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내용!! 강해!!

[스크랩] 너희는 부요한 자라!(계 2:8-11)

하나님아들 2013. 3. 22. 12:11

너희는 부요한 자라!(계 2:8-11)

 

(계 2:8-11)

[8]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 진짜 부자 ☆

조선시대 숙종 임금이 어느 날 야행을 나갔다가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를 지나게 되었다.

다 쓰러져가는 집들을 보며 혀를 차고 있는데 어느 움막에서 웃음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것이 아닌가.

기와집이 즐비한 부자 동네에서도 듣지 못했던 웃음 소리에 숙종은 어리둥절했다 .

숙종은 그 까닭을 알아보기 위해 움막에 들어가 주인에게 물 한 사발을 청했다.

그 사이 문틈으로 방안을 살펴보니 수염이 허연 할아버지는 새끼를 꼬고 올망졸망한 어린 아이들은 짚을 고르고 있었다.

할머니는 빨래를 밟고 부인은 옷을 깁고 있었다.

 

그런데 모두들 얼굴이 어찌나 밝고 맑은지, 도무지 근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숙종이 주인이게 물었다.

" 형편이 어려워 보이는데,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소? 밖에서 들으니 이곳에서 웃음이 끊이지 않더이다.“

 

"빚 갚으며 저축하면서 부자로 삽니다 그래서 저절로 웃음이 나는가 봅니다."

 

궁궐로 돌아온 숙종은 금방 쓰러질 듯한 움막에서 살며 빚도 갚고 저축도 한다는 말이 의아해 몰래 알아보았다. 하지만 조사 결과 그 집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숙종은 다시 그 집을 찾아가 주인에게 예전에 했던 말의 뜻을 물었다.

주인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부모님 봉양하는 것이 곧 빚 갚는 것이고, 제가 늙어서 의지할 아이들을 키우니 이게 바로 저축이 아니오? 어떻게 이 보다 더 부자일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돈이 있다고, 형편이 좋다고 부자가 아니지요?

 

그래서 독일의 브라운 슈바이크란 사람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물질적인 부와 정신적인 부는 반드시 병행하는 것이 아니다. 부유하면서도 가난한 사람이 있고, 가난하면서도 부유한 사람이 있다. -브라운슈바이크 ’

 

그런 물질적인 만족은 우리에게 채울 수 없는 한 없는 욕심의 항아리가 있습니다. 이 항아리는 밑이 뚫려있는 항아리죠.

우리 예수님 또한 서머나 교회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선 궁핍하지만 너희의 진짜 모습은 ‘부요한 자이다.’"

 

지난 주 이 시간에 말씀 드린 것처럼 이 계시록의 교회들을 향한 말씀은 바로 우리 교회를 위한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바로 우리에게 향한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안양교회~! 바로 너희들의 실상은 부자야~^^

 

도대체 우리가 왜 부자일까요?

 

1. 우리는 왜 부요한 자인가?

1) 환란과 궁핍을 아시는 주님이 있기에

(계 2: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당시에 서머나라는 도시는 에베소와 함께 에게해를 끼고 있는 항구 도시에베소, 버가모와 함께 소아시아 지역에서 당대 최고의 도시라고 불리우기를 다투던 중심도시였습니다.

그러나 당대 일급 도시라는 호칭은 세상적인 관점에서는 좋은 것이었으나 기독교인의 관점에서는 결코 좋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당시대 당 지역에 있어 일급 도시란 그 만큼 우상 숭배가 성행했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서머나는 예루살렘 멸망(AD 70년) 이후에 많은 유대인들이 이주해서 정착한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서머나 교회는 황제 숭배를 강요하는 로마의 세력유대주의적 율법주의 때문에 기독교를 배척하는 유대인들이라는 커다란 두 세력으로브터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심한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끊임없는 환란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환란이라는 것은 곤경에 빠지기도하고 압박을 받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이 압박은 우상을 숭배하고 황제를 숭배하는 사람들로부터의 압박이지요.

끊임없이 그들이 행하는 제사에 동참하기를 압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빠져나오기 힘든 곤란한 환경을 만들어서 그들로부터 곤경에 빠지게 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았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섬김으로 받는 압박이 장난이 아니었다는 것이지요...

 

고등학교 때에 제가 교회를 다니면서 참으로 힘든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제사의 문제였습니다.

처음에 교회를 다닐 때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다니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성령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아 가면서 마음속으로 걸리는 것이 있었어요. 그것은 바로 제사의 문제였습니다. 보시기엔 제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저는 집안에서 4대 독자입니다.

일년이면 몇 번씩 있고, 추석 설날 때마다 드려야하는 제사는 저를 많은 시험에 빠지게 했습니다.

항상 고민이었습니다.

 

그런 믿음의 싸움이 오늘날 저를 만들어 주었다고 믿습니다. 그런 믿음의 싸움에서 하나님은 저를 성숙시키시고 만드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서머나교회가 당하는 환란이었습니다.

거기에 서머나 교회는 궁핍했습니다. 궁핍했다는 것은 비단 마음이 궁핍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정말 그들의 먹고살 것이 없는 궁핍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의 양심이 당시 사회문화적으로 우상을 섬기는 분위기에서 할 수 있는 직업이 극히 제한되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사회 문화적으로 우상을 섬기는 일에 대한 일거리와 먹을 거리가 많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시장에 팔기 위해 나와있는 음식에 대해서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당시엔 우상을 섬기는 일로 인한 직업, 먹을 수 있는 것들이 신앙의 양심으로 도저히 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았다는 것이지요.

 

서머나 교회는 바로 이런 교회였습니다. 그들이 섬기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받는 환란과 궁핍이 그들을 괴롭게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누가 알아주십니까?

우리 예수님께서 알아주신다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 예수님은 8절에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고 계십니다.

(계 2:8)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우리 예수님은 세상의 처음이고 나중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시간을 주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이것은 생명의 주인되시는 예수그리스도 자신을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계십니니다.

‘너희의 환란과 궁핍을 내가 알고 있다. 하지만 너희는 이런 형편을 이기는 신앙이 있으니 부요한 자니라~’

 

오늘날 우리가 세상에서 헐벗고 굼주린 분들은 아니게실 것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 신앙, 그가 말씀하신 말씀을 지켜나가기 위해서 당하는 시련이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 집사님이 안식일 지키시려고 아르바이트 자리 찾는 것이 한계가 있고, 아직 믿지 않는 가정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을 거부하며 싸워가는 언수의 모습이 바로 이런 환란과 궁핍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환란당하는 자가 아이요 궁핍한 자가 아닌 부요한 자입니다.

 

찬송 중에 이런 찬송이 있잖아요.

내 영혼이 은총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주예수 모신 곳이 그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모든 죄 사함받고 주예수와 동행하니 그어디나 하늘나라~

 

처음이요, 나중인 예수님, 죽었다가 다시 사신 예수님이 우리의 형편을 너무나 잘 알고 계닙니다.

그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곳, 함께하는 자가 천국에 있는 자요. 부요한 자라는 것입니다. 모쪼록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영적 부요함에 힘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2) 우리가 하나님의 선택된 참백성이기 때문에

우리 예수님은 당시에 스스로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알고 있었던 유대인들을 이렇게 표현하고 계십니다.

9절 하반부 절입니다.

(계 2: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여기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을 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까? 그들은

자칭 유대인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고

사단의 회

 

이들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의 모든 자보다 우월한 존재로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을 행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핍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아무리 스스로를 유대인, 하나님의 선민으로 여기고 있지만 그들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롬 2:28-29) 『[28]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그러면 누가 유대인이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일컬음 받는 할례를 받은 사람입니까?

(갈 3:26-29) 『[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우리 예수님께서는 서머나 교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다른 사람이 유업을 이을 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은, 세례를 받은 자가 바로 내 아들, 내 유업을 이을 자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요한 자인 것입니다.

 

마크 트웨인의 “왕자와 거지”를 아십니까?

어느날 시골에서 톰이라는 아이가 태어나고 왕궁에서 애드워드라는 왕자가 태어나잖아요. 그런데 이 둘이 비슷해서 결국에 서로의 생활에...

그리니까 거지는 왕자로, 왕자는 거지로 바꾸어서 생활하게 됩니다. 거지였던 왕자는 나름대로 그 격식에 너무나 힘이들고, 왕자였던 거지는 아버지의 폭력과 억압에 힘이 들어 하다가 결국에 다시 돌아오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볼 때에는 우리의 모습은 비슷해 보입니다. 다를 것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왕자예요. 왕이신 하나님의 왕자!

 

아동반 찬양중에 이런 찬양이 있습니다.

왕왕왕왕 나는 왕자다

하나님 나라의 나는 왕자다

이 세상을 앞장 서가는 나는 왕 나는 왕 나는 왕자다

내 앞길 막아서는 자 누구든지 물리치리라

이 세상을 앞장서가는 나는 왕 나는 왕 나는 왕자다.

 

우리의 신분을 밣히 알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예수그리스도의 유업을 이을 아들 바로 영적 유대인이라는 사실을요.

 

3) 생명의 면류관에 대한 약속 우리에게 있기에

그리고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런 영적인 신앙의 승리자는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도곡동 땅이 아닙니다. 강남의 빌딩이 아니예요. 하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생명의 면류관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서머나 교회가 끝까지 그 신앙을 지켜나가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끝없이 충성함으로 그에게 약속한 것은 먼 훗날 우리에게 올 생명의 면류관을 약속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천국이 왜 좋습니까, 왜 천국에 가려고 하십니까?”하고 물으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하늘나라가 좋은 가장 큰 이유는 그곳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3명의 아들을 둔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불의의 사고로 큰아들을 잃고 말았습니다. 안식일 아침, 아직도 슬픔이 채 가시지 않아 모두 말없이 수저만 뜨고 있던 식탁에서 둘째아들이 불쑥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은 하늘나라에 가서 처음 안식일을 지내겠지?”

그런데 그 말에 막내아들이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바보같은 소리하지 마. 하늘나라에선 매일이 안식일이야.”

 

어린 아들의 이 말은 집사님의 정신을 번쩍 들게 했습니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것을 기억나게 해줬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큰아들은 늘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하늘나라가 좋은 것은 그곳에 우리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약속받은 그 생명의 면류관은 우리 예수님과 영원히 살 수 있는 권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이요. 주신 것이지요.

 

우리의 삶을 살면서 이 약속받은 생명의 면류관을 잊지 않으시길 원합니다.

2. 부요한 자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1) 고난을 두려워 말라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세상에 살려다가 고난이 오더라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지래 겁먹어서 스스로 고난을 자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신분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나의 형편을 아신다는 믿음으로 우리는 당당히 그 고난을 맞서야하다는 것입니다.

장수가 전쟁에서 상대가 가지고 있는 무기가 뻔히 나보다 턱없이 모자란 무딘 칼이라는 것을 아는데, 그리고 상대와는 비교도 안되는 칼과 방패가 있는데 두려워서 피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고난을 두려워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 환란가운데 죽도록 충성하라

이 환란은 10일동안 받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특별한 10일 동안의 환란이라기 보다는 길지 않는 환란의 시간이 있을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이지요.

주후 156년경 서머나에 닥친 환란을 말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서머나의 감독 폴리캅은 신약시대 이후 첫 순교자 중 한 사람이다.

역사가 브루스는 폴리캅은 사도 요한의 수하에서 공부하였고, 사도들과 그 후 세대를 연결하는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주후 2세기경 서머나에서 목회를 했던 폴리캅은 전도에 열심이어서 신자, 불신자들의 주목을 받곤 했다. 현존하는 그의 유일한 작품은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로, 그는 이 편지에서 “그리스도는 주님이시고 그는 현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며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이 그에게 굴복한다.”고 강변하고 있다. 약 50여 년간 감독직을 수행한 그는 온유하였고 사람들에게 겸손의 귀감이 된 사람이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주후 156년경 아시아 지방에서 기독교 박해가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정부는 명확한 이유 없이 몇 명의 기독교인을 처형하기로 결정하였다. 당시 교회의 지도자였던 폴리캅은 지명대상이 될 것이라는 우려로 인해 한동안 숨어 지냈다. 그러나 로마 군인들이 그의 하인을 고문하여 그가 숨은 장소를 알아내어 그를 체포했다.

당국자들은 86세 된 노인인 폴리캅을 처형하는 것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각종 회유를 통해 그가 신앙을 부인하도록 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폴리캅은 재판정에서 “그리스도를 저주한다고 저주하라. 그러면 석방하겠다.”는 형리들의 말에,

“나는 평생 동안 그분의 종이었고 주님은 나에게 단 한 번도 서운하게 해 주신 적이 없었소. 그런데 나를 구원해 주신 왕을 이제 와서 어떻게 부인할 수 있겠소!”

라고 응수하며 계속되는 사나운 짐승과 화형의 협박에도 굴하지 않았다. 결국 투기장에서 폴리캅을 고문했던 형리가 “폴리캅은 그가 기독교인이라고 고백하였다!”는 말을 세 번 외치며 군중들을 성나게 했고, 성난 군중들에 의해 폴리캅은 화형을 당하게 된다.

 

폴리캅의 순교로 인해 서머나 교인들은 훌륭한 지도자를 잃게 되었으나 그 순교사건 이후 비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인들을 크게 두려워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아시아 순교의 종지부가 찍히게 되었다. 또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하지 못하던 용기 없은 기독교인들에게 커다란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이 환란이 있음에도 예수님께서는 죽도록, 죽음의 위험가운데 있어도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결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서머나교회의 성도들처럼 신앙을 지켜 나감으로 인한 어려움이 있습니다. 부족함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의 실상은 부요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이 가지지 못한 것을 우리는 가졌기 때문입니다.

 

송명희 시인의 “나” 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이 찬송으로 오늘 이시간 우리가 마칠까 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보다도 부요자요 행복자임을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고백하겠습니다.

 

새찬양 242장 하시겠습니다.

출처 : 하나님의 종 바나바의 자료
글쓴이 : 끝장보는 신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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