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강해] 엡 2:4 - 7
- 설교 : 전준식 목사
저희 교회 청년 아버지는 장로님이십니다. 이 분은 신유의 은사도 있었던 분이십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잘 섬기셨던 분이십니다. 그런데 간에 이상이 와서 병원에 가보니 간암으로 발전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공부하는 아들이 걱정을 할 까 봐서 아들에게 알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친구가 아들에게 알려 주는 바람에 아들이 아버지의 병환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들은 걱정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병원에 입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퇴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간암이던 분이 퇴원을 하셨다면 우리 상식으로는 이제 소망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라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됩니다. 이 아들 된 형제도 너무 걱정이 되어서 저를 찾아와 같이 기도했습니다. 중보기도 분들에게도 기도 부탁을 드렸습니다. 이제 끝이구나! 그러나 하나님! 하나님께서 고쳐주시기를 바랍니다. 라는 간절한 기도를 우리가 합니다. 엊그제 형제가 교회에서 기도하고 가는 중에 저를 만났습니다. 형제가 안도의 한숨을 쉽니다. 목사님! 그렇게 치명적인 것은 아니랍니다. 약물로 치료 할 수 있는 약품이 개발이 되어서 약물치료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 소식을 듣고 절망했습니다. 그러나 약물치료가 가능하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9회 말 막판 뒤집기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소망 없음을 나누었습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허물과 죄로 죽은 존재이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다. 여기에는 어떤 누구도 예외가 없다. 유대인도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다. 이방인도 허물과 죄로 죽은 존재들이다. 때문에 인간은 살 수 있는 가망성이 전혀 없는 존재이다. 죄 덩어리들이다. 이것이 인간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우리에게 9회 말 막판 뒤집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4절 말씀입니다.--4절 우리 개역 성경에는 번역이 안되었습니다만 그런데 성경 원문에는 "그러나" 라는 단어가 분명히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다. 그러나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 안에 죄가 가득 차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였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소망을 예비해 놓으셨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에베소 성도들에게 말하는 바울의 심정을 우리는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고백은 바울이 경험했던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전에는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전에는 육체를 신뢰하고 자랑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바리새인이라는 족보를 자랑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유대교의 엄격한 규례를 따라 살아온 것을 자랑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종교적인 열심을 자랑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육신적으로나 세상적으로 자랑할 것이 너무나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의 삶을 "그러나" 라는 단어 하나로 자신의 삶을 구분합니다. 그리스도를 만난 후부터는 육체를 자랑하지 않고 십자가를 자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이력서에도 바울처럼 반드시 "그러나" 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내가 전에는 육신을 자랑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오직 하나님을 자랑하는 사람이다. 내가 전에는 이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다. 내가 전에는 영원을 사랑하기 보다는 순간적인 즐거움과 성취를 위하여 살았다. 그러나 이제 나는 순간을 사랑하지 않고 영원을 사랑한다. 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의 이력서에 이 고백이 분명히 기록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면 이전의 삶과 "그러나"의 삶을 구분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그리고 하나님께서 소망 없는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4-7절을 읽어보시면 3가지 하나님의 성품을 관찰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긍휼입니다. 사랑입니다. 그리고 자비입니다. 둘째로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신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4-7을 다시 보시면 3개의 동사를 관찰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셨고, 일으키시고, 앉히셨다는 동사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성품 가운데 첫 번째 성품은 긍휼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긍휼함은 반드시 자비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여리고로 가다 강도 만난 사람의 이야기를 기억해 보십시요.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강도를 만나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쓰러진 이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쓰러진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마음에 불쌍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쓰러진 사람을 업고 여관에 맡겨 치료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말씀을 마치시고 물으셨습니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 이에 사람들은 말합니다.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웃의 어려움을 보고 불쌍한 마음을 갖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고 그 마음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 긍휼이요 자비입니다. 그래서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던 우리를 보고 측은한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실천으로 옮기신 것입니다. 그 실천이 무엇입니까? 자기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자기 돈을 들이면서 까지 살린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들을 위하여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우리를 살리신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갖기 원하십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을 보면 불쌍한 마음을 우리 가운데 주십니다. 그리고 돈을 들여서라도 예수님을 믿도록 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갖게 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에 오면 그 사람이 정착할 때까지 친절하게 대합니다. 때로는 그 사람을 위하여 점심을 대접합니다. 생일이 되면 선물도 합니다. 그 사람을 위하여 시간도 할애합니다. 쇼핑도 같이 가줍니다. 이것이 긍휼함이요 자비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성품은 사랑입니다. 사랑에는 3가지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는 주고 받는 사랑입니다. 너가 나를 사랑하면 나도 너를 사랑하겠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지만 너의 배경을 보고 사랑하겠다는 사랑입니다. 얼굴이 아름다우니 사랑하겠다는 것입니다. 직업이 좋으니 사랑하겠다는 것입니다. 집안이 좋으니 사랑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진노의 자녀인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학벌이 좋아서 직업이 좋아서 가문이 좋아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대항하는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 가운데 심어 주셨습니다. 때문에 우리 안에 참으로 소중한 것은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요 그 마음이 행동으로 드러나는 사랑입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남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그는 풍요로운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없어도 남을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는 풍요로운 삶을 사는 사람이요 천국 곡간에 쌓아두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긍휼하십시오. 자비하십시오. 사랑하십시오. 남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사랑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남을 위하여 물 한 그릇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대접하는 것이 풍요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5-6절 3가지 동사를 볼 수 있습니다. 살리셨고 일으키시고 앉히셨다는 동사입니다. 이 동사를 분석해 보면 구원의 과거 구원의 현재 구원의 미래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구원의 과거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은 자신이 허물과 죄로 죽어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풍속을 따라 사는 죽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해당되는 진리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어떻습니까? 이것과는 정 반대입니다. 살리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마침표를 찍은 인생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지닌 사람은 결코 자신을 정죄 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미워하다가도 다시 일어서는 것입니다. 절망하다가도 다시 용기를 가지고 일어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심판자인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그분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에서는 결코 정죄 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살인자가 있다고 가정합시다. 살인자가 잡히면 그는 법에 준엄한 심판을 받습니다. 때로는 그 사람도 사형언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종신형을 선고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살인자의 아버지는 자기 아들을 결코 정죄 하지 않습니다. 혼을 낼지언정 아들을 죽이지는 않습니다. 종신형을 내리지를 못합니다.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입니다. 한번 하나님의 아들은 영원한 아들입니다. 내가 잘못해서 꾸지람을 듣는다고 해서 집을 나가면 그 아들은 어리석은 아들입니다. 아버지를 분명히 아는 사람은 꾸짖음을 당해도 집을 나가지 않습니다.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분명한 양자 됨의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나는 결코 과거의 죄 때문에 정죄 함을 받지 않는 다는 분명한 선포를 할 수 있기 바랍니다. 두 번째는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했다는 말입니다. 구원의 현재를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구원만 받았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사람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간 사람입니다. 새 것이 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이전에 내가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 사라진 것입니다. 이전에 내가 가지고 있었던 못된 습관이 사라진 것입니다. 새 부대에 새 술을 담듯이 우리가 새로운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사람은 이전에 두렵게만 느껴졌던 하나님이 더 이상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 친근한 분임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피하며 살았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 하듯이 우리 영혼이 주를 찾으려고 갈망합니다. 하나님과 더욱 더 가까이 나가고 싶어하는 열망이 넘치게 됩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습니다. 유행을 따라 살지 않습니다. 유한의 시간에 자신을 묶어 두지 않습니다. 영원한 시간에 대한 소망이 있습니다. 세상이 원하는 책을 읽기보다는 성경을 읽고 영적인 데에 더 관심을 많이 둡니다. 사람을 만나 세상 돌아가는 일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보다는 주님과 대화를 하는 시간을 갖기를 원합니다. 세 번째는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앉히심입니다. 구원의 미래입니다. 비록 우리가 지금 이 세상에 몸담고 있지만 앞으로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앉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과 연합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음에도 불구하고 씻기시는 성령께서 우리의 허물을 씻기셔서 이 연합을 유지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연합 때문에 예수님이 하늘에 올라가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 그 자리에 우리도 주님과 함께 간다는 축복입니다. 영원과 잇대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이 세상에서 고난도 참을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늘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땅을 쳐다보며 살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늘을 쳐다보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나팔 소리 울릴 때 나의 이름을 불릴 것을 확신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위엣 것을 바라보십시오.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나를 바라보지 마시고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진노의 자녀인 우리를 구원하셨습니까? --7절 그렇습니다. 그 은혜의 풍성함을 오는 세대에게 나타내시려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과 자비하심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암환자가 있었습니다. 어떤 의사도 이 병은 소망이 없습니다. 수술도 할 수 없습니다 라고 포기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의사가 내가 할 수 있다고 나서서 수술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병이 나았습니다. 그 때부터 사람들은 이 사람이 낳은 것을 보고 감탄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수술했느냐에 대한 관심이 더 많아지는 것입니다. 그런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도저히 소망 없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수술하시고 살리셨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여러분의 직장 사람들이 말합니다. 누가 저 사람을 저렇게 변화시켰나 라고 물어보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구원시켰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오는 세대에게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보이시기를 원하십니다. 이번 북한에서 탈출한 사람들이 아주 빨리 우리나라로 돌아오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나라 외교관들이 나라를 대신해서 일 처리를 아주 잘했기 때문입니다. 이번 일을 통하여 국민들에게 외교관의 능력을 보여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셔서 세상사람들에게 풍성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보이시기를 원하십니다. 때문에 창립 주일을 맞이하는 우리는 돌아오는 금요일에 이 동네를 청소하기로 하였습니다. 하늘의 풍성함을 사람들에게 전하려고 준비했습니다. 여러분이 하는 아주 작은 일이 바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드러내는 것임을 기억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설교 : 전준식 목사
저희 교회 청년 아버지는 장로님이십니다. 이 분은 신유의 은사도 있었던 분이십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잘 섬기셨던 분이십니다. 그런데 간에 이상이 와서 병원에 가보니 간암으로 발전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공부하는 아들이 걱정을 할 까 봐서 아들에게 알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친구가 아들에게 알려 주는 바람에 아들이 아버지의 병환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들은 걱정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병원에 입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퇴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간암이던 분이 퇴원을 하셨다면 우리 상식으로는 이제 소망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라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됩니다. 이 아들 된 형제도 너무 걱정이 되어서 저를 찾아와 같이 기도했습니다. 중보기도 분들에게도 기도 부탁을 드렸습니다. 이제 끝이구나! 그러나 하나님! 하나님께서 고쳐주시기를 바랍니다. 라는 간절한 기도를 우리가 합니다. 엊그제 형제가 교회에서 기도하고 가는 중에 저를 만났습니다. 형제가 안도의 한숨을 쉽니다. 목사님! 그렇게 치명적인 것은 아니랍니다. 약물로 치료 할 수 있는 약품이 개발이 되어서 약물치료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 소식을 듣고 절망했습니다. 그러나 약물치료가 가능하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9회 말 막판 뒤집기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소망 없음을 나누었습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허물과 죄로 죽은 존재이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다. 여기에는 어떤 누구도 예외가 없다. 유대인도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다. 이방인도 허물과 죄로 죽은 존재들이다. 때문에 인간은 살 수 있는 가망성이 전혀 없는 존재이다. 죄 덩어리들이다. 이것이 인간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우리에게 9회 말 막판 뒤집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4절 말씀입니다.--4절 우리 개역 성경에는 번역이 안되었습니다만 그런데 성경 원문에는 "그러나" 라는 단어가 분명히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다. 그러나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 안에 죄가 가득 차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였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소망을 예비해 놓으셨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에베소 성도들에게 말하는 바울의 심정을 우리는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고백은 바울이 경험했던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전에는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전에는 육체를 신뢰하고 자랑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바리새인이라는 족보를 자랑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유대교의 엄격한 규례를 따라 살아온 것을 자랑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종교적인 열심을 자랑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육신적으로나 세상적으로 자랑할 것이 너무나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의 삶을 "그러나" 라는 단어 하나로 자신의 삶을 구분합니다. 그리스도를 만난 후부터는 육체를 자랑하지 않고 십자가를 자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이력서에도 바울처럼 반드시 "그러나" 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내가 전에는 육신을 자랑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오직 하나님을 자랑하는 사람이다. 내가 전에는 이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다. 내가 전에는 영원을 사랑하기 보다는 순간적인 즐거움과 성취를 위하여 살았다. 그러나 이제 나는 순간을 사랑하지 않고 영원을 사랑한다. 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의 이력서에 이 고백이 분명히 기록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면 이전의 삶과 "그러나"의 삶을 구분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그리고 하나님께서 소망 없는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4-7절을 읽어보시면 3가지 하나님의 성품을 관찰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긍휼입니다. 사랑입니다. 그리고 자비입니다. 둘째로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신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4-7을 다시 보시면 3개의 동사를 관찰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셨고, 일으키시고, 앉히셨다는 동사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성품 가운데 첫 번째 성품은 긍휼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긍휼함은 반드시 자비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여리고로 가다 강도 만난 사람의 이야기를 기억해 보십시요.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강도를 만나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쓰러진 이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쓰러진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마음에 불쌍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쓰러진 사람을 업고 여관에 맡겨 치료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말씀을 마치시고 물으셨습니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 이에 사람들은 말합니다.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웃의 어려움을 보고 불쌍한 마음을 갖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고 그 마음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 긍휼이요 자비입니다. 그래서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던 우리를 보고 측은한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실천으로 옮기신 것입니다. 그 실천이 무엇입니까? 자기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자기 돈을 들이면서 까지 살린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들을 위하여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우리를 살리신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갖기 원하십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을 보면 불쌍한 마음을 우리 가운데 주십니다. 그리고 돈을 들여서라도 예수님을 믿도록 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갖게 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에 오면 그 사람이 정착할 때까지 친절하게 대합니다. 때로는 그 사람을 위하여 점심을 대접합니다. 생일이 되면 선물도 합니다. 그 사람을 위하여 시간도 할애합니다. 쇼핑도 같이 가줍니다. 이것이 긍휼함이요 자비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성품은 사랑입니다. 사랑에는 3가지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는 주고 받는 사랑입니다. 너가 나를 사랑하면 나도 너를 사랑하겠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지만 너의 배경을 보고 사랑하겠다는 사랑입니다. 얼굴이 아름다우니 사랑하겠다는 것입니다. 직업이 좋으니 사랑하겠다는 것입니다. 집안이 좋으니 사랑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진노의 자녀인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학벌이 좋아서 직업이 좋아서 가문이 좋아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대항하는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 가운데 심어 주셨습니다. 때문에 우리 안에 참으로 소중한 것은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요 그 마음이 행동으로 드러나는 사랑입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남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그는 풍요로운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없어도 남을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는 풍요로운 삶을 사는 사람이요 천국 곡간에 쌓아두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긍휼하십시오. 자비하십시오. 사랑하십시오. 남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사랑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남을 위하여 물 한 그릇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대접하는 것이 풍요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5-6절 3가지 동사를 볼 수 있습니다. 살리셨고 일으키시고 앉히셨다는 동사입니다. 이 동사를 분석해 보면 구원의 과거 구원의 현재 구원의 미래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구원의 과거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은 자신이 허물과 죄로 죽어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풍속을 따라 사는 죽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해당되는 진리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어떻습니까? 이것과는 정 반대입니다. 살리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마침표를 찍은 인생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지닌 사람은 결코 자신을 정죄 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미워하다가도 다시 일어서는 것입니다. 절망하다가도 다시 용기를 가지고 일어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심판자인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그분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에서는 결코 정죄 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살인자가 있다고 가정합시다. 살인자가 잡히면 그는 법에 준엄한 심판을 받습니다. 때로는 그 사람도 사형언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종신형을 선고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살인자의 아버지는 자기 아들을 결코 정죄 하지 않습니다. 혼을 낼지언정 아들을 죽이지는 않습니다. 종신형을 내리지를 못합니다.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입니다. 한번 하나님의 아들은 영원한 아들입니다. 내가 잘못해서 꾸지람을 듣는다고 해서 집을 나가면 그 아들은 어리석은 아들입니다. 아버지를 분명히 아는 사람은 꾸짖음을 당해도 집을 나가지 않습니다.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분명한 양자 됨의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나는 결코 과거의 죄 때문에 정죄 함을 받지 않는 다는 분명한 선포를 할 수 있기 바랍니다. 두 번째는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했다는 말입니다. 구원의 현재를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구원만 받았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사람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간 사람입니다. 새 것이 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이전에 내가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 사라진 것입니다. 이전에 내가 가지고 있었던 못된 습관이 사라진 것입니다. 새 부대에 새 술을 담듯이 우리가 새로운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사람은 이전에 두렵게만 느껴졌던 하나님이 더 이상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 친근한 분임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피하며 살았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 하듯이 우리 영혼이 주를 찾으려고 갈망합니다. 하나님과 더욱 더 가까이 나가고 싶어하는 열망이 넘치게 됩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습니다. 유행을 따라 살지 않습니다. 유한의 시간에 자신을 묶어 두지 않습니다. 영원한 시간에 대한 소망이 있습니다. 세상이 원하는 책을 읽기보다는 성경을 읽고 영적인 데에 더 관심을 많이 둡니다. 사람을 만나 세상 돌아가는 일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보다는 주님과 대화를 하는 시간을 갖기를 원합니다. 세 번째는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앉히심입니다. 구원의 미래입니다. 비록 우리가 지금 이 세상에 몸담고 있지만 앞으로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앉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과 연합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음에도 불구하고 씻기시는 성령께서 우리의 허물을 씻기셔서 이 연합을 유지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연합 때문에 예수님이 하늘에 올라가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 그 자리에 우리도 주님과 함께 간다는 축복입니다. 영원과 잇대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이 세상에서 고난도 참을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늘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땅을 쳐다보며 살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늘을 쳐다보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나팔 소리 울릴 때 나의 이름을 불릴 것을 확신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위엣 것을 바라보십시오.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나를 바라보지 마시고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진노의 자녀인 우리를 구원하셨습니까? --7절 그렇습니다. 그 은혜의 풍성함을 오는 세대에게 나타내시려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과 자비하심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암환자가 있었습니다. 어떤 의사도 이 병은 소망이 없습니다. 수술도 할 수 없습니다 라고 포기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의사가 내가 할 수 있다고 나서서 수술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병이 나았습니다. 그 때부터 사람들은 이 사람이 낳은 것을 보고 감탄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수술했느냐에 대한 관심이 더 많아지는 것입니다. 그런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도저히 소망 없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수술하시고 살리셨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여러분의 직장 사람들이 말합니다. 누가 저 사람을 저렇게 변화시켰나 라고 물어보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구원시켰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오는 세대에게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보이시기를 원하십니다. 이번 북한에서 탈출한 사람들이 아주 빨리 우리나라로 돌아오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나라 외교관들이 나라를 대신해서 일 처리를 아주 잘했기 때문입니다. 이번 일을 통하여 국민들에게 외교관의 능력을 보여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셔서 세상사람들에게 풍성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보이시기를 원하십니다. 때문에 창립 주일을 맞이하는 우리는 돌아오는 금요일에 이 동네를 청소하기로 하였습니다. 하늘의 풍성함을 사람들에게 전하려고 준비했습니다. 여러분이 하는 아주 작은 일이 바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드러내는 것임을 기억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출처 :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 agaser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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