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이 살아서 깨어 일어나는 교회(계 3:1-6)
살았으나 죽은 나는
글 / 고 운
내 영혼인데도
지금 그 영혼 내게는 없습니다.
어느새 몸뚱이 빠져나가
당신 주변을 서성이고 있습니다.
당신의 마음 문 살짜기 두드리고 있습니다.
당신이 곁에 없는 온 하루, 나는
살아있어 숨 쉬나
빈 껍질만 남아 죽어 살았습니다.
내 눈 가득히
당신의 눈웃음만 강물로 흐르고
내 오감은
숯불로 끓는 당신 가슴 헤엄칩니다.
내 머리에는 온통
당신으로 가득 차 바늘끝 틈새가 없습니다.
우리 잠 못 이루는 이 밤 그리움의 상념들
천리 길 내달리다 어느 하늘밑 만나
천둥으로 뒹굴고 있을 겁니다.
아직은 멀기만 한 봄
가슴에 심은 작고 까만 씨앗 한 알
차디찬 겨울비라 함초롬히 머금고
언 대지 힘차게 솟아오르려 움찔댑니다.
소한 대한 몰아쳐 위협한단들
야들한 새싹이라 결코 꺾지 못하리다.
멀리 대지 울리는 발 소리 다가와 멎고
으스러지게 보듬어 맴돌 날 기다리며
혼자이나
결코
혼자일 리 없는 당신의
나
그대 품속인 듯 포근히 잠자리 들려오.
꿈길
그 하늘가 찾아 맴돌며 -.
이 시는 바로 고운 시의 ‘살았으나 죽은 나는’이라는 시입니다.
이 시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영혼을 빼앗겨서 내 몸에 영혼이 그 사랑하는 사람을 쫒아 간다는 그런 사랑에 관한 시입니다.
하지만 이 시에서 중요한 것을 하나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육체만 가지고 있다고 그 사람이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의 영혼이 중요한 것이지요.
사데 교회의 현재 지명은 사르디스입니다.
사데의 뜻은 ‘남은 자' 또는 ‘남은 물건’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사데는 두아디라에서 남쪽으로 48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요.
강가와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사데의 이러한 지형학적 위치가 적들이 침입했을 때 방어할 수 있는 난공불락의 도시적인 지형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17세기에 지진으로 기둥들만 남아있지만 한때는 굉장한 도시였습니다.
이곳은 과일과 양모 생산이 유명한데 특히 생산되는 양모를 염색하여 옷을 만드는 일이 사데의 중요 산업이었습니다.
사데 교회 기원은 분명치 않으나 역사가들의 말에 의하면 요한의 전도로 세워졌고, 2세기에 주석가로 유명한 멜리토가 이 교회의 감독이 되면서 교회의 명성을 떨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데 교회의 문제가 어떤 문제였냐 하면 물질적 풍요로 말미암아 내적인 피폐로 안일과 부도덕의 모습이 교회에 깊숙이 침투하였다는 점입니다.
이곳은 금화를 처음으로 만들어 이웃 도시 국가들에게로 보급하던 곳입니다.
당시 문명이 앞서 있던 이집트나 히타이트에서도 동전을 만들어 사용하지 않았는데 사데의 리비아 왕국이 금과 은으로 만든 동전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금화를 만들어 사용했다는 것은 사데 지역에 금이 많이 나왔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까 양모염색과 금채취로 인해 사데는 부유한 도시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원래 사데 지역의 주된 신앙 대상은 키벨레 여신이었습니다.
지금 가보면 거의 기둥만 남아 있는데, 신전 옆에 작은 교회가 세워진 것으로 보면 이교도 신앙에 기독교로 개종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에서 사데 교회처럼 혹독한 비판을 받은 교회도 없습니다.
1. 내가 살았다는 나태함에서 깨어 일어나야 합니다.
= 내 신앙이 죽어있는 신앙인지 살피라(1절)
우리 예수님은 이렇게 책망하고 있습니다.
(계 3: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여기 사대 교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행위는 안다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 행위가 어떤 것인지 잘은 모르지만 그 뒤에 예수님의 말씀.
‘너희가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라는 것으로 보아 이 교회의 외형적인 모습을 말해주고 있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사데 교회가 ‘교회’라는 이름은 가졌지만~ 교회가 살아있는 그런 영성은 없다는 것을 우리 예수님은 ‘죽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죽었다는 것은 바로 성도들의 신앙이 죽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 자신은 그들이 죽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믿음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빠짐없이 교회에 나가고 있고, 또 정기적으로 있는 예배도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스스로 신앙의 의무를 다 행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죽은 자이다.’
사람들이 볼 때에는 믿음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렇게 보이니까요.
사람들은 그들의 믿음을 우러러 보기도 합니다. 그렇게 보이니까요.
사람들은 그들의 행위를 인정합니다. 그렇게 보이니까요.
하지만 하나님은 다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몸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삼상 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사람들은 사데교회의 성도들을 칭찬합니다. 그리고 스스로도 그러한 칭찬에 걸맞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그런 껍데기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이 정말 살아 있는가를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니 사데교회는 그 영혼이 이미 죽은 자였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자신은 그것을 모른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개구리를 고통없게 익혀 죽이는 법을 아십니까?
개구리를 큰 수조에 넣고 물을 가득 채웁니다. 그리고 밑에 불을 붙여서 개구리가 있는 물을 끓이는 거예요. 갑자기 끓이면 이 개구리가 어떻게 할까요? 가만이 있을까요? 가만있지 않아요. 바로 뛰쳐나와요. 그러니까 개구리가 느끼지 못하도록 조금씩, 조금씩, 물을 끊이는 거죠.
그러면 개구리는 처음에 차가웠던 물이 아주 미지근하면 개구리가 조금씩 활동이 많다가 조금 따뜻해지면 개구리가 유유히 수영을 하곤 한답니다.
물의 온도가 자기를 죽일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알지 못하고 자기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전혀 알지 못하다가 결국에 이 개구리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 익어서 죽습니다.
개구리는 자기가 죽은 줄도 모르고 죽는다는 것이지요.
자기 몸이 익어가면서 자신이 죽어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딤후 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우리가 ‘살았다’하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진정으로 살았느냐는 말입니다. 안식일에 교회는 옵니다. 신앙의 모양은 있습니다.
사데 교회는 부유한 도시에 있었습니다.
양모를 염색하는 주된 산업을 통해서 부를 축척했습니다.
그리고 외적으로는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내적으로는 죽은 상태였습니다. 내적 생명력, 참된 사랑, 성령의 능력에 있어서는 죽은 상태나 다름없었습니다.
여러분 어떤 일이 닥친다 하더라도 어떤 죄를 짓는다 할지라도 어떤 실수를 한다 할지라도 살아 있으면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교회가 온 천하에 교회보다 우뚝 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안양교회가 그런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죽은 교회는 절대로 회복되지 않습니다. 비록 시험이 있고 분쟁이 있고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고 영이 살아있는 교회는 희망이 있지만, 죽어가는 교회는 희망이 없다는 말입니다.
교회가 프로그램의 다양화와 성도들의 친밀한 교제와 부흥을 꿈꾸고 있습니다.
안식일 예배, 화요일 예배, 각종 성경공부 등 열심을 다해 참여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개개인이 구원의 기쁨과 감격이 그리고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 내 영혼에 살아있지 못하면 이런 모든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제가 두려운 것은 성도들이 영적으로 갈급해 하며 메마른 영혼을 달래지 못하는 교회가 되면 어떡하나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더 이상 교회에 기대하지 않고 위로와 힘을 받지 못한다면 분명히 교회의 역할을 재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왜냐하면 성도들의 생명력 있는 삶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데 교회가 죽었다는 것을 강조하기위해서가 아니라 이처럼 죽은 영혼이 되면 모든 것이 끝이니까 교회가 생명의 성장과 감격을 놓치지 말자는 뜻에서 사데 교회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2. 세상에서 하나님의 남은 자로 깨어 일어나야 합니다.
= 행위의 온전함을 가지라.(2절, 4절)
그리고 예수님은 사데교회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2절에 보시면은요
(계 3:2)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남은 바 죽게 된 것은 무엇입니까?
대부분의 사람이 다 살았다고 했지만 그 영혼은 죽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몇 명은 영혼이 죽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남은 사람은 4절에서 이렇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
우리 예수님은 이 사데 교회를 보면서 한심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두 다 죽은 사람밖에 없어요. 그런데 스스로는 죽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한심할까요~ 하나님 보시기에는 실망과 좌절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몇 명이 남아 있어요. 그 몇 명이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그 영혼이 살아 있다는 것이지요.
그 살아있는 자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 죽음의 골짜기에서 살아서 깨어나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시고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를 끊임없는 남은 자 사상으로 챙기셨습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떠나는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남은 자로 다시 시작하시고, 또 그들이 많은 백성이 되면 또 죄지어서 떠나고, 그들 중에서 남은 자가 있어 그 남은 자로 새롭게 시작하는 반복이 일어납니다.
언제
- 노아 홍수 때 : 노아와 그의 가족(창6:8-22)
- 소돔과 고모라 심판 때 : 롯과 두 딸(창 19:12-26)
- 이스라엘의 남자 아이를 죽일 때 : 모세(출 2:1-26)
-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 : 여호수아와 갈렙(민 14:29-30)
- 아합 시대 : 엘리야와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은 7천명(왕상 19:18)
- 오늘날 : 신실한 성도(롬 11:5)
- 마지막 심판 때 : 생명책에 기록된 자(계 20:15)
우리가 이 시대의 남은 자로서 살려면 어떻게 해야하겠습니까? 이 시대에 마지막 양심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공통적으로 남은 자로 선택한 사람들은 모두 다 시대의 조류에 휩쓸리지 않고 마지막 남은 하나님의 양심으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어야 할 하나님이 주신 시대의 소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과 같은 생각과 같은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바른 길로 갈 수 있는 등불과 같은 역할과 세상의 소금과 같은 역할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실이라는 무기
한 군사 훈련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곳은 교관들이 엄하고 혹독하기로 소문난 훈련소였습니다.
"핫둘 핫둘...핫둘핫둘!"
훈련은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짜여진 일과표에 따라 진행됐습니다. 그런데 유독 장거리 구보만 하면 영락없이 대열에서 떨어져 외롭게 달리는 꼴찌 병사가 있었습니다. 그 날도 그랬습니다.
"헉헉...헉헉..."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데 그 병사만이 혼자 뒤쳐진 채 비틀거렸습니다.
"후...헉헉...."
그렇다고 주저앉아 낙오자가 될 수는 없는 일. 그는 이를 악물고 달렸습니다.
"하..할 수 있다. 헉헉..."
그렇게 얼마쯤 갔을까. 눈앞에 갈림길이 나타났습니다. 어느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양갈래 길이었습니다. 각각의 길 앞에는 이정표가 서 있었습니다. 오른쪽 길은 사병이 달리는 길, 왼쪽 길은 장교가 달리는 길이었습니다. 그는 잠시 멈춰 서서 양갈래 길을 번갈아 바라보았습니다.
"아무래도 장교가 달리는 길이 더 짧거나 편하겠지."
보는 사람도 없는데 편한 길로 달릴까 한참을 망설이던 그는 결국 사병이 달리는 길로 들어섰습니다. 군인으로서의 양심을 저버릴 수 없기에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뜻밖에도 30분이 채 안돼 결승점에 도착했고 놀랍게도 9등을 기록했습니다. 9등은커녕 50등 안에 들어본 적이 없는 그는 분명 뭔가 잘못됐구나 생각했습니다. 바로 그때 훈련 교관이 물병을 건네며 말했습니다.
"잘 했어. 마시라구."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하나 둘 탈진한 군인들이 결승점에 들어섰습니다. 모두가 장교가 달리는 길을 선택한 군인들이었습니다.
"이제 알았나? 갈림길에서 자신을 속이지 않았던 성실함이 바로 자네의 무기였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양심을 지킨 그는 이제 더 이상 나약한 꼴찌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의 양심이 되어야 합니다. 남이 한다고 다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의 모습이 아니라면 당당히 하지 않는 그런 모습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사대교회의 많은 이들의 영혼은 죽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죽은 줄 모르고 온갖 허위와 과장으로 그들을 포장했습니다. 그런 것이 어찌보면 당연한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 중심을 잡고 하나님을 믿고 나아갔던 남은 자가 있었고, 그들에게 예수님은 그 잡은 것을 굳게 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쪼록 우리의 이 세상에서의 삶이 하나님의 남은 자로서의 삶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3.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어 일어나라
= 생각하고(되새기다) 지키고 회개하라(3절)
그러면 살아 있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었다고 여겨지는 이 사람들은 기회가 없는 것입니까? 아니에요.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깨어서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3절 말씀 보겠습니다.
(계 3: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 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무엇인가를 받았고, 들었다고 말하고 있지요? 무엇을 받고 들었습니까? 이것은 바로 하나님 말씀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이 사데 교회도 받았고 들었다는 것입니다.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지요.
왜요? 교회니까요.
교회에서 하나님 말씀이 듣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님 말씀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아무리 영적으로 죽은 사데교회도 그들이 받고 들은 하나님 말씀이 있었습니다. 왜요? 교회니까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다음입니다. 그들이 하나님 말씀을 받고 들었지만, 예수님께거 그들에게 명령하고 있는 것은 그 다음입니다.
그 하나님 말씀을 받고 들었으면 어떻게 해야 한다구요?
계 3:3절 다시 봅시다. 세 가지의 동사가 나오지요?
첫째는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생각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표준 새번역에는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들은 것은 되새겨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되새기라는 것이지요.
헬라어로는 (mnhmoneuvw 므네모뉴오) 라고 해서
‘기억을 더듬어서 생각하고 연습하라~’
는 뜻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말씀을 받을 때에 어떤 심정으로 받아야 하는 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고 삶에서 그것을 더듬어 지키도록 연습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내가 하나님 말씀을 받았을 때에 어떤 삶이었는지를 기억을 더듬어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그 말씀이 내 삶이 되도록 연습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하나님 말씀을 받는 우리의 자세입니다.
두 번째는 무엇입니까? 지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우리가 잘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을 지킵니까? 하나님 말씀을 지킵니다. 그러면 그 지킨다는 개념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하나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말합니까?
아니에요. 이것을 성문을 지키듯이 무엇인가를 보호하라는 것입니다.
표준 새번역에는 ‘굳게 지키라’고 해석하고 있고
헬라어 성경에는 ‘테레오 threvw’ 손실이나 해로부터 지키어 보호한다는 의미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것은 그 말씀이 완전한 말씀으로 내 삶이 그것을 무너뜨리지 않게 보호하라는 것입니다.
참 말이 재미있잖아요. 말씀이 우리를 보호한다는 것은 들어봤어도, 우리가 말씀을 보호한다는 것은 들어보질 못했잖아요.
사데교회는 많은 사람들이 죽은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보존하지 못했어요. 어떻게요?
하나님의 말씀은 힘있고, 운동력이 있는 능력의 말씀입니다. 신실하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삶으로 그 하나님의 말씀이 지켜지지 못해 많은 이로서 훼손이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믿는 사람들이 말씀다운 삶을 살지 못하면 모든 이로서 하나님의 말씀은 훼손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가운데 살면서 이 말씀을 훼손해가며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행하지 않는 것 또한 하나님 말씀을 훼손하는 것이지요.
수 많은 사람이 내 삶으로 하나님 말씀을 보는데 그렇지 못하여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것은 바로 하나님 말씀이 훼손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보호하는 저와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회개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잘 아는 단어이지요. 돌이켜서 바꾼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동안의 삶에서 완전히 돌이키는 것을 회개라고 하는 것이지요.
우리 예수님께서는 이런 하나님 말씀으로 깨어있는 삶을 원하시는데 우리가 그런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결론
생명책에서 이름을 흐리지 않고 아버지와 천사들 앞에 시인 받는 교회(5-6절)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남은자로서의 삶과 하나님 말씀을 들은 사람의 삶을 잘 살아 나갈 때에 이런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계 3:5-6) 『[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6]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 그에게는 흰 옷을 입고, 생명책에 이름이 흐리지 않아질 것이고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 시인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인하시는 그 내용이 무엇일까요?
‘예 누구는 내 이름을 널리 전하는 충성된 종이었어~’
‘예 누구는 늘 나를 찬양하는 사랑스런 아들이었어~’
참~ 좋지요?
모쪼록 우리 성도님들 우리의 신앙이 죽은 것이 아니라 깨어서 일어나는 살아있는 교회 되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
오늘 이 시간에 사데 교회에 대해서 하나님 말씀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데교회에게 말씀하신 책망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하는 말씀이
우리의 영혼을 비추어 보게 합니다.
너무나 부족하고 나약하여 생명력이 부족한 저희를 보게 됩니다.
부디 저희가 이 하나님 말씀 붙잡아서
말씀이 완성되는 삶이 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권고하신 생각하고, 지키며, 회개하는 삶이 우리의 삶이 되어서.
언제나 화려하진 않지만
내적인 생명력이 충만한 저희 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일 주일도 주님을 증거하는 삶 될 수 있도록 인도하시고.
하나님의 인도가 삶에서 체험되어져
다음 예배의 자리에 올 때에는 감사의 제물로 당신 앞에 나아올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사랑이 충만하시어 우리의 목자 되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신약 내용!! 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믿음을 지키며 사는 사람들(계 2:12-17) (0) | 2013.03.22 |
---|---|
[스크랩] 끝까지 순결을 지키는 교회(계 2:18-29) (0) | 2013.03.22 |
[스크랩] 강하고 힘있는 교회(계 3:7-13) (0) | 2013.03.22 |
[스크랩] 열정넘치는 부요한 교회(계 3:14-22) (0) | 2013.03.22 |
[스크랩] 사복음서 대조표 (0) | 2013.03.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