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강해] 엡 2:19 - 22 (함께 지어져 가는 성전)
- 설교 : 전준식 목사
옛날에 잘 사는 집에는 가정부라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이분들은 지금처럼 출퇴근하는 분들이 아니라 주인집 식구들과 같이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루 이틀 같이 사는 게 아니라 오랜 시간을 그 집에서 살다가 결혼을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남이 보면 딸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그 집에 식구는 아닙니다. 같이 한 지붕 밑에서 자고 먹고 생활하지만 한 식구는 아닙니다. 주소지도 같지만 한 식구는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인과 같은 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시민과 식구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19절 이제 에베소 성도들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축복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방인인 에베소 성도들은 외국인도 아니요 손님도 아니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요 가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게 되었습니까? 바울은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이제는 멀리 있던 너희가 하나님과 가까워 졌다고 말합니다. 중간에 막힌 담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었는데 그리스도의 피로 중간에 막힘 담이 무너지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9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 된 우리를 시민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것으로 결론 내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데까지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으려면 성령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6절에서 십자가를 말씀하시고 이어서 곧 바로 18절에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는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성령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모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십자가는 그리스도 밖에 있는 우리를 그리스도 안으로 오게 하십니다. 하늘나라 밖에 살고 있었던 우리에게 십자가는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늘나라에서 추방당하지 않고 살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로 이제부터 우리는 여권을 갱신하지 않고 계속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큰 축복은 십자가를 통하여 내리시는 성령의 축복입니다. 성령이 주시는 축복은 시민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속, 가족이 되는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늘나라의 시민이 되시기를 원하십니까? 하늘나라의 가족까지 가기를 원하십니까? 저는 여러분들이 모두 하나님의 권속이 되는 데까지 이르기를 축복합니다. 성령님을 사모하십시오. 성령님은 사모하는 분에게 임하십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그토록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늘 손님으로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번 주에는 이 교회, 다음 주에는 저 교회를 다니면서 떠돌이 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도들을 봐도 늘 서먹서먹합니다. 아마도 이런 분들은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시민은 되었어도 아직 가족까지는 이르지 못한 분들 같습니다. 이런 모습은 현대 교회 안에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도 이런 모습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저 예배 마치고 의무적으로 악수는 하지만 식구라는 친근함이 없습니다. 저 분에 대한 아픔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 문제 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가운에 이런 모습이 있다면 먼저 성령님을 사모하십시오. 성령님을 사모하셔서 가족이 되는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또 하나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그토록 오래 교회를 다녀도 하나님의 권속은 커녕 아직 시민권도 얻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런 사람이 나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성전 미문 밖에서 구걸하는 장애인인 한 사람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장애인이었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이 사람의 나이가 적어도 40살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사람은 그토록 오랜 세월을 성전 문지방에서 구걸하며 살았지만 한번도 성전 문턱을 넘어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문지방에 있는 것은 방안에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또한 문지방에 있다고 해서 문지방과 멀리 떨어져 있는 저 밖에 있는 사람과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문지방에 있었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문지방을 넘어야 합니다. 방안으로 들어 와야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교회에서 편안함을 느끼십니까? 집안에서 느끼는 편안함을 느끼십니까? 교회에서 여러분에게 최선을 다해서 친절함과 편안함을 드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불편하시고 서먹서먹하십니까? 우리는 아직도 문지방을 넘지 못한 사람입니다. 아직도 나는 내 집에 오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려도 좋습니다. 이런 분들에게 베드로는 선포합니다. 내가 너에게 도와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이다. 이 이름을 너에게 줄 테니 일어나 걸어라 고 선포하였습니다. 그는 그 즉시로 걷고 뛰면서 성전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찬양했습니다. 성전이 자기 집이 된 것입니다. 성전이 자기 안방처럼 느껴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전이 나의 안방처럼 느껴져야 합니다. 이곳에 오면 마음이 편안해 져야 합니다. 이곳에 오면 찬양이 하고 싶어져야 합니다. 이런 능력이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이런 편안함이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이것이 우리의 의지입니까? 우리가 인위적으로 만드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20절의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퉁이 돌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모퉁이 돌이 무엇입니까? 여기서 모퉁이 돌이라는 것은 골조의 기능을 말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시멘트가 없어서 골조 공사를 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퉁이 돌을 쌓고 양쪽 벽이 하나가 디게 했습니다. 때문에 모퉁이돌은 벽의 하중을 감당하는 돌입니다. 그 집에 중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힘듬을 다 감당하는 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반석 위에 세운 집이라면 예수님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힘듬을 가져가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언제 그런 고통이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우리가 겪는 고난을 가져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무너지는 집을 볼 수 있습니다. 벽이 사방으로 갈라지고 벌어지는 집을 보면 무섭습니다. 왜 이렇게 무너지는 것입니까? 왜 벽이 한곳으로 갈라지지 않고 사방으로 갈라지고 벌어지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모퉁이 돌이 그 힘을 지탱해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모퉁이 돌이 하중을 분산시켜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초가 튼튼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모퉁이 돌이 튼튼하면 비가 오고 창수가 나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고통스러움이 나에게 파도처럼 밀려 와도 우리는 다시 일어 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퉁이 돌 없이도 집을 지을 수 있습니다. 쉽게 집을 지을 수 있습니다. 빠르게 집을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쉽게 지은 집은 창수가 나면 무너지고 쓸려 가버리고 맙니다.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모퉁이 돌을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모퉁이 돌로 이방인과 유대인이 하나가 되도록 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지금 왜 고난을 받고 있습니까? 나의 고통과 아픔을 왜 모통이 돌 되신 예수님이 안 가져가는 것입니까? 왜 우리 가정은 금이가고 깨어지는 것입니까? 왜 교회는 하나되지 못하고 균열이 가는 것입니까? 우리의 믿음이 연약해서 그런 것입니까? 아닙니다. -21절 아직 집이 완성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완성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집을 완성시켜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미완성의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인생의 집을 짓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서로 개성이 다릅니다. 성품도 다릅니다. 인격도 다릅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재료를 가지고 우리는 인생의 집을 지어 나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인생의 주춧돌이 되어서 나의 모든 성품과 인격과 개성을 연결시켜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완성된 인생은 없습니다. 아무리 나이가 먹어도 인생은 미완성인 채 지금도 공사중입니다. 아직도 다듬어질 부분이 있습니다. 아직도 깎여야 할 성품이 있습니다. 아직도 채워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토기장이요 너희는 흙이다. 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잡힘 같이 하나님의 손에 이스라엘이 잡혀 있다" 저는 이 말씀이 얼마나 감사와 위로가 되는 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지금 제 모습이 나의 완성된 모습이라면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그러나 제가 앞으로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변할 것을 생각하면 기쁨이 되고 소망이 되고 위로를 얻습니다. 이전 보다 더 나아질 수 있다는 소망을 갖습니다. 우리 동네에 지금 집을 많이 짓고 있습니다. 집 짓는 곳에 가보십시오. 얼마나 지저분하고 먼지가 많이 납니까? 그리고 집 주인은 그 집이 다 할 때까지 단칸방에서 불편함을 참고 몇 달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매일 마다 건축현장에 나가서 지어져 가는 집을 바라보곤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시간이 가면 갈수록 집 모양이 나오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새집에 들어간다 는 소망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제 집을 다 짓고 가재 도구를 들여다 놓으면 우리가 쉴 수 있는 아름다운 방 때문에 어려움을 참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월세 방에서 불편하게 사십니까? 사는 게 불편해서 짜증이 나십니까? 지금 여러분이 처한 이 현실은 여러분의 종착역이 아닙니다. 우리는 더욱 하나님의 선한 소견대로 빚어져 가는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우리의 집을 지어가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믿습니까? 앞으로 나에게는 잘 될 일만 남아 있다고 선포하십시오. 전에는 창수가 나고 비가 오면 걱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부터는 창수가 나고 비가 오면 나를 씻기시는 비이기 때문에 무섭지 안습니다. 비가 그친 후에 다시 새롭게 나를 빚으시는 계획이 있다는 것 때문에 우리는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현실을 자책하지 마십시오. 현실의 부족함 때문에 속상해 하지 마십시오. 그 재료를 주님께 돌려 드리십시오. 나의 부족한 이 성품을 가지고 주님께서 새롭게 빚어 주시도록 맡기십시오.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내가 주님의 손에 잡혀있다는 사실을 고백하십시요. 우리는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지어져 가는 존재라는 것을 선포하십시오. 여러분! 제일 흉측한 건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신림 4거리에 가면 짓다가 멈춘 빌딩이 있습니다. 그 건물을 보면 참 흉측합니다. 놋그릇을 보십시오. 놋 그릇을 날마다 닦지 않으면 추해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부지런한 집은 날마다 놋그릇을 닦아서 어르신들에게 진지를 대접해 드리지만 그렇지 못한 집은 제삿날이라 꺼내서 닦아 제사를 드리는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일 흉측한 인생은 예수님 믿다가 중도 하차한 사람입니다. 믿다가 그만 둔 인생은 참으로 불쌍하고 지저분합니다. 한 두 번 예배를 빠져 보십시오. 우리는 얼마나 지저분한 사람이 되는 지 모릅니다. 본질이 흔들립니다. 하나님이 계시나? 라는 본질적인 질문에 의심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이 정말 하나님인가 라는 의심을 갖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날마다 닦지 않으면 어느새 추한 인생으로 돌아가 버리고 맙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 추한 인생을 들고 주님 앞에 나가서 날마다 새롭게 씻기시고 빚어 주시기를 사모해야합니다. 사랑하는 어려분! 예배를 빼먹지 마십시오. 쉬지 말고 나오십시오. 맡김을 계속 하십시오. 오셔서 회개하고 다음 주에 오셔서 또 회개하십시오. 이것이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는 길입니다. 이렇게 성장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축복하십니다. 무슨 축복입니까?--23절 하나님의 처소가 되기 위하여 지금 성전을 지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몸이 무엇이라고요? 술집이라고요? 담배 집이라고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실 곳이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축복입니까? 우리 집에 오늘 대통령이 와서 하루 자고 간다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입니까? 광화문에 가면 대통령이 수제비를 먹고 갔다고 해서 사람들이 일부러 가보는 식당이 있습니다. 우리는 대통령이 아닙니다.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완성될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아직도 힘드십니까? 아직도 내 성격에 만족하지 못하고 인격에 만족하지 못하십니까? 이것이 정상입니다. 이것이 완성될 것을 바라보게 하는 소망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빚으시는 것을 사모하십시오. 주님이 완성하실 그 날까지 믿음의 달려갈 길을 달려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 설교 : 전준식 목사
옛날에 잘 사는 집에는 가정부라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이분들은 지금처럼 출퇴근하는 분들이 아니라 주인집 식구들과 같이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루 이틀 같이 사는 게 아니라 오랜 시간을 그 집에서 살다가 결혼을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남이 보면 딸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그 집에 식구는 아닙니다. 같이 한 지붕 밑에서 자고 먹고 생활하지만 한 식구는 아닙니다. 주소지도 같지만 한 식구는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인과 같은 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시민과 식구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19절 이제 에베소 성도들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축복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방인인 에베소 성도들은 외국인도 아니요 손님도 아니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요 가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게 되었습니까? 바울은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이제는 멀리 있던 너희가 하나님과 가까워 졌다고 말합니다. 중간에 막힌 담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었는데 그리스도의 피로 중간에 막힘 담이 무너지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9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 된 우리를 시민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것으로 결론 내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데까지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으려면 성령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6절에서 십자가를 말씀하시고 이어서 곧 바로 18절에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는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성령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모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십자가는 그리스도 밖에 있는 우리를 그리스도 안으로 오게 하십니다. 하늘나라 밖에 살고 있었던 우리에게 십자가는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늘나라에서 추방당하지 않고 살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로 이제부터 우리는 여권을 갱신하지 않고 계속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큰 축복은 십자가를 통하여 내리시는 성령의 축복입니다. 성령이 주시는 축복은 시민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속, 가족이 되는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늘나라의 시민이 되시기를 원하십니까? 하늘나라의 가족까지 가기를 원하십니까? 저는 여러분들이 모두 하나님의 권속이 되는 데까지 이르기를 축복합니다. 성령님을 사모하십시오. 성령님은 사모하는 분에게 임하십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그토록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늘 손님으로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번 주에는 이 교회, 다음 주에는 저 교회를 다니면서 떠돌이 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도들을 봐도 늘 서먹서먹합니다. 아마도 이런 분들은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시민은 되었어도 아직 가족까지는 이르지 못한 분들 같습니다. 이런 모습은 현대 교회 안에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도 이런 모습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저 예배 마치고 의무적으로 악수는 하지만 식구라는 친근함이 없습니다. 저 분에 대한 아픔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 문제 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가운에 이런 모습이 있다면 먼저 성령님을 사모하십시오. 성령님을 사모하셔서 가족이 되는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또 하나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그토록 오래 교회를 다녀도 하나님의 권속은 커녕 아직 시민권도 얻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런 사람이 나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성전 미문 밖에서 구걸하는 장애인인 한 사람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장애인이었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이 사람의 나이가 적어도 40살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사람은 그토록 오랜 세월을 성전 문지방에서 구걸하며 살았지만 한번도 성전 문턱을 넘어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문지방에 있는 것은 방안에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또한 문지방에 있다고 해서 문지방과 멀리 떨어져 있는 저 밖에 있는 사람과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문지방에 있었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문지방을 넘어야 합니다. 방안으로 들어 와야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교회에서 편안함을 느끼십니까? 집안에서 느끼는 편안함을 느끼십니까? 교회에서 여러분에게 최선을 다해서 친절함과 편안함을 드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불편하시고 서먹서먹하십니까? 우리는 아직도 문지방을 넘지 못한 사람입니다. 아직도 나는 내 집에 오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려도 좋습니다. 이런 분들에게 베드로는 선포합니다. 내가 너에게 도와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이다. 이 이름을 너에게 줄 테니 일어나 걸어라 고 선포하였습니다. 그는 그 즉시로 걷고 뛰면서 성전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찬양했습니다. 성전이 자기 집이 된 것입니다. 성전이 자기 안방처럼 느껴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전이 나의 안방처럼 느껴져야 합니다. 이곳에 오면 마음이 편안해 져야 합니다. 이곳에 오면 찬양이 하고 싶어져야 합니다. 이런 능력이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이런 편안함이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이것이 우리의 의지입니까? 우리가 인위적으로 만드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20절의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퉁이 돌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모퉁이 돌이 무엇입니까? 여기서 모퉁이 돌이라는 것은 골조의 기능을 말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시멘트가 없어서 골조 공사를 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퉁이 돌을 쌓고 양쪽 벽이 하나가 디게 했습니다. 때문에 모퉁이돌은 벽의 하중을 감당하는 돌입니다. 그 집에 중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힘듬을 다 감당하는 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반석 위에 세운 집이라면 예수님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힘듬을 가져가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언제 그런 고통이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우리가 겪는 고난을 가져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무너지는 집을 볼 수 있습니다. 벽이 사방으로 갈라지고 벌어지는 집을 보면 무섭습니다. 왜 이렇게 무너지는 것입니까? 왜 벽이 한곳으로 갈라지지 않고 사방으로 갈라지고 벌어지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모퉁이 돌이 그 힘을 지탱해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모퉁이 돌이 하중을 분산시켜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초가 튼튼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모퉁이 돌이 튼튼하면 비가 오고 창수가 나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고통스러움이 나에게 파도처럼 밀려 와도 우리는 다시 일어 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퉁이 돌 없이도 집을 지을 수 있습니다. 쉽게 집을 지을 수 있습니다. 빠르게 집을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쉽게 지은 집은 창수가 나면 무너지고 쓸려 가버리고 맙니다.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모퉁이 돌을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모퉁이 돌로 이방인과 유대인이 하나가 되도록 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지금 왜 고난을 받고 있습니까? 나의 고통과 아픔을 왜 모통이 돌 되신 예수님이 안 가져가는 것입니까? 왜 우리 가정은 금이가고 깨어지는 것입니까? 왜 교회는 하나되지 못하고 균열이 가는 것입니까? 우리의 믿음이 연약해서 그런 것입니까? 아닙니다. -21절 아직 집이 완성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완성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집을 완성시켜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미완성의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인생의 집을 짓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서로 개성이 다릅니다. 성품도 다릅니다. 인격도 다릅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재료를 가지고 우리는 인생의 집을 지어 나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인생의 주춧돌이 되어서 나의 모든 성품과 인격과 개성을 연결시켜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완성된 인생은 없습니다. 아무리 나이가 먹어도 인생은 미완성인 채 지금도 공사중입니다. 아직도 다듬어질 부분이 있습니다. 아직도 깎여야 할 성품이 있습니다. 아직도 채워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토기장이요 너희는 흙이다. 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잡힘 같이 하나님의 손에 이스라엘이 잡혀 있다" 저는 이 말씀이 얼마나 감사와 위로가 되는 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지금 제 모습이 나의 완성된 모습이라면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그러나 제가 앞으로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변할 것을 생각하면 기쁨이 되고 소망이 되고 위로를 얻습니다. 이전 보다 더 나아질 수 있다는 소망을 갖습니다. 우리 동네에 지금 집을 많이 짓고 있습니다. 집 짓는 곳에 가보십시오. 얼마나 지저분하고 먼지가 많이 납니까? 그리고 집 주인은 그 집이 다 할 때까지 단칸방에서 불편함을 참고 몇 달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매일 마다 건축현장에 나가서 지어져 가는 집을 바라보곤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시간이 가면 갈수록 집 모양이 나오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새집에 들어간다 는 소망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제 집을 다 짓고 가재 도구를 들여다 놓으면 우리가 쉴 수 있는 아름다운 방 때문에 어려움을 참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월세 방에서 불편하게 사십니까? 사는 게 불편해서 짜증이 나십니까? 지금 여러분이 처한 이 현실은 여러분의 종착역이 아닙니다. 우리는 더욱 하나님의 선한 소견대로 빚어져 가는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우리의 집을 지어가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믿습니까? 앞으로 나에게는 잘 될 일만 남아 있다고 선포하십시오. 전에는 창수가 나고 비가 오면 걱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부터는 창수가 나고 비가 오면 나를 씻기시는 비이기 때문에 무섭지 안습니다. 비가 그친 후에 다시 새롭게 나를 빚으시는 계획이 있다는 것 때문에 우리는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현실을 자책하지 마십시오. 현실의 부족함 때문에 속상해 하지 마십시오. 그 재료를 주님께 돌려 드리십시오. 나의 부족한 이 성품을 가지고 주님께서 새롭게 빚어 주시도록 맡기십시오.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내가 주님의 손에 잡혀있다는 사실을 고백하십시요. 우리는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지어져 가는 존재라는 것을 선포하십시오. 여러분! 제일 흉측한 건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신림 4거리에 가면 짓다가 멈춘 빌딩이 있습니다. 그 건물을 보면 참 흉측합니다. 놋그릇을 보십시오. 놋 그릇을 날마다 닦지 않으면 추해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부지런한 집은 날마다 놋그릇을 닦아서 어르신들에게 진지를 대접해 드리지만 그렇지 못한 집은 제삿날이라 꺼내서 닦아 제사를 드리는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일 흉측한 인생은 예수님 믿다가 중도 하차한 사람입니다. 믿다가 그만 둔 인생은 참으로 불쌍하고 지저분합니다. 한 두 번 예배를 빠져 보십시오. 우리는 얼마나 지저분한 사람이 되는 지 모릅니다. 본질이 흔들립니다. 하나님이 계시나? 라는 본질적인 질문에 의심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이 정말 하나님인가 라는 의심을 갖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날마다 닦지 않으면 어느새 추한 인생으로 돌아가 버리고 맙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 추한 인생을 들고 주님 앞에 나가서 날마다 새롭게 씻기시고 빚어 주시기를 사모해야합니다. 사랑하는 어려분! 예배를 빼먹지 마십시오. 쉬지 말고 나오십시오. 맡김을 계속 하십시오. 오셔서 회개하고 다음 주에 오셔서 또 회개하십시오. 이것이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는 길입니다. 이렇게 성장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축복하십니다. 무슨 축복입니까?--23절 하나님의 처소가 되기 위하여 지금 성전을 지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몸이 무엇이라고요? 술집이라고요? 담배 집이라고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실 곳이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축복입니까? 우리 집에 오늘 대통령이 와서 하루 자고 간다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입니까? 광화문에 가면 대통령이 수제비를 먹고 갔다고 해서 사람들이 일부러 가보는 식당이 있습니다. 우리는 대통령이 아닙니다.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완성될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아직도 힘드십니까? 아직도 내 성격에 만족하지 못하고 인격에 만족하지 못하십니까? 이것이 정상입니다. 이것이 완성될 것을 바라보게 하는 소망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빚으시는 것을 사모하십시오. 주님이 완성하실 그 날까지 믿음의 달려갈 길을 달려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출처 :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 agaser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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