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강해] 엡 3:14-17 (무릎꿇고 비노니)
- 설교 : 전준식 목사
결혼한 우리가 자녀들을 얻게 되면 그 기쁨은 얼마나 강한지 모릅니다. 더군다나 아이가 자라면서 아빠라고 부를 때 엄마라고 부를 때 그 감격과 감사는 뭐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자라면서 아빠에게 엄마에게 돈 줘요. 아니 돈 줘요 라고 하지 않고 돈 줘 라고 할 때마다 아이가 당당하게 자기 표현을 하는 것이 기특해서 돈도 주고 장난감도 사주지요. 그러나 아이가 중학교를 가고 고등학교를 가고 대학을 가면 말이 달라져야 합니다. 용돈이 필요하면 돈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돈 좀 주십시오 라고 말하는 게 정상이지요. 만일 그렇지 않고 여전히 5살 먹은 아이가 아빠 돈 줘 하는 식으로 부모에게 말한다면 부모는 기쁜 게 아니라 속상함이요, 예쁘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미웁게 보일 것입니다. 아이는 자라면서 자신에 맞는 언어와 태도를 보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당당하게 나가는 축복을 얻었음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바울은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당당하게 나가는 우리에게 다음을 기억하라 고 말씀하십니다.-- 14-15절 첫째로 모든 민족을 이데올로기로 통일시키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민족의 이름은 하나님께서 주신 민족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민족을 민족으로 인정하지 않고 이데올로기로 묶으려고 합니다. 지난 해 우리 가족이 영국에 있으면서 가장 피부로 느낀 것은 그 나라는 문자 그래도 유나이드 킹덤 이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이 나라는 4나라가 통합되어 있는 나라입니다. 웨일즈라는 나라는 자기들 언어가 따로 있습니다. 스코틀랜드는 자기들 화폐가 따로 있었습니다. 이렇게 사로 다른 나라가 서로를 인정하면서 국가 시스템이 돌아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 나라가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종교 분쟁입니다. 지금도 북 아일랜드는 캐톨릭과 개신교가 서로를 인정하지 않고 싸우고 있습니다. 테러도 감행하기도 합니다. 무장 병력이 출동해서 시위를 막기도 합니다. 어느 선교사님이 강의 시간에 이런 사례를 말해 주었습니다. 어느 나라에 가서 선교를 하다 보니 그 곳에 여인들이 물을 길러 가기 위하여 한나절을 걸어 다녀오는 것이었습니다. 보기가 너무 안타까워서 많은 후원을 얻어 동네마다 펌프시설을 설치해 주었습니다. 이제 아낙네들이 아침부터 물동이를 이고 먼 길 까지 가지 않고 동네 마당에만 나오면 물을 얻을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참 편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펌프가 고장이 난 것입니다. 때문에 물길으러 가는 것이 불편해서 빨리 고쳐 달라고 선교사에게 요청을 할 텐데 이들은 고쳐달라고 하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예전처럼 다시 먼길을 아침 일찍부터 물동이를 들고 길러 나서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여인들은 물동이를 이고 먼 길을 다녀오면서 자기 속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노래도 부르기도 하고 자식 자랑하기도 하고 남편 흉도 보면서 자연스럽게 치유 받고 오는 그들 나름대로의 독특한 피난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선교를 잘 못 이해한 나머지 하나님이 각 종족에게 주신 고유한 민족으 이름을 무시하고 단일 공동체를 만드는 게 선교라고 착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민족은 나름대로 자기의 민족 이름을 가질 권리가 있고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 째로 무릎 꿇음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당당하게 담대하게 나가는 특권을 얻었으면 문자 그대로 당당하게 담대하게 나가지 뭐하러 무릎을 꿇습니까? 무릎을 꿇는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음이 성숙하지 못할 때에는 무릎을 꿇지 않고 하나님께 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성숙한 사람이면 하나님을 존경하면서 기도해야된다는 말입니다. 무릎을 끓고 빈다는 말은 신중하게 기도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믿고 기도는 무릎꿇고 하는 것이구나 라고 생각해서 언제나 무릎꿇고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말씀은 피상적으로 문자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왜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셨는지에 대한 영적인 안목으로 봐야 합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 자녀들이 교제하는 형제나 자매를 여러분에게 인사시키러 집에 데려 왔습니다. 그런데 보니 아니에요. 보는 순간 속이 상하는 거예요. 왜 그렇습니까? 부모이신 여러분은 자녀가 데려온 그 아이의 속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겉모양이 보이지 않아요. 내면이 보이기 시작하고 그 사람의 내면이 어떤 사람인가 보기 시작합니다. 자식이 좋다고 데려 온 아이를 보니 부모의 눈에는 아니예요. 왜 그렇습니까? 아이는 겉모양만 본 거예요, 속을 보지 못하는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요즈음은 부모가 잘 못 보는 수도 있는 거 같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적용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기도는 무릎을 끓고 하는 것이구나 라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관절이 아픈 사람은 무릎을 꿇고 기도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기도는 무릎꿇고 하는 것이다 라고 하면 우리가 그 사람에게 죄를 짓게 만드는 것입니다. 무릎을 끓는다 는 메시지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무릎 꿇는 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신중하게 기도한다는 말입니다. 어린아이가 막무가내로 아버지에게 돈 달라고 하던 시기에서 벗어나서 이제는 아버지 앞에 겸손하게 신중하게 필요한 것을 말하듯이 그렇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포함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장통 입니다. 성숙과 성장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아이들이 영국에서 키가 부쩍 컸습니다. 아이들이 키가 크면서 고통스러워 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릎 관절이 아픈 거였어요. 마찬가지입니다. 어린아이의 단계에서 무릎 꿇는 단계로 나갈 때에는 어린아이의 것을 버려야하는 아픔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갈대아 우르 땅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그는 결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향한 진보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진지하게 기도할 수 있으려면 이제 어린아이의 행실을 버려야 합니다. 나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고정시킨 채 믿음은 자라날 수 없습니다. 변할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성장할 결심이 있어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변화를 원하면서도 막상 자기 자신이 변화하는 것에는 주저하고 있습니다. 성장과 성숙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껍질이 깨어져야 애벌레가 나오듯이 우리의 겉 사람이 깨어져야 속 사람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숙한 사람이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서 그 기도를 하는 것입니까? 15절을 다시 보면 아버지 앞에서 기도한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을 본 사람은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지만 하나님 앞에 도저히 살수가 없어서 대타를 하나 세웠습니다. 그들이 대제사장입니다.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타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고 들어가 일년에 한번 씩 하나님 앞으로 나갑니다. 그러나 이들도 인간이기 때문에 온전한 제사를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지성소에 들어 갈 때마다 담대하게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당당하게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숨을 죽이면서 들어 갈 수 밖에 없었던 우리와 같은 죄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대제사장의 옷을 만들 때 옷 가장 자리에 방울을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방울은 소리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대 제사장이 방울 달린 옷을 입고 들어가 속죄 제사를 드리고 있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이 온전히 제사를 드리고 걸어 나올 때 방울 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그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대 제사장은 지성소에서 죽은 것입니다. 이 정도로 손에 땀을 쥐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제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지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이제 누구도 번갈아 가면서 대타를 세우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이제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본 사람은 죽지 않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나가서 하나님께 소원을 아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모두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을 영접하십시오. 나중에 라고 말하는 사람 치고 예수님만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집에 빈방이 있어서 방이 필요한 사람에게 빌려주려고 내놓았습니다. 어느 학생이 와서 방을 보더니 잘 보았습니다. 라고 말하면 이 학생은 방을 거부한다는 말입니다. 미루는 것은 거부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지금 예수님을 영접하면 우리는 지존하신 하나님 앞에 갈 수 있습니다. 담대하게 당당하게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무릎꿇고 신중하게 기도하는 기도 내용이 무엇입니까?-- 16절 바울은 환경을 변화 시켜 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빨리 감옥에서 나가서 에베소 교회에 가 집회를 할 수 있도록 허락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의 속 사람을 강건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는 기도내용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세계보다는 육적인 세계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입니다. 세상이 돈을 좋아하니까 교회도 돈을 좋아합니다. 세상이 명예를 좋아 하니까 교회에 와서 명예를 얻으려고 합니다. 세상이 성공을 좋아하니까 교회도 성공하는 교회를 원하고 있습니다. 목사로서 안타까운 것은 성공하는 목회 세미나가 인기를 끌고 있다는 것에 참으로 안타까움을 갖습니다. 이런 세미나를 눈여겨보면 내용들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많이 모이게 할 수 있는가 하는 점에 관심을 갖는 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 없이 사람 많이 모이는 곳에서 목회를 하면 좋겠지요. 그러나 이 이 세미나의 이름처럼 그 철학이 성공하는 철학이라면 그것은 성경에서 한참 곁길로 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공 철학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원하시는 것은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겉 사람을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가 겉으로는 아무리 완벽하게 보여도 주님은 우리의 중심을 정확히 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전능하시고 전지 하신 분이십니다. 지난 금요일에 우리 구역 식구들이 바람을 쐬러 춘천을 다녀왔습니다. 사회 보는 집사님께서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날마다 흑심을 품고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아나요? 제가 이 질문을 받고 야 저 집사님 제 속을 어떻게 알고 이런 질문을 하지라고 놀랐습니다. 날마다 흑심을 품고 사는 것이 누구예요? 누구 긴 누구예요? 전준식 이지요. 저는 그 집사님께서 흑심을 품고 사는 사람이 누구지요? 라고 질문하지 않고 흑심을 품고 사는 것이 무엇이지요? 라고 질문해 주신 것에 대해서 얼마나 은혜스럽게 느껴진지 몰라요. 왜냐하면 제가 주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저는 인간이 아니었거든요. 저는 벌레만도 못한 것이었어요. 그런데 주님의 보혈로 제가 사람이 된 것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자주 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은 한결같이 정직하다. 그렇습니다. 자연을 보십시오. 저들은 참 정직합니다. 아침이 우리를 속이지 않아요 아침이 지나면 밤이 어김없이 와요. 그런데 유독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 중에서 인간은 정직하지 못합니다. 겉은 그럴 듯 한데 속하고는 전혀 다른 존재가 인간입니다. 그래서 로마서에 바울이 뭐라고 말합니까? 피조물들이 탄식한데요. 피조물들이 고통스러워 한데요. 왜냐하면 정직하지 못한 인간들이 그들의 눈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산에 올라가면 나무들이 신음한다는 것입니다. 어휴 저 사기꾼 또 올라 오는구나 라구요. 그러면 속 사람이 강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합니까? 겉 사람이 강건하기 위해서는 날마다 운동해야 하는 것처럼 속 사람이 강건하게 되는 방법이 있습니다. 16절을 다시 보면 성령이 내 안에서 움직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우리의 겉모습이 깨어지고 속 사람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움직이는 파워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멈추지 않고 계속 흐르는 권능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성령의 파워 성령의 권능을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여러분의 속을 보이지 않기 위하여 교양으로 덮고 있는 것이 깨어지기를 원합니다. 사모하십시오. 성령이 이른 비와 단비로 내려오셔서 내 속 사람을 강건케 하신 다는 이 약속을 사모하십시오. 사모하는 사람에게 주님은 16절의 말씀처럼 영광의 풍성함으로 축복하신다 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풍성하십니다. 바울은 감옥에서 나오는 것이 하늘의 풍성한 축복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감옥에서 에베소 교인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그에게는 하늘의 풍성함이라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감옥 안에서 사랑하는 에베소 교인들을 영적으로 교통하게 하신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를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풍성하신 은혜를 받아 이삭이 열매를 맺고 고개를 숙이는 것처럼 무릎을 끓고 기도하는 성숙한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설교 : 전준식 목사
결혼한 우리가 자녀들을 얻게 되면 그 기쁨은 얼마나 강한지 모릅니다. 더군다나 아이가 자라면서 아빠라고 부를 때 엄마라고 부를 때 그 감격과 감사는 뭐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자라면서 아빠에게 엄마에게 돈 줘요. 아니 돈 줘요 라고 하지 않고 돈 줘 라고 할 때마다 아이가 당당하게 자기 표현을 하는 것이 기특해서 돈도 주고 장난감도 사주지요. 그러나 아이가 중학교를 가고 고등학교를 가고 대학을 가면 말이 달라져야 합니다. 용돈이 필요하면 돈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돈 좀 주십시오 라고 말하는 게 정상이지요. 만일 그렇지 않고 여전히 5살 먹은 아이가 아빠 돈 줘 하는 식으로 부모에게 말한다면 부모는 기쁜 게 아니라 속상함이요, 예쁘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미웁게 보일 것입니다. 아이는 자라면서 자신에 맞는 언어와 태도를 보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당당하게 나가는 축복을 얻었음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바울은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당당하게 나가는 우리에게 다음을 기억하라 고 말씀하십니다.-- 14-15절 첫째로 모든 민족을 이데올로기로 통일시키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민족의 이름은 하나님께서 주신 민족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민족을 민족으로 인정하지 않고 이데올로기로 묶으려고 합니다. 지난 해 우리 가족이 영국에 있으면서 가장 피부로 느낀 것은 그 나라는 문자 그래도 유나이드 킹덤 이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이 나라는 4나라가 통합되어 있는 나라입니다. 웨일즈라는 나라는 자기들 언어가 따로 있습니다. 스코틀랜드는 자기들 화폐가 따로 있었습니다. 이렇게 사로 다른 나라가 서로를 인정하면서 국가 시스템이 돌아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 나라가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종교 분쟁입니다. 지금도 북 아일랜드는 캐톨릭과 개신교가 서로를 인정하지 않고 싸우고 있습니다. 테러도 감행하기도 합니다. 무장 병력이 출동해서 시위를 막기도 합니다. 어느 선교사님이 강의 시간에 이런 사례를 말해 주었습니다. 어느 나라에 가서 선교를 하다 보니 그 곳에 여인들이 물을 길러 가기 위하여 한나절을 걸어 다녀오는 것이었습니다. 보기가 너무 안타까워서 많은 후원을 얻어 동네마다 펌프시설을 설치해 주었습니다. 이제 아낙네들이 아침부터 물동이를 이고 먼 길 까지 가지 않고 동네 마당에만 나오면 물을 얻을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참 편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펌프가 고장이 난 것입니다. 때문에 물길으러 가는 것이 불편해서 빨리 고쳐 달라고 선교사에게 요청을 할 텐데 이들은 고쳐달라고 하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예전처럼 다시 먼길을 아침 일찍부터 물동이를 들고 길러 나서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여인들은 물동이를 이고 먼 길을 다녀오면서 자기 속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노래도 부르기도 하고 자식 자랑하기도 하고 남편 흉도 보면서 자연스럽게 치유 받고 오는 그들 나름대로의 독특한 피난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선교를 잘 못 이해한 나머지 하나님이 각 종족에게 주신 고유한 민족으 이름을 무시하고 단일 공동체를 만드는 게 선교라고 착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민족은 나름대로 자기의 민족 이름을 가질 권리가 있고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 째로 무릎 꿇음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당당하게 담대하게 나가는 특권을 얻었으면 문자 그대로 당당하게 담대하게 나가지 뭐하러 무릎을 꿇습니까? 무릎을 꿇는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음이 성숙하지 못할 때에는 무릎을 꿇지 않고 하나님께 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성숙한 사람이면 하나님을 존경하면서 기도해야된다는 말입니다. 무릎을 끓고 빈다는 말은 신중하게 기도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믿고 기도는 무릎꿇고 하는 것이구나 라고 생각해서 언제나 무릎꿇고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말씀은 피상적으로 문자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왜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셨는지에 대한 영적인 안목으로 봐야 합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 자녀들이 교제하는 형제나 자매를 여러분에게 인사시키러 집에 데려 왔습니다. 그런데 보니 아니에요. 보는 순간 속이 상하는 거예요. 왜 그렇습니까? 부모이신 여러분은 자녀가 데려온 그 아이의 속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겉모양이 보이지 않아요. 내면이 보이기 시작하고 그 사람의 내면이 어떤 사람인가 보기 시작합니다. 자식이 좋다고 데려 온 아이를 보니 부모의 눈에는 아니예요. 왜 그렇습니까? 아이는 겉모양만 본 거예요, 속을 보지 못하는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요즈음은 부모가 잘 못 보는 수도 있는 거 같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적용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기도는 무릎을 끓고 하는 것이구나 라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관절이 아픈 사람은 무릎을 꿇고 기도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기도는 무릎꿇고 하는 것이다 라고 하면 우리가 그 사람에게 죄를 짓게 만드는 것입니다. 무릎을 끓는다 는 메시지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무릎 꿇는 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신중하게 기도한다는 말입니다. 어린아이가 막무가내로 아버지에게 돈 달라고 하던 시기에서 벗어나서 이제는 아버지 앞에 겸손하게 신중하게 필요한 것을 말하듯이 그렇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포함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장통 입니다. 성숙과 성장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아이들이 영국에서 키가 부쩍 컸습니다. 아이들이 키가 크면서 고통스러워 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릎 관절이 아픈 거였어요. 마찬가지입니다. 어린아이의 단계에서 무릎 꿇는 단계로 나갈 때에는 어린아이의 것을 버려야하는 아픔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갈대아 우르 땅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그는 결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향한 진보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진지하게 기도할 수 있으려면 이제 어린아이의 행실을 버려야 합니다. 나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고정시킨 채 믿음은 자라날 수 없습니다. 변할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성장할 결심이 있어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변화를 원하면서도 막상 자기 자신이 변화하는 것에는 주저하고 있습니다. 성장과 성숙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껍질이 깨어져야 애벌레가 나오듯이 우리의 겉 사람이 깨어져야 속 사람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숙한 사람이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서 그 기도를 하는 것입니까? 15절을 다시 보면 아버지 앞에서 기도한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을 본 사람은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지만 하나님 앞에 도저히 살수가 없어서 대타를 하나 세웠습니다. 그들이 대제사장입니다.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타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고 들어가 일년에 한번 씩 하나님 앞으로 나갑니다. 그러나 이들도 인간이기 때문에 온전한 제사를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지성소에 들어 갈 때마다 담대하게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당당하게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숨을 죽이면서 들어 갈 수 밖에 없었던 우리와 같은 죄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대제사장의 옷을 만들 때 옷 가장 자리에 방울을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방울은 소리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대 제사장이 방울 달린 옷을 입고 들어가 속죄 제사를 드리고 있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이 온전히 제사를 드리고 걸어 나올 때 방울 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그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대 제사장은 지성소에서 죽은 것입니다. 이 정도로 손에 땀을 쥐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제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지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이제 누구도 번갈아 가면서 대타를 세우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이제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본 사람은 죽지 않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나가서 하나님께 소원을 아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모두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을 영접하십시오. 나중에 라고 말하는 사람 치고 예수님만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집에 빈방이 있어서 방이 필요한 사람에게 빌려주려고 내놓았습니다. 어느 학생이 와서 방을 보더니 잘 보았습니다. 라고 말하면 이 학생은 방을 거부한다는 말입니다. 미루는 것은 거부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지금 예수님을 영접하면 우리는 지존하신 하나님 앞에 갈 수 있습니다. 담대하게 당당하게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무릎꿇고 신중하게 기도하는 기도 내용이 무엇입니까?-- 16절 바울은 환경을 변화 시켜 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빨리 감옥에서 나가서 에베소 교회에 가 집회를 할 수 있도록 허락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의 속 사람을 강건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는 기도내용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세계보다는 육적인 세계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입니다. 세상이 돈을 좋아하니까 교회도 돈을 좋아합니다. 세상이 명예를 좋아 하니까 교회에 와서 명예를 얻으려고 합니다. 세상이 성공을 좋아하니까 교회도 성공하는 교회를 원하고 있습니다. 목사로서 안타까운 것은 성공하는 목회 세미나가 인기를 끌고 있다는 것에 참으로 안타까움을 갖습니다. 이런 세미나를 눈여겨보면 내용들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많이 모이게 할 수 있는가 하는 점에 관심을 갖는 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 없이 사람 많이 모이는 곳에서 목회를 하면 좋겠지요. 그러나 이 이 세미나의 이름처럼 그 철학이 성공하는 철학이라면 그것은 성경에서 한참 곁길로 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공 철학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원하시는 것은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겉 사람을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가 겉으로는 아무리 완벽하게 보여도 주님은 우리의 중심을 정확히 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전능하시고 전지 하신 분이십니다. 지난 금요일에 우리 구역 식구들이 바람을 쐬러 춘천을 다녀왔습니다. 사회 보는 집사님께서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날마다 흑심을 품고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아나요? 제가 이 질문을 받고 야 저 집사님 제 속을 어떻게 알고 이런 질문을 하지라고 놀랐습니다. 날마다 흑심을 품고 사는 것이 누구예요? 누구 긴 누구예요? 전준식 이지요. 저는 그 집사님께서 흑심을 품고 사는 사람이 누구지요? 라고 질문하지 않고 흑심을 품고 사는 것이 무엇이지요? 라고 질문해 주신 것에 대해서 얼마나 은혜스럽게 느껴진지 몰라요. 왜냐하면 제가 주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저는 인간이 아니었거든요. 저는 벌레만도 못한 것이었어요. 그런데 주님의 보혈로 제가 사람이 된 것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자주 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은 한결같이 정직하다. 그렇습니다. 자연을 보십시오. 저들은 참 정직합니다. 아침이 우리를 속이지 않아요 아침이 지나면 밤이 어김없이 와요. 그런데 유독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 중에서 인간은 정직하지 못합니다. 겉은 그럴 듯 한데 속하고는 전혀 다른 존재가 인간입니다. 그래서 로마서에 바울이 뭐라고 말합니까? 피조물들이 탄식한데요. 피조물들이 고통스러워 한데요. 왜냐하면 정직하지 못한 인간들이 그들의 눈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산에 올라가면 나무들이 신음한다는 것입니다. 어휴 저 사기꾼 또 올라 오는구나 라구요. 그러면 속 사람이 강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합니까? 겉 사람이 강건하기 위해서는 날마다 운동해야 하는 것처럼 속 사람이 강건하게 되는 방법이 있습니다. 16절을 다시 보면 성령이 내 안에서 움직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우리의 겉모습이 깨어지고 속 사람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움직이는 파워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멈추지 않고 계속 흐르는 권능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성령의 파워 성령의 권능을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여러분의 속을 보이지 않기 위하여 교양으로 덮고 있는 것이 깨어지기를 원합니다. 사모하십시오. 성령이 이른 비와 단비로 내려오셔서 내 속 사람을 강건케 하신 다는 이 약속을 사모하십시오. 사모하는 사람에게 주님은 16절의 말씀처럼 영광의 풍성함으로 축복하신다 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풍성하십니다. 바울은 감옥에서 나오는 것이 하늘의 풍성한 축복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감옥에서 에베소 교인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그에게는 하늘의 풍성함이라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감옥 안에서 사랑하는 에베소 교인들을 영적으로 교통하게 하신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를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풍성하신 은혜를 받아 이삭이 열매를 맺고 고개를 숙이는 것처럼 무릎을 끓고 기도하는 성숙한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출처 :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 agaser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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