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스크랩] 타종교의 영성

하나님아들 2012. 8. 10. 16:29

타종교의 영성

 

(안점식: 한국선교훈련원 교수)

* 2004년 3월 목회와 신학에 게재된 글입니다.

기독교의 영적 훈련에 타종교의 수행법들을 차용할 수 있는가?

  현대의 영성신학, 영성운동의 바람은 60년대 이후에 태동했는데 이제 그 바람은 한국 땅에도 상륙해서 90년대 이후에는 거세게 불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영성의 개념에 대한 정의도 다양하고 영성훈련의 방식도 교파에 따라서 제각각이다. 그런데 영성이라는 개념은 단순히 기독교에만 국한되어서 사용되어지지는 않는다. 영성이라는 개념은 타종교에도 적용할 수 있는 중립적인 개념으로 이해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과 종교다원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타종교의 영성을 말하며 타종교의 수행법을 영성훈련이라는 이름 하에 기독교적 영적 훈련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이 글에서는 영성의 개념에 관련된 논의나 영성 개념의 사용에 대한 정당성 여부 등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는다. 영성의 개념에 관련해서 필자는 개인적으로 영적훈련이나 영적성숙의 개념들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하지만 이 자체가 복잡한 논의이기 때문에 이 글이 목표하는 논의를 전개하기 위해서 여기서는 영성이라는 개념도 수용해서 사용하고자 한다. 이 글에서 초점을 맞추고자 하는 것은 우선 에큐메니즘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시도하고 있는바 타종교의 영성훈련방법을 기독교적 영성훈련에 수용하는 것과 로마 카톨릭의 수도원주의적 영성훈련을 개신교회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이다.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소위 기독교적 영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려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이 글에서는 성경적 관점에서 타종교의 영성과 성경적 영성을 비교해보고 타종교의 수행법과 기독교적 영적 훈련을 비교해보고자 한다. 동시에 다원적 종교의 전통 가운데 놓여있는 한국 기독교인들이 오해하기 쉬운 “영적임”에 대한 관념들에 대해서도 짚어보고자 한다.

  원래 “영성”이라는 개념이 성경에서 직접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에는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다. 성경에서 사용되는 것은 “영적”이라는 개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던져보아야 할 질문은 “성경은 어떤 사람을 영적인 사람이라고 하는가?” 라는 것이다. 성경적인 의미에서 “무엇이 영적인가”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큰 그림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영적인 사람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본래 의도하신 존재의 상태를 이루어내고 본래 주어졌던 사명을 수행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창세기 1:26-28은 인간 존재의 당위적 본질과 사명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피조세계를 관리하는 임무를 맡기셨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사건은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훼손하였고 피조세계를 관리하는 책임을 수행하는 것도 불가능하게 만들어놓았다. 죄의 결과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렸고, 자기 자신과의 관계, 타인과의 관계, 그리고 자연과의 관계를 깨뜨리게 하였다. 하나님의 형상 안에 있는 거룩과 사랑과 의와 기쁨과 평강 대신에 불경건, 미움, 불의, 슬픔, 불안이 인간의 내면세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의미에서 기쁨과 평강은 기본적으로 관계적인 것이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로 창조되어졌다. 영은 하나님과 관계하는 자리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영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을 때에만 영적일 수 있고 기쁨과 평강과 의로움을 누릴 수 있게 (롬14:17) 되어 있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자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서 영이 죽어 있는 자연인들, 타종교인들은 영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결국 타종교의 영성훈련법들, 즉 수행법들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야기된 결핍과 갈증을 반영하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데서 야기된 결핍과 갈증

  첫번째로 범신론적 신비주의로 분류될 수 있는 타종교에서 추구하는 궁극적 실재와의 합일, 우주와의 합일, 신인(神人) 합일, 천인(天人) 합일 등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깨어진데서 오는 인간의 영적 결핍과 갈증을 반영하고 있다. 이슬람의 수피즘이나 수도원주의에 나타나는 로마 카톨릭의 영성훈련 방법들 중에도 하나님과의 신비적인 합일을 추구하는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신비주의적 영성계발은 신비적 합일의 체험을 강조한다. 이러한 체험은 종종 몰아경, 무아경, 황홀경, 삼매경과 같은 변성의식(trance) 상태로 묘사된다. 이러한 범신론적 합일사상에서는 궁극적 실재와 수행자 사이의 정체성의 구분을 상실하는 몰아(沒我)적 상태에서 인간이 곧 궁극적 실재가 되고 신이 되는 신인합일을 경험한다.

  성경적인 “하나됨”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합일이라는 개념보다는 연합이라는 개념이 더욱 적합하다. 연합은 정체성의 상실이 수반되지 않는 상태에서 성령과 연합하고 (고전6:17) 성령의 다스림 하에서 하나님의 의지와 나의 의지가 일치하게 되는 것이다. 성령충만의 온전한 연합에서는 인간은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방식대로 성경적 세계관에 입각해서 생각하게 되고, 하나님이 느끼시는 방식대로 느끼게 되고, 하나님이 하시고 싶은 일을 하기 원하는 방향으로 지정의(知情意)를 사용하게 된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깨어진 데서 야기된 결핍과 갈증

  두 번째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깨어진 데서 야기된 결핍과 갈증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다. 인간의 타락은 수치감, 두려움, 죄책감, 열등감, 욕구의 좌절과 같은 고통을 가져다주었는데 이 때문에 인간은 내적 고요함과 기쁨, 평안함, 의로움에 대한 갈망을 갖게 된다. 타종교들은 바로 인간의 마음의 수양, 마음공부, 자아의 파쇄 등에 관심을 가져왔다. 사람들은 고통이 욕구와 관련되어 있고 욕구의 좌절에서 고통이 발생하는 일반적인 심리현상을 관측하게 되었다. 모든 종교는 고통받고 있는 자아의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해결방식을 제시하려고 한다. 대체로 범신론적 신비주의적 종교에서는 욕구하는 자아가 저급한 물질세계에 속해 있으므로 육체를 억압하는 금욕주의를 통해서 고통에서 벗어나서 진정한 자아의 해방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혹은 헬라의 카포크라테스나 힌두교의 좌도파 등 영지주의 좌파는 오히려 욕구의 실현을 통해서 자아의 해방을 누릴 수 있다는 생각으로까지 나아간다.

  범신론적 신비주의에서는 불교의 제법무아(諸法無我)설에서처럼 ‘나’라고 하는 정체성 자체를 부정함으로써 욕구하는 자아가 받게 되는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이러한 자기부정은 성경이 말하는 자기부인과는 다르다 성경에서 말하는 자기부인은 성령의 내주(內住)를 전제로 한 것이다. 따라서 자기부인과 성령충만은 동전의 앞면 뒷면이다(갈5:16-17). 성경의 자기부인은 자기 정체성의 부정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성령의 다스림 하에 자기를 두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 스스로 자기를 다스리는 것을 넘어서 궁극적으로는 성령의 다스림 하에 자기를 두는 것이다. 여기에 불교나 힌두교의 마음공부가 성경적 마음 다스림과 다른 점이 있다. 신자에 대한 성령의 내주하심은 타종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기독교의 톡특한 약속이다. 따라서 성경적 의미에서 영적인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고 (마16:24) 성령충만한 사람이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마음에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인간관계의 갈등 문제와 통제할 수 없는 환경의 문제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타종교에서 마음을 다스리는 방식들 중에는 대체로 두드러진 세가지 방식이 관찰된다. 하나는 자신의 내면의 의식과 감정의 변화를 그대로 직면하여 관조하는 훈련이고, 다른 하나는 어떤 물체나 신체의 한 부분 혹은 호흡에 집중하는 훈련이다. 나머지 하나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일을 통제하려 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함으로써 집착을 끊는 훈련이다. 이러한 것은 주로 마음의 작용을 정지하거나 조작함으로써 마음의 고통을 떨쳐내고 평안함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러한 훈련은 일시적으로 효과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성경적 마음 다스리기는 자신의 마음을 조작하고 통제하는데 있지 않으며 궁극적으로 관계를 회복하는데 있다.

   성경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질서와 원리를 순종함으로써 마음의 고통을 극복하는 길을 제시한다. 우선 인간관계의 갈등문제에 있어서 성경은 우리의 의식과 관념을 단순히 조작하는 것을 넘어서 올바른 관계의 회복을 촉구한다. 즉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기 전에 먼저 갈등이 있는 자와 화해하는 (마5:23-24) 관계회복의 행위가 있어야 한다. 잠언과 같은 지혜서는 어떻게 인간관계를 맺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잘 말해준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환경이나 미래에 발생할지도 모르는 예기치 않은 통제 불가능한 일에 대해서도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할 때 하나님이 평강을 주장하신다는 (빌4:6-7) 것이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는 통제 불가능한 환경과 예기치 않은 미래의 일에 대한 염려라는 마음의 고통을 해소하는 올바른 방법이다. 성경에서 염려를 극복하는 방법은 단순히 스스로 마음을 조작하는 것을 넘어서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평강을 주장해주시는 측면이 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바로 믿음이다. 하나님은 믿음을 의롭게 여기시며(롬4:5,9) 믿음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 (히11:6). 믿음만이 의인이 사는 길이고 (롬1:17; 히10:38) 하나님은 의인을 붙드시고 요동함을 허락지 아니하신다 (시55:22).

  타종교의 영성수련의 방법들 중에는 이처럼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생략하고 고통을 느끼는 자신의 자아를 조작함으로써 되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성경도 마음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한다(잠4:23).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마음을 지키는 것은 단지 혼(魂)의 차원에서 나의 생각과 감정을 조종하는 차원은 아닐 것이다. 마음을 지키는 것은 이 세계의 질서와 원리에 대해서 거짓, 즉 왜곡된 세계관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지정의의 관점에서 이 세계를 보고, 하나님, 인간, 자연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다.

  타인과의 관계가 깨어진 데서 야기된 결핍과 갈증

  세 번째로 타인과의 관계의 깨어짐에서 오는 결핍과 갈증이다. 소위 사회적 영성이라고 불리는 것이 이 범주에 들 수 있다. 이것은 기독교와 타종교에서, 그리고 휴머니즘에서도 공히 나타난다. 이것은 마더 테레사처럼 구제와 희생의 사회사업의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고 해방신학처럼 사회의 구조적 악과 싸우는 저항적 영성의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다. 유교의 내성외왕(內聖外王) 혹은 수기치인(修己治人)과 같이 통치이념으로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다.
  사회적 영성은 참된 “영적” 태도에서 배제될 수 없는 것이다. 야고보서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 (약1:27)에 대해서 말한다. 그 중 하나는 수직적인 것이고 하나는 수평적인 것이다. 수직적인 경건은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거룩이고, 수평적인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는” 사랑이다. 거룩이 하나님의 본체적 속성이라면 (사6:3; 계4:8) 사랑은 피조물과의 관계적 속성이라고 (요일4:16) 할 수 있다. 영이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도 거룩함과 사랑으로 충만해있을 때 그를 “영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거룩과 사랑은 경건의 모양을 넘어선 능력이 있는 경건이다 (딤후3:5).

  샤마니즘의 영향을 받은 한국 기독교인들은 거룩보다는 초자연적 영계와의 직통계시와 같은 것을 수직적 영성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예언과 치병의 능력과 같은 초월적 은사를 가진 사람을 영적인 사람이라고 단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무당도 그런 일은 할 수 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하나님 사랑은 언제나 형제사랑, 이웃사랑으로 검증되어진다 (요일4:20; 요15:12). 신비주의적 영성은 종종 황홀경 무아경과 같은 체험에 초점을 맞추지만 이러한 체험이 곧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있음을 말해주지 않는다. 변화산에서의 놀라운 체험(막9:1-8)은 그곳에 안주해도 되는 최종 목적지가 아니다. 아무리 황홀한 경험이라도 그것은 영적성숙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변화산상에 수도원을 짓고 그러한 황홀한 체험을 날마다 추구하는 존재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산 아래 현실도 돌아와서 하나님의 계명을 실천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믿음, 순종, 거룩함 등으로 나타나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전제되어 있지 않은 사회적 영성은 자기 의나 휴머니즘에 불과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범신론적 신비주의는 초월성만 강조될 뿐 역사성은 중요하지 않다. 이 세상은 해탈함으로써 초월해야 할 어떤 곳이기 때문에 이 세상의 사회와 역사에 대한 관심은 결핍될 수밖에 없다. 사회변화와 역사의식 등은 오히려 해탈을 방해하는 집착거리가 될 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범신론적 신비주의에 속한 타종교들에서 사회적 영성을 잘 나타나지 않는다. 물론 대승불교의 보살 사상에 오면 공(空)의 견지에서 정토(淨土)와 예토(濊土)를 분별하지 않음으로써 이 세상 안에서의 실천의 가능성을 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영성은 단순히 자비를 행하고 선업(善業)의 공덕을 쌓는 일방적인 것이지 타인과의 관계 회복이라는 상호적인 영성은 아닐 수 있다.

  자연과의 관계가 깨어진 데서 야기된 결핍과 갈증
  네 번째로 자연과의 관계의 깨어짐에서 오는 갈증으로 말미암은 영성이다. 이것은 아씨시의 프란치스꼬처럼 자연과의 친밀함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생태신학 등과 결부되어서 소위 생태적 영성의 개념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타종교에서도 궁극적 실재와 인간, 그리고 자연의 삼자(三者) 간의 관계에 대해서 특별히 초점을 맞춘다. 특별히 중국문화권에서는 천(天), 지(地), 인(人)이라는 개념으로 이 삼자를 설명해왔다. 일반적으로 동북아시아의 범신론적 신비주의에서는 천(궁극적 실재)은 지(대자연)를 초월한 어떤 존재가 아니다. 대자연이 가장 궁극자이다. 그러므로 천지의 개념은 거의 동반적으로 나타난다. 자연과 인간 또한 별개의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소우주로서 대자연의 일부분이고 자연과 동화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인간은 또한 대자연과의 합일을 통해서 궁극적 실재와의 합일 즉 천인합일(天人合一)을 체험한다. 장자(莊子) 등에서 나타나는 만물과의 일체감이나 물화(物化)의 개념은 이러한 자연과의 합일을 묘사한다. 범신론적 신비주의에서 나타나는 만물의 하나됨은 인식주체인 인간과 인식대상인 사물이 각각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함으로써 일어나는 주객합일(主客合一)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만유의 통일은 만물이 각자의 개체성, 혹은 정체성을 상실하고 하나가 되는 범신론적 합일주의와는 다르다. 성경적 관점에서 만유의 통일은 (엡4:6) 만물을 붙드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중심으로 만물이 하나로 묶여 있음을 의미한다.

  성경적 세계관의 관점에서 인간과 자연은 공히 피조물이지만 범신론적 신비주의 종교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인간과 자연이 동격은 아니다. 인간은 자연 위에서 자연을 관리하는 직무를 맡았다.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피조세계를 관리하는 관리권을 맡았지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자연을 남용하도록 허락받은 것은 아니다. 그런데 서구에서 세속주의의 등장은 초자연을 배제함으로써 오직 인간과 자연과의 수직적 질서만 남게 되었다. 그리하여 인간의 욕구를 위해서 자연을 남용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일부 생태신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환경오염과 생태계의 문제는 유신론적 신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세속주의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생태적 영성운동 중에는 뉴에이지 생태운동처럼 범신론적 신비주의에 기초한 것들도 많이 있다.

  타종교의 영성과 기독교적 영성의 차이점
  신학과 영성의 분리는 앎에 대한 헬라적 관념을 수용한 서양의 스콜라주의적 아카데미즘이 필연적으로 만들어낸 소산이다. 그러나 동양의 전통은 앎과 삶, 지(知)와 행(行)을 분리하지 않는다. 이것은 성경적 전통이기도 하다. 불교의 각(覺)이든 유교의 학(學)이든 그것이 추구하는 바는 단순히 지식으로 아는 것을 넘어서 체득(體得)하고 내면화해서 총체적 삶으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동양은 이론과 실천, 지와 행의 일치라는 측면에서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한편 동양의 체험주의는 지나치게 주관적으로 흐를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기본적으로 기독교도 체험의 종교이지만 동시에 계시의 종교이며 정경(正經;canon)에 기초한 교의(敎義)의 종교이다. 체험과 계시가 충돌하면 체험을 포기해야 한다. 체험을 포기하지 못하고 계시를 자의적으로 자신의 체험에 짜맞추는 식으로 해석하면 이단이 된다. 이러한 체험주의 위험은 카톨릭의 수도원주의의 영성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된다. 영성신학이 신학과 영성의 일치를 추구하는 것은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영성신학이 지나친 체험주의에 기초하고 있을 때 그것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지나친 자의적 주관적 해석을 양산해낼 수 있다. 그것은 객관적인 말씀의 학문적 연구는 있지만 영성과 삶이 없는 스콜라주의적 아카데미즘만큼 나쁜 것이다.

  체험주의에 따라오는 관념 중 하나는 경지(境地)의 개념이다. 즉 체험에는 어떤 단계가 있고 어떤 단계에 도달하면 그 이하로는 떨어지지 않는 것처럼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 한국의 기독교인과 같이 동양의 수도(修道) 문화권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은연중에 이러한 경지에 대한 관념이 박혀있다. 그러나 성경적 영성에는 경지가 없다. 언제든지 자기부인을 중지하고 성령의 다스리심을 받지 않으면 매우 형편없는 상태로 떨어질 수 있는 것이 인간존재의 실상이다. 성경적 영적 성숙은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며(눅9:23), 날마다 죽는(고전15:31) 진행(ongoing) 과정이며 선줄로 생각하면 넘어지기 때문에(고전10:12) 늘 깨어서 있는(골4:2) 각성을 요구한다.

  수도(修道) 문화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수행행위 자체의 강도가 세고 금욕적일수록 영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기도를 많이 하고 성경을 많이 읽는 사람이 영적인 사람이 될 가능성은 절대적으로 높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많은 기도를 하고 성경을 많이 읽는다는 사람들 중에 균형 잡힌 영성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종종 관측되어진다. 많은 기도와 성경읽기가 곧 그 사람을 영적인 사람으로 보증해주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성경적 영성은 순종의 행위에 의해서 완성되어지기 때문이다.  

  타종교의 영성훈련은 도교(道敎) 식의 분류법대로 말하자면 조심(調心), 조식(調息), 조신(調身) 법으로 나눌 수 있다. 즉 마음, 호흡, 그리고 신체를 다스리고 조화롭게 하는 것이다. 영, 혼, 육의 삼분법적 견지에서 본다면 조심법은 혼에서 출발하는 방법이고 조신법은 육에서 출발하는 방법이고 조식법은 혼과 육을 연결하는 고리에서 출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심신상관적(psycho-somatic)이라고 할 때 심(혼)과 신(육)을 연결하는 고리에 호흡과 관련되어 있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혼과 육에서 출발하는 육체의 연습이 약간의 유익이 있겠으나 (딤전4:8) 이러한 훈련은 영에서 출발하지 못한다. 영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과 관계하는 자리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성령이 내주하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없이는 인간의 영은 기능을 하지 못하고 죽어있다. 영이 죽어있기 때문에 타종교에는 영에서 출발하는 훈련이 있을 수 없다. 영에서 출발하는 성경적 영적훈련의 요점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에서 영적인 사람은 영을 좇아 행하는 사람이다 (갈5:16). 성령충만한 사람의 내적 특징은 지정의를 성령의 다스림에 복종시키는 것이며 외적 특징은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자연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다. 생각은 감정을 발생시키고 감정은 의지를 움직여서 말과 행동을 하게 한다. 말과 행동은 덕(德)이 될 수도 있고 죄가 될 수도 있다. 성령이 우리의 지정의(知情意)를 다스리면 지정의가 올바른 방향으로 기능하여서 하나님이 생각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知) 하나님이 느끼시는 것처럼 느끼고 (情) 하나님이 하시고 싶은 일을 하고 싶어하게 (意) 된다. 이러한 사람이 성령충만한 사람이고 영적인 사람이다.

  성령충만하고 영적인 사람의 출발점은 하나님의 생각으로 우리의 생각을 채우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으로 채워지는데 있어서 핵심은 하나님 말씀의 묵상이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하나님의 생각이 온전히 반영되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해서 (수1:8; 시1:2) 내면화하는 것이 성경적 영성의 출발점이다. 묵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반추하여서 마음에 새기는 것이다. 어떤 생각이든 반추될 때 그 생각은 증폭되어지며 그에 따르는 감정이 발생한다. 감정이 증폭되어지면 반드시 말이나 행동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성경적 묵상법의 종결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수1:8) 순종이다. 묵상과 순종은 성경적 영성훈련의 핵심이다. 이처럼 성경의 묵상법은 의식에서 출발해서 순종을 통해서 체험되어진 것이 무의식에 까지 남게 된다.

  타종교의 수행법은 마음과 호흡과 신체를 조종하여서 곧바로 무의식으로 퇴행하여 자기정체성의 상실과 함께 황홀경, 무아경, 삼매경, 몰아경과 같은 변성의식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얻어지는 평안과 기쁨은 참된 것이 아니다. 참된 기쁨과 평안은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주어진다 (요15:11; 14:27). 왜냐하면 참된 기쁨과 평안은 의식이나 관념의 조작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관계에 기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적인 사람은 성령의 다스림 하에 지정의를 의탁하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아서 (롬12:2) 세상과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영적인 사람은 하나님이 보시는 것처럼 자연, 사회, 세계, 역사, 개인사를 볼 수 있는 사람이다. 즉 영적인 사람은 성경적 세계관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감각적 실재, 즉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을 넘어서 영적 실재를 볼 수 있는 사람이다. 나아가서 영적인 사람은 이러한 성경적 세계관에 입각해서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자연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사람이다.

  로마 카톨릭의 수도원주의나 타종교의 수행법은 수용할 수 있는가?
  로마 카톨릭의 수도원적 영성훈련법이나 타종교의 영성훈련법은 전혀 수용할 수가 없는 것일까? 육체의 연습에 전혀 유익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약간의 유익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 혼과 육의 차원에서 출발하는 영성훈련의 테크닉 중에 어떤 것은 일시적인 효과를 줄 수 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과의 불편한 관계 때문에 마음에서 화가 난다면 그러한 감정과 생각의 흐름을 관조함으로써 화를 가라앉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자기멸시의 관념을 만들어냄으로써 효과를 볼 수 있다. 거기에는 마음의 메카니즘에 관련된 일반은총적인 면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는 것은 성경적 영적훈련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인간관계의 갈등이 있을 때 화해하는 행동이 필요하고 관계를 회복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한다. 자기멸시도 자신이 만들어낸 관념적 차원에서는 그 효과가 그리 오래가지 못할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자신의 죄인됨을 더 깊이 자각함으로써 일어나는 근원적인 겸손에 기초해야 한다.

  타인을 통제하고 미래를 통제하려고 하는데서 오는 마음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 통제하려는 태도를 포기할 때 일시적으로 마음의 평안을 갖는 것은 일반은총적인 체험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깊이 인정하는 올바른 태도 없이는 그러한 단순한 마음의 조작은 오래가지 못할 수도 있다. 화가 났을 때 운동을 하는 것도 일종의 조신법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것이 일시적인 효과를 준다고 해도 궁극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혼과 육에서 출발하는 것이 일반은총적인 요소가 있고 따라서 약간의 효과가 일시적으로 있다고 해도 이러한 방법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의존하게 된다면 더욱 근본적인 방법인 영에서 출발하는 영적훈련의 기회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참된 영적훈련은 영에서 출발하는 것이어야 한다. 영에서 출발한다는 것은 성령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고 관계의 회복에서 출발하는 것이고 이를 위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요15:10). 그것은 바로 회개, 화해의 시도, 원수를 갚으려 하지 않고 도리어 축복해줌과 같은 사랑의 행위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사랑은 기본적으로 관계적이다. 그것은 모든 깨어진 관계를 회복해주는 영적 원리이고 실천적 원리이다. 그러므로 계명을 지키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는 길이다 (요15:11).

  수도원주의 등에서 나타나는 상상력의 사용은 주의를 요한다. 힌두교나 도교 등에서도 구상화(visualization)를 통한 수행은 전통적으로 행해져 왔다. 그리고 이러한 수행은 종종 신접현상과 유사한 현상을 야기시킨다. 상상력의 사용은 인위적인 내면화의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실제적인 체험을 통해서 보고 들은 대신에 가상적으로 체험하여 보고 들은 것을 무의식에 각인시키는 내면화의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 말씀은 실제적인 삶에서의 순종을 통해서 나의 삶의 현장 안에서 내면화되어져야지 가상세계를 그려내는 것에 집중할 때 실제적인 삶에서의 순종에 무관심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상상력은 의식과 무의식의 길목으로 있다고 생각되어지는데 상상력의 사용 자체는 중립적일 수 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상상력의 사용은 설사 성경의 사건을 그려내는 경우라 할지라도 그것이 단순히 그 때의 정황을 깊이 고려해보는 것을 넘어서 구상화의 형태로 억지로 나아갈 때 사단의 공격을 받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굳이 상상력을 사용해야 한다면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더 깊이 요청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궁극적으로 나의 순종을 통해서 나에게 새롭게 체험되어져야 하지 상상력의 사용에 의해서 체험되어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삶에서 순종과 행함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은 상상력의 사용의 필요성을 많이 느끼지 못할 것이다.

  맺음말

  다시 창세기 1:26-28의 큰 그림으로 돌아와서 본다면 영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 그리스도의 형상이 더욱 많이 회복되어진 사람이며 거룩과 사랑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거룩과 사랑이 충만한 영적인 사람들이 이 땅에 충만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도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이러한 영적인 사람들이 이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기 원하신다. 그러므로 참된 영성은 사명의 수행을 배제하지 않는다. 영적인 사람이 하나님께서 사명으로 주신 문화명령과 지상명령에 적극적으로 순종하지 않는 것을 상상할 수는 없다. 하나님과 어떤 친밀감을 누리고 어떤 일치감을 누리는 관계인지는 몰라도 바로 거기에서만 머문다면 그는 영적인 사람은 아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또한 사명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에는 가르침과 교훈이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가르침과 교훈과 깨달음을 본질로 하는 종교가 아니다. 모든 타종교들이 가르침과 교훈을 본질로 한다. 기독교는 대속의 종교이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가르치고 교훈을 주고 깨달음을 주는데 궁극적으로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대속에 있다(마20:28). 대속은 인간의 죄로 인하여 깨어진 관계들을 회복함으로 하나님이 원래 의도하신대로 우주의 질서와 원리로 돌아가는 기반이다. 그러므로 회개 또한 관념과 의식의 차원이 아니라 행위의 수정과 관계의 회복을 위한 순종적 실천을 요구하는 것이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영적인 사람은 이 대속 사역의 반석 위에서 관계를 올바르게 회복한 사람이다. 영적인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경외감과 친밀감을, 자기자신 안에서는 평안, 기쁨, 내적 고요함을, 타인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사랑과 관용의 성숙함을, 사회에 대해서는 정의로움과 공평무사함을 자연에 대해서는 긍휼함을 가지고 관계를 맺을 것이다. 영적인 사람은 안으로는 평강(shalom)을 실현하고 밖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 성경적인 “영적임”은 포괄적이고 균형잡히고 실천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영적 훈련이 한 측면에 치우치거나 실천적이지 못할 때 사람들은 갈증과 결핍을 느끼고 타종교의 수행법이나 성경 밖의 방법에서 소위 영성훈련을 하고자 할 것이다.

  기독교인은 진리를 찾아서 헤매는 구도자(求道者)도 아니다. 어떤 체험적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 발버둥치는 수도자(修道者)도 아니다. 우리는 이미 진리의 길을 얻은 득도자(得道者)이고 이미 깔려있는 그 길 위를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부지런히 걸어가는 행도자(行道者) 이다.

출처 : 산족선교
글쓴이 : 일오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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