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철학 동양 철학

기독교 철학 3

하나님아들 2025. 5. 21. 23:25

기독교 교육 철학 3

 

 기독교 교육 철학에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 개념(形像槪念)은 극히 기본적인 개념이다. 아니 이 개념은 본래 철학의 본질적인 개념이다. 이 본질을 무시하고 제외시킴으로 세상의 철학들은 죽음과 고통, 허무와 혼돈 속에서 방황하고 있다. 모든 사물의 원리를 바르게 탐구하여 인간의 삶을 궁극적으로 그리고 진리로 향할 수 있도록 그 바른 지침이 되어야할 철학이 이렇듯 혼미한 상황이라면,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있어서 큰 책임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본 장에서 기독교 교육 철학의 바른 개념을 열거하여 세속적 철학 개념의 오명을 씻고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바른 개념을 정립해 보자.

 

  1.형상 개념(Image Idea)

  형상 개념(形像槪念)은 모든 만물을 이해하는 원리를 구명(究明)하는 하나의 의미 깊은 사실이다. 이 개념은 형상(image)이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그 유사성, 그 닮음 꼴을 말한다. 즉 거울에 비친 모습(모양)을 통하여 실물을 아는 것과 같은 부인할 수 없는 이치(理致)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었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철학적 기본 개념에 큰 영향을 주는 깊은 의미의 말씀이다. 왜냐하면 보이는 것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것의 그 이념과 속성을 분명하게 드러나게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개념은 철학의 근본 원리에 정확하게 규합되는 하나의 사실적인 법칙으로서 철학(哲學)은 가설(假說)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모든 영역에 걸친 사물(事物)의 근본 원리를 추구하는 학문으로 자연과 사회 전반에 걸친 일반적인 법칙성을 탐구하게 하는 촉매제 역할을 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 형상 개념, 또는 모양 개념은 창 1:26에 명확하게 규정지어져 있다. 형상은 

 - image 이며, 모양은 

 - likeness 로 그 뜻에 있어서는 유사, 닮음이라는 동의어로 취급된다. 다시 말하여 동의어의 반복이라는 점에서 볼 때 형상 개념(Image Idea)을 특별히 강조한 하나님의 깊으신 의도가 숨어있는 것이다.
  또한 이와 같은 개념은 비단 인간 창조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광의적(廣義的)이며 근본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 철학인 것처럼 하나님의 전 우주적인 창조물, 즉 모든 만물을 이해하는 원리에 대한 사실을 탐구하는 그 자체로서 철학을 위한 근본 원리로 존재하는 하나의 사실적인 법칙이다.
  그러므로 이 보이는 형상 개념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실물의 그 생생한 존재성과 그 속성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는 것을 어느 누구도 핑계치 못한다고 사도 파울은 말하였다(롬1:20).
  그리고 형상 개념으로 나타난 인간 창조의 그 계획 속에는 인간을 모든 만물의 우두머리로 창조하심으로 인간에게 하등 영광(lower honor)15)을 부여하셨다는 것은, 곧 창조자 하나님 자신의 고등 영광(glory of God)을 동시적으로 이미 선포하셨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그리고 특히 인간 창조에 있어서 형상 개념이 의미하는 최고의 목적은 하나님이 영이신 것처럼 인간을 그 유사한 영적 성질로 창조하여 하나님과 인간과의 친밀한 인격적 교제(spirited fellow-ship)16)를 성취하셨다는 사실이다.
  다시 반복 강조하지만,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인간 창조 목적의 최고 성취이다. 그러므로 또한 형상 개념이 인간에게 의미하는 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으로서만 완전한 만족을 얻게 된다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교육의 기초가 철학이라면 철학의 기초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2.옛 형상 개념(Old Image Idea)

  옛 형상 개념은 타락한 아담의 유전을 따르는 전적 타락, 또는 전적 무능력의 그 형상(Image)과 그 모양(likeness)이다. 즉 인간 타락 이전의 형상 개념의 함축적인 의미가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인간 타락 이후에는 무시되고 제외되어 버린 가운데 허상만을 쫓는 비참한 모습이 되어버렸다. 거울의 바로 앞, 그 면전에 사실적으로 서있는 하나님의 형상(spiritual image) 자체인 자기 자신의 실상을 보면서도, 그 정신면의 인식 속에는 타락한 허상(soul image)만을 쫓는 옛 형상 개념을 그대로 갖고 있는 것이다.
  옛 형상 개념은 타락한 인간 아담의 유전을 따라,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긴 역사의 터널을 지나오고 있다. 즉 타락한 인간의 유전, 전통 그 관습의 옛 것들을 실제의 형상과 모양인 양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상에 있어서 허상( 虛像, virtual image) 17)이다.
  그러므로 이 허상의 본체 안에는 철학의 형상 개념의 기초가 되어야할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무시되고 제외되어 존재할 수가 없다. 심지어 하나님이 불러모은 신자의 무리들까지도 자기들이 만들어낸 허상18) 속으로 하나님을 끌어들인다.
  세속 철학의 인식 개념은 옛 아담의 그 유전을 따라, 옛 형상 개념 안에서 금지 시험19)의 인식 장소를 제 마음껏 넘나들고 있다. 다시 말하여 인간의 정신 세계 안에는 형상 개념의 원초인 영적 장소(spiritual image)가 무능해진 가운데 타락한 혼적 장소(soul image)의 그 허상(ghost image), 망상(fancy image), 공상(idle image)의 비참한 상태에 놓여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인간의 처절한 상태에 직면해 있으면서도“카인의 후예”라고 하는 등, 로맨틱(romantic)하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나를 건져주랴”(롬7:24) 라고 자기 자신을 향하여 철저히 개탄(慨歎)하고 있는 것이다.
  옛 형상 개념은 성경의 모든 말씀 중에서 가장 슬픈 이야기이다. 이것은 인류의 시조 아담이 뱀의 유혹을 받아 금단의 열매를 따먹고 에덴에서 추방되었다는 그러한 형식상의 단순한 범죄 기록이 아니다. 이것은 전 인류에게 미친 죄의 기원을 말하고 원죄(原罪, Original Sin)를 말하는 것으로, 철학의 근본을 제 마음대로 뒤흔드는 타락한 인간의 그 인식의 세계를 지목(指目)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의 형상 개념의 침범할 수 없는 그 불가항력적 인식의 세계를 제 마음대로 혼탁케하여 하나님의 금지 명령을 약하게, 흐리게, 가볍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삭제, 첨가, 변경하는 상상할 수 없는 범죄자의 심리를 그대로 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 원죄 개념에 대하여 사탄(tempter)은 철저한 부정이요, 불순종이요, 대항자이다. 세속 철학의 인식 속에 이와 같은 개념이 그대로 유전되어 우리 앞에 직면해 있는 지금, 아니 온 세상에 이와 같은 교육 철학이 가득한 지금, 더더욱 그와 같은 세속적인 교육을 전혀 여과 없이 받아들인 우리들에게 있어서 엄청난 큰 문제로 우리 인식 속에 자리잡혀 있다는 것을 통찰(洞察, discernment)해야 한다.

 

  3.새 형상 개념(New Image Idea)

  타락한 옛 아담으로 인하여 전 인류가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새 아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시 회복시키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이 개념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형상 개념(New Image Idea in Christ)이라고 한다.
  옛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전 인류에게 미친 옛 형상 개념은 철학의 본질적 개념인 형상 개념(Image Idea = Image of God)을 전적으로 무력화시켰다. 즉 전적 불능이요, 전적 무능력으로 인간의 인식 세계를 약화시켜버린 것이다.
  반면에 뱀(tempter)에 말처럼(창3:4-5) 눈이 밝아져 혼( = soul)적 인식의 세계(psychology)20)가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hold up) 간교(cunning)한 혀를 날름거리면서 무모한 도전과 굉장한 위험을 무릅쓴 쓸데없는 짓, 그 못된 짓을 하도록 하는 인식 세계의 겉잡을 수 없는 충동질 속에서, 혼잡한 생각을 거듭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행위를 서슴없이 함으로, 하나님을 감히 시험(test)하고 노(provoke)하게 하는 그 쾌락의 참으로 못된 유혹(tempt)의 인식이, 인간을 한없는 사망의 구렁텅이로 내 몰리게 하고 있다.
  타락한 인간의 유전, 전통 그 관습은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이 타락한 육적(

 = psyche)인간 존재의 주체적 인식 속에서 인격의 중심을 형성하고, 자아를 형성시키고, 사고와 정서 ` 의지와 행동을 그 스스로 하게 하였다. 이것을 인간 심리학에서는 사이칼러지(psychology)라고 하여 연구의 대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타락한 육적인간 존재의 주체적 인식은 피비린내 나는 고대의 정복의 역사를 통하여 그 문화를 발전시켜 소위 사상을 낳고, 미(美)를 풀고, 문학, 예술, 철학을 낳고, 또 그 맛을 보고 즐기는 그 스스로 한다 하는 자칭 주체적 존재이지만 참된 사람, 참된 문화, 참된 역사, 참된 철학을 이루지 못하는 불확실성의 시대를 대대로(generation) 물려주며 물려받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하 등의 능력은 극심한 정도의 차는 있지만 동물에도 구비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은 사람만이 갖는 것인데, 이것은 영적(

)인 것으로 본래의 철학의 기본 개념인 형상 개념의 본질적 요소이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타락이전 인간 정신세계의 그 근본 개념으로 참된 사람이 되게 하는 까닭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본질적 부분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아는 능력이며,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기쁨으로 얻는 능력이며,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에 설 수 있는 능력이다. 이 능력을 얻은 자는 진정으로 자유 함을 누린다(요14:6, 8:32). 죽음, 고통, 허무가 있을 수 없고 모든 것을 초월하여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가득한 참된 능력이다.
  이 하나님의 능력(

)은 타락한 인간 스스로는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불가항력이다. 왜냐하면 영이신 하나님과 타락한 인간의 육적 정신이 그러하듯이,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저항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하나님의 공의(

 = righteousness)가 작동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변절될 수 없는 하나님의 속성 그 자체로서 완전한 도덕적인 의를 말한다. 이것은 완전하신 하나님의 무흠함, 무죄성, 정결함과 그 위엄성 그 자체로서 도덕적으로 타락한 인간 스스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불가항력인 것이다. 그리고 그 용서를 받지 못할 때는 오직 죽음뿐인 것이다. 따라서 이 경이로운 두려움, 하나님의 속성인 공의를 만족시켜야만 인간의 상실된 영적 능력은 회복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 공의를 만족케 할 자는 타락한 인간으로서는 그 누구도 합당한 자가 없는 것이다. 오직 이 공의를 만족케 할 자는 하나님 자신의 무흠한 피흘림만이 합당한 것이다. 이것은 피로 맺은 약정(bond-in-blood)21) 의로 이미 인간 창조 이전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약 속에서 작정해 놓으신 상호협정으로서 정의되는 계약(a mutual contract)22)이다.
  이 계약의 성취가 성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형상 개념(New Image Idea in Jesus Christ)이다. 이 새형상 개념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만날 때까지는 전적으로 죽어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인류적이며 전인격적인 무조건 선택 - 제한적 속죄 - 불가항력적 은혜 - 궁극적 구원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그 성취 안에서 죽었던 하나님의 형상 개념이 살아나게 하고 새로운 생명을 베풀어주심으로 인하여 타락한 인간의 영과 혼과 몸이 깨끗하게 - 하나님이 받으실 만 하게- 그 도덕적 성질이나 상태, 그 의지나 생각이 하나님의 뜻과 합치되는 완전한 상태의 새 형상 개념을 초자연적으로 기적적으로 우리 속에서 이루시는 것이다. 이것이 참으로 놀라운 회개(

)23)의 인식의 전환이다. 이 놀라운 역사의 대 장정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한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그 성령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의 혼적 요소인 프시케에 역사하여 더 깊은 곳에 있는 프뉴마에 조용히 역사 하시는 것이다. 이로써 타락한 인간의 이성과 감정의 주체는 실제적으로 개조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타락한 인식의 그 주체가 하나님을 깨끗이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인간 정신세계의 그 근본 - 새 형상 개념의 철학적 본질을 완전하게 이루는 것이다.

 

  4.개체(個體)와 공동체(共同體)의 연관성(聯關性)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의 세계는 두 개의 생활을 하게 되어 있다. 하나는 순수한 개별적인 생활이고, 다른 하나는 여러 개체가 서로 연합하는 공동생활이다. 즉 모든 피조물 각각의 개체들은 각기 독립된 개체로서 생활하고, 또 서로 상호간에 연관성을 맺는 공동체로서 생활을 한다. 이것은 개체와 공동체의 올바른 관계로서, 모든 피조물들이 추구하는 목적이며 벗어날 수 없는 질서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 세계에서 생활하는 인간도 역시 개체이면서 공동체 생활의 연관성 안에서 그 목적과 질서를 가지고 삶을 영위한다. 이와 같은 법칙은 인간도 자연물도 벗어날 수 없는 것으로서 창조주 하나님의 계시(revelation) 24)이다.
  그러므로 또한 우리가 피조물임을 잘 알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창조주 하나님에게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창조주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성경적인 하나님의 개념은 어떠한가?
  하나님은 삼위(三位)이시지만 한 분이시다. 즉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

)25)이시다.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오묘하신 그 계시 속에는 개체와 공동체의 긴밀한 연관성이 있음을 보여 주신다. 즉 삼위 하나님의 개체와 공동체로서의 연관성은 여럿이 하나로 전체적인 움직임이 잘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삼위일체의 각 위(位)가 각기 하나님이 되실 뿐더러 하나로 일체(一體)된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의 세계에는 그 계시의 형상을 그대로 반영시켜 본받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개체와 공동체로서의 연관성은 하등 피조물에서 보다 고등 피조물인 인간의 창조에서 더욱 뚜렷하게 잘 나타난다.
  인간의 개체이면서 공동체적인 생활은 가정, 사회, 국가, 세계라는 광범위하고도 폭넓은 영역을 차지한다. 특히 그 중에서도 공동체의 기초 단위인 가정은 더 기초적인 단위인 결혼으로부터 출발을 한다. 이 결혼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세우신 최초의 약정으로서 창조의 계약(Covenant of Creation) 또는 창조의 약정(Bond of Creation)26)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리고 이 창조의 약정에는 일반적인 면으로 안식일, 결혼, 노동이라는 세 가지의 규례를 정해 놓으심으로서 이것은 그 어느 것도 변할 수 없는 창조 규례에 내재된 원칙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규례들은 사실상에 있어서 창조주에 대한 피조물 인간의 넓은 책임과 연관되어진다.
  결혼은 개체이면서 공동체적인 연관성을 나타내는 참으로 신비한 하나님의 창조 규례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그 형상이 그러하듯이 사람이 개체적인 생활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음을 이미 규정해 놓으셨다(창2:18,“사람의 독처함히 좋지 못하다”).
  우리는 이 결혼의 창조 규례에 의해서 개체와 공동체의 연관성 안에 있는 그 목적과 질서를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

첫째, 개체와 공동체간에는 창조 약정에 포함된“상호 결합”의 신비가 주목된다.

  남자와 여자라는 각각의 개체가 창조의 약정에 따라 결혼함으로 서로 하나가 되는 공동체의 연관성을 맺고,“한 몸을 이룬다”는 것은 단순히 완전한 경지에 이르는 여러 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하나됨은 결혼함으로써 갖는“결합의 영속적인 상태”를 표현한다. 이것은 창조 때 이미 정해진 상호 결합의 함축된 의미로서 오로지 창조 질서에 따른 개체와 공동체의 연관성에 의해서 그런 신비한 관계에 들어 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사상을 더욱 분명히 하여 복음으로써 전달하시었다. 이혼 문제를 다루는 말씀에서, “사람을 만드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을 이룰지니라”(

; 마19:4-5, 막10:6-8, 엡5:31).
  즉 하나님의 창조 약정이 각각의 개체를 하나로 연합했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는 둘이 아니고 한 몸이라고 설명한다(마19:6). 그러므로 개체와 공동체간에는 창조 약정에 포함된 상호 결합이 강조되고 있으며, 이는 창조 질서에 의하여 신비하게 상호 결합되는 것이다.

둘째로, 창조 질서는 개체와 공동체간의 질서를 규정짓는 내부 구조를 결정한다.

  사람이 개체로서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그를 돕는 배필”( , a halper corresponding to him)을 만들었다고 하셨다(창2:18).
  즉 여자는 결혼 관계에서 남자를 돕는 자로서 창조되었다. 이는 개체와 공동체간의 변할 수 없는 내부 질서를 분명히 하심이다. 여자의 존재 목적이 남자를 도움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것이 있다.“그와 동등한 돕는 자”이다(창2:20). 이 말의 뜻은 지배력이나 거만함이 전혀 없는 인격적인 면에서 남자와 동등하다는 것이며, 따라서 남자와 여자는 다 똑같이 중요하다 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개체와 공동체간의 내부 질서는 인격의 동등성 안에서 서로 합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된 그 창조 질서에 부합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개체와 공동체간의 내부 질서는 이 세상을 완성하게 하는 목적이 된다. 다시 말하면 가정, 사회, 국가, 세계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그 창조 질서 안에 거하여 인격의 동등 성을 지켜 서로 돕는 자가 되어야 하며 서로 사랑하고 서로 보호하여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거역할 수 없는 창조 질서에 의한 공동체 안에서의 내부 질서이다.
  이제 우리의 사회 질서에는 지위고하, 빈부귀천의 차별을 없애고, 뿌리 깊은 권위주의와 남아 선호사상, 부익부 빈익빈, 학벌, 문벌, 지역 감정, 등등의 말로 할 수 없는 타락의 요소들을 깨끗하게 청소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부가되는 것은 사랑이다. 이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으로 내가 죽기까지 희생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함이요, 그와 같이, 내 이웃을 사랑함이다.
  이제 우리의 사회 질서에는 지배하는 또는 거만한 가장으로서의 질서가 아니라 서로 희생하고 서로 사랑하는 가장으로서 서로 돕는 역할을 충실히 해야만 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고전11:12下半節)이기 때문이다.

 

  5.개별주의와 공동주의의 역사적 고찰(신학적 비판)

  두 주의를 역사적으로 고찰하면, 공동주의는 플라톤(Platon, B. C. 427-347)27)의 이상주의(idealism)에서 발생된 것이고, 개별주의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 C. 384-322) 28)의 자연주의에 의해서 발생된 것이다.
  따라서 중세기의 종교적 공동주의는 플라톤의 이상주의(공동주의)로 인해 발단이 되었다. 이 주의가 중세기 카톨릭 교회 안에서 아무런 여과장치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진 이유는, 그 당시 수도원의 금욕주의가 각기 개별적인 신앙생활로 고조되었으므로 이를 약화시키고자 모색한 나머지 무신론의 공동주의를 그대로 받아들여 강요하게 된 것이다(개체와 공동체간의 극심한 분화 현상).
  그 결과, 공동주의 또는 제도주의의 지배력은 도리어 자연주의적인 개별주의의 강한 욕구를 더욱 불러 일으키게된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따라서 중세기의 종교는 개체와 공동체의 균형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하나님의 약정과 그 창조 질서를 무시하고 제외시킨 개체와 공동체간의 극심한 분화현상은 인식의 극히 좁은 범위에 내포된 의미를 준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식의 보다 넓은 책임이 자주 무시되는 진정한 철학적 본질의 부재인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까지도 간단없이 지속되고 있어서 불확실성의 기약 없는 세월만이 충만할 뿐이다. 이 좁은 관점은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구속 의미를 고찰하는 데까지 연장되어, 그 결과 인간 구원에 대한 교회의 공동체 개념에 큰 결핍을 초래하고 있다. 이로써 기독교회 공동체는 전 세계관과 인생관에 결핍을 가져다주고 있다. 창조 질서에 의한 개체와 공동체의 긴밀한 상호 연합에 의한 그리스도 왕국중심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개체와 공동체간의 극심한 분화현상을 도무지 회개할 줄 모르는 교회중심이 되어 버렸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개체와 공동체간의 극심한 분화현상의 이론을 일반적으로 보편 타당한 것처럼 정립한 것은, 소위 천재적인 철학자라고 알려져 있는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A. D. 1227-1274)에 의해서 이다.
  그는 무신론의 개별주의(자연주의)와 공동주의(제도주의)를 당시에 유행된 카톨릭 공동체의 교권주의와 소위 천재적으로 융화시켜 보편 타당한 종합 이론을 창출해 낸 것이다. 이는 로마 카톨릭 교회 공동체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고 그 공동체의 기초 개념으로서 확립되기에 이른다. 이것이 소위 중세의 아퀴나스 철학이다.
  본래 개체와 공동체는 신비한 상호 연합에 의하여 서로 희생하며, 사랑하며, 돕는 가운데 균형을 이루는 창조 질서에 근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론은 로마 카톨릭 공동체의 그 지배력과 거만함의 제도주의를 자연주의와 교묘히(cunning) 결합시켜 극히 사이키적(프시케)인 보편타당성을 이끌어 낸 것이다.
  그러므로 중세 세계의 그 공동체적 인식은 카톨릭 교회 공동체의 그 지배력과 거만함 속에 잠식되어 버렸다. 아퀴나스의 학설은 신학적으로 볼 때, 소위 은혜와 자연을 대조시킨 것으로 카톨릭 공동주의 곧 그 지배와 거만함의 제도주의를 은혜의 저장소로 둔갑시켜 버렸다. 다시 말하면 아퀴나스 철학의 결론은 공동주의(제도주의) + 자연주의의 카톨릭 교회가 인간의 생명과 죽음을 지배하고 있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13세기와 14세기초에는 중세 교회의 공동주의(제도주의, 교권주의)에 대항하는 자연주의 성향의 개인주의가 활발하게 일어남으로 인해 개체와 공동체간의 불가피한 충돌이 생기기 시작했다. 헬라의 자연주의(개인주의)를 회복시켜 공동체보다는 개체(개인)의 우선을 강조한 르네상스(Renaissance)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여기에도 아퀴나스 철학의“개인들에게 보장된 자연권”이 한 몫 을 하였다. 따라서 르네상스 운동의 목적은 개인 독립에 대한 인간의 감정과 옛 고전주의의 정신으로 복귀하자는 것이다.
  15세기에는 14세기에 일어난 헬라의 개별주의 부흥과 더불어 인문주의가 탄생하고 이 인문주의는 교회의 초자연주의를 불신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로 인하여 비종교적인 인식의 성향이 날로 증가하는 가운데 세속주의라고 하는 것이 탄생하게 된다. 이 세속주의 철학은 인간 주체적 성향을 극히 강조하는 인본주의의 개념이다. 이것은 정치단체의 내부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 또다시 공동주의로 개별주의를 삼켜 버리는 그 비겁한 자태를 들어내고 있다.
  이런 세속주의적 성향의 카톨릭 교권주의에 강력히 반발하여 일어난 것이 1517년의 종교개혁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지배력과 거만함의 그 타락한 공동체의 난잡한 인간 질서를 완벽하게 개혁(Reformed)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던 것이다.
  사실 종교 개혁자들은 진정한 개체로서의 자각을 갖고 있었다. 즉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준하는 그 자각인 것이다. 이는 기독교 철학의 대가(大家) 사도 바울의 말처럼“죄인 된 나와 믿음으로 의롭게 된 나가 한 몸에 있다”라고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회개하여 타락한 개체 안의 인식의 개조를 분명히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삶 속에는 인간의 공력(功力)을 내세우지 않고 오로지 믿음으로서만 의로워짐을 강조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인간 역사에 있어서 가장 큰 혁명이었다. 르네상스나 산업혁명이나 기타 세상의 어느 혁신적인 운동도 이 종교 개혁을 능가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개체와 공동체간의 상호 연합의 신비를 본래의 창조 질서 안으로 개혁하기 위한 위대한 행보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실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주님의 위대한 사랑이 그러하듯이 이들 또한 그 자취를 따라간 것이다. 한 몸으로 하나된 신비한 상호 연합, 서로 죽기까지 희생함으로 사랑하고, 서로 돕고 보호하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견고히 한 것이다.

이제 결론적으로, 다시 한 번 간추려 보자.

  중세기 교회의 철학은 공동주의가 개별주의를 삼켜 버렸다. 오늘 날 세속주의 철학은 정치 단체의 발달로 인해 또 다시 공동주의로 개별주의를 삼켜 버리고자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개혁파 교회나 교인들은 종교 개혁자들의 그 위대한 자취를 따라 개별주의와 공동주의가 균형 잡힌 이상적인 철학을 추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창조 약정의 그 창조 질서에 의한 개체와 공동체의 신비한 상호 연합을 회복시키는 강력한 개혁주의(the Reformation)인 것이다.
  이러한 개혁의 실마리는 철저한 개체의 자각으로부터 출발을 한다. 즉 하나님 앞에서의 철저한 자기 발견과 통찰, 그리고 진정으로 뉘우치는 회개로부터의 철저한 인식의 개조가 천국을 소유케 하는 것이다(“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4:17).
  그러므로 항간에 비쳐지고 있는 개교회주의나 지방주의의 개별주의적 경향이나, 교권주의로 흐르는 공동주의적 경향은 매우 위험한 신호(sign)이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정지 신호(A signal of stop), 또는 경고 표지(A warning si- gn)로 진정한 기독교 철학의 부재에서 야기되는 것이다.
  기독교 철학의 총체적 입장은“의인은 믿음으로 살며, 오직 하나님의 임재와 그 영광을 위해 사는 것”, 이것만이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이다.

 기독교 교육 철학에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 개념(形像槪念)은 극히 기본적인 개념이다. 아니 이 개념은 본래 철학의 본질적인 개념이다. 이 본질을 무시하고 제외시킴으로 세상의 철학들은 죽음과 고통, 허무와 혼돈 속에서 방황하고 있다. 모든 사물의 원리를 바르게 탐구하여 인간의 삶을 궁극적으로 그리고 진리로 향할 수 있도록 그 바른 지침이 되어야할 철학이 이렇듯 혼미한 상황이라면,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있어서 큰 책임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본 장에서 기독교 교육 철학의 바른 개념을 열거하여 세속적 철학 개념의 오명을 씻고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바른 개념을 정립해 보자.

 

  1.형상 개념(Image Idea)

  형상 개념(形像槪念)은 모든 만물을 이해하는 원리를 구명(究明)하는 하나의 의미 깊은 사실이다. 이 개념은 형상(image)이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그 유사성, 그 닮음 꼴을 말한다. 즉 거울에 비친 모습(모양)을 통하여 실물을 아는 것과 같은 부인할 수 없는 이치(理致)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었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철학적 기본 개념에 큰 영향을 주는 깊은 의미의 말씀이다. 왜냐하면 보이는 것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것의 그 이념과 속성을 분명하게 드러나게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개념은 철학의 근본 원리에 정확하게 규합되는 하나의 사실적인 법칙으로서 철학(哲學)은 가설(假說)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모든 영역에 걸친 사물(事物)의 근본 원리를 추구하는 학문으로 자연과 사회 전반에 걸친 일반적인 법칙성을 탐구하게 하는 촉매제 역할을 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 형상 개념, 또는 모양 개념은 창 1:26에 명확하게 규정지어져 있다. 형상은 

 - image 이며, 모양은 

 - likeness 로 그 뜻에 있어서는 유사, 닮음이라는 동의어로 취급된다. 다시 말하여 동의어의 반복이라는 점에서 볼 때 형상 개념(Image Idea)을 특별히 강조한 하나님의 깊으신 의도가 숨어있는 것이다.
  또한 이와 같은 개념은 비단 인간 창조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광의적(廣義的)이며 근본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 철학인 것처럼 하나님의 전 우주적인 창조물, 즉 모든 만물을 이해하는 원리에 대한 사실을 탐구하는 그 자체로서 철학을 위한 근본 원리로 존재하는 하나의 사실적인 법칙이다.
  그러므로 이 보이는 형상 개념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실물의 그 생생한 존재성과 그 속성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는 것을 어느 누구도 핑계치 못한다고 사도 파울은 말하였다(롬1:20).
  그리고 형상 개념으로 나타난 인간 창조의 그 계획 속에는 인간을 모든 만물의 우두머리로 창조하심으로 인간에게 하등 영광(lower honor)15)을 부여하셨다는 것은, 곧 창조자 하나님 자신의 고등 영광(glory of God)을 동시적으로 이미 선포하셨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그리고 특히 인간 창조에 있어서 형상 개념이 의미하는 최고의 목적은 하나님이 영이신 것처럼 인간을 그 유사한 영적 성질로 창조하여 하나님과 인간과의 친밀한 인격적 교제(spirited fellow-ship)16)를 성취하셨다는 사실이다.
  다시 반복 강조하지만,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인간 창조 목적의 최고 성취이다. 그러므로 또한 형상 개념이 인간에게 의미하는 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으로서만 완전한 만족을 얻게 된다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교육의 기초가 철학이라면 철학의 기초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2.옛 형상 개념(Old Image Idea)

  옛 형상 개념은 타락한 아담의 유전을 따르는 전적 타락, 또는 전적 무능력의 그 형상(Image)과 그 모양(likeness)이다. 즉 인간 타락 이전의 형상 개념의 함축적인 의미가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인간 타락 이후에는 무시되고 제외되어 버린 가운데 허상만을 쫓는 비참한 모습이 되어버렸다. 거울의 바로 앞, 그 면전에 사실적으로 서있는 하나님의 형상(spiritual image) 자체인 자기 자신의 실상을 보면서도, 그 정신면의 인식 속에는 타락한 허상(soul image)만을 쫓는 옛 형상 개념을 그대로 갖고 있는 것이다.
  옛 형상 개념은 타락한 인간 아담의 유전을 따라,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긴 역사의 터널을 지나오고 있다. 즉 타락한 인간의 유전, 전통 그 관습의 옛 것들을 실제의 형상과 모양인 양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상에 있어서 허상( 虛像, virtual image) 17)이다.
  그러므로 이 허상의 본체 안에는 철학의 형상 개념의 기초가 되어야할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무시되고 제외되어 존재할 수가 없다. 심지어 하나님이 불러모은 신자의 무리들까지도 자기들이 만들어낸 허상18) 속으로 하나님을 끌어들인다.
  세속 철학의 인식 개념은 옛 아담의 그 유전을 따라, 옛 형상 개념 안에서 금지 시험19)의 인식 장소를 제 마음껏 넘나들고 있다. 다시 말하여 인간의 정신 세계 안에는 형상 개념의 원초인 영적 장소(spiritual image)가 무능해진 가운데 타락한 혼적 장소(soul image)의 그 허상(ghost image), 망상(fancy image), 공상(idle image)의 비참한 상태에 놓여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인간의 처절한 상태에 직면해 있으면서도“카인의 후예”라고 하는 등, 로맨틱(romantic)하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나를 건져주랴”(롬7:24) 라고 자기 자신을 향하여 철저히 개탄(慨歎)하고 있는 것이다.
  옛 형상 개념은 성경의 모든 말씀 중에서 가장 슬픈 이야기이다. 이것은 인류의 시조 아담이 뱀의 유혹을 받아 금단의 열매를 따먹고 에덴에서 추방되었다는 그러한 형식상의 단순한 범죄 기록이 아니다. 이것은 전 인류에게 미친 죄의 기원을 말하고 원죄(原罪, Original Sin)를 말하는 것으로, 철학의 근본을 제 마음대로 뒤흔드는 타락한 인간의 그 인식의 세계를 지목(指目)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의 형상 개념의 침범할 수 없는 그 불가항력적 인식의 세계를 제 마음대로 혼탁케하여 하나님의 금지 명령을 약하게, 흐리게, 가볍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삭제, 첨가, 변경하는 상상할 수 없는 범죄자의 심리를 그대로 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 원죄 개념에 대하여 사탄(tempter)은 철저한 부정이요, 불순종이요, 대항자이다. 세속 철학의 인식 속에 이와 같은 개념이 그대로 유전되어 우리 앞에 직면해 있는 지금, 아니 온 세상에 이와 같은 교육 철학이 가득한 지금, 더더욱 그와 같은 세속적인 교육을 전혀 여과 없이 받아들인 우리들에게 있어서 엄청난 큰 문제로 우리 인식 속에 자리잡혀 있다는 것을 통찰(洞察, discernment)해야 한다.

 

  3.새 형상 개념(New Image Idea)

  타락한 옛 아담으로 인하여 전 인류가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새 아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시 회복시키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이 개념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형상 개념(New Image Idea in Christ)이라고 한다.
  옛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전 인류에게 미친 옛 형상 개념은 철학의 본질적 개념인 형상 개념(Image Idea = Image of God)을 전적으로 무력화시켰다. 즉 전적 불능이요, 전적 무능력으로 인간의 인식 세계를 약화시켜버린 것이다.
  반면에 뱀(tempter)에 말처럼(창3:4-5) 눈이 밝아져 혼( = soul)적 인식의 세계(psychology)20)가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hold up) 간교(cunning)한 혀를 날름거리면서 무모한 도전과 굉장한 위험을 무릅쓴 쓸데없는 짓, 그 못된 짓을 하도록 하는 인식 세계의 겉잡을 수 없는 충동질 속에서, 혼잡한 생각을 거듭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행위를 서슴없이 함으로, 하나님을 감히 시험(test)하고 노(provoke)하게 하는 그 쾌락의 참으로 못된 유혹(tempt)의 인식이, 인간을 한없는 사망의 구렁텅이로 내 몰리게 하고 있다.
  타락한 인간의 유전, 전통 그 관습은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이 타락한 육적(

 = psyche)인간 존재의 주체적 인식 속에서 인격의 중심을 형성하고, 자아를 형성시키고, 사고와 정서 ` 의지와 행동을 그 스스로 하게 하였다. 이것을 인간 심리학에서는 사이칼러지(psychology)라고 하여 연구의 대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타락한 육적인간 존재의 주체적 인식은 피비린내 나는 고대의 정복의 역사를 통하여 그 문화를 발전시켜 소위 사상을 낳고, 미(美)를 풀고, 문학, 예술, 철학을 낳고, 또 그 맛을 보고 즐기는 그 스스로 한다 하는 자칭 주체적 존재이지만 참된 사람, 참된 문화, 참된 역사, 참된 철학을 이루지 못하는 불확실성의 시대를 대대로(generation) 물려주며 물려받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하 등의 능력은 극심한 정도의 차는 있지만 동물에도 구비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은 사람만이 갖는 것인데, 이것은 영적(

)인 것으로 본래의 철학의 기본 개념인 형상 개념의 본질적 요소이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타락이전 인간 정신세계의 그 근본 개념으로 참된 사람이 되게 하는 까닭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본질적 부분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아는 능력이며,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기쁨으로 얻는 능력이며,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에 설 수 있는 능력이다. 이 능력을 얻은 자는 진정으로 자유 함을 누린다(요14:6, 8:32). 죽음, 고통, 허무가 있을 수 없고 모든 것을 초월하여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가득한 참된 능력이다.
  이 하나님의 능력(

)은 타락한 인간 스스로는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불가항력이다. 왜냐하면 영이신 하나님과 타락한 인간의 육적 정신이 그러하듯이,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저항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하나님의 공의(

 = righteousness)가 작동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변절될 수 없는 하나님의 속성 그 자체로서 완전한 도덕적인 의를 말한다. 이것은 완전하신 하나님의 무흠함, 무죄성, 정결함과 그 위엄성 그 자체로서 도덕적으로 타락한 인간 스스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불가항력인 것이다. 그리고 그 용서를 받지 못할 때는 오직 죽음뿐인 것이다. 따라서 이 경이로운 두려움, 하나님의 속성인 공의를 만족시켜야만 인간의 상실된 영적 능력은 회복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 공의를 만족케 할 자는 타락한 인간으로서는 그 누구도 합당한 자가 없는 것이다. 오직 이 공의를 만족케 할 자는 하나님 자신의 무흠한 피흘림만이 합당한 것이다. 이것은 피로 맺은 약정(bond-in-blood)21) 의로 이미 인간 창조 이전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약 속에서 작정해 놓으신 상호협정으로서 정의되는 계약(a mutual contract)22)이다.
  이 계약의 성취가 성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형상 개념(New Image Idea in Jesus Christ)이다. 이 새형상 개념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만날 때까지는 전적으로 죽어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인류적이며 전인격적인 무조건 선택 - 제한적 속죄 - 불가항력적 은혜 - 궁극적 구원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그 성취 안에서 죽었던 하나님의 형상 개념이 살아나게 하고 새로운 생명을 베풀어주심으로 인하여 타락한 인간의 영과 혼과 몸이 깨끗하게 - 하나님이 받으실 만 하게- 그 도덕적 성질이나 상태, 그 의지나 생각이 하나님의 뜻과 합치되는 완전한 상태의 새 형상 개념을 초자연적으로 기적적으로 우리 속에서 이루시는 것이다. 이것이 참으로 놀라운 회개(

)23)의 인식의 전환이다. 이 놀라운 역사의 대 장정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한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그 성령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의 혼적 요소인 프시케에 역사하여 더 깊은 곳에 있는 프뉴마에 조용히 역사 하시는 것이다. 이로써 타락한 인간의 이성과 감정의 주체는 실제적으로 개조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타락한 인식의 그 주체가 하나님을 깨끗이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인간 정신세계의 그 근본 - 새 형상 개념의 철학적 본질을 완전하게 이루는 것이다.

 

  4.개체(個體)와 공동체(共同體)의 연관성(聯關性)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의 세계는 두 개의 생활을 하게 되어 있다. 하나는 순수한 개별적인 생활이고, 다른 하나는 여러 개체가 서로 연합하는 공동생활이다. 즉 모든 피조물 각각의 개체들은 각기 독립된 개체로서 생활하고, 또 서로 상호간에 연관성을 맺는 공동체로서 생활을 한다. 이것은 개체와 공동체의 올바른 관계로서, 모든 피조물들이 추구하는 목적이며 벗어날 수 없는 질서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 세계에서 생활하는 인간도 역시 개체이면서 공동체 생활의 연관성 안에서 그 목적과 질서를 가지고 삶을 영위한다. 이와 같은 법칙은 인간도 자연물도 벗어날 수 없는 것으로서 창조주 하나님의 계시(revelation) 24)이다.
  그러므로 또한 우리가 피조물임을 잘 알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창조주 하나님에게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창조주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성경적인 하나님의 개념은 어떠한가?
  하나님은 삼위(三位)이시지만 한 분이시다. 즉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

)25)이시다.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오묘하신 그 계시 속에는 개체와 공동체의 긴밀한 연관성이 있음을 보여 주신다. 즉 삼위 하나님의 개체와 공동체로서의 연관성은 여럿이 하나로 전체적인 움직임이 잘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삼위일체의 각 위(位)가 각기 하나님이 되실 뿐더러 하나로 일체(一體)된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의 세계에는 그 계시의 형상을 그대로 반영시켜 본받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개체와 공동체로서의 연관성은 하등 피조물에서 보다 고등 피조물인 인간의 창조에서 더욱 뚜렷하게 잘 나타난다.
  인간의 개체이면서 공동체적인 생활은 가정, 사회, 국가, 세계라는 광범위하고도 폭넓은 영역을 차지한다. 특히 그 중에서도 공동체의 기초 단위인 가정은 더 기초적인 단위인 결혼으로부터 출발을 한다. 이 결혼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세우신 최초의 약정으로서 창조의 계약(Covenant of Creation) 또는 창조의 약정(Bond of Creation)26)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리고 이 창조의 약정에는 일반적인 면으로 안식일, 결혼, 노동이라는 세 가지의 규례를 정해 놓으심으로서 이것은 그 어느 것도 변할 수 없는 창조 규례에 내재된 원칙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규례들은 사실상에 있어서 창조주에 대한 피조물 인간의 넓은 책임과 연관되어진다.
  결혼은 개체이면서 공동체적인 연관성을 나타내는 참으로 신비한 하나님의 창조 규례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그 형상이 그러하듯이 사람이 개체적인 생활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음을 이미 규정해 놓으셨다(창2:18,“사람의 독처함히 좋지 못하다”).
  우리는 이 결혼의 창조 규례에 의해서 개체와 공동체의 연관성 안에 있는 그 목적과 질서를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

첫째, 개체와 공동체간에는 창조 약정에 포함된“상호 결합”의 신비가 주목된다.

  남자와 여자라는 각각의 개체가 창조의 약정에 따라 결혼함으로 서로 하나가 되는 공동체의 연관성을 맺고,“한 몸을 이룬다”는 것은 단순히 완전한 경지에 이르는 여러 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하나됨은 결혼함으로써 갖는“결합의 영속적인 상태”를 표현한다. 이것은 창조 때 이미 정해진 상호 결합의 함축된 의미로서 오로지 창조 질서에 따른 개체와 공동체의 연관성에 의해서 그런 신비한 관계에 들어 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사상을 더욱 분명히 하여 복음으로써 전달하시었다. 이혼 문제를 다루는 말씀에서, “사람을 만드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을 이룰지니라”(

; 마19:4-5, 막10:6-8, 엡5:31).
  즉 하나님의 창조 약정이 각각의 개체를 하나로 연합했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는 둘이 아니고 한 몸이라고 설명한다(마19:6). 그러므로 개체와 공동체간에는 창조 약정에 포함된 상호 결합이 강조되고 있으며, 이는 창조 질서에 의하여 신비하게 상호 결합되는 것이다.

둘째로, 창조 질서는 개체와 공동체간의 질서를 규정짓는 내부 구조를 결정한다.

  사람이 개체로서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그를 돕는 배필”( , a halper corresponding to him)을 만들었다고 하셨다(창2:18).
  즉 여자는 결혼 관계에서 남자를 돕는 자로서 창조되었다. 이는 개체와 공동체간의 변할 수 없는 내부 질서를 분명히 하심이다. 여자의 존재 목적이 남자를 도움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것이 있다.“그와 동등한 돕는 자”이다(창2:20). 이 말의 뜻은 지배력이나 거만함이 전혀 없는 인격적인 면에서 남자와 동등하다는 것이며, 따라서 남자와 여자는 다 똑같이 중요하다 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개체와 공동체간의 내부 질서는 인격의 동등성 안에서 서로 합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된 그 창조 질서에 부합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개체와 공동체간의 내부 질서는 이 세상을 완성하게 하는 목적이 된다. 다시 말하면 가정, 사회, 국가, 세계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그 창조 질서 안에 거하여 인격의 동등 성을 지켜 서로 돕는 자가 되어야 하며 서로 사랑하고 서로 보호하여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거역할 수 없는 창조 질서에 의한 공동체 안에서의 내부 질서이다.
  이제 우리의 사회 질서에는 지위고하, 빈부귀천의 차별을 없애고, 뿌리 깊은 권위주의와 남아 선호사상, 부익부 빈익빈, 학벌, 문벌, 지역 감정, 등등의 말로 할 수 없는 타락의 요소들을 깨끗하게 청소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부가되는 것은 사랑이다. 이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으로 내가 죽기까지 희생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함이요, 그와 같이, 내 이웃을 사랑함이다.
  이제 우리의 사회 질서에는 지배하는 또는 거만한 가장으로서의 질서가 아니라 서로 희생하고 서로 사랑하는 가장으로서 서로 돕는 역할을 충실히 해야만 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고전11:12下半節)이기 때문이다.

 

  5.개별주의와 공동주의의 역사적 고찰(신학적 비판)

  두 주의를 역사적으로 고찰하면, 공동주의는 플라톤(Platon, B. C. 427-347)27)의 이상주의(idealism)에서 발생된 것이고, 개별주의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 C. 384-322) 28)의 자연주의에 의해서 발생된 것이다.
  따라서 중세기의 종교적 공동주의는 플라톤의 이상주의(공동주의)로 인해 발단이 되었다. 이 주의가 중세기 카톨릭 교회 안에서 아무런 여과장치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진 이유는, 그 당시 수도원의 금욕주의가 각기 개별적인 신앙생활로 고조되었으므로 이를 약화시키고자 모색한 나머지 무신론의 공동주의를 그대로 받아들여 강요하게 된 것이다(개체와 공동체간의 극심한 분화 현상).
  그 결과, 공동주의 또는 제도주의의 지배력은 도리어 자연주의적인 개별주의의 강한 욕구를 더욱 불러 일으키게된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따라서 중세기의 종교는 개체와 공동체의 균형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하나님의 약정과 그 창조 질서를 무시하고 제외시킨 개체와 공동체간의 극심한 분화현상은 인식의 극히 좁은 범위에 내포된 의미를 준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식의 보다 넓은 책임이 자주 무시되는 진정한 철학적 본질의 부재인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까지도 간단없이 지속되고 있어서 불확실성의 기약 없는 세월만이 충만할 뿐이다. 이 좁은 관점은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구속 의미를 고찰하는 데까지 연장되어, 그 결과 인간 구원에 대한 교회의 공동체 개념에 큰 결핍을 초래하고 있다. 이로써 기독교회 공동체는 전 세계관과 인생관에 결핍을 가져다주고 있다. 창조 질서에 의한 개체와 공동체의 긴밀한 상호 연합에 의한 그리스도 왕국중심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개체와 공동체간의 극심한 분화현상을 도무지 회개할 줄 모르는 교회중심이 되어 버렸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개체와 공동체간의 극심한 분화현상의 이론을 일반적으로 보편 타당한 것처럼 정립한 것은, 소위 천재적인 철학자라고 알려져 있는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A. D. 1227-1274)에 의해서 이다.
  그는 무신론의 개별주의(자연주의)와 공동주의(제도주의)를 당시에 유행된 카톨릭 공동체의 교권주의와 소위 천재적으로 융화시켜 보편 타당한 종합 이론을 창출해 낸 것이다. 이는 로마 카톨릭 교회 공동체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고 그 공동체의 기초 개념으로서 확립되기에 이른다. 이것이 소위 중세의 아퀴나스 철학이다.
  본래 개체와 공동체는 신비한 상호 연합에 의하여 서로 희생하며, 사랑하며, 돕는 가운데 균형을 이루는 창조 질서에 근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론은 로마 카톨릭 공동체의 그 지배력과 거만함의 제도주의를 자연주의와 교묘히(cunning) 결합시켜 극히 사이키적(프시케)인 보편타당성을 이끌어 낸 것이다.
  그러므로 중세 세계의 그 공동체적 인식은 카톨릭 교회 공동체의 그 지배력과 거만함 속에 잠식되어 버렸다. 아퀴나스의 학설은 신학적으로 볼 때, 소위 은혜와 자연을 대조시킨 것으로 카톨릭 공동주의 곧 그 지배와 거만함의 제도주의를 은혜의 저장소로 둔갑시켜 버렸다. 다시 말하면 아퀴나스 철학의 결론은 공동주의(제도주의) + 자연주의의 카톨릭 교회가 인간의 생명과 죽음을 지배하고 있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13세기와 14세기초에는 중세 교회의 공동주의(제도주의, 교권주의)에 대항하는 자연주의 성향의 개인주의가 활발하게 일어남으로 인해 개체와 공동체간의 불가피한 충돌이 생기기 시작했다. 헬라의 자연주의(개인주의)를 회복시켜 공동체보다는 개체(개인)의 우선을 강조한 르네상스(Renaissance)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여기에도 아퀴나스 철학의“개인들에게 보장된 자연권”이 한 몫 을 하였다. 따라서 르네상스 운동의 목적은 개인 독립에 대한 인간의 감정과 옛 고전주의의 정신으로 복귀하자는 것이다.
  15세기에는 14세기에 일어난 헬라의 개별주의 부흥과 더불어 인문주의가 탄생하고 이 인문주의는 교회의 초자연주의를 불신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로 인하여 비종교적인 인식의 성향이 날로 증가하는 가운데 세속주의라고 하는 것이 탄생하게 된다. 이 세속주의 철학은 인간 주체적 성향을 극히 강조하는 인본주의의 개념이다. 이것은 정치단체의 내부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 또다시 공동주의로 개별주의를 삼켜 버리는 그 비겁한 자태를 들어내고 있다.
  이런 세속주의적 성향의 카톨릭 교권주의에 강력히 반발하여 일어난 것이 1517년의 종교개혁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지배력과 거만함의 그 타락한 공동체의 난잡한 인간 질서를 완벽하게 개혁(Reformed)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던 것이다.
  사실 종교 개혁자들은 진정한 개체로서의 자각을 갖고 있었다. 즉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준하는 그 자각인 것이다. 이는 기독교 철학의 대가(大家) 사도 바울의 말처럼“죄인 된 나와 믿음으로 의롭게 된 나가 한 몸에 있다”라고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회개하여 타락한 개체 안의 인식의 개조를 분명히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삶 속에는 인간의 공력(功力)을 내세우지 않고 오로지 믿음으로서만 의로워짐을 강조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인간 역사에 있어서 가장 큰 혁명이었다. 르네상스나 산업혁명이나 기타 세상의 어느 혁신적인 운동도 이 종교 개혁을 능가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개체와 공동체간의 상호 연합의 신비를 본래의 창조 질서 안으로 개혁하기 위한 위대한 행보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실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주님의 위대한 사랑이 그러하듯이 이들 또한 그 자취를 따라간 것이다. 한 몸으로 하나된 신비한 상호 연합, 서로 죽기까지 희생함으로 사랑하고, 서로 돕고 보호하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견고히 한 것이다.

이제 결론적으로, 다시 한 번 간추려 보자.

  중세기 교회의 철학은 공동주의가 개별주의를 삼켜 버렸다. 오늘 날 세속주의 철학은 정치 단체의 발달로 인해 또 다시 공동주의로 개별주의를 삼켜 버리고자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개혁파 교회나 교인들은 종교 개혁자들의 그 위대한 자취를 따라 개별주의와 공동주의가 균형 잡힌 이상적인 철학을 추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창조 약정의 그 창조 질서에 의한 개체와 공동체의 신비한 상호 연합을 회복시키는 강력한 개혁주의(the Reformation)인 것이다.
  이러한 개혁의 실마리는 철저한 개체의 자각으로부터 출발을 한다. 즉 하나님 앞에서의 철저한 자기 발견과 통찰, 그리고 진정으로 뉘우치는 회개로부터의 철저한 인식의 개조가 천국을 소유케 하는 것이다(“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4:17).
  그러므로 항간에 비쳐지고 있는 개교회주의나 지방주의의 개별주의적 경향이나, 교권주의로 흐르는 공동주의적 경향은 매우 위험한 신호(sign)이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정지 신호(A signal of stop), 또는 경고 표지(A warning si- gn)로 진정한 기독교 철학의 부재에서 야기되는 것이다.
  기독교 철학의 총체적 입장은“의인은 믿음으로 살며, 오직 하나님의 임재와 그 영광을 위해 사는 것”, 이것만이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이다.

 기독교 교육 철학에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 개념(形像槪念)은 극히 기본적인 개념이다. 아니 이 개념은 본래 철학의 본질적인 개념이다. 이 본질을 무시하고 제외시킴으로 세상의 철학들은 죽음과 고통, 허무와 혼돈 속에서 방황하고 있다. 모든 사물의 원리를 바르게 탐구하여 인간의 삶을 궁극적으로 그리고 진리로 향할 수 있도록 그 바른 지침이 되어야할 철학이 이렇듯 혼미한 상황이라면,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있어서 큰 책임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본 장에서 기독교 교육 철학의 바른 개념을 열거하여 세속적 철학 개념의 오명을 씻고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바른 개념을 정립해 보자.

 

  1.형상 개념(Image Idea)

  형상 개념(形像槪念)은 모든 만물을 이해하는 원리를 구명(究明)하는 하나의 의미 깊은 사실이다. 이 개념은 형상(image)이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그 유사성, 그 닮음 꼴을 말한다. 즉 거울에 비친 모습(모양)을 통하여 실물을 아는 것과 같은 부인할 수 없는 이치(理致)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었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철학적 기본 개념에 큰 영향을 주는 깊은 의미의 말씀이다. 왜냐하면 보이는 것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것의 그 이념과 속성을 분명하게 드러나게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개념은 철학의 근본 원리에 정확하게 규합되는 하나의 사실적인 법칙으로서 철학(哲學)은 가설(假說)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모든 영역에 걸친 사물(事物)의 근본 원리를 추구하는 학문으로 자연과 사회 전반에 걸친 일반적인 법칙성을 탐구하게 하는 촉매제 역할을 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 형상 개념, 또는 모양 개념은 창 1:26에 명확하게 규정지어져 있다. 형상은 

 - image 이며, 모양은 

 - likeness 로 그 뜻에 있어서는 유사, 닮음이라는 동의어로 취급된다. 다시 말하여 동의어의 반복이라는 점에서 볼 때 형상 개념(Image Idea)을 특별히 강조한 하나님의 깊으신 의도가 숨어있는 것이다.
  또한 이와 같은 개념은 비단 인간 창조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광의적(廣義的)이며 근본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 철학인 것처럼 하나님의 전 우주적인 창조물, 즉 모든 만물을 이해하는 원리에 대한 사실을 탐구하는 그 자체로서 철학을 위한 근본 원리로 존재하는 하나의 사실적인 법칙이다.
  그러므로 이 보이는 형상 개념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실물의 그 생생한 존재성과 그 속성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는 것을 어느 누구도 핑계치 못한다고 사도 파울은 말하였다(롬1:20).
  그리고 형상 개념으로 나타난 인간 창조의 그 계획 속에는 인간을 모든 만물의 우두머리로 창조하심으로 인간에게 하등 영광(lower honor)15)을 부여하셨다는 것은, 곧 창조자 하나님 자신의 고등 영광(glory of God)을 동시적으로 이미 선포하셨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그리고 특히 인간 창조에 있어서 형상 개념이 의미하는 최고의 목적은 하나님이 영이신 것처럼 인간을 그 유사한 영적 성질로 창조하여 하나님과 인간과의 친밀한 인격적 교제(spirited fellow-ship)16)를 성취하셨다는 사실이다.
  다시 반복 강조하지만,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인간 창조 목적의 최고 성취이다. 그러므로 또한 형상 개념이 인간에게 의미하는 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으로서만 완전한 만족을 얻게 된다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교육의 기초가 철학이라면 철학의 기초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2.옛 형상 개념(Old Image Idea)

  옛 형상 개념은 타락한 아담의 유전을 따르는 전적 타락, 또는 전적 무능력의 그 형상(Image)과 그 모양(likeness)이다. 즉 인간 타락 이전의 형상 개념의 함축적인 의미가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인간 타락 이후에는 무시되고 제외되어 버린 가운데 허상만을 쫓는 비참한 모습이 되어버렸다. 거울의 바로 앞, 그 면전에 사실적으로 서있는 하나님의 형상(spiritual image) 자체인 자기 자신의 실상을 보면서도, 그 정신면의 인식 속에는 타락한 허상(soul image)만을 쫓는 옛 형상 개념을 그대로 갖고 있는 것이다.
  옛 형상 개념은 타락한 인간 아담의 유전을 따라,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긴 역사의 터널을 지나오고 있다. 즉 타락한 인간의 유전, 전통 그 관습의 옛 것들을 실제의 형상과 모양인 양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상에 있어서 허상( 虛像, virtual image) 17)이다.
  그러므로 이 허상의 본체 안에는 철학의 형상 개념의 기초가 되어야할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무시되고 제외되어 존재할 수가 없다. 심지어 하나님이 불러모은 신자의 무리들까지도 자기들이 만들어낸 허상18) 속으로 하나님을 끌어들인다.
  세속 철학의 인식 개념은 옛 아담의 그 유전을 따라, 옛 형상 개념 안에서 금지 시험19)의 인식 장소를 제 마음껏 넘나들고 있다. 다시 말하여 인간의 정신 세계 안에는 형상 개념의 원초인 영적 장소(spiritual image)가 무능해진 가운데 타락한 혼적 장소(soul image)의 그 허상(ghost image), 망상(fancy image), 공상(idle image)의 비참한 상태에 놓여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인간의 처절한 상태에 직면해 있으면서도“카인의 후예”라고 하는 등, 로맨틱(romantic)하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나를 건져주랴”(롬7:24) 라고 자기 자신을 향하여 철저히 개탄(慨歎)하고 있는 것이다.
  옛 형상 개념은 성경의 모든 말씀 중에서 가장 슬픈 이야기이다. 이것은 인류의 시조 아담이 뱀의 유혹을 받아 금단의 열매를 따먹고 에덴에서 추방되었다는 그러한 형식상의 단순한 범죄 기록이 아니다. 이것은 전 인류에게 미친 죄의 기원을 말하고 원죄(原罪, Original Sin)를 말하는 것으로, 철학의 근본을 제 마음대로 뒤흔드는 타락한 인간의 그 인식의 세계를 지목(指目)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의 형상 개념의 침범할 수 없는 그 불가항력적 인식의 세계를 제 마음대로 혼탁케하여 하나님의 금지 명령을 약하게, 흐리게, 가볍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삭제, 첨가, 변경하는 상상할 수 없는 범죄자의 심리를 그대로 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 원죄 개념에 대하여 사탄(tempter)은 철저한 부정이요, 불순종이요, 대항자이다. 세속 철학의 인식 속에 이와 같은 개념이 그대로 유전되어 우리 앞에 직면해 있는 지금, 아니 온 세상에 이와 같은 교육 철학이 가득한 지금, 더더욱 그와 같은 세속적인 교육을 전혀 여과 없이 받아들인 우리들에게 있어서 엄청난 큰 문제로 우리 인식 속에 자리잡혀 있다는 것을 통찰(洞察, discernment)해야 한다.

 

  3.새 형상 개념(New Image Idea)

  타락한 옛 아담으로 인하여 전 인류가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새 아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시 회복시키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이 개념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형상 개념(New Image Idea in Christ)이라고 한다.
  옛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전 인류에게 미친 옛 형상 개념은 철학의 본질적 개념인 형상 개념(Image Idea = Image of God)을 전적으로 무력화시켰다. 즉 전적 불능이요, 전적 무능력으로 인간의 인식 세계를 약화시켜버린 것이다.
  반면에 뱀(tempter)에 말처럼(창3:4-5) 눈이 밝아져 혼( = soul)적 인식의 세계(psychology)20)가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hold up) 간교(cunning)한 혀를 날름거리면서 무모한 도전과 굉장한 위험을 무릅쓴 쓸데없는 짓, 그 못된 짓을 하도록 하는 인식 세계의 겉잡을 수 없는 충동질 속에서, 혼잡한 생각을 거듭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행위를 서슴없이 함으로, 하나님을 감히 시험(test)하고 노(provoke)하게 하는 그 쾌락의 참으로 못된 유혹(tempt)의 인식이, 인간을 한없는 사망의 구렁텅이로 내 몰리게 하고 있다.
  타락한 인간의 유전, 전통 그 관습은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이 타락한 육적(

 = psyche)인간 존재의 주체적 인식 속에서 인격의 중심을 형성하고, 자아를 형성시키고, 사고와 정서 ` 의지와 행동을 그 스스로 하게 하였다. 이것을 인간 심리학에서는 사이칼러지(psychology)라고 하여 연구의 대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타락한 육적인간 존재의 주체적 인식은 피비린내 나는 고대의 정복의 역사를 통하여 그 문화를 발전시켜 소위 사상을 낳고, 미(美)를 풀고, 문학, 예술, 철학을 낳고, 또 그 맛을 보고 즐기는 그 스스로 한다 하는 자칭 주체적 존재이지만 참된 사람, 참된 문화, 참된 역사, 참된 철학을 이루지 못하는 불확실성의 시대를 대대로(generation) 물려주며 물려받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하 등의 능력은 극심한 정도의 차는 있지만 동물에도 구비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은 사람만이 갖는 것인데, 이것은 영적(

)인 것으로 본래의 철학의 기본 개념인 형상 개념의 본질적 요소이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타락이전 인간 정신세계의 그 근본 개념으로 참된 사람이 되게 하는 까닭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본질적 부분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아는 능력이며,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기쁨으로 얻는 능력이며,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에 설 수 있는 능력이다. 이 능력을 얻은 자는 진정으로 자유 함을 누린다(요14:6, 8:32). 죽음, 고통, 허무가 있을 수 없고 모든 것을 초월하여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가득한 참된 능력이다.
  이 하나님의 능력(

)은 타락한 인간 스스로는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불가항력이다. 왜냐하면 영이신 하나님과 타락한 인간의 육적 정신이 그러하듯이,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저항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하나님의 공의(

 = righteousness)가 작동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변절될 수 없는 하나님의 속성 그 자체로서 완전한 도덕적인 의를 말한다. 이것은 완전하신 하나님의 무흠함, 무죄성, 정결함과 그 위엄성 그 자체로서 도덕적으로 타락한 인간 스스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불가항력인 것이다. 그리고 그 용서를 받지 못할 때는 오직 죽음뿐인 것이다. 따라서 이 경이로운 두려움, 하나님의 속성인 공의를 만족시켜야만 인간의 상실된 영적 능력은 회복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 공의를 만족케 할 자는 타락한 인간으로서는 그 누구도 합당한 자가 없는 것이다. 오직 이 공의를 만족케 할 자는 하나님 자신의 무흠한 피흘림만이 합당한 것이다. 이것은 피로 맺은 약정(bond-in-blood)21) 의로 이미 인간 창조 이전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약 속에서 작정해 놓으신 상호협정으로서 정의되는 계약(a mutual contract)22)이다.
  이 계약의 성취가 성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형상 개념(New Image Idea in Jesus Christ)이다. 이 새형상 개념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만날 때까지는 전적으로 죽어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인류적이며 전인격적인 무조건 선택 - 제한적 속죄 - 불가항력적 은혜 - 궁극적 구원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그 성취 안에서 죽었던 하나님의 형상 개념이 살아나게 하고 새로운 생명을 베풀어주심으로 인하여 타락한 인간의 영과 혼과 몸이 깨끗하게 - 하나님이 받으실 만 하게- 그 도덕적 성질이나 상태, 그 의지나 생각이 하나님의 뜻과 합치되는 완전한 상태의 새 형상 개념을 초자연적으로 기적적으로 우리 속에서 이루시는 것이다. 이것이 참으로 놀라운 회개(

)23)의 인식의 전환이다. 이 놀라운 역사의 대 장정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한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그 성령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의 혼적 요소인 프시케에 역사하여 더 깊은 곳에 있는 프뉴마에 조용히 역사 하시는 것이다. 이로써 타락한 인간의 이성과 감정의 주체는 실제적으로 개조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타락한 인식의 그 주체가 하나님을 깨끗이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인간 정신세계의 그 근본 - 새 형상 개념의 철학적 본질을 완전하게 이루는 것이다.

 

  4.개체(個體)와 공동체(共同體)의 연관성(聯關性)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의 세계는 두 개의 생활을 하게 되어 있다. 하나는 순수한 개별적인 생활이고, 다른 하나는 여러 개체가 서로 연합하는 공동생활이다. 즉 모든 피조물 각각의 개체들은 각기 독립된 개체로서 생활하고, 또 서로 상호간에 연관성을 맺는 공동체로서 생활을 한다. 이것은 개체와 공동체의 올바른 관계로서, 모든 피조물들이 추구하는 목적이며 벗어날 수 없는 질서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 세계에서 생활하는 인간도 역시 개체이면서 공동체 생활의 연관성 안에서 그 목적과 질서를 가지고 삶을 영위한다. 이와 같은 법칙은 인간도 자연물도 벗어날 수 없는 것으로서 창조주 하나님의 계시(revelation) 24)이다.
  그러므로 또한 우리가 피조물임을 잘 알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창조주 하나님에게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창조주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성경적인 하나님의 개념은 어떠한가?
  하나님은 삼위(三位)이시지만 한 분이시다. 즉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

)25)이시다.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오묘하신 그 계시 속에는 개체와 공동체의 긴밀한 연관성이 있음을 보여 주신다. 즉 삼위 하나님의 개체와 공동체로서의 연관성은 여럿이 하나로 전체적인 움직임이 잘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삼위일체의 각 위(位)가 각기 하나님이 되실 뿐더러 하나로 일체(一體)된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의 세계에는 그 계시의 형상을 그대로 반영시켜 본받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개체와 공동체로서의 연관성은 하등 피조물에서 보다 고등 피조물인 인간의 창조에서 더욱 뚜렷하게 잘 나타난다.
  인간의 개체이면서 공동체적인 생활은 가정, 사회, 국가, 세계라는 광범위하고도 폭넓은 영역을 차지한다. 특히 그 중에서도 공동체의 기초 단위인 가정은 더 기초적인 단위인 결혼으로부터 출발을 한다. 이 결혼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세우신 최초의 약정으로서 창조의 계약(Covenant of Creation) 또는 창조의 약정(Bond of Creation)26)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리고 이 창조의 약정에는 일반적인 면으로 안식일, 결혼, 노동이라는 세 가지의 규례를 정해 놓으심으로서 이것은 그 어느 것도 변할 수 없는 창조 규례에 내재된 원칙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규례들은 사실상에 있어서 창조주에 대한 피조물 인간의 넓은 책임과 연관되어진다.
  결혼은 개체이면서 공동체적인 연관성을 나타내는 참으로 신비한 하나님의 창조 규례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그 형상이 그러하듯이 사람이 개체적인 생활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음을 이미 규정해 놓으셨다(창2:18,“사람의 독처함히 좋지 못하다”).
  우리는 이 결혼의 창조 규례에 의해서 개체와 공동체의 연관성 안에 있는 그 목적과 질서를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

첫째, 개체와 공동체간에는 창조 약정에 포함된“상호 결합”의 신비가 주목된다.

  남자와 여자라는 각각의 개체가 창조의 약정에 따라 결혼함으로 서로 하나가 되는 공동체의 연관성을 맺고,“한 몸을 이룬다”는 것은 단순히 완전한 경지에 이르는 여러 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하나됨은 결혼함으로써 갖는“결합의 영속적인 상태”를 표현한다. 이것은 창조 때 이미 정해진 상호 결합의 함축된 의미로서 오로지 창조 질서에 따른 개체와 공동체의 연관성에 의해서 그런 신비한 관계에 들어 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사상을 더욱 분명히 하여 복음으로써 전달하시었다. 이혼 문제를 다루는 말씀에서, “사람을 만드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을 이룰지니라”(

; 마19:4-5, 막10:6-8, 엡5:31).
  즉 하나님의 창조 약정이 각각의 개체를 하나로 연합했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는 둘이 아니고 한 몸이라고 설명한다(마19:6). 그러므로 개체와 공동체간에는 창조 약정에 포함된 상호 결합이 강조되고 있으며, 이는 창조 질서에 의하여 신비하게 상호 결합되는 것이다.

둘째로, 창조 질서는 개체와 공동체간의 질서를 규정짓는 내부 구조를 결정한다.

  사람이 개체로서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그를 돕는 배필”( , a halper corresponding to him)을 만들었다고 하셨다(창2:18).
  즉 여자는 결혼 관계에서 남자를 돕는 자로서 창조되었다. 이는 개체와 공동체간의 변할 수 없는 내부 질서를 분명히 하심이다. 여자의 존재 목적이 남자를 도움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것이 있다.“그와 동등한 돕는 자”이다(창2:20). 이 말의 뜻은 지배력이나 거만함이 전혀 없는 인격적인 면에서 남자와 동등하다는 것이며, 따라서 남자와 여자는 다 똑같이 중요하다 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개체와 공동체간의 내부 질서는 인격의 동등성 안에서 서로 합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된 그 창조 질서에 부합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개체와 공동체간의 내부 질서는 이 세상을 완성하게 하는 목적이 된다. 다시 말하면 가정, 사회, 국가, 세계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그 창조 질서 안에 거하여 인격의 동등 성을 지켜 서로 돕는 자가 되어야 하며 서로 사랑하고 서로 보호하여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거역할 수 없는 창조 질서에 의한 공동체 안에서의 내부 질서이다.
  이제 우리의 사회 질서에는 지위고하, 빈부귀천의 차별을 없애고, 뿌리 깊은 권위주의와 남아 선호사상, 부익부 빈익빈, 학벌, 문벌, 지역 감정, 등등의 말로 할 수 없는 타락의 요소들을 깨끗하게 청소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부가되는 것은 사랑이다. 이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으로 내가 죽기까지 희생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함이요, 그와 같이, 내 이웃을 사랑함이다.
  이제 우리의 사회 질서에는 지배하는 또는 거만한 가장으로서의 질서가 아니라 서로 희생하고 서로 사랑하는 가장으로서 서로 돕는 역할을 충실히 해야만 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고전11:12下半節)이기 때문이다.

 

  5.개별주의와 공동주의의 역사적 고찰(신학적 비판)

  두 주의를 역사적으로 고찰하면, 공동주의는 플라톤(Platon, B. C. 427-347)27)의 이상주의(idealism)에서 발생된 것이고, 개별주의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 C. 384-322) 28)의 자연주의에 의해서 발생된 것이다.
  따라서 중세기의 종교적 공동주의는 플라톤의 이상주의(공동주의)로 인해 발단이 되었다. 이 주의가 중세기 카톨릭 교회 안에서 아무런 여과장치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진 이유는, 그 당시 수도원의 금욕주의가 각기 개별적인 신앙생활로 고조되었으므로 이를 약화시키고자 모색한 나머지 무신론의 공동주의를 그대로 받아들여 강요하게 된 것이다(개체와 공동체간의 극심한 분화 현상).
  그 결과, 공동주의 또는 제도주의의 지배력은 도리어 자연주의적인 개별주의의 강한 욕구를 더욱 불러 일으키게된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따라서 중세기의 종교는 개체와 공동체의 균형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하나님의 약정과 그 창조 질서를 무시하고 제외시킨 개체와 공동체간의 극심한 분화현상은 인식의 극히 좁은 범위에 내포된 의미를 준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식의 보다 넓은 책임이 자주 무시되는 진정한 철학적 본질의 부재인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까지도 간단없이 지속되고 있어서 불확실성의 기약 없는 세월만이 충만할 뿐이다. 이 좁은 관점은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구속 의미를 고찰하는 데까지 연장되어, 그 결과 인간 구원에 대한 교회의 공동체 개념에 큰 결핍을 초래하고 있다. 이로써 기독교회 공동체는 전 세계관과 인생관에 결핍을 가져다주고 있다. 창조 질서에 의한 개체와 공동체의 긴밀한 상호 연합에 의한 그리스도 왕국중심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개체와 공동체간의 극심한 분화현상을 도무지 회개할 줄 모르는 교회중심이 되어 버렸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개체와 공동체간의 극심한 분화현상의 이론을 일반적으로 보편 타당한 것처럼 정립한 것은, 소위 천재적인 철학자라고 알려져 있는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A. D. 1227-1274)에 의해서 이다.
  그는 무신론의 개별주의(자연주의)와 공동주의(제도주의)를 당시에 유행된 카톨릭 공동체의 교권주의와 소위 천재적으로 융화시켜 보편 타당한 종합 이론을 창출해 낸 것이다. 이는 로마 카톨릭 교회 공동체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고 그 공동체의 기초 개념으로서 확립되기에 이른다. 이것이 소위 중세의 아퀴나스 철학이다.
  본래 개체와 공동체는 신비한 상호 연합에 의하여 서로 희생하며, 사랑하며, 돕는 가운데 균형을 이루는 창조 질서에 근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론은 로마 카톨릭 공동체의 그 지배력과 거만함의 제도주의를 자연주의와 교묘히(cunning) 결합시켜 극히 사이키적(프시케)인 보편타당성을 이끌어 낸 것이다.
  그러므로 중세 세계의 그 공동체적 인식은 카톨릭 교회 공동체의 그 지배력과 거만함 속에 잠식되어 버렸다. 아퀴나스의 학설은 신학적으로 볼 때, 소위 은혜와 자연을 대조시킨 것으로 카톨릭 공동주의 곧 그 지배와 거만함의 제도주의를 은혜의 저장소로 둔갑시켜 버렸다. 다시 말하면 아퀴나스 철학의 결론은 공동주의(제도주의) + 자연주의의 카톨릭 교회가 인간의 생명과 죽음을 지배하고 있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13세기와 14세기초에는 중세 교회의 공동주의(제도주의, 교권주의)에 대항하는 자연주의 성향의 개인주의가 활발하게 일어남으로 인해 개체와 공동체간의 불가피한 충돌이 생기기 시작했다. 헬라의 자연주의(개인주의)를 회복시켜 공동체보다는 개체(개인)의 우선을 강조한 르네상스(Renaissance)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여기에도 아퀴나스 철학의“개인들에게 보장된 자연권”이 한 몫 을 하였다. 따라서 르네상스 운동의 목적은 개인 독립에 대한 인간의 감정과 옛 고전주의의 정신으로 복귀하자는 것이다.
  15세기에는 14세기에 일어난 헬라의 개별주의 부흥과 더불어 인문주의가 탄생하고 이 인문주의는 교회의 초자연주의를 불신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로 인하여 비종교적인 인식의 성향이 날로 증가하는 가운데 세속주의라고 하는 것이 탄생하게 된다. 이 세속주의 철학은 인간 주체적 성향을 극히 강조하는 인본주의의 개념이다. 이것은 정치단체의 내부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 또다시 공동주의로 개별주의를 삼켜 버리는 그 비겁한 자태를 들어내고 있다.
  이런 세속주의적 성향의 카톨릭 교권주의에 강력히 반발하여 일어난 것이 1517년의 종교개혁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지배력과 거만함의 그 타락한 공동체의 난잡한 인간 질서를 완벽하게 개혁(Reformed)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던 것이다.
  사실 종교 개혁자들은 진정한 개체로서의 자각을 갖고 있었다. 즉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준하는 그 자각인 것이다. 이는 기독교 철학의 대가(大家) 사도 바울의 말처럼“죄인 된 나와 믿음으로 의롭게 된 나가 한 몸에 있다”라고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회개하여 타락한 개체 안의 인식의 개조를 분명히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삶 속에는 인간의 공력(功力)을 내세우지 않고 오로지 믿음으로서만 의로워짐을 강조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인간 역사에 있어서 가장 큰 혁명이었다. 르네상스나 산업혁명이나 기타 세상의 어느 혁신적인 운동도 이 종교 개혁을 능가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개체와 공동체간의 상호 연합의 신비를 본래의 창조 질서 안으로 개혁하기 위한 위대한 행보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실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주님의 위대한 사랑이 그러하듯이 이들 또한 그 자취를 따라간 것이다. 한 몸으로 하나된 신비한 상호 연합, 서로 죽기까지 희생함으로 사랑하고, 서로 돕고 보호하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견고히 한 것이다.

이제 결론적으로, 다시 한 번 간추려 보자.

  중세기 교회의 철학은 공동주의가 개별주의를 삼켜 버렸다. 오늘 날 세속주의 철학은 정치 단체의 발달로 인해 또 다시 공동주의로 개별주의를 삼켜 버리고자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개혁파 교회나 교인들은 종교 개혁자들의 그 위대한 자취를 따라 개별주의와 공동주의가 균형 잡힌 이상적인 철학을 추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창조 약정의 그 창조 질서에 의한 개체와 공동체의 신비한 상호 연합을 회복시키는 강력한 개혁주의(the Reformation)인 것이다.
  이러한 개혁의 실마리는 철저한 개체의 자각으로부터 출발을 한다. 즉 하나님 앞에서의 철저한 자기 발견과 통찰, 그리고 진정으로 뉘우치는 회개로부터의 철저한 인식의 개조가 천국을 소유케 하는 것이다(“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4:17).
  그러므로 항간에 비쳐지고 있는 개교회주의나 지방주의의 개별주의적 경향이나, 교권주의로 흐르는 공동주의적 경향은 매우 위험한 신호(sign)이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정지 신호(A signal of stop), 또는 경고 표지(A warning si- gn)로 진정한 기독교 철학의 부재에서 야기되는 것이다.
  기독교 철학의 총체적 입장은“의인은 믿음으로 살며, 오직 하나님의 임재와 그 영광을 위해 사는 것”, 이것만이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이다.

 기독교 교육 철학에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 개념(形像槪念)은 극히 기본적인 개념이다. 아니 이 개념은 본래 철학의 본질적인 개념이다. 이 본질을 무시하고 제외시킴으로 세상의 철학들은 죽음과 고통, 허무와 혼돈 속에서 방황하고 있다. 모든 사물의 원리를 바르게 탐구하여 인간의 삶을 궁극적으로 그리고 진리로 향할 수 있도록 그 바른 지침이 되어야할 철학이 이렇듯 혼미한 상황이라면,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있어서 큰 책임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본 장에서 기독교 교육 철학의 바른 개념을 열거하여 세속적 철학 개념의 오명을 씻고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바른 개념을 정립해 보자.

 

  1.형상 개념(Image Idea)

  형상 개념(形像槪念)은 모든 만물을 이해하는 원리를 구명(究明)하는 하나의 의미 깊은 사실이다. 이 개념은 형상(image)이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그 유사성, 그 닮음 꼴을 말한다. 즉 거울에 비친 모습(모양)을 통하여 실물을 아는 것과 같은 부인할 수 없는 이치(理致)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었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철학적 기본 개념에 큰 영향을 주는 깊은 의미의 말씀이다. 왜냐하면 보이는 것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것의 그 이념과 속성을 분명하게 드러나게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개념은 철학의 근본 원리에 정확하게 규합되는 하나의 사실적인 법칙으로서 철학(哲學)은 가설(假說)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모든 영역에 걸친 사물(事物)의 근본 원리를 추구하는 학문으로 자연과 사회 전반에 걸친 일반적인 법칙성을 탐구하게 하는 촉매제 역할을 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 형상 개념, 또는 모양 개념은 창 1:26에 명확하게 규정지어져 있다. 형상은 

 - image 이며, 모양은 

 - likeness 로 그 뜻에 있어서는 유사, 닮음이라는 동의어로 취급된다. 다시 말하여 동의어의 반복이라는 점에서 볼 때 형상 개념(Image Idea)을 특별히 강조한 하나님의 깊으신 의도가 숨어있는 것이다.
  또한 이와 같은 개념은 비단 인간 창조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광의적(廣義的)이며 근본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 철학인 것처럼 하나님의 전 우주적인 창조물, 즉 모든 만물을 이해하는 원리에 대한 사실을 탐구하는 그 자체로서 철학을 위한 근본 원리로 존재하는 하나의 사실적인 법칙이다.
  그러므로 이 보이는 형상 개념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실물의 그 생생한 존재성과 그 속성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는 것을 어느 누구도 핑계치 못한다고 사도 파울은 말하였다(롬1:20).
  그리고 형상 개념으로 나타난 인간 창조의 그 계획 속에는 인간을 모든 만물의 우두머리로 창조하심으로 인간에게 하등 영광(lower honor)15)을 부여하셨다는 것은, 곧 창조자 하나님 자신의 고등 영광(glory of God)을 동시적으로 이미 선포하셨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그리고 특히 인간 창조에 있어서 형상 개념이 의미하는 최고의 목적은 하나님이 영이신 것처럼 인간을 그 유사한 영적 성질로 창조하여 하나님과 인간과의 친밀한 인격적 교제(spirited fellow-ship)16)를 성취하셨다는 사실이다.
  다시 반복 강조하지만,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인간 창조 목적의 최고 성취이다. 그러므로 또한 형상 개념이 인간에게 의미하는 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으로서만 완전한 만족을 얻게 된다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교육의 기초가 철학이라면 철학의 기초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2.옛 형상 개념(Old Image Idea)

  옛 형상 개념은 타락한 아담의 유전을 따르는 전적 타락, 또는 전적 무능력의 그 형상(Image)과 그 모양(likeness)이다. 즉 인간 타락 이전의 형상 개념의 함축적인 의미가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인간 타락 이후에는 무시되고 제외되어 버린 가운데 허상만을 쫓는 비참한 모습이 되어버렸다. 거울의 바로 앞, 그 면전에 사실적으로 서있는 하나님의 형상(spiritual image) 자체인 자기 자신의 실상을 보면서도, 그 정신면의 인식 속에는 타락한 허상(soul image)만을 쫓는 옛 형상 개념을 그대로 갖고 있는 것이다.
  옛 형상 개념은 타락한 인간 아담의 유전을 따라,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긴 역사의 터널을 지나오고 있다. 즉 타락한 인간의 유전, 전통 그 관습의 옛 것들을 실제의 형상과 모양인 양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상에 있어서 허상( 虛像, virtual image) 17)이다.
  그러므로 이 허상의 본체 안에는 철학의 형상 개념의 기초가 되어야할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무시되고 제외되어 존재할 수가 없다. 심지어 하나님이 불러모은 신자의 무리들까지도 자기들이 만들어낸 허상18) 속으로 하나님을 끌어들인다.
  세속 철학의 인식 개념은 옛 아담의 그 유전을 따라, 옛 형상 개념 안에서 금지 시험19)의 인식 장소를 제 마음껏 넘나들고 있다. 다시 말하여 인간의 정신 세계 안에는 형상 개념의 원초인 영적 장소(spiritual image)가 무능해진 가운데 타락한 혼적 장소(soul image)의 그 허상(ghost image), 망상(fancy image), 공상(idle image)의 비참한 상태에 놓여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인간의 처절한 상태에 직면해 있으면서도“카인의 후예”라고 하는 등, 로맨틱(romantic)하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나를 건져주랴”(롬7:24) 라고 자기 자신을 향하여 철저히 개탄(慨歎)하고 있는 것이다.
  옛 형상 개념은 성경의 모든 말씀 중에서 가장 슬픈 이야기이다. 이것은 인류의 시조 아담이 뱀의 유혹을 받아 금단의 열매를 따먹고 에덴에서 추방되었다는 그러한 형식상의 단순한 범죄 기록이 아니다. 이것은 전 인류에게 미친 죄의 기원을 말하고 원죄(原罪, Original Sin)를 말하는 것으로, 철학의 근본을 제 마음대로 뒤흔드는 타락한 인간의 그 인식의 세계를 지목(指目)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의 형상 개념의 침범할 수 없는 그 불가항력적 인식의 세계를 제 마음대로 혼탁케하여 하나님의 금지 명령을 약하게, 흐리게, 가볍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삭제, 첨가, 변경하는 상상할 수 없는 범죄자의 심리를 그대로 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 원죄 개념에 대하여 사탄(tempter)은 철저한 부정이요, 불순종이요, 대항자이다. 세속 철학의 인식 속에 이와 같은 개념이 그대로 유전되어 우리 앞에 직면해 있는 지금, 아니 온 세상에 이와 같은 교육 철학이 가득한 지금, 더더욱 그와 같은 세속적인 교육을 전혀 여과 없이 받아들인 우리들에게 있어서 엄청난 큰 문제로 우리 인식 속에 자리잡혀 있다는 것을 통찰(洞察, discernment)해야 한다.

 

  3.새 형상 개념(New Image Idea)

  타락한 옛 아담으로 인하여 전 인류가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새 아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시 회복시키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이 개념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형상 개념(New Image Idea in Christ)이라고 한다.
  옛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전 인류에게 미친 옛 형상 개념은 철학의 본질적 개념인 형상 개념(Image Idea = Image of God)을 전적으로 무력화시켰다. 즉 전적 불능이요, 전적 무능력으로 인간의 인식 세계를 약화시켜버린 것이다.
  반면에 뱀(tempter)에 말처럼(창3:4-5) 눈이 밝아져 혼( = soul)적 인식의 세계(psychology)20)가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hold up) 간교(cunning)한 혀를 날름거리면서 무모한 도전과 굉장한 위험을 무릅쓴 쓸데없는 짓, 그 못된 짓을 하도록 하는 인식 세계의 겉잡을 수 없는 충동질 속에서, 혼잡한 생각을 거듭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행위를 서슴없이 함으로, 하나님을 감히 시험(test)하고 노(provoke)하게 하는 그 쾌락의 참으로 못된 유혹(tempt)의 인식이, 인간을 한없는 사망의 구렁텅이로 내 몰리게 하고 있다.
  타락한 인간의 유전, 전통 그 관습은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이 타락한 육적(

 = psyche)인간 존재의 주체적 인식 속에서 인격의 중심을 형성하고, 자아를 형성시키고, 사고와 정서 ` 의지와 행동을 그 스스로 하게 하였다. 이것을 인간 심리학에서는 사이칼러지(psychology)라고 하여 연구의 대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타락한 육적인간 존재의 주체적 인식은 피비린내 나는 고대의 정복의 역사를 통하여 그 문화를 발전시켜 소위 사상을 낳고, 미(美)를 풀고, 문학, 예술, 철학을 낳고, 또 그 맛을 보고 즐기는 그 스스로 한다 하는 자칭 주체적 존재이지만 참된 사람, 참된 문화, 참된 역사, 참된 철학을 이루지 못하는 불확실성의 시대를 대대로(generation) 물려주며 물려받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하 등의 능력은 극심한 정도의 차는 있지만 동물에도 구비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은 사람만이 갖는 것인데, 이것은 영적(

)인 것으로 본래의 철학의 기본 개념인 형상 개념의 본질적 요소이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타락이전 인간 정신세계의 그 근본 개념으로 참된 사람이 되게 하는 까닭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본질적 부분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아는 능력이며,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기쁨으로 얻는 능력이며,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에 설 수 있는 능력이다. 이 능력을 얻은 자는 진정으로 자유 함을 누린다(요14:6, 8:32). 죽음, 고통, 허무가 있을 수 없고 모든 것을 초월하여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가득한 참된 능력이다.
  이 하나님의 능력(

)은 타락한 인간 스스로는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불가항력이다. 왜냐하면 영이신 하나님과 타락한 인간의 육적 정신이 그러하듯이,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저항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하나님의 공의(

 = righteousness)가 작동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변절될 수 없는 하나님의 속성 그 자체로서 완전한 도덕적인 의를 말한다. 이것은 완전하신 하나님의 무흠함, 무죄성, 정결함과 그 위엄성 그 자체로서 도덕적으로 타락한 인간 스스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불가항력인 것이다. 그리고 그 용서를 받지 못할 때는 오직 죽음뿐인 것이다. 따라서 이 경이로운 두려움, 하나님의 속성인 공의를 만족시켜야만 인간의 상실된 영적 능력은 회복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 공의를 만족케 할 자는 타락한 인간으로서는 그 누구도 합당한 자가 없는 것이다. 오직 이 공의를 만족케 할 자는 하나님 자신의 무흠한 피흘림만이 합당한 것이다. 이것은 피로 맺은 약정(bond-in-blood)21) 의로 이미 인간 창조 이전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약 속에서 작정해 놓으신 상호협정으로서 정의되는 계약(a mutual contract)22)이다.
  이 계약의 성취가 성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형상 개념(New Image Idea in Jesus Christ)이다. 이 새형상 개념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만날 때까지는 전적으로 죽어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인류적이며 전인격적인 무조건 선택 - 제한적 속죄 - 불가항력적 은혜 - 궁극적 구원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그 성취 안에서 죽었던 하나님의 형상 개념이 살아나게 하고 새로운 생명을 베풀어주심으로 인하여 타락한 인간의 영과 혼과 몸이 깨끗하게 - 하나님이 받으실 만 하게- 그 도덕적 성질이나 상태, 그 의지나 생각이 하나님의 뜻과 합치되는 완전한 상태의 새 형상 개념을 초자연적으로 기적적으로 우리 속에서 이루시는 것이다. 이것이 참으로 놀라운 회개(

)23)의 인식의 전환이다. 이 놀라운 역사의 대 장정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한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그 성령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의 혼적 요소인 프시케에 역사하여 더 깊은 곳에 있는 프뉴마에 조용히 역사 하시는 것이다. 이로써 타락한 인간의 이성과 감정의 주체는 실제적으로 개조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타락한 인식의 그 주체가 하나님을 깨끗이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인간 정신세계의 그 근본 - 새 형상 개념의 철학적 본질을 완전하게 이루는 것이다.

 

  4.개체(個體)와 공동체(共同體)의 연관성(聯關性)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의 세계는 두 개의 생활을 하게 되어 있다. 하나는 순수한 개별적인 생활이고, 다른 하나는 여러 개체가 서로 연합하는 공동생활이다. 즉 모든 피조물 각각의 개체들은 각기 독립된 개체로서 생활하고, 또 서로 상호간에 연관성을 맺는 공동체로서 생활을 한다. 이것은 개체와 공동체의 올바른 관계로서, 모든 피조물들이 추구하는 목적이며 벗어날 수 없는 질서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 세계에서 생활하는 인간도 역시 개체이면서 공동체 생활의 연관성 안에서 그 목적과 질서를 가지고 삶을 영위한다. 이와 같은 법칙은 인간도 자연물도 벗어날 수 없는 것으로서 창조주 하나님의 계시(revelation) 24)이다.
  그러므로 또한 우리가 피조물임을 잘 알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창조주 하나님에게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창조주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성경적인 하나님의 개념은 어떠한가?
  하나님은 삼위(三位)이시지만 한 분이시다. 즉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

)25)이시다.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오묘하신 그 계시 속에는 개체와 공동체의 긴밀한 연관성이 있음을 보여 주신다. 즉 삼위 하나님의 개체와 공동체로서의 연관성은 여럿이 하나로 전체적인 움직임이 잘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삼위일체의 각 위(位)가 각기 하나님이 되실 뿐더러 하나로 일체(一體)된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의 세계에는 그 계시의 형상을 그대로 반영시켜 본받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개체와 공동체로서의 연관성은 하등 피조물에서 보다 고등 피조물인 인간의 창조에서 더욱 뚜렷하게 잘 나타난다.
  인간의 개체이면서 공동체적인 생활은 가정, 사회, 국가, 세계라는 광범위하고도 폭넓은 영역을 차지한다. 특히 그 중에서도 공동체의 기초 단위인 가정은 더 기초적인 단위인 결혼으로부터 출발을 한다. 이 결혼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세우신 최초의 약정으로서 창조의 계약(Covenant of Creation) 또는 창조의 약정(Bond of Creation)26)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리고 이 창조의 약정에는 일반적인 면으로 안식일, 결혼, 노동이라는 세 가지의 규례를 정해 놓으심으로서 이것은 그 어느 것도 변할 수 없는 창조 규례에 내재된 원칙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규례들은 사실상에 있어서 창조주에 대한 피조물 인간의 넓은 책임과 연관되어진다.
  결혼은 개체이면서 공동체적인 연관성을 나타내는 참으로 신비한 하나님의 창조 규례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그 형상이 그러하듯이 사람이 개체적인 생활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음을 이미 규정해 놓으셨다(창2:18,“사람의 독처함히 좋지 못하다”).
  우리는 이 결혼의 창조 규례에 의해서 개체와 공동체의 연관성 안에 있는 그 목적과 질서를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

첫째, 개체와 공동체간에는 창조 약정에 포함된“상호 결합”의 신비가 주목된다.

  남자와 여자라는 각각의 개체가 창조의 약정에 따라 결혼함으로 서로 하나가 되는 공동체의 연관성을 맺고,“한 몸을 이룬다”는 것은 단순히 완전한 경지에 이르는 여러 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하나됨은 결혼함으로써 갖는“결합의 영속적인 상태”를 표현한다. 이것은 창조 때 이미 정해진 상호 결합의 함축된 의미로서 오로지 창조 질서에 따른 개체와 공동체의 연관성에 의해서 그런 신비한 관계에 들어 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사상을 더욱 분명히 하여 복음으로써 전달하시었다. 이혼 문제를 다루는 말씀에서, “사람을 만드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을 이룰지니라”(

; 마19:4-5, 막10:6-8, 엡5:31).
  즉 하나님의 창조 약정이 각각의 개체를 하나로 연합했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는 둘이 아니고 한 몸이라고 설명한다(마19:6). 그러므로 개체와 공동체간에는 창조 약정에 포함된 상호 결합이 강조되고 있으며, 이는 창조 질서에 의하여 신비하게 상호 결합되는 것이다.

둘째로, 창조 질서는 개체와 공동체간의 질서를 규정짓는 내부 구조를 결정한다.

  사람이 개체로서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그를 돕는 배필”( , a halper corresponding to him)을 만들었다고 하셨다(창2:18).
  즉 여자는 결혼 관계에서 남자를 돕는 자로서 창조되었다. 이는 개체와 공동체간의 변할 수 없는 내부 질서를 분명히 하심이다. 여자의 존재 목적이 남자를 도움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것이 있다.“그와 동등한 돕는 자”이다(창2:20). 이 말의 뜻은 지배력이나 거만함이 전혀 없는 인격적인 면에서 남자와 동등하다는 것이며, 따라서 남자와 여자는 다 똑같이 중요하다 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개체와 공동체간의 내부 질서는 인격의 동등성 안에서 서로 합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된 그 창조 질서에 부합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개체와 공동체간의 내부 질서는 이 세상을 완성하게 하는 목적이 된다. 다시 말하면 가정, 사회, 국가, 세계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그 창조 질서 안에 거하여 인격의 동등 성을 지켜 서로 돕는 자가 되어야 하며 서로 사랑하고 서로 보호하여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거역할 수 없는 창조 질서에 의한 공동체 안에서의 내부 질서이다.
  이제 우리의 사회 질서에는 지위고하, 빈부귀천의 차별을 없애고, 뿌리 깊은 권위주의와 남아 선호사상, 부익부 빈익빈, 학벌, 문벌, 지역 감정, 등등의 말로 할 수 없는 타락의 요소들을 깨끗하게 청소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부가되는 것은 사랑이다. 이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으로 내가 죽기까지 희생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함이요, 그와 같이, 내 이웃을 사랑함이다.
  이제 우리의 사회 질서에는 지배하는 또는 거만한 가장으로서의 질서가 아니라 서로 희생하고 서로 사랑하는 가장으로서 서로 돕는 역할을 충실히 해야만 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고전11:12下半節)이기 때문이다.

 

  5.개별주의와 공동주의의 역사적 고찰(신학적 비판)

  두 주의를 역사적으로 고찰하면, 공동주의는 플라톤(Platon, B. C. 427-347)27)의 이상주의(idealism)에서 발생된 것이고, 개별주의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 C. 384-322) 28)의 자연주의에 의해서 발생된 것이다.
  따라서 중세기의 종교적 공동주의는 플라톤의 이상주의(공동주의)로 인해 발단이 되었다. 이 주의가 중세기 카톨릭 교회 안에서 아무런 여과장치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진 이유는, 그 당시 수도원의 금욕주의가 각기 개별적인 신앙생활로 고조되었으므로 이를 약화시키고자 모색한 나머지 무신론의 공동주의를 그대로 받아들여 강요하게 된 것이다(개체와 공동체간의 극심한 분화 현상).
  그 결과, 공동주의 또는 제도주의의 지배력은 도리어 자연주의적인 개별주의의 강한 욕구를 더욱 불러 일으키게된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따라서 중세기의 종교는 개체와 공동체의 균형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하나님의 약정과 그 창조 질서를 무시하고 제외시킨 개체와 공동체간의 극심한 분화현상은 인식의 극히 좁은 범위에 내포된 의미를 준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식의 보다 넓은 책임이 자주 무시되는 진정한 철학적 본질의 부재인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까지도 간단없이 지속되고 있어서 불확실성의 기약 없는 세월만이 충만할 뿐이다. 이 좁은 관점은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구속 의미를 고찰하는 데까지 연장되어, 그 결과 인간 구원에 대한 교회의 공동체 개념에 큰 결핍을 초래하고 있다. 이로써 기독교회 공동체는 전 세계관과 인생관에 결핍을 가져다주고 있다. 창조 질서에 의한 개체와 공동체의 긴밀한 상호 연합에 의한 그리스도 왕국중심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개체와 공동체간의 극심한 분화현상을 도무지 회개할 줄 모르는 교회중심이 되어 버렸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개체와 공동체간의 극심한 분화현상의 이론을 일반적으로 보편 타당한 것처럼 정립한 것은, 소위 천재적인 철학자라고 알려져 있는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A. D. 1227-1274)에 의해서 이다.
  그는 무신론의 개별주의(자연주의)와 공동주의(제도주의)를 당시에 유행된 카톨릭 공동체의 교권주의와 소위 천재적으로 융화시켜 보편 타당한 종합 이론을 창출해 낸 것이다. 이는 로마 카톨릭 교회 공동체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고 그 공동체의 기초 개념으로서 확립되기에 이른다. 이것이 소위 중세의 아퀴나스 철학이다.
  본래 개체와 공동체는 신비한 상호 연합에 의하여 서로 희생하며, 사랑하며, 돕는 가운데 균형을 이루는 창조 질서에 근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론은 로마 카톨릭 공동체의 그 지배력과 거만함의 제도주의를 자연주의와 교묘히(cunning) 결합시켜 극히 사이키적(프시케)인 보편타당성을 이끌어 낸 것이다.
  그러므로 중세 세계의 그 공동체적 인식은 카톨릭 교회 공동체의 그 지배력과 거만함 속에 잠식되어 버렸다. 아퀴나스의 학설은 신학적으로 볼 때, 소위 은혜와 자연을 대조시킨 것으로 카톨릭 공동주의 곧 그 지배와 거만함의 제도주의를 은혜의 저장소로 둔갑시켜 버렸다. 다시 말하면 아퀴나스 철학의 결론은 공동주의(제도주의) + 자연주의의 카톨릭 교회가 인간의 생명과 죽음을 지배하고 있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13세기와 14세기초에는 중세 교회의 공동주의(제도주의, 교권주의)에 대항하는 자연주의 성향의 개인주의가 활발하게 일어남으로 인해 개체와 공동체간의 불가피한 충돌이 생기기 시작했다. 헬라의 자연주의(개인주의)를 회복시켜 공동체보다는 개체(개인)의 우선을 강조한 르네상스(Renaissance)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여기에도 아퀴나스 철학의“개인들에게 보장된 자연권”이 한 몫 을 하였다. 따라서 르네상스 운동의 목적은 개인 독립에 대한 인간의 감정과 옛 고전주의의 정신으로 복귀하자는 것이다.
  15세기에는 14세기에 일어난 헬라의 개별주의 부흥과 더불어 인문주의가 탄생하고 이 인문주의는 교회의 초자연주의를 불신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로 인하여 비종교적인 인식의 성향이 날로 증가하는 가운데 세속주의라고 하는 것이 탄생하게 된다. 이 세속주의 철학은 인간 주체적 성향을 극히 강조하는 인본주의의 개념이다. 이것은 정치단체의 내부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 또다시 공동주의로 개별주의를 삼켜 버리는 그 비겁한 자태를 들어내고 있다.
  이런 세속주의적 성향의 카톨릭 교권주의에 강력히 반발하여 일어난 것이 1517년의 종교개혁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지배력과 거만함의 그 타락한 공동체의 난잡한 인간 질서를 완벽하게 개혁(Reformed)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던 것이다.
  사실 종교 개혁자들은 진정한 개체로서의 자각을 갖고 있었다. 즉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준하는 그 자각인 것이다. 이는 기독교 철학의 대가(大家) 사도 바울의 말처럼“죄인 된 나와 믿음으로 의롭게 된 나가 한 몸에 있다”라고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회개하여 타락한 개체 안의 인식의 개조를 분명히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삶 속에는 인간의 공력(功力)을 내세우지 않고 오로지 믿음으로서만 의로워짐을 강조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인간 역사에 있어서 가장 큰 혁명이었다. 르네상스나 산업혁명이나 기타 세상의 어느 혁신적인 운동도 이 종교 개혁을 능가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개체와 공동체간의 상호 연합의 신비를 본래의 창조 질서 안으로 개혁하기 위한 위대한 행보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실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주님의 위대한 사랑이 그러하듯이 이들 또한 그 자취를 따라간 것이다. 한 몸으로 하나된 신비한 상호 연합, 서로 죽기까지 희생함으로 사랑하고, 서로 돕고 보호하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견고히 한 것이다.

이제 결론적으로, 다시 한 번 간추려 보자.

  중세기 교회의 철학은 공동주의가 개별주의를 삼켜 버렸다. 오늘 날 세속주의 철학은 정치 단체의 발달로 인해 또 다시 공동주의로 개별주의를 삼켜 버리고자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개혁파 교회나 교인들은 종교 개혁자들의 그 위대한 자취를 따라 개별주의와 공동주의가 균형 잡힌 이상적인 철학을 추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창조 약정의 그 창조 질서에 의한 개체와 공동체의 신비한 상호 연합을 회복시키는 강력한 개혁주의(the Reformation)인 것이다.
  이러한 개혁의 실마리는 철저한 개체의 자각으로부터 출발을 한다. 즉 하나님 앞에서의 철저한 자기 발견과 통찰, 그리고 진정으로 뉘우치는 회개로부터의 철저한 인식의 개조가 천국을 소유케 하는 것이다(“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4:17).
  그러므로 항간에 비쳐지고 있는 개교회주의나 지방주의의 개별주의적 경향이나, 교권주의로 흐르는 공동주의적 경향은 매우 위험한 신호(sign)이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정지 신호(A signal of stop), 또는 경고 표지(A warning si- gn)로 진정한 기독교 철학의 부재에서 야기되는 것이다.
  기독교 철학의 총체적 입장은“의인은 믿음으로 살며, 오직 하나님의 임재와 그 영광을 위해 사는 것”, 이것만이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이다.

 기독교 교육 철학에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 개념(形像槪念)은 극히 기본적인 개념이다. 아니 이 개념은 본래 철학의 본질적인 개념이다. 이 본질을 무시하고 제외시킴으로 세상의 철학들은 죽음과 고통, 허무와 혼돈 속에서 방황하고 있다. 모든 사물의 원리를 바르게 탐구하여 인간의 삶을 궁극적으로 그리고 진리로 향할 수 있도록 그 바른 지침이 되어야할 철학이 이렇듯 혼미한 상황이라면,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있어서 큰 책임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본 장에서 기독교 교육 철학의 바른 개념을 열거하여 세속적 철학 개념의 오명을 씻고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바른 개념을 정립해 보자.

 

  1.형상 개념(Image Idea)

  형상 개념(形像槪念)은 모든 만물을 이해하는 원리를 구명(究明)하는 하나의 의미 깊은 사실이다. 이 개념은 형상(image)이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그 유사성, 그 닮음 꼴을 말한다. 즉 거울에 비친 모습(모양)을 통하여 실물을 아는 것과 같은 부인할 수 없는 이치(理致)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었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철학적 기본 개념에 큰 영향을 주는 깊은 의미의 말씀이다. 왜냐하면 보이는 것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것의 그 이념과 속성을 분명하게 드러나게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개념은 철학의 근본 원리에 정확하게 규합되는 하나의 사실적인 법칙으로서 철학(哲學)은 가설(假說)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모든 영역에 걸친 사물(事物)의 근본 원리를 추구하는 학문으로 자연과 사회 전반에 걸친 일반적인 법칙성을 탐구하게 하는 촉매제 역할을 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 형상 개념, 또는 모양 개념은 창 1:26에 명확하게 규정지어져 있다. 형상은 

 - image 이며, 모양은 

 - likeness 로 그 뜻에 있어서는 유사, 닮음이라는 동의어로 취급된다. 다시 말하여 동의어의 반복이라는 점에서 볼 때 형상 개념(Image Idea)을 특별히 강조한 하나님의 깊으신 의도가 숨어있는 것이다.
  또한 이와 같은 개념은 비단 인간 창조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광의적(廣義的)이며 근본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 철학인 것처럼 하나님의 전 우주적인 창조물, 즉 모든 만물을 이해하는 원리에 대한 사실을 탐구하는 그 자체로서 철학을 위한 근본 원리로 존재하는 하나의 사실적인 법칙이다.
  그러므로 이 보이는 형상 개념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실물의 그 생생한 존재성과 그 속성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는 것을 어느 누구도 핑계치 못한다고 사도 파울은 말하였다(롬1:20).
  그리고 형상 개념으로 나타난 인간 창조의 그 계획 속에는 인간을 모든 만물의 우두머리로 창조하심으로 인간에게 하등 영광(lower honor)15)을 부여하셨다는 것은, 곧 창조자 하나님 자신의 고등 영광(glory of God)을 동시적으로 이미 선포하셨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그리고 특히 인간 창조에 있어서 형상 개념이 의미하는 최고의 목적은 하나님이 영이신 것처럼 인간을 그 유사한 영적 성질로 창조하여 하나님과 인간과의 친밀한 인격적 교제(spirited fellow-ship)16)를 성취하셨다는 사실이다.
  다시 반복 강조하지만,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인간 창조 목적의 최고 성취이다. 그러므로 또한 형상 개념이 인간에게 의미하는 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으로서만 완전한 만족을 얻게 된다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교육의 기초가 철학이라면 철학의 기초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2.옛 형상 개념(Old Image Idea)

  옛 형상 개념은 타락한 아담의 유전을 따르는 전적 타락, 또는 전적 무능력의 그 형상(Image)과 그 모양(likeness)이다. 즉 인간 타락 이전의 형상 개념의 함축적인 의미가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인간 타락 이후에는 무시되고 제외되어 버린 가운데 허상만을 쫓는 비참한 모습이 되어버렸다. 거울의 바로 앞, 그 면전에 사실적으로 서있는 하나님의 형상(spiritual image) 자체인 자기 자신의 실상을 보면서도, 그 정신면의 인식 속에는 타락한 허상(soul image)만을 쫓는 옛 형상 개념을 그대로 갖고 있는 것이다.
  옛 형상 개념은 타락한 인간 아담의 유전을 따라,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긴 역사의 터널을 지나오고 있다. 즉 타락한 인간의 유전, 전통 그 관습의 옛 것들을 실제의 형상과 모양인 양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상에 있어서 허상( 虛像, virtual image) 17)이다.
  그러므로 이 허상의 본체 안에는 철학의 형상 개념의 기초가 되어야할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무시되고 제외되어 존재할 수가 없다. 심지어 하나님이 불러모은 신자의 무리들까지도 자기들이 만들어낸 허상18) 속으로 하나님을 끌어들인다.
  세속 철학의 인식 개념은 옛 아담의 그 유전을 따라, 옛 형상 개념 안에서 금지 시험19)의 인식 장소를 제 마음껏 넘나들고 있다. 다시 말하여 인간의 정신 세계 안에는 형상 개념의 원초인 영적 장소(spiritual image)가 무능해진 가운데 타락한 혼적 장소(soul image)의 그 허상(ghost image), 망상(fancy image), 공상(idle image)의 비참한 상태에 놓여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인간의 처절한 상태에 직면해 있으면서도“카인의 후예”라고 하는 등, 로맨틱(romantic)하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나를 건져주랴”(롬7:24) 라고 자기 자신을 향하여 철저히 개탄(慨歎)하고 있는 것이다.
  옛 형상 개념은 성경의 모든 말씀 중에서 가장 슬픈 이야기이다. 이것은 인류의 시조 아담이 뱀의 유혹을 받아 금단의 열매를 따먹고 에덴에서 추방되었다는 그러한 형식상의 단순한 범죄 기록이 아니다. 이것은 전 인류에게 미친 죄의 기원을 말하고 원죄(原罪, Original Sin)를 말하는 것으로, 철학의 근본을 제 마음대로 뒤흔드는 타락한 인간의 그 인식의 세계를 지목(指目)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의 형상 개념의 침범할 수 없는 그 불가항력적 인식의 세계를 제 마음대로 혼탁케하여 하나님의 금지 명령을 약하게, 흐리게, 가볍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삭제, 첨가, 변경하는 상상할 수 없는 범죄자의 심리를 그대로 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 원죄 개념에 대하여 사탄(tempter)은 철저한 부정이요, 불순종이요, 대항자이다. 세속 철학의 인식 속에 이와 같은 개념이 그대로 유전되어 우리 앞에 직면해 있는 지금, 아니 온 세상에 이와 같은 교육 철학이 가득한 지금, 더더욱 그와 같은 세속적인 교육을 전혀 여과 없이 받아들인 우리들에게 있어서 엄청난 큰 문제로 우리 인식 속에 자리잡혀 있다는 것을 통찰(洞察, discernment)해야 한다.

 

  3.새 형상 개념(New Image Idea)

  타락한 옛 아담으로 인하여 전 인류가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새 아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시 회복시키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이 개념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형상 개념(New Image Idea in Christ)이라고 한다.
  옛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전 인류에게 미친 옛 형상 개념은 철학의 본질적 개념인 형상 개념(Image Idea = Image of God)을 전적으로 무력화시켰다. 즉 전적 불능이요, 전적 무능력으로 인간의 인식 세계를 약화시켜버린 것이다.
  반면에 뱀(tempter)에 말처럼(창3:4-5) 눈이 밝아져 혼( = soul)적 인식의 세계(psychology)20)가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hold up) 간교(cunning)한 혀를 날름거리면서 무모한 도전과 굉장한 위험을 무릅쓴 쓸데없는 짓, 그 못된 짓을 하도록 하는 인식 세계의 겉잡을 수 없는 충동질 속에서, 혼잡한 생각을 거듭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행위를 서슴없이 함으로, 하나님을 감히 시험(test)하고 노(provoke)하게 하는 그 쾌락의 참으로 못된 유혹(tempt)의 인식이, 인간을 한없는 사망의 구렁텅이로 내 몰리게 하고 있다.
  타락한 인간의 유전, 전통 그 관습은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이 타락한 육적(

 = psyche)인간 존재의 주체적 인식 속에서 인격의 중심을 형성하고, 자아를 형성시키고, 사고와 정서 ` 의지와 행동을 그 스스로 하게 하였다. 이것을 인간 심리학에서는 사이칼러지(psychology)라고 하여 연구의 대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타락한 육적인간 존재의 주체적 인식은 피비린내 나는 고대의 정복의 역사를 통하여 그 문화를 발전시켜 소위 사상을 낳고, 미(美)를 풀고, 문학, 예술, 철학을 낳고, 또 그 맛을 보고 즐기는 그 스스로 한다 하는 자칭 주체적 존재이지만 참된 사람, 참된 문화, 참된 역사, 참된 철학을 이루지 못하는 불확실성의 시대를 대대로(generation) 물려주며 물려받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하 등의 능력은 극심한 정도의 차는 있지만 동물에도 구비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은 사람만이 갖는 것인데, 이것은 영적(

)인 것으로 본래의 철학의 기본 개념인 형상 개념의 본질적 요소이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타락이전 인간 정신세계의 그 근본 개념으로 참된 사람이 되게 하는 까닭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본질적 부분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아는 능력이며,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기쁨으로 얻는 능력이며,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에 설 수 있는 능력이다. 이 능력을 얻은 자는 진정으로 자유 함을 누린다(요14:6, 8:32). 죽음, 고통, 허무가 있을 수 없고 모든 것을 초월하여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가득한 참된 능력이다.
  이 하나님의 능력(

)은 타락한 인간 스스로는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불가항력이다. 왜냐하면 영이신 하나님과 타락한 인간의 육적 정신이 그러하듯이,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저항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하나님의 공의(

 = righteousness)가 작동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변절될 수 없는 하나님의 속성 그 자체로서 완전한 도덕적인 의를 말한다. 이것은 완전하신 하나님의 무흠함, 무죄성, 정결함과 그 위엄성 그 자체로서 도덕적으로 타락한 인간 스스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불가항력인 것이다. 그리고 그 용서를 받지 못할 때는 오직 죽음뿐인 것이다. 따라서 이 경이로운 두려움, 하나님의 속성인 공의를 만족시켜야만 인간의 상실된 영적 능력은 회복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 공의를 만족케 할 자는 타락한 인간으로서는 그 누구도 합당한 자가 없는 것이다. 오직 이 공의를 만족케 할 자는 하나님 자신의 무흠한 피흘림만이 합당한 것이다. 이것은 피로 맺은 약정(bond-in-blood)21) 의로 이미 인간 창조 이전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약 속에서 작정해 놓으신 상호협정으로서 정의되는 계약(a mutual contract)22)이다.
  이 계약의 성취가 성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형상 개념(New Image Idea in Jesus Christ)이다. 이 새형상 개념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만날 때까지는 전적으로 죽어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인류적이며 전인격적인 무조건 선택 - 제한적 속죄 - 불가항력적 은혜 - 궁극적 구원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그 성취 안에서 죽었던 하나님의 형상 개념이 살아나게 하고 새로운 생명을 베풀어주심으로 인하여 타락한 인간의 영과 혼과 몸이 깨끗하게 - 하나님이 받으실 만 하게- 그 도덕적 성질이나 상태, 그 의지나 생각이 하나님의 뜻과 합치되는 완전한 상태의 새 형상 개념을 초자연적으로 기적적으로 우리 속에서 이루시는 것이다. 이것이 참으로 놀라운 회개(

)23)의 인식의 전환이다. 이 놀라운 역사의 대 장정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한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그 성령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의 혼적 요소인 프시케에 역사하여 더 깊은 곳에 있는 프뉴마에 조용히 역사 하시는 것이다. 이로써 타락한 인간의 이성과 감정의 주체는 실제적으로 개조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타락한 인식의 그 주체가 하나님을 깨끗이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인간 정신세계의 그 근본 - 새 형상 개념의 철학적 본질을 완전하게 이루는 것이다.

 

  4.개체(個體)와 공동체(共同體)의 연관성(聯關性)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의 세계는 두 개의 생활을 하게 되어 있다. 하나는 순수한 개별적인 생활이고, 다른 하나는 여러 개체가 서로 연합하는 공동생활이다. 즉 모든 피조물 각각의 개체들은 각기 독립된 개체로서 생활하고, 또 서로 상호간에 연관성을 맺는 공동체로서 생활을 한다. 이것은 개체와 공동체의 올바른 관계로서, 모든 피조물들이 추구하는 목적이며 벗어날 수 없는 질서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 세계에서 생활하는 인간도 역시 개체이면서 공동체 생활의 연관성 안에서 그 목적과 질서를 가지고 삶을 영위한다. 이와 같은 법칙은 인간도 자연물도 벗어날 수 없는 것으로서 창조주 하나님의 계시(revelation) 24)이다.
  그러므로 또한 우리가 피조물임을 잘 알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창조주 하나님에게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창조주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성경적인 하나님의 개념은 어떠한가?
  하나님은 삼위(三位)이시지만 한 분이시다. 즉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

)25)이시다.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오묘하신 그 계시 속에는 개체와 공동체의 긴밀한 연관성이 있음을 보여 주신다. 즉 삼위 하나님의 개체와 공동체로서의 연관성은 여럿이 하나로 전체적인 움직임이 잘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삼위일체의 각 위(位)가 각기 하나님이 되실 뿐더러 하나로 일체(一體)된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의 세계에는 그 계시의 형상을 그대로 반영시켜 본받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개체와 공동체로서의 연관성은 하등 피조물에서 보다 고등 피조물인 인간의 창조에서 더욱 뚜렷하게 잘 나타난다.
  인간의 개체이면서 공동체적인 생활은 가정, 사회, 국가, 세계라는 광범위하고도 폭넓은 영역을 차지한다. 특히 그 중에서도 공동체의 기초 단위인 가정은 더 기초적인 단위인 결혼으로부터 출발을 한다. 이 결혼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세우신 최초의 약정으로서 창조의 계약(Covenant of Creation) 또는 창조의 약정(Bond of Creation)26)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리고 이 창조의 약정에는 일반적인 면으로 안식일, 결혼, 노동이라는 세 가지의 규례를 정해 놓으심으로서 이것은 그 어느 것도 변할 수 없는 창조 규례에 내재된 원칙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규례들은 사실상에 있어서 창조주에 대한 피조물 인간의 넓은 책임과 연관되어진다.
  결혼은 개체이면서 공동체적인 연관성을 나타내는 참으로 신비한 하나님의 창조 규례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그 형상이 그러하듯이 사람이 개체적인 생활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음을 이미 규정해 놓으셨다(창2:18,“사람의 독처함히 좋지 못하다”).
  우리는 이 결혼의 창조 규례에 의해서 개체와 공동체의 연관성 안에 있는 그 목적과 질서를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

첫째, 개체와 공동체간에는 창조 약정에 포함된“상호 결합”의 신비가 주목된다.

  남자와 여자라는 각각의 개체가 창조의 약정에 따라 결혼함으로 서로 하나가 되는 공동체의 연관성을 맺고,“한 몸을 이룬다”는 것은 단순히 완전한 경지에 이르는 여러 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하나됨은 결혼함으로써 갖는“결합의 영속적인 상태”를 표현한다. 이것은 창조 때 이미 정해진 상호 결합의 함축된 의미로서 오로지 창조 질서에 따른 개체와 공동체의 연관성에 의해서 그런 신비한 관계에 들어 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사상을 더욱 분명히 하여 복음으로써 전달하시었다. 이혼 문제를 다루는 말씀에서, “사람을 만드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을 이룰지니라”(

; 마19:4-5, 막10:6-8, 엡5:31).
  즉 하나님의 창조 약정이 각각의 개체를 하나로 연합했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는 둘이 아니고 한 몸이라고 설명한다(마19:6). 그러므로 개체와 공동체간에는 창조 약정에 포함된 상호 결합이 강조되고 있으며, 이는 창조 질서에 의하여 신비하게 상호 결합되는 것이다.

둘째로, 창조 질서는 개체와 공동체간의 질서를 규정짓는 내부 구조를 결정한다.

  사람이 개체로서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그를 돕는 배필”( , a halper corresponding to him)을 만들었다고 하셨다(창2:18).
  즉 여자는 결혼 관계에서 남자를 돕는 자로서 창조되었다. 이는 개체와 공동체간의 변할 수 없는 내부 질서를 분명히 하심이다. 여자의 존재 목적이 남자를 도움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것이 있다.“그와 동등한 돕는 자”이다(창2:20). 이 말의 뜻은 지배력이나 거만함이 전혀 없는 인격적인 면에서 남자와 동등하다는 것이며, 따라서 남자와 여자는 다 똑같이 중요하다 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개체와 공동체간의 내부 질서는 인격의 동등성 안에서 서로 합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된 그 창조 질서에 부합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개체와 공동체간의 내부 질서는 이 세상을 완성하게 하는 목적이 된다. 다시 말하면 가정, 사회, 국가, 세계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그 창조 질서 안에 거하여 인격의 동등 성을 지켜 서로 돕는 자가 되어야 하며 서로 사랑하고 서로 보호하여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거역할 수 없는 창조 질서에 의한 공동체 안에서의 내부 질서이다.
  이제 우리의 사회 질서에는 지위고하, 빈부귀천의 차별을 없애고, 뿌리 깊은 권위주의와 남아 선호사상, 부익부 빈익빈, 학벌, 문벌, 지역 감정, 등등의 말로 할 수 없는 타락의 요소들을 깨끗하게 청소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부가되는 것은 사랑이다. 이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으로 내가 죽기까지 희생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함이요, 그와 같이, 내 이웃을 사랑함이다.
  이제 우리의 사회 질서에는 지배하는 또는 거만한 가장으로서의 질서가 아니라 서로 희생하고 서로 사랑하는 가장으로서 서로 돕는 역할을 충실히 해야만 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고전11:12下半節)이기 때문이다.

 

  5.개별주의와 공동주의의 역사적 고찰(신학적 비판)

  두 주의를 역사적으로 고찰하면, 공동주의는 플라톤(Platon, B. C. 427-347)27)의 이상주의(idealism)에서 발생된 것이고, 개별주의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 C. 384-322) 28)의 자연주의에 의해서 발생된 것이다.
  따라서 중세기의 종교적 공동주의는 플라톤의 이상주의(공동주의)로 인해 발단이 되었다. 이 주의가 중세기 카톨릭 교회 안에서 아무런 여과장치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진 이유는, 그 당시 수도원의 금욕주의가 각기 개별적인 신앙생활로 고조되었으므로 이를 약화시키고자 모색한 나머지 무신론의 공동주의를 그대로 받아들여 강요하게 된 것이다(개체와 공동체간의 극심한 분화 현상).
  그 결과, 공동주의 또는 제도주의의 지배력은 도리어 자연주의적인 개별주의의 강한 욕구를 더욱 불러 일으키게된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따라서 중세기의 종교는 개체와 공동체의 균형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하나님의 약정과 그 창조 질서를 무시하고 제외시킨 개체와 공동체간의 극심한 분화현상은 인식의 극히 좁은 범위에 내포된 의미를 준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식의 보다 넓은 책임이 자주 무시되는 진정한 철학적 본질의 부재인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까지도 간단없이 지속되고 있어서 불확실성의 기약 없는 세월만이 충만할 뿐이다. 이 좁은 관점은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구속 의미를 고찰하는 데까지 연장되어, 그 결과 인간 구원에 대한 교회의 공동체 개념에 큰 결핍을 초래하고 있다. 이로써 기독교회 공동체는 전 세계관과 인생관에 결핍을 가져다주고 있다. 창조 질서에 의한 개체와 공동체의 긴밀한 상호 연합에 의한 그리스도 왕국중심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개체와 공동체간의 극심한 분화현상을 도무지 회개할 줄 모르는 교회중심이 되어 버렸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개체와 공동체간의 극심한 분화현상의 이론을 일반적으로 보편 타당한 것처럼 정립한 것은, 소위 천재적인 철학자라고 알려져 있는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A. D. 1227-1274)에 의해서 이다.
  그는 무신론의 개별주의(자연주의)와 공동주의(제도주의)를 당시에 유행된 카톨릭 공동체의 교권주의와 소위 천재적으로 융화시켜 보편 타당한 종합 이론을 창출해 낸 것이다. 이는 로마 카톨릭 교회 공동체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고 그 공동체의 기초 개념으로서 확립되기에 이른다. 이것이 소위 중세의 아퀴나스 철학이다.
  본래 개체와 공동체는 신비한 상호 연합에 의하여 서로 희생하며, 사랑하며, 돕는 가운데 균형을 이루는 창조 질서에 근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론은 로마 카톨릭 공동체의 그 지배력과 거만함의 제도주의를 자연주의와 교묘히(cunning) 결합시켜 극히 사이키적(프시케)인 보편타당성을 이끌어 낸 것이다.
  그러므로 중세 세계의 그 공동체적 인식은 카톨릭 교회 공동체의 그 지배력과 거만함 속에 잠식되어 버렸다. 아퀴나스의 학설은 신학적으로 볼 때, 소위 은혜와 자연을 대조시킨 것으로 카톨릭 공동주의 곧 그 지배와 거만함의 제도주의를 은혜의 저장소로 둔갑시켜 버렸다. 다시 말하면 아퀴나스 철학의 결론은 공동주의(제도주의) + 자연주의의 카톨릭 교회가 인간의 생명과 죽음을 지배하고 있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13세기와 14세기초에는 중세 교회의 공동주의(제도주의, 교권주의)에 대항하는 자연주의 성향의 개인주의가 활발하게 일어남으로 인해 개체와 공동체간의 불가피한 충돌이 생기기 시작했다. 헬라의 자연주의(개인주의)를 회복시켜 공동체보다는 개체(개인)의 우선을 강조한 르네상스(Renaissance)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여기에도 아퀴나스 철학의“개인들에게 보장된 자연권”이 한 몫 을 하였다. 따라서 르네상스 운동의 목적은 개인 독립에 대한 인간의 감정과 옛 고전주의의 정신으로 복귀하자는 것이다.
  15세기에는 14세기에 일어난 헬라의 개별주의 부흥과 더불어 인문주의가 탄생하고 이 인문주의는 교회의 초자연주의를 불신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로 인하여 비종교적인 인식의 성향이 날로 증가하는 가운데 세속주의라고 하는 것이 탄생하게 된다. 이 세속주의 철학은 인간 주체적 성향을 극히 강조하는 인본주의의 개념이다. 이것은 정치단체의 내부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 또다시 공동주의로 개별주의를 삼켜 버리는 그 비겁한 자태를 들어내고 있다.
  이런 세속주의적 성향의 카톨릭 교권주의에 강력히 반발하여 일어난 것이 1517년의 종교개혁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지배력과 거만함의 그 타락한 공동체의 난잡한 인간 질서를 완벽하게 개혁(Reformed)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던 것이다.
  사실 종교 개혁자들은 진정한 개체로서의 자각을 갖고 있었다. 즉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준하는 그 자각인 것이다. 이는 기독교 철학의 대가(大家) 사도 바울의 말처럼“죄인 된 나와 믿음으로 의롭게 된 나가 한 몸에 있다”라고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회개하여 타락한 개체 안의 인식의 개조를 분명히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삶 속에는 인간의 공력(功力)을 내세우지 않고 오로지 믿음으로서만 의로워짐을 강조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인간 역사에 있어서 가장 큰 혁명이었다. 르네상스나 산업혁명이나 기타 세상의 어느 혁신적인 운동도 이 종교 개혁을 능가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개체와 공동체간의 상호 연합의 신비를 본래의 창조 질서 안으로 개혁하기 위한 위대한 행보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실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주님의 위대한 사랑이 그러하듯이 이들 또한 그 자취를 따라간 것이다. 한 몸으로 하나된 신비한 상호 연합, 서로 죽기까지 희생함으로 사랑하고, 서로 돕고 보호하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견고히 한 것이다.

이제 결론적으로, 다시 한 번 간추려 보자.

  중세기 교회의 철학은 공동주의가 개별주의를 삼켜 버렸다. 오늘 날 세속주의 철학은 정치 단체의 발달로 인해 또 다시 공동주의로 개별주의를 삼켜 버리고자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개혁파 교회나 교인들은 종교 개혁자들의 그 위대한 자취를 따라 개별주의와 공동주의가 균형 잡힌 이상적인 철학을 추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창조 약정의 그 창조 질서에 의한 개체와 공동체의 신비한 상호 연합을 회복시키는 강력한 개혁주의(the Reformation)인 것이다.
  이러한 개혁의 실마리는 철저한 개체의 자각으로부터 출발을 한다. 즉 하나님 앞에서의 철저한 자기 발견과 통찰, 그리고 진정으로 뉘우치는 회개로부터의 철저한 인식의 개조가 천국을 소유케 하는 것이다(“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4:17).
  그러므로 항간에 비쳐지고 있는 개교회주의나 지방주의의 개별주의적 경향이나, 교권주의로 흐르는 공동주의적 경향은 매우 위험한 신호(sign)이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정지 신호(A signal of stop), 또는 경고 표지(A warning si- gn)로 진정한 기독교 철학의 부재에서 야기되는 것이다.
  기독교 철학의 총체적 입장은“의인은 믿음으로 살며, 오직 하나님의 임재와 그 영광을 위해 사는 것”, 이것만이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이다.

 기독교 교육 철학에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 개념(形像槪念)은 극히 기본적인 개념이다. 아니 이 개념은 본래 철학의 본질적인 개념이다. 이 본질을 무시하고 제외시킴으로 세상의 철학들은 죽음과 고통, 허무와 혼돈 속에서 방황하고 있다. 모든 사물의 원리를 바르게 탐구하여 인간의 삶을 궁극적으로 그리고 진리로 향할 수 있도록 그 바른 지침이 되어야할 철학이 이렇듯 혼미한 상황이라면,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있어서 큰 책임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본 장에서 기독교 교육 철학의 바른 개념을 열거하여 세속적 철학 개념의 오명을 씻고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바른 개념을 정립해 보자.

 

  1.형상 개념(Image Idea)

  형상 개념(形像槪念)은 모든 만물을 이해하는 원리를 구명(究明)하는 하나의 의미 깊은 사실이다. 이 개념은 형상(image)이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그 유사성, 그 닮음 꼴을 말한다. 즉 거울에 비친 모습(모양)을 통하여 실물을 아는 것과 같은 부인할 수 없는 이치(理致)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었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철학적 기본 개념에 큰 영향을 주는 깊은 의미의 말씀이다. 왜냐하면 보이는 것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것의 그 이념과 속성을 분명하게 드러나게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개념은 철학의 근본 원리에 정확하게 규합되는 하나의 사실적인 법칙으로서 철학(哲學)은 가설(假說)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모든 영역에 걸친 사물(事物)의 근본 원리를 추구하는 학문으로 자연과 사회 전반에 걸친 일반적인 법칙성을 탐구하게 하는 촉매제 역할을 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 형상 개념, 또는 모양 개념은 창 1:26에 명확하게 규정지어져 있다. 형상은 

 - image 이며, 모양은 

 - likeness 로 그 뜻에 있어서는 유사, 닮음이라는 동의어로 취급된다. 다시 말하여 동의어의 반복이라는 점에서 볼 때 형상 개념(Image Idea)을 특별히 강조한 하나님의 깊으신 의도가 숨어있는 것이다.
  또한 이와 같은 개념은 비단 인간 창조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광의적(廣義的)이며 근본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 철학인 것처럼 하나님의 전 우주적인 창조물, 즉 모든 만물을 이해하는 원리에 대한 사실을 탐구하는 그 자체로서 철학을 위한 근본 원리로 존재하는 하나의 사실적인 법칙이다.
  그러므로 이 보이는 형상 개념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실물의 그 생생한 존재성과 그 속성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는 것을 어느 누구도 핑계치 못한다고 사도 파울은 말하였다(롬1:20).
  그리고 형상 개념으로 나타난 인간 창조의 그 계획 속에는 인간을 모든 만물의 우두머리로 창조하심으로 인간에게 하등 영광(lower honor)15)을 부여하셨다는 것은, 곧 창조자 하나님 자신의 고등 영광(glory of God)을 동시적으로 이미 선포하셨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그리고 특히 인간 창조에 있어서 형상 개념이 의미하는 최고의 목적은 하나님이 영이신 것처럼 인간을 그 유사한 영적 성질로 창조하여 하나님과 인간과의 친밀한 인격적 교제(spirited fellow-ship)16)를 성취하셨다는 사실이다.
  다시 반복 강조하지만,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인간 창조 목적의 최고 성취이다. 그러므로 또한 형상 개념이 인간에게 의미하는 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으로서만 완전한 만족을 얻게 된다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교육의 기초가 철학이라면 철학의 기초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2.옛 형상 개념(Old Image Idea)

  옛 형상 개념은 타락한 아담의 유전을 따르는 전적 타락, 또는 전적 무능력의 그 형상(Image)과 그 모양(likeness)이다. 즉 인간 타락 이전의 형상 개념의 함축적인 의미가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인간 타락 이후에는 무시되고 제외되어 버린 가운데 허상만을 쫓는 비참한 모습이 되어버렸다. 거울의 바로 앞, 그 면전에 사실적으로 서있는 하나님의 형상(spiritual image) 자체인 자기 자신의 실상을 보면서도, 그 정신면의 인식 속에는 타락한 허상(soul image)만을 쫓는 옛 형상 개념을 그대로 갖고 있는 것이다.
  옛 형상 개념은 타락한 인간 아담의 유전을 따라,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긴 역사의 터널을 지나오고 있다. 즉 타락한 인간의 유전, 전통 그 관습의 옛 것들을 실제의 형상과 모양인 양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상에 있어서 허상( 虛像, virtual image) 17)이다.
  그러므로 이 허상의 본체 안에는 철학의 형상 개념의 기초가 되어야할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무시되고 제외되어 존재할 수가 없다. 심지어 하나님이 불러모은 신자의 무리들까지도 자기들이 만들어낸 허상18) 속으로 하나님을 끌어들인다.
  세속 철학의 인식 개념은 옛 아담의 그 유전을 따라, 옛 형상 개념 안에서 금지 시험19)의 인식 장소를 제 마음껏 넘나들고 있다. 다시 말하여 인간의 정신 세계 안에는 형상 개념의 원초인 영적 장소(spiritual image)가 무능해진 가운데 타락한 혼적 장소(soul image)의 그 허상(ghost image), 망상(fancy image), 공상(idle image)의 비참한 상태에 놓여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인간의 처절한 상태에 직면해 있으면서도“카인의 후예”라고 하는 등, 로맨틱(romantic)하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나를 건져주랴”(롬7:24) 라고 자기 자신을 향하여 철저히 개탄(慨歎)하고 있는 것이다.
  옛 형상 개념은 성경의 모든 말씀 중에서 가장 슬픈 이야기이다. 이것은 인류의 시조 아담이 뱀의 유혹을 받아 금단의 열매를 따먹고 에덴에서 추방되었다는 그러한 형식상의 단순한 범죄 기록이 아니다. 이것은 전 인류에게 미친 죄의 기원을 말하고 원죄(原罪, Original Sin)를 말하는 것으로, 철학의 근본을 제 마음대로 뒤흔드는 타락한 인간의 그 인식의 세계를 지목(指目)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의 형상 개념의 침범할 수 없는 그 불가항력적 인식의 세계를 제 마음대로 혼탁케하여 하나님의 금지 명령을 약하게, 흐리게, 가볍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삭제, 첨가, 변경하는 상상할 수 없는 범죄자의 심리를 그대로 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 원죄 개념에 대하여 사탄(tempter)은 철저한 부정이요, 불순종이요, 대항자이다. 세속 철학의 인식 속에 이와 같은 개념이 그대로 유전되어 우리 앞에 직면해 있는 지금, 아니 온 세상에 이와 같은 교육 철학이 가득한 지금, 더더욱 그와 같은 세속적인 교육을 전혀 여과 없이 받아들인 우리들에게 있어서 엄청난 큰 문제로 우리 인식 속에 자리잡혀 있다는 것을 통찰(洞察, discernment)해야 한다.

 

  3.새 형상 개념(New Image Idea)

  타락한 옛 아담으로 인하여 전 인류가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새 아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시 회복시키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이 개념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형상 개념(New Image Idea in Christ)이라고 한다.
  옛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전 인류에게 미친 옛 형상 개념은 철학의 본질적 개념인 형상 개념(Image Idea = Image of God)을 전적으로 무력화시켰다. 즉 전적 불능이요, 전적 무능력으로 인간의 인식 세계를 약화시켜버린 것이다.
  반면에 뱀(tempter)에 말처럼(창3:4-5) 눈이 밝아져 혼( = soul)적 인식의 세계(psychology)20)가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hold up) 간교(cunning)한 혀를 날름거리면서 무모한 도전과 굉장한 위험을 무릅쓴 쓸데없는 짓, 그 못된 짓을 하도록 하는 인식 세계의 겉잡을 수 없는 충동질 속에서, 혼잡한 생각을 거듭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행위를 서슴없이 함으로, 하나님을 감히 시험(test)하고 노(provoke)하게 하는 그 쾌락의 참으로 못된 유혹(tempt)의 인식이, 인간을 한없는 사망의 구렁텅이로 내 몰리게 하고 있다.
  타락한 인간의 유전, 전통 그 관습은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이 타락한 육적(

 = psyche)인간 존재의 주체적 인식 속에서 인격의 중심을 형성하고, 자아를 형성시키고, 사고와 정서 ` 의지와 행동을 그 스스로 하게 하였다. 이것을 인간 심리학에서는 사이칼러지(psychology)라고 하여 연구의 대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타락한 육적인간 존재의 주체적 인식은 피비린내 나는 고대의 정복의 역사를 통하여 그 문화를 발전시켜 소위 사상을 낳고, 미(美)를 풀고, 문학, 예술, 철학을 낳고, 또 그 맛을 보고 즐기는 그 스스로 한다 하는 자칭 주체적 존재이지만 참된 사람, 참된 문화, 참된 역사, 참된 철학을 이루지 못하는 불확실성의 시대를 대대로(generation) 물려주며 물려받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하 등의 능력은 극심한 정도의 차는 있지만 동물에도 구비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은 사람만이 갖는 것인데, 이것은 영적(

)인 것으로 본래의 철학의 기본 개념인 형상 개념의 본질적 요소이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타락이전 인간 정신세계의 그 근본 개념으로 참된 사람이 되게 하는 까닭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본질적 부분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아는 능력이며,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기쁨으로 얻는 능력이며,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에 설 수 있는 능력이다. 이 능력을 얻은 자는 진정으로 자유 함을 누린다(요14:6, 8:32). 죽음, 고통, 허무가 있을 수 없고 모든 것을 초월하여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가득한 참된 능력이다.
  이 하나님의 능력(

)은 타락한 인간 스스로는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불가항력이다. 왜냐하면 영이신 하나님과 타락한 인간의 육적 정신이 그러하듯이,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저항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하나님의 공의(

 = righteousness)가 작동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변절될 수 없는 하나님의 속성 그 자체로서 완전한 도덕적인 의를 말한다. 이것은 완전하신 하나님의 무흠함, 무죄성, 정결함과 그 위엄성 그 자체로서 도덕적으로 타락한 인간 스스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불가항력인 것이다. 그리고 그 용서를 받지 못할 때는 오직 죽음뿐인 것이다. 따라서 이 경이로운 두려움, 하나님의 속성인 공의를 만족시켜야만 인간의 상실된 영적 능력은 회복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 공의를 만족케 할 자는 타락한 인간으로서는 그 누구도 합당한 자가 없는 것이다. 오직 이 공의를 만족케 할 자는 하나님 자신의 무흠한 피흘림만이 합당한 것이다. 이것은 피로 맺은 약정(bond-in-blood)21) 의로 이미 인간 창조 이전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약 속에서 작정해 놓으신 상호협정으로서 정의되는 계약(a mutual contract)22)이다.
  이 계약의 성취가 성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형상 개념(New Image Idea in Jesus Christ)이다. 이 새형상 개념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만날 때까지는 전적으로 죽어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인류적이며 전인격적인 무조건 선택 - 제한적 속죄 - 불가항력적 은혜 - 궁극적 구원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그 성취 안에서 죽었던 하나님의 형상 개념이 살아나게 하고 새로운 생명을 베풀어주심으로 인하여 타락한 인간의 영과 혼과 몸이 깨끗하게 - 하나님이 받으실 만 하게- 그 도덕적 성질이나 상태, 그 의지나 생각이 하나님의 뜻과 합치되는 완전한 상태의 새 형상 개념을 초자연적으로 기적적으로 우리 속에서 이루시는 것이다. 이것이 참으로 놀라운 회개(

)23)의 인식의 전환이다. 이 놀라운 역사의 대 장정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한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그 성령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의 혼적 요소인 프시케에 역사하여 더 깊은 곳에 있는 프뉴마에 조용히 역사 하시는 것이다. 이로써 타락한 인간의 이성과 감정의 주체는 실제적으로 개조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타락한 인식의 그 주체가 하나님을 깨끗이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인간 정신세계의 그 근본 - 새 형상 개념의 철학적 본질을 완전하게 이루는 것이다.

 

  4.개체(個體)와 공동체(共同體)의 연관성(聯關性)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의 세계는 두 개의 생활을 하게 되어 있다. 하나는 순수한 개별적인 생활이고, 다른 하나는 여러 개체가 서로 연합하는 공동생활이다. 즉 모든 피조물 각각의 개체들은 각기 독립된 개체로서 생활하고, 또 서로 상호간에 연관성을 맺는 공동체로서 생활을 한다. 이것은 개체와 공동체의 올바른 관계로서, 모든 피조물들이 추구하는 목적이며 벗어날 수 없는 질서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 세계에서 생활하는 인간도 역시 개체이면서 공동체 생활의 연관성 안에서 그 목적과 질서를 가지고 삶을 영위한다. 이와 같은 법칙은 인간도 자연물도 벗어날 수 없는 것으로서 창조주 하나님의 계시(revelation) 24)이다.
  그러므로 또한 우리가 피조물임을 잘 알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창조주 하나님에게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창조주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성경적인 하나님의 개념은 어떠한가?
  하나님은 삼위(三位)이시지만 한 분이시다. 즉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

)25)이시다.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오묘하신 그 계시 속에는 개체와 공동체의 긴밀한 연관성이 있음을 보여 주신다. 즉 삼위 하나님의 개체와 공동체로서의 연관성은 여럿이 하나로 전체적인 움직임이 잘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삼위일체의 각 위(位)가 각기 하나님이 되실 뿐더러 하나로 일체(一體)된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의 세계에는 그 계시의 형상을 그대로 반영시켜 본받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개체와 공동체로서의 연관성은 하등 피조물에서 보다 고등 피조물인 인간의 창조에서 더욱 뚜렷하게 잘 나타난다.
  인간의 개체이면서 공동체적인 생활은 가정, 사회, 국가, 세계라는 광범위하고도 폭넓은 영역을 차지한다. 특히 그 중에서도 공동체의 기초 단위인 가정은 더 기초적인 단위인 결혼으로부터 출발을 한다. 이 결혼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세우신 최초의 약정으로서 창조의 계약(Covenant of Creation) 또는 창조의 약정(Bond of Creation)26)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리고 이 창조의 약정에는 일반적인 면으로 안식일, 결혼, 노동이라는 세 가지의 규례를 정해 놓으심으로서 이것은 그 어느 것도 변할 수 없는 창조 규례에 내재된 원칙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규례들은 사실상에 있어서 창조주에 대한 피조물 인간의 넓은 책임과 연관되어진다.
  결혼은 개체이면서 공동체적인 연관성을 나타내는 참으로 신비한 하나님의 창조 규례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그 형상이 그러하듯이 사람이 개체적인 생활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음을 이미 규정해 놓으셨다(창2:18,“사람의 독처함히 좋지 못하다”).
  우리는 이 결혼의 창조 규례에 의해서 개체와 공동체의 연관성 안에 있는 그 목적과 질서를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

첫째, 개체와 공동체간에는 창조 약정에 포함된“상호 결합”의 신비가 주목된다.

  남자와 여자라는 각각의 개체가 창조의 약정에 따라 결혼함으로 서로 하나가 되는 공동체의 연관성을 맺고,“한 몸을 이룬다”는 것은 단순히 완전한 경지에 이르는 여러 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하나됨은 결혼함으로써 갖는“결합의 영속적인 상태”를 표현한다. 이것은 창조 때 이미 정해진 상호 결합의 함축된 의미로서 오로지 창조 질서에 따른 개체와 공동체의 연관성에 의해서 그런 신비한 관계에 들어 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사상을 더욱 분명히 하여 복음으로써 전달하시었다. 이혼 문제를 다루는 말씀에서, “사람을 만드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을 이룰지니라”(

; 마19:4-5, 막10:6-8, 엡5:31).
  즉 하나님의 창조 약정이 각각의 개체를 하나로 연합했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는 둘이 아니고 한 몸이라고 설명한다(마19:6). 그러므로 개체와 공동체간에는 창조 약정에 포함된 상호 결합이 강조되고 있으며, 이는 창조 질서에 의하여 신비하게 상호 결합되는 것이다.

둘째로, 창조 질서는 개체와 공동체간의 질서를 규정짓는 내부 구조를 결정한다.

  사람이 개체로서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그를 돕는 배필”( , a halper corresponding to him)을 만들었다고 하셨다(창2:18).
  즉 여자는 결혼 관계에서 남자를 돕는 자로서 창조되었다. 이는 개체와 공동체간의 변할 수 없는 내부 질서를 분명히 하심이다. 여자의 존재 목적이 남자를 도움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것이 있다.“그와 동등한 돕는 자”이다(창2:20). 이 말의 뜻은 지배력이나 거만함이 전혀 없는 인격적인 면에서 남자와 동등하다는 것이며, 따라서 남자와 여자는 다 똑같이 중요하다 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개체와 공동체간의 내부 질서는 인격의 동등성 안에서 서로 합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된 그 창조 질서에 부합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개체와 공동체간의 내부 질서는 이 세상을 완성하게 하는 목적이 된다. 다시 말하면 가정, 사회, 국가, 세계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그 창조 질서 안에 거하여 인격의 동등 성을 지켜 서로 돕는 자가 되어야 하며 서로 사랑하고 서로 보호하여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거역할 수 없는 창조 질서에 의한 공동체 안에서의 내부 질서이다.
  이제 우리의 사회 질서에는 지위고하, 빈부귀천의 차별을 없애고, 뿌리 깊은 권위주의와 남아 선호사상, 부익부 빈익빈, 학벌, 문벌, 지역 감정, 등등의 말로 할 수 없는 타락의 요소들을 깨끗하게 청소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부가되는 것은 사랑이다. 이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으로 내가 죽기까지 희생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함이요, 그와 같이, 내 이웃을 사랑함이다.
  이제 우리의 사회 질서에는 지배하는 또는 거만한 가장으로서의 질서가 아니라 서로 희생하고 서로 사랑하는 가장으로서 서로 돕는 역할을 충실히 해야만 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고전11:12下半節)이기 때문이다.

 

  5.개별주의와 공동주의의 역사적 고찰(신학적 비판)

  두 주의를 역사적으로 고찰하면, 공동주의는 플라톤(Platon, B. C. 427-347)27)의 이상주의(idealism)에서 발생된 것이고, 개별주의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 C. 384-322) 28)의 자연주의에 의해서 발생된 것이다.
  따라서 중세기의 종교적 공동주의는 플라톤의 이상주의(공동주의)로 인해 발단이 되었다. 이 주의가 중세기 카톨릭 교회 안에서 아무런 여과장치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진 이유는, 그 당시 수도원의 금욕주의가 각기 개별적인 신앙생활로 고조되었으므로 이를 약화시키고자 모색한 나머지 무신론의 공동주의를 그대로 받아들여 강요하게 된 것이다(개체와 공동체간의 극심한 분화 현상).
  그 결과, 공동주의 또는 제도주의의 지배력은 도리어 자연주의적인 개별주의의 강한 욕구를 더욱 불러 일으키게된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따라서 중세기의 종교는 개체와 공동체의 균형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하나님의 약정과 그 창조 질서를 무시하고 제외시킨 개체와 공동체간의 극심한 분화현상은 인식의 극히 좁은 범위에 내포된 의미를 준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식의 보다 넓은 책임이 자주 무시되는 진정한 철학적 본질의 부재인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까지도 간단없이 지속되고 있어서 불확실성의 기약 없는 세월만이 충만할 뿐이다. 이 좁은 관점은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구속 의미를 고찰하는 데까지 연장되어, 그 결과 인간 구원에 대한 교회의 공동체 개념에 큰 결핍을 초래하고 있다. 이로써 기독교회 공동체는 전 세계관과 인생관에 결핍을 가져다주고 있다. 창조 질서에 의한 개체와 공동체의 긴밀한 상호 연합에 의한 그리스도 왕국중심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개체와 공동체간의 극심한 분화현상을 도무지 회개할 줄 모르는 교회중심이 되어 버렸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개체와 공동체간의 극심한 분화현상의 이론을 일반적으로 보편 타당한 것처럼 정립한 것은, 소위 천재적인 철학자라고 알려져 있는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A. D. 1227-1274)에 의해서 이다.
  그는 무신론의 개별주의(자연주의)와 공동주의(제도주의)를 당시에 유행된 카톨릭 공동체의 교권주의와 소위 천재적으로 융화시켜 보편 타당한 종합 이론을 창출해 낸 것이다. 이는 로마 카톨릭 교회 공동체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고 그 공동체의 기초 개념으로서 확립되기에 이른다. 이것이 소위 중세의 아퀴나스 철학이다.
  본래 개체와 공동체는 신비한 상호 연합에 의하여 서로 희생하며, 사랑하며, 돕는 가운데 균형을 이루는 창조 질서에 근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론은 로마 카톨릭 공동체의 그 지배력과 거만함의 제도주의를 자연주의와 교묘히(cunning) 결합시켜 극히 사이키적(프시케)인 보편타당성을 이끌어 낸 것이다.
  그러므로 중세 세계의 그 공동체적 인식은 카톨릭 교회 공동체의 그 지배력과 거만함 속에 잠식되어 버렸다. 아퀴나스의 학설은 신학적으로 볼 때, 소위 은혜와 자연을 대조시킨 것으로 카톨릭 공동주의 곧 그 지배와 거만함의 제도주의를 은혜의 저장소로 둔갑시켜 버렸다. 다시 말하면 아퀴나스 철학의 결론은 공동주의(제도주의) + 자연주의의 카톨릭 교회가 인간의 생명과 죽음을 지배하고 있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13세기와 14세기초에는 중세 교회의 공동주의(제도주의, 교권주의)에 대항하는 자연주의 성향의 개인주의가 활발하게 일어남으로 인해 개체와 공동체간의 불가피한 충돌이 생기기 시작했다. 헬라의 자연주의(개인주의)를 회복시켜 공동체보다는 개체(개인)의 우선을 강조한 르네상스(Renaissance)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여기에도 아퀴나스 철학의“개인들에게 보장된 자연권”이 한 몫 을 하였다. 따라서 르네상스 운동의 목적은 개인 독립에 대한 인간의 감정과 옛 고전주의의 정신으로 복귀하자는 것이다.
  15세기에는 14세기에 일어난 헬라의 개별주의 부흥과 더불어 인문주의가 탄생하고 이 인문주의는 교회의 초자연주의를 불신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로 인하여 비종교적인 인식의 성향이 날로 증가하는 가운데 세속주의라고 하는 것이 탄생하게 된다. 이 세속주의 철학은 인간 주체적 성향을 극히 강조하는 인본주의의 개념이다. 이것은 정치단체의 내부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 또다시 공동주의로 개별주의를 삼켜 버리는 그 비겁한 자태를 들어내고 있다.
  이런 세속주의적 성향의 카톨릭 교권주의에 강력히 반발하여 일어난 것이 1517년의 종교개혁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지배력과 거만함의 그 타락한 공동체의 난잡한 인간 질서를 완벽하게 개혁(Reformed)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던 것이다.
  사실 종교 개혁자들은 진정한 개체로서의 자각을 갖고 있었다. 즉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준하는 그 자각인 것이다. 이는 기독교 철학의 대가(大家) 사도 바울의 말처럼“죄인 된 나와 믿음으로 의롭게 된 나가 한 몸에 있다”라고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회개하여 타락한 개체 안의 인식의 개조를 분명히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삶 속에는 인간의 공력(功力)을 내세우지 않고 오로지 믿음으로서만 의로워짐을 강조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인간 역사에 있어서 가장 큰 혁명이었다. 르네상스나 산업혁명이나 기타 세상의 어느 혁신적인 운동도 이 종교 개혁을 능가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개체와 공동체간의 상호 연합의 신비를 본래의 창조 질서 안으로 개혁하기 위한 위대한 행보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실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주님의 위대한 사랑이 그러하듯이 이들 또한 그 자취를 따라간 것이다. 한 몸으로 하나된 신비한 상호 연합, 서로 죽기까지 희생함으로 사랑하고, 서로 돕고 보호하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견고히 한 것이다.

이제 결론적으로, 다시 한 번 간추려 보자.

  중세기 교회의 철학은 공동주의가 개별주의를 삼켜 버렸다. 오늘 날 세속주의 철학은 정치 단체의 발달로 인해 또 다시 공동주의로 개별주의를 삼켜 버리고자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개혁파 교회나 교인들은 종교 개혁자들의 그 위대한 자취를 따라 개별주의와 공동주의가 균형 잡힌 이상적인 철학을 추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창조 약정의 그 창조 질서에 의한 개체와 공동체의 신비한 상호 연합을 회복시키는 강력한 개혁주의(the Reformation)인 것이다.
  이러한 개혁의 실마리는 철저한 개체의 자각으로부터 출발을 한다. 즉 하나님 앞에서의 철저한 자기 발견과 통찰, 그리고 진정으로 뉘우치는 회개로부터의 철저한 인식의 개조가 천국을 소유케 하는 것이다(“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4:17).
  그러므로 항간에 비쳐지고 있는 개교회주의나 지방주의의 개별주의적 경향이나, 교권주의로 흐르는 공동주의적 경향은 매우 위험한 신호(sign)이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정지 신호(A signal of stop), 또는 경고 표지(A warning si- gn)로 진정한 기독교 철학의 부재에서 야기되는 것이다.
  기독교 철학의 총체적 입장은“의인은 믿음으로 살며, 오직 하나님의 임재와 그 영광을 위해 사는 것”, 이것만이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이다.

 기독교 교육 철학에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 개념(形像槪念)은 극히 기본적인 개념이다. 아니 이 개념은 본래 철학의 본질적인 개념이다. 이 본질을 무시하고 제외시킴으로 세상의 철학들은 죽음과 고통, 허무와 혼돈 속에서 방황하고 있다. 모든 사물의 원리를 바르게 탐구하여 인간의 삶을 궁극적으로 그리고 진리로 향할 수 있도록 그 바른 지침이 되어야할 철학이 이렇듯 혼미한 상황이라면,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있어서 큰 책임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본 장에서 기독교 교육 철학의 바른 개념을 열거하여 세속적 철학 개념의 오명을 씻고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바른 개념을 정립해 보자.

 

  1.형상 개념(Image Idea)

  형상 개념(形像槪念)은 모든 만물을 이해하는 원리를 구명(究明)하는 하나의 의미 깊은 사실이다. 이 개념은 형상(image)이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그 유사성, 그 닮음 꼴을 말한다. 즉 거울에 비친 모습(모양)을 통하여 실물을 아는 것과 같은 부인할 수 없는 이치(理致)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었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철학적 기본 개념에 큰 영향을 주는 깊은 의미의 말씀이다. 왜냐하면 보이는 것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것의 그 이념과 속성을 분명하게 드러나게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개념은 철학의 근본 원리에 정확하게 규합되는 하나의 사실적인 법칙으로서 철학(哲學)은 가설(假說)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모든 영역에 걸친 사물(事物)의 근본 원리를 추구하는 학문으로 자연과 사회 전반에 걸친 일반적인 법칙성을 탐구하게 하는 촉매제 역할을 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 형상 개념, 또는 모양 개념은 창 1:26에 명확하게 규정지어져 있다. 형상은 

 - image 이며, 모양은 

 - likeness 로 그 뜻에 있어서는 유사, 닮음이라는 동의어로 취급된다. 다시 말하여 동의어의 반복이라는 점에서 볼 때 형상 개념(Image Idea)을 특별히 강조한 하나님의 깊으신 의도가 숨어있는 것이다.
  또한 이와 같은 개념은 비단 인간 창조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광의적(廣義的)이며 근본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 철학인 것처럼 하나님의 전 우주적인 창조물, 즉 모든 만물을 이해하는 원리에 대한 사실을 탐구하는 그 자체로서 철학을 위한 근본 원리로 존재하는 하나의 사실적인 법칙이다.
  그러므로 이 보이는 형상 개념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실물의 그 생생한 존재성과 그 속성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는 것을 어느 누구도 핑계치 못한다고 사도 파울은 말하였다(롬1:20).
  그리고 형상 개념으로 나타난 인간 창조의 그 계획 속에는 인간을 모든 만물의 우두머리로 창조하심으로 인간에게 하등 영광(lower honor)15)을 부여하셨다는 것은, 곧 창조자 하나님 자신의 고등 영광(glory of God)을 동시적으로 이미 선포하셨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그리고 특히 인간 창조에 있어서 형상 개념이 의미하는 최고의 목적은 하나님이 영이신 것처럼 인간을 그 유사한 영적 성질로 창조하여 하나님과 인간과의 친밀한 인격적 교제(spirited fellow-ship)16)를 성취하셨다는 사실이다.
  다시 반복 강조하지만,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인간 창조 목적의 최고 성취이다. 그러므로 또한 형상 개념이 인간에게 의미하는 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으로서만 완전한 만족을 얻게 된다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교육의 기초가 철학이라면 철학의 기초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2.옛 형상 개념(Old Image Idea)

  옛 형상 개념은 타락한 아담의 유전을 따르는 전적 타락, 또는 전적 무능력의 그 형상(Image)과 그 모양(likeness)이다. 즉 인간 타락 이전의 형상 개념의 함축적인 의미가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인간 타락 이후에는 무시되고 제외되어 버린 가운데 허상만을 쫓는 비참한 모습이 되어버렸다. 거울의 바로 앞, 그 면전에 사실적으로 서있는 하나님의 형상(spiritual image) 자체인 자기 자신의 실상을 보면서도, 그 정신면의 인식 속에는 타락한 허상(soul image)만을 쫓는 옛 형상 개념을 그대로 갖고 있는 것이다.
  옛 형상 개념은 타락한 인간 아담의 유전을 따라,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긴 역사의 터널을 지나오고 있다. 즉 타락한 인간의 유전, 전통 그 관습의 옛 것들을 실제의 형상과 모양인 양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상에 있어서 허상( 虛像, virtual image) 17)이다.
  그러므로 이 허상의 본체 안에는 철학의 형상 개념의 기초가 되어야할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무시되고 제외되어 존재할 수가 없다. 심지어 하나님이 불러모은 신자의 무리들까지도 자기들이 만들어낸 허상18) 속으로 하나님을 끌어들인다.
  세속 철학의 인식 개념은 옛 아담의 그 유전을 따라, 옛 형상 개념 안에서 금지 시험19)의 인식 장소를 제 마음껏 넘나들고 있다. 다시 말하여 인간의 정신 세계 안에는 형상 개념의 원초인 영적 장소(spiritual image)가 무능해진 가운데 타락한 혼적 장소(soul image)의 그 허상(ghost image), 망상(fancy image), 공상(idle image)의 비참한 상태에 놓여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인간의 처절한 상태에 직면해 있으면서도“카인의 후예”라고 하는 등, 로맨틱(romantic)하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나를 건져주랴”(롬7:24) 라고 자기 자신을 향하여 철저히 개탄(慨歎)하고 있는 것이다.
  옛 형상 개념은 성경의 모든 말씀 중에서 가장 슬픈 이야기이다. 이것은 인류의 시조 아담이 뱀의 유혹을 받아 금단의 열매를 따먹고 에덴에서 추방되었다는 그러한 형식상의 단순한 범죄 기록이 아니다. 이것은 전 인류에게 미친 죄의 기원을 말하고 원죄(原罪, Original Sin)를 말하는 것으로, 철학의 근본을 제 마음대로 뒤흔드는 타락한 인간의 그 인식의 세계를 지목(指目)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의 형상 개념의 침범할 수 없는 그 불가항력적 인식의 세계를 제 마음대로 혼탁케하여 하나님의 금지 명령을 약하게, 흐리게, 가볍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삭제, 첨가, 변경하는 상상할 수 없는 범죄자의 심리를 그대로 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 원죄 개념에 대하여 사탄(tempter)은 철저한 부정이요, 불순종이요, 대항자이다. 세속 철학의 인식 속에 이와 같은 개념이 그대로 유전되어 우리 앞에 직면해 있는 지금, 아니 온 세상에 이와 같은 교육 철학이 가득한 지금, 더더욱 그와 같은 세속적인 교육을 전혀 여과 없이 받아들인 우리들에게 있어서 엄청난 큰 문제로 우리 인식 속에 자리잡혀 있다는 것을 통찰(洞察, discernment)해야 한다.

 

  3.새 형상 개념(New Image Idea)

  타락한 옛 아담으로 인하여 전 인류가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새 아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시 회복시키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이 개념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형상 개념(New Image Idea in Christ)이라고 한다.
  옛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전 인류에게 미친 옛 형상 개념은 철학의 본질적 개념인 형상 개념(Image Idea = Image of God)을 전적으로 무력화시켰다. 즉 전적 불능이요, 전적 무능력으로 인간의 인식 세계를 약화시켜버린 것이다.
  반면에 뱀(tempter)에 말처럼(창3:4-5) 눈이 밝아져 혼( = soul)적 인식의 세계(psychology)20)가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hold up) 간교(cunning)한 혀를 날름거리면서 무모한 도전과 굉장한 위험을 무릅쓴 쓸데없는 짓, 그 못된 짓을 하도록 하는 인식 세계의 겉잡을 수 없는 충동질 속에서, 혼잡한 생각을 거듭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행위를 서슴없이 함으로, 하나님을 감히 시험(test)하고 노(provoke)하게 하는 그 쾌락의 참으로 못된 유혹(tempt)의 인식이, 인간을 한없는 사망의 구렁텅이로 내 몰리게 하고 있다.
  타락한 인간의 유전, 전통 그 관습은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이 타락한 육적(

 = psyche)인간 존재의 주체적 인식 속에서 인격의 중심을 형성하고, 자아를 형성시키고, 사고와 정서 ` 의지와 행동을 그 스스로 하게 하였다. 이것을 인간 심리학에서는 사이칼러지(psychology)라고 하여 연구의 대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타락한 육적인간 존재의 주체적 인식은 피비린내 나는 고대의 정복의 역사를 통하여 그 문화를 발전시켜 소위 사상을 낳고, 미(美)를 풀고, 문학, 예술, 철학을 낳고, 또 그 맛을 보고 즐기는 그 스스로 한다 하는 자칭 주체적 존재이지만 참된 사람, 참된 문화, 참된 역사, 참된 철학을 이루지 못하는 불확실성의 시대를 대대로(generation) 물려주며 물려받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하 등의 능력은 극심한 정도의 차는 있지만 동물에도 구비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은 사람만이 갖는 것인데, 이것은 영적(

)인 것으로 본래의 철학의 기본 개념인 형상 개념의 본질적 요소이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타락이전 인간 정신세계의 그 근본 개념으로 참된 사람이 되게 하는 까닭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본질적 부분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아는 능력이며,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기쁨으로 얻는 능력이며,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에 설 수 있는 능력이다. 이 능력을 얻은 자는 진정으로 자유 함을 누린다(요14:6, 8:32). 죽음, 고통, 허무가 있을 수 없고 모든 것을 초월하여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가득한 참된 능력이다.
  이 하나님의 능력(

)은 타락한 인간 스스로는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불가항력이다. 왜냐하면 영이신 하나님과 타락한 인간의 육적 정신이 그러하듯이,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저항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하나님의 공의(

 = righteousness)가 작동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변절될 수 없는 하나님의 속성 그 자체로서 완전한 도덕적인 의를 말한다. 이것은 완전하신 하나님의 무흠함, 무죄성, 정결함과 그 위엄성 그 자체로서 도덕적으로 타락한 인간 스스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불가항력인 것이다. 그리고 그 용서를 받지 못할 때는 오직 죽음뿐인 것이다. 따라서 이 경이로운 두려움, 하나님의 속성인 공의를 만족시켜야만 인간의 상실된 영적 능력은 회복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 공의를 만족케 할 자는 타락한 인간으로서는 그 누구도 합당한 자가 없는 것이다. 오직 이 공의를 만족케 할 자는 하나님 자신의 무흠한 피흘림만이 합당한 것이다. 이것은 피로 맺은 약정(bond-in-blood)21) 의로 이미 인간 창조 이전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약 속에서 작정해 놓으신 상호협정으로서 정의되는 계약(a mutual contract)22)이다.
  이 계약의 성취가 성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형상 개념(New Image Idea in Jesus Christ)이다. 이 새형상 개념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만날 때까지는 전적으로 죽어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인류적이며 전인격적인 무조건 선택 - 제한적 속죄 - 불가항력적 은혜 - 궁극적 구원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그 성취 안에서 죽었던 하나님의 형상 개념이 살아나게 하고 새로운 생명을 베풀어주심으로 인하여 타락한 인간의 영과 혼과 몸이 깨끗하게 - 하나님이 받으실 만 하게- 그 도덕적 성질이나 상태, 그 의지나 생각이 하나님의 뜻과 합치되는 완전한 상태의 새 형상 개념을 초자연적으로 기적적으로 우리 속에서 이루시는 것이다. 이것이 참으로 놀라운 회개(

)23)의 인식의 전환이다. 이 놀라운 역사의 대 장정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한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그 성령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의 혼적 요소인 프시케에 역사하여 더 깊은 곳에 있는 프뉴마에 조용히 역사 하시는 것이다. 이로써 타락한 인간의 이성과 감정의 주체는 실제적으로 개조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타락한 인식의 그 주체가 하나님을 깨끗이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인간 정신세계의 그 근본 - 새 형상 개념의 철학적 본질을 완전하게 이루는 것이다.

 

  4.개체(個體)와 공동체(共同體)의 연관성(聯關性)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의 세계는 두 개의 생활을 하게 되어 있다. 하나는 순수한 개별적인 생활이고, 다른 하나는 여러 개체가 서로 연합하는 공동생활이다. 즉 모든 피조물 각각의 개체들은 각기 독립된 개체로서 생활하고, 또 서로 상호간에 연관성을 맺는 공동체로서 생활을 한다. 이것은 개체와 공동체의 올바른 관계로서, 모든 피조물들이 추구하는 목적이며 벗어날 수 없는 질서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 세계에서 생활하는 인간도 역시 개체이면서 공동체 생활의 연관성 안에서 그 목적과 질서를 가지고 삶을 영위한다. 이와 같은 법칙은 인간도 자연물도 벗어날 수 없는 것으로서 창조주 하나님의 계시(revelation) 24)이다.
  그러므로 또한 우리가 피조물임을 잘 알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창조주 하나님에게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창조주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성경적인 하나님의 개념은 어떠한가?
  하나님은 삼위(三位)이시지만 한 분이시다. 즉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

)25)이시다.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오묘하신 그 계시 속에는 개체와 공동체의 긴밀한 연관성이 있음을 보여 주신다. 즉 삼위 하나님의 개체와 공동체로서의 연관성은 여럿이 하나로 전체적인 움직임이 잘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삼위일체의 각 위(位)가 각기 하나님이 되실 뿐더러 하나로 일체(一體)된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의 세계에는 그 계시의 형상을 그대로 반영시켜 본받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개체와 공동체로서의 연관성은 하등 피조물에서 보다 고등 피조물인 인간의 창조에서 더욱 뚜렷하게 잘 나타난다.
  인간의 개체이면서 공동체적인 생활은 가정, 사회, 국가, 세계라는 광범위하고도 폭넓은 영역을 차지한다. 특히 그 중에서도 공동체의 기초 단위인 가정은 더 기초적인 단위인 결혼으로부터 출발을 한다. 이 결혼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세우신 최초의 약정으로서 창조의 계약(Covenant of Creation) 또는 창조의 약정(Bond of Creation)26)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리고 이 창조의 약정에는 일반적인 면으로 안식일, 결혼, 노동이라는 세 가지의 규례를 정해 놓으심으로서 이것은 그 어느 것도 변할 수 없는 창조 규례에 내재된 원칙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규례들은 사실상에 있어서 창조주에 대한 피조물 인간의 넓은 책임과 연관되어진다.
  결혼은 개체이면서 공동체적인 연관성을 나타내는 참으로 신비한 하나님의 창조 규례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그 형상이 그러하듯이 사람이 개체적인 생활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음을 이미 규정해 놓으셨다(창2:18,“사람의 독처함히 좋지 못하다”).
  우리는 이 결혼의 창조 규례에 의해서 개체와 공동체의 연관성 안에 있는 그 목적과 질서를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

첫째, 개체와 공동체간에는 창조 약정에 포함된“상호 결합”의 신비가 주목된다.

  남자와 여자라는 각각의 개체가 창조의 약정에 따라 결혼함으로 서로 하나가 되는 공동체의 연관성을 맺고,“한 몸을 이룬다”는 것은 단순히 완전한 경지에 이르는 여러 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하나됨은 결혼함으로써 갖는“결합의 영속적인 상태”를 표현한다. 이것은 창조 때 이미 정해진 상호 결합의 함축된 의미로서 오로지 창조 질서에 따른 개체와 공동체의 연관성에 의해서 그런 신비한 관계에 들어 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사상을 더욱 분명히 하여 복음으로써 전달하시었다. 이혼 문제를 다루는 말씀에서, “사람을 만드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을 이룰지니라”(

; 마19:4-5, 막10:6-8, 엡5:31).
  즉 하나님의 창조 약정이 각각의 개체를 하나로 연합했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는 둘이 아니고 한 몸이라고 설명한다(마19:6). 그러므로 개체와 공동체간에는 창조 약정에 포함된 상호 결합이 강조되고 있으며, 이는 창조 질서에 의하여 신비하게 상호 결합되는 것이다.

둘째로, 창조 질서는 개체와 공동체간의 질서를 규정짓는 내부 구조를 결정한다.

  사람이 개체로서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그를 돕는 배필”( , a halper corresponding to him)을 만들었다고 하셨다(창2:18).
  즉 여자는 결혼 관계에서 남자를 돕는 자로서 창조되었다. 이는 개체와 공동체간의 변할 수 없는 내부 질서를 분명히 하심이다. 여자의 존재 목적이 남자를 도움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것이 있다.“그와 동등한 돕는 자”이다(창2:20). 이 말의 뜻은 지배력이나 거만함이 전혀 없는 인격적인 면에서 남자와 동등하다는 것이며, 따라서 남자와 여자는 다 똑같이 중요하다 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개체와 공동체간의 내부 질서는 인격의 동등성 안에서 서로 합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된 그 창조 질서에 부합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개체와 공동체간의 내부 질서는 이 세상을 완성하게 하는 목적이 된다. 다시 말하면 가정, 사회, 국가, 세계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그 창조 질서 안에 거하여 인격의 동등 성을 지켜 서로 돕는 자가 되어야 하며 서로 사랑하고 서로 보호하여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거역할 수 없는 창조 질서에 의한 공동체 안에서의 내부 질서이다.
  이제 우리의 사회 질서에는 지위고하, 빈부귀천의 차별을 없애고, 뿌리 깊은 권위주의와 남아 선호사상, 부익부 빈익빈, 학벌, 문벌, 지역 감정, 등등의 말로 할 수 없는 타락의 요소들을 깨끗하게 청소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부가되는 것은 사랑이다. 이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으로 내가 죽기까지 희생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함이요, 그와 같이, 내 이웃을 사랑함이다.
  이제 우리의 사회 질서에는 지배하는 또는 거만한 가장으로서의 질서가 아니라 서로 희생하고 서로 사랑하는 가장으로서 서로 돕는 역할을 충실히 해야만 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고전11:12下半節)이기 때문이다.

 

  5.개별주의와 공동주의의 역사적 고찰(신학적 비판)

  두 주의를 역사적으로 고찰하면, 공동주의는 플라톤(Platon, B. C. 427-347)27)의 이상주의(idealism)에서 발생된 것이고, 개별주의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 C. 384-322) 28)의 자연주의에 의해서 발생된 것이다.
  따라서 중세기의 종교적 공동주의는 플라톤의 이상주의(공동주의)로 인해 발단이 되었다. 이 주의가 중세기 카톨릭 교회 안에서 아무런 여과장치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진 이유는, 그 당시 수도원의 금욕주의가 각기 개별적인 신앙생활로 고조되었으므로 이를 약화시키고자 모색한 나머지 무신론의 공동주의를 그대로 받아들여 강요하게 된 것이다(개체와 공동체간의 극심한 분화 현상).
  그 결과, 공동주의 또는 제도주의의 지배력은 도리어 자연주의적인 개별주의의 강한 욕구를 더욱 불러 일으키게된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따라서 중세기의 종교는 개체와 공동체의 균형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하나님의 약정과 그 창조 질서를 무시하고 제외시킨 개체와 공동체간의 극심한 분화현상은 인식의 극히 좁은 범위에 내포된 의미를 준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식의 보다 넓은 책임이 자주 무시되는 진정한 철학적 본질의 부재인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까지도 간단없이 지속되고 있어서 불확실성의 기약 없는 세월만이 충만할 뿐이다. 이 좁은 관점은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구속 의미를 고찰하는 데까지 연장되어, 그 결과 인간 구원에 대한 교회의 공동체 개념에 큰 결핍을 초래하고 있다. 이로써 기독교회 공동체는 전 세계관과 인생관에 결핍을 가져다주고 있다. 창조 질서에 의한 개체와 공동체의 긴밀한 상호 연합에 의한 그리스도 왕국중심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개체와 공동체간의 극심한 분화현상을 도무지 회개할 줄 모르는 교회중심이 되어 버렸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개체와 공동체간의 극심한 분화현상의 이론을 일반적으로 보편 타당한 것처럼 정립한 것은, 소위 천재적인 철학자라고 알려져 있는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A. D. 1227-1274)에 의해서 이다.
  그는 무신론의 개별주의(자연주의)와 공동주의(제도주의)를 당시에 유행된 카톨릭 공동체의 교권주의와 소위 천재적으로 융화시켜 보편 타당한 종합 이론을 창출해 낸 것이다. 이는 로마 카톨릭 교회 공동체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고 그 공동체의 기초 개념으로서 확립되기에 이른다. 이것이 소위 중세의 아퀴나스 철학이다.
  본래 개체와 공동체는 신비한 상호 연합에 의하여 서로 희생하며, 사랑하며, 돕는 가운데 균형을 이루는 창조 질서에 근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론은 로마 카톨릭 공동체의 그 지배력과 거만함의 제도주의를 자연주의와 교묘히(cunning) 결합시켜 극히 사이키적(프시케)인 보편타당성을 이끌어 낸 것이다.
  그러므로 중세 세계의 그 공동체적 인식은 카톨릭 교회 공동체의 그 지배력과 거만함 속에 잠식되어 버렸다. 아퀴나스의 학설은 신학적으로 볼 때, 소위 은혜와 자연을 대조시킨 것으로 카톨릭 공동주의 곧 그 지배와 거만함의 제도주의를 은혜의 저장소로 둔갑시켜 버렸다. 다시 말하면 아퀴나스 철학의 결론은 공동주의(제도주의) + 자연주의의 카톨릭 교회가 인간의 생명과 죽음을 지배하고 있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13세기와 14세기초에는 중세 교회의 공동주의(제도주의, 교권주의)에 대항하는 자연주의 성향의 개인주의가 활발하게 일어남으로 인해 개체와 공동체간의 불가피한 충돌이 생기기 시작했다. 헬라의 자연주의(개인주의)를 회복시켜 공동체보다는 개체(개인)의 우선을 강조한 르네상스(Renaissance)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여기에도 아퀴나스 철학의“개인들에게 보장된 자연권”이 한 몫 을 하였다. 따라서 르네상스 운동의 목적은 개인 독립에 대한 인간의 감정과 옛 고전주의의 정신으로 복귀하자는 것이다.
  15세기에는 14세기에 일어난 헬라의 개별주의 부흥과 더불어 인문주의가 탄생하고 이 인문주의는 교회의 초자연주의를 불신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로 인하여 비종교적인 인식의 성향이 날로 증가하는 가운데 세속주의라고 하는 것이 탄생하게 된다. 이 세속주의 철학은 인간 주체적 성향을 극히 강조하는 인본주의의 개념이다. 이것은 정치단체의 내부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 또다시 공동주의로 개별주의를 삼켜 버리는 그 비겁한 자태를 들어내고 있다.
  이런 세속주의적 성향의 카톨릭 교권주의에 강력히 반발하여 일어난 것이 1517년의 종교개혁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지배력과 거만함의 그 타락한 공동체의 난잡한 인간 질서를 완벽하게 개혁(Reformed)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던 것이다.
  사실 종교 개혁자들은 진정한 개체로서의 자각을 갖고 있었다. 즉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준하는 그 자각인 것이다. 이는 기독교 철학의 대가(大家) 사도 바울의 말처럼“죄인 된 나와 믿음으로 의롭게 된 나가 한 몸에 있다”라고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회개하여 타락한 개체 안의 인식의 개조를 분명히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삶 속에는 인간의 공력(功力)을 내세우지 않고 오로지 믿음으로서만 의로워짐을 강조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인간 역사에 있어서 가장 큰 혁명이었다. 르네상스나 산업혁명이나 기타 세상의 어느 혁신적인 운동도 이 종교 개혁을 능가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개체와 공동체간의 상호 연합의 신비를 본래의 창조 질서 안으로 개혁하기 위한 위대한 행보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실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주님의 위대한 사랑이 그러하듯이 이들 또한 그 자취를 따라간 것이다. 한 몸으로 하나된 신비한 상호 연합, 서로 죽기까지 희생함으로 사랑하고, 서로 돕고 보호하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견고히 한 것이다.

이제 결론적으로, 다시 한 번 간추려 보자.

  중세기 교회의 철학은 공동주의가 개별주의를 삼켜 버렸다. 오늘 날 세속주의 철학은 정치 단체의 발달로 인해 또 다시 공동주의로 개별주의를 삼켜 버리고자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개혁파 교회나 교인들은 종교 개혁자들의 그 위대한 자취를 따라 개별주의와 공동주의가 균형 잡힌 이상적인 철학을 추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창조 약정의 그 창조 질서에 의한 개체와 공동체의 신비한 상호 연합을 회복시키는 강력한 개혁주의(the Reformation)인 것이다.
  이러한 개혁의 실마리는 철저한 개체의 자각으로부터 출발을 한다. 즉 하나님 앞에서의 철저한 자기 발견과 통찰, 그리고 진정으로 뉘우치는 회개로부터의 철저한 인식의 개조가 천국을 소유케 하는 것이다(“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4:17).
  그러므로 항간에 비쳐지고 있는 개교회주의나 지방주의의 개별주의적 경향이나, 교권주의로 흐르는 공동주의적 경향은 매우 위험한 신호(sign)이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정지 신호(A signal of stop), 또는 경고 표지(A warning si- gn)로 진정한 기독교 철학의 부재에서 야기되는 것이다.
  기독교 철학의 총체적 입장은“의인은 믿음으로 살며, 오직 하나님의 임재와 그 영광을 위해 사는 것”, 이것만이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이다.

 기독교 교육 철학에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 개념(形像槪念)은 극히 기본적인 개념이다. 아니 이 개념은 본래 철학의 본질적인 개념이다. 이 본질을 무시하고 제외시킴으로 세상의 철학들은 죽음과 고통, 허무와 혼돈 속에서 방황하고 있다. 모든 사물의 원리를 바르게 탐구하여 인간의 삶을 궁극적으로 그리고 진리로 향할 수 있도록 그 바른 지침이 되어야할 철학이 이렇듯 혼미한 상황이라면,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있어서 큰 책임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본 장에서 기독교 교육 철학의 바른 개념을 열거하여 세속적 철학 개념의 오명을 씻고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바른 개념을 정립해 보자.

 

  1.형상 개념(Image Idea)

  형상 개념(形像槪念)은 모든 만물을 이해하는 원리를 구명(究明)하는 하나의 의미 깊은 사실이다. 이 개념은 형상(image)이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그 유사성, 그 닮음 꼴을 말한다. 즉 거울에 비친 모습(모양)을 통하여 실물을 아는 것과 같은 부인할 수 없는 이치(理致)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었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철학적 기본 개념에 큰 영향을 주는 깊은 의미의 말씀이다. 왜냐하면 보이는 것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것의 그 이념과 속성을 분명하게 드러나게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개념은 철학의 근본 원리에 정확하게 규합되는 하나의 사실적인 법칙으로서 철학(哲學)은 가설(假說)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모든 영역에 걸친 사물(事物)의 근본 원리를 추구하는 학문으로 자연과 사회 전반에 걸친 일반적인 법칙성을 탐구하게 하는 촉매제 역할을 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 형상 개념, 또는 모양 개념은 창 1:26에 명확하게 규정지어져 있다. 형상은 

 - image 이며, 모양은 

 - likeness 로 그 뜻에 있어서는 유사, 닮음이라는 동의어로 취급된다. 다시 말하여 동의어의 반복이라는 점에서 볼 때 형상 개념(Image Idea)을 특별히 강조한 하나님의 깊으신 의도가 숨어있는 것이다.
  또한 이와 같은 개념은 비단 인간 창조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광의적(廣義的)이며 근본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 철학인 것처럼 하나님의 전 우주적인 창조물, 즉 모든 만물을 이해하는 원리에 대한 사실을 탐구하는 그 자체로서 철학을 위한 근본 원리로 존재하는 하나의 사실적인 법칙이다.
  그러므로 이 보이는 형상 개념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실물의 그 생생한 존재성과 그 속성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는 것을 어느 누구도 핑계치 못한다고 사도 파울은 말하였다(롬1:20).
  그리고 형상 개념으로 나타난 인간 창조의 그 계획 속에는 인간을 모든 만물의 우두머리로 창조하심으로 인간에게 하등 영광(lower honor)15)을 부여하셨다는 것은, 곧 창조자 하나님 자신의 고등 영광(glory of God)을 동시적으로 이미 선포하셨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그리고 특히 인간 창조에 있어서 형상 개념이 의미하는 최고의 목적은 하나님이 영이신 것처럼 인간을 그 유사한 영적 성질로 창조하여 하나님과 인간과의 친밀한 인격적 교제(spirited fellow-ship)16)를 성취하셨다는 사실이다.
  다시 반복 강조하지만,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인간 창조 목적의 최고 성취이다. 그러므로 또한 형상 개념이 인간에게 의미하는 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으로서만 완전한 만족을 얻게 된다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교육의 기초가 철학이라면 철학의 기초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2.옛 형상 개념(Old Image Idea)

  옛 형상 개념은 타락한 아담의 유전을 따르는 전적 타락, 또는 전적 무능력의 그 형상(Image)과 그 모양(likeness)이다. 즉 인간 타락 이전의 형상 개념의 함축적인 의미가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인간 타락 이후에는 무시되고 제외되어 버린 가운데 허상만을 쫓는 비참한 모습이 되어버렸다. 거울의 바로 앞, 그 면전에 사실적으로 서있는 하나님의 형상(spiritual image) 자체인 자기 자신의 실상을 보면서도, 그 정신면의 인식 속에는 타락한 허상(soul image)만을 쫓는 옛 형상 개념을 그대로 갖고 있는 것이다.
  옛 형상 개념은 타락한 인간 아담의 유전을 따라,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긴 역사의 터널을 지나오고 있다. 즉 타락한 인간의 유전, 전통 그 관습의 옛 것들을 실제의 형상과 모양인 양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상에 있어서 허상( 虛像, virtual image) 17)이다.
  그러므로 이 허상의 본체 안에는 철학의 형상 개념의 기초가 되어야할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무시되고 제외되어 존재할 수가 없다. 심지어 하나님이 불러모은 신자의 무리들까지도 자기들이 만들어낸 허상18) 속으로 하나님을 끌어들인다.
  세속 철학의 인식 개념은 옛 아담의 그 유전을 따라, 옛 형상 개념 안에서 금지 시험19)의 인식 장소를 제 마음껏 넘나들고 있다. 다시 말하여 인간의 정신 세계 안에는 형상 개념의 원초인 영적 장소(spiritual image)가 무능해진 가운데 타락한 혼적 장소(soul image)의 그 허상(ghost image), 망상(fancy image), 공상(idle image)의 비참한 상태에 놓여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인간의 처절한 상태에 직면해 있으면서도“카인의 후예”라고 하는 등, 로맨틱(romantic)하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나를 건져주랴”(롬7:24) 라고 자기 자신을 향하여 철저히 개탄(慨歎)하고 있는 것이다.
  옛 형상 개념은 성경의 모든 말씀 중에서 가장 슬픈 이야기이다. 이것은 인류의 시조 아담이 뱀의 유혹을 받아 금단의 열매를 따먹고 에덴에서 추방되었다는 그러한 형식상의 단순한 범죄 기록이 아니다. 이것은 전 인류에게 미친 죄의 기원을 말하고 원죄(原罪, Original Sin)를 말하는 것으로, 철학의 근본을 제 마음대로 뒤흔드는 타락한 인간의 그 인식의 세계를 지목(指目)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의 형상 개념의 침범할 수 없는 그 불가항력적 인식의 세계를 제 마음대로 혼탁케하여 하나님의 금지 명령을 약하게, 흐리게, 가볍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삭제, 첨가, 변경하는 상상할 수 없는 범죄자의 심리를 그대로 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 원죄 개념에 대하여 사탄(tempter)은 철저한 부정이요, 불순종이요, 대항자이다. 세속 철학의 인식 속에 이와 같은 개념이 그대로 유전되어 우리 앞에 직면해 있는 지금, 아니 온 세상에 이와 같은 교육 철학이 가득한 지금, 더더욱 그와 같은 세속적인 교육을 전혀 여과 없이 받아들인 우리들에게 있어서 엄청난 큰 문제로 우리 인식 속에 자리잡혀 있다는 것을 통찰(洞察, discernment)해야 한다.

 

  3.새 형상 개념(New Image Idea)

  타락한 옛 아담으로 인하여 전 인류가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새 아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시 회복시키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이 개념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형상 개념(New Image Idea in Christ)이라고 한다.
  옛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전 인류에게 미친 옛 형상 개념은 철학의 본질적 개념인 형상 개념(Image Idea = Image of God)을 전적으로 무력화시켰다. 즉 전적 불능이요, 전적 무능력으로 인간의 인식 세계를 약화시켜버린 것이다.
  반면에 뱀(tempter)에 말처럼(창3:4-5) 눈이 밝아져 혼( = soul)적 인식의 세계(psychology)20)가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hold up) 간교(cunning)한 혀를 날름거리면서 무모한 도전과 굉장한 위험을 무릅쓴 쓸데없는 짓, 그 못된 짓을 하도록 하는 인식 세계의 겉잡을 수 없는 충동질 속에서, 혼잡한 생각을 거듭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행위를 서슴없이 함으로, 하나님을 감히 시험(test)하고 노(provoke)하게 하는 그 쾌락의 참으로 못된 유혹(tempt)의 인식이, 인간을 한없는 사망의 구렁텅이로 내 몰리게 하고 있다.
  타락한 인간의 유전, 전통 그 관습은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이 타락한 육적(

 = psyche)인간 존재의 주체적 인식 속에서 인격의 중심을 형성하고, 자아를 형성시키고, 사고와 정서 ` 의지와 행동을 그 스스로 하게 하였다. 이것을 인간 심리학에서는 사이칼러지(psychology)라고 하여 연구의 대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타락한 육적인간 존재의 주체적 인식은 피비린내 나는 고대의 정복의 역사를 통하여 그 문화를 발전시켜 소위 사상을 낳고, 미(美)를 풀고, 문학, 예술, 철학을 낳고, 또 그 맛을 보고 즐기는 그 스스로 한다 하는 자칭 주체적 존재이지만 참된 사람, 참된 문화, 참된 역사, 참된 철학을 이루지 못하는 불확실성의 시대를 대대로(generation) 물려주며 물려받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하 등의 능력은 극심한 정도의 차는 있지만 동물에도 구비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은 사람만이 갖는 것인데, 이것은 영적(

)인 것으로 본래의 철학의 기본 개념인 형상 개념의 본질적 요소이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타락이전 인간 정신세계의 그 근본 개념으로 참된 사람이 되게 하는 까닭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본질적 부분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아는 능력이며,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기쁨으로 얻는 능력이며,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에 설 수 있는 능력이다. 이 능력을 얻은 자는 진정으로 자유 함을 누린다(요14:6, 8:32). 죽음, 고통, 허무가 있을 수 없고 모든 것을 초월하여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가득한 참된 능력이다.
  이 하나님의 능력(

)은 타락한 인간 스스로는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불가항력이다. 왜냐하면 영이신 하나님과 타락한 인간의 육적 정신이 그러하듯이,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저항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하나님의 공의(

 = righteousness)가 작동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변절될 수 없는 하나님의 속성 그 자체로서 완전한 도덕적인 의를 말한다. 이것은 완전하신 하나님의 무흠함, 무죄성, 정결함과 그 위엄성 그 자체로서 도덕적으로 타락한 인간 스스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불가항력인 것이다. 그리고 그 용서를 받지 못할 때는 오직 죽음뿐인 것이다. 따라서 이 경이로운 두려움, 하나님의 속성인 공의를 만족시켜야만 인간의 상실된 영적 능력은 회복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 공의를 만족케 할 자는 타락한 인간으로서는 그 누구도 합당한 자가 없는 것이다. 오직 이 공의를 만족케 할 자는 하나님 자신의 무흠한 피흘림만이 합당한 것이다. 이것은 피로 맺은 약정(bond-in-blood)21) 의로 이미 인간 창조 이전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약 속에서 작정해 놓으신 상호협정으로서 정의되는 계약(a mutual contract)22)이다.
  이 계약의 성취가 성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형상 개념(New Image Idea in Jesus Christ)이다. 이 새형상 개념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만날 때까지는 전적으로 죽어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인류적이며 전인격적인 무조건 선택 - 제한적 속죄 - 불가항력적 은혜 - 궁극적 구원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그 성취 안에서 죽었던 하나님의 형상 개념이 살아나게 하고 새로운 생명을 베풀어주심으로 인하여 타락한 인간의 영과 혼과 몸이 깨끗하게 - 하나님이 받으실 만 하게- 그 도덕적 성질이나 상태, 그 의지나 생각이 하나님의 뜻과 합치되는 완전한 상태의 새 형상 개념을 초자연적으로 기적적으로 우리 속에서 이루시는 것이다. 이것이 참으로 놀라운 회개(

)23)의 인식의 전환이다. 이 놀라운 역사의 대 장정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한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그 성령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의 혼적 요소인 프시케에 역사하여 더 깊은 곳에 있는 프뉴마에 조용히 역사 하시는 것이다. 이로써 타락한 인간의 이성과 감정의 주체는 실제적으로 개조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타락한 인식의 그 주체가 하나님을 깨끗이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인간 정신세계의 그 근본 - 새 형상 개념의 철학적 본질을 완전하게 이루는 것이다.

 

  4.개체(個體)와 공동체(共同體)의 연관성(聯關性)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의 세계는 두 개의 생활을 하게 되어 있다. 하나는 순수한 개별적인 생활이고, 다른 하나는 여러 개체가 서로 연합하는 공동생활이다. 즉 모든 피조물 각각의 개체들은 각기 독립된 개체로서 생활하고, 또 서로 상호간에 연관성을 맺는 공동체로서 생활을 한다. 이것은 개체와 공동체의 올바른 관계로서, 모든 피조물들이 추구하는 목적이며 벗어날 수 없는 질서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 세계에서 생활하는 인간도 역시 개체이면서 공동체 생활의 연관성 안에서 그 목적과 질서를 가지고 삶을 영위한다. 이와 같은 법칙은 인간도 자연물도 벗어날 수 없는 것으로서 창조주 하나님의 계시(revelation) 24)이다.
  그러므로 또한 우리가 피조물임을 잘 알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창조주 하나님에게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창조주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성경적인 하나님의 개념은 어떠한가?
  하나님은 삼위(三位)이시지만 한 분이시다. 즉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

)25)이시다.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오묘하신 그 계시 속에는 개체와 공동체의 긴밀한 연관성이 있음을 보여 주신다. 즉 삼위 하나님의 개체와 공동체로서의 연관성은 여럿이 하나로 전체적인 움직임이 잘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삼위일체의 각 위(位)가 각기 하나님이 되실 뿐더러 하나로 일체(一體)된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의 세계에는 그 계시의 형상을 그대로 반영시켜 본받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개체와 공동체로서의 연관성은 하등 피조물에서 보다 고등 피조물인 인간의 창조에서 더욱 뚜렷하게 잘 나타난다.
  인간의 개체이면서 공동체적인 생활은 가정, 사회, 국가, 세계라는 광범위하고도 폭넓은 영역을 차지한다. 특히 그 중에서도 공동체의 기초 단위인 가정은 더 기초적인 단위인 결혼으로부터 출발을 한다. 이 결혼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세우신 최초의 약정으로서 창조의 계약(Covenant of Creation) 또는 창조의 약정(Bond of Creation)26)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리고 이 창조의 약정에는 일반적인 면으로 안식일, 결혼, 노동이라는 세 가지의 규례를 정해 놓으심으로서 이것은 그 어느 것도 변할 수 없는 창조 규례에 내재된 원칙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규례들은 사실상에 있어서 창조주에 대한 피조물 인간의 넓은 책임과 연관되어진다.
  결혼은 개체이면서 공동체적인 연관성을 나타내는 참으로 신비한 하나님의 창조 규례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그 형상이 그러하듯이 사람이 개체적인 생활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음을 이미 규정해 놓으셨다(창2:18,“사람의 독처함히 좋지 못하다”).
  우리는 이 결혼의 창조 규례에 의해서 개체와 공동체의 연관성 안에 있는 그 목적과 질서를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

첫째, 개체와 공동체간에는 창조 약정에 포함된“상호 결합”의 신비가 주목된다.

  남자와 여자라는 각각의 개체가 창조의 약정에 따라 결혼함으로 서로 하나가 되는 공동체의 연관성을 맺고,“한 몸을 이룬다”는 것은 단순히 완전한 경지에 이르는 여러 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하나됨은 결혼함으로써 갖는“결합의 영속적인 상태”를 표현한다. 이것은 창조 때 이미 정해진 상호 결합의 함축된 의미로서 오로지 창조 질서에 따른 개체와 공동체의 연관성에 의해서 그런 신비한 관계에 들어 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사상을 더욱 분명히 하여 복음으로써 전달하시었다. 이혼 문제를 다루는 말씀에서, “사람을 만드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을 이룰지니라”(

; 마19:4-5, 막10:6-8, 엡5:31).
  즉 하나님의 창조 약정이 각각의 개체를 하나로 연합했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는 둘이 아니고 한 몸이라고 설명한다(마19:6). 그러므로 개체와 공동체간에는 창조 약정에 포함된 상호 결합이 강조되고 있으며, 이는 창조 질서에 의하여 신비하게 상호 결합되는 것이다.

둘째로, 창조 질서는 개체와 공동체간의 질서를 규정짓는 내부 구조를 결정한다.

  사람이 개체로서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그를 돕는 배필”( , a halper corresponding to him)을 만들었다고 하셨다(창2:18).
  즉 여자는 결혼 관계에서 남자를 돕는 자로서 창조되었다. 이는 개체와 공동체간의 변할 수 없는 내부 질서를 분명히 하심이다. 여자의 존재 목적이 남자를 도움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것이 있다.“그와 동등한 돕는 자”이다(창2:20). 이 말의 뜻은 지배력이나 거만함이 전혀 없는 인격적인 면에서 남자와 동등하다는 것이며, 따라서 남자와 여자는 다 똑같이 중요하다 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개체와 공동체간의 내부 질서는 인격의 동등성 안에서 서로 합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된 그 창조 질서에 부합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개체와 공동체간의 내부 질서는 이 세상을 완성하게 하는 목적이 된다. 다시 말하면 가정, 사회, 국가, 세계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그 창조 질서 안에 거하여 인격의 동등 성을 지켜 서로 돕는 자가 되어야 하며 서로 사랑하고 서로 보호하여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거역할 수 없는 창조 질서에 의한 공동체 안에서의 내부 질서이다.
  이제 우리의 사회 질서에는 지위고하, 빈부귀천의 차별을 없애고, 뿌리 깊은 권위주의와 남아 선호사상, 부익부 빈익빈, 학벌, 문벌, 지역 감정, 등등의 말로 할 수 없는 타락의 요소들을 깨끗하게 청소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부가되는 것은 사랑이다. 이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으로 내가 죽기까지 희생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함이요, 그와 같이, 내 이웃을 사랑함이다.
  이제 우리의 사회 질서에는 지배하는 또는 거만한 가장으로서의 질서가 아니라 서로 희생하고 서로 사랑하는 가장으로서 서로 돕는 역할을 충실히 해야만 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고전11:12下半節)이기 때문이다.

 

  5.개별주의와 공동주의의 역사적 고찰(신학적 비판)

  두 주의를 역사적으로 고찰하면, 공동주의는 플라톤(Platon, B. C. 427-347)27)의 이상주의(idealism)에서 발생된 것이고, 개별주의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 C. 384-322) 28)의 자연주의에 의해서 발생된 것이다.
  따라서 중세기의 종교적 공동주의는 플라톤의 이상주의(공동주의)로 인해 발단이 되었다. 이 주의가 중세기 카톨릭 교회 안에서 아무런 여과장치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진 이유는, 그 당시 수도원의 금욕주의가 각기 개별적인 신앙생활로 고조되었으므로 이를 약화시키고자 모색한 나머지 무신론의 공동주의를 그대로 받아들여 강요하게 된 것이다(개체와 공동체간의 극심한 분화 현상).
  그 결과, 공동주의 또는 제도주의의 지배력은 도리어 자연주의적인 개별주의의 강한 욕구를 더욱 불러 일으키게된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따라서 중세기의 종교는 개체와 공동체의 균형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하나님의 약정과 그 창조 질서를 무시하고 제외시킨 개체와 공동체간의 극심한 분화현상은 인식의 극히 좁은 범위에 내포된 의미를 준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식의 보다 넓은 책임이 자주 무시되는 진정한 철학적 본질의 부재인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까지도 간단없이 지속되고 있어서 불확실성의 기약 없는 세월만이 충만할 뿐이다. 이 좁은 관점은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구속 의미를 고찰하는 데까지 연장되어, 그 결과 인간 구원에 대한 교회의 공동체 개념에 큰 결핍을 초래하고 있다. 이로써 기독교회 공동체는 전 세계관과 인생관에 결핍을 가져다주고 있다. 창조 질서에 의한 개체와 공동체의 긴밀한 상호 연합에 의한 그리스도 왕국중심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개체와 공동체간의 극심한 분화현상을 도무지 회개할 줄 모르는 교회중심이 되어 버렸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개체와 공동체간의 극심한 분화현상의 이론을 일반적으로 보편 타당한 것처럼 정립한 것은, 소위 천재적인 철학자라고 알려져 있는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A. D. 1227-1274)에 의해서 이다.
  그는 무신론의 개별주의(자연주의)와 공동주의(제도주의)를 당시에 유행된 카톨릭 공동체의 교권주의와 소위 천재적으로 융화시켜 보편 타당한 종합 이론을 창출해 낸 것이다. 이는 로마 카톨릭 교회 공동체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고 그 공동체의 기초 개념으로서 확립되기에 이른다. 이것이 소위 중세의 아퀴나스 철학이다.
  본래 개체와 공동체는 신비한 상호 연합에 의하여 서로 희생하며, 사랑하며, 돕는 가운데 균형을 이루는 창조 질서에 근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론은 로마 카톨릭 공동체의 그 지배력과 거만함의 제도주의를 자연주의와 교묘히(cunning) 결합시켜 극히 사이키적(프시케)인 보편타당성을 이끌어 낸 것이다.
  그러므로 중세 세계의 그 공동체적 인식은 카톨릭 교회 공동체의 그 지배력과 거만함 속에 잠식되어 버렸다. 아퀴나스의 학설은 신학적으로 볼 때, 소위 은혜와 자연을 대조시킨 것으로 카톨릭 공동주의 곧 그 지배와 거만함의 제도주의를 은혜의 저장소로 둔갑시켜 버렸다. 다시 말하면 아퀴나스 철학의 결론은 공동주의(제도주의) + 자연주의의 카톨릭 교회가 인간의 생명과 죽음을 지배하고 있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13세기와 14세기초에는 중세 교회의 공동주의(제도주의, 교권주의)에 대항하는 자연주의 성향의 개인주의가 활발하게 일어남으로 인해 개체와 공동체간의 불가피한 충돌이 생기기 시작했다. 헬라의 자연주의(개인주의)를 회복시켜 공동체보다는 개체(개인)의 우선을 강조한 르네상스(Renaissance)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여기에도 아퀴나스 철학의“개인들에게 보장된 자연권”이 한 몫 을 하였다. 따라서 르네상스 운동의 목적은 개인 독립에 대한 인간의 감정과 옛 고전주의의 정신으로 복귀하자는 것이다.
  15세기에는 14세기에 일어난 헬라의 개별주의 부흥과 더불어 인문주의가 탄생하고 이 인문주의는 교회의 초자연주의를 불신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로 인하여 비종교적인 인식의 성향이 날로 증가하는 가운데 세속주의라고 하는 것이 탄생하게 된다. 이 세속주의 철학은 인간 주체적 성향을 극히 강조하는 인본주의의 개념이다. 이것은 정치단체의 내부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 또다시 공동주의로 개별주의를 삼켜 버리는 그 비겁한 자태를 들어내고 있다.
  이런 세속주의적 성향의 카톨릭 교권주의에 강력히 반발하여 일어난 것이 1517년의 종교개혁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지배력과 거만함의 그 타락한 공동체의 난잡한 인간 질서를 완벽하게 개혁(Reformed)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던 것이다.
  사실 종교 개혁자들은 진정한 개체로서의 자각을 갖고 있었다. 즉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준하는 그 자각인 것이다. 이는 기독교 철학의 대가(大家) 사도 바울의 말처럼“죄인 된 나와 믿음으로 의롭게 된 나가 한 몸에 있다”라고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회개하여 타락한 개체 안의 인식의 개조를 분명히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삶 속에는 인간의 공력(功力)을 내세우지 않고 오로지 믿음으로서만 의로워짐을 강조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인간 역사에 있어서 가장 큰 혁명이었다. 르네상스나 산업혁명이나 기타 세상의 어느 혁신적인 운동도 이 종교 개혁을 능가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개체와 공동체간의 상호 연합의 신비를 본래의 창조 질서 안으로 개혁하기 위한 위대한 행보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실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주님의 위대한 사랑이 그러하듯이 이들 또한 그 자취를 따라간 것이다. 한 몸으로 하나된 신비한 상호 연합, 서로 죽기까지 희생함으로 사랑하고, 서로 돕고 보호하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견고히 한 것이다.

이제 결론적으로, 다시 한 번 간추려 보자.

  중세기 교회의 철학은 공동주의가 개별주의를 삼켜 버렸다. 오늘 날 세속주의 철학은 정치 단체의 발달로 인해 또 다시 공동주의로 개별주의를 삼켜 버리고자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개혁파 교회나 교인들은 종교 개혁자들의 그 위대한 자취를 따라 개별주의와 공동주의가 균형 잡힌 이상적인 철학을 추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창조 약정의 그 창조 질서에 의한 개체와 공동체의 신비한 상호 연합을 회복시키는 강력한 개혁주의(the Reformation)인 것이다.
  이러한 개혁의 실마리는 철저한 개체의 자각으로부터 출발을 한다. 즉 하나님 앞에서의 철저한 자기 발견과 통찰, 그리고 진정으로 뉘우치는 회개로부터의 철저한 인식의 개조가 천국을 소유케 하는 것이다(“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4:17).
  그러므로 항간에 비쳐지고 있는 개교회주의나 지방주의의 개별주의적 경향이나, 교권주의로 흐르는 공동주의적 경향은 매우 위험한 신호(sign)이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정지 신호(A signal of stop), 또는 경고 표지(A warning si- gn)로 진정한 기독교 철학의 부재에서 야기되는 것이다.
  기독교 철학의 총체적 입장은“의인은 믿음으로 살며, 오직 하나님의 임재와 그 영광을 위해 사는 것”, 이것만이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이다.

 기독교 교육 철학에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 개념(形像槪念)은 극히 기본적인 개념이다. 아니 이 개념은 본래 철학의 본질적인 개념이다. 이 본질을 무시하고 제외시킴으로 세상의 철학들은 죽음과 고통, 허무와 혼돈 속에서 방황하고 있다. 모든 사물의 원리를 바르게 탐구하여 인간의 삶을 궁극적으로 그리고 진리로 향할 수 있도록 그 바른 지침이 되어야할 철학이 이렇듯 혼미한 상황이라면,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있어서 큰 책임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본 장에서 기독교 교육 철학의 바른 개념을 열거하여 세속적 철학 개념의 오명을 씻고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바른 개념을 정립해 보자.

 

  1.형상 개념(Image Idea)

  형상 개념(形像槪念)은 모든 만물을 이해하는 원리를 구명(究明)하는 하나의 의미 깊은 사실이다. 이 개념은 형상(image)이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그 유사성, 그 닮음 꼴을 말한다. 즉 거울에 비친 모습(모양)을 통하여 실물을 아는 것과 같은 부인할 수 없는 이치(理致)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었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철학적 기본 개념에 큰 영향을 주는 깊은 의미의 말씀이다. 왜냐하면 보이는 것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것의 그 이념과 속성을 분명하게 드러나게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개념은 철학의 근본 원리에 정확하게 규합되는 하나의 사실적인 법칙으로서 철학(哲學)은 가설(假說)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모든 영역에 걸친 사물(事物)의 근본 원리를 추구하는 학문으로 자연과 사회 전반에 걸친 일반적인 법칙성을 탐구하게 하는 촉매제 역할을 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 형상 개념, 또는 모양 개념은 창 1:26에 명확하게 규정지어져 있다. 형상은 

 - image 이며, 모양은 

 - likeness 로 그 뜻에 있어서는 유사, 닮음이라는 동의어로 취급된다. 다시 말하여 동의어의 반복이라는 점에서 볼 때 형상 개념(Image Idea)을 특별히 강조한 하나님의 깊으신 의도가 숨어있는 것이다.
  또한 이와 같은 개념은 비단 인간 창조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광의적(廣義的)이며 근본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 철학인 것처럼 하나님의 전 우주적인 창조물, 즉 모든 만물을 이해하는 원리에 대한 사실을 탐구하는 그 자체로서 철학을 위한 근본 원리로 존재하는 하나의 사실적인 법칙이다.
  그러므로 이 보이는 형상 개념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실물의 그 생생한 존재성과 그 속성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는 것을 어느 누구도 핑계치 못한다고 사도 파울은 말하였다(롬1:20).
  그리고 형상 개념으로 나타난 인간 창조의 그 계획 속에는 인간을 모든 만물의 우두머리로 창조하심으로 인간에게 하등 영광(lower honor)15)을 부여하셨다는 것은, 곧 창조자 하나님 자신의 고등 영광(glory of God)을 동시적으로 이미 선포하셨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그리고 특히 인간 창조에 있어서 형상 개념이 의미하는 최고의 목적은 하나님이 영이신 것처럼 인간을 그 유사한 영적 성질로 창조하여 하나님과 인간과의 친밀한 인격적 교제(spirited fellow-ship)16)를 성취하셨다는 사실이다.
  다시 반복 강조하지만,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인간 창조 목적의 최고 성취이다. 그러므로 또한 형상 개념이 인간에게 의미하는 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으로서만 완전한 만족을 얻게 된다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교육의 기초가 철학이라면 철학의 기초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2.옛 형상 개념(Old Image Idea)

  옛 형상 개념은 타락한 아담의 유전을 따르는 전적 타락, 또는 전적 무능력의 그 형상(Image)과 그 모양(likeness)이다. 즉 인간 타락 이전의 형상 개념의 함축적인 의미가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인간 타락 이후에는 무시되고 제외되어 버린 가운데 허상만을 쫓는 비참한 모습이 되어버렸다. 거울의 바로 앞, 그 면전에 사실적으로 서있는 하나님의 형상(spiritual image) 자체인 자기 자신의 실상을 보면서도, 그 정신면의 인식 속에는 타락한 허상(soul image)만을 쫓는 옛 형상 개념을 그대로 갖고 있는 것이다.
  옛 형상 개념은 타락한 인간 아담의 유전을 따라,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긴 역사의 터널을 지나오고 있다. 즉 타락한 인간의 유전, 전통 그 관습의 옛 것들을 실제의 형상과 모양인 양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상에 있어서 허상( 虛像, virtual image) 17)이다.
  그러므로 이 허상의 본체 안에는 철학의 형상 개념의 기초가 되어야할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무시되고 제외되어 존재할 수가 없다. 심지어 하나님이 불러모은 신자의 무리들까지도 자기들이 만들어낸 허상18) 속으로 하나님을 끌어들인다.
  세속 철학의 인식 개념은 옛 아담의 그 유전을 따라, 옛 형상 개념 안에서 금지 시험19)의 인식 장소를 제 마음껏 넘나들고 있다. 다시 말하여 인간의 정신 세계 안에는 형상 개념의 원초인 영적 장소(spiritual image)가 무능해진 가운데 타락한 혼적 장소(soul image)의 그 허상(ghost image), 망상(fancy image), 공상(idle image)의 비참한 상태에 놓여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인간의 처절한 상태에 직면해 있으면서도“카인의 후예”라고 하는 등, 로맨틱(romantic)하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나를 건져주랴”(롬7:24) 라고 자기 자신을 향하여 철저히 개탄(慨歎)하고 있는 것이다.
  옛 형상 개념은 성경의 모든 말씀 중에서 가장 슬픈 이야기이다. 이것은 인류의 시조 아담이 뱀의 유혹을 받아 금단의 열매를 따먹고 에덴에서 추방되었다는 그러한 형식상의 단순한 범죄 기록이 아니다. 이것은 전 인류에게 미친 죄의 기원을 말하고 원죄(原罪, Original Sin)를 말하는 것으로, 철학의 근본을 제 마음대로 뒤흔드는 타락한 인간의 그 인식의 세계를 지목(指目)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의 형상 개념의 침범할 수 없는 그 불가항력적 인식의 세계를 제 마음대로 혼탁케하여 하나님의 금지 명령을 약하게, 흐리게, 가볍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삭제, 첨가, 변경하는 상상할 수 없는 범죄자의 심리를 그대로 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 원죄 개념에 대하여 사탄(tempter)은 철저한 부정이요, 불순종이요, 대항자이다. 세속 철학의 인식 속에 이와 같은 개념이 그대로 유전되어 우리 앞에 직면해 있는 지금, 아니 온 세상에 이와 같은 교육 철학이 가득한 지금, 더더욱 그와 같은 세속적인 교육을 전혀 여과 없이 받아들인 우리들에게 있어서 엄청난 큰 문제로 우리 인식 속에 자리잡혀 있다는 것을 통찰(洞察, discernment)해야 한다.

 

  3.새 형상 개념(New Image Idea)

  타락한 옛 아담으로 인하여 전 인류가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새 아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시 회복시키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이 개념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형상 개념(New Image Idea in Christ)이라고 한다.
  옛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전 인류에게 미친 옛 형상 개념은 철학의 본질적 개념인 형상 개념(Image Idea = Image of God)을 전적으로 무력화시켰다. 즉 전적 불능이요, 전적 무능력으로 인간의 인식 세계를 약화시켜버린 것이다.
  반면에 뱀(tempter)에 말처럼(창3:4-5) 눈이 밝아져 혼( = soul)적 인식의 세계(psychology)20)가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hold up) 간교(cunning)한 혀를 날름거리면서 무모한 도전과 굉장한 위험을 무릅쓴 쓸데없는 짓, 그 못된 짓을 하도록 하는 인식 세계의 겉잡을 수 없는 충동질 속에서, 혼잡한 생각을 거듭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행위를 서슴없이 함으로, 하나님을 감히 시험(test)하고 노(provoke)하게 하는 그 쾌락의 참으로 못된 유혹(tempt)의 인식이, 인간을 한없는 사망의 구렁텅이로 내 몰리게 하고 있다.
  타락한 인간의 유전, 전통 그 관습은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이 타락한 육적(

 = psyche)인간 존재의 주체적 인식 속에서 인격의 중심을 형성하고, 자아를 형성시키고, 사고와 정서 ` 의지와 행동을 그 스스로 하게 하였다. 이것을 인간 심리학에서는 사이칼러지(psychology)라고 하여 연구의 대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타락한 육적인간 존재의 주체적 인식은 피비린내 나는 고대의 정복의 역사를 통하여 그 문화를 발전시켜 소위 사상을 낳고, 미(美)를 풀고, 문학, 예술, 철학을 낳고, 또 그 맛을 보고 즐기는 그 스스로 한다 하는 자칭 주체적 존재이지만 참된 사람, 참된 문화, 참된 역사, 참된 철학을 이루지 못하는 불확실성의 시대를 대대로(generation) 물려주며 물려받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하 등의 능력은 극심한 정도의 차는 있지만 동물에도 구비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은 사람만이 갖는 것인데, 이것은 영적(

)인 것으로 본래의 철학의 기본 개념인 형상 개념의 본질적 요소이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타락이전 인간 정신세계의 그 근본 개념으로 참된 사람이 되게 하는 까닭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본질적 부분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아는 능력이며,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기쁨으로 얻는 능력이며,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에 설 수 있는 능력이다. 이 능력을 얻은 자는 진정으로 자유 함을 누린다(요14:6, 8:32). 죽음, 고통, 허무가 있을 수 없고 모든 것을 초월하여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가득한 참된 능력이다.
  이 하나님의 능력(

)은 타락한 인간 스스로는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불가항력이다. 왜냐하면 영이신 하나님과 타락한 인간의 육적 정신이 그러하듯이,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저항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하나님의 공의(

 = righteousness)가 작동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변절될 수 없는 하나님의 속성 그 자체로서 완전한 도덕적인 의를 말한다. 이것은 완전하신 하나님의 무흠함, 무죄성, 정결함과 그 위엄성 그 자체로서 도덕적으로 타락한 인간 스스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불가항력인 것이다. 그리고 그 용서를 받지 못할 때는 오직 죽음뿐인 것이다. 따라서 이 경이로운 두려움, 하나님의 속성인 공의를 만족시켜야만 인간의 상실된 영적 능력은 회복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 공의를 만족케 할 자는 타락한 인간으로서는 그 누구도 합당한 자가 없는 것이다. 오직 이 공의를 만족케 할 자는 하나님 자신의 무흠한 피흘림만이 합당한 것이다. 이것은 피로 맺은 약정(bond-in-blood)21) 의로 이미 인간 창조 이전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약 속에서 작정해 놓으신 상호협정으로서 정의되는 계약(a mutual contract)22)이다.
  이 계약의 성취가 성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형상 개념(New Image Idea in Jesus Christ)이다. 이 새형상 개념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만날 때까지는 전적으로 죽어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인류적이며 전인격적인 무조건 선택 - 제한적 속죄 - 불가항력적 은혜 - 궁극적 구원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그 성취 안에서 죽었던 하나님의 형상 개념이 살아나게 하고 새로운 생명을 베풀어주심으로 인하여 타락한 인간의 영과 혼과 몸이 깨끗하게 - 하나님이 받으실 만 하게- 그 도덕적 성질이나 상태, 그 의지나 생각이 하나님의 뜻과 합치되는 완전한 상태의 새 형상 개념을 초자연적으로 기적적으로 우리 속에서 이루시는 것이다. 이것이 참으로 놀라운 회개(

)23)의 인식의 전환이다. 이 놀라운 역사의 대 장정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한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그 성령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의 혼적 요소인 프시케에 역사하여 더 깊은 곳에 있는 프뉴마에 조용히 역사 하시는 것이다. 이로써 타락한 인간의 이성과 감정의 주체는 실제적으로 개조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타락한 인식의 그 주체가 하나님을 깨끗이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인간 정신세계의 그 근본 - 새 형상 개념의 철학적 본질을 완전하게 이루는 것이다.

 

  4.개체(個體)와 공동체(共同體)의 연관성(聯關性)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의 세계는 두 개의 생활을 하게 되어 있다. 하나는 순수한 개별적인 생활이고, 다른 하나는 여러 개체가 서로 연합하는 공동생활이다. 즉 모든 피조물 각각의 개체들은 각기 독립된 개체로서 생활하고, 또 서로 상호간에 연관성을 맺는 공동체로서 생활을 한다. 이것은 개체와 공동체의 올바른 관계로서, 모든 피조물들이 추구하는 목적이며 벗어날 수 없는 질서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 세계에서 생활하는 인간도 역시 개체이면서 공동체 생활의 연관성 안에서 그 목적과 질서를 가지고 삶을 영위한다. 이와 같은 법칙은 인간도 자연물도 벗어날 수 없는 것으로서 창조주 하나님의 계시(revelation) 24)이다.
  그러므로 또한 우리가 피조물임을 잘 알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창조주 하나님에게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창조주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성경적인 하나님의 개념은 어떠한가?
  하나님은 삼위(三位)이시지만 한 분이시다. 즉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

)25)이시다.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오묘하신 그 계시 속에는 개체와 공동체의 긴밀한 연관성이 있음을 보여 주신다. 즉 삼위 하나님의 개체와 공동체로서의 연관성은 여럿이 하나로 전체적인 움직임이 잘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삼위일체의 각 위(位)가 각기 하나님이 되실 뿐더러 하나로 일체(一體)된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의 세계에는 그 계시의 형상을 그대로 반영시켜 본받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개체와 공동체로서의 연관성은 하등 피조물에서 보다 고등 피조물인 인간의 창조에서 더욱 뚜렷하게 잘 나타난다.
  인간의 개체이면서 공동체적인 생활은 가정, 사회, 국가, 세계라는 광범위하고도 폭넓은 영역을 차지한다. 특히 그 중에서도 공동체의 기초 단위인 가정은 더 기초적인 단위인 결혼으로부터 출발을 한다. 이 결혼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세우신 최초의 약정으로서 창조의 계약(Covenant of Creation) 또는 창조의 약정(Bond of Creation)26)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리고 이 창조의 약정에는 일반적인 면으로 안식일, 결혼, 노동이라는 세 가지의 규례를 정해 놓으심으로서 이것은 그 어느 것도 변할 수 없는 창조 규례에 내재된 원칙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규례들은 사실상에 있어서 창조주에 대한 피조물 인간의 넓은 책임과 연관되어진다.
  결혼은 개체이면서 공동체적인 연관성을 나타내는 참으로 신비한 하나님의 창조 규례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그 형상이 그러하듯이 사람이 개체적인 생활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음을 이미 규정해 놓으셨다(창2:18,“사람의 독처함히 좋지 못하다”).
  우리는 이 결혼의 창조 규례에 의해서 개체와 공동체의 연관성 안에 있는 그 목적과 질서를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

첫째, 개체와 공동체간에는 창조 약정에 포함된“상호 결합”의 신비가 주목된다.

  남자와 여자라는 각각의 개체가 창조의 약정에 따라 결혼함으로 서로 하나가 되는 공동체의 연관성을 맺고,“한 몸을 이룬다”는 것은 단순히 완전한 경지에 이르는 여러 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하나됨은 결혼함으로써 갖는“결합의 영속적인 상태”를 표현한다. 이것은 창조 때 이미 정해진 상호 결합의 함축된 의미로서 오로지 창조 질서에 따른 개체와 공동체의 연관성에 의해서 그런 신비한 관계에 들어 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사상을 더욱 분명히 하여 복음으로써 전달하시었다. 이혼 문제를 다루는 말씀에서, “사람을 만드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을 이룰지니라”(

; 마19:4-5, 막10:6-8, 엡5:31).
  즉 하나님의 창조 약정이 각각의 개체를 하나로 연합했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는 둘이 아니고 한 몸이라고 설명한다(마19:6). 그러므로 개체와 공동체간에는 창조 약정에 포함된 상호 결합이 강조되고 있으며, 이는 창조 질서에 의하여 신비하게 상호 결합되는 것이다.

둘째로, 창조 질서는 개체와 공동체간의 질서를 규정짓는 내부 구조를 결정한다.

  사람이 개체로서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그를 돕는 배필”( , a halper corresponding to him)을 만들었다고 하셨다(창2:18).
  즉 여자는 결혼 관계에서 남자를 돕는 자로서 창조되었다. 이는 개체와 공동체간의 변할 수 없는 내부 질서를 분명히 하심이다. 여자의 존재 목적이 남자를 도움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것이 있다.“그와 동등한 돕는 자”이다(창2:20). 이 말의 뜻은 지배력이나 거만함이 전혀 없는 인격적인 면에서 남자와 동등하다는 것이며, 따라서 남자와 여자는 다 똑같이 중요하다 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개체와 공동체간의 내부 질서는 인격의 동등성 안에서 서로 합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된 그 창조 질서에 부합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개체와 공동체간의 내부 질서는 이 세상을 완성하게 하는 목적이 된다. 다시 말하면 가정, 사회, 국가, 세계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그 창조 질서 안에 거하여 인격의 동등 성을 지켜 서로 돕는 자가 되어야 하며 서로 사랑하고 서로 보호하여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거역할 수 없는 창조 질서에 의한 공동체 안에서의 내부 질서이다.
  이제 우리의 사회 질서에는 지위고하, 빈부귀천의 차별을 없애고, 뿌리 깊은 권위주의와 남아 선호사상, 부익부 빈익빈, 학벌, 문벌, 지역 감정, 등등의 말로 할 수 없는 타락의 요소들을 깨끗하게 청소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부가되는 것은 사랑이다. 이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으로 내가 죽기까지 희생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함이요, 그와 같이, 내 이웃을 사랑함이다.
  이제 우리의 사회 질서에는 지배하는 또는 거만한 가장으로서의 질서가 아니라 서로 희생하고 서로 사랑하는 가장으로서 서로 돕는 역할을 충실히 해야만 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고전11:12下半節)이기 때문이다.

 

  5.개별주의와 공동주의의 역사적 고찰(신학적 비판)

  두 주의를 역사적으로 고찰하면, 공동주의는 플라톤(Platon, B. C. 427-347)27)의 이상주의(idealism)에서 발생된 것이고, 개별주의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 C. 384-322) 28)의 자연주의에 의해서 발생된 것이다.
  따라서 중세기의 종교적 공동주의는 플라톤의 이상주의(공동주의)로 인해 발단이 되었다. 이 주의가 중세기 카톨릭 교회 안에서 아무런 여과장치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진 이유는, 그 당시 수도원의 금욕주의가 각기 개별적인 신앙생활로 고조되었으므로 이를 약화시키고자 모색한 나머지 무신론의 공동주의를 그대로 받아들여 강요하게 된 것이다(개체와 공동체간의 극심한 분화 현상).
  그 결과, 공동주의 또는 제도주의의 지배력은 도리어 자연주의적인 개별주의의 강한 욕구를 더욱 불러 일으키게된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따라서 중세기의 종교는 개체와 공동체의 균형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하나님의 약정과 그 창조 질서를 무시하고 제외시킨 개체와 공동체간의 극심한 분화현상은 인식의 극히 좁은 범위에 내포된 의미를 준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식의 보다 넓은 책임이 자주 무시되는 진정한 철학적 본질의 부재인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까지도 간단없이 지속되고 있어서 불확실성의 기약 없는 세월만이 충만할 뿐이다. 이 좁은 관점은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구속 의미를 고찰하는 데까지 연장되어, 그 결과 인간 구원에 대한 교회의 공동체 개념에 큰 결핍을 초래하고 있다. 이로써 기독교회 공동체는 전 세계관과 인생관에 결핍을 가져다주고 있다. 창조 질서에 의한 개체와 공동체의 긴밀한 상호 연합에 의한 그리스도 왕국중심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개체와 공동체간의 극심한 분화현상을 도무지 회개할 줄 모르는 교회중심이 되어 버렸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개체와 공동체간의 극심한 분화현상의 이론을 일반적으로 보편 타당한 것처럼 정립한 것은, 소위 천재적인 철학자라고 알려져 있는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A. D. 1227-1274)에 의해서 이다.
  그는 무신론의 개별주의(자연주의)와 공동주의(제도주의)를 당시에 유행된 카톨릭 공동체의 교권주의와 소위 천재적으로 융화시켜 보편 타당한 종합 이론을 창출해 낸 것이다. 이는 로마 카톨릭 교회 공동체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고 그 공동체의 기초 개념으로서 확립되기에 이른다. 이것이 소위 중세의 아퀴나스 철학이다.
  본래 개체와 공동체는 신비한 상호 연합에 의하여 서로 희생하며, 사랑하며, 돕는 가운데 균형을 이루는 창조 질서에 근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론은 로마 카톨릭 공동체의 그 지배력과 거만함의 제도주의를 자연주의와 교묘히(cunning) 결합시켜 극히 사이키적(프시케)인 보편타당성을 이끌어 낸 것이다.
  그러므로 중세 세계의 그 공동체적 인식은 카톨릭 교회 공동체의 그 지배력과 거만함 속에 잠식되어 버렸다. 아퀴나스의 학설은 신학적으로 볼 때, 소위 은혜와 자연을 대조시킨 것으로 카톨릭 공동주의 곧 그 지배와 거만함의 제도주의를 은혜의 저장소로 둔갑시켜 버렸다. 다시 말하면 아퀴나스 철학의 결론은 공동주의(제도주의) + 자연주의의 카톨릭 교회가 인간의 생명과 죽음을 지배하고 있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13세기와 14세기초에는 중세 교회의 공동주의(제도주의, 교권주의)에 대항하는 자연주의 성향의 개인주의가 활발하게 일어남으로 인해 개체와 공동체간의 불가피한 충돌이 생기기 시작했다. 헬라의 자연주의(개인주의)를 회복시켜 공동체보다는 개체(개인)의 우선을 강조한 르네상스(Renaissance)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여기에도 아퀴나스 철학의“개인들에게 보장된 자연권”이 한 몫 을 하였다. 따라서 르네상스 운동의 목적은 개인 독립에 대한 인간의 감정과 옛 고전주의의 정신으로 복귀하자는 것이다.
  15세기에는 14세기에 일어난 헬라의 개별주의 부흥과 더불어 인문주의가 탄생하고 이 인문주의는 교회의 초자연주의를 불신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로 인하여 비종교적인 인식의 성향이 날로 증가하는 가운데 세속주의라고 하는 것이 탄생하게 된다. 이 세속주의 철학은 인간 주체적 성향을 극히 강조하는 인본주의의 개념이다. 이것은 정치단체의 내부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 또다시 공동주의로 개별주의를 삼켜 버리는 그 비겁한 자태를 들어내고 있다.
  이런 세속주의적 성향의 카톨릭 교권주의에 강력히 반발하여 일어난 것이 1517년의 종교개혁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지배력과 거만함의 그 타락한 공동체의 난잡한 인간 질서를 완벽하게 개혁(Reformed)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던 것이다.
  사실 종교 개혁자들은 진정한 개체로서의 자각을 갖고 있었다. 즉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준하는 그 자각인 것이다. 이는 기독교 철학의 대가(大家) 사도 바울의 말처럼“죄인 된 나와 믿음으로 의롭게 된 나가 한 몸에 있다”라고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회개하여 타락한 개체 안의 인식의 개조를 분명히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삶 속에는 인간의 공력(功力)을 내세우지 않고 오로지 믿음으로서만 의로워짐을 강조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인간 역사에 있어서 가장 큰 혁명이었다. 르네상스나 산업혁명이나 기타 세상의 어느 혁신적인 운동도 이 종교 개혁을 능가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개체와 공동체간의 상호 연합의 신비를 본래의 창조 질서 안으로 개혁하기 위한 위대한 행보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실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주님의 위대한 사랑이 그러하듯이 이들 또한 그 자취를 따라간 것이다. 한 몸으로 하나된 신비한 상호 연합, 서로 죽기까지 희생함으로 사랑하고, 서로 돕고 보호하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견고히 한 것이다.

이제 결론적으로, 다시 한 번 간추려 보자.

  중세기 교회의 철학은 공동주의가 개별주의를 삼켜 버렸다. 오늘 날 세속주의 철학은 정치 단체의 발달로 인해 또 다시 공동주의로 개별주의를 삼켜 버리고자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개혁파 교회나 교인들은 종교 개혁자들의 그 위대한 자취를 따라 개별주의와 공동주의가 균형 잡힌 이상적인 철학을 추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창조 약정의 그 창조 질서에 의한 개체와 공동체의 신비한 상호 연합을 회복시키는 강력한 개혁주의(the Reformation)인 것이다.
  이러한 개혁의 실마리는 철저한 개체의 자각으로부터 출발을 한다. 즉 하나님 앞에서의 철저한 자기 발견과 통찰, 그리고 진정으로 뉘우치는 회개로부터의 철저한 인식의 개조가 천국을 소유케 하는 것이다(“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4:17).
  그러므로 항간에 비쳐지고 있는 개교회주의나 지방주의의 개별주의적 경향이나, 교권주의로 흐르는 공동주의적 경향은 매우 위험한 신호(sign)이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정지 신호(A signal of stop), 또는 경고 표지(A warning si- gn)로 진정한 기독교 철학의 부재에서 야기되는 것이다.
  기독교 철학의 총체적 입장은“의인은 믿음으로 살며, 오직 하나님의 임재와 그 영광을 위해 사는 것”, 이것만이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이다.

'서양 철학 동양 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독교 철학 5  (0) 2025.05.21
기독교 철학 4  (0) 2025.05.21
기독교 철학 2  (0) 2025.05.21
기독교 철학  (0) 2025.05.21
제1원인과 제2원인  (0) 2025.0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