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자들!! 제자들!!

[스크랩] 누가신학의 제자도의 조건

하나님아들 2013. 8. 3. 11:40

-= IMAGE 1 =-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누가신학의 제자도의 조건 Requirements for Discipleship in Lukan Theology.
― 복음서의 다양성에 근거한 본문 해석의 한 경우 ―A Test-Case for a Proper Interpretation for Solving the Diversity of the Synoptic Gospels. ----- 김경진 교수 (신약학)

1. 들어가는 글
2. 복음서 해석의 두 가지 원리
3. 본문 상의 차이점
4. 누가신학의 제자도의 조건
3.1. 제자도의 조건으로써의 회심
3.2. 제자도의 조건으로써의 pa,nta 포기
5. 나가는 글
----------------------------------------------------------
1. 들어가는 글
공관복음서는 통일성(unity)과 다양성(diversity)을 모두 갖춘 책이다. 통일성(統一性)이라 함은 복음서의 주인공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심(poiei/n; 사역)과 가르치심(dida,skein; 교훈)을 근거로 역사적 사실로서의 동질성 혹은 복음서 사이의 공통분모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통일성에 대한 일반적 전제는 사역의 핵심으로서의 십자가 사건, 즉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과, 교훈의 핵심으로서의 하나님의 나라이다. 반면에 다양성(多樣性)은 동일한 사건에 대한 각기 다른 해석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결국 복음서기자의 의도와 동기, 즉 복음서 기자의 신학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공관복음서를 이해하고 해석함에 있어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우리가 읽는 본문이 이러한 통일성과 다양성을 어떻게 드러내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통일성의 문제는 대체로 '십자가'와 '하나님의 나라'라는 두 가지 커다란 범주에 의거하여 풀이될 수 있으므로, 그다지 큰 문제를 야기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양성의 문제는 일단 각 복음서 전체의 주제와 신학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까닭에, 그에 대한 기본 이해가 없으면 그 해답을 얻기가 용이하지 않음으로, 그다지 쉽지 않은 숙제가 될 수 있다. 그리하여 사실 아직까지 공관복음 사이의 차이점들에 대한 신학적 해석이 전면적으로 제시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과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아니하면, 본인이 다른 곳에서 지적한 대로, 성경학도(學徒)와 설교자는 마가복음을 본문으로 하면서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을 끌어들여 혼합함으로써, 여전히 디아테사론(Diatessarwn)적으로 설교하게 되는 것이다. 즉 공관복음서 중 어느 하나를 택하든지, 그 내용은 별반 다르지 않은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마가복음을 누가복음처럼 설교하고, 누가복음을 마태복음처럼 설교하는, 적지 아니 실망스런 결과를 맞게 되는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주님은 우리에게 네 권의 복음서를 통합하여 이해하도록, 쉽게 말하면 네 권의 책을 섞어 사용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글은 각 복음서기자의 신학에 근거하여 주어진 본문을 해석하는 한 실례를 제시함으로, 바른 복음서 이해 및 해석을 돕고자 의도된 것이다. 실례로서 제시하는 본문은 누가복음 5장 1-11절, 즉 예수님이 최초로 네 명의 어부를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이다.

2. 복음서 해석의 두 가지 원리
공관복음서를 해석함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유의해야 하는 두 가지 사실은 본문이 위치한 문맥(context)과 다른 복음서와의 차이점에 대한 관찰이다.
첫째로, 본문의 문맥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복음서가 연대기적으로 기술된 역사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공관복음서에 기록된 주님의 일대기, 즉 주님의 사역의 순서(order)는 모두 동일하지 않고, 복음서마다 각기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다. 여기서 사역의 순서는 저자(著者)에게는 자료의 배열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를 저자의 입장에서 고려한다면, 저자가 주어진 수중(手中)의 자료를 자기 나름대로 다른 복음서와는 다르게 배열하는 것은, 곧 그 저자의 의도와 동기를 반영한 것이고, 이는 곧 그만의 신학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서를 이해하고 연구함에 있어서, 우선적으로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그 본문이 위치한 문맥에 대한 적당한 관심인 것이다.
둘째로,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본문의 다른 복음서와의 차이점이다. 여기서 차이점은 성령 하나님의 허락 하에 이루어진 저자의 신학적 작업의 결과로 이해되는데, 단어나 구절을 추가 혹은 생략하기도 하고, 본문 내에서 그 위치를 바꾸기도 함으로써 발생한다. 따라서 공관복음서를 이해하려는 연구자나 설교자는 항상 주어진 본문을 상호 비교, 관찰함으로써 무엇이 추가되고 생략되었는지, 혹은 단어나 구절이 주어진 본문 내에서 위치가 바꿔지지는 않았는지, 유심히 관찰해야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자료의 각기 다른 배열이나 복음서 간의 다양성을 통일성의 관점에서만 해석하여, 그 차이점을 무시하는 ‘의도적 태만’을 경계해야 한다. 어찌하여 다르게 배열된 문맥을 하나의 통일된 구조 혹은 순서로만 이해하려 하는가? 또 같은 말씀(saying)이나 이야기(narrative)를 다르게 기록함으로 존재하는 다양성을 무시하고 조화(調和)만을 중시한 나머지 통일성의 견지에서 하나로 묶거나 섞으려하는가? 이것은, 거듭 말하지만, 디아테사론적 사고방식에 비롯된 그릇된 해석 방법이다. 오늘 우리가 읽는 복음서가 모두 성령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믿는다면, 다르게 배열된 사건의 구조 및 다르게 기록된 말씀 혹은 사건(이야기) 역시 성령 하나님의 허락 하에 이뤄진 것으로써 그에 상응하는 명백한 의도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숨겨진 의도를 찾으려 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지, 이것을 찾기가 어려움으로 배제하거나 혹은 사소한 것으로 무시하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과오(過誤)인 것이다. 조금 심하게 표현한다면, 이것은 성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비성경적 태도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제 주어진 본문을 이러한 원리에 따라 살펴봄으로써, 드러나는 결과와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주목하도록 하자.

3. 본문 상의 차이점
예수님이 어부들을 최초로 제자로 부르신 본문의 사건이 각 복음서 내에서 등장하는 문맥은 물론 각기 다르다. 문맥을 고려함에 있어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 한 가지는, 진보(進步)와 보수(保守)를 막론하고, 대다수의 학자들이 따르고 있는 두 자료설을 근거로 할 때, 일차적인 비교의 대상이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이라는 사실이다. 즉 마가복음을 근거로 하여, 마태와 누가가 어떻게 그것을 다르게 바꾸었는지를, 즉 확대하거나 생략하였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선은 누가복음/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을 비교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가복음을 기본적 자료로 누가와 마태가 확대하거나 축소하는 등의 변화를 부여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그러면, 마태와 누가의 비교는 불필요한 것처럼 보일는지 모르겠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단지 일차적 비교의 대상이 마가복음이라는 것을 강조하려는 까닭이다.
먼저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의 경우, 제자 부르심 사건은 주님이 첫 설교인 취임설교를 하신 후(막 1.14-15) 바로 그 다음 장면에 등장한다(막 1.16-20). 마태복음의 경우 역시 마가복음의 순서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4.17 = 취임설교; 4.18-22 = 제자 부르심.
그러나 누가복음의 경우는 이 두 복음서와 그 순서가 사뭇 다르다. 우선은, 첫 설교에 해당하는 취임설교의 내용과 그 설교가 위치한 문맥이 다르다(눅 4.16-30). 마가, 마태복음에서 주님은 사역을 시작하신 이후 얼마간의 시간이 경과한 후 고향인 나사렛을 방문하는 것으로 기록되어있으나, 누가복음에서 주님은 사역의 시작에서부터 나사렛이 그 배경이 되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취임설교의 내용이 다르다.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은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도래(到來)와 그에 대한 준비로서의 회개(悔改)에 대한 강조라는 견지에서 볼 때 동일선상에 있다고 보인다. 그러나 누가복음은 주님의 취임설교에서 이 두 복음서가 언급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와 회개를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이사야 61장의 내용을 언급하면서, 주님의 사역의 방향을 매우 다르게 제시하고 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눅 4.17-18)
이러한 차이점에서 우리는 누가가 마가, 마태와는 달리 주님의 사역의 성격을 다르게 제시하고자 하는 신학적 의도를 발견할 수 있다. 한 마디로, 누가복음에서 주님은 가난한 자, 포로 된 자, 눌린 자, 눈먼 자 등과 같이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종교적으로 소외되고 배척당한 소자(小子) 및 약자(弱者)들을 위해 오신 메시아 사역의 특징을 바르게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누가의 강조점은 계속되는 그의 글에서 지속적으로 발견된다.
취임설교와 나사렛에서의 사역 이후 누가는 가버나움에서의 주님의 사역을 소개한다. 즉 가버나움 회당에서의 가르침과 이후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의 치유 사건이 등장한다(눅 4.31-37). 그런데 이 사건은 마가복음에는 네 명의 어부를 제자로 부른 장면 이후에 등장한다(막 1.21-28). 그리고 마태복음에서 이 사건은 생략되었다.
누가복음에서 가버나움 회당 사건 이후 등장하는 사건은 시몬의 장모(丈母)의 열병을 치유하는 장면이다(눅 4.38-39). 그리고 이러한 순서는 마가복음에서도 동일하다. 그런데 마태복음의 경우는 이 두 복음서와는 달리, 산상설교가 끝난 후 8장에서 가버나움의 백부장의 하인을 치유한 사건 이후에 비로소 시몬의 장모 치유 사건이 기록된다(마 8.14-17). 그런데 이 가버나움 백부장의 하인의 치유 사건은 마가복음에는 생략되어있고, 누가복음에는 평지설교가 끝난 후 7장에서 등장한다(눅 7.2-10). 이러한 차이점을 통하여, 결과적으로 우리는 공관복음서가 그 사건의 순서에 있어서 각기 다르게 기록되어있음을 다시금 확연하게 알 수 있게 된다.
누가복음에서 시몬의 장모의 치유 사건 이후에, 저녁 무렵 시행된 병자들 치유와 귀신추방 사건이 등장하며(눅 4.40-41), 그 후에는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던 주님을 찾아오신 제자들에게 주님이 자신의 사역의 목적을 선포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눅 4.42-44). 그리고 이러한 순서는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과 일치함으로 누가가 마가의 순서를 따른 것으로 이해된다(막 1.32-39). 여기서 마태복음의 경우는 마가, 누가와는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어 있으므로, 잠정적으로 우리의 논의에서 제외하기로 한다.
위의 결과를 종합하여 볼 때, 마가복음은 주님의 취임설교 이후 제자 부르심 사건이 등장하고, 이어서 가버나움 회당에서의 설교와 귀신추방에 뒤이어, 시몬의 장모 치유사건이 등장한다. 그런데 누가복음의 경우는 이와는 다르게, 마가복음과는 다른 내용의 주님의 취임설교 이후 가버나움 회당에서의 설교와 귀신추방에 뒤이어, 시몬의 장모 치유 사건이 등장하고, 그 다음에 비로소 제자 부르심 사건이 나타난다(눅 5.1-11). 이상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마가복음에서는 제자 부르심 사건이 먼저 등장하고 그 다음에 시몬의 장모 치유사건이 등장하는 반면에, 누가복음에서는 시몬의 장모 치유사건이 등장한 이후에 제자 부르심 사건이 등장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그 순서가 완전히 반대로 뒤바뀌었던 것이다. 이를 도표로 그리면 다음과 같다.
마가복음 제자 부르심 장모 치유
누가복음 장모 치유 제자 부르심
이제 그러면 이러한 결과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 질문은 순서상의 차이로만 해결될 것이 아니고, 그와 함께 누가가 부여한 본문상의 변화를 또한 고려함으로써 풀이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본문상의 차이는 무엇일까?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마가복음의 제자 부르심 사건(막 1.16-20)과 누가복음의 그것(눅 5.1-11)은 그 내용이 사뭇 달라서 마치 다른 사건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누가복음의 사건은 내용적으로 볼 때 오히려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에 나오는 베드로의 복권(復權) 사건과 유사하게 보인다(요 21.2-14). 베드로를 비롯하여 제자들이 밤새도록 수고하여 고기를 잡았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다가, 새벽녘에 찾아오신 주님의 명령을 따라 그물을 던지자 수많은 고기를 잡았다는 대략의 내용이 유사한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다른 점은 누가복음에서는 그 사건 이후 제자들이 주님을 따라 나섰으나, 요한복음에서는 주님이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한 후 베드로에게 재차 사명을 일깨우는 복권의 사건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아울러 결정적인 차이점은 누가복음에서 이 사건은 주님의 사역 초창기에 등장하나, 요한복음에서는 오히려 부활 이후의 사건이자 주님의 마지막 사역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런 내용상의 비교를 참작할 때, 비록 요한복음과 형태상의 유사성은 인정된다 하더라도, 누가복음의 이 사건은 마가복음의 사건에 대한 해석적 확대로 이해해야 될 줄로 여겨진다.
그러면 이제 제기되는 질문은 왜 그리고 어떻게 누가는 마가복음을 확대하여 해석하였을까 하는 점이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크게 두 가지로 제시될 수 있겠다. 첫째로, 마가는 주님의 제자 부르심 사건의 핵심만을 간략하게 소개한 반면에, 누가는 그 사건의 핵심이 되는 인물인 베드로가 어떻게 주님을 제자로서 따르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심리적 변화, 즉 회심(回心)에 초점을 두어 기록하였고, 둘째로, 그와 함께 제자가 되기 위한 조건 중 누가가 중요하게 강조하는 특징 하나를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4. 누가신학에서의 제자도의 조건
4.1. 제자도의 조건으로써의 회심(回心)
왜 누가는 베드로의 회심을 상세하게 묘사하는 것일까? 최초의 네 명의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신 사건을 소개함에 있어서 누가가 마가복음이나 마태복음보다 자세하게 밝히고 있는 것은 베드로가 회심하는 장면이다. 사실 마가나 마태복음에서는 베드로의 회심에 대하여 전혀 언급이 없다. 그를 비롯하여 다른 어부들은 자신을 따라오라는 주님의 명령을 듣자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즉시 주님을 따라나선 것으로 되어있다(막 1.16-20; 마 4.18-22). 그러나 누가는 이 사건을 그처럼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지 않다. 누가의 묘사에 따르면, 사실 베드로는 밤새 그물을 던졌으나 전혀 잡은 것이 없는 상황에서 목수인 예수님에게서 깊은 데 그물을 던지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은근히 불만스러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5장 5절에서 암시된다: “…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 수고를 하였으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던지리이다’ (evpista,ta( di v o[lhj nukto.j kopia,santej ouvde.n evla,bomen) evpi. de. tw|/ r`h,mati, sou calavsw ta. di,ktua))….” 우리말 번역은 “말씀에 의지하여”란 표현으로 인해 베드로의 이 말이 매우 신앙적으로 들리는 것으로 보이는데, 원문에 의하면 그것은 단지 “당신의 말씀에 따라”(evpi. de. tw|/ r`h,mati, sou; at your word; auf dein Wort)이다. 베드로의 말이 부정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음을 드러내주는 다른 증거는 8절에서의 베드로의 고백이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ivdw.n de. Si,mwn Pe,troj prose,pesen toi/j go,nasin vIhsou/ le,gwnn) e;xelqe avp v evmou/( o[ti avnh.r a`martwlo,j eivmi( ku,rie)). 고기를 많이 잡은 상황에서 왜 이제 베드로는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며 부정한 자신을 떠날 것을 주님에게 간청하는가? 또한 그가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呼稱)도 5절에서는 ‘선생’(evpista,ta)이었으나 8절에서는 ‘주'(ku,rie)로 바뀌었다. 이것 역시 베드로의 인식의 변화, 즉 회심(回心)의 한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할 때 누가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베드로가 어떻게 회심하였는지를 회화적으로 잘 묘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로써 누가는 제자로 부름을 받는 자들이 우선적으로 갖추어야 할 요건 중 하나가 진정한 회심임을 가르치고자 하였을 것으로 우리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제자도의 이런 요소를 부각하기 위하여, 우리는 누가가 그가 저술한 두 권의 긴 책에서 주님을 만난 사람들의 회심에 대하여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누가복음에서 회심과 관련하여 우선적으로 떠오르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선구자 세례 요한의 종말론적 설교를 듣고 찾아온 무리와 세리와 군병들이다(눅 3.10-14). 이 세 그룹이 세례 요한에게 나아와 한결같이 물었던 질문, “그러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ti, ou=n poih,swmen*)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세례 요한의 설교에 대한 반응이었다. 그리고 이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으로서의 세례 요한의 권면이 누가복음에만 등장하고, 또한 ti, poih,swmen*이 누가복음의 속편인 사도행전 2장 37절에서 다시 등장하는 것으로 참작할 때, 우리는 누가가 그만큼 회심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졌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 누가복음에서 회심과 관련하여 눈에 띠는 인물은 누가복음에만 등장하는 인물인 여리고의 세리 장(長) 삭개오이다(눅 19.1-10). 사실 이 사건이 위치한 문맥을 보면, 부자 삭개오는 그 앞에 등장하는 부자 관원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영생(永生)을 얻기 위해 주님을 찾아온 부자 관원은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처방을 주님을 통해 들었지만 그가 소유한 많은 재물로 인해 고민 중에 있었다. 그러나 마가복음이나 마태복음에서처럼 현장을 떠나가지 않음으로 하여 여전히 구원의 가능성은 남아있는 것이다(cf. 막 10.22-23; 마 19.22-23; 눅 18.23-24). 이 사건 이후 소경치유 사건이 등장하고(눅 18.35-43), 그 다음에 삭개오 사건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렇다면 그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삽입된 소경치유 사건은 상징적인 의미를 시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영생(永生)의 비밀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목하 고민 중인 부자 관원은 마치 소경처럼 영적으로 어두운 상태에 처해있음에 반해, 기꺼이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나눠줄 뿐만 아니라 남의 것을 토색한 것이 있으면 4배나 갚겠다고 선언함으로써 그 가진 바 재산 모두를 포기할 용의를 내보인 삭개오는 영적으로 눈을 뜬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이방인과 죄인처럼 간주되었던 세리, 그것도 세리의 장이었던 삭개오의 회심의 과정이 이처럼 자세하게 극적으로 묘사된 것은 제자 됨의 요건 중 하나가 진정한 회심임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면서, 누가신학의 제자도의 한 특징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회심에 관한 한 사도행전에서 눈에 띠는 인물은 초대교회의 최초의 선교사이자 최고의 신학자인 사도 바울이다(행 9.1-9; 22.2-21; 26.2-23). 베드로나 삭개오처럼 한 번이 아니고, 세 번씩이나 반복하여 사도 바울의 회심이 같은 책에서 소개되었다는 것은 누가가 얼마나 그의 회심을 중요하게 간주하였는지를 보여준다.
누가가 이처럼 주님을 만난 인물들의 회심을 상세하게 기술한 것은, 아마도 그 자신이 이러한 과정의 회심을 겪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이들이 모두 주님의 사역과 초대교회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위인들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누가는 주님을 따르기 전(前) 제자들이 갖추어야 할 요건 중 하나가 바로 진정한 회심임을 지적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4.2. 제자도의 조건으로써의 pa,nta 포기
사건의 도치를 통하여 누가가 의도한 결과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해답은 본문의 마지막 구절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kai. katagago,ntej ta. ploi/a evpi. th.n gh/n avfe,ntej pa,nta hvkolou,qhsan auvtw/|; 눅 5.11). 이 구절에 대응하는 마가복음의 구절은 1장 18절과 20절인데, 이들 구절과 누가복음 5장 11절과의 사이에서 두드러진 차이점은 “모든 것”(pa,nta)이다. 그러면 왜 마가는 pa,nta를 사용하지 않고, 누가만 이 pa,nta를 사용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바로 누가가 사건의 도치(倒置)를 통하여 유도한 결과라고 생각된다. 이를 풀어 설명하자면, 마가복음에서는 제자 부르심 사건이 나온 이후 시몬의 장모(丈母) 치유 사건이 등장함으로써 제자들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제자로 활동하면서도, 여전히 가족을 돌보아야 하는 위치에 머물러 있음을 보게 된다. 다시 말하면, 아직까지 과거와의 완전한 단절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사람을 낚아야 할 주님의 제자로서의 온전한 모습이 아닐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누가복음에서는 시몬의 장모(丈母) 치유 사건이 먼저 발생한 이후에 제자 부르심 사건이 등장함으로 인하여, 누가는 제자들이 주님을 따를 때 모든 것을 버렸다는 사실을 강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이 그들을 부를 때, 시몬의 장모 치유 사건은 이미 끝나버린 과거의 사건으로서, 제자들은 더 이상 가족을 돌보아야 하는 의무나 속박이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누가는 제자들이 주님을 따를 때 pa,nta를 버리고 완전한 의미에서의 제자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됨으로써, 제자 됨의 조건으로써 재물 및 소유의 포기를 강조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대로 누가공동체를 향한 교훈이 됨으로써, 주님을 따르려는 모든 제자들은 주님을 만나기 전(前) 과거의 속박과 구속을 상징하는 재물, 소유 및 가족, 즉 pa,nta를 온전히 그리고 철저히 포기해야만 됨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면 제자 됨의 조건으로 누가가 제시하는 이 두 가지 내용을 함께 고려할 때 얻어지는 결과는 회심은 재물 및 소유의 포기로 표현되어야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 다른 회심으로 앞서 언급한 삭개오의 경우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행전에 언급된 사도 바울의 경우에서는 이런 요소가 확인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기록 목적과 동기가 다르다는 점을 감안할 때, 반드시 일치되어야 한다고 강요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재물 및 소유의 포기가 온전한 회심의 징표로서 이해된다고 한다면, 사도 바울 역시 다메섹 도상에서의 회심 이후 기존에 누렸던 모든 특권과 혜택을 포기하였다는 바울서신의 기록을 고려할 때(빌 3.4-9; cf. 고후 11.22-27), 적어도 바울 사도의 삶에서 누가가 지적한 제자도의 조건은 충분히 확인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5. 나가는 글
이제까지의 논의를 통하여 우리는 복음서의 다양성에 근거한 본문 해석의 한 실례로서, 주님이 최초의 네 명의 어부 제자들을 부른 사건을 살펴보았다. 누가는 이 사건을 마가, 마태복음과는 달리 시몬의 장모치유 사건 이후에 배열함으로써, 그리고 베드로의 회심을 자세하게 설명함으로써,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온전한 제자가 되기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위하여 철저한 회심과 함께, 또한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할 준비와 각오가 되어있어야 함을 강조하고자 하였음을 발견하였다. 그 결과로서, 우리는 누가가 제자도의 조건으로서의 두 요소, 철저한 회심과 그 증거로서의 재물, 소유 및 가정의 포기를 부각시키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특징을 제자도의 조건으로 드러내고 강조하기 위하여, 누가는 마가복음의 구조와 내용에 변화를 주어 자신의 제자도 신학을 표현하는데 성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이러한 시도를 통하여 드러난 이러한 결과는 복음서 사이의 다른 많은 차이점을 해석하고 풀이하는데 유용한 하나의 본보기를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향후의 복음서 및 누가신학 연구에 하나의 방향을 시사하는 것으로써 적게나마 그 기여함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출처 : 智本知神
글쓴이 : Healer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