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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철학

하나님아들 2025. 5. 21. 10:51

 

 

  기독교 철학

  철학(哲學)은 가설(假說)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모든 영역에 걸친 사물(事物)의 근본 원리를 추구하는 학문으로 자연과 사회 전반에 걸친 일반적인 법칙성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즉, 광의적(廣義的)이며 근본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 철학인 것이다. 그것은 만물을 이해하는 원리에 대한 사실을 탐구하는 것으로서 행위, 사상, 종교적 신앙 그리고 전통에 대한 원리 자체이며 실제 생활을 인도하는 하나의 사상 체계이다.1)
  그러므로 사실에 있어서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철학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러면 철학이 교육을 소유하는가? 라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먼저 결론을 내리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명확하다. 철학이 교육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이 철학을 소유하는 것이다. 이 말은 교육이 철학을 필요로 하며 교육에도 철학이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여 역사적으로 볼 때 그 시대 시대의 모든 교육 체계의 기본은 철학의 터 위에서 세워진 것이다. 교육에 관한 한 모든 기본 원리가 철학적 기초의 구명(究明) 아래서 탐구되어 교육이라는 한 영역(領域)을 이룬 것이다. 예를 들면 교육학이 현재로서는 인문 과학 또는 사회 과학의 한 부문이라고 간주되지만, 전에는 철학의 한 부문으로서 교육(pedagogy)에 관하여 연구하는 학문이었다.
  그러므로 철학은 광의적이고 근본적인 의미에서 모든 만물을 이해하는 원리에 대한 사실을 연구하는 기초 사상 체계로서 그 힘은 대단하다. 이러한 철학적 가치와 그 영향력을 평가하는 말이 있다. 「세계는 사상가인 철학자들에 의해 움직인다2)」.
  그러나 많은 기독교인들, 특히 한국의 크리스천들은 철학에 대한 연구를 죄악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분명 잘못된 것으로서 기독교적인 철학 관념과 무신론의 일반적인 철학 관념을 혼동하는데서 오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무속 종교관과 기복 신앙에 심취한 나머지 기독교 사상에는 철학적인 관념이 전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오해(誤解)하는데서 기인하는 것이다.
  철학은 이미 언급하였듯이 모든 영역에 걸친 사물(事物)의 근본 원리를 추구하는 것이며, 만물을 이해하는 원리에 대한 사실을 탐구하는 것으로서 광의적(廣義的)이며 근본적인 의미를 갖고서 행위, 사상, 종교적 신앙 그리고 전통에 대한 원리 자체이며 실제 생활을 인도하는 하나의 사상 체계이다 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모든 부문에 걸쳐 인간의 생활 영역 안에는 철학을 소유할 수밖에 없다 라고 하였다. 이러한 철학적 영향력의 인정아래서 기독교적인 철학 개념이 무엇이며 무신론의 일반론적인 철학 개념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1. 무신론의 일반론적인 철학 개념
  무신론의 일반론적인 철학 개념은 기독교적인 하나님의 사상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제외시켜 도무지 인정치 않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곧 사물의 근본 원리나 만물을 이해하는 원리에 대한 사실을 어디까지나 인간 주체(主體)의 이성론과 합리론을 내세워 그 스스로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국한(局限)한다. 일반 철학 개념의 그 근본적인 오류(誤謬)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엄연히 존재하는 불가항력(不可抗力)의 힘을 인간 자체에는 말할 것도 없고 전 우주적으로 도무지 인정치 않는 것이다. 예를 들면 소위 불가지론(不可知論: agnosticism)3)이라고 하는 것인데, 이것은 감각적 경험만을 인식하고 그 배후에 있는 객관적인 실재는 인식할 수 없다는 설(設)이다. 그러므로 엄연히 존재하는 불가항력의 힘은 그 존재의 명확성, 분명성, 확실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시당하고 제외되어 버린다. 불가항력(Irresistible)이란 우리가 잘아는대로 천재지변과 같은 사람의 힘으로는 저항할 수 없는 힘, 도저히 막을 수 없는 힘을 말한다.
  이 불가항력의 힘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가득하다. 그러므로 불가항력의 힘의 근원은 바로 하나님의 능력()4)이다. 이 불가항력은 이미 규정지어졌다(창1:1). 그리고 인간은 이 불가항력에 대하여 저항, 반항, 거부, 무시, 제외 등등 어떠한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도 이미 차단되어져 있다.
  다시 말하여 여기에 반(反)하는 것은 무모한 도전, 굉장한 위험과 모험을 무릅쓴 행위 그리고 무모하고 쓸데없는 못된 짓, 신의 뜻을 거스르고 하나님을 노하게 하는 두려움이 없는 행동인 것이다(tempt).
  인본주의의 초기 철학의 그 출발 개념이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소위 초기 철학자들이 살았던 시대는 2천년이 지난 현재와는 판이하게 달랐었다. 즉 플라톤(B. C. 427-347)이나 소크라테스(B. C. 470-399)나 아리스토텔레스(B. C. 384 -322) 등이 살았던 당시에는 하나님에 대한 유신론적인 사상이 오히려 더 일반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모한 도전을 시작한 이들은 짐짓 하나님의 말씀을 커닝(cunning)5)하여 인간 주체의 정반대 개념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6) 그러므로 2천년 동안 인간 철학의 역사는 그 제자가 그 스승의 사상을 반박하여 새로운 사상을 만들어 내는 무모한 짓만을 계속해 왔고7), 21세기로 접어들면서 이제는 철학 사조가 조금은 정신을 차린 듯한? 기미를 보이고 있다.
  즉 하나님의 사상으로부터 출발된 철학이라는 그 근본 개념을 교묘한 수법8)의로 커닝하여 나(ergo)라고 하는 타락한 이성의 최고의 권위로 온갖 망상을 늘어놓다가 스스로의 올무, 덫 그 함정에 빠져 2천년이라는 긴 세월을 허비하고서 21세기를 맞는 지금 이 시점에서 여전히 무신론인체 이지만, 그래도 철학이라는 그 근본 원리의 본래의 정답에 조금은 접근되어진 것 같다 라는 말이다.

2. 기독교적인 철학 개념(본래의 철학 개념)
  이미 언급하였지만, 기독교적인 철학 개념은 -모든 영역에 걸친 사물(事物)의 근본 원리를 추구하는 것이나, 만물을 이해하는 원리에 대한 사실을 탐구하는 것- 그 자체를 인간에게 특별한 계시로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하여 정확 무오(正確無吳)하게 확립시킨다.
  첫째는 철학의 그 근본 원리가 창 1:1,“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에서 출발한다. 이 개념의 근본 원리는 영원 전부터 이미 계신 엘로힘-(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 하나님의 그 창조 이전의 계약으로부터 비롯되며, 그 계약으로부터 행위로 나타난 무(無)에서 유(有)의 창조()라는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그 불가항력의 힘, 그 능력()을 깨끗이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을 말한다. 이 불가항력의 힘, 창조자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 자신만의 자유 의지(내적 자유)로 도저히 저항할 수도 반항할 수도 없는 초월적 능력이다. 그러니까 인격적인 관계를 원하시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자유 의지(free-will)를 가지고 무모하게 수없는 도전을 해보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의 불가항력의 그 섭리아래 여전히 그리고 변함없이 놓여져 있다는 뜻이다.
  인간 타락이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사유(思惟) 개념은 분명하였다. 그것은 인격적 관계 안에서 맺어지는 영적 교통(spiritual communication)으로서 죽음, 고통, 불안, 허무 등등이 없는 가운데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을 누리며 관리()9)하는 놀라운 세계인 것이다.
  단, 여기에는 단 한가지 금지 시험(禁止試驗)이 있었다. 이 시험은 페이라조()로서 그 뜻은 피조자 인간의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나 덕, 그 성격 등을 견고하게 하기 위한 증명(시험)이다. 그러니까 이 시험은 인간 정신 세계의 근본을 무너뜨릴 수 없는 또는 견고하게 하는 시도(test)로서 무신론의 철학에서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이성의 근본(originally)이다.
  이 이성(理性)은 엄밀히 따져서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 교인들이 무신론의 이성과 혼동한 나머지 무조건적으로 이성을 죄악시하는 것도 극히 잘못된 관념들이다. 인간이 생각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창조자 하나님의 그 능력 하에서 타 피조물들과는 달리 인간에게만 특별하게 부여해 주신 인간만의 특유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으로서는 엄청난 배려였다. 왜냐하면 불가항력의 힘에 의해 실제로는 그렇지 않지만 자칫 하나님의 자리를 인간이 넘볼 수 있는 엄청난 지적(知的)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락 이전 최초의 인간들(아담)10)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수없는 세월 동안 영적 세계 안에서 소위 인간 인식 세계의 그 근본을 참되게 지킴으로 또한, 소위 철학 개념 역시도 똑바른 것이었다. 이 세계에서의 철학의 근본 원리란 창세기 1장 1절에 기초하였고, 이 말씀에 입각한 가장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인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의 구체적인 기초 개념에 철저하였었다. 그러므로 “철학의 근본 개념은 이 두 말씀 위에 철저하게 기초”하여야 한다.
  불가항력의 원천이신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무시함은 물론, 자연의 천재 지변도 인정은 하지만 인간이 인식할 수 없다하여 무시하고, 더 나아가 창조자 하나님이 가장 귀하게 여기시는 내 주변의 수많은 이웃들을 무시 또는 방관하여, 나(ergo)만의 욕구에 의한 이성, 합리, 실증, 실존, 감각, 경험, 과학, 주체적 존재성, 자각 존재 등등의 알 수 없는 변론들만을 늘어놓으며 스스로의 덫에 걸려, 스스로의 함정에 빠져서, 스스로의 “죽음의 속박”(the Death Chain) 속으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3. 기독교 교육 철학
  이미 언급한대로 철학이란 단어는 광의적이며 근본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철학은 만물을 이해하는 원리에 대한 사실을 나타내며, 어떠한 사상 체계에도 기초하는 원리 자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비록 어떤 사람들이 말하기를 철학이 필요 없다고 할지 몰라도 도리어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철학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교육이라고 하는 영역에서 철학을 생각할 때에 교육은 철학을 필요로 하며, 교육은 철학을 소유한다. 그러므로 역사적으로 볼 때에도 그 시대 시대의 모든 교육 체계의 기본은 철학의 기초 위에서 세워졌다.
  그러므로 기독교 교육 철학이라는 말은 이미 언급한 기독교적 철학이 기독교 교육의 기초가 된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 교육 철학은 기독교 교육 내용을 바르게 식별하는 열쇠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무신론의 교육 철학들은 그 무신론의 철학의 영향을 그대로 받고 있다. 곧 현대 교육은 현대 철학의 깊은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죄의 본질을 부정11)하고 인문주의와 과학적 방법12)을 치켜올린다. 그러므로 현대 교육은 소위 하나님의 사상(기독교적 교육 철학)을 떠난 진리를 추구하고 이해하기를 노력하는 철학 사상들의 혼합물이다. 따라서 기독교 교육 지도자나 교사들은 무신론의 일반론적 철학에 기초를 둔 세속적인 철학자와 교육자들의 이론을 추종하지 말아야 한다.

  특히 크리스천들이 이 부분에 있어서 조심해야 할 것은 어려서부터 그와 같은 무신론의 교육 철학에 자신이 세뇌(洗腦)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사실 인간의 그 타락한 유전, 전통, 관습으로 수천년 동안 그렇게 잠식(蠶食)되어 왔다. 다시 말하여 무의식중에 그렇게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다는 뜻이다.
  또 다시 말하면 창조론 적인 교육 철학 보다는 진화론적인 교육 철학을 더 쉽게 받아들이고 긍정한다는 뜻이다.
  또 다시 말하면 생물학에서의 진화론(進化論)을 보자, 생물이 외계의 영향과 내부의 발전에 의하여 간단한 것으로부터 복잡한 것으로, 하등에서 고등으로, 동종(同種)에서 이종(異種)으로 그 체재(體裁)를 향상시켜 가는 사실의 비교 해부학, 고(古)생물학, 생물 지리학 등, 제 분야의 진화 사실 자체를 무시하려는 게 아니다, 이러한 것들은 그 사실 자체가 하나님의 섭리로 인정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불가항력을 인정하면서도 인간이 인식할 수 없다 하여 무시하고 제외시켜 버리는 진화의 원인에 대해서가 문제이다. 즉 인류의 진화 과정을 놓고 볼 때, 앞에 언급한대로 제 분야의 진화 자체는 인정되나 소위 원숭이로부터의 진화 원인을 말하는 것은 극히 잘못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진화 원인에 관한 한 창조론 적인 개념이 전혀 무시되고 제외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소위 원숭이로부터라고 운운하는 것은 이미 언급한대로 인문주의의 과학적 사고 방법에 불과하다. 곧 빙산에 일각을 보고서 다른 엉뚱한 말을 하는 것과 같다.13)

  그러므로 기독교 교육 철학은 불가항력을 깨끗이 인정하여 창조론적 바탕 위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기독교 교육은 일반 교육의 기초인 세속 철학과는 구별된 기독교적 철학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이 기독교적 철학은 하나님의 특별 계시인 성경에서 그 원리를 찾아볼 수 있다. 성경에 기초를 둔 기독교적 철학은 성경이 기본이 되는 것이다. 철학은 만물의 원리를 바르게 이해하려는 사실로서 유형 무형의 원리 자체를 탐구하는 진리의 사상 체계이다. 이 진리가 바르게 탐구되고 이해될 때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함을 얻는 것이다. “진리 안에서의 자유함”, 그것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에게 누누이 강조하여 오신 바다(요 8:32).
  성경에 수도 없이 나타나는 진리-알레데이아()-에 대한 권고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구별된 기독교적 철학의 기초임을 말한다. 바로 이 바탕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기독교 교육 철학이다.

4.기독교 교육 철학의 의의(意義)
  기독교 철학은 하나님을 궁극(窮極)으로 삼고 모든 만물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상호연관을 맺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중심으로한 모든 만물의 상호작용의 그 원리의 해설이 기독교 철학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만물(창1:1) 속에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여기에서 특히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하는 뜻은 그 이념과 속성을 말한다. 그리고 그 보이지 않는 이념과 속성들은 보이는 것으로 말미암아 분명히 드러남으로 핑계치 못한다고 하였다. 곧 보이는 모든 만물을 통하여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분명히 나타남으로 인간이 핑계치 못한다는 뜻이다(롬1:20).
  그리고 교육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해설의 과정이다. 다시 말하면 교육을 통하여 알지 못하는 것을 찾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알려져 있는 것을 알도록 하는데 있다. 즉 기독교적 교육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에 의하여 이미 알려져 있는 것들을 그대로 이해하도록 해설(解說)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교육 철학은 하나님의 창조에 의하여 이미 이루어진 모든 만물의 상호작용의 그 원리를 그대로 이해하도록 해설하는 과정이다. 참 철학과 참 교육의 진정한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교육은 철학의 터 위에 세워짐으로 우리는 다음에서 참 철학인 기독교 철학의 3요소를 정의할 수 있다.

(1)철학은 사랑()이다.
  철학이 사랑이라는 말은 철학의 지적 표준이 종합적 학(學)임을 의미한다. 즉 둘이 하나되는 결혼의 결정에 도달되는 표준이 사랑이듯이, 철학도 결혼 못지 않게 사랑의 결정이다. 그러므로 철학을 모든 사랑 중에 사랑이다(the romance of all romance)라고 극찬하기도 한다.
  그러나 기독교 철학의 사랑은 아가페()이다. 이 아가페의 사랑은 자연 발생적인 사랑14)이 아니다. 죽기까지 희생함으로 서로 하나되는 사랑의 잔치요, 교제요, 사귐이요, 만남이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타락한 인간의 사이가 이 아가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친밀하게 되었다. 기독교 철학의 지적 표준은 이 아가페 사랑에 통일하게 하는 종합적 학(學)임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2)철학은 모든 것을 전체로, 종합적으로 보는 것이다.
  철학은 잡다한 여러 가지를 하나로 보는 것이다. 즉 모든 만물의 상호작용과 그 관계를 전체적으로 종합적으로 하나로 보는 것을 말한다.
  탈레스(Thales) 이후 존 듀이(John Dewey)까지 세속 철학자들의 인문주의의 과학적 방법은 인간 주체적 인식 하나만을 통하여 철학을 종합적으로 보아왔다. 그러나 기독교 철학은 하나님 주체적 인식 즉 하나님을 궁극적인 원천으로 삼고, 하나님이 중심된 그 원리 하나만으로 모든 만물의 전체를 바로 알고, 모든 만물을 종합적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3)철학은 궁극적(窮極的)이다.
  궁극적이라는 말은 어떤 일이나 생각 따위를 추진하여 최후에 도달하려는 것을 말한다. 특히 철학에 있어서 이 말은 인생이 추구하는 종국(終局)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철학이 전체적이고 종합적으로 볼 때, 무엇을 추구하여 궁극적 목적으로 삼고 있는가? 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을 중심으로 전체적이고 종합적으로 조화시키며 상호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 영향력은 매우 큼으로 그 올바른 기본적인 통일성을 우리는 바르게 찾아야만 한다. 세계의 질서 유지의 기본 문제가 바로 여기에서 제시되어지며 그 해결점마저도 바로 여기에서 제시되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세속 철학과 기독교 철학의 그 궁극적 목적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비교해 보자.
  세속 철학은 그 궁극적 목적을 인간에게 두고 있고, 기독교 철학은 그 궁극적 목적을 하나님께 두고 있다. 다시 말하면 세속 철학에서는 인간을 최고의 위치에 놓고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것이고, 기독교 철학은 하나님을 최고의 위치에 놓고 세상의 모든 질서를 유지하려는 것이다.
오늘 날 세속주의적인 모든 철학은 범신론(汎神論=pantheism)과 초연신론(超然神論=deism=자연신론)이다. 범신론과 초연신론은 엄밀하게 따져서 무신론과 다름이 없다. 이는 곧 반신론(反神論)과 불신론(不神論)으로까지 나아가게 된다. 그러므로 유물 철학에 근거한 공산주의는 반신론을 의미하고, 실존주의 철학은 무신론을 뜻하며, 실증주의 철학은 불신론이라고도 한다.
  유물주의 철학은 물질을 절대적으로 인정하는 이성주의(理性主義)이다. 이 주의는 공산주의까지 파생시켰다. 공산주의는 전체주의적 국가를 형성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정부나 국가를 신격화시키고 있다. 때에 따라서는 정부도 정당의 절대 지배를 받기 때문에 정당이 신(神)이라고 믿도록 강요한다. 이 철학은 신의 내재성(內在性, immanent)과 초월성(超越性, transcendent)을 부인한다.
  범신론적 철학은 모든 만물이 신(神)이라고 주장하는 이성주의(理性主義)이다. 이 철학은 신(神)의 내재성은 인정하나 결국 신(神)의 초월성은 부인한다.
  초연신론적 철학은 신과 물질(God & material)을 동시에 주장하는 이성주의(理性主義)이다. 이 철학은 신(神)의 초월성을 인정하고 신(神)의 내재성을 부인한다.
  결국 이상에서 본 세 철학은 이성주의라는 데서 그 공통성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 세 철학은 인간의 이성(理性)을 최고의 위치에 놓고, 그것을 근본으로 하여 모든 만물을 이해하는 원리로 삼는다는 공통성이 있다.
  그러나 기독교 철학은 이와는 정반대로 인간의 이성(理性=혼,)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Covenant of God)가 절대시된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계시(Revela- tion)란 전 우주적 자연계시와 특별계시로서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 가운데 나타내신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철학은 신(神)의 내재성과 초월성을 그대로 인정하여 확신한다. 따라서 기독교 철학은 하나님의 계시(Covenant of God) 즉 하나님의 계약(bond-in-blood, 피로 맺은 약정)을 기초로한 신본주의(神本主義)이다. 피로 맺은 약정을 궁극적으로 이루시기 위해 죽기까지 희생한 하나님의 선수적 (先手的) 사랑(아가페, )이 바로 기독교 철학의 저변에 깔려있는 중요한 요소들이다.
  철학의 주체에 있어서 인간이 앞에 서지 못하는 이유는 그 무능성 때문이다. 타락하여 죄를 지을 수밖에 없고 그것으로 인하여 진리의 근본이신 하나님께 그 스스로 다가설 수 없는 인간의 실존인 것이다. 인간이 추구해야할 최후의 종국(終局)의 목표, 그 궁극적인 목적은 피로 맺은 약정의 성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아가페)안에서 지적(知的) 표준의 기본적 통일을 이루어 모든 만물을 이해하는 원리 자체로서 전체적으로 종합적으로 연구되어져 인간의 실제 생활을 인도하는 견고한 하나의 사상체계로서 그리고 그 철학으로서 자리 메김을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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