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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믿음의 선진들(4) - 아브라함(1)

하나님아들 2013. 1. 10. 16:26

믿음의 선진들(4) - 아브라함(1)

김 영익 목사

 

히11:8-10

우리나라는 원조란 말을 많이 쓰는 나라입니다.

특별히 식당 쪽에서 많이 쓰고 있습니다.

원조라야 변하지 않은 제 맛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날 믿음도 원조 신앙을 찾아야 할 때입니다.

오늘 우리는 믿음의 원조인 아브라함을 통해서 바른 신앙을 배우고자 합니다.

1. 부르심에 순종하는 믿음이었습니다. (8절)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8절에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라는 표현은 본래 희랍어 현재분사로서 ‘순종하여’라는 주동사와 연관되어 그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동시에 즉각적으로 순종한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동시에 8절은 ‘그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순종함으로’ 고향을 떠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하고 나아간 것입니다.

‘순종하여’란 말은 그의 마음의 동의를 나타내는 것이며, ‘나갈 새’라는 말은 그의 실제적인 수행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에게 어디로 가느냐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순종이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8절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설명해 주는 재미있는 두 가지 동사가 있는데 첫째는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갔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믿음은 현재 받는 보상이 아니라 장래에 이뤄질 약속이라는 뜻입니다.

또 한 가지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다’는 말입니다. 믿음은 어떤 상황이든지 순종을 수반하는 것입니다. 믿음과 순종은 결코 분리될 수가 없습니다. 태양과 빛이, 불과 열이 분리될 수 없듯이 믿음과 순종은 분리될 수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본시 고향은 갈대아 우르였습니다. 그곳은 그 당시로서는 세계 최대의 도시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갈대아 우르가 속한 메소포타미아지방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인류 4대 문명의 발상지 가운데 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로서는 아브라함은 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살았던 셈입니다. 그러나 갈대아 우르는 우상의 도시였습니다. 수24:2의 말씀에서 보는 대로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도 그곳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면서 살았습니다. 이러한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여 그곳에서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아,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게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세 가지를 되풀이하여 강조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네 본토를 떠나라’고 했습니다.

당시의 상황을 설명해주는 고대문서를 보면 아브라함이 살았던 우르 즉, 수메르라고 하는 지역은 메소포타미아 도시 연맹의 일부였습니다. 지금의 이라크 지역입니다. 이곳에서는 상업과 무역, 농업 등이 삶의 기반을 이루었고, 이방 종교관을 믿고 사는 지역입니다. 당시 제사드리는 예배의식은 문란한 성행위로 제사를 드리는 의식이었습니다. 그들의 신을 예배하는 신전에는 여자 사제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제사 의식 중에 성 관계를 갖고 음란한 춤을 추기도 하는 창녀의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상의 도시, 음란의 도시를 ‘떠나라’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성경을 보면 아브라함의 아비 데라는 우상 숭배자였습니다(수24:2-3). 옛 생활을 멀리하라고 명했던 것입니다. 옛 생활을 멀리하라고 명했던 것입니다.

그 당시 공동체를 떠난다는 것은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고든 맥도날드는 아브라함의 떠남은 마치 우주 왕복선이 지구의 중력에서 떨어져 나가도록 밀어내는 힘찬 로켓의 분사력 같은 것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이 순종하여 떠날 수 있었던 것은 능히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네 족속을 떠나라’고 했습니다.

고대에는 개인의 결단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공동체 가운데 있어야만 삶의 방향을 갖고,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형제들과 이웃을 떠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네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했습니다.

가족은 사회의 안전망과도 같습니다. 어렵고 힘들고 지칠 때 가족은 매우 든든한 울타리 역할을 합니다. 종합해볼 때 떠나라고 하는 말은 아브라함의 삶에서 자신의 문화, 자신의 유익, 자신의 전통 등 안전을 보장해 주는 음성을 뛰어넘으라는 명령과도 같습니다.

왜 아비집을 떠나라고 했을까요? 성경을 보면 아브라함의 아비 데라는 우상 숭배자였기 때문입니다. (수24:2-3). 데라가 칠십세에 아브람을 낳았고 창세기 12장 4절을 보면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 칠십오세였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때 데라의 나이는 약 1백 45세쯤 이었을 것입니다. 데라는 하란에서 머무르기를 원했습니다. 우상숭배하면서 친척들과 편안이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하란을 떠나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으로 가고자 했습니다.

아브람은 부인과 조카 롯을 데리고 떠났지만 데라는 하란에서 그의 인생을 마칩니다. 떠나는 것은 분리를 의미합니다.

제1단계, 이방 문화와의 분리는 되었는데 제2단계 사람과 분리가 안 되었습니다. 즉 사람과의 분리입니다. 사람과의 분리는 문화와의 분리보다는 훨씬 더 어렵습니다. 더구나 육신의 아버지와의 분리는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진행치 못하고 계속 지체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14년을 기다리셨습니다. 그래도 변화지 않자 하나님이 데려가셨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삼도록 하셨다.

아버지 데라가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는 아브라함을 계속 붙잡았습니다. 하나님이 붙잡아야 하는데 그 아비가 붙잡고 놔주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관계를 죽음이라는 자연스런 방법으로 끊으셨습니다. 믿음을 가진 자와 믿음 없이 사는 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자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은 자의 차이입니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도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 아브라함은 그 즉시 무조건적으로 순종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를 못했지만 이삿짐을 다 챙겨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해서 나섰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었습니까? 오늘 본문 8절은 "믿음으로"라는 단어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던 것입니다.

앤드류 머레이는 ‘우리가 주를 믿는 동시에 순종의 학교에 입학’한다고 말했습니다. 로마서 1장 5절,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서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믿음과 순종은 같음을 강조합니다. 로마서 16장 26절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믿음과 순종은 성경이 가장 강조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옛날 아브라함을 택하여 부르셨던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도 택하여 불러주셨습니다. 우리가 떠나야 할 우리의 갈대아 우르는 어디입니까? 우리가 바라보며 나아가야 할 우리의 가나안은 어디입니까? 갈 바를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해서 나아갈 때 능히 이루시는 하나님을 체험학 되는 것입니다.

▶ 이스라엘의 출애급의 부르심

▶ 베드로의 부르심에 따름

▶ 젊은 관원은 부르심에 따르지 못햇슴

2. 약속을 믿고 참는 믿음이었습니다. (9절)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고향이 갈대와 우르인데 지금의 이락 남부 고대 유프라데 강 유역에 위치한 도시로 고대세계에서는 굉장한 문명이 있었던 곳으로 고고학계에서 증언되고 있습니다. 가나안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하지만 개발되지 않은 척박한 황무지였습니다.

9절에 장막에 ‘우거했다’는 단어는 영구적인 거주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나그네 처럼’ 거한다는 뜻입니다. 그는 고향을 떠난 순간부터 나그네 인생을 시작했고, 그것은 곧 고난이요 희생이었던 것입니다.

‘거하였다’라는 말은 정착의 개념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가나안땅에서 장구한 기거는 장막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이 생명이 끝 날에 이르자 유일하게 그가 소유했던 땅은 사라의 매장지로 구입한 밭뿐이었습니다. 그의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 사라를 매장하기 위해서 헷 족속에게 샀던 막벨라 밭이 전부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었지만 마치 이방인처럼, 외국인처럼 그곳에서 우거했습니다. 타향살이를 했습니다. 더군다나 아브라함은 그곳에서 정착해서 살지도 못했습니다. 장막에 거하면서 이리저리 옮겨 다녔습니다. 그것은 그의 아들 이삭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의 손자 야곱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낙심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도대체 왜 이곳으로 왔단 말인가? 울려고 내가 왔단 말인가? 웃으려고 내가 왔단 말인가?"

그러면서 그는 자기의 본토 친척 아비의 집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땅에 늘 약속을 끝까지 참고 머물러 살았습니다. 결코 자기의 본토 친척 아비 집으로 떠나가지 않았습니다.

히11:15,16절에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이 집으로 되돌아감을 포기한 것은 9절 말씀에 의하면 "믿음"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인내하면서 기다렸던 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장막을 치고 여기저기 옮겨다녔지만 언제나 그 땅 안에서 맴 돌았습니다. 비록 기근에 의해서 애굽 땅으로 내려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잠시뿐이었습니다. 그는 곧 다시 가나안땅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장막에서 어떤 대가를 치르면서도 기쁨으로 살았던 것은 그곳은 하나님께서 그와 그의 후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신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결코 그 땅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일생토록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인내하면서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언제 이루어졌습니까? 야곱 때 야곱의 가족들이 모두 애굽에 내려갔습니다. 400년을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큰 민족을 이루었습니다. 그들이 가나안 땅으로 다시금 되돌아왔을 때 하나님의 약속은 비로소 이루어졌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의 생전에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짐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끝까지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이 우리에게 보여준 인내의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너무 조급하지 않습니까? 축복도 당장 받아야 되고, 기도의 응답도 당장 받아야 직성이 풀립니다. 일생은 고사하고 십 년, 아니 일 년도 제대로 기다리지 못하는 우리가 아닙니까? 아브라함처럼 먼 안목으로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면서 기다리는 믿음이 우리의 믿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 칠레의 산속 늪지에는 ‘리노데르마르’라는 특이한 작은 개구리가 살고 있습니다. 알을 낳을 때가 되면 이 개구리의 암컷은 젤리 같은 물질에 싸인 알을 낳습니다. 그 순간 옆에 있던 수컷이 알을 모두 삼켜버립니다. 먹이처럼 완전히 삼키는 것이 아니라 식도 부근에 있는 자신의 소리주머니에 그 알들을 소중히 간직합니다. 그리곤 그 알들이 성숙할 때까지 자신을 온전히 희생합니다. 수컷 개구리는 알들이 완전히 성숙해지기 전까지는 결코 입을 벌리지 않습니다. 자신의 존재 이유며 중요한 쾌락인 우는 것을 포기합니다. 소리주머니에 있는 새끼들의 안전을 위해 먹는 것까지도 포기합니다. 어느 날 알들이 완전히 성장했다고 판단되면 비로소 개구리는 자신의 입을 벌려 마치 긴 하품을 하듯 새끼 올챙이를 입에서 내보냅니다. 사랑의 결실을 맺고 싶다면 끝까지 사랑하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떠한 희생이 따르더라도 견뎌야 합니다. 생명과 같이 소중한 것들은 그런 사랑 속에서만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성을 바라는 믿음이었습니다. (10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아브라함이 장막생활의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믿음이 삶을 기쁨으로 살아간 이유는 무엇입니까? 10절에 ‘하나님이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보았기 때문’ 이라는 것입니다.

‘터가 있는’ (투스 테멜리우스 에쿠산)이라는 말을 직역하면 ‘기초들’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성을 영어로 말할 때 ‘그’ 도시(‘the’ city)라고 정관사가 따라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기초를 놓으시고 우리가 가야할 바로 ‘그’ 성 즉, 천국을 의미합니다.

믿음은 내세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믿음은 천국을 바라보며 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사람이 경영하고,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을 사모하면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친히 경영하시고, 하나님의 손으로 지은 성, 새 예루살렘 성, 천성, 곧 영원한 본향을 사모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서 행인처럼, 나그네처럼 살았지만 낙심하지 아니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지상의 낙원을 꿈꾸지 않았습니다. 땅엣 것에 집착하지 않고 위엣 것을 바라보면서 살았습니다. 그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그는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장막에 거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머물 때에 장막에 거했습니다.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살다’라는 말은 ‘잠시 체류하다’는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이 나그네로 장막에 살았던 것은 재물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며 사는 것이 행복했고, 즐거웠기 때문입니다.

장막은 고대사회에서 유목민들이 주로 사용하던 이동식 거처입니다. 이러한 장막은 나뭇가지나 막대기를 세우고 측면을 지푸라기나 가죽으로 막아 쉽게 해체가 가능한 임시로 머무는 집입니다.

그런 곳에서 즐겁게 살 수 있었던 것은 소망이 하늘에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6-18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란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이 땅의 삶이 전부라면 우리의 성공여부가 행복과 불행을 결정합니다. 어려운 일이 닥치면 정말 슬퍼해야합니다. 그러나 삶의 초점이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있다면 성공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맛보며 겸손하게 그 나라를 위한 삶을 계속해서 살아갈 것입니다.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이 닥쳤을 때도 영원한 나라에 소망이 있기에 낙심하지 않고 지금 현재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며 힘든 일을 이겨나갈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하늘에 소망을 두고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영원히 머물 곳은 이 땅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그 나라임을 기억하고 땅에서의 삶을 최선을 다해 사는 것입니다.

그는 이 땅에 살면서 나그네로서 장막에 거하며 살았던 것은 영원한 천국을 사모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여유 있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롯에게 양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설교 마6:19∼21에서 하신 말씀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우리는 빌3:20의 말씀대로 천국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로서 천국의 시민권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저 높은 곳을 향해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나그네 된 우리의 인생길이 때로는 험하고 어려움이 있다고 할지라도 낙심하지 마십시다. 이 땅에 너무 집착하거나 미련을 두지 마십시다.

우리가 미국의 석유왕 존 록펠러, 자동차왕 헨리 포드, 강철왕 앤드루 카네기를 존경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사업가로 성공했기 때문입니까? 대재벌이기 때문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 모두가 훌륭한 자선 사업가들이며, 도성인 천국을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맡기신 물질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바르고 값있게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이 바라본 영원한 도성, 아브라함이 바라본 영원한 도성, 아브라함이 바라본 영원한 도성, 그 도성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살아갈 때 열국의 아비, 믿음의 조상, 믿음의 영웅이 될 것입니다.

▶ 미국의 유명한 빌 하이벨스 목사님이 쓴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책에 보면 그는 비전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현상 너머에 있는 것을 바라보는 것" 그러면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비좁은 감방에 갇힌 죄수 두 명에 관한 이야깁니다. 감방에는 빛이라고는 전혀 없습니다. 단지 눈 높이에서 석자 위에 자그마한 창문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물론 두 죄수는 창문을 쳐다보며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죄수 한 사람이 본 것은 엄연한 현실을 일깨워 주는 차가운 쇠창살만을 보았습니다. 쇠창살만 보고 있던 그는 날마다 점점 풀이 죽고 비탄에 젖어 분통을 터뜨리는가 하면 한없이 절망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러나 그와는 대조적으로 다른 죄수가 본 것은 창문너머에 있는 별이었습니다. 창문너머에 있는 별을 보고 있는 죄수의 마음은 희망으로 가득 찼습니다. 언젠가는 자유의 몸이 되어 새 생활을 할 것을 생각하면 그는 힘이 솟아나서 감방안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가 있었습니다. 같은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한사람은 창살을 보았고 또 한사람은 창문 넘어 별을 보았습니다. 시야(vision)의 차이가 이들의 삶에 커다란 차이를 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시선은 현실 넘어 주님을 바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출처 : 목회자의 요람 한서노회
글쓴이 : 요세비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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