論評 : "영성의 정의에 관한 선교신학적 고찰과 적용"
이 현모 교수(침례신학대학교, 선교학)
최근의 선교는 그 주관심사가 60년대에서 80년대 전반까지 지속되어지던 에큐메니칼 그룹과의 선교신학적 논쟁에서 미전도종족에 대한 새로운 강조와 세계복음화의 완수에 대한 주제로 많이 옮겨가 있다. 또한 풀러신학교를 중심으로 제삼의 물결운동이 일어나면서 이전에는 복음주의 중심그룹들이 주저하던 오순절 운동에 대한 복음주의적 이해가 크게 증진되었다. 이에 따라서 영적 대결(power encounter)에 대한 논의가 이제는 자연스러운 복음주의적 선교학의 한 부분이 되어져 있다. 그동안 선교사들에게 요구되어지는 영성 요구는 개신교 그룹의 선교이후 복음주의 계열에서는 당연한 자질로서 새로운 논의가 필요한가라는 의구심을 가질 정도였다. 그러나 점차 제삼의 물결과 영적대결에 대한 논의가 빈번해 질수록 우리는 영성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정의를 내려야 하는가, 그리고 그것을 선교의 실상황에 적용시키는 어떤 기준내지는 원리가 있는가라는 등의 의문을 품지않을 수없었다. 때로는 제삼의 물결에서 강조하는데로 신유와 축사의 능력이 영성인가, 아니면 오순절 계통에서는 성령의 역사라고 별로 보지않는 평범한 신앙의 삶 가운데서 영성을 찾아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생기게 되었다.
이런 시점에 정흥호 교수님에 의하여서 "영성의 정의에 관한 선교신학적인 고찰과 적용"이라는 논문이 발표되어진 것은 적절한 주제라고 생각이 되어진다. 특히 정흥호 교수님은 지금까지 발간된 영적전투에 대한 다양한 책들의 견해를 객관적으로 비교 평가한 책을 최근 번역한 경험도 있으셔서 이러한 주제에 대하여서 접근할 수 있는 기본 자료들이 충분한 저자라고 보인다. 이러한 배경이해를 가지고 정 교수님의 논문에 대해서 몇가지 논평을 더하는 영광을 누리고자 한다.
우선 발제되어진 논문을 전반적으로 읽을 때 상당히 많은 다양한 자료를 폭넓게 연구한 공로를 인정하지 않을 수없다. 본고에서도 보여주고 있는 것 처럼 영성에 대한 정의는 극히 다양하다. 이러한 주장들을 중세적 캐톨릭의 견해로부터 보수적 복음주의, 그리고 반대쪽 끝에 있는 해방신학적인 견해까지 폭넓게 접근한 것은 영성에 대한 기본 이해의 폭을 넓혀주는 공로가 있다. 그리고 다소 추상적이지 않을 수 없는 영성이란 개념을 나름대로 정의하려는 시도가 좋았다.
그러나 비평을 위해서 몇가지 본고의 내용에 대해서 비판적인 견해를 제시해 보고자 한다.
첫째로는 본고의 본론에 해당하는 "영성의 이해"라는 부분과 "영성에 관한 선교신학적 고찰'이라는 두 부분을 볼 때 다양한 학자들의 견해를 인용한 것은 좋지만 그러한 견해들에 대한 비판과 분석, 그리고 그에 따른 정교수님 자신의 정의가 분명하게 제시되어있지 않다. 얼핏보면 여러 학자들의 정의와 주장을 그냥 나열식으로 늘어놓고 마무리가 분명히 없이 끝난 느낌을 준다. 본고의 논지가 영성에 대한 나름대로의 정의를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정의가 좀더 결론적으로 명쾌하게 제시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느낀다.
둘째로는 세 번째 부분의 제목자체가 "영성에 관한 선교신학적 고찰"로 되어져 있는데 이곳에서 선교신학적 고찰이라는 것이 이 주제를 다루는 특별한 관점내지는 방법론을 의미한다고 이해되어진다. 그러나 정교수님께서 의미하시는 '선교신학적 고찰"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주제 서술의 방법에 어떤 특정한 선교신학적 관점이나 방법론을 도입하신 것인지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듯하다. 본인의 이해로는 선교신학적 접근방법은 기존의 다양한 신학적 견해들을 어느 정도 변증적인 방법으로 접근하는 것이라고 본다. 복음주의 선교신학이란 교회의 사명(mission of Church)이라는 의미의 선교에 관련된 주제에 대해서 기존의 다양한 신학견해들을 복음주의적 견지에서 변증적으로 변호하여서 자신의 개념이 성서적이고 타당함을 보이는 학문이라고 이해한다. 이러한 이해에서는 이곳에서 사용되어진 방법론이 선교신학적인 고찰이라고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약간 제시되어진다. 혹 다른 정의가 있다면 정 교수님이 사용하신 선교신학적이라는 의미의 정의를 논문중에 삽입해 주시면 좋을 것이라고 본다.
세 번째는 세 번째 부분에서 다른 세사람의 견해, 토마스 아캠피스, 루이스 쉐퍼, 그리고 도날드 도르의 견해에 대한 설명에서 얻어진 내용들이 "4. 선교인들 자신에게 적용되여야 할 영성의 문제" 라든지 "5. 나오는 말"등의 적용과 결론에서 사용되거나 그 논거의 기조로서 사용되어질 것을 기대하였는데 적용과 결론에서는 이 세 번째 부분에서 언급되어진 내용이 거의 사용되지 않은 듯하다. 대신에 다시 케네스 갱글의 주장을 인용하여서 설명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앞에서 긴 부분을 들여서 서술한 세사람의 견해가 이 논문에서 어떤 목적이었는지가 궁금해진다.
이러한 구조적 질문이외에 조금 세밀한 내용을 볼 때 또한 몇가지 질문이 있다.
첫째로는 3쪽에서 오성춘 교수의 글을 인용하여서 기독교의 영성은 "역사적인 예수의 삶과 인격과 정신을 본받아 살며 그의 성품"을 닮아 실천해 가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영성을 이렇게 정의한다면 이는 "성화"라는 개념과 무엇이 다른가? 영성은 그것이 반드시 신유나 축사등의 신비적 은사와 연관될 필요는 없다고 할지라도 "초월적인 하나님과 자연적 혹은 과학적 방법으로 설명되지 않는 관계를 가지는 능력"이라고 어느 정도 신비적 영역의 개념을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을 제기하여 본다.
둘째는 이미 앞에서 세사람의 견해에 대해서 비판이 없었음을 지적하였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도날드 도르의 영성에 대한 정의에 대한 정교수님의 견해를 묻고 싶다. 도르의 견해는 전반적으로 해방신학에서 주장하는 영성의 정의와 같은 주장으로 보인다. 해방신학자들은 영성의 정의를 "자의적으로 가난한 자들과 함께하며 형성하는 유대관계"라고 주장한다. 본고에서 밝힌대로 이들은 말로는 "종교적," "도덕적," "정치적" 관계라고 말하지만 이는 실제로는 민중들과 함께하는 정치적 의식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어지고 있다. 이에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영적인 개념이 거의 배제되어진 것인데 도르의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일만한 영성의 정의의 하나로 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세 번째로는 선교사들이 선교지에서 받게되는 스트레스로 인한 마음의 상처(trauma)의 해법으로 영성을 제안하셨는데 영성 개발과 훈련이 이러한 상처의 해법중의 하나이고 또한 커다란 요소임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영적으로 침체되지 않은 선교사들도 이러한 상처와 스트레스를 경험하지 않을 수없는데 스트레스와 영성이 본고에서 말하는 정도의 직접적인 관계가 되는지를 질문하고 싶다.
마지막으로는 본고의 결론이 선교사들에게 매일의 삶에서 영성을 위한 훈련과 그로 인한 성숙을 권하는 다소 상식적인 내용으로 끝맺은 것이 비평적인 내용을 다루어야 할 논문으로서는 약간의 취약한 면이 아닌가라는 것을 지적하고자 한다.
흔히 말되어지는 영성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분명한 성서적, 신학적 개념 정의는 꼭 필요한 과제임에 동의한다. 이를 위하여 본 논문이 제시한 견해들에서 많은 것을 새로이 배우게 되었음을 감사하며 간략한 논평을 마친다.
'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기독교 영성과 영성신학 (0) | 2012.08.10 |
---|---|
[스크랩] 타종교의 영성 (0) | 2012.08.10 |
[스크랩] 영성이란 무엇인가? (0) | 2012.08.10 |
[스크랩] 기독교 영성신학과 영성의 유형 (0) | 2012.08.10 |
[스크랩] 복음주의, 근본주의, 개혁주의 비교(신복윤 교수) (0) | 2012.08.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