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 에베소서

[스크랩] [에베소서강해] 엡 3:12- 13 (담대함으로 나아감)

하나님아들 2014. 1. 2. 10:30
[에베소서강해] 엡 3:12- 13 (담대함으로 나아감)


- 설교 : 전준식 목사

몇 해 전에 미국의 교포가 자기 아들이 죽은 것을 보고 내가 죽였다고 내가 죽였다고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미국 경찰은 그 어머니를 살인자로 체포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내가 죽였다고 말하는 것은 결국 내 탓이라는 마음이지요. 어머니가 아들을 죽이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 경찰은 그 말을 그대로 믿고 어머니를 체포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을 당하거나 죽음을 당하면 그 모든 일이 자신의 탓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서로의 관계가 깨어지면 다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게 사람입니다. 아들이 죽은 것을 보고 내 탓이라고 말하는 어머니가 계시는가 하면 아버지가 죽은 것은 어머니 탓이라고 몰아 부치는 자식들이 있습니다. 에베소서는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힌 채 에베소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오늘 본문은 먼저 13절을 읽고 12절을 해석하는 것이 더 쉽게 해석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13절 에베소 교인들은 바울이 감옥에 가 있는 이유가 바로 자기를 때문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바울이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았더라면 저렇게 고생을 하지 않았을 텐데 우리 때문에 저 사람이 저렇게 고생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에베소 교인들은 공동의회를 열었을 것입니다. 바울을 석방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 했을 것입니다.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만나보자는 의견도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이라도 이방인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서류에 도장을 찍고 바울을 감옥에서 나오도록 하자는 의견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방인도 반드시 구원 받을 수 있다는 복음을 포기하지 안았습니다. 전향각서에 사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하여 바울은 지금 감옥에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을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너희들 탓이 아니라 내가 이렇게 고생하고 고난 받는 것은 바로 너희에게 영광을 드러내게 하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유대율법주의자들이 말합니다. 너희들은 구원받을 사람이 아니다 라고 비난 할 때 이방인들은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증거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을 봐라 바울은 지금 이방인도 구원을 받는다는 이 진리를 굽히지 않고 감옥에 있다. 당신이 이렇게 말하려면 바울에게 가서 말해라 우리는 바울이 말한 진리를 믿는다 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위하여 받는 고난 중에 아주 유익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감옥에 가도 주님을 향한 믿음을 버리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 사람을 보고 진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지난 선교학교 때 유병국 선교사가 한 강의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어느 장로님이 선교를 하고 싶어서 사업을 정리하셨습니다. 그리고 중국을 오가면서 성경 보급 선교를 하셨습니다. 어느 날 중국에 들어가 성경을 보급하게 되었습니다. 한 호텔에 들어가 쉬고 있는데 경찰이 들이 닥쳤습니다. 그리고 장로님의 가방을 수색하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그 가방에는 성경책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경찰은 장로님에게 물었습니다. 당신 예수쟁이냐? 그러자 장로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한국에서는 교회를 열심히 다녔는데 중국은 교회가 없어서 라고 얼버무렸습니다. 그러자 경찰이 다시 동일한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 예수쟁이냐? 이 말에 장로님이 똑같은 대답을 경찰에게 했습니다. 내가 한국에서는 열심히 교회를 다녔는데 중국은 교회가 없어서...다시 경찰이 세 번째 물었습니다. 당신 예수쟁이냐? 장로님도 똑 같은 말을 되풀이했습니다. 그러자 경찰은 장로님이 지금까지 몇 년 동안 다니면서 성경 보급 선교를 한 내역들을 읽어 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옆에 통역 요원으로 온 사람이 이 정도면 징역1년 6개월 정도가 될 것이다 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경찰은 나갔습니다. 이제 장로님은 앞이 캄캄했습니다. 이국 땅에서 어떻게 감옥 생활을 하나 걱정이었습니다. 그런데 30분 후에 경찰이 다시 장로님 방에 오더니 어서 썩 꺼져 버리라고 하면서 서류를 내던지고 나가더라는 것입니다. 이 때 장로님은 누가 생각이 낫겠습니까? 베드로가 생각이 났지요. 경찰은 장로님에게 이렇게 질문한 의도가 무엇입니까? 진짜입니까 라는 것을 물은 것이지요. 장로님은 하나님의 진리를 위하여 사업을 정리하고 자신에게 주신 고난을 짊어지고 거룩한 사역을 감당하였지만 이렇게 실수를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얼마든지 쉽고 편하게 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감옥에 가서 고생을 함으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의 자랑거리가 된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지금 받고 있는 어려움이 다른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으로 보이지 않고 자랑거리로 보여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어서 바울은 더 적극적으로 에베소 교인들을 격려합니다. --12절 담대 하라 고 말합니다. 당당 하라 고 말합니다. 그리고 나아가라 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반드시 주의 할 말씀이 있습니다. 바울은 무대포로 담대하고 당당하게 나아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주안에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가운데 교회를 너무 가볍게 생각한 나머지 무대포 정신을 가지고 예배에 나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너무나 가볍게 생각한 나머지 기분 나쁘면 안나오고 기분 좋으면 나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또한 교회에 와서도 자기 감정과 생각대로 신앙 생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장로님의 기도가 기냐 짧으냐에 따라 은혜가 왔다 갔다 합니다. 장로님의 기도가 길면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도의 내용이 없어도 기도가 짧으면 은혜를 받습니다. 이렇게 은혜를 받고 있다가 성가대가 은혜스런 찬양을 하면 더욱 더 은혜를 받습니다. 거기에다가 성가대 안에 아름다운 자매가 있으면 그 은혜를 하늘을 찌르게 되지요. 그러다가 목사가 설교를 조금 길게 하면 지금까지 받은 은혜가 다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다가 식당에 가서 맛있는 식사를 하면 은혜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겁을 먹고 주저하면서 교회에 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난 주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눌려서 하나님께 벌을 받으면 어떡하나 위축된 채 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둘 다 하나님께 나오는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나오는 길이 무엇입니까? 바울은 말합니다. 위축된 채로 하나님께 나오는 것이 아니다. 내 감정대로 나오는 게 아니다. 오직 예수 안에서 나아가는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회의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설교를 하는 곳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역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존 맥아더라는 목사님이 쓴 히브리서 강해를 읽어보면 이런 이야기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영국의 한 마을에 교회가 하나 세워졌는데 정문 아치에 교인들이 이런 글을 새겨 넣었습니다. We preach christ crucified -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그리스도를 설교한다 라는 문구입니다. 이 교회 성도들은 십자가에 못박여 죽으신 예수님에 대한 설교를 듣고 싶었고 이 교회 목사님 역시 예수님의 십자가를 설교하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복음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고 시대가 바뀌어 지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말은 골동품처럼 사람들이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너무나 십자가에 대한 설교를 많이 들어서 매력적으로 다가오지도 않았고 시대에 뒤떨어지는 설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생각하기를 예수님의 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좀 촌스러우니까 예수님의 삶이 우리를 구원한다 로 잠깐 바꾸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 정문 옆에 담쟁이 넝쿨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담쟁이 넝쿨이 자라면서 crucified 못 박히신 이라는 말을 가려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랬더니 우리는 그리스도를 설교한다 류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이제 편안한 마음으로 사회 참여나 정치문제나 철학이나 도덕 같은 세상적인 이슈를 가지고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교인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나무가 더 자라서 또 그 옆에 있는 다른 단어를 가리었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을 가리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볼 수 있는 단어는 We preach 우리는 설교한다만 남은 것이었습니다. 무엇을 설교하든지 아무튼 설교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교회는 복음을 잃어 버렸다는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입니다. 이런 교회는 간이 부은 담대함입니다. 간이 부은 당당함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가는 당당함은 예수 안에서 이루어지는 담대함이요 당당함입니다. 그러면 예수 안에서라는 말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곧 피를 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말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담대함을 얻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빨간 책은 모두 성경인지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책 테두리는 온통 빨간 색이었기 때문입니다. 누가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성경책 테두리를 빨간 색으로 한 것 자체가 하나의 설교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피로 물든 책이기 때문입니다. 더 은혜가 되는 성경책은 빨간 테두리로 된 성경책에 눈물 자욱이 떨어진 성경책은 정말 은혜스럽게 보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의 성경책을 보면 국을 업어서 국물자국이 있는 성경도 있습니다. 그건 보면 알지요. 빗물자국이 떨어진 성경책은 그 자국이 날카롭습니다. 그러나 눈물 자국은 거의 원에 가까운 부드러운 원을 그리고 있지요. 여러분! 예수님이 달려 돌아가신 십자가를 다시 보십시오. 여기에는 치유함이 있습니다. 회복함이 있습니다. 담대하게 나아가는 능력이 있습니다. 로마병정들은 주님의 머리에 가시면류관을 쓰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머리에서 피가 흐릅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가 지금 지적인 노예로 살고 있는데 내가 이것을 쪼개겠다. 그리고 이 세상의 지식과 학문이 그리스도의 피로 적셔져야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손과 발에 못이 박히고 피가 흐릅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내 손으로 지은 죄, 죄를 짓기에 발빠르게 움직인 나의 발에 못을 박음으로 주님의 보혈로 씻기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의 옆구리에 창을 찔러 피와 물을 흐르게 했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정상적인 방법으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옆길로 가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우리의 어긋난 삶에 창을 찌르고 피를 흘리게 해서 정상적인 방법대로 사는 삶을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벌거벗기신 채 십자가에 돌아 가셨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가 지은 죄를 감추고 덮으려는 것을 주님은 다 벗기셔서 보혈로 씻기시는 회복을 말합니다. 이렇게 지성의 생명으로 회복하고 나의 죄된 삶을 버리게 하시고 정상적인 방법으로 살도록 회복하시고 나의 죄를 온전히 십자가의 피로 씻기셔서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가게 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머리에 가시면류관에서 흐르는 보혈이 있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이 공부하는 학문과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지식은 생명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손과 발이 십자가에서 흐르는 보혈로 적셔지고 있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의 손과 발은 아름다운 손과 발이 된 것입니다. 어려분의 옆구리에 주님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올바른 거룩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피를 받기 위하여 은혜로 발가벗김을 당하셨습니까? 여러분의 죄 된 삶은 청산이 되었습니다. 이러면 우리는 당당히 담다하게 주님의 성소에 들어가는 특권을 얻은 것입니다. 이어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에베소 교인들아 기죽지 말아라 율법을 지키면서 폼잡는 유대인들 앞에 너희가 절대로 주눅들 필요가 없다. 너희들도 주 안에서 주님의 십자가의 피로 당당하고 담대하게 나아 갈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는 목사와 평신도의 구분이 없습니다. 계급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가 먼저 가고 다음에 평신도가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12절을 다시 보십시오.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주 안에서 나아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라고 말합니다. 같은 위치에 놓고 있습니다. 공동체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몸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목사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오는 분들이 아닙니다. 저도 여러분도 모두 같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담대함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계급으로 가지 않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계급을 만드는 교회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 안에서는 목사의 자리가 따로 있고 성도들의 자리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헌금을 많이 한 사람이 헌금을 적게 한 사람보다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는 곳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담대함을 얻은 사람들이 바로 성도입니다.



출처 :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 agaser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