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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철학 4

하나님아들 2025. 5. 21. 23:28

기독교 철학 4

 

교육이란 인간이 지식, 교양, 품성 등을 선하게 지니도록 이끄는 것으로서, 특히 인간관(人間觀)을 매개로 해서 성립하는 작용이다. 그 기본 원리는 철학의 터 위에 기초한다.
  특히 기독교 교육철학은 이와 같은 인간관의 구명(究明)을 기독교 철학의 기본 원리 위에서 연구하는 학문이다.
  여기에는 창조된 인간관, 타락된 인간관, 구속된 인간관 등이 있다.

1.창조된 인간관

창조된 인간관은 비이성적(非理性的)인 면과 이성적(理性的)인 면, 두 가지가 있다.

(1)비이성적인 면의 창조 의의와 그 목적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에게 비이성적(非理性的)인 면이 있다라는 것을 바르게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크리스천에게 있어서나 무신론의 일반인에게 있어서나 그 단편적인 지식의 오해로 말미암아 서로의 편파적인 주장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무신론의 일반론적인 인식은 인간의 비이성적인 면을 어쩔 수 없이 인정은 하면서도 그 인식의 세계 안에서는 철저히 무시하고 제외시켜 버린다. 다시 말하면 천재지변과 같은 불가항력을 인정은 하면서도 인간이 인식할 수 없다하여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그 성향이다. 특히 철학적으로는 불가지론(不可知論)29)이 바로 그와 같은 성향이다. 이로부터 또한 발생되는 것이 진화론이고, 이 진화론은 결국 범신론에 인도되고, 유물주의로 나아가는 길잡이가 된 것이다. 다음은 초연신론(deism)30) 역시 자연법칙에 대해서 하나님을 방관자로 몰아 내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인간 이성의 직관적 인식 그 자체의 양상을 놓고 기독교 철학에 밝은 사상가31)들은 지적하기를,“인간들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대한 폭넓은 책임을 감히 떠나고자 하는 욕망을 표시한다”라고 정확하게 지적하였다.
  또 그와는 반대로, 크리스천들은 창조된 인간관의 이성적인 면을 무시하고 비이성적인 면을 너무 추종하는 나머지 하나님을 무속화(巫俗化)시켜 버리고, 기복화(起伏化)시켜 버렸다. 이것 역시 극히 잘못된 신앙 관으로, 특히 우리 한국의 기독교 문제이다. 이런 점에 있어서 기독교 교육철학의 그 중요성이 새삼 증가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상(성경) 안에는 분명한 철학과 이성이 존재함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두 가지 측면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관에는 비이성적인 면이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정하는 사례들을 살펴보았다. 그러므로 인간의 비이성적인 창조의 의의는 성경에 밝혀진바, 하나님의 계시(자연계시와 특별계시)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으며 어디까지나 부인할 수 없는 피조물의 본질로서 창조자에 의존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다음으로 인간의 비이성적인 창조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창조자 하나님의 영광을 전적으로 드러내게 한다는 것에서 그 본질을 찾을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는 없으나 그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비이성적인 면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시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실 예는 성경과 믿는 자들 속에서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즉 인간의 비이성적인 면의 창조 목적은 최고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보편적 속성을 나타내 보여주기 위함이다.

(2)이성적인 면의 창조 의의와 그 목적

  인간이 이성적(理性的)이다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이 말의 뜻은 타락한 인간의 이성(

)32)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타락이전 본래의 하나님의 형상인“이성적인 영”(

)을 말한다. 이는 인간이 이성적인 영적 본성을 소유한 것(

, 고전15:46)을 말함으로, 인간의 영적 본성의 성향은 - 생각하고(知), 느끼고(感), 의지 결단하는(情) 능력 - 의“이성적인 영”(고전2:11-12)이다.
  이것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 인간에게만 있는 것으로 참된 사람이 되게 하는 까닭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본질적 부분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진정한 이성적인 부분으로서 신적이고 영원한 일을 깨닫고 붙잡는 능력인데, 하나님의 성령이 그 영향력을 행사하시는 부분이다.
  그러므로 본래 영(靈)이라고 하는 것은 무속적 의미로, 또는 무작정 초월적 의미로 간주되어, 이성적인 감각이 전혀 없거나, 무딘 것이거나, 또는 조잡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인 영적 본성을 극히 왜곡시키고, 결핍되게 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다시 분명히 말하건대 영은 알고, 바라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능력을 소유한 이성적 본질 그 자체이다. 이“이성적인 영”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능력이며,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기쁨으로 얻는 능력이다. 즉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그 능력이다.
  그러나, 이 능력이 슬프게도 타락이후 죽어버렸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찾아낸 칼빈의 전적타락, 전적 무능력이다.
  그리고, 이것은 창조자 하나님의 구속의 언약에 의한 성취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회복되는 것으로 전 인류적, 전 인격적인 것이며 생명의 본원, 생명의 원리로 다시 살려서 깨끗하게 완성해 놓으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성적인 영이다.
  그러므로 인간 이성의 모든 활동에 있어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그 자체는 곧 회개의 대상이며 천국을 소유하지 못하는 그 원인이다. 세상의 교육철학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가운데 제아무리 지식과 교양, 품성을 가르친다고 한들 참된 인간상을 길러내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이 이성적인 영적 존재로 창조된 데에는 그 깊은 목적이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며 보여주기 위함이다.

  인간이 이성적 본질의 영적 존재로 창조된 것은 하나님의 원형적인 형상을 그대로 빼어 닮은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속성(Attributes of God)을 그대로 드러내며 보여주기 위함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자기를 중심으로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살게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 제일주의로 그 인격적 행동이 나타나 하나님의 영광과 그 속성을 드러내며 보여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타 피조물들과는 판이하고 다르게 이성적 본질의 영적 존재로 창조하신 것이다. 물론 이성과 인격적인 성향이 없는 전 우주적인 피조물들을 통하여서도 하나님의 영광과 속성이 잘 나타난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계의 모든 피조물들은 그 자체의 경각심이나 조심성 그리고 자제하는 자율성을 지니지 못한다. 역시 마찬가지로 자율적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속성을 드러내며 보여주지 못한다. 또한 어떤 것을 선택할 자유의지도 갖지 못한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않다. 사람은 모든 피조물 위에 가장 높은 위치로 창조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하였다. 인간의 이러한 이성적 본질의 영적 존재성은 첫째로,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생활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여야 하며. 둘째로, 그와 같이 내 이웃을 내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마22:37-40). 이것은 이성적 본질의 영적 존재인 인간이 하여야만 하는 것으로 그 의미는 광의적이며 폭 넓은 책임이 있음을 말한다.
  먼저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며, 다음은 내 이웃의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많은 사람들과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자연 만물을 사랑하고 보호함으로 역시 하나님의 영광과 그 속성을 드러내며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셋째로, 내가 죽기까지 희생할 때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선택하여 주시고 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죽기까지 희생함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그 견인불발(堅忍不拔)의 은혜에 우리도 또한 그 견인불발의 투지로 하나님께 보여드려야 하는 것이다.
  세속의 철학을 주도하는 이성은 도무지 희생할 줄 모르는 자기 영광과 자기의 속성을 자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철학은 내가 희생함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며 내 이웃을 기쁘게 하고, 삼라만상의 자연 환경까지도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며, 영적 부흥, 심령 대 부흥33)이 된 자이다.

둘째로, 하나님의 보편적 속성을 전달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보편적 속성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피조물 인간과 공통되는 속성으로서 공유적 속성(Communicable Attributes)이라고도 한다.
  여기에는 1)영성(Spirituality). 2)지성(지식, 지혜, 진실성). 3)도덕성(선(善)-사랑, 은혜, 자비, 오래 참으심, 거룩등. 의(義)-보수적, 응보적 의). 4)주권성(주권적 의지, 주권적 능력) 등이 있다.
  이와 같은 보편적 속성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 속에 이미 전달되어진 속성들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속성들이 우리로 하여금 드러내며 보여지게 하기 위해서 이성적인 면으로 창조된 것이다. 아울러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이와 같은 하나님의 보편적 속성들이 진정으로 드러나야 한다. 이것 역시 창조 약정의 넓은 책임인 것이다.

(3)하나님의 절대적 속성을 우러러 앙모하며 경배하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절대적 속성은 인간이 갖지 못하는 하나님만의 절대적 속성(Incom- municable Attributes)들이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 속에 전달되지 아니한 하나님만의 속성들이다. 여기에는 1)독립성(자존성). 2)불변성. 3)무한성(완전성, 영원성, 무변성). 4)통일성(단수성, 단순성) 등이 있다.
  이와 같은 하나님만의 절대적 속성들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모든 피조물 위에 빼어난 인간으로부터 그 자율성에 의하여 우러나는 영광과 찬양, 곧 예배를 받으시기 위함이다.

 

  2.타락된 인간관

(1)죄의 기원

  죄의 기원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찾아보면, 하나님과 첫 아담(모든 사람들 개념) 사이에 맺어졌던 독특한 관계인 창조의 계약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 창조의 계약은 하나님만의 절대주권적인 창조행위가 하나님 자신의 형상과 모양으로 인간을 창조함으로써,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맺어지는 최초의 약정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약정의 구체적인 면은 창조계약의 특수한 면으로서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금지, 또는 시험에서 제기된 인간의 특수책임과 연관되어지는 것으로, 여기에는 하나님 절대주권의 삶과 죽음이 내재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에게 부과된 창조계약의 특수한 면이요, 그 명령에 대한 인간의 특수한 책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7), 라고 피로 맺은 그 대원칙을 세우셨다.
  이 대원칙은 창조주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을 그 피조물 인간이 감히 넘볼 수 없음이며, 오로지 찬양과 영광, 경배(예배)의 대상뿐임을 말한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하나님의 허용작정(permissive decree)도 동시에 작동된다. 즉 하나님 절대 주권의 금지시험을 파기하는 인간의 교만이 일어 날 때는 사단(tempter)의 유혹(tempt)이 어김없이 찾아오는 것이다. 이 금단의 법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전체 삶과 연관이 깊은 것으로, 하나님이 인간을 시험하는 데 그 초점이 맞추어진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전인격적인 모든 행위가 특수한 책임을 갖고서 하나님의 창조계약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비이성적인 면과 이성적인 면을 갖는 영적 존재로서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을 자율적으로 인정하여 찬양하고 경배하여야 하며, 또 인간 속에 전달된 하나님의 공유적 속성을 인간의 전반적인 삶 속에서 드러내며 보여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악과에 대한 금지시험은 창조계약의 특수한 면으로서, 구체적으로 인간에게 요구된 복종이 철저하게 근본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하는 이유, 복종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유 의지의 자유로운 존재 인간은 주권적인 창조자의 말씀 밑에서 자율적으로 겸손하여 복종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이다.
  선악과에 대한 금지시험은 창조자에 대한 인간의 복종을 면밀히 검토하는 데 초점이 있다. 이제 이 금지시험의 목적은 복종 자체를 위해 복종을 기꺼이 선택하는 인간의 의지로 좁혀진다. 인간 행동의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인 것이다. 인간의 실존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데 달려 있는 것이며, 이것은 하나님이 명한 모든 것을 즐거이 믿는 가운데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러한 명백한 창조계약의 특수한 면(선악과 금지시험, 창2:16, 17)이 인간의 교만(superbia, 

)으로 인하여 사단의 유혹을 받고, 영적 세계의 타락을 가져와 인류의 조상 아담이 타락함으로 전 인류가 타락하는 죄의 기원(원죄, Original Sin)이 된 것이다(창3:1-7).

(2)죄의 결과

  죄의 결과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한 인간은 창조시 이성적인 면의 영적 본성(

)을 또한 상실함으로 참 인간으로서의 영적 활동이 불능하게 되었다. 인간 정신세계의 본질인 이성적인 영적 본성의 상실은 첫째, 지성적인 면에서 불 신앙과 교만(Superbia)을 불러왔다. 둘째, 의지적인 면에서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욕망(To be as God)을 불러왔다. 셋째, 감정적인 면에서 방종(Concu- piscence)에 빠졌다.
  이로 인하여 인간은 전적 부패, 전적 무능력하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못하게 되고, 부패 의식(수치감)과 죄책 의식(양심)에 사로잡히게 되고, 사망의 법에 종속하게 되었다(엡2:3).
  이와 같은 죄의 결과는 전적으로 첫 사람 아담의 타락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지, 하나님은 죄의 창시자가 아니다. [아담(

)은 성경에서 일반적인 인간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는 히브리 용어이기 때문에“모든 사람”즉 인간의 개념이다.]
  다시 말하여 타락 이전에도 인간들은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posse peccare)속에서 살았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당신의 비공유적 속성 외에는 모든 것을 거의 다 인간에게 전달(communicable)했다는 그 확실한 증거가 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 자율적인 자유 의지 안에서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까지도 가졌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금지시험을 어기지 않는 한 인간은 영원한 축복 속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인류 역사의 고고학적인 발견이 불확실해서 그렇지, 성경적으로 볼 때는 타락이전의 인간의 삶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시간의 개념을 내포한다. 영적 본성의 이성을 갖고 참된 인식 속에서 참된 사람으로 삶을 누렸던 첫 사람 아담이 그 자유 의지 안에서 창조 질서의 특별한 책임을 파기해버린 그 결과는 타락이후 전 인류에게 그대로 전가되고, 자연계까지도 저주를 받는 상상할 수 없는 창조주 하나님의 진노아래 놓이게 된 것이다.
  타락한 인간의 유전, 전통 그 관습은 그 후손 대대로(generation after gener- ation) 이성적인 영적 본성의 불구자가 되어 태어나고 죽고를 반복하면서, 여전히 사탄의 그 유혹(tempt) 속에서 헤어 나오지를 못하고 있는 것이다. 타락한 인간의 정신은 프시케(사이키)적인 이성이 되어, 욕망과 그 욕구적인 면만을 강조하는 육적인 주체를 중시하여 물질적 수준에 사는 도무지 희생할 줄 모르는 죽음, 고통, 허무의 존재가 되어 버렸다.
  세속적인 철학이 그러하듯이 직관적 인식, 감각적 인식만을 부르짖으며 철학은 필로 소피아(philosophia < Gk. 

 wisdom)라고 하여 자연발생적 사랑의 지혜라고 하며, 로맨틱한 사랑 중에 사랑(the romance of all rom- ance)이라고 울부짖는다.
  그리고 인간 심리학이나 정신 분석학은 타락이후 형성된 인간의 그 이성(사이키[psyche < 

])만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러므로 프로이드는 특히 타락한 인간의 성적 욕망을 자신의 심리학에 끌어 드렸다.
  그런가 하면 교육은 가르치는 것을 강조한 나머지 선생을 하나님처럼 만들어 놓고, 사이키적인 철학의 발상을 기초 개념으로 하여 인간 주체의 진화론적 교육과 주입식 교육에 열을 올리면서, 일류대학 일류학생만을 고집 하는 가운데 어린 학생들은 더 큰 고통 속에 놓이게 되었다. 요즈음 특히 체벌이 문제가 되어 때리지 말아야 되느니 몇 대까지는 때려야 되느니 등등 웃지 못할 그 희한한 발상까지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도무지 희생할 줄 모르는 타락한 인간의 그 유전인 것이다.
  인간의 참 이성, 그 인간 정신세계의 근본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에게 이성적인 면을 불어넣어 창조하시고, 그것이 또한 인간의 영적 본성이 되게 하셨다.
  크리스천이 이성을 도외시하는 것도, 무신론자가 하나님을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것도, 모두 다 타락한 그 유전, 전통, 관습에 의한 결과이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의 복음의 제일성은“회개하라”(

)이다. 인식의 개조, 타락한 이성의 철저한 개조인 것이다. 영적 부흥은 그리스도에 의해 하나님의 형상에 의한 이성을 되찾는 것이다., 아 멘.

(3)타락된 인간의 딜레마(Dilemma)

  딜레마는 헬라어서 왔다(dil?mma < Gk. di-twise, double + l?mma, assumption) . 그 뜻은 양도(兩刀) 논법인데, 이것은 어느 논법을 취해도 불리한 것을 말한다. 즉 궁지에 몰린 것 또는 진퇴 양난에 빠진 것, 그 곤란한 상태를 말한다.
  마찬가지로 타락한 인간의 이성은 본래의 철학 개념인 하나님의 사상(성경)을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까닭에 딜레마에 빠져있다.
  이와 같은 혼미한 철학 사상들이 전세계적으로 퍼져있고, 전 세계인들의 모든 영역에 걸쳐 전반적인 삶 속에 침투해 있다. 서양 철학, 동양 철학, 인도 철학의 세계 3대 철학은 신학적으로 볼 때 이미 양도 논법의 진퇴 양난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양 철학은 서양 철학에 밀려 나 있고, 문명이 발달할수록 서양 철학 역시도 그 논리에 근거를 놓고 서로 물고 물리는 곤란한 상황을 거듭하고 있다. 특히 서양 철학은 19 - 20세기에 들어서서 급속도로 변화되고 있는 추세이다.
  21세기 밀레니엄 새 천년을 맞이하는 세계 지식인의 사회는 미리부터 그 사상의 변화 추이를 놓고 갑론을박(甲論乙駁) 중이다.
  다윈의 진화론은 이미 그 근거를 잃었고, 인류의 종교 의식은 청동기가 아닌 신석기부터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도무지 인식할 줄 모르는 인간의 비이성적인 면을 깨끗이 인식하라는 표징(sign)들은 그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다. 해마다 찾아오는 자연 재해가 그러하고, 검출도 처방도 할 수 없는 슈퍼 박테리아의 출현이 그러하다. 더군다나 이 죽음의 세균은 인간의 병의학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병원에서부터 발병하고 있다.
  인간들이 자칭 첨단을 지향한다는 소프트웨어 기술은 하찮은 곤충 한 마리의 초정밀도 앞에서 맥을 못 추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무시하고 사이키적인 발상을 계속하는 한, 인간의 정신세계는 영원한 정신병자들의 괴로운 행진일 뿐이다. 어떻게 타락한 성적욕망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한 인간의 심리를 파악할 수 있으며, 치료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제 우리는“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고 급박하게(at hand) 재촉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발견하고 통찰할 줄 알아야 한다. 기독교는 무신론의 사이키적인 인식의 세계에서 말하는 대로 일반적인 종교가 아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 정신세계의 그 근본으로 본래의 철학 사상이요, 본래의 인간 이성이다. 기독교 철학이 이 세상을 정복하고 그 바탕 위에 기초한 기독교 교육이 이 세상을 인도할 때, 진정한 참 인간상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3.구속된 인간관

  구속된 인간관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자신의 모양과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함으로서 하나님은 자신과 인간사이에 창조 계약이라는 독특한 관계를 세우셨다는 것으로부터 출발을 하여야 한다.
  이 창조 계약은 하나님 절대주권적 행위로서 하나님은 이 주권적인 창조 행위에 덧붙여 인간의 역할이 결정되게 하였다. 즉 하나님과 인간의 창조 계약은 일반적인 면과 구체적인 면에서 검토되는 데, 창조 계약의 일반적인 면34)은 창조주에 대한 인간의 넓은 책임과 연관되어지고, 창조 계약의 구체적인 면35)은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금지시험에서 제기된 인간의 특수 책임과 연관되어진다.
  특히 창조 계약의 구체적인 면, 금지시험은“선악과를 먹지 않는 것”(창2:16, 17)으로서 이는 최초의 죄의 본질적 성질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불신앙과 교만(Superbia)이며, 인간 스스로 선악의 결정자가 되어 신(神)이 되고자 하는 자율적 의지의 인간의 욕망이다. 하나님은 바로 이것을 금지하고 시험하는 데 그 초점을 두고, 선악과를 먹지 말 것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법제화 시켰다. 이 명령 또는 법은 인간에게 있어서 철저히 복종해야 할 보다 근본적이며 결정적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더 구체적(형식적 성질의 말씀“선악과”제시)으로 특수한 책임이다. 이 특수한 책임이 근본적이며 결정적이다 라는 것은 삶과 죽음의 연장선상에 서 있는 피로 맺은 약정(“정녕 죽으리라”,창2:17)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적 신앙에서 피의 강조는 창조 계약에 있는 죽음까지의 강제적인 것(mandatory)임을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 처음 계약을 어기면 피로 대신하는 것 외에는 그 죽음의 저주로부터 구원의 방법이 없게 된다. 즉 이 처음 계약을 파기한 피조물 인간에게서는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구원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공의를 만족시킬만 한 어떤 것도 타락된 인간관 속에는 없기 때문이다. 오직 이것을 만족케 할만한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 스스로가 창조의 궁극적인 저주를 스스로 지게 됨으로써 구속된 인간관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창조의 계약 밑에서 인간의 실패와 함께 구속된 인간관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구속의 계약(Covenant of Redemption)은 동시적으로 작동되었다. 이는 타락이전 창조 계약 당시 저주의 말씀과 동시에 이미 결정되어진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속의 계약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과의 관계는 인간의 죄로 인해 끝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공의대로 라면 인간에게는 실제로 심판이 내리어져 피흘림과 죽음밖에는 없다. 그러나 죽기까지 희생하기로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은혜로운 특성의 신비는 심판의 한 가운데에서 구속의 희망으로 나타나 하나님은 이제 자기 백성을 구속하기 위하여 자신을 스스로 묶은 것이다.
  이 구속의 계약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대표자이신 성부와 하나님의 백성의 대표자이신 성자가 맺은 계약으로서, 성자는 성부가 주신 백성에 대한 의무를 맡고, 성부는 성자의 속죄 사역을 위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성자에게 약속한 것이다. 이는 영원한 계약이요, 은혜의 언약으로“구속의 계약”의 기초이다.
  그러므로 구속된 인간관에 있어서 성자 하나님은 그 성취자요, 완성자이시다. 성자 하나님의 명칭은 예수36)(Jesus), 그리스도37)(Christ), 인자38)(the Son of Man), 하나님의 아들39)(the Son of God), 주40)(Lord) 등으로 하나님께서 계시해주셨으며, 구속된 인간관을 완성하기 위한 신성41)(Divinity)과 인성42)(Humanity)의 이성(二性)의 필요성43)을 가지셨다. 특히 인성의 신분44)(States)을 가지심으로 자기를 비워 종의 신분보다 더 낮게 비하(Humiliation)하셨다.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도저히 만족시킬 수 없는 인간, 하나님의 형상으로 다시 회복될 수 없는 저주를 받은 인간, 피를 흘리며 죽을 수밖에 없는 그 비참한 인간관의 생생한 현장을 대신하여, 흠이 없고 죄가 없으신 성자 하나님께서 그토록 비참하게 낮아지셔서 생명의 본원으로 다시 회복시키시는 그 놀라운 은혜의 언약을 완성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인간 마리아의 태(胎)중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었다(Inca- rnation)는 사실을 우리는 의심없이 믿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중보적 과업에서 오는 사단의 공격, 백성의 증오와 불신, 원수들의 박해, 그리고 육체적 패배의 수난(Suffering)과 영혼의 고민과 고초, 윤리적 완전성과 의(義), 진(眞), 성(聖)에 대한 열정 때문에 오는 더 큰 고난, 시험 등이 바로 타락한 우리의 그 생생한 마음과 몸에 현장성이라는 것을 더욱 믿지 않을 수 없으며, 당시 사실적인 사법적 선고에 의하여 가장 극악 무도한 죄수에게 내려지는 십자가의 처참한 피흘림과 육체적인 죽음(Crucifixion)은 우리 자신의 비참한 그 저주를 대신 담당하신 그 놀라운 구속의 은혜로 믿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특히 장사(Burial)되어 음부 강하(陰部降下)로 까지 내려가신 것은 타락한 인간이 받아야할 죄의 궁극적인 한 부분을 대신 담당하심으로 우리의 타락한 죄의 본질은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burial)된 것이다. 그것은 옛 사람을 떠남과 버림, 그리고 그 파멸을 의미한다.
  이것은 구속받은 인간관의 시작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하나님의 계약의 목적이 달성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구속된 인간관은 새 인간상의 대표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비적 연합(Mystical Union)이다. 이 신비적 연합의 모든 축복들은 구속적 계약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로부터 나온다.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서 기초한 성령 하나님의 초자연적, 신비적 사역이다. 이 신비적 연합의 특성은 유기적이며, 생명적이요, 성령으로 중재된 상호 행동적, 영적 인격의 특성을 갖는다(롬8:2). 그러므로 구속된 인간관은 중생과 구원의 목적인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케 한다. 즉 죄인 스스로의 아무런 공로 없이 오직 그리스도의 의(

)를 전가 받음이요, 그리스도의 변화시키는 생명력으로 영육간에 변화가 오는 것이다.
  이 변화는 궁극적이요, 전적으로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안에서이다. 이 구원에는 차서(Ordo Salutis[Way of Salvation])가 있다. 구원의 차서란 구속된 인간관을 위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며, 전적 은혜인데, 성령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적용해주시는 그 주관적이며, 논리적인 과정이다. 개혁 교회의 대표자 칼빈(John Calvin)은 그의 책 기독교 강요 3권에서 이에 대한 조직적 설명을 가했다. 그 일반적인 순서는 소명→중생→회심(회개와 신앙)→칭의(양자)→성화(견인)→영화이다.
  그러므로 구속의 계약(Covenant of Redemption)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속된 인간관은 여전히 그리고 영원히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세워진 최초의 약정, 그 창조의 계약아래 놓여져 있다. 따라서 창조 질서에 의한 넓은 책임(안식일, 결혼, 노동)과 특수 책임인 본질적 성질의 금지시험이 여전히 작동되고 있다.
  특히, 본질적 성질의 금지시험이란, 인간의 인식 속에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불신앙과 교만이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그 자율적 의지를 잘못 오용하여 스스로 인식의 주체를 만들고 진리를 판단하며 선악의 기준을 세우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지금도 구속받지 못한 인간의 인식 속에서는(세속 철학) 인간이 넘볼 수 없는 불가항력의 요소들인 죽음, 고통, 허무를 스스로의 판단 속에서 해결하겠다는 미련함을 보이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이러한 사실의 원인 제공자는 타락한 인간 자신이며, 그것에 따른 하나님의 공의로 인간에게 찾아온 죽음이기 때문에 그 해결 자는 역시 하나님 한 분 뿐으로, 이미 그리스도의 부활(Resurrection)을 통하여 구속된 인간관의 실상이 보여졌다.
  이 부활은 구속된 인간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과 교만,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고 진리의 체계를 규정짓는 그 오만하며 비참한 타락된 인식의 세계가 그리스도의 피의 산 제사로 완전히 죽고, 하나님의 형상의 육체와 영혼이 재 연합하여 회복됨으로 영생의 조건이 만족되었다는 성부 하나님의 선포이기 때문이다. 타락한 진리의 인식 체계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완전한 승리인 것이다.
  참 인간의 이성적 영혼의 본성이 바로 이 부활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구속된 인간관은 이 부활을 준비하는 실제적인 과정인 것이다. 구원의 차서에 의한 그 주관적, 논리적, 조직적인 설명은 구속된 인간관을 형성시켜 미래적 부활을 맞이하게 하기 위한 신비한 본래의 이성(理性)이요, 철학(哲學)이다.

교육이란 인간이 지식, 교양, 품성 등을 선하게 지니도록 이끄는 것으로서, 특히 인간관(人間觀)을 매개로 해서 성립하는 작용이다. 그 기본 원리는 철학의 터 위에 기초한다.
  특히 기독교 교육철학은 이와 같은 인간관의 구명(究明)을 기독교 철학의 기본 원리 위에서 연구하는 학문이다.
  여기에는 창조된 인간관, 타락된 인간관, 구속된 인간관 등이 있다.

1.창조된 인간관

창조된 인간관은 비이성적(非理性的)인 면과 이성적(理性的)인 면, 두 가지가 있다.

(1)비이성적인 면의 창조 의의와 그 목적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에게 비이성적(非理性的)인 면이 있다라는 것을 바르게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크리스천에게 있어서나 무신론의 일반인에게 있어서나 그 단편적인 지식의 오해로 말미암아 서로의 편파적인 주장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무신론의 일반론적인 인식은 인간의 비이성적인 면을 어쩔 수 없이 인정은 하면서도 그 인식의 세계 안에서는 철저히 무시하고 제외시켜 버린다. 다시 말하면 천재지변과 같은 불가항력을 인정은 하면서도 인간이 인식할 수 없다하여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그 성향이다. 특히 철학적으로는 불가지론(不可知論)29)이 바로 그와 같은 성향이다. 이로부터 또한 발생되는 것이 진화론이고, 이 진화론은 결국 범신론에 인도되고, 유물주의로 나아가는 길잡이가 된 것이다. 다음은 초연신론(deism)30) 역시 자연법칙에 대해서 하나님을 방관자로 몰아 내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인간 이성의 직관적 인식 그 자체의 양상을 놓고 기독교 철학에 밝은 사상가31)들은 지적하기를,“인간들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대한 폭넓은 책임을 감히 떠나고자 하는 욕망을 표시한다”라고 정확하게 지적하였다.
  또 그와는 반대로, 크리스천들은 창조된 인간관의 이성적인 면을 무시하고 비이성적인 면을 너무 추종하는 나머지 하나님을 무속화(巫俗化)시켜 버리고, 기복화(起伏化)시켜 버렸다. 이것 역시 극히 잘못된 신앙 관으로, 특히 우리 한국의 기독교 문제이다. 이런 점에 있어서 기독교 교육철학의 그 중요성이 새삼 증가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상(성경) 안에는 분명한 철학과 이성이 존재함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두 가지 측면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관에는 비이성적인 면이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정하는 사례들을 살펴보았다. 그러므로 인간의 비이성적인 창조의 의의는 성경에 밝혀진바, 하나님의 계시(자연계시와 특별계시)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으며 어디까지나 부인할 수 없는 피조물의 본질로서 창조자에 의존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다음으로 인간의 비이성적인 창조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창조자 하나님의 영광을 전적으로 드러내게 한다는 것에서 그 본질을 찾을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는 없으나 그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비이성적인 면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시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실 예는 성경과 믿는 자들 속에서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즉 인간의 비이성적인 면의 창조 목적은 최고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보편적 속성을 나타내 보여주기 위함이다.

(2)이성적인 면의 창조 의의와 그 목적

  인간이 이성적(理性的)이다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이 말의 뜻은 타락한 인간의 이성(

)32)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타락이전 본래의 하나님의 형상인“이성적인 영”(

)을 말한다. 이는 인간이 이성적인 영적 본성을 소유한 것(

, 고전15:46)을 말함으로, 인간의 영적 본성의 성향은 - 생각하고(知), 느끼고(感), 의지 결단하는(情) 능력 - 의“이성적인 영”(고전2:11-12)이다.
  이것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 인간에게만 있는 것으로 참된 사람이 되게 하는 까닭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본질적 부분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진정한 이성적인 부분으로서 신적이고 영원한 일을 깨닫고 붙잡는 능력인데, 하나님의 성령이 그 영향력을 행사하시는 부분이다.
  그러므로 본래 영(靈)이라고 하는 것은 무속적 의미로, 또는 무작정 초월적 의미로 간주되어, 이성적인 감각이 전혀 없거나, 무딘 것이거나, 또는 조잡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인 영적 본성을 극히 왜곡시키고, 결핍되게 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다시 분명히 말하건대 영은 알고, 바라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능력을 소유한 이성적 본질 그 자체이다. 이“이성적인 영”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능력이며,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기쁨으로 얻는 능력이다. 즉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그 능력이다.
  그러나, 이 능력이 슬프게도 타락이후 죽어버렸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찾아낸 칼빈의 전적타락, 전적 무능력이다.
  그리고, 이것은 창조자 하나님의 구속의 언약에 의한 성취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회복되는 것으로 전 인류적, 전 인격적인 것이며 생명의 본원, 생명의 원리로 다시 살려서 깨끗하게 완성해 놓으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성적인 영이다.
  그러므로 인간 이성의 모든 활동에 있어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그 자체는 곧 회개의 대상이며 천국을 소유하지 못하는 그 원인이다. 세상의 교육철학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가운데 제아무리 지식과 교양, 품성을 가르친다고 한들 참된 인간상을 길러내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이 이성적인 영적 존재로 창조된 데에는 그 깊은 목적이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며 보여주기 위함이다.

  인간이 이성적 본질의 영적 존재로 창조된 것은 하나님의 원형적인 형상을 그대로 빼어 닮은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속성(Attributes of God)을 그대로 드러내며 보여주기 위함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자기를 중심으로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살게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 제일주의로 그 인격적 행동이 나타나 하나님의 영광과 그 속성을 드러내며 보여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타 피조물들과는 판이하고 다르게 이성적 본질의 영적 존재로 창조하신 것이다. 물론 이성과 인격적인 성향이 없는 전 우주적인 피조물들을 통하여서도 하나님의 영광과 속성이 잘 나타난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계의 모든 피조물들은 그 자체의 경각심이나 조심성 그리고 자제하는 자율성을 지니지 못한다. 역시 마찬가지로 자율적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속성을 드러내며 보여주지 못한다. 또한 어떤 것을 선택할 자유의지도 갖지 못한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않다. 사람은 모든 피조물 위에 가장 높은 위치로 창조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하였다. 인간의 이러한 이성적 본질의 영적 존재성은 첫째로,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생활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여야 하며. 둘째로, 그와 같이 내 이웃을 내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마22:37-40). 이것은 이성적 본질의 영적 존재인 인간이 하여야만 하는 것으로 그 의미는 광의적이며 폭 넓은 책임이 있음을 말한다.
  먼저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며, 다음은 내 이웃의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많은 사람들과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자연 만물을 사랑하고 보호함으로 역시 하나님의 영광과 그 속성을 드러내며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셋째로, 내가 죽기까지 희생할 때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선택하여 주시고 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죽기까지 희생함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그 견인불발(堅忍不拔)의 은혜에 우리도 또한 그 견인불발의 투지로 하나님께 보여드려야 하는 것이다.
  세속의 철학을 주도하는 이성은 도무지 희생할 줄 모르는 자기 영광과 자기의 속성을 자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철학은 내가 희생함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며 내 이웃을 기쁘게 하고, 삼라만상의 자연 환경까지도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며, 영적 부흥, 심령 대 부흥33)이 된 자이다.

둘째로, 하나님의 보편적 속성을 전달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보편적 속성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피조물 인간과 공통되는 속성으로서 공유적 속성(Communicable Attributes)이라고도 한다.
  여기에는 1)영성(Spirituality). 2)지성(지식, 지혜, 진실성). 3)도덕성(선(善)-사랑, 은혜, 자비, 오래 참으심, 거룩등. 의(義)-보수적, 응보적 의). 4)주권성(주권적 의지, 주권적 능력) 등이 있다.
  이와 같은 보편적 속성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 속에 이미 전달되어진 속성들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속성들이 우리로 하여금 드러내며 보여지게 하기 위해서 이성적인 면으로 창조된 것이다. 아울러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이와 같은 하나님의 보편적 속성들이 진정으로 드러나야 한다. 이것 역시 창조 약정의 넓은 책임인 것이다.

(3)하나님의 절대적 속성을 우러러 앙모하며 경배하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절대적 속성은 인간이 갖지 못하는 하나님만의 절대적 속성(Incom- municable Attributes)들이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 속에 전달되지 아니한 하나님만의 속성들이다. 여기에는 1)독립성(자존성). 2)불변성. 3)무한성(완전성, 영원성, 무변성). 4)통일성(단수성, 단순성) 등이 있다.
  이와 같은 하나님만의 절대적 속성들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모든 피조물 위에 빼어난 인간으로부터 그 자율성에 의하여 우러나는 영광과 찬양, 곧 예배를 받으시기 위함이다.

 

  2.타락된 인간관

(1)죄의 기원

  죄의 기원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찾아보면, 하나님과 첫 아담(모든 사람들 개념) 사이에 맺어졌던 독특한 관계인 창조의 계약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 창조의 계약은 하나님만의 절대주권적인 창조행위가 하나님 자신의 형상과 모양으로 인간을 창조함으로써,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맺어지는 최초의 약정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약정의 구체적인 면은 창조계약의 특수한 면으로서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금지, 또는 시험에서 제기된 인간의 특수책임과 연관되어지는 것으로, 여기에는 하나님 절대주권의 삶과 죽음이 내재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에게 부과된 창조계약의 특수한 면이요, 그 명령에 대한 인간의 특수한 책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7), 라고 피로 맺은 그 대원칙을 세우셨다.
  이 대원칙은 창조주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을 그 피조물 인간이 감히 넘볼 수 없음이며, 오로지 찬양과 영광, 경배(예배)의 대상뿐임을 말한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하나님의 허용작정(permissive decree)도 동시에 작동된다. 즉 하나님 절대 주권의 금지시험을 파기하는 인간의 교만이 일어 날 때는 사단(tempter)의 유혹(tempt)이 어김없이 찾아오는 것이다. 이 금단의 법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전체 삶과 연관이 깊은 것으로, 하나님이 인간을 시험하는 데 그 초점이 맞추어진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전인격적인 모든 행위가 특수한 책임을 갖고서 하나님의 창조계약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비이성적인 면과 이성적인 면을 갖는 영적 존재로서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을 자율적으로 인정하여 찬양하고 경배하여야 하며, 또 인간 속에 전달된 하나님의 공유적 속성을 인간의 전반적인 삶 속에서 드러내며 보여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악과에 대한 금지시험은 창조계약의 특수한 면으로서, 구체적으로 인간에게 요구된 복종이 철저하게 근본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하는 이유, 복종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유 의지의 자유로운 존재 인간은 주권적인 창조자의 말씀 밑에서 자율적으로 겸손하여 복종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이다.
  선악과에 대한 금지시험은 창조자에 대한 인간의 복종을 면밀히 검토하는 데 초점이 있다. 이제 이 금지시험의 목적은 복종 자체를 위해 복종을 기꺼이 선택하는 인간의 의지로 좁혀진다. 인간 행동의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인 것이다. 인간의 실존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데 달려 있는 것이며, 이것은 하나님이 명한 모든 것을 즐거이 믿는 가운데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러한 명백한 창조계약의 특수한 면(선악과 금지시험, 창2:16, 17)이 인간의 교만(superbia, 

)으로 인하여 사단의 유혹을 받고, 영적 세계의 타락을 가져와 인류의 조상 아담이 타락함으로 전 인류가 타락하는 죄의 기원(원죄, Original Sin)이 된 것이다(창3:1-7).

(2)죄의 결과

  죄의 결과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한 인간은 창조시 이성적인 면의 영적 본성(

)을 또한 상실함으로 참 인간으로서의 영적 활동이 불능하게 되었다. 인간 정신세계의 본질인 이성적인 영적 본성의 상실은 첫째, 지성적인 면에서 불 신앙과 교만(Superbia)을 불러왔다. 둘째, 의지적인 면에서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욕망(To be as God)을 불러왔다. 셋째, 감정적인 면에서 방종(Concu- piscence)에 빠졌다.
  이로 인하여 인간은 전적 부패, 전적 무능력하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못하게 되고, 부패 의식(수치감)과 죄책 의식(양심)에 사로잡히게 되고, 사망의 법에 종속하게 되었다(엡2:3).
  이와 같은 죄의 결과는 전적으로 첫 사람 아담의 타락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지, 하나님은 죄의 창시자가 아니다. [아담(

)은 성경에서 일반적인 인간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는 히브리 용어이기 때문에“모든 사람”즉 인간의 개념이다.]
  다시 말하여 타락 이전에도 인간들은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posse peccare)속에서 살았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당신의 비공유적 속성 외에는 모든 것을 거의 다 인간에게 전달(communicable)했다는 그 확실한 증거가 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 자율적인 자유 의지 안에서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까지도 가졌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금지시험을 어기지 않는 한 인간은 영원한 축복 속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인류 역사의 고고학적인 발견이 불확실해서 그렇지, 성경적으로 볼 때는 타락이전의 인간의 삶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시간의 개념을 내포한다. 영적 본성의 이성을 갖고 참된 인식 속에서 참된 사람으로 삶을 누렸던 첫 사람 아담이 그 자유 의지 안에서 창조 질서의 특별한 책임을 파기해버린 그 결과는 타락이후 전 인류에게 그대로 전가되고, 자연계까지도 저주를 받는 상상할 수 없는 창조주 하나님의 진노아래 놓이게 된 것이다.
  타락한 인간의 유전, 전통 그 관습은 그 후손 대대로(generation after gener- ation) 이성적인 영적 본성의 불구자가 되어 태어나고 죽고를 반복하면서, 여전히 사탄의 그 유혹(tempt) 속에서 헤어 나오지를 못하고 있는 것이다. 타락한 인간의 정신은 프시케(사이키)적인 이성이 되어, 욕망과 그 욕구적인 면만을 강조하는 육적인 주체를 중시하여 물질적 수준에 사는 도무지 희생할 줄 모르는 죽음, 고통, 허무의 존재가 되어 버렸다.
  세속적인 철학이 그러하듯이 직관적 인식, 감각적 인식만을 부르짖으며 철학은 필로 소피아(philosophia < Gk. 

 wisdom)라고 하여 자연발생적 사랑의 지혜라고 하며, 로맨틱한 사랑 중에 사랑(the romance of all rom- ance)이라고 울부짖는다.
  그리고 인간 심리학이나 정신 분석학은 타락이후 형성된 인간의 그 이성(사이키[psyche < 

])만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러므로 프로이드는 특히 타락한 인간의 성적 욕망을 자신의 심리학에 끌어 드렸다.
  그런가 하면 교육은 가르치는 것을 강조한 나머지 선생을 하나님처럼 만들어 놓고, 사이키적인 철학의 발상을 기초 개념으로 하여 인간 주체의 진화론적 교육과 주입식 교육에 열을 올리면서, 일류대학 일류학생만을 고집 하는 가운데 어린 학생들은 더 큰 고통 속에 놓이게 되었다. 요즈음 특히 체벌이 문제가 되어 때리지 말아야 되느니 몇 대까지는 때려야 되느니 등등 웃지 못할 그 희한한 발상까지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도무지 희생할 줄 모르는 타락한 인간의 그 유전인 것이다.
  인간의 참 이성, 그 인간 정신세계의 근본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에게 이성적인 면을 불어넣어 창조하시고, 그것이 또한 인간의 영적 본성이 되게 하셨다.
  크리스천이 이성을 도외시하는 것도, 무신론자가 하나님을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것도, 모두 다 타락한 그 유전, 전통, 관습에 의한 결과이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의 복음의 제일성은“회개하라”(

)이다. 인식의 개조, 타락한 이성의 철저한 개조인 것이다. 영적 부흥은 그리스도에 의해 하나님의 형상에 의한 이성을 되찾는 것이다., 아 멘.

(3)타락된 인간의 딜레마(Dilemma)

  딜레마는 헬라어서 왔다(dil?mma < Gk. di-twise, double + l?mma, assumption) . 그 뜻은 양도(兩刀) 논법인데, 이것은 어느 논법을 취해도 불리한 것을 말한다. 즉 궁지에 몰린 것 또는 진퇴 양난에 빠진 것, 그 곤란한 상태를 말한다.
  마찬가지로 타락한 인간의 이성은 본래의 철학 개념인 하나님의 사상(성경)을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까닭에 딜레마에 빠져있다.
  이와 같은 혼미한 철학 사상들이 전세계적으로 퍼져있고, 전 세계인들의 모든 영역에 걸쳐 전반적인 삶 속에 침투해 있다. 서양 철학, 동양 철학, 인도 철학의 세계 3대 철학은 신학적으로 볼 때 이미 양도 논법의 진퇴 양난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양 철학은 서양 철학에 밀려 나 있고, 문명이 발달할수록 서양 철학 역시도 그 논리에 근거를 놓고 서로 물고 물리는 곤란한 상황을 거듭하고 있다. 특히 서양 철학은 19 - 20세기에 들어서서 급속도로 변화되고 있는 추세이다.
  21세기 밀레니엄 새 천년을 맞이하는 세계 지식인의 사회는 미리부터 그 사상의 변화 추이를 놓고 갑론을박(甲論乙駁) 중이다.
  다윈의 진화론은 이미 그 근거를 잃었고, 인류의 종교 의식은 청동기가 아닌 신석기부터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도무지 인식할 줄 모르는 인간의 비이성적인 면을 깨끗이 인식하라는 표징(sign)들은 그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다. 해마다 찾아오는 자연 재해가 그러하고, 검출도 처방도 할 수 없는 슈퍼 박테리아의 출현이 그러하다. 더군다나 이 죽음의 세균은 인간의 병의학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병원에서부터 발병하고 있다.
  인간들이 자칭 첨단을 지향한다는 소프트웨어 기술은 하찮은 곤충 한 마리의 초정밀도 앞에서 맥을 못 추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무시하고 사이키적인 발상을 계속하는 한, 인간의 정신세계는 영원한 정신병자들의 괴로운 행진일 뿐이다. 어떻게 타락한 성적욕망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한 인간의 심리를 파악할 수 있으며, 치료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제 우리는“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고 급박하게(at hand) 재촉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발견하고 통찰할 줄 알아야 한다. 기독교는 무신론의 사이키적인 인식의 세계에서 말하는 대로 일반적인 종교가 아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 정신세계의 그 근본으로 본래의 철학 사상이요, 본래의 인간 이성이다. 기독교 철학이 이 세상을 정복하고 그 바탕 위에 기초한 기독교 교육이 이 세상을 인도할 때, 진정한 참 인간상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3.구속된 인간관

  구속된 인간관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자신의 모양과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함으로서 하나님은 자신과 인간사이에 창조 계약이라는 독특한 관계를 세우셨다는 것으로부터 출발을 하여야 한다.
  이 창조 계약은 하나님 절대주권적 행위로서 하나님은 이 주권적인 창조 행위에 덧붙여 인간의 역할이 결정되게 하였다. 즉 하나님과 인간의 창조 계약은 일반적인 면과 구체적인 면에서 검토되는 데, 창조 계약의 일반적인 면34)은 창조주에 대한 인간의 넓은 책임과 연관되어지고, 창조 계약의 구체적인 면35)은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금지시험에서 제기된 인간의 특수 책임과 연관되어진다.
  특히 창조 계약의 구체적인 면, 금지시험은“선악과를 먹지 않는 것”(창2:16, 17)으로서 이는 최초의 죄의 본질적 성질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불신앙과 교만(Superbia)이며, 인간 스스로 선악의 결정자가 되어 신(神)이 되고자 하는 자율적 의지의 인간의 욕망이다. 하나님은 바로 이것을 금지하고 시험하는 데 그 초점을 두고, 선악과를 먹지 말 것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법제화 시켰다. 이 명령 또는 법은 인간에게 있어서 철저히 복종해야 할 보다 근본적이며 결정적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더 구체적(형식적 성질의 말씀“선악과”제시)으로 특수한 책임이다. 이 특수한 책임이 근본적이며 결정적이다 라는 것은 삶과 죽음의 연장선상에 서 있는 피로 맺은 약정(“정녕 죽으리라”,창2:17)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적 신앙에서 피의 강조는 창조 계약에 있는 죽음까지의 강제적인 것(mandatory)임을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 처음 계약을 어기면 피로 대신하는 것 외에는 그 죽음의 저주로부터 구원의 방법이 없게 된다. 즉 이 처음 계약을 파기한 피조물 인간에게서는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구원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공의를 만족시킬만 한 어떤 것도 타락된 인간관 속에는 없기 때문이다. 오직 이것을 만족케 할만한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 스스로가 창조의 궁극적인 저주를 스스로 지게 됨으로써 구속된 인간관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창조의 계약 밑에서 인간의 실패와 함께 구속된 인간관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구속의 계약(Covenant of Redemption)은 동시적으로 작동되었다. 이는 타락이전 창조 계약 당시 저주의 말씀과 동시에 이미 결정되어진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속의 계약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과의 관계는 인간의 죄로 인해 끝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공의대로 라면 인간에게는 실제로 심판이 내리어져 피흘림과 죽음밖에는 없다. 그러나 죽기까지 희생하기로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은혜로운 특성의 신비는 심판의 한 가운데에서 구속의 희망으로 나타나 하나님은 이제 자기 백성을 구속하기 위하여 자신을 스스로 묶은 것이다.
  이 구속의 계약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대표자이신 성부와 하나님의 백성의 대표자이신 성자가 맺은 계약으로서, 성자는 성부가 주신 백성에 대한 의무를 맡고, 성부는 성자의 속죄 사역을 위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성자에게 약속한 것이다. 이는 영원한 계약이요, 은혜의 언약으로“구속의 계약”의 기초이다.
  그러므로 구속된 인간관에 있어서 성자 하나님은 그 성취자요, 완성자이시다. 성자 하나님의 명칭은 예수36)(Jesus), 그리스도37)(Christ), 인자38)(the Son of Man), 하나님의 아들39)(the Son of God), 주40)(Lord) 등으로 하나님께서 계시해주셨으며, 구속된 인간관을 완성하기 위한 신성41)(Divinity)과 인성42)(Humanity)의 이성(二性)의 필요성43)을 가지셨다. 특히 인성의 신분44)(States)을 가지심으로 자기를 비워 종의 신분보다 더 낮게 비하(Humiliation)하셨다.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도저히 만족시킬 수 없는 인간, 하나님의 형상으로 다시 회복될 수 없는 저주를 받은 인간, 피를 흘리며 죽을 수밖에 없는 그 비참한 인간관의 생생한 현장을 대신하여, 흠이 없고 죄가 없으신 성자 하나님께서 그토록 비참하게 낮아지셔서 생명의 본원으로 다시 회복시키시는 그 놀라운 은혜의 언약을 완성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인간 마리아의 태(胎)중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었다(Inca- rnation)는 사실을 우리는 의심없이 믿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중보적 과업에서 오는 사단의 공격, 백성의 증오와 불신, 원수들의 박해, 그리고 육체적 패배의 수난(Suffering)과 영혼의 고민과 고초, 윤리적 완전성과 의(義), 진(眞), 성(聖)에 대한 열정 때문에 오는 더 큰 고난, 시험 등이 바로 타락한 우리의 그 생생한 마음과 몸에 현장성이라는 것을 더욱 믿지 않을 수 없으며, 당시 사실적인 사법적 선고에 의하여 가장 극악 무도한 죄수에게 내려지는 십자가의 처참한 피흘림과 육체적인 죽음(Crucifixion)은 우리 자신의 비참한 그 저주를 대신 담당하신 그 놀라운 구속의 은혜로 믿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특히 장사(Burial)되어 음부 강하(陰部降下)로 까지 내려가신 것은 타락한 인간이 받아야할 죄의 궁극적인 한 부분을 대신 담당하심으로 우리의 타락한 죄의 본질은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burial)된 것이다. 그것은 옛 사람을 떠남과 버림, 그리고 그 파멸을 의미한다.
  이것은 구속받은 인간관의 시작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하나님의 계약의 목적이 달성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구속된 인간관은 새 인간상의 대표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비적 연합(Mystical Union)이다. 이 신비적 연합의 모든 축복들은 구속적 계약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로부터 나온다.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서 기초한 성령 하나님의 초자연적, 신비적 사역이다. 이 신비적 연합의 특성은 유기적이며, 생명적이요, 성령으로 중재된 상호 행동적, 영적 인격의 특성을 갖는다(롬8:2). 그러므로 구속된 인간관은 중생과 구원의 목적인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케 한다. 즉 죄인 스스로의 아무런 공로 없이 오직 그리스도의 의(

)를 전가 받음이요, 그리스도의 변화시키는 생명력으로 영육간에 변화가 오는 것이다.
  이 변화는 궁극적이요, 전적으로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안에서이다. 이 구원에는 차서(Ordo Salutis[Way of Salvation])가 있다. 구원의 차서란 구속된 인간관을 위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며, 전적 은혜인데, 성령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적용해주시는 그 주관적이며, 논리적인 과정이다. 개혁 교회의 대표자 칼빈(John Calvin)은 그의 책 기독교 강요 3권에서 이에 대한 조직적 설명을 가했다. 그 일반적인 순서는 소명→중생→회심(회개와 신앙)→칭의(양자)→성화(견인)→영화이다.
  그러므로 구속의 계약(Covenant of Redemption)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속된 인간관은 여전히 그리고 영원히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세워진 최초의 약정, 그 창조의 계약아래 놓여져 있다. 따라서 창조 질서에 의한 넓은 책임(안식일, 결혼, 노동)과 특수 책임인 본질적 성질의 금지시험이 여전히 작동되고 있다.
  특히, 본질적 성질의 금지시험이란, 인간의 인식 속에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불신앙과 교만이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그 자율적 의지를 잘못 오용하여 스스로 인식의 주체를 만들고 진리를 판단하며 선악의 기준을 세우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지금도 구속받지 못한 인간의 인식 속에서는(세속 철학) 인간이 넘볼 수 없는 불가항력의 요소들인 죽음, 고통, 허무를 스스로의 판단 속에서 해결하겠다는 미련함을 보이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이러한 사실의 원인 제공자는 타락한 인간 자신이며, 그것에 따른 하나님의 공의로 인간에게 찾아온 죽음이기 때문에 그 해결 자는 역시 하나님 한 분 뿐으로, 이미 그리스도의 부활(Resurrection)을 통하여 구속된 인간관의 실상이 보여졌다.
  이 부활은 구속된 인간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과 교만,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고 진리의 체계를 규정짓는 그 오만하며 비참한 타락된 인식의 세계가 그리스도의 피의 산 제사로 완전히 죽고, 하나님의 형상의 육체와 영혼이 재 연합하여 회복됨으로 영생의 조건이 만족되었다는 성부 하나님의 선포이기 때문이다. 타락한 진리의 인식 체계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완전한 승리인 것이다.
  참 인간의 이성적 영혼의 본성이 바로 이 부활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구속된 인간관은 이 부활을 준비하는 실제적인 과정인 것이다. 구원의 차서에 의한 그 주관적, 논리적, 조직적인 설명은 구속된 인간관을 형성시켜 미래적 부활을 맞이하게 하기 위한 신비한 본래의 이성(理性)이요, 철학(哲學)이다.

 

교육이란 인간이 지식, 교양, 품성 등을 선하게 지니도록 이끄는 것으로서, 특히 인간관(人間觀)을 매개로 해서 성립하는 작용이다. 그 기본 원리는 철학의 터 위에 기초한다.
  특히 기독교 교육철학은 이와 같은 인간관의 구명(究明)을 기독교 철학의 기본 원리 위에서 연구하는 학문이다.
  여기에는 창조된 인간관, 타락된 인간관, 구속된 인간관 등이 있다.

1.창조된 인간관

창조된 인간관은 비이성적(非理性的)인 면과 이성적(理性的)인 면, 두 가지가 있다.

(1)비이성적인 면의 창조 의의와 그 목적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에게 비이성적(非理性的)인 면이 있다라는 것을 바르게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크리스천에게 있어서나 무신론의 일반인에게 있어서나 그 단편적인 지식의 오해로 말미암아 서로의 편파적인 주장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무신론의 일반론적인 인식은 인간의 비이성적인 면을 어쩔 수 없이 인정은 하면서도 그 인식의 세계 안에서는 철저히 무시하고 제외시켜 버린다. 다시 말하면 천재지변과 같은 불가항력을 인정은 하면서도 인간이 인식할 수 없다하여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그 성향이다. 특히 철학적으로는 불가지론(不可知論)29)이 바로 그와 같은 성향이다. 이로부터 또한 발생되는 것이 진화론이고, 이 진화론은 결국 범신론에 인도되고, 유물주의로 나아가는 길잡이가 된 것이다. 다음은 초연신론(deism)30) 역시 자연법칙에 대해서 하나님을 방관자로 몰아 내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인간 이성의 직관적 인식 그 자체의 양상을 놓고 기독교 철학에 밝은 사상가31)들은 지적하기를,“인간들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대한 폭넓은 책임을 감히 떠나고자 하는 욕망을 표시한다”라고 정확하게 지적하였다.
  또 그와는 반대로, 크리스천들은 창조된 인간관의 이성적인 면을 무시하고 비이성적인 면을 너무 추종하는 나머지 하나님을 무속화(巫俗化)시켜 버리고, 기복화(起伏化)시켜 버렸다. 이것 역시 극히 잘못된 신앙 관으로, 특히 우리 한국의 기독교 문제이다. 이런 점에 있어서 기독교 교육철학의 그 중요성이 새삼 증가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상(성경) 안에는 분명한 철학과 이성이 존재함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두 가지 측면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관에는 비이성적인 면이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정하는 사례들을 살펴보았다. 그러므로 인간의 비이성적인 창조의 의의는 성경에 밝혀진바, 하나님의 계시(자연계시와 특별계시)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으며 어디까지나 부인할 수 없는 피조물의 본질로서 창조자에 의존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다음으로 인간의 비이성적인 창조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창조자 하나님의 영광을 전적으로 드러내게 한다는 것에서 그 본질을 찾을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는 없으나 그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비이성적인 면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시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실 예는 성경과 믿는 자들 속에서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즉 인간의 비이성적인 면의 창조 목적은 최고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보편적 속성을 나타내 보여주기 위함이다.

(2)이성적인 면의 창조 의의와 그 목적

  인간이 이성적(理性的)이다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이 말의 뜻은 타락한 인간의 이성(

)32)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타락이전 본래의 하나님의 형상인“이성적인 영”(

)을 말한다. 이는 인간이 이성적인 영적 본성을 소유한 것(

, 고전15:46)을 말함으로, 인간의 영적 본성의 성향은 - 생각하고(知), 느끼고(感), 의지 결단하는(情) 능력 - 의“이성적인 영”(고전2:11-12)이다.
  이것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 인간에게만 있는 것으로 참된 사람이 되게 하는 까닭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본질적 부분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진정한 이성적인 부분으로서 신적이고 영원한 일을 깨닫고 붙잡는 능력인데, 하나님의 성령이 그 영향력을 행사하시는 부분이다.
  그러므로 본래 영(靈)이라고 하는 것은 무속적 의미로, 또는 무작정 초월적 의미로 간주되어, 이성적인 감각이 전혀 없거나, 무딘 것이거나, 또는 조잡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인 영적 본성을 극히 왜곡시키고, 결핍되게 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다시 분명히 말하건대 영은 알고, 바라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능력을 소유한 이성적 본질 그 자체이다. 이“이성적인 영”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능력이며,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기쁨으로 얻는 능력이다. 즉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그 능력이다.
  그러나, 이 능력이 슬프게도 타락이후 죽어버렸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찾아낸 칼빈의 전적타락, 전적 무능력이다.
  그리고, 이것은 창조자 하나님의 구속의 언약에 의한 성취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회복되는 것으로 전 인류적, 전 인격적인 것이며 생명의 본원, 생명의 원리로 다시 살려서 깨끗하게 완성해 놓으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성적인 영이다.
  그러므로 인간 이성의 모든 활동에 있어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그 자체는 곧 회개의 대상이며 천국을 소유하지 못하는 그 원인이다. 세상의 교육철학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가운데 제아무리 지식과 교양, 품성을 가르친다고 한들 참된 인간상을 길러내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이 이성적인 영적 존재로 창조된 데에는 그 깊은 목적이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며 보여주기 위함이다.

  인간이 이성적 본질의 영적 존재로 창조된 것은 하나님의 원형적인 형상을 그대로 빼어 닮은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속성(Attributes of God)을 그대로 드러내며 보여주기 위함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자기를 중심으로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살게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 제일주의로 그 인격적 행동이 나타나 하나님의 영광과 그 속성을 드러내며 보여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타 피조물들과는 판이하고 다르게 이성적 본질의 영적 존재로 창조하신 것이다. 물론 이성과 인격적인 성향이 없는 전 우주적인 피조물들을 통하여서도 하나님의 영광과 속성이 잘 나타난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계의 모든 피조물들은 그 자체의 경각심이나 조심성 그리고 자제하는 자율성을 지니지 못한다. 역시 마찬가지로 자율적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속성을 드러내며 보여주지 못한다. 또한 어떤 것을 선택할 자유의지도 갖지 못한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않다. 사람은 모든 피조물 위에 가장 높은 위치로 창조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하였다. 인간의 이러한 이성적 본질의 영적 존재성은 첫째로,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생활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여야 하며. 둘째로, 그와 같이 내 이웃을 내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마22:37-40). 이것은 이성적 본질의 영적 존재인 인간이 하여야만 하는 것으로 그 의미는 광의적이며 폭 넓은 책임이 있음을 말한다.
  먼저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며, 다음은 내 이웃의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많은 사람들과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자연 만물을 사랑하고 보호함으로 역시 하나님의 영광과 그 속성을 드러내며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셋째로, 내가 죽기까지 희생할 때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선택하여 주시고 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죽기까지 희생함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그 견인불발(堅忍不拔)의 은혜에 우리도 또한 그 견인불발의 투지로 하나님께 보여드려야 하는 것이다.
  세속의 철학을 주도하는 이성은 도무지 희생할 줄 모르는 자기 영광과 자기의 속성을 자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철학은 내가 희생함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며 내 이웃을 기쁘게 하고, 삼라만상의 자연 환경까지도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며, 영적 부흥, 심령 대 부흥33)이 된 자이다.

둘째로, 하나님의 보편적 속성을 전달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보편적 속성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피조물 인간과 공통되는 속성으로서 공유적 속성(Communicable Attributes)이라고도 한다.
  여기에는 1)영성(Spirituality). 2)지성(지식, 지혜, 진실성). 3)도덕성(선(善)-사랑, 은혜, 자비, 오래 참으심, 거룩등. 의(義)-보수적, 응보적 의). 4)주권성(주권적 의지, 주권적 능력) 등이 있다.
  이와 같은 보편적 속성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 속에 이미 전달되어진 속성들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속성들이 우리로 하여금 드러내며 보여지게 하기 위해서 이성적인 면으로 창조된 것이다. 아울러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이와 같은 하나님의 보편적 속성들이 진정으로 드러나야 한다. 이것 역시 창조 약정의 넓은 책임인 것이다.

(3)하나님의 절대적 속성을 우러러 앙모하며 경배하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절대적 속성은 인간이 갖지 못하는 하나님만의 절대적 속성(Incom- municable Attributes)들이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 속에 전달되지 아니한 하나님만의 속성들이다. 여기에는 1)독립성(자존성). 2)불변성. 3)무한성(완전성, 영원성, 무변성). 4)통일성(단수성, 단순성) 등이 있다.
  이와 같은 하나님만의 절대적 속성들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모든 피조물 위에 빼어난 인간으로부터 그 자율성에 의하여 우러나는 영광과 찬양, 곧 예배를 받으시기 위함이다.

 

  2.타락된 인간관

(1)죄의 기원

  죄의 기원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찾아보면, 하나님과 첫 아담(모든 사람들 개념) 사이에 맺어졌던 독특한 관계인 창조의 계약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 창조의 계약은 하나님만의 절대주권적인 창조행위가 하나님 자신의 형상과 모양으로 인간을 창조함으로써,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맺어지는 최초의 약정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약정의 구체적인 면은 창조계약의 특수한 면으로서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금지, 또는 시험에서 제기된 인간의 특수책임과 연관되어지는 것으로, 여기에는 하나님 절대주권의 삶과 죽음이 내재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에게 부과된 창조계약의 특수한 면이요, 그 명령에 대한 인간의 특수한 책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7), 라고 피로 맺은 그 대원칙을 세우셨다.
  이 대원칙은 창조주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을 그 피조물 인간이 감히 넘볼 수 없음이며, 오로지 찬양과 영광, 경배(예배)의 대상뿐임을 말한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하나님의 허용작정(permissive decree)도 동시에 작동된다. 즉 하나님 절대 주권의 금지시험을 파기하는 인간의 교만이 일어 날 때는 사단(tempter)의 유혹(tempt)이 어김없이 찾아오는 것이다. 이 금단의 법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전체 삶과 연관이 깊은 것으로, 하나님이 인간을 시험하는 데 그 초점이 맞추어진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전인격적인 모든 행위가 특수한 책임을 갖고서 하나님의 창조계약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비이성적인 면과 이성적인 면을 갖는 영적 존재로서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을 자율적으로 인정하여 찬양하고 경배하여야 하며, 또 인간 속에 전달된 하나님의 공유적 속성을 인간의 전반적인 삶 속에서 드러내며 보여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악과에 대한 금지시험은 창조계약의 특수한 면으로서, 구체적으로 인간에게 요구된 복종이 철저하게 근본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하는 이유, 복종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유 의지의 자유로운 존재 인간은 주권적인 창조자의 말씀 밑에서 자율적으로 겸손하여 복종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이다.
  선악과에 대한 금지시험은 창조자에 대한 인간의 복종을 면밀히 검토하는 데 초점이 있다. 이제 이 금지시험의 목적은 복종 자체를 위해 복종을 기꺼이 선택하는 인간의 의지로 좁혀진다. 인간 행동의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인 것이다. 인간의 실존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데 달려 있는 것이며, 이것은 하나님이 명한 모든 것을 즐거이 믿는 가운데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러한 명백한 창조계약의 특수한 면(선악과 금지시험, 창2:16, 17)이 인간의 교만(superbia, 

)으로 인하여 사단의 유혹을 받고, 영적 세계의 타락을 가져와 인류의 조상 아담이 타락함으로 전 인류가 타락하는 죄의 기원(원죄, Original Sin)이 된 것이다(창3:1-7).

(2)죄의 결과

  죄의 결과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한 인간은 창조시 이성적인 면의 영적 본성(

)을 또한 상실함으로 참 인간으로서의 영적 활동이 불능하게 되었다. 인간 정신세계의 본질인 이성적인 영적 본성의 상실은 첫째, 지성적인 면에서 불 신앙과 교만(Superbia)을 불러왔다. 둘째, 의지적인 면에서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욕망(To be as God)을 불러왔다. 셋째, 감정적인 면에서 방종(Concu- piscence)에 빠졌다.
  이로 인하여 인간은 전적 부패, 전적 무능력하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못하게 되고, 부패 의식(수치감)과 죄책 의식(양심)에 사로잡히게 되고, 사망의 법에 종속하게 되었다(엡2:3).
  이와 같은 죄의 결과는 전적으로 첫 사람 아담의 타락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지, 하나님은 죄의 창시자가 아니다. [아담(

)은 성경에서 일반적인 인간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는 히브리 용어이기 때문에“모든 사람”즉 인간의 개념이다.]
  다시 말하여 타락 이전에도 인간들은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posse peccare)속에서 살았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당신의 비공유적 속성 외에는 모든 것을 거의 다 인간에게 전달(communicable)했다는 그 확실한 증거가 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 자율적인 자유 의지 안에서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까지도 가졌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금지시험을 어기지 않는 한 인간은 영원한 축복 속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인류 역사의 고고학적인 발견이 불확실해서 그렇지, 성경적으로 볼 때는 타락이전의 인간의 삶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시간의 개념을 내포한다. 영적 본성의 이성을 갖고 참된 인식 속에서 참된 사람으로 삶을 누렸던 첫 사람 아담이 그 자유 의지 안에서 창조 질서의 특별한 책임을 파기해버린 그 결과는 타락이후 전 인류에게 그대로 전가되고, 자연계까지도 저주를 받는 상상할 수 없는 창조주 하나님의 진노아래 놓이게 된 것이다.
  타락한 인간의 유전, 전통 그 관습은 그 후손 대대로(generation after gener- ation) 이성적인 영적 본성의 불구자가 되어 태어나고 죽고를 반복하면서, 여전히 사탄의 그 유혹(tempt) 속에서 헤어 나오지를 못하고 있는 것이다. 타락한 인간의 정신은 프시케(사이키)적인 이성이 되어, 욕망과 그 욕구적인 면만을 강조하는 육적인 주체를 중시하여 물질적 수준에 사는 도무지 희생할 줄 모르는 죽음, 고통, 허무의 존재가 되어 버렸다.
  세속적인 철학이 그러하듯이 직관적 인식, 감각적 인식만을 부르짖으며 철학은 필로 소피아(philosophia < Gk. 

 wisdom)라고 하여 자연발생적 사랑의 지혜라고 하며, 로맨틱한 사랑 중에 사랑(the romance of all rom- ance)이라고 울부짖는다.
  그리고 인간 심리학이나 정신 분석학은 타락이후 형성된 인간의 그 이성(사이키[psyche < 

])만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러므로 프로이드는 특히 타락한 인간의 성적 욕망을 자신의 심리학에 끌어 드렸다.
  그런가 하면 교육은 가르치는 것을 강조한 나머지 선생을 하나님처럼 만들어 놓고, 사이키적인 철학의 발상을 기초 개념으로 하여 인간 주체의 진화론적 교육과 주입식 교육에 열을 올리면서, 일류대학 일류학생만을 고집 하는 가운데 어린 학생들은 더 큰 고통 속에 놓이게 되었다. 요즈음 특히 체벌이 문제가 되어 때리지 말아야 되느니 몇 대까지는 때려야 되느니 등등 웃지 못할 그 희한한 발상까지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도무지 희생할 줄 모르는 타락한 인간의 그 유전인 것이다.
  인간의 참 이성, 그 인간 정신세계의 근본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에게 이성적인 면을 불어넣어 창조하시고, 그것이 또한 인간의 영적 본성이 되게 하셨다.
  크리스천이 이성을 도외시하는 것도, 무신론자가 하나님을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것도, 모두 다 타락한 그 유전, 전통, 관습에 의한 결과이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의 복음의 제일성은“회개하라”(

)이다. 인식의 개조, 타락한 이성의 철저한 개조인 것이다. 영적 부흥은 그리스도에 의해 하나님의 형상에 의한 이성을 되찾는 것이다., 아 멘.

(3)타락된 인간의 딜레마(Dilemma)

  딜레마는 헬라어서 왔다(dil?mma < Gk. di-twise, double + l?mma, assumption) . 그 뜻은 양도(兩刀) 논법인데, 이것은 어느 논법을 취해도 불리한 것을 말한다. 즉 궁지에 몰린 것 또는 진퇴 양난에 빠진 것, 그 곤란한 상태를 말한다.
  마찬가지로 타락한 인간의 이성은 본래의 철학 개념인 하나님의 사상(성경)을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까닭에 딜레마에 빠져있다.
  이와 같은 혼미한 철학 사상들이 전세계적으로 퍼져있고, 전 세계인들의 모든 영역에 걸쳐 전반적인 삶 속에 침투해 있다. 서양 철학, 동양 철학, 인도 철학의 세계 3대 철학은 신학적으로 볼 때 이미 양도 논법의 진퇴 양난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양 철학은 서양 철학에 밀려 나 있고, 문명이 발달할수록 서양 철학 역시도 그 논리에 근거를 놓고 서로 물고 물리는 곤란한 상황을 거듭하고 있다. 특히 서양 철학은 19 - 20세기에 들어서서 급속도로 변화되고 있는 추세이다.
  21세기 밀레니엄 새 천년을 맞이하는 세계 지식인의 사회는 미리부터 그 사상의 변화 추이를 놓고 갑론을박(甲論乙駁) 중이다.
  다윈의 진화론은 이미 그 근거를 잃었고, 인류의 종교 의식은 청동기가 아닌 신석기부터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도무지 인식할 줄 모르는 인간의 비이성적인 면을 깨끗이 인식하라는 표징(sign)들은 그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다. 해마다 찾아오는 자연 재해가 그러하고, 검출도 처방도 할 수 없는 슈퍼 박테리아의 출현이 그러하다. 더군다나 이 죽음의 세균은 인간의 병의학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병원에서부터 발병하고 있다.
  인간들이 자칭 첨단을 지향한다는 소프트웨어 기술은 하찮은 곤충 한 마리의 초정밀도 앞에서 맥을 못 추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무시하고 사이키적인 발상을 계속하는 한, 인간의 정신세계는 영원한 정신병자들의 괴로운 행진일 뿐이다. 어떻게 타락한 성적욕망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한 인간의 심리를 파악할 수 있으며, 치료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제 우리는“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고 급박하게(at hand) 재촉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발견하고 통찰할 줄 알아야 한다. 기독교는 무신론의 사이키적인 인식의 세계에서 말하는 대로 일반적인 종교가 아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 정신세계의 그 근본으로 본래의 철학 사상이요, 본래의 인간 이성이다. 기독교 철학이 이 세상을 정복하고 그 바탕 위에 기초한 기독교 교육이 이 세상을 인도할 때, 진정한 참 인간상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3.구속된 인간관

  구속된 인간관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자신의 모양과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함으로서 하나님은 자신과 인간사이에 창조 계약이라는 독특한 관계를 세우셨다는 것으로부터 출발을 하여야 한다.
  이 창조 계약은 하나님 절대주권적 행위로서 하나님은 이 주권적인 창조 행위에 덧붙여 인간의 역할이 결정되게 하였다. 즉 하나님과 인간의 창조 계약은 일반적인 면과 구체적인 면에서 검토되는 데, 창조 계약의 일반적인 면34)은 창조주에 대한 인간의 넓은 책임과 연관되어지고, 창조 계약의 구체적인 면35)은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금지시험에서 제기된 인간의 특수 책임과 연관되어진다.
  특히 창조 계약의 구체적인 면, 금지시험은“선악과를 먹지 않는 것”(창2:16, 17)으로서 이는 최초의 죄의 본질적 성질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불신앙과 교만(Superbia)이며, 인간 스스로 선악의 결정자가 되어 신(神)이 되고자 하는 자율적 의지의 인간의 욕망이다. 하나님은 바로 이것을 금지하고 시험하는 데 그 초점을 두고, 선악과를 먹지 말 것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법제화 시켰다. 이 명령 또는 법은 인간에게 있어서 철저히 복종해야 할 보다 근본적이며 결정적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더 구체적(형식적 성질의 말씀“선악과”제시)으로 특수한 책임이다. 이 특수한 책임이 근본적이며 결정적이다 라는 것은 삶과 죽음의 연장선상에 서 있는 피로 맺은 약정(“정녕 죽으리라”,창2:17)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적 신앙에서 피의 강조는 창조 계약에 있는 죽음까지의 강제적인 것(mandatory)임을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 처음 계약을 어기면 피로 대신하는 것 외에는 그 죽음의 저주로부터 구원의 방법이 없게 된다. 즉 이 처음 계약을 파기한 피조물 인간에게서는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구원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공의를 만족시킬만 한 어떤 것도 타락된 인간관 속에는 없기 때문이다. 오직 이것을 만족케 할만한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 스스로가 창조의 궁극적인 저주를 스스로 지게 됨으로써 구속된 인간관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창조의 계약 밑에서 인간의 실패와 함께 구속된 인간관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구속의 계약(Covenant of Redemption)은 동시적으로 작동되었다. 이는 타락이전 창조 계약 당시 저주의 말씀과 동시에 이미 결정되어진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속의 계약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과의 관계는 인간의 죄로 인해 끝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공의대로 라면 인간에게는 실제로 심판이 내리어져 피흘림과 죽음밖에는 없다. 그러나 죽기까지 희생하기로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은혜로운 특성의 신비는 심판의 한 가운데에서 구속의 희망으로 나타나 하나님은 이제 자기 백성을 구속하기 위하여 자신을 스스로 묶은 것이다.
  이 구속의 계약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대표자이신 성부와 하나님의 백성의 대표자이신 성자가 맺은 계약으로서, 성자는 성부가 주신 백성에 대한 의무를 맡고, 성부는 성자의 속죄 사역을 위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성자에게 약속한 것이다. 이는 영원한 계약이요, 은혜의 언약으로“구속의 계약”의 기초이다.
  그러므로 구속된 인간관에 있어서 성자 하나님은 그 성취자요, 완성자이시다. 성자 하나님의 명칭은 예수36)(Jesus), 그리스도37)(Christ), 인자38)(the Son of Man), 하나님의 아들39)(the Son of God), 주40)(Lord) 등으로 하나님께서 계시해주셨으며, 구속된 인간관을 완성하기 위한 신성41)(Divinity)과 인성42)(Humanity)의 이성(二性)의 필요성43)을 가지셨다. 특히 인성의 신분44)(States)을 가지심으로 자기를 비워 종의 신분보다 더 낮게 비하(Humiliation)하셨다.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도저히 만족시킬 수 없는 인간, 하나님의 형상으로 다시 회복될 수 없는 저주를 받은 인간, 피를 흘리며 죽을 수밖에 없는 그 비참한 인간관의 생생한 현장을 대신하여, 흠이 없고 죄가 없으신 성자 하나님께서 그토록 비참하게 낮아지셔서 생명의 본원으로 다시 회복시키시는 그 놀라운 은혜의 언약을 완성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인간 마리아의 태(胎)중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었다(Inca- rnation)는 사실을 우리는 의심없이 믿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중보적 과업에서 오는 사단의 공격, 백성의 증오와 불신, 원수들의 박해, 그리고 육체적 패배의 수난(Suffering)과 영혼의 고민과 고초, 윤리적 완전성과 의(義), 진(眞), 성(聖)에 대한 열정 때문에 오는 더 큰 고난, 시험 등이 바로 타락한 우리의 그 생생한 마음과 몸에 현장성이라는 것을 더욱 믿지 않을 수 없으며, 당시 사실적인 사법적 선고에 의하여 가장 극악 무도한 죄수에게 내려지는 십자가의 처참한 피흘림과 육체적인 죽음(Crucifixion)은 우리 자신의 비참한 그 저주를 대신 담당하신 그 놀라운 구속의 은혜로 믿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특히 장사(Burial)되어 음부 강하(陰部降下)로 까지 내려가신 것은 타락한 인간이 받아야할 죄의 궁극적인 한 부분을 대신 담당하심으로 우리의 타락한 죄의 본질은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burial)된 것이다. 그것은 옛 사람을 떠남과 버림, 그리고 그 파멸을 의미한다.
  이것은 구속받은 인간관의 시작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하나님의 계약의 목적이 달성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구속된 인간관은 새 인간상의 대표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비적 연합(Mystical Union)이다. 이 신비적 연합의 모든 축복들은 구속적 계약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로부터 나온다.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서 기초한 성령 하나님의 초자연적, 신비적 사역이다. 이 신비적 연합의 특성은 유기적이며, 생명적이요, 성령으로 중재된 상호 행동적, 영적 인격의 특성을 갖는다(롬8:2). 그러므로 구속된 인간관은 중생과 구원의 목적인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케 한다. 즉 죄인 스스로의 아무런 공로 없이 오직 그리스도의 의(

)를 전가 받음이요, 그리스도의 변화시키는 생명력으로 영육간에 변화가 오는 것이다.
  이 변화는 궁극적이요, 전적으로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안에서이다. 이 구원에는 차서(Ordo Salutis[Way of Salvation])가 있다. 구원의 차서란 구속된 인간관을 위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며, 전적 은혜인데, 성령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적용해주시는 그 주관적이며, 논리적인 과정이다. 개혁 교회의 대표자 칼빈(John Calvin)은 그의 책 기독교 강요 3권에서 이에 대한 조직적 설명을 가했다. 그 일반적인 순서는 소명→중생→회심(회개와 신앙)→칭의(양자)→성화(견인)→영화이다.
  그러므로 구속의 계약(Covenant of Redemption)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속된 인간관은 여전히 그리고 영원히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세워진 최초의 약정, 그 창조의 계약아래 놓여져 있다. 따라서 창조 질서에 의한 넓은 책임(안식일, 결혼, 노동)과 특수 책임인 본질적 성질의 금지시험이 여전히 작동되고 있다.
  특히, 본질적 성질의 금지시험이란, 인간의 인식 속에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불신앙과 교만이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그 자율적 의지를 잘못 오용하여 스스로 인식의 주체를 만들고 진리를 판단하며 선악의 기준을 세우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지금도 구속받지 못한 인간의 인식 속에서는(세속 철학) 인간이 넘볼 수 없는 불가항력의 요소들인 죽음, 고통, 허무를 스스로의 판단 속에서 해결하겠다는 미련함을 보이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이러한 사실의 원인 제공자는 타락한 인간 자신이며, 그것에 따른 하나님의 공의로 인간에게 찾아온 죽음이기 때문에 그 해결 자는 역시 하나님 한 분 뿐으로, 이미 그리스도의 부활(Resurrection)을 통하여 구속된 인간관의 실상이 보여졌다.
  이 부활은 구속된 인간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과 교만,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고 진리의 체계를 규정짓는 그 오만하며 비참한 타락된 인식의 세계가 그리스도의 피의 산 제사로 완전히 죽고, 하나님의 형상의 육체와 영혼이 재 연합하여 회복됨으로 영생의 조건이 만족되었다는 성부 하나님의 선포이기 때문이다. 타락한 진리의 인식 체계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완전한 승리인 것이다.
  참 인간의 이성적 영혼의 본성이 바로 이 부활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구속된 인간관은 이 부활을 준비하는 실제적인 과정인 것이다. 구원의 차서에 의한 그 주관적, 논리적, 조직적인 설명은 구속된 인간관을 형성시켜 미래적 부활을 맞이하게 하기 위한 신비한 본래의 이성(理性)이요, 철학(哲學)이다.

교육이란 인간이 지식, 교양, 품성 등을 선하게 지니도록 이끄는 것으로서, 특히 인간관(人間觀)을 매개로 해서 성립하는 작용이다. 그 기본 원리는 철학의 터 위에 기초한다.
  특히 기독교 교육철학은 이와 같은 인간관의 구명(究明)을 기독교 철학의 기본 원리 위에서 연구하는 학문이다.
  여기에는 창조된 인간관, 타락된 인간관, 구속된 인간관 등이 있다.

1.창조된 인간관

창조된 인간관은 비이성적(非理性的)인 면과 이성적(理性的)인 면, 두 가지가 있다.

(1)비이성적인 면의 창조 의의와 그 목적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에게 비이성적(非理性的)인 면이 있다라는 것을 바르게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크리스천에게 있어서나 무신론의 일반인에게 있어서나 그 단편적인 지식의 오해로 말미암아 서로의 편파적인 주장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무신론의 일반론적인 인식은 인간의 비이성적인 면을 어쩔 수 없이 인정은 하면서도 그 인식의 세계 안에서는 철저히 무시하고 제외시켜 버린다. 다시 말하면 천재지변과 같은 불가항력을 인정은 하면서도 인간이 인식할 수 없다하여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그 성향이다. 특히 철학적으로는 불가지론(不可知論)29)이 바로 그와 같은 성향이다. 이로부터 또한 발생되는 것이 진화론이고, 이 진화론은 결국 범신론에 인도되고, 유물주의로 나아가는 길잡이가 된 것이다. 다음은 초연신론(deism)30) 역시 자연법칙에 대해서 하나님을 방관자로 몰아 내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인간 이성의 직관적 인식 그 자체의 양상을 놓고 기독교 철학에 밝은 사상가31)들은 지적하기를,“인간들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대한 폭넓은 책임을 감히 떠나고자 하는 욕망을 표시한다”라고 정확하게 지적하였다.
  또 그와는 반대로, 크리스천들은 창조된 인간관의 이성적인 면을 무시하고 비이성적인 면을 너무 추종하는 나머지 하나님을 무속화(巫俗化)시켜 버리고, 기복화(起伏化)시켜 버렸다. 이것 역시 극히 잘못된 신앙 관으로, 특히 우리 한국의 기독교 문제이다. 이런 점에 있어서 기독교 교육철학의 그 중요성이 새삼 증가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상(성경) 안에는 분명한 철학과 이성이 존재함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두 가지 측면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관에는 비이성적인 면이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정하는 사례들을 살펴보았다. 그러므로 인간의 비이성적인 창조의 의의는 성경에 밝혀진바, 하나님의 계시(자연계시와 특별계시)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으며 어디까지나 부인할 수 없는 피조물의 본질로서 창조자에 의존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다음으로 인간의 비이성적인 창조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창조자 하나님의 영광을 전적으로 드러내게 한다는 것에서 그 본질을 찾을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는 없으나 그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비이성적인 면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시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실 예는 성경과 믿는 자들 속에서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즉 인간의 비이성적인 면의 창조 목적은 최고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보편적 속성을 나타내 보여주기 위함이다.

(2)이성적인 면의 창조 의의와 그 목적

  인간이 이성적(理性的)이다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이 말의 뜻은 타락한 인간의 이성(

)32)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타락이전 본래의 하나님의 형상인“이성적인 영”(

)을 말한다. 이는 인간이 이성적인 영적 본성을 소유한 것(

, 고전15:46)을 말함으로, 인간의 영적 본성의 성향은 - 생각하고(知), 느끼고(感), 의지 결단하는(情) 능력 - 의“이성적인 영”(고전2:11-12)이다.
  이것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 인간에게만 있는 것으로 참된 사람이 되게 하는 까닭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본질적 부분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진정한 이성적인 부분으로서 신적이고 영원한 일을 깨닫고 붙잡는 능력인데, 하나님의 성령이 그 영향력을 행사하시는 부분이다.
  그러므로 본래 영(靈)이라고 하는 것은 무속적 의미로, 또는 무작정 초월적 의미로 간주되어, 이성적인 감각이 전혀 없거나, 무딘 것이거나, 또는 조잡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인 영적 본성을 극히 왜곡시키고, 결핍되게 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다시 분명히 말하건대 영은 알고, 바라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능력을 소유한 이성적 본질 그 자체이다. 이“이성적인 영”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능력이며,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기쁨으로 얻는 능력이다. 즉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그 능력이다.
  그러나, 이 능력이 슬프게도 타락이후 죽어버렸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찾아낸 칼빈의 전적타락, 전적 무능력이다.
  그리고, 이것은 창조자 하나님의 구속의 언약에 의한 성취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회복되는 것으로 전 인류적, 전 인격적인 것이며 생명의 본원, 생명의 원리로 다시 살려서 깨끗하게 완성해 놓으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성적인 영이다.
  그러므로 인간 이성의 모든 활동에 있어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그 자체는 곧 회개의 대상이며 천국을 소유하지 못하는 그 원인이다. 세상의 교육철학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가운데 제아무리 지식과 교양, 품성을 가르친다고 한들 참된 인간상을 길러내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이 이성적인 영적 존재로 창조된 데에는 그 깊은 목적이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며 보여주기 위함이다.

  인간이 이성적 본질의 영적 존재로 창조된 것은 하나님의 원형적인 형상을 그대로 빼어 닮은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속성(Attributes of God)을 그대로 드러내며 보여주기 위함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자기를 중심으로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살게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 제일주의로 그 인격적 행동이 나타나 하나님의 영광과 그 속성을 드러내며 보여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타 피조물들과는 판이하고 다르게 이성적 본질의 영적 존재로 창조하신 것이다. 물론 이성과 인격적인 성향이 없는 전 우주적인 피조물들을 통하여서도 하나님의 영광과 속성이 잘 나타난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계의 모든 피조물들은 그 자체의 경각심이나 조심성 그리고 자제하는 자율성을 지니지 못한다. 역시 마찬가지로 자율적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속성을 드러내며 보여주지 못한다. 또한 어떤 것을 선택할 자유의지도 갖지 못한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않다. 사람은 모든 피조물 위에 가장 높은 위치로 창조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하였다. 인간의 이러한 이성적 본질의 영적 존재성은 첫째로,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생활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여야 하며. 둘째로, 그와 같이 내 이웃을 내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마22:37-40). 이것은 이성적 본질의 영적 존재인 인간이 하여야만 하는 것으로 그 의미는 광의적이며 폭 넓은 책임이 있음을 말한다.
  먼저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며, 다음은 내 이웃의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많은 사람들과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자연 만물을 사랑하고 보호함으로 역시 하나님의 영광과 그 속성을 드러내며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셋째로, 내가 죽기까지 희생할 때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선택하여 주시고 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죽기까지 희생함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그 견인불발(堅忍不拔)의 은혜에 우리도 또한 그 견인불발의 투지로 하나님께 보여드려야 하는 것이다.
  세속의 철학을 주도하는 이성은 도무지 희생할 줄 모르는 자기 영광과 자기의 속성을 자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철학은 내가 희생함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며 내 이웃을 기쁘게 하고, 삼라만상의 자연 환경까지도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며, 영적 부흥, 심령 대 부흥33)이 된 자이다.

둘째로, 하나님의 보편적 속성을 전달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보편적 속성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피조물 인간과 공통되는 속성으로서 공유적 속성(Communicable Attributes)이라고도 한다.
  여기에는 1)영성(Spirituality). 2)지성(지식, 지혜, 진실성). 3)도덕성(선(善)-사랑, 은혜, 자비, 오래 참으심, 거룩등. 의(義)-보수적, 응보적 의). 4)주권성(주권적 의지, 주권적 능력) 등이 있다.
  이와 같은 보편적 속성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 속에 이미 전달되어진 속성들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속성들이 우리로 하여금 드러내며 보여지게 하기 위해서 이성적인 면으로 창조된 것이다. 아울러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이와 같은 하나님의 보편적 속성들이 진정으로 드러나야 한다. 이것 역시 창조 약정의 넓은 책임인 것이다.

(3)하나님의 절대적 속성을 우러러 앙모하며 경배하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절대적 속성은 인간이 갖지 못하는 하나님만의 절대적 속성(Incom- municable Attributes)들이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 속에 전달되지 아니한 하나님만의 속성들이다. 여기에는 1)독립성(자존성). 2)불변성. 3)무한성(완전성, 영원성, 무변성). 4)통일성(단수성, 단순성) 등이 있다.
  이와 같은 하나님만의 절대적 속성들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모든 피조물 위에 빼어난 인간으로부터 그 자율성에 의하여 우러나는 영광과 찬양, 곧 예배를 받으시기 위함이다.

 

  2.타락된 인간관

(1)죄의 기원

  죄의 기원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찾아보면, 하나님과 첫 아담(모든 사람들 개념) 사이에 맺어졌던 독특한 관계인 창조의 계약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 창조의 계약은 하나님만의 절대주권적인 창조행위가 하나님 자신의 형상과 모양으로 인간을 창조함으로써,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맺어지는 최초의 약정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약정의 구체적인 면은 창조계약의 특수한 면으로서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금지, 또는 시험에서 제기된 인간의 특수책임과 연관되어지는 것으로, 여기에는 하나님 절대주권의 삶과 죽음이 내재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에게 부과된 창조계약의 특수한 면이요, 그 명령에 대한 인간의 특수한 책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7), 라고 피로 맺은 그 대원칙을 세우셨다.
  이 대원칙은 창조주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을 그 피조물 인간이 감히 넘볼 수 없음이며, 오로지 찬양과 영광, 경배(예배)의 대상뿐임을 말한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하나님의 허용작정(permissive decree)도 동시에 작동된다. 즉 하나님 절대 주권의 금지시험을 파기하는 인간의 교만이 일어 날 때는 사단(tempter)의 유혹(tempt)이 어김없이 찾아오는 것이다. 이 금단의 법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전체 삶과 연관이 깊은 것으로, 하나님이 인간을 시험하는 데 그 초점이 맞추어진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전인격적인 모든 행위가 특수한 책임을 갖고서 하나님의 창조계약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비이성적인 면과 이성적인 면을 갖는 영적 존재로서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을 자율적으로 인정하여 찬양하고 경배하여야 하며, 또 인간 속에 전달된 하나님의 공유적 속성을 인간의 전반적인 삶 속에서 드러내며 보여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악과에 대한 금지시험은 창조계약의 특수한 면으로서, 구체적으로 인간에게 요구된 복종이 철저하게 근본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하는 이유, 복종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유 의지의 자유로운 존재 인간은 주권적인 창조자의 말씀 밑에서 자율적으로 겸손하여 복종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이다.
  선악과에 대한 금지시험은 창조자에 대한 인간의 복종을 면밀히 검토하는 데 초점이 있다. 이제 이 금지시험의 목적은 복종 자체를 위해 복종을 기꺼이 선택하는 인간의 의지로 좁혀진다. 인간 행동의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인 것이다. 인간의 실존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데 달려 있는 것이며, 이것은 하나님이 명한 모든 것을 즐거이 믿는 가운데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러한 명백한 창조계약의 특수한 면(선악과 금지시험, 창2:16, 17)이 인간의 교만(superbia, 

)으로 인하여 사단의 유혹을 받고, 영적 세계의 타락을 가져와 인류의 조상 아담이 타락함으로 전 인류가 타락하는 죄의 기원(원죄, Original Sin)이 된 것이다(창3:1-7).

(2)죄의 결과

  죄의 결과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한 인간은 창조시 이성적인 면의 영적 본성(

)을 또한 상실함으로 참 인간으로서의 영적 활동이 불능하게 되었다. 인간 정신세계의 본질인 이성적인 영적 본성의 상실은 첫째, 지성적인 면에서 불 신앙과 교만(Superbia)을 불러왔다. 둘째, 의지적인 면에서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욕망(To be as God)을 불러왔다. 셋째, 감정적인 면에서 방종(Concu- piscence)에 빠졌다.
  이로 인하여 인간은 전적 부패, 전적 무능력하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못하게 되고, 부패 의식(수치감)과 죄책 의식(양심)에 사로잡히게 되고, 사망의 법에 종속하게 되었다(엡2:3).
  이와 같은 죄의 결과는 전적으로 첫 사람 아담의 타락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지, 하나님은 죄의 창시자가 아니다. [아담(

)은 성경에서 일반적인 인간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는 히브리 용어이기 때문에“모든 사람”즉 인간의 개념이다.]
  다시 말하여 타락 이전에도 인간들은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posse peccare)속에서 살았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당신의 비공유적 속성 외에는 모든 것을 거의 다 인간에게 전달(communicable)했다는 그 확실한 증거가 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 자율적인 자유 의지 안에서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까지도 가졌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금지시험을 어기지 않는 한 인간은 영원한 축복 속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인류 역사의 고고학적인 발견이 불확실해서 그렇지, 성경적으로 볼 때는 타락이전의 인간의 삶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시간의 개념을 내포한다. 영적 본성의 이성을 갖고 참된 인식 속에서 참된 사람으로 삶을 누렸던 첫 사람 아담이 그 자유 의지 안에서 창조 질서의 특별한 책임을 파기해버린 그 결과는 타락이후 전 인류에게 그대로 전가되고, 자연계까지도 저주를 받는 상상할 수 없는 창조주 하나님의 진노아래 놓이게 된 것이다.
  타락한 인간의 유전, 전통 그 관습은 그 후손 대대로(generation after gener- ation) 이성적인 영적 본성의 불구자가 되어 태어나고 죽고를 반복하면서, 여전히 사탄의 그 유혹(tempt) 속에서 헤어 나오지를 못하고 있는 것이다. 타락한 인간의 정신은 프시케(사이키)적인 이성이 되어, 욕망과 그 욕구적인 면만을 강조하는 육적인 주체를 중시하여 물질적 수준에 사는 도무지 희생할 줄 모르는 죽음, 고통, 허무의 존재가 되어 버렸다.
  세속적인 철학이 그러하듯이 직관적 인식, 감각적 인식만을 부르짖으며 철학은 필로 소피아(philosophia < Gk. 

 wisdom)라고 하여 자연발생적 사랑의 지혜라고 하며, 로맨틱한 사랑 중에 사랑(the romance of all rom- ance)이라고 울부짖는다.
  그리고 인간 심리학이나 정신 분석학은 타락이후 형성된 인간의 그 이성(사이키[psyche < 

])만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러므로 프로이드는 특히 타락한 인간의 성적 욕망을 자신의 심리학에 끌어 드렸다.
  그런가 하면 교육은 가르치는 것을 강조한 나머지 선생을 하나님처럼 만들어 놓고, 사이키적인 철학의 발상을 기초 개념으로 하여 인간 주체의 진화론적 교육과 주입식 교육에 열을 올리면서, 일류대학 일류학생만을 고집 하는 가운데 어린 학생들은 더 큰 고통 속에 놓이게 되었다. 요즈음 특히 체벌이 문제가 되어 때리지 말아야 되느니 몇 대까지는 때려야 되느니 등등 웃지 못할 그 희한한 발상까지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도무지 희생할 줄 모르는 타락한 인간의 그 유전인 것이다.
  인간의 참 이성, 그 인간 정신세계의 근본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에게 이성적인 면을 불어넣어 창조하시고, 그것이 또한 인간의 영적 본성이 되게 하셨다.
  크리스천이 이성을 도외시하는 것도, 무신론자가 하나님을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것도, 모두 다 타락한 그 유전, 전통, 관습에 의한 결과이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의 복음의 제일성은“회개하라”(

)이다. 인식의 개조, 타락한 이성의 철저한 개조인 것이다. 영적 부흥은 그리스도에 의해 하나님의 형상에 의한 이성을 되찾는 것이다., 아 멘.

(3)타락된 인간의 딜레마(Dilemma)

  딜레마는 헬라어서 왔다(dil?mma < Gk. di-twise, double + l?mma, assumption) . 그 뜻은 양도(兩刀) 논법인데, 이것은 어느 논법을 취해도 불리한 것을 말한다. 즉 궁지에 몰린 것 또는 진퇴 양난에 빠진 것, 그 곤란한 상태를 말한다.
  마찬가지로 타락한 인간의 이성은 본래의 철학 개념인 하나님의 사상(성경)을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까닭에 딜레마에 빠져있다.
  이와 같은 혼미한 철학 사상들이 전세계적으로 퍼져있고, 전 세계인들의 모든 영역에 걸쳐 전반적인 삶 속에 침투해 있다. 서양 철학, 동양 철학, 인도 철학의 세계 3대 철학은 신학적으로 볼 때 이미 양도 논법의 진퇴 양난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양 철학은 서양 철학에 밀려 나 있고, 문명이 발달할수록 서양 철학 역시도 그 논리에 근거를 놓고 서로 물고 물리는 곤란한 상황을 거듭하고 있다. 특히 서양 철학은 19 - 20세기에 들어서서 급속도로 변화되고 있는 추세이다.
  21세기 밀레니엄 새 천년을 맞이하는 세계 지식인의 사회는 미리부터 그 사상의 변화 추이를 놓고 갑론을박(甲論乙駁) 중이다.
  다윈의 진화론은 이미 그 근거를 잃었고, 인류의 종교 의식은 청동기가 아닌 신석기부터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도무지 인식할 줄 모르는 인간의 비이성적인 면을 깨끗이 인식하라는 표징(sign)들은 그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다. 해마다 찾아오는 자연 재해가 그러하고, 검출도 처방도 할 수 없는 슈퍼 박테리아의 출현이 그러하다. 더군다나 이 죽음의 세균은 인간의 병의학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병원에서부터 발병하고 있다.
  인간들이 자칭 첨단을 지향한다는 소프트웨어 기술은 하찮은 곤충 한 마리의 초정밀도 앞에서 맥을 못 추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무시하고 사이키적인 발상을 계속하는 한, 인간의 정신세계는 영원한 정신병자들의 괴로운 행진일 뿐이다. 어떻게 타락한 성적욕망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한 인간의 심리를 파악할 수 있으며, 치료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제 우리는“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고 급박하게(at hand) 재촉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발견하고 통찰할 줄 알아야 한다. 기독교는 무신론의 사이키적인 인식의 세계에서 말하는 대로 일반적인 종교가 아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 정신세계의 그 근본으로 본래의 철학 사상이요, 본래의 인간 이성이다. 기독교 철학이 이 세상을 정복하고 그 바탕 위에 기초한 기독교 교육이 이 세상을 인도할 때, 진정한 참 인간상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3.구속된 인간관

  구속된 인간관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자신의 모양과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함으로서 하나님은 자신과 인간사이에 창조 계약이라는 독특한 관계를 세우셨다는 것으로부터 출발을 하여야 한다.
  이 창조 계약은 하나님 절대주권적 행위로서 하나님은 이 주권적인 창조 행위에 덧붙여 인간의 역할이 결정되게 하였다. 즉 하나님과 인간의 창조 계약은 일반적인 면과 구체적인 면에서 검토되는 데, 창조 계약의 일반적인 면34)은 창조주에 대한 인간의 넓은 책임과 연관되어지고, 창조 계약의 구체적인 면35)은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금지시험에서 제기된 인간의 특수 책임과 연관되어진다.
  특히 창조 계약의 구체적인 면, 금지시험은“선악과를 먹지 않는 것”(창2:16, 17)으로서 이는 최초의 죄의 본질적 성질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불신앙과 교만(Superbia)이며, 인간 스스로 선악의 결정자가 되어 신(神)이 되고자 하는 자율적 의지의 인간의 욕망이다. 하나님은 바로 이것을 금지하고 시험하는 데 그 초점을 두고, 선악과를 먹지 말 것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법제화 시켰다. 이 명령 또는 법은 인간에게 있어서 철저히 복종해야 할 보다 근본적이며 결정적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더 구체적(형식적 성질의 말씀“선악과”제시)으로 특수한 책임이다. 이 특수한 책임이 근본적이며 결정적이다 라는 것은 삶과 죽음의 연장선상에 서 있는 피로 맺은 약정(“정녕 죽으리라”,창2:17)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적 신앙에서 피의 강조는 창조 계약에 있는 죽음까지의 강제적인 것(mandatory)임을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 처음 계약을 어기면 피로 대신하는 것 외에는 그 죽음의 저주로부터 구원의 방법이 없게 된다. 즉 이 처음 계약을 파기한 피조물 인간에게서는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구원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공의를 만족시킬만 한 어떤 것도 타락된 인간관 속에는 없기 때문이다. 오직 이것을 만족케 할만한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 스스로가 창조의 궁극적인 저주를 스스로 지게 됨으로써 구속된 인간관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창조의 계약 밑에서 인간의 실패와 함께 구속된 인간관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구속의 계약(Covenant of Redemption)은 동시적으로 작동되었다. 이는 타락이전 창조 계약 당시 저주의 말씀과 동시에 이미 결정되어진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속의 계약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과의 관계는 인간의 죄로 인해 끝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공의대로 라면 인간에게는 실제로 심판이 내리어져 피흘림과 죽음밖에는 없다. 그러나 죽기까지 희생하기로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은혜로운 특성의 신비는 심판의 한 가운데에서 구속의 희망으로 나타나 하나님은 이제 자기 백성을 구속하기 위하여 자신을 스스로 묶은 것이다.
  이 구속의 계약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대표자이신 성부와 하나님의 백성의 대표자이신 성자가 맺은 계약으로서, 성자는 성부가 주신 백성에 대한 의무를 맡고, 성부는 성자의 속죄 사역을 위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성자에게 약속한 것이다. 이는 영원한 계약이요, 은혜의 언약으로“구속의 계약”의 기초이다.
  그러므로 구속된 인간관에 있어서 성자 하나님은 그 성취자요, 완성자이시다. 성자 하나님의 명칭은 예수36)(Jesus), 그리스도37)(Christ), 인자38)(the Son of Man), 하나님의 아들39)(the Son of God), 주40)(Lord) 등으로 하나님께서 계시해주셨으며, 구속된 인간관을 완성하기 위한 신성41)(Divinity)과 인성42)(Humanity)의 이성(二性)의 필요성43)을 가지셨다. 특히 인성의 신분44)(States)을 가지심으로 자기를 비워 종의 신분보다 더 낮게 비하(Humiliation)하셨다.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도저히 만족시킬 수 없는 인간, 하나님의 형상으로 다시 회복될 수 없는 저주를 받은 인간, 피를 흘리며 죽을 수밖에 없는 그 비참한 인간관의 생생한 현장을 대신하여, 흠이 없고 죄가 없으신 성자 하나님께서 그토록 비참하게 낮아지셔서 생명의 본원으로 다시 회복시키시는 그 놀라운 은혜의 언약을 완성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인간 마리아의 태(胎)중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었다(Inca- rnation)는 사실을 우리는 의심없이 믿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중보적 과업에서 오는 사단의 공격, 백성의 증오와 불신, 원수들의 박해, 그리고 육체적 패배의 수난(Suffering)과 영혼의 고민과 고초, 윤리적 완전성과 의(義), 진(眞), 성(聖)에 대한 열정 때문에 오는 더 큰 고난, 시험 등이 바로 타락한 우리의 그 생생한 마음과 몸에 현장성이라는 것을 더욱 믿지 않을 수 없으며, 당시 사실적인 사법적 선고에 의하여 가장 극악 무도한 죄수에게 내려지는 십자가의 처참한 피흘림과 육체적인 죽음(Crucifixion)은 우리 자신의 비참한 그 저주를 대신 담당하신 그 놀라운 구속의 은혜로 믿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특히 장사(Burial)되어 음부 강하(陰部降下)로 까지 내려가신 것은 타락한 인간이 받아야할 죄의 궁극적인 한 부분을 대신 담당하심으로 우리의 타락한 죄의 본질은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burial)된 것이다. 그것은 옛 사람을 떠남과 버림, 그리고 그 파멸을 의미한다.
  이것은 구속받은 인간관의 시작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하나님의 계약의 목적이 달성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구속된 인간관은 새 인간상의 대표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비적 연합(Mystical Union)이다. 이 신비적 연합의 모든 축복들은 구속적 계약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로부터 나온다.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서 기초한 성령 하나님의 초자연적, 신비적 사역이다. 이 신비적 연합의 특성은 유기적이며, 생명적이요, 성령으로 중재된 상호 행동적, 영적 인격의 특성을 갖는다(롬8:2). 그러므로 구속된 인간관은 중생과 구원의 목적인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케 한다. 즉 죄인 스스로의 아무런 공로 없이 오직 그리스도의 의(

)를 전가 받음이요, 그리스도의 변화시키는 생명력으로 영육간에 변화가 오는 것이다.
  이 변화는 궁극적이요, 전적으로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안에서이다. 이 구원에는 차서(Ordo Salutis[Way of Salvation])가 있다. 구원의 차서란 구속된 인간관을 위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며, 전적 은혜인데, 성령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적용해주시는 그 주관적이며, 논리적인 과정이다. 개혁 교회의 대표자 칼빈(John Calvin)은 그의 책 기독교 강요 3권에서 이에 대한 조직적 설명을 가했다. 그 일반적인 순서는 소명→중생→회심(회개와 신앙)→칭의(양자)→성화(견인)→영화이다.
  그러므로 구속의 계약(Covenant of Redemption)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속된 인간관은 여전히 그리고 영원히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세워진 최초의 약정, 그 창조의 계약아래 놓여져 있다. 따라서 창조 질서에 의한 넓은 책임(안식일, 결혼, 노동)과 특수 책임인 본질적 성질의 금지시험이 여전히 작동되고 있다.
  특히, 본질적 성질의 금지시험이란, 인간의 인식 속에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불신앙과 교만이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그 자율적 의지를 잘못 오용하여 스스로 인식의 주체를 만들고 진리를 판단하며 선악의 기준을 세우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지금도 구속받지 못한 인간의 인식 속에서는(세속 철학) 인간이 넘볼 수 없는 불가항력의 요소들인 죽음, 고통, 허무를 스스로의 판단 속에서 해결하겠다는 미련함을 보이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이러한 사실의 원인 제공자는 타락한 인간 자신이며, 그것에 따른 하나님의 공의로 인간에게 찾아온 죽음이기 때문에 그 해결 자는 역시 하나님 한 분 뿐으로, 이미 그리스도의 부활(Resurrection)을 통하여 구속된 인간관의 실상이 보여졌다.
  이 부활은 구속된 인간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과 교만,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고 진리의 체계를 규정짓는 그 오만하며 비참한 타락된 인식의 세계가 그리스도의 피의 산 제사로 완전히 죽고, 하나님의 형상의 육체와 영혼이 재 연합하여 회복됨으로 영생의 조건이 만족되었다는 성부 하나님의 선포이기 때문이다. 타락한 진리의 인식 체계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완전한 승리인 것이다.
  참 인간의 이성적 영혼의 본성이 바로 이 부활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구속된 인간관은 이 부활을 준비하는 실제적인 과정인 것이다. 구원의 차서에 의한 그 주관적, 논리적, 조직적인 설명은 구속된 인간관을 형성시켜 미래적 부활을 맞이하게 하기 위한 신비한 본래의 이성(理性)이요, 철학(哲學)이다.

교육이란 인간이 지식, 교양, 품성 등을 선하게 지니도록 이끄는 것으로서, 특히 인간관(人間觀)을 매개로 해서 성립하는 작용이다. 그 기본 원리는 철학의 터 위에 기초한다.
  특히 기독교 교육철학은 이와 같은 인간관의 구명(究明)을 기독교 철학의 기본 원리 위에서 연구하는 학문이다.
  여기에는 창조된 인간관, 타락된 인간관, 구속된 인간관 등이 있다.

1.창조된 인간관

창조된 인간관은 비이성적(非理性的)인 면과 이성적(理性的)인 면, 두 가지가 있다.

(1)비이성적인 면의 창조 의의와 그 목적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에게 비이성적(非理性的)인 면이 있다라는 것을 바르게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크리스천에게 있어서나 무신론의 일반인에게 있어서나 그 단편적인 지식의 오해로 말미암아 서로의 편파적인 주장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무신론의 일반론적인 인식은 인간의 비이성적인 면을 어쩔 수 없이 인정은 하면서도 그 인식의 세계 안에서는 철저히 무시하고 제외시켜 버린다. 다시 말하면 천재지변과 같은 불가항력을 인정은 하면서도 인간이 인식할 수 없다하여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그 성향이다. 특히 철학적으로는 불가지론(不可知論)29)이 바로 그와 같은 성향이다. 이로부터 또한 발생되는 것이 진화론이고, 이 진화론은 결국 범신론에 인도되고, 유물주의로 나아가는 길잡이가 된 것이다. 다음은 초연신론(deism)30) 역시 자연법칙에 대해서 하나님을 방관자로 몰아 내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인간 이성의 직관적 인식 그 자체의 양상을 놓고 기독교 철학에 밝은 사상가31)들은 지적하기를,“인간들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대한 폭넓은 책임을 감히 떠나고자 하는 욕망을 표시한다”라고 정확하게 지적하였다.
  또 그와는 반대로, 크리스천들은 창조된 인간관의 이성적인 면을 무시하고 비이성적인 면을 너무 추종하는 나머지 하나님을 무속화(巫俗化)시켜 버리고, 기복화(起伏化)시켜 버렸다. 이것 역시 극히 잘못된 신앙 관으로, 특히 우리 한국의 기독교 문제이다. 이런 점에 있어서 기독교 교육철학의 그 중요성이 새삼 증가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상(성경) 안에는 분명한 철학과 이성이 존재함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두 가지 측면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관에는 비이성적인 면이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정하는 사례들을 살펴보았다. 그러므로 인간의 비이성적인 창조의 의의는 성경에 밝혀진바, 하나님의 계시(자연계시와 특별계시)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으며 어디까지나 부인할 수 없는 피조물의 본질로서 창조자에 의존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다음으로 인간의 비이성적인 창조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창조자 하나님의 영광을 전적으로 드러내게 한다는 것에서 그 본질을 찾을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는 없으나 그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비이성적인 면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시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실 예는 성경과 믿는 자들 속에서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즉 인간의 비이성적인 면의 창조 목적은 최고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보편적 속성을 나타내 보여주기 위함이다.

(2)이성적인 면의 창조 의의와 그 목적

  인간이 이성적(理性的)이다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이 말의 뜻은 타락한 인간의 이성(

)32)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타락이전 본래의 하나님의 형상인“이성적인 영”(

)을 말한다. 이는 인간이 이성적인 영적 본성을 소유한 것(

, 고전15:46)을 말함으로, 인간의 영적 본성의 성향은 - 생각하고(知), 느끼고(感), 의지 결단하는(情) 능력 - 의“이성적인 영”(고전2:11-12)이다.
  이것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 인간에게만 있는 것으로 참된 사람이 되게 하는 까닭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본질적 부분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진정한 이성적인 부분으로서 신적이고 영원한 일을 깨닫고 붙잡는 능력인데, 하나님의 성령이 그 영향력을 행사하시는 부분이다.
  그러므로 본래 영(靈)이라고 하는 것은 무속적 의미로, 또는 무작정 초월적 의미로 간주되어, 이성적인 감각이 전혀 없거나, 무딘 것이거나, 또는 조잡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인 영적 본성을 극히 왜곡시키고, 결핍되게 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다시 분명히 말하건대 영은 알고, 바라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능력을 소유한 이성적 본질 그 자체이다. 이“이성적인 영”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능력이며,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기쁨으로 얻는 능력이다. 즉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그 능력이다.
  그러나, 이 능력이 슬프게도 타락이후 죽어버렸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찾아낸 칼빈의 전적타락, 전적 무능력이다.
  그리고, 이것은 창조자 하나님의 구속의 언약에 의한 성취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회복되는 것으로 전 인류적, 전 인격적인 것이며 생명의 본원, 생명의 원리로 다시 살려서 깨끗하게 완성해 놓으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성적인 영이다.
  그러므로 인간 이성의 모든 활동에 있어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그 자체는 곧 회개의 대상이며 천국을 소유하지 못하는 그 원인이다. 세상의 교육철학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가운데 제아무리 지식과 교양, 품성을 가르친다고 한들 참된 인간상을 길러내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이 이성적인 영적 존재로 창조된 데에는 그 깊은 목적이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며 보여주기 위함이다.

  인간이 이성적 본질의 영적 존재로 창조된 것은 하나님의 원형적인 형상을 그대로 빼어 닮은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속성(Attributes of God)을 그대로 드러내며 보여주기 위함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자기를 중심으로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살게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 제일주의로 그 인격적 행동이 나타나 하나님의 영광과 그 속성을 드러내며 보여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타 피조물들과는 판이하고 다르게 이성적 본질의 영적 존재로 창조하신 것이다. 물론 이성과 인격적인 성향이 없는 전 우주적인 피조물들을 통하여서도 하나님의 영광과 속성이 잘 나타난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계의 모든 피조물들은 그 자체의 경각심이나 조심성 그리고 자제하는 자율성을 지니지 못한다. 역시 마찬가지로 자율적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속성을 드러내며 보여주지 못한다. 또한 어떤 것을 선택할 자유의지도 갖지 못한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않다. 사람은 모든 피조물 위에 가장 높은 위치로 창조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하였다. 인간의 이러한 이성적 본질의 영적 존재성은 첫째로,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생활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여야 하며. 둘째로, 그와 같이 내 이웃을 내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마22:37-40). 이것은 이성적 본질의 영적 존재인 인간이 하여야만 하는 것으로 그 의미는 광의적이며 폭 넓은 책임이 있음을 말한다.
  먼저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며, 다음은 내 이웃의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많은 사람들과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자연 만물을 사랑하고 보호함으로 역시 하나님의 영광과 그 속성을 드러내며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셋째로, 내가 죽기까지 희생할 때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선택하여 주시고 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죽기까지 희생함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그 견인불발(堅忍不拔)의 은혜에 우리도 또한 그 견인불발의 투지로 하나님께 보여드려야 하는 것이다.
  세속의 철학을 주도하는 이성은 도무지 희생할 줄 모르는 자기 영광과 자기의 속성을 자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철학은 내가 희생함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며 내 이웃을 기쁘게 하고, 삼라만상의 자연 환경까지도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며, 영적 부흥, 심령 대 부흥33)이 된 자이다.

둘째로, 하나님의 보편적 속성을 전달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보편적 속성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피조물 인간과 공통되는 속성으로서 공유적 속성(Communicable Attributes)이라고도 한다.
  여기에는 1)영성(Spirituality). 2)지성(지식, 지혜, 진실성). 3)도덕성(선(善)-사랑, 은혜, 자비, 오래 참으심, 거룩등. 의(義)-보수적, 응보적 의). 4)주권성(주권적 의지, 주권적 능력) 등이 있다.
  이와 같은 보편적 속성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 속에 이미 전달되어진 속성들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속성들이 우리로 하여금 드러내며 보여지게 하기 위해서 이성적인 면으로 창조된 것이다. 아울러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이와 같은 하나님의 보편적 속성들이 진정으로 드러나야 한다. 이것 역시 창조 약정의 넓은 책임인 것이다.

(3)하나님의 절대적 속성을 우러러 앙모하며 경배하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절대적 속성은 인간이 갖지 못하는 하나님만의 절대적 속성(Incom- municable Attributes)들이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 속에 전달되지 아니한 하나님만의 속성들이다. 여기에는 1)독립성(자존성). 2)불변성. 3)무한성(완전성, 영원성, 무변성). 4)통일성(단수성, 단순성) 등이 있다.
  이와 같은 하나님만의 절대적 속성들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모든 피조물 위에 빼어난 인간으로부터 그 자율성에 의하여 우러나는 영광과 찬양, 곧 예배를 받으시기 위함이다.

 

  2.타락된 인간관

(1)죄의 기원

  죄의 기원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찾아보면, 하나님과 첫 아담(모든 사람들 개념) 사이에 맺어졌던 독특한 관계인 창조의 계약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 창조의 계약은 하나님만의 절대주권적인 창조행위가 하나님 자신의 형상과 모양으로 인간을 창조함으로써,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맺어지는 최초의 약정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약정의 구체적인 면은 창조계약의 특수한 면으로서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금지, 또는 시험에서 제기된 인간의 특수책임과 연관되어지는 것으로, 여기에는 하나님 절대주권의 삶과 죽음이 내재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에게 부과된 창조계약의 특수한 면이요, 그 명령에 대한 인간의 특수한 책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7), 라고 피로 맺은 그 대원칙을 세우셨다.
  이 대원칙은 창조주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을 그 피조물 인간이 감히 넘볼 수 없음이며, 오로지 찬양과 영광, 경배(예배)의 대상뿐임을 말한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하나님의 허용작정(permissive decree)도 동시에 작동된다. 즉 하나님 절대 주권의 금지시험을 파기하는 인간의 교만이 일어 날 때는 사단(tempter)의 유혹(tempt)이 어김없이 찾아오는 것이다. 이 금단의 법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전체 삶과 연관이 깊은 것으로, 하나님이 인간을 시험하는 데 그 초점이 맞추어진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전인격적인 모든 행위가 특수한 책임을 갖고서 하나님의 창조계약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비이성적인 면과 이성적인 면을 갖는 영적 존재로서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을 자율적으로 인정하여 찬양하고 경배하여야 하며, 또 인간 속에 전달된 하나님의 공유적 속성을 인간의 전반적인 삶 속에서 드러내며 보여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악과에 대한 금지시험은 창조계약의 특수한 면으로서, 구체적으로 인간에게 요구된 복종이 철저하게 근본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하는 이유, 복종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유 의지의 자유로운 존재 인간은 주권적인 창조자의 말씀 밑에서 자율적으로 겸손하여 복종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이다.
  선악과에 대한 금지시험은 창조자에 대한 인간의 복종을 면밀히 검토하는 데 초점이 있다. 이제 이 금지시험의 목적은 복종 자체를 위해 복종을 기꺼이 선택하는 인간의 의지로 좁혀진다. 인간 행동의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인 것이다. 인간의 실존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데 달려 있는 것이며, 이것은 하나님이 명한 모든 것을 즐거이 믿는 가운데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러한 명백한 창조계약의 특수한 면(선악과 금지시험, 창2:16, 17)이 인간의 교만(superbia, 

)으로 인하여 사단의 유혹을 받고, 영적 세계의 타락을 가져와 인류의 조상 아담이 타락함으로 전 인류가 타락하는 죄의 기원(원죄, Original Sin)이 된 것이다(창3:1-7).

(2)죄의 결과

  죄의 결과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한 인간은 창조시 이성적인 면의 영적 본성(

)을 또한 상실함으로 참 인간으로서의 영적 활동이 불능하게 되었다. 인간 정신세계의 본질인 이성적인 영적 본성의 상실은 첫째, 지성적인 면에서 불 신앙과 교만(Superbia)을 불러왔다. 둘째, 의지적인 면에서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욕망(To be as God)을 불러왔다. 셋째, 감정적인 면에서 방종(Concu- piscence)에 빠졌다.
  이로 인하여 인간은 전적 부패, 전적 무능력하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못하게 되고, 부패 의식(수치감)과 죄책 의식(양심)에 사로잡히게 되고, 사망의 법에 종속하게 되었다(엡2:3).
  이와 같은 죄의 결과는 전적으로 첫 사람 아담의 타락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지, 하나님은 죄의 창시자가 아니다. [아담(

)은 성경에서 일반적인 인간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는 히브리 용어이기 때문에“모든 사람”즉 인간의 개념이다.]
  다시 말하여 타락 이전에도 인간들은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posse peccare)속에서 살았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당신의 비공유적 속성 외에는 모든 것을 거의 다 인간에게 전달(communicable)했다는 그 확실한 증거가 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 자율적인 자유 의지 안에서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까지도 가졌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금지시험을 어기지 않는 한 인간은 영원한 축복 속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인류 역사의 고고학적인 발견이 불확실해서 그렇지, 성경적으로 볼 때는 타락이전의 인간의 삶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시간의 개념을 내포한다. 영적 본성의 이성을 갖고 참된 인식 속에서 참된 사람으로 삶을 누렸던 첫 사람 아담이 그 자유 의지 안에서 창조 질서의 특별한 책임을 파기해버린 그 결과는 타락이후 전 인류에게 그대로 전가되고, 자연계까지도 저주를 받는 상상할 수 없는 창조주 하나님의 진노아래 놓이게 된 것이다.
  타락한 인간의 유전, 전통 그 관습은 그 후손 대대로(generation after gener- ation) 이성적인 영적 본성의 불구자가 되어 태어나고 죽고를 반복하면서, 여전히 사탄의 그 유혹(tempt) 속에서 헤어 나오지를 못하고 있는 것이다. 타락한 인간의 정신은 프시케(사이키)적인 이성이 되어, 욕망과 그 욕구적인 면만을 강조하는 육적인 주체를 중시하여 물질적 수준에 사는 도무지 희생할 줄 모르는 죽음, 고통, 허무의 존재가 되어 버렸다.
  세속적인 철학이 그러하듯이 직관적 인식, 감각적 인식만을 부르짖으며 철학은 필로 소피아(philosophia < Gk. 

 wisdom)라고 하여 자연발생적 사랑의 지혜라고 하며, 로맨틱한 사랑 중에 사랑(the romance of all rom- ance)이라고 울부짖는다.
  그리고 인간 심리학이나 정신 분석학은 타락이후 형성된 인간의 그 이성(사이키[psyche < 

])만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러므로 프로이드는 특히 타락한 인간의 성적 욕망을 자신의 심리학에 끌어 드렸다.
  그런가 하면 교육은 가르치는 것을 강조한 나머지 선생을 하나님처럼 만들어 놓고, 사이키적인 철학의 발상을 기초 개념으로 하여 인간 주체의 진화론적 교육과 주입식 교육에 열을 올리면서, 일류대학 일류학생만을 고집 하는 가운데 어린 학생들은 더 큰 고통 속에 놓이게 되었다. 요즈음 특히 체벌이 문제가 되어 때리지 말아야 되느니 몇 대까지는 때려야 되느니 등등 웃지 못할 그 희한한 발상까지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도무지 희생할 줄 모르는 타락한 인간의 그 유전인 것이다.
  인간의 참 이성, 그 인간 정신세계의 근본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에게 이성적인 면을 불어넣어 창조하시고, 그것이 또한 인간의 영적 본성이 되게 하셨다.
  크리스천이 이성을 도외시하는 것도, 무신론자가 하나님을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것도, 모두 다 타락한 그 유전, 전통, 관습에 의한 결과이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의 복음의 제일성은“회개하라”(

)이다. 인식의 개조, 타락한 이성의 철저한 개조인 것이다. 영적 부흥은 그리스도에 의해 하나님의 형상에 의한 이성을 되찾는 것이다., 아 멘.

(3)타락된 인간의 딜레마(Dilemma)

  딜레마는 헬라어서 왔다(dil?mma < Gk. di-twise, double + l?mma, assumption) . 그 뜻은 양도(兩刀) 논법인데, 이것은 어느 논법을 취해도 불리한 것을 말한다. 즉 궁지에 몰린 것 또는 진퇴 양난에 빠진 것, 그 곤란한 상태를 말한다.
  마찬가지로 타락한 인간의 이성은 본래의 철학 개념인 하나님의 사상(성경)을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까닭에 딜레마에 빠져있다.
  이와 같은 혼미한 철학 사상들이 전세계적으로 퍼져있고, 전 세계인들의 모든 영역에 걸쳐 전반적인 삶 속에 침투해 있다. 서양 철학, 동양 철학, 인도 철학의 세계 3대 철학은 신학적으로 볼 때 이미 양도 논법의 진퇴 양난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양 철학은 서양 철학에 밀려 나 있고, 문명이 발달할수록 서양 철학 역시도 그 논리에 근거를 놓고 서로 물고 물리는 곤란한 상황을 거듭하고 있다. 특히 서양 철학은 19 - 20세기에 들어서서 급속도로 변화되고 있는 추세이다.
  21세기 밀레니엄 새 천년을 맞이하는 세계 지식인의 사회는 미리부터 그 사상의 변화 추이를 놓고 갑론을박(甲論乙駁) 중이다.
  다윈의 진화론은 이미 그 근거를 잃었고, 인류의 종교 의식은 청동기가 아닌 신석기부터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도무지 인식할 줄 모르는 인간의 비이성적인 면을 깨끗이 인식하라는 표징(sign)들은 그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다. 해마다 찾아오는 자연 재해가 그러하고, 검출도 처방도 할 수 없는 슈퍼 박테리아의 출현이 그러하다. 더군다나 이 죽음의 세균은 인간의 병의학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병원에서부터 발병하고 있다.
  인간들이 자칭 첨단을 지향한다는 소프트웨어 기술은 하찮은 곤충 한 마리의 초정밀도 앞에서 맥을 못 추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무시하고 사이키적인 발상을 계속하는 한, 인간의 정신세계는 영원한 정신병자들의 괴로운 행진일 뿐이다. 어떻게 타락한 성적욕망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한 인간의 심리를 파악할 수 있으며, 치료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제 우리는“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고 급박하게(at hand) 재촉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발견하고 통찰할 줄 알아야 한다. 기독교는 무신론의 사이키적인 인식의 세계에서 말하는 대로 일반적인 종교가 아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 정신세계의 그 근본으로 본래의 철학 사상이요, 본래의 인간 이성이다. 기독교 철학이 이 세상을 정복하고 그 바탕 위에 기초한 기독교 교육이 이 세상을 인도할 때, 진정한 참 인간상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3.구속된 인간관

  구속된 인간관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자신의 모양과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함으로서 하나님은 자신과 인간사이에 창조 계약이라는 독특한 관계를 세우셨다는 것으로부터 출발을 하여야 한다.
  이 창조 계약은 하나님 절대주권적 행위로서 하나님은 이 주권적인 창조 행위에 덧붙여 인간의 역할이 결정되게 하였다. 즉 하나님과 인간의 창조 계약은 일반적인 면과 구체적인 면에서 검토되는 데, 창조 계약의 일반적인 면34)은 창조주에 대한 인간의 넓은 책임과 연관되어지고, 창조 계약의 구체적인 면35)은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금지시험에서 제기된 인간의 특수 책임과 연관되어진다.
  특히 창조 계약의 구체적인 면, 금지시험은“선악과를 먹지 않는 것”(창2:16, 17)으로서 이는 최초의 죄의 본질적 성질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불신앙과 교만(Superbia)이며, 인간 스스로 선악의 결정자가 되어 신(神)이 되고자 하는 자율적 의지의 인간의 욕망이다. 하나님은 바로 이것을 금지하고 시험하는 데 그 초점을 두고, 선악과를 먹지 말 것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법제화 시켰다. 이 명령 또는 법은 인간에게 있어서 철저히 복종해야 할 보다 근본적이며 결정적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더 구체적(형식적 성질의 말씀“선악과”제시)으로 특수한 책임이다. 이 특수한 책임이 근본적이며 결정적이다 라는 것은 삶과 죽음의 연장선상에 서 있는 피로 맺은 약정(“정녕 죽으리라”,창2:17)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적 신앙에서 피의 강조는 창조 계약에 있는 죽음까지의 강제적인 것(mandatory)임을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 처음 계약을 어기면 피로 대신하는 것 외에는 그 죽음의 저주로부터 구원의 방법이 없게 된다. 즉 이 처음 계약을 파기한 피조물 인간에게서는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구원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공의를 만족시킬만 한 어떤 것도 타락된 인간관 속에는 없기 때문이다. 오직 이것을 만족케 할만한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 스스로가 창조의 궁극적인 저주를 스스로 지게 됨으로써 구속된 인간관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창조의 계약 밑에서 인간의 실패와 함께 구속된 인간관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구속의 계약(Covenant of Redemption)은 동시적으로 작동되었다. 이는 타락이전 창조 계약 당시 저주의 말씀과 동시에 이미 결정되어진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속의 계약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과의 관계는 인간의 죄로 인해 끝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공의대로 라면 인간에게는 실제로 심판이 내리어져 피흘림과 죽음밖에는 없다. 그러나 죽기까지 희생하기로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은혜로운 특성의 신비는 심판의 한 가운데에서 구속의 희망으로 나타나 하나님은 이제 자기 백성을 구속하기 위하여 자신을 스스로 묶은 것이다.
  이 구속의 계약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대표자이신 성부와 하나님의 백성의 대표자이신 성자가 맺은 계약으로서, 성자는 성부가 주신 백성에 대한 의무를 맡고, 성부는 성자의 속죄 사역을 위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성자에게 약속한 것이다. 이는 영원한 계약이요, 은혜의 언약으로“구속의 계약”의 기초이다.
  그러므로 구속된 인간관에 있어서 성자 하나님은 그 성취자요, 완성자이시다. 성자 하나님의 명칭은 예수36)(Jesus), 그리스도37)(Christ), 인자38)(the Son of Man), 하나님의 아들39)(the Son of God), 주40)(Lord) 등으로 하나님께서 계시해주셨으며, 구속된 인간관을 완성하기 위한 신성41)(Divinity)과 인성42)(Humanity)의 이성(二性)의 필요성43)을 가지셨다. 특히 인성의 신분44)(States)을 가지심으로 자기를 비워 종의 신분보다 더 낮게 비하(Humiliation)하셨다.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도저히 만족시킬 수 없는 인간, 하나님의 형상으로 다시 회복될 수 없는 저주를 받은 인간, 피를 흘리며 죽을 수밖에 없는 그 비참한 인간관의 생생한 현장을 대신하여, 흠이 없고 죄가 없으신 성자 하나님께서 그토록 비참하게 낮아지셔서 생명의 본원으로 다시 회복시키시는 그 놀라운 은혜의 언약을 완성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인간 마리아의 태(胎)중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었다(Inca- rnation)는 사실을 우리는 의심없이 믿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중보적 과업에서 오는 사단의 공격, 백성의 증오와 불신, 원수들의 박해, 그리고 육체적 패배의 수난(Suffering)과 영혼의 고민과 고초, 윤리적 완전성과 의(義), 진(眞), 성(聖)에 대한 열정 때문에 오는 더 큰 고난, 시험 등이 바로 타락한 우리의 그 생생한 마음과 몸에 현장성이라는 것을 더욱 믿지 않을 수 없으며, 당시 사실적인 사법적 선고에 의하여 가장 극악 무도한 죄수에게 내려지는 십자가의 처참한 피흘림과 육체적인 죽음(Crucifixion)은 우리 자신의 비참한 그 저주를 대신 담당하신 그 놀라운 구속의 은혜로 믿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특히 장사(Burial)되어 음부 강하(陰部降下)로 까지 내려가신 것은 타락한 인간이 받아야할 죄의 궁극적인 한 부분을 대신 담당하심으로 우리의 타락한 죄의 본질은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burial)된 것이다. 그것은 옛 사람을 떠남과 버림, 그리고 그 파멸을 의미한다.
  이것은 구속받은 인간관의 시작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하나님의 계약의 목적이 달성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구속된 인간관은 새 인간상의 대표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비적 연합(Mystical Union)이다. 이 신비적 연합의 모든 축복들은 구속적 계약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로부터 나온다.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서 기초한 성령 하나님의 초자연적, 신비적 사역이다. 이 신비적 연합의 특성은 유기적이며, 생명적이요, 성령으로 중재된 상호 행동적, 영적 인격의 특성을 갖는다(롬8:2). 그러므로 구속된 인간관은 중생과 구원의 목적인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케 한다. 즉 죄인 스스로의 아무런 공로 없이 오직 그리스도의 의(

)를 전가 받음이요, 그리스도의 변화시키는 생명력으로 영육간에 변화가 오는 것이다.
  이 변화는 궁극적이요, 전적으로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안에서이다. 이 구원에는 차서(Ordo Salutis[Way of Salvation])가 있다. 구원의 차서란 구속된 인간관을 위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며, 전적 은혜인데, 성령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적용해주시는 그 주관적이며, 논리적인 과정이다. 개혁 교회의 대표자 칼빈(John Calvin)은 그의 책 기독교 강요 3권에서 이에 대한 조직적 설명을 가했다. 그 일반적인 순서는 소명→중생→회심(회개와 신앙)→칭의(양자)→성화(견인)→영화이다.
  그러므로 구속의 계약(Covenant of Redemption)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속된 인간관은 여전히 그리고 영원히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세워진 최초의 약정, 그 창조의 계약아래 놓여져 있다. 따라서 창조 질서에 의한 넓은 책임(안식일, 결혼, 노동)과 특수 책임인 본질적 성질의 금지시험이 여전히 작동되고 있다.
  특히, 본질적 성질의 금지시험이란, 인간의 인식 속에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불신앙과 교만이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그 자율적 의지를 잘못 오용하여 스스로 인식의 주체를 만들고 진리를 판단하며 선악의 기준을 세우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지금도 구속받지 못한 인간의 인식 속에서는(세속 철학) 인간이 넘볼 수 없는 불가항력의 요소들인 죽음, 고통, 허무를 스스로의 판단 속에서 해결하겠다는 미련함을 보이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이러한 사실의 원인 제공자는 타락한 인간 자신이며, 그것에 따른 하나님의 공의로 인간에게 찾아온 죽음이기 때문에 그 해결 자는 역시 하나님 한 분 뿐으로, 이미 그리스도의 부활(Resurrection)을 통하여 구속된 인간관의 실상이 보여졌다.
  이 부활은 구속된 인간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과 교만,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고 진리의 체계를 규정짓는 그 오만하며 비참한 타락된 인식의 세계가 그리스도의 피의 산 제사로 완전히 죽고, 하나님의 형상의 육체와 영혼이 재 연합하여 회복됨으로 영생의 조건이 만족되었다는 성부 하나님의 선포이기 때문이다. 타락한 진리의 인식 체계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완전한 승리인 것이다.
  참 인간의 이성적 영혼의 본성이 바로 이 부활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구속된 인간관은 이 부활을 준비하는 실제적인 과정인 것이다. 구원의 차서에 의한 그 주관적, 논리적, 조직적인 설명은 구속된 인간관을 형성시켜 미래적 부활을 맞이하게 하기 위한 신비한 본래의 이성(理性)이요, 철학(哲學)이다.

교육이란 인간이 지식, 교양, 품성 등을 선하게 지니도록 이끄는 것으로서, 특히 인간관(人間觀)을 매개로 해서 성립하는 작용이다. 그 기본 원리는 철학의 터 위에 기초한다.
  특히 기독교 교육철학은 이와 같은 인간관의 구명(究明)을 기독교 철학의 기본 원리 위에서 연구하는 학문이다.
  여기에는 창조된 인간관, 타락된 인간관, 구속된 인간관 등이 있다.

1.창조된 인간관

창조된 인간관은 비이성적(非理性的)인 면과 이성적(理性的)인 면, 두 가지가 있다.

(1)비이성적인 면의 창조 의의와 그 목적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에게 비이성적(非理性的)인 면이 있다라는 것을 바르게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크리스천에게 있어서나 무신론의 일반인에게 있어서나 그 단편적인 지식의 오해로 말미암아 서로의 편파적인 주장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무신론의 일반론적인 인식은 인간의 비이성적인 면을 어쩔 수 없이 인정은 하면서도 그 인식의 세계 안에서는 철저히 무시하고 제외시켜 버린다. 다시 말하면 천재지변과 같은 불가항력을 인정은 하면서도 인간이 인식할 수 없다하여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그 성향이다. 특히 철학적으로는 불가지론(不可知論)29)이 바로 그와 같은 성향이다. 이로부터 또한 발생되는 것이 진화론이고, 이 진화론은 결국 범신론에 인도되고, 유물주의로 나아가는 길잡이가 된 것이다. 다음은 초연신론(deism)30) 역시 자연법칙에 대해서 하나님을 방관자로 몰아 내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인간 이성의 직관적 인식 그 자체의 양상을 놓고 기독교 철학에 밝은 사상가31)들은 지적하기를,“인간들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대한 폭넓은 책임을 감히 떠나고자 하는 욕망을 표시한다”라고 정확하게 지적하였다.
  또 그와는 반대로, 크리스천들은 창조된 인간관의 이성적인 면을 무시하고 비이성적인 면을 너무 추종하는 나머지 하나님을 무속화(巫俗化)시켜 버리고, 기복화(起伏化)시켜 버렸다. 이것 역시 극히 잘못된 신앙 관으로, 특히 우리 한국의 기독교 문제이다. 이런 점에 있어서 기독교 교육철학의 그 중요성이 새삼 증가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상(성경) 안에는 분명한 철학과 이성이 존재함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두 가지 측면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관에는 비이성적인 면이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정하는 사례들을 살펴보았다. 그러므로 인간의 비이성적인 창조의 의의는 성경에 밝혀진바, 하나님의 계시(자연계시와 특별계시)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으며 어디까지나 부인할 수 없는 피조물의 본질로서 창조자에 의존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다음으로 인간의 비이성적인 창조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창조자 하나님의 영광을 전적으로 드러내게 한다는 것에서 그 본질을 찾을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는 없으나 그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비이성적인 면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시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실 예는 성경과 믿는 자들 속에서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즉 인간의 비이성적인 면의 창조 목적은 최고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보편적 속성을 나타내 보여주기 위함이다.

(2)이성적인 면의 창조 의의와 그 목적

  인간이 이성적(理性的)이다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이 말의 뜻은 타락한 인간의 이성(

)32)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타락이전 본래의 하나님의 형상인“이성적인 영”(

)을 말한다. 이는 인간이 이성적인 영적 본성을 소유한 것(

, 고전15:46)을 말함으로, 인간의 영적 본성의 성향은 - 생각하고(知), 느끼고(感), 의지 결단하는(情) 능력 - 의“이성적인 영”(고전2:11-12)이다.
  이것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 인간에게만 있는 것으로 참된 사람이 되게 하는 까닭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본질적 부분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진정한 이성적인 부분으로서 신적이고 영원한 일을 깨닫고 붙잡는 능력인데, 하나님의 성령이 그 영향력을 행사하시는 부분이다.
  그러므로 본래 영(靈)이라고 하는 것은 무속적 의미로, 또는 무작정 초월적 의미로 간주되어, 이성적인 감각이 전혀 없거나, 무딘 것이거나, 또는 조잡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인 영적 본성을 극히 왜곡시키고, 결핍되게 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다시 분명히 말하건대 영은 알고, 바라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능력을 소유한 이성적 본질 그 자체이다. 이“이성적인 영”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능력이며,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기쁨으로 얻는 능력이다. 즉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그 능력이다.
  그러나, 이 능력이 슬프게도 타락이후 죽어버렸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찾아낸 칼빈의 전적타락, 전적 무능력이다.
  그리고, 이것은 창조자 하나님의 구속의 언약에 의한 성취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회복되는 것으로 전 인류적, 전 인격적인 것이며 생명의 본원, 생명의 원리로 다시 살려서 깨끗하게 완성해 놓으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성적인 영이다.
  그러므로 인간 이성의 모든 활동에 있어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그 자체는 곧 회개의 대상이며 천국을 소유하지 못하는 그 원인이다. 세상의 교육철학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가운데 제아무리 지식과 교양, 품성을 가르친다고 한들 참된 인간상을 길러내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이 이성적인 영적 존재로 창조된 데에는 그 깊은 목적이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며 보여주기 위함이다.

  인간이 이성적 본질의 영적 존재로 창조된 것은 하나님의 원형적인 형상을 그대로 빼어 닮은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속성(Attributes of God)을 그대로 드러내며 보여주기 위함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자기를 중심으로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살게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 제일주의로 그 인격적 행동이 나타나 하나님의 영광과 그 속성을 드러내며 보여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타 피조물들과는 판이하고 다르게 이성적 본질의 영적 존재로 창조하신 것이다. 물론 이성과 인격적인 성향이 없는 전 우주적인 피조물들을 통하여서도 하나님의 영광과 속성이 잘 나타난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계의 모든 피조물들은 그 자체의 경각심이나 조심성 그리고 자제하는 자율성을 지니지 못한다. 역시 마찬가지로 자율적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속성을 드러내며 보여주지 못한다. 또한 어떤 것을 선택할 자유의지도 갖지 못한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않다. 사람은 모든 피조물 위에 가장 높은 위치로 창조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하였다. 인간의 이러한 이성적 본질의 영적 존재성은 첫째로,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생활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여야 하며. 둘째로, 그와 같이 내 이웃을 내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마22:37-40). 이것은 이성적 본질의 영적 존재인 인간이 하여야만 하는 것으로 그 의미는 광의적이며 폭 넓은 책임이 있음을 말한다.
  먼저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며, 다음은 내 이웃의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많은 사람들과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자연 만물을 사랑하고 보호함으로 역시 하나님의 영광과 그 속성을 드러내며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셋째로, 내가 죽기까지 희생할 때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선택하여 주시고 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죽기까지 희생함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그 견인불발(堅忍不拔)의 은혜에 우리도 또한 그 견인불발의 투지로 하나님께 보여드려야 하는 것이다.
  세속의 철학을 주도하는 이성은 도무지 희생할 줄 모르는 자기 영광과 자기의 속성을 자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철학은 내가 희생함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며 내 이웃을 기쁘게 하고, 삼라만상의 자연 환경까지도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며, 영적 부흥, 심령 대 부흥33)이 된 자이다.

둘째로, 하나님의 보편적 속성을 전달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보편적 속성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피조물 인간과 공통되는 속성으로서 공유적 속성(Communicable Attributes)이라고도 한다.
  여기에는 1)영성(Spirituality). 2)지성(지식, 지혜, 진실성). 3)도덕성(선(善)-사랑, 은혜, 자비, 오래 참으심, 거룩등. 의(義)-보수적, 응보적 의). 4)주권성(주권적 의지, 주권적 능력) 등이 있다.
  이와 같은 보편적 속성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 속에 이미 전달되어진 속성들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속성들이 우리로 하여금 드러내며 보여지게 하기 위해서 이성적인 면으로 창조된 것이다. 아울러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이와 같은 하나님의 보편적 속성들이 진정으로 드러나야 한다. 이것 역시 창조 약정의 넓은 책임인 것이다.

(3)하나님의 절대적 속성을 우러러 앙모하며 경배하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절대적 속성은 인간이 갖지 못하는 하나님만의 절대적 속성(Incom- municable Attributes)들이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 속에 전달되지 아니한 하나님만의 속성들이다. 여기에는 1)독립성(자존성). 2)불변성. 3)무한성(완전성, 영원성, 무변성). 4)통일성(단수성, 단순성) 등이 있다.
  이와 같은 하나님만의 절대적 속성들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모든 피조물 위에 빼어난 인간으로부터 그 자율성에 의하여 우러나는 영광과 찬양, 곧 예배를 받으시기 위함이다.

 

  2.타락된 인간관

(1)죄의 기원

  죄의 기원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찾아보면, 하나님과 첫 아담(모든 사람들 개념) 사이에 맺어졌던 독특한 관계인 창조의 계약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 창조의 계약은 하나님만의 절대주권적인 창조행위가 하나님 자신의 형상과 모양으로 인간을 창조함으로써,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맺어지는 최초의 약정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약정의 구체적인 면은 창조계약의 특수한 면으로서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금지, 또는 시험에서 제기된 인간의 특수책임과 연관되어지는 것으로, 여기에는 하나님 절대주권의 삶과 죽음이 내재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에게 부과된 창조계약의 특수한 면이요, 그 명령에 대한 인간의 특수한 책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7), 라고 피로 맺은 그 대원칙을 세우셨다.
  이 대원칙은 창조주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을 그 피조물 인간이 감히 넘볼 수 없음이며, 오로지 찬양과 영광, 경배(예배)의 대상뿐임을 말한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하나님의 허용작정(permissive decree)도 동시에 작동된다. 즉 하나님 절대 주권의 금지시험을 파기하는 인간의 교만이 일어 날 때는 사단(tempter)의 유혹(tempt)이 어김없이 찾아오는 것이다. 이 금단의 법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전체 삶과 연관이 깊은 것으로, 하나님이 인간을 시험하는 데 그 초점이 맞추어진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전인격적인 모든 행위가 특수한 책임을 갖고서 하나님의 창조계약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비이성적인 면과 이성적인 면을 갖는 영적 존재로서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을 자율적으로 인정하여 찬양하고 경배하여야 하며, 또 인간 속에 전달된 하나님의 공유적 속성을 인간의 전반적인 삶 속에서 드러내며 보여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악과에 대한 금지시험은 창조계약의 특수한 면으로서, 구체적으로 인간에게 요구된 복종이 철저하게 근본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하는 이유, 복종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유 의지의 자유로운 존재 인간은 주권적인 창조자의 말씀 밑에서 자율적으로 겸손하여 복종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이다.
  선악과에 대한 금지시험은 창조자에 대한 인간의 복종을 면밀히 검토하는 데 초점이 있다. 이제 이 금지시험의 목적은 복종 자체를 위해 복종을 기꺼이 선택하는 인간의 의지로 좁혀진다. 인간 행동의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인 것이다. 인간의 실존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데 달려 있는 것이며, 이것은 하나님이 명한 모든 것을 즐거이 믿는 가운데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러한 명백한 창조계약의 특수한 면(선악과 금지시험, 창2:16, 17)이 인간의 교만(superbia, 

)으로 인하여 사단의 유혹을 받고, 영적 세계의 타락을 가져와 인류의 조상 아담이 타락함으로 전 인류가 타락하는 죄의 기원(원죄, Original Sin)이 된 것이다(창3:1-7).

(2)죄의 결과

  죄의 결과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한 인간은 창조시 이성적인 면의 영적 본성(

)을 또한 상실함으로 참 인간으로서의 영적 활동이 불능하게 되었다. 인간 정신세계의 본질인 이성적인 영적 본성의 상실은 첫째, 지성적인 면에서 불 신앙과 교만(Superbia)을 불러왔다. 둘째, 의지적인 면에서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욕망(To be as God)을 불러왔다. 셋째, 감정적인 면에서 방종(Concu- piscence)에 빠졌다.
  이로 인하여 인간은 전적 부패, 전적 무능력하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못하게 되고, 부패 의식(수치감)과 죄책 의식(양심)에 사로잡히게 되고, 사망의 법에 종속하게 되었다(엡2:3).
  이와 같은 죄의 결과는 전적으로 첫 사람 아담의 타락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지, 하나님은 죄의 창시자가 아니다. [아담(

)은 성경에서 일반적인 인간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는 히브리 용어이기 때문에“모든 사람”즉 인간의 개념이다.]
  다시 말하여 타락 이전에도 인간들은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posse peccare)속에서 살았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당신의 비공유적 속성 외에는 모든 것을 거의 다 인간에게 전달(communicable)했다는 그 확실한 증거가 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 자율적인 자유 의지 안에서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까지도 가졌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금지시험을 어기지 않는 한 인간은 영원한 축복 속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인류 역사의 고고학적인 발견이 불확실해서 그렇지, 성경적으로 볼 때는 타락이전의 인간의 삶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시간의 개념을 내포한다. 영적 본성의 이성을 갖고 참된 인식 속에서 참된 사람으로 삶을 누렸던 첫 사람 아담이 그 자유 의지 안에서 창조 질서의 특별한 책임을 파기해버린 그 결과는 타락이후 전 인류에게 그대로 전가되고, 자연계까지도 저주를 받는 상상할 수 없는 창조주 하나님의 진노아래 놓이게 된 것이다.
  타락한 인간의 유전, 전통 그 관습은 그 후손 대대로(generation after gener- ation) 이성적인 영적 본성의 불구자가 되어 태어나고 죽고를 반복하면서, 여전히 사탄의 그 유혹(tempt) 속에서 헤어 나오지를 못하고 있는 것이다. 타락한 인간의 정신은 프시케(사이키)적인 이성이 되어, 욕망과 그 욕구적인 면만을 강조하는 육적인 주체를 중시하여 물질적 수준에 사는 도무지 희생할 줄 모르는 죽음, 고통, 허무의 존재가 되어 버렸다.
  세속적인 철학이 그러하듯이 직관적 인식, 감각적 인식만을 부르짖으며 철학은 필로 소피아(philosophia < Gk. 

 wisdom)라고 하여 자연발생적 사랑의 지혜라고 하며, 로맨틱한 사랑 중에 사랑(the romance of all rom- ance)이라고 울부짖는다.
  그리고 인간 심리학이나 정신 분석학은 타락이후 형성된 인간의 그 이성(사이키[psyche < 

])만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러므로 프로이드는 특히 타락한 인간의 성적 욕망을 자신의 심리학에 끌어 드렸다.
  그런가 하면 교육은 가르치는 것을 강조한 나머지 선생을 하나님처럼 만들어 놓고, 사이키적인 철학의 발상을 기초 개념으로 하여 인간 주체의 진화론적 교육과 주입식 교육에 열을 올리면서, 일류대학 일류학생만을 고집 하는 가운데 어린 학생들은 더 큰 고통 속에 놓이게 되었다. 요즈음 특히 체벌이 문제가 되어 때리지 말아야 되느니 몇 대까지는 때려야 되느니 등등 웃지 못할 그 희한한 발상까지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도무지 희생할 줄 모르는 타락한 인간의 그 유전인 것이다.
  인간의 참 이성, 그 인간 정신세계의 근본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에게 이성적인 면을 불어넣어 창조하시고, 그것이 또한 인간의 영적 본성이 되게 하셨다.
  크리스천이 이성을 도외시하는 것도, 무신론자가 하나님을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것도, 모두 다 타락한 그 유전, 전통, 관습에 의한 결과이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의 복음의 제일성은“회개하라”(

)이다. 인식의 개조, 타락한 이성의 철저한 개조인 것이다. 영적 부흥은 그리스도에 의해 하나님의 형상에 의한 이성을 되찾는 것이다., 아 멘.

(3)타락된 인간의 딜레마(Dilemma)

  딜레마는 헬라어서 왔다(dil?mma < Gk. di-twise, double + l?mma, assumption) . 그 뜻은 양도(兩刀) 논법인데, 이것은 어느 논법을 취해도 불리한 것을 말한다. 즉 궁지에 몰린 것 또는 진퇴 양난에 빠진 것, 그 곤란한 상태를 말한다.
  마찬가지로 타락한 인간의 이성은 본래의 철학 개념인 하나님의 사상(성경)을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까닭에 딜레마에 빠져있다.
  이와 같은 혼미한 철학 사상들이 전세계적으로 퍼져있고, 전 세계인들의 모든 영역에 걸쳐 전반적인 삶 속에 침투해 있다. 서양 철학, 동양 철학, 인도 철학의 세계 3대 철학은 신학적으로 볼 때 이미 양도 논법의 진퇴 양난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양 철학은 서양 철학에 밀려 나 있고, 문명이 발달할수록 서양 철학 역시도 그 논리에 근거를 놓고 서로 물고 물리는 곤란한 상황을 거듭하고 있다. 특히 서양 철학은 19 - 20세기에 들어서서 급속도로 변화되고 있는 추세이다.
  21세기 밀레니엄 새 천년을 맞이하는 세계 지식인의 사회는 미리부터 그 사상의 변화 추이를 놓고 갑론을박(甲論乙駁) 중이다.
  다윈의 진화론은 이미 그 근거를 잃었고, 인류의 종교 의식은 청동기가 아닌 신석기부터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도무지 인식할 줄 모르는 인간의 비이성적인 면을 깨끗이 인식하라는 표징(sign)들은 그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다. 해마다 찾아오는 자연 재해가 그러하고, 검출도 처방도 할 수 없는 슈퍼 박테리아의 출현이 그러하다. 더군다나 이 죽음의 세균은 인간의 병의학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병원에서부터 발병하고 있다.
  인간들이 자칭 첨단을 지향한다는 소프트웨어 기술은 하찮은 곤충 한 마리의 초정밀도 앞에서 맥을 못 추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무시하고 사이키적인 발상을 계속하는 한, 인간의 정신세계는 영원한 정신병자들의 괴로운 행진일 뿐이다. 어떻게 타락한 성적욕망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한 인간의 심리를 파악할 수 있으며, 치료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제 우리는“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고 급박하게(at hand) 재촉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발견하고 통찰할 줄 알아야 한다. 기독교는 무신론의 사이키적인 인식의 세계에서 말하는 대로 일반적인 종교가 아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 정신세계의 그 근본으로 본래의 철학 사상이요, 본래의 인간 이성이다. 기독교 철학이 이 세상을 정복하고 그 바탕 위에 기초한 기독교 교육이 이 세상을 인도할 때, 진정한 참 인간상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3.구속된 인간관

  구속된 인간관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자신의 모양과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함으로서 하나님은 자신과 인간사이에 창조 계약이라는 독특한 관계를 세우셨다는 것으로부터 출발을 하여야 한다.
  이 창조 계약은 하나님 절대주권적 행위로서 하나님은 이 주권적인 창조 행위에 덧붙여 인간의 역할이 결정되게 하였다. 즉 하나님과 인간의 창조 계약은 일반적인 면과 구체적인 면에서 검토되는 데, 창조 계약의 일반적인 면34)은 창조주에 대한 인간의 넓은 책임과 연관되어지고, 창조 계약의 구체적인 면35)은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금지시험에서 제기된 인간의 특수 책임과 연관되어진다.
  특히 창조 계약의 구체적인 면, 금지시험은“선악과를 먹지 않는 것”(창2:16, 17)으로서 이는 최초의 죄의 본질적 성질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불신앙과 교만(Superbia)이며, 인간 스스로 선악의 결정자가 되어 신(神)이 되고자 하는 자율적 의지의 인간의 욕망이다. 하나님은 바로 이것을 금지하고 시험하는 데 그 초점을 두고, 선악과를 먹지 말 것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법제화 시켰다. 이 명령 또는 법은 인간에게 있어서 철저히 복종해야 할 보다 근본적이며 결정적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더 구체적(형식적 성질의 말씀“선악과”제시)으로 특수한 책임이다. 이 특수한 책임이 근본적이며 결정적이다 라는 것은 삶과 죽음의 연장선상에 서 있는 피로 맺은 약정(“정녕 죽으리라”,창2:17)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적 신앙에서 피의 강조는 창조 계약에 있는 죽음까지의 강제적인 것(mandatory)임을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 처음 계약을 어기면 피로 대신하는 것 외에는 그 죽음의 저주로부터 구원의 방법이 없게 된다. 즉 이 처음 계약을 파기한 피조물 인간에게서는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구원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공의를 만족시킬만 한 어떤 것도 타락된 인간관 속에는 없기 때문이다. 오직 이것을 만족케 할만한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 스스로가 창조의 궁극적인 저주를 스스로 지게 됨으로써 구속된 인간관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창조의 계약 밑에서 인간의 실패와 함께 구속된 인간관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구속의 계약(Covenant of Redemption)은 동시적으로 작동되었다. 이는 타락이전 창조 계약 당시 저주의 말씀과 동시에 이미 결정되어진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속의 계약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과의 관계는 인간의 죄로 인해 끝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공의대로 라면 인간에게는 실제로 심판이 내리어져 피흘림과 죽음밖에는 없다. 그러나 죽기까지 희생하기로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은혜로운 특성의 신비는 심판의 한 가운데에서 구속의 희망으로 나타나 하나님은 이제 자기 백성을 구속하기 위하여 자신을 스스로 묶은 것이다.
  이 구속의 계약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대표자이신 성부와 하나님의 백성의 대표자이신 성자가 맺은 계약으로서, 성자는 성부가 주신 백성에 대한 의무를 맡고, 성부는 성자의 속죄 사역을 위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성자에게 약속한 것이다. 이는 영원한 계약이요, 은혜의 언약으로“구속의 계약”의 기초이다.
  그러므로 구속된 인간관에 있어서 성자 하나님은 그 성취자요, 완성자이시다. 성자 하나님의 명칭은 예수36)(Jesus), 그리스도37)(Christ), 인자38)(the Son of Man), 하나님의 아들39)(the Son of God), 주40)(Lord) 등으로 하나님께서 계시해주셨으며, 구속된 인간관을 완성하기 위한 신성41)(Divinity)과 인성42)(Humanity)의 이성(二性)의 필요성43)을 가지셨다. 특히 인성의 신분44)(States)을 가지심으로 자기를 비워 종의 신분보다 더 낮게 비하(Humiliation)하셨다.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도저히 만족시킬 수 없는 인간, 하나님의 형상으로 다시 회복될 수 없는 저주를 받은 인간, 피를 흘리며 죽을 수밖에 없는 그 비참한 인간관의 생생한 현장을 대신하여, 흠이 없고 죄가 없으신 성자 하나님께서 그토록 비참하게 낮아지셔서 생명의 본원으로 다시 회복시키시는 그 놀라운 은혜의 언약을 완성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인간 마리아의 태(胎)중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었다(Inca- rnation)는 사실을 우리는 의심없이 믿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중보적 과업에서 오는 사단의 공격, 백성의 증오와 불신, 원수들의 박해, 그리고 육체적 패배의 수난(Suffering)과 영혼의 고민과 고초, 윤리적 완전성과 의(義), 진(眞), 성(聖)에 대한 열정 때문에 오는 더 큰 고난, 시험 등이 바로 타락한 우리의 그 생생한 마음과 몸에 현장성이라는 것을 더욱 믿지 않을 수 없으며, 당시 사실적인 사법적 선고에 의하여 가장 극악 무도한 죄수에게 내려지는 십자가의 처참한 피흘림과 육체적인 죽음(Crucifixion)은 우리 자신의 비참한 그 저주를 대신 담당하신 그 놀라운 구속의 은혜로 믿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특히 장사(Burial)되어 음부 강하(陰部降下)로 까지 내려가신 것은 타락한 인간이 받아야할 죄의 궁극적인 한 부분을 대신 담당하심으로 우리의 타락한 죄의 본질은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burial)된 것이다. 그것은 옛 사람을 떠남과 버림, 그리고 그 파멸을 의미한다.
  이것은 구속받은 인간관의 시작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하나님의 계약의 목적이 달성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구속된 인간관은 새 인간상의 대표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비적 연합(Mystical Union)이다. 이 신비적 연합의 모든 축복들은 구속적 계약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로부터 나온다.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서 기초한 성령 하나님의 초자연적, 신비적 사역이다. 이 신비적 연합의 특성은 유기적이며, 생명적이요, 성령으로 중재된 상호 행동적, 영적 인격의 특성을 갖는다(롬8:2). 그러므로 구속된 인간관은 중생과 구원의 목적인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케 한다. 즉 죄인 스스로의 아무런 공로 없이 오직 그리스도의 의(

)를 전가 받음이요, 그리스도의 변화시키는 생명력으로 영육간에 변화가 오는 것이다.
  이 변화는 궁극적이요, 전적으로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안에서이다. 이 구원에는 차서(Ordo Salutis[Way of Salvation])가 있다. 구원의 차서란 구속된 인간관을 위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며, 전적 은혜인데, 성령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적용해주시는 그 주관적이며, 논리적인 과정이다. 개혁 교회의 대표자 칼빈(John Calvin)은 그의 책 기독교 강요 3권에서 이에 대한 조직적 설명을 가했다. 그 일반적인 순서는 소명→중생→회심(회개와 신앙)→칭의(양자)→성화(견인)→영화이다.
  그러므로 구속의 계약(Covenant of Redemption)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속된 인간관은 여전히 그리고 영원히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세워진 최초의 약정, 그 창조의 계약아래 놓여져 있다. 따라서 창조 질서에 의한 넓은 책임(안식일, 결혼, 노동)과 특수 책임인 본질적 성질의 금지시험이 여전히 작동되고 있다.
  특히, 본질적 성질의 금지시험이란, 인간의 인식 속에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불신앙과 교만이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그 자율적 의지를 잘못 오용하여 스스로 인식의 주체를 만들고 진리를 판단하며 선악의 기준을 세우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지금도 구속받지 못한 인간의 인식 속에서는(세속 철학) 인간이 넘볼 수 없는 불가항력의 요소들인 죽음, 고통, 허무를 스스로의 판단 속에서 해결하겠다는 미련함을 보이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이러한 사실의 원인 제공자는 타락한 인간 자신이며, 그것에 따른 하나님의 공의로 인간에게 찾아온 죽음이기 때문에 그 해결 자는 역시 하나님 한 분 뿐으로, 이미 그리스도의 부활(Resurrection)을 통하여 구속된 인간관의 실상이 보여졌다.
  이 부활은 구속된 인간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과 교만,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고 진리의 체계를 규정짓는 그 오만하며 비참한 타락된 인식의 세계가 그리스도의 피의 산 제사로 완전히 죽고, 하나님의 형상의 육체와 영혼이 재 연합하여 회복됨으로 영생의 조건이 만족되었다는 성부 하나님의 선포이기 때문이다. 타락한 진리의 인식 체계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완전한 승리인 것이다.
  참 인간의 이성적 영혼의 본성이 바로 이 부활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구속된 인간관은 이 부활을 준비하는 실제적인 과정인 것이다. 구원의 차서에 의한 그 주관적, 논리적, 조직적인 설명은 구속된 인간관을 형성시켜 미래적 부활을 맞이하게 하기 위한 신비한 본래의 이성(理性)이요, 철학(哲學)이다.

교육이란 인간이 지식, 교양, 품성 등을 선하게 지니도록 이끄는 것으로서, 특히 인간관(人間觀)을 매개로 해서 성립하는 작용이다. 그 기본 원리는 철학의 터 위에 기초한다.
  특히 기독교 교육철학은 이와 같은 인간관의 구명(究明)을 기독교 철학의 기본 원리 위에서 연구하는 학문이다.
  여기에는 창조된 인간관, 타락된 인간관, 구속된 인간관 등이 있다.

1.창조된 인간관

창조된 인간관은 비이성적(非理性的)인 면과 이성적(理性的)인 면, 두 가지가 있다.

(1)비이성적인 면의 창조 의의와 그 목적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에게 비이성적(非理性的)인 면이 있다라는 것을 바르게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크리스천에게 있어서나 무신론의 일반인에게 있어서나 그 단편적인 지식의 오해로 말미암아 서로의 편파적인 주장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무신론의 일반론적인 인식은 인간의 비이성적인 면을 어쩔 수 없이 인정은 하면서도 그 인식의 세계 안에서는 철저히 무시하고 제외시켜 버린다. 다시 말하면 천재지변과 같은 불가항력을 인정은 하면서도 인간이 인식할 수 없다하여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그 성향이다. 특히 철학적으로는 불가지론(不可知論)29)이 바로 그와 같은 성향이다. 이로부터 또한 발생되는 것이 진화론이고, 이 진화론은 결국 범신론에 인도되고, 유물주의로 나아가는 길잡이가 된 것이다. 다음은 초연신론(deism)30) 역시 자연법칙에 대해서 하나님을 방관자로 몰아 내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인간 이성의 직관적 인식 그 자체의 양상을 놓고 기독교 철학에 밝은 사상가31)들은 지적하기를,“인간들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대한 폭넓은 책임을 감히 떠나고자 하는 욕망을 표시한다”라고 정확하게 지적하였다.
  또 그와는 반대로, 크리스천들은 창조된 인간관의 이성적인 면을 무시하고 비이성적인 면을 너무 추종하는 나머지 하나님을 무속화(巫俗化)시켜 버리고, 기복화(起伏化)시켜 버렸다. 이것 역시 극히 잘못된 신앙 관으로, 특히 우리 한국의 기독교 문제이다. 이런 점에 있어서 기독교 교육철학의 그 중요성이 새삼 증가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상(성경) 안에는 분명한 철학과 이성이 존재함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두 가지 측면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관에는 비이성적인 면이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정하는 사례들을 살펴보았다. 그러므로 인간의 비이성적인 창조의 의의는 성경에 밝혀진바, 하나님의 계시(자연계시와 특별계시)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으며 어디까지나 부인할 수 없는 피조물의 본질로서 창조자에 의존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다음으로 인간의 비이성적인 창조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창조자 하나님의 영광을 전적으로 드러내게 한다는 것에서 그 본질을 찾을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는 없으나 그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비이성적인 면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시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실 예는 성경과 믿는 자들 속에서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즉 인간의 비이성적인 면의 창조 목적은 최고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보편적 속성을 나타내 보여주기 위함이다.

(2)이성적인 면의 창조 의의와 그 목적

  인간이 이성적(理性的)이다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이 말의 뜻은 타락한 인간의 이성(

)32)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타락이전 본래의 하나님의 형상인“이성적인 영”(

)을 말한다. 이는 인간이 이성적인 영적 본성을 소유한 것(

, 고전15:46)을 말함으로, 인간의 영적 본성의 성향은 - 생각하고(知), 느끼고(感), 의지 결단하는(情) 능력 - 의“이성적인 영”(고전2:11-12)이다.
  이것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 인간에게만 있는 것으로 참된 사람이 되게 하는 까닭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본질적 부분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진정한 이성적인 부분으로서 신적이고 영원한 일을 깨닫고 붙잡는 능력인데, 하나님의 성령이 그 영향력을 행사하시는 부분이다.
  그러므로 본래 영(靈)이라고 하는 것은 무속적 의미로, 또는 무작정 초월적 의미로 간주되어, 이성적인 감각이 전혀 없거나, 무딘 것이거나, 또는 조잡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인 영적 본성을 극히 왜곡시키고, 결핍되게 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다시 분명히 말하건대 영은 알고, 바라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능력을 소유한 이성적 본질 그 자체이다. 이“이성적인 영”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능력이며,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기쁨으로 얻는 능력이다. 즉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그 능력이다.
  그러나, 이 능력이 슬프게도 타락이후 죽어버렸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찾아낸 칼빈의 전적타락, 전적 무능력이다.
  그리고, 이것은 창조자 하나님의 구속의 언약에 의한 성취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회복되는 것으로 전 인류적, 전 인격적인 것이며 생명의 본원, 생명의 원리로 다시 살려서 깨끗하게 완성해 놓으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성적인 영이다.
  그러므로 인간 이성의 모든 활동에 있어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그 자체는 곧 회개의 대상이며 천국을 소유하지 못하는 그 원인이다. 세상의 교육철학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가운데 제아무리 지식과 교양, 품성을 가르친다고 한들 참된 인간상을 길러내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이 이성적인 영적 존재로 창조된 데에는 그 깊은 목적이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며 보여주기 위함이다.

  인간이 이성적 본질의 영적 존재로 창조된 것은 하나님의 원형적인 형상을 그대로 빼어 닮은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속성(Attributes of God)을 그대로 드러내며 보여주기 위함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자기를 중심으로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살게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 제일주의로 그 인격적 행동이 나타나 하나님의 영광과 그 속성을 드러내며 보여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타 피조물들과는 판이하고 다르게 이성적 본질의 영적 존재로 창조하신 것이다. 물론 이성과 인격적인 성향이 없는 전 우주적인 피조물들을 통하여서도 하나님의 영광과 속성이 잘 나타난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계의 모든 피조물들은 그 자체의 경각심이나 조심성 그리고 자제하는 자율성을 지니지 못한다. 역시 마찬가지로 자율적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속성을 드러내며 보여주지 못한다. 또한 어떤 것을 선택할 자유의지도 갖지 못한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않다. 사람은 모든 피조물 위에 가장 높은 위치로 창조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하였다. 인간의 이러한 이성적 본질의 영적 존재성은 첫째로,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생활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여야 하며. 둘째로, 그와 같이 내 이웃을 내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마22:37-40). 이것은 이성적 본질의 영적 존재인 인간이 하여야만 하는 것으로 그 의미는 광의적이며 폭 넓은 책임이 있음을 말한다.
  먼저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며, 다음은 내 이웃의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많은 사람들과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자연 만물을 사랑하고 보호함으로 역시 하나님의 영광과 그 속성을 드러내며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셋째로, 내가 죽기까지 희생할 때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선택하여 주시고 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죽기까지 희생함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그 견인불발(堅忍不拔)의 은혜에 우리도 또한 그 견인불발의 투지로 하나님께 보여드려야 하는 것이다.
  세속의 철학을 주도하는 이성은 도무지 희생할 줄 모르는 자기 영광과 자기의 속성을 자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철학은 내가 희생함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며 내 이웃을 기쁘게 하고, 삼라만상의 자연 환경까지도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며, 영적 부흥, 심령 대 부흥33)이 된 자이다.

둘째로, 하나님의 보편적 속성을 전달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보편적 속성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피조물 인간과 공통되는 속성으로서 공유적 속성(Communicable Attributes)이라고도 한다.
  여기에는 1)영성(Spirituality). 2)지성(지식, 지혜, 진실성). 3)도덕성(선(善)-사랑, 은혜, 자비, 오래 참으심, 거룩등. 의(義)-보수적, 응보적 의). 4)주권성(주권적 의지, 주권적 능력) 등이 있다.
  이와 같은 보편적 속성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 속에 이미 전달되어진 속성들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속성들이 우리로 하여금 드러내며 보여지게 하기 위해서 이성적인 면으로 창조된 것이다. 아울러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이와 같은 하나님의 보편적 속성들이 진정으로 드러나야 한다. 이것 역시 창조 약정의 넓은 책임인 것이다.

(3)하나님의 절대적 속성을 우러러 앙모하며 경배하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절대적 속성은 인간이 갖지 못하는 하나님만의 절대적 속성(Incom- municable Attributes)들이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 속에 전달되지 아니한 하나님만의 속성들이다. 여기에는 1)독립성(자존성). 2)불변성. 3)무한성(완전성, 영원성, 무변성). 4)통일성(단수성, 단순성) 등이 있다.
  이와 같은 하나님만의 절대적 속성들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모든 피조물 위에 빼어난 인간으로부터 그 자율성에 의하여 우러나는 영광과 찬양, 곧 예배를 받으시기 위함이다.

 

  2.타락된 인간관

(1)죄의 기원

  죄의 기원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찾아보면, 하나님과 첫 아담(모든 사람들 개념) 사이에 맺어졌던 독특한 관계인 창조의 계약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 창조의 계약은 하나님만의 절대주권적인 창조행위가 하나님 자신의 형상과 모양으로 인간을 창조함으로써,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맺어지는 최초의 약정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약정의 구체적인 면은 창조계약의 특수한 면으로서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금지, 또는 시험에서 제기된 인간의 특수책임과 연관되어지는 것으로, 여기에는 하나님 절대주권의 삶과 죽음이 내재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에게 부과된 창조계약의 특수한 면이요, 그 명령에 대한 인간의 특수한 책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7), 라고 피로 맺은 그 대원칙을 세우셨다.
  이 대원칙은 창조주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을 그 피조물 인간이 감히 넘볼 수 없음이며, 오로지 찬양과 영광, 경배(예배)의 대상뿐임을 말한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하나님의 허용작정(permissive decree)도 동시에 작동된다. 즉 하나님 절대 주권의 금지시험을 파기하는 인간의 교만이 일어 날 때는 사단(tempter)의 유혹(tempt)이 어김없이 찾아오는 것이다. 이 금단의 법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전체 삶과 연관이 깊은 것으로, 하나님이 인간을 시험하는 데 그 초점이 맞추어진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전인격적인 모든 행위가 특수한 책임을 갖고서 하나님의 창조계약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비이성적인 면과 이성적인 면을 갖는 영적 존재로서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을 자율적으로 인정하여 찬양하고 경배하여야 하며, 또 인간 속에 전달된 하나님의 공유적 속성을 인간의 전반적인 삶 속에서 드러내며 보여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악과에 대한 금지시험은 창조계약의 특수한 면으로서, 구체적으로 인간에게 요구된 복종이 철저하게 근본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하는 이유, 복종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유 의지의 자유로운 존재 인간은 주권적인 창조자의 말씀 밑에서 자율적으로 겸손하여 복종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이다.
  선악과에 대한 금지시험은 창조자에 대한 인간의 복종을 면밀히 검토하는 데 초점이 있다. 이제 이 금지시험의 목적은 복종 자체를 위해 복종을 기꺼이 선택하는 인간의 의지로 좁혀진다. 인간 행동의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인 것이다. 인간의 실존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데 달려 있는 것이며, 이것은 하나님이 명한 모든 것을 즐거이 믿는 가운데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러한 명백한 창조계약의 특수한 면(선악과 금지시험, 창2:16, 17)이 인간의 교만(superbia, 

)으로 인하여 사단의 유혹을 받고, 영적 세계의 타락을 가져와 인류의 조상 아담이 타락함으로 전 인류가 타락하는 죄의 기원(원죄, Original Sin)이 된 것이다(창3:1-7).

(2)죄의 결과

  죄의 결과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한 인간은 창조시 이성적인 면의 영적 본성(

)을 또한 상실함으로 참 인간으로서의 영적 활동이 불능하게 되었다. 인간 정신세계의 본질인 이성적인 영적 본성의 상실은 첫째, 지성적인 면에서 불 신앙과 교만(Superbia)을 불러왔다. 둘째, 의지적인 면에서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욕망(To be as God)을 불러왔다. 셋째, 감정적인 면에서 방종(Concu- piscence)에 빠졌다.
  이로 인하여 인간은 전적 부패, 전적 무능력하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못하게 되고, 부패 의식(수치감)과 죄책 의식(양심)에 사로잡히게 되고, 사망의 법에 종속하게 되었다(엡2:3).
  이와 같은 죄의 결과는 전적으로 첫 사람 아담의 타락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지, 하나님은 죄의 창시자가 아니다. [아담(

)은 성경에서 일반적인 인간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는 히브리 용어이기 때문에“모든 사람”즉 인간의 개념이다.]
  다시 말하여 타락 이전에도 인간들은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posse peccare)속에서 살았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당신의 비공유적 속성 외에는 모든 것을 거의 다 인간에게 전달(communicable)했다는 그 확실한 증거가 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 자율적인 자유 의지 안에서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까지도 가졌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금지시험을 어기지 않는 한 인간은 영원한 축복 속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인류 역사의 고고학적인 발견이 불확실해서 그렇지, 성경적으로 볼 때는 타락이전의 인간의 삶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시간의 개념을 내포한다. 영적 본성의 이성을 갖고 참된 인식 속에서 참된 사람으로 삶을 누렸던 첫 사람 아담이 그 자유 의지 안에서 창조 질서의 특별한 책임을 파기해버린 그 결과는 타락이후 전 인류에게 그대로 전가되고, 자연계까지도 저주를 받는 상상할 수 없는 창조주 하나님의 진노아래 놓이게 된 것이다.
  타락한 인간의 유전, 전통 그 관습은 그 후손 대대로(generation after gener- ation) 이성적인 영적 본성의 불구자가 되어 태어나고 죽고를 반복하면서, 여전히 사탄의 그 유혹(tempt) 속에서 헤어 나오지를 못하고 있는 것이다. 타락한 인간의 정신은 프시케(사이키)적인 이성이 되어, 욕망과 그 욕구적인 면만을 강조하는 육적인 주체를 중시하여 물질적 수준에 사는 도무지 희생할 줄 모르는 죽음, 고통, 허무의 존재가 되어 버렸다.
  세속적인 철학이 그러하듯이 직관적 인식, 감각적 인식만을 부르짖으며 철학은 필로 소피아(philosophia < Gk. 

 wisdom)라고 하여 자연발생적 사랑의 지혜라고 하며, 로맨틱한 사랑 중에 사랑(the romance of all rom- ance)이라고 울부짖는다.
  그리고 인간 심리학이나 정신 분석학은 타락이후 형성된 인간의 그 이성(사이키[psyche < 

])만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러므로 프로이드는 특히 타락한 인간의 성적 욕망을 자신의 심리학에 끌어 드렸다.
  그런가 하면 교육은 가르치는 것을 강조한 나머지 선생을 하나님처럼 만들어 놓고, 사이키적인 철학의 발상을 기초 개념으로 하여 인간 주체의 진화론적 교육과 주입식 교육에 열을 올리면서, 일류대학 일류학생만을 고집 하는 가운데 어린 학생들은 더 큰 고통 속에 놓이게 되었다. 요즈음 특히 체벌이 문제가 되어 때리지 말아야 되느니 몇 대까지는 때려야 되느니 등등 웃지 못할 그 희한한 발상까지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도무지 희생할 줄 모르는 타락한 인간의 그 유전인 것이다.
  인간의 참 이성, 그 인간 정신세계의 근본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에게 이성적인 면을 불어넣어 창조하시고, 그것이 또한 인간의 영적 본성이 되게 하셨다.
  크리스천이 이성을 도외시하는 것도, 무신론자가 하나님을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것도, 모두 다 타락한 그 유전, 전통, 관습에 의한 결과이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의 복음의 제일성은“회개하라”(

)이다. 인식의 개조, 타락한 이성의 철저한 개조인 것이다. 영적 부흥은 그리스도에 의해 하나님의 형상에 의한 이성을 되찾는 것이다., 아 멘.

(3)타락된 인간의 딜레마(Dilemma)

  딜레마는 헬라어서 왔다(dil?mma < Gk. di-twise, double + l?mma, assumption) . 그 뜻은 양도(兩刀) 논법인데, 이것은 어느 논법을 취해도 불리한 것을 말한다. 즉 궁지에 몰린 것 또는 진퇴 양난에 빠진 것, 그 곤란한 상태를 말한다.
  마찬가지로 타락한 인간의 이성은 본래의 철학 개념인 하나님의 사상(성경)을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까닭에 딜레마에 빠져있다.
  이와 같은 혼미한 철학 사상들이 전세계적으로 퍼져있고, 전 세계인들의 모든 영역에 걸쳐 전반적인 삶 속에 침투해 있다. 서양 철학, 동양 철학, 인도 철학의 세계 3대 철학은 신학적으로 볼 때 이미 양도 논법의 진퇴 양난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양 철학은 서양 철학에 밀려 나 있고, 문명이 발달할수록 서양 철학 역시도 그 논리에 근거를 놓고 서로 물고 물리는 곤란한 상황을 거듭하고 있다. 특히 서양 철학은 19 - 20세기에 들어서서 급속도로 변화되고 있는 추세이다.
  21세기 밀레니엄 새 천년을 맞이하는 세계 지식인의 사회는 미리부터 그 사상의 변화 추이를 놓고 갑론을박(甲論乙駁) 중이다.
  다윈의 진화론은 이미 그 근거를 잃었고, 인류의 종교 의식은 청동기가 아닌 신석기부터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도무지 인식할 줄 모르는 인간의 비이성적인 면을 깨끗이 인식하라는 표징(sign)들은 그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다. 해마다 찾아오는 자연 재해가 그러하고, 검출도 처방도 할 수 없는 슈퍼 박테리아의 출현이 그러하다. 더군다나 이 죽음의 세균은 인간의 병의학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병원에서부터 발병하고 있다.
  인간들이 자칭 첨단을 지향한다는 소프트웨어 기술은 하찮은 곤충 한 마리의 초정밀도 앞에서 맥을 못 추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무시하고 사이키적인 발상을 계속하는 한, 인간의 정신세계는 영원한 정신병자들의 괴로운 행진일 뿐이다. 어떻게 타락한 성적욕망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한 인간의 심리를 파악할 수 있으며, 치료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제 우리는“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고 급박하게(at hand) 재촉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발견하고 통찰할 줄 알아야 한다. 기독교는 무신론의 사이키적인 인식의 세계에서 말하는 대로 일반적인 종교가 아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 정신세계의 그 근본으로 본래의 철학 사상이요, 본래의 인간 이성이다. 기독교 철학이 이 세상을 정복하고 그 바탕 위에 기초한 기독교 교육이 이 세상을 인도할 때, 진정한 참 인간상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3.구속된 인간관

  구속된 인간관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자신의 모양과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함으로서 하나님은 자신과 인간사이에 창조 계약이라는 독특한 관계를 세우셨다는 것으로부터 출발을 하여야 한다.
  이 창조 계약은 하나님 절대주권적 행위로서 하나님은 이 주권적인 창조 행위에 덧붙여 인간의 역할이 결정되게 하였다. 즉 하나님과 인간의 창조 계약은 일반적인 면과 구체적인 면에서 검토되는 데, 창조 계약의 일반적인 면34)은 창조주에 대한 인간의 넓은 책임과 연관되어지고, 창조 계약의 구체적인 면35)은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금지시험에서 제기된 인간의 특수 책임과 연관되어진다.
  특히 창조 계약의 구체적인 면, 금지시험은“선악과를 먹지 않는 것”(창2:16, 17)으로서 이는 최초의 죄의 본질적 성질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불신앙과 교만(Superbia)이며, 인간 스스로 선악의 결정자가 되어 신(神)이 되고자 하는 자율적 의지의 인간의 욕망이다. 하나님은 바로 이것을 금지하고 시험하는 데 그 초점을 두고, 선악과를 먹지 말 것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법제화 시켰다. 이 명령 또는 법은 인간에게 있어서 철저히 복종해야 할 보다 근본적이며 결정적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더 구체적(형식적 성질의 말씀“선악과”제시)으로 특수한 책임이다. 이 특수한 책임이 근본적이며 결정적이다 라는 것은 삶과 죽음의 연장선상에 서 있는 피로 맺은 약정(“정녕 죽으리라”,창2:17)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적 신앙에서 피의 강조는 창조 계약에 있는 죽음까지의 강제적인 것(mandatory)임을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 처음 계약을 어기면 피로 대신하는 것 외에는 그 죽음의 저주로부터 구원의 방법이 없게 된다. 즉 이 처음 계약을 파기한 피조물 인간에게서는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구원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공의를 만족시킬만 한 어떤 것도 타락된 인간관 속에는 없기 때문이다. 오직 이것을 만족케 할만한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 스스로가 창조의 궁극적인 저주를 스스로 지게 됨으로써 구속된 인간관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창조의 계약 밑에서 인간의 실패와 함께 구속된 인간관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구속의 계약(Covenant of Redemption)은 동시적으로 작동되었다. 이는 타락이전 창조 계약 당시 저주의 말씀과 동시에 이미 결정되어진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속의 계약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과의 관계는 인간의 죄로 인해 끝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공의대로 라면 인간에게는 실제로 심판이 내리어져 피흘림과 죽음밖에는 없다. 그러나 죽기까지 희생하기로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은혜로운 특성의 신비는 심판의 한 가운데에서 구속의 희망으로 나타나 하나님은 이제 자기 백성을 구속하기 위하여 자신을 스스로 묶은 것이다.
  이 구속의 계약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대표자이신 성부와 하나님의 백성의 대표자이신 성자가 맺은 계약으로서, 성자는 성부가 주신 백성에 대한 의무를 맡고, 성부는 성자의 속죄 사역을 위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성자에게 약속한 것이다. 이는 영원한 계약이요, 은혜의 언약으로“구속의 계약”의 기초이다.
  그러므로 구속된 인간관에 있어서 성자 하나님은 그 성취자요, 완성자이시다. 성자 하나님의 명칭은 예수36)(Jesus), 그리스도37)(Christ), 인자38)(the Son of Man), 하나님의 아들39)(the Son of God), 주40)(Lord) 등으로 하나님께서 계시해주셨으며, 구속된 인간관을 완성하기 위한 신성41)(Divinity)과 인성42)(Humanity)의 이성(二性)의 필요성43)을 가지셨다. 특히 인성의 신분44)(States)을 가지심으로 자기를 비워 종의 신분보다 더 낮게 비하(Humiliation)하셨다.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도저히 만족시킬 수 없는 인간, 하나님의 형상으로 다시 회복될 수 없는 저주를 받은 인간, 피를 흘리며 죽을 수밖에 없는 그 비참한 인간관의 생생한 현장을 대신하여, 흠이 없고 죄가 없으신 성자 하나님께서 그토록 비참하게 낮아지셔서 생명의 본원으로 다시 회복시키시는 그 놀라운 은혜의 언약을 완성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인간 마리아의 태(胎)중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었다(Inca- rnation)는 사실을 우리는 의심없이 믿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중보적 과업에서 오는 사단의 공격, 백성의 증오와 불신, 원수들의 박해, 그리고 육체적 패배의 수난(Suffering)과 영혼의 고민과 고초, 윤리적 완전성과 의(義), 진(眞), 성(聖)에 대한 열정 때문에 오는 더 큰 고난, 시험 등이 바로 타락한 우리의 그 생생한 마음과 몸에 현장성이라는 것을 더욱 믿지 않을 수 없으며, 당시 사실적인 사법적 선고에 의하여 가장 극악 무도한 죄수에게 내려지는 십자가의 처참한 피흘림과 육체적인 죽음(Crucifixion)은 우리 자신의 비참한 그 저주를 대신 담당하신 그 놀라운 구속의 은혜로 믿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특히 장사(Burial)되어 음부 강하(陰部降下)로 까지 내려가신 것은 타락한 인간이 받아야할 죄의 궁극적인 한 부분을 대신 담당하심으로 우리의 타락한 죄의 본질은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burial)된 것이다. 그것은 옛 사람을 떠남과 버림, 그리고 그 파멸을 의미한다.
  이것은 구속받은 인간관의 시작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하나님의 계약의 목적이 달성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구속된 인간관은 새 인간상의 대표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비적 연합(Mystical Union)이다. 이 신비적 연합의 모든 축복들은 구속적 계약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로부터 나온다.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서 기초한 성령 하나님의 초자연적, 신비적 사역이다. 이 신비적 연합의 특성은 유기적이며, 생명적이요, 성령으로 중재된 상호 행동적, 영적 인격의 특성을 갖는다(롬8:2). 그러므로 구속된 인간관은 중생과 구원의 목적인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케 한다. 즉 죄인 스스로의 아무런 공로 없이 오직 그리스도의 의(

)를 전가 받음이요, 그리스도의 변화시키는 생명력으로 영육간에 변화가 오는 것이다.
  이 변화는 궁극적이요, 전적으로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안에서이다. 이 구원에는 차서(Ordo Salutis[Way of Salvation])가 있다. 구원의 차서란 구속된 인간관을 위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며, 전적 은혜인데, 성령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적용해주시는 그 주관적이며, 논리적인 과정이다. 개혁 교회의 대표자 칼빈(John Calvin)은 그의 책 기독교 강요 3권에서 이에 대한 조직적 설명을 가했다. 그 일반적인 순서는 소명→중생→회심(회개와 신앙)→칭의(양자)→성화(견인)→영화이다.
  그러므로 구속의 계약(Covenant of Redemption)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속된 인간관은 여전히 그리고 영원히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세워진 최초의 약정, 그 창조의 계약아래 놓여져 있다. 따라서 창조 질서에 의한 넓은 책임(안식일, 결혼, 노동)과 특수 책임인 본질적 성질의 금지시험이 여전히 작동되고 있다.
  특히, 본질적 성질의 금지시험이란, 인간의 인식 속에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불신앙과 교만이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그 자율적 의지를 잘못 오용하여 스스로 인식의 주체를 만들고 진리를 판단하며 선악의 기준을 세우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지금도 구속받지 못한 인간의 인식 속에서는(세속 철학) 인간이 넘볼 수 없는 불가항력의 요소들인 죽음, 고통, 허무를 스스로의 판단 속에서 해결하겠다는 미련함을 보이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이러한 사실의 원인 제공자는 타락한 인간 자신이며, 그것에 따른 하나님의 공의로 인간에게 찾아온 죽음이기 때문에 그 해결 자는 역시 하나님 한 분 뿐으로, 이미 그리스도의 부활(Resurrection)을 통하여 구속된 인간관의 실상이 보여졌다.
  이 부활은 구속된 인간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과 교만,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고 진리의 체계를 규정짓는 그 오만하며 비참한 타락된 인식의 세계가 그리스도의 피의 산 제사로 완전히 죽고, 하나님의 형상의 육체와 영혼이 재 연합하여 회복됨으로 영생의 조건이 만족되었다는 성부 하나님의 선포이기 때문이다. 타락한 진리의 인식 체계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완전한 승리인 것이다.
  참 인간의 이성적 영혼의 본성이 바로 이 부활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구속된 인간관은 이 부활을 준비하는 실제적인 과정인 것이다. 구원의 차서에 의한 그 주관적, 논리적, 조직적인 설명은 구속된 인간관을 형성시켜 미래적 부활을 맞이하게 하기 위한 신비한 본래의 이성(理性)이요, 철학(哲學)이다.

교육이란 인간이 지식, 교양, 품성 등을 선하게 지니도록 이끄는 것으로서, 특히 인간관(人間觀)을 매개로 해서 성립하는 작용이다. 그 기본 원리는 철학의 터 위에 기초한다.
  특히 기독교 교육철학은 이와 같은 인간관의 구명(究明)을 기독교 철학의 기본 원리 위에서 연구하는 학문이다.
  여기에는 창조된 인간관, 타락된 인간관, 구속된 인간관 등이 있다.

1.창조된 인간관

창조된 인간관은 비이성적(非理性的)인 면과 이성적(理性的)인 면, 두 가지가 있다.

(1)비이성적인 면의 창조 의의와 그 목적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에게 비이성적(非理性的)인 면이 있다라는 것을 바르게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크리스천에게 있어서나 무신론의 일반인에게 있어서나 그 단편적인 지식의 오해로 말미암아 서로의 편파적인 주장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무신론의 일반론적인 인식은 인간의 비이성적인 면을 어쩔 수 없이 인정은 하면서도 그 인식의 세계 안에서는 철저히 무시하고 제외시켜 버린다. 다시 말하면 천재지변과 같은 불가항력을 인정은 하면서도 인간이 인식할 수 없다하여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그 성향이다. 특히 철학적으로는 불가지론(不可知論)29)이 바로 그와 같은 성향이다. 이로부터 또한 발생되는 것이 진화론이고, 이 진화론은 결국 범신론에 인도되고, 유물주의로 나아가는 길잡이가 된 것이다. 다음은 초연신론(deism)30) 역시 자연법칙에 대해서 하나님을 방관자로 몰아 내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인간 이성의 직관적 인식 그 자체의 양상을 놓고 기독교 철학에 밝은 사상가31)들은 지적하기를,“인간들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대한 폭넓은 책임을 감히 떠나고자 하는 욕망을 표시한다”라고 정확하게 지적하였다.
  또 그와는 반대로, 크리스천들은 창조된 인간관의 이성적인 면을 무시하고 비이성적인 면을 너무 추종하는 나머지 하나님을 무속화(巫俗化)시켜 버리고, 기복화(起伏化)시켜 버렸다. 이것 역시 극히 잘못된 신앙 관으로, 특히 우리 한국의 기독교 문제이다. 이런 점에 있어서 기독교 교육철학의 그 중요성이 새삼 증가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상(성경) 안에는 분명한 철학과 이성이 존재함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두 가지 측면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관에는 비이성적인 면이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정하는 사례들을 살펴보았다. 그러므로 인간의 비이성적인 창조의 의의는 성경에 밝혀진바, 하나님의 계시(자연계시와 특별계시)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으며 어디까지나 부인할 수 없는 피조물의 본질로서 창조자에 의존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다음으로 인간의 비이성적인 창조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창조자 하나님의 영광을 전적으로 드러내게 한다는 것에서 그 본질을 찾을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는 없으나 그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비이성적인 면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시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실 예는 성경과 믿는 자들 속에서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즉 인간의 비이성적인 면의 창조 목적은 최고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보편적 속성을 나타내 보여주기 위함이다.

(2)이성적인 면의 창조 의의와 그 목적

  인간이 이성적(理性的)이다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이 말의 뜻은 타락한 인간의 이성(

)32)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타락이전 본래의 하나님의 형상인“이성적인 영”(

)을 말한다. 이는 인간이 이성적인 영적 본성을 소유한 것(

, 고전15:46)을 말함으로, 인간의 영적 본성의 성향은 - 생각하고(知), 느끼고(感), 의지 결단하는(情) 능력 - 의“이성적인 영”(고전2:11-12)이다.
  이것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 인간에게만 있는 것으로 참된 사람이 되게 하는 까닭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본질적 부분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진정한 이성적인 부분으로서 신적이고 영원한 일을 깨닫고 붙잡는 능력인데, 하나님의 성령이 그 영향력을 행사하시는 부분이다.
  그러므로 본래 영(靈)이라고 하는 것은 무속적 의미로, 또는 무작정 초월적 의미로 간주되어, 이성적인 감각이 전혀 없거나, 무딘 것이거나, 또는 조잡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인 영적 본성을 극히 왜곡시키고, 결핍되게 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다시 분명히 말하건대 영은 알고, 바라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능력을 소유한 이성적 본질 그 자체이다. 이“이성적인 영”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능력이며,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기쁨으로 얻는 능력이다. 즉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그 능력이다.
  그러나, 이 능력이 슬프게도 타락이후 죽어버렸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찾아낸 칼빈의 전적타락, 전적 무능력이다.
  그리고, 이것은 창조자 하나님의 구속의 언약에 의한 성취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회복되는 것으로 전 인류적, 전 인격적인 것이며 생명의 본원, 생명의 원리로 다시 살려서 깨끗하게 완성해 놓으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성적인 영이다.
  그러므로 인간 이성의 모든 활동에 있어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그 자체는 곧 회개의 대상이며 천국을 소유하지 못하는 그 원인이다. 세상의 교육철학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가운데 제아무리 지식과 교양, 품성을 가르친다고 한들 참된 인간상을 길러내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이 이성적인 영적 존재로 창조된 데에는 그 깊은 목적이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며 보여주기 위함이다.

  인간이 이성적 본질의 영적 존재로 창조된 것은 하나님의 원형적인 형상을 그대로 빼어 닮은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속성(Attributes of God)을 그대로 드러내며 보여주기 위함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자기를 중심으로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살게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 제일주의로 그 인격적 행동이 나타나 하나님의 영광과 그 속성을 드러내며 보여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타 피조물들과는 판이하고 다르게 이성적 본질의 영적 존재로 창조하신 것이다. 물론 이성과 인격적인 성향이 없는 전 우주적인 피조물들을 통하여서도 하나님의 영광과 속성이 잘 나타난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계의 모든 피조물들은 그 자체의 경각심이나 조심성 그리고 자제하는 자율성을 지니지 못한다. 역시 마찬가지로 자율적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속성을 드러내며 보여주지 못한다. 또한 어떤 것을 선택할 자유의지도 갖지 못한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않다. 사람은 모든 피조물 위에 가장 높은 위치로 창조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하였다. 인간의 이러한 이성적 본질의 영적 존재성은 첫째로,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생활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여야 하며. 둘째로, 그와 같이 내 이웃을 내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마22:37-40). 이것은 이성적 본질의 영적 존재인 인간이 하여야만 하는 것으로 그 의미는 광의적이며 폭 넓은 책임이 있음을 말한다.
  먼저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며, 다음은 내 이웃의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많은 사람들과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자연 만물을 사랑하고 보호함으로 역시 하나님의 영광과 그 속성을 드러내며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셋째로, 내가 죽기까지 희생할 때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선택하여 주시고 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죽기까지 희생함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그 견인불발(堅忍不拔)의 은혜에 우리도 또한 그 견인불발의 투지로 하나님께 보여드려야 하는 것이다.
  세속의 철학을 주도하는 이성은 도무지 희생할 줄 모르는 자기 영광과 자기의 속성을 자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철학은 내가 희생함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며 내 이웃을 기쁘게 하고, 삼라만상의 자연 환경까지도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며, 영적 부흥, 심령 대 부흥33)이 된 자이다.

둘째로, 하나님의 보편적 속성을 전달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보편적 속성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피조물 인간과 공통되는 속성으로서 공유적 속성(Communicable Attributes)이라고도 한다.
  여기에는 1)영성(Spirituality). 2)지성(지식, 지혜, 진실성). 3)도덕성(선(善)-사랑, 은혜, 자비, 오래 참으심, 거룩등. 의(義)-보수적, 응보적 의). 4)주권성(주권적 의지, 주권적 능력) 등이 있다.
  이와 같은 보편적 속성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 속에 이미 전달되어진 속성들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속성들이 우리로 하여금 드러내며 보여지게 하기 위해서 이성적인 면으로 창조된 것이다. 아울러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이와 같은 하나님의 보편적 속성들이 진정으로 드러나야 한다. 이것 역시 창조 약정의 넓은 책임인 것이다.

(3)하나님의 절대적 속성을 우러러 앙모하며 경배하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절대적 속성은 인간이 갖지 못하는 하나님만의 절대적 속성(Incom- municable Attributes)들이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 속에 전달되지 아니한 하나님만의 속성들이다. 여기에는 1)독립성(자존성). 2)불변성. 3)무한성(완전성, 영원성, 무변성). 4)통일성(단수성, 단순성) 등이 있다.
  이와 같은 하나님만의 절대적 속성들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모든 피조물 위에 빼어난 인간으로부터 그 자율성에 의하여 우러나는 영광과 찬양, 곧 예배를 받으시기 위함이다.

 

  2.타락된 인간관

(1)죄의 기원

  죄의 기원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찾아보면, 하나님과 첫 아담(모든 사람들 개념) 사이에 맺어졌던 독특한 관계인 창조의 계약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 창조의 계약은 하나님만의 절대주권적인 창조행위가 하나님 자신의 형상과 모양으로 인간을 창조함으로써,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맺어지는 최초의 약정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약정의 구체적인 면은 창조계약의 특수한 면으로서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금지, 또는 시험에서 제기된 인간의 특수책임과 연관되어지는 것으로, 여기에는 하나님 절대주권의 삶과 죽음이 내재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에게 부과된 창조계약의 특수한 면이요, 그 명령에 대한 인간의 특수한 책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7), 라고 피로 맺은 그 대원칙을 세우셨다.
  이 대원칙은 창조주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을 그 피조물 인간이 감히 넘볼 수 없음이며, 오로지 찬양과 영광, 경배(예배)의 대상뿐임을 말한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하나님의 허용작정(permissive decree)도 동시에 작동된다. 즉 하나님 절대 주권의 금지시험을 파기하는 인간의 교만이 일어 날 때는 사단(tempter)의 유혹(tempt)이 어김없이 찾아오는 것이다. 이 금단의 법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전체 삶과 연관이 깊은 것으로, 하나님이 인간을 시험하는 데 그 초점이 맞추어진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전인격적인 모든 행위가 특수한 책임을 갖고서 하나님의 창조계약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비이성적인 면과 이성적인 면을 갖는 영적 존재로서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을 자율적으로 인정하여 찬양하고 경배하여야 하며, 또 인간 속에 전달된 하나님의 공유적 속성을 인간의 전반적인 삶 속에서 드러내며 보여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악과에 대한 금지시험은 창조계약의 특수한 면으로서, 구체적으로 인간에게 요구된 복종이 철저하게 근본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하는 이유, 복종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유 의지의 자유로운 존재 인간은 주권적인 창조자의 말씀 밑에서 자율적으로 겸손하여 복종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이다.
  선악과에 대한 금지시험은 창조자에 대한 인간의 복종을 면밀히 검토하는 데 초점이 있다. 이제 이 금지시험의 목적은 복종 자체를 위해 복종을 기꺼이 선택하는 인간의 의지로 좁혀진다. 인간 행동의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인 것이다. 인간의 실존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데 달려 있는 것이며, 이것은 하나님이 명한 모든 것을 즐거이 믿는 가운데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러한 명백한 창조계약의 특수한 면(선악과 금지시험, 창2:16, 17)이 인간의 교만(superbia, 

)으로 인하여 사단의 유혹을 받고, 영적 세계의 타락을 가져와 인류의 조상 아담이 타락함으로 전 인류가 타락하는 죄의 기원(원죄, Original Sin)이 된 것이다(창3:1-7).

(2)죄의 결과

  죄의 결과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한 인간은 창조시 이성적인 면의 영적 본성(

)을 또한 상실함으로 참 인간으로서의 영적 활동이 불능하게 되었다. 인간 정신세계의 본질인 이성적인 영적 본성의 상실은 첫째, 지성적인 면에서 불 신앙과 교만(Superbia)을 불러왔다. 둘째, 의지적인 면에서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욕망(To be as God)을 불러왔다. 셋째, 감정적인 면에서 방종(Concu- piscence)에 빠졌다.
  이로 인하여 인간은 전적 부패, 전적 무능력하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못하게 되고, 부패 의식(수치감)과 죄책 의식(양심)에 사로잡히게 되고, 사망의 법에 종속하게 되었다(엡2:3).
  이와 같은 죄의 결과는 전적으로 첫 사람 아담의 타락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지, 하나님은 죄의 창시자가 아니다. [아담(

)은 성경에서 일반적인 인간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는 히브리 용어이기 때문에“모든 사람”즉 인간의 개념이다.]
  다시 말하여 타락 이전에도 인간들은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posse peccare)속에서 살았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당신의 비공유적 속성 외에는 모든 것을 거의 다 인간에게 전달(communicable)했다는 그 확실한 증거가 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 자율적인 자유 의지 안에서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까지도 가졌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금지시험을 어기지 않는 한 인간은 영원한 축복 속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인류 역사의 고고학적인 발견이 불확실해서 그렇지, 성경적으로 볼 때는 타락이전의 인간의 삶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시간의 개념을 내포한다. 영적 본성의 이성을 갖고 참된 인식 속에서 참된 사람으로 삶을 누렸던 첫 사람 아담이 그 자유 의지 안에서 창조 질서의 특별한 책임을 파기해버린 그 결과는 타락이후 전 인류에게 그대로 전가되고, 자연계까지도 저주를 받는 상상할 수 없는 창조주 하나님의 진노아래 놓이게 된 것이다.
  타락한 인간의 유전, 전통 그 관습은 그 후손 대대로(generation after gener- ation) 이성적인 영적 본성의 불구자가 되어 태어나고 죽고를 반복하면서, 여전히 사탄의 그 유혹(tempt) 속에서 헤어 나오지를 못하고 있는 것이다. 타락한 인간의 정신은 프시케(사이키)적인 이성이 되어, 욕망과 그 욕구적인 면만을 강조하는 육적인 주체를 중시하여 물질적 수준에 사는 도무지 희생할 줄 모르는 죽음, 고통, 허무의 존재가 되어 버렸다.
  세속적인 철학이 그러하듯이 직관적 인식, 감각적 인식만을 부르짖으며 철학은 필로 소피아(philosophia < Gk. 

 wisdom)라고 하여 자연발생적 사랑의 지혜라고 하며, 로맨틱한 사랑 중에 사랑(the romance of all rom- ance)이라고 울부짖는다.
  그리고 인간 심리학이나 정신 분석학은 타락이후 형성된 인간의 그 이성(사이키[psyche < 

])만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러므로 프로이드는 특히 타락한 인간의 성적 욕망을 자신의 심리학에 끌어 드렸다.
  그런가 하면 교육은 가르치는 것을 강조한 나머지 선생을 하나님처럼 만들어 놓고, 사이키적인 철학의 발상을 기초 개념으로 하여 인간 주체의 진화론적 교육과 주입식 교육에 열을 올리면서, 일류대학 일류학생만을 고집 하는 가운데 어린 학생들은 더 큰 고통 속에 놓이게 되었다. 요즈음 특히 체벌이 문제가 되어 때리지 말아야 되느니 몇 대까지는 때려야 되느니 등등 웃지 못할 그 희한한 발상까지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도무지 희생할 줄 모르는 타락한 인간의 그 유전인 것이다.
  인간의 참 이성, 그 인간 정신세계의 근본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에게 이성적인 면을 불어넣어 창조하시고, 그것이 또한 인간의 영적 본성이 되게 하셨다.
  크리스천이 이성을 도외시하는 것도, 무신론자가 하나님을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것도, 모두 다 타락한 그 유전, 전통, 관습에 의한 결과이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의 복음의 제일성은“회개하라”(

)이다. 인식의 개조, 타락한 이성의 철저한 개조인 것이다. 영적 부흥은 그리스도에 의해 하나님의 형상에 의한 이성을 되찾는 것이다., 아 멘.

(3)타락된 인간의 딜레마(Dilemma)

  딜레마는 헬라어서 왔다(dil?mma < Gk. di-twise, double + l?mma, assumption) . 그 뜻은 양도(兩刀) 논법인데, 이것은 어느 논법을 취해도 불리한 것을 말한다. 즉 궁지에 몰린 것 또는 진퇴 양난에 빠진 것, 그 곤란한 상태를 말한다.
  마찬가지로 타락한 인간의 이성은 본래의 철학 개념인 하나님의 사상(성경)을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까닭에 딜레마에 빠져있다.
  이와 같은 혼미한 철학 사상들이 전세계적으로 퍼져있고, 전 세계인들의 모든 영역에 걸쳐 전반적인 삶 속에 침투해 있다. 서양 철학, 동양 철학, 인도 철학의 세계 3대 철학은 신학적으로 볼 때 이미 양도 논법의 진퇴 양난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양 철학은 서양 철학에 밀려 나 있고, 문명이 발달할수록 서양 철학 역시도 그 논리에 근거를 놓고 서로 물고 물리는 곤란한 상황을 거듭하고 있다. 특히 서양 철학은 19 - 20세기에 들어서서 급속도로 변화되고 있는 추세이다.
  21세기 밀레니엄 새 천년을 맞이하는 세계 지식인의 사회는 미리부터 그 사상의 변화 추이를 놓고 갑론을박(甲論乙駁) 중이다.
  다윈의 진화론은 이미 그 근거를 잃었고, 인류의 종교 의식은 청동기가 아닌 신석기부터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도무지 인식할 줄 모르는 인간의 비이성적인 면을 깨끗이 인식하라는 표징(sign)들은 그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다. 해마다 찾아오는 자연 재해가 그러하고, 검출도 처방도 할 수 없는 슈퍼 박테리아의 출현이 그러하다. 더군다나 이 죽음의 세균은 인간의 병의학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병원에서부터 발병하고 있다.
  인간들이 자칭 첨단을 지향한다는 소프트웨어 기술은 하찮은 곤충 한 마리의 초정밀도 앞에서 맥을 못 추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무시하고 사이키적인 발상을 계속하는 한, 인간의 정신세계는 영원한 정신병자들의 괴로운 행진일 뿐이다. 어떻게 타락한 성적욕망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한 인간의 심리를 파악할 수 있으며, 치료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제 우리는“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고 급박하게(at hand) 재촉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발견하고 통찰할 줄 알아야 한다. 기독교는 무신론의 사이키적인 인식의 세계에서 말하는 대로 일반적인 종교가 아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 정신세계의 그 근본으로 본래의 철학 사상이요, 본래의 인간 이성이다. 기독교 철학이 이 세상을 정복하고 그 바탕 위에 기초한 기독교 교육이 이 세상을 인도할 때, 진정한 참 인간상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3.구속된 인간관

  구속된 인간관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자신의 모양과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함으로서 하나님은 자신과 인간사이에 창조 계약이라는 독특한 관계를 세우셨다는 것으로부터 출발을 하여야 한다.
  이 창조 계약은 하나님 절대주권적 행위로서 하나님은 이 주권적인 창조 행위에 덧붙여 인간의 역할이 결정되게 하였다. 즉 하나님과 인간의 창조 계약은 일반적인 면과 구체적인 면에서 검토되는 데, 창조 계약의 일반적인 면34)은 창조주에 대한 인간의 넓은 책임과 연관되어지고, 창조 계약의 구체적인 면35)은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금지시험에서 제기된 인간의 특수 책임과 연관되어진다.
  특히 창조 계약의 구체적인 면, 금지시험은“선악과를 먹지 않는 것”(창2:16, 17)으로서 이는 최초의 죄의 본질적 성질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불신앙과 교만(Superbia)이며, 인간 스스로 선악의 결정자가 되어 신(神)이 되고자 하는 자율적 의지의 인간의 욕망이다. 하나님은 바로 이것을 금지하고 시험하는 데 그 초점을 두고, 선악과를 먹지 말 것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법제화 시켰다. 이 명령 또는 법은 인간에게 있어서 철저히 복종해야 할 보다 근본적이며 결정적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더 구체적(형식적 성질의 말씀“선악과”제시)으로 특수한 책임이다. 이 특수한 책임이 근본적이며 결정적이다 라는 것은 삶과 죽음의 연장선상에 서 있는 피로 맺은 약정(“정녕 죽으리라”,창2:17)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적 신앙에서 피의 강조는 창조 계약에 있는 죽음까지의 강제적인 것(mandatory)임을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 처음 계약을 어기면 피로 대신하는 것 외에는 그 죽음의 저주로부터 구원의 방법이 없게 된다. 즉 이 처음 계약을 파기한 피조물 인간에게서는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구원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공의를 만족시킬만 한 어떤 것도 타락된 인간관 속에는 없기 때문이다. 오직 이것을 만족케 할만한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 스스로가 창조의 궁극적인 저주를 스스로 지게 됨으로써 구속된 인간관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창조의 계약 밑에서 인간의 실패와 함께 구속된 인간관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구속의 계약(Covenant of Redemption)은 동시적으로 작동되었다. 이는 타락이전 창조 계약 당시 저주의 말씀과 동시에 이미 결정되어진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속의 계약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과의 관계는 인간의 죄로 인해 끝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공의대로 라면 인간에게는 실제로 심판이 내리어져 피흘림과 죽음밖에는 없다. 그러나 죽기까지 희생하기로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은혜로운 특성의 신비는 심판의 한 가운데에서 구속의 희망으로 나타나 하나님은 이제 자기 백성을 구속하기 위하여 자신을 스스로 묶은 것이다.
  이 구속의 계약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대표자이신 성부와 하나님의 백성의 대표자이신 성자가 맺은 계약으로서, 성자는 성부가 주신 백성에 대한 의무를 맡고, 성부는 성자의 속죄 사역을 위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성자에게 약속한 것이다. 이는 영원한 계약이요, 은혜의 언약으로“구속의 계약”의 기초이다.
  그러므로 구속된 인간관에 있어서 성자 하나님은 그 성취자요, 완성자이시다. 성자 하나님의 명칭은 예수36)(Jesus), 그리스도37)(Christ), 인자38)(the Son of Man), 하나님의 아들39)(the Son of God), 주40)(Lord) 등으로 하나님께서 계시해주셨으며, 구속된 인간관을 완성하기 위한 신성41)(Divinity)과 인성42)(Humanity)의 이성(二性)의 필요성43)을 가지셨다. 특히 인성의 신분44)(States)을 가지심으로 자기를 비워 종의 신분보다 더 낮게 비하(Humiliation)하셨다.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도저히 만족시킬 수 없는 인간, 하나님의 형상으로 다시 회복될 수 없는 저주를 받은 인간, 피를 흘리며 죽을 수밖에 없는 그 비참한 인간관의 생생한 현장을 대신하여, 흠이 없고 죄가 없으신 성자 하나님께서 그토록 비참하게 낮아지셔서 생명의 본원으로 다시 회복시키시는 그 놀라운 은혜의 언약을 완성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인간 마리아의 태(胎)중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었다(Inca- rnation)는 사실을 우리는 의심없이 믿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중보적 과업에서 오는 사단의 공격, 백성의 증오와 불신, 원수들의 박해, 그리고 육체적 패배의 수난(Suffering)과 영혼의 고민과 고초, 윤리적 완전성과 의(義), 진(眞), 성(聖)에 대한 열정 때문에 오는 더 큰 고난, 시험 등이 바로 타락한 우리의 그 생생한 마음과 몸에 현장성이라는 것을 더욱 믿지 않을 수 없으며, 당시 사실적인 사법적 선고에 의하여 가장 극악 무도한 죄수에게 내려지는 십자가의 처참한 피흘림과 육체적인 죽음(Crucifixion)은 우리 자신의 비참한 그 저주를 대신 담당하신 그 놀라운 구속의 은혜로 믿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특히 장사(Burial)되어 음부 강하(陰部降下)로 까지 내려가신 것은 타락한 인간이 받아야할 죄의 궁극적인 한 부분을 대신 담당하심으로 우리의 타락한 죄의 본질은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burial)된 것이다. 그것은 옛 사람을 떠남과 버림, 그리고 그 파멸을 의미한다.
  이것은 구속받은 인간관의 시작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하나님의 계약의 목적이 달성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구속된 인간관은 새 인간상의 대표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비적 연합(Mystical Union)이다. 이 신비적 연합의 모든 축복들은 구속적 계약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로부터 나온다.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서 기초한 성령 하나님의 초자연적, 신비적 사역이다. 이 신비적 연합의 특성은 유기적이며, 생명적이요, 성령으로 중재된 상호 행동적, 영적 인격의 특성을 갖는다(롬8:2). 그러므로 구속된 인간관은 중생과 구원의 목적인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케 한다. 즉 죄인 스스로의 아무런 공로 없이 오직 그리스도의 의(

)를 전가 받음이요, 그리스도의 변화시키는 생명력으로 영육간에 변화가 오는 것이다.
  이 변화는 궁극적이요, 전적으로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안에서이다. 이 구원에는 차서(Ordo Salutis[Way of Salvation])가 있다. 구원의 차서란 구속된 인간관을 위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며, 전적 은혜인데, 성령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적용해주시는 그 주관적이며, 논리적인 과정이다. 개혁 교회의 대표자 칼빈(John Calvin)은 그의 책 기독교 강요 3권에서 이에 대한 조직적 설명을 가했다. 그 일반적인 순서는 소명→중생→회심(회개와 신앙)→칭의(양자)→성화(견인)→영화이다.
  그러므로 구속의 계약(Covenant of Redemption)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속된 인간관은 여전히 그리고 영원히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세워진 최초의 약정, 그 창조의 계약아래 놓여져 있다. 따라서 창조 질서에 의한 넓은 책임(안식일, 결혼, 노동)과 특수 책임인 본질적 성질의 금지시험이 여전히 작동되고 있다.
  특히, 본질적 성질의 금지시험이란, 인간의 인식 속에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불신앙과 교만이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그 자율적 의지를 잘못 오용하여 스스로 인식의 주체를 만들고 진리를 판단하며 선악의 기준을 세우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지금도 구속받지 못한 인간의 인식 속에서는(세속 철학) 인간이 넘볼 수 없는 불가항력의 요소들인 죽음, 고통, 허무를 스스로의 판단 속에서 해결하겠다는 미련함을 보이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이러한 사실의 원인 제공자는 타락한 인간 자신이며, 그것에 따른 하나님의 공의로 인간에게 찾아온 죽음이기 때문에 그 해결 자는 역시 하나님 한 분 뿐으로, 이미 그리스도의 부활(Resurrection)을 통하여 구속된 인간관의 실상이 보여졌다.
  이 부활은 구속된 인간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과 교만,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고 진리의 체계를 규정짓는 그 오만하며 비참한 타락된 인식의 세계가 그리스도의 피의 산 제사로 완전히 죽고, 하나님의 형상의 육체와 영혼이 재 연합하여 회복됨으로 영생의 조건이 만족되었다는 성부 하나님의 선포이기 때문이다. 타락한 진리의 인식 체계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완전한 승리인 것이다.
  참 인간의 이성적 영혼의 본성이 바로 이 부활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구속된 인간관은 이 부활을 준비하는 실제적인 과정인 것이다. 구원의 차서에 의한 그 주관적, 논리적, 조직적인 설명은 구속된 인간관을 형성시켜 미래적 부활을 맞이하게 하기 위한 신비한 본래의 이성(理性)이요, 철학(哲學)이다.

교육이란 인간이 지식, 교양, 품성 등을 선하게 지니도록 이끄는 것으로서, 특히 인간관(人間觀)을 매개로 해서 성립하는 작용이다. 그 기본 원리는 철학의 터 위에 기초한다.
  특히 기독교 교육철학은 이와 같은 인간관의 구명(究明)을 기독교 철학의 기본 원리 위에서 연구하는 학문이다.
  여기에는 창조된 인간관, 타락된 인간관, 구속된 인간관 등이 있다.

1.창조된 인간관

창조된 인간관은 비이성적(非理性的)인 면과 이성적(理性的)인 면, 두 가지가 있다.

(1)비이성적인 면의 창조 의의와 그 목적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에게 비이성적(非理性的)인 면이 있다라는 것을 바르게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크리스천에게 있어서나 무신론의 일반인에게 있어서나 그 단편적인 지식의 오해로 말미암아 서로의 편파적인 주장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무신론의 일반론적인 인식은 인간의 비이성적인 면을 어쩔 수 없이 인정은 하면서도 그 인식의 세계 안에서는 철저히 무시하고 제외시켜 버린다. 다시 말하면 천재지변과 같은 불가항력을 인정은 하면서도 인간이 인식할 수 없다하여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그 성향이다. 특히 철학적으로는 불가지론(不可知論)29)이 바로 그와 같은 성향이다. 이로부터 또한 발생되는 것이 진화론이고, 이 진화론은 결국 범신론에 인도되고, 유물주의로 나아가는 길잡이가 된 것이다. 다음은 초연신론(deism)30) 역시 자연법칙에 대해서 하나님을 방관자로 몰아 내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인간 이성의 직관적 인식 그 자체의 양상을 놓고 기독교 철학에 밝은 사상가31)들은 지적하기를,“인간들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대한 폭넓은 책임을 감히 떠나고자 하는 욕망을 표시한다”라고 정확하게 지적하였다.
  또 그와는 반대로, 크리스천들은 창조된 인간관의 이성적인 면을 무시하고 비이성적인 면을 너무 추종하는 나머지 하나님을 무속화(巫俗化)시켜 버리고, 기복화(起伏化)시켜 버렸다. 이것 역시 극히 잘못된 신앙 관으로, 특히 우리 한국의 기독교 문제이다. 이런 점에 있어서 기독교 교육철학의 그 중요성이 새삼 증가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상(성경) 안에는 분명한 철학과 이성이 존재함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두 가지 측면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관에는 비이성적인 면이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정하는 사례들을 살펴보았다. 그러므로 인간의 비이성적인 창조의 의의는 성경에 밝혀진바, 하나님의 계시(자연계시와 특별계시)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으며 어디까지나 부인할 수 없는 피조물의 본질로서 창조자에 의존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다음으로 인간의 비이성적인 창조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창조자 하나님의 영광을 전적으로 드러내게 한다는 것에서 그 본질을 찾을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는 없으나 그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비이성적인 면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시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실 예는 성경과 믿는 자들 속에서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즉 인간의 비이성적인 면의 창조 목적은 최고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보편적 속성을 나타내 보여주기 위함이다.

(2)이성적인 면의 창조 의의와 그 목적

  인간이 이성적(理性的)이다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이 말의 뜻은 타락한 인간의 이성(

)32)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타락이전 본래의 하나님의 형상인“이성적인 영”(

)을 말한다. 이는 인간이 이성적인 영적 본성을 소유한 것(

, 고전15:46)을 말함으로, 인간의 영적 본성의 성향은 - 생각하고(知), 느끼고(感), 의지 결단하는(情) 능력 - 의“이성적인 영”(고전2:11-12)이다.
  이것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 인간에게만 있는 것으로 참된 사람이 되게 하는 까닭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본질적 부분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진정한 이성적인 부분으로서 신적이고 영원한 일을 깨닫고 붙잡는 능력인데, 하나님의 성령이 그 영향력을 행사하시는 부분이다.
  그러므로 본래 영(靈)이라고 하는 것은 무속적 의미로, 또는 무작정 초월적 의미로 간주되어, 이성적인 감각이 전혀 없거나, 무딘 것이거나, 또는 조잡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인 영적 본성을 극히 왜곡시키고, 결핍되게 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다시 분명히 말하건대 영은 알고, 바라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능력을 소유한 이성적 본질 그 자체이다. 이“이성적인 영”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능력이며,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기쁨으로 얻는 능력이다. 즉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그 능력이다.
  그러나, 이 능력이 슬프게도 타락이후 죽어버렸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찾아낸 칼빈의 전적타락, 전적 무능력이다.
  그리고, 이것은 창조자 하나님의 구속의 언약에 의한 성취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회복되는 것으로 전 인류적, 전 인격적인 것이며 생명의 본원, 생명의 원리로 다시 살려서 깨끗하게 완성해 놓으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성적인 영이다.
  그러므로 인간 이성의 모든 활동에 있어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그 자체는 곧 회개의 대상이며 천국을 소유하지 못하는 그 원인이다. 세상의 교육철학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가운데 제아무리 지식과 교양, 품성을 가르친다고 한들 참된 인간상을 길러내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이 이성적인 영적 존재로 창조된 데에는 그 깊은 목적이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며 보여주기 위함이다.

  인간이 이성적 본질의 영적 존재로 창조된 것은 하나님의 원형적인 형상을 그대로 빼어 닮은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속성(Attributes of God)을 그대로 드러내며 보여주기 위함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자기를 중심으로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살게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 제일주의로 그 인격적 행동이 나타나 하나님의 영광과 그 속성을 드러내며 보여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타 피조물들과는 판이하고 다르게 이성적 본질의 영적 존재로 창조하신 것이다. 물론 이성과 인격적인 성향이 없는 전 우주적인 피조물들을 통하여서도 하나님의 영광과 속성이 잘 나타난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계의 모든 피조물들은 그 자체의 경각심이나 조심성 그리고 자제하는 자율성을 지니지 못한다. 역시 마찬가지로 자율적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속성을 드러내며 보여주지 못한다. 또한 어떤 것을 선택할 자유의지도 갖지 못한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않다. 사람은 모든 피조물 위에 가장 높은 위치로 창조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하였다. 인간의 이러한 이성적 본질의 영적 존재성은 첫째로,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생활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여야 하며. 둘째로, 그와 같이 내 이웃을 내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마22:37-40). 이것은 이성적 본질의 영적 존재인 인간이 하여야만 하는 것으로 그 의미는 광의적이며 폭 넓은 책임이 있음을 말한다.
  먼저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며, 다음은 내 이웃의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많은 사람들과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자연 만물을 사랑하고 보호함으로 역시 하나님의 영광과 그 속성을 드러내며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셋째로, 내가 죽기까지 희생할 때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선택하여 주시고 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죽기까지 희생함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그 견인불발(堅忍不拔)의 은혜에 우리도 또한 그 견인불발의 투지로 하나님께 보여드려야 하는 것이다.
  세속의 철학을 주도하는 이성은 도무지 희생할 줄 모르는 자기 영광과 자기의 속성을 자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철학은 내가 희생함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며 내 이웃을 기쁘게 하고, 삼라만상의 자연 환경까지도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며, 영적 부흥, 심령 대 부흥33)이 된 자이다.

둘째로, 하나님의 보편적 속성을 전달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보편적 속성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피조물 인간과 공통되는 속성으로서 공유적 속성(Communicable Attributes)이라고도 한다.
  여기에는 1)영성(Spirituality). 2)지성(지식, 지혜, 진실성). 3)도덕성(선(善)-사랑, 은혜, 자비, 오래 참으심, 거룩등. 의(義)-보수적, 응보적 의). 4)주권성(주권적 의지, 주권적 능력) 등이 있다.
  이와 같은 보편적 속성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 속에 이미 전달되어진 속성들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속성들이 우리로 하여금 드러내며 보여지게 하기 위해서 이성적인 면으로 창조된 것이다. 아울러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이와 같은 하나님의 보편적 속성들이 진정으로 드러나야 한다. 이것 역시 창조 약정의 넓은 책임인 것이다.

(3)하나님의 절대적 속성을 우러러 앙모하며 경배하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절대적 속성은 인간이 갖지 못하는 하나님만의 절대적 속성(Incom- municable Attributes)들이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 속에 전달되지 아니한 하나님만의 속성들이다. 여기에는 1)독립성(자존성). 2)불변성. 3)무한성(완전성, 영원성, 무변성). 4)통일성(단수성, 단순성) 등이 있다.
  이와 같은 하나님만의 절대적 속성들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모든 피조물 위에 빼어난 인간으로부터 그 자율성에 의하여 우러나는 영광과 찬양, 곧 예배를 받으시기 위함이다.

 

  2.타락된 인간관

(1)죄의 기원

  죄의 기원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찾아보면, 하나님과 첫 아담(모든 사람들 개념) 사이에 맺어졌던 독특한 관계인 창조의 계약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 창조의 계약은 하나님만의 절대주권적인 창조행위가 하나님 자신의 형상과 모양으로 인간을 창조함으로써,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맺어지는 최초의 약정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약정의 구체적인 면은 창조계약의 특수한 면으로서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금지, 또는 시험에서 제기된 인간의 특수책임과 연관되어지는 것으로, 여기에는 하나님 절대주권의 삶과 죽음이 내재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에게 부과된 창조계약의 특수한 면이요, 그 명령에 대한 인간의 특수한 책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7), 라고 피로 맺은 그 대원칙을 세우셨다.
  이 대원칙은 창조주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을 그 피조물 인간이 감히 넘볼 수 없음이며, 오로지 찬양과 영광, 경배(예배)의 대상뿐임을 말한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하나님의 허용작정(permissive decree)도 동시에 작동된다. 즉 하나님 절대 주권의 금지시험을 파기하는 인간의 교만이 일어 날 때는 사단(tempter)의 유혹(tempt)이 어김없이 찾아오는 것이다. 이 금단의 법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전체 삶과 연관이 깊은 것으로, 하나님이 인간을 시험하는 데 그 초점이 맞추어진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전인격적인 모든 행위가 특수한 책임을 갖고서 하나님의 창조계약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비이성적인 면과 이성적인 면을 갖는 영적 존재로서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을 자율적으로 인정하여 찬양하고 경배하여야 하며, 또 인간 속에 전달된 하나님의 공유적 속성을 인간의 전반적인 삶 속에서 드러내며 보여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악과에 대한 금지시험은 창조계약의 특수한 면으로서, 구체적으로 인간에게 요구된 복종이 철저하게 근본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하는 이유, 복종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유 의지의 자유로운 존재 인간은 주권적인 창조자의 말씀 밑에서 자율적으로 겸손하여 복종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이다.
  선악과에 대한 금지시험은 창조자에 대한 인간의 복종을 면밀히 검토하는 데 초점이 있다. 이제 이 금지시험의 목적은 복종 자체를 위해 복종을 기꺼이 선택하는 인간의 의지로 좁혀진다. 인간 행동의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인 것이다. 인간의 실존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데 달려 있는 것이며, 이것은 하나님이 명한 모든 것을 즐거이 믿는 가운데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러한 명백한 창조계약의 특수한 면(선악과 금지시험, 창2:16, 17)이 인간의 교만(superbia, 

)으로 인하여 사단의 유혹을 받고, 영적 세계의 타락을 가져와 인류의 조상 아담이 타락함으로 전 인류가 타락하는 죄의 기원(원죄, Original Sin)이 된 것이다(창3:1-7).

(2)죄의 결과

  죄의 결과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한 인간은 창조시 이성적인 면의 영적 본성(

)을 또한 상실함으로 참 인간으로서의 영적 활동이 불능하게 되었다. 인간 정신세계의 본질인 이성적인 영적 본성의 상실은 첫째, 지성적인 면에서 불 신앙과 교만(Superbia)을 불러왔다. 둘째, 의지적인 면에서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욕망(To be as God)을 불러왔다. 셋째, 감정적인 면에서 방종(Concu- piscence)에 빠졌다.
  이로 인하여 인간은 전적 부패, 전적 무능력하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못하게 되고, 부패 의식(수치감)과 죄책 의식(양심)에 사로잡히게 되고, 사망의 법에 종속하게 되었다(엡2:3).
  이와 같은 죄의 결과는 전적으로 첫 사람 아담의 타락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지, 하나님은 죄의 창시자가 아니다. [아담(

)은 성경에서 일반적인 인간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는 히브리 용어이기 때문에“모든 사람”즉 인간의 개념이다.]
  다시 말하여 타락 이전에도 인간들은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posse peccare)속에서 살았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당신의 비공유적 속성 외에는 모든 것을 거의 다 인간에게 전달(communicable)했다는 그 확실한 증거가 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 자율적인 자유 의지 안에서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까지도 가졌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금지시험을 어기지 않는 한 인간은 영원한 축복 속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인류 역사의 고고학적인 발견이 불확실해서 그렇지, 성경적으로 볼 때는 타락이전의 인간의 삶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시간의 개념을 내포한다. 영적 본성의 이성을 갖고 참된 인식 속에서 참된 사람으로 삶을 누렸던 첫 사람 아담이 그 자유 의지 안에서 창조 질서의 특별한 책임을 파기해버린 그 결과는 타락이후 전 인류에게 그대로 전가되고, 자연계까지도 저주를 받는 상상할 수 없는 창조주 하나님의 진노아래 놓이게 된 것이다.
  타락한 인간의 유전, 전통 그 관습은 그 후손 대대로(generation after gener- ation) 이성적인 영적 본성의 불구자가 되어 태어나고 죽고를 반복하면서, 여전히 사탄의 그 유혹(tempt) 속에서 헤어 나오지를 못하고 있는 것이다. 타락한 인간의 정신은 프시케(사이키)적인 이성이 되어, 욕망과 그 욕구적인 면만을 강조하는 육적인 주체를 중시하여 물질적 수준에 사는 도무지 희생할 줄 모르는 죽음, 고통, 허무의 존재가 되어 버렸다.
  세속적인 철학이 그러하듯이 직관적 인식, 감각적 인식만을 부르짖으며 철학은 필로 소피아(philosophia < Gk. 

 wisdom)라고 하여 자연발생적 사랑의 지혜라고 하며, 로맨틱한 사랑 중에 사랑(the romance of all rom- ance)이라고 울부짖는다.
  그리고 인간 심리학이나 정신 분석학은 타락이후 형성된 인간의 그 이성(사이키[psyche < 

])만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러므로 프로이드는 특히 타락한 인간의 성적 욕망을 자신의 심리학에 끌어 드렸다.
  그런가 하면 교육은 가르치는 것을 강조한 나머지 선생을 하나님처럼 만들어 놓고, 사이키적인 철학의 발상을 기초 개념으로 하여 인간 주체의 진화론적 교육과 주입식 교육에 열을 올리면서, 일류대학 일류학생만을 고집 하는 가운데 어린 학생들은 더 큰 고통 속에 놓이게 되었다. 요즈음 특히 체벌이 문제가 되어 때리지 말아야 되느니 몇 대까지는 때려야 되느니 등등 웃지 못할 그 희한한 발상까지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도무지 희생할 줄 모르는 타락한 인간의 그 유전인 것이다.
  인간의 참 이성, 그 인간 정신세계의 근본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에게 이성적인 면을 불어넣어 창조하시고, 그것이 또한 인간의 영적 본성이 되게 하셨다.
  크리스천이 이성을 도외시하는 것도, 무신론자가 하나님을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것도, 모두 다 타락한 그 유전, 전통, 관습에 의한 결과이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의 복음의 제일성은“회개하라”(

)이다. 인식의 개조, 타락한 이성의 철저한 개조인 것이다. 영적 부흥은 그리스도에 의해 하나님의 형상에 의한 이성을 되찾는 것이다., 아 멘.

(3)타락된 인간의 딜레마(Dilemma)

  딜레마는 헬라어서 왔다(dil?mma < Gk. di-twise, double + l?mma, assumption) . 그 뜻은 양도(兩刀) 논법인데, 이것은 어느 논법을 취해도 불리한 것을 말한다. 즉 궁지에 몰린 것 또는 진퇴 양난에 빠진 것, 그 곤란한 상태를 말한다.
  마찬가지로 타락한 인간의 이성은 본래의 철학 개념인 하나님의 사상(성경)을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까닭에 딜레마에 빠져있다.
  이와 같은 혼미한 철학 사상들이 전세계적으로 퍼져있고, 전 세계인들의 모든 영역에 걸쳐 전반적인 삶 속에 침투해 있다. 서양 철학, 동양 철학, 인도 철학의 세계 3대 철학은 신학적으로 볼 때 이미 양도 논법의 진퇴 양난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양 철학은 서양 철학에 밀려 나 있고, 문명이 발달할수록 서양 철학 역시도 그 논리에 근거를 놓고 서로 물고 물리는 곤란한 상황을 거듭하고 있다. 특히 서양 철학은 19 - 20세기에 들어서서 급속도로 변화되고 있는 추세이다.
  21세기 밀레니엄 새 천년을 맞이하는 세계 지식인의 사회는 미리부터 그 사상의 변화 추이를 놓고 갑론을박(甲論乙駁) 중이다.
  다윈의 진화론은 이미 그 근거를 잃었고, 인류의 종교 의식은 청동기가 아닌 신석기부터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도무지 인식할 줄 모르는 인간의 비이성적인 면을 깨끗이 인식하라는 표징(sign)들은 그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다. 해마다 찾아오는 자연 재해가 그러하고, 검출도 처방도 할 수 없는 슈퍼 박테리아의 출현이 그러하다. 더군다나 이 죽음의 세균은 인간의 병의학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병원에서부터 발병하고 있다.
  인간들이 자칭 첨단을 지향한다는 소프트웨어 기술은 하찮은 곤충 한 마리의 초정밀도 앞에서 맥을 못 추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무시하고 사이키적인 발상을 계속하는 한, 인간의 정신세계는 영원한 정신병자들의 괴로운 행진일 뿐이다. 어떻게 타락한 성적욕망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한 인간의 심리를 파악할 수 있으며, 치료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제 우리는“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고 급박하게(at hand) 재촉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발견하고 통찰할 줄 알아야 한다. 기독교는 무신론의 사이키적인 인식의 세계에서 말하는 대로 일반적인 종교가 아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 정신세계의 그 근본으로 본래의 철학 사상이요, 본래의 인간 이성이다. 기독교 철학이 이 세상을 정복하고 그 바탕 위에 기초한 기독교 교육이 이 세상을 인도할 때, 진정한 참 인간상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3.구속된 인간관

  구속된 인간관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자신의 모양과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함으로서 하나님은 자신과 인간사이에 창조 계약이라는 독특한 관계를 세우셨다는 것으로부터 출발을 하여야 한다.
  이 창조 계약은 하나님 절대주권적 행위로서 하나님은 이 주권적인 창조 행위에 덧붙여 인간의 역할이 결정되게 하였다. 즉 하나님과 인간의 창조 계약은 일반적인 면과 구체적인 면에서 검토되는 데, 창조 계약의 일반적인 면34)은 창조주에 대한 인간의 넓은 책임과 연관되어지고, 창조 계약의 구체적인 면35)은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금지시험에서 제기된 인간의 특수 책임과 연관되어진다.
  특히 창조 계약의 구체적인 면, 금지시험은“선악과를 먹지 않는 것”(창2:16, 17)으로서 이는 최초의 죄의 본질적 성질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불신앙과 교만(Superbia)이며, 인간 스스로 선악의 결정자가 되어 신(神)이 되고자 하는 자율적 의지의 인간의 욕망이다. 하나님은 바로 이것을 금지하고 시험하는 데 그 초점을 두고, 선악과를 먹지 말 것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법제화 시켰다. 이 명령 또는 법은 인간에게 있어서 철저히 복종해야 할 보다 근본적이며 결정적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더 구체적(형식적 성질의 말씀“선악과”제시)으로 특수한 책임이다. 이 특수한 책임이 근본적이며 결정적이다 라는 것은 삶과 죽음의 연장선상에 서 있는 피로 맺은 약정(“정녕 죽으리라”,창2:17)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적 신앙에서 피의 강조는 창조 계약에 있는 죽음까지의 강제적인 것(mandatory)임을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 처음 계약을 어기면 피로 대신하는 것 외에는 그 죽음의 저주로부터 구원의 방법이 없게 된다. 즉 이 처음 계약을 파기한 피조물 인간에게서는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구원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공의를 만족시킬만 한 어떤 것도 타락된 인간관 속에는 없기 때문이다. 오직 이것을 만족케 할만한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 스스로가 창조의 궁극적인 저주를 스스로 지게 됨으로써 구속된 인간관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창조의 계약 밑에서 인간의 실패와 함께 구속된 인간관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구속의 계약(Covenant of Redemption)은 동시적으로 작동되었다. 이는 타락이전 창조 계약 당시 저주의 말씀과 동시에 이미 결정되어진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속의 계약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과의 관계는 인간의 죄로 인해 끝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공의대로 라면 인간에게는 실제로 심판이 내리어져 피흘림과 죽음밖에는 없다. 그러나 죽기까지 희생하기로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은혜로운 특성의 신비는 심판의 한 가운데에서 구속의 희망으로 나타나 하나님은 이제 자기 백성을 구속하기 위하여 자신을 스스로 묶은 것이다.
  이 구속의 계약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대표자이신 성부와 하나님의 백성의 대표자이신 성자가 맺은 계약으로서, 성자는 성부가 주신 백성에 대한 의무를 맡고, 성부는 성자의 속죄 사역을 위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성자에게 약속한 것이다. 이는 영원한 계약이요, 은혜의 언약으로“구속의 계약”의 기초이다.
  그러므로 구속된 인간관에 있어서 성자 하나님은 그 성취자요, 완성자이시다. 성자 하나님의 명칭은 예수36)(Jesus), 그리스도37)(Christ), 인자38)(the Son of Man), 하나님의 아들39)(the Son of God), 주40)(Lord) 등으로 하나님께서 계시해주셨으며, 구속된 인간관을 완성하기 위한 신성41)(Divinity)과 인성42)(Humanity)의 이성(二性)의 필요성43)을 가지셨다. 특히 인성의 신분44)(States)을 가지심으로 자기를 비워 종의 신분보다 더 낮게 비하(Humiliation)하셨다.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도저히 만족시킬 수 없는 인간, 하나님의 형상으로 다시 회복될 수 없는 저주를 받은 인간, 피를 흘리며 죽을 수밖에 없는 그 비참한 인간관의 생생한 현장을 대신하여, 흠이 없고 죄가 없으신 성자 하나님께서 그토록 비참하게 낮아지셔서 생명의 본원으로 다시 회복시키시는 그 놀라운 은혜의 언약을 완성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인간 마리아의 태(胎)중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었다(Inca- rnation)는 사실을 우리는 의심없이 믿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중보적 과업에서 오는 사단의 공격, 백성의 증오와 불신, 원수들의 박해, 그리고 육체적 패배의 수난(Suffering)과 영혼의 고민과 고초, 윤리적 완전성과 의(義), 진(眞), 성(聖)에 대한 열정 때문에 오는 더 큰 고난, 시험 등이 바로 타락한 우리의 그 생생한 마음과 몸에 현장성이라는 것을 더욱 믿지 않을 수 없으며, 당시 사실적인 사법적 선고에 의하여 가장 극악 무도한 죄수에게 내려지는 십자가의 처참한 피흘림과 육체적인 죽음(Crucifixion)은 우리 자신의 비참한 그 저주를 대신 담당하신 그 놀라운 구속의 은혜로 믿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특히 장사(Burial)되어 음부 강하(陰部降下)로 까지 내려가신 것은 타락한 인간이 받아야할 죄의 궁극적인 한 부분을 대신 담당하심으로 우리의 타락한 죄의 본질은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burial)된 것이다. 그것은 옛 사람을 떠남과 버림, 그리고 그 파멸을 의미한다.
  이것은 구속받은 인간관의 시작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하나님의 계약의 목적이 달성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구속된 인간관은 새 인간상의 대표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비적 연합(Mystical Union)이다. 이 신비적 연합의 모든 축복들은 구속적 계약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로부터 나온다.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서 기초한 성령 하나님의 초자연적, 신비적 사역이다. 이 신비적 연합의 특성은 유기적이며, 생명적이요, 성령으로 중재된 상호 행동적, 영적 인격의 특성을 갖는다(롬8:2). 그러므로 구속된 인간관은 중생과 구원의 목적인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케 한다. 즉 죄인 스스로의 아무런 공로 없이 오직 그리스도의 의(

)를 전가 받음이요, 그리스도의 변화시키는 생명력으로 영육간에 변화가 오는 것이다.
  이 변화는 궁극적이요, 전적으로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안에서이다. 이 구원에는 차서(Ordo Salutis[Way of Salvation])가 있다. 구원의 차서란 구속된 인간관을 위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며, 전적 은혜인데, 성령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적용해주시는 그 주관적이며, 논리적인 과정이다. 개혁 교회의 대표자 칼빈(John Calvin)은 그의 책 기독교 강요 3권에서 이에 대한 조직적 설명을 가했다. 그 일반적인 순서는 소명→중생→회심(회개와 신앙)→칭의(양자)→성화(견인)→영화이다.
  그러므로 구속의 계약(Covenant of Redemption)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속된 인간관은 여전히 그리고 영원히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세워진 최초의 약정, 그 창조의 계약아래 놓여져 있다. 따라서 창조 질서에 의한 넓은 책임(안식일, 결혼, 노동)과 특수 책임인 본질적 성질의 금지시험이 여전히 작동되고 있다.
  특히, 본질적 성질의 금지시험이란, 인간의 인식 속에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불신앙과 교만이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그 자율적 의지를 잘못 오용하여 스스로 인식의 주체를 만들고 진리를 판단하며 선악의 기준을 세우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지금도 구속받지 못한 인간의 인식 속에서는(세속 철학) 인간이 넘볼 수 없는 불가항력의 요소들인 죽음, 고통, 허무를 스스로의 판단 속에서 해결하겠다는 미련함을 보이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이러한 사실의 원인 제공자는 타락한 인간 자신이며, 그것에 따른 하나님의 공의로 인간에게 찾아온 죽음이기 때문에 그 해결 자는 역시 하나님 한 분 뿐으로, 이미 그리스도의 부활(Resurrection)을 통하여 구속된 인간관의 실상이 보여졌다.
  이 부활은 구속된 인간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과 교만,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고 진리의 체계를 규정짓는 그 오만하며 비참한 타락된 인식의 세계가 그리스도의 피의 산 제사로 완전히 죽고, 하나님의 형상의 육체와 영혼이 재 연합하여 회복됨으로 영생의 조건이 만족되었다는 성부 하나님의 선포이기 때문이다. 타락한 진리의 인식 체계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완전한 승리인 것이다.
  참 인간의 이성적 영혼의 본성이 바로 이 부활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구속된 인간관은 이 부활을 준비하는 실제적인 과정인 것이다. 구원의 차서에 의한 그 주관적, 논리적, 조직적인 설명은 구속된 인간관을 형성시켜 미래적 부활을 맞이하게 하기 위한 신비한 본래의 이성(理性)이요, 철학(哲學)이다.

교육이란 인간이 지식, 교양, 품성 등을 선하게 지니도록 이끄는 것으로서, 특히 인간관(人間觀)을 매개로 해서 성립하는 작용이다. 그 기본 원리는 철학의 터 위에 기초한다.
  특히 기독교 교육철학은 이와 같은 인간관의 구명(究明)을 기독교 철학의 기본 원리 위에서 연구하는 학문이다.
  여기에는 창조된 인간관, 타락된 인간관, 구속된 인간관 등이 있다.

1.창조된 인간관

창조된 인간관은 비이성적(非理性的)인 면과 이성적(理性的)인 면, 두 가지가 있다.

(1)비이성적인 면의 창조 의의와 그 목적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에게 비이성적(非理性的)인 면이 있다라는 것을 바르게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크리스천에게 있어서나 무신론의 일반인에게 있어서나 그 단편적인 지식의 오해로 말미암아 서로의 편파적인 주장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무신론의 일반론적인 인식은 인간의 비이성적인 면을 어쩔 수 없이 인정은 하면서도 그 인식의 세계 안에서는 철저히 무시하고 제외시켜 버린다. 다시 말하면 천재지변과 같은 불가항력을 인정은 하면서도 인간이 인식할 수 없다하여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그 성향이다. 특히 철학적으로는 불가지론(不可知論)29)이 바로 그와 같은 성향이다. 이로부터 또한 발생되는 것이 진화론이고, 이 진화론은 결국 범신론에 인도되고, 유물주의로 나아가는 길잡이가 된 것이다. 다음은 초연신론(deism)30) 역시 자연법칙에 대해서 하나님을 방관자로 몰아 내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인간 이성의 직관적 인식 그 자체의 양상을 놓고 기독교 철학에 밝은 사상가31)들은 지적하기를,“인간들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대한 폭넓은 책임을 감히 떠나고자 하는 욕망을 표시한다”라고 정확하게 지적하였다.
  또 그와는 반대로, 크리스천들은 창조된 인간관의 이성적인 면을 무시하고 비이성적인 면을 너무 추종하는 나머지 하나님을 무속화(巫俗化)시켜 버리고, 기복화(起伏化)시켜 버렸다. 이것 역시 극히 잘못된 신앙 관으로, 특히 우리 한국의 기독교 문제이다. 이런 점에 있어서 기독교 교육철학의 그 중요성이 새삼 증가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상(성경) 안에는 분명한 철학과 이성이 존재함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두 가지 측면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관에는 비이성적인 면이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정하는 사례들을 살펴보았다. 그러므로 인간의 비이성적인 창조의 의의는 성경에 밝혀진바, 하나님의 계시(자연계시와 특별계시)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으며 어디까지나 부인할 수 없는 피조물의 본질로서 창조자에 의존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다음으로 인간의 비이성적인 창조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창조자 하나님의 영광을 전적으로 드러내게 한다는 것에서 그 본질을 찾을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는 없으나 그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비이성적인 면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시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실 예는 성경과 믿는 자들 속에서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즉 인간의 비이성적인 면의 창조 목적은 최고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보편적 속성을 나타내 보여주기 위함이다.

(2)이성적인 면의 창조 의의와 그 목적

  인간이 이성적(理性的)이다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이 말의 뜻은 타락한 인간의 이성(

)32)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타락이전 본래의 하나님의 형상인“이성적인 영”(

)을 말한다. 이는 인간이 이성적인 영적 본성을 소유한 것(

, 고전15:46)을 말함으로, 인간의 영적 본성의 성향은 - 생각하고(知), 느끼고(感), 의지 결단하는(情) 능력 - 의“이성적인 영”(고전2:11-12)이다.
  이것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 인간에게만 있는 것으로 참된 사람이 되게 하는 까닭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본질적 부분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진정한 이성적인 부분으로서 신적이고 영원한 일을 깨닫고 붙잡는 능력인데, 하나님의 성령이 그 영향력을 행사하시는 부분이다.
  그러므로 본래 영(靈)이라고 하는 것은 무속적 의미로, 또는 무작정 초월적 의미로 간주되어, 이성적인 감각이 전혀 없거나, 무딘 것이거나, 또는 조잡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인 영적 본성을 극히 왜곡시키고, 결핍되게 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다시 분명히 말하건대 영은 알고, 바라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능력을 소유한 이성적 본질 그 자체이다. 이“이성적인 영”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능력이며,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기쁨으로 얻는 능력이다. 즉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그 능력이다.
  그러나, 이 능력이 슬프게도 타락이후 죽어버렸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찾아낸 칼빈의 전적타락, 전적 무능력이다.
  그리고, 이것은 창조자 하나님의 구속의 언약에 의한 성취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회복되는 것으로 전 인류적, 전 인격적인 것이며 생명의 본원, 생명의 원리로 다시 살려서 깨끗하게 완성해 놓으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성적인 영이다.
  그러므로 인간 이성의 모든 활동에 있어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그 자체는 곧 회개의 대상이며 천국을 소유하지 못하는 그 원인이다. 세상의 교육철학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가운데 제아무리 지식과 교양, 품성을 가르친다고 한들 참된 인간상을 길러내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이 이성적인 영적 존재로 창조된 데에는 그 깊은 목적이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며 보여주기 위함이다.

  인간이 이성적 본질의 영적 존재로 창조된 것은 하나님의 원형적인 형상을 그대로 빼어 닮은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속성(Attributes of God)을 그대로 드러내며 보여주기 위함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자기를 중심으로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살게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 제일주의로 그 인격적 행동이 나타나 하나님의 영광과 그 속성을 드러내며 보여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타 피조물들과는 판이하고 다르게 이성적 본질의 영적 존재로 창조하신 것이다. 물론 이성과 인격적인 성향이 없는 전 우주적인 피조물들을 통하여서도 하나님의 영광과 속성이 잘 나타난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계의 모든 피조물들은 그 자체의 경각심이나 조심성 그리고 자제하는 자율성을 지니지 못한다. 역시 마찬가지로 자율적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속성을 드러내며 보여주지 못한다. 또한 어떤 것을 선택할 자유의지도 갖지 못한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않다. 사람은 모든 피조물 위에 가장 높은 위치로 창조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하였다. 인간의 이러한 이성적 본질의 영적 존재성은 첫째로,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생활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여야 하며. 둘째로, 그와 같이 내 이웃을 내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마22:37-40). 이것은 이성적 본질의 영적 존재인 인간이 하여야만 하는 것으로 그 의미는 광의적이며 폭 넓은 책임이 있음을 말한다.
  먼저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며, 다음은 내 이웃의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많은 사람들과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자연 만물을 사랑하고 보호함으로 역시 하나님의 영광과 그 속성을 드러내며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셋째로, 내가 죽기까지 희생할 때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선택하여 주시고 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죽기까지 희생함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그 견인불발(堅忍不拔)의 은혜에 우리도 또한 그 견인불발의 투지로 하나님께 보여드려야 하는 것이다.
  세속의 철학을 주도하는 이성은 도무지 희생할 줄 모르는 자기 영광과 자기의 속성을 자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철학은 내가 희생함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며 내 이웃을 기쁘게 하고, 삼라만상의 자연 환경까지도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며, 영적 부흥, 심령 대 부흥33)이 된 자이다.

둘째로, 하나님의 보편적 속성을 전달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보편적 속성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피조물 인간과 공통되는 속성으로서 공유적 속성(Communicable Attributes)이라고도 한다.
  여기에는 1)영성(Spirituality). 2)지성(지식, 지혜, 진실성). 3)도덕성(선(善)-사랑, 은혜, 자비, 오래 참으심, 거룩등. 의(義)-보수적, 응보적 의). 4)주권성(주권적 의지, 주권적 능력) 등이 있다.
  이와 같은 보편적 속성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 속에 이미 전달되어진 속성들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속성들이 우리로 하여금 드러내며 보여지게 하기 위해서 이성적인 면으로 창조된 것이다. 아울러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이와 같은 하나님의 보편적 속성들이 진정으로 드러나야 한다. 이것 역시 창조 약정의 넓은 책임인 것이다.

(3)하나님의 절대적 속성을 우러러 앙모하며 경배하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절대적 속성은 인간이 갖지 못하는 하나님만의 절대적 속성(Incom- municable Attributes)들이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 속에 전달되지 아니한 하나님만의 속성들이다. 여기에는 1)독립성(자존성). 2)불변성. 3)무한성(완전성, 영원성, 무변성). 4)통일성(단수성, 단순성) 등이 있다.
  이와 같은 하나님만의 절대적 속성들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모든 피조물 위에 빼어난 인간으로부터 그 자율성에 의하여 우러나는 영광과 찬양, 곧 예배를 받으시기 위함이다.

 

  2.타락된 인간관

(1)죄의 기원

  죄의 기원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찾아보면, 하나님과 첫 아담(모든 사람들 개념) 사이에 맺어졌던 독특한 관계인 창조의 계약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 창조의 계약은 하나님만의 절대주권적인 창조행위가 하나님 자신의 형상과 모양으로 인간을 창조함으로써,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맺어지는 최초의 약정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약정의 구체적인 면은 창조계약의 특수한 면으로서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금지, 또는 시험에서 제기된 인간의 특수책임과 연관되어지는 것으로, 여기에는 하나님 절대주권의 삶과 죽음이 내재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에게 부과된 창조계약의 특수한 면이요, 그 명령에 대한 인간의 특수한 책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7), 라고 피로 맺은 그 대원칙을 세우셨다.
  이 대원칙은 창조주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을 그 피조물 인간이 감히 넘볼 수 없음이며, 오로지 찬양과 영광, 경배(예배)의 대상뿐임을 말한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하나님의 허용작정(permissive decree)도 동시에 작동된다. 즉 하나님 절대 주권의 금지시험을 파기하는 인간의 교만이 일어 날 때는 사단(tempter)의 유혹(tempt)이 어김없이 찾아오는 것이다. 이 금단의 법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전체 삶과 연관이 깊은 것으로, 하나님이 인간을 시험하는 데 그 초점이 맞추어진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전인격적인 모든 행위가 특수한 책임을 갖고서 하나님의 창조계약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비이성적인 면과 이성적인 면을 갖는 영적 존재로서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을 자율적으로 인정하여 찬양하고 경배하여야 하며, 또 인간 속에 전달된 하나님의 공유적 속성을 인간의 전반적인 삶 속에서 드러내며 보여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악과에 대한 금지시험은 창조계약의 특수한 면으로서, 구체적으로 인간에게 요구된 복종이 철저하게 근본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하는 이유, 복종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유 의지의 자유로운 존재 인간은 주권적인 창조자의 말씀 밑에서 자율적으로 겸손하여 복종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이다.
  선악과에 대한 금지시험은 창조자에 대한 인간의 복종을 면밀히 검토하는 데 초점이 있다. 이제 이 금지시험의 목적은 복종 자체를 위해 복종을 기꺼이 선택하는 인간의 의지로 좁혀진다. 인간 행동의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인 것이다. 인간의 실존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데 달려 있는 것이며, 이것은 하나님이 명한 모든 것을 즐거이 믿는 가운데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러한 명백한 창조계약의 특수한 면(선악과 금지시험, 창2:16, 17)이 인간의 교만(superbia, 

)으로 인하여 사단의 유혹을 받고, 영적 세계의 타락을 가져와 인류의 조상 아담이 타락함으로 전 인류가 타락하는 죄의 기원(원죄, Original Sin)이 된 것이다(창3:1-7).

(2)죄의 결과

  죄의 결과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한 인간은 창조시 이성적인 면의 영적 본성(

)을 또한 상실함으로 참 인간으로서의 영적 활동이 불능하게 되었다. 인간 정신세계의 본질인 이성적인 영적 본성의 상실은 첫째, 지성적인 면에서 불 신앙과 교만(Superbia)을 불러왔다. 둘째, 의지적인 면에서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욕망(To be as God)을 불러왔다. 셋째, 감정적인 면에서 방종(Concu- piscence)에 빠졌다.
  이로 인하여 인간은 전적 부패, 전적 무능력하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못하게 되고, 부패 의식(수치감)과 죄책 의식(양심)에 사로잡히게 되고, 사망의 법에 종속하게 되었다(엡2:3).
  이와 같은 죄의 결과는 전적으로 첫 사람 아담의 타락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지, 하나님은 죄의 창시자가 아니다. [아담(

)은 성경에서 일반적인 인간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는 히브리 용어이기 때문에“모든 사람”즉 인간의 개념이다.]
  다시 말하여 타락 이전에도 인간들은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posse peccare)속에서 살았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당신의 비공유적 속성 외에는 모든 것을 거의 다 인간에게 전달(communicable)했다는 그 확실한 증거가 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 자율적인 자유 의지 안에서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까지도 가졌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금지시험을 어기지 않는 한 인간은 영원한 축복 속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인류 역사의 고고학적인 발견이 불확실해서 그렇지, 성경적으로 볼 때는 타락이전의 인간의 삶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시간의 개념을 내포한다. 영적 본성의 이성을 갖고 참된 인식 속에서 참된 사람으로 삶을 누렸던 첫 사람 아담이 그 자유 의지 안에서 창조 질서의 특별한 책임을 파기해버린 그 결과는 타락이후 전 인류에게 그대로 전가되고, 자연계까지도 저주를 받는 상상할 수 없는 창조주 하나님의 진노아래 놓이게 된 것이다.
  타락한 인간의 유전, 전통 그 관습은 그 후손 대대로(generation after gener- ation) 이성적인 영적 본성의 불구자가 되어 태어나고 죽고를 반복하면서, 여전히 사탄의 그 유혹(tempt) 속에서 헤어 나오지를 못하고 있는 것이다. 타락한 인간의 정신은 프시케(사이키)적인 이성이 되어, 욕망과 그 욕구적인 면만을 강조하는 육적인 주체를 중시하여 물질적 수준에 사는 도무지 희생할 줄 모르는 죽음, 고통, 허무의 존재가 되어 버렸다.
  세속적인 철학이 그러하듯이 직관적 인식, 감각적 인식만을 부르짖으며 철학은 필로 소피아(philosophia < Gk. 

 wisdom)라고 하여 자연발생적 사랑의 지혜라고 하며, 로맨틱한 사랑 중에 사랑(the romance of all rom- ance)이라고 울부짖는다.
  그리고 인간 심리학이나 정신 분석학은 타락이후 형성된 인간의 그 이성(사이키[psyche < 

])만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러므로 프로이드는 특히 타락한 인간의 성적 욕망을 자신의 심리학에 끌어 드렸다.
  그런가 하면 교육은 가르치는 것을 강조한 나머지 선생을 하나님처럼 만들어 놓고, 사이키적인 철학의 발상을 기초 개념으로 하여 인간 주체의 진화론적 교육과 주입식 교육에 열을 올리면서, 일류대학 일류학생만을 고집 하는 가운데 어린 학생들은 더 큰 고통 속에 놓이게 되었다. 요즈음 특히 체벌이 문제가 되어 때리지 말아야 되느니 몇 대까지는 때려야 되느니 등등 웃지 못할 그 희한한 발상까지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도무지 희생할 줄 모르는 타락한 인간의 그 유전인 것이다.
  인간의 참 이성, 그 인간 정신세계의 근본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에게 이성적인 면을 불어넣어 창조하시고, 그것이 또한 인간의 영적 본성이 되게 하셨다.
  크리스천이 이성을 도외시하는 것도, 무신론자가 하나님을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것도, 모두 다 타락한 그 유전, 전통, 관습에 의한 결과이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의 복음의 제일성은“회개하라”(

)이다. 인식의 개조, 타락한 이성의 철저한 개조인 것이다. 영적 부흥은 그리스도에 의해 하나님의 형상에 의한 이성을 되찾는 것이다., 아 멘.

(3)타락된 인간의 딜레마(Dilemma)

  딜레마는 헬라어서 왔다(dil?mma < Gk. di-twise, double + l?mma, assumption) . 그 뜻은 양도(兩刀) 논법인데, 이것은 어느 논법을 취해도 불리한 것을 말한다. 즉 궁지에 몰린 것 또는 진퇴 양난에 빠진 것, 그 곤란한 상태를 말한다.
  마찬가지로 타락한 인간의 이성은 본래의 철학 개념인 하나님의 사상(성경)을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까닭에 딜레마에 빠져있다.
  이와 같은 혼미한 철학 사상들이 전세계적으로 퍼져있고, 전 세계인들의 모든 영역에 걸쳐 전반적인 삶 속에 침투해 있다. 서양 철학, 동양 철학, 인도 철학의 세계 3대 철학은 신학적으로 볼 때 이미 양도 논법의 진퇴 양난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양 철학은 서양 철학에 밀려 나 있고, 문명이 발달할수록 서양 철학 역시도 그 논리에 근거를 놓고 서로 물고 물리는 곤란한 상황을 거듭하고 있다. 특히 서양 철학은 19 - 20세기에 들어서서 급속도로 변화되고 있는 추세이다.
  21세기 밀레니엄 새 천년을 맞이하는 세계 지식인의 사회는 미리부터 그 사상의 변화 추이를 놓고 갑론을박(甲論乙駁) 중이다.
  다윈의 진화론은 이미 그 근거를 잃었고, 인류의 종교 의식은 청동기가 아닌 신석기부터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도무지 인식할 줄 모르는 인간의 비이성적인 면을 깨끗이 인식하라는 표징(sign)들은 그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다. 해마다 찾아오는 자연 재해가 그러하고, 검출도 처방도 할 수 없는 슈퍼 박테리아의 출현이 그러하다. 더군다나 이 죽음의 세균은 인간의 병의학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병원에서부터 발병하고 있다.
  인간들이 자칭 첨단을 지향한다는 소프트웨어 기술은 하찮은 곤충 한 마리의 초정밀도 앞에서 맥을 못 추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무시하고 사이키적인 발상을 계속하는 한, 인간의 정신세계는 영원한 정신병자들의 괴로운 행진일 뿐이다. 어떻게 타락한 성적욕망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한 인간의 심리를 파악할 수 있으며, 치료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제 우리는“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고 급박하게(at hand) 재촉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발견하고 통찰할 줄 알아야 한다. 기독교는 무신론의 사이키적인 인식의 세계에서 말하는 대로 일반적인 종교가 아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 정신세계의 그 근본으로 본래의 철학 사상이요, 본래의 인간 이성이다. 기독교 철학이 이 세상을 정복하고 그 바탕 위에 기초한 기독교 교육이 이 세상을 인도할 때, 진정한 참 인간상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3.구속된 인간관

  구속된 인간관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자신의 모양과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함으로서 하나님은 자신과 인간사이에 창조 계약이라는 독특한 관계를 세우셨다는 것으로부터 출발을 하여야 한다.
  이 창조 계약은 하나님 절대주권적 행위로서 하나님은 이 주권적인 창조 행위에 덧붙여 인간의 역할이 결정되게 하였다. 즉 하나님과 인간의 창조 계약은 일반적인 면과 구체적인 면에서 검토되는 데, 창조 계약의 일반적인 면34)은 창조주에 대한 인간의 넓은 책임과 연관되어지고, 창조 계약의 구체적인 면35)은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금지시험에서 제기된 인간의 특수 책임과 연관되어진다.
  특히 창조 계약의 구체적인 면, 금지시험은“선악과를 먹지 않는 것”(창2:16, 17)으로서 이는 최초의 죄의 본질적 성질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불신앙과 교만(Superbia)이며, 인간 스스로 선악의 결정자가 되어 신(神)이 되고자 하는 자율적 의지의 인간의 욕망이다. 하나님은 바로 이것을 금지하고 시험하는 데 그 초점을 두고, 선악과를 먹지 말 것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법제화 시켰다. 이 명령 또는 법은 인간에게 있어서 철저히 복종해야 할 보다 근본적이며 결정적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더 구체적(형식적 성질의 말씀“선악과”제시)으로 특수한 책임이다. 이 특수한 책임이 근본적이며 결정적이다 라는 것은 삶과 죽음의 연장선상에 서 있는 피로 맺은 약정(“정녕 죽으리라”,창2:17)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적 신앙에서 피의 강조는 창조 계약에 있는 죽음까지의 강제적인 것(mandatory)임을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 처음 계약을 어기면 피로 대신하는 것 외에는 그 죽음의 저주로부터 구원의 방법이 없게 된다. 즉 이 처음 계약을 파기한 피조물 인간에게서는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구원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공의를 만족시킬만 한 어떤 것도 타락된 인간관 속에는 없기 때문이다. 오직 이것을 만족케 할만한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 스스로가 창조의 궁극적인 저주를 스스로 지게 됨으로써 구속된 인간관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창조의 계약 밑에서 인간의 실패와 함께 구속된 인간관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구속의 계약(Covenant of Redemption)은 동시적으로 작동되었다. 이는 타락이전 창조 계약 당시 저주의 말씀과 동시에 이미 결정되어진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속의 계약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과의 관계는 인간의 죄로 인해 끝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공의대로 라면 인간에게는 실제로 심판이 내리어져 피흘림과 죽음밖에는 없다. 그러나 죽기까지 희생하기로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은혜로운 특성의 신비는 심판의 한 가운데에서 구속의 희망으로 나타나 하나님은 이제 자기 백성을 구속하기 위하여 자신을 스스로 묶은 것이다.
  이 구속의 계약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대표자이신 성부와 하나님의 백성의 대표자이신 성자가 맺은 계약으로서, 성자는 성부가 주신 백성에 대한 의무를 맡고, 성부는 성자의 속죄 사역을 위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성자에게 약속한 것이다. 이는 영원한 계약이요, 은혜의 언약으로“구속의 계약”의 기초이다.
  그러므로 구속된 인간관에 있어서 성자 하나님은 그 성취자요, 완성자이시다. 성자 하나님의 명칭은 예수36)(Jesus), 그리스도37)(Christ), 인자38)(the Son of Man), 하나님의 아들39)(the Son of God), 주40)(Lord) 등으로 하나님께서 계시해주셨으며, 구속된 인간관을 완성하기 위한 신성41)(Divinity)과 인성42)(Humanity)의 이성(二性)의 필요성43)을 가지셨다. 특히 인성의 신분44)(States)을 가지심으로 자기를 비워 종의 신분보다 더 낮게 비하(Humiliation)하셨다.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도저히 만족시킬 수 없는 인간, 하나님의 형상으로 다시 회복될 수 없는 저주를 받은 인간, 피를 흘리며 죽을 수밖에 없는 그 비참한 인간관의 생생한 현장을 대신하여, 흠이 없고 죄가 없으신 성자 하나님께서 그토록 비참하게 낮아지셔서 생명의 본원으로 다시 회복시키시는 그 놀라운 은혜의 언약을 완성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인간 마리아의 태(胎)중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었다(Inca- rnation)는 사실을 우리는 의심없이 믿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중보적 과업에서 오는 사단의 공격, 백성의 증오와 불신, 원수들의 박해, 그리고 육체적 패배의 수난(Suffering)과 영혼의 고민과 고초, 윤리적 완전성과 의(義), 진(眞), 성(聖)에 대한 열정 때문에 오는 더 큰 고난, 시험 등이 바로 타락한 우리의 그 생생한 마음과 몸에 현장성이라는 것을 더욱 믿지 않을 수 없으며, 당시 사실적인 사법적 선고에 의하여 가장 극악 무도한 죄수에게 내려지는 십자가의 처참한 피흘림과 육체적인 죽음(Crucifixion)은 우리 자신의 비참한 그 저주를 대신 담당하신 그 놀라운 구속의 은혜로 믿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특히 장사(Burial)되어 음부 강하(陰部降下)로 까지 내려가신 것은 타락한 인간이 받아야할 죄의 궁극적인 한 부분을 대신 담당하심으로 우리의 타락한 죄의 본질은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burial)된 것이다. 그것은 옛 사람을 떠남과 버림, 그리고 그 파멸을 의미한다.
  이것은 구속받은 인간관의 시작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하나님의 계약의 목적이 달성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구속된 인간관은 새 인간상의 대표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비적 연합(Mystical Union)이다. 이 신비적 연합의 모든 축복들은 구속적 계약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로부터 나온다.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서 기초한 성령 하나님의 초자연적, 신비적 사역이다. 이 신비적 연합의 특성은 유기적이며, 생명적이요, 성령으로 중재된 상호 행동적, 영적 인격의 특성을 갖는다(롬8:2). 그러므로 구속된 인간관은 중생과 구원의 목적인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케 한다. 즉 죄인 스스로의 아무런 공로 없이 오직 그리스도의 의(

)를 전가 받음이요, 그리스도의 변화시키는 생명력으로 영육간에 변화가 오는 것이다.
  이 변화는 궁극적이요, 전적으로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안에서이다. 이 구원에는 차서(Ordo Salutis[Way of Salvation])가 있다. 구원의 차서란 구속된 인간관을 위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며, 전적 은혜인데, 성령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적용해주시는 그 주관적이며, 논리적인 과정이다. 개혁 교회의 대표자 칼빈(John Calvin)은 그의 책 기독교 강요 3권에서 이에 대한 조직적 설명을 가했다. 그 일반적인 순서는 소명→중생→회심(회개와 신앙)→칭의(양자)→성화(견인)→영화이다.
  그러므로 구속의 계약(Covenant of Redemption)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속된 인간관은 여전히 그리고 영원히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세워진 최초의 약정, 그 창조의 계약아래 놓여져 있다. 따라서 창조 질서에 의한 넓은 책임(안식일, 결혼, 노동)과 특수 책임인 본질적 성질의 금지시험이 여전히 작동되고 있다.
  특히, 본질적 성질의 금지시험이란, 인간의 인식 속에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불신앙과 교만이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그 자율적 의지를 잘못 오용하여 스스로 인식의 주체를 만들고 진리를 판단하며 선악의 기준을 세우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지금도 구속받지 못한 인간의 인식 속에서는(세속 철학) 인간이 넘볼 수 없는 불가항력의 요소들인 죽음, 고통, 허무를 스스로의 판단 속에서 해결하겠다는 미련함을 보이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이러한 사실의 원인 제공자는 타락한 인간 자신이며, 그것에 따른 하나님의 공의로 인간에게 찾아온 죽음이기 때문에 그 해결 자는 역시 하나님 한 분 뿐으로, 이미 그리스도의 부활(Resurrection)을 통하여 구속된 인간관의 실상이 보여졌다.
  이 부활은 구속된 인간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과 교만,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고 진리의 체계를 규정짓는 그 오만하며 비참한 타락된 인식의 세계가 그리스도의 피의 산 제사로 완전히 죽고, 하나님의 형상의 육체와 영혼이 재 연합하여 회복됨으로 영생의 조건이 만족되었다는 성부 하나님의 선포이기 때문이다. 타락한 진리의 인식 체계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완전한 승리인 것이다.
  참 인간의 이성적 영혼의 본성이 바로 이 부활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구속된 인간관은 이 부활을 준비하는 실제적인 과정인 것이다. 구원의 차서에 의한 그 주관적, 논리적, 조직적인 설명은 구속된 인간관을 형성시켜 미래적 부활을 맞이하게 하기 위한 신비한 본래의 이성(理性)이요, 철학(哲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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