 땅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믿고 갈대아 우르 땅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완성된 신앙인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 땅을 나와서도 많은 실수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실수 많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좀더 잘 알 수 있도록 다양한 경험을 하게 하셨습니다. 하늘에 별들을 보여 주시면서 하나님의 신령한 약속을 다시 확인시켜주셨습니다. 또 한가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기도 하기 전에 바울이 가진 마음은 감사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의 순서는 찬양이고 감사고 그리고 기도 인 것입니다. 찬양이 없으면 감사가 생기지 않습니다. 찬양과 감사가 없으면 기도가 나오질 않습니다. 온전한 기도는 주님을 찬양하면 감사 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기도 할때 먼저 찬양과 감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찬양과 감사가 바로 기도 줄을 붙잡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하는 기도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17절 첫 번째 기도 제목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계시의 정신으로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바울은 소크라테스처럼 우리가 누구인지 알게 해 달라 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체험케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우리는 기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 바울 처럼 기도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우리 자신의 문제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남을 위해서 중보 기도할 때에도 그 사람이 지금 처한 어려움을 가지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 자녀들의 대학입시 합격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 교회 성도들 사업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더욱 더 잘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더 풍성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냥 지나친 사람을 보고 아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냥 얼굴만 아는 사람을 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영어로 프랜드는 그냥 아는 사람을 말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정말 친하고 그 사람 속을 다 알고 있는 친구는 프랜드라고 하지 않고 베스트 프랜드 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그냥 아는 사이가 아니라 베스트 프랜드가 되는데 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가 가야 할 삶의 목표입니다. 이것만큼 더 큰 기도는 없습니다. 여러분!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 모른 채 살아 보십시오. 얼마나 불쌍한 사람입니까? 이런 아내는 남편을 위하여 밥을 해주는 것에 대해서 아무 의미도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저 밥 해주는 기계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남편이 누구인지 알게 되면 우리가 새벽에 일어나 아침을 준비하는 것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사역임을 알게 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모른 채 교회에 나오면 얼마나 불쌍한 사람이겠습니까? 아무 의미도 발견하지 못한 채 예배를 드린다면 얼마나 시간 낭비하는 것이겠습니까? 저는 여러분들 가운데 하나님을 알고 싶은 마음을 하나님께서 주시기를 사모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기쁨이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에 기쁨이 있기를 바랍니다. 왜 내가 교회에 나와 사역을 하는지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모른 채 하는 사역, 하나님을 모른 채 하는 열심히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풍성하는데 까지 이르도록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17절을 다시 보면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셔야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지혜의 성령과 계시의 성령이 우리에게 임해야 풍성하신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지식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만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해 주시고 풍성하게 해 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본질상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잘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 마음을 가지고 성경을 보십시오. 지난해에 성경을 읽을 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아 그냥 지나친 성경말씀이었는데 올해에는 그 말씀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새롭게 이해되고 새롭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삶이 더욱 풍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나갔다는 증거입니다.
출처 :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 agaser 원글보기
메모 :
'신약강해 에베소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에베소서강해] 엡 1:20 - 22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0) | 2014.01.02 |
---|---|
[스크랩] [에베소서강해] 엡 1:18-19 (0) | 2014.01.02 |
[스크랩] [에베소서 강해] 엡 1:13 - 14 (0) | 2014.01.02 |
[스크랩] [에베소서 강해] 엡 1:7 - 12 (0) | 2014.01.02 |
[스크랩] 에베소서 강해 (3) / 엡 1:4 - 6 (0) | 2014.0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