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의 치유적 의미
들어가는 말
몸되는 말
1. "치유"에 대하여
1. 치유가 가지는 뜻과 목표
2. 치유의 능력과 방법
3. 성서를 통한 치유
4. 설교를 통한 치유
2. "성경적 설교의 필요성"에 관한 고찰
가) 도날드 G. 블러쉬의 "목회와 신학" 중 설교를 중심으로
1. 하나님 말씀의 기근
2. 설교의 종류와 그 문제점
3. 성경적 설교의 검증기준
4. 하나님의 말씀 및 성령의 필요성
5. 블러쉬의 기준에 따른 한국 설교의 고찰
나) 한국 교회 설교사역과 커뮤니케이션 환경이해
나가는 말
들어가는 말
1 연구목적
성경적 설교의 기준을 찾기란 그리 쉽지는 않은 일이다. 하지만 말씀의 기근을 경험해야 하는 요즈음의 세대를 많은 영적으로 깨어 있는 신앙인들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본다. 더욱이 그 심각성이 특별히 목회자의 경우에 발견되는 것은 실로 크나 큰 문제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말씀의 기근의 시기라는 문제는 날로 심각성을 더해 가는 문제라는 지적이다. 그것은 사무엘이나 아모스 시대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그 숨결을 더 이상 우리에게 뿜어주시지 않는 것 같은 절망감을 느끼게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 블러쉬는 이렇게 쓴다.
"하나님 말씀의 기갈이라는 말을 우리는 점점 더 흔하게 듣고 있다. 아모스 시대처럼, 하나님은 병들고 패역한 문명에 대한 심판의 말씀을 보류하고 계신 것처럼 보인다. 제 1 차 세계대전 이후로 위대한 설교가 현저히 퇴보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설교집의 판매고의 현황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분명한 사실은 능력 있는 말씀의 실제가 우리 시대에 찾아보기가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위대한 설교가가 없어서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사실은 그 원인을 찾아야 하는 아직 미 해결 문제인 것이다. 그 해결을 시도하는 노력 중의 하나가 설교 갱신 운동이다. 말씀으로 돌아갔던 개혁자들의 전통을 따라 말씀으로 돌아가는 노력이 현재 시도되고 있는 것이다.
정 장 복 교수는 그의 역서 '현대 설교학 입문'에서 이러한 현상을 이렇게 분석한다.
"교회가 교회로서 바른 위치를 정립해 가는 데는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선포(proclamation) 되어지고, 해석(interpretation) 되어지고, 그리고 효율적으로 적용(application) 되어지는 것이 선결의 문제이다. 그렇지 못할 때 교회란 언제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고 그 터전마저 흔들릴 때가 교회의 역사에 적지 아니하였다. 우리 한국 교회는 "말씀과 함께 살고, 말씀과 함께 죽는다."고 믿었던 청교도 후예들의 땀속에서 그 터전이 굳어왔다. 그들은 지칠 줄 모르는 선교의 혼을 붙들고 강인한 말씀의 불씨는 지난 백년동안 한국 교회의 활력을 재촉해 왔다. 이 말씀의 사역 속에서 그토록 견딜 수 없는 핍박과 갖은 시련도 모두 극복하여 우리의 교회는 오늘의 경이적인 발전을 거듭해 왔다.
그러나, 이제 선교 200년의 괘도에 진입하려는 우리가 경청해야 할 소중한 경고가 우리 앞에 예상보다 빨리 다가왔다. 그것은 바로 설교의 전성기가 이제 몰락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위기의 경고는 "현대인들은 이제 설교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에 싸여 있고, 설교자가 설교를 시작하기도 전에 회중들은 설교를 들을 귀를 막아버리는 현실"이라는 지적 앞에 더욱 실감을 더해주고 있다. 우리의 설교가 날이 가명 갈수록 반복을 일삼으면서 영적인 감화력이 없어지고 , 회중들의 삶의 현장과 무관해지고, 설교의 근본 의도가 충분히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이 되지못한 현실임을 직시할 때, 한국 교회 강단의 위기가 심각한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어쩌면 우리의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사명이 지금 소외되고 편법과 인스턴트 식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도 된다. 말씀은 교회의 생명이다. 말씀이 제대로 서지 못할 경우에 초래될 수 있는 심각한 결과에 대해서 크신 하나님의 손길을 믿지만 그 일을 위임받은 한 사람으로써 지금 그 문제를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이번 보고서를 준비하면서 나는 설교의 치유적인 의미와 그 실제적인 영향을 생각하게 되었다.치유의 원론적인 모습과 그 현실과의 접목 점을 찾아보려고 하였다. 잃어버린 설교의 권위를 다시 생각하면서 참다운 말씀을 지켜 가는 자로써 현재의 문제를 점검하고 그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식으로 이 글을 쓰려한다. 설교가 가지고 있는 치유적 열매를 점검하고 그것이 올바로 목회 현장에서 이루어지게 할 방법을 찾아보려 하였다.
몸되는 말
1. "치유"에 대하여
1. 치유가 가지는 뜻과 목표
성경에서 치유라함은 전인격적인 면을 말한다. 육적인 면 뿐 아니라 결정적으로 그의 영적인 면이 치유되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사역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예수님의 사역에서 치유사건은 신학적으로 그리고 예수님의 자의식에 중요한 열쇠를 지닌다. 그것은 곧 하늘나라의 도래이며 개인적으로는 구원의 확인이었고, 이스라엘 민족에겐 징표였다. 그 의미를 성경적으로 보면 그것은 분명히 예수님의 의사로써의 사역을 말하게 된다. 그리고 구원자로서의 그의 위치도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예수님은 그의 치유사역에 반드시 죄의 용서를 덧붙이셨다. 개신교 전통에서 구원이란 분명히 영혼에 관련된 일면적인 면이 있음을 우리는 안다. 그것은 전인적인 구원에 있어서 편협한 생각을 하게 하는 위험이 있다. 우리가 살펴볼 구원은 전인적인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치유라하는 것은 역시 전인적인 특징을 지닌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말하셨듯이 치유는 곧 죄의 속량, 즉 구원인 것이다. 예수님은 구원받은 이후의 인간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셨다. 그것은 결정적인 시각이다. 그것은 치유가 곧 구원으로 나아가게 했던 근본적인 요소인 것이다. 인간을 바라보되 병들어 있는 인간을 바라본 것이다. 그것은 곧 병들기 전의 인간의 아름다운 모습을 꿰뚫어 보고 있다는 말이며 미래에 있어 전인적이 치유가 완성된 인간의 아름다움을 소망하였다는 말이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가 세상을 향하여 가지셨던 눈이다. 곧 사랑의 눈인 것이다.
이런 것과 맥을 같이하여 투니어는 치유관을 전인적인 관점에서 말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진정한 치유란 몸, 정신, 영혼의 합일로 이루지며, 치유와 구원은 연합된 상태라고 한다. 그는 엘롬 교수의 말을 인용하여 "치유는 언제나 육체적인 동시에 영적이다."
또한 튜니어는 진정한 치유란 단지 질병의 회복의 단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질병의 회복이후 계속적인 삶의 자세까지 연관시켜서 하나님 앞에서 헌신자의 삶을 사는 것을 완전한 치유로 보고 있다. 그는 "회복된 건강을 어떻게 활용할 것이냐 하는 것은 건강 그 자체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다."라고 한다.
신약 성서에 나타난 에수님의 치유도 몸의 치유만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구속과 사단의 박멸이라는 구속적인 관점에서 전인치유, 지-정-의가 완전히 조화된 몸, 정신, 영혼을 함께 치유하셨다.
예를 들면 요 5:14에서 38년된 병자의 육적인 치유 후 "다시는 죄를 짓지 않도록 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더 흉한 일이 생길지도 모릅니다."라는 말씀은 육체적인 치유보다 더 흉한 일이 있고 육체적인 치유보다 더 위대한 것이 있음을 말한다.
막 2:1-12에서 중풍병자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언하심으로 그의 육체적 질병의 핵심이 영적인 것임을 시사한 뒤에 육체적 치유를 행하신다.
요 7:23에서 "내가 안식일에 사람 하나를 온전히 고쳐서"라고 말씀하실 때의 온전하다는 의미는 그 치유가 정신적, 육체적으로 전인적이라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P. Tillich도 육체적 질병과 정신적 질병에서의 치유와 영적인 죄악에서의 구원을 구별하지 않고, 전인적 존재의 구성요소-육체ㅡ 정신, 영적측면-중에서 어느 한부분이 상해를 입게 될 떼ㅐ 전인적 와해의 위기를 맞게 되는 바, 진실한 의미에서의 구원은 결합, 침해, 왜곡 등에 의해 고통당하는 개인을 치유하여 이전보다 더 완전한 인간회복을 달성시켜 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는 "구원은 근본적으로, 그리고 원칙적으로 치유이다. 다시 말하면 꺽어지고 와해된 것을 성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Hiltner도 목회학적인 의미에서 치유란 단지 육체적 질병에서 치유되는 것만으로는 온전한 치유라고 할 수 없으며 어떤 수단에 의하여 그 육체의 질병을 치유하든지간에 목회자는 전인적회복, 즉 구원에의 관심 하에서 목회사역을 행하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치유란 온전하게 만드는 일, 다시 회복하는 일을 말한다. 방향이나 스캐줄에서 손상(병)된 기능적인 불완전성을 다시 회복하여 회복이전 단계보다 한단계 더 발전한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결국 치유란 육체적, 정신적, 영적 차원중 어느 부분의 결합으로 그 손상에 대한 치유이다. 곧 어느 한 부분의 침해는 전인적인 파급 효과를 일으키게 되며 어느 부분에서라도 치유는 시작될 수 있다. 그러나 결정적인 결합을 이루는 그 부분의 치유만으로는 전인적인 치유가 일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손상을 입지 않은 다른 각 부분에서도 동시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과학적인 방법에 의한 치유이든 Charismatic Healper나 다른 신앙적 방법을 통한 치유이든지 간에 부분적인 치유의 수단을 동원하여 전인적 회복의 수단으로 삼을 수 있으나 그것 자체만으로서는 목회의 기능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전인적 목표를 가지고 부분적인 치유의 수단을 동원하여 손상이전보다 나아진 인간 회복을 목표로 회복된 건강을 활용하여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삶을 살아가는 단계까지 성장시켜야 할 것이다.
2. 치유의 능력과 방법
투니어는 치유의 방법으로 기술적이 방법과 영적인 만남 둘다를 포함하지만, 어떠한 방법을 사용하든 치유의 근본 능력은 하나님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생명은 위에서부터 오는 것으로 신과의 사귐으로 풍성해지며,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하게 될 때 인간의 생명은 확실하고, 안정되고, 평화롭고 불안에서 해방되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환자가 치유되기 위해서는 환자 자신이 자신의 자존심, 독립성을 버리고 의사의 말에 순종하며 병에 대하여 수긍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적인 영적 체험을 통하여야 행동이 변화되고 성격의 오류가 교정되며 고통이 사라지게 된다. 이 영적 체험은 아무리 심오한 영적 체험이라도 단번에 개인의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며 전진과 퇴보를 거듭한다고 한다.
인간치유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하여 학자들의 이론을 좀 더 살펴보면 구약성서학자 폰라드는 구약성서의 하나님은 치로하시는 하나님(출15:26)으로, 그 당시는 신만이 치료할 수 있었고(왕하5:2), 야훼의 호의를 불신하고 의사들의 충고를 받는 것은 불신앙이었으며 (대하16:12), 그만이 꿰맬 수 있어서(욥5:18) 나를 고쳐 주시고(시6:3, 렘17:14), 당신이 나를 고쳤나이다(시30:3,103:3)라고 고백하며 병자가 이방신에게 치유를 호소할 때 그것은 악에 속하였고(왕하12:8), 야훼를 신뢰하던 모든 처방들은 효력을 나타내었다.(왕하20:1-7)고 구약성서는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키엘케골은 삶의 단계를 심미적 단계, 윤리적 단계, 종교적 단계로 구분하고, 인간은 신과의 관계속에서만 참다운 인간성을 나타낼 수 있다고 하였다.
3. 성서를 통한 치유
투니어는 인간에게 생명을 허락한 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인간의 생활법칙을 성서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성서는 역사적으로 사람의 생과 사건에 대해서 묘사한다. 성서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들음이 지혜에 대해 설명하며, 우리들의 삶을 위한 신의 계획을 보녀주며, 피조물을 위한 하나님의 무한하신 목적과 역사이 의미에 대해서 묘사한다. 성서를 읽으며 성서에 나오는 인물과 대화할 때, 그들의 행동과 말씀에 대해 깊이 명상할 때, 그들을 본받아 기도하는 가운데서 하나님과 일대일로 만나 그가 우리에게 정해주신 뜻이 무엇인가. 밝히고자 할 때, 우리들은 자신의 삶 가운데 무엇이 그릇되었는지 알아내고 고치며 그 자리에서 돌아설 수 있게 된다.
성서를 토?여 기도와 명상 가운데서 그리스도와 개인관계를 맺음로서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교훈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으며, 또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생활을 하게 되고, 하나가 되지 못한 마음상태를 치료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으므로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활 가운데서 아직까지 고치지 못하고 있는 결점들을 용서해 주신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투루나이젠도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으며 죄로 인하여 파괴된 인간성은 말씀에 의하여 회복된다고 하였으며, 마틴 로이드 존스도 성서는 하나님, 이웃, 그리고 이 모든 것과의 관계에서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밝혀준다고 하고 있다. 그는 "성서만이 인간의 문제해결에 적당한 것으로 가장 난해한 문제(죽음, 파탄지경에 이른 결혼문제, 동성애 문제)에 대해서도 인간의 권위가 아닌 하나님의 권위로 화해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명령으로 정확한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된다."하고 있다.
성서적 상담의 권위자인 아담스는 성서를 사용할 때 사람들이 성서에 주어진 그 자체의 목적 보다도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이용해 왔음을 지적하면서, 치유자는 그가 사용하는 모든 성구의 목적을 알고 있어야 할며, 하나님게서 이 말씀을 가지고 독자에게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가(경고인가, 격려인가, 동기유발인가 등등)를 똑바로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4. 설교를 통한 치유
설교는 말씀의 풀이이며 말씀의 적용을 위한 선포이다. 그것은 주로 목회자에게 맡겨진 사명이다. 그러나 목회자가 자신이 전하는 말씀을 믿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설교는 치유적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죄용서이며 말씀안에서의 자기 사랑이다. 이 설교는 성경의 사실에 근거한 신앙에 의한다. 치유의 기적은 신화도 설화도 아니다. 그것은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진실한 사실이다. 우리는 진지한 자세로 성경의 주장들을 고찰해야 한다. 틱히 치유와 관련하여 설교의 중요성은 현대에 와서 더욱 커진다. 현대의 전인적인 병리현상은 그 원인을 영의 곤핍에 두고 있다. 영이 빈곤하여 현대의 탈선현상들이 벌어지는 것이다. 목회자는 진실한 신앙으로 자신의 확신을 전해야 한다.
2. "성경적 설교의 필요성"에 관한 고찰
가) 도날드 G. 블러쉬의 "목회와 신학" 중 설교를 중심으로
1. 하나님 말씀의 기근
서론에서도 지적했던 바 말씀의 중요성은 더 이상 강조할 이유를 찾지 못할 정도이다. 우리는 성경적, 복음적 설교의 퇴보를 분명히 말할 수 있겠다. 설교는 교인을 가득 메운 교회들에서 여전히 전달되고 있지만 사람들은 실제적으로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풍요함 중에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말씀의 풍요만큼이나 심각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 블러쉬는 포사이드(Forsyth)와 신부 머피 코오너(Murphy-O'Connor)의 말을 인용함으로써 이 심각한 상황을 묘사한다..
"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설교가 아니라 복음이다. 설교가 이 복음을 죽이고 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설교자들의 기술적 무능성과 영적 평범성 때문이라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블러쉬는 현대의 설교 유형을 대충 열거하면서 그것들의 문제점을 밝혀간다..그가 말한 것을 항목별로 정리하여 문제점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2. 설교의 종류와 그 문제점
2-1 주제설교
이 설교는 "현대문화의 주제에 대한 강의"라고 평가받았다. 블러쉬에 의하면 이런 설교들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설교라고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이다. 이것은 참으로 충격적인 선언이 아닐 수 없다. 적어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되고 있는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닐 수 있다는 가능성은 그 누구도 찾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 블러쉬의 견해가 사실이라면 그것은 더더욱 충격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 심각한 논쟁의 불길을 블러쉬는 이렇게 잡아간다.
"이 설교들은 아주 자연스러우며 덕을 세우기까지 하지만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구원으로 인도하지는 못한다. 이런 설교들은 '사실'을 우리에게 설명해 줄지는 몰라도 '권위의 강조'는 부족하다. 사람들은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라는 말 대신에 "내 개인 의견입니다." 또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강단에서 듣게 된다. 주제 설교는 자유주의 개신교 교회들에서 지배적이다."
주제설교의 단적인 모습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표되지 않는 것에 있다. 블러쉬의 아쉬움은 그것이 도덕적일지는 몰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케리그마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현대인의 구미에는 맞을는지 몰라도 내주하시는 성령은 반드시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에 문제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블러쉬는 계속해서 과거 로마 카톨릭과 영국 성공회 예배의 설교도 이 주제설교의 범주에 넣었다. 일부 카톨릭 저술가들은 설교와 복음적 설교를 구분하지만 블러쉬는 결단과 회개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모든 설교는 복음적이어야 한다고 한다. 그 이유는 기독교인들은 은혜 가운데 살고 있을 뿐 아니라 동시에 죄 가운데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블러쉬의 설교론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모든 설교는 두 왕국에서 사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것이므로 복음적이어야 한다."
2-2 영감설교
블러쉬는 이 영감설교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영감설교의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지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보다는 회중들을 고무시키고 자극하거나 감동시킴으로써 사람들의 창조적인 노력을 격려하는 데 있다."
이 영감설교의 형태는 다소 부정적이다. 블러쉬는 그것을 '더 연극적이다"라는 표현으로 나타내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가지는 목적이 그러하듯이 영감설교는 하나님께로서 사람들을 향한 설교이기보다는 처음부터 사람들을 향한 설교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생각하는 것은 어느 때이건 간에 그 결과에 있어서 아름답지 않았다. 영감설교도 마찬가지인데 이 설교는 종종 개인적 체험을 고양시키는 데 집중되어 있고 항상 설교자의 체험을 포함하고 있다. 이 설교의 결정적인 문제는 그것이 하나님의 성령에 의한 구원이 아니라, 인스턴트식 자기만족이 될 수 있는 것이 문제이다. 블러쉬는 연이어 쉴라이에르마허의 말을 인용하는데, 그것은 어느 정도는 이 영감설교를 지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다. 쉴라이에르마허는 설교는 항상 어떤 사람의 체험에 대한 간증 형태여야 한다고 했다. 블러쉬는 바울의 말을 인용하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만 선포할 것을 간접적으로 주장하는데 논지가 다소 일관 적이지 않다. 예수에 대한 선포 속에 개인의 간증이 차지하는 위치를 고려하지 않았다. 블러쉬의 부정적인 시각의 원인이었던 간증을 통한 고양이 어느새 그 목적과 결과를 파악하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한가지 경우에 있어서 타당한 전제를 인정한다면 블러쉬의 견해는 타당하다. 즉, 영감설교가 추구하는 목적이 그 수단과 구분이 안된다는 가정이다. 블러쉬가 결론 짓기를 교인들을 고무시키는 것이 설교의 목적이 아닌 그 열매여야 한다고 함으로써 결국 영감설교의 문제점을 목적과 수단을 분간하지 못하는 영적 무지로 본 것이다.
체험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것이, 하나님의 말씀은 간증을 낳는 것이 아니라 덕을 세우는 것이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간증의 목적은, 따라서, 덕을 세우는 것이다. 그것이 덕인지 아니면 교인들을 세우는 목적과 분별하지 못하는 영감설교인지는 실로 구분이 어렵다. 하지만 어떤 설교이건 영감설교의 위험성은 항상 존재한다. 자신이 스스로 조심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이런 설교의 위험에 빠지게 된다.
2-3 종파적 설교
이 설교는 이를테면 체제 유지적인 설교이다. 신앙이 아닌 신념집단의 모습에 가까운데 교파의 노선에 충실한 것이 특징이다. 하나님의 자유하심이 교파의 교리에 매여 버린 꼴이다. 이런 설교가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는 확신으로 사람들의 편견과 신념들을 자극하여 더욱 신념에 얽어매 버린다. 자신들의 선배나 자신들의 신념을 증명하기 위한 성경의 본문만을 찾아 제시한다. 그것이 비록 단순하여 복음의 성격에 근접하긴 하나 복음은 순수해야 한다. 교파의 신념에 채색된 것이어서는 더 이상 복음일 수 없는 것이다. 블러쉬는 이렇게 말한다.
"권위 있는 성경적 설교는 '순수복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즉 사람들이 속해 있는 문화 및 실존상황과 관련하여 속죄의 메시지를 깨달을 수 있게 선포하는 것이다."
2-4 반증설교
이것은 설교자의 설교적 카리스마를 포기하는 것으로서 오로지 청중들의 질문에 답변하는 형식의 설교이다.
이 설교에서 목회자가 차지하는 위치는 오직 상담자의 위치이다. 목회자는 함께 고민해주는 동역자 이상이 아니다. 블러쉬의 표현대로 진리를 추구하는 교인들의 동료이기를 자처하는 것이다. 블러쉬는 이런 설교의 원인이 세속신학에 있다고 보았다.
2-5 오늘날 설교의 공통된 문제
블러쉬는 오늘날 설교의 문제를 그 기근성에 있다고 본다, 말씀은 정말로 많이 선포되고 설교되고 있지만 누구도 그것에서 영적 충족감을 얻지 못한다는 말이다. 블러쉬는 그 이유를 몇 가지로 제시한다.
1) 목회자들이 더이상 하나님 말씀이 종이 되려고 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신학도가 되려고 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2) 현대의 목회자들은 너무 사회생활에 몰입한 나머지 성경학도가 되지 못한다.
3) 현대 성직자들은 대개 기도의 사람이 되지 못한다. 오늘의 대다수 목회자들은 말하는 것을 빼놓고는 생활에서 전혀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없다.
4) 현대의 목회자들은 자신의 참위치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들을 그리스도의 대사와 목자가 아닌 상담가, 행정가, 선전원으로 자처한다.
5) 개신교회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중산층을 목회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목회자는 귀족층의 가치와 편견을 초월하기 어렵다. 또한 가난한 계층의 이해도 따라가지 못한다. 그것은 사실 상 죄악을 죄악으로 지적하지 못하는 영적 무감각성을 가지게 한다. 사회를 향한 정의에 대 하여 더이상 목회자가 할 말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6) 오늘의 신앙을 현대 문명인들에게 유쾌하게 해주려는 기도로 생각하기 때문에 설교는 성경 적 본질을 상실케 되었다.
이런 문제들은 현대의 목회자들로 하여금 정체성의 위기를 맞이하게 한다. 그것은 고통이다. 신도들과 성직자 모두에게 닥쳐오는 위기인 것이다. 현대의 목회자들은 자기의 참위치를 이해하지 못한다. 설교는 어두워진 이성의 노리갯감으로 전락해 버렸고 복음은 마치 장사를 위해서 만든 제품인 것처럼 윤색하려는 것은 복음을 값싸게 할 뿐이다.
3. 성경적 설교의 검증기준
성경적 설교가 본질적으로 이데올로기적 설교나 도덕설교와 다르다. 그것은 문화의 입장을 단순히 반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기준은 무엇이며 어떤 것이 이 성경적 설교의 본질일 수 있겠인가? 블러쉬는 몇 가지의 점을 말한다.
3-1 성경적 설교는 강해설교여야 한다.
블러쉬는 말한다. "강해설교는 그리스도 계시의 입장에서 성경에 나타난 입장이나 문구를 설명해야 할 것이다. 설교의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충분히 알게 하는 것이며'(골1:25), 성경의 설명을 포함한다. 예화들은 본문의 의미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 사용할 수 있지만 신학적 예화와 이야기 전달, 즉 회고록 강의간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칼 바르트는 설교의 목적이 본문을 해석해야 하는 것이지 이야기나 예화로 본문에서 직접적인 의미를 앗아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설교자는 교인을 즐겁게 해주거나 사로잡거나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교인을 구원의 메시지에 직면시키기 위해서 부름받은 자이다. 설교자는 하나님 말씀의 대변자이지 쇼를 부리는 연기자나 장사꾼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이를테면 성경적 설교는 사람들의 구미를 맞춘다기 보다는 능력되시는 하나님의 구미에 맞추는 것이다. 성경을 가지고 사람을 고려하여 요리하는 것이 아니라-하지만 이 말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설교는 그 전달의 효율을 위해 건전하게 연구되고 다듬어져야 하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성경이 말하는 바를 들어야 하는 것이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바를 교인들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다음의 성격을 지니게 된다.
3-2 성격적 설교는 성격상 케리그마여야 한다.
케리그마(kerygma)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메세지를 나타낸다. 즉, 목회자는 성경 본문의 원의미를 단순하게 표출할 뿐 아니라 이 본문을 성경의 주제인 불경건한 자들의 칭의와 관계시켜야 한다. 이를테면 이것이 케리그마인 셈이다. 루이스 바우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각을 알리는 것도 아니고 더욱이 어떤 추상적인 교리를 알리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중대한 소식, 즉 기쁜 소식을 갖고 있다."
설교자는 복음의 변호자나 증명하는 자가 아니다. 오히려 복음을 지성적으로 명료하게 선포하여야 한다.
3-3 성경적 설교는 예언적이어야 한다.
블러쉬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대사는 하나님의 사랑뿐 아니라 우상숭배와 인간의 범죄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도 선포하라고 부름받았다. 이것은 설교자가 복음뿐 아니라 율법도 설교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설교자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위해서 행하신 것을 말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지금 설교자의 설교가 케리그마적일 뿐 아니라 예언적이어야 함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성경적 설교가 예언적이어야 하는 이유이다.
다시 말하면, 현대의 설교는 단적으로 표현해서 하나님 위주가 아니라 성도들의 관심 위주로 흐르다 못해서 성경의 내용을 편파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을 비판한 것이다. 즉 오로지 교인들의 평안과 안심을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그리고 복의 약속만을 설교하는 것이다. 이것은 구약의 예언자들이 가장 경고했던 멸망의 징조였다. 그것에서 종교적 타락이 싹텄던 것이다.
이러한 예언적 설교는 "특수성과 구체성"을 수반하게 된다. 블러쉬는 이렇게 말한다.
"예언적 설교는 죄에 대해서 설교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설교자는 사람들에게 재앙을 가져다 주는 구체적인 죄를 밝혀야 하고 청중에게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가를 보여 주어야 한다. 사랑을 내세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어떻게 그리스도가 답변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가 따라야 하는 바로 그 길이 되시는 가를 지적해야 한다."
이러한 기준에서 블러쉬는 자유주의와 근본주의 그리고 신정통주의까지 비판하고 나선다. 즉 자유주의와 근본주의는 추상주의의 우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설교들은 그리스도의 속죄를 오늘날 인간과 백성들의 구체적인 죄와 어느 모양으로도 연관시키지 못하고 있다. 근본주의자들의 설교는 개인적 죄는 언급하지만 사회구조의 죄는 거의 무시하고 있는 형편이다. 신정통주의의 설교는 케리그마는 선포되지만 우리를 참 기독교인의 생활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법과 구체적인 절차의 위반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말하지 않고 있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성경적 설교는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뿐 아니라 간음이나 신성모독에 대한 명령도 포함해서 하나님의 법도 포함하는 것이다.
3-4 성경적 설교는 교리적이어야 한다.
블러쉬는 현대의 교리교육을 개탄하면서 우매한 평신도의 문제를 지적한다. 즉, 유명한 기독교교리 대부분을 교회의 평신도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교리 문제들을 흔히 설교에서 회피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설교의 순서에서 현대적 설교가 품고 있는 문제는 강해적이고 케리그마적이기 이전에 먼저 생활정황과 인간의 문화적 상황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설교가 강해적이고 케리그마적이면 당연히 인간의 생활정황을 무시할 수 없다. 말 그대로 "생활 정황과 강해설교간에서 어떤 차이를 두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다. 모든 설교는 성경에서 시작하여 오늘날 인간의 문화적 상황으로 나아가야"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용하는 바르트의 이야기는 다소 블러쉬의 일관성을 깨는데, 어쨌든 블러쉬는 바르트의 말을 인용하면서 설교의 이중성을 주장한다. 즉 성경적 설교에 필요한 유일한 두 가지는 성경과 매일신문이라는 것이다.
3-5 성경적 설교의 성격
성경적 설교는 인간의 맹목성과 완고함에서 기인하는 분리성을 지닌다. 성경적 메세지는 인간을 가르는 장벽을 무너뜨릴 뿐 아니라 동시에 새로운 벽을 세우는 것이라야 한다. 성경적 설교는 계층, 인종, 성별의 장벽을 극복하지만 새로운 신앙의 장벽을 초래한다. 세상을 향하여 복음은 영원히 스캔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회자들에게 있어서의 목표는 항상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화해와 평화가 있게 해야 하는 것이다.
4. 하나님의 말씀 및 성령의 필요성
이부분에서 블러쉬는 현대의 예전운동을 말한다. 교회의 근본되는 표지는 깔뱅 이후로 설교와 성례였다. 그러나 현대의 교회는 이러한 것을 설교쪽에 더 기울어져서 강조하는 분위기이다. 그런데 문제는 현대인들이 더이상 설교를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것의 유일한 탈출구는 주의 영으로 충만하여 그 양떼들을 생명의 떡으로 계속 먹이는 것이다. 현대인들의 노외게딕 신경증-즉, 영혼의 빈곤으로 겪는 신경증 증세는 더욱 현대의 설교의 문제를 지적한다
우리의 시대에 있어서 기근을 없애는 방법은 하나님의 영을 기다리고 기도하는 편이 더 낳을 것이라고 블러쉬는 분석한다.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기도, 연구, 훈련"인 것이다. 위대한 설교는 명상과 묵상을 통해서만 탄생한다. 블러쉬의 마지막 권고는 능력과 권세로 다시 한번 설교하기에 앞서 기도와 명상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과 다시 한번 만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5. 블러쉬의 기준에 따른 한국 설교의 고찰
5-1 블러쉬의 기준
앞서 살펴본 블러쉬의 기준은 다음과 같다.
(1) 강해적일 것 (2) 케리그마일 것 (3) 예언적일 것 (4) 교리적일 것
5-2. 현대 한국 설교의 비판
2-1 강해설교에 대하여
2-1-1 비판
강해설교라함은 아마도 그전단계로써 본문의 주석작업을 반드시 전제한다고 본다. 문제는 그 주석작업이 너무 피상적이라는 있다. 아예 주석작업은 삭제하고 본문으로 경건의 시간을 가진 그 결과로만 설교하는 목회자들이 대부분일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신학교에서 교육을 잘못시킨 탓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신학생들이 본문주석에 관해서 해보았다는 데 만족해 버리는 경향을 본다. 그것은 전혀 올바른 생각이 아님이 분명하다. 그러기에 그나마 본문을 가지고 씨름하신다는 목사님들 조차도 주석-올바른 의미에서 견실하지 못한 강해식 주석류-을 대충 몇가지 참고하고 대신 본문을 바라봄에 있어서 너무 깊이가 없이 보시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 대부분의 설교집은 주제별 설교이다. 이것이야말로 블러쉬가 지적한 문제성 설교인 것이다. 물론 그것이 케리그마적인 것일땐 다소 건전할 수 있겠지만 그러할지라도 그것은 목회자들의 의도가 선행한 후에 본문을 끌어다 붙이는 식이기 때문에 그 문제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결론적으로는 역시 본문에서 설교의 주제와 은혜를 끌어내는 강해설교만이 그 타당성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나마 강해설교라고 하시는 목회자들의 설교를 살펴보면 그것이 본문중심이라는 것을 빼고는 다른 설교의 방법론, 즉 스타일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고 보는데 그것은 설교가 "쇼"가 되는 것이다. 예화 중심, 성경을 설명하기 위해서 더 많은 예화와 이야기들이 설교에 삽입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본문을 현대에 적용함에 있어서 사회구조적인 부분을 다루기 보다 여전히 개인적인 부분에만 치중하고 있음을 본다.
2-1-2 나아갈 방향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은 블러쉬의 지적대로 연구하는 자의 자세를 가져야 할것이다. 무엇보다도 기도와 연구를 병행하여 인스탄트식 목회와 설교를 청산해야 할 것이다. 당연히 강해설교로 그 방향을 바꾸어야 할 것이다. 본문에 매어달리는 학자적 양심을 지녀야 할 것이다. 본문 주석을 위한 신학교의 수업을 강화해야 할 것은 주지하는 바이다. 자신의 사역과 말씀 연구를 위한 사역간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시간 설정을 하나님 앞에서 용기를 내어 결단해야 할 것이다. 돌아봄도 중요하지만 결국 살아있는 말씀이 교회를 살리는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2-2 케리그마적 설교에 대하여
2-2-1 비판
말씀은 목회자의 설교를 이끌어가는 주체이다. 물론 설교의 도구이긴 하지만, 하나님의 통로이긴 하지만 말씀은 목회자를 사로잡는 능력인 것이다. 예수님의 선포의 스타일은 복음을 통하여 죄인들을 구원으로 선포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치유이다. 현대적 설교의 위기는 그것이 윤리적 치유를 위해서만 치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세상의 윤리에 사로잡힌 성도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죄속에서 회의하는 현대의 신자들에게 구원과 치유의 말씀이 아니라 윤리적 공로를 따르라는 설교가 대부분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목회자의 영성 문제이다. 기도와 말씀 연구의 부족이다. 설교는 근복적으로 케리그마적 곧 복음의 선포여야한다.
2-2-2 나아갈 방향
따라서 현대의 설교가 지향해야 할 것은 곧 복음의 재 확인이다. 언제나 죄인들을 구원으로 초대하는 선포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목회자 자신이 복음에 투철한 의식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언제나 그리스도인들이 죄인이라는 것, 즉 구원의 대상자라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원의 감격과 그 능력을 늘 확인시키라는 것으로 본다. 그러기 위해서 목회자는 전도자여야한다. 목회자의 케리그마가 아닌 성경의 케리그마를 늘 염두에 두고 설교의 끝맺음도 언제나 구원으로의 초대여야 할 것이다.
2-3 예언적 설교에 대하여
2-3-1 비판
사실 이부분은 현대의 설교가 가지는 가장 취약한 부분일 것이다. 현대적 설교는 더이상 성도들을 꾸짖기를 잊었다. 그들을 양육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악된 삶의 용기와 위로를 주는 설교로 변질되었다. 누구도 구약의 예언서를 설교하지 않는다. 성도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설교가 바로 예언서의 심판선포인 것이다. 목회자들은 성도들을 두려워한다. 그들의 성도들을 향한 사랑은 더이상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목양의 한계를 넘어선 사랑의 남용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월권이다. 성도들을 위해 채찍을 드는 것은 금기사항이다. 덕-그 근거조차도 없는-을 세우는 것이 교회의 가장 아름다운 미덕이 되버렸다. 또한 이 사회를 꾸짖는 것을 싫어한다.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라는 명령은 태반 개인적 도덕생활이나 사회윤리에 제한되는 것이 태반이다. 사회에 대해서, 정치, 경제에 대하여 더이상 복음과 하나님의 능력은 존재한지 못한다. 그것은 목회자들의 책임이다. 어느 목회자도 예언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런 목회자가 있다면 교회속에서 매장당하기 쉽다. 교인수가 줄어드는 것 이것이 현대의 목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다.
2-3-2 나아갈 방향
목자들은 양떼를 하나님께 위탁받은 것이다. 그들이 잘못가는 것은 하나님의 눈으로 판단해야한다. 목자들은 야훼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현대사회가 총체적으로 병들어 가는데 더이상 교회에서 평안을 선포할 수 없는 것이다. 더이상 성도들의 안락과 하나님의 은혜만을 강조할 수 없다. 이 시대의 예언자가 되어야 한다. 성도들의 죄악과 잘못을 하나님의 방법을 간구하여 지적하고 치리해야 한다. 말씀도 케리그마적인 것 곧 죄를 지적하고 그후에 구원의 은혜를 선포하는 형식을 가져야 한다. 설교는 생명이다. 교회가 교회되게 하는 보루이다. 설교는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자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성경을 고루 묵상하며 설교의 본문도 구약과 신약에서 고루 뽑아야 할 것이다.
2-4 교리적인 설교에 대하여
2-4-1 비판
블러쉬는 우매한 평신도의 생산을 이 교리적 설교이 부족에서 보았다. 블러쉬는 묻는다. "어떠한 교리의 언급없이 어떻게 성경을 설명할 수 있겠는가?". 물론 이 말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에서는 성경의 교리가 아닌 교단의 교리를 성경을 빌어 전달하고 주입하는 경향이 있다. 집단 이기주의가 이미 교회에까지 침투하여 개교회주의 현상 까지 나타나고 있다. 교회가 전체로 하나인 것이 이렇게 생소한 말일 수 없을 것이다. 어찌보면 교회는 신앙인들의 모임이 아니라 교단 교리에 세뇌된 신념집단에 가깝다. 목자는 교주가 되기도 하고, 성육신하신 하나님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참으로 올바른 교리의 정립이 요구된다. 조직신학적 소양이 한국의 신학전통속에는 없다. 목자들조차도 조직신학에 우매하여 교회를 유지하는 것이 교리인양, 진리를 교회안정의 수단으로 여긴다. 교리는 성경에서 발견한 교회존재이유이다. 교리는 우리가 성경을 지키려는 노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교리는 기독교의 진리, 그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2-4-2 나아갈 방향
조직신학의 올바른 교육이 요구되며, 개혁전통 속에서의 위치를 바르게 잡아가고, 비판적이 개정 작업을 바르게 수행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성경속의 참된 교리를 볼줄 알아서 교단이 내세운 교리의 편파성을 극복해야 할 것이다. 언제든 하나님의 성령 앞에서 열려진 신학을 해야 할 것이다. 연구하는 학자의 자세가 목자들에게는 반드시 요구되는 것이다. 그것은 필연에 가깝다. 한?회는 이제 팽창주의에서 벗어나 내적인 충실에 눈을 돌려야 할 것이다. 교인들을 더 이상 우매한 자들로 만들 수 없다. 그들이야말로 결국 교회를 이끌어갈 교회속에 교회이기 때문이다.
나) 한국 교회 설교사역과 커뮤니케이션 환경이해
설교사역자는 언제나 균형의 조화를 앞에 주고 깊은 고민을 하낟. 이 균형의 조화는 여러분야에서 요구되어지는 것들이다. 예를 들어 설교자가 외치는 메시지의 내용과 자신의 삶의 균형을 비롯하여 지적인 기능의 개발과 영성의 개발이 갖추어야 할 균형까지 모두가 설교자의 어깨를 무겁게 하는 것들이다.
그 중에서도 고민스러운 부분은 메시지와 그 커뮤니케이션의 기술의 조화이다. 선포의 사역에 몸을 던져 살아간 사람은 현대 커뮤니케이션의 기술에 노무 관심을 가지려고 할 때 메시지는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되어 의미 없는 수사학도로서 선포의 장에 서는 모순을 범하게 된다. 그러나 또 하뉴 으로는 메시지를 수 해야 할 무리들의 변천하는 주변환경과 그들의 새로운 몬화적인 요소들, 그리고 커뮤니 케이션의 환경을 도외시하는 경우 메세지 자체의 소통이 단절되는 위험이 따른다. 그러기에 선포의 사역자는 순수한 메시지가 왜곡되지 않게 현대의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운반선에 성공적으로 승선되도록 깊은 관심을 기울일 수 밖에 없다.
나가는 말
한국의 설교는 대부분이 목자 개인의 간증이거나 신념의 전달이다. 성경의 소리는 그 흔적을 찾기가 힘이든다. 어쩌면 말씀의 수호자는 없는 듯 한 느낌도 받는다. 그것은 교회 현실에 맞닥뜨려서 너무 쉬운 길을 찾으려는 습성이 있어서 인듯하다. 한국의 목사님들께서는 목회의 다른 부분들은 그래도 열심으로 하셨지만, 말씀에 있어서는 소흘했던 전통이 이제와서 그 심각한 결과를 거두어 들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앞으로 목회 현장에 맞는 말씀 연구 방법과 올바른 성경적설교의 모델이 많이 제시되어야 하겠다. 목사님들이 가지는 성경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 성도들이 다함께 연구하는 수준높은 성경연구의 습성이 생겨야 할 것이다. 그런 분위기가 한국의 교회 전체에 퍼져야 할 것이다.
신학교 때부터 성경을 대하는 자세를 제대로 가르쳐야 할 것이며, 목회와 연결되는 알맞은 성경적 설교와 연구법을 부지런히 개발해야 할 것이다. 더불어 경건에 힘쓰는 분위기를 형성하여 경건과 학문이 제대로 만나는 일치를 보아야 할 것이며, 그 길도 제시해야 할 것이다. 신학교에서는 성경중심의 설교와 목회를 연구하는 분과나 실천신학적 과목을 개설하여 신학생들에게 일찍부터 성경적 설교에 익숙하도록 배려해야 할 것이다. 그 길이 멀고, 힘들고는 하지 못할 이유가 되지 못한다. 오히려 지금의 현실적인 설교의 위기가 필연적으로 이러한 몸부림을 요구할 것이다. 이런 변화는 당연한 것이다.
끝으로 예배 설교가 교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지 못할 때 그 교인들은 영적 무기력속에서 세상을 향하여 어떠한 발전적인 소망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겠다. 설교는 교회의 생명력이다. 교회는 말씀을 통하여 사는 것이다.
한국의 오랜 문화를 업고 첨단을 달리는 오늘의 사회속에 십자가를 높이 세운 교회는 헤아릴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안에서 외쳐진 설교의 함성은 쉬임이 없다. 그런데 여기서 들려오는 우리의 설교자들의 비명은 실로 다양하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고통스럽게 생각하는 부분은 현대를 살아가는 양들은 그들이 좋아하는 기호식품만을 찾는다는 문제이다.
선포된 메시지가 그들의 입에 조급이라도 달갑지 않을 때 우리의 회중들은 차가운 반응을 보이는 것이 현실이다. 여기에 설교자들이 흔들리고 있다.
먹여야 할 먹이를 균형있게 먹이지 못한 채 그들이 원하는 것만을 찾아 먹여 편식을 시키고 있다. 그결과 오늘의 양들이 골고루 먹여주지 못한 설교 때문에 건강을 잃고 "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자"들이 되어가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이 "실상은 죽은 자"들이 구름처럼 모여 튼튼한 미랭의 주인들이 될 것임을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균형잡힌 설교의 목적을 보여주는 다양한 설교의 형태가 우리의 교회 가운데서 외쳐질 때만 이 편식 때문에 얻은 기형적인 모습도 치유될 것이다.
결국 사랑하는 양들을 살리고야 말겠다는 목적 의식이 분명한 설교자만이 언제나 건강한 양들을 섬길 수 있다. 헌명한 설교역의 당에는 항상 균형잡힌 영양이 공급을 위하여 필요한 식품을 찾아 식탁을 차리는 어머니의 남모른 수고의 땀이 바로 설교자에게 있어야 한다.
설교의 치유적 의미는 설교를 통하여 사람들이 구원을 재 확인하는 재충전의 기회를 준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자기 속의 죄의 모난 부분들이 설교를 통하여 씨서진다는 것이다. 죄용서의 감격을 맛본다는 것이다.
설교는 근본적으로 치유의 성격을 지니닌다. 그것은 곧 설교에서 목회자?은 치유가 일어날 수 있도록 깨어 기도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설교는 곧 우리 목회자들의 특권이니 만큼 겸손하게 주님의 부르심에 응해야 할 것이다.
[출처] [펌] 설교의 치유적 의미|작성자 우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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