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강해] 엡 2:11-14 (그리스도의 피)
- 설교 : 전준식 목사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에베소 교인은 이방인교회 였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유대인보다 이방인들이 많은 교회였습니다. 이방인이었던 에베소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성도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십자가의 은혜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살림을 받은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전체의 분위기를 보면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되지 못하고 서로 이질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유대인은 유대인으로 긍지와 자긍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방인은 이방인대로 유대인을 바라보는 눈이 곱지만 않습니다. 그래서 이방인인 에베소 교인들은 에베소 사람들만 어울리고 그들과 친교를 나누었던 것입니다. 반대로 유대인들은 유대인들끼리 어울려 신앙 생활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초대교회의 모습만이 아닙니다. 오늘 이 땅에서 신앙 생활하고 있는 교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교회가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하나님의 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보이지 않는 막힌 담들이 있습니다. 신분의 벽들이 있습니다. 지방의 벽들이 있습니다. 교회 전입순이나 직분의 벽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이 땅에 있는 교회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년 말이 되면 교역자들은 구역 편성을 하면서 힘들어합니다. 나는 절대로 저 구역에 가지 않을래요. 나를 저 구역으로 보내면 나는 구역 예배를 드리지 않겠어요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드는 사람끼리만 신앙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외국에서 외국 사람들과 어울려 예배드리는 것을 거북해 합니다. 이럴 때 우리 교역자들은 할 수 없이 다른 곳으로 보내지 못하고 그냥 친한 분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도록 합니다. 또한 이런 한국 사람들을 위하여 이민사회에 나가 목회를 하는 목사들이 필요합니다. 물론 현실적인 문제로 한국 목사들이 미국이나 캐나다에 가서 한국인 교회를 세워야 할 것입니다. 나는 저 구역을 절대로 가지 않겠다고 말하는 성도를 교역자는 사랑하는 마음에서 친한 사람끼리 구역을 조직해 드리는 것은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성경적으로 보면 이런 행위는 아주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잘 기억해 주십시오. 교회가 무엇입니까? 교회는 하늘 나라의 샘플입니다. 이 지상의 교회는 우리가 앞으로 가야 할 하늘나라의 삶을 먼저 맛보고 경험하고 살아 보는 곳입니다. 하늘나라에는 한국인만이 모여 살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다양한 종족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오는 곳입니다. 다양한 종족들을 만나 영원토록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야 할 곳이 하늘나라의 교회입니다. 이 지상교회에서 타 민족과 사는 훈련을 배워야 합니다. 이 지상 교회에서 보기 싫은 사람을 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에베소 교회에는 어떤 문제가 있었습니까?--11절 그렇습니다. 이들은 유대인과 하나되지 못한 채 신앙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들 가운데에는 유대인들이 하는 십일조 보다 더 많은 십의 이조를 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금식하는 것을 보고 자기는 유대인 보다 더 많은 날을 금식하는 것을 자랑하는 사람도 생겼을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이런 사람을 보고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선전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어느새 이방인으로 살았던 에베소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성도가 된 것을 잊은 채 자신의 신앙 생활을 공로로 비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생각하라 고 말합니다. 기억하라 고 말합니다. 너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이방인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라 는 것입니다. 육체적으로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말들 가운데 다음과 같은 말들이 있습니다. "올챙이 적 시절을 모른다."" 물에 빠진 사람을 살려 주었더니 자기 보따리 내놓으라고 한다." 이런 표현은 자신의 과거를 잊은 채 교만한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 하는 말입니다. 이런 행동은 교만한 마음에서 시작되는 행동들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 문제는 우리가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뒤를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의도적인 마음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상대방만 보면 그 사람 과거가 생각이 나서 도저히 은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올챙이 적 시절이 기억나서 상대방을 현재 그대로 인정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서로 하나되지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태어 날 때부터 서로 차이가 있게 태어납니다. 백인이 있는가 하면 흑인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차이는 하나님의 주권이요 하나님의 뜻입니다. 아름다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뛰어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유대인이 있는가 하면 이방인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차이가 이웃을 무시해서는 곤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서로의 차이를 비교하라고 하신 것이라 아니라 그 차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라 고 하신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백인은 백인대로 살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흑인은 흑인대로 살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장애자는 장애자로 살 권리가 있습니다. 연약한 사람은 연약한 대로 인정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힘이 생기면서부터 힘없는 사람을 무시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보호할 성을 쌓아가면서 성 밖에 있는 사라들을 무시하고 상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먼저 택하신 이유는 유대인들을 통하여 온 세계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지기를 원하셔서 택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신들과 이방인을 구분했습니다. 이방인과 상종을 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만든 성안에서 살아갑니다. 스스로 할례당과 무할례당으로 구분하기 시작합니다. 이로 인하여 유대인들은 유대인임을 자랑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방인을 무시하는데 까지 발전하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개라고 불렀습니다. 반대로 이방인들은 유대인보다 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유대인들을 이기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유대인에게 당한 수치를 그래도 행하고 싶어했습니다. 이런 일들은 어디서 나온 것들입니까? 이런 생각은 모두 힘에서 나온 생각들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공부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힘을 얻기 위함이지요. 돈을 버는 것도 힘을 얻기 위함이지요. 그 힘으로 남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함이지요. 이런 힘의 철학이 우리 삶에 깊이 들어 온 것이 바로 진화론입니다. 진화론은 철저히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는 것처럼 힘있는 자와 힘없는 자를 분리하려는 철학입니다. 그래서 미국의 학자 푸트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흑인이 백인처럼 진화되기 위해서는 거의 무한대의 시간이 필요 할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미국의 지식층들은 아프리카에서 건너온 아메리카 흑인들은 구제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푸트남이란 학자가 말한 말은 틀렸습니다. 흑인이 백인이 되는 것은 무한대 시간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절대로 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간다 할지라도 우리는 백인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죽었다가 깨어나도 나는 백인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창조주 하나님께서 나를 황인으로 만드시기로 계획하셨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백인으로 태어난 것에 대해서 우월감을 갖는 것도 문제지만 내가 흑인으로 태어난 것을 비관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무엇 때문에 비관하십니까? 우리가 무엇 때문에 자기 스스로를 우월하다고 하십니까? 돈이 없다고 비관하십니까? 돈이 많다고 우월하십니까? 건강하다고 건강을 남용하십니까? 건강하지 못하다고 자신을 절망 가운데로 몰아 가십니까?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다 똑 같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창조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서로 비교 하기 때문에 깨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남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 때문에 관계는 깨어지는 것입니다. 남편의 집보다 아내의 집이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부부 관계가 깨지는 것입니다. 남편이 불쌍해서 내가 구제 해주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우리와 비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인간의 옷을 입고 죄인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우월한 위치에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좌절하고 절망하는 사람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사람을 위하여 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의 처지를 비관하지 마십시오. 나의 나됨은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음을 선포하십시오.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시면 내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자존감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깨어지면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약속을 얻지 못합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소망이 없습니다. 오직 진노와 갈등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약속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소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할 수 없는 것도 그리스도는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깨어진 관계를 누가 회복 시켜 주시는 것입니까? --13절 그렇습니다. 에베소 교회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서로 하나 되지 못했습니다. 이 때 바울은 지도자들을 소집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됨의 대한 주제로 세미나 하지 않았습니다. 분열이 있는 에베소 교회가 하나 되기 위해서는 오직 그리스도의 피만이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교회가 어떤 문제로 서로 다른 의견이 생기면 그 의견을 조율하기 위하여 서로 회의를 합니다. 때로는 선거도 합니다, 다수결로 해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그 문제가 해결 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서로 회복 되는 것은 회의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수결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선한 행위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워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적인 행위로 가까워 질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나가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피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피로 물든 책입니다. 성경은 약속의 책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피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마다 피로 인쳐 있고 피로 보증되어 있습니다. 창세기에서부터 피는 흐르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무화과 나무로 옷을 해 입고 있을 때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의 부끄러움을 감추시기 위하여 동물의 피를 흘려주신 것입니다. 이어서 창세기에는 가인의 의해서 아벨의 피가 흘렀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가 무엇을 하였느냐? 너 아우의 피가 땅에서부터 내가 호소하고 있다." 아벨의 피가 하나님께 보응해 달라고 소리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창세기에 두 종류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하나는 동물이 죽어 피를 흘려 만든 가죽옷의 피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아벨의 피입니다. 하나는 죄를 덮는 피요 하나는 저주하는 아벨의 피입니다. 그러면 우리 예수님의 피는 무슨 피입니까? 예수님의 피는 진노의 피가 아닙니다. 저주의 피가 아닙니다. 용서의 피입니다. 화목의 피입니다. 이 주님의 피는 우리에게 부르짖고 있습니다. 나는 죽었다. 그러나 너는 살았다고 선포하시고 계십니다. 나는 너 대신 심판을 받았으니 너는 나가서 자유롭게 살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이제 어느 누구도 너를 정죄 할 수 없다 고 예수님의 피는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번 주 교회에 안나갔으니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벌하실 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십일조 안 하면 내 사업이 망할 것 같아서 십일조 하는 사람이 있다면 자유 하십시오. 여러분 진정한 구원은 우리에게 진정한 양심의 자유를 가져다 줍니다. 양심의 자유는 죄로부터 우리를 자유케하고 죽음과 질병으로부터 치유하게 하십니다. 내가 죽을 힘을 다하여 죄를 안짓는 것이 아니라 너무 기뻐서 죄를 짓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끙끙대면서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봉사하고 싶은 마음이 깊은 곳에서부터 생겨서 봉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피로 인하여 가까워진 사람들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봉사는 비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 생활은 비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하니까 나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피를 흘려 주신 은혜로 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십일조 많이 낸다고 자랑할 필요가 없습니다. 새벽기도 열심히 나온다고 나오지 못하는 사람을 비교할 필요도 없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이런 것 때문에 서로 갈등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의 피로 이들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저는 우리 신림교회가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가 되는 교회가 되어서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약속의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스도의 피로 진정한 자유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설교 : 전준식 목사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에베소 교인은 이방인교회 였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유대인보다 이방인들이 많은 교회였습니다. 이방인이었던 에베소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성도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십자가의 은혜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살림을 받은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전체의 분위기를 보면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되지 못하고 서로 이질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유대인은 유대인으로 긍지와 자긍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방인은 이방인대로 유대인을 바라보는 눈이 곱지만 않습니다. 그래서 이방인인 에베소 교인들은 에베소 사람들만 어울리고 그들과 친교를 나누었던 것입니다. 반대로 유대인들은 유대인들끼리 어울려 신앙 생활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초대교회의 모습만이 아닙니다. 오늘 이 땅에서 신앙 생활하고 있는 교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교회가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하나님의 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보이지 않는 막힌 담들이 있습니다. 신분의 벽들이 있습니다. 지방의 벽들이 있습니다. 교회 전입순이나 직분의 벽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이 땅에 있는 교회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년 말이 되면 교역자들은 구역 편성을 하면서 힘들어합니다. 나는 절대로 저 구역에 가지 않을래요. 나를 저 구역으로 보내면 나는 구역 예배를 드리지 않겠어요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드는 사람끼리만 신앙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외국에서 외국 사람들과 어울려 예배드리는 것을 거북해 합니다. 이럴 때 우리 교역자들은 할 수 없이 다른 곳으로 보내지 못하고 그냥 친한 분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도록 합니다. 또한 이런 한국 사람들을 위하여 이민사회에 나가 목회를 하는 목사들이 필요합니다. 물론 현실적인 문제로 한국 목사들이 미국이나 캐나다에 가서 한국인 교회를 세워야 할 것입니다. 나는 저 구역을 절대로 가지 않겠다고 말하는 성도를 교역자는 사랑하는 마음에서 친한 사람끼리 구역을 조직해 드리는 것은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성경적으로 보면 이런 행위는 아주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잘 기억해 주십시오. 교회가 무엇입니까? 교회는 하늘 나라의 샘플입니다. 이 지상의 교회는 우리가 앞으로 가야 할 하늘나라의 삶을 먼저 맛보고 경험하고 살아 보는 곳입니다. 하늘나라에는 한국인만이 모여 살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다양한 종족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오는 곳입니다. 다양한 종족들을 만나 영원토록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야 할 곳이 하늘나라의 교회입니다. 이 지상교회에서 타 민족과 사는 훈련을 배워야 합니다. 이 지상 교회에서 보기 싫은 사람을 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에베소 교회에는 어떤 문제가 있었습니까?--11절 그렇습니다. 이들은 유대인과 하나되지 못한 채 신앙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들 가운데에는 유대인들이 하는 십일조 보다 더 많은 십의 이조를 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금식하는 것을 보고 자기는 유대인 보다 더 많은 날을 금식하는 것을 자랑하는 사람도 생겼을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이런 사람을 보고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선전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어느새 이방인으로 살았던 에베소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성도가 된 것을 잊은 채 자신의 신앙 생활을 공로로 비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생각하라 고 말합니다. 기억하라 고 말합니다. 너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이방인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라 는 것입니다. 육체적으로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말들 가운데 다음과 같은 말들이 있습니다. "올챙이 적 시절을 모른다."" 물에 빠진 사람을 살려 주었더니 자기 보따리 내놓으라고 한다." 이런 표현은 자신의 과거를 잊은 채 교만한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 하는 말입니다. 이런 행동은 교만한 마음에서 시작되는 행동들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 문제는 우리가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뒤를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의도적인 마음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상대방만 보면 그 사람 과거가 생각이 나서 도저히 은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올챙이 적 시절이 기억나서 상대방을 현재 그대로 인정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서로 하나되지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태어 날 때부터 서로 차이가 있게 태어납니다. 백인이 있는가 하면 흑인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차이는 하나님의 주권이요 하나님의 뜻입니다. 아름다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뛰어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유대인이 있는가 하면 이방인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차이가 이웃을 무시해서는 곤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서로의 차이를 비교하라고 하신 것이라 아니라 그 차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라 고 하신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백인은 백인대로 살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흑인은 흑인대로 살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장애자는 장애자로 살 권리가 있습니다. 연약한 사람은 연약한 대로 인정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힘이 생기면서부터 힘없는 사람을 무시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보호할 성을 쌓아가면서 성 밖에 있는 사라들을 무시하고 상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먼저 택하신 이유는 유대인들을 통하여 온 세계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지기를 원하셔서 택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신들과 이방인을 구분했습니다. 이방인과 상종을 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만든 성안에서 살아갑니다. 스스로 할례당과 무할례당으로 구분하기 시작합니다. 이로 인하여 유대인들은 유대인임을 자랑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방인을 무시하는데 까지 발전하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개라고 불렀습니다. 반대로 이방인들은 유대인보다 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유대인들을 이기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유대인에게 당한 수치를 그래도 행하고 싶어했습니다. 이런 일들은 어디서 나온 것들입니까? 이런 생각은 모두 힘에서 나온 생각들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공부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힘을 얻기 위함이지요. 돈을 버는 것도 힘을 얻기 위함이지요. 그 힘으로 남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함이지요. 이런 힘의 철학이 우리 삶에 깊이 들어 온 것이 바로 진화론입니다. 진화론은 철저히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는 것처럼 힘있는 자와 힘없는 자를 분리하려는 철학입니다. 그래서 미국의 학자 푸트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흑인이 백인처럼 진화되기 위해서는 거의 무한대의 시간이 필요 할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미국의 지식층들은 아프리카에서 건너온 아메리카 흑인들은 구제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푸트남이란 학자가 말한 말은 틀렸습니다. 흑인이 백인이 되는 것은 무한대 시간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절대로 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간다 할지라도 우리는 백인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죽었다가 깨어나도 나는 백인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창조주 하나님께서 나를 황인으로 만드시기로 계획하셨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백인으로 태어난 것에 대해서 우월감을 갖는 것도 문제지만 내가 흑인으로 태어난 것을 비관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무엇 때문에 비관하십니까? 우리가 무엇 때문에 자기 스스로를 우월하다고 하십니까? 돈이 없다고 비관하십니까? 돈이 많다고 우월하십니까? 건강하다고 건강을 남용하십니까? 건강하지 못하다고 자신을 절망 가운데로 몰아 가십니까?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다 똑 같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창조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서로 비교 하기 때문에 깨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남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 때문에 관계는 깨어지는 것입니다. 남편의 집보다 아내의 집이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부부 관계가 깨지는 것입니다. 남편이 불쌍해서 내가 구제 해주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우리와 비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인간의 옷을 입고 죄인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우월한 위치에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좌절하고 절망하는 사람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사람을 위하여 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의 처지를 비관하지 마십시오. 나의 나됨은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음을 선포하십시오.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시면 내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자존감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깨어지면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약속을 얻지 못합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소망이 없습니다. 오직 진노와 갈등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약속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소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할 수 없는 것도 그리스도는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깨어진 관계를 누가 회복 시켜 주시는 것입니까? --13절 그렇습니다. 에베소 교회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서로 하나 되지 못했습니다. 이 때 바울은 지도자들을 소집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됨의 대한 주제로 세미나 하지 않았습니다. 분열이 있는 에베소 교회가 하나 되기 위해서는 오직 그리스도의 피만이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교회가 어떤 문제로 서로 다른 의견이 생기면 그 의견을 조율하기 위하여 서로 회의를 합니다. 때로는 선거도 합니다, 다수결로 해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그 문제가 해결 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서로 회복 되는 것은 회의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수결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선한 행위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워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적인 행위로 가까워 질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나가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피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피로 물든 책입니다. 성경은 약속의 책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피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마다 피로 인쳐 있고 피로 보증되어 있습니다. 창세기에서부터 피는 흐르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무화과 나무로 옷을 해 입고 있을 때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의 부끄러움을 감추시기 위하여 동물의 피를 흘려주신 것입니다. 이어서 창세기에는 가인의 의해서 아벨의 피가 흘렀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가 무엇을 하였느냐? 너 아우의 피가 땅에서부터 내가 호소하고 있다." 아벨의 피가 하나님께 보응해 달라고 소리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창세기에 두 종류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하나는 동물이 죽어 피를 흘려 만든 가죽옷의 피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아벨의 피입니다. 하나는 죄를 덮는 피요 하나는 저주하는 아벨의 피입니다. 그러면 우리 예수님의 피는 무슨 피입니까? 예수님의 피는 진노의 피가 아닙니다. 저주의 피가 아닙니다. 용서의 피입니다. 화목의 피입니다. 이 주님의 피는 우리에게 부르짖고 있습니다. 나는 죽었다. 그러나 너는 살았다고 선포하시고 계십니다. 나는 너 대신 심판을 받았으니 너는 나가서 자유롭게 살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이제 어느 누구도 너를 정죄 할 수 없다 고 예수님의 피는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번 주 교회에 안나갔으니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벌하실 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십일조 안 하면 내 사업이 망할 것 같아서 십일조 하는 사람이 있다면 자유 하십시오. 여러분 진정한 구원은 우리에게 진정한 양심의 자유를 가져다 줍니다. 양심의 자유는 죄로부터 우리를 자유케하고 죽음과 질병으로부터 치유하게 하십니다. 내가 죽을 힘을 다하여 죄를 안짓는 것이 아니라 너무 기뻐서 죄를 짓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끙끙대면서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봉사하고 싶은 마음이 깊은 곳에서부터 생겨서 봉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피로 인하여 가까워진 사람들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봉사는 비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 생활은 비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하니까 나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피를 흘려 주신 은혜로 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십일조 많이 낸다고 자랑할 필요가 없습니다. 새벽기도 열심히 나온다고 나오지 못하는 사람을 비교할 필요도 없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이런 것 때문에 서로 갈등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의 피로 이들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저는 우리 신림교회가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가 되는 교회가 되어서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약속의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스도의 피로 진정한 자유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 agaser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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