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순결을 지키는 교회(계 2:18-29)
두아디라는 사도 요한이 가장 긴 편지를 보낸 도시였습니다.
이 지역은 상업적으로 다른 곳보다 좀더 활기 있는 곳이었습니다.
교통의 중심지로서 세계 무역의 절반 이상을 관장하고 있었다고 전해질 만큼 상업적으로 왕성한 활동이 펼쳐진 곳이었습니다.
모직, 직조, 염색, 요업 등의 분야에 동업조합이 있었고 특히 유행한 것은 양모와 염색 산업이었습니다.
우리는 두아디라 출신의 한 성도를 알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6장 14절에 보면 비단장수 루디아의 고향이 바로 두아디라입니다.
유럽 최초의 개종자라는 칭호를 받고 있는 그녀는 두아디라의 특산품이자 당대의 고가품인 염료를 취급하던 무역업자였습니다.
두아디라 교회가 지닌 문제는 버가모 교회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음행과 우상숭배가 난무했습니다. 그러나 이들 두 교회의 상황은 서로 달랐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사단의 핍박이 거셌지만 두아디라 교회는 그다지 핍박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들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요.
내부 문제입니다. 핍박은 없었지만 안에서 잘못 가르치는 사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단은 핍박보다 거짓 교훈으로 두아디라 교회를 공략하려는 전략을 펼쳤습니다.
선지자를 자처하는 이세벨은 사단의 깊은 것을 하나님의 계시인 양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안에서 이상한 사람이 나타나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는 것입니다.
외부보다 내부에서 발생하는 문제가 더 위험합니다.
외부에서 누군가가 공격할 때는 똘똘 뭉쳐서 대항하기 때문에 오히려 극복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내부에 문제가 있으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사단은 목표 달성을 위해 상황에 따라 다른 전법을 활용합니다.
사단이 항상 같은 수법으로만 나오리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언제든 상황을 활용해 성도를 공격하고 교회를 공격합니다.
성도들은 상황논리에 휩싸여 살아서는 안됩니다.
어떠한 상황에 처할지라도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상황과 환경의 지배를 받는 건 사단의 계략에 휘말리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를 따라가야 합니다.
변화무쌍한 세상의 뒤를 좇는 것은 옳은 선택이 아닙니다.
한결 같고 변함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야하고 그럼으로 영적인 순결을 지켜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두아디라 교회를 천천히 살펴보면서 두아디라교회를 향한 칭찬과 책망과 경고의 말씀이 우리교회에게 어떤 교훈은 주는지 같이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칭찬 -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은 교회(19절)
19절 말씀 보도록 하겠습니다.
(계 2:19) 『내가 네게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여기 두아디라 교회는 참으로 칭찬할 일이 많았습니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 이러한 것들이 많았던 교회였습니다.
여기서 사업이라는 것은 행위와 같은 단어는 행위와 같은 단어입니다.
그래서 이 사업이라는 말은 사랑, 믿음, 섬김, 인내를 다 아우르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섬김이라는 단어는 사랑의 행위로서 나타나는 것으로 볼 수 있구요.
여기 인내는 세상을 살아가는데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인내를 소망으로 의역할 수가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이 내용을 의역해보면 예수님께서는 두아리라교회의 사랑과 믿음과 소망의 행위를 알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사랑과 믿음과 소망, 즉 기독교의 3대 덕목을 잘 갖추고 있는 교회였습니다.
이 사랑과 믿음과 소망을 잘 들어내서 행위로서 보여주는 교회였던 것이지요.
예수님의 칭찬으로는 더할 나위 없는 칭찬이지만 우리 예수님께서는 더욱 큰 칭찬을 두아리라 교회에 하고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처음의 그들의 믿음, 소망, 사랑의 행위보다 나중에 그들이 보인 믿음, 소망, 사랑의 모습이 더욱 크고 많았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도 잘했지만 점점 더 잘한다는 것이지요.
이 두아디라지방에 교회가 세워지고 그들은 얼마나 열심히였겠습니까?
그들 중 많은 성도들이 염색업을 통해서 돈을 벌었고, 그것이 교회에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사업에 쓰임받는 것이 참으로 좋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런 모습은 변하지않고 계속해서 그 교회에 넘쳐났고, 매일 매일 이런 행위와 모습들이 이 교회에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처음에 잘할 수는 있습니다.
의욕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시작했을 때는 잘 할수 있어요.
하지만 그것이 익숙해지고, 시간이 지나면 처음의 그런 의욕은 식어지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그래서 처음의 그런 헌신과 수고가 형식적인 것이 되다보니, 나중에는 그런 모습이 껍데기만 남는 경우가 생긴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들은 달랐습니다.
이런 사랑과 믿음과 소망의 행위와 사업들을 계속을 늘려갔고, 늘리는 만큼 이들의 헌신과 봉사가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안양교회가 이런 교회였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우리 안양교회는 최근에 참예수교회안에서도 모든 이로서 주목을 받을 만큼의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와 성도님들의 헌신이 있었습니다.
이 사실은 지금 모는 참예수교회에서의 이야기 거리가 되고 자랑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안식일에도 많은 설교 단상에서 본 받아야 될 간증으로 우리 안양교회가 소개되고 있을 것입니다.
자랑스러운 일이지요.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런 성도님들의 수고가 스스로는 수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를 체험하는 행복이라는 것이지요.
우리 성도님들은 다 그렇게 말씀하시잖아요.
이렇게 교회가 세워지는 과정을 체험하니 하나님의 섭리에 놀라워할 수밖에 없고, 일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행복할 수밖에 없는 것!
그렇다면 우리는 더 나아가야 합니다.
앞으로 이런 우리의 헌신이 날로날로 발전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연예계의 반짝 스타로 남는 것이 아니라~
오래오래 대기만성형의 모습으로 나아가는 진정한 스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욕심내야 합니다.
어떤 분은 빌립보서에 바울의 고백처럼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라고 하면서 ‘이 정도면 됐지~’하는 스스로 만족하는 말씀을 하시는데요..
그것은 세상에 대하여 하나님이 주시는데로 만족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앙안에서는요? 끊임없이 욕심내야지요.
지금 교회가 이렇게 세워졌으면 다음에 더 큰 교회를 꿈꾸며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 만약 교인의 수가 조금 증가했다면 이 교회에 더 많은 하나님의 백성이 가득할 수록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님들을 주님의 교회를 세우는 기초석으로 사용하셨다면 이제는 하나님께서 웅장하고 큰 구원의 집의 기둥으로 사용하실 수 있도록 헌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에 머무르는 신앙은 썩을 수밖에 없습니다.
물은 고이면 썪는다고 했어요.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신앙의 믿음, 소망, 사랑의 실천이 계속에 커지고 발전해야 내 신앙이 썩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모쪼록 처음 행위보나 우리의 나중 행위가 더욱 많아지는 우리들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2. 책망 - 회개할 기회를 굳게 잡는 교회(20-23)
우리 예수님께서는 이번엔 두아디라 교회를 실랄하게 책망하고 또 벌을 주겠노라고 엄포를 놓고 계십니다.
20절에 보니 자칭 선지자라 하는 이세벨을 용납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그들의 신앙의 행위만 열심히 발전시킬 줄 알았지 잘못된 진리를 전하는 교회내에서의 무리를 용납하고 따랐다는 것입니다.
이세벨이 누구입니까? 이세벨은 북이스라엘 아합왕의 아내였습니다.
그는 그가 섬기는 바알신을 이스라엘에 들여와서하고 사당을 세우고 그를 섬기게 한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들이 이세벨이 들여온 바알신을 섬기고 바알신과 짝을 이루는 아세라신을 섬기는 우상숭배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세벨은 교묘한 여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 하나님을 바알과 아세라신으로 바꾸어서 그대로 섬기게 했다는 것입니다.
결국에 백성들이 수천년동안 섬기던 하나님을 뒤로하게 되다보니 엘리야기 급기야는 바알과 아세라신의 선지자들로 갈멜산에서 내기를 하기에 이르지 않습니까?
사실 이세벨은 북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아 멸망당하게 되는 직접적인 이유가 됩니다.
여기 두아디라 교회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교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서 조금 방향만 틀어서 그런 교회에서 하는 사업은 많이 하고 있으니 세상과 조금 타협하고 살아도 무방하지 않냐는 그런 식의 논리로 사람을 꾀어갔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그것을 잘못했다고 막아야하고, 징계해야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인정해줍니다.
받아줘요. 결국에 그것이 예수님께로 크게 책망받을 일로 되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그들이 책망받을 것은 회개할 기회를 줘도 회개를 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계 2: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
어떤 방법으로 회개의 기회가 주어졌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간음과 살인죄를 나단이 지적했던 것처럼 기회를 줬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은 회개할 기회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어땠습니까?
그 회개의 기회를 주었음에도 그것을 져버리고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결국에 회개하지 않은 죄가 더 큰 죄가 되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런 댓가를 지불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 침상에 던질 것이다. => 각종 질병으로 고생케 하겠다.
- 환난 가운데 던질 것이다. => 삶을 곤란하게 만들며
- 그의 자녀를 죽일 것이다. => 자녀의 목숨을 빼앗겠다는 것.
너무나 무서운 것 아니겠습니까?
사실 이런 육체적인 고통보다 더욱 무서워해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더욱 무서운 것은 이런 각 사람의 회개치 않는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런 두아디라 교회를 향한 책망에서 교훈을 받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회개할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기회를 붙잡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을 살면서 얼마나 많은 죄의 유혹에 있습니까? 우리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롬 7:21-25)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참 공감 가는 그런 말씀 아닙니까? 이러면 안되는데....하면서 내 육신의 정욕에 넘어지는 우리의 모습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만약 바울이 이것으로 문장을 끝냈다면 참으로 실망만 있는 우리의 모습일 것 같습니다.
(롬 8:1-4)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의 육신으로는 그런 유혹을 이겨낼 수 없지만 성령의 능력으로 율법의 요구, 죄를 짖지 않을 수 이도록 해준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이 세상가운데 살면서 이 순간까지 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율법을 다 지키는 단계를 말합니다. 이런 단계에 이르는 과정을 성화의 과정이라고 말할수 있지요.
'신약 내용!! 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너희는 부요한 자라!(계 2:8-11) (0) | 2013.03.22 |
---|---|
[스크랩] 믿음을 지키며 사는 사람들(계 2:12-17) (0) | 2013.03.22 |
[스크랩] 영혼이 살아서 깨어 일어나는 교회(계 3:1-6) (0) | 2013.03.22 |
[스크랩] 강하고 힘있는 교회(계 3:7-13) (0) | 2013.03.22 |
[스크랩] 열정넘치는 부요한 교회(계 3:14-22) (0) | 2013.03.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