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 에베소서

[스크랩] [에베소서 강해] 엡 1:13 - 14

하나님아들 2014. 1. 2. 10:24
[에배소서 강해] 엡 1:13 - 14
: 전준식 목사



에베소서 1장 13절 - 14절

이제 우리는 바울이 너무나 흥분해서 숨도 쉬지 않고 3-14절까지 선포한 말씀 마지막 부분에 와 있습니다. 흥분한 바울이 선포한 말씀을 분석해 보니 거기에는 3가지 신령한 축복이 있었습니다. 첫째 신령한 복은 나도 모르게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 하셨다는 것입니다. 둘째 신령한 복은 때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구속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가진 믿음은 내가 노력해서 얻은 믿음 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 내가 믿음을 찾아서 소유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택하셔서 내 안에 믿음이 들어 온 것임을 알게 됩니다. 내가 성경을 읽고 똑똑해서 예수님을 알게 되고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을 보니 자신이 예수님을 선택해서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나에게 알게 해주셔서 알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 떼 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 지 난 알 수 없도다.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출발입니다. 오늘은 3번째 신령한 복에 대해서 상고하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복은 성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고 둘째 복은 성자 하나님께서 주신 복입니다. 오늘 우리가 상고하려는 3번째 복은 성령 하나님께서 주신 복입니다. 먼저 우리가 3번째 성령이 주시는 복을 상고하기 전에 지난주에 시간이 부족해서 다루지 못한 11절과 12절을 먼저 보고 나서 성령이 주시는 복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11절을 보면 바울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주님 안에서 기업이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13절에서는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을 듣고 기업이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바울은 지금 같은 표현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체가 서로 다른 것을 발견합니다. 11절은 우리라고 표현했고 13절은 너희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면 11절에 나오는 우리는 누구이고 13절에 나오는 너희는 누구인가? 라는 점입니다. 성경학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11절에 우리는 유대인이고 13절에 나오는 너희는 일차적으로 에베소 성도들 곧 이방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학자의 이런 분석을 토대로 다시 보면 유대인과 이방인이 서로 같은 기업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같은 상속을 가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한가지 질문할 것이 있습니다. 왜 바울은 유대인을 성자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령한 축복을 말씀하실 때 언급하셨을까? 그리고 성령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령한 축복을 말씀하실 때 이방인인 에베소 교인을 언급하는 것일까? 하는 점입니다. 물론 다 같은 축복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같은 축복을 이렇게 분류를 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은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자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축복에서 유대인이 받은 상속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방인들은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본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방인 선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계시다가 하늘로 승천하시면서 부탁하신 명령입니다. 이제 몇 날이 못되어 성령이 오실 것이다. 그때가 되면 제자들 너희는 예루살렘 뿐만 아니라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령이 주시는 신령한 축복을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제 성도의 세 번째 축복에 대해서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13절 믿음은 어디에서 시작합니까? 예수 안에서 진리의 말씀을 듣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내 능력으로 말씀을 들어서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말씀을 듣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때문에 아무리 훌륭한 삶을 살았다 할지라도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지 않으면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복음이 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이 교회에 와서 설교를 들어도 그 들음은 그리스도 밖에서 듣는 들음이기 때문에 그 말씀이 자신의 것이 되지 않습니다. 내 안에 심어지지 않습니다. 참 좋은 이야기하는 구나 라고 생각하고 금방 그 말씀이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듣는 들음은 내 마음에 그 말씀이 심겨집니다. 나를 사로잡습니다. 나를 흔들어 댑니다.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가슴이 떨리기 시작합니다. 너무나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지기 시작합니다. 눈물이 나오려는데 옆 사람이 이상하게 생각할 까봐 눈에 티가 들어 간 것처럼 재 빨리 눈을 닦기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께서 내 안에서 움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구원 받은 사람인가? 아닌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복음이 내 귀에 들리는가 들리지 않는가? 를 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복음을 쉽게 들을 수 있을까요? 가만히 보면 선하게 사는 사람은 복음이 잘 들리지 않습니다. 모태신자에게는 복음이 잘 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복음을 만나기 전에 도덕에 익숙해져 있고 복음을 만나기 전에 교회 문화를 먼저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도덕이 자기를 보호해주기 때문에 복음이 필요가 없는 것이고 교회에 나오기 때문에 교회가 자기를 보호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도덕도 없고 인생의 가치체계도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들은 복음을 쉽게 받아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복음이 들리십니까? 여러분은 예수님 안에서 진리의 말씀을 듣고 계십니까? 내가 많이 배웠기 때문에 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들리게 해주시기 때문에 들리는 것입니다. 이 복음이 들리면 우리는 믿음이 자라기 시작합니다. 인생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내 안에서 들리기 시작하면 내 인생은 급속도로 변하기 시작합니다. 사는 것이 감격입니다. 잠자는 것이 은총입니다. 그러나 이 복음이 들리지 않으면 우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변하지 않는 우리의 삶은 짜증이고 곤고입니다. 불평과 불만입니다. 변하지 않은 채 교회에 다니면 교회는 다 좋은 이야기하는 곳이요, 착한 사람되라고 하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와서 들어야 할 것은 착한 사람이 되라는 것이 아니라 거듭나라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껍데기만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본질이 바뀌는 것입니다. 육으로 다시 태어난 다는 것이 아닙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육으로 사는 이 몸이 죽고 영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내 속에 죄의 인자가 없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내 안에 죄의 인자가 죽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그냥 놔둔 채 아무리 우리가 다시 태어났다고 해도 그 사람은 다시 죄 된 세상으로 가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의 귀에 성령이 말씀하시는 것들이 들려지는 축복이 임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거듭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진정한 믿음을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진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처음도 예수님이요 마지막도 예수님이십니다. 내가 이렇게 살게 된 것도 예수님 때문이요, 내가 높은 자리에 올라 간 것도 예수님 때문입니다. 내가 집을 구입하게 된 것도 예수님 때문이요, 내가 결혼 한 것도 예수님 때문입니다. 내가 이렇게 고난받고 어려움에 처한 것도 예수님을 위함이라고 고백하는 믿음이 참 믿음입니다. 이렇게 믿음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다시 한번 13절을 보십시오. 그것은 인치심입니다. 성령으로 도장을 찍는다는 말입니다. 왜 이런 말씀을 사도바울이 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인간은 다 연약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선물을 간직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언제든지 없앨 수 있고 버릴 수 있는 것이 우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울을 통하여 안전장치를 만들어 놓으셨음을 알려 주고 계십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인치심입니다. 저는 아프리카 감비아에서 사역하신 선교사님과 교제를 나누고 있습니다. 이 분께서 선교사역을 하시면서 겪은 일들을 책으로 쓴 내용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이슬람 형제에게 복음을 전하고 마침내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교회 지도자까지 되도록 양육했고 마침내 교회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결혼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형제가 선교사님을 찾아왔습니다. 내가 두 번째 아내를 맞이하려고 하는데 허락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님이 우리 기독교인들은 아내를 하나만 데리고 사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자 이 형제가 나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 문화는 아내를 여럿 데리고 사는 문화가 있다. 만일 선교사님이 허락을 해주지 않으면 나는 기독교를 떠나겠다고 하였습니다. 결과는 이 형제가 교회를 떠나는 것으로 결론을 지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인간입니다. 내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신앙을 유지할 수 없을 때가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연약한 우리들에게 성령님은 안전장치를 만들어 놓으시는데 그것은 바로 인치시는 것입니다. 도장을 찍는 것입니다. 도장은 아주 중요한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로 도장을 찍는 다는 말은 권위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안전을 보장합니다. 또한 신약시대에는 가축의 엉덩이에다 도장을 찍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곧 그 도장을 찍은 사람의 소유물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만큼 도장은 소중한 의미들을 담고 있습니다. 영국에 있을 때 도장이 얼마나 소중한지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캐나다에서 공부하고 있는 향숙 자매가 저희 집에 오겠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내외는 공항으로 자매를 마중 나갔습니다. 시간이 되자 비행기가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1시간이 지나도록 자매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 자매가 다른 비행기를 탔나, 혹시 우리가 비행기를 잘못 안 것이 아닌가? 다른 청사로 내리는 비행기에 탑승한 것일까?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약속한 비행기를 탔습니다. 약속한 시간에 비행기는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자매는 출국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민국에서 입국 도장을 찍어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행이 우리와 연락이 되어서 출국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토록 도장은 소중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이 나를 인치셨다 고 하는 것은 그만큼 나는 하늘의 권위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불법체류 할 사람이 아니다. 이 사람은 내가 보장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인침을 받았다는 것은 나는 이제부터 하나님의 소유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내가 죄를 짓고 싶고 내가 죄 가운데로 가고 싶을 때 우리는 내 안에 찍힌 성령의 도장을 보는 것입니다. 나는 성령의 도장을 받은 사람이야 나는 당당하게 살 수 있는 권리가 있고 당당하게 살아야해 나는 비굴하게 살아서는 안 돼. 나는 담을 넘어 사는 비겁한 사람이 아니야 라고 생각이 되어 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도장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마귀의 소유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내 인생을 마귀에게 넘기지 마십시오. 세상에게 넘기지 마십시오. 마귀가 우리를 유혹 할 때마다 여러분에게 찍어 주신 성령의 도장을 보여 주십시오. 마귀가 그것을 보고 꼬리를 내릴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의 인치심이 나를 이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모두 이런 성령의 인치심으로 세상을 이기는 성도가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이제 14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인치시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기업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됨이라는 말입니다. 상속자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사실을 보증하신다는 말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상속자라는 것을 증언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확신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십니까? 여러분! 성령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하고 계심을 믿고 계십니까? 아무리 힘센 존재가 우리에게 와서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야 너는 천국 갈 수 없어 라고 말할 때 우리는 당당히 아니야 나는 천국 갈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야 라고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는 기업을 가지고 계십니까? 이것이 보증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증언입니다. 이 보증만 있으면 우리는 걱정이 없습니다. 이 보증은 미래를 위한 것입니다. 저는 영국에서 안식년을 보내면서 보증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 지에 대해서 경험했습니다. 일년을 살고 보니 생활비가 부족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내가 서울로 가고 나서 나는 아이들과 함께 한 달을 어떻게 살지 계산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두려워하지 않은 것은 바로 주인 집에 맡겨 둔 보증금이었습니다. 내가 살림살이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도, 아내가 서울로 간 변화 된 환경에서도 나를 안심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보증금이었습니다. 안식년을 마치고 쪼들리지 않고 서울에 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보증금때문이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어떤 환경에 처하더라도 성령님이 나를 보증하시는 그 보증 때문에 우리는 죄 지으면서 돈버는 데로 가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이 나를 보증하시기에 우리는 죄지으면서 돈버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돈을 버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사는 우리는 마지막으로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할 수 없을 때 할 수있도록 힘주시니 감사합니다. 내가 연약해서 죄 가운데로 갈 뻔했는데 나를 인 치셔서 마귀가 내 앞에서 떠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제 나는 상황에 따라 흔들리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기업의 보증이 되신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라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출처 :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 agaser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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