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철학 동양 철학

기독교 철학 2

하나님아들 2025. 5. 21. 23:20

기독교 철학 2

 

서론

 

  우리 나라에 서양식 교육이 전해진 것은 지금으로부터 100전의 일로 미국을 비롯한 기독교 선교사들에 의해서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전할 목적으로 선교와 교육사업을 최초로 시작하였다.
  하나님 말씀을 근본으로 하는 이들의 철학과 교육은 획기적인 것이어서 당시의 전제 군주국가 형태인 이씨 왕조 정치로부터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동양 철학의 한 유형인 유교사상을 공동체의 핵심사상으로 받아들여 제도주의의 철저한 권위와 족벌정치를 위한 방패막이로 신봉했던 소수 무리의 왕족들은 당시의 공동체 안에서 스스로 하나님처럼 행동하였던 것이다. 이 소수 무리의 권위는 사실상 무력에 의한 억압으로 무수한 개체들을 점유하면서 자기들의 법제화된 제도주의(유교적 공동주의)를 일반적으로 보편 타당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때의 교육이라고 하는 것은 유교적 공동주의의 제도권 아래 이루어져 정치, 사회, 문화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이 교육의 첫째 목적은 왕을 하나님처럼 신봉하는 것으로 그 한사람을 위해 무수한 개체들의 자율권이 희생당하는 비인격성을 드러내었고, 더더욱 신분의 비하를 부추겨 세움으로 약자는 더욱 희생할 수밖에 없는 비이성적 사상의 교육이었다.
  이에 반하여 하나님 말씀을 근본으로 하는 선교사들의 그 철학과 사상은 철저한 자기 희생적 사랑의 개체와 공동체간의 신비한 상호 연합을 그 교육 철학의 기초로 삼았기 때문에 철저한 감시와 축출의 대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희생적 노력은 많은 고난과 죽음을 감수하면서 까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꽃을 피웠다.
  이들의 선교 활동과 더불어 시작된 교육 사업은 우리 나라 최초의 교육의 뿌리가 되었으며 사실상 일제의 침략 전까지는 국가의 바른 민족의식과 사회 정화의 기풍에 크게 기여하였다. 종교 개혁자들의 그 개혁정신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교육이었기 때문에 세속적인 어떠한 사상과 철학도 자리잡을 수 없었다. 즉 교육에 있어서 진화론적인 발상보다는 창조론적인 교육철학을 근간으로 참된 이성의 참 인간상을 이끌어 내는 교육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일제의 침략과 더불어 우리 나라 최초의 기독교 교육은 거의 말살되는 비극을 겪게 되었다. 일본의 제국주의의 그 교육의 방향은 군국주의(軍國主義, militarism)의 형태를 갖는 것으로서 군사적 가치를 다른 사회적 가치보다 우선(優先)시켜, 교육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 등의 일체를 군사목적에 따르게 하려는 주의를 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주의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고대의 스파르타, 로마제국, 근대의 프로이센,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의 나치스 등이 실행했던 것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은 비참한 교육의 형태는 해방이후에도 계속이어져 자유에 거센 물결을 타고 무서운 사상의 변천과 청소년의 범죄를 부추키는 상황으로까지 나아갔다. 이러한 교육의 형태는 지금도 그대로 잔존하고 있어서 교육에 대한 범국민적인 투자를 소홀히 하고, 교육의 형태 역시 무신론적이며 철저한 자기 위주의 그릇된 인간상을 창출하는 비이성적 교육으로 나아가고 있다. 왜냐하면 사회봉사의 참인격적 교육보다는 일류학교 일류학생 만들기를 위한 주입식 교육의 그 못된 진화론적 발상과 도무지 희생할 줄 모르는 자기욕구 만족의 학벌주의 경쟁체재등으로 혼잡하기 때문이다.45)
  학생들은 혼잡한 교육제도 안에서 고3병에 시달려야 하고, 부모들은 그 체제의 변화 추이를 민감하게 따라잡지 못해서 안달이 나있다. 심지어 기성 교회들이 세운 학교 교육마저도 무신론적인 그 발상에 편중하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 나라 최초의 그 개혁(Reformed)적인 기독교 교육이 자취를 감추어 버린 것이다.
  개혁적인 기독교 교육이라고 하는 것은 세속주의 철학이나 군국주의 등과 같은 타락한 인간의 그 비이성적인 개념을 말 그대로 개혁하는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참 인간상을 찾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육이라고 하는 것은 타락한 인간의 이성이 교묘히 만들어낸 그 무엇을 찾고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론적인 기초 위에서 창조론적인 질서에 의하여 이미 결정된 인간의 넓은 책임과 특수한 책임을 해설하는 데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진정한 모범(Model)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참 인성 속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보여졌다.
  교육도 역시, 첫째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그와 같이 내 이웃의 많은 사람들과 자연 환경의 모든 것들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종합적 학(學)임을 알아야 한다.

 

  1.기독교 교육의 정의

  순수한 기독교 교육은 기독교인에 대한 교육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다운 인간을 형성하도록 하는 노력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교육은 기독교 철학의 기초 위에 세워진다.
  이 바탕 위에서 기독교 교육의 본질을 따져 본다면 기독교 교육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고, 성경에 기초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학생들과 관계를 맺고, 그리고 한편으로는 사회에 적응하려는 과정이다46)”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기독교 교육은 “하나님의 구속 사업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개개인의 심령 속에서 역사 하여 인간들의 공동생활에 기여한다는 관점에서 출발하는 풍부한 기독교적 사상과 생활을 어린이와 젊은이와 장년들에게 유용하게 적용시키는 데 있다47)”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 교육은 그리스도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정상관계를 수립하는 데 있다. 따라서 기독교 교육은 어떤 문제에 직면하게 되면 복음의 특정한 사실에서 그리스도를 중심 하여 시작한다.
  그러므로 골로새서 1:18절에 “그는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라”라고 하였다. 그리스도는 인간 사상과 생활의 중심이고, 기독교 교육의 중심 메시지이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중생과 구원의 확신을 얻는데서 온다.
  어린이들과 젊은 학생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기 전까지는 하나님이 중심하지 않는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아니한 피교육생들은 인간에게 있는 기본적인 죄악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기독교 교육은 어린이들로부터 젊은이, 장년에 이르기까지 인간에게는 기본적인 죄악이 있다는 것을 인식시켜야 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후서 5:17절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인간에게 있는 기본적인 죄악이 깨끗이 청산되고 완전한 새 인간상으로 다시 태어남을 강조한 것이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 교육의 참 목적이다.
  현대의 교육은 인간 중심의 교육이다. 이 말을 형식적으로 들으면 아주 보편타당성이 있는 것처럼 인식되어 진다. 그러나 그 내면을 진지하게 바라보면 그 교육의 기초는 타락한 세속적 철학의 바탕 위에서 말하여 진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타락한 그 유전을 따라 그 타락한 인간의 기본권리를 최대한으로 강조한다. 그러므로 또한 인간의 지식, 교양, 품성 등을 가르쳐 기르거나 이끌어 선량하게 한다는 그 교육의 중심 목표는 이미 흔들리고 있다. 오늘 날 교육 현장의 실태는 기계적 방법에 의한 무신론의 교과서를 그대로 읽고 답습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것을 근거로 학생중심의 교육에서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기본권리를 최대한도로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린이들과 학생들은 이미 그 기계적인 방법의 노예가 되어 있다. 정신적으로만 피폐해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으로까지 엄청나게 큰 몸살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 시각까지 기본권리를 최대한 보장받기는커녕, 오히려 창살 없는 지적 감옥에 갇혀 날마다 곤욕을 치러내야 한다. 여기에 따라 가정교육은 그 설자리를 잃었다. 이른 새벽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고생 만하고 돌아온 자녀들에게 인간적인 기본 교육을 차마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의 고통과 고생 속으로 같이 휘말려 들고 있다. 오늘 날 사회교육의 진정한 일익을 담당해야할 T. V 등 언론 매체는 이상스런 몸짓과 죽음의 옷을 걸치고 게걸스런 가사 풍의 극히 타락한 모습들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 교육은 인간의 타락한 기본적인 죄악을 바르게 인식시켜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는 참 이성, 참 인격의 참된 인간상을 이끌어 내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타락한 인간의 그 주체적 인식만으로는 전혀 불가능하다. 인간 정신세계의 그 근본이요, 주체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절대적인 개입만이 가능케 하는 것이다. 이 교육은 삼위 하나님의 절대적인 간섭 하에서 이루어진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감동에 의한 신비한 교육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또한 교육-敎育-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다. 진실된 의미에서 이 말은 교육-交育-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타락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죄를 진정으로 회개하고, 가르치는 자나 가르침을 받는 자가 하나님 앞에서 서로 희생하고 서로 사랑하며 서로 나눔이 있는 진정성의 교육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교육은 세속적 교육이 아니라고 단언하고 싶다. 기독교 교육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탁하신 대로 실시하는 교육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참 인간이 되게 하는 교육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본 형상이고 참 다운 본보기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은 이들은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한 삶을 갖게 한다”(골3:17).
  기독교 교육은 일반적으로 학생들로 하여금 학문의 모든 분야에 대하여 창조론 적인 관점에서 바른 지식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을 배우게 한다. 참 인간의 진정한 본보기이신 예수님의 생애와 그 실천적 행위에 의해 학생들 스스로는 자기들 생활에 모든 것을 스스로 평가하는 것이다. 이는 인간 생활의 목적과 갈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활의 조명아래서 모두 평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교육은 학생들이 그리스도의 생활의 모범을 따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찾을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이다. 기독교 교육의 모든 방법들은 오직 하나님께 정직하며, 진실하며,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로 행해져야만 한다.

 

  2.기독교 교육과 성령의 역사(役事)

(1)진정한 교사로서의 성령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14:26)

  기독교 교육의 진정한 선생이요, 지도자는 성령 하나님이시다. 가르치는 자나 가르침을 받는 자에게 있어서 성령의 역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으로 이루어지기에 실로 그 영향력은 크고 위대하다. 기독교 교육은 이와 같이 약속하신 성령의 역사에 의해 인간의 삶 전체를 향상시키며 더 나아가 거룩하게 사는 힘의 원천을 제공해 주신다.
  성령께서는 가르치는 자나 가르침을 받는 자에게 진실된 마음의 감동을 일으키도록 격려와 힘을 불어넣어 주신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있어서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들을 깨닫게 해 주신다. 그러므로 이러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은 자들은 서로에게 희생과 사랑, 나눔의 진정한 교육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 교육은 성령의 역사를 무시하고 제외시켜 자기들 스스로의 주체적 인식 속에서 타락된 인간의 욕망을 따라 교육의 질적 향상을 꾀하고자 한다. 이러한 교육의 방향은 오늘의 교육현실이 증명하듯이 그 제도주의의 권위의식으로 나타나 오히려 교육의 질적 하락을 가져올 뿐이다.
  특히 성령께서 교사에게 격려해 주시는 힘은 교사 자신은 물론 학생들에게 진실된 마음을 열게 하여 성경의 교훈을 따라 바른 생활을 실천하도록 격려해주시고 원기를 북돋아 주신다. 보혜사 성령의 은혜를 충만하게 받은 교사는 학생들에게 진리를 깨닫게 하는 것과 그들의 날마다의 생활에 힘을 얻게 하여 생활의 큰 변화를 일으키게 한다.
  그러므로 보혜사48) 라고 하는 말이 의미하듯이 교육현장에 있어서 진정한 교사는 성령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배우고 가르치는 법을 그 창조질서 안에 이미 규정해 놓으셨다. 이 법과 질서는 절대로 인간을 속박하는 수단이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에게 있어서 꼭 필요한 그 법과 질서로서의 황금의 속박이다. 따라서 보혜사 성령 하나님이 주장하시는 교육은 우리에게 있어서 위대한 선물이다.

(2)성경에 기초를 둔 기독교 교육

  기독교 교육의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초를 둔다. 성경은 모든 만물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특별한 계시로 주신 진리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하나님, 사람, 세상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본래의 철학이 있으며, 이것은 모든 만물의 근본 원리로서 세속의 진리를 능가하고도 남음이 있는 정확 무오(正確無誤)한 절대적인 진리이다.
  그러므로 또한 인간의 모든 생활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비추어져야 하며 해석되어져야 한다.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일반적인 종교의 개념으로 추상 인식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인간 정신세계의 근본개념으로, 모든 만물의 근본원리로, 인간의 실제 생활 속에 명확하게 기초하여야 한다.
  이와 같은 기독교 철학의 기초 위에서 기독교 교육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24:35) 라고 하셨다. 신적 선언의 분명한 이 말씀 속에서 기독교 교육은 이루어진다.

1)성경에 기초한 교육

  요한복음 14: 6에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라고 말씀 하셨다. 여기에서 “나는```이니”는 

 로서, 신적 자기 선언의 불변의 원칙임을 의미한다. 즉 기독교 교육은 세상의 일반적 교육과는 달리 만고불변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기초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초를 둔 기독교 교육은 절대적 진리인 하나님 말씀에 기초한 하나의 해설의 과정으로서 모든 교육 영역을 지배한다.
  세속적인 철학의 터위에 기초한 교육의 방법으로는 진리를 찾아 갈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현실적으로 논리가 선명한 듯 하나 거기에는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을 초월하는 세계를 보는 영적 통찰력이 없기 때문에(불가지론의 인식) 인간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가 없는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회의와 실증의 현실적 방법들만이 우선하기 때문에 소위 과학적이라고는 하지만 극히 인간적인 논리의 바탕 위에서 혼미한 사상의 변론만이 난무하는 것이다.

2)성령께서 인도하는 교육

  교육의 진정한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삼위 하나님의 작정과 계획은 교육에 관한 한 보혜사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진행할 것을 말씀하셨다. 다시 말하면, 지도 교사는 인간 주체의 가르침을 금지하고, 보혜사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진정으로 소원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배우는 자에게 있어서도 같은 원리로서 기독교 교육은 시작하기 전에 기도하고, 또 기도로 시작하고, 진행시키고, 끝을 맺어야 한다.
  보혜사 성령 하나님을 곁에 가까이 부르지 않는 - 기도 없는 - 기독교 교육은 성경적 진리와 그 원리에서 이미 빗나가 있으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교육이 될 수없다. 그러므로 기독교 교육이 무엇인지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려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이와 같은 이치는 크리스천이 무신론의 일반론적인 교육을 담당하였다 할지라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다. 크리스천이 지도 교사로서 담당하는 학교 교육에 있어서도 신실한 교사로서의 자세를 지향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중심에 모시고, 그 분이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의 인도에 따라 가르치며, 학생들을 대하며, 사회적 적응을 시켜야 한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에 표준을 두고 기도하는 교사는 교육의 진의(眞意)를 바로 알고 이해한 신실한 교사로서 교육의 방향을 참되게 한다.

 

  3.기독교 교육의 영역(領域)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에게 있어서 교육은 창조 질서의 순리를 따르는 것으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이는 인간의 형성 과정을 좌우하는 것으로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일이며, 바람직한 인간을 육성하려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하나님과의 정상관계 수립이 그 목적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형성과정을 타락한 인간의 유전이나 환경에 의한 결정 요인으로 보고 혼미한 논쟁만을 거듭하는 것은 진정한 교육의 의미를 상실한다. 일반 교육에서의 유전 결정설이나 환경 결정설은 한계가 있는 것으로 전적으로 극단화 될 수 없으며 오히려 종합되어야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인간 교육의 영역을 바라볼 때, 기독교 교육의 필요성은 광범위하게 적용되어진다. 그것은 교회뿐 아니라 가정과 학교, 사회 속에서 가장 필요한 일이다.

(1)가정 교육

  가정은 인간에게 있어서 유전과 환경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곳으로 교육을 실시하는 첫 장소요, 중요한 터전이다. 인간의 인격의 결정은 유전과 환경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지는 것으로 가정은 인격이 결정되는 요람(搖籃)이라고 할 수 있다. 소위 유전은 선천적으로 가능성의 기능을 마련하여 주며, 환경은 후천적으로 가능성의 기능을 제한한다. 이와 같은 교육의 첫 장소요, 중요한 터전이 가정인 것이다.
  사람의 어린 시절은 감수성이 예민하여 교육적 가치상 가장 많은 영향을 받는다. 이러한 중요한 시기에 있어서 가정 안에서 이루어지는 종교 교육은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대 히브리인들은 교육의 시작을 어머니 품에서부터 하였다. 가정에서 부모의 역할은 어린 자녀들을 사람다운 사람으로 길러내는 초석이 되는 것이다. 특히 가정에서의 종교 생활은 어린 자녀의 마음속에 은연중 깊은 의식을 갖게 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인격을 형성해 나갈 때, 하나님이 원하시고 그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참다운 인격을 형성할 수 있는 것이다. 어린 자녀가 선천적으로 타락한 유전의 가능성을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그 스스로를 제한하는 후천적 가능성의 기능을 보장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2)학교 교육

  교육에 있어서 가정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학교 교육이다. 학교 교육은 일정한 장소에 시설을 갖추고, 일정한 교과 과정에 따라 교사가 계획적, 계속적, 계단적, 집단적으로 실시하는 특징을 갖는다. 이것은 가정 교육에서는 볼 수 없는 것으로 인간에게 학교 교육의 필요성이 크게 요구되는 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학교 교육에 앞서 가정 교육이 더욱 중요함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사실 학교 교육은 가정 교육에서 어떤 부족한 점을 학교 교육을 통하여 보충한다는 의도와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학교 교육만을 강조한 나머지 가정 교육을 소홀히 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교육적 가치를 가져오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학교가 교육 기관으로서 가정 교육을 대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는 가정 교육과 학교 교육이 서로 깊은 연관성을 맺고서 상호 보완적으로 추진되어야 함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육 형태의 양상은 소위 무신론의 실용주의(practicalism) 사상 때문에 교사와 학생, 학부모들은 큰 혼란 속에 빠져있다. 성경이 일반 학교 교과과정에서 삭제되었다는 것 외에도 진정한 학교 교육의 그 의도와 목적을 상실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어린 학생들은 그 부모를 통한 가정 교육에 충실한 기초 위에서 학교 교육에도 충실해야 한다는 점인데, 오늘날의 교육은 가정 교육의 기본 개념을 상실한 체, 대학 입시위주의 실질적인 고득점 전략에 익숙한 나머지 교육은 그 본질을 잃고 일상적인 관행대로 연습, 익힘, 실습이라는 빈틈없는 책략적 수법에 골몰하고 있다.
  이와 같은 수법은 교육의 본질적 측면에서 통찰하면, 소위 “부정 수단”(practice)이다. 이는 마치 법을 바르게 집행하여야할 변호사가 오히려 그 법을 교활하게 피해 가는‘악덕 변호사의 부정 수단’(practices of a shyster)과 같은 것이다.

(3)교회 교육

  이제 교회 교육의 중요성을 논하고자 한다. 논하기에 앞서 우리가 먼저 알아야할 원칙은 가정, 학교, 교회의 세 기관이 혼연일체로 하나가 되어, 서로 깊은 관련성 안에서 관심을 갖고 상호 보완적인 자세로 나아갈 때 진정한 교육의 성과는 이루어진다.
  교회 교육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육하는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될 가장 중요한 교육기관이다. 무신론의 일반 개념들은 교회 교육을 하나의 종교 분파의 전도 역할 정도로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인간 본래의 형상 개념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극단적인 무지의 소치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갖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육하여야 그 인격형성에 참 본질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이는 진정한 교육의 주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일찍이 미국의 학교 교육에서는 성경을 교과서로 사용하여 교육을 실시하였다. 즉 3R’s를 모든 학생들에게 배우게 하였는데, 이는 학생들의 의식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르게 하기 위한 것으로 첫째, 바르게 읽기(Reading). 둘째, 종교 의식(Riting). 셋째, 생활 주제(Rithmetic)가 그 내용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의 학교 교육은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진정한 교육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교회 교육은 진정한 교사로서 역사 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곁에 아주 가까이 모셔들임으로서 시작된다. 미성숙한 인간 자신의 행위에 의해서는 참된 교육을 바랄 수 없음을 통찰하고, 불가항력의 그 역사 하심을 과감하게 받아드림으로서 인간이 무능하게 대처했던 수많은 부분들을 비로소 완성하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교육의 중요성은 인간의 생각을 보다 넓게 하여 주며 더욱 진보적으로 나아가게 한다. 왜냐하면 전적 무능한 타락한 인간의 의식을 초월하여 타락이전의 보다 순수하고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에 접근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육 방법은 인간으로 하여금 참된 인격 형성을 이루게 하고, 모든 가치 판단에 있어서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한다.
  특히 우리 나라의 교육 문화는 어떤 특정 종교 교육을 실시하기에는 곤란한 점이 많다고 본다. 그러나 최소한 기독교인이 세운 일반 학교나 일반 학교에 다니고 있는 크리스천의 자녀들은 가정, 학교, 교회라고 하는 세 교육기관의 긴밀한 상호 보완적 관계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지하여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 교육 기관을 신비한 연합으로 서로 하나되게 하시기를 오늘도 간절히 원하고 계신다.
  이제 끝으로 교회 교육의 단점들을 지적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정한 교육으로 지향해 나가자.

첫째, 대부분의 교회들은 자라나는 어린이들보다도 장년들을 위주로 하여 교육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가정, 학교, 교회라고 하는 세 교육기관의 상호 보완적 관계에 있어서 먼저 앞장 서야할 교회 자체가 오히려 먼저 문을 닫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교회는 건축과 그 시설 자체에서부터 획기적인 개혁을 단행하여야 한다. 즉 주일학교 교육을 평일에도 활성화시킬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하여야 하는 것이다.

둘째, 대부분 교회의 교육 프로그램이 어린이보다는 어른을 위하여 준비되고 있다는 점이다.

  모든 교회의 예정 계획과 그 진행 순서는 어린이나 젊은 학생, 어른들이 다같이 귀중하게 존중되어져야 한다. 어른 예배를 중심으로 어린이 예배가 소홀히 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법에 합당치 않다. 특히 우리 나라에는 청소년을 위한 건전한 프로그램이 취약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교회의 책임이 크다 아니할 수 없다.

셋째, 진실된 사랑과 나눔의 교제의 장이 열려야 한다.

  자연적 사랑이 아닌 죽기까지 희생하는 그리스도의 사랑, 가진 자가 없는 자를 향하여 함께 나누는 진정한 나눔, 가르치는 자가 아니라 섬기며 봉사하는 진정한 교제의 장이 하루 속히 활짝 열려야 한다.
  이와는 반대로 모든 교회들은 유교적 공동주의에 깊이 물들어 있다. 공자의 눈으로 성경을 해석하여 수직윤리와 차별문화를 양산함으로 남녀차별, 권위주의, 과시문화가 교회 내에 팽배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중심으로 기독교인의 바른 태도와 의식 구조조정이 시급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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