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 에베소서

[스크랩] [에베소서강해] 엡 2:16-18 (한 성령)

하나님아들 2014. 1. 2. 10:29
[에베소서강해] 엡 2:16-18 (한 성령)


- 설교 : 전준식 목사

우리나라가 민주화가 되면서 제일 먼저 수면 위로 떠오른 사회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사용주와 노동자가 극한적인 대립일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시간 동안 눌려 내 왔던 노동자들이 자기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사용주들과 노동자의 주장은 늘 평행선만 달리고 있습니다. 이 때 이들 사이를 중재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독재정권 시대에는 사회에서 존경받는 사람들이 이들 사이에 중재자로 나섰습니다. 지금은 정부가 이 둘 사이를 중재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이 둘 사이는 화해시킬 능력이 있다고 인정하기 때문에 중간에 개입해서 서로 다투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간에 개입한 사람이 능력이 없거나 양쪽 어느 한쪽이라도 인정받지 못하면 문제는 더 커지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에게 신뢰를 받는 사람이 중재를 하면 노사문제가 쉽게 해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늘 싸움입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께 순종할 것인가? 내 마음대로 살 것인가에 대한 투쟁의 연속입니다. 육체의 소욕을 따를 것인가? 성령의 소욕을 따를 것인가? 에 대한 싸움이 연속되고 있습니다. 이런 싸움 속에 중계자로 나선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일어나는 대립을 중재하시는 분이십니다. 어떻게 중재하십니까? --16절 그렇습니다. 십자가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대립과 싸움을 화목하게 만드시는 분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십자가는 원래 치욕스런 사형들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쳐다보고 싶지 않는 사형틀이요 가장 저주스런 죽음의 도구였습니다. 이 사형틀에 앞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은 구원을 얻기 위하여 모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모인 사람들은 예수님께 침을 뱉기 위하여 모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저주하러 모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가장 치욕스럽게 죽어 가는 예수님을 구경하러 모인 사람들이었습니다. 만약 우리 사회에서 이런 일들이 재현 되다면 우리도 같은 마음으로 십자가에 모여들었을 것입니다. 많은 방송사들이 전국으로 중계하는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가장 치욕스럽게 죽는 광경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싶어 할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러 모인 갈보리 십자가에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들은 저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십자가 앞에 나온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철없어서 이 자리에 나온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를 벌하지 마시고 용서 해 달라고 기도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 가운데 아무 것도 모른 채 교회에 나오셨습니까? 친구가 구경 삼아 가자고 해서 나오셨습니까? 아내의 손에 끌려서 나오셨습니까? 교회가 어떤 곳인지 호기심으로 나오셨습니까? 이런 분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저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내 앞에 나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 아무것도 모른 채 나온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저는 오늘 이 주님의 음성이 여러분 영혼 위에 들려 지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나오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라는 한 인간이 나의 죄를 사할 수 있다고 믿고 나오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고 나왔지만 그리고 아무것도 모른 채 예수님 앞에 나와 앉아 있지만 어느새 주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계십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관계만 회복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서로 원수지간도 화목하게 하시는 능력입니다. 이 일이 어디에서 일어난다고 말씀하십니까? 다시 한번 16절을 보십시오. 여기에 한 몸으로 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한 몸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교회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교회에 이 용서의 십자가를 주셨습니다. 때문에 교회는 십자가를 선포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복을 주신다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교회를 통하여 용서를 선포하시고 화해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직접 복을 내리실 사람에게 복을 주시지 왜 아브라함을 통하여, 교회를 통하여 복을 내리시고 용서를 선포하시는 것입니까? 우리 생각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만 주시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복만 받을 테니 하나님께서 다니시면서 복 받을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에서 십자가를 선포하게 하시고 교회를 통하여 원수와 화목하게 하게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일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그냥 놀고 먹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일거리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열심히 젊은 시절에 열심히 일하시다가 퇴직을 하면 어떻습니까? 편하십니까? 아닙니다. 일하고 싶습니다. 일을 지나치게 해도 피곤하지만 일을 너무 하지 않아도 피곤합니다. 사람은 일이 있어야 합니다. 돈이 궁해서가 일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놀고 먹는 것이 불편하고 피곤하기 때문에 일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신림동은 축복 받은 땅이라고 여겨집니다. 이 곳은 우리 어머니들이 일을 할 수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여 집사님들에게 고시원을 할 수 있도록 축복하셨습니다. 나이가 연만한데도 불구하고 일하시는 모습을 보면 참 복 받은 분들이라고 생각됩니다. 일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하나님은 교회 된 우리와 함께 일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때문에 교회가 된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역을 해야합니다. 이것은 우리를 피곤하게 만들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를 못살게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를 더 건강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십니다. 때문에 세상의 직업은 은퇴가 있지만 하나님 나라에는 은퇴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토록 우리에게 사역을 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영적인 젊음을 주시기 위하여 일하게 하실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가도 우리는 일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서 본 하늘나라의 일을 우리도 할 것입니다. 24장로가 성도들의 기도를 들고 하나님의 존전에 나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하늘나라에 가서 이 땅에서 올리는 기도를 들고 하나님의 존전에 가는 일을 할 것입니다. 히브리서에 보여주셨던 믿음의 선진들이 이 땅에 사는 믿음의 후배들을 위하여 중보하는 일을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은퇴 없는 거룩한 일에 헌신하십시오. 영적인 일에 관심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하늘의 복을 전하십시오. 우리는 모두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왕이 선포하면 사람들은 다 듣고 순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회상의 사장이 말하면 사원들은 다 듣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장 자리는 은퇴가 있습니다. 그 자리를 떠나면 어떤 누구도 그 사람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복된 자리는 어느 누구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이 자리는 영원합니다. 이 자리는 내 능력으로 얻은 자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복을 전하는 거룩한 통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은 또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17절 여기서 먼데 있는 사람은 이방인을 말합니다. 가까운 데 있는 사람은 유대인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모두 평안을 원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안식을 원한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평안하십니까? 우리는 이 질문에 정직하게 답을 하지 못합니다. 그냥 평안하다고 인사차 말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죽지 못해서 살지요. 그냥 사니까 살지요 라고 대답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평안을 얻기 위하여 술을 마시기도 합니다. 수면제를 먹고 잠을 청하기도 합니다. 노이로제로 인하여 마음에 평강을 잃어버린 수많은 현대인들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평안을 얻기 위하여 더 열심히 자신의 일에 헌신하기도 합니다. 더 착한 일을 열심히 해보고 음악도 듣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평강을 얻지 못합니다. 존경할 만한 삶을 사는 사람도 그 마음 속에는 갈등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만 평안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교인도 평안을 원합니다. 아무리 경건하게 사는 성도라도 평안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다 곤고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평강을 원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은 바울이 이사야 57장19절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57장 20절을 보면 악인은 진흙과 더러운 것을 뱉어내는 요동하는 바다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다는 정기적으로 요동합니다. 파도가 칩니다. 바다가 요동하면 더러운 것들이 다 올라옵니다. 그 더러운 것들이 해안으로 밀려옵니다. 왜 이렇게 바다는 정기적으로 요동하고 파도가 일어나는 것입니까? 그것은 달과 지구가 가지고 있는 인력 때문에 바다는 요동합니다. 그리고 요동하는 바다에 바람이 합세하면 파도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원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요동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늘 평강 가운데 살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불행이 없었습니다. 갈등이 없었습니다. 고통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죽음이 들어 왔습니다. 악의 세력들이 우리를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걱정하고 근심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죽음을 생각하면 무섭습니다. 마치 바다가 요동하는 것처럼 우리 안에 하나님에 대한 의식과 함께 내 안에 있는 죄 성이 서로 우리를 끌어 당기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가 우리를 공격 할 때에는 우리 안에 파도가 넘쳐 나서 더러운 것들이 내 안에서 올라오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만족이 없는 삶!. 휴식이 없는 삶이 바로 인간의 본 모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피곤해 하는 것입니다. 지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 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렇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원치 않는 고난을 받든지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존재입니다. 저 사람은 고민이 없겠지 하고 만나보면 그 사람도 고민이 참 많이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일에 대한 고민, 자신에 대한 고민 부부사이에 대한 고민 자식에 대한 고민들을 안고 살아가는 게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남몰래 흘린 눈물과 한숨을 다 모아 본다면 얼마나 많을까요?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으로 얼마나 우는 일이 많이 있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을 증오하면 살아가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이런 것을 모두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죄로 인하여 저주받은 피곤한 삶을 알고 계십니다. 이런 고민을 안고 무거운 짐을 진 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님은 함께 일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참된 평화, 참된 안식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진정한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 가야 합니다. 의식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가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교회에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교회에 나온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께 나온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 가면 우리를 반겨 주십니다. 예수님께 오면 부수고 녹이고 고치십니다. 예수님께 가면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 예수님께로 오면 영원한 안식을 누립니다. 이런 평안을 얻게 된 사람의 인생은 어디를 향해서 가는 것입니까?--18절 그렇습니다. 바울 사도는 16절에서 십자가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능력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런데 18절에서는 하나님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아버지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십자가의 피로 하나님과 화목 된 우리가 얻게 되는 축복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앞에 나아 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오늘 본문은 말씀하십니다. 한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성령의 은총입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축복하신 것입니다. 때문에 성령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어떤 개념이나 철학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실제로 만드신 분이시고 말씀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병들었을 때에 같이 내 옆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힘들 때 같이 걸어가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소망 없는 사람에게 소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했을 때 바른 길로 가도록 채찍을 주시는 아버지 되십니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은 어떤 관념이 아니라 실제를 믿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 하나님은 보고 계시는 분이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땅에서 나를 사랑 해 줄 아버지가 없어서 상처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 할 아버지가 내 안에 없기 때문에 상처를 받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을 나아가세요. 아버지를 안아 보세요. 어린 아이처럼 아빠라고 불러 보세요. 아버지 집으로 돌아 가십시오. 아버지 집에서 편히 쉬십시오. 아버지 하나님과 거룩한 사역을 하십시오. 우리가 신고 있는 신을 벗고 염려를 버리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새 옷을 준비하시고 새 신을 준비하셨습니다. 우리 몸에 할퀸 상처를 옷으로 가리시고 우리가 인생의 험한 길을 걸을 때 받았던 상처를 새 신으로 덮어 주십니다.



출처 :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 agaser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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