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와 하나님과의 만남
예배론 - 김남준 목사
들어가는 말
중심부에는 반드시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향한 참된 사랑과 경배가 있다. 그리고 예배는 바로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의 전형적인 표현이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가 이루어지고 인간의 경험 세계 속에 자신의 성품과 하신 일을 알게 해 주실 때 인간은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우리는 교회 안에서 누룩처럼 번져 가는 경박하고 단지 의무에 매인, 아니 의무감에서조차 자유로운 예배 태도들을 본다.
등록한 교인들의 수에 비하면 비참할 정도로 적은 수의 사람들만이 예배에 참석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이러한 세태를 거의 당연한 것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다. 주일 오전 예배에 나오는 교인 중 단 십 퍼센트도 저녁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교회가 늘어나고 있다. 이제 수요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교인은 거의 없는 세태를 맞이하게 되었다.
예배 상황의 위기
이렇게 가다가는 이 십 년 후쯤 되어서는 텅 빈 교회당이 되지 아니 하리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도대체 예배드려야 할 이 지정된 시간에 자신의 예배의 의무를 버리고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들은 정말 하나님께 예배하기조차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 예배 시간을 아끼며 살면서 그 시간으로 이 세상에서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 것인가? 보다 심각한 것은 예배의 의무에 대해 방종할 정도로 자유로워진 그리스도인들의 사고와 행동이다. 신앙에 있어서 예배의 의무를 져버리는 것은 곧 하나님을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을 막 보는 반신앙적인 행동의 시작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면 그 은혜로 예배를 드리라”고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아주 단순하게 우리에게 명령한다. 거룩하신 하나님께 예배하라고 말이다. 따라서 은혜 생활에서 물러나면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풍조는 실로 개탄스러운 일이다.
청교도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늘 깊이 가슴에 새긴 단어는 “의무”라는 단어였다.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로써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행하여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명심하였다. 만약에 마음이 따라오지 않기 때문에 신앙 생활의 의무를 얼마든지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배교적인 무율법주의자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율법적인 의무감만으로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예배할 마음도 없고 나아가서 예배의 의무마저 포기한 것은 배교에 가까운 사고 방식이다.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명령하시든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바로 하나님을 막 보겠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단지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유무로 그리스도인 인지의 여부를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예배에 참석하지만 거짓된 그리스도인이 있는 것처럼 드려지는 예배에도 헛된 예배가 있다. 참된 신앙을 가진 사람은 헛된 예배에서 한없는 허기짐을 느끼고 거짓된 신앙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헛된 예배에서 대단한 만족감을 느낀다. 하나님의 백성들 중에 행해지는 헛된 예배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단호한 태도를 보며 참된 예배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유행하던 헛된 예배에 대하여 단호하게 경고하신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마15:8)
여러 예배와 범주
성경은 여러 곳에서 개인적인 예배의 중요성과 그 예들을 제시하고 있다. 넓은 의미에서 볼 때 개인적인 예배는 경건 생활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행10:2,9등). 경건의 실천과 기도와 성경 읽기, 자기성찰과 진리를 묵상하는 것 같은 것들이 바로 그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삶 그 자체가 개인적인 예배라고 볼 수도 있다(롬12:1-3). 이런 것들은 공적인 예배의 기초가 되는 것과 함께 기독교 신앙을 이어가는데 있어서 근간이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개인적인 예배는 삶의 지평으로까지 확장된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한 바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조오지 스윈녹(George Swinnock)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예배의 이러한 의미를 잘 보여준다.
“경건(godliness)은 하나님의 계시된 뜻을 따라 마음과 삶을 다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경건이라는 말을 설명함에 있어서 나는 네 가지를 주목하고자한다. 첫째는 행동이 곧 예배라는 사실과, 둘째는 이 예배의 대상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고, 셋째로는 예배의 범위가 마음과 삶 전체라는 사실이며, 넷째로는 예배가 하나님의 계시된 뜻을 따르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배는 인간이 하나님께 덕을 입고 있고 그분께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포함한다....그에게 마땅한 영광을 돌리는 것이 곧 진정한 경건이다. 이것을 부인하는 것은 무신론이며 불신앙이다. 내면적으로는 모든 경외와 존경, 외면적으로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봉사 이것들은 하나이며, 예배라는 한 마디의 말에 모두 포함되는 것이다” 공적인 예배의 중요성
그러나 성경에서는 공적인 예배를 개인적인 예배와는 별도로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 함께 모여 하나님을 한 마음으로 경배하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신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리고 그러한 공적 예배가 하나님께서 백성들로 하여금 당신과의 관계를 확인시켜 주시는 장(場)이었다. 이에 대해 데이빗 클락슨(David Clarkson)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공적인 예배에서 죽은 자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듣는 자들을 살아난다. 여기에서 성자께서는 병든 영혼들을 말씀으로 고치신다.
그 예배에서 성자께서는 사단을 쫓아내신다. 물론 하나님께서 공적인 예배에서만 이 일을 행하신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공적인 예배는 주님께서 이러한 일들을 행하시는 유일한 정상적인 수단이다.” 하나님께서는 개인적인 경배보다는 공적인 예배를 통해서 보다 더 크게 영광을 받으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거룩하신 분이라고 인정할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신다. 그리고 그러한 인정이 더욱 더 공개적이고 대중적일수록 하나님은 더욱 거룩히 여김을 받으신다.
성경이 바라보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이 처럼 온전한 예배 관계가 온 땅 위에 보편화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구약의 선지자 하박국이 바라보았던 비젼-“대저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합2:14)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첫 부분 세 간구-“...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9-10)는 같은 지평을 바라보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나라의 회복은 곧 예배 관계의 회복이라고 할 수 있다.
예배는 영원하신 분(the Eetrnal)께 대한 피조물의 응답이다. 이러한 예배의 영역은 인간들에만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온 우주의 전 생명체가 보이든 보이지 않든 예배의 행위로서 기원자이시며, 유지자이시며, 목적 자체이신 그분을 영화롭게 하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다만 인간과 관련 시켜서 이 문제를 생각해 볼 때 인간 안에서 예배의 정신의 출현과 발달 과정, 혹은 그 예배자들의 예배 정신이 삶에 끼치는 영향을 상고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예배는 그 표현 방식이 무엇이든지 그것은 언제나 주관적이고 객관적인 관계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초월자에 대한 인정이고 예배자에 대하여 타자(the Other)인 독립적인 실체에 대한 경외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예배는 근본적으로 존재론에 뿌리 박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성경과 예배의 역사
이스라엘의 역사는 예배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어느 때에든지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크고 작은 무리들이 있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모여서 그분을 경배하는 공적인 예배는 편의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분명 편의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사람들은 언제나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서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예배하는 일들을 게을리 하였다.
그러나 시대가 어둡고 추울수록 참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함께 모여서 예배하여야 할 필요를 더욱 많이 느꼈다. 비록 적은 수의 사람이었다 할지라도 언제나 모이기를 즐거워하였으며 그 일에 가치를 두었다. 지체들과 함께 한 마음으로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일에 힘썼고 그들은 거기에서 실제적인 영혼의 유익을 얻었고 신앙을 지키면서 살아야 할 필연적인 의무감를 다졌다. 그들은 거기서 용기와 위로를 얻었다.
성경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공적인 예배에 대한 강조를 지속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고 난 즉시 그들이 잃어버린 첫 번째 축복은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예배의 상실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께 예배하는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오고 그들이 타락하자 그들이 하나님을 스스로 찾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숨어버리는 처지가 되었다(창3:10).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당시 예배에 관한 구체적인 예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통해 전해지는 교훈이 매우 영적이고 심오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의 신앙은 그들이 드리는 예배에 의하여 판단되었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 하신지라”(창4:4-5). 그들의 존재는 그들이 드리는 예배와 분리되지 아니하였고, 그들의 존재는 그들의 삶과 나뉘지 않았다. 아벨의 제사가 짐승의 제사였고, 가인의 제사가 곡식의 제사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두 사람의 제사에 대하여 다르게 반응하셨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이 사건에 대한 신약성경의 해설을 보면 이러한 사실이 분명해 진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히11:4). 아벨의 제사를 하나님이 받으신 것은 제물 자체가 아니라 아벨 자신이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믿음의 사람이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다.
온 땅에 생명 있는 것들을 물로써 심판하신 노아 홍수 사건 이후에 하나님과 다시 이 땅을 심판하지 않겠다는 약속의 증표를 주신 것도 바로 노아와 그 가족들이 방주에서 나와 온 땅을 심판하신 하나님께 예배하던 바로 그때였다. 경건한 족장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살았고 그 예배 속에서 믿음을 따라서 험악한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공급받았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단(壇)을 쌓았고 그것을 중심으로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졌고 그것이 하나님의 선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삶을 살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모세 시대에 와서는 이제 예배 행위가 단지 선택적으로 주어지는 일방적인 호의 베풂의 약속이 아니라, 율법을 따라 공적인 예배가 순종의 요구와 함께 징벌의 강제와 함께 제시된다. 성막과 성전의 공적인 예배에 함께 드리지 않는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회중에서 제외되어야 했던 사실은 이러한 점을 보여준다(출31:14, 민9:13).
신약시대에도 마찬가지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두 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그곳에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마18:20). 오순절 성령강림은 즉시 선명한 복음의 선포를 가져왔다. 교회는 진리를 외치는 설교자를 갖게 되었고 그 진리가 외쳐지는 곳에는 예배 공동체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예배 공동체를 중심으로 선교가 이루어졌고, 선교가 이루어지는 곳에는 예배 관계가 회복되었다. 좁은 의미의 공적인 예배가 회복되는 곳에는 넓은 의미의 삶의 예배가 회복되었다.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예배
이처럼 사도시대는 물론 구약에서부터 공적인 예배는 언제나 하나님을 찾는 영혼들에게 유익을 주는 수단이 되어 왔다. 참된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경험한다. 거기서 잠자던 영혼들을 깨우며, 죽은 자와 다름없는 영혼들을 살아나게 하고, 죄 사함과 하늘의 신령한 은혜를 받게 한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가장 잘 의식하게 되며, 그래서 자기의 죄악된 삶에 대하여 참회하며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회복하게 되는 것도 예배라는 은혜의 수단을 통하여 가장 잘 주어진다.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가 세상에 살지만 동시에 다른 나라에 속한 사람들이라는 신분을 가장 잘 깨닫게 된다.
조국 교회에 다니는 신자들의 수가 점차 줄고 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교회의 수는 늘어나지만 점차 소규모화 되어 가고 있는 것은 이 땅에서 기독교 선교가 얼마나 어려운 정황을 마주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주일 낮 예배에 교회당에서 만난 사람들이 저녁예배 시간에는 거의 다시 만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예배에 대한 열심히 식어가고 그래서 주일저녁예배 수요예배가 존폐의 위기에 놓인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대안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에게는 예배의 부흥이 필요하다.
그 동안 우리는 침체된 교회의 영적 상황을 갱신해 보기 위하여 여러 가지 방법론들을 교회 현장에 적용해 왔다. 결국 교회는 다양한 프로그램과 많은 기능들을 가지게 되었다. 한 마디로 교회가 바빠졌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프로그램이나 행사를 위주로 교인들을 즐겁게 하거나 몰아가는 식의 목회를 펼치는 동안에 가장 중요한 은혜의 방편인 예배가 소홀히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공적인 예배보다는 성경공부나 훈련 프로그램, 개인적인 경건 생활, 여러 가지 행사등이 교회의 중심적인 기능인 예배를 대치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교인들로 하여금 더욱 공적인 예배에 대한 의무감들을 약화시켰고 교회의 예배 공동체적인 고유한 성격을 약화시켰다.
이것은 단지 오늘날 예배자들의 태만한 신앙 생활 때문만은 아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여줄 수 있는 설교단이 예배를 장악하는 데 실패하고 있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직무는 예배 시간을 통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들려줌으로써 그들을 거룩하신 하나님의 면전 앞에 세워 주는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부름을 받았다는 것은 조금도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교회는 세상에게 바라는 변화된 삶을 이미 살아가고 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세상을 향해 바라는 예배 관계를 이미 누리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목회자는 이 일을 위하여 부름 받은 사람이다.
참된 제사의 조건
그리스도인들이 예배에 태만한 것은 예배 속에서 무엇인가 하나님의 실재를 인식하지 못하는 영적인 무감각에 기인한 바 크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단지 그리스도인들에게 공적인 예배에 참석하여야 할 필요만이 아니라 예배가 참된 예배가 되어야 할 교회의 부르심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제사가 성공한 제사가 있고 실패한 제사가 있었듯이 오늘날의 예배 또한 그것을 통하여 약속된 바를 성취하는 예배가 있고 그렇지 못한 예배가 있을 수 있다.
구약에 나오는 제사 규례를 읽으면서 자주 만나게 되는 공식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항상 경건한 긴장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조항이었다. “.....하면 열납되리라”와 “......하면 열납되지 아니하리라”는 것이다. 성경은 제사의 목표가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것임을 여러 차례 강조한다. 그리고 그러한 성경의 관심은 “...하면 열납되지 못하리라, ....하지 아니하면 열납되지 못하리라”는 공식으로 나타난다(레7:18, 19:7등). 성경의 이러한 관심은 예배자들의 관심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말해준다.
하나님께서 열납하시는 제사에는 하나님의 호의적인 응답이 있었고 그것은 항상 그들의 영혼과 육체에 커다란 기쁨과 감화를 끼쳤다. 열납되지 못할 제사나 예배를 계속하는 것은 하나님께 있어서 대단히 고통스러운 것이었으며 심지어 분노를 촉발하는 것이었다(사1:11-13, 렘4:4, 미6:6-8).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은 오늘날 예배자들이 빠지기 쉬운 자기 만족이나 예배 행위를 통하여 자기의(自己義)를 쌓는 것에 대해 얼마나 심각한 경고가 된다.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사랑과 경외심이 사라질 때, 차가운 형식으로써 하나님께 드리는 참된 예배를 대신하고 싶어하는 시도들이 언제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완전한 영이시고 인격이신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오늘날 예배가 단지 차가운 형식 속에서 우리 자신의 종교적인 요구나 만족시키기 위하여 행해지는 것인지 혹은 진심으로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만남을 갈망하는 동기에서 이루어지는 것인지가 진지하게 판단하여야 한다.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이 없는 속에서 이루어지는 예배라면 그 예배행위는 참된 예배 행위일수 없다. 사람에게는 종교적인 보상심리가 있다. 하나님 없이 살아왔던 악한 생활들을 한 순간 예배의 형식을 통하여 보상해 보려는 심리이다. 하나님과의 만남에 대한 기대 없이 차가운 예배 형식을 되풀이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기만이며 신성모독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앞에 보이려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은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사1:12-13).
예배와 하나님과의 만남
예배는 예배자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거룩하신 성품을 알고 그에게 합당한 경배를 돌려 드리고, 피조물로서의 자기의 본분을 상기하고, 영적인 임재 속에서 예배자들을 찾아오셔서 은혜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예배는 결코 그리스도의 죽음이나 부활의 의미를 되새기는 기념식이 아니다. 참된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그리스도의 중보적 사역를 통하여 죄인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옵는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가 다른 세속의 기관과 다른 것은 죄인들과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능하게 해주는 권세를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그가 어떤 사람이든지 인간에게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하나님이 당신을 떠나 죄 가운데 빠진 사람들을 어떻게 건지시는가? 소망 없이 살아가는 영혼을 부여안고 어두운 길에서 헤매며 사망과 흑암의 그늘 아래 앉아 곤고하고 쇠사슬에 매인 것처럼 비참한 인생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건지시는가? 삶과 죽음, 신앙과 불신앙의 갈림길에 서서 가야 할 길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그들의 갈 바를 보여주시는가? 그들은 모두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일들을 통해서 이런 변화들을 경험하게 되었다. 사람의 유일한 소망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요17:3). 거기에 구원이 있고 사랑을 아는 지식이 있고 은혜가 있으며 참된 위로가 있고,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게 할 능력이 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진리와 능력 안에서 예배를 드리는 일들을 통해서 이 모든 축복들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예배의 최대의 성취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예배자의 예배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통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에 대해 기대를 갖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나아오는 성도들의 갈망 어린 참여로 시작되고 그러한 예배를 받아 주시는 하나님의 응답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세상에 대한 사랑과 세속적인 욕망을 이루려는 열심은 영적인 예배를 향한 영혼의 열망을 감퇴시킨다. 그러므로 오늘날 예배가 참된 정신을 잃고 배교에 가까울 정도로 타락한 것은 곧 거룩한 것에 대한 열심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형식적인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안에 창궐해 가는 것은 형식적인 예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 자기를 드리는 헌신의 정신이 없고,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이 누구이신 지를 아는 지식이 없는 예배, 하나님의 현존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 주는 거룩한 예배에 깃 드는 독특한 권세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과 진노하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진리를 통해 신자들에게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형식적인 신자들이 양산되고 있는 것이다. 예배를 드리면서, 잃어버린 신앙의 기쁨과 하나님과의 만남의 축복에 대하여 안타까워하거나 마음 아파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소수인가? 세상을 탐하고 세상에 있는 것들에 탐닉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예배의 정신을 따라 사는 사람들의 정신이 아니다.
예배를 견디는가?
요즘은 예배가 성도들에게 인내를 필요로 하는 종교적인 의무라고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영과 진리 안에서, 즉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드려지는 예배는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예배 속에서 성령과의 교통이 없고 인간의 심령을 찌르는 하나님의 음성이 없는데 어떻게 무관심한 예배가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졸음과 무관심, 냉담함과 아무런 기대감이 없는 마음, 딴 생각으로 가득 찬 마음, 단지 예배가 끝날 때까지 예배를 견디는(?) 마음, 이런 것들이 오늘날 우리의 예배를 지배하고 있지 않는가? 어디서 하나님이 그 예배 가운데 함께 하시는 표징을 찾을 수 있을까?
성령이 예배를 장악하시고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힌 진리가 역사할 때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허물 많은 삶을 인하여 고뇌하고 참회를 경험하게 된다. 세속에 물든 신앙적인 가치관을 새롭게 하고 거룩한 섬김을 위한 헌신을 새롭게 다짐하게 된다. 이 모든 일들이 영으로 드리는 예배 속에서 일어난다. 비관적인 교회 시대일수록 더욱 예배다운 예배가 필요하다. 죄인들로 가득 찬 교회일수록 거룩한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예배의 필요성은 증대된다. 그리고 이러한 예배는 오직 성령이 함께 하심으로써만 가능하다.
예배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하나님의 백성들이 경배를 드리는 것이며, 경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대면이 이루어지는 자리이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하여 임재하신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예배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방문하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임재(the presence of God)”이라는 말은 너무나 감미로운 말이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실 수 있는 은사 중 가장 큰 축복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어떠한 선물도 하나님 자신의 임재하시는 축복과는 비교할 수 없다. 구약 성경에 강조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특권은 바로 그 백성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임재를 늘 가까이 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신4:7, 33:29, 수10:14, 시73:28). 똑같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불신자들과는 전혀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신령한 것들을 추구하며 살아가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 주는 힘이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예배를 통해서 온다는 것은 분명하다.
요한복음4:24의 “영과 진리”
그러면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예배는 어떻게 가능한가?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조차 갖지 않고 교회 생활을 하고 있다. 예배 시간은 점점 짧아지고 예배를 “드린다”기 보다는 “해치우는” 행사처럼 이해되고 있다. 개신교 예배에서 유지되어야 할 단순성과 자유함을 통하여 받는 영적인 감화보다는 의식과 형식에 대해 보다 많은 관심이 기울여지는 것도 바람직한 상황은 아니다. 예배에 있어서 형식이 복잡해지는 것은 예배에 마땅히 깃들여야 할 영성(靈性)의 쇠퇴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미 오십 여 년 전 죠오지 에반스(George Evans)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우리에게 경고가 된다.
“최근 예배라는 주제에 대하여 교회 안에서는 많은 논의가 있어왔다. 너무나 많은 관심이 예배에 있어서 외적인 사항들(outward details)이나 형식에 집중되었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예배에 있어서 성령의 문제는 논의에 있어서 부차적인 것이 되게 하였다. 예배당 건축이나 예식, 상징, 예배에 있어서 다른 부수적인 것들에 대하여 피 튀기는 연구가 경쟁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이러한 운동은 분명하고 거기에는 오직 하나의 종착역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여러 세기 동안의 교회의 역사에 의하여 명백해 진다. 그것은 교회의 영적인 힘의 쇠퇴와 예배에 있어서 형식과 의식의 증가가 반비례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영성이 쇠락(衰落)해져 감에 따라 형식과 의식은 증가하고 반대로 영적인 권세가 흥왕할수록 예배는 단순해지고 자유로워지며, 인위적인 형식을 벗어버리게 된다. 오늘날의 교회가 영적으로 쇠퇴해져가고 있다는 사실과 내면적인 실재(internal reality)가 외적인 꾸밈으로 대체되고, 인간의 굶주린 심령을 상징적인 형상이나 공연으로 만족시켜 보려고 헛된 시도를 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신약의 예배 정신을 가장 함축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다. 본문은 예배의 본질적인 요소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견해를 보여 주고 있다.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합당한 장소가 어디인지를 묻는 사마리아 여인의 질문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짧은 대답은 참된 예배에 대한 의미심장한 가르침을 내포하고 있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4:21-24).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예배가 “영과 진리 안에서(in spirit and truth)” 드려져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청교도들은 이 말은 곧 예배가 한편으로는 인간 내면에 관계된 심령의 일(heart-work)이며, 또 한 편으로는 하나님의 뜻과 하신 일에 대하여 계시된 실재를 향한 응답이며, 이것은 성령에 의하여 사람들의 마음에 적용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예배가 단순하고 성경적이어야 할 것을 고집하였다. 성경이 모든 진리의 원천(fountain-head)인 것처럼 예배에 있어서 단순성은 예배의 이 같은 내적 성격(inwardness)을 지켜주는 보호장치라고 믿었다.
오늘날의 교회가 흔히 그러하듯이 사마리아 사람인 그녀가 예배에 관하여 생각하고 있는 것은 오직 두 방법밖에 없었다. 하나는 자기네 사마리아인들의 방식으로 드리는 예배이고, 또 하나는 유대인들의 방식으로 드리는 예배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답변은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 예배가 그렇게 양자 택일의 문제가 아님을 보여 준 것이다. 이에 대하여 죤 맥아더(John MacAthur)는 이렇게 설명한다. “사마리아인들의 예배 방식의 문제는 무지 가운데 드리는 예배라는 것이다. 그들은 구약 성경 중 오직 모세 오경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경전으로 받기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영적인 지식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그들의 신앙은 적절한 지식이 없는 열광주의적인 예배(enthusiastic worship)로 특징지어졌었다. 그들은 영으로 예배하였으나 진리로 드리지는 못했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노니’ 라고 하신 이유였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전혀 다른 반대의 상황에 있었다. 그들은 구약의 전부를 경전으로 삼고 있었다. 그들은 진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영적으로 결핍되어 있었다. 바리새인들이 구제를 하고 금식을 하였지만 거기에는 마음이 깃들여 있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과 진이 안에서(in spirit and in truth)” 예배하라고 말씀하신다. 우선 주목할 것은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4:23)고 하신 말씀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교훈을 얻는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는 사실과 또 하나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방식대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이 교훈은 예배가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영원한 가치가 있는 은혜의 수단임을 가르쳐 주고 있다. 더욱이 본문의 문맥으로 볼 때 예수 그리스도와 사마리아여인이 대화 속에서 염두에 두고 있는 예배는 개인적인 예배가 아니라 공적인 예배이다. 즉 공적인 예배가 장소와 시간을 불문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의 신앙 생활의 변함없는 중요한 은혜의 방편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또 하나 보여 주는 진리는 하나님께서는 아무렇게나 자의적으로 드리는 예배에는 찾아오시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만나는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의도하는 방식을 따라 드려지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새 방식의 예배는 영(靈) 안에서, 그리고 진리(眞理)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영과 진리 안에서(in spirit and truth)”드려지는 예배가 바로 하나님의 방문이 약속된 예배라고 한다면, 참된 예배는 장소가 아니라 방식이 문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로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 가르침이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이다. 예루살렘에 대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장소적인 집착과의 결별을 선언하는 것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 가르침은 성령의 시대의 도래와 함께 예루살렘이라는 장소가 지시하는 구속사적인 의미가 자신을 통하여 성취될 것을 예고하는 말씀이기도 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 산”도, 예루살렘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직 문제가 되는 것은 “어디서”가 아니라 “어떻게”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어떻게 라는 말에 답이 되는 예배의 방식은 두 가지로 이루어지는 예배이다. 즉 영과 진리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이다. 여기서 우리는 신약 예배의 가장 중심적인 두 기둥을 만나게 된다. 그것은 성령과 진리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논의를 통해서 다루어지는 것처럼 이 두 요소는 서로 분리되지 말아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예배와 성령, 예배와 진리에 대하여 생각하게 된다.
첫째 요소: 성령
“영 안에서” 드리는 예배이어야 한다는 교훈은 당연히 예배와 성령의 관계에 대한 고찰로 나아가게 한다. 하나님은 본질상 영(靈)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예배하는 방식에 대하여 말씀하시기 직전에 여인에게 상기시켜 주신 것은 바로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영이시니라”(4:24).
먼저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예배자들은 이 한 가지 사실을 붙들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존재가 영이시라는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당연한 진리를 상기시켜 주신 것은 우리의 예배가 영적인 방식으로 드려져야 할 것을 지시하시는 것이다. 영이신 하나님이 충분히 우리와 교통할 수 있도록, 하나님과 사귈 수 있는 영혼을 분여 받은 예배자들이 순결하시고 완전하시고 거룩하신 영이신 하나님에 의하여 넉넉히 영향받을 수 있도록, 성령에 의하여 주도되는 예배로 드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 두 가지의 커다란 교훈을 던져 준다. 첫째는 예배를 주관하시는 성령에 관한 이해이고, 둘째는 영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의 자유이다.
예배를 말함에 있어서 성령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의 이해와 관련이 있다. 본질적으로 인간은 영적인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격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느끼는 일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무한한 질적인 차이와 죄로 말미암은 영향 때문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이러한 무한한 질적인 차이, 죄로 말미암는 영적인 교제의 단절을 극복하게 하는 단 하나의 하나님의 방법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그것을 기초로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영적인 교통이 있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가장 우선적인 사역은 죄에 대하여 깨닫고 회개하게 하는 것과 그것을 기초로 하나님에 대하여 깨닫게 하고 그 인격을 경험하게 하시는 것이다.
예배에 있어서 “영” 이라는 요소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는 때가 올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당시 사마리아인들과 유대인들은 그렇게 예배를 드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될 수 없었다. 참된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의 인격과 뜻에 대한 오해 때문이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들과는 다른 장소와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께 예배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드리는 예배가 진정으로 하나님께 기억되는 예배인지에 대하여 확신을 갖지 못하게 하는 한 요인이 되었다. 그들은 예배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 분명하게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본질적인 방식이 아니라, 단지 장소의 문제에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찾으시는 자가 누구이신 지를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4:23)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이렇게”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예배의 구체적인 순서가 아니다. 이것은 예배 전체가 무엇에 의하여 지배되어야 하는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시종일관 예배를 지배하고 있어야 할 원칙과 정신에 대하여, 나아가서는 실재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그리고 그 예배는 우선 영 안에서(in spirit), 영으로 드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예배는 한 사건을 기대하며 이루어지는 신앙의 행위(acts of faith)이다. 예배로 모이는 사람들이 예배 행위를 통하여 기대하여야 할 한 사건은 무엇인가? 그들로 하여금 정해진 시간에 약속한 장소에 나아와 예배 드리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기대감은 무엇을 향한 것이어야 하는가? 그것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경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응답이다. 따라서 예배의 결과로서 예배자들이 기대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이다(대하7:1-2, 11-12, 행2:47, 4:29-31).
하나님을 경배하는 예배의 결과로서 기대되어야 할 사건은 인간과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그리고 예배로부터 얻게 되는 교훈과 감화와 교제는 그 결과이어야 한다. 그리고 예배의 마지막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관계에 대하여 찬송과 갱신된 헌신을 되찾는 것이다(창25:14, 출15:1, 19:7-8등). 예배는 우리에게 이미 이루신 하나님의 일을 기억하는 것과 앞으로 우리를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일을 사모하는 가운데 드려져야 한다. 그리고 이 예배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이신 지를 새롭게 알고, 따라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붙들고 살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를 분명히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배는 결코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나 부활 사건을 기념하는 것일 수는 없다.
고대 중근동의 뇌물 제사
우리가 예배가 무엇인지를 생생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신약의 예배의 뿌리가 되고 있는 구약의 제사를 이해하여야 한다. 물론 구약의 제사가 신약의 예배로 직접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제사는 예배의 원형(proto-type)이다. 구약의 제사는 그리스도의 속죄를 바라본, 예배의 일시적인 한 형태였다. 약속을 따라서 그리스도는 오셨고, 속죄는 완성되었다. 구약의 제사 가운데 있었던 많은 신학적인 개념과 정신들이 이미 성취되었다. 따라서 신약의 예배는 구약의 그것과 동일할 수 없다. 그러나 원리적으로 볼 때, 차이는 있어도, 같은 구속 사건을 바라보고 있는 구약의 제사는 신약의 예배의 의미의 뿌리를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유용하다.
구약의 제사에 대해를 생각해 보자. 사람들이 저마다 집에서 기른 짐승을 가지고 성전을 향하여 올라간다. 그리고 그 짐승에게 손을 얹고 기도할 때 기도자의 죄가 짐승에게로 옮겨가고 그 성전에서 그 제물 되는 짐승들이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처참하게 피 흘리고 죽어 간다. 그곳에서 진심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예배자들이 무엇을 생각하였을까? 그들이 드리는 제사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있었다면, 그들은 그 예배 안에서 무엇인가를 알고 경험하지 않았겠는가? 그것은 단순히 짐승을 하나님 앞에 선물로 바치는 장면이 아니다. 그것은 이방인들의 제사 개념이었다. 당시 중근동 지방의 이방인들의 제사 개념은 소위 “뇌물 개념”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러한 제사 개념은 당시 중근동 사람들의 사고 방식에 자리하고 있던 신관(神觀)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들의 눈에 비친 신들은 막강한 권세를 가진 존재들로서 서로 시샘하고 음식에 대하여 걸근대며, 생각하는 것이나 인간들을 향한 태도에 일관성이 없는 존재들이었다. 성경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신실함(faithfulness)과 자비하심을 즐겨 노래하는 것도 바로 이 같은 당시의 신관과 대조되는 하나님의 성품을 찬송하는 것이었다. 인간이 바치는 제사는 그들에게 뇌물로 이해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제물은 그 자체가 신들의 기분을 달래고 분노를 호의로 바꾸는 데 유용한 것이었다.
제사가 신들을 달래는 뇌물과 같이 이해되는 것은 당시 고대중근동의 문맥(the ancient near eastern context)에서는 매우 보편적인 것이었다. 이방종교에서의 보편화되어 있는 뇌물 개념의 제사와 구약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제사의 차이는 제사가 가지는 고도의 도덕성이다. 뇌물 제사 개념에서는 제물와 제사자의 도덕적인 삶의 일치 여부나, 제사 행위와 제사자의 내면세계 같은 것이 별로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그러나 야웨 종교에서는 이것이 집요하리 만치 문제가 된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소위 구약에서 1ib-pattern(??? pattern)이라고 일컬어지는 종교적 정당성의 논쟁 패턴도 알고 보면 이 같은 독특한 구약 종교적 예배관과 이방종교의 예배관의 충돌에서 비롯된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의 의미는 당시이방인들의 “뇌물 개념”의 제사 정신과는 관련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제사와 제사 드리는 자의 삶을 그토록 집요하게 연결지어 말씀하신 것도 바로 이 같은 구약 제사의 정신 때문이다.
제사의 현장에서 그렇게 죽어 가는 제물들의 죽음을 통해서 제사 드리는 자들이 하나님을 향해 기대하는 바는 다름 아닌, 바로 하나님과의 만남이었다. 제사를 통해 죄로 말미암아 막혔던 담이 무너지고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질 것임을 기대하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오셔서 예배자를 만나 주심으로 죄를 사하시고 영혼에 자비와 은혜를 베푸시고 심령에 자유를 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예배를 통하여 자신이 하나님 앞에 누구인가 하는 것을 깨닫고 이방종교의 문화에 둘러 싸여 있던 그 시대 한가운데서 오직 진리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게끔 해 주시는 것이 그들로 하여금 제사 드리게 하였던 동기였던 것이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예배 속에 임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우리의 예배는 결국 뇌물개념의 예배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인격을 경험하지 못하는 예배가 인격적인 예배가 될 리가 없고, 그러한 예배가 뇌물 개념의 예배로 전락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예배와 교회의 갱신
교회가 어떤 영적인 상태를 누리고 있는가, 교회가 과연 하나님의 생명의 부요함을 그 지체들에게 누리게 하고 있는지의 여부도 예배에 의해서 결정된다. 이 말은 단지 예배를 정성껏 드려야 한다는 교훈적인 의미만을 내포하는 것이 아니다. 한 교회의 예배는 한 교회의 영적인 수준을 넘을 수 없다. 그만 못한 예배를 드릴 수 있으나, 그것을 뛰어넘는 예배를 드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교회의 개혁의 모든 문제의 핵심에는 이처럼 예배의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그렇다. 교회의 갱신을 이야기하면서 이 문제를 비껴 가는 것은 논의의 핵심을 젖혀 두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예배가 교회 속에서 드려질 때 비로소 교회는 이 세상의 단체와는 다른 신적인 기관임을 드러내게 된다. 그 곳이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긍휼을 드러내도록 부름 받은 장소라는 사실을 보여 줄 수 있다. 교회는 예배하고 예배 드리게 하기 위하여 부름 받은 기관이다. 예배드리는 교회는 외연적으로 예배하는 세상을 꿈꾼다. 이것은 모든 선교 활동을 보는 하나의 렌즈이다. 참된 예배를 드리는 교회 공동체는 세상이 자기들과 같이 참된 예배를 드리기까지는 세상의 변화에 만족하지 않는다. 실로 교회는 예배의 깊이 만큼만 깊이 있는 선교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 안에 창궐한 세속주의는 물론 세상에 기독교신앙의 영향이 미치지 못하거나 매우 적게 밖에 미치지 못하는 것도 알고 보면 예배의 실패에 기인한다. 따라서 예배의 성경적인 갱신이야말로 교회 갱신에 관한 모든 논의의 심장부에 있다.
교회는 단지 사회를 개혁하기 위한 변화의 매개체로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다. 거기는 예배드리는 곳이다. 진리를 들을 수 있고 영혼의 교통이 있고 성령과의 사귐이 있는 곳이다. 그러한 영적 교통을 통하여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또 느끼게 되고 어두운 세상을 어떻게 예배의 정신으로 살아야 할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어둠 속에 살아가던 사람들이 진리의 참 빛을 붙들고 살아가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도 바로 예배 속에서 만나는 하나님과의 만남 때문이며 사랑이 없었던 사람들이 참된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하게 되는 것도 사랑하시는 하나님과의 만남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은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예배를 통하여 바뀌어 가야 한다. 예배가 영혼의 변화에 아무런 영향을 주고 있지 못하다면 그것은 대단히 커다란 문제이다. 거기에서 어떻게 성도의 성도 됨이 드러날 수 있으며 교회의 교회 됨을 확인할 수 있겠는가?
예배와 죄를 깨달음
무엇보다도 오늘날 예배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커다란 문제는 예배를 통하여 예배자들이 죄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우리의 예배가 성령 안에서 드려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배 가운데 자각하는 죄에 대한 인식이 경미한 것 만큼,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갈망도 하찮다. 성령이 예배 가운데 함께 하사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가 있을 때 거기에는 죄에 대한 자각이 있다. 구약의 제사를 생각해 보라. 제물인 짐승 위에 손을 얹고 기도할 때 제사장의 선언을 통하여 제사 드리는 자의 죄가 제물에게로 전가되고, 이윽고 그 제물이 죽어간다.
제사 속에서 죽어 가던 양을 상상해 보라. 하얀 양들이 그 털을 시뻘건 피로 물들이며 비명 소리에 죽어 가고 사지가 잘리워지며 온몸이 각 떠진다. 내장이 헤쳐지고, 살과 기름이 분해되며 콩팥과 쓸개가 나뉘어 진다. 짐승들이 죽어 가는 그 자리는 한 마디로 피바다이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끔찍한 방법으로 제사의 규례를 정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실연식(實演式, real play) 교육 방식이 되었다. 살아 있는 양심과 영적인 예민함을 소유하고 있었던 모든 예배자들은 그렇게 죽어 가는 짐승의 모습 속에서 무엇을 느꼈을까? 그들은 모두 한결같이 동일한 사실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죄의 심각함이다.
죽음을 불러오는 죄, 자신을 그렇게 죽음으로 데려가야 할 죄의 값을 짐승에게 갚으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 이것이 제사 드리는 자들이 제일 먼저 깨닫게 되는 사실이었다. 우리는 정상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 구약의 사람들이 이렇게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현장에서 졸거나 딴 생각을 하며 제사가 끝나기까지 시간이나 때우고 있었을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다. 죽임을 당하는 것은 제물이지만 이미 그 아픔은 예배자의 심령 깊이 다가 왔고 피 어린 통곡과 참회의 눈물로 죽어 마땅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모든 회피할 수 없는 제사의 장면들을 통하여 대면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전적으로 타락하고 죄악 된 자신의 모습이었다.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존재라는 인식,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붙들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자신의 모습, 바로 이것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정상적인 제사를 통하여서는, 제사 드리는 자들이 항상 하나님과의 관계의 갱신을 경험하였다.
오늘날 참된 예배를 드리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예배가 드려지는 교회, 거룩한 하나님과 죄인과의 만남이 있고 그 만남 안에서 지상의 미물과 같은 존재들이 천상의 전능하신 하나님을 대면한다. 거기에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닫는 겸비함이 있고, 자신이 얼마나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에 부적합한 존재인지를 아는 자기 인식과 회개가 있다. 뉘우침이 있고, 돌이킴이 있다. 거기에서 다시 한 번 하늘로부터 부어 주시는 신적인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삶의 모든 소망을 자신의 선한 상태나 의로운 행위에 두지 아니하고 오로지 자비로우신 하나님께 두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넓은 의미의 삶의 예배는 좁은 의미의 신령한 예배가 하나님과의 만남을 제공해 줌으로써 가능해 지고, 넓은 의미의 예배로서의 삶이 하나님께 바쳐짐으로 좁은 의미의 예배가 더욱 신령해 지는 것이다. 결국 온 천하 만민이 여호와 앞에 예배하게 되는 세상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은 예배자들이 예배 중에 만나는 하나님 앞에 참회하는 일들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오늘날 조국의 교회를 보라. 예배 가운데 참회의 영이 있는가? 예배 중에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거나 후회하는 일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있다고 하더라도 참회하는 예배의 정신을 통하여 자기의 삶의 변화를 경험하게되리 만치 심오하지를 않다. 그래서 신자의 영적 생활은 메마르고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정신으로 살지 못한다. “세상의 소금”이 되기 위하여 고난을 받기보다는 “세상 속의 꿀단지”가 되기 위하여 세속적인 가치관과의 타협하는 데 능숙해지고 있다. 이 모두 참된 회개의 결핍에서 오는 것이다.
선지자의 경고
예배와 삶이 분리되는 곳에는 언제나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통을 가능하게 하는 인간의 영혼에 영혼을 미치는 성령의 역사가 멎은 예배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의문(儀文)에 매인 형식으로 드리는 예배이다.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정신이 그들의 삶을 온전히 지배하지 못할 때 그들의 예배 행위는 오히려 하나님 앞에 가장 가증하고 사악한 행위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드려지는 예배를 범죄 행위로 규정하셨다. 이런 죽어 있는 예배의 심각함에 대하여 선지자들은 피를 토하듯이 경고하였다.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들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네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숫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사1:10-15).
이에 대해 동일하게 언급하고 있는 미가 선지자의 외침은 예배에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쉽게 예배의 원래 정신을 구현하는 데 실패하였는가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께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6-8).
하나님께 끊임없이 예배를 드리면서도 여전히 공의와는 거리가 멀고 삶으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구현하지 못하며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백성으로서의 독특한 빛과 맛을 드러내며 살지 못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현실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가져오는 진리에 대한 명민한 인식이 없기 때문이다. 형식적인 예배 속에서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며 살고자하는 헌신의 갱신을 경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모두 예배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의 임재하심이 없기 때문이다.
예배에 있어서 인간과 성령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지음 받았다는 점에서는 모든 피조물과 동류이면서도 다른 모든 피조물들과 구별되는 것은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영혼을 소유하였기 때문이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이 영혼을 주신 인간과 교제하신다. 그리고 그러한 영적인 교제의 특성을 예배 속에서 구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인간은 내면의 세계의 진정한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인간은 타락한 이후로, 근본적으로 영적인 일에 대하여 대부분의 감각을 상실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부패한 죄성은 점점 신령한 세계에 속한 것들에 대한 무관심 내지는 오해를 가져 왔다. 하나님 없이도 넉넉히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의 완고한 불신앙도 바로 타락한 인간의 죄성 때문이다. 이에 관하여 고오던 피이(Gordon D. Fee)는 그의 최근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 자신의 형상으로 만드셨다. 이는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이 인격적이시며 관계를 맺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타락과 함께 생겨난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이해(vision of God)를 잃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잃어버렸고, 그래서 더 이상 그의 임재하심을 지각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오심이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을 영원히 바꾸어 놓았다고 본 것이다..... 성령은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할 그분의 백성들을 새로이 형성하며 믿음의 공동체를 세우기 위한 은사들을 공유하게 된다” 따라서 예배는 하나님께서 죄로 말미암아 더러워진 시간과 공간을 그의 구속사역으로 새롭게 창조하시는 행위이다.
예배 속에 있는 이러한 요소를 에이리 레더(Arie C. Leder)는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임재로 설명을 한다. 그리고 그의 임재하심은 “정결케 하고 화목케 하는 임재(cleansing and reconciling)"라고 주장한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임재를 잃었고, 성별된 시간과 공간을 상실하였다. 오직 하나님의 속죄의 행동만이 다시 정결케 된 아담과 하와의 후손을 다시금 거룩하신 시간과 공간으로 들어오게 할 수 있다. 예배는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구속적 행동이 가져온 거룩한 사람들과 구별된 시간과 장소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또한 하나님을 필요로 하면서도 죄로 말미암아 그의 임재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사람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생명과 기쁨을 필요로 하면서도 죄로 말미암아 그것을 누릴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부르심이다.
성령께서 죄인의 마음에 역사하심으로 인간은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성령이 오셔서 그들의 죄와 하나님의 의(義)와 심판에 대하여 생각나게 하신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에 대하여 그리고 하나님 안에 있는 안식과 구원의 은혜를 통해서 이 세상을 향해 주신 사명을 생각나게 하신다.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오늘 자신의 삶과 관계 있음을 고백하고 받아들이도록 만들어 주신다. 죄에 참회와 신앙을 선물로 주시는 분도 성령이시다. 불신하는 사람의 마음에 믿음을 심으시고, 냉담한 사람의 마음에 신령한 열심의 불을 지피시는 것도 모두 성령이 하시는 것이다. 성령은 무수한 예배 속에서 도무지 느낄 수 없었던 하나님의 인격을 경험하고 그분의 성품에 대하여 감격하고 찬송하게 만드신다. 성령이 오셔서 예배자의 마음에 감화를 주시고 그의 영혼이 변화를 경험할 때 예배드리는 태도는 바뀌고 예배 드리는 방식이 변화되며, 그의 삶도 변화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무엇보다도 성령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는 우리를 늘 듣던 진리에 대하여 새로운 경험과 지식을 갖게 만들어 준다. 우리는 영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를 통하여 보다 분명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소유하게 된다. 불분명하게 받아들여지던 지식들을 믿게 되는 것도 성령 안에서 드려 지는 예배를 통해서 가능해 진다. 진리와 함께 역사하시는 성령이 이 일을 하신다. 회중들이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또한 그 진리를 자신의 영적 상태와 삶에 적용되게 하시는 것도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이다.
그 다음으로 우리가 이해하여야 할 것은 예배를 주관하시는 성령에 관한 이해이다.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사실은 먼저 예배를 주관하시는 성령에 관한 새로운 이해를 갖도록 우리를 인도한다. 예배자들은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인격과 교제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배는 마땅히 성령이 역사하시는 무대가 되어야 한다. 성령은 어디서나 일하신다. 개인에게 진리의 말씀을 비추어 깨닫게 하실 수 있고, 삶의 현장에도 나타나 능력을 주실 수도 있다. 그러나 성령께서 역사하시고 그의 은혜 베푸심이 뚜렷하게 나타나야 할 곳이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모여서 예배드리는 곳이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개인적으로도 다스리지시만, 집단적으로도 다루신다. 교회를 영적인 연합체로 보시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교회는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우리의 영 안에 생명적인 교제를 주셔야할 영적인 필요에 대하여 예민하지 못한 것 같다. 아무런 감화가 없고 영혼의 변화가 없는 예배가 오랜 세월 동안 지속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예배 상황에 대하여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예배의 정신을 따라 드리는 예배라기 보다는 구태의연한 자기 만족을 쌓아 가는 차가운 종교의식을 되풀이하는 것에 다름이 아니다.
예배자들과 성령
오늘날 조국교회는 이미 참회 없이 드려지는 예배에 익숙해져가고 있다. 비할 데 없는 악한죄인들이 타락한 세상을 살다가 하나님 앞에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손수건이 필요 없는 예배를 드리고 있다. 세상은 점점 악해져가고 그리스도인의 삶은 선명한 복음의 정신을 잃어가고 있는데, 하나님을 알고 영화롭게 해야할 신자들이 자신과 사회의 죄악을 위하여 참회하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이 모든 이상한 일은 예배 속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부재에서 비롯된다. 살아 있는 예배는 반드시 침묵 이상의 어떤 사건을 동반해야 한다. 침묵을 능가하는 신령한 영적인 권세가 하나님과 설교자, 설교자와 회중, 회중과 예배 순서 사이를 지배하고 있어야 한다.
말씀을 증거하는 설교자로 하여금 하나님께 사로잡히도록 만들어 주고 그로 하여금 자신이 선포하는 말씀에 매이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주는, 설교에 있어서의 신적인 강제력(divine enforcement)의 기원이 어디에 있는가? 무엇을 통해서 설교자는 남의 말하듯이 설교하지 아니하고 진실을 규명하고자 하는 처절한 증언자의 심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게 되는가? 하나님의 손에 사로잡힌 설교자의 메시지에 대하여 회중으로 하여금 믿음과 사랑으로 어우러진 감격적인 반응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불신앙으로 냉담한 무리들의 마음에 믿음을 불러일으키고 좌절과 패배로 가득 한 사람들의 마음을 소망으로 가득 차게 하는 원동력이 무엇인가? 예배가 단지 순서지를 따라 진행되는 차례와 관계를 맺는 대신 순서를 통해 회중이 영적인 속박에서 해방되는 자유와 권능을 경험하게 되는 근원은 무엇인가?
성령은 예배자들을 준비시킬 뿐 아니라 예배를 인도하는 설교자들도 준비시킨다. 설교 행위 속에 비범한 능력을 주시는 것도 성령을 통해서이지만, 설교 내용의 지평을 열어 주어서 예배를 진리의 내용으로 가득 차게 하는 일도 성령께서 하신다. 이 같은 사실은 오순절 성령 사건을 통해서도 명백히 나타난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구속사적으로 성령의 시대가 시작되는 사건인 동시에 선교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설교사적인 면에서 본다면 오순절 사건은 설교자들을 세우셔서 예배공동체를 만드시는 사건이었다. 오순절의 성령 강림은 그 사건을 체험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커다란 능력으로 임했을 뿐 아니라, 이전에 도무지 인식할 수 없었던 구속사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열어 주었다. 이 말은 오순절의 성령 체험이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약 성경과 그리스도의 교훈과 삶 그리고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새롭고도 획기적인 인식을 가져왔다는 뜻이다. 실제로 이 사건을 체험한 사도들은 설교하기 시작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의미에 대한 인식이 분명해지자 구약의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가 보이기 시작했다. 메시아가 보이자 성경은 장엄한 구속사의 물줄기로 그들에게 다가왔다. 이 모두 성령의 역사가 새로운 예배공동체를 만드시는 사건이었다. 그들에게는 원고도 없었고 성경을 펼쳐 놓고 설교한 것도 아니었다. 그들의 구약인용은 대부분 기억에 의존하였다(행1:20, 히4: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구약의 각 본문이 구속사를 설명함에 있어서 어느 지점에서 인용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탁월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 같은 인식의 지평은 장기간의 학습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영적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 문제에 대해 존 오웬(John Owen)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령의 내적 조명으로 말미암는)이해의 표징은 이제 성경이 일목요연하게 보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성령에 의하여 조명 받은 사람에게 성경은 더 이상 단절된 항목들의 정신없이 혼란스러운 나열이 아니다. 이전에는 그에게 성경이 그렇게 보였을지 몰라도 이제 성경의 모든 부분은 성령의 내적 조명이 주는 유익 아래서 조화와 일치를 이루고, 성경의 모든 진리는 능력과 필연성으로 함께 그리고 전체로서 증거하며 다가온다. 부분과 부분이 조화하며 성경의 각 책들은 서로 맞물리며 성경 전체의 종합적인 의미가 명확해진다. 영적 실재들을 지각하게 되는 내적 경험들은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며,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것이다.”
예배의 축제적 성격과 성령
성령이 함께 하시는 예배에는 참회가 있고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고 돌이키는 삶의 변화가 있다. 예배의 축제적인 성격은 예배 자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배자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방문이 그의 백성들에게 축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암5:18,20).
예배가 가지고 있는 축제적인 성격이 예배자들 속에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예배자들의 참된 회개와 돌이킴이 필수적이다. 이것은 마치 구약에서 여호와의 날이 이중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던 백성들에게는 그분의 방문이 위로가 되지만, 거스르며 살았던 자들에게는 두려운 심판의 날이 된다.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뇨 그 날은 어두움이요 빛이 아니라”(암5:18). 예배 중에 오시는 성령은 이처럼 죄를 책망하고 사람들을 중생하게 하실 뿐 아니라 참된 회개를 주시고 위로를 얻게 하신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은 예배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영광이다. 누가 이런 일들을 가능하게 하는가? 고가(高價)의 파이프 오르간이나 성악전공자들로 구성된 찬양대가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성능 좋은 앰프나 마이크가 이런 일들을 성취하는 주체가 아니다. 목회자의 고고한 복식이나 장엄한 예배당의 실내장식이 이런 일들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화려한 강단이나 목회자의 화려한 학력이나 경력이 이 일을 일어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이 일을 이루시는 분은 오직 성령이시다.
그분께서 사람의 영혼에 영향을 미치심으로 이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예배가 거룩해지는 것은 실내장식이나 순서의 재편, 예배에 심리적인 기법을 동원하는 것 같은 청중을 마취시키는 기법을 통해서가 아니다. 예배 드리는 장소를 구별하시고 예배자들의 모임을 거룩하게 하시는 것은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다. 임재 속에서 당신의 자비와 권위를 드러내심으로 예배는 영광을 회복하게 된다. 에이리 레더(Arie C. Leder)의 다음 진술은 예배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우리가 의식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예배의 대상이시다. 예배하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응답이며 거룩하신 분의 나타나심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다. 물론 예배 가운데서 경외와 두려움과 기이함을 체험하는 것이 정상적이기는 하지만 요점은 우리가 무엇을 느끼느냐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예배 가운데서 우리 자신을 창조적으로 그분과 연관지으며 죄를 고백하고 이미 우리에게 나타난 은총에 대하여 감사하는 가운데 찬양과 경배로서 그의 임재하심에 반응하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관계이며 거룩하신 분, 위대하시고, 엄위로우시고 두려우신 하나님의 권세와 선하심에 대하여 느껴진 관계이다. 이것이 바로 예배의 핵심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경배하고 우리 자신을 굴복시키며,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 예배이다.”
성령과 설교
예배 중에 함께 하시는 성령은 위대한 사역은 설교 속에서 절정을 이룬다. 성령이 설교자를 붙잡아 주시고 말씀 선포 가운데 함께 하시면 평범한 설교라도 수많은 사람의 심령을 찌를 수 있다. 비범한 말이 비범한 능력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말 속에 깃들여 있는 비범한 성령의 능력이 이러한 일들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하늘의 신령한 은혜로 기름 부어진 한 마디의 말은 단지 인간의 지식으로, 또 능변으로 늘어놓는 수천 마디의 말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위대한 힘이 있다. 적막한 예배당을 뒤흔들어 놓으심으로써 기대감 없이 모였던 수많은 회중들로 하여금 죄에 대한 자각과 애통하는 마음을 갖게 하고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흐느끼게 만들어 주신다.
이에 대하여 바운즈(E. M. Bounds)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은 간단하게 정의하거나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스코틀랜드의 한 설교자는 이에 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복음을 전할 때 형언하고 표현할 수는 없지만 웬지 모르게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그 어떤 신적인 존재를 소유하고 있음을 자각하게 되며, 달콤하고 강력한, 그러면서도 인간의 심령을 울리는 그 무엇의 실재를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는 ...체험하는 자만이 알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라고 칭한다...죽은 자들의 모임과 방불한 집회를 뒤흔들고 격동시키며 예배 중 힘차고 날카롭게 요점을 찌르는 설교를 가능하게 하는 것도 역시 이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다. 동일한 진리를 문자 그대로 정확히 전달하고 인간의 지식과 재주를 기름 삼아 제아무리 공들여 다듬는다할지라도 성령의 역사 하심이 없다면, 이는 생명이 없고 죄인들의 심장이 하나님의 말씀에 놀라 뛰도록 만들어 주지 못하며, 혹시 약간의 자극을 준다하더라도 그것은 차디찬 주검이나 무덤에 감도는 적막함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예배자의 마음을 지배하던 세속적인 욕망과 더러운 탐심을 축출하고 하늘의 거룩한 은혜로 충만해 지도록 만들어 주었다. 지난날의 상처와 오늘날의 고난으로 억눌렸던 사람들의 영혼을 자유케 하신다. 어떤 예배자들은 기쁨 때문에 어떤 예배자들은 죄에 대한 애통함으로 예배에는 눈물이 마르지 않는다. 성령이야말로 이 같은 변화의 조건이다. 성령이 함께 하시지 않는 예배, 그것은 마치 국경일에 거행되는 기념 행사 같은 분위기를 벗어날 수 없다. 오직 성령만이 죽음의 침묵만이 무겁게 깃든 교회당을 뒤흔들어 생명의 함성이 가득 차게 만들어 줄 수 있으며, 마른 뼈와 같은 자들로 함성을 지르는 군대와 같은 회중들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그 말씀에 온 마음으로 응답하며 살아 계신 하나님께 먼저 자신을 드리는 가운데 바쳐지는 헌금과 기도와 그리고 자유 함을 얻은 심령으로 드리는 찬양과 같은 것들은 모두 살아 계신 하나님께 드려지는 산 예배의 요소이다. 그 모든 요소들을 살아나게 만들어 주는 그 모든 힘의 원천은 오직 성령이 예배 중에 임하시는 것이다.
단지 예배의 형식만으로는 내용을 지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여야 한다. 예배의 내용은 형식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그러나 예배의 형식을 바꾼다고 해서 예배의 내용이 반드시 바뀌는 것은 아니다. 물론 예배는 성경적인 근거와 역사적인 전통, 그리고 그 전통에 대한 반성으로서의 개혁 등을 고려하며 규모 있게 순서를 따라 드려져야 한다. 그러나 예배의 순서와 형식을 바꾼다고 해서 대단한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교회 시대의 예배로부터 많은 것을 배운다. 신약의 확고한 교리와 성경적인 전통과 교회가 누리던 영성(靈性)을 담아 낼 수 있는 개혁된 예배의 모범 속에서 가치 있는 많은 교훈을 얻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들을 배우며 오늘날 우리의 약간의 탈신학적이고 탈형식지향의 무분별한 예배 방식을 반성해야 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단지 당시의 예배의 틀과 형태를 흉내내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들의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예배의 현장 속에 흐르던 예배의 정신과 그 예배 안에 깃든 영적인 생명력과 예배자를 변화시키는 거룩한 변화의 능력, 설교하는 이들 안에 있어 예배를 통하여 드러났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깊이와 진리로 영향을 끼쳐 예배자들의 마음을 말씀의 단 쇠로 지져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만들었던, 형언할 수 없는 신령한 영향력 같은 것들을 본 받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영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의미 중 일부이다.
예배와 정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그 곳에는 언제나 감화가 있고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변화 받는 영적인 삶과 인격이 있다. 그리고 확대되는 진리 인식의 지평이 있는 것이다. 성령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는 우리가 죄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서 예민한 영적인 감각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느끼고 그의 현존하시는 임재를 자각하는 가운데 드려지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 안에서 드려지는 참된 예배 속에는 정서적인 요소(affectional factor)가 있다. 따라서 예배가 성령 안에 드려지고 성령에 의한 거룩한 감화가 회중 가운데 있게 되면 거기에는 반드시 정서가 깃든다. 그것은 신령하게 드려진 예배의 결과이다. 오늘날 우리는 잘못된 감정주의의 위험을 경계한 나머지 신앙에서 아예 감정적인 요소를 천시하는 경향으로까지 나아가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목욕통의 물이 더러워서 거기 앉은 아이까지 쏟아 버리는 것과 같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의 말과 같이 “신령한 은혜는 반드시 거룩한 정서를 동반한다”.
물론 예배의 목표 자체가 예배자들에게 정서적인 자극을 주거나 충격을 주는 것일 수는 없다. 만약 예배에 이런 식의 목표를 부여한다면, 그것은 타락한 예배로 가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것이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에는 항상 경건한 정서의 갱신이 뒤따른다. 예배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을 향한 참된 경배이다. 하나님과의 만남 안에서 올리는 하나님을 향한 경배야말로 예배에 있어서 움직일 수 없는 목표이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긍휼을 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찬양하며,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말씀을 들으며, 자신을 드리는 마음으로 헌금하며, 축복을 받는다. 이 사실에는 어떤 이의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예배가 진정으로 하나님께 드려지고 회중들이 거기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경험하게 될 때 그들은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느끼는 “거룩한 정서”(holy affection)을 경험하게 된다.
만약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조하신 특별한 방식으로 예배한다면, 우리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게 되고 그 임재 앞에서 후회, 탄원, 열정, 두려움, 근심, 신비, 경외, 사랑, 아픔, 절망, 신뢰, 고난, 목마름 같은 정서(情緖)를 반드시 경험하게 된다. 물론 이런 것들이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받으시는 방식으로 드려지는 예배에 있어서는 예배자의 이러한 정서적 갱신(emotional renewal)이 반드시 예배의 결과로 나타난다. 그리고 예배의 이러한 효과는 바로 예배 안에 임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예배와 십자가 사건의 중심성
또한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참모습을 보게 하신다. 성령이 함께 하시는 예배만큼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누구인가 깨닫게 해 주는 시간은 많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갈 수밖에 없게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 보도록 만들어 주었다. 따라서 예배는 필연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과거적인 사건에로 우리의 눈을 돌리도록 만들어 주었다. 도저히 하나님 앞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비천한 인생들임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처럼 살아서 거룩한 하나님께 경배할 수 있게 된 모든 은총의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늘 울어도 눈물로는 하나님 앞에 정결한 삶을 살 수 없는 죄인들임에도 불구하고 고백하는 자들의 예배의 현장에 찾아 오셔서 탕자를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게 하시는 구원의 은혜는 무엇을 통하여 발견되는가?
도무지 아무 선한 것이 없는 인생임을 고백함에도 불구하고 누추한 죄인들을 용납하시는 예배 속에서의 거룩한 하나님의 사랑은 무엇에 터잡고 있는가? 예배 속에서 하나님이 이처럼 우리를 용납해 주시는 것, 성령이 예배드리는 가운데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인쳐 주시는 은혜 주심, 이모든 것은 이미 하나님이 예배하는 우리들을 위하여 이미 이루신 구원 사역에 기초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과 부활의 사건, 성령 강림 그리고 재림의 사건이 나뉘어질 수 없는 구속 역사의 한 맥락인 것처럼 예배하는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구속의 사건과 우리의 예배에 임하시는 성령의 은혜는 나뉘어지지 않는 것이다.
한 교회가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의 영적 깊이는 그들이 마음속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식하고 느끼는 정도에 비례한다. 따라서 십자가의 복음이 없는 곳에서는 성령 안에서 예배드리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말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한 교회의 예배에 성령이 함께 하시지 않는 한, 그들이 인간의 눈에 미련한 십자가의 도와 하나님의 구원을 기뻐하는 일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위대한 부흥의 역사를 경험했던 교회의 시대는 부흥된 예배 속에서 살던 시대이다. 예배 중에 항상 하나님의 임재가 있고 죄인의 심령을 움직이던 살아있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었던 때의 회중들은 모두 복음의 진수에 대해 깊이 알고 느끼던 사람들이었다. 한 시대의 각성을 알리는 효시도 항상 십자가와 복음의 진수를 선포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의 사건을 인하여 감격하던 사람들에 의하여 부흥은 추구되었다. 자신들이 이렇게 예배할 수 있게 된 그 모든 근원을 십자가의 구속 사건에서 찾았다. 그리스도는 그들을 위해 못 박혔고 믿음으로 십자가의 예수를 바라보며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의로운 행위와 선행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용납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 공로를 인하여 의롭게 여기심을 받아 주님께 영접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거룩하고 성자에 가까운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라도 예배하러 나올 적마다 그들은 자신과 같은 죄인으로 하여금 거룩한 하나님의 존전 앞에 서게 만들어 주는 그 위대한 은총의 원천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다고 믿었다. 의로운 삶을 살았으나 자신의 의로운 행위 때문이 아니라 소망 없이 죄 가운데 죽어 가는 자신과 같은 사람을 위해 피 흘리신 예수의 대속적인 죽음 때문에 자신의 예배가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믿었다.
예배자가 오직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절박한 마음을 드러내게 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예배를 올바른 방식으로 드린다면 거기에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십자가의 구원 사건에 대한 회상이 있고 감격이 있다. 예배자들은 하나님과 만나기 전에 십자가의 구속 사건 앞에 직면하게 된다. 그리고 그 사실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과 삶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성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 주님이 우리의 모든 삶의 중심이며 삶 자체가 그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을 기념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예배를 통해 가장 잘 고백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언제나 우리를 위해 이루신 십자가의 구속을 향한 입을 다물 수 없는 감격이 있고 그렇게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이면서 왜 이렇게 죄 많은 세상에 여전히 살아 있는가 하는 이유 발견하게 된다. 사람들이 예배에 대한 기대를 잃어버린 채 신앙 생활 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의 축복을 거의 경험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예배에 있어서 성령과 자유
“하나님은 영이시니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하여 받는 또 하나의 교훈은 예배에 있어서 성령으로 말미암는 자유이다.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에는 자유가 있다. 그리고 모든 예배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하여 자유할 수 있는 여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예배에는 분명히 정해진 순서와 규모가 있어야 한다. 이런 것들을 모두 배척해 버리는 사람들이 교회 역사에 언제나 있었다. 극단의 자유를 강조한 나머지 예배에 있어서 규모를 잃어버림으로 그들이 구한 자유보다 더 많은 것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일들이 언제나 있었다.
성령과의 직접적인 교통을 위하여는 모든 형식이 방해가 된다는 위험한 사고를 가진 소위 “직통파”(?)들이 언제나 존재하였다. 그들은 초대교회의 예배를 흉내내어 예배시간 중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사람들에게 발표할 기회를 주기도 하고 방언을 말하거나 통역하는 순서를 도입하기도 하였다. 하나님과 직접적인 교통을 가능하게 하는 성령의 계시를 받는 정도가 예배자의 신령함의 척도가 된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이었다. 또한 우리는 정 반대편에 치우친 극단도 보게 된다. 이들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전통이고 지식이다. 그들은 때때로 하나님을 위한 예배보다는 예배 자체를 위한 예배를 지향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예배의 형식에 대해 배타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예배의 형식에 대한 충성이 곧 하나님에 대한 충성일 수는 없다. 열광적인 직통파나 황폐한 정통주의 모두 예배의 참된 의미를 알지 못한다. 오늘날 일부 교회에나 선교 단체에서 유행하고 있는 전도 집회 형식의 찬양모임 같은 예배를 진정한 의미에서 예배하고 부를 수 있는지에 대해, 저는 강한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아무런 형식과 규모 없이 찬양도 부르고 이 사람 저 사람 나와서 간증도 하고 인사도 하고 축하도 하고 말씀도 듣고 토론도 하는 전도 집회를 과연 예배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형식을 파괴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성령으로 말미암는 자유로움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다. 예배를 진정으로 자유케 하는 것은 성령이고 그것을 구속하고 있는 것은 영적인 역사의 결핍이지 형식 그 자체만은 아니다. 오랜 예배의 전통 속에서 신앙의 선조들은 성경과 교회의 역사를 참고하며 나름대로의 예배의 형태를 만들어 왔다. 물론 역사적으로 있어 왔던 예배의 형태 중 그 어느 것도 절대적인 것은 없다. 그러나 성경을 비롯하여 어느 시대이든지 언제나 공통된 예배의 요소가 있었고 또 순서가 있었다. 시대는 흘렀고 축복스러웠던 교회 시대에 넘쳤던 예배의 은혜는 말랐다. 그러자 후손들은 생각하기를 오늘날 자신들이 경험하는 예배에서의 메마름과 감화 없음이 전통적인 형식을 고집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대단히 잘못된 진단이었다. 예배를 그토록 메마르고 형식화시키는 주범은 형식 자체가 아니라 그 형식 속에 역사하여야 할 성령의 결핍이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 시대에 제네바에서 설교하던 존 칼빈(J. Calvin)은 일주일 후에 설교할 성경 본문을 미리 알려 준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광고가 아니었다. 교인들이 다음 주에 설교될 본문을 집에서 미리 공부하며 묵상하고 다음 주 설교를 통해 펼쳐질 본문 속에 담긴 풍성한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리도록 미리 알려 준 것이었다. 만약 이러한 의도라면 설교 본문을 미리 회중에게 알리는 것에 반대하지 않겠다. 어느 정도 설교 본문 선택의 자유를 잃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이런 의도가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설교자가 일주일 전에 미리 설교 본문과 제목을 정하여야 하는지 나는 의아할 뿐이다. 이 모두 설교에 있어서 진정한 자유를 가로막는 속박이 되고 있다. 오히려 19세기 복음전도자 찰스 피니(Charles G. Finney)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오랜 세월 설교했으나 한 번도 내가 설교하여야 할 내용을 24시간 이전에 결정해 본 적이 없다.” 그는 설교를 한 후에 원고를 적어 두던 사람이었다.
물론 나는 피니의 이 같은 설교 경험을 모든 설교자들이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지금 성령께서 설교하기 24 시간 전에는 결코 말씀을 주시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피니가 그 같은 발언을 통하여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설교자의 자유이다. 성령이 함께 하시는 예배에 있어서 자유로움이었다. 성령께서 역사하실 여유를 허락하지도 않고 계산에 넣지도 않는 예배의 형식을 따르는 예배자들의 마음속에 과연 예배 중에 임하실 성령에 대한 넘치는 기대가 있겠는가.
예배가 일정한 규모를 가지고 정해진 순서를 따라 드려진다 할지라도 어떤 때에는 찬양을 부르는 가운데 성령이 그 찬양을 사용하셔서 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시고 말씀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열게 하실 수 있다. 이 때 주보의 순서를 따라 무조건 다음 순서로 기계적인 진행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겠는가? 아니면 은혜가 되는 찬송을 한 두 곡 더 부르는 것이 진정한 예배의 의미를 구현하는 데 도움이 되겠는가? 설교를 30분 정도에 마치는 것이 예정된 예배 프로그램이었는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설교자를 붙잡았다.
그리고 그 설교자는 진리의 말씀을 실로 오랜만에 폭포수와 같이 쏟아내고 있었다. 회중들은 그 진리의 말씀에 붙잡히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말씀 선포 속에서 막 맛보고 있는 참이었다. 예정된 설교 시간을 거의 모두 사용하였지만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는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하나님의 손이 설교자를 사로잡았고 본문의 진리는 이제 막 개봉되는 때였다. 설교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배 후에 있을 식사시간과 각종 회합을 위한 시간 계획을 고려하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는 상관없이 그 자리에서 즉시 설교를 마쳐야 하겠는가? 아니면 성령께서 자신을 통하여 충분히 말씀하시도록 더 설교를 하여야 하겠는가? 여러분은 어떻게 하는 것이 마음 뜻에 부합한다고 생각하는가?
조국교회를 보라. 어느 교단의 대표들이 모여서 약속한 것도 아닌데 거의 모든 교회의 주일예배가 열 한 시에 시작하여 열 두 시 십 분에 마친다. 거의 같은 순서로 거의 같은 시간에 성가대의 찬양이 있고 거의 같은 시간에 설교가 시작되고 거의 같은 시간에 끝난다. 그리고 거의 같은 시간에 예배당 문을 나선다. 열 두 시 십 분이다. 그리고 오후 1시에는 이미 교회적인 다른 모임이나 프로그램들이 예정되어 있고 그 사이 시간은 식사시간이다. 이처럼 교회의 예배 계획 자체가 예배를 준비하는 사람들 속에 이미 성령께서 예배 가운데 임하실 리가 없다는 확신이 서 있다. 그리고 이것은 이미 죽은 예배에 익숙한 교회가 되어 가고 있는 증거이다. 나는 지금 예배 시간을 늘이자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예배 가운데 규모를 지키면서 예배드리지만 그러나 성령이 그 규모 안에서 진리를 따라 자유롭게 역사하실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 드려야 한다. 성령이 친히 예배의 주관자가 되시고 얽매이지 않고 자유스럽게 역사하셔서 우리 자신을 바꾸어 놓으실 수 있도록 파격(?)에 대한 기대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예배 중에 역사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예배자들의 신앙과 삶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예배라고 하는 것은 좁은 공간에서 특정한 사람들에게 되풀이되는 자기 만족적인 의식이 되고 말 것이다. 예배자들이 예배 속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마음을 다하여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경배하지도 못할 것이며 예배 중에 사용되는 종교적인 용어들은 예배자들로 하여금 예배당이 세상으로부터 도망쳐 나온 자들이 잠시 은신하는 곳으로 여기게 만들어 줄 것이다. 우리는 결국 여기서 성령이 예배 가운데 역사하시지 아니하시면 예배는 예배답게 될 수 없다는 결론을 얻는다. 거기에는 살아 있는 예배에 대하여 약속된 모든 축복의 분여가 중지될 것이며, 따라서 예배를 드려도 거기에는 가슴을 찌르는 깨달음도 없고 치유도 없으며 진정한 참회와 사죄의 확신도 존재할 수 없다. 모습이 경건해도 결국은 형식을 숭상하는 바리새적인 예배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성령으로 드려지는 예배를 통해서가 아니고서는 그 예배로 말미암아 감화를 받고 앞으로 한 주간 동안을 험악한 세상 속에 오직 믿음으로 싸워 이겨야 되겠다는 결의와 함께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며 교회당을 나서는 일이 가능하지 않다. 그들은 넓은 의미에서의 예배인 엿새 동안의 삶에서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며 이렇게 실패한 삶은 제 칠 일에 드리는 좁은 의미의 예배를 더욱 답답하게 만들 것이다. 믿음을 가지라. 예배다운 예배를 통하여 형성되는 회중은 여타의 인간적인 방법이나 프로그램들을 통하여 형성되는 회중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예배다운 예배가 드려지고 있다면 그 교회는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될 것이고 교회당을 가득 채운 사람들은 하나님으로 가득차게 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고요한 침묵으로 드리는 무감각한 예배야말로 우리와 그리고 우리 시대 조국 교회에 진정한 신앙 부흥이 필요함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들은 기도하여야 한다. “우리의 예배가 불꽃처럼 드려지도록...”
둘째 요소: 진리
그 다음으로 생각 볼 예배의 두 번째 요소는 진리이다. 예배에 있어서 두 번째 요소인 진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요한복음4장의 맥락에서 볼 때 두 가지를 의미하는데 하나는 예배 행위 자체가 성경 진리의 틀 안에 있어야 한다는 점과 예배자가 예배 속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배에 있어서 하나님과의 만남은 구체적으로 그 백성들에게 무엇을 가져다주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에서는 많은 경건한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혹은 집단적으로 하나님과의 만남을 경험하였다. 하나님께서 특정한 때에 당신의 임재를 그들에게 드러내셨다. 구약의 성도이든, 신약의 성도이든 개인적으로든 공동체적으로든 그들이 하나님과 만났을 때 그 만남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이었다.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가르침이 있었다. 하나님의 성품과 존재에 관한 새로운 지식이 있었고, 그것을 기초로 선택된 백성들이 살아가야 할 가르침이 존재하였다. 이것은 예배의 계시적인 성격과도 연관된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경배하기를 원하실 뿐 아니라, 예배를 통하여 당신을 알리시고자하는 열망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하여 당신이 얼마나 거룩하신 존재이신지를 알리고 싶어하신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이 예배를 통하여 그러한 사실을 인정할수록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하나님 자신이 위대하신 분이시지만, 우리의 경배에 의하여 그 위대하심은 더욱 “풍성하게 나타난다(enriched by our praise)".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심각해지는 동시에 기뻐하게 된다. 그의 거룩하심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키지만, 그의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걱정스러운 두려움으로부터 자유하게 하기 때문이다. 오토(R. Otto)의 표현을 빌자면 “두려우면서 동시에 기쁨으로 열광하게 하는 신비”(mysterium tremendum ac fascinans)로서의 하나님이시다. 예배 가운데 이 두 가지가 긴장을 이루게 되며, 예배의 가장 커다란 문제는 이 모순적인 둘을 어떻게 하나로 묶는가 하는 것이다. 심각하면서도 단지 비극적인 슬픔으로 가득 차지도 아니하고, 기쁘면서도 제멋대로가 아닌 그런 예배가 되게 하느냐이다. 이에 대하여 랄프 마틴(Ralph P. Martin)은 이에 대한 답이 성령이라고 못박는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알리시고 싶어하는 열망은 예배자들의 깨달음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앞 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 지식이 전달되는 가운데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써 두려움과 기쁨이라는 두 모순 사이의 긴장(paradoxical tension)은 해결을 보게 된다. 따라서 예배 속에서 하나님과 예배자들의 만남은 단지 열광이나 신비만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단지 감정적인 흥분이나 감격 이상의 아무 것도 남겨 두지 않은 적은 없었다. 오히려 이러한 식의 체험은 이방 종교의 엑스타시(ecstasy)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진리가 있었던 것이다. 지식이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인가 자기 백성들에게 말씀하고자 하시는 바가 없으시면 결코 찾아오신 적이 없었다. 이 같은 사실은 성경의 예증을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로 일반적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실 때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셔서 자신을 알리셨다. 그때에 천사는 그냥 나타나서 세상에 천사라는 존재가 있다라는 사실을 넌지시 보여 주시기 위해서 파송되지 않았다. 그는 명백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왔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자기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눅1:31).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단강변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그 세례 받는 곳에는 하나님이 임재하셨다. "그때에 하늘에서는 분명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3:17).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기록하고 있는 사울의 회심 기록도 마찬가지이다. 주님이 나타나셨고 거기에서 이루어진 만남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9:4). 사울이 생애적인 회심을 경험한 것은 신비체험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영적인 체험 속에서 주신 분명한 말씀 때문이었다.
예배가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져준다고 할 때, 간과되지 말아야 할 사실은 하나님과의 만남은 그분께서 당신의 뜻을 예배자들에게 알리는 장(場)이라는 사실이다. 예배 속에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기들의 사정을 하나님께 알려 고하는 요소가 포함된다. 그리고 이러한 요소는 예배 순서 중 기도로 표현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예배자들에게 자기의 뜻을 알리고, 예배자들은 그 뜻을 준행하며 살겠다고 헌신을 다짐하는 것은 그 보다 더욱 중요한 요소이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예배자들에게 알리시는 일은 설교를 통하여 나타난다. 예배에 있어서 설교가 중심이라는 사실은 기독교 역사에서 오래도록 유지되어 온 전통이다. 심지어 기독교이전의 회당예배에서 조차 이것은 사실이다. 그들의 예배에서 성경(그들의 경전인 구약)을 읽는 것과 그 읽은 바를 해석하거나 설명하는 일은 회당예배에의 가장 기본적인 두 순서였다. 기독교 예배에서 성경을 읽는 것과 설교하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 순서가 된 것은 유대인들의 실천에서 직접 유래된 것이다.
예배와 이해
이처럼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그곳에는 분명한 교훈이 있었다. 만남은 교훈과 함께 다가왔다. 이것이 바로 예배의 정신이다. 하나님을 뵈옵기를 원한다는 갈망이 결국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으로 이어져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예배와 이해의 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예배와 진리, 그리고 진리와 이해의 문제이다. 예배 속에 깃든 진리의 요소는 설교에 의하여 대표되고, 설교를 통하여 주어지는 진리가 예배를 움직이는 본질적인 요소로 작용하기 위하여는 먼저 설교에 대한 예배자들의 지적인 이해(understanding)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스테펀 챠아녹(Stephen Charnock)은 요한복음4:24를 해설하면서 예배와 이해의 관계를 이렇게 강조하였다. “예배는 그 자체를 하나님의 탁월하심, 관한 지식과 그의 엄위에 대한 실제적인 사고에 적용하면서 이루어지는 이해(understanding)의 행동이다..... 그것은 또한 의지의 행동이다, 그것으로써 예배자의 영혼이 하나님의 위엄을 찬양하고 경의를 표한다.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에 황홀하게 되고 그의 선하심에 안기며,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통 속으로 들어서 모든 애정(all his affection)을 그분 위에 부어 드리는 것이다”
우리는 주위에서 수많은 신앙의 체험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리 만치 곤고하고 정함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있다. 삶에 있어서 거룩해지려는 노력도 없고 주님을 닮아 가는 기쁨도, 구원의 영광스러운 목적을 위하여 살아가는 헌신도 없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가? 성령은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체험하게 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영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체험하기도 한다. 병고침의 체험을 하기도 하고 귀신을 내어쫓는 체험을 하기도 한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은사로 더 풍부한 정서를 체험하기도 한다. 그런 체험 속에서 열정을 소유하게 되어 냉랭하던 사람도 펄펄 끓는 사람으로 바뀔 수 있다.
그런데 그런 많은 체험들이 거룩하고 견고한 신앙생활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체험을 많이 한 사람이나 체험이 없는 사람이나 어차피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결국 신앙적인 체험 자체를 경시하는 경향으로 흘러간다. 우리에게는 열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빛도 필요하듯이 뜨거운 열정 뿐 아니라 신앙적으로 정리된 지식이 필요하다. 다양한 체험을 하지만 체험이 우리를 붙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체험을 통해서 받았던 진리가 우리를 붙들어 주는 것이다. 같은 성령을 체험하면서도 거기서 진리를 경험한 사람들이 견고한 삶을 살아가는 이유이다. 이렇게 말씀에 붙들리는 것 없이는 수많은 성령의 체험들도 그를 참된 신앙으로 인도하지 못한다. 그러면 예배에 있어서 진리라는 요소는 무엇인가? 진리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한 다리이다.
설교는 죄인이 하나님과의 만약을 가능하게 해 주는 다리를 세우는 일이다. 좋은 다리가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거기로 건너가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하고 건너하고 싶어할지라도 만약에 진리의 다리가 없다면 올바른 하나님의 인격을 알 수가 없다. 한 교회에서 올바른 진리의 말씀이 선포된다는 사실은 그것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여 인격적인 하나님을 올바르게 만날 수 있도록 해 주는 다리가 마련된 것이다. 만약에 강을 건너고자 하는 열정도 있고 또 건너고자 하는 사람도 있고 또 건너게 해주고자 하는 인도자도 있지만 다리가 목적지가 아닌 다른 곳으로 놓여져 있다면 아무리 열심히 노력할지라도 잘못된 길로 가기 마련이다. 이단적인 교리를 통해서 구원을 받기가 거의 불가능한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오늘날은 예배를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으로 가치를 찾는 것이 아니라, 예배자들 자신이 즐기는 데서 가치를 찾는 것 같다. 다시 말해서 예배 속에서 “깨닫게 하는 요소”외에 “느끼게 하는 요소”와 “즐기는 요소”들이 과도하게 도입되고 있는 것 같다. 과도한 악기의 사용이나 드라마(drama)등을 예배에 도입하거나 대규모의 성가대를 운영하거나 열정적인 찬양으로 예배 분위기를 돋우는 것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이러한 현상이 일반화되는 것은 언제나 말씀의 쇠퇴라는 배경이 있다. 예배에 있어서 설교가 하나님의 음성을 대변해 주는 위치를 잃게 될 때 언제나 “깨닫게 하는 요소” 보다는 다른 요소들이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문제에 관한 조국교회의 예배 상황은 사도적 전통이나 종교개혁의 노선에 서 있다기보다는 다분히 구약적이고 중세 카톨릭의 전통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예배와 음악
심지어 오늘날 교회 음악의 기본을 오르간(organ) 조차 역사 기록으로 볼 때 12세기까지는 미사에 사용된 기록이 없다. 오르간이 미사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3세기 이후의 일이었고, 찬송을 화음으로 부르는 전통도 14세기 이후의 일이다. 성가대의 등장은 313년 밀라노 칙령(the Edict of Milan)으로 기독교인들의 박해가 끝나고 공적인 예배를 드리게 되면서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그때까지 예배에 있어서 음악은 회중 찬송이 기본을 이루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150?-215?)는 말하기를 “우리는 (예배에 있어서) 단 하나의 악기를 사용한다. 그것은 평화의 말씀이며 우리는 그것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더 이상 옛날의 현악기나 나팔, 그리고 피리 같은 것은 사용하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며, 주후4,5세기의 전설적인 설교가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345?-407)은 신약예배에 있어서 말씀의 충족성을 이렇게 단언하였다. “이전에 다윗은 시편을 노래하였다 오늘날 우리도 그와 같이 찬송한다; 그는 생명이 없는 현(絃)을 가진 수금을 가지고 노래하였으나, 오늘날 교회에는 생명이 있는 줄을 가진 수금이 있다. 우리의 혀가 곧 수금의 현(絃)이다. 이 현에는 오히려 더 다양한 곡조와 내면의 노래와 하나된 경건함이 있다.”
오늘날 예배 가운데 과도한 악기나 열광적인 찬양의 순서나 예배실에 대한 과도한 실내 장식이나 조명 시설 같은 것이 예배의 갱신에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참된 예배의 회복을 위한 요점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미국으로 건너간 초기 영국 청교도들의 예배의 역사를 보면 그들은 예배 시간에 모든 악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회중 찬송도 여러 가지 화음이 아니라 한 곡조로 부르기를 원하였다. 그들은 모두 음악을 사랑하고 즐기던 사람들이었다. 그들 가정에서는 언제나 악기를 사용하며 찬송하고 노래하기를 즐겼다. 그러나 예배에 있어서는 그것을 거부하였다. 분명히 그들의 그러한 견해에는 다소 지나친 면이 없지는 않는다. 그러나 올바른 예배에 대한 그들의 정직한 견해에는 전혀 지나침이 없다. 그들이 예배 중에 악기의 사용을 마다한 것은 그만큼 잘못된 요인으로써 예배자들의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것의 위험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배 중에 악기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악기를 사용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러한 견해를 붙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감화를 받음으로써 거룩한 정서가 깃드는 것이 아니면, 그 모든 예배자들의 정서는 유익하지 못한 것일 뿐 아니라 위험한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을 가진 그들의 예배에서 설교가 예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음을 말할 나위도 없다.
이에 대하여 호턴 데이비스(Horton Davis)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배당 전면 중앙에 높이 위치한 설교단에는 성경이 펼쳐져 있었고 설교자는 거기에서 검은 가운을 입은 채 회중들의 마음과 심령을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하였고, 그러한 설교가 순서가 그들의 예배로 하여금 진지하고 매우 신실한 예배가 되게 하였다. 그들은 예배를 위하여, 스테인드 글라스(stained glass)나 화려하게 수놓은 예복이나 강대상 전면의 장식이나 깃발 같은 것을 거절하였으며 이러한 것들로 예배당을 장식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며 마치 백합화에 금도금을 하고 햇빛을 내쫓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였다”
진리와 설교
존 스트트(John Stott)는 20세기 후반을 서구에 있어서 설교의 퇴조기라고 말한다. 이러한 설교의 퇴조 현상은 곧 교회의 몰락을 예고하는 심각한 징후이다. 헬무트 틸리케(Helmut Thiellicke)가 “오늘날 설교는 임종에 가까울 정도로 쇠하고 붕괴되었다”고 말한 것도 같은 우려를 반영하는 것이다. 이러한 풍조는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설교의 전통적인 위치 자체에 대한 회의주의를 불러왔다.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는 데 있어서 독보적인 존재로서 여겨졌던 설교는 이제 왕관을 벗어야 한다는 주장이 서슴없이 제기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성경과 설교 사이의 불연속성을 강조하여 권위는 물론 내용의 면에 있어서도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같은 회의주의는 결국 설교의 수위성(首位性)에 대한 회의를 불러왔다. 최근 설교학이라는 학문의 분과 안에서 “설교 없는 예배”, “예배 없는 목회” 같은 것들이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것은 설교학자들이 설교를 불신하는 아이러니이다. 그러나 복음을 전파하고 신자들을 교화하는 수단으로서의 설교는 인간이 경험을 통해서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은혜의 방편이다. 교회의 개역의 기초를 예배의 개혁이라고 본다면, 예배의 개혁은 항상 설교가 예배에 있어서 자기 자리를 찾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따라서 교회의 개혁은 항상 설교의 수위성의 회복과 함께 이루어졌다. 종교개혁도 알고보면 미신적인 희생과 신비적인 예전으로 말미암아 늪에 묻혀버린 설교의 수위성의 회복을 통한 예배의 개혁이었다. 잉그베 브릴리오드(Yngve Brillioth)가 지적한 것처럼 교회의 모든 개혁은 설교가들의 개혁된 강단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설교가 올바른 복음 진리를 가르치는 예배가 아니라면 그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날 가능성은 그 만큼 희박해 진다. 따라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올바로 선포되어지는 일 없이는 예배다운 예배를 드릴 가능성이 전혀 없다. 여기에서 우리가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진리의 말씀이 전해지지만 전해지는 것 때문에 하나님과의 만남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말씀을 듣는 회중의 올바른 반응이 요구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전에는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고 이상 중에 지시하기도 하셨다. 그러나 같은 구약 안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이 성숙해질수록 족장시대에 자주 있었던 신적인 현현(顯現)은 급격히 줄어들고 계명을 상기시키는 일이 중시된다. 선지자들을 부르시고 말씀을 주심으로 그들을 통해 당신의 뜻을 알리셨으며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쳐지는 곳에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게 하셨다. 이전에는 직접 찾아 오셨지만 이제는 예배를 드리는 이 시간에 오늘날 시대에 하나님께서 설교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들이 증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당신의 백성들과 만나 주신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성경을 설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성도들은 그의 설교에 귀를 기울여야할 의무가 없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이렇게 대답한다. “설교가 성경을 말하고 있는 한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칼빈(John Calvin)도 비슷한 견해를 말한다. “...이로 인하여 설교가 성경과 동등하게 격상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확정적이고 주권적인 반면에 설교는 파생적이고 종속적일 수 밖에 없다. 명백히 성경이 설교에 맞춰져야 할 필요는 없지만 설교는 항상 성경과 일치하여야한다. 정확히 말해서 설교의 영광이란 파생적으로 종속적인 지위로서 겸손한 것이다. 그러나 설교는 하나님의 멕시지, 곧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설교하는 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정직하게 선포되는 성경 진리와 거기에 대한예배자들의 겸손한 반응, 그 위에 내리시는 성령의 축복, 이것이 있을 때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예배가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진리를 예배자들에게 적용하게 되면 예배에 있어서 예배자들의 가장 중요한 의무가 무엇인지 명백해진다. 예배에 있어서 진리의 요소는 설교자에게는 참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할 의무를 예배자들에게는 그 말씀을 이해해야할 의무를 가져온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복음 진리를 전하고 깨달은 바대로 즉각적으로 순종하기를 원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진리를 깨닫는 것이야말로 예배에 있어서 진리의 요소를 충족하는 것이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예배자들이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명하셨는가? 예배에 있어서 예배자들이 설교의 최종적인 권위인 성경 자체를 읽는 것보다 설교를 듣는 것을 더 중요하게 정해 놓으셨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토마스 굳윈(Thomas Goodwin)은 구약성경에서 이미 이러한 하나님의 뜻이 명백하다고 주장한다. 느헤미야8장에 보면 수문 앞 광장에서 집회를 갖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타난다. 학사 에스라가 율법책을 백성들 앞에서 읽었다(느8:3).
그러나 그것은 단지 율법을 읽는 것이 아니라 그 뜻을 해석하는 일이 뒤따랐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매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느8:8-9). 이같은 예는 역대하7장에도 나타난다. “저희가 여호와의 율법 책을 가지고 유다에서 가르치되 그 모든 성읍으로 순행하며 인민을 가르쳤더라”(대하17:9). 이 장면은 여호사밧 시대에 비번(非番)인 제사장들로 하여금 전국을 순회하며 율법을 교육하게 한 장면이다. 이러한 전통은 예수 그리스도 시대의 유대들 가운데 있었던 회당 예배에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전통은 기독교 예배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토마스 굳윈(Thomas Goodwin)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예배 중에 성경을 설교하는 순서를 성경 자체를 읽는 것보다 더욱 중시하신 것에 대하여 다음 세 가지 때문이라고 답한다. 첫째는 예배자들 안에 있는 진리에 대한 우둔함 때문이고(행8:30), 둘째는 그런 은사를 특별한 사람들에게 주셔서 성도들을 섬기게 하셨기 때문이며(엡4:8,골2:3), 셋째로는 일상적으로 사람들을 회심하도록 깨우는 말씀은 문자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거기에 담긴 영적인 의미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롬7:9, 고전2:13-16). 그러므로 예배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는 설교 시간이 예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간임을 기억하여야 한다.
그리고 설교를 통하여 전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함으로 깨닫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그리고 깨달은 대로 살려고 하는 거룩한 순종의 의지를 가진 채 예배에 참여하여야 한다. 비유를 하자면 예배는 마치 거룩한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들이 하나님과의 만남을 기대하며 그리고 자신의 방과 의복을 정결케 하고 새로운 기대를 가지고 자신을 돌아보며 거룩한 산에 올라간다. 그리고 드디어 거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뵈옵는다. 그분 앞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말씀대로 살 것에 대하여 거룩한 헌신을 다시 맹세한다. 그리고는 축제의 분위기 속에서 산을 내려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배이다. 그러므로 설교가 예배의 모두는 아니지만 모든 예배의 순서의 중심이 된다. 그러므로 예배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마치 정직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자가 없는 예배만큼이나 예배다운 예배가 될 가능성이 없는 것이다.
말씀과 정서적 충동
리챠드 백스터(Richard Baxter)의 저작을 보면 그가 설교를 듣는 예배자의 태도에 대하여 자신의 양떼들에게 얼마나 세밀하게 가르쳤는지 알 수 있다. 그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크게 세 부분의 가르침을 제시하고 그 세 가지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실제적인 방법을 상세히 해설하였는데 그 꼼꼼함과 성경적인 정신에 놀라게 된다. 그는 첫째 가르침인 “설교를 통해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한 지침(Directions for the Understanding the Word which the Word which you hear)"이라는 제목 아래서 12가지 실천 지침을 제시한다.
첫째는 개인적으로 늘 성경을 읽고 묵상할 것, 둘째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분명하고 명백하며 확고한 가르침 아래서 살아갈 것, 셋째는 부주의한 마음으로 설교를 듣지 말 것, 넷째는 설교 중 쓸 데 없는 생각이나 졸음으로 말씀을 놓지는 일이 없도록 할 것, 다섯째는 설교 중에 다루어지고 있는 교리의 윤곽을 기억하거나 요지를 적어 둘 것, 여섯째는 설교 중 당신의 영혼에 가장 크게 중요하거나 관심사에 대해 답이 되는 내용들을 특별히 기록할 것, 일곱째는 집에서 기독교교리를 공부하도록 할 것, 여덟째는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 설교 중에 들은 말씀을 묵상할 것, 아홉째는 설교 내용에 대하여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은 대답해 줄 수 있을 만한 사람들에게 물어 볼 것, 열째 당신이 이해하고 싶어하는 교리들을 다룬 좋은 책들을 읽도록 할 것, 열한째 지혜와 성령의 조명을 구하며 부지런히 기도할 것, 열두째 당신이 알게 된 내용을 의식적으로 실천할 것, 이것이야말로 말씀에 대한 이해를 돕는 최상의 방편이다.
이 점에 있어서 제임스 패커(James I. Packer)는 이 문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모든 청교도들은 지식 없는 종교적 감정이나 정서는 무익하다기보다 사악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들은 오직 진리를 지각하고 있을 때의 정서라야만 바람직한 정서라고 보았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진리를 느끼고 순종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이고, 지식이 없는 감정에 의하여 지배될 때 그것은 마귀가 역사하고 있는 확실한 표적이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순종이 없는 지식이 영혼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것처럼 지식과 분리된 감정과 어두운 정신이 지각하는 충동 같은 것들도 똑같이 영혼에 파멸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진리의 가르침이 목회자의 제일 과제인 것처럼 진리를 배움은 평신도의 제일 과제이다.”
진리의 빛이 사라진 교회에서는 언제나 어두움의 영들이 활개를 친다. 깨닫지 못하는 우매한 마음으로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언제나 하나님에게 지배를 받기보다 자신의 생각과 악한 영들의 세력에 의하여 다스려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서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2:15-17).
정직한 설교자
이처럼 청교도들이 예배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할 때 그것은 명백히 설교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설교는 하나님의 심판과 위로를 담고 있었는데 이것은 바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와 자비를 전해주는 것이었다. 그들이 모든 설교자가 바나바, 곧 위로의 아들이 되기 전에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따라서 청교도목사들은 성직에 취임할 때에 당연히 설교를 자신들의 가장 중요한 직무로 삼겠다는 개인적인 헌신의 맹세를 요구받았고, 신자들은 그가 선포하는 순수한 말씀에 열심을 품고 귀를 기울이겠다는 서약을 요구받았다. 그들이 원 계시가 담긴 성서 원어 연구를 목사의 당연한 의무로 받아 들였던 것도 바로 예배에 있어서 설교가 이처럼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사상 때문이었다. 이한 맥락에서 볼 때 설교가 예배자들이 이해하기 쉽고 평이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결론이다. 그래서 리챠드 백스터(Richard Baxter)는 이렇게 말했다. “가장 명백한 말은 가장 묵직한 문제들을 다룸에 있어서 가장 유익한 웅변이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의 하나님의 메시지를 그대로 전하기 위하여 그들은 결코 현학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다루지 아니하였다. 그들의 설교가 진지했던 것은 유모어 감각의 결핍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드러내려는 열망때문이었다. 그들은 학문적으로 박식한 사람들이었으나 예배자들의 교육 수준이 낮은 것이 설교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마음으로 소화하지 못한 내용들을 관용구, 전문용어, 과장법, 꾸밈, 학적인 체하는 표현을 통해 설교하는 것은 곧 성도들의 이해를 가리는 것이라고 믿었다. 다시 말해서 순수한 성경의 진리를 단순하고 평이한 방법으로 회중들에게 이해시키는 설교 방식을 택함으로써 그들의 예배로 하여금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되게 하였던 것이다.
오늘날 조국교회의 예배의 위기는 단지 성직자의 화려한 복식이나, 아름다운 실내 장식, 열정적인 찬양팀의 운영이나, 전문적인 성가대의 운영이나 예배 순서의 현대적인 변화 등을 통하여 극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체험한 거룩한 진리에 사로잡힌 설교자와 예배를 통한 하나님을 갈망하는 예배자들과 그들의 만남에 찾아와 주시는 하나님의 임재하심 없이는 거룩한 예배가 될 수 없다.
맺는 말
우리 앞에 있는 다음 세기는 불확실하다. 그러나 우리가 알 수 있는 확실 것이 하나 있다. 다음 세기의 사람들은 더더욱 기독교신앙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러나 참된 기독교신앙을 일고자하는 자들일수록 교회로부터 도움을 받을 필요성을 점점 덜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교회가 복음의 본질을 회복함으로써 예배 속에서 그리스도의 참된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정직하게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의 예배가 “영과 진리”안에서 드리는 예배로 회복되어야 한다. 필자는 조국교회가 이러한 예배를 회복하기를 갈망하며 죤 길리즈(John Gillies)와 함께 다음과 같은 회고에 그리움을 담아 이 글을 맺는다.
“그들의 설교에는 장엄함과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말과 생각에는 타오르는 불과 힘이 있었으며 이로 인해 우리는 그 설교자들이 힘의 사람들이었음을 느낍니다. 그들의 증거는 나팔이 되었고 그 나팔은 소리를 성자에게나 죄인에게나 교회에 대해서나 세상에 대해서나 결코 희미하거나 애매한 소리를 내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말씀을 증거함에 있어 주춤거림이나 입 발린 소리를 하는 것이나 겉치레의 말로 예언을 대신하는 것 같은 일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죄를 멸하신 십자가 위에서 죄의 종지부를 찍으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역사하게 된 큰 기쁨의 소식을 선언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율법과 형벌들은 선포하는 데 더욱더 탁월하였습니다. 그들은 구도자들을 십자가에서 완성된 바로 그 구속의 성취로 곧장 이끌어 내어 복음을 즐거워하도록 만들어 주는 일보다 먼저 그들에게 자신들의 행위가 무엇이고 무엇을 느껴야 하고 믿어야 하는지를 심어 주고자 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시간에는 또한 구주가 누구신지를 완전히 드러내 주었으며 주님의 영광스러운 복음에 대해 자유롭게 선포하였습니다. 그들의 설교는 엄청난 능력으로 청중들에게 던져진 가장 용맹스럽고 담대한 종류의 선포들이었습니다. 그것은 격렬하지도 않았고 사납지도 않았으며 시끄럽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은 너무도 경건하여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것은 경박하지도 아니하였으며, 무게도 있었고, 날카로웠으며, 사람의 심령을 깨뜨리는 힘이 있었으며, 좌우에 날선 검보다도 예리하였습니다. 그들이 휘둘렀던 말씀의 무기들은 잘 담금질되어 있었고, 반짝반짝하게 닦여 있었으며, 예리하고 날카로웠습니다. 그들은 결코 빈약하거나 훈련되지 않은 무기를 휘두르는 법이 없었습니다.” -ⓗ
예수가좋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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