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을 지키며 사는 사람들(계 2:12-17)
서론
예수님과 제자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애들아, 내일 소풍을 가려고 하니 커다란 돌을 몇 개씩 가져 오너라!”
베드로를 비론한 많은 제자들은 말씀에 순종하여 바윗돌처럼 큰 돌을 힘들게 들고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늘 의심하던 가룟 유다는 아주 작은 돌을 두 개만 가져왔습니다.
목적지데 다다르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애들아, 돌들을 내려놓고 모두 앉아서 점심 먹자.”
그리고는 하늘을 우러러 감사기도를 드린 후 돌에게 안수하시니 돌들이 빵으로 변했습니다. 제자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큰 빵을 실컷 먹었으나 가룟 유다는 쫄쫄 굶어야 했습니다.
며칠이 지난 후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애들아, 내일 또 소풍을 가려는데 작은 돌을 몇 개씩 가져와라”
다음 날 베드로와 제자들은 작은 돌을 주머니에 가득 넣어서 소풍을 떠났습니다.
의심많은 가룟유다는 지난 번 일이 생각이 나서 큰 돌을 낑낑거리며 들고 따라왔습니다.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 예수님께서 큰 나무 아래 가셔서 나무를 붙들고 기도하시니 갑자기 나무에 빵이 주렁주렁 열렸습니다.
“얘들아, 가지고 온 돌을 던져 따 먹어라.”
이번에도 베드로와 제자들은 배불리 먹었으나 가룟 유다는 큰 바윗돌을 제대로 던져보지도 못하고 구석에 앉아 주린 배를 움키고 울어야 했습니다.
참 재미있지요.
성경을 보면서 유다를 보면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유다는 예수님과 항상 함께 다니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으면서도 그 삶은 변화가 없었습니다.
변화는 커녕 오히려 그 예수님을 팔아서 돈 벌 생각까지 했다는 것이지요. 참으로 아이러니 하지요.
그는 예수님의 말씀과 기적을 보고 들으면서도 마음 속으로는 진정한 예수님을 체험하지 못하고 바라보지 못했던 것을 봅니다.
즉 믿음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유다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믿음이 이성적으로 혹은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생기거나 자랄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히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벧전 2:2)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롬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자라지 못했다는 것은 우리가 믿음의 연단을 통해서 그 자라고 자라지 못하는 것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벧전 1: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여기 버가모 교회가 그런 교회였던 것 같습니다.
끊임없는 믿음의 시련이 그들의 믿음을 시험했습니다.
그래서 자라지 못한 믿음은 많은 유혹에 넘어져 죄악으로 나아가 버리고,
믿음이 성숙한 사람은 시련에 순교함으로 그 믿음의 장성함을 증거하였습니다.
이런 모든 현상이 이 버가모 교회에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 믿음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마치 유다가 3년이 넘는 오랜 시간을 예수님의 말씀과 이적을 보았으면서도 그의 삶이 변화가 없는 것처럼.
우리가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았던 기간이 10년, 20년, 30년이 지나도, 예수님의 말씀을 예배시간에 수십 번, 수백 번을 들어도 나의 삶에 변화가 없고, 나의 믿음에 성장이 없다면 이것은 큰일이 아니겠어요?
오늘 이 버가모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칭찬과 경고를 보며,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에 대한 신앙의 태도를 가지고자 합니다.
본론
1. 날선 검과 같은 말씀으로 나의 삶이 변화되자.
먼저 버가모 교회에 대해서 설명드리고자 합니다.
버가모라는 도시를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선과 악의 투쟁지’였습니다.
버가모는 13절에 ‘사단의 위’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온 아시아에서 가장 우상 숭배가 성한 곳’이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버가모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바실리카교회의 기둥이 남아있습니다.
바실리카교회라는 것은 옛날 지역의 재판장과 같은 곳을 교회로 사용한 것을 말합니다.
버가모에도 많은 그리스도인이 있었다는 것인데 그 곳에는 충성된 종인 안디바와 발람의 교훈을 쫓는 니골라당과 같은 사람들이 공존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교회는 선과 악의 투쟁지였습니다.
그런 버가모 교회에 예수님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고 계십니다.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
이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고 있고 있는 것입니다.
(계 1:16)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그런데 왜 말씀은 날선 검이라고 하셨을까요? 이것은 말씀이 가진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은 살아있고, 움직이며, 예리해서 혼과 영과 곹수를 쪼갠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곧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뜻을 감찰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새번역에서는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어서, 어떤 양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를 밝혀냅니다.』
결국 이 말은 우리 말씀이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영역, 생각하고 있는 모든 영역, 의도하는 모든 영역을 밝혀낸다는 것입니다.
밝혀내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뭘 밝혀냅니까?
지금 무슨 생각하십니까? 저는 모르는데 예수님은 아셔요.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의 말씀 앞에 우리는 벌거숭이가 된다는 것입니다.
(히 4: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그럼 우리는 예수님 앞에 벌거벗은 부끄러운 모습으로 서 있어야하느냐~ 그게 아니죠.
끊임없이 우리의 모난부분은 다듬고, 더러운 부분은 깨끗하게 씻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모난부분을 다듬습니까? 바로 말씀이라는 예리한 칼입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우리의 모나고 부족한 부분을 다듬어야 하는 것입니다.
2. 환란 중에도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자.
버가모 교회에 충성된 믿음으로 한 사람의 일꾼이 순교를 당하게 됩니다. 바로 안디바라는 사람입니다.
안디바라는 사람에 대한 신빙성있는 자료는 현재 없다고 합니다.
단지 본문을 통해 볼 때 그는 순교한 성도라는 사실만 추론해 낼 수 있을 뿐입니다.
유대 전승에 그나마 안디바라는 사람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는데 그는 버가모 교회의 감독이었고 도미티나누스 황제 통치 때에 황제 숭배를 가부하다 체포당했다고 합니다.
도미티아누스는 요한을 펄펄 끓는 기름에 넣기도하고 이곳 밧모섬에 유배보낸 황제입니다.
안디바는 그렇게 체포되어 불에 벌겋게 달구어진 놋쇠 황소위에 앉히어 타죽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로마는 왜이렇게 무서운 형벌을 만들어 냈는가? 그것은 한 사람을 본보기로 죽이면 다른 사람이 그것을 보고 지레 겁을 내고 스스로 항복할 것이라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온갗 방법으로 다 죽임을 당했지요.
우선 12제자들의 죽음을 볼까요?
베드로 -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음
안드레 - X자형 십자가에 달려 순교
야고보 - 헤롯에게 목베어 죽고
요한 - 에베소에서 순사하고
빌립 - 기둥에 매여 맞아 죽음
바돌로매 - 산채로 가죽을 베낌
도마 - 쇠몽둥이에 맞아 죽음
마태 - 칼에 찔려 죽음
야고보 - 나무에 달려죽음
시몬 - 몽둥이로 맞아 죽음
유다 - 자결하여 목매어 죽음
당시에 이런 형벌들을 당했었습니다. 보통 생각하기로는 이런 죽음을 보고 미리 겁을 먹고 황제에게 달려가 절을 하거나 예수님을 부인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버가모 교회 형제들이 이런 모습에서 굴하지 않고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주변의 상황들이 공포로 엄습해 올 때에 오직 믿음을 가지고 헤쳐 나가야 한다는 것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공포가 엄습해 오는 경우는 많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많은 회식문화와 직장생활에서 자신이 예수님 믿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싶을 때가 생긴다는 것이지요.
제가 안동에서 실습할 때에 안동에 박헌신 목자님이 이런 간증을 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우리 박헌신 목자님이 처음에는 장로교회에 다니셨다는 것을 아십니까? 아시지요.
박목자님이 참으로 열심히 다니셨다고 합니다. 그러는 중에 아무리 봐도 주일이 맞지 않는 다는 것을 알게 되고 고민하고 있는데 마침 안식일 교회를 알게 되고 그 안식일에대해서 토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옳더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개종을 하시게 됩니다. 안식일 교회에서 매일같이 장로교회에서 이 목자님을 찾아 옵니다. 그때에 마침 한국전쟁이 나게 됩니다. 그 때에 장로교회에서는 목자님을 붙잡기 위해서 이 안동지역의 종교시설 책임자를 재안합니다. 그러면 군대에 가질 않아도 되는 거거든요. 하지만 박목자님은 단호하게 거절하게 됩니다.
그리고 열심히 안식일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곳에서 신학도 하게 되고 전도자와 같은 직분의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에 한 교회의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참예수교회 성도였습니다.
그 분과 토론을 하는 중에 성령에 대해서 듣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곤 여러번 만나서 토론을 하는데 너무나 성경적인 교회를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안식일 교회였습니다.
당시에 이 안식일 교회는 전쟁이 지난지 얼만 되지 않는 시점에서 미국에서 제공되는 엄청난 구호물자가 이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안식일 교회에서 제안이 들어오는데 여기 안식일 교회 목회자로 남는다면 그 구호물자를 관할하고 책임지는 일을 하게 해 주겠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꽤 많은 돈이 되니까요. 먹을 것이 없어서 하루하루를 고민하는 당시 시대에서 얼마나 달콤합니다.
거기에 번듯한 사택을 주겠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 박목자님 사모님이 매일같이 그것을 붙들어야 한다고 이야기를 하십니다.
보통사람들의 선택이라면 이 제안은 너무나 달콤합니다. 한 번쯤 눈 딱 감고 이 참예수교회를 포기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 때에 목자님이 이런 생각을 하셨다고 합니다.
“나중에 예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에 하나님이 왜 참교회를 선택하지 않았냐고 하시면 ‘유구무언’일수밖에 없겠구나~”
이렇게 생각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곤 참예수교회를 선택하셨다는 것이지요.
저는 마땅히 이 박헌신 목자님의 이 신앙생활이 세상에서주는 성공이라는 핍박중에서 승리한 신앙이라고 믿습니다.
참교회인줄 알면서 거부하고 숨기고 싶은 욕구.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의 사람으로의 삶을 알면서도 세상가운데 예수님의 자녀라고 크리스찬이라고 숨기는 것은 믿음을 져버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날 우리에게는 ‘성공’이라는 핍박이 여러분들을 옥죄고 믿음을 가지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이해하시길 원합니다.
오히려 그런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켰던 박헌신 목자님, 그리고 다니엘처럼 믿음의 승리가 항상 우리안에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3. 세상의 유혹에 넘어지지 않는 믿음으로 성장하자.
1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버가모교회를 책망을 하고 계십니다. 같이 볼까요?
(계 2:14)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바로 발람의 교훈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니골라당의 교훈과도 같은 것입니다. 계시록의 내용을 보아 니골라당의 교훈은 당시에 교회에서 큰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계 2:6)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이 니골라당은 오늘날에 남아있는 문헌이 없습니다. 온 갗 추측만이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니골라당이 추구했던 사상이 무엇인지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알 것 같습니다.
바로 14절에 있는 발람의 교훈이지요.
발람은 민 22-25장, 31:8, 16절에 등장합니다.
그는 모압왕 발락의 돈에 팔려서 발락에게 이스라엘을 유혹하여 모압여인들과 음행케하는 꾀를 가르쳐준 사람입니다.
그래서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압여인들과 음행하고 모압인들이 섬기는 우상에 절을 하고 그 음식을 먹게 됩니다. 그 결과 수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죽임을 당하게 하는 것이지요.
그런 발람의 짓이 당시에 교회에 일어났던 모양입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게하고 행음하게 했다고 14절에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들은 아마 거짓 선지자들의 복음의 자유를 종교적, 윤리적 방종으로 전락시킨 것 같습니다. 버가모 교인들은 그들의 논리에 넘어가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오늘날 우리에게 이 발람의 교훈, 즉 니골라당의 교훈이 얼마나 많이 있는 줄 모릅니다.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세상에 양보하다가 아예 넘어가 버리는 일이 얼마나 많이 있는 줄 모릅니다.
용서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긍휼의 하나님,
이런 하나님은 듣기도 좋고 기분도 좋습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이런 하나님의 속성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심판의 하나님, 징벌의 하나님, 노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죄를 싫어하시는 하나님~
사실 우리가 미연에 하나님 말씀으로 우리를 경건함을 지켜나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정도면 괜찮겠지~’라는 마음이 우리를 끊임없이 유혹하는 것을 잊고 삽니다.
옛날에 로마에 무섭고 흉학한 처형법이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잔인하고, 고통스럽게 죽이는 방법을 연구했던 로마였습니다.
그중에 죄수들이 참으로 무서워하는 형벌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체와 죄수가 함께 묵여져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뭐 이게 무섭냐구요?
처음에 별로 느낌이 없겠지요. 그런데 그 시체는 생명이 없기에 조금 지나면 썩겠지요.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그곳에 벌레가 생깁니다. 옆에 성했던 몸이 그런 벌레가 넘어오고 병균이 넘어와서 결국에는 같이 몸이 썩어가고, 결국에는 고통스럽게 온 몸이 썩어져서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씩 양보하면 몸, 하나님과 나 사이에 별로 피해가, 변화가 없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이것이 조금씩 조금씩 내 삶을 잠식해가면, 내 사고가 세상화 되고 내 언어 습관이 세상화 되고, 내 행동이 세상화 되고 결국 예수님으로부터 버리운 자식으로 될 수가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예수님은 세상의 이런 니골라당의 교훈을 싫어하시기에 회개하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조금이라도 세상에 발과 손을 담그고 있다면 이 시간 이후로 돌아서서 나오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곧 회개인 줄 믿습니다.
이렇게 조금 조금 내 삶이 변화된다면 그것이 신앙의 성장이라 자라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결론
오늘 우리는 버가모 교회의 교훈을 배웠습니다. 그 교회는 선과 악의 투쟁지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얼마나 큰 선과 악의 투쟁지에서 살아나가고 계십니까?
우리가 보고 배워야 할 것은 그들이 그런 악을 믿음으로 극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반면 교사로 삼아야 할 것은 니골라당의 교훈으로 우리가 절대로 넘어지지 말자는 것입니다.
조금씩 양보하는 내가 아니라 내가 더욱 하나님의 경건으로 나아가는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기도
양날에 날선 검과 같은 말씀으로 저희를 훈련하시는 하나님
오늘이 이 시간 믿음으로 우리가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서머나 교회가 믿음으로 순교하여 칭찬을 받았던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위한 순교로 말미암아 칭찬받게 하옵소서
구체적인 목숨의 위험은 없지만 우리를 ‘세상에서의 성공’이라는 것만으로
예수님을 배반케하는 세상입니다.
저희로 믿음을 지켜나가면서 성공한 다니엘처럼
믿음이 더욱 강건하여 무너지지 않는 성공의 탑을 쌓게 하시고
그 믿음의 우선순위가 우리의 삶의 방식이 되기를 원합니다.
모난 저희 말씀으로 다듬어주시고, 상처받은 영혼 말씀으로 치유하시고,
부족한 저희 말씀의 충만함으로 채워주시옵소서
모든 영광 주님께서 홀로받으시길 원하오며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신약 내용!! 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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