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 에베소서

[스크랩] [에베소서강해] 엡 2:1 - 3 (인간의 본질)

하나님아들 2014. 1. 2. 10:26
[에베소서강해] 엡 2:1 - 3 (인간의 본질)


- 설교 : 전준식 목사

우리는 누가 복음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를 알고 있습니다. 이 집에는 아들이 둘이 있습니다. 작은 아들은 세상에 관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돈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입니다. 맘몬에게 충실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방법대로 살고 싶은 이 아들은 세상으로 나갔습니다. 세상에 나가 세상의 방법대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 또 한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 아들은 세상의 방법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이 아들은 아버지를 모시고 살았습니다. 아버지 집에서 충실하게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에 동생은 세상에 나가 세상의 방법대로 살다가 모든 것을 잃은 채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집으로 돌아 온 아들을 위하여 아버지는 잔치를 베푸셨습니다. 새 신을 신기고 새 옷을 입히고 풍악을 울리며 즐거워 하셨습니다. 마침 밭에서 충실히 일하고 집으로 돌아오던 큰 아들이 이 광경을 보고 아버지에게 분노를 터뜨렸습니다. 아버지! 아버지는 나의 친구를 위하여 한번도 잔치를 베푸신 적이 없는데 세상에 나가 허랑방탕 한 삶을 살고 온 동생에게 잔치를 베푸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따졌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비유를 성경적인 인간론을 구원의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동생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이방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형은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말하는 유대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이방인인 동생도 죄인이요, 비록 아버지 집에서 아무 말 없이 순종하며 사는 것 같았던 유대인들도 결국은 아버지에게 분노를 하고 있는 죄인이라는 것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함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에베소서 2장을 같이 나누게 되었습니다. 얼핏보면 2장은 1장과 단절 된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1장과 2장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1장의 주제는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는데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목적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고 우리가 그 복음을 듣게 된 것입니다. 또한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성령께서 내 안에 도장을 찍으시고 내 안에서 능력으로 역사 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누가 구원을 받을 대상인지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먼저 우리는 오늘 본문을 분석 할 필요가 있습니다. 2장 1절을 보십시오. 너희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고 3절을 보십시오. 우리도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누구입니까? 에베소 교인들입니다. 이방인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도는 누구입니까? 유대인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의 가치관을 가지고 세상에 살던 작은 아들이 바로 너희이고 비록 아버지 집에서 아버지 말씀 잘 듣고 살았던 사람처럼 보이는 큰 아들이 바로 우리도라는 범주 안에 들어오는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너희이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우리가 우리도 라는 범주 안에 들어오는 사람인데 이들 모두가 다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우리를 객관적으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거나 믿지 않는 사람이거나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이 죄는 죽음을 동반합니다. 그러면 먼저 너희라는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 1절 이들은 이방인입니다. 에베소 성도들이 예수님을 믿기 전에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모두 죽은 사람들입니다. 죽었다는 말은 생명과 관계가 끊겼다는 것을 말합니다. 생명과 단절을 말합니다. 생명과 단절했다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가 끊겼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죽음입니다. 살았으나 죽은 사람입니다. 왜 죽은 것입니까? --2절 첫째로 이 세상 풍속을 좇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하라는 대로 순종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가치관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은 진실을 싫어합니다. 이 세상은 불법이 불편한 세상이 아니라 불법이 자연스러운 세상입니다. 항상 하나님을 대항하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어느 윤리신학자는 이 사회는 결코 도덕적일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사회는 인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회는 얼굴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인격만 없어진다면 못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얼굴이 있는 한, 인격이 있는 한 우리는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영적인 일이나 영적인 생명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시간을 가지라고 하면 시간이 없다고 말합니다. 바쁘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영혼을 파괴시키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합니다. 좋지 못한 소설을 밤새워 읽기도 합니다. 보지 말아야 할 영화를 없는 시간을 쪼개서라도 기어이 보고야 맙니다. 내적인 인격을 아름답게 가꾸기보다는 외모를 가꾸기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청소년들은 유명 브랜드를 입거나 신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찾지 못 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이 나라는 온통 다이어트 열풍입니다. 살진 사람들이 비관해서 자살 할 정도로 이 세상의 잘못된 문화가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생명을 살려야 할 의사들이 모두 성형외과로 지원을 하여 외과나 내과 의사들이 태반이나 부족한 실정이 되어 버렸습니다. 어째서 이렇게 되었습니까? 죽었기 때문입니다. 얼굴을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인격을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 중에는 브랜드 신발이나 옷을 사기 위하여 나쁜 짓도 서슴지 않고 합니다. 나쁜 짓을 하다가 잡힌 사람들이 뉴스에 자주 잡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대부분은 카메라 앞에서 얼굴을 들지 못합니다. 자신의 옷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립니다. 이것은 이 사람이 아직도 얼굴이 있다는 말입니다. 인격이 어느 정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완전히 인격을 무너진 사람들은 카메라 앞에서도 버젓이 자기를 드러냅니다. 이 사람들을 우리는 후안무치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인격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얼굴을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가치관은 너 자신을 위하여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우리를 부추기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서 집단을 이룹니다. 서로 격려해 주고 있습니다. 서로 죄를 짓도록 부추기고 있습니다. 죄를 짓는데 동역자들 까지 생겼습니다. 이것이 이 세대를 따르는 모습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두 번째로 이 세상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는 세상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이 움직이는 원리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악한 영이 지배하는 원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악한 영은 어떤 존재입니까? 2절을 다시 보면 역사하는 영이라고 말합니다. 힘과 능력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마귀는 보이지 않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힘이 있는 존재입니다.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이 보이지 않듯이 마귀도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나에게 능력이듯이 보이지 않는 마귀도 나에게 역사 한다 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비극은 보이지 않는 힘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기에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마귀가 보이지 않기에 마귀를 인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때문에 내가 죽은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죽지 않은 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보이지도 않는 마귀가 우리 가운데 힘으로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까? 마귀는 손도 없습니다. 마귀는 발도 없습니다.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역사 합니다. 어떻게요? 공중권세를 잡고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전략 중에 하나는 제공권을 장악하는 것입니다. 9/11테러로 인하여 미국이 아프카니스탄을 침공 할 때 제일 먼저 미국은 아프카니스탄의 제공권을 장악했습니다. 제공권을 장악하자 탈레반 정권은 지하 깊은 곳으로 숨어버렸습니다. 지하로 숨어 버리면 햇빛을 보지 못합니다. 하늘을 볼 수가 없습니다. 영적인 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탄이 우리의 제공권을 장악했습니다. 그 결과 하늘을 쳐다 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지하 깊은 곳으로 숨어 버립니다. 빛을 볼 수가 없습니다. 이런 우리 안에서 어두운 영은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어두움이 역사 합니다. 분노가 역사 합니다. 의심이 역사 합니다. 절망이 역사 합니다. 그래서 어떤 젊은이는 인터넷을 통하여 자살 동호회에 들어가 동반 자살 할 사람들을 찾고 있습니다. 인터넷에 올라온 사탄 숭배 사상에 빠져 밤마다 사탄과 영적인 교제를 나누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풍속을 따라 때가 되면 우상에게 절을 해야 했고 이사철만 되면 점 집에 가서 점을 보아야만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죄된 삶입니다. 이제 3절입니다. 3절의 우리는 누구입니까? 이들은 바로 유대인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다고 말하는 우리도 너희처럼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인들아 너희들이 우러러 보는 우리도 결코 여기에서 예외가 아니다. 우리는 비록 사회적인 구조가 깨끗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내 마음에는 이미 죄를 안고 있는 진노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마음에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고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믿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때문에 바울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기의 욕심을 따라 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열정을 믿은 사람입니다. 때문에 이런 사람도 거룩한 사람이 아니라 진노의 자녀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진노의 자녀가 언제 된 것입니까? 본질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태생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경이 말씀하시는 성경적인 인간론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중간적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가 살다보니 많은 어려움 때문에 악해지는 존재가 아니라 태생이 본질적으로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천진난만한 아이가 자라면서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되는 게 아니라 사람 자체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엄마의 산고의 고통을 받으며 해산한 그 핏덩이가 영적인 눈으로 보면 죄 덩어리가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인간론입니다. 어느 산모가 아이를 낳았습니다. 간호사가 아이를 엄마 품에 안기고 젖을 물리게 했습니다. 젖을 물리던 이 엄마는 갑자기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통곡하기 시작했습니다. 큰 일이 났나 싶어 부모님들이 달려 왔습니다. 애야 왜 그러냐? 이 엄마가 울면서 말합니다. 어머니! 이제 나 어떡하면 좋아요? 내 아이가 병신이에요. 이 아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요? 어디가 부족한가 살펴보았습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병신이 아니었습니다. 애야 아무렇지도 않은 건강한 아이인데..왜 그러니? 아니에요. 어머니 아이가 병신이에요. 아이 입에 이빨이 없어요. 여러분 아이가 이빨이 없습니까? 물론 없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이빨이 없는 게 아니라 이빨이 있는데 아직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것 뿐이지요. 우리가 이런 존재입니다. 우리는 다 깨끗하게 보이는 것 같아도 내 안에 죄가 때가 되면 내 안에서 올라오는 것입니다. 다만 그것을 누르고 있을 뿐이지요. 종교로 누르고, 도덕으로 누르고 있을 뿐이지요. 교양으로 인격으로 누르고 있을 뿐이지요. 그러면 이방인과 유대인의 죄짓는 차이가 무엇입니까? 이방인은 이 세상 풍속을 따라 죄를 짓습니다. 드러내고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은 어떻게 죄를 짓습니까? 마음으로 죄를 짓습니다. 마음으로 지은 죄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세리는 드러난 죄인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은 드러난 죄 때문에 통곡하고 회개하는 것을 보고 자기는 그렇게 살지 않았음을 의롭게 여기고 세리를 마음 속으로 정죄하고 있는 죄를 짓고 범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기 앉아 있는 우리는 모두 드러나지 않은 죄인일 뿐입니다. 지금 드러난 죄인들은 모두 교도소에 가 있습니다. 우리가 교도소에 가지 않는 것은 우리 죄가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둘 모두가 죄인에서 자유 할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나의 의지와 능력으로는 도저히 끊을 수 없는 권능이 있습니다. 술먹는 사람의 말들을 들어 보십시오. 처음에는 내가 술을 먹고 그 다음에는 술이 술을 먹고 마지막에는 술이 나를 먹는 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인간이고 인간의 배후에는 이렇게 술이 우리를 먹듯이 어두움의 영이 우리를 장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소망 없는 인간에게 죄의 권세를 깨뜨려 버리고 절망 상태에 있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비하신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그토록 자랑스럽게 고백하고 선포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아무리 강한 의지와 고상한 도덕과 심오한 종교와 철학으로도 깨뜨릴 수 없었던 죄악의 세력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깨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마귀의 힘을 누르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마귀의 손안에서 놓임을 받게 된 것을 주님의 이름으로 선포합니다. 고사를 지내지 않고도 잠을 잘 잘 수 있게 되었습니다. 브랜드 옷을 입지 않아도 당당할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 가운데 이런 능력이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선포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출처 :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 agaser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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