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선진들(2)- 에녹
김 영익목사
히 11:5-6
우리 상식으로는 죽어야 저세상으로 가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죽지 않고 하늘로 간 사람 둘이 있습니다. 에녹과 엘리야입니다.
우리는 천국은 영적인 세계로 육을 벗어야만 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에녹과 엘리야 두 사람이 육을 가진 채 간 것으로 말하고 있으니 천국은 물질적 장소가 있는 곳으로도 여겨집니다.
천국은 이 우주 어디인가 있습니다. 그 곳은 우리가 사는 이 지구보다 월등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곳입니다.
▶ 한 어린이가 목사님께 물었습니다. “천국이 정말 있나요?”
“그렇단다. 그곳은 너무나도 좋은 곳이란다.”
“목사님, 그걸 어떻게 알아요. 보고 와서 알려 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쟎아요...”
“얘야, 그곳은 너무나 좋은 곳이라 하나님이 갔다 오라 하여도 오기 싫어한단다.”
여러분 이곳에서 천년만년 살고 싶어 하지만 그곳이 훨씬 좋아 벌써 간 에녹도 엘리야도 다시 오지 않는답니다. 우리도 에녹처럼 엘리야처럼 죽지 않고 그곳에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에녹은 남처럼 살지 않았고, 남처럼 죽지도 않았습니다. 남다른 사람이 된 사람은 남다르게 행한 사람이요 남다르게 살아야 남다른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녹에게 죽음을 맛보지 않고 승천케 하는 남다른 축복을 허락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본받아야할 에녹의 믿음은 무엇일까요?
히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그러나 오늘 본문의 주인공 “에녹”에 대한 성경의 증거는 다음과 같다.
히11:5,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창5:5-31 말씀 중에 단 한 사람 에녹에 대하여만 “죽었더라”는 문구가 없습니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그러면 어떻게 그가 죽음을 보지 않고 천국에 올라가게 되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히11:5에 나와 있습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믿음”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가진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기에 죽음을 보지 않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었는가?
1.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히11:5)
에녹의 믿음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로 인정받은 것입니다.
동양권의 전통유교윤리는 인생을 가장 가치 있게 하고, 아름답고 훌륭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누구냐? 그는 <부모를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들을 효자 효녀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윤리에서는 부모를 기쁘시게 하는 자들을 여전히 소중한 가치로 받아드리지만, 기독교 윤리는 부모를 주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로> 인정받는 것이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로 살 것인가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무엇으로 어떤 행동을 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 <에녹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가장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 무엇입니까?
본문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히11:5하,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에녹이 죽지 않고 산 채로 들림 받기 전에 -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던 그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는가?
6절,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주석가 이상근 박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은 어떤 위대한 행위가 아니라 중심에 간직하고 보이지 않는 믿음이었다.” 라고 봤습니다.
에녹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내용은 무엇이었는가?
1) 그가 계신 것을 믿음 - 존재에 대한 확신.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믿느냐, 안 믿느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느냐, 노엽게 하느냐를 좌우하는 문제일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들에게 있어 삶의 방향과 세상의 선악을 좌우하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롬1:18-23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롬1:28-32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 김영길박사, 나사의 과학자. “하나님이 안 계시다는 증거를 찾는 것보다 계시다는 증거를 찾는 것이 훨씬 쉬웠다.”
성경은 하나님을 믿되 미신으로 우상으로 믿지 않고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믿는 것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 바울의 아덴 전도 : 행17:23-31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하나님을 믿되 그의 보내신 자 예수를 믿는 신앙을 갖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임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요6장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무리들이 예수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현대어성경 -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겠습니까?
-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이니 이 믿음으로 천국으로 들림 받기를 축복합니다.
2) 상주시는 이심을 믿음 - 상주시는 이심을 바라봄.
간혹 어떤 사람들은 “상 받는 것”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구원받은 것과 천국을 보장받았으면 됐다는 것입니다. 다른 보상을 기대하는 것은 천국을 세속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고차원적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에 상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또한 우리가 주님을 향하여 상 주실 분이심을 믿고 열심을 낼 때 주님 앞에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빌3:13-14,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에녹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었던 것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확신과 상주시는 자이심을 믿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실패는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믿기보다는 내가 원하는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소홀해지고 떠나가기 때문입니다.
에녹은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믿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생활과 하나님을 찾으면 상주시는 좋은 분으로 믿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렸기에 하나님은 그를 데려 가신 것입니다.
2.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 (창5:22,24)
그 다음 에녹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습니까?
지금까지는 히브리서 기자의 증거에 초점을 맞추어 에녹의 믿음을 살펴보았는데 이제는 구약 창세기에서 언급된 에녹의 믿음을 추심해 보겠습니다.
창5:22-24, “므드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육십오 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에녹의 믿음에 대한 중요한 증거가 되는 단어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동행”이란 단어입니다. “동행”이란 말은 - 길을 같이 가는 것. 얼마동안 같이 길을 갔는가? - 300년입니다.
그렇다면 그 동행이란 표현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무엇인가?
현대어성경 - 하나님의 뜻을 따랐다.
현대인의 성경 -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었다.
공동번역 - 하나님과 함께 살았다.
영어번역본 - 함께 걸었다.
지구촌교회 이동원목사는 동행을 부부관계에 적용하여 3가지로 설명했습니다.
1) 뜻의 일치, 조화
오늘날 이혼율 증가의 원인 - 성격차이가 주원인. 부부간의 조화가 이뤄지지 않음. 일방적 강요. 대부분 아내 쪽이 포기하면서 삽니다. 그것은 동행이 아닙니다.
암3:3, 두 사람이 의합하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뜻에 맞춰야 합니다. 만약 내 뜻에 맞추려고 한다면 실패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가장 완벽한 의미에서 동행하는 삶을 살았던 분은 예수님이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에도, 또 태초에도, 아니 영원 전부터 아들이신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도 순간 순간마다 아버지와 더불어 동행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었던 비밀이 뭐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드리고 행하는 것이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우리가 인간적인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기도하시면서 유명한 이런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그래서 마침내 자기의 뜻을 넘어서서 아버지의 뜻을 받아드릴 수가 있었기.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과 줄 곳 동행하는 삶을 살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행했던 삶의 비밀이고,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비밀이었으며, 이것이 또한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속에 들어가는 비밀입니다.
2) 도덕적 성질의 일치
부부간에 뜻이 일치되지 않아도 웬만큼 맞춰가면서 참고 삽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문제는 배우자의 부정입니다. 남편의 부정을 용납할 아내가 거의 없을 것이고, 아내의 불륜을 용납할 남편도 거의 없을 것입니다. 도적적인 부조화는 두 사람의 관계를 회복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된 성도들에게 요구하시는 도덕성이 있습니다. 거룩함입니다.
벧전1:15-16,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죄가 있는 곳에 머물러 있으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단절됩니다. 빛과 어두움이 공존할 수 없듯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원하고 동행을 원한다면 죄를 포기해야 합니다.
3) 교통 - 대화, 커뮤니케이션
부부간의 대화가 통하지 않으면 이미 문제가 심각한 것입니다.
대화의 상대 - 자녀, 이웃 사람.
왜 대화를 않습니까? - 할 말이 없어요. 부부간에 함께 차를 타고 가지만 동행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상호 의사교환이 잘 이뤄지고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에녹은 항상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들었고, 그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였습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의 관계를 잘 유지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대단히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에녹이 우연한 기회에 하나님과 동행하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분명한 동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이었습니다.
창5:22-23, 므드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육십오 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기 시작했던 시기가 “므드셀라를 낳은 후”라고 그 시작점을 명확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에녹이 65세 되던 해 므드셀라를 낳았는데, 그를 낳고 난 후 분명한 하나님의 부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에녹은 아들의 이름은 “므드셀라”라고 지었습니다.
“므두셀라”- “무기의 사람”, “창을 던지는 사람.” 이름을 이렇게 지은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에 대한 메시지를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유1:14-15, 아담의 칠 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에녹은 방탕하고 혼란한 시대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300년 동안 한결같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드리는 삶을 통해 하나님과 동행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성실히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였고, 선지자적인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 없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승천함으로 그 시대 사람들에게 충격을 던져 주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노아시대 홍수가 나기 전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혼란한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에녹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분명히 배울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 늘 혼자라고 생각했던 사람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 사람이 예수님에게 항의를 했습니다.
-"나의 고통스러운 시간에 당신은 왜 나를 위로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나의 눈물을 보고도 왜 모른척하셨습니까? 왜 이 모래사장을 혼자 걷게 하셨습니까?"
예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 "친구여, 난 너와 항상 함께 하며 너를 보듬어주고 너의 그 고통들을 같이 아파했단다. 너의 발자국이 하나인 것은 내가 너를 업고 걸었기 때문이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필요하면 찾아가고, 불필요하면 떠나버리지 않았는가?
지나온 날들을 돌아봅시다. 주님과 함께 동행 해왔는가? 일시적으로만 동행, 들쑥날쑥하진 않았는가?
하나님의 자녀 됨은 특별한 은총입니다.
자녀된 입장에서 적극적인 응답이 요구됩니다. 도망 도피하지 마십시오. 이제는 적극적으로 주님의 기쁨이 되어드리는 삶, 주님과 교제하며 주님 앞에 부름 받는 그날까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되기 바랍니다.
지속적으로 변함없이 굴곡 없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삽시다.
신앙생활의 굴곡을 줄이는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 미국의 설교가 맥기( J. V. Mcgee) 목사는「에녹의 사건」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매일 에녹의 집에 찾아 와서 ‘얘야! 나하고 오늘 산책하지 않겠니?’하고 말씀하시면 에녹은 집 밖으로 나와 하나님과 함께 산책을 가곤 했습니다. 에녹은 그 후 하나님과 산책하는 것이 너무도 재미가 있어 매일 자기 집 문 밖에서 하나님을 기다리곤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와서 함께 산책하곤 했는데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 ‘에녹아! 오늘은 우리 좀 더 멀리 가보자 내가 너에게 할 말이 많단다.’ 그래서 에녹은 하나님과 하염없이 걸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에녹이 외쳤습니다. ‘세상에 너무 늦었어요 이제 집으로 돌아 가봐야겠어요’ 하자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에녹아! 여긴 너희 집보다 나의 집이 더 가까운 곳이구나 그러니 오늘은 나의 집으로 가자’ 그리하여 에녹은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본향으로 가서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 저는 누가 저에게 목사님 도대체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입니까? 신앙생활은 무엇입니까? 라고 묻는다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하나님과 날마다 같이 걷는 삶이라고 대답하고 싶습니다.
결론
지팡이가 무겁다고 지팡이를 버리고 가는 맹인이 있을까요?
먹을 것이 무겁다고 먹을 것을 버리고 등산하는 등산가가 있을까요?
믿음 생활이 좀 힘들다고 믿음을 버리고 살아가는 인생이 돼서야 되겠습니까?
에녹처럼 남다른 믿음으로 사셔서 남다른 축복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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