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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구약 예언자 연구

하나님아들 2013. 8. 16. 15:10

구약 예언자 연구

 

김 문 영

 

 

제 1 장  서론

 

1. 문제제기

 이스라엘 종교사에서 예언자들이 차지한 비중은 대단한 것이었다. 구약의 3분의 1이 예언자들에 의해 쓰여졌고 이 예언 운동은 아스라엘 역사에 줄기차게 나타났고 가장 놀라운 현상이었다. 예언자는 어떠한 특별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사명자였다. 예언자의 사명은 직접적인 영감으로써 그에게 전달되었고,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있는 하나님의 대변자로 생각했다. 또한 예언자들은 자신의 직무와 영감이 야훼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것으로 확신했었기 때문에, 자기 시대의 종교 및 사회상을 고발함으로 조금도 두려움이 없었다.

 이스라엘 예언은 이스라엘 야훼 종교의 특별한 현상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다른 민족에게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다. 예언 운동은 그 내용과 형태의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많은 민족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예언자들의 생성의 동기는 신회관계의 수평선에서 찾아야 될 것인데, 말하자면 인간의 가는 길과 생각이 하나님에게서 끊어질 때, 또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와의 사귐으로서 초대하실 때 예언자의 출현을 기대케 되는 것이다. 근대에 예언자의 생성을 오직 제의적 배경에서만 보려는 학자들의 견해도 있지만 예언자 케리그마의 발단점은 제사제의에 그 발단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내지 윤리적 관점에서 보아야 될 것이다.

 구약 예언자 연구에 있어서 많은 연구들을 수집 정리함으로써 구약 시대에 활동한 많은 예언자들에 대한 보다 많은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에 나타난 이스라엘 종교사적인 면에서 예언자에 대한 용어는 물론이거니와 시대의 역사적 배경과 함께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의 예언의 위치와 기능을 고찰하게 되면 많은 예언자들이 당시의 시대적 상활 속에서 어떻게 활동하였으며, 그 당시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으며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해 주고 있는가에 대해서 연구 고찰해 보아야 될 것이다.

 

2. 연구의 목적

 구약을 읽으면서 우리는 구약 속에서 많은 예언자들을 보게 되면 많은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그 말씀을 백성들에게 선포하였다. (혹은 왕이나 그 밖의 정치, 종교지도자들에게 선포하였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구약 성서의 3분의 1이 예언자들에 의하여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종교사에 있어서 예언자들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다.

 구약 예언자들에 대해서 연구 고찰해 봄으로써 우리는 과거 이스라엘 종교사회에서 예언자들의 활동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알 수 있으면, 예언자들이 하나님께 어떻게 부름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사람들에게 선포하였으며 예언자들이 선포한 예언이 이스라엘 사회속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였으며, 사회 속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가를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고대 근동 세계 속에서,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예언 활동에 있어서 주변 이방 종교들이 끼친 영향은 어느정도 였을까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연구 고찰해 봄으로써, 주변 이방 민족들이 이스라엘 종교에 끼친 영향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예언자들의 활동을 연구해 봄으로써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어떻게 나타났으며,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공의와 그분의 자기 백성들을 향한 무한하신 사랑을 깨달을 수 있으며, 이스라엘 역사 속에 예언자들의 등장은 최종적으로 오실 메시야의 예표었으며 이는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온 인류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서 구약 예언자를 연구하는 목적은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많은 예언자들을 통하여 섭리 역사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오늘날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역사하심을, 먼저 예언자들의 활동 속에서 깊이 인식함으로써 더욱 더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이 사랑을 전파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3. 연구의 방법 및 범위

 이스라엘 종교사에서 구약 예언자에 대한 연구를 함에 있어서 기본적인 자료인 구약 성서를 비롯하여 고대 근동 지역에 대한 역사를 밝혀주는 고고학적인 자료들과 인류학 및 사회학, 종교학 등의 자료의 뒷받침에 의하여 오늘날 구약 예언자에 대한 연구는 많은 성과와 발전을 이룩하여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국내 신학계에는 아직도 이스라엘 종교사와 그 안에 속한 예언자에 대한 연구가 부진한 가운데 외국 신학자들의 번역서뿐만 아니라 국내 신학자들의 연구 논문이나 저술도 부족한 가운데 있다. 이러한 가운데서 본 논문은 여러 자료를 수집하여 서술하려 하며 연구 방법에 있어서 이스라엘 종교사에서 구약 예언자들의 예언 운동에 가나안 이방 종교를 비롯하여 주변 이민족들의 종교 즉 다시 말해서 고대 근동 종교와 근동의 예언 활동이 이스라엘 종교의 예언에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끼친 영향과 아울러 이스라엘 종교 사회에서 예언자들의 활약으로 인한 업적과 그들이 이스라엘 사회와 국가에 끼친 영향들을 연구 고찰해 보고자 하며 연구 범위에 있어서 구약 예언자들의 활동을 서술하는데 있어서는 그 범위가 사실을 족장 시대에서부터 시작되어 모세시대와 사사 시대를 거쳐서 왕국 시대의 예언 운동이 서술되어야 하겠지만 본 논문에서는 이스라엘 야훼 종교의 체계적인 성립과 발전이 시작된 왕국 시대의 예언 활동부터 서술하려 한다.

 왕국 시대의 예언 운동은 궁정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제 2 장  예언자에 대한 용어

 

1. 예언자

 구약 에브라임 전승에 가장 흔히 나타나는 중재자의 명칭은 나비 즉 “예언자”이다. 이 명칭은 다양한 명사형으로 에브라임 문한에 200여 회 이상 나타나는데, 그 대다수는 신명기 역사서와 예레미야서에서 나온다. 이에 반하여, 에브라임 전승 외에서는 바빌론 포로 이전의 예언적 문헌에 약 30회 가량만 나타나고, 그 중에 17회는 에스겔서에 나오는데 이 책 역시 에브라임의 다른 특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 호칭은 포로기 이후의 문헌에 산발적으로 나타나고, 열왕기서에서 인용한 구절에 몇 번 나오기는 하지만, 특히 역대기에서 많이 사용된다. 이러한 수치는 나비라는 호칭을 에브라임 전승만이 사용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 호칭에 예언에 대한 그 전승의 견해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시사하여 준다.

 불행하게도 나비라는 호칭 자체는 이 호칭이 붙여진 인물들의 특징에 대하여 거의 알려주는 바가 없다. 이 호칭은 성서 밖에서 사용된 예가 드물기 때문에 그 용례도 그 의미를 연구하는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으며 나비라는 단어 자체의 어원도 불확실하다. 나비는 아마도 “부르다, 알리다, 명명하다”라는 뜻을 가진, 아카디아어 동사인 나부와 연관된 것 같으나, 그 어형이 능동적인 의미를 가졌는지 수동적인 의미를 가졌는지는 불확실하다. 그런데 아카디아어 자료에 의하면 수동형의 해석을 지지하는 듯하다. 이러한 해석을 받아 들이면 이 명칭은 ‘부름을 받은 자’를 언급하는 것일 것이다. 만약에 아카디아어와 히브리어 명사인 나비가 연관이 있다면 이 예언자의 호칭도 또한 부름 받은 자를 가리키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구약성서에서 흔히 사용되는 히브리 명사의 기초가 되는 언근의 원래의 의미를 확실하게 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이것을 B.C. 1천년기 중기의 예언자에 대한 기본적인 관념의 결정적인 증거로 취할 수 있을 것인가? 오랫동안 사용되어온 흔한 말들은 어원학적으로 파악하기가 어렵다. 비록 어원이 밝혀진다 하더라도 그러한 단어들은 적어도 그 어원만큼이나 중요한 의미있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 여기서 핵심이 되는 것은 예언자라는 단어의 역사이다. 우리는 고대 이스라엘의 공동체 안에서 등장하였고 역할을 했던 예언자를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2. 선견자

 히브리어 ‘호제’와 ‘로에가 한글 개역 성서에는 선견자로 번역되었다. 구약의 여러 곳에서 문맥상 두 단어가 다 예언자라는 말과 병행되어 사용되고 있다.

 에브라임 문헌은 선견자라는 호칭을 사무엘에게만 적용시키고 있으며, 이 경우에서 조차도 이 호칭은 사울이 잃은 나귀를 찾는 오래된 이야기에만 국한되어 사용된다. 사울 시대로부터의 고대 에브라임 전승을 실제로 반영하고 있는 이 이야기에 따르면, 선견자는 중재자로서 하나님께 대한 백성들의 질문을 묻기 위해 그에게 찾아갔다. 사례에 대한 보담으로 선견자는 그들이 원하는 정보를 얻기 위하여 알려지지 않은 어떤 방법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선견자의 직무는 사무엘상 9:9에 설명체로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는데, 거기에서 후기 에브라임 저자들은 그 고문체의 호칭에 대한 의미를 해석해 놓았다. 즉 그 해설은 “옛적 이스라엘에 사람이 하나님께 가서 묻고자 하는 자를 옛적에는 선견자라 일컬었더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설명은 이 해설가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선견자라는 호칭이 사용되지 않고 있었으며 이 사람이 가진, 하나님께 물어 보는 기능이 예언자에게로 넘어 갔음을 나타내 준다. 사무엘상 9장은 또한 선견자가 때때로 청탁받지도 않은 신탁을 전하였으며, 그가 제의와도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그러나 제의에 대한 이러한 언급들은 이 이야기에 삽입된 것 같다. 왜냐하면 후기의 전승은 사무엘을 제사장과 예언자로 함께 보고 있으며, 또한 그 구절에서 다른 선견자들은 제의에서 어떠한 역할을 담당했음을 실제로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로에와 함께 선견자로 번역된 히브리어 호제는 “보다 혹은 환상을 갖다. 활홀경적으로 경험한다”라는 뜻의 동사 hazah의 분사형이다. 이 동사와 명사형은 환상을 뜻하는 문맥 속에서 나타나므로 hozeh를 환상을 통하여 계시를 받은 자로 생각할 수 있다. 이 명칭은 유다인 저자에 의해 일차적으로 사용되었으며 거의 항상 그 신분이 유다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에게만 사용된 것이다. 아모스 7:12에 보면 아모스는 북쪽 제사장 아마시야에 의해 선견자로 불리워졌고, 미가 3:7의 선견자도 예루살렘의 왕조 신학의 옹호자에게 적용되었다.

 이사야는 이 호칭을 예루살렘에 있는 예언자들을 말할 때 두 번 사용하였다. 역대기에 반영된 유다 전승들에 의하면, 선견자들은 특히 통일 왕국 시대에 유다에서 활동하였지만 예언서에는 이 중재자들이 후기에도 여전히 유다에 존재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역대기 기자의 증거대로 선견자는 중앙의 중재자였음이 분명하다. 갓은 다윗의 선견자, 또는 왕의 선견자로 불리운다. 갓이 가졌던 중앙에서의 신분은 그가 다윗 통치 기간을 기술한 공식적인 역대기의 저자로 알려진 것과, 그가 성전 예배 공동체에서 주된 역할을 했다는 사실로써 더욱 잘 드러난다. 헤만과 여두둔에게도 또한 왕의 선견자라는 호칭이 주어졌는데, 이들은 아삽과 함께 노래하는 레위인들을 조직하는 일에 참여했다. 그는 솔로몬과 여로보암의 행적을 다룬 그의 묵시를 모았고 르호보암의 통치에 관한 연대기를 기록했다고 한다.

 역대기 기자가 선견자들을 성전 예배 조직의 일원으로 묘사한 것이 역사적 정확성과 함께 그들이 유다의 중앙 사회 구조에 속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선견자들이 독특한 행동 특성을 소유했는가의 여부를 결정하기란 불가능하다. 미가 3:7에서 “선견자”란 단어가 술객이란 단어와 시적 병행구로 쓰여진 사실은 선견자가 그의 신탁을 얻기 위하여 점을 사용했다는 것을 지적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증거는 확실치 않은데, 왜냐하면 예루살렘 저자들은 선견자란 말을 예언자, 선견자들과도 함께 병행하여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갓은 선견자인 동시에 예언자로 불려졌다. 이러한 호칭을 사용한 예로 보아 유다 저자들이 여러 유행의 중재자들을 명백히 구별하지 않고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들 인물 중의 어느 누구도 특별한 행동을 보여준다고 믿기는 어렵다.

 

3.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호칭은 에브라임 자료에 약 66회 나타나며 성서 이외의 문헌에서도 폭 넓게 발견된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종”의 의미로도 이해되어야 할 것이며, 이 호칭이 예언자 집단의 어떤 구성원들에게 붙여진 존칭이었다는 지적도 일부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보존되어 온 성서 전승에서 보면, 하나님의 사람은 예언자와 동의어이며 사실상 이 두 호칭이 동일 인물에게 가끔 붙여지기도 하였다. 하나님의 사람의 특징이 예언자의 특징과 상이했으며, 두 호칭이 지리적으로 서로 다른 지역에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지금으로서는 두 인물을 구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4. 예언자의 아들들

 “예언자의 아들들”이라는 호칭은 아합, 아하시야, 그리고 요람의 통치 기간 동안 이스라엘에서의 예언 활동을 묘사하고 있는 에브라임 설화에만 국한되어 사용된다. 그러므로 이 명칭은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사용된 것 같으며 특별히 엘리사의 활동과 함께 언급되고 있다. “…의 아들(들)”이라는 표현이 흔히 어떤 집단이나 조합의 구성원을 지칭하기 위하여 셈족어에서 자주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예언자들의 아들들”이 일종의 예언자집단의 구성원들에게 적용된 호칭이었다는 사실은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구성원들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방법에서 비롯된 것 같다. 즉 경험이 많은 어느 예언자가 자기의 영의 일부를 전수받기를 갈구하는 젊은이의 일단을 자신에게 끌어들인다. 이 예언자들의 제자들은 그들의 가족과 함께 스승이 있는 지역 근처에서 살았다.

 엘리야, 엘리사의 이야기를 분석해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으 집단은 통합된 사회적인 행동을 할 수 있었고 계급 조직을 가직 있었다. 이 집단은 ‘아버지’라는 호칭을 지닌 지도자가 다스리고 있었으며, 그 지도자가 죽으면 이 호칭은 다른 예언자에게 전수되었다. 이 집단의 구성원들은 가끔 공동 생활을 하였으며, 공동식사를 하기도 하였고, 또한 독립적인생활을 할 수도 있었다.

제 3 장  예언의 역사적 배경

 

1. 고대 근동지방의 예언과 기원

(1) 팔레스타인, 시리아

 예언이라는 현상이 이스라엘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음은 구약 성서 자체가 증언한다. 에레미야는 에돔, 모압, 암몬, 그리고 페니키아 여러 성읍 등 주변지역에서 활동한 예언자 및 다른 종교 전문가들에 대해 언급한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또 예레이먀 자신과 다름없이 기원전 594년 느부갓네살을 대항하여 일어난 반란 기도를 지지하고 있다. 이것은 몇가지 흥미있는 문제를 제기한다. 이스라엘의 예언이 이 지역에 있던 한 가지 현상이 몇몇 국가에 다양하게 나타난 것들 중의 하나인가? 종교 문헌 한 뭉치가 예를 들어, 에돔 같은 곳에 보존되었고 그것이 이스라엘의 경우와 유사하다면, 서로 어떤 점에서 차이가 있는가? 이스라엘에서 예언이 특별한 방향으로 발달하도록 결정지은 요소는 무엇인가?

 불행히도 이스라엘 구변 국가에서 나온 자료 가운데는 이러한 물음에 대답할 만큼 쓸만한 것이 실제로 하나도 없다. 모압의 비석에 보도된 것으로, 케모쉬신으로 부터 모압의 메샤왕에게 전해진 바, 이스라엘 성읍들을 공격하라는 명령은 왕궁이나 성전에서 일하고 있던 탈혼 예언자들을 통해 나왔다. 그러나 명시적으로 그렇게 언급된 것은 아니며 다른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다.

 시리아의 북부에 위치한 성읍 국가인 하맛의 경우, 그 왕 자키르가 세운 비문이 있다. 8세기로 소급되는 이 비문은 아모스 시대로부터 별로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 이 비분은 한 위성 성읍이 포위되었을 때 자키르가 그 지역의 신 바알에게 어떻게 기도했으며, 신이 지원할 것을 선견자나 그 외 영감을 받은 사람들을 통해 어떻게 확신하게 되었는지 그 경위를 말해준다. 이스라엘 예언자의 예언과 마찬가지로 그 메시지도 신의 1인칭 언어로 표현되는 확신의 메시지이다. “두려워 말라. 이는 내가 너를 왕으로 삼았고,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원할 것이기 때문이다.”같은 시리아에서 이보다 천년 전에 나온 알렙포지역 혹은 그 근처에 있는 아닷의 성소 직원의 마리의 마지막 왕 짐릴림에 관한 신탁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신탁적인 약속과 위협이 담겨있었는데, 몇 가지 측면에서 나단의 왕조 신탁에 비교된다.

 

(2) 메소포타미아

 고대 메소포타미아 종교들의 예언자들에 관해 말할 때, 우리는 이 용어를 넓게 미래의 예언들을 포함하는 것으로 사용해야 한다. 지금 사용 가능한 수메르 자료들 중 어느 것도 미래에 대한 정보를 얻는 어떠한 수단은 기술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외가 있는데 꿈을 통해 미래에 관한 정보가 지도자들에게 주어지고 신에 의해 해석되는 경우이다. 한 예로 구대아의 꿈은 여신 난쉐에 의해 해명되고, 다른 경우엔 두우찌의 꿈은 그의 자매 여신, 게수티난나에 의해 해석되었다. 해석 과정에 사용된 방법들에 대한 어떤 단서도 없다. 다른 신들로부터 인간에게 주어진 신탁도 아직 수메르 문헌에 발견되지 않았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아카드인, 바빌로인, 앗시리아인은 바루라고 불리우는 제사장들 계급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들의 일은 신전의 규칙적인 행위들 중 한 부분이었다. 바루란 말은 “보는 것”을 의미하고 제사장들의 직무는 컵 안의 기름과 물의 움직임을, 사물들이 떨어지는 방식을, 제물이 된 동물들의 내장의 상태를, 여러 천체들의 상호 관련성을, 동물들과 새들의 움직임을, 그리고 꿈의 상징들을 관찰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바루 제사장들은 매우 세련된 전문가들이었고, 그들의 일의 방법들은 엄밀하게 비밀이 지켜졌다. 그들은 그들의 지식 중 일부를 점토판에 기록했고 이중 일부가 발견되었다.

 바루 제사장들은 그들의 신들이 위에 언급된 자연 현상들을 통해 말한다는 것을 믿었고, 그들은 그들이 “신의 말씀”으로서의 도래하는 사건들 가까이에 도달한다고 결론지었다. 수메르 문헌은 진탕 마시고 떠드는 행위가 이 제사장들의 특성이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몇몇 신들과 왕들과 낮은 계층이 몇몇 사람들에 기원을 둔 신탁 문헌들이 있다. 이 신탁들은 대부분 여자들에 의해 전달되었으나 신탁들이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에 대해 어떤 정보도 주지 않는다. 이 표본들의 연대는 주전 7세기 초이다.

 메소포타미아 “예언”을 담은 가장 주목할 만한 문헌 자료는 상(上)유프라테스 강둑에 위치한 고대 마리에서 나왔다. 에블라 서판들에 마후와 나비우툼, 이 두 예언자들 계급이 언급된다. 그러니 아직 그들의 성격과 행위에 대해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지난 수년에 걸쳐 발굴된 많은 서판들은 신들로부터 사람들에게 대부분 왕에게 주어진 메시지들을 담고 있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지금까지 약 30개의 서판이 “전달자”유형으로 명칭이이 붙여졌다.

 신탁들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한 유형은 “대답하는 자”를 의미하는 아필루였다. 단 하나의 서판만이 인간 자신에 의한 메시지를 담고 있고 다른 모든 것은 제 삼자에 의해 말해졌다.

 메시지들이 어떻게 얻어지는지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다. 메시지들의 내용은 대부분은 정치적이고 때로는 비관적이고 때로는 권고적이거나 약속을 포함하고 있었다. 몇몇 예에서 아필루는 제물들이 신에게 드려져야 할 것을 요구했다. 흥미있는 것은 메시지들이 직업적인 예언자들에 의해 검사되어야 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종류의 전달자는 신전과 관계된 남창인 앗신누였다. 이 신탁들을 담은 텍스트들은 앗신누가 때때로 난폭하고 황홀한 행동의 상태에서 신탁을 받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메시지들은 왕에 대항하는 음모들에 대해 경고하고 있지만, 타당하다고 생각되기에 앞서 점에 의해 시험받았다.

 전달자의 세 번째 계급은 무후였다. 어떤 학자들은 이 사람들이 황홀상태에 있었다고 생각하고 다른 학자들은 이것을 의심한다. 어떤 이들은 신전에 관련되어 있었으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았다. 대부분 메시지들은 신에게 희생을 드리는데 힘쓸 것을 촉구하거나 왕의 행위에 관한 정보를 요구했다. 이 서판들 중 많은 것들에서 꿈들이 두드러진 역할을 했고, 많은 예들에서 꿈을 꾸는 여성이 있었다. 점에 의한 시험은 공통적이었다.

 요약하면, 마리 서판들의 “예언자들”은 그들이 지역신에게서 메시지를 받았다고 주장하고, 그들이 우선적으로 왕에게 말씀을 보내도록 위임받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또한 메시지들의 내용은 지역신이 자기가 무시되고 있음을 심하게 느끼고 주목받기를 원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실제적으로 이것은 제사장들이 무시되고 있음을 느꼈고 그들이 좀 더 많은 제물들을 원했고 그들이 왕이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보다 많은 정보를 원했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이 “예언자들”은 종교 제도의 확립을 위해 말했다.

 

(3) 이집트

 이집트에 있었던 신관계급의 헬라어 명칭을 바탕으로 하여 헌대의 학자들은 이따금 신관적인 예언자들을 거론하고 있다. 이집트어의 명칭을 그대로 풀어 본다면 ‘신의 종’이라는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헬라어 번역은 이들 신관의 일차적인 역할이, 신탁에 대한 질문을 마련하고 그에 대한 신의 응답을 밝혀내는 데 있었다는 사실에서 연유한 것이 확실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위에서 정의된 의미의 예언자들이 아니다.

 이집트학 학자들은 전통적으로 ‘예언’이라는 명칭을, 미래의 사건에 대한 예고를 수록하고 있는 이집트 텍스트들의 비교적 드문 장르에 적용시켰다. 성서학자들이이스라엘의 예언과 묵시 문학을 해석하기 위하여 이런 텍스트들을 때때로 사용하기는 하였지만, 사실상 이 텍스트들은 이집트 예언의 성격에 대하여 거의 알려 주지 않고 있다. “예언”을 유발시킨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재자들이 아니었으며, 그들의 메시지가 초자연적인 세계에서 온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언은 보통 대언자의 지혜와 지각력에서 유래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텍스트들이 아카디아의 예언들과 어느 정도 닮았고 묵시문학의 연구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예언’이라는 용어는 이집트에서는 이집트 문학의 한 유형을 가리키는 경우에도 사용되었다. 예컨대 ‘네페르티의 예언’이라는 작품은 제4왕조에 나타날 위대한 왕 아메니를 에워싸고 일어날 일들을 예측하려는 목적으로 씌어졌다고 할 수도 있지만, 이 문서는 제 12왕조의 아멘 엠 헤트 1세의 통치기간에 만들어진 일종의 문학적인 허구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나아가서 예언의 성격을 띤 예보, 또는 예측을 신의 계시로 내놓고 있지는 않다. 또 다른 작품 ‘이푸웨르의 훈계’ 또는 ‘어느 이집트 현인의 훈계’는 성서적 의미에서 ‘예언적’이라고 규정되어 왔다. 그 이유로서는 이집트의 과거와 현재에 이르는 행정 및 정치에 대한 비판이 담겨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그 비판 역시 신의 계시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다.

 

2. 고대 이스라엘의 예언과 기원

 이스라엘 예언의 기원에 대한 성서자료는 그리 많지 않지만, 에브라임 전승에 의하면 일찍이 족장 시대로부터 예언자들이 이스라엘 지파의 중앙 사회 구조 내에서 사회 유지 기능을 수행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나온 증거에 의하면 비발론과 앗시리아 제국의 변방인 아모리 지역에 예언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구나 가장 초기의 예언자들은 보통 이스라엘 족장들과 관련이 있는 동일한 지역과 시대에 존재하였음이 입증된다. 그러므로 예언이 족장 시대에 이스라엘 어느 집단에 존재했을 것이라고 제안하는 것은 타당하다. 중앙 사회 구조의 구성원으로서 예언자들은 사회를 통합하고 사회적 변화를 통제하는 임무를 가졌는데, 이러한 임무에는 제의적, 정치적 책임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미리암과 드보라 같은 예언자들은 정복하는 일에서도 역할을 수행했고, 거룩한 전쟁을 지휘하는 공식적인 기능도 담당했을 것이다.

 사사 시대에는 중앙 예언자들이 몇몇 성소들에 연관되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사무엘을 제외하면 이러한 예언자들이 제사장이었던 것 같지는 않으며, 제의에서 그들의 역할이 분명치 않다.

 사무엘과 같은 예언자들은 정치적, 종교적 체제 모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그 체제는 예언자들이 때때로 전달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도 통제되었다. 그들의 권위는 사회에 의해서 인정되었으며, 그 권위가 그들의 지지 세력을 형성하였다.

 한편으로 예언자들은 지지 세력의 견해를 대변하였고 그 그룹의 기대에 부응하는 방식으로 행동하였다. 그러므로 예언자들은 사회, 정치, 종교적 변화를 규제할 수 있었고 이렇게 해서 사회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지파동맹 자치 체제에서 왕정으로의 중요한 정치적 전환조차도 모세와 같은 예언자가 왕의 임명을 합법화함으로써 비교적 수월하게 이루어졌다.

 유대 예언의 기원은 에브라임 예언의 기원보다 훨씬 불문명하다. 유다의 독특한 중재자인 호제는 사사 시대 말엽에 처음으로 나타나는데, 우리는 이러한 인물이 원래 다윗을 지지한 남쪽 집단에 거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호제라는 명칭이 이스라엘 밖에서 나타난다는 것은 주목할 가치가 있으며, 그래서 이러한 특별한 형태의 중재자는 외래적 기원을 갖는 것 같다.

 처음부터 hozeh는 유다의 중앙 체제의 일원이었던 것 같으며, 그는 환상 중에 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함으로써 그 체제의 유지를 도왔다. 유다에서 중재 역할은 엄격하게 제사장의 특권이었던 것 같다.

 다위 왕조의 성립과 더불어 예언자들은 예루살렘 궁정에 소속되었다. 다윗이 에브라임 출신과 유다 출신에서 각각 하나씩 두 명의 대제사장을 임명하며 제의를 통합한 것처럼, 그는 또한 에브라임과 유다 예언자들을 모두 중앙의 사회 구조 속으로 끌어 들였을 것이다.

 하여튼 이 시기에 예루살렘 예언자들이 사회 유지 기능을 가졌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예언자들이 궁정에 소속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왕, 정부 혹은 제의를 비판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나단은 밧세바 사건의 부도덕성 때문만이 아리나, 왕위 계승 이야기가 명백히 입증하는 바와 같이, 왕위의 정당성과 왕조의 계속성을 위태롭게 한 왕의 행동 때문에 다윗에게 맞섰다.

 솔로몬 통치 후에, 일부 에브라임 예언자들의 사회적 기능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던 것 같다. 이 시점에서 에브라임과 유다 예언 전승이 가라지며, 각각 적절한 예언 행동에 대한 저마다 독특한 견해를 발전시켰다.

 아비아달과 그의 제사장 가문이 아나돗으로 추방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에브라임 예언자들은 다시 출현하여 북쪽의 전통적인 정치적, 신학적, 견해를 옹호하기 시작했다. 이 예언자들은 아비아달 집단에 의해서 지지받은 것 같은데, 이 집단은 본래 실로와 연관된 레위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레위인들 중 일부는 아비아달처럼 제사장이었지만, 솔로몬이 그들을 권력에서 몰아낸 후에 그들은 주변적 사회집단이 되었다. 본래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아나돗에 기반은 두고서 이 집단은 궁정과 어떤 연관을 지속할 수 있었다.

 예루살렘에서 추방된 후에, 아나돗의 주변적인 레위 집단은 곧바로 그들의 상실한 권력과 사회적 지위를 되찾으려는 시도를 감행했던 것 같다. 이 집단의 종교적 권력을 되찾으려는 첫 번째 시도에는 솔로몬 왕국의 분열을 지지하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아마 이 그룹과 관련된 예언자인실로의 아히야는 예언 신탁을 사용하여 야훼가 택한 앙을 합법화시키는 전통적인 에브라임 관습을 따른다. 새 왕의 선택과 다윗왕국의 분열은 솔로몬의 용납할 수 없는 종교 정책 때문에 그에게 심판이 내려진 것으로 설명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을 통해서 레위 집단이 전통적인 북쪽의 원리에 의해 통치될 에브라임 왕국에서 중앙 종교 체제의 일원이 됨으로써 권력을 회복하기를 희망했을 수도 있다. 만일 그렇다면, 여로보암이 단과 벧엘에 성소를 세워 비레위인 제사장이 관할하는 옛 송아지 예배를 회복하였을 때, 이 집단의 희망은 산산 조각나고 말았다. 이러한 행동은 아나돗 집단에게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으므로, 이 집단은 결국 유다 궁정 체제의 주변에 있게 된 것은 물론이고 막 태동한 에브라임 정부에서도 돌연 주변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그리하여 이 집단은 남쪽뿐만 아니라 북쪽에 대해서도 개혁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고 이러한 과정의 일부분으로 예언자들은 그 집단의 메시지를 보다 넓은 사회에 전달하게 되었다. 이때로부터 일련의 주변 예언자들이 북쪽과 남쪽 왕국 모두에게 개혁을 요구하는 신탁을 전했고, 아나돗 집단이 지지하는 예언자들은 곧 그들과 많은 공통점을 가진 북쪽의 레위 족속이 지지하는 예언자들과 연합했다. 아나돗의 레위 족속처럼 북쪽의 레위인들도 여로보암이 비레위인 제사장을 임명했을 때 에브라임의 종교체제 밖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북쪽 왕국이 견고하게 세워진 후, 예언자들은 다시 중앙 체제 내에서 활동했던 것 같다. 이러한 예언자들은 에브라임 예언자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종류의 행동을 보여 주지는 않는데, 그것은 중앙의 예언자들이 당연히 또 다른 지지 그룹의 기대에 부응했기 때문이다.

 어떤 예언자들은 야훼보다 바알에 사로 잡혔으며, 야훼의 예언자들 조차도 북쪽의 사회 구조의 안정을 유지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 임무는 북쪽 성소, 특히 벧엘에서 발달되었던 혼합주의적 제의를 지지하는 것을 포함했다. 이리하여 북쪽 중앙 예언자들의 활동은 레위 족속 그룹에 의해 지지를 받던 주변 예언자들과 직접적인 대결을 초래하였다. 이러한 예언 대결 기사는 엘리야의 이야기와 열왕기상 22장에 보존되어 있다.

 여러 레위 집단들에 의해 지지를 받던 주변 예언자들이 북쪽 체제에 계속적으로 압력을 가했으나, 다만 예후의 통치 때 어느 정도 그들의 개혁 노력의 성과를 거두었을 뿐이다. 마침내 북쪽은 앗시리아인에게 멸망당했는데, 그것은 신명기 사가에 의하면 야훼께서 보낸 예언자들이 말씀에 북쪽 왕들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초래된 사건이었다.

 남왕국 유다에서는 예언자들의 개혁 노력이 약간 다르게 진행되었다. 특히 히스기야와 요시야의 재위 기간 동안에 제의와 정부까지도 에브라임 노선을 따라 개혁되었다. 요시야의 치하에서 아나돗의 레위인들은 다시 예루살렘의 중앙체제의 일원이 되었고, 그들 중 일부는 예루살렘 성의 멸망 때까지 계속 남아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유다에서의 개혁 노력들은 정치적, 종교적 체제들로부터 저항을 받게 되었다. 특히 요시야의 사후에 정부는 거센 신탁으로 급진적인 개혁을 계속적으로 요구한 예레미야 등의 주변 예언자들을 압박하려고 했다. 또한 레위 집단이 지지하던 주변 예언자들과 예루살렘 체제에 속한 중앙 예언자들 사이에 대결이 심화되었으며 이것은 예루살렘 인들과 에브라임 주변 예언자들과의 사이에 첨예한 대립을 가져오게 되었다. 예레미야서는 이러한 에언 대립의 분명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또한 이 책은 사회 상황이 악화되어 감에 따라 예언자들 간의 투쟁이 더욱 격렬해졌음을 암시해 준다.

 결국 예레미야는 그의 예언 적수들을 억누르기 위한 시도로써 거짓 예언 정죄를 부활시켰지만, 그의 노력은 허사였다. 마침내 유다는 멸망했고, 신명기 사가들은 다시 파멸의 원인을 왕과 백성들이 에브라임의 개혁 계획을 따르지 않은 데 두었다.

 예루살렘의 멸망 후, 이스라엘의 정치적, 종교적 상황은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되었다. 끝까지 시온의 불가침을 주장해오던 예루살렘 왕조 신학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더구나 그 신학을 지지했던 중앙의 예언자들은 믿을 수 없는 존재로 판명되었다. 반대로 주변 예언자들이 주장하였던 에브라임 견해가 그 재난에 대해 납득할 만한 설명을 제공해 주었다. 민족이 하나님과의 계역을 깨뜨린 것과, 회개하라난 예언자의 부름을 거절한 것에 대해서 야훼께서 유다를 심판했다는 것이다. 백성들과 왕은 그들 스스로 재앙에 책임을 져야 마땅했다. 더욱이 에브라임 예언자들 자신은 그들이 전한 심판 신탁의 진실성을 입증하게 되었고, 이렇게 하여 그들의 예언자적 권위를 높이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포로 사회의 생활에 대하여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해도, 우리는 신명기적 견해가 포로 기간 중에 점점 대중적인 지지를 모았으며, 반면에 이전의 예루살렘 체제에 대한 지지는 틀림없이 감소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포로기 이후 시대의 초기에 종교적 상황은 옛 레위계 제사장의 신명기적 대표들과 예루살렘 전승의 사독계 전수자들 사이에 모종의 협정이 맺어졌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분명히 양측에 타협이 이루어졌다.

 포로기 이후의 재건에는 대부분의 사독계 제의의 특징이 그대로 남아있게 되었고, 이러한 양보의 대가로 신명기 사가들은 점증하는 성서 문서를 편집하는 자율권을 허용받았다. 이리하여 포로기 이후의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신명기적 해석이 공식적인 설명 기사가 되었는데, 그것은 훨씬 후에 예루살렘적인 인식을 가진 역대기 기자에 의해 도전을 받게 된다.

 신명기 사가들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모든 형태의 예언은 포로기 이후 시대에 쇠퇴하게 딘 것 같다. 포로기 이후의 예언자들은 그들의 문서에서 권위를 높이려는 여러 가지 방안을 되찾았고, 점차 말보다는 문서에 의존하였다. 그리고 예언자의 메시지 자체와 그 메시지의 신적인 기원이 더욱 강조되었고, 그와 동시에 예언자 자신 즉 오류가 있기 쉬운 인간적 중재자는 독자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분리시키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뒤로 물러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후기 예언서들은 실제로 예언자 행동에 대하여 거의 아무 것도 추론할 수 없다.

 이러한 가운데 사람들은 점점 더 어떤 종류의 예언이나 예언자의 권위도 인정하지 않으려 했으며 그 결과로 예언자들은 사회적 지지를 잃게 되었으며 예언자들은 존속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예언의 쇠퇴를 가져온 요인들이 묵시의 발전에 박차를 가했을 것이다. 포로기 이후 묵시적 자료가 일부 예언서에 나타나는 사실은 이 예언 전승을 전수한 일부 집단이 포로기 이후에 묵시적 방향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이들 집단 가운데 일부는 포로기의 타협에 불만을 품은 레위인들로 구성되었을 것이다. 참된 예언자들이 희소해졌기 때문에 이러한 집단은 예언 문학으로 돌아가서 그것을 보존하려고 애썼다. 그들은 예언 문학을 통해, 관직을 빼앗긴 위기의 순간에서도 살아남게 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일부 예언적 약속이 실현되지 못함으로 혼란해지자, 집단의 구성원들은 그 약속을 묵시적 맥락 속에 두어 그것의 성취가 “다가올 세상에서”만 기대되도록 했을 것이다. 이렇게 포로 이전 시대와 포로기의일부 예언자 지지 집단은 포로기 이후에는 묵시집단으로 바뀌어진 것 같다. 예언자의 지지 집단이 묵시 집단으로 변신된 것은 이스라엘에서 참된 예언자의 활동이 종식된 것을 말한다. 결국 예언자들은 계속 존재할 수 없게 되었고, 그리하여 이스라엘의 예언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제 4 장  예언자와 그 시대

 

1. 예언자의 특성

 예언자들의 결정적인 체험은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을 대신해서 말하라는 소명이었다. 이사야 6장의 이사야의 극적인 소명은 예레미야와 에스겔의 소명과 비슷하다. 아모스의 경우는 특별히 흥미로운데, 그 이유는 그가 자신을 예언자로부터 특별히 구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마도 그가, 이때까지도 왕과 연관을 맺고 있었던 직업적 예언자들의 무리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를 그의 무리들 가운데서 택하셔서 “가서 이스라엘에게 말하라”고 명령하셨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예언자들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에 대해 생기있고 살아 있는 의식을 갖도록 해준 하나님과의 인격적 체험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 체험은 그들로 하여금 그 당시의 관습들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교리나 새로운 윤리를 선포하려고 애썼던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삶속에 하나님의 엄위에 대한 새로운 의식을 일으키려고 애썼던 것이다.

 비록 환상이 이 예언자들의 공통점이긴 했지만 그들의 주된 도구는 말씀, 즉 기록된 말씀과 구두로 전해진 말씀의 양자 모두였던 것이다. 그들이 그들의 세계 속에 소개했던 하나님의 말씀은 근본적으로 상황을 변화시켰다. 예레미야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바위를 부수는 방망이라고 부른다. 하나님께서 말을 하시면 그 말은 결코 헛되이 도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예언자들이 전하는 이 메시지는 이스라엘이 그들과 하나님과의 독특한 관계를 보증한다고 믿고 있었던 모든 제도들, 왕정 제도뿐 아니라 직업적 예언자들과 심지어 제사조차도 거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제사에 대한 강한 정죄는 예언과 제사 사이의 관계에 특히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몇몇 학자들은 예언을 제사적 예배 자체의 일부로 간주한다. 그러나 비록 예언자가 때로는 예배 장소에서 발견될 수도 있는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들은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그들이 특별한 소명 때문에 독립적인 존재들이었고 따라서 자유롭게 그들이 본 잘못을 비평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언서에서 발견하게 되는 제사적 예배의 강한 거부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들은 제사를 없애고 그 대신에 좀 더 인격적이고 영적인 종교로 대치하려고 했던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신약적인 많은 것과 우리 자신의 종교적인 선입관을 가지고 구약을 이해하려는 태도를 취하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설명하는 것이 가장 안전할 것이다.

 예언자들이 고발했던 것은 제도들이 아니라 백성들이 이 제도들을 가지고 행했던 일이었다. 백성들은 그들의 행위가 어떻든지 간에 이런 전승들이 그들로 하여금 분명히 하나님의 은총을 받게 해 줄 것이라고 믿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묶여 있으며 이런 가시적 전승들이 하나님의 은총의 담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였던 것이다.

 예레미야의 무시무시한 말 속에 보면 선지자들과 제사장들 모두가 일을 거짓으로 처리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선전 자체도 일종의 물신이 되어 버렸다. 그러는 동안 그들은 계속해서 악한 행위를 그치지 않았다. 이사야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허물진”백성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언자들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예언자 이사야가 단순히 제사를 정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사야 1:16에서 볼 수가 있다. 그 곳에서 이사야는 그들의 도덕적 청결을 상징화하기 위해 사실상 의식적 청결의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하여” 예언자들의 의도는 형식적 종교의 비판 그 차제보다 더 깊은 그 무엇에 있었다. 그들의 의도는 문제의 핵심에까지 직접 들어 가는 것이었다. 종교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를 표현하는 그 무엇이어야만 했던 것이다. 종교는 인격적 결단과 전자아의 굴복을 요구하는 인격적 이해의 영역 안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종교는 도덕적 의의 생활을 그 결실로 맺어야만 했던 것이다. 아모스는 말한다. “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리지로다(암 5:23-24)”

 

2. 예언자와 정치

 예언은 이스라엘에 처음 등장할 때부터 정치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었다. 그때, 예언자들의 무리는 불레셋과 싸우는 성전에 참여하도록 이스라엘사람들을 고무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는 방법으로 그들은 사람들을 격동시키는 군가를 신들린 듯이 부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때 이전의 카리스마적인 사사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열광적인 기운”에 도취되어 있었다. 이 열광이란 말도 글자대로의 뜻은 하나님께로부터 영감을 받는다는 뜻이다. 엘리야와 엘리사도 이스라엘 신앙을 그와 같이 격정적으로 옹호했기 때문에 그들은 “이스라엘의 병거이며 기마병”이라고 불려 졌었다.

 그러나 초기의 예언자들은 성전의 열렬한 옹호자 그 이상이었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들은 특별한 상황을 위한 야훼의 말씀을 전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그 당시에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방법으로 널리 인정된 것으로는 세 가지가 있다. 즉 꿈, 제사장들이 다루는 거룩한 주사위, 그리고 예언이 그것이다. 사무엘상 28:6에 보면 사울은 좌절상태에 빠져 있을 때 이 세 가지 방법을 모두 시도해 보았으나 아무런 대답을 얻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두 가지 타입의 종교적 지도자 즉, 예언자와 제사장 중에서 정치적 위기의 때에 야훼의 대변자로 적격자는 예언자였다. 제사장은 성례를 집행하고 백성들에게 과거의 전승을 가르치고, 거룩한 주사위를 놀려 긍정 부정을 정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는 있었지만, 예언자는 야훼의 영의 영향을 받아 말하므로 사건의 의미를 해석하고 이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예언자의 무리가 서로 얽혀서 노래하고 뛰고 하는 동안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위기가 일어날 때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예언자의 무리로부터 탈퇴해서까지라도 독립하는 예언자의 수가 증가했던 것을 볼 수 있다. 이미 다윗의 시대에 예언자 나단은 단독으로 궁정에서 영향력 있는 위치에까지 올랐던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이 다윗과 맺으신 계약에 대한 그의 신탁은 이스라엘 생활과 사상에 영속적인 영향을 끼쳤다. 동시에 그는 다윗왕한테, 권력의 악용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보라고 서슴지 않고 왕을 지고의 심판대 앞에 불러 낼 수도 있었다.

 사울의 시대에 예언자의 열광적인 힘으로 불붙은 야훼께 대한 충성은 이스라엘을 결속시키는 힘이었다. 그러나 예언은 그와 같은 국가의 위기에 처했을 때 실로 큰 역할을 감당하기도 하지만, 위험의 요소 또한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본래의 열정과 자발성을 잃게 되면 쉽사리 직업적으로 타락할 수 있었다. 더욱이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들은 점차로 정치는 자신의 독점무대라고 느껴 제사장 직분을 국가의 사당에 매어 놓은 것처럼 “예언자의 아들들”을 자신의 수중에 놓고자 하였다. 이렇게 되자 예언이란 것은 국가주의의 좋이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이기 보다는 백성들이 듣고 싶어하는 것을 자연히 지껄이는 것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위대한 예언자들은 때때로 이와 같은 직업적 예언자들과 충동했으며, 특히 아모스는 자기가 그들과 동일시 되기를 원치 않았다. 그러나 왕들이 예언자들의 외침을 잠잠케 하려고 애썼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3. 예언자와 청중

 예언자들의 활동 범위는 광범위했다. 개인들은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들을 찾아갔다. 이스라엘의 여러 왕들과 군사 지도자들은 이웃나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전쟁을 앞두고, 또는 전쟁기간 중에 예언자들의 자문을 구했다. 하지만 그러한 의논은 분명히 일상적인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정치적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 예언보다 현자의 충고에 의지했으며 이 사실은 두 전문가들 사이의 경쟁관계로 번질 경우도 있었다. 그 사회의 전반적인 관계에서 보면 예언의 말은 재난을 당했을 때 집단 금식에 대한 응답으로 나오기도 하여, 심판의 말로 그러한 금식을 유도할 수도 있었다.

 예언자들이 정기적으로 예배의식에 참가했느냐 하는 의문도 나올 수 있다. 개인의 자격으로, 그리고 특히 하나님의 대변자로서 그러했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고대의 의식은 그 진행이 엉성하여 귀를 기울이고 있는 청중들에게 온갖 사람들이 말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사실 여기에는 특별한 하나님의 계시가 있기를 바라는 기대와 소망이 있었다. 예언자들은 물리적으로 왕의 상대가 되지 않았으나, 이스라엘의 논리에 따르면 그들은 여호와를 대표한다는 점에서 왕보다 높은 위치에 있었다. 예언자들은 나라 최고의 사법장관인 왕을 비판하는 권리를 가지고 행사했으며, 따라서 어떠한 형태의 사법적 조치도 받지 않았다. 근동의 다른 곳에서도 그러했듯이 하나님의 말씀은 성전을 건설하는 허가를 내릴 수도 있었고, 금기할 수도 있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나라 지도자들을 개별적 또는 집단적으로 규탄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지시를 중재하고 따르지 못했으며, 속죄물과 기타 보수를 받아들이기에 너무 열을 올렸다고 해서 공격을 받았다. 예언자들은 그들이 지켜야 할 규범을 어겼다는 이유로 비난을 당했다.

 공격을 받은 다른 집단들로서는 속임수와 몰지각한 탐욕에 빠진 장사꾼들, 이기적이고 오만한 사치에 넋을 잃은 성내의 여인들이 있다.

 비난하는 말을 악, 악함, 거짓 등의 일반적인 표현에 담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구체적인 죄의 목록은대체로 율법과 지혜문학에 나오는 것과 같다. 다른 신을 경배하는 것, 우상숭배, 살인, 매음, 간통, 절도, 탐욕, 술취함, 빚에 대한 이자, 그리고 근친상간 등이 앞서 지적한 것에 추가된다.

 예언자들에게 특별히 관심 있는 것 중에 군사 및 기타 인간 활동을 신뢰하는 것이 들어 있다. 우상숭배와 압제는 모두 신뢰의 방향이 빗나간 사례로 보고 있으며 간혹 다른 나라들이 무너지는 이유는 그들의 오만한 자신에서 찾고 있다. 원칙적으로 대적하는 백성은 유죄하다고 판정을 받는데,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국제적인 압제,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또는 다른 나라에 파괴적인 행동을 한다는 것이 규탄의 원인이 된다. 이스라엘의 청중에게는 적국에 대항하는 신탁의 공세가 여호와에 대한 확신을 조성 지원하는 것이다. 비판적인 말과 약속의 말의 차이는 그들이 압제나 기타 다른 형태의 악을 가하느냐, 아니면 그러한 것들로부터 구원을 요구하느냐 하는 청취자들의 처지에 크게 좌우된다.

 

4. 예언자의 메시지

 문서 예언자들 이전의 엘리야와 같은 예언자들의 실제적인 메시지들은 전승되었으며, 그들의 짤막한 구원의 메시지는 삶 자체에 관한 걱정이 다시는 없을 보다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일깨웠다.

 예언자들의 메시지의 주된 내용은 백성들 가운데서 죄를 고발하는 것이었다. 훨씬 후대에 아모스가 북 왕국에서 사회적인 죄악을 공격하였던 반면에 호세아는 혼합주의와 배도를 책망하였다.

 그 때에 남방 유다에서는 이사야가 외적인 종교와 부정을, 미가는 거짓 종교와 불평등을 신랄하게 비난하였다. 그러나 국가의 죄는 항상 과거에 있었던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로우신 행위들을 배경으로 하여 지적되고 있었다. 특별히 언약 속에 표현되어 있는 이 하나님의 자비를 이스라엘은 일축하여 왔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어겼고 따라서 하나님의 진노를 샀다.

 호세와의 감동적인 비유적 표현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 내었거늘...”이라고 말씀하신다. 이사야의 경우에 있어서 예언은 다윗의 언약의 영향을 받고 있다. 따라서 그는 “잠잠하고 신뢰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라고 백성들에게 요구한다.

 이아같이 그들은 자신들이 배척을 받는 것이 아니요 징계를 당하는 것으로 얘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희망은 메시야라는 인물에 그 초점이 놓여져 있었다. 이것이 후대 유대주의의 규범적인 메시야 사상의 기초가 되었던 것이다.

 때때로 예언자들이 말하고 있는 것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길들을 고치려는 중요한 시도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개혁이 히스기야 왕과 요시야 왕의 통치시대에 각기 일어났다. 전자의 경우에 있어서는 미가의 설교가 영향을 끼쳤다. 비록 그 개혁이 단명에 그쳤을지라도 예언자들의 자극은 계속해서 그 열매를 거두었다.

 예언자들의 실제 의도는 일차적으로 율법을 선포하고 개인과 국가의 죄를 공개적으로 묘사하는 데에 있지 않았다. 그들은 시대 상황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하지 않았으며 일차적으로 그들 자신의 역사적인 현실을 해석하는 자들, 곧 국가의 살아있는 양심도 아니었다. 아모스는 평화의 시기에 하나님과 국가 사이의 건강한 친교가 취소되었음을 선언했다. “내 백성 이스라엘의 끝이 이르렀은즉” 그의 설교의 나머지는 모두가 다 이 메시지 즉 이제까지 이스라엘에서 들려지지 않았던 바, 국가 전체에 대한 재난 선고를 발전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예레미야는 구원을 설교하는 자들과는 반대로 은혜와 구원의 시기가 지나갔다고 선포했다.

 하나님의 심판은 언제나 의로운 심판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은 구속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데 있다. 이사야가 말하듯이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을 청결케 하기 위하여 자신의 손을 들어 그들을 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심지어 진노중이라도 긍휼을 잊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심판은 결코 기계적인 숙명으로 간주될 수는 없는 것이며, 심판은 항상 인격적인 관계의 상황에서의 실제적 인격의 표현인 것이다. 이 때문에 항상 하나님 안에는 희망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노를 한없이 품을 수가 없는 분이시다. 이와 같이 예언자들의 메시지는 확실히 미래를 향한 살아 이는 소망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우리는 일찍이 이스라엘을 통하여 인근 국가에까지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의 경향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롯의 이야기는 구약에서 일찍이 그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며 후에 예언자 요나는 고전적인 본보기가 된 것이다. 여기에 궁극적으로 이방 도시 니네베에 대한 예언에 동의하기 전에, 하나님의 소명을 피해 도망치는 하나님의 사람이 있다. 니네베백성은 회개하였고, 요나의 분통이 터지게도 하나님은 그 성을 용서하셨다. 여기에 하나님의 크신 긍휼이 크게 나타나며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소원이 명백히 나타난다. 비록 분명치는 못하나 어떤 방법을 통해서 예언자들은 모든 열방이 언젠가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제 5 장  초기의 예언자들

 

1. 나단

 나단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활동하던 예언자였다. 그는 다윗이 성전 건축 계획을 맨 처음 발표했을 때, 전심으로 동의하였다. 그러나 후에 예언자 나단은 성전 건축이 다윗의 후계자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라는 하나님의 계시를 다윗에게 전하였다. 이때 그는 다윗의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게 세워질 것도 예언하였다.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죄를 범한 후에 그녀의 남편을 살해한 적이 있었다. 이때 나단은 왕 앞에 나아가서, 가난한 자의 유일한 양을 빼앗은 부자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드디어 다윗이 그 부자를 처형하라고 명했을때, 나단은 다윗이 바로 그 악한 부자라고 책망하였다. 다윗은 즉시 자신의 행동을 회개하였다. 그러나 다윗과 밧세바의 첫 번째 아들은 태어난 지 얼마 후에 죽고 말았다.

 다윗이 늙어 기동할 수 없게 되자, 그의 아들 아도니야가 왕이 될 음모를 꾸몄다. 이때도 나단은 밧세바와 함께 다윗 앞에 나아가 소로몬을 대신하여 중재에 나섰다. 나단은 밧세바에게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겠다고 했던 다윗의 옛 맹세를 상기시키고 아도니야의 행동을 낱낱이 보고하라고 충고했다. 결국 나단의 노력으로 솔로몬이 다윗의 후계자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나단은 같은 시대의 동료 선지자 갓과 함께, 레위인 성가대와 연주자들의 배열에 관한 야훼의 말씀을 전달하였다. 또한 나단은 다윗과 솔로몬의 통치사를 편찬하였다. 그러나 솔로몬 통치가 끝나기 전에 죽었으므로 솔로몬 통치사를 완성시키지는 못했을 것이다.

 

2. 아히야

 예언자 아히야는 실로의 제사장 가문의 후손으로서 그는 유다 지향적인 다윗 왕국에 반대하면서 이스라엘의 이익을 위한 구심적 역할을 하였다. 이처럼 저변에 깔려 있는 적대 감정과 그리고 솔로몬에게 있어서의 소위 종교 혼합주의를 맹렬히 비난하난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근거로 하여서 아히야는 부역을 감독하는 솔로몬의 신하들 중의 한 사람이며 느밧의 아들인 여로보암과의 만남에서 상징적인 방법으로 혁명의 불을 당겼다. 아히야는 여로보암의 옷을 12지파에 해당하는 12조각으로 찢어서 그 중 10조각을 여로보암에게 주었다. 그리하여 다윗의 왕조에게 오로지 두 지파 곧 베냐인과 유다 지파가 남게 되었다. 아히야 일파는 여로보암이 실로를 수복하고 또 통일왕국 이전 시대의 특징인 지방분권적인 정치형태를 회복시켜 줄 것을 기대했던 것 같다. 비록 여로보암이 벧엘과 단에 두 개의 왕립 제단을 세우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는 본질적으로 중앙집권주의자였으며 또 몇몇 사람들의 견해에 의하면 솔로몬에 못지 않는 혼합주의자였다고 한다. 금송아지들은 사실상 이방의식 형태이기도 했지만 오히려 옛적의 이스라엘전통에로의 복귀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여로보암의 정책들은 아히야의 오랜 경계와의 사이에 대단한 긴장관계를 야기시켰다. 그리하여 여로보암의 아들 아비야가 병들게 되었을 때에 여로보암은 자기가 친히 가는 대신에 자기의 아내를 보내어서 왕자의 운명을 붇게 했다. 아히야는 왕자의 죽음과 그리고 여로보암 왕조의 단명 종말을 예언하였다.

 

3. 엘리야

 엘리야는 B.C. 9세기의 예언자로 북왕국 이스라엘의 길르앗지방 디셉사람이다. 엘리야의 신앙과 충성은 이세벨공주의 후원으로 세워진 두로의 바알종교에 대항한 싸움에 지도자로 군림하게 만들었고 그의 말과 행적은 그의 제자들에 의해 기억되고 그의 명성은 그를 인간의 차원 이상으로 올려놓았다. 엘리야 이야기에는 기사이적이 잇달아 생긴다. 파괴적인 한재로 그릿 시냇가에서 까마귀의 양식 보급, 물이 마르자 시돈땅 시렙다의 한 과부집에 유속하며 곡식 항아리와 기름병이 기적적으로 계속 채워지는 과부 아들의 기적적인 소생, 오바댜와의 담화와 성령으로 장거리 이동, 하늘에서 갈멜산 상의 제물 위에 불이 내려 번제를 삼켜버림 등이다.

 그러나 주제는 분명히 야훼 종교와 바알 종교의 대립니다. 호렙산으로 가던 중 기적적인 천사의 급식도 예언자와 야훼의상봉 사실을 흐리게 하지 않는다. 후에 엘리야는 엘리사를 불러 그의 제자로 삼는다.

 에리야는 아합왕과 그의 아들 아라시야에 대항하여 용감하게 맞섰다. 그는 이 왕들이 타협적인 태도로 야훼 예배와 더불어 이방신들을 섬기도록 허용한데 대하여 공격했다. 이러한 사건들 외에 엘리야는 나봇의 포도원 사건에 대해서도 왕을 비난했다. 왕이 포도원을 심히 탐내 그것을 소유하고자 했으나 나봇은 포도원 팔기를 거절하였다. 이세벨은 죄목을 날조하여 나봇을 사형에 처하도록 재판을 조정했다. 나봇이 처형된 후에 아합왕은 그 포도원을 소유하였다. 엘리야는 아합을 살인자이며 도둑이라고 선언했고 그의 왕가의 운명에 대하여 예언했다.  엘리야에 대한 기록은 그의 사랑하는 제자 엘리사를 통하여 엘리야와 영적으로 친분관계가 있다고 주장하였던 예언자 그룹을 통하여 경건하게 보존되어 왔다. 그러나 그는 역시 이스라엘 백성의 상상력에 있어서도 심오한 영향을 끼쳤다. 그 후 시대는 엘리야의 신비한 승천을 기억하였고 또한 여호와의 날이 이르기 전에 예비하는 자로서 그가 다시 이 세상에 올 것으로 기대되어 왔다. 신약성서에서 종말론의 선구자로서 동일한 역할이 엘리야에게 돌려지고 있다. 그 시대의 몇몇 사람들은 예수를 엘리야라고 생각했다.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은 세례요한을 엘리야라고 믿었다. 그러나 요한은 이를 부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에서 요한은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자며 그가 엘리야의 영과 능력을 이어 받은 자이거나 아니면 엘리야 자신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수께서 변형되셨을때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나타났다.

 

4. 엘리사

 엘리사는 젊었을 때 농부였으며 요단 동편의 아벨므흘라 출신이다. 엘리사는 소 열두 거리로 밭을 갈고 있을 때 엘리야의 부름을 받고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 후로 그는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던 사받의 아들 엘리사로 알려졌다. 엘리사는 엘리야를 대단히 존경한 가운데 엘리야의 영감이 자신에게 갑절이나 있기를 구하였고 엘리야가 불수레에 회리 바람을 타고 승천하는 모습을 보는 가운데 엘리야는 보이지 않고 그의 겉옷이 엘리사에게 떨어졌다. 엘리사가 그 겉옷으로 요단강을 거쳐 길을 내고 건너가니, 예언자의 아들들이 그를 지도자로 높였다.

 엘리사는 대머리진 인자하고 친절하묘 외교에 능한 사람이었다. 그는 도시에 드나들며 사마리아에 집을 지녔다. 그는 여리고 사람들을 위해 그 쓴물을 달게 했으며, 예언자들에게 해독되는 국을 먹게 해주었고, 가련한 과부의 기름을 많이 하여 빚을 갚게 해주었고, 도끼 잃은 사람의 도끼를 찾게 해주었고 나아만의 문둥병을 고친 이야기에는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와 능력만 나타났을 뿐 아니라, 심오한 정신적 진리도 보여준 것이다

 여호와하스가 왕위에 오른 조금 후에 엘리사가 병들었다. 여호와하스는 엘리사를 찾아가서 아니든 엘리사가 죽게 된 것을 보고 울었다. 그가 엘리사에게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요, 마병이여”라고 한 천사들은 엘리사가 엘리야의 중요성을 요약해서 말한 것과 같은 것이다.

 엘리사는 죽어서 요단 동편 그의 고향에 묻혔다. 어떤 사람들이 엘리사의 고향에 죽은 시체를 던지니 그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마자 그 사람이 살아났다. 엘리사는 죽어서까지 생명을 주는 야훼의 중재자가 되었다.

 

 

 

 

 

 

 

 

제 6 장  북국의 예언자들

 

1. 요나

 요나의 뜻은 집비둘기이다. 갈릴리의 읍 가드 헤벨의 사람으로 아밋대의 아들이다. 그는 여로보암 5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의 실지가 회복될 것을 예언하였다. 정통적 견해에 의하면 그는 요나서의 저자로 되어있다.

 요나서의 이야기는 유대의 옛 항구 욥바에서 시작되었다. 그 내용을 좀 더 살펴보면 징벌의 폭풍, 요나의 제비, 잔잔해진 바다, 기다렸던 큰 고기, 요나의 안전상륙, 빨리 자랄 박넝쿨 등 초현실적인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다.

 요나가 니느웨 성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을 때 왕과 백성들은 금식하며 회개하였다. 그러나 요나는 불만을 나타내었다.

 

2. 아모스

 아모스는 유대 예언자로서 아모스서의 기자이다. 그는 드고아의 목자이며 뽕나무를 배양하는 사람이었다. 드고아는 예루살렘 남쪽 약 삼십리 되는 곳에 있다. 그러므로 그가 남쪽 왕국에서 출생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명을 받아 북쪽 왕국의 예언자가 되었다. 아모스는 구약에 있어서 소위 문서 예언자 중 최초의 인물인데, 그는 이사야나 예리미야와 같이 자신의 말로서는 예언자라고 자칭하고자 하는 것 같이는 보이지 않는다. 아모스의 왕조 비판은 여로보암 2세의 경제적 또는 정치적 번영기 즉 주전 760년 경에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아모스는 갑자기 이스라엘 왕국을 대항하는 도전자와 같이 나타남으로써 국가 제사장 아마샤가 벧엘에서 그를 추방해야만 했던 것이다. 의심할 바 없이 그는 한 비타협적인 심판 예언자였으며 왕국에 대한 비판자였다. 아모스는 ‘심판예언자’로서 그 동시대의 인물 아밋대의 아들 “극 민족주의자적 열심자 요나”, “구원 예언자”에게 대립되는데 이들은 여로바암 2세때 사람들이고 렘 28장에서 예언자 예레미야가 거짓 예언자 하나냐에게 대립되어 있는 것과도 같다. 아모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요셉의 남은 자에게 은혜로우시리라고 한 말이 결국 유일한 긍정적인 발언이다. 아모스는 야훼의 장래할 심판의 원인을 왕국에 있어서의 사회적 불의로 보고, 왕국의 오도된 역사 이해 또 국가 제의로 보나 그는 이스라엘에게 어떤 발전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암픽티오니 관계(지파동맹) 또는 출애굽 전승을 내세우는 것이다.

 아모스는 신본주의자이다. 그는 야훼의 은총과 그의 구원사의 인도를 강조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스스로 출애굽 전승을 무효하게 만들었으며 또 아훼 통치에 반항하여, 야훼 자신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의 특권도 오는 심판에서 그들을 구해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야훼의 심판은 우주적이요 보편 타당하게 되어진 것이다.

 

3. 호세아

 호세아는 아모스와 거의 동시대의예언자로서 그에 관한 유일한 자료는 호에아서이다. 그는 북왕국 이스라엘 출신으로서 브에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B.C. 746년 경에 예언자로 부름을 받았다. 그는 블라임의 딸 고멜을 아내로 삼았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2남 1녀들 두었다. 이들의 이름은 이스르엘, 로루하마, 로암으로서, 호세아의 결혼은 신실치 못한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비유한다. 그런데 아내 고멜은 남편인 호세아를 배신하고 간음죄를 범하였다. 그리하여 남편과 자녀 셋을 남겨두고 정부와 달아나고 말았다. 그리고 결국엔 고멜은 노예의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그러나 호세아는 대사를 지불하고 다시 고멜을 맞아들여 아내로서 사랑하였다. 그렇게 호세아는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 비극적인 쓰라린 경험을 통하여,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부각시켰다. 즉 이스라엘의 부정과 범죄와 배신, 이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불가피하므로 회개해야 한다고 외쳤다. 하지만 이스라엘에 대한 나나님의 끊임없는 사람에는 변함이 없으므로 돌아오라는 것이 그의 예언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제 7 장  남국의 예언자들

 

1. 요엘

 예언자 요엘은 브두엘의 아들이라는 언급 외에는 예언자 요엘에 관한 직접적인 자료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성전과 제사에 관한 그의 지식이나 예루살렘에 대한 잦은 인용으로 미루어 보아 요엘은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 근처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그가 제사장들에 대하여 신랄한 혹평을 서슴지 않았던 것을 보면, 자신이 제사장은 아니었던 것 같다.

 요엘은 예루살렘 성전에 관한 메시지를 전했던 예언자들 가운데 한사람으로 분류된다.

 예언자 요엘의 예언 속에는 중대한 민족적 비극 사건이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학자들은 이 언급이 구체적으로 무슨 사건을 가리키는지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요엘서의 저작 연대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들이 제시되고 있는 가운데 언어학적인 면이나 역사적인 배경을 고려해 볼때 B.C. 400년설이 가장 타당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2. 미가

 예언자 미가는 예루살렘 남쪽 모레셋 사름으로서 그의 활동시대는 유다왕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시대 즉 B.C. 740-690년 경이다. 그는 직업적인 예언자는 아니었으며, 그의 배경은 농업이었다는 사실만이 대체로 인정되고 있다. 미가는 예루살렘의 아사야와 동시대인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의 예언은 정치적이기 보다는 사회적인 것이었다. 환상의 넓이나 식견의 깊이는 아모스에게 미치지 못하나 그의 뜨거운 도덕적 열정은 아모스와 같았다. 미가서는 4부분으로 구분된다. 회개의 요구와 심판의 예언, 종말론적 예언, 민중의 부패에 대한 예언자의 안타까운 회개의 권고, 기도와 구원의 포고, 그 중에 특히 하나님과 백성과의 극적 대화가 결론인 6장 8절은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의 중심적 메시지를 간결하고도 고상한 종교적 의무의 선언으로 요약한 것이다.

 

3. 오바댜

 예언자 오바댜의 묵시가 기록되어 있는 오바댜서에서 그의 계보에 관한 것이 전혀 나타나지 않으며, 구약에 거론된 사람 중 어느 사람과도 동일시할 만한 내적 암시가 없다. 랍비 전통은 그를 아합 왕가의 궁내 대신 오바야와 관계시키며, 초기 기독교 저술가 에피파니우스는 그를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의 대신과 동일시 한다.

 애돔에 대한 확대된 경고로서 오바야서의 초점 주로 갈대아 사람에 대한 에돔 사람의 초기 협정에 주의를 돌리고 B.C. 587년 예루살렘 약탈에 참여하리라는 것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에돔 사이의 수세기에 걸친 갈등 때문에 학자들은 오바댜서에 다양한 자료를 제시하거나 또는 그것의 연대들 B.C. 850년에서 B.C. 312년으로 다양하게 추정하려고 시도하였다.

 

4. 나훔

 예언자 나훔에 대해서는, 고향이 불레셋과 유다의 국경지대에 위치하던 엘고스라는 것 외에는 거의 알려져 있디 않다. 많은 학자들은 1:15와 종교 의식의 준수에 관한 내용들에 근거하여, 나훔을 ‘제사적 예언자’로 간주한다. 그러나 나훔서에는 예루살렘에 대한 언급과 제사에 대한 규례들이 거의 나타나 있지 않다.

 나훔서 전반에 걸친 주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다. 곧 하나님께서는 대적인 앗시리아 제국 위에 피할 수 없는 징벌을 집행하실 것이며 하나님의 선민 위에는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구원이 베풀어진다는 것이 본 서의 주제이다.

 

5. 하박국

 하박국은 포로기 전 유다의 예언자로서 하박국이란 이름은 리브리어 하바크(안다, 껴안다)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이 예언자의 신원에 대해서는 알아낼 길이 없다. 그의 예언에 대한 역사적 추론과 언어적 특성을 통해서 그는 B.C. 600년경 유다에서 사역한 것으로 제시된다. 그러므로 그가 수넴여인의 아들이라는 랍비의 전통은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또 다른 전통은, 별로 신빙성은 없지만 그를 시므온 지파의 세라 자손으로 보고 있다.

 

6. 스바냐

 예언자 스바냐는 구시의 아들로 요시아 시대의 예언자였다. 그런데 부친의 이름이 구시이므로 구시는 이디오피아를 가리키므로 벤첸은 스바냐를 이디오피아인의 노예로 생각한다. 또 예루살렘 성전 예배에 봉사하던 자로 상상하고, 특히 그의 예언 가운데 제의에 관한 언급이 그 사실을 시사해 준다는 것이다. 표제에 의하면 스바냐의 활동은 유대의 요시야 왕 치세 때이다. 1:5절 이하에서 비난 공격하고 있는 우상예배, 천체예배, 밀곰예배 등은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으로 일소되었으므로, 스바냐의 예언은 개혁 이전으로 생각된다. 제1부는 유대에 대한 심판, 제2부는 국민에 대한 심판, 제3부는 예루살렘에 대한 경고와 회복이다. 스바냐서의 주제는 주의 날이다. 주의 날은 이스라엘에 대하여 어두운 날이요 고통의 날이라는 사살을 스바냐는 아모스로보터 이어 받고 있다. 이 주의 날의 심판은 이스라엘 민족뿐만 아니라 전 세계 민족에게 향한 것이며 더욱이 자연계도 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상은 주의 날은 이미 보편적인 세계적 카타스트로피로 생각되어 있다. 그 파멸 가운데서 하나님에 의하여 남겨진 자만이 구원을 받는다. 남은 자의 사살은 사2:9, 3:13-14절에서 계승한 것이라고 보겠다. 또한 스바냐의 ‘진노의 날’ 사상에서 13세기경의 찬송가 ‘Dies Irae’가 작성되었다.

 

7. 이사야

 이사야는 구약의 대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B.C. 8세기 후반에 예루살렘에서 활동하였다. 이사야는 아모스의 아들이었으며 결혼해서 한 아내와 두 아들을 가지고 있었다.그런데 두 아들의 이름은 곧 스알야숩과 마헬살랄하스바스는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사야는 왕궁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고 왕들을 만나는데도 별 어려움이 없기 때문에 그는 아마도 유대의 마지막 궁정 예언자였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이사야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인 B.C. 740년 경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으며, 히스기야 통치때까지 또는 B.C. 701년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공격한 루까지 그의 사역을 계속하였다. 전승에 따르면 이 선지자는 므낫세 왕 시대에 순교를 당했다고 한다.

 이사야서는 바벨론 포로기간과 그 이후에 있었던 사건들에 간한 예언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비평주의 학자들은 대개 이사야서의 어떤 부분을 이사야 외에 한두 사람 이상의 다른 예언자에게 돌리고 있다.

 이사야서는 예루살렘과 유다에 관한 예언으로 시작하며, 이방 나라들과 성읍에 대한 경고가 있으며 이사야의 묵시, 예루살렘과 유다에 관한 두 번째 예언과 위로의 책으로 알려진 40-55장과 회복된 공동체의 관심사에 관한 계시로 구성되어 있다.

 이사야서는 잘 발전된 신론을 제시한다. 이 책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의 초월성에 의해서 인간과 구별된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으로 묘사된다.

 이사야는 그의 예언에서 이스라엘의 메시야 사상을 누구보다도 명백히 선포하고 메시야의 대속적 사역을 강조한다. 동시에 그는 그의 예언 과정에서 시종여일하게 조국의 죄악상을 책망했으니, 이 죄상이 사회적, 도덕적인 면의 무질서를 규 한 것이고 자기 자신도 그 죄악에 대한 책임을 진다고 고백한다.

 이사야의 예언 중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사상보다 더 특이한 점은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다. 7:14에서 말하는 처녀의 몸에서 탄생할 임마누엘은 원시복음이라 불리우는 창세기 3:15의 여인의 후손이며, 마태복음 1:25이 증거하는 대로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선포한 메시야 예언이다.

 이사야의 메시야 사상은 위에서 말한바 대로 임마누엘 동정녀 출생사상이다. 도성인신하신 성자, 하나님의 아들 사상으로 위대한 교훈을 준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고난의 메시야, 대속의 제물 메시야 사상은 이사야의 종의 노래, 즉 야훼의 종 부분에서 더욱 확실해진다.

8. 예레미야

 예레미야는  B.C. 627년 경에 활동안 대예언자였다. 예레미야는 요시야 왕 치세 때 예루살렘 북방 아나돗에서 제사장 기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B.C. 626년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예언자가 되었는데 당시의 연령은 분명치 않고, 아마도 청년 시기인 듯하며 당시 근동 역사는 격변기에 처해 있었고, 강대국이었던 앗시리아가 멸망하고 신바빌로니아가 대두하였다. 결국 유대왕국은 신바빌론에게 멸망당하는데,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전에 유대사회에서 정치가, 예언자, 제사장들이 타락하고 이교 신들에게 기울어지고 있는 현상을 보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호소했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예언을 서기 바룩에게 필기시켰으며 이 예언의 기록은 왕을 격노시켜 예레미야는 박해를 받았다. B.C. 598년부터 예루살렘 함락까지 시드기야가 유대 왕으로 있었는데, 그는 예레미야를 존경했었다. 그러나 바빌론왕에 의하여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백성은 그를 신뢰하지 않았고, 예언자들은 느부갓네살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내려 바빌론에 잡혀간 유대인은 돌아올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이러한 예언에 반대하였다. 그 후 예레미야는 가끔 옥중 생활을 했고 생명이 위험했던 때도 있었다. B.C. 587년 드디어 예루살렘은 바빌론의 공격으로 멸망했으며 예레미야는 느부갓네살의 배려로 옥중에서 풀려났다. 그런데 바빌론이 세운 총독 그달리야가 살해되자 바빌론의 보복을 두려워한 유대의 지도자들은 이집트로 피난하였다. 이때 예레미야는 서기 부룩을 동반한 것이다. 그 후 이집트에서 어떻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바룩이 예레미야의 예언을 편집한 것이 이 때가 아닐까 하는 논쟁도 없지 않아 있다.

 예레미야 사상의 핵심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한 관심이다. 이 책은 주로 하나님과 그의 언약의 백성 곧 잔존한 유다 왕국을 이루고 있는 자들 사이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온 인류의 관계에도 관여한다.

 

 

 

 

 

 

 

 

 

 

제 8 장  포로기와 회복기의 예언자들

 

1. 다니엘

 예언자 다니엘은 이사야와 같이 유다지파이며 왕족인 듯하다. 그는 소년시절에 포로가 되어 바빌론에 잡혀갔다. 그는 바빌론 왕궁에서 갈대아인의 학문에 통달하였고 지혜가 출중하였다. 다니엘이 유명하게 된 것은 느부갓네살의 꿈을 해몽한 일 때문이다. 그는 느부갓네살에 의해 높은 벼슬에 오르고 자기 민족의 종교를 충성스럽게 믿었으므로 다리오 왕 때에 사자굴에 던짐을 당했으나 기적적으로 구원을 받았다. 에스겔은 말하기를 다니엘은 노아나 욥과 같은 의인이며, 특별한 지혜가 있다고 하였다.

 다니엘의 저작으로 믿어지는 다니엘서는 일반적으로 묵시 문학에 속한다고 보면서도 예언서로 간주되고 있다.

 다니엘서의 내용은 웅장하여 세계사에 관한 폭넓은 시각을 열어주고 있다. 모든 사건들과 이상들은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시고 책임지실뿐 아니라 동시에 역사의 미래를 그의 신실한 자들에게 제시하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강조하고 있다.

 

2. 에스겔

 에스겔은 바빌론 포로기 동안 활동했던 대예언자이며 사독 계열 제사장 부시의 아들로서 느부갓네살이 여호야긴 왕을 사로 잡아갈 때인 B.C. 598년에 귀족들과 함께 포로로 잡혀갔다. 그는 바빌론 성과 니푸르 사이에 있는 그발강가의 델아빕에서 살았다. 그는 B.C. 593년에 예언자의 소명을 받았으며 약 23년 동안 활동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던 때는 B.C. 571년이었다. 그의 예언이 두드러진 특징은 수많은 환상과 상징적인 행동들이었다. 이스겔은 예언활동을 하던 도중에 아내를 잃게 되었다. 그런데 이 비극까지도 예루살렘 멸망을 예언하는 상징적의 의미를 지녔다.

 예스겔서의 특징으로서는 예언 문학인 동시에 묵시문학적인 요소를 구비하고 있는 점이다. 특히 에스겔서에 나타난 묵시문학의 특징은 환상에 있다.

 분명히 에스겔서는 환상을 보는 것을 예언의 근거로 삼았고, 또한 예언의 본질적인 부분의 하나이다.

 에스겔서의 주제는 징계와 회개와 회복이며 주요 사상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사상과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언약의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이다.

 

3. 스가랴

 예언자 스가랴는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로서 학개와 동시대의 인물이다. 그의 사명의 성전재건이었으며 그는 예언자였을 뿐만 아니라 제사장이었으며, ‘아버지의 집’의 머리로서 그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그의 이름은 실로 특별한 재능을 부여 받았다는 암시를 주는데 히브리어로 “야훼께서 기억하시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구약성서 중에서 스가랴서 만큼 해석하기 힘든 책도 드물다고 한다. 유대 주석가인 아바바넬이나 야기 그리고 제롬과 같은 사람들도 이 예언자의 환상을 해석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들의 손을 놀리지 못하고” 미로의 구름 속을 헤메이다가 마침내는 길을 잃곤 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로 이 예언자가 가졌던 환상의 범위나 그의 생각이 지닌 영적 깊이는 아주 진진하게 숙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실 구약성서에 나와 있는 모든 예언 중에서 스가랴서의 환상과 말씀만큼 메시야 중심적인 것이 없고 그래서 매우 난해한데 이는 스가랴서가 묵시론적이고 종말론적인 내용들로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4. 학개

 예언자 학개에 대해서는 그가 주전 536년에 바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새로이 정착한 유대 거민의 첫 예언자라는 사실 이외에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의 책과 에스라 5:1에서 그는 단순하게 예언자 학개라고 소개되어 있다. 학개 2:3을 통해 에발트는 그가 예언을 하던 때는 이미 그의 나이가 약 70에서 80에 이르는 노인때 였을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여하튼, 학개의 이름은 스가랴의 이름과 동시에 열거될 때에는 언제나 학개의 이름이 먼저 언급된 것으로 보아 그는 스가랴의 선배였던 것 같다. 고대의 한 전승에 의하며 그는 예루살렘에서 태어나 느부갓네살에 의해 포로로 잡혀 갔다가 고레스 왕에 의해 예루살렘으로 귀환했다고 한다. 한편 에피파니우스는 그의 책 [예언자들의 생애]에서 학개가 젊었을 때 바빌론에서 귀환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성전 재건이야말로 학개가 지닌 관심의 중심이었고, 그가 설교한 모든 것의 초점이었다. 그에게 부여된 가장 중요한 사명은 느부갓네살에 의해 파괴도니 솔로몬 성전을 제건하는 것이었다.

 

5. 밀라기

 구약 시대의 마지막 예언자인 밀라기는 개인적 신상에 대한 자료가 거의 없다. 심지어 말라기란 이름까지도 이 예언자의 본명이 아닌 일반명칭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왜나하면 3:1에서는 말라기란 말이 내사자라고 되어 있다. 70인역에는 1:1의 말라기란 이름까지도 내사자라고 변역하였다. 랍비의 전승에는 말라기가 에스라 서기관 또는 모르드개와 동일인일 것이라고 추측되고 있다.

 말라기서는 야훼께서 이스라엘을 아직도 사랑하고 계신다는 분명하고 명확한 진술로 시작하여 모세의 율법을 기억하라는 열렬한 권면으로 끝맺고 있는데 말라기서의 영적 목표는 오실 메시야의 길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제 9 장  결론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특별에서 특별하게 인정된 직분에 속하여 있던 사람들이었다. 왕, 사사 그리고 제사장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높은 지위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예언자의 지위는 그들의 것과 같지 않았다. 왕이나 제사장은 세습적인 것이었지만, 반면 예언자는 세습적인 신분이 아니었다. 예언자는 하나님에 의해서 임명이 되었고 그의 직임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왕, 제사장 그리고 사사는 세워진 법과 순서에 따라 행하였다. 하나님이 이와 같은 중재자 직분을 통하지 않고 직접 말씀하시고 원하실 때 항상 예언자를 택하셨다. 예언자는 신성한 주권자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자였다. 그의 주된 관심은 특별한 그 당시의 상활에 대해서 하나님의 메시지로 확신하고 있는 내용을 전달하는 데 있었다.

 B.C. 9세기경 엘리야 시대에 많은 예언자들로 이스라엘이 넘치고 있었지만 참으로 선한 일을 행한 예언자는 그렇게 많지 않은 사실을 보게 된다. 주를 대신해서 말하는 다양한 예언 속에는 사실상 진리를 말하고 있는 것을 알지만 거짓 예언자의 문제는 대단히 심각한 문제였다. 그리고 당시에는 이방 종교의 제사장이나 예언자들의 위협도 대단한 것이었다. 예언자 엘리야와 엘리사는 이 같은 과정을 극적으로 중단시키는 운동을 지휘하였다.

 B.C. 6세기경 남북의 예언자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유다의 정치적인 의미의 국가를 멸망시키려 하시며, 그 백성들을 열국 가운데 흩으실 것이라고 선포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예언하기를 하나님은 팔레스타인에 다시 그들을 회복시킬 것이며, 하나님의 왕국의 새롭고 영광스런 시대가 땅위에 시작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스라엘과 유대는 멸망을 당하고 그들의 백성들은 흩어지게 되었으나 예언자들의 말씀없이는 아무도 그 참상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될 것이다.

 예언의 역사적 배경에 있어서 가나안 예언이 이스라엘의 예언에 중요한 영향을 끼쳐왔다고 간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이나 시리아의 중재자들에 대한 성서 외적 자료가 실제로는 매우 적으며, 이러한 자료들이 이스라엘 왕정 사회에서의 예언의 역할에 대해 조명해 주는 바도 거의 없다.

 고대 근동의 예언자들은 현대에 사는 그들의 상대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사회와 복잡하게 연관되어 있었으며 수많은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메소포타미아의 점쟁이나 팔레스타인의 예언자와 같은 일부의 중재자들은 중앙 사회의 일원으로서 그 사회 구조를 조정하고 유지하는 데 조력했다. 그러한 인물들은 전체 사회나 또는 지배 엘리트 계층에 의해서 신중하게 선택되어 훈련받았고 또 후원 받았다.

 고대 근동의 자료는 고대의 예언자들과 그들의 사회 간의 관계가 현대 문화에 있어서 예언자와 사회의 관계만큼이나 매우 복잡하였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예언도 이와 유사한 복잡성을 띠고 있다고 추정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이스라엘 예언에 있어서 에브라임 전승에 의하면 예언자들은 종교적인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지도자이기도 하였으며 그들의 예언 활동은 사회를 유지시켜주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더욱이 초기 에브라임 예언자들은 제의적 기능도 지니고 있었는데 이것은 그들의 예언적 기능과 분명히 구별되지는 않는다. 왕정 수립 후 에브라임 예언자들은 일차적으로 사회 주변에서 활동하였으며 지지 집단을 이루고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견해들에 대한 대변자 역할을 하였다.

 유다 전승에 의하면 예언자들은 중앙의 사회 구조 안에서 활동했으며, 거기에서 그들은 사회적 안정을 유지하도록 도왔다. 이러한 직무의 일부분으로 그들은 고대의 종교적 전통을 보존하였으며, 그들 중 어떤 사람은 궁정 예언자로서 왕의 고문으로 일하였다.

 성서 자료들은 포로 이전 시기의 유다 예언자들의 행동 특성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런 통찰력도 주는 바가 없다. 그들 대부분은 예루살렘의 표준 언어를 익숙하게 사용한 것 같지만 영에 사로잡혔을 때의 모든 유다 예언자들이 거의 똑같은 양식으로 말하고 행동했다는 것을 증명할 만한 충분한 자료는 없다. 에스겔의 경우를 제외하면, 황홀경이 영에 사로잡힐 때마다 규칙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적 행동의 일부였다는 지적은 없다. 유다에서 중앙의 예언자들은 기존의 사회 구조에 속했기 때문에 주변적 예언자들보다 훨씬 더 그들은 지지 세력의 엄격한 통제를 받았다. 비정상적인 신들림 행위는 용납되지 않았으며 중앙의 예언자들은 사회적 기대를 충족시켜야만 했다. 그러나 성서의 자료들은 유다의 예언자들의 행동에 대해서 거의 언급하고 있지 않다. 성서 자료의 침묵은 단순히 유다 저자들이 예언에 그리 큰 비중을 두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예언자들은 모세 아래에 있다. 모세가 그리스도의 모형인 것처럼 예언자 무리도 모세 아래 있는 집단이며 장차 올 위대한 예언자의 전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예언자들이 그들의 메시지에 대하여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그들은 다가오는 구원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해 말하였다.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여러 방법으로 이스라엘의 자녀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들은 메시지가 전부 받아들여졌을때 그들이 메시야 사역의 통일된 모습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그들을 통하여 죄악된 세계에 구속자의 오심을 알리셨다. 그러므로 예언자들은 단순한 종교적 천재나 지도자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 그들은 단지 그렇게만 생각하는 것은 그들을 완전히 오해하는 것이다. 그들의 메시지는 사람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모든 예언의 말씀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이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현대에도 한국 개신교 교계에는 많은 주의 종들이 예언을 한다고 하는 가운데 예언이 범람하고 있는 실정인데 예언은 앞날을 예견하여 말하는 기능도 있지만 하지만 예언은 말씀에 비추어 볼 때에 예언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서 선포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가장 성서적인 예언은 예언하는 사람이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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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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