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강해] 엡 2:14-18 (그는 우리의 화평)
- 설교 : 전준식 목사
바울은 우리에게 에베소서를 통하여 구원의 풍성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풍성함이 무엇입니까? 풍성함을 아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물질에 궁핍함을 경험한 사람이 물질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영적인 삶이 얼마나 곤고하고 부족한 사람이었는지를 아는 사람이 구원의 풍성함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구원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에베소서를 통하여 풍성함을 체험하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존재였습니까? 우리는 영적으로 풍성함을 누리는 존재였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죄가 들어오기 전까지 우리는 영적으로 풍성함을 누리는 존재였습니다. 하나님과 직접 교통할 수 있는 하나님의 피조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하나님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죄로 인하여 우리는 죽은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것이 2장1-10절 에서 바울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죄는 우리를 영적으로 죽일 뿐만 아니라 관계를 파괴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분열시켰습니다. 사람과 사람사이를 분열시켰습니다.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서로 차별화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이 11-13절입니다. 이렇게 차별화를 갖다 보니 이제는 서로가 원수가 되었습니다. 요즈음 우리 사회를 보십시오. 모두가 원수지간처럼 싸우고 있습니다. 사용주와 노동자 사이가 원수처럼 싸웁니다. 정당과 정당이 원수지간처럼 적대합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같은 정당안에서 또 원수처럼 물고 뜯고 서로를 미워하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생사를 같이할 정치적인 동지처럼 여기던 사람들이 이제는 원수가 되어버렸습니다. 여기에 언론은 더욱 원수지간이 되도록 부채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후보자들이 내놓는 정책을 들을 기회를 박탈당한 채 후보자들의 성장배경과 비인격적인 부분을 들추어내는 기사들만 일방적으로 듣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 속에는 선거에 참여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생길 정도로 국민들의 마음을 실망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언론이나 후보자나 그리고 우리나 모두 똑같은 죄인들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가 우리를 그렇게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죄가 우리를 속삭입니다. 어째서 너는 가만 있느냐? 너도 너 자신이 잘났다고 빨리 말해라. 상대방이 나보다 못하다고 빨리 말하라. 나도 하나님처럼 능력이 있다고 말하는 게 사람이다. 패배하면 죽는 것이다. 빨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너를 알리라고 속삭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죄를 짓고 우리끼리 하나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이 죄는 우리 사이를 원수지간으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 우리가 정당들의 싸움을 보면서 그리고 정당 안에서 서로 같은 노선을 걷고 있는 사람들이 비방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의 무서움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이것을 죄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설명할 대안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깨어진 결과임에도 불구하고 이 원인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안에서 추방시켜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이 누구이십니까? -- 14절 여러분 본문을 잘 살펴 보셔야합니다. 예수님은 화평을 이루는 분이다 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화평이십니다. 우리는 화평을 이루려고 합니다.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분단의 벽을 헐고 화평을 가져오기 위하여 자신의 몸을 내어놓습니다. 그러나 화평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 자신이 화평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화평이 아닌 내가 화평을 만들어 내려고 하니 힘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화평 그 일을 하면 화평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분단의 장벽을 헐려고 하면 안되지만 평화이신 주님이 나를 통하여 하게 하시면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랑도 같은 원리입니다. 내가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신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면 나는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왜 이 땅에 예수님께서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그치지 않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이 땅에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평화를 영접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까지는 절대로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만 화평을 이루십니다. 왜냐하면 이분은 평화이시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선교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 땅에 전쟁이 없어지는 그 날을 위해서입니다. 이 땅에 평화를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분단의 벽을 헐기 위하여 자신의 몸을 버리는 애국자보다 더 위대한 사역을 주님께서 주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선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시댁과 화평하십니까? 명절 때마다 시댁으로 내려가시면서 마음에 다짐을 하시고 가십니까? 이번에는 내가 웃으리라! 누가 뭐라고 해도 기분상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다짐하십니까? 아닙니다. 내 안에 평화의 주님이 나를 움직이도록 하셔야 합니다. 내 의지로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의 주님이 화평케 하심을 믿고 내려가는 것입니다. 내 의지로 평화를 유지하려고 하면 긴장입니다. 우리나라 휴전선을 보십시오. 거기는 참 평화스럽습니다. 새들이 한가로이 날아다닙니다. 아름다운 들꽃들이 지천으로 피어 있습니다. 산짐승 들짐승들의 천국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를 평화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의지로 전쟁을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든지 전쟁이 터질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정에서 억누름으로 평화유지가 되신다면 그 가정은 늘 긴장입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뇌관을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이제 그 긴장을 푸십시오. 내가 웃고 내가 서비스함으로 평화가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여러분 가정을 주관하시도록 주님께 내어 드리십시오. 나를 주님께 올려 드리십시오. 그러면 여러분 가정에 평화가 넘치게 될 것을 믿습니다. 내가 평화를 유지하는 게 아니라 평화의 주님이 평화를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이 평화의 주님이 어떻게 평화를 만드십니까? --14절 그렇습니다. 주님은 막힌 담을 허시는 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막힌 담을 소화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막힌 담을 잘 이해 하셔야합니다. 막힌 담이 무엇입니까? 누가 막힘 담을 만들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막힌 담은 인간이 만들지 않았습니다. 마귀가 만든 것도 아닙니다. 이 막힌 담은 하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막힌 담을 만드셨습니다.이 막힌 담이 어디에 가면 볼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바울은 구약의 성전을 예를 들면서 이 막힌 담을 허시는 복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성전은 유대인의 뜰과 이방인의 뜰로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이 둘 사이에는 막힌 담이 있었습니다. 이방인은 유대인의 뜰로 들어 갈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드신 제도입니다. 또한 성전은 막힌 담들이 이곳에만 있지 않았습니다. 일년에 한번 대 제사장이 들어가는 지성소에도 막힌 담이 있었습니다. 이것도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드신 제도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질문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인간을 차별하신 분은 결국 하나님이시군요? 하나님이 원인제공자였군요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12제자들에게 병 고치는 은사와 귀신 쫒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전도대로 파송 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무슨 말씀입니까? 주님이 주신 은사를 사용하고 역사가 일어 날 때만다 이것은 내 능력이 아니다. 이것은 주님이 주신 능력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것을 날마다 부인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느 새 주님이 주신 능력이 내 능력이 되어 버립니다. 내가 능력이 있어서 이런 은사가 있다고 착각하고 교만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막힌 담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을 구별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도록 축복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예배를 드릴 때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일방적으로 부르셔서 하나님의 백성 삼아 주셨구나 감격하고 감사하던 사람들이 어느 새 감사를 잃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담 밖에 있는 이방인들을 무시하기 시작합니다. 저렇게 사니 하나님께 축복을 받지 못한다고 흉보기 시작합니다. 여기에 대응하여 이방인들도 유대인들을 무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막힌 담을 사용하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직분을 주셨습니다. 감독이라는 직분, 장로와 집사라는 직분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계급이 아니라 분명히 은사라고 에베소서에서 말씀하십니다. 이 은사를 가지신 분들에게 은사를 드리기 위하여 교회는 선거를 시행합니다. 민주주의의 원칙대로 많은 표를 얻은 분에게 교회는 직분을 드립니다. 이 직분을 받음으로 하나님께서는 서로의 구분을 하셨습니다. 성전처럼 담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왜 교회에 이런 담을 허락하신 것입니까? 우리는 여기서 은사를 발견 해야합니다. 은혜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직분이 교회에서 계급의 담이 되어버리거나 공로의 담이 되어버립니다. 자신이 능력이 있어서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된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로 인하여 장로 권사가 되신 분들은 그 은사를 활용하고 감사하기보다는 그 은사를 명함에 드러내기를 원합니다. 은사는 활용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교회에서 이런 사람입니다. 나는 이제 남편과 아내와 자식들에게도 교회에서 인정받는 사람이라는 것을 과시하기 위한 자리로 사용합니다. 우리 안에 이런 모습이 있다면 우리는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모습 때문에 장로의 은사와 권사의 은사를 받지 못한 분들은 장로를 권사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만드신 담들이 인간이 서로 인정하지 않는 담으로 변질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허락하신 제도를 인간은 죄로 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선한 행위를 해서 담장 밖에 있는 사람과 담장 안에 있는 사람으로 구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담장 안에서 살게 됨을 고백하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것을 놓치면 우리는 스스로 담장을 쌓고 사는 사람들이 되고 그로 인하여 계급이 조장되고 불신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수 관계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을 주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15절 그렇습니다. 주님은 율법으로 원수된 관계를 십자가로 허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을 개량하여 이방인과 하나되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이방인을 종교적으로 더 높은 경험을 하게 해서 하나 되게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말씀처럼 전적으로 새롭게 창조하심으로 하나되게 하셨습니다. 교회는 서로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경제적으로 서로 차이가 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지식의 정도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출생지도 다릅니다. 그리고 자기 기준으로 사람을 담장 밖의 사람과 담장 안의 사람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기준으로 사람들이 교회에 모인다면 그 교회는 더 이상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이런 다양한 사람들을 다시 재창조해서 새롭게 빚은 받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자신의 과거를 버린 채 새로운 존재로 만나는 곳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마틴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에베소서를 강해하면서 영국과 미국을 예를 들어 설명하였습니다. 영국은 서로 다른 나라의 연합체 국가입니다. 웨일즈라는 나라가 있습니다. 스코틀랜드 나라가 있습니다. 아일랜드 나라가 있습니다. 이들은 한 나라입니다. 민족성도 죽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문자와 언어도 살아 있습니다. 심지어는 스코트랜드 같은 나라는 대영제국이면서 자신들의 고유의 화폐를 가지고 있습니다. 축구 경기도 각나라의 이름으로 출전합니다. 월드컵도 웨일즈라는 이름으로 예선경기를 치루고 잉글랜드라는 이름으로 예선에 참여 합니다. 각각의 나라가 대영제국이란 이름으로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미국은 전혀 다릅니다. 미국은 여러 나라가 연합되어 있지 않습니다. 각각의 나라들을 자신들의 목적을 위하여 합쳐진 나라가 아닙니다. 이 미국이란 나라에 들어가 시민으로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옛 국적을 버려야합니다. 그래야 새로운 나라가 자기의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에베소 교회에서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을 그저 모아 놓은 곳이 아니라 전에는 전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피조물들이 모여있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이것이 곧 주님이 주시는 화평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나의 이익을 얻기 위하여 "나" 라는 이름으로 이 자리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는 지역도 파벌도 계급도 존재해서는 안됩니다. 교회 안에서는 새로운 피조물들이 모여 서로 화평하는 모습을 보이는 곳입니다. 때문에 율법을 붙잡고 절대로 담장 밖의 사람과 하나되지 못하는 사람은 율법 밖으로 나와 새 창조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이방인들은 답답하게만 보이는 유대인들을 이해하고 더 이상 정죄하지 말라 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죄라는 누룩이 은밀히 들어와 은혜를 죄를 바꾸는 것을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가 아무리 크면 무엇합니까?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못하고 자기를 드러내는 교회라면 우리는 부끄러운 교회에 다니는 부끄러운 교인입니다. 아무리 작은 교회라 할지라도 나를 드러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는 참된 교회가 되도록 다시 한번 나에게 주신 막힌 담을 은혜로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설교 : 전준식 목사
바울은 우리에게 에베소서를 통하여 구원의 풍성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풍성함이 무엇입니까? 풍성함을 아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물질에 궁핍함을 경험한 사람이 물질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영적인 삶이 얼마나 곤고하고 부족한 사람이었는지를 아는 사람이 구원의 풍성함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구원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에베소서를 통하여 풍성함을 체험하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존재였습니까? 우리는 영적으로 풍성함을 누리는 존재였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죄가 들어오기 전까지 우리는 영적으로 풍성함을 누리는 존재였습니다. 하나님과 직접 교통할 수 있는 하나님의 피조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하나님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죄로 인하여 우리는 죽은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것이 2장1-10절 에서 바울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죄는 우리를 영적으로 죽일 뿐만 아니라 관계를 파괴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분열시켰습니다. 사람과 사람사이를 분열시켰습니다.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서로 차별화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이 11-13절입니다. 이렇게 차별화를 갖다 보니 이제는 서로가 원수가 되었습니다. 요즈음 우리 사회를 보십시오. 모두가 원수지간처럼 싸우고 있습니다. 사용주와 노동자 사이가 원수처럼 싸웁니다. 정당과 정당이 원수지간처럼 적대합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같은 정당안에서 또 원수처럼 물고 뜯고 서로를 미워하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생사를 같이할 정치적인 동지처럼 여기던 사람들이 이제는 원수가 되어버렸습니다. 여기에 언론은 더욱 원수지간이 되도록 부채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후보자들이 내놓는 정책을 들을 기회를 박탈당한 채 후보자들의 성장배경과 비인격적인 부분을 들추어내는 기사들만 일방적으로 듣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 속에는 선거에 참여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생길 정도로 국민들의 마음을 실망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언론이나 후보자나 그리고 우리나 모두 똑같은 죄인들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가 우리를 그렇게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죄가 우리를 속삭입니다. 어째서 너는 가만 있느냐? 너도 너 자신이 잘났다고 빨리 말해라. 상대방이 나보다 못하다고 빨리 말하라. 나도 하나님처럼 능력이 있다고 말하는 게 사람이다. 패배하면 죽는 것이다. 빨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너를 알리라고 속삭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죄를 짓고 우리끼리 하나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이 죄는 우리 사이를 원수지간으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 우리가 정당들의 싸움을 보면서 그리고 정당 안에서 서로 같은 노선을 걷고 있는 사람들이 비방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의 무서움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이것을 죄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설명할 대안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깨어진 결과임에도 불구하고 이 원인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안에서 추방시켜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이 누구이십니까? -- 14절 여러분 본문을 잘 살펴 보셔야합니다. 예수님은 화평을 이루는 분이다 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화평이십니다. 우리는 화평을 이루려고 합니다.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분단의 벽을 헐고 화평을 가져오기 위하여 자신의 몸을 내어놓습니다. 그러나 화평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 자신이 화평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화평이 아닌 내가 화평을 만들어 내려고 하니 힘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화평 그 일을 하면 화평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분단의 장벽을 헐려고 하면 안되지만 평화이신 주님이 나를 통하여 하게 하시면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랑도 같은 원리입니다. 내가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신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면 나는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왜 이 땅에 예수님께서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그치지 않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이 땅에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평화를 영접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까지는 절대로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만 화평을 이루십니다. 왜냐하면 이분은 평화이시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선교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 땅에 전쟁이 없어지는 그 날을 위해서입니다. 이 땅에 평화를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분단의 벽을 헐기 위하여 자신의 몸을 버리는 애국자보다 더 위대한 사역을 주님께서 주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선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시댁과 화평하십니까? 명절 때마다 시댁으로 내려가시면서 마음에 다짐을 하시고 가십니까? 이번에는 내가 웃으리라! 누가 뭐라고 해도 기분상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다짐하십니까? 아닙니다. 내 안에 평화의 주님이 나를 움직이도록 하셔야 합니다. 내 의지로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의 주님이 화평케 하심을 믿고 내려가는 것입니다. 내 의지로 평화를 유지하려고 하면 긴장입니다. 우리나라 휴전선을 보십시오. 거기는 참 평화스럽습니다. 새들이 한가로이 날아다닙니다. 아름다운 들꽃들이 지천으로 피어 있습니다. 산짐승 들짐승들의 천국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를 평화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의지로 전쟁을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든지 전쟁이 터질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정에서 억누름으로 평화유지가 되신다면 그 가정은 늘 긴장입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뇌관을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이제 그 긴장을 푸십시오. 내가 웃고 내가 서비스함으로 평화가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여러분 가정을 주관하시도록 주님께 내어 드리십시오. 나를 주님께 올려 드리십시오. 그러면 여러분 가정에 평화가 넘치게 될 것을 믿습니다. 내가 평화를 유지하는 게 아니라 평화의 주님이 평화를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이 평화의 주님이 어떻게 평화를 만드십니까? --14절 그렇습니다. 주님은 막힌 담을 허시는 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막힌 담을 소화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막힌 담을 잘 이해 하셔야합니다. 막힌 담이 무엇입니까? 누가 막힘 담을 만들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막힌 담은 인간이 만들지 않았습니다. 마귀가 만든 것도 아닙니다. 이 막힌 담은 하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막힌 담을 만드셨습니다.이 막힌 담이 어디에 가면 볼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바울은 구약의 성전을 예를 들면서 이 막힌 담을 허시는 복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성전은 유대인의 뜰과 이방인의 뜰로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이 둘 사이에는 막힌 담이 있었습니다. 이방인은 유대인의 뜰로 들어 갈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드신 제도입니다. 또한 성전은 막힌 담들이 이곳에만 있지 않았습니다. 일년에 한번 대 제사장이 들어가는 지성소에도 막힌 담이 있었습니다. 이것도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드신 제도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질문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인간을 차별하신 분은 결국 하나님이시군요? 하나님이 원인제공자였군요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12제자들에게 병 고치는 은사와 귀신 쫒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전도대로 파송 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무슨 말씀입니까? 주님이 주신 은사를 사용하고 역사가 일어 날 때만다 이것은 내 능력이 아니다. 이것은 주님이 주신 능력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것을 날마다 부인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느 새 주님이 주신 능력이 내 능력이 되어 버립니다. 내가 능력이 있어서 이런 은사가 있다고 착각하고 교만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막힌 담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을 구별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도록 축복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예배를 드릴 때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일방적으로 부르셔서 하나님의 백성 삼아 주셨구나 감격하고 감사하던 사람들이 어느 새 감사를 잃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담 밖에 있는 이방인들을 무시하기 시작합니다. 저렇게 사니 하나님께 축복을 받지 못한다고 흉보기 시작합니다. 여기에 대응하여 이방인들도 유대인들을 무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막힌 담을 사용하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직분을 주셨습니다. 감독이라는 직분, 장로와 집사라는 직분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계급이 아니라 분명히 은사라고 에베소서에서 말씀하십니다. 이 은사를 가지신 분들에게 은사를 드리기 위하여 교회는 선거를 시행합니다. 민주주의의 원칙대로 많은 표를 얻은 분에게 교회는 직분을 드립니다. 이 직분을 받음으로 하나님께서는 서로의 구분을 하셨습니다. 성전처럼 담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왜 교회에 이런 담을 허락하신 것입니까? 우리는 여기서 은사를 발견 해야합니다. 은혜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직분이 교회에서 계급의 담이 되어버리거나 공로의 담이 되어버립니다. 자신이 능력이 있어서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된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로 인하여 장로 권사가 되신 분들은 그 은사를 활용하고 감사하기보다는 그 은사를 명함에 드러내기를 원합니다. 은사는 활용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교회에서 이런 사람입니다. 나는 이제 남편과 아내와 자식들에게도 교회에서 인정받는 사람이라는 것을 과시하기 위한 자리로 사용합니다. 우리 안에 이런 모습이 있다면 우리는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모습 때문에 장로의 은사와 권사의 은사를 받지 못한 분들은 장로를 권사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만드신 담들이 인간이 서로 인정하지 않는 담으로 변질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허락하신 제도를 인간은 죄로 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선한 행위를 해서 담장 밖에 있는 사람과 담장 안에 있는 사람으로 구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담장 안에서 살게 됨을 고백하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것을 놓치면 우리는 스스로 담장을 쌓고 사는 사람들이 되고 그로 인하여 계급이 조장되고 불신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수 관계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을 주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15절 그렇습니다. 주님은 율법으로 원수된 관계를 십자가로 허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을 개량하여 이방인과 하나되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이방인을 종교적으로 더 높은 경험을 하게 해서 하나 되게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말씀처럼 전적으로 새롭게 창조하심으로 하나되게 하셨습니다. 교회는 서로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경제적으로 서로 차이가 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지식의 정도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출생지도 다릅니다. 그리고 자기 기준으로 사람을 담장 밖의 사람과 담장 안의 사람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기준으로 사람들이 교회에 모인다면 그 교회는 더 이상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이런 다양한 사람들을 다시 재창조해서 새롭게 빚은 받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자신의 과거를 버린 채 새로운 존재로 만나는 곳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마틴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에베소서를 강해하면서 영국과 미국을 예를 들어 설명하였습니다. 영국은 서로 다른 나라의 연합체 국가입니다. 웨일즈라는 나라가 있습니다. 스코틀랜드 나라가 있습니다. 아일랜드 나라가 있습니다. 이들은 한 나라입니다. 민족성도 죽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문자와 언어도 살아 있습니다. 심지어는 스코트랜드 같은 나라는 대영제국이면서 자신들의 고유의 화폐를 가지고 있습니다. 축구 경기도 각나라의 이름으로 출전합니다. 월드컵도 웨일즈라는 이름으로 예선경기를 치루고 잉글랜드라는 이름으로 예선에 참여 합니다. 각각의 나라가 대영제국이란 이름으로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미국은 전혀 다릅니다. 미국은 여러 나라가 연합되어 있지 않습니다. 각각의 나라들을 자신들의 목적을 위하여 합쳐진 나라가 아닙니다. 이 미국이란 나라에 들어가 시민으로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옛 국적을 버려야합니다. 그래야 새로운 나라가 자기의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에베소 교회에서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을 그저 모아 놓은 곳이 아니라 전에는 전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피조물들이 모여있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이것이 곧 주님이 주시는 화평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나의 이익을 얻기 위하여 "나" 라는 이름으로 이 자리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는 지역도 파벌도 계급도 존재해서는 안됩니다. 교회 안에서는 새로운 피조물들이 모여 서로 화평하는 모습을 보이는 곳입니다. 때문에 율법을 붙잡고 절대로 담장 밖의 사람과 하나되지 못하는 사람은 율법 밖으로 나와 새 창조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이방인들은 답답하게만 보이는 유대인들을 이해하고 더 이상 정죄하지 말라 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죄라는 누룩이 은밀히 들어와 은혜를 죄를 바꾸는 것을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가 아무리 크면 무엇합니까?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못하고 자기를 드러내는 교회라면 우리는 부끄러운 교회에 다니는 부끄러운 교인입니다. 아무리 작은 교회라 할지라도 나를 드러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는 참된 교회가 되도록 다시 한번 나에게 주신 막힌 담을 은혜로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출처 :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 agaser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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